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도대체 부처님이라고 하는 분이 어떤 분인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神)이 부처님이라는 말인가?’ 하고 궁금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어떤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어떤 것을 부처라고 합니까?” 그랬더니 선지식의 대답은 “심시불(心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깨달았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어디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사람 외에 특별한 존재로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하였습니다. 부처, 즉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소리를 수없이 들었지만 지나가는 소리로 흘려 버립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분은 선지식이 말한 딱 한 마디 “심시불(心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다.”를 듣고 바로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심시불(心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다.”를 수없이 들었고, 수없이 책자를 통해서도 보았는데 왜 “심시불(心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것을 그냥 넘어간 것입니까? 그 이유는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참선한다, 주력한다, 염불한다, 독경하는 것 물론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 밥 먹어야 하고, 목마를 때 물 마셔야 하고, 예불 시간에는 예불해야 합니다. 공양할 때는 대중이 함께 공양해야 하고, 울력할 때는 다 같이 울력하는 것처럼, 일상생활을 남과 똑같이 합니다.
그런데 가장 근본, 기본이 무엇이냐, 심시불(心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는 모른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람들 각자가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도대체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心)은 물질(物質)이 아니고 형체(形體)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마음을 아무리 보려고 해도 마음을 볼 수 없고, 마음에 귀를 기울여도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코로 마음에 어떤 냄새가 나는가 하고 맡아보아도 마음은 냄새도 없습니다. 마음에 어떤 맛이 있는가 하고 마음을 맛보려고 해도 마음은 맛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이름만 마음이라고 했지 있지도 않은 마음을 마음이라고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할 겁니다.
마음은 형체와 모양이 없기에 눈으로 마음을 볼 수 없고, 형체와 모양이 없기에 마음을 두드려도 마음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깥에 물체가 있고, 바깥에 소리가 나고, 바깥에 냄새가 나고, 바깥에 맛이 있다는 것은 오직 마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마음 자체는 맛이 아니고, 소리도 아니고, 냄새도 아니고, 빛깔(형체, 모양)도 아니지만 각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입니까? 각자는 소리가 나자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종소리구나, 예불 때가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마음을 깨달았다고 해서 없던 마음이 새로 생기고 마음을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마음이 도망가는 일은 없습니다. 마음을 깨달아도 마음이고 마음을 깨닫지 못해도 마음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깨달음과 마음을 깨닫지 못함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마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하는지 저렇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상생활 속에서 이랬다가 저랬다가 기대한대로 되지 않고 감정과 욕심대로 항상 불안하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도 마음입니다만,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그 불안 고통 속에 살던 자기가 마음 하나 깨달음으로서 지금까지 불안 고통에 사로잡힌 것이 삽시간에 없어집니다. 마음을 깨닫지 못하면 불안 고통 속에 묻혀 있고,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불안 고통을 다 밀어내어 버렸습니다. 마음을 깨달아도 마음을 깨닫지 못해도 둘 다 똑같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깨달아도 바깥에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가 난 줄 압니다. 마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 심지어 축생, 곤충, 미물, 곤충까지도 바깥에 소리가 나면 똑같이 그 소리를 압니다. 아는 그 자체가 마음입니다. 옛 선사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화두를 들고 열심히 힘을 다하고 노력해도 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바깥에 쿵 하는 종소리를 듣고 마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내가 하는 이런 말을 여러분은 수없이 들으셨을 겁니다. 한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목탁을 치면 목탁 소리인 줄 아시잖아요? 종을 치면 종소리인 줄 압니다. 종소리를 들으면 종소리인 줄 알잖아요? 목탁소리인 줄 종소리인 줄 아는 그것이 누구입니까? 남입니까? 귀신입니까? 부처님입니까? 아닙니다. 나 자신입니다. 목탁소리 종소리 나기 전에도 있었고, 소리는 사라져서 없어지더라도 그 소리를 아는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심시불(心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다 라는 말은 바로 이것, 저것, 너, 나, 사람, 축생, 벌레도 모두 똑같이 평등하게 마음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은 종소리가 나자마자 이러쿵저러쿵, 좋다, 나쁘다 분별해서 좋아하는 것은 취하고 싫어하는 것은 버리려는 취사분별(取捨分別)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산란합니다. 그래서 어지럽고, 어지러우니까 피곤해서 혼침에 빠져 버립니다.
마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도 알기는 아는데 소리인 줄 알고, 빛깔(형체, 모양)인 줄 알고, 맛인 줄 알면서 온갖 사량분별 (思量分別)하는 생각 속에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원한 맛이 하나도 없습니다. 피곤하다고 해서 잠에 빠져 버리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지만, 그것은 혼침입니다. 마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눈만 뜨면 일상생활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잡다한 생각을 합니다. 피곤하면 잠에 빠지고, 이것이 1년 365일, 10년, 100년 동안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마음(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했지만,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마음이 혼침과 산란에 묻혀 버리니까 근본의 자기 본래 갖추고 있던 힘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생로병사에 늙고 병들어 죽는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종소리를 듣자 내가 저 소리가 종소리라는 쓸데없는 분별하는 생각을 했구나, 하고 분별하는 생각을 싹 쓸어버리니까 종소리가 났다고 해서 마음이 산란하거나, 어떤 물체가 보인다고 해서 마음이 괴롭거나, 그러한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것이 사람마다 갖추어져 있어서 “심시불(心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라.” 하고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는 “심시불(心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라.” 뿐만 아니라 온갖 법문, 부처님 경전, 게송 등 외우지 못하는 게 하나도 없을 정도이지만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마음을 자기 속에 놔두고 있으면서 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바깥으로 향하는 생각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이다, 그러니 모든 생각을 다 집어 던져 버려라,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 “백척이나 되는 절벽에서 마지막 끝까지 나아갔는데 그 절벽의 끝에서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내딛으면 죽는다? 마땅히 죽어야지요. 크게 한바탕 죽으면 크게 산다고 했습니다. 마지막까지도 못하고 있던 걸 모두 놓았을 때, 그때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본래면목이 무엇이겠습니까? 종소리가 나면 분별해서 종소리인 줄 알고, 찬 것이 오면 찬 줄 아는 것이 본래면목이지 본래면목이 어디 멀리 있다가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 본래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쓸데없는 분별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그렇지요?
옛 선사의 말씀에도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 도(道)는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하지만 좋다, 싫다, 취사분별을 하다 보면 도(道) 속에 있으면서도 도(道)의 혜택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한 취사분별하는 생각 마음만 털어버리면 도(道), 마음(心), 법(法, 진리), 부처(佛), 깨달음)이 환하게 열린다, ‘신심명(信心銘)’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옛날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주장자를 바닥에 치면서, “이 소식을 아느냐?” 들어보셨지요? 그리고는 다시 ‘탁’ 치면서 “이 소리를 아느냐?” 그런데 그런 말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떤 물건을 들면 그 즉시 누구든지 무엇을 들었는지 압니다. 바로 그놈이 마음, 도, 진리, 부처, 깨달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도 못 알아듣기 때문에 죽비로 바닥을 탁탁 치는 것입니다. 물건에 무엇이 있고 죽비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을 들었으면 물건 들은 줄 알고 있는 각자 자기 마음,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있는 각자 자기 마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래서 선사의 법문은 “내가 이 법상에 오르기 전에 이미 설법해 마쳤느니라.”하고 내려갑니다. 그 말씀이 이해되시지요? 법상에 오르고 난 후에 아는 것이 아니라, 법상에 오르기 전에도 이미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것입니다. (말을 하고 말을 하지 않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여러분은 너무 복잡하게 이리 저리 시비하고 분별하고 비교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복잡한 생각을 다 집어던지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모든 생각은 집어던질 수 있지만, 그런 생각을 집어던지는 마음은 생각이 생겨났다고 해서 같이 생겨나거나 생각이 사라졌다고 해서 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생겨나든 말든 관계없이 마음(心)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거불래(不去不來)입니다.
오늘은 법문을 길게하면 안 된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수심결(修心訣)’의 한 구절을 설명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데, 어떤 식으로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까? 무슨 방편(方便)을 지어야 한 생각을 돌이켜서 문득 자기 자성(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이,
“네 스스로가 마음인데 거기에 무슨 방편이 필요한가? 만일 어떤 방편을 지어서 마음을 깨닫겠다 한다면,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자기 눈으로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고는 자기 눈이 없다고 생각하고 눈을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자기 눈으로 자기 눈을 볼 수 없다 해도 이미 자기 눈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이 자기 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아, 나에게 이미 눈이 있었구나. 눈이 있는 것도 모르고 새삼스럽게 눈을 보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구나.’ 이렇게 자기에게 본래 이미 눈이 있는 줄 알았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눈을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삼스레 눈으로 눈을 보려고 할 생각이 있을 리가 없고 눈을 보지 못한다는 생각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이미 자기의 마음인데 자기의 마음을 어떻게 알려고 하는 것입니까? 보십시오. 이미 자기 마음입니다.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아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손을) 흔들면 손을 흔드는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잘 알고 있는데 그 이상 무엇을 마음에 대해 더 알려고 합니까? 만약 마음을 알려고 애를 쓴다면 골치만 아픕니다. 마음은 분별하는 생각으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눈을 보려고 애를 써보십시오. 눈이 봐 집니까? 눈을 보려고 애를 쓸수록 눈병만 걸릴 뿐입니다. 눈을 보지 못하는 줄 알면 그 사람은 눈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듯이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마음인 줄 알면 그것이 바로 자기 마음을 깨달은 사람, 시즉견성(是卽見性), 자기 마음을 본 사람입니다. 알 필요가 없는 마음인데 이 이상 어떻게 마음을 알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출처] 심시불(心是佛), 마음이 바로 부처다|작성자 명신산업안전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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