선의 세계

판치생모

수선님 2021. 5. 9. 11:27

판치생모

- 아미산님의 글 -

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의 유명한 화두이다. 판치(板齒)란 판때기 모양으로 생긴 앞니란 말이다. 앞니 두 개는 대개 넓은 판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판치라 했으니, ‘판치생모’란 앞니에 털이 났다는 말이다.

조주 선사는 당나라 중기의 걸출한 선승으로서 무려 120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조주의 성은 학씨(郝氏)이고, 이름은 종심(從諗), 훗날 조주(趙州)의 관음원(觀音院)에 있었으므로 조주(趙州)라 한다.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에게 사사해 그의 법을 이어받았고, 남전이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제자이므로 마조의 손제자인 셈이다.

   조주 선사는 학인들에게 임제(臨濟義玄, ?~867)나 덕산(德山宣鑒, 782~865)처럼 고함(喝)을 치거나 주장자(棒)를 휘두르는 거친 교화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입으로 한 두 마디의 말로써 불법을 자유롭게 설해 지도했다. 그래서 송대의 법연(五祖法演, 1024∼1104) 선사는 조주의 입술에는 빛이 발한다는 의미로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 평했다.

헌데 달마(達磨) 대사 별명이 ‘판치노한(板齒老漢)’이라 했지만 원래 달마 대사는 판때기 모양의 앞니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주 선사는 120살까지 장수하면서 가장 불편했던 것이 치아부실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이 이 화두 구성에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진부왕(鎭府王)이 짓궂게 물었다. 진부왕이란 당시 조주 선사가 머물던 진부 지역을 다스리던 조왕(趙王)을 일컫는다.

   “선사께서는 높으신 연세에 치아가 몇 개나 남았습니까?”

   “어금니 한 개 뿐입니다.”

   “그럼 음식을 어떻게 씹으십니까?”

   “한 개 뿐이지만 차근차근 씹지요.”

그런 조주 선사라서 그런지 이빨에 관련된 판치생모(板齒生毛)라는 유명한 화두를 던졌다.

 어떤 학인 스님이 조주 선사께 여쭈었다.

   “어떤 것이 조사(달마)께서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달마 대사가 서쪽(인도)에서 가지고 온 불법의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말이다. 당시 인도는 중국의 서남쪽에 있었으나 대개 서쪽에 있는 나라로 여겨서 인도를 서천축(西天竺)이라고도 했다.

이에 조주 선사가 답한 말이 “판치생모(板齒生毛)”였다.

헌데 있지도 않는 달마 대사의 앞니에서 털이 났다니, 그 도리가 무엇인가. 바로 그 의문을 깨치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리란 ‘판치생모’, 즉 언어도단,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음을 뜻한다.

조주 선사는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無字)’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 선사께 뜻이 있는 것이니, 조주 선사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참구해야 거기서 답이 나온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 답이 ‘무’혹은 ‘판치생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주 선사의 본의에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심법(心法)을 교외별전(敎外別傳)으로 이어받았다는 달마 조사가 중국에 와서 소림굴 속에 들어가 면벽(面壁)을 시작하니, 심법을 전해 줄 사람을 기다리는 처지에서, 달마 대사가 전하려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말로 전할 수 없다는,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전해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중국에 전해진 수많은 불경의 가르침은 무엇이기에 심법이 따로 있다며, 부처님의 정법(正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면서 조사가 왔으니 그 달마 조사가 전하려 한 정법의 핵심이 무엇인지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답이 ‘판치생모’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달마는 부처님 법을 전하러 온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 법이 무엇일까. 바로 마음을 깨치신 것이다. 그러므로 달마 대사는 부처님이 깨친 마음을 전하려 중국에 온 것이다. 왜냐하면 달마 대사는 부처님이 깨치신 그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시도 부처님과 똑 같은 마음을 깨쳤기 때문이다. 그 마음의 이치를 알리기 위해 중국에 온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어디에 있을까. 이것을 찾는 것이 선(禪)이다.

 이것은 경전에도 없다. 마음이 어떻게 경전에 있겠나. 다만 선(禪)공부하고 수행한 사람만이 마음의 진리를 알고, 그 대답의 비밀한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경전에도 없는 것을 “(조주 선사)내가 무슨 재주로 말로 알려주겠나.” 해서 “판치생모”라는 말이다.

 옛 선사께서 흔히 거론하신 토끼 뿔(토끼가 실지로는 뿔이 없는 짐승임)이나 거북 털(거북도 실지로는 털이 없는 동물임)과도 같은 맥락의 말이다. 거북 털이 실다운 것이 아니듯 우리의 몸뚱이를 포함한 욕계ㆍ색계ㆍ무색계의 삼라만상 모두가 이름뿐인 토끼 뿔에 불과하고, 영원한 실체는 우리의 청정법신, 우리 몸뚱이를 운전하는 참다운 주체, 우주의 절대생명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

. 가운데, 사랑이다, 미움이다, 이롭다, 해롭다, 부럽다, 괴롭다고 하는 거짓 이름에 불과한 토끼 뿔, 거북 털을 실다운 것으로 봐서 싸우거나 속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흔히 추구하는 행복조차도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역시 환영에 불과한 토끼 뿔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 실다운 것이 없는 헛소리일 뿐이란 말이다.

 본분사(本分事)를 잊어버리고 지말사(枝末事)에 걸려 세월만 보내는 사람들, 따져서 이치로만 알려고 하고, 들려달라고 하니, 언어문자로 흉내만 내는 사람들에게 일러 줄 말이 ‘판치생모’밖에 더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말장난 할 생각 그만두고 가서 정진하라는 경책인 것이다. 스스로 깨치라는 말이다.

진리를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말이나 글은 상대성인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도구일 뿐인데, 진리는 말이나 글 이전이며, 영원성이자 절대성이다. 영원히 존재해야 하고, 스스로 존재할 수 있어야 바로서 진리가 될 수 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진리는 상대가 끊어진 절대의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상대란 늘 무언가에 의존해야 되지만 절대는 그 무엇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는 존재 그 자체이다. 이러 하므로 상대적 표현의 도구인 말이나 글로써는 절대성인 진리를 그려낼 수가 없다. 진리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침묵일 뿐이다. 아니면 판치생모라고 하든지, 그 방법뿐이다. 부처님 말씀조차도 언구에 매달리면 토끼 뿔, 거북 털이 되므로, 오직 근본 당처를 깨칠 일이다. 

헌데 달마서래의(達磨西來意)에 대해 시원히 밝힌 말씀이 있다. 즉, 에 나오는 말이다. “달마종서천래 유전일심법 직지일체중생 본래시불(達摩從西天來 唯傳一心法 直指一切衆生 本來是佛)라는 구절이다. 달마 대사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온 것은 오직 한 마음의 법을 전해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바로 가리켜 주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중국 당나라시대 황벽 희운(黃檗希運, ?∼850) 선사의 법문을 재가불자인 배휴(裵休)가 기록한 책이다. 그의 불법에 대한 바른 견해는 천하가 다 인정하는 바다. “달마서래의(達磨西來意) ― 무엇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라는 말을 화두라고 해서 일생 참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선문(禪門)의 대 종장이신 황벽 스님이 명쾌하게 밝히고 있어서 더 이상 의심하거나 참구할 필요가 없다. 사람에게는 마음이란 것이 있으므로 그 마음이 있는 사람은 모두 다 부처라는 말이다.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조각배를 타고 먼 바다를 항해해 중국에까지 온 것은 오직 이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한 것이었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 보다 한층 더 친절한 표현이다.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려고 온 것이다. 더 이상 무슨 설명과 무슨 의심이 필요하겠는가. 사람이 부처님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출처] 판치생모|작성자 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