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행복해지고 싶고, 고뇌없는 평안한 마음상태를 항상 유지하고 싶지만, 자기 마음대로 편안해지지가 않습니다. 자기 존재성에 대한 원천적인 불안감으로 인해서 항상 무언가를 추구하며 움직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항상 불안해 합니다. 무언가를 찾는 과정에서 그 대상에 대한 집착심이 강해지고, 그 대상을 자기것으로 성취하기 위해 불철주야로 뛰어다니다가 어느새 나이가 먹어 사회에서 은퇴시기를 맞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에 이끌리는 어떤 대상에서 만족과 행복감을 대신 충족해 보려고 집착합니다. 그 대상이라는 것들이 바로 욕망의 대상, 재산, 돈, 섹스, 명예, 사회적 성공, 외모, 건강, 자존감, 과시, 남들의 시선 등 등 같은 욕망의 대상들이죠. 이런 일시적으로 잠깐동안 약간의 기쁨과 만족감을 주는 욕망의 대상들은 모두가 자기외부에 있는 것들이며, 나와 대상들이라는 주객 이원화 상태에서 항상 성취하고 집착하는 목표물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항상 마음이 외부로만 향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느끼는 만족감과 기쁨이 이러한 외물의 대상에서 나온다고 잘못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기쁨이 나오는 것은 사실은 자기내면의 바탕에서 나오는 것인데도 마치 외부의 욕망의 대상에서 나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마음에 아무런 이원화 대상이 없을 때에, 즉 깊은 잠의 상태같은 때에는 기쁨도 없고, 불안도 없지만, 사실은 원천적인 지복(blissful)상태가 있습니다.
평안하다는 느낌도 없는 평안함, 그것이 바로 원래 우리들이 공통으로 항상 지니고 있는 기쁨과 평안의 뿌리이며, 자기의 존재감조차 아무것도 못느끼는 지복상태입니다.
그러나 잠의 경우는 그 지복상태가 무지(無知)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잠 자체가 지복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죠.
대신 잠을 깨고 나서는 편안하게 푹 잤다, 라는 것을 누구나 느낍니다.
그 이유는 깊은 잠 동안에는 육체가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가장 편안한 지복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노자도덕경에서 말하는 가장 큰 주제는 자기의 개인의식을 넘어가서 본래부터 있는 내면의 본성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내면의 본성이 바로 道입니다.
즉 외부 대상을 향하던 관심을 내면으로 돌려서 자기 원래 지복상태인 참나를 찾는 방법을 이 도덕경에서 여러가지 개념적 이론과 실천요령, 평범한 실생활에서 응용할 수 있는 마음자세등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도덕경에서는 여러장에서 실제 수행방법도 곳곳에 간단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여기서 한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제28장의 <知其雄(지기웅) 守其雌(수기자) 爲天下谿(위천하계)> 경우는 <밖의 대상으로 향하는 외향성 마음을 알아차려서, 안으로 향하는 내면을 지키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계곡의 시냇물처럼 자유롭다>라는 뜻인데, 외부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 문장은 <知其白(지기백) 守其黑(수기흑) 爲天下式(위천하식)>이라는 문장은 <밝게 깨어있는 앎을 알아차리고, 어두운 내면의 모름을 지키고 있으면, 이 세상이 나온 바탕이 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깨어있음을 주시하고 있는 의식의 주시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밝게 깨어있는 의식의 주시자는 바로 어둠의 무지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실제 수행내용은 어떤 불교경전이나 아드바이드 베단타 경전 못지 않게 아주 실천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된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를 잘 이해하면서 한문장 한문장 되새겨서 읽고 이해하면 차츰 심오한 의미가 한꺼풀 한꺼풀 벗겨지면서 그 말로 표현되지 않는 내면의 "그것"이 저절로 드러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깊은 의미를 되짚어가려면 본 해석서를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어보면, 읽으면 읽을 수록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의 도가 무엇인지 저절로 밝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왕 노자를 공부하려면 도덕경에서 가르쳐 주는 문장들의 명확한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를 해야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마치 선불교 선사들이 말하는 활구(活句)적인 화두(話頭)식으로 애매모호한 해석을 해서 도덕경은 원래가 의식을 초월한 심오한 도를 말하기 때문에 애매모호하고 아리송한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면, 이는 완전히 도덕경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일단 문자로 쓰여진 말은 그 의미를 명백하게 이해를 해야되며, 그 이해를 바탕으로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 이전에 지성으로 이해했던 내용을 모두 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의 뿌리까지 도달해야 됩니다.
또한 그 무지의 뿌리(원인체)에 잠겨 있으면, 어느 때에 저절로 그 무지를 벗어나서 우주적인 앎에 들어서게 되는데, 그 우주적 존재앎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명상이며, 삼매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하며, 그곳에 머무르는 과정 중에 모든 현상계, 육체,마음,우주가 모두 꿈처럼 허황하다는 깨달음이 오고, 더불어 자기는 그 우주적 의식도 아니며, 그 넘어 절대바탕이라는 최종 깨달음이 저절로 다가오게 됩니다. 말하자면 도와 하나가 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그러하긴 하지만,
도덕경은 어디까지나 문자이며, 글자를 통해서 말의 의미만 전달할 뿐이지,
그 안에 실재(實在)하는 道는 없읍니다.
마치 붕어 빵에는 진짜 붕어는 없고, 붕어와 비슷한 모양과 이름만 있을 뿐입니다.
도덕경에는 道에 대한 명칭과 의미만 있을 뿐, 진짜 실재하는 道는 없읍니다.
실재의 도는 도덕경 자체에는 없고,바로 도덕경을 읽고 있는 사람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1장 첫번째 문장인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는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바로 <붕어 빵에는 붕어가 없네>
또는 <바나나향 우유에는 바나나가 없네>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말은 도는 도덕경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그 마음 내면에서 道를 찾으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1.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 <도>라고 말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천지의 원천이며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 만물의 모태다
故常無欲以觀其妙(고상무욕이관기묘) : 그러므로 언제나 욕심내지 않으면 그 오묘함을 볼 수 있으며
常有欲以觀其?(상유욕이관기요) : 언제나 욕심냄이 있으면 그 나타남만을 볼 수 있다
此兩者同(차량자동) : 이 두 가지는 근원 같으나
出而異名(출이이명) : 나타나 이름이 다르다
同謂之玄(동위지현) : 같이 이를 신비롭다고 말한다
玄之又玄(현지우현) : 신비롭고 또 신비로우니
衆妙之門(중묘지문) : 모든 신비의 문이다
1장 신비로운 삶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도는 이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이름 없는 것은 모든 것의 근원이고 이름 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이다. 욕심이 없으면 신비로움을 볼 수 있고 욕심이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그 신비로움은 모든 이해로 향한 문이다. |
노자의 『도덕경』 첫 장에서 “도는 이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서구적인 사고로 볼 때 이 말은 모순이다. 실제로도 모순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음양사상은
사물의 ‘이것’과 ‘저것’을 동시에 묘사할 수 있는 동양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이런 반대되는 개념들을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도는 모든 것이 시작되는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영역이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것의 내면에
존재한다. 이 볼 수 없는 신비로움을 보고자 할 때 우리는 형태를 가진 외부 세계의 관점에서
이를 규정하려고 한다. 노자는 그 신비로움을 보려고 애쓰지 않아야 비로소
그것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음을 내려놓고 맡기는 것’이다.
◎ 신비로움을 즐겨라.
항상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애쓰지 말고 세상이 그냥 펼쳐지도록
내버려두라. 모든 것은 순서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므로 그냥 내버려두라.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 너무 열심히 노력하지 마라.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라.
도는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 뜻대로 일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는 연습을 하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은 이래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는 자신을 매순간 인식하라. 예리한 관찰자가 되라.
비판을 적게 하고 많이 들어라.
◎ 규정하고 분류하기를 멈추는 연습을 하라
우리는 학교에서 사물을 규정하는 법에 대해 배웠다. 그러나 물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물이 아닌 것처럼 이 우주의 무엇도 그것에 붙여진 이름과는 다르다.
사물의 범주를 분류하고 나누려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동물, 꽃, 식물,
인간은 결코 정확하게 묘사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는 “이름으로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분류하고
외우는 것이 아닌, 보고 느끼는 것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제1장은 《老子》를 유명하게 만든 “道는 〈문자로〉 표현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은 〈문자로〉 규정하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동아시아 전통 사상의 形而上學과 言語哲學, 存在論 등 매우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논의되었고, 존재와 언어의 문제, 삶과 깨달음의 경지 등과 관련하여 인식론이나 경험적 차원에서도 논의되었다.
일반적으로 20세기에 ‘道’는 우주의 궁극적 근원, 근본 실체, 우주적 원리 등등으로 규정지어져 왔다. 특히 서구 형이상학적 전통에 자극되어 ‘道’는 동아시아 전통 존재론과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으로 논의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이 모두 王弼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여겨지지만 왕필의 논의는 이와 다소 차이가 있다.
우선 《老子》에서는 道가 말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고 하는데, 실제로 왕필은 道를 문자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지만 象을 통해 드러낼 수 있고, 결국 言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즉 言(문자적 표현)과 意(의도, 뜻)의 문제로 이해한 것이다. 특히 그것은 유가 경전 등에 담긴 언어와 그 의미에 관한 이해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말이 뜻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言意之辨’으로 논의되었다.
이러한 논쟁의 맥락에서 보면 《老子》의 첫 구절에서 ‘可道’와 ‘不可道’는 궁극적 실재를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이 아니라 經典의 말과 그 말에 담긴 뜻의 관계에 대한 논의이다. 왕필의 입장은 言이 意를 다 드러낼 수 없다고 보았지만 이러한 긴장 관계는 象을 통해 극복된다. 즉 經典에 담긴 성인의 意는 言을 통해 象을 얻고, 象을 통해 意를 얻는 방식으로 긍정된다. 이렇게 해서 王弼은 聖人의 意, 經典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오로지 象數에 집착하던 漢代易學을 비판하면서 言을 중시하며 이를 통해 象을 해석하는 義理易을 주창한 사실과 통한다.
왕필은 《周易略例》 〈明象〉에서 “象은 意를 드러내는 것이고, 言은 象을 밝히는 것이다. 意를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은 象만 한 것이 없고, 象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은 言만 한 것이 없다. 言은 象에서 생기므로 言을 찾아서 象을 보고, 象은 意에서 생기므로 象을 찾아서 意를 본다.……그러므로 言은 象을 밝히는 수단이니 象을 얻으면 言을 잊고, 象은 意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니 意를 얻었으면 象을 잊어야 하는 것이다.[夫象者 出意者也 言者 明象者也 盡意莫若象 盡象莫若言 言生於象 故可尋言以觀象 象生於意 故可尋象以觀意……故言者所以明象 得象而忘言 象者 所以存意 得意而忘象]”라고 하였는데, 이 논의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王弼은 象을 통해 言을 다시 긍정한 것이다. 따라서 言에 집착하는 訓詁를 반성하고, 聖人의 意를 추구하려는 義理의 입장에서 나온 의미로 보아야 한다. 현대철학의 존재와 언어, 언어와 실재라는 맥락과는 분명 다르다.
“無名은 만물의 시작이요, 有名은 만물의 어미이다.”라는 문장 또한 수많은 해석을 낳았다. 이는 구체적으로 제40장의 “天下의 萬物은 有에서 생겨나고 有는 無에서 생겨난다.[天下萬物 生於有 有生於無]”와 관련되는데, 東洋哲學의 宇宙發生論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특히 無를 강조하는 貴無와 有를 긍정하는 崇有의 입장이 대립한 魏晉時代에 왕필은 貴無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有生於無’를 그대로 긍정하는 논리를 펴지 않고 ‘生’을 ‘始’로 바꾸어 이해하고, 有와 無의 관계는 ‘未形無名之時’와 ‘有形有名之時’의 관계로 대체하였다. 즉 天地 이전의 無로부터의 蒼生을 긍정하지 않고 天地 안에서 萬物이 形成되는 過程으로 파악한 것이다.
오히려 ‘有生於無’가 宇宙論的 차원의 논쟁으로 본격화되는 것은 佛敎가 수용되던 시기에 불교의 용어가 《老子》의 哲學的 用語들로 번역되면서부터이다. 《老子》와 《莊子》의 哲學的 槪念들에 의존하여 佛經을 해석하는 格義佛敎에서 空과 色은 처음에 《老子》의 無와 有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老子》의 有無는 보다 풍부한 철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다른 한편 ‘有生於無’는 藝術의 영역에서 새로운 작품 창작의 이론과 실제에 관련하여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되기도 하였다. 흰 여백의 종이 위에 山水가 그려지는 과정을 ‘有生於無’의 과정으로 파악하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제1장은 동아시아의 哲學과 宗敎, 藝術에 커다란 意味와 想像力을 제공해준 文章이라 말할 수 있다.
道는 〈문자로〉 표현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은 〈문자로〉 규정하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문자로〉 표현된 도와 〈문자로〉 규정된 이름은 〈구체적 사태를 가리키는〉 指事나 〈아주 구체적인 형태를 가리키는〉 造形에 해당하므로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문자로〉 표현할 수 없고 〈문자로〉 규정할 수 없다.
無名은 만물의 시작이요, 有名은 만물의 어미이다.
무릇 有는 모두 無에서 시작한다.
따라서 〈만물이〉 아직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는 때가 만물의 시작이요, 〈만물이〉 형체가 있고 이름이 있는 때에는 〈道가 만물을〉 자라게 하고 길러주며 형통케 하고 성장케 하니 〈만물의〉 어미가 된다.
이는 도가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는 상태에서 만물을 시작하고 이루어주지만, 만물은 〈그 도에 의해〉 시작되고 이루어지면서도 그 所以然을 알지 못하니 신비하고 또 신비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없으면 그 신묘함을 보고,
‘妙’란 지극히 ‘작다[微]’는 뜻이다.
만물은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한 뒤에 성장하고, 無에서 시작한 뒤에 생장한다.
따라서 늘 욕심이 없어 그 마음을 텅 비워내면 그 시작하는 만물의 신비를 볼 수 있다.
항상 욕심이 있으면 그 돌아가는 끝을 본다.
‘끝[徼]’이란 돌아가 마치는 곳이다.
무릇 有가 이롭게 되려면 반드시 無를 써야 한다. 욕심의 뿌리인 〈마음은〉 도에 나아간 뒤에야 가지런해진다.
그러므로 항상 욕심이 있으면 마치고 〈돌아가는〉 만물의 끝을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나와 이름을 달리한 것으로, 함께 일컬어 ‘신비하다’고 하는데, 신비하고 또 신비한 것이 뭇 신비함이 나오는 문이다.
兩者란 ‘始’와 ‘母’이다. ‘함께 나왔다[同出]’는 것은 ‘함께 玄에서 나왔다’는 뜻이다. ‘이름이 다르다[異名]’는 것은 〈‘始’와 ‘母’가〉 하는 일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래서 머리 쪽에 있으면 ‘始’라 일컫고, 끝 쪽에 있으면 ‘母’라고 일컫는다.
‘玄’은 깊고 어두운 것이니, 고요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無有]이며 ‘始’와 ‘母’가 나오는 곳으로서 〈이러한 玄에 대해〉 ‘이름[名]’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함께 ‘玄’이라고 이름을 붙여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함께 일컬어 玄이라 한다.[同謂之玄]’고 말한 것은 그렇게 〈이름을〉 붙여 일컬을 수 없다는 데서 취한 것이다.
그렇게 〈이름을〉 붙일 수 없다면 ‘玄’이라는 하나의 〈글자로〉 확정할 수 없으니, 만약 ‘玄’이란 하나의 〈글자로〉 확정하면 이것은 곧 이름이요 〈본래의 뜻을〉 크게 잃은 것이다.
그래서 ‘신비하고 또 신비하다.[玄之又玄]’고 〈형용하는 의미로 중복하여〉 말한 것이다.
뭇 신비함이 모두 같은 玄에서 나오니, 이 때문에 ‘뭇 신비함이 나오는 문’이라고 했다.
2.
天下皆知美之爲美(천하개지미지위미) :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斯惡已(사악이) :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皆知善之爲善(개지선지위선) :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斯不善已(사불선이) :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故有無相生(고유무상생) :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難易相成(난이상성) :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
長短相較(장단상교) :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高下相傾(고하상경) : 높고 낮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
音聲相和(음성상화) : 악기 소리와 목소리도 서로의 관계에서 어울리는 것
前後相隨(전후상수) : 앞과 뒤도 서로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
是以聖人處無爲之事(시이성인처무위지사) : 따라서 성인은 무위로써 이를 처리하고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 :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한다
萬物作焉而不辭(만물작언이불사) : 모든 일 생겨나도 마다하지 않고
生而不有(생이불유) : 모든 것을 이루나 가지려 하지 않고
爲而不恃(위이불시) : 할 것 다 이루나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功成而弗居(공성이불거) : 꿈을 쌓으나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
夫唯弗居(부유불거) : 공을 주장하지 않기에
是以不去(시이불거) : 이룬 일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
2장 모순된 조화를 따르는 삶 세상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은 추함이 있기 때문이다. 착한 것을 착하다고 아는 것은 착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만들어 낸다. 긴 것은 짧은 것으로 인해 정해지고 높은 것은 낮은 것으로 인해 결정된다. 앞과 뒤는 서로 함께한다. 그래서 성인은 드러나는 이원성과 모순된 조화에 마음을 열고 산다. 성인은 노력하지 않음으로 행하고 말하지 않고 가르친다. 기르되 소유하지 않고 일하되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겨루지만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일은 끝나면 잊힌다. 이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이유이다. |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판단을 부추기고 이중성을 장려하는 우리의 믿음 체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아주 일방적이며, 때로는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달라지고 진정한 조화의 환희를 맛보게 된다. 누구나 아름다움이 추함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은 추함을 낳고, 추함에 대한 생각은 반대로 아름다움을 낳는다. 이러한 믿음 체계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개념들이 이처럼 정반대의 것에 따라 결정되는지 생각해 보라. 키기 큰 사람은 그보다 작은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반대되는 구조로 보지 않고 완전한 하나의 일부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서로 반대라는 것들이 조화를 이루고 공존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결국 반대라는 개념은 세상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판단의 결과일 뿐이다. 수선화는 데이지가 더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수리나 쥐는 우리가 삶과 죽음이라고 부르는 서로 정반대의 것들에 대한 감각이 없다. 나무나 꽃 그리고 동물들은 추함이나 아름다움을 따지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은 채 영월한 도의 조화 속에서 ‘그저 존재할’ 뿐이다.
몸은 시작과 끝이 있고,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은 이러한 물질적인 요소가 아니고 무한하며 형체도 없다. 당신은 만물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위대한 도 그 자체이기도 하다. 서로 상반되는 생각들을 당신 안에 함께 머무르게 하라. 선과 악은 한 곳에서 나온 서로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도의 조화로움을 유지하면서 물질세계의 이중성을 수용하라. 그러면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판단할 필요가 없어진다.
⊙ 하나 된 삶을 살라
모든 것을 선과 악, 또는 옳고 그름으로 구분 짓는 그릇된 성향을 버리고 조화로운 세상에 발을 들여 놓아라. 아름답다거나 못생겼다는 판단은 물질세계의 기준일 분이다. 이원성이라는 것은 결국 일종의 심리게임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자신의 방식대로 본다. 따라서 언제나 비판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비판이 반드시 유용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일은 끝나면 잊힌다. 이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이유이다.”라는 말이 뜻하는 바다. 이원성과 판단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이들을 통합의 일부라 생각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도를 실천하면 다른 사람들이 이분법의 논리를 만들어낼 조차도 항상 하나 됨을 유지할 수 있다.
⊙ 덜 노력하고 더 많이 얻어라
노력은 전체의 한 조각일 분이다. 나머지 조각은 바로 ‘노력하지 않음’이다. 이제부터 이러한 두 가지를 함께 녹여서 버무려라. 이것이 바로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노력하지 않는 행함’이다. 이것은 누군가와 함께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상반되는 개념을 없애면 모순적이게도 그들을 하나로 통합하게 되고 더 이상 한 입장에서서 상대방을 규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제2장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첫 부분은 價値의 相對性에 관한 유명한 文章이다. 우리가 通常的으로 생각하는 美와 善은 실상 惡[醜]과 不善일 수 있음을 老子는 지적한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보면 분명한 相對主義에 해당한다. 하지만 老子의 맥락은 莊子처럼 相對主義를 철저하게 긍정하기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추한 것일 수 있고 선한 것이 불선한 것일 수 있다는 逆說의 논리에 입각해 있다. 이것은 수단적 상대주의에 그치는 것이지 철저한 상대주의를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예컨대 河上公이 해석하는 방식처럼 우리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일종의 處世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有와 無는 서로를 낳는다.”는 구절에 대해 하상공은 “있음을 보거든 없음을 행하라.[見有而爲無也]”는 처세훈으로 이해한다.
둘째 부분에서는 유명한 聖人의 ‘無爲’와 ‘不言之敎’를 論한다. 無爲는 통상 道家의 고유한 사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先秦 諸子百家 共通의 理想이라고 이해하는 傾向이 있다. 예컨대 《論語》 〈衛靈公〉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無爲하면서 다스리신 분은 아마도 순임금일 것이다. 대체 어떻게 하였는가? 공손히 몸을 바르게 한 채 남면하였을 뿐이다.’[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라고 하였는데, 이는 禮治 혹은 德에 의한 敎化의 이상이 실현된 상태로 볼 수 있다. 이러한 《論語》의 이상은 王弼이 《老子》의 無爲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王弼의 無爲와 관련된 논의는 제3장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어지는 세 번째 부분에서는 功이 이루어져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말아야 공이 스스로를 보전하고, 그 공이 온전히 자기 것이 된다는 逆說을 논하고 있다. 이런 논의는 《老子》가, 본래 취지가 스스로를 보전하는 道를 추구하였던 정치적 성격이 강한 문헌임을 보여준다.
天下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추한 것이다. 천하가 모두 선한 것을 선하다고 여길 줄 아는데 이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有(있음)와 無(없음)는 서로 낳고, 쉬움과 어려움은 서로 이루어주고, 긺과 짧음은 서로 비교되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악소리와 〈사람의〉 노랫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 진작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요, 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기쁨과 노여워함과 같고, 선과 선하지 않음은 옳음과 그름과 같다.
기쁨과 노여워함은 같은 뿌리에서 나오고, 옳음과 그름은 같은 문에서 나온다. 그래서 어느 한쪽만을 들어 말할 수 없다.
〈‘있음과 없음’, ‘쉬움과 어려움’, ‘긺과 짧음’, ‘높음과 낮음’, ‘음악소리와 노랫소리’, ‘앞과 뒤’〉 이 여섯 가지는 모두 자연스러움을 늘어놓은 것이니 어느 한쪽만을 들어 밝힐 수 없다.
이런 까닭에 聖人은 無爲의 일에 거하고
자연스럽게 되어 이미 충분하니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하면 실패하게 된다.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여,
지혜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으니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하면 거짓이다.
만물(만백성)이 움직이더라도 억지로 시작으로 삼지 않고, 살게 두되 소유하려 하지 않고, 베풀면서도 자신이 베풀었다 하지 않고,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을〉 자처하지 않는다.
만물에 따라 〈그 각각의 쓰임새에 맞춰〉 쓰이니 功이 저것(萬物)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 공을〉 자처하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공을 자처하지 않으니 〈그 공이〉 사라지지 않는다.
공을 자신의 것으로 하면 그 공이 오래 갈 수 없다.
3
不尙賢(불상현) :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말라
使民不爭(사민불쟁) : 사람들 사이에 다투는 일 없어질 것이다
不貴難得之貨(불귀난득지화) : 귀중하다는 것 귀히 여기지 말라
使民不爲盜(사민불위도) : 사람 사이에 훔치는 일 없어질 것이다
不見可欲(불견가욕) : 탐날 만한 것 보이지 마시라
使民心不亂(사민심불란) : 사람의 마음 산란해지지 않을 것이다
是以聖人之治(시이성인지치) : 그러므로 성인이 다스리게 되면 사람들도
虛其心(허기심) : 마음은 비우고
實其腹(실기복) : 배는 튼튼하게 하며
弱其志(약기지) : 뜻은 약하게 하고
强其骨(강기골) : 뼈는 튼튼하게 한다
常使民無知無欲(상사민무지무욕) : 사람들로 지식도 없애고 욕망도 없애고
使夫智者不敢爲也(사부지자불감위야) : 영리하다는 자들 함부로 하겠다는 짓도 못하게 한다
爲無爲則無不治(위무위칙무불치) : 억지로 하는 함이 없으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3장 만족하는 삶 지위를 귀하게 떠받들면 경쟁이 생길 것이다. 재물을 중요하게 여기면 도둑질을 할 것이다. 탐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아야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성인이 다스릴 때는 백성의 마음과 가슴을 비우게 하고, 뜻을 약하게 하며, 뼈를 강하게 한다. 노력하지 않음으로 행하라. 행함이 순수하고 자기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완전히 제자리를 찾는다. |
만족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우선순위를 다시 조정해야 한다. 욕망에만 집착하면 외적인 요인이 우리를 지배한다. 돈이나 권력, 사회적 지위만을 좇는 것은 도를 향한 눈을 가리고 만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에고가 재산, 지위, 권력 등을 얻는 것에 집착함으로써 우리는 성취를 과대평가 하게 된다.『도덕경』은 우리에게 도둑질과 논쟁과 혼란으로 내모는 삶의 방식을 과감히 버리라고 이른다. 늘 감사하는 마음속에서 道를 행하는 습관이야말로 우리를 만족스러운 삶으로 이끈다. 우리는 개인적 욕망이 아닌, 道에 중심을 둔 질문을 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삶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노력하지 않음’을 행하면 모든 것이 완전한 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말은 나태하고 실패한 사람들을 위한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노자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빈둥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에고가 이끄는 욕망보다 차원이 높은 원칙과 근원이 방향을 제시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할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신성하고 근원적인 길에는 에고가 끼어들게 마련이다. 에고를 버리고 道가 이끄는 방식을 따르라. 극도로 화가 나더라도 도를 따르라. 에고의 속박에서 벗어나라는 내면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리라. 그러면 역설적이게도 더 많이 이루게 될 것이다. 세상 속된 논리에서 벗어나 내면의 것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도록 두면 더 이상 내가 아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없다.
행복은 그 여정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루어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믿는 여러 가지 목표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행복지수를 점검해 본다면 예전 이미 목표 중 일부가 이루어졌음에도 그것들이 지속적 기쁨을 주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욕망은 불안과 스트레스, 그리고 시기심을 낳는다. 외적인 기쁨을 버리고 삶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일들 속에서 행복을 찾아라.
道는 만물의 근원이다.
道의 완전함을 믿어라.
道는 당신 내면에 존재하며, 당신을 위해 존재한다. 道의 조화로움을 믿어라. 원하는 것의 목록을 만들어서 道에게 넘겨줘라. 그리고 그냥 믿어라. 그와 동시에 道의 인내에 귀를 기울이고 살펴보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공급해 주는 완전한 에너지와 당신을 연결하라. 에고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영원한 道가 당신을 통해 작용하도록 내버려두면 된다. 이것이야말로 노자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제3장은 竹簡本에는 없다. 이 章은 주로 老子의 政治思想의 핵심을 드러낸 부분으로서, 《墨子》 이래 능력 있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여 다스리는 정치[尙賢]를 부정하고, 愚民政治를 옹호하는 것으로 無爲의 의미를 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老子》의 文字를 그대로 풀이하는 주석자는 거의 없다. 오히려 많은 주석자들은 능력과 역량에 맞게 관직과 직책이 주어진다면 尙賢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이해한다. 예컨대 河上公은 세속에서 말하는 현명한 사람을 기용하는 것으로, 王弼은 孔子가 말했던 小人을 배제하고 공정하게 능력에 맞는 관직과 직책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이 다투고 경쟁하는 폐해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洪奭周는 능력과 직책이라는 名實이 일치하지 않은 데에서 오는 폐해라고 보며 오히려 尙賢은 治天下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한편 愚民政策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백성들로 하여금 無知하고 無慾하게 하라”는 구절에 대해 현대학자 묄러(Hans-Georg Moeller)는 老子의 이 文章이 현대 사회의 욕망 충족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만족의 기술을 주장한다고 보았다. “욕망은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만족을 얻음으로써 충족시킬 수 있다. 일단 어떤 이가 음식을 먹으면, 그 사람은 ‘자연적으로’ 먹고 싶은 욕망을 제거할 것이다. 사람들은 먹는 것을 통해 먹고 싶은 욕망을 간단히 제거한다. 사람들은 더 먹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먹는다. 욕망은 사람이 만족할 만큼 먹지 않을 때에만 생겨난다. 아니면 다른 말로 욕망의 제거는 ‘만족의 정복(mastery)’ 혹은 ‘중단의 통제’의 결과이다. 道家의 성인들은 그들이 언제 멈추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만족의 달인’들이다. 언제 멈춰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절대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욕망이 생겼다는 것은 만족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다는 징후이다. 오직 만족되지 않은 사람들만이 욕망한다. 성왕들은 일반적인 만족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 그들 자신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통치하고 있는 나라를 위해서도 그렇다.”(《Daodejing》)
능력 있는 사람을 숭상하지 말아 백성들이 다투지 않게 한다.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말아 백성들이 도둑이 되지 않게 한다.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말아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게 한다.
‘賢’은 ‘능력[能]’과 같다. ‘尙’은 이름을 아름답게 한다는 뜻이요, ‘貴’는 칭호를 높여준다는 뜻이다.
오로지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일이 맡겨지면 숭상해서 무엇 하겠는가?
오로지 쓰일 만한 사람에게 관직이 주어진다면 귀하게 해서 무엇 하겠는가?
만약 능력 있는 사람을 숭상하고 그 이름을 현창하는 데 영화가 그 맡겨진 일보다 지나치면 아랫사람들이 다투어 〈윗사람과〉 경쟁하려 하고 능력을 비교하며 서로 이기려 들 것이다.
재화를 그 쓰임새보다 지나치게 귀하게 여기면 탐내는 사람들이 다투어 담을 넘어 상자를 샅샅이 뒤져 죽음을 무릅쓰고 도둑질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어지럽게 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은 비우게 하고 그 배는 채워주며,
마음은 지혜를 품고 배는 음식을 담는다. 〈그 마음이〉 비어야 지혜가 들어차고 〈그 배가〉 차야 꾀가 없게 된다.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하여
뼈는 뜻이 없기에 골간이 되고, 뜻은 일을 벌여 어지럽게 만든다.
늘 백성들로 하여금 꾀가 없고 욕심도 없게 하고,
〈백성들의〉 타고난 참된 본성을 지킨다는 뜻이다.
무릇 꾀 있다 하는 자들이 감히 무언가 하지 못하게 하니
‘꾀부린다[知]’는 것은 〈자연에 거슬러〉 할 줄 안다는 것을 일컫는다.
無爲를 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4.
道沖而用之(도충이용지) : 도는 그릇처럼 비어 그 쓰임에
或不盈(혹불영) : 넘치는 일이 없다
淵兮似萬物之宗(연혜사만물지종) : 심연처럼 깊어 온갖 것의 근원이다
挫其銳(좌기예) :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解其紛(해기분) : 얽힌 것을 풀어 주고
和其光(화기광) : 빛을 부드럽게 하고
同其塵(동기진) : 티끌과 하나가 된다
湛兮似或存(담혜사혹존) : 깊고 고요하여 뭔가 존재하는 것 같다
吾不知誰之子(오불지수지자) : 누구의 아들인지 난 알 수 없지만
象帝之先(상제지선) : 하느님보다 먼저 있었음이 틀립없다
4장 무한한 삶 道는 비어 있지만 다함이 없고 끝없이 깊으며 모든 것의 근원이다. 道 안에서 날카로운 경계는 무너지고 얽힌 매듭은 풀어진다. 태양은 구름에 가려 부드러워지고 티끌은 하나로 뭉치게 된다. 道는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존재한다. 나는 누가 그것을 태어나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道는 모두의 공통된 원형이요. 만물의 아버지이다. |
道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도는 비어 있는 동시에 무한하다. 또한 도는 통제할 수도 없고, 그 수를 세거나 측정할 수도 없다. 생명을 주는 에너지인 도는 언제나 기쁨의 원천이다. 우리가 무한의 관점으로 산다면, 태어나서 자라고 늙어서 죽는 과정을 거치는 우리 육체가 자신을 증명하는 유일한 상징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 “날카로운 경계”와 “얽힌 매듭”의 세상을 살아가는 무한한 존재이다. 드러나지 않게 생명을 주는 도의 힘은 언제나 당신의 내면과 주위로 몰려든다. 도는 다함이 없고 끝없이 깊다. 그래서 도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
4장은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뭐라고 답할지 생각해 보라고 한다. 노자는 자신의 무한함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내면에 흐르는 창조적 에너지 근원에 다가서는 길이라 말한다. 예를 들어 불행한 사람을 돕고 싶지만 현실적 제약 때문에 시간과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직업이나 생활수준에서 한 걸음 나아가 무한한 창조 에너지가 이미 당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알지 못했던 시간과 힘이 저절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道는 “다함이 없고 끝없이 깊으며 모든 것의 근원이다.”라고 노자는 다시 말한다. 언제 어디서나 도가 존재함을 아는 것은 부족이나 결핍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든가 “이것은 내 운명이 아니야.” 또는 “내 주제에 그런 행운이 오겠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즐거움은 살아진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 대신에 당신이 원하는 것이 곧 이루어질 거라고 상상하라. 아니 벌써 이루어졌다고 말하라. 이 새로운 자화상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멋진 삶을 살게 한다. 우리는 활기로 가득해지고 도와 영원히 연결된다.
골칫거리처럼 보이는 모든 문제들을
영원한 道의 관점에서 바라보라.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느껴진다면 이 문제를 도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세상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돈도 개인이 필요한 것보다 훨씬 풍ㄴ부하게 존재한다. 이 점을 이해하고 그 무한한 공급에 접속하라. 먼저 “지금 내개 필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라고 스스로를 확신시켜라.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무한한 본성에 다가서서 실천을 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된다. 도 안에 조화롭게 머물면서 모든 문제에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라. 잘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우리 주변에 충분히 존재한다. 내키지 않고 불행하게 느껴지는 일에 힘을 쏟지 말고 도와 어우러져라. 도를 마음에 품고 느끼고 실천하면 도는 당신 내면에서 당신을 위해 작용할 것이다.
무한의 관찰자가 되라.
변화의 신호가 나타나면 일시적으로 걱정과 근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은 변화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무한의 관찰자라는 입장에서 삶을 내려다보면 걱정과 불안 갈등은 영원한 조화 속으로 녹아든다. 시간을 초월한 이런 관점으로 지금 걱정하고 있는 문제들이 백 년이나 천 년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는 어떻게 여겨질지 그려보라. 무한한 도와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도 영원함의 일부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생각과 사고가 도와 일직선이 되도록 조율하라. 영원한 도 안에서 삶의 모든 날카로운 경계는 무너지고, 얽힌 매듭은 풀어지며, 티끌은 하나로 뭉친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지혜라면 ,
내가 전부임을 깨닫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오가며 내 삶은 나아간다.
골짜기, 문 그리고 뿌리의 자연적 과정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여기서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뜻의 한자 ‘綿’은 가느다란 비단실 가닥을 나타내는데, 이 ‘면’자는 또한 ‘관통해 나아간다’는 함축적 의미도 갖고 있다. 골짜기, 문 그리고 뿌리는 “꽉 채워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비어[虛]’ 있거나 또는 《노자》에서 말하듯이 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그러한 활동의 중심은 비어 있다. 즉 ‘있지[有]’ 않지만 결코 ‘없지도[無]’ 않은 통로이다. 이러한 ‘없는[無]’ 것들의 존재라는 ‘틈새적(in-between)’ 형식은 제4장에서 하나의 감탄으로 引喩되고 있기도 하다.
뿌리는 그윽하게 거기에 있는 듯하다. 우리의 시야로부터 숨어 있거나 비어 있는 또는 어떠한 형체도 없는 그것은 어쨌거나 존재한다. 그것은 ‘심원’하거나 ‘모호’한 존재의 방식이며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제4장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대단히 많은 자연 환경과 인공 구조물의 경우처럼 ‘없는’ 것들이 다함이 없는 유용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도는 비어 있는데 아무리 써도 다시 차오르지 않는다. 그윽함이 마치 만물의 으뜸 같도다.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얽힘을 풀고, 그 빛남을 부드럽게 하고, 그 티끌과 함께한다. 담담함이 마치 있는 듯하도다.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지만 天帝보다 앞서는 것 같다.
대저 한 가문을 다스릴 역량을 지닌 자는 그 가문을 온전하게 할 수 없고, 한 나라를 다스릴 역량을 지닌 사람은 그 나라를 번성하게 할 수 없다.
가진 힘을 다해 무거운 것을 들고 있기 때문에 제대로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물을 다스릴 지혜를 갖고 있어도 二儀의 도리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넉넉할 수 없다.
땅에게 비록 形魄이 있어도 하늘을 본받지 않는다면 그 안정성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없고, 하늘에게 비록 精象이 있어도 도를 본받지 않는다면 그 정함을 지킬 수가 없다.
비어 있는 가운데 그것을 쓰면 그 쓰임이 다하지 않게 될 것이다. 가득 채워서 그 속을 꽉 채우면 그 채워짐으로 인하여 넘치게 된다.
그러므로 비어 있는 가운데 그것을 쓰는 것이니 다시 채워지지 않은 상태가 회복되니 그 하는 바가 무궁하여 이미 지극해진다.
형체가 아무리 커도 그 몸에 누가 될 수 없고, 일이 아무리 커도 그 역량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만물이 이것을 버리고 주인을 구한다면 그 주인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그윽함이 마치 만물의 으뜸 같지 않은가.
날카로움이 꺾여도 손상됨이 없고, 얽힘을 풀어도 수고롭지 않고, 빛남을 누그러뜨려도 그 몸을 더럽히지 않으며, 티끌과 같이 되어도 그 참된 본성을 바꾸지 못하니, 또한 담담함이 마치 있는 듯하지 않은가.
있으면서 있지 않고 없으면서 없지 않아 있는지 없는지 헤아릴 길이 없으므로 ‘있는 듯하다’고 했다.
땅이 그 형체를 지키니 〈땅의〉 덕이 그 실어줌을 넘지 못하고, 하늘이 형상을 만족하니 그 덕이 덮어줌을 넘지 못한다.
하늘과 땅 또한 결코 그에 미칠 수가 없는데 또한 帝보다 앞서는 듯하지 않은가? 帝는 天帝이다.
5.
天地不仁(천지불인) :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
以萬物爲芻狗(이만물위추구) : 모든 것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한다
聖人不仁(성인불인) : 성인도 편애하지 않는다
以百姓爲芻狗(이백성위추구) : 백성들을 모두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한다
天地之間(천지지간) : 하늘과 땅 사이는
其猶??乎(기유탁약호) : 풀무의 바람통
虛而不屈(허이불굴) : 비어 있으나 다함이 없고
動而愈出(동이유출) : 움직일수록 더욱더 내놓은 것
多言數窮(다언수궁) : 말이 많으면 궁지에 몰리는 법
不如守中(불여수중) : 중심을 지키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다
5장 치우치지 않는 삶 하늘과 땅은 치우침이 없어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성인도 이처럼 치우침이 없이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성인은 하늘과 땅 같아서 누구도 유별나게 귀하게 여기지 않고 어떤 사람도 꺼리지 않는다. 성인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보물을 누구에게나 준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풀무와 같은 공간이 있어서 비어 있으되 다함이 없다. 이는 쓸수록 더 많이 생긴다. 중심을 지켜라. 사람은 고요히 앉아 내면의 진실을 찾는 존재이다. |
道는 차별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처럼 치우치는 법이 없다. 모든 것의 근원이며, 보이지 않게 만물을 부양하는 위대한 공급자이다. 도는 다른 것에 줄 힘을 거둬서 유독 하나에만 쏟는 편애를 하지 않는다. 바람, 햇빛, 공기, 비 같은 생명 유지에 필요한 요소들은 이 땅의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진다. 의식의 내부와 외부에서 이 강력한 특징과 조화를 이루면 진정한 자아를 깨달을 수 있다. 자아는 도와 조화를 이루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사려 깊은 태도이다. 자아를 깨닫게 되면 어떤 삶을 다른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세속적으로 인기 있는 것들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노자가 “성인은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고 말한 것과 같다.
노자는 이 말을 통해 도와 성인이 만물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스테판 미첼은 그가 번역한 『도덕경』에서 “짚으로 만든 개는 종교적 의식에 쓰이는 물건으로 의식이 행해지기 전에는 귀하게 여겨지지만 의식이 끝난 후에는 버려진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도교에서는 밀려들어오고 다시 흘러나가는 밀물과 썰물처럼, 존재를 편견 없이 대한다. 성인은 이렇게 치우침 없는 깨달음을 통해 우리 의식 속의 모든 ‘짚으로 만든 개’안에서 신성함을 찾아낸다.
『도덕경』의 5장은 우리에게 공평하고 치우침 없는 도를 깨닫고, 그 모순적 기질을 즐기라고 말한다. 도의 에너지를 더 많이 접하고, 도의 시선을 가질수록 우리는 도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된다. 도는 결코 소모되는 것이 아니다. 쓰면 쓸수록 더 생긴다. 그러나 우리가 도를 가두거나 저장하려고 하면 어느새 부족해지고 한 움큼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 고갈되지 않는 힘은 우리가 공평한 본질에서 무엇을 배제시키려고 하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사라져버린다.
당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치우침 없는 도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라.
마음속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순간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 격상시키게 되고, 자신은 예외적인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자신을 이런 범주에 올려놓는 순간, 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자신의 존재가 더 중요해 지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道의 작용을 멈추게 한다. 종교적 모임을 포함해서 도를 중심에 둔 모든 조직은 몇몇 구성원에게만 특별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 납득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차별하고 편애하는 행위는 진정한 자아를 방해한다. 우리를 조각조각 분열하게 하는 생각이나 행동은 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를 하나로 뭉치도록 엮어주는 것이야말로 신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노자는 우리 안에 자리한 道의 초점에 맞추면 그러한 정신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보물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라.
삼라만상의 모든 스팩트럼에 필요한 것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 매 순간 道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내면에 존재하는 남에 대한 판단과 편견을 최대한 없는 것이다. 자연스럽고 가장 단순한 방법은 모든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이 평가하고 판단하는 상대방 사이에는 도라는 공통점이 있다. 짚으로 만든 개에 불과한 겉모습이 아닌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한 도를 발견하라. 그러면 그들을 비판하고 함부로 규정하려는 마음은 사라질 것이다. 두 번째는 당신 사전에서 ‘특별하다’는 말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한 사람이 특별하다면 우리 모두 다 특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특별하다면 더 이상 특별하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특별하다는 말에는 결국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 비해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치우침이 없는 도를 실천하고 내면의 공간과 연결됨으로써 너그러운 마음을 펼치도록 하는 것이다. 내면의 공간속에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자신만의 것이 아닌 전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소유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다. 조건 없이 나누다 보면 편견이 사라지고 있음에 전율하게 된다. 도는 바로 당신 내면에 존재하는 진리이다. 결코 마르지 않는 도와 연결되어 그 평화와 기쁨 속에 머물라,
道家의 성인은 인간의 덧없음에서 자유롭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결정하려는 충동에서도 자유로운 유일한 인간이다. 즉, 추한 것보다 아름다운 것을 선호하려는, 이것은 善이고 저것은 惡이라 규정하려는, 죽는 것을 사는 것보다 더 감정적으로 불안하게 여기려는, 하나의 의견은 옳고 다른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기려는 어떠한 욕망도 가지지 않은 유일한 인간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도가의 성인이 그러한 인간의 특성들을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그들이 그러한 것으로 “내면적으로 자신의 인격에 상처를 입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성인은 따라서 인도적이지 않고 자연적이다.
‘인도적인’ 것 대신에 도가의 성인은 하늘과 땅의 태도를 가지고 인간을 마치 ‘짚강아지[芻狗]’처럼 대한다. 고대와 근대의 주석자들이 다 같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짚강아지는 희생제에서 대단히 숭배되는 요소지만 의례 이후엔 모든 의미를 상실하고 그저 버려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도가의 성인은 사람들에게 크게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 우리는 《노자》의 다섯 번째 장이 儒學者와 ‘人本主義者’의 의례에 대한 집착을 공격하는 것으로 읽혀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의례, 특히 죽음을 처리해야만 하는 것들은 유교 문화에서는 최우선시된다. 버려진 짚강아지를 언급하는 것은 의례적 수행을 조롱하는 것이다. 명백하게 영속성 - 인간의 선조와 그 일족들의 영속성 - 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가정되는 의례는 대단히 일시적인 사건이다. 의례가 끝나자마자, 그 의례에 사용된 도구들은 그것들에게 부여되었던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여기에서 《노자》는 인간의 영속성에 대한 유교의 탐구를 실패한 것으로 비판하는 듯 보인다. 도가의 관점에서 영속성은 〈선조와 일족의〉 진행 중인 존재에 대한 기념에 기반을 둘 수 없으며, 오직 끊임없는 변화의 인식에만 기반을 둘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영속적이지 않고 유교적인 의례는 또한 인간을 그러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게다가 도가적 관점에서 유교의 의례는 삶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적 집착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장자》처럼 《노자》도 죽음에 대한 유교의 감정적 집착을 비판한다. 도학자에게, 삶을 죽음보다 선호하는 인간적 경향에서 생겨난 그러한 감정적 애착은 짚강아지에 대한 감정적 애착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짚강아지의 이미지가 유교의 의례에 대한 집착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반면, 무엇보다도 우리는 여기서 논쟁이 되는 것이 그 이미지와 얽혀 있는 ‘인본주의(humanism)’라고 생각해보는 것은 재미있다. 하늘과 땅과 마찬가지로 도가의 성인은 특히 ‘인간적’이거나 각별하게 인간에게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도가 성인에게 인간은 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심지어 짚강아지하고도 다르지 않다! 인간은 마치 짚강아지가 의례 수행 뒤에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삶에서 사라진다. 짚강아지가 아궁이를 위한 연료가 되는 것처럼, 인간은 하늘의 조상이 아니라, 도가의 성인 - 《노자》 5장 세 번째 부분에서 인간이 아닌 풀무에 비견되는 존재 - 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무관심하다. 이것은 물론 성인들이 인류를 싫어한다거나 심지어 경멸한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다른 종보다 인간 종에 더하거나 덜한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인들은 스스로를 비워냄에 있어 감정을 버릴 뿐 아니라 자신의 性과 種까지 버린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강아지처럼 여기고
하늘과 땅은 저절로 그러함에 맡겨 함도 없고 만듦도 없으나 만물이 스스로 서로를 다스린다.
그래서 ‘어질지 않다’고 한 것이다. ‘어질다’는 것은 반드시 무언가를 만들어 세우고 펼쳐서 변화시키니 은혜가 있고 함이 있다.
그러나 만들어 세우고 펼쳐서 변화시키게 되면 만물은 그 참된 본성을 잃게 될 것이요,
은혜가 있고 함이 있게 되면 만물이 함께 보존될 수 없고, 만물이 함께 보존될 수 없으면 온전히 실어주기에는 부족하게 된다.
하늘과 땅이 짐승을 위하여 꼴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짐승들은 꼴을 먹고, 사람을 위하여 개를 낳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개를 먹는다.
만물에 無爲하면 만물은 저마다 제가 쓰일 바에 맞추어 나아가게 되니 넉넉하지 못함이 없게 된다.
만약 지혜가 자기로부터 세워지게 되면 맡기기에 부족하다.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을 짚강아지로 여긴다.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합치하기에 백성을 짚강아지에 견준 것이다.
하늘과 땅의 사이는 아마도 풀무나 피리와 같지 않은가? 비어 있으나 쪼그라들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온다.
‘槖’은 ‘풀무[排槖]’이고 ‘籥’은 ‘피리[樂籥]’이다.
풀무와 피리의 속은 텅 비어 있어서 어떠한 마음도 없고 무언가 함도 없다.
그래서 비어 있으면서도 다하여 쪼그라들지 않을 수 있고 움직여도 다 소진되지 않을 수 있다.
하늘과 땅의 가운데는 텅 비어 스스로 그러함에 맡긴다. 그래서 다할 수 없는 것이 마치 풀무나 피리와 같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가운데를 지키느니만 못하다.
하면 할수록 더욱 잃게 된다. 만물이 〈군주의〉 지혜를 피하고 하는 일마다 〈군주의〉 말과 어긋나니, 그 지혜가 다스려지지 않고 그 말은 조리에 맞지 않게 되어 반드시 막히는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풀무와 피리가 그 속을 지키면 궁하거나 다함이 없다. 자신을 버리고 만물에게 맡기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게 된다.
만약 풀무와 피리가 어떤 소리를 내겠다는 뜻을 갖게 되면 함께 〈그 피리를〉 부는 사람이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없게 된다.
6.
谷神不死(곡신불사) : 골자기의 신묘함은 죽지 않나니,
是謂玄牝(시위현빈) : 이를 일컬어 현묘한 암컷이라 이른다.
玄牝之門(현빈지문) : 현묘한 암컷의 아랫도리 드나드는곳은,
是謂天地根(시위천지근) : 바로 하늘과 땅의 뿌리 로다.
綿綿若存(면면약존) : 이어지고 또 이어져 있는 것과 같아서,
用之不勤(용지불근) :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도다.
► 곡신(谷神)이라는 어휘를 직역을 하면 "골자기의 신"이라고 표현이 되나, 道(도) 라는 것이 신령스럽고, 골자기의 공허한 것처럼 허무하기는 하나, 허공의 골자기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도(道)뿐이니, 그윽하면서도 오묘한 것 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한 표현이다.
► 이 글에서는 谷神(곡신)이라고 합하여 谷神不死 (곡신불사)라고 표현하였으나, 노자는 나누어서 표현하기도 하였다. 즉 谷得一以盈(곡득일이영- 가득 채움으로서 하나를 얻는 것이 골자기요), 神得一以靈(신득일이령) - 신령스러움으로서 하나를 얻는 것이 신이다." 는 표현이다.
► <谷神不死>에 관하여 서한시대에 쓰였다는 하상공(河上公) 의 주석을 소개 하여 본다면,"谷이라는것은 기르는것이다. 사람이 능히 심신을 기른다면 죽지 않는것이다. 심신이라는것은 오장의 신을 이르는 것이니, 간장은 혼이오, 패장은 백이오, 심장은 신이오, 신장은 정이오, 비장은 지이니, 이 오장이 상처를 입어 다하여 버린다면, 이 다섯가지 신도 죽어 버리는것이다. (谷, 養也. 人能養神則不死, 神謂五藏之神. 肝藏魂, 肺藏魄, 心藏神, 腎藏精, 脾藏志. 五藏盡傷, 則五神去矣)." 라고 주석하였다.
6장 창조적인 삶 결코 사라지지 않는 정신을 신비의 여인이라 부른다. 신비의 여인은 세상의 전부가 된다 해도 할지라도 그 완전한 순결을 잃지 않는다. 그녀가 비록 다양한 모습으로 변한다 해도 진정한 본질은 고스란히 남는다. 신비한 여인에 이르는 몸은 창조의 근원.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라. 창조를 통해 메아리치는 그 소리를 들어라. 그녀는 반드시 존재를 드러내고 우리를 우리의 완전함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지속되고 결코 끝나지 않는다. |
6장에서 노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영원한 창조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비한 여인의 힘은 계속해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에게 다양하게 메아리치는 창조의 소리를 깨달으라고 한다. 이 신비의 여인은 계속해서 새 생명을 낳는다.『도덕경』은 그 여인에게 이르는 문이 바로 “창조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도덕경』은 무한한 영역에 다가서서 함께 창조하거나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결코 마르지 않는 그 에너지는 그것을 의식하건 않건 간에 우리의 유산인 동시에 운명이다. 도를 실천하면서 얻는 깨달음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온전함으로 우리를 이끈다.
노자의 글은 거의 2500여 년 전에 씌어졌지만,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통해 21세기에 꼭 맞는 조언을 한다. 시대를 다라 그 표현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여성적인 힘은 우리를 완성된 모습으로 이끌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할 것이다. 내면 깊게 울려 퍼지는 타고난 창조성을 깨닫는다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새로운 성취를 이루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완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등명도(燈明道)는 그의 저서《마음의 눈을 밝혀주는 도 365일》에서 “신성한 여성의 힘은 하늘로 치솟아 거대한 자연 으로 미끄러지는 새들의 노래와 같다”고 말한다. 이처럼 도가 다가오면 온 힘을 다해 거기에 올라타라. 참견도 하지 말고, 멈추지도 말고, 도에게 갈 곳을 정해 주지도 말고, 그냥 흐르게 내버려 두라
당신은 부모가 니라 위대한 영혼의
신성한 어머니인 道에 의해 태어났음을 깨달으라.
도는 무엇을, 어떻게 창할지에 대해 헷갈리는 법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신비의 여안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다. 내면 외침에 귀를 기울여라.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삶을 이끌려고 하는 것에는 신경 쓰지 마라. 당신의 내면 아주 깊은 곳에 있는 그것을 향해 뻗어 나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놓아주라. 끝도 없고 고갈되지도 않는 재능과 능력 그리고 지혜의 저장소가 당신 내면에 잇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신이 시작된 곳은 바로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창조적 신성한 어머니, 즉 도의 신비의 여인이다. 내면에서 소생으로 느껴지는 삶의 기쁨처럼 느껴지는 일이 있다면, 이런 흥분이야말로 가슴 속에 숨겨둔 열정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증거이다.
항상 창조적으로 느끼고 행동하라.
하는 일마다 자시만의 고유성을 추구하라.
음악을 작곡하거나, 꽃을 장식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하라. 창조적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비난과 편견에도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것이다. 또한 재능이 자연스럽게 발휘될 수 있도록, 그것을 가로 막고 있는 방해물을 부숴버리는 것이다. 당신 능력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내려놓아라. 창조적인 힘은 개인의 삶보다 위대한 동시에 삶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신성한 어머니와 연결될 때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를 실천하는 길이다.
제6장은 傳統的 해석과 現代的 해석이 크게 다르다. “골짜기의 신령은 죽지 않는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장은 현대의 모든 철학들과 종교들이 다루는 주요한 실존적 문제, 즉 삶의 일시성 혹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독해하기도 한다. 또는 제28장과 연결하여 原始宗敎의 女性 生殖器 崇拜, 남성성에 대해 여성성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老子》의 독특한 철학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맥락에서 보면 제6장은 《노자》의 고유한 사상인 ‘부드러움[柔]’, ‘스스로를 낮춤[卑]’을 강조하는 處世의 태도로 보거나 道敎的 養生의 의미를 說明한 것으로 본다.
특히 어떤 의미에서 道는 ‘不死’하는 것이기에 道를 본받으려고 하는 것은 인간이 不死‧不滅이 되기를 열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대의 도교에서 《노자》를 이해한 방식은 정확하게 이런 것이며, 흔히 종교적인 道敎의 역사는 그러한 해석을 위한 충분한 증거를 제공한다. 도가적 실천은 몸을 영원히 지속되는 ‘유기체’로 변형하려는 시도를 의미할 수도 있고, 도가적 실천가는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많은 구제책들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텍스트로서 《노자》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매뉴얼로 읽힐 수 있었으며, 《노자》의 저자로 추정되는 노자 자신은 그 기술을 성공적으로 숙달했던 불멸의 모델로 존경받을 수 있었다.
골짜기의 신령은 죽지 않으니, 이를 신비한 암컷[玄牝]이라 일컫는다.
이 신비한 암컷의 문을 하늘과 땅의 뿌리라 일컬으니, 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 면면히 이어져 그것을 아무리 써도 수고롭지 않다.
‘谷神’이란 골짜기 한가운데의 빈 곳이다.
〈골짜기의 한가운데는〉 어떠한 형체나 그림자도 없고 거스름이나 어김도 없으며, 낮은 곳에 처해 움직이지 않고 고요함을 지켜 쇠하지 않는다.
만물은 그것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곡신은〉 그 형체를 보이지 않으니, 이는 지극한 존재[至物]이다.
낮은 곳에 처하여 〈어떤 것이라고〉 이름 지어 말할 수가 없기에 그것을 ‘현묘한 암컷’이라 일컫는다.
〈《老子》는〉 “하늘과 땅의 뿌리는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 면면히 이어져 그것을 아무리 써도 수고롭지 않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門’이란 현묘한 암컷이 유래한 곳이다.
그 유래한 곳에 근본해볼 때 太極과 한 몸을 이루었기에 그것을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일컬었다.
있다고 말하고자 하면 그 형체가 보이지 않고, 없다고 말하고자 하면 만물이 그에 의해 생겨난다. 그래서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 면면히 이어진다.”고 했다.
어떤 만물이든 이루어지지 않는 게 없는데 아무리 써도 수고롭지 않으므로 “그것을 아무리 써도 수고롭지 않다.”고 했다.
7.
天長地久(천장지구) : 하늘과 땅은 영원하니
天地所以能長且久者(천지소이능장차구자) : 하늘과 땅이 영원한 까닭은
以其不自生(이기불자생) : 자기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故能長生(고능장생) : 그러기에 참된 삶을 사는 것이다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 성인도 마찬가지 자기를 앞세우지 않기에 앞서게 되고
外其身而身存(외기신이신존) :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를 보존한다
非以其無私邪(비이기무사사) : 사사로운 나로 하지 않기에
故能成其私(고능성기사) : 진정으로 나를 완성하는 것 아니겠는가
7장 에고 너머의 삶 하늘과 땅은 영원하다. 하늘과 땅이 영원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를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늘과 땅이 영원할 수 있는 비결이다. 성인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위해 세움으로써 결국 앞에 서고 자신을 돌보지 않기에 오히려 보호 받는다.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면 당신이 필요한 것을 얻을 것이다. 자신을 버림으로써 성취를 이룬다. |
7장의 첫 문장은 천지의 근원인 도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삶의 본질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그 본질은 세속적인 에고를 내려놓고 도를 중심으로 살 때 비로소 감응한다. 물질적인 부분만 추구하면 무한 본성에 소홀하게 되고 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제한적인 세게 속에서는 소유와 성취를 위해 애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소위 문명화된다고 하는 것은 주로 권력과 경제적 측면에 몰두 성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런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주고 불행을 막아줄 거라고 여긴다.
이 장에서는 특히 그러한 관념을 새롭게 정리하고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뛰어넘어 그 이상을 위해 존재하라고 제안한다. 도의 비밀은 재산을 소유한다거나 무언가를 얻으려고 애쓴다고 해서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도는 끝없이 베풀지만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자연스러운 성향 때문에 도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다. 이처럼 베풂과 영원한 생명은 함께 어우러진다. 영원히 지속되는 도의 본질을 이해하는 성인은 타인을 앞에 세우고 진심으로 섬기면서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 없이 베풀면 필요한 모든 것이 모여든다. 성인은 자신을 마지막에 세움으로써 결국은 맨 앞에 서게 되고, 남을 먼저 생각하기에 더 오래 존재하는 것이다.
에고는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끊없이 요구한다. 우리에게 더 많은 돈과 권력 그리고 명예를 추구하라고 명령한다. 에고가 아닌 도 중심의 삶을 산다면 치열하고 무의미한 경쟁에서 벗어나 평화와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면
당신이 필요한 것을 얻을 것이다.
이러한 도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에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라.
다른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고 섬긴다면 당신의 행동은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 힘이 자유롭게 흘러 당신을 충만한 삶으로 이끌 것이다. 하지만 에고의 경우는 다르다. 에고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누군가가 당신 몫을 가져가기 전에 먼저 차지하라고 말한다. 에고의 귀를 기우릴 때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항상 애쓰지만 결코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 목표를 이룬 충족감을 맛보지 못한다.
생각과 행동이 도에 이르면 베풂이라는 사랑의 에너지가 작동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도가 언제나 보답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한 근원임을 안다. 내 생각과 행동을 통해 도를 실천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다른 사람들을 당신 앞에 세워라. 개인의 성공과 실패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면 바로 그 순간 불운한 처지의 사람들에게로 관심을 옮겨보라. 혼자만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는 것보다 만족스럽고 삶에 더욱 밀착되어 잇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섬겨라. 그리고 당신이 베푼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다시 당신에게로 돌아오는지 깊게 살펴라.
쫓아가기를 그만두고 멈춰 서서 바라보라.
욕망을 추구할수록 그것은 교묘히 당신 눈을 속이고 달아날 것이다. 삶이 스스로 다가서게 하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에 주목하라. 도의 관대한 특성으로 인해 당신은 항상 무언가를 받고 있다. 들어 마시는 공기나, 마시는 물, 먹는 음식, 심지어 당신 마음을 채우고 있는 생각까지 모든 것이 바로 도가 주는 선물이다. 도에서 모든 것들이 흘러나왔음을 느끼고 당신이 받은 것들에 감사하라. 추구를 그만 두고 멈춰 서서 바라보라.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쫓으려는 마음을 진정시켜라. 스스로를 내려놓고 신에게 맡겨라. 어떻게 내면의 신이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면 당신은 세속적인 에고로부터 멀어지고 신에게 다가서게 된다.
하늘의 道는 ‘하늘(sky)’과 땅의 의미에서의 모두 하늘을 포함한다. 天地라는 표현은 종종 ‘하늘[天]’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곤 한다. ‘하늘과 땅’을 함께 말한다는 것은 우주적 또는 자연적 과정이 ‘응답’의 하나라는 점을 보다 더 명백하게 하는데, 이러한 응답이란 여러 요소들의 ‘어울림’, 여러 측면과 계기들의 조화로운 뒤섞임이 수반되는 역동적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의 효력은 스스로를 지속하는 능력에 따라 측정된다. 잘 세워진 리드미컬한 과정은 〈아마〉 끝없이 계속 될 것이다. 여기 제7장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늘과 땅의 사심 없음은 그 두 개체가 서로간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상호간에 주고받도록 해준다. 그것들은 어떤 특수한 ‘의제(agenda)’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갈등하지 않고, 서로를 아끼듯이 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의 교대는 어떠한 마찰도 일으키지 않는다. 마찰이 없기 때문에 그 과정은 어떠한 기운도 소모하지 않고 또한 멈추지도 않는다. 우주적 ‘상호작용’은 행동 없는 행동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하다. 마찰 없는 행동의 동일한 규칙은 자연이나 ‘하늘 아래’에서 대우주적이고 소우주적인 모든 차원에 적용될 수 있다.
天地는 長久하다. 하늘과 땅이 능히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그것들이 스스로 낳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낳으면 만물과 다투게 되고, 스스로 낳지 않으면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장구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성인은 자신의 몸을 뒤로 물리지만 몸이 앞서고, 자신의 몸을 도외시하지만 몸이 보전된다.
그에게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은 제 자신에게 無爲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몸이 앞서고 보전되는 까닭에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8.
上善若水(상선약수) :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
水善利萬物而不爭(수선리만물이불쟁) :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악) : 모두가 싫어한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이다
故幾於道(고기어도) :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居善地(거선지) : 낮은 데를 찾아가 사는 지혜
心善淵(심선연) : 심연을 닮은 마음
與善仁(여선인) : 사람됨을 갖춘 사귐
言善信(언선신) : 믿음직한 말
正善治(정선치) : 정의로운 다스림
事善能(사선능) : 힘을 다한 섬김
動善時(동선시) : 때를 가린 움직임
夫唯不爭(부유불쟁) : 겨루는 일이 없으니
故無尤(고무우) : 나무람을 받을 일도 없다
8장 흐름을 따르는 삶 최고의 선은 물과 같아서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면서 만물을 가른다. 물은 모든 이가 꺼리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깝다. 사물의 본성에 따라 살라. 마음을 헤아릴 때는 마음 깊숙이 들어가라. 사랑을 대할 때는 온화하고 친절하게 하라. 말한 바를 지켜라. 공평하게 다스려라. 거동함에 있어서는 때를 잘 살펴라. 본성에 따라 사는 사람은 사물의 이치에 맞서지 않는다. 언제나 해야 할 일의 진실을 알고 현재의 순간과 조화를 이룬다. |
노자의 가르침에서 도와 물은 같은 의미이다. 당신이 물이고 물이 곧 당신이다. 어머니의 몸속에서 보낸 인생의 첫 아홉 달을 생각해 보라. 당신은 양수 속에서 영양분을 공급받고 살았다. 양수야말로 조건 없는 사랑의 전형이다. 당신은 75%의 물로 이루어져 있고 특히 뇌는 85%가 물이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이 물은 움켜쥐려 하면 어느새 빠져나가지만 그 안에 손을 담그고 있으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물은 고이면 탁해지고 흐르면 맑아진다. 물은 높은 곳을 찾지 않고 가장 낮은 곳을 찾아 머문다. 물은 강으로 호수로 흐르고, 바다로 향하는 줄기에 합류한다. 그러고는 비가 되기 위해 하늘로 오른다. 물은 아무것도 꾸미지 않고 사사로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물은 동물과 식물을 돌보지도 않을뿐더러 땅을 비옥하게 만들 계획도 없다. 물은 그저 물 자신의 일을 하고 생긴 그대로 존재하는 데서 비롯된 이로움일 뿐이다.
도는 물과 당신의 유사점을 인식하라고 요구한다. 당신이 바로 물이다. 생명을 불어넣어 당신을 지탱하는 물과 같이 살아라. 만물의 본성에 다라 평온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라. 당신은 온화하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게 하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영원한 흐름을 믿고, 본성에 솔직해지며, 약속을 지켜야 한다. 또한 모든 이를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 생명을 지탱하는 물이 어떻게 흐르는가를 지켜보면서 이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물은 꾸밈없이 수수하게 흐르고 자신의 할 바를 정확히 알고 현재와 조화를 이루며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데서 그 이로움이 나온다.
물처럼 흐를 때, 자신의 위치에 따라 소통할 수 있다.
지식은 교환되고 학문은 모든 이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진보한다.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특히 배우지 못하거나 가난하거나 몸이 아픈 소외된 사람들을 끌어안아라. “모든 이가 꺼리는 낮은 곳” 곳”으로 가서 마음을 열어라. 사람들 속에서 도를 찾아라. 받아들임, 온화함, 친절함이 당신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하라. 안달하지 않음으로써 존중받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조정하지 않는 데 최선을 다한다면 도의 자연스러운 질서와 조화를 이룬 평화를 얻을 것이다. 물처럼 되라. 물은 그저 흐르기만 할 뿐 아무것도 이루려 하지 않지만 그로 인해 수영하고, 낚시하고, 마시고, 뿌리고, 떠다니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로움을 만들어 낸다.
생각이 자유롭게 떠다니도록 하라.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다투는 삶, 또는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삶을 잊어버려라.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에모토 마사루는 “우리가 곧 물이고, 물은 자유로워지고자 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물을 존중하고 사랑함으로써 물의 결정화 과정을 바꿀 수 있음에 주목했고 물이 반응하는 방식을 탐구했다. 사랑, 감사, 그리고 아름다움이라고 새겨진 그릇에 담으면 물은 아름답게 빛나는 결정체가 된다. 그러나 미움, 비난, 악함이라고 새겨진 그릇에 담으면 결정체는 산산이 깨지고, 혼란스럽게 보인다. 놀라운 의미이다. 의식은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고 몸의 대부분은 물이 차지하고 있음으로 생각의 균형이 무너진다면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道家의 聖人은 도덕적 논쟁, 혹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논쟁,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에 대한 논쟁에 가담하지 않는다. 그저 변방 노인처럼 무엇이 좋거나 나쁜지, 무엇이 옳거나 그른지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알지 못한다. 특히 《淮南子》의 이야기는 적어도 도덕과 관계없는 의욕이다. 도덕적 구별은 다른 차이들만큼이나 반전을 일으키기 쉽다. 도덕적인 논쟁에서 가능한 최종 판단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판단을 삼가는 쪽이 더 현명하다. 좋게 보이는 행동은 아마도 나쁜 결과를 가질지도 모르고, 나쁘게 보이는 행동이 좋은 결과를 가질지도 모른다. 오늘날 참으로 취했던 것이 내일 거짓으로 드러나고, 오늘날 거짓으로 보였던 것이 내일 옳게 된다. 어쨌든 두 평가는 모두 상호의존적이다. 두 평가 모두 두 가지 입장을 구성하는 현실의 동등한 부분이다. 다른 것의 희생에서 하나를 고립시키는 것은 ‘전체 그림을 얻는 것’을 못하게 함을 의미한다.
도덕적 논쟁에서 성인의 무관심은 더 중요한데, 도덕이 아주 덧없기 때문이다. 도덕적 차이는 갈등으로 쉽게 전이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은 종종 전쟁은 아닐지라도, 言爭뿐만 아니라 폭력과 무력을 사용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도덕적인 구별은 잠재적으로 위험하다. 비인간적인 자연에서는 어떠한 도덕도 찾아볼 수 없다. 겨울은 여름보다 더 ‘악하지’ 않고, 그저 더 추울 뿐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영역에서 도덕적인 구별들이 쉽게 敵對的으로 바뀔 수 있다. 따라서 相補的인 구별이 적대적으로 될 수 있다.
도덕은 이렇게 사회적 안정에 중요한 위협을 야기한다. 성왕이 편파적일 경우에, 그들은 사회의 균형을 깨뜨리고 스스로 적대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덕적인 판단을 그친다. 옳고 그름에 대한 도덕적 소통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통치자들은 이러한 소통이 폭력적으로 바뀌지 못하게 예방한다. 그들의 중립성이 당파적인 투쟁을 방지한다.
성왕에 관하여 제8장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인은 편파적이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다른 모든 것들, 대중적인 사람들은 일정한 위치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 예를 들어 그들은 행운은 좋고 불운은 나쁘다고 말한다. 온건한 성인은 무관심한 채로 있는, 그러므로 다른 것이 논쟁을 초래하는 사회적 분열이 되지 않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며,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비천한 곳에 자리 잡는다.
사람들은 비천한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道에 가깝다.
도는 ‘無’에 해당하고 물은 ‘有’에 해당한다. 〈무에 해당하는 도를 유에 해당하는 물에 비유하여 말하였지만 ‘무’는 ‘유’가 아니기에〉 그래서 ‘가깝다’고 한 것이다.
〈물은 도처럼〉 거할 때에는 땅처럼 낮은 데에 처하기를 잘하고, 마음 쓸 때에는 그윽이 깊게 하기를 잘하고, 사물과 더불어 할 때에는 어질게 행하기를 잘하고, 말할 때에는 믿음직스럽게 하기를 잘하고, 바로잡을 때에는 다스리기를 잘하고, 일을 할 때에는 능숙함을 펼치기를 잘하고, 움직일 때에는 때를 맞추기를 잘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않으니 이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여기의 뛰어난 장점들은〉 물이 모두 이러한 도에 상응한다는 것을 말한다.
9.
持而盈之(지이영지) :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보다
不如其已(불여기이) :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좋다
?而銳之(췌이예지) : 너무 날카롭게 벼리고 갈면
不可長保(불가장보) : 쉽게 무디어집니다
金玉滿堂(금옥만당) : 금과 옥이 집에 가득하면
莫之能守(막지능수) : 이를 지킬 수가 없다
富貴而驕(부귀이교) : 재산과 명예로 교만해짐은
自遺其咎(자유기구) : 재앙을 자초한다
功遂身退(공수신퇴) : 일이 이루어졌으면 물러나는 것
天之道(천지도) : 하늘의 길이다
9장 겸허한 삶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보다 적당할 때 멈추는 것이 좋다. 칼을 너무 날카롭게 벼리면 쉽게 무뎌진다. 금과 옥으로 집을 가득 채우면 불안함이 밀려온다, 교만과 자만이 가득하면 자신을 벼랑에서 구해 줄 이 아무도 없다. 일을 다 하였으면 물러나는 것이 바로 하늘의 길이다. |
도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창조하면서 어느 정도 충분한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또한 이 조건 없는 공급이 적당할 때에 멈춘다는 것을 우리는 내면에서 감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도가 얼마나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 도는 겸손의 원리 속에서 아름답게 균형을 이룬다. 도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이 온화한 겸손은 나무, 벌, 그리고 모든 생명체에게 어느 정도가 충분한지를 안다. 도는 넘치지 않는다. 창조의 무한한 능력을 과시할 필요가 없기에 도는 적당한 때에 정확히 멈춘다.
넘치는 것이 결국 결핍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소유, 쾌락, 교만 등의 행위들로 가득 찬 삶은 도가 아닌 에고를 따르는 삶임을 알게 된다. 겸허한 삶은 언제 멈추고, 언제 놓아 보내고, 언제 우리 노력에 대한 열매를 즐겨야 할지를 안다. 따라서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재산, 더 강한 권력을 쫓는 것은 이미 잘 갈아놓은 칼을 또 다시 숫돌에 가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칼을 가는 것은 날카로운 칼을 오히려 무디게 만들 뿐이다. 노자는 재산을 모아 축적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소중한 삶을 낭비하고 자꾸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하게 한다.
그리고 노자는 겸허한 삶을 실천하라고 이른다. 부와 명예를 가지려고 한다면, 최소한 그것들을 추구하는 단조로운 길에서 물러나 도를 실천하며 살아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데 중독된 이 세속적인 세상과 반대되는 하늘의 길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을 간직하라.
이 다짐을 마음속에 간직하라. 비록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부족하다고 소리칠 테지만 말이다. 할 일을 다 하면 한 걸음 물러서라. 겉치레와 무절제한 소비 대신 검소한 생활로 실천하라. 서구사회, 그중에서도 미국의 비만 문제는 바로 이 도덕경 9장의 단순한 지혜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배고프면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멈춰라. 계속해서 더 많이 소유하면 더 행복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의 덫에 걸린 것이다. 성공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신을 과도하게 치장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은 적당할 대 멈추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는 도의 지혜를 떠 올려보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은 그냥 충분한 것이 아니라 도의 완전함과 일치하는 것이다.
에고의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하고 있는 일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라.
에고는 당신이 한 일에 대해서 더 많이 보상받기를 원한다. 재산을 축적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매 순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 없앨 수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당신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 생각하지 말고 바로 그 일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라. 이 물질만능의 세상에 당신을 태어나게 한 무한한 지혜인 도를 믿어라.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유혹이 당신을 찾아오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도를 생각하라. 이 창조의 원리는 할 일을 다 하면 거기서 멈춰야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노자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길이다.” 왜 굳이 하늘의 길을 거스르려고 하는가?
하늘에 대해서 모든 것은 ‘하늘 아래[天下]’에 있다. 그러므로 천하는 종종 ‘世界’로 번역된다. ‘세계’는 ‘하늘 아래’ 기능하는 森羅萬象의 구체적 영역, 즉 문자 그대로 해와 달의 운행과 나란히 밤에 어둡고 낮에 밝은 모든 것이다. 하늘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분리될 수 없다. 인간 사회는 물론 ‘하늘 아래’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는 〈불가피하게〉 밤에는 자고 낮 동안에 일을 했다. 하늘 아래에 있으면서 사람들은 그에 맞추어서 행동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다른 고대 중국철학 텍스트와 비슷하게 《老子》는 일반적으로 하늘 아래에 있을 때 하늘의 운행을 따를 것을 추천한다. 그것은 특히 하늘의 역학을 거스르는 어떤 종류의 행동을 그만두게끔 한다. 그러한 행동들은 실패하기 마련이거나 적어도 수고스럽거나 소모적이다. - 궁극적으로 그것은 효과적일 수 없다. 가장 효율적인 행동 방식은 하늘과 어울리게 행동하는 것이다. 하늘에 짝한다는 것은 上古시대의 이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이 함축적으로 암시하는 바는 사람이 이렇게 소박하지만 가치 있는 전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하늘의 질서는 단지 거기에 있다. - 그리고 늘 있어왔다. 인간이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은 제59장에서 지적하듯이 ‘아끼면서’ 행동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질서를 다스리기 위해선 하늘의 道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 하늘 그 자체는 ‘아끼면서’ 행동하고 그래서 하늘을 ‘섬기는’ 것은 그에 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은 ‘가야 할 곳’에 대해 어떤 특정한 목적도 어떤 특정한 의도도 갖지 않는데, 동일한 것이 왕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늘은 사사롭지 않다. 사사로움이 제거될 때, 사물은 부드럽게 진행되어 나간다. 제9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지고 있으면서 더 채우고자 하는 것은 그만두느니만 못하다.
持란 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것을 말한다. 이미 자신의 덕을 잃지 않았는데 또 그것을 채우고자 하니 세력이 반드시 기울고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래서 “그치느니만 못하다.”고 한 것이다. ‘不如其已’는 오히려 덕이 없고 공이 없는 것만도 못함을 이른다.
〈뾰족한 것을〉 다듬어서 그것을 더 날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은 오래도록 보전할 수 없다.
이미 끝을 다듬어서 뾰족하게 하였는데 다시 그것을 날카롭게 하여 더욱 예리하게 하면 세력이 꺾여 위축될 것이니, 그래서 “오래도록 보전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金과 玉이 집안을 가득 채우면 능히 그것을 지킬 수가 없고,
그치느니만 못하다는 뜻이다.
부유하고 귀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된다.
오래 보전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자신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사계절이 번갈아 운행하니 공이 이루어지면 옮겨간다.
10.
載營魄抱一(재영백포일) : 혼백을 하나로 감싸안고
能無離乎(능무리호) :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할 수 있겠는가
專氣致柔(전기치유) : 기에 전심하여 더없이 부드러워지므로
能?兒乎(능영아호) : 갓난아이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滌除玄覽(척제현람) :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닦아
能無疵乎(능무자호) : 티가 없게 할 수 있겠는가
愛民治國(애민치국) :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能無知乎(능무지호) : “무위”를 실천할 수 있겠는가
天門開闔(천문개합) : 하늘 문을 열고 닫음에
能無雌乎(능무자호) : 여인과 같을 수 있겠는가
明白四達(명백사달) : 밝은 깨닭음 사방으로 비춰 나가
能無爲乎(능무위호) : 무지의 경지를 이룰 수 있겠는가
生之畜之(생지축지) : 낳고 기르시오
生而不有(생이불유) : 낳았으되 가지려 하지 마시오
爲而不恃(위이불시) : 모든 것 이루나 거기 기대려고 하지 마시오
長而不宰(장이불재) : 지도자가 되어도 지배하려 하지 마시오
是謂玄德(시위현덕) :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한다
10장. 하나 되는 삶 몸과 정신을 하나로 감싸 안고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할 수 있는가? 기운을 부드럽게 하여 갓난아이처럼 될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음에 있어 여인과 같을 수 있는가? 자만심 없이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가? 생명을 낳고 기르되 가지려 하지 말고 일을 하되 공을 인정받으려 말고 이끌되 조정하고 지배하지 말라. 이러한 힘을 마음에 새긴 사람이 이 명예 도를 가져온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덕이다. |
노자는 이 땅에 존재하는 삶의 역설적인 성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몸과 정신처럼 겉보기에 상반된 것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될 육체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도의 무한함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불안전한 자세로 서서 완전한 세상을 본다. 또한 완전무결하게 보이는 모든 것 안에서 그것의 모순된 진실을 알아 볼 수 있다. 굳어 있고 아픔을 느끼고, 관절통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지는 어른의 몸이 갓 태어난 아이의 그것처럼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워질 수 있을까? 전사처럼 일하면서 여전히 여성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 모든 일이 가능하고도 자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에고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아를 잘 다스리고 도에 맞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도덕경 10장은 이중성이라는 환상이 더욱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세상에서 ‘하나로 껴안는’ 힘을 삶의 방식으로 따르라 권한다. 같은 주제로 쓰여진 하피즈의 시를 읽어 본다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유혹하는
저 밝게 빛나는
하나만이
내 심장을 훔칠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둘’이라는 말을 비웃는
완전한 하나만이
너에게 사랑을 알려줄 수 있다.
우리의 근원은 결코 나뉠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완전한 ‘하나됨’인 도를 거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에 대한 믿음을 거두고 그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도를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노자가 2,500년 전의 관점으로 우리에게 들려주는 충고이다.
타인의 내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하나 됨을 끌어안으라.
이질적이거나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고 그들을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라. 이런 생각은 자만심을 없애고 노자가 말한 덕과 하나로 어우러지게 해줄 것이다. 에고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벗어나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하나 됨과 모든 것을 끌어안는 도를 느낄 수 있다.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집단을 비판하고 싶을 때마다 내면의 깨달음을 실천하라. 단절과 우월감이 들도록 만드는 뉴스를 볼 때야말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뉴스에 등장하는 사람 중 한 명을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라. 누군가를 미워해야 하는 상황들 속에서 이러한 부정적인 판단들을 멈추도록 노력하라. 그리고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라. 갖가지 모습의 생명체가 되어 이렇게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실천해 보자. 나무나 풀이 되어보라. 이러한 관찰을 통해 발견하는 도에 주목하면서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창조물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라. 우리는 하나이다.
가진 것에서 즐거움을 누리되 집착하지는 마라.
재산과 성취를 통해 얻은 신분 따위는 잊어버려라. 단지 행하고 그 흐름 자체를 지켜보면서 당신의 하는 일, 그리고 당신의 삶으로 흘러들어 오늘 모든 것을 즐겨라. 당신은 아무것도, 아무도 소유할 수 없다. 한 번 모인 것은 받시 흩어지게 마련이다. 한 번 손에 들어왔던 것은 다시 당신을 떠나 다른 사람의 것이 된다. 그러나 한 걸은 물러서서 이 물질의 세계를 지켜보라. 이렇게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은 소유에 대한 집착을 느슨하게 해주는 동시에 당신을 환희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 놓아주는 과정 속에서 당신은 도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
첫 번째 세 문장은 신체 修養의 방법을 논하고 있으니, 이는 초기 道敎에 그러한 수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 해도 嬰兒의 형상이 언급되는 것에 주목해보는 것은 재미있다. 제20장, 제28장 그리고 제55장과 같이 이 장에서도 성인은 영아를 모방하고자(emulate) 노력한다. 이러한 상태는 자의식으로부터 자유롭고, 완전히 자발적이며(spontaneous), 어떠한 의도도 개입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養神(nourishing the soul)’과 ‘包一(embracing unity)’ 같은 도가적 수행은 갓난아이와 같은 상태에 도달하곤 했을 듯하다.
이어지는 글은 성격상 보다 정치적이다. 명백히 신체 수양은 성인 군주가 되는 데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되었다. 서로가 꼬여 있는 신체 수련[治身]과 통치[治國 혹은 主術]를 상관적으로 이해하는 사상은 先秦儒家에서도 나타나며, 《老子》 제13장과 제54장 또한 그것을 引喩하고 있다. 다섯 번째 문장에 나오는 天門과 여성성의 형상은 이 장을 제6장과 연관시켜 준다. 성인 군주는 여성적 자질에 근거하여 다스리며 아마도 자연의 재생산 과정의 열리고 닫힘에서 그 비어 있는 문의 지위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늘 머무는 곳에 살면서 하나를 끌어안아 능히 떠나지 않을 수 있는가?
載는 거처하다[處]는 뜻이다. 營魄은 사람이 늘 머무는 주거지이다.
一은 사람의 ‘참된 본성[眞]’이다.
〈이 구절은〉 사람이 능히 늘 머무는 집에 거쳐하면서 하나를 끌어안고 정신을 맑게 하여 〈집과 하나를〉 항상 떠나지 않을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손님으로 와서 〈그에게 복종할 것〉임을 말했다.
氣를 맡겨두고 부드러움을 이루어 능히 갓난아기처럼 될 수 있겠는가?
專은 맡긴다[任]는 뜻이다. 致는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다[極]는 뜻이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뜻을〉 말한 것이다.
자연스러운 기운(숨결)에 맡겨 지극히 부드러운 조화가 완벽한 상태에 도달하여 갓 태어난 아이와 같이 어떠한 욕망도 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만물이 온전해져서 〈본래의 참된〉 본성을 얻게 될 것이다.
현묘한 거울에 낀 〈사악함과 꾸밈을〉 깨끗이 닦고 제거해내어 능히 흠이 없게 할 수 있는가?
玄은 만물의 궁극이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은 뜻을〉 말한 것이다.
〈만약 군주가〉 능히 사악하고 꾸며낸 것을 깨끗이 닦고 제거해내어 완벽한 거울과 같은 〈상태에〉 이를 수 있어 어떤 외물도 그 밝음을 훼손하여 그 정신에 흠이 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결국에는 현묘함 그 자체와 같아지게 된다는 뜻이다.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꼼수를 쓰지 않을 수 있는가?
〈군주가〉 술책을 부려 성공을 추구하고 술수를 부려 숨겨진 것을 찾고자 하는 것이 ‘꼼수’이다.
전혀 더럽혀지지 않은 현묘한 거울 같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노자》에서 말하는〉 “성스러움을 끊는다.”는 것과 같다.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꼼수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노자》가 말하는〉 “앎을 버린다.”는 것과 같다.
군주가 꼼수를 쓰지 않을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백성들이 그를 피하지 아니하고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과 같이 할 수 있는가?
‘하늘의 문’이란 하늘 아래 모든 만물이 거쳐서 나오는 곳이다. ‘열림과 닫힘’이란 천하가 다스려질 때와 천하가 혼란스러울 때이다.
그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하늘 아래 모두에게 두루 통하여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힌다.”고 한 것이다.
암컷은 응하기만 할 뿐 먼저 울지 않고, 따르기만 할 뿐 먼저 나서지 않는다.
〈이 문장이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군주가〉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데 능히 암컷과 같이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손님이 되어 복종하고 거처가 저절로 편안해질 것이다.
사방에 두루 밝으면서도 능히 함이 없게 할 수 있는가?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군주가〉 사방에 두루 밝아 분간하지 못함이 없고 혹하는 게 없어 무언가를 가지고서 함이 없게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만물이 교화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 37.1-3에서〉 이른바 “도는 늘 함이 없으니 侯王이 만약 이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저절로 교화될 것이다.”라고 한 말의 의미이다.
〈도는 만물을〉 낳고
〈도가〉 만물의 근원을 막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물을〉 길러주되
〈도가〉 만물의 본성을 속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낳으면서 〈그 공로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하면서도 〈지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장성케 하면서도 주재하지 않으니, 이것을 현묘한 덕이라 한다.
〈도가〉 만물의 근원을 막지 않으면 만물이 스스로 살아가게 되니, 어찌 〈군주의〉 공이 있겠는가?
만물의 본성을 속박하지 않으면 만물이 저절로 가지런해지니, 어찌 의존함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고 풍족해져서 내가 주재하여 이루지 않았으니, 〈만물에 베풀어진〉 덕은 있는데 그 주재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신비롭다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무릇 신비한 덕을 말한 것은 모두 덕은 있으나 그 주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윽하고 어두운 곳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11.
三十輻共一(삼십폭공일) : 설른 개 바퀴살이 한 군데로 모여 바퀴통을 만드는데
當其無(당기무) :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有車之用(유차지용) : 수레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埴以爲器(연식이위기) :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當其無(당기무) :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有器之用(유기지용) : 그릇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鑿戶?以爲室(착호유이위실) :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當其無(당기무) : 그 가운데 아무것도 없음 때문에
有室之用(유실지용) : 방의 쓸모가 생겨납니다
故有之以爲利(고유지이위리) : 그러므로 있음은 이로움을 위한 것이지만
無之以爲用(무지이위용) : 없음은 쓸모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11장 비움으로 사는 삶 하나의 바퀴통에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데 그 가운데 빈 구멍이 있으므로 수레의 쓸모가 생겨난다. 흙을 빗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 빈 공간이 있으므로 그릇의 쓸모가 생겨난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으므로 방의 쓸모가 생겨난다. 있음의 유용함은 없음에 달려있다. |
노자는 종종 무시되는 ‘텅 빔’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퀴통의 중심에 비어 있는 구멍, 그릇 내부의 빈 공간, 방의 한 쪽 공간 등의 이미지를 통해 그는 이 개념을 설명한다. 그리고 “있음의 유용함은 없음에 달려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달리 말해 각각의 나뉘어진 부분들은 그 중심이 있어야 유용해진다. 노자는 우리 존재 중심에 자리잡은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의 의미를 되새기며 살라고 한다. 즉 삶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존재함’에 깊이 생각하면서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역설적인 개념을 잘 살펴보자. 당신은 마치 거푸집처럼 모양을 유지해 주는 피부와 뼈, 장기 그리고 피의 흐름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신체 기관들 속에는 분명 ‘나’라는 존재를‘남’과 구분 짖는 본질이 있다. 그러나 육체를 분해해 펼쳐놓고 그것을 당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신체 부분들을 하나로 모아놓는다 해도 그 유용함은 ‘존재하지 않음’, 즉 노자의 표현대로 ‘없음’에 있다.
지금 있는 방의 벽고 천장을 따로 분리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물건들과 함께 일렬로 늘어놓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그 중심의 빈 공간이 없다면 다른 요소들이 그대로 존재한다고 해도 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흙으로 만든 화분은 그 흙이 들어 있는 빈 공간 없이는 화분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외장재가 둘러싸고 있는 내부의 공간이 없다면 집으라고 할 수 없다. 음악을 음악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음표와 음표 사이에 있는 빈 공간이라고 말했다. 만약 미움이 없다면 음악은 그저 끊없이 이어지는 소음에 불과하다.
당신은 이 작은 깨달음을 일상에서 경험하는 일들에 적용해 볼 수 있다. 당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무를 나무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껍질, 가지, 뿌리, 잎사귀 그것도 아니라면 열매? 이 모든 것들은 노자가 말한 ‘있음’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것들만으로는 나무가 될 수 없다. 여기에 더해 나무가 나무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없음’이다. 이것은 당신의 오감을 교묘히 벗어나는, 느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삶의 기운이다. 당신은 나무를 자르고 나누어 그 세포 속까지 끝없이 살펴볼 수는 있겠지만 결코 그것을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중심이야말로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본질이다.
당신의 본질인 이른바 ‘없음’에 주의를 기울려보자. 텅 진 그 공간은 모든 창조를 책임지는 ‘눈에 보이지 않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신 내면의 자아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은 바로 순수한 사랑과 어짊이다. 내면에 ‘존재하지 않은 공간’은 당신에게서 따로 떨어져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 신비로운 중심을 찾아 탐험하라. 육체적인 자아에 둘러싸인 공간, 그곳으로부터 당신의 모든 이해와 생각이 흘러나온다. 긍정적이려 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대신 단순히 당신 존재의 본질에 섬세한 관찰을 기울여라. 도의 길은 억지로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내면의 중신이 그 쓰임새를 작동시키도록 놓아두라. 불현 듯 떠오르는 생각들이 당신 육체에 들어 왔다가 다시 떠나도록 두라. 마치 들숨과 날숨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라.
매일 침묵의 힘을 실천하라.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명상은 내면의 빈 공간과 당신을 연결함으로써 환희를 느끼도록 돕는 훌륭한 도구다. 모든 생각이 흘러나오는 내면의‘공간 없는 공간’을 더 많이 찾아라. 깨끗하고 순수하며 사랑과 조화를 이룬 내면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라. 성인과 우리들의 차이는 성인들만이 성실하고 순수한 믿음을 갖고 있고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 아니다. 성인들은 오직 그들의 본질에 따라서 맡은 바를 행한다. 이것이 명상이나 침묵하는 방법을 배우는 주된 목적으로 본질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이끌고 당신이 텅 빈 공간 속에서 살아가도록 허락한다.
제11장은 《老子》의 유명한 장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장은 바퀴, 그릇, 방, 창문은 물론 문 등의 형상을 통해 道의 일정한 기능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기본적으로는 道가 갖는 효용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달리 말해서 이런 사례들은 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 통해 최고의 덕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板本에 따른 차이는 크게 없으나 竹簡本에는 이 장이 빠져 있다.
빈 중심과 가득 찬 주변으로 이루어진 구조(the structure of an empty and a full periphery)는 물질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는 물론이고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기능한다. 성인은 자신의 마음을 비움으로써 스스로를 다스린다고 가정되는데, 사회의 중심에 있는 성인 군주는 함이 없고 그럼으로써 국가가 잘 기능하도록 한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언제나 비어 있음 또는 없음이 있음과 가득 차 있음과 나란히 간다는 점이다. 비어 있음 혼자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심지어 그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이란 중심이 되게 하는 주변을 필요로 한다. 도가는 일방적으로 비어 있음 또는 無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도의 한 가지 또는 중심적인 측면일 뿐이며 그것만을 분리하여 말할 수 없다. 비어 있음과 가득 차 있음이 함께해야 이로움을 낳고 완벽하게 사용될 수 있다.
王弼은 다양한 비유적 표현이 등장하는 《老子》 經文에 비해 두 가지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 하나는 有가 인간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려면 無에 의지하거나 혹은 무 자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용되는 無는 실질적으로는 비어 있음[虛]의 의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왕필의 논리는 大衍之數에도 해당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수적인 의미는 ‘적은 것이 많은 것을 다스리고 거느린다.[以寡統衆]’는 사상과도 연결된다.
서른 개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이는데 그 바퀴통이 비어 있기에 수레의 쓰임이 있다.轂
바퀴통이 서른 개의 바퀴살을 거느릴 수 있는 것은 〈그 바퀴통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 빈 곳으로 모든 바퀴살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거느릴 수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니 그 그릇 속이 비어 있기에 그릇의 쓰임이 있고,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니 그 방 속이 비어 있기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러므로 有가 이로움이 되는 까닭은 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
나무와 찰흙과 벽으로 〈수레와 그릇과 방〉 세 가지를 완성하는 것은 모두 無(비어 있음)를 쓰임으로 삼아서이다.
〈이것은〉 有가 이로움이 되는 까닭이 모두 無에 의지하여 쓰임이 됨을 말한 것이다.
12.
五色令人目盲(오색령인목맹) : 섯 가지 색깔로 사람의 눈이 멀게 되고
五音令人耳聾(오음령인이롱) : 다섯 가지 음으로 사람의 귀가 멀게 되고
五味令人口爽(오미령인구상) : 다섯 가지 맛으로 사람의 입맛이 고약해진다
馳騁?獵令人心發狂(치빙전렵령인심발광) : 말달리기 사냥하기로 사람의 마음이 광분하고
難得之貨令人行妨(난득지화령인행방) : 얻기 어려운 재물로 사람의 행동이 그르게 된다
是以聖人爲腹(시이성인위복) : 성인은 배를 위하고
不爲目(불위목) : 눈을 위하지 않는다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 : 그러므로 후자는 뒤로하고 전자를 취한다
12장 내면의 신념에 따른 삶 다섯 가지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다섯 가지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한다. 다섯 가지 맛은 사람의 입맛을 잃게 한다. 말 달리고 사냥하는 것은 사람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 얻기 힘든 재물을 위해 애쓰는 것은 성장을 가로막을 뿐이다. 성인은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내면의 눈을 믿는다. 그는 만물이 오고 가도록 내버려둔다. 그는 드러나는 것이 아닌 내면의 것을 취한다. |
노자는 우리가 감각적인 즐거움과 경험에 너무 많은 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감각적인 것에만 몰두하면 결국 환상에 불과한 외형 중심의 세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모든 것은 오고 가기 마련이므로 물질이 중심인 세상의 본질은 잠시 동안의 덧없는 상태일 뿐이다. 우리가 사물의 표면에 드러난 색깔에만 집착하면 결국 그 껍데기 너머의 것은 볼 수 없다. 온 신경을 피조물에만 기울일 때, 우리는 창조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창조 행위 너머의 것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창조성을 잃는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은 서로 다른 감각의 영역이다. 만약 감각의 만족이 삶의 목표라고 믿는다면 삶은 노자가 “말 달리고 사냥하는 것” 이라고 말한 그것으로 인해 황폐해질 것이다.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노력함에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생각에 당신은 평화와 만족에 결코 이를 수 없다. 노자는 이런 무모한 추구가 끝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 말한다. 성인이나 현인처럼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세상을 바라보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세상에 살면서 그와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성인은 물질적인 유혹이 아닌 내면의 신념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오감을 현혹하는 것들을 멀리하고,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도 고요히 즐긴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성인은 자신의 무한한 본질을 깨닫고 세상의 겉모습이 덧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저 잠시 거쳤다 떠나는 우리의 육신도 이런 세상의 일부일 분이다. 겉모양을 쫏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알기에 부와 명성에 유혹당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보라.
우리 내면에서는 장미가 좋은 향기와 부드러운 꽃잎을 가진, 한 송이의 꽃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 ‘nowhere'를 ’now here'로 바꾸는 것처럼 꽃을 피우는 기적을 일으키는 그 창조적인 힘을 느껴보라. 아주 작은 씨앗에서 아름다운 꽃이라는 걸작을 피워 올리는 창조의 정수를 경험하라. ‘아무것도 없음’ ‘영혼의 세계’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공간에서 그 씨앗이 비롯되었다는 것을 명심하라. 꽃의 색과 향기 그리고 몸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 영혼을 보라. 초자연적인 시선으로 모든 생명을 바라보라. 당신은 물질적인 선취를 추구하는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본질은 이 물질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계속 더 많이 축적하라고 부추기는 세상의 압박에서 벗어나라.
물질적인 성취를 좇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그 길 위에서 지치게 놓아두라. 대신 당신은 그 길에서 한 걸음 물러나 마음을 평온히 하는 방법을 배워라. 외부에 관심을 갖는 대신 그것이 안쪽을 향하게 하라. 더 많이 바라고, 축적하고자 하는 외부의 기준을 따르지 말고 정의와 감사의 마음을 내면의 기준으로 삼아라. 아름다운 풍광을 보거나 매혹적인 음악을 듣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감각적인 즐거움 안에 자리한, 꽃을 피우는 것과도 같은 기적을 생각하라. 가고 옴의 덧없는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말고 모든 일이 순서대로 흐르게 하라.
제12장은 東洋哲學의 욕망과 감각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 드러나는 장이다. 특히 道家的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감각을 하게 될 때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禁慾主義와는 상관없다. ‘五色’ 등으로 표현되는 색깔과 음조, 그리고 맛과 같은 영역을 완벽하게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람이 그것들을 탐닉하게 되면 그것들을 향유할 능력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사람이 늘 향료가 풍부한 요리만 먹으면 나중에는 더 많은 향료를 넣은 요리라야 조금이라도 맛을 느끼게 되는 것과 같다. 이는 다른 감각에 대해서도 똑같다. 이와 반대로 성인은 맛을 간직하되 無味함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사람이 자그마한 자극조차 알아차릴 수 있으려면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지켜서 미묘한 차이에도 민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제10장에서 말하듯 갓 태어난 아이의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하게 말달리기 또는 사냥이나 얻기 어려운 재화를 구하려는 것과 같은 자극적인 활동은 사람의 마음을 지치게 한다.
성인 군주는 이러한 측면의 인간적인 성격을 잘 고려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감각적인 것을 너무 많게 혹은 과다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성인 군주는 백성 모두를 만족스럽게 해주어야만 한다. 즉 배는 채워주어야 하지만 사치스러운 물품은 보이지 않게 한다. 사람들의 감정, 야망 또는 마음을 자극하게 하는 모든 것은 피해야 한다. 도가적 국가는 확실히 소비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일반적인 만족을 위해서 구경거리나 흥미거리는 사회의 평화를 해치지 않도록 금지된다.
제12장은 저본, 河上公本, 帛書本에 큰 차이가 없고, 竹簡本에는 없다.
다섯 가지 〈아름다운〉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音〈으로 된 화려한 음악〉은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다섯 가지 맛〈의 온갖 산해진미〉는 사람의 입맛을 상하게 한다.
말 달리며 들판에서 사냥질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
爽은 어긋나서 잃어버린다는 뜻이다. 입이 맛보는 작용을 잃었기에 ‘상했다’고 한 것이다.
대체로 귀와 눈과 마음과 입은 모두 저마다의 본성을 따른다. 그런데 타고난 性命을 따르지 않아 도리어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해친 격이다.
그래서 ‘눈이 멀었다’, ‘귀가 먹었다’, ‘입맛을 버렸다’, ‘마음이 미쳤다’고 한 것이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실을 잘못되게 한다.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이 가는 바른길을 막는다. 그래서 사람의 행실을 잘못되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배를 위하는 사람은 外物로써 자기 자신을 기르지만, 눈을 위하는 사람은 외물로써 자신을 부리게 만든다.
그래서 성인은 눈을 위하지 않는다.
13.
寵辱若驚(총욕약경) : 수모를 신기한 것처럼 좋아하고
貴大患若身(귀대환약신) : 고난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기십시오
何謂寵辱若驚(하위총욕약경) : 수모를 신기한 것처럼 좋아한다 함은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寵爲下(총위하) : 낮아짐을 좋아한다는 뜻이다
得之若驚(득지약경) : 수모를 당해도 신기한 것
失之若驚(실지약경) :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신기한 것
是謂寵辱若驚(시위총욕약경) : 이것을 일러 수모를 신기한 것처럼 좋아한다고 한다
何謂貴大患若身(하위귀대환약신) : 고난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긴다 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吾所以有大患者(오소이유대환자) : 고난을 당하는 까닭은
爲吾有身(위오유신) :내 몸이 있기 때문
及吾無身(급오무신) : 내 몸이 없어진다면
吾有何患(오유하환) : 무슨 고난이 있겠는가
故貴以身爲天下(고귀이신위천하) : 내 몸 바쳐 세상을 귀히 여기는 사람
若可寄天下(약가기천하) : 가히 세상을 맡을 수 있고
愛以身爲天下(애이신위천하) : 내 몸 바쳐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
若可託天下(약가탁천하) : 가히 세상을 떠맡을 수 있을 것이다
13장 독립된 마음으로 사는 삶 칭찬을 들어도, 욕을 들어도 모두 경계하라. 높은 자리는 사람을 상하게 한다. 왜 칭찬을 들어도, 욕을 들어도 모두 경계하라는 것인가? 칭찬을 구하는 것은 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얻어도 경계하고, 그것을 잃어도 경계하라. 높은 지위는 왜 사람을 상하게 하는가? 우리가 많은 문제를 겪는 것은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자아가 없다면 무슨 문제가 생기겠는가? 사람의 참 자아는 영원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육신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곧 죽을 것이라 믿는다. 만약 우리에게 육신이 없다면 어떤 재앙이 일어날 수 있을까? 자신을 만물과 똑같이 보는 사람은 가히 세상을 맡을 수 있다. 자신을 만인과 똑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천하의 스승이 될 수 있다. |
13장의 핵심 메시지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타인의 의견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독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들이 우리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우리에 대한 그들의 평가를 우리 자신의 생각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몹시 괴로워진다. 남들의 지지와 찬성에 영합하는 것은 도의 방식이 아니다. 사회적인 지위를 추구하게 되면 독립적인 마음을 향해 자연스럽게 흐르던 신성한 에너지는 멈춘다. 당신은 자신만의 독특한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 본성을 통해 도의 본질을 믿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근본적인 존재, 즉 독립적인 마음을 강하게 만드는 ‘타고난 자신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라.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남들이 선호하는 지위나 고상한 직책을 맹목적으로 추구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외부 신호에 의존하는 것이다. 도는 어떤 일에 대해 강요하거나 간섭하는 법이 없다. 각자 고유의 방식으로 자연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내도록 내버려둘 뿐이다. 당신이 하려는 일에 어떤 허락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완벽한 조화에 따라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어떤 반대에 부딪치게 되더라도 그것 역시 조화의 한 부분이다. 노자는 칭찬을 추구하는 것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경계할 일이라고 지적한다.
만약 칭찬을 받게 되면 칭찬이 주는 외부적 메시지의 노예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 당신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만드는 셈이다. 만약 반대에 부딪친다면 그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더욱 강하게 시도할 것이고 이 경우역시 자신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힘을 따르게 된다. 두 가지 경우 모두 독립적인 마음이 흐르는 도의 길과는 정반대인, 의존적인 마음을 키우는 결과를 불러온다. 지위에 대한 욕망과 에고야 말로 세속적인 자아가 불러온 문젯거리들이라고 주장한다. 도의 길은 영원한 본성을 깨닫고 자아와 육체로부터 한 걸음 걸어 나온 것이다. 에고가 사라자면 모든 문제도 함께 사라진다. 반대로 에고가 커지면 문제도 덩달아 커지게 마련이다.
당신 내면의 본성을 믿으라.
당신이 삶에 대해 품은 모든 열정적인 생각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본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다. 강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당신과 달라서 불안한 마음이 든다면 “칭찬을 구하는 것은 겪이 떨어지는 것이다”라는 노자의 말을 떠올려라. 그러면 그가 참 자아로 향하는 길을 알려줄 것이다. 당신은 그저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님을 기억하라.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견은 자신의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 또한 그들의 육체가 전부는 아니다. 그들의 칭찬과 동의를 구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전부라는 환상을 더욱 부채질할 뿐이다.
노자가 13장에서 말한 사람이 되라.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다짐하라. “나는 이 세상의 수호자이며, 이 세상의 스승이 되기에 적합한 사람이다.” 당신은 사랑이 바탕이 된 독립적인 마음을 통해 만물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자아를 따라 산다면 당신은 정신적인 스승이자 수호자가 될 것이다. 당신의 세속적인 자아가 찾아 헤매던 동의와 칭찬은 더 이상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 지지가 있어야만 삶이 유지될 수 있다는 의존적인 마음도 어느덧 사라질 것이다.
제13장은 두 가지 道家的 주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첫째는 그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호의나 그가 당할 수 있는 어떠한 치욕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인 군주의 감정적 平靜心(the emotional equanimity)이다. 두 번째는 성인 군주가 스스로의 몸을 돌보는 것이다.
《老子》에 따르면 성인 군주는 어떠한 호의도 환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자신을 치우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누군가로부터 호의나 선물을 받는 것은 일종의 의존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를 받는 것은 복종을 낳거나 빚진 관계가 되도록 한다. 또한 호의가 거두어지면 이것은 또 다른 의존을 하게 만든다. 성인 군주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치우치지 않게 다룬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그는 어떠한 호의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따라서 누구에게도 특별하게 대하지 않는다. 치욕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논리가 추론될 수 있다. 성인은 개인적 인간적으로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人性이 비어 있는, 즉 개인적인 감정이나 성향 또는 욕구가 없기 때문이다. 성인은 선물로 인해 우쭐해하지 않고 공격당했다고 허를 찔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군주가 돌봐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이다. 정치 권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인 방식으로 군주가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은, 그를 국가의 이상적 군주로 만들어준다. 이러한 논리는 이단적 사상가 楊朱를 생각나게 하는데, 그는 천하에 이익이 된다 해도 자신의 터럭 하나 뽑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몸을 온전히 하는 것이야 말로 道와 하나가 되었다는 표시로 보인다. 몸은 잘 기능하는 자연적 과정이며, 따라서 우리가 몸을 잘 돌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자연 또는 도와 하나가 되는 기술을 완성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신체적 수련(bodily cultivation)을 강조하는 도교적 실천과 종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노자》의 다른 곳 예를 들어 제10장과 제54장은 이 주제에 관해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은 利己的이 되라는 것과 무관하며 정확하게 그 반대로서 말하자면 권력이나 富와 같은 것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최소화하는 것 그리고 사회적 경쟁으로부터 물러서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게, 사람을 군주가 되기에 적합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권력에 대한 무관심이다. 통치에 사적인 관심을 갖지 않음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私益을 추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통치에 가장 적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 가장 공평하고 치우치지 않은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 장의 문자적 구조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다. 처음의 두 문장은 전해오는 속담처럼 들린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구를 이루면서 두 가지 속담에 대한 철학적 해설을 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이 텍스트가 처음에 구전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어쩌면 《노자》는 도가가 그러한 속담들을 모은 후에 거기에 시적 철학적 해석을 보태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총애를 받거나 치욕을 당하거나 놀란 듯이 하며 큰 환란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겨라.
총애를 받거나 치욕을 당하거나 놀란 듯이 하란 말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었다는 것이니 총애를 받아도 놀란 듯이 하고 총애를 잃어도 놀란 듯이 하라는 말이다.
이것을 일컬어 총애를 받거나 치욕을 당하거나 놀란 듯이 한다고 한다.
총애를 받으면 반드시 치욕을 당할 때가 있고, 영화를 누리면 반드시 환란을 당할 때가 있으니, 총애를 받고 치욕을 당하는 것은 같고 영화를 누리고 환란을 당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총애를 받거나 치욕을 당하거나 영화를 누리거나 환란을 당하거나 놀란 듯이 한다면 천하를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큰 환란을 내 몸처럼 여긴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큰 환란이란 영화를 누리거나 총애를 받는 따위이다. 삶이 풍족하다 보면 반드시 死地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큰 환란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사람이 영화와 총애에 미혹되면 도리어 자신에게 〈환란이나 치욕이 되어〉 돌아온다.
그래서 “큰 환란을 내 몸처럼 귀하게 여긴다.”고 했다.
나에게 큰 환란이 있는 까닭은 내게 몸이 있기 때문이니
나에게 몸이 있기에 생기는 일이다.
가령 나에게 몸이 없다면
타고난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에게 무슨 환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천하를 귀하게 여기는 자라면 천하를 맡길 만하고,
어떠한 외물로도 제 몸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귀하다’고 했다. 이와 같다면 천하를 맡길 만하다.
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아끼는 자라면 천하를 줄 만하다.
어떠한 외물로도 제 몸을 상하게 할 수 없으므로 ‘아낀다’고 했다.
이와 같다면 천하를 줄 만하다. 〈다시 말하면〉 총애와 치욕과 영화와 환란으로도 제 몸을 손상시키거나 바꾸지 않은 후에야 비로소 천하를 맡길 만하다는 뜻이다.
14
視之不見(시지불견) :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名曰夷(명왈이) : 이름하여 <이>라 하여 보자
聽之不聞(청지불문) :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名曰希(명왈희) : 이름하여 <희>라 하여 보자
搏之不得(박지불득) :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名曰微(명왈미) : 이름하여 <미>라 하여 보자
此三者(차삼자) : 이 세 가지로도
不可致詰(불가치힐) : 밝혀 낼 수 없는 것
故混而爲一(고혼이위일) : 그래서 세 가지가 하나로 혼연 일체를 이룬 상태
其上不?(기상불교) : 그 위라서 더 밝은 것도 아니고
其下不昧(기하불매) : 그 아래라서 더 어두운 것도 아니다
繩繩不可名(승승불가명) : 끝없이 이어지니 무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다
復歸於無物(복귀어무물) : 결국, <없음>의 세계로 돌아간다
是謂無狀之狀(시위무상지상) : 이를 일러 <모양 없는 모양>이고
無物之象(무물지상) : <아무것도 없음의 형상>이라 한다
是謂惚恍(시위홀황) : 이것을 <황홀>이라 하겠다
迎之不見其首(영지불견기수) : 앞에서 맞아도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隨之不見其後(수지불견기후) : 뒤에서 좇아도 그 뒤를 볼 수 없다
執古之道(집고지도) : 태고의 도를 가지고
以御今之有(이어금지유) : 오늘의 일을 처리하라
能知古始(능지고시) : 태고의 시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是謂道紀(시위도기) : 이를 일컬어 <도의 실마리>라 한다
14장 외형 너머의 삶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이지 않는 것을 ‘희(希)’라 하고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라 한다. 이 세 지는 나누어 정의할 수 없는데, 본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오직 직관에 의해서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잡히지 않는 것은 하나로서 존재한다. 위라고 해서 더 밝지 않고 아래라고 해서 더 어둡지 않다. 그것은 계속 이어지고, 이름 지울 수 없으며 결국 없음으로 돌아간다. 앞에서 맞이하면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면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그것이 될 수는 있다. 만물이 항상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를 알면 도와 조화를 이룬 삶을 살 수 있다. |
시작도 끝도 없으며 결코 변하지도 않는 ‘영원’이라는 개념을 떠올려 보라. 이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잡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원’이라는 것이 과거에도 지금도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당신이 가슴 깊이 이해하고 있는 바로 그 영원에 대해 생각해 보라. 영원의 본질은 당신과 주변의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지만 움켜쥐려고 하면 언제나 교묘히 빠져나간다.
이 원칙은 모든 존재들을 지배해 왔으며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또한 모든 존재들은 결국 이 원칙이 전개될 결과이다. 노자는 하나됨을 경험하기 위해 감각에 의존하지 않는 무형의 가르침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장에서는 눈이 아닌 것으로 보고, 귀가 아닌 것으로 듣고, 만지지 않고 잡으라고 한다. 이러한 세 가지 방식들 역시 깨달음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형태가 없는 이러한 영역들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도의 세계에서 하나가 된다. 노자는 이 모두를 포함하는 원칙을 온전히 품고 살아가라고 용기를 북돋운다.
어떤 학자들은 이 14장을《도덕경》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으로 꼽는다. 모든 존재의 토대가 되는 하나의 원칙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볼 수도, 만질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에너지를 활용하면 조화를 얻는다. 조화는 ‘영혼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도달해야 하는 최종목표와도 같다. 당신은 물질, 소유, 성취로 대변되는 세속적인 자아를 폐지하고,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시작된 ‘공간 없는 공간’으로 되돌아간다. 그렇게 함으로서 당신은 도에서 비롯된 신비롭고 마법에 가까운 힘을 다시 얻을 것이다. 보이는 세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형태 안(in-form)에 갇혀서 살면 정보를 쌓는 데 집중하게 된다. 14장은 정보가 아니라 영감 속에 자신을 빠트리라고 말한다. 이전부터 항상 존재해온 그 창조적 자극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지혜로운 결론을 내린다. “만물이 항상 어떻게 존재해 왔는지를 알면 도와 조화를 이룬 삶을 살 수 있다.” 도 안에서 서로 충동하는 것들은 없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것들이 뒤섞인 하나 됨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자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고 말한 것과 같은 충돌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항상 존재해 온,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근원은 당신에게 평화와 조화로움을 선사한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 걷기 명상을 하자.
모든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는 그 영원한 원칙을 끊임없이 지각하라. 우연히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신을 느낌으로서 당신은 좀 더 신과 닮아갈 것이고, 그 연결고리를 녹슬지 않게 할 것이다. 당신에게 다시 균형을 가져다주고 에고가 사라진 진정한 본성과 조화를 이루게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보라.
무엇을 보든 스스로에게 물어라. 눈에 보이는 것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인가? 꽁꽁 얼어붙었던 가지에서 봄이 오면 꽃망울을 피워내는 불가사의한 힘을 생각해 보라. 모기와 같은 생명의 창조를 그 에너지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라.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들리는 것에 대해서도 똑 같은 질문을 하라. 그러한 소리들은 조용한 세상에서 나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나지막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임으로서 듣는 힘을 키워라. 이 원칙을 받아들일 때 경외와 감사가 자라날 것이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뜬다는 점이다. 당신의 마음은 덧없는 세상을 따라가던 길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것이고, 만물 안에서 영원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 페루시아의 시인 루미가 노자보다 1500년쯤 후에 시로 풀어 놓은 글이 있다.
초원의 모든 나무와 풀들이 춤을 추고 있다.
평범한 눈으로라면 그저 한 자리에
서 있을 뿐인 것처럼 보였을
그것들이
제14장은 고대 중국의 形而上學的 사유, 즉 인간의 감각을 넘어서서 형상이 없는 형상, 텅 빈 사물의 모습, 너무 작아 있다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사물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王弼은 주석에서 사물의 모습을 ‘狀 → 象 → 形(名)’의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狀’은 가물가물한 모양이요, ‘象’은 뚜렷한 형상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명확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얼핏 우리는 불완전함을 떠올리지만, 왕필은 그러한 뚜렷한 형체 없음이 오히려 ‘온갖 데를 갈 수 있고, 온갖 것과 통할 수 있다.’고 한다. 일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어디에 담기느냐에 따라 온갖 형태가 되는 물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이 참으로 요상하다. 그 모습을 무어라 딱 정의해 말할 수 없으니 있는 것도 아니요, 보이지 않아 없다고 하려니 사물을 이루어주는 근원이 되므로 없다고 부정해버리기도 곤란하다.
그 신비로운 것이 바로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인 ‘夷’, ‘希’, ‘微’를 합한 것인데, 이것이 道(一)이다. 도란 ‘雜스러운 것’, ‘섞여 있는 것’이므로, 이는 뒤에 나오는 ‘혼탁’한 것과도 이어진다. ‘옛날의 道를 잡아 지금의 有를 다스린다.’라는 구절에서, 王弼은 ‘無가 一에 있다.[無在於一]’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今之有’를 ‘시대가 처한 시대적 과제’로 해석하게 한다. 왕필의 주석을 읽으면 이 부분은 좀 명확해진다.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것이 만물의 근본인 도인데, 그것은 시대가 변하고 풍속이 변해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도를 가지고 지금의 일들을 다스려야 한다. 옛날의 도란 중국의 영원한 이상향인 堯舜時代를 이루던 도, 先王之道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儒者들의 목표는 옛 성인들의 가르침이 적혀 있는 五經을 통해 선왕들의 도를 부활시켜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천국을 이루자는 것이다. 유학자인 왕필이 왜 《노자》에 주석을 달았는지, 《노자》를 왜 정치적인 텍스트라고 하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다. 동아시아 사유에서 요순시대를 이상향으로 추앙하는 것은 서양이 그리스 시대를 찬미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일컬어 ‘어슴푸레하다[夷]’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일컬어 ‘어렴풋하다[希]’ 하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 것을 일컬어 ‘작다[微]’ 한다.
이 세 가지는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다. 그러므로 뭉뚱그려 하나라고 한다.
가물가물한 모습도 없고 뚜렷한 형상도 없고, 분명한 소리도 없고 메아리처럼 울림도 없다.
그래서 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가지 못하는 곳도 없어서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나의 귀, 눈, 몸의 감각으로는 무어라 이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꼬치꼬치 캐물을 수 없어 뭉뚱그려 ‘하나’라고 하였다.
‘하나’는 그 위는 밝지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으며,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데 이름 지을 수 없다.
다시 어떤 것도 없는 상태로 돌아가니 이것을 일컬어 모습 없는 모습, 물체 없는 형상이라 하며,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만물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생성한다.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 정확한 형체를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모습 없는 모습, 물체 없는 형상’이라 말한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惚恍하다 한다.
〈어떤 것이라고〉 확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맞이하여도 그 머리가 보이지 않고, 뒤에서 따라가도 그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옛날의 도를 잡고서 오늘의 있음을 다스리면
옛날과 지금은 비록 다르지만 〈천하를 다스리는〉 道는 언제나 있었으니, 그 도를 잡으면 바야흐로 만물을 다스릴 수 있다.
‘있음’이란 그에 해당하는 일이 있다는 뜻이다.
이로써 옛 始原을 아니, 이것을 일컬어 道의 벼리라 한다.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는 것은 만물의 으뜸이다.
비록 지금과 옛날이 같지 않으나 시대가 바뀌고 풍속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것으로 말미암아서 그 治績을 이루지 않은 적이 없다.
그래서 옛날의 도를 잡고서 오늘의 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상고시대는 비록 아득히 멀지만 〈옛 선왕들이 남긴〉 그 도는 〈五經과 같은 경전을 통해〉 아직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것으로 옛 始原을 알 수 있는 것이다.
15.
古之善爲士者(고지선위사자) : 도를 체득한 훌륭한 옛사람은
微妙玄通(미묘현통) : 미묘현통하여
深不可識(심불가식) :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夫唯不可識(부유불가식) :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니
故强爲之容(고강위지용) :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억지로 형용을 하라 한다면
豫焉若冬涉川(예언약동섭천) : 겨울에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고
猶兮若畏四隣(유혜약외사린) : 사방의 이웃을 대하듯 주춤거리고
儼兮其若容(엄혜기약용) : 손님처러 어려워하고
渙兮若氷之將釋(환혜약빙지장석) : 녹으려는 얼름처럼 맺힘이 없고
敦兮其若樸(돈혜기약박) :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曠兮其若谷(광혜기약곡) : 계곡처럼 트이고
混兮其若濁(혼혜기약탁) : 흙탕물처럼 탁하다
孰能濁以靜之徐淸(숙능탁이정지서청) : 누가 탁한 것을 고요히 하여 점점 맑아지게 할 수 있을까
孰能安以久動之徐生(숙능안이구동지서생) : 누가 능히 가만히 있던 것을 움직여 점점 생동하게 할 수 있을까
保此道者(보차도자) : 도를 체득한 사람은
不欲盈(불욕영) :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夫唯不盈(부유불영) :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새로워진다
15장 서두르지 않는 삶 도를 행한 옛 사람은 깊고 오묘해서 그들의 지혜는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깊이를 알 수 없으니 그들을 막연하게만 묘사할 수 있다. 신중하기를 겨울에 강을 건너듯이 하고 조심하기를 위험을 살피는 사람처럼 한다.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동굴처럼 텅 비어 있고 녹아내리는 얼음처럼 유연하고 흙탕물처럼 흐리다. 그러나 흐린 물도 고요하면 맑아지기 마련 그 고요함에서 생명이 솟아오른다. 도를 행하는 사람은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채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숨은 새싹처럼 남아 있을 수 있고 빨리 무르익으려고 서두르지 않는다. |
이 장은 세상과 깊은 소통을 즐겼던 옛 성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연하고 평화로운 삶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여러 비유를 사용한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시냇물을 건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깨질 듯한 위험에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러한 표현을 통해 서두르지 않으면서 동시에 온전히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갈 이들을 그려 내고 있다. 이 장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주변 환경으로 녹아들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둘째는 그와 동시에 우리의 고요함으로 주변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서 맑아지도록 마음을 편하게 갖는 것이다.
긴장을 늦추지 말고 깨어 있으라. 그와 동시에 그 안에 고요히 머물라. 서두르거나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고 당신의 내면세계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라. 당신 존재와 다른 창조물은 고요함에서 태어났다. 노자가 ‘통나무’라고 묘사한 창조적이고 간결한 상태에 머물라. 삶과 더불어 기꺼이 흐르고, 도의 영원한 힘에 순응하는 마음을 가져라. 이 장에 언급된 것들에 대해 스스로 바라보라. 신중하되 편안하고 평화롭게, 경계를 늦추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자신 있게, 물러서되 맑아지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있듯이 말이다.
이 장은 결국 우리에게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이 맑아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언젠가 불쑥 솟아올라 운명을 시작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흙 속의 새싹과 같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자연의 어떤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창조는 스스로의 계획표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진다. 당신은 신이 준비한 순서에 따라 태어난 것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때가 되면 주어질 것이다. 갖고자 하는 욕심을 놓아버리고 도가 완벽히 펼쳐질 것을 믿어라.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도와 발맞춰 나아가라.
꿈을 쫓아가는 그 걸음을 멈추라.
그 꿈들이 적절한 순간에, 완전한 순서에 맞춰서 당신을 찾아오게 하라. 미친 듯이 내달리는 당신의 속도를 조금 늦추어라. 동굴처럼 ‘텅 비어있음’을 실천하고 통나무처럼 모든 가능성에 스스로를 열어두라. 매일 일정한 시간을 할애하여 고요해지는 연습을 하라. 인생을 통해 당신이 경험하고 싶은 것들을 상상하라. 그러고는 놓아두라. 마치 도가 이 땅 위에 모든 만물에게 그러하듯 당신에게도 완벽하게 작용할 것을 믿어라. 서두르거나 무엇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삶을 관리하려 들지 말고 관찰자인 동시에 수혜자가 되라. 당신은 서두르지 않고 펼쳐지는 도의 방식으로 생활을 지배할 수 있다.
삶의 흐름에 올라타라
그 흐름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려가라
억지로 애쓰지 말고 도의 지혜를 믿어라. 당신에게 와야 할 것은 강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을 때 찾아온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내내 욕망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이제 당신 내면을 통해 흐르는 영원한 지혜를 믿어야 할 시간이다. 워너 바이너가 1944년 번역한 《노자를 따르는 삶의 길》은 이 장을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냥 흘러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면
삶이 어떻게 그 방향을 유지할 수 있을까?
흐름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힘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지치지도, 슬프지도 않다.
그들에게는 고칠 것도, 치료할 것도 없다.
서두르지 않는 삶을 위한 멋진 조언이 아니가?
제15장에서는 君主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王弼은 군주는 속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겨울에 살얼음이 낀 개울을 건널 때 속으로는 골백번 망설이면서 고개를 갸웃거려서도, 얼굴에 두려운 표정을 드러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자칫 ‘미묘하고 그윽이 통달해서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은 음흉함과는 거리가 있다. 또 그 다음 왕필의 주석을 보면 ‘사방에서 힘을 모아 공격을 해 온다.’고 되어 있다. 혼란스러웠던 전국시대에 만백성을 책임져야 하는 군주라는 위치에 서 있으려면 자기의 의중을 쉽게 드러내 상대방에게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에 군주의 자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한다. “손님처럼 조심하고, 얼음이 녹듯이 흩어지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진실되고, 계곡같이 비고, 탁한 듯이 섞여 있어야 한다.” 자기만을 고집스럽게 내세우기보다는 자유자재로 자기를 변용하라는 말처럼 보인다. 때로는 자기를 낮추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혼탁’해지길 요구한다. 맑고자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속성일진대, 혼탁해져서 다른 이를 맑게 해주라니! 지도자가 되기 참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왕필은 ‘濁以靜 物則得淸(스스로를 혼탁하게 함으로써 고요하게 하면 다른 사람이 맑아질 수 있다.)’이란 구절을 통해 濁流派(曹操 정권)를 정당화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왕필은 이러한 도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하들에 대해서도 덮어둘[蔽] 뿐, 자신이 새롭게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부하가 잘못했을 때 벌로 懲治하는 상사도 있을 것이고, 덮어줌으로써 부하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는 상사도 있을 터인데, 어떤 게 더 효과적인 방법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를 선호하는 듯 여겨진다.
예로부터 선비 노릇을 잘하는 사람은 미묘하고 그윽이 통달하여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대저 헤아릴 수 없기에 억지로 다음과 같이 형용할 뿐이다. 머뭇거리는 모습이 겨울에 〈살얼음이 언〉 시내를 건너는 것 같으며,
겨울에 〈살얼음이 언〉 시내를 건널 때에는 머뭇거리며 건널까 말까 하니 그 사정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모습이다.
망설이는 모습이 두려워 사방의 주위를 살피는 것 같으며,
사방이 중앙의 군주를 함께 공격해 오니 망설이는 모습이 어느 쪽을 향해 나아갈지 알지 못한다.
뛰어난 덕을 지닌 사람은 그의 속내의 조짐을 볼 수 없으니, 그의 뜻을 눈치챌 수 없는 것이 또한 이와 같다.
근엄한 모습이 마치 손님과 같고, 흩어지는 모습이 마치 녹으려 하는 얼음과 같고, 도타와 보이는 모습이 마치 질박한 통나무와 같고,
텅 빈 듯한 모습이 마치 빈 계곡과 같고, 혼탁한 모습이 마치 흙탕물과 같다.
무릇 여기의 모든 ‘若(~와 같다)’은 모두 그 모습과 형상이 일정하게 형체화되고 이름 지어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어느 누가 〈자기를〉 흐리게 만들어 더러움을 가라앉히고 물을 서서히 맑게 할 수 있는가?
어느 누가 〈자기를〉 안정시켜 오래가게 하며 천천히 〈다른 이들을〉 잘살게 할 수 있겠는가?
대저 어둠으로 다스리면 다른 사람이 밝음을 얻고, 스스로를 혼탁하게 함으로써 고요하게 하면 다른 사람이 맑아질 수 있고, 스스로를 안정시킴으로써 움직이면 다른 사람이 잘살게 된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도이다. ‘누가 할 수 있는가[孰能]’라고 한 것은 그 어려움을 말한 것이고, ‘천천히[徐]’라고 한 것은 상세하고 신중하게 하는 것이다.
이 도를 보존하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채우고자 하지 않으니,
채우면 반드시 넘치게 된다.
대저 오로지 채우고자 하지 않는 까닭에 〈만물을〉 덮어줄 뿐 새롭게 이루지 않을 수 있다.
‘蔽’는 덮어준다는 뜻이다.
16.
致虛極(치허극) : 완전한 비움에 이르게 하고
守靜篤(수정독) : 참된 고요함을 지키라
萬物竝作(만물병작) :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吾以觀復(오이관복) :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 본다
夫物芸芸(부물운운) : 온갖 것 무성하게 뻗어 가나
各復歸其根(각복귀기근) : 결국 모두 그 뿌리로 돌아가게 된다
歸根曰靜(귀근왈정) : 그 뿌리로 돌아감은 고요함을 찾음이다
是謂復命(시위복명) : 이를 일러 제 명을 찾아감이라 한다
復命曰常(복명왈상) : 제 명을 찾아감이 영원한 것이다
知常曰明(지상왈명) : 영원한 것을 아는 것이 밝아짐이다
不知常(불지상) : 영원한 것을 알지 못하면
妄作凶(망작흉) : 미망으로 재난을 당한다
知常容(지상용) : 영원한 것을 알면 너그러워진다
容乃公(용내공) : 너그러워지면 공평해진다
公乃王(공내왕) : 공평해지면 왕같이 된다
王乃天(왕내천) : 왕같이 되면 하늘같이 된다
天乃道(천내도) : 하늘같이 되면 도같이 된다
道乃久(도내구) : 도같이 되면 영원히 사는 것이다
沒身不殆(몰신불태) : 몸이 다하는 날까지 두려울 것이 없다
16장 한결같은 삶 완전히 비워라. 마음을 고요하게 하라. 세상일의 혼잡함 속에서 끝이 어떻게 다시 시작되는지 보라. 만물이 무성하게 뻗어나가는 것은 결국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다. 그 현재와 미래로 뿌리로 돌아감은 고요를 찾음이고, 고요를 찾음은 제 명을 사는 것이다. 제 명을 사는 것은 언제나 한결같음이다. 한결같음을 아는 것을 통찰이라 한다. 이 순환을 알지 못하면 영원한 재앙에 이르게 된다. 한결같음을 알면 너그러워지고 너그러워지면 치우침이 없다. 치우침이 없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고귀함이고, 신성함이다. 신성해짐으로써 도와 하나가 될 것이다. 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영원함이다. 이것은 영원히 지속되어 육신이 다하는 날까지 위태롭지 않다. |
이 장은 만물의 한결같은 순환을 알아차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변화를 파괴적이고 불필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삶의 수많은 변화들은 도 중심의 생활 속에서 긍정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진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뿐이라는 사실을 알면 변화는 자신의 고유한 목적과 의미를 향해 삶이 나아가고 있다는 반가운 징후로 인식하게 된다. 변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근원을 경험하게 되고, 치우침 없이 균형 잡힌 관점을 통해 고요함으로 들어가게 된다. 에고 중심의 생각들을 바꾸고 도와 하나가 되는 환희를 경험하면서 이 과정을 시작하라.
‘죽음-삶-죽음’으로 이어지는 결코 변하지 않는 순환의 고리가 존재한다. 우리도 그 순환의 일부이다. 만물은 때가 되면 태어나고 때가 되면 물러간다. 삶은 다양한 형태로 일어난다. 이 자리에 존재하고 어떤 시점이 되면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오고 가는 것이 그 순간만의 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근본적인 한결같음이다. 이는 결코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반복되는 변화의 본성을 끌어안으라. 그러면 번성할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끝맺음이 슬퍼해야 할 이유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이는 인생의 한 단계가 마무리되는 순간이기도 하고, 프로젝트의 완료, 어떤 관계의 정리 혹은 죽음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자는 우리에게 만물이 뻗어나간 이후에는 “근원으로 돌아간다...그 현재와 미래로 돌아간다.”라고 말해준다. 삶이라는 순환은 현재와 미래가 있는 당신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다. 최후에 도달해야 할 평화와 지혜의 장소는 당신이 시작된,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공간도 없는 곳으로의 끊임없는 회귀 속에 있다. 노자는 순환이 시작되고 끝나는 근원으로 돌아갈 대 평화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운명이다. 태어나고 다시 돌아가는 순환의 너머에 존재하는 도를 깨달아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물질적인 피조물서의 자신과 영원히 지속되는 도의 일부로서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흔들림 없는 이 힘을 깨닫지 못하면 순환 주기, 그중에서도 한 가지 요소에 집착할 것이고 결국은 노자가 말한 ‘영원한 재앙’에 이르고 말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 곁을 떠나면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진다. 사업이 실패하고, 공동체에서 버림받고, 질병에 걸리게 되면 당신은 깊은 좌절을 한다. 이런 감정에 갇히면 이것 또한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신으로부터 단절되었다고 느끼게 된다. 당신은 “세상일들의 혼잡함 속에” 빠져“끝이 다시 시작이 되는” 한결같음을 기억할 수 없다. 현실 속에서 ‘시작’은 종종 고통스러운 ‘끝’의 모습으로 위장을 해서 나타나곤 한다. 현재의 실망스러운 일 너머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것을 알면 “이것 역시 지나갈 것이다."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하나의 끝으로 인해 절망하게 될 때,
편견 없는 삶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져라.
모든 사건들 속에 당신의 근원인 도가 작용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근원과 당신의 생각을 하나로 연결하겠다고 마음먹어라. 모든 끝은 순환의 한 부분이다. 당신은 변하지 않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이 장을 통해 노자가 가르쳐 주는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행동을 바꾸거나 혹은 어떤 새로운 전략을 구사할 필요도 없다. 그저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 결코 변하지 않을 도를 낙으로 삼아라. 그러면 절망이 아닌 평화를 얻을 것이다. 도는 결코 떠나거나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결코 치우치지도 않는다. 당신의 감정적인 사이클이 어디에 있든 비난받지 않을 것이다.
다음 문구를 써서 당신 생활공간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라
“이것도 역시 지나갈 것이다”
삶에 있어 한결같은 것은 오직 변화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줄 것이다. 당신이 인지하는 모든 것들은 오고 가는 순환 고리 안에 있다. 예외란 없다. 이것을 이해하고 당신의 생각이 변화의 한결같음으로 흐르게 하라. 이것이 그 뿌리이며 모든 일의 근원이다. 그것은 완벽하다. 그것은 또한 신성하다. 그것은 당신이 완전히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것은 꽃을 피게 하고, 늙어가게 하고, 다시 테어 나게 한다. 도에게로 돌아가라. 그리고 이 자리에서 지금 당장 영원한 본질을 경험하라. 몸이라고 부르는 덧없는 껍데기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극적인 사건들 속에서 말이다.
제16장은 ‘虛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텅 비어 있음이 사물의 참되고 바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만물은 움직여서 일어나 생겨나고 자라지만 결국 허정한 곳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니, 텅 비어 있어야 만물이 되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허정한 곳이 뿌리인 셈이다. 王弼은 이를 ‘性命之常(본분의 마땅함)’이라고 풀고 있다. ‘性命之常’을 아는 것을 ‘明(밝은 지혜)’이라고 한다. 그래서 ‘性命之常’을 알게 되면 모든 것과 통하게 되고 공정하게 되며, 왕이 되고 하늘이 되며, 도를 얻게 되고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修養論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노자》에서 靈性 수련의 세 가지 화두를 말하여 ‘몸성히’, ‘맘놓이’, ‘바탈퇴히’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맘놓이’가 바로 자기를 비우는 행위, 마음을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바탈퇴히’는 나의 바탕(자아)을 태워나가는 것을 말한다. ‘내 못된 버릇과 내 악한 바탕을 끊임없이 태워 변화시키고 새 바탈(나)을 낳는 것, 종국에는 나를 아주 벗어버리는 것’이 수양의 요체라는 것인데,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마음을〉 비운 상태를 유지하면 〈만물이〉 지극해지고 〈마음의〉 고요한 상태를 지키면 〈만물이〉 돈독해진다.
〈마음을〉 비운 상태를 유지하면 만물이 지극해지고, 〈마음의〉 고요함을 지키면 만물의 참된 본성이 바르게 된다는 말이다.
만물이 함께 자라나는데
〈만물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자라난다.
나는 돌아옴을 볼 뿐이다.
〈마음을〉 비우고 고요하게 함으로써 만물이 돌아옴을 본다는 말이다.
무릇 있음이란 비어 있는 곳에서 일어나고 움직임이란 고요함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만물이 다같이 활동하지만 결국에는 비어 있고 고요한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니, 이 때문에 만물이 지극하고 돈독해진다.
무릇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나 뒤엉키지만 각각 제 뿌리로 다시 돌아갈 뿐이다.
根이란 〈만물의〉 ‘처음’이니 각각 그 처음 시작한 곳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일컬어 ‘고요하다[靜]’고 하고, 고요함을 일컬어 〈만물이 각각 자신의〉 ‘性命으로 돌아간다[復命]’고 하고, 〈만물이 각각 자신의〉 성명으로 돌아감을 일컬어 ‘늘 그러하다[常]’고 하고,
뿌리로 돌아가면 고요해지므로 ‘고요하다’고 했다. 고요해지면 〈만물이 각각 본래의〉 성명으로 돌아가게 되므로 ‘〈본래의〉 성명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성명으로 돌아가면 성명의 늘 그러함을 얻게 되므로 ‘늘 그러하다’고 했다.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일컬어 ‘밝다[明]’고 한다.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게 흉한 일을 하게 되나,
‘늘 그러하다’는 것은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으며, 밝거나 어두운 모습도 따뜻하거나 차가운 형상도 없다.
그러므로 ‘〈만물이〉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일컬어 밝다고 한다.’고 한 것이다.
오로지 이와 같은 〈만물의〉 ‘돌아옴’은 만물을 끌어안고 통할 수 있어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이것을 잃어버린 뒤로부터는 사특함이 〈만물 사이의〉 명분에 끼어들게 되니, 곧 만물이 자신의 명분을 떠나게 된다.
그래서 “〈만물이〉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게 흉한 일을 하게 된다.”고 했다.
늘 그러함을 알면 포용하게 되니,
끌어안아 통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포용하게 되면 공평해지고,
끌어안아 통하지 못할 것이 없으면 곧 크게 공평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공평하게 되면 〈진정한 천하의〉 王者가 되고,
크게 공평해지면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진정한 천하의〉 왕자가 되면 하늘의 도에 합치하고,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면 하늘과 〈도를〉 함께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하늘의 도에 합치하게 되면 도와 같아지고,
하늘과 덕이 합치하고 도를 체득하여 크게 통하면 허무의 상태를 극도에 달하게 함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도와 같아지면 오래 가니
허무의 상태를 극도에 달하게 하여 만물의 늘 그러함을 얻으면, 곧 다함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無’라는 것은 물이나 불로 해칠 수 없고 쇠나 돌로 깨뜨릴 수 없다.
〈군주가〉 無를 마음에 쓰면 호랑이나 외뿔소가 그 발톱이나 뿔로 덤빌 곳이 없고 칼과 창의 날로 찌를 곳이 없으니, 어찌 위태로움이 있겠는가!
17.
太上不知有之(태상부지유지) :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其次親而譽之(기차친이예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其次畏之(기차외지) :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其次侮之(기차모지) : 가장 좋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
信不足焉(신불족언) : 지도자에게 신의가 모자라면
有不信焉(유불신언) : 사람들의 불신이 따르게 된다
悠兮其貴言(유혜기귀언) : 훌륭한 지도자는 말을 삼가고 아낀다
功成事遂(공성사수) : 지도자가 할 일을 다하여 모든 일 잘 이루어지면
百姓皆謂我自然(백성개위아자연) :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모두가 우리에게 저절로 된 것이다>고
17장 현명한 지도자의 삶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이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겨우 아는 지도자이다. 그다음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칭찬하는 지도자이다. 그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이다. 가장 좋지 못한 지도자는 사람들이 경멸하고 무시하는 지도자이다. 지도자가 사람들을 믿지 않으면 사람들 또한 지도자를 믿지 않는다. 훌륭한 지도자는 말을 적게 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지 않고 일하며 일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을 때 사람들은 “이 모두를 우리 스스로 해냈다.”라고 말한다. |
이 장은 우리에게 권위를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라고 한다. 즉 위대하고 현명한 지도자는 실제로 아무도 이끌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도의 시각에서 볼 때, 현명한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각자가 책임을 가진 전체의 일부로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낸다. 현명한 지도자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방식뿐만 아니라 기업, 정부 혹은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존경하는 방식도 바꾼다. 이러한 충고는 사회에서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또한 리더의 의미를 부모나 교사로 대체하면 이 교훈을 각자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점검하라. 다른 사람들 또한 깨달을 수 있도록 변화를 만들어내라.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머물러 전개되는 상황을 예리하게 관찰해야 한다.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각자 책임 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노자는 좋은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다른 사람들이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고 올바른 일을 하도록 독려한다. 그리고 일의 성과를 칭찬할 때가 되면 지도자는 눈에 띄지 않는 배경으로 사라진다. 도를 따르는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만의 방식과 가치를 추구하도록 놓아둔다. 권위주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들은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견해를 통해 주변의 에너지를 높인다. 이 장에서는 지도자들의 세 가지 다른 유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사랑을 통해 대립을 해결하면서 삶의 차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는 지도자는 도와 조화를 이룬다. 칭찬받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고 경쟁보다는 서로 돕는 방식을 택한다. 여기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리더십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만약 그런 무기를 이용해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다면, 당신은 내가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만 그렇데 행동할 것이다. 규율을 강조하는 선생님들의 교육 방식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연구한 결과가 있다. 그 결과에 따르면 학생들은 규율이 엄격한 선생님이 교실 안에 있을 때만 잘 행동한다. 그러니 그 선생님이 떠나면 난장판으로 돌변한다.
이와 반대로 학생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선생님들도 있다. 그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은 선생님이 교실에 있건 없건 거의 차이가 없다. 당신이 아이를 둔 부모라면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해 두 길 바란다. 리더십에 있어 가장 효과가 적은 방법은 그들이 당신을 경멸하게 만들 술책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들은 당신 시야에서 벗어나는 순간 당신을 무시할 것이다. 독재자들은 이것을 아주 어렵게 깨닫는다.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자신들이 당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독재자들을 위협할 때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현명한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이끌어야 할 사람들을 믿는다. 이런 사고방식은 상호 간에 신뢰를 낳아 지도자가 사람들을 믿고 그 사람들 역시 지도자를 믿는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우리가 해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자녀들이 자기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자랑스러워할 수 있도록, 그리고 결과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도록 키워야 한다. 자신을 현명한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향해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을 선보여라. 그런 방식 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노자가 말한 것과 같이 훌륭한 지도자로 성장할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 스스로가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 있음을 믿으라.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라. 그러한 당신의 생각을 알려라. 각자 올바른 판단을 내리리라 믿고 있음을 알려라. 그러고는 한 걸음 물러서서, 당신이 그 상황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될 것임을 생각하라. 당신 책임 아래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면 칭찬하라. 설사 그것이 당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도 말이다. 당신 자신이 정담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 가장 훌륭하게 대응할 수 있다. 이 구절을 명심하라. “지도자가 사람들을 믿지 않으면 사람들 또한 지도자를 믿지 않는다.” 당신이 관리 감독하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그들 스스로 가능한 많은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공을 가로채지 않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
다른 사람들의 업적을 통해 당신이 보상받고 승진하거나 찬사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그 생각부터 버려라. 말수를 줄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버려라. 당신이 이끄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말하도록 허락하라. 다른 사람의 재주로 당신의 역량을 돋보이게 하려 하지 말고, 그들이 스스로 해낸 일에 대해 전율하게 하라. 평판이나 명성에 연연하지 않고 그들이 경험하는 행복과 자부심을 함께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 14세기 하피즈가 쓴 시를 옮긴다.
이 모든 시간이 흐른 뒤에도
태양은 대지에게
“내가 너에게 베풀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라. 그런 사랑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그 사랑이 온 하늘을 밝혔다.
당신이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라. 마치 태양이 우리별을 사랑하듯이, 그저 베풀고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마라.
제17장은 어떤 군주가 옳은 군주인지 군주의 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최상의 군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즘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불행히도 지극한 덕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지도자도, 친근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지도자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한때 두려워했던 지도자가 있었고, 이제 지도자를 업신여기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해 뜨면 일하고 해 지면 쉬고, 우물 파 물 마시고 밭 갈아 내 먹으니, 임금의 혜택이 내게 무엇이 있다더냐.’라며 〈擊壤歌〉를 부를 수 있는 시대를 꿈꾸는 것은 옛 고전들이 함께 이야기하는 바인 듯하다.
大人이 윗자리에 앉아 다스릴 때에는 아래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며,
太上은 〈《주역》에서 말하는〉 大人을 말한다. 대인이 윗자리에 있으므로 ‘太上’이라고 한 것이다.
대인이 윗자리에서 無爲의 일에 거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면 만물이 그에 의해 지어지면서도 시작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아래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그 다음 사람은 〈백성들이〉 그를 친하게 여기고 기리게 하며,
無爲로 자신의 일에 거하지 못하고 말하지 아니함으로 교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善을 세우고 교화를 베풀어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친하게 여기고 기리도록 만든다.
그 다음 사람은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게 하며,
다시 은혜[思]와 인자함[仁]으로는 다른 사람을 부릴 수 없어 위엄과 권세에 의존하게 된다.
그 다음 사람은 〈백성들이〉 그를 모멸한다.
법을 만들어 백성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하고 ‘꼼수’로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그를 피할 줄만 알게 되고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모멸한다.”고 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윗사람에게〉 믿음이 부족하면 〈백성들 사이에〉 不信이 생겨나니,
〈백성들이〉 윗사람을 따른다는 말이다. 무릇 몸을 다스림에 있어 타고난 본성을 잃게 되면 질병이 생기고,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있어 타고난 진정성을 잃게 되면 종기가 생긴다.
〈윗사람에게〉 믿음이 부족하면 〈백성들 사이에〉 불신이 생겨나니, 이것은 자연의 도이다.
이미 부족한 상태에 처하였으므로 智謀로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윽하여 보이지 않는 모습이 그의 말 한마디를 귀하게 여겨,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다 성취되어도 백성들이 모두 ‘나 스스로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自然’이란 그 조짐을 볼 수가 없고 그 뜻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것으로도 그 말을 바꿀 수 없어 말을 하면 반드시 그에 응함이 있기에 “그윽하여 보이지 않는 모습이 그의 말 한마디를 귀하게 여긴다.”고 한 것이다.
無爲의 일에 거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며 드러난 외형으로 다른 사람을 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공이 이루어지고 일이 다 성취되어도 백성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18.
大道廢(대도폐) : 대도가 폐하면
有仁義(유인의) : 인이니 의니 하는 것이 나서고
慧智出(혜지출) : 지략이니 지모니 하는 것이 설치면
有大僞(유대위) : 엄청안 위선이 만연하게 된다
六親不和(륙친불화) : 가족 관계가 조화롭지 못하면
有孝慈(유효자) : 효니 자니 하는 것이 나서고
國家昏亂(국가혼란) :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有忠臣(유충신) : 충신이 생겨난다
18장 규칙이 없는 삶 대도(大道)가 있을 때 행동은 그 마음으로부터 나오고 대도(大道)가 없을 때 행동은 인(仁)과 의(義)로부터 나온다. 만약 인과 의가 필요하거나 지금 덕이 있는 행동을 하고 있다면, 이건 분명 덕이 없다는 신호다. 따라서 우리는 위선에 직면한다. 가족관계가 조화롭지 못하면 효도나 자애(慈愛)가 나서는 것이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신이 나타나고 애국심이 생기게 된다. |
법과 규칙이 존재하지 않은 채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떠올려 보라. 그곳에는 혼란, 도둑질, 증오, 전쟁 같은 것들이 없다. 사람들은 단순하게 살고 일하며 즐긴다. 다스림을 받을 필요가 없다. 말 그대로 대중을 다스리기 위한 명령이나 규범 같은 것들이 필요 없는 세상, 이것이 바로 노자로 하여금 도덕경 18장을 쓰게 한 일종의 이상주의적 마음의 흐름이다. 노자는 어질고 올바르기 위해 규칙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규제의 밑바탕에 깔린 의도를 새롭게 바라보던 사회, 정치 그리고 사법제도를 좌지우지하는 조직들도 변화하게 될 것이다.
도가 중심이 되면 국가나 도시 학교, 종교 등이 정한 규칙이 우리가 존재하고 행동하는 주된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저의, 사랑을 지키는 데 법과 규칙만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이러한 미덕들을 법규나 관습이 요구하는 것이 아닌 개인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살 수 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규칙 없는 삶’이다. 규칙을 앞세우지 않고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갖춘다면 당신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가족들 간에 의무가 아닌 사랑 그 자체가 서로 사랑하는 동기가 되게 하라. 예절이나 행동 양식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친절히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기 위해서다. 만약 이를 어기는 일이 생기면 도의 에너지는 방해를 받거나 멈추게 될 것이다. 조화가 깨졌을 때는 규칙이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모두가 그 규칙을 벗어나서 사는 법을 배우려 한다는 점을 명심하라. 규범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 도가 자유롭게 흐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도를 중심에 둔 마음에서 당신의 행동이 우러나오게 하라.
당신 중심에 도가 있으면 더 이상 어떤 규칙도 필요 없을뿐더러 합법이냐 불법이냐의 시비에 휘둘리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은 단지 그 행위가 법에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 행위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삶은 규칙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다.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은 타인을 존중하기 때문이고 바로 이런 마음이 도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도에는 도둑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물은 만인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땅이나 재산에 대한 소유권도 없다. 그저 만인과 만물을 기꺼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도둑질이나 싸움 등을 금지하는 법은 도와의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선하게 행동하지 말고 선함 그 자체가 되어라.
선하게 행동하는 것과 선한 것은 다르다. 도는 당신의 모든 상호작용 속에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당신의 심장은 이미 도의 경건함을 느끼고 있다. 그러니 경건한 마음을 가져라.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져라.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요구해서가 아니라 당신 내면의 목소리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하는 일을 미루지 마라. 자연재해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자극할지 모른다. 생각의 방식을 바꾸면 자연재해조차 당신을 도의 길로 인도하는 사건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재해는 당신의 애국심을 태어난 땅덩어리에 가두는 것이 아닌 모든 인류를 위한 방법으로 이끌 것이다. 다시 수피 시인 하피즈의 생각을 들려주고 싶다.
모든 이가 곧 신의 목소리다.
어찌 무례할 수 있겠는가?
어찌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18장, 제19장은 통상적으로 仁義에 대한 부정적 언급 때문에 儒家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 있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초간본에 의하면 그런 루머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일단 제18장은 초간본과 왕필본이 조금 다르다. 馬王堆 漢墓 帛書本을 저본으로 한 김홍경에 의하면 제18장은 제17장과 이어진다. 첫머리에 ‘故’자를 붙인 점이 다르고, 군데군데 ‘焉’자가 첨부되어 있으며, ‘國家’가 ‘邦家’로, ‘忠臣’이 ‘貞臣’으로 되어 있다. 종합하면 ‘故大道廢, 焉有仁義, 智慧出, 焉有大僞. 六親不和, 焉有孝慈, 邦家昏亂, 焉有貞臣.’으로 글자의 차이는 조금 있으나,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 다음 구절에서는 孝誠과 慈愛가 나오게 된 이유, 충신이 있게 된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노자는 ‘孝, 자애로움, 忠’ 등 유가에서 내세우는 인위적 가치가 나오게 된 것이 결국 화목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탓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유가를 비판했다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왕필은 ‘六親’을 ‘부자, 형제, 부부’라고 하고 《여씨춘추》에는 육친을 ‘부모, 형제, 처자’라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육친은 ‘나와 가장 가까운 피붙이 6명’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가까운 피붙이들이 반목하는 상황이니 자연히 효를 강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비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숱하게 벌어지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다음 왕필의 해석이 재미있다. 왕필은 《莊子》 〈大宗師〉에 나오는 “샘이 마르면 물고기들이 땅바닥에 드러나 서로 숨을 내쉬어 적셔주고 서로 물거품을 뿜어주니, 강호 속에서 서로를 잊는 것만 못하다.”는 구절을 완전히 뒤집는다. “물고기들이 강과 호수에서 서로 잊고 지내는 도가 있기 때문에 서로 적셔주는 덕도 생겨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장자가 ‘물거품’이라는 비유를 들어 ‘仁義’를 부정했다면, 왕필은 ‘서로 적셔주는 덕’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즉, ‘仁義’를 긍정하고 어질게 사는 사회가 기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큰 도가 없어지니 仁義가 있게 되었고,
無爲의 일을 잃고서 다시 지혜를 베풀고 善의 기준을 세우니 이는 도가 物로 나아간 것이다.
지혜가 나오니 큰 위선이 있게 되었고,
술수를 행하고 밝음을 사용하여 간사함과 위선을 살피는 것은 이미 〈군주의 마음이 가는〉 방향이 보이고 그의 행위 방식이 드러나서 만물(사람들)이 피할 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지혜가 나오면 큰 위선이 생겨나는 것이다.
六親이 불화하니 孝道와 慈愛가 있게 되었고, 국가가 혼란하니 忠臣이 있게 되었다.
매우 아름다운 이름은 크게 추한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니, 이른바 ‘아름다움과 추함이 같은 문에서 나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육친이란 부모와 자식, 형제와 부부 사이를 말한다.
만약 육친이 스스로 화목하고 국가가 저절로 다스려진다면 효도와 자애나 충신이라는 말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莊子》에서 말하는〉 ‘물고기들이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는 도’를 잃으면 서로 물기로 적셔주는 덕이 생겨난다.
19.
絶聖棄智(절성기지) : 성스런 체함을 그만두고 아는 체함을 버리면
民利百倍(민리백배) : 사람에게 이로움이 백 배나 더할 것이다
絶仁棄義(절인기의) : 인을 그만두고 의를 버리면
民復孝慈(민복효자) : 사람이 효성과 자애를 회복할 것이다
絶巧棄利(절교기리) : 재간 부리기를 그만두고 이익보려는 마음을 버리면
盜賊無有(도적무유) : 도둑이 없어질 것이다
此三者以爲文不足(차삼자이위문불족) : 이 세 가지는 문명을 위하는 일이지만그 자체만으로는 부족하다
故令有所屬(고령유소속) : 그러므로 뭔가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見素抱樸(견소포박) : 물들이지 않은 명주의 순박한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의 질박함을 품는 것
少私寡欲(소사과욕) : <나>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이다
19장 집착하지 않는 삶 성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지혜로움을 버려라. 그러면 모든 사람에게 백배는 이로울 것이다. 인과 이를 버려라. 사람들이 저절로 효성과 자애를 되찾을 것이다. 기교와 그로 인한 이익을 끊어 버려라. 도적이 사라질 것이다. 이 모두는 그저 껍데기일 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간소함을 보고 진정한 본성을 깨닫고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
19장은 마치 노자가 도의 가장 중요한 원칙들을 포기하라고 이르는 것처럼 보인다. 성자가 되는 것, 지혜, 인과 의, 기교 그리고 그로 인한 이익까지 모두 버리고 나면 모든 것이 잘될 거라고 이 위대한 현자는 말한다. 노자는 우리에게 “이 모두는 껍데기일 뿐”이며 그것들은 높은 도를 따라 사는데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노자가 말한 껍데기 중 첫 번째는 교육과 배움에 대한 사고방식이다. 노자의 정형화된 종교 가르침을 따르면 성자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고, 학위에서 비롯된 자만심을 버리라고 말한다. 노자는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발견하고 성장하는 것이 헐신 더 값진 일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도의 가르침은 신성한 중심에 다가가는 데 있다. 당신 안에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신의 일부가 있다. 노자는 자기 자신을 믿고 교육기관과 종교단체를 다시 평가하라고 조언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진정한 본질이 “모든 사람에게 백배는 이로울 것”임을 알게 된다. 진실이란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전까지만 진실이며, 그 다음부터는 거짓이 되고 만다고 말하는 듯하다. 초기에 질서를 잡기 위해 시도했던 일이 결국에는 조직의 목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노자는 인과 의를 버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백배는 이로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껍데기 중 두 번째, 자연스러운 내면의 고결함 앞에 있는 법률제도를 지목한다. 자신이 흠잡을 데 없는 신의의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연연할 필요가 없어진다. 노자는 정해진 도덕 체계에 비추어 스스로 열등한 존재로 바라보지 dksag는 것이 중요하다고 일깨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위해 고안된 미궁 같은 제도들은 타고난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고 slTek는 증거이다.
모든 껍데기의 마지막은 사업의 세계에 있다. 노자는 “이익 추구하기를 멈추고, 기교를 버려라. 그리고 기록 남기기를 그만 두어라, 그러면 모든 도둑이 사라질 것이다.” 라고 풀이 한다. 모두를 끌어안는 도의 온전함 속에서 중심을 잡고, 이익과 부를 통해 성공을 얻으려는 생각을 놓아 버리라고 충고한다. 도의 가르침 안에서 삶을 바라본다면 많은 돈을 쌓아놓을 필요가 없다. 그 대신 끝없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게” 될 것이다.
교육, 재판, 사업과 당신의 관계를 관찰하라.
당신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려는 시도를 감지하라. 잘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내리는 제도에 중독되어 있는가? 당신이 따르는 규칙과 행동규범들은 가슴에서 우러난 것인가? 아니면 그저 ‘특별함’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 이런 제도의 압박들이나 혹은 그것들의 존재에 맞붙어 다투지 마라. 거기에 달라붙은 집착들을 내려놓아라. 당신이 숭고한 것은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의 신성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 종교 조직이 그렇다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의 지성은 성적증명서가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번뜩이는 지성 그 자체이며 여기에 외부의 증인 따위는 필요 없다. 당신이 도덕적인 것은 법을 준수하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도덕 그 자체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신이 시작된 근원, 즉 도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집착하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라.
그동안 재물을 얼마나 모았는지를 근거로 값어치를 매기지 마라. 당신이 가진 것과 하는 일을 돈의 가치로 환산하지 마라. 많이 모아야 한다는 마음을 버리고, 나누는 존재가 되라.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라는 믿음을 버리는 것만으로도 삶이 얼마나 즐거운지 안다면 놀라운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윤을 남기는데 집중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당신의 에너지를 삶의 목적을 추구하는 쪽으로 옮긴다면 더 많은 돈이 당신에게로 흘러들 것이다. 그리고 아량을 베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것이다. 세상은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로 넘쳐난다. 그러나 노자는 당신의 가슴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라고 한다. 다른 어느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 당신에게 알려줄 수 없다.
제19장은 聖人의 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백성들을 위해 군주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韓非子》 〈揚權〉에 나오는 “성인의 도는 지혜와 기교를 없애는 데 있으니, 지혜와 기교가 없어지지 않으면 常道를 만들기 어렵다.”라는 구절을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장도 초간본과 왕필본의 내용이 약간 다르다. 초간본은 군주가 버려야 할 세 가지로 ‘辨(말로 명확하게 구분하려는 것)과 智(잔머리 굴리는 것), 巧(기교)와 利(이익), 僞(거짓)와 詐(속임)’를 들고 있다. 그러나 왕필본은 ‘성스러움과 지, 인과 의, 기교와 이익’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왕필의 해석이 재미있다. 노자는 “성스러움과 지, 인과 의, 기교와 이로움”을 버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나, 왕필은 “성스러움과 지는 뛰어난 재주고, 인과 의는 훌륭한 행실이며, 기교와 이익은 쓰기에 좋은 것”이라고 노자의 생각을 뒤집는다. 그런 좋은 것들을 노자가 끊어버리라고 이야기한 것은 ‘언어화된 것, 즉 文飾을 부정한 것’이지 앞의 덕목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글자로 표현된 가치와 실상 사이의 간극에 대해 짚음으로써, 교묘하게 ‘인간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려야 백성에게 이로움이 백 배가 될 것이다.
어짊을 끊고 의로움을 버려야 백성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워질 것이다.
교사스러움을 끊고 이로움을 버려야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억지로〉 꾸민 것이기에 충분한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각자의〉 속할 곳이 있게 하면 소박함을 보고 끌어안으며 사사로움을 줄이고 욕심을 적게 할 것이다.
성스러움과 지혜는 재주의 뛰어남이다. 어짊과 의로움은 행실의 뛰어남이다.
교사스러움과 이로움은 쓰임새의 뛰어남이다.
그런데도 〈《노자》의 문장은 이것들을〉 끊어버리라고만 말하고 있으니, 〈억지로〉 꾸민 것이 매우 부족해져 〈백성이〉 속할 곳이 없게 한다면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드러낼 방법이 없게 된다.
그래서 〈《노자》에서〉 “이 세 가지는 〈억지로〉 꾸민 것이기에 충분한 것이 못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속할 곳이 있게 한다면 소박함과 욕심을 줄이는 것에 속하게 할 것이다.
20.
絶學無憂(절학무우) : 배우는 일을 그만두면 근심이 없어질 것이다
唯之與阿(유지여아) : <예>라는 대답과 <응>이라는 대답의
相去幾何(상거기하) : 차이가 얼마이겠는가
善之與惡(선지여악) :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의
相去若何(상거약하) : 차이가 얼마이겠는가
人之所畏(인지소외) :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不可不畏(불가불외) : 나도 두려워해야 하는가
荒兮其未央哉(황혜기미앙재) : 얼마나 허황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인가
衆人熙熙(중인희희) : 딴 사람 즐거워하기를
如享太牢(여향태뢰) : 모두 소 잡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하고
如春登臺(여춘등대) : 봄철 망두에 오른 것처럼 기뻐하는데
我獨泊兮其未兆(아독박혜기미조) : 나 홀로 멍청하여 무슨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如?兒之未孩(여영아지미해) : 아직 웃을 줄도 모르는 갓난아이 같기만 한다
??兮若無所歸(래래혜약무소귀) : 지친 몸이나 돌아갈 곳 없는 사람과 같다
衆人皆有餘(중인개유여) : 세상 사람들 모두 여유 있어 보이는데
而我獨若遺(이아독약유) : 나 홀로 빈털터리 같습니다
我愚人之心也哉(아우인지심야재) : 내 마음 바보의 마음인가
沌沌兮(돈돈혜) : 흐리멍텅하기만 한다
俗人昭昭(속인소소) : 세상 사람들 모두 총명한데
我獨昏昏(아독혼혼) : 나 홀로 아리송하고
俗人察察(속인찰찰) : 세상 사람들 모두 똑똑한데
我獨悶悶(아독민민) : 나 홀로 맹맹하다
澹兮其若海(담혜기약해) : 바다처럼 잠잠하고
?兮若無止(료혜약무지) : 쉬지 않는 바람 같다
衆人皆有以(중인개유이) : 사람들 모두 뚜렷한 목적이 있는데
而我獨頑似鄙(이아독완사비) :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게 보인다
我獨異於人(아독이어인) : 나 홀로 뭇사람과 다른 것은
而貴食母(이귀식모) : 나 홀로 어머니 젖먹을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20장 애쓰지 않는 삶 배우기를 멈추면 모든 금심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예’와 ‘아니오.’의 차이는 무엇인가? ‘선’과 ‘악’의 차이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해야 하는가? 풍요로움 속에서 황폐함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천지가 빛으로 가득할 때 어둠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봄이 오면 어떤 이는 공원에 가고 언덕을 오른다. 그러나 나는 홀로 떠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마치 아직 미소 짓는 법을 배우지 못한 갓난아이처럼 나는 홀로 갈 곳이 없다. 사람들은 모두 많이 갖고 있고 나만 홀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보인다. 그 순수한 간절함에 있어 내 마음은 참으로 무지한 자의 그것과 같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저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 해내려고 달려들 때 나는 그저 줘진 것을 받아들인다. 적게 벌어, 적게 쓰니 나만 홀로 어리석어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명성을 얻기 위해 애쓰고 나는 혼자 남겨지길 택해서 세상의 주목을 피한다. 참으로 나는 어리석어 보인다. 욕심을 버리니 근심도 사라진다. 나는 큰 바다의 파도처럼 떠돌고 욕심 없는 바람처럼 불어댄다. 모든 사람이 알맞은 장소에 자리를 잡는데 나만 홀로 고집스레 경계 밖에 머문다. 그러나 내가 뭇사람과 가장 다른 것은 나 홀로 위대한 어머니가 우리를 먹이는 것을 아는데 있다. |
이 장은 세속적인 것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데서 벗어나 주어진 삶을 경험하라고 한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망의 속도를 늦추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대한 기대로 매 순간을 채우는 노력을 멈추라고 조언한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 갈망은 버리고 감사의 마음만 간직하라. 옳은 일을 하는데 있어 의심하는 마음은 내려놓아라. 만약을 걱정하는 마음과 미래를 위한 목표도 모두 놓아두고 대신 이 순간의 힘을 따르라. 여기에 존재하라. 다른 어딘가에 생각하는 것은 당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순간들을 소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성인은 언제나 ‘현재’에 완전히 몰입한다.
도의 방식대로 삶을 받아들이면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무릎 끓고 항복하는 과정이다. 위대한 근원이 이끄는 대로 자신을 내 맡기면 된다. 미래에는 더 많이 가져야 하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현재 모습 그대로 자신을 온전하고 완전한 모습으로 바라보라. 당신은 모든 과정 속에서 언제나 존재하는 무한한 풍요로움과 빛의 증거가 될 수 있다. 부족함에 대한 걱정을 버리고, 위대한 근원이 모든 존재에게 그래왔듯 앞으로도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줄 거라는 걸 믿어라.
노자는 더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삶을 단순하게 만들라고 한다. 어쩌면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고 깎아내리거나 무지하다고 놀리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항상 손님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거기서 오는 내면의 평화를 깊이 있게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은 어쩌면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무언가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더 이상 누군가가 되려는 욕망이나 무언가를 얻으려는 욕심에 갇혀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은 애쓰는 대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기를 선택한 것이다. 근심이나 두려움 없는 삶을 상상해 보라. 만물을 주관하는 힘이 모두를 조정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만물의 근원과 당신 자신이 단단히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삶 말이다.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아라.
그저 당신이 살고 있는 우주의 완전함 속으로 녹아들도록 자신을 내버려두라. 행복해지기 위해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제공된다. 이 순간 속에 존재하라.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얻거나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쓰는 마음에서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라. 이것이 도의 평화를 느끼는 훈련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라. “삶은 정말로 완전하다. 신의 따스한 사랑은 모든 곳에 미치고 어느 누구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바로 이 힘이 나를 인도해 줄 것을 믿는다. 여기에 내 에고가 끼어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걱정도 두려움도 없는 마음가짐을 가질 때 얼마나 자유로워지는지 한없이 느껴보라.
매일 “마음을 내려놓고 신에게 맡기는” 시간을 가져라.
“마음을 내려놓고 신에게 맡겨라.”라고 말하면서 실제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라. 놓아버리는 것은 아주 뚜렷하고 분명한,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경험이다. 이는 애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당신의 이런저런 요구들을 내려놓아라. 당신의 인생에서 무언가가 빠졌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함께 내려놓아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그것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변화다. 그러고 나면 당신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고 마음 편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미 가지고 있음을 알아챌 것이다. 긴장을 풀고 이 깨달음 속으로 빠져들어라. 그리고 반복해서 계속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신에게 맡긴다. 나는 모든 것을 주는 위대한 어머니의 젖을 먹는 영광스러운 아이다.”라고 되새겨라.
제20장은 儒學이 강조하는 ‘배움[學]’에 대한 비판으로 읽혀진다. ‘學’을 한다는 건 결국 벼슬에 나아간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회 시스템이 안정되어 있지 않을 때 공부를 해서 자기 자신을 진작시키고 명예를 드높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벼슬길에 나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이 될지도 모르고 사람들은 즐거워하기만 한다. 큰 소를 잡아 잔치를 하고, 봄날 누대에 오른 듯이 들떠서 난리다. 환하고, 신나고, 빛나는 사람들 무더기 저편에 사내 하나가 우두커니 동떨어져 있다. 어깨도 좀 굽은 것 같고, 찬바람을 피하기엔 옷이 얇아 보이기도 하다. 옹알거리거나 웃을 줄도 모르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라 얼핏 처량해 보이기도 하고, 한심해 보이기도 하고 세상사에 찌든 패잔병처럼 보이기도 한다.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어지니, ‘네’와 ‘아니오’가 서로 다른 것이 얼마이겠는가?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 다른 것이 얼마이겠는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 또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노자》의〉 하편에서 “배움을 추구하는 것은 날마다 보태는 것이요 도를 추구하는 것은 날마다 덜어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배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능한 바를 보태어 자신의 지혜를 진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장차 그러한 욕구가 없이 만족한다면 어찌 보태고자 하겠는가?
알지 못하더라도 〈행실이 법도에〉 맞는다면 어찌 진전시키고자 하겠는가?
무릇 제비와 참새에게도 배필이 있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에게도 짝이 있으며, 〈마찬가지로〉 추운 지방에 사는 백성들은 반드시 털옷과 가죽옷을 지어 입을 줄 아는 법이다.
저절로 그러함이 이미 충분한데 〈거기에 무언가를〉 보탠다면 근심만 생길 뿐이다.
그러하기에 오리의 다리를 길게 잇는 것이 학의 정강이를 자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명예를 두려워하면서 〈자신의 지혜를〉 진전시키는 것이 형벌을 두려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예’와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다른 것이 얼마이겠는가?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을 나 또한 두려워하는 것이니, 감히 그런 것을 믿고서 쓰이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황량한 모습이 텅 빈 곳에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세속과 서로 어긋남이 큰 것을 한탄한 것이다.
뭇사람들이 희희낙락하며 큰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것 같고, 봄날 누각에 오르는 것 같다.
뭇사람들은 칭찬과 재물에 〈곧잘〉 미혹되고 영화와 이로움에 〈곧잘〉 미혹되어 욕심을 부리며 마음으로 다툰다.
그래서 희희낙락하며 큰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것 같고, 봄날 누각에 오르는 것 같은 것이다.
나 홀로 담박하여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모습이 아직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기 같으며,
나는 마음이 텅 비어서 이름 붙일 만한 형체가 없고 나열할 만한 조짐이 없는 것이 마치 아직 웃을 줄 모르는 갓난아이 같다고 말한 것이다.
몹시 지친 모습이 돌아갈 곳이 없는 것 같네.
거처할 곳이 없는 것 같은 것이다.
뭇사람은 모두 남음이 있는데 나홀로 잃어버린 듯하니,
뭇사람들은 생각이나 뜻을 두어 가슴속에 차고 넘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래서 ‘모두가 남음이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나홀로 텅 비어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것이 마치 잃어버린 것 같다고 한 것이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로구나.
매우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이 나누어지고 흩어지는 것이 없고, 뜻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없으니 유유한 그 마음을 볼 수 없다. 나의 쓸쓸한 마음이 이와 같다.
혼돈스럽다.
〈마음이〉 나누어지고 흩어지는 것이 없으니 무어라 이름할 수 없다.
세간의 사람들은 똑똑한데
그 밝음을 환하게 드러낸다.
나홀로 흐리멍덩하고, 세상 사람들은 잘도 살피는데
분별하고 나눈다는 뜻이다.
나홀로 어리석도다. 담담하여 바다 같고
그 마음을 볼 수 없다.
고고하여 〈산들바람처럼〉 그칠 줄을 모르는 듯하네.
〈그 무엇에도〉 매인 것이 없다.
뭇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以는 쓰인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게 일정한 자리가 주어져〉 쓰이기를 바란다.
나홀로 완고하고 비루하다.
하고 싶은 것이 없어 어리석고 흐리멍덩하니 마치 아는 것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완고하고 비루하다.”고 한 것이다.
나홀로 다른 사람과 다르고자 하여 〈만물을〉 먹이는 어미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食母란 삶의 뿌리이다. 사람은 모두 백성의 삶을 가능케 하는 그 뿌리는 버리고서 말단이나 꾸미는 화려함만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나홀로 다른 사람과 다르고자 한다.”고 했다.
21.
孔德之容(공덕지용) : 위대한 덕의 모습은
惟道是從(유도시종) : 오로지 도를 따르는 데서 나온다
道之爲物(도지위물) : 도라고 하는 것은
惟恍惟惚(유황유홀) : 황홀할 뿐이다
惚兮恍兮(홀혜황혜) : 황홀하기 그지 없지만
其中有象(기중유상) : 그 안에 형상이 있다
恍兮惚兮(황혜홀혜) : 황홀하기 그지 없지만
其中有物(기중유물) : 그 안에 질료가 있다
窈兮冥兮(요혜명혜) : 그윽하고 어둡지만
其中有精(기중유정) : 그 안에 알맹이가 있다
其精甚眞(기정심진) : 알맹이는 지극히 참된 것으로서
其中有信(기중유신) : 그 안에는 미쁨이 있다
自古及今(자고급금) : 예부터 이제까지
其名不去(기명불거) : 그 이름 없은 적이 없다
以閱衆甫(이열중보) : 그 이름으로 우리는 만물의 시원을 볼 수 있다
吾何以知衆甫之狀哉(오하이지중보지상재) : 내가 무엇으로 만물의 시원이 이러함을 알 수 있었겠는가
以此(이차) : 바로 이 때문이다
21장 오묘한 모순의 삶 위대한 덕은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다. 도는 이해하기 어려우며 만질 수도 없다. 형체가 없고 만질 수도 없음에도 형상을 이루어 낸다. 어둡고 흐릿하지만 정신이고 본질이며 만물의 살아 있는 숨결이다. 세월이 흘러도 만물의 처음을 일깨우기 위해 그 이름은 유지되었다. 내가 어떻게 만물의 시원을 알 수 있을까? 나는 내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본다. |
노자는 ‘신비로운 삶’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간다. 이 개념의 정의와 가치로 돌아가서 더욱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를 확인한다. 뭐라 말할 수도 없고 오감으로 경험할 수도 없는 도의 오묘한 본질을 아는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모순의 본보기임을 인식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으라고 말한다. “내가 어떻게 만물의 시원을 알 수 있을까? 나는 내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본다.” 이제 당신 존재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라. 당신은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 인간 세포질의 미립자에서 비롯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 더 이전으로 가보라.
양자물리학은 입자가 보이지도 않고 형태도 없는 에너지 장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당신을 포함한 모든 창조물은 형태가 없는 에너지에서 형상으로, 정신에서 육체로, 이름 없는 도에서 이름을 가진 객체로 움직여 가는 일련의 운동 작용이다. 창조의 과정은 그 이름 없음을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도덕경의 전반에서 다루어진다. 당신은 이 오묘한 모순을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경험하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시험해 보고, 만물을 창조한 바로 그 힘이 당신의 모든 생각과 행동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
집게손가락을 움직이겠다는 결정을 내려라.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보라. 그런 다음 팔을 들어 올려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동작들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근본적인 힘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라. 무엇이 당신으로 하여금 색과 모양을 볼 수 있게 해 주는가? 도대체 눈동자 뒤에 어떤 힘이 하늘을 푸르다거나 나무는 키가 커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신호를 보내는가? 귓속 어딘가에서 진동을 포착해 소리로 인식하게 만드는 형태 없는 에너지는 무엇인가?
그 모든 것은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다. 그것은 모호하다. 그것은 구름이 낀 것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면 자신의 그러한 면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노자는 이를 “만물의 살아 있는 숨결”이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더 이상 신비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당신은 내면에 그와 같은 영원한 도를 품고 있으며 이는 하루에도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당신 안에 있다. 당신이 바로 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을 지탱하는, 만질 수도 없고
정체를 알 수도 없는 그 힘에 대한 갈증을 느껴라.
만물의 근원인 도와 규칙적으로 소통하라. 도에서 길을 구하고 그 신성함에 대해 명상하라. 보이지 않는 도를 공경할수록 자신의 도와 연격 되었음을 더 많이 느낄 것이다. 도와 연결되면 에고가 세상을 바라보는 걱정, 불안,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이 부나 권력을 추구하는데 몰두하는 동안 당신은 ‘만물의 살아 있는 숨결’에 감사의 마음을 가짐으로써 따뜻한 미소를 짓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도와 신성한 협력에 있음을 알게 됨으로써 당신은 더욱 안전함을 느낄 것이다.
이 장의 마지막 두 줄을 외워서 필요할 때 나지막이 암송하라.
“내가 어떻게 만물의 시원을 알 수 있을까? 나는 내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본다.” 그렇게 하면 도는 항상 당신 내면에 있는 진실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당신이 가진 비전의 정당함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려고 애쓰지 마라. 그들 또한 준비가 되면 그들을 위한 스승을 만날 것이다. 다음은 노자가 죽고 수백 년이 지난 후에 페르시아의 서정시인 하피즈가 도의 본질에 대해 내린 결론이다.
만약 글로서
진실이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다면,
만약 입으로는 좁은 틈새로
태양과 바다가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 누군가 웃기 시작할 것이다.
누군가는 크게 웃기 시작할 것이다.
제21장은 道의 원초적 모습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인간 세상의 군주가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를 類比的으로 표현한 문장으로 볼 수 있다.
이석명은 《帛書老子》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恍忽이나 窈冥 등은 모두 희미하고 어렴풋한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즉 있는 듯하나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없고, 없는 듯하나 여전히 어떤 조짐이 존재하는 미묘한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道에 대한 표현은 사실상 이상적 통치자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말로 볼 수 있다. 도가 홀황하고 황홀하여 잘 파악할 수 없듯이 통치자 또한 자신의 속을 함부로 밖에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홀황한 도 가운데 형상[象]이 있고 사물[物]이 있고 알맹이[精]가 있듯이 통치자 또한 그러한 ‘안개 행보’ 속에 실질적인 통치 내용이 있다. 이렇게 처신할 때 도가 그러하듯이 통치자 또한 그 이름이 영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王弼은 이러한 통치자의 행동방식에 대한 의미로 풀이하지 않는다. 왕필은 無名한 道로부터 萬物이 비롯되는데 이 근원의 상태를 형용하는 말들로 忽恍, 窈冥 등을 해석하고, 오히려 이들을 통해 道 본연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여기서 王弼에게 가장 중요한 말은 所以然으로서의 道이다. 萬物은 바로 道에 의해 시작되고 이루어지므로 만물에 대한 이해는 곧 道라는 所以然을 살피는 데에 있다. 이러한 해석은 板本上의 차이와 병행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帛書本과 王弼本은 전혀 다른 텍스트가 된다.
텅 빈 德의 모습은 오로지 道를 따를 뿐이다.
孔은 텅 비다는 뜻이다. 오로지 텅 빔을 덕으로 삼은 후에야 비로소 행동이 도를 따를 수 있다.
도라는 것은 오로지 恍하고 오로지 惚하다.
‘恍惚’이란 〈구체적〉 형체가 없고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음을 탄미한 것이다.
홀하고 황하도다. 그 가운데 형상이 있으며, 황하고 홀하도다. 그 가운데 사물이 있으며,
〈도가〉 무형으로 만물을 시작하고 매이지 않음으로 만물을 이루어준다.
만물은 〈이 도에 의해〉 시작하고 이루어지지만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황하고 홀하도다. 그 가운데 물건이 있으며, 홀하고 황하도다. 그 가운데 형상이 있다.”고 하였다.
그윽하고 아득하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으며,
窈冥이란 깊고 아득함을 탄미한 말이다.
깊고 아득하여 볼 수가 없지만 만물은 그것을 말미암는다. 〈아마도 우리가 도를〉 볼 수 있는 것은 〈그 도가 만물의〉 참된 본성을 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윽하고 아득하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다.”라고 했다.
그 精氣가 매우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
信은 믿을 만한 증험이다. 만물이 그윽하고 아득함으로 돌아가면 참된 정기의 극치를 얻고 만물의 본성이 정해진다.
그래서 “그 정기가 매우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고 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않아
지극한 참됨의 극치는 이름 지을 수 없으니, ‘無名(이름 없음)’은 바로 그 이름이 된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로써 만물의 太初를 살필 수 있다.
‘衆甫’란 만물의 시작이니, 〈以閱衆甫는〉 이름 없음으로 만물의 시작을 살핀다는 뜻이다.
내가 어떻게 만물의 처음 모습을 알겠는가. 이 〈도〉로써 알 뿐이다.
此는 위에서 말한 것을 가리킨다. 내가 어떻게 만물이 ‘無’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겠는가. 이것으로 알 뿐이라는 말이다.
22.
曲則全(곡즉전) : 휘면 온전할 수 있고
枉則直(왕즉직) : 굽으면 곧아질 수 있고
窪則盈(와즉영) : 움푹 파이면 채워지게 되고
幣則新(폐즉신) : 헐리면 새로워지고
少則得(소즉득) : 적으면 얻게 되고
多則惑(다즉혹) : 많으면 미혹을 당하게 된다
是以聖人抱一爲天下式(시이성인포일위천하식) : 그러므로 성인은 <하나>를 품고 세상의 본보기가 된다
不自見故明(불자견고명) :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에 밝게 빛나고
不自是故彰(불자시고창) : 스스로 옳다 하지 않기에 돋보이고
不自伐故有功(불자벌고유공) :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에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되고
不自矜故長(불자긍고장) : 스스로 뽐내지 않기에 오래간다
夫唯不爭(부유불쟁) : 겨루지 않기에
故天下莫能與之爭(고천하막능여지쟁) : 세상이 그와 더불어 겨루지 못한다
古之所謂曲則全者(고지소위곡즉전자) : 옛말에 이르기를, 휘면 온전할 수 있다고 한 것이
豈虛言哉(개허언재) : 어찌 빈말이겠는가
誠全而歸之(성전이귀지) : 진실로 온전함을 보존하여 돌아가시오
22장 유연한 삶 유연하면 부러지지 않고 구부러지면 다시 펴진다. 비우면 채워지고 낡으면 다시 새로워진다.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된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하나 됨을 끌어안는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의 빛을 볼 수 있고,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는다. 스스로 누구인지 모르기에 사람들이 그 안에서 자신들을 보고, 마음속에 품은 목적이 없기에 하는 일마다 이루어진다. 옛사람이 유연하면 깨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옳다. 진실로 온전함을 이루면 모든 것이 자신에게로 귀결된다. |
몇 년 동안 바닷가에 살면서 물가에서 자라는 야자나무의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보았다. 그 나무들 중에는 10m가 넘는 것들도 종종 있다. 이 키 큰 나무들은 시속 300km가 넘는 태풍에도 능히 견디어 낸다. 다른 수많은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나가는데 비해 이 당당한 야자나무들은 폐허가 된 땅 위에서 자랑스럽게 흔들거린다. 이 야자나무가 뽑히거나 꺾이지 않고 살아남은 비밀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유연성이다. 이 나무들은 바람이 불면 거의 땅에 닿을 듯이 구부러지는데, 이것이야말로 나무들이 부러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다.
노자는 이런 유연성을 지니라고 이른다. 야자나무처럼 유연하게 삶의 폭풍을 견딜 수 있도록 돕는 도의 하나 됨을 느껴라. 파괴적인 에너지가 찾아오면 구부러져서 부러짐을 막아라. 저항하지 말고 그것이 흐르게 함으로서 폭풍을 이겨낼 만한 때를 찾아라. 싸우는 대신 힘을 뺀 채 직면한 모든 것과 어울려 함께 가면 ‘도의 시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온전함에 대한 또 하나의 유익한 점은 온전함이 모든 것을 끌어당긴다는 점이다. 만약 당신이 부, 지식, 건강, 사랑, 그리고 도를 상징하는 다른 것들을 원한다면 그것들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
노자는 먼저 가득 채우기 위해 먼저 비워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집착이 가득 찬 자아 속으로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다. 신념, 소유, 에고가 이끄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닌,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린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것이 도와의 어우러짐이다. 그래야만 어떠한 관점이나 방법에 얽매지 않고 생명을 불어넣는다. 유연한 사람은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다. 또한 그 무엇도 증명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도에 대한 깨달음은 곧 유연함이다. 경직된 사고를 벗어던지면 신뢰의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도는 어떠한 목적도 욕망도, 비난도 품지 않는다.
삶의 폭풍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라.
당신을 지배하는 에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라. 타인의 관심에 대한 욕구를 놓아버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당신에게 자연스레 빠져드는지 보라. “당신이 옳은 것 같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관점을 알게 해준 것에 감사드립니다.”와 같은 말로 논쟁에서 이기려는 마음과 자신이 옳아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아라. 이러한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경직된 마음을 풀 수 있게 해 준다. 왜냐하면 당신 스스로가 옳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달라진다. 그러니 기꺼이“모릅니다.” 혹은 “내가 왜 그랬는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라. 노자가 이르는 것처럼 거만한 태도와 경직된 사고를 버리면 사람들은 당신의 유연한 본질 속에서 그들 스스로를 알아보고 당신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를 크고 당당한 야자 나무라고 상상해 보라.
목표나 목적이 없는 사람이 되라. 그 대신, 자연의 힘에 순응할 수 있도록 단단히 잘 서 있어라. 마치 허리케인 같은 바람 속에서 구부린 나무처럼 그 힘을 느끼도록 자신을 내버려 둠으로써 무슨 일이 닥치든 기꺼이 받아들여라. 비판하는 이가 있거든 기꺼이 받아 들어라. 강력한 힘이 어떤 방향으로 이끌더라도 싸우지 말고 머리를 숙여라. 부러지는 대신 몸을 구부려라. 경직된 규칙에서 벗어나라. 그렇게 함으로서 당신은 부러지지 않고 보호받을 것이다. 도의 시간 속에서 ‘폭풍’을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당신의 육체가 온전히 느끼도록 내버려 두라. 도의 에너지를 향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기회로서 폭풍을 받아들일 때, 그 폭풍은 당신의 진정한 본질인 사랑을 더 많이 드러내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제22장은 老子의 유명한 逆說의 論理가 處世로 드러난 내용을 담고 있다. 굽힘과 온전함, 구부림과 곧게 펴짐, 움푹 패임과 채워짐 등은 제42장에서 말하는 ‘되돌아가는 것이 道의 운동’이라는 논리가 적용된 것이다. 즉 굽힘으로써 오히려 온전해지고, 구부림으로써 곧게 펴진다는 논리이다. 이런 이해의 방식은 河上公本이나 王弼本에서 커다란 차이는 없다.
그러나 經22.5의 “적어지면 얻고, 많아지면 미혹된다.”는 부분에서는 해석이 크게 갈린다. 河上公은 재산이나 지식이 많은 것은 미혹을 일으키니 적게 줄이고 겸손하며 스스로를 비울 것을 권하는 반면, 王弼은 이와 달리 근본으로부터 가깝고 먼 차이로 설명하여 근본으로 돌아갈 것을 권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注22.4 ‘不自矜 則其德長也(스스로 자만하지 않으면 그 덕이 오래간다.)’의 ‘長’은 ‘오래간다’와 ‘어른’의 의미를 다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영속성에 포인트를 준 개념인 ‘오래간다’로 해석하는 게 좋을 듯하다. ‘德’은 ‘總和’를 말하는 것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최고의 경지를 말한다. 누군가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하게 하는 힘이지만 바로 나에게 있는 것, 그게 바로 ‘德’이다. 반면 ‘道’는 덕을 기르기 위해 따라가야 하는 길이기도 하고, 또 그 길을 따라가야만 덕이 생긴다는 규범적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제22장은 《老子》가 분명 天下의 侯王이 따르고 본받아야 할 일종의 治術의 일부로서 處世訓의 성격을 지닌 規範으로 成立된 것임을 보여준다.
굽히면 온전해지고,
스스로의 밝음을 드러내지 않으면 온전해진다.
구부리면 곧게 펴지고,
스스로를 옳다고 하지 않으면 그 옳음이 드러난다.
〈움푹〉 파이면 채워지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면 그 공이 있게 된다.
오래되면 새로워지고,
스스로 자만하지 않으면 그 덕이 오래간다.
적어지면 얻고, 많아지면 미혹된다.
자연스러운 도는 또한 나무와 같다. 〈나뭇가지가〉 더욱 많아질수록 그 뿌리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나뭇가지가〉 더욱 적어질수록 그 근본을 더욱 얻게(가깝게) 된다.
많아지면 그 참된 본성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래서 ‘미혹된다’고 했다. 적어지면 그 근본을 얻는다. 그래서 ‘얻는다’고 했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하나를 끌어안아 천하의 모범이 되니,
하나는 가장 작은 것이다. 式이란 그것을 본받는다는 뜻과 같다.
스스로의 〈밝음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 지혜가〉 밝게 드러나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옳음이〉 드러나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 있게 되고, 스스로 자만하지 않기 때문에 〈그 덕이〉 오래간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의 그 누구도 그와 다툴 수 없다.
예로부터 이른바 “굽히면 온전해진다.”고 한 것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진실로 온전해지면 〈천하의 백성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23.
希言自然(희언자연) :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故飄風不終朝(고표풍불종조) : 회오리 바람도 아침 내내 볼 수 없고
驟雨不終日(취우불종일) : 소낙비도 하루 종일 내릴 수 없다
孰爲此者(숙위차자) : 누가 하는 일인가
天地(천지) : 하늘과 땅이다
天地尙不能久(천지상불능구) : 하늘과 땅도 이처럼 이런 일을 오래 할수 없는데
而況於人乎(이황어인호) : 하물며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故從事於道者(고종사어도자) : 그러므로 도에서 일을 따르는 사람은
道者同於道(도자동어도) : 도는 도에서 하나가 되고
德者同於德(덕자동어덕) : 덕은 덕에서 하나가 된다
失者同於失(실자동어실) : 잃음을 따르는 사람은 잃음과 하나가 됩니다
同於道者(동어도자) : 도와 하나된 사람
道亦樂得之(도역락득지) :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同於德者(동어덕자) : 덕과 하나된 사람
德亦樂得之(덕역락득지) :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하고
同於失者(동어실자) : 잃음에서 하나된 사람
失亦樂得之(실역락득지) : 역시 그를 얻었음을 기뻐할 것이다
信不足焉有不信焉(신불족언유불신언) : 신의가 모자라면 불신이 따르게 마련이다
23장 자연스러운 삶 말을 별로 하지 않는 것이 자연이다. 매서운 바람도 아침 내내 불지 않는다. 억수 같은 비도 하루 종일 내리지 않는다. 누가 이를 행하는가? 바로 하늘과 땅이다. 매서운 바람, 억수같은 비는 과장되고 강요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하늘과 땅도 오래 지속할 수가 없는데 사람이 하는 일은 오죽하겠는가? 도를 따르는 사람은 도와 하나가 되고 덕을 따르는 사람은 덕과 하나가 된다. 도와 덕에서 멀어진 사람은 실패와 하나가 된다. 만약 도에 순응한다면 그 힘이 당신을 통해 흐르고 당신의 행동은 자연의 그것이 될 것이다. 도에게 자신을 열라. 그리고 자신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믿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을 것이다. |
모여 있는 것은 결국 흩어진다. 땅위에 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항상 변화되고 흩어지는 원리의 일부이다. 이 장은 이런 자연의 길을 관찰하고 조화롭게 사는 삶을 택하라고 요구한다. 자연 안에서는 결코 고집부리거나 주장하거나 강요할 필요가 없다. 바람은 거세게 몰아치지만 때가 되면 이내 잦아든다. 만물은 영원 안에서 창조되지만 태어나는 순간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에 들어선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라. 순환하는 자연의 일부가 되는 쪽을 택하라. 하늘도 강압적인 행위를 지속할 수 없다. 모든 행위는 일시적인 모습을 지녔으며 때가 되면 고요한 상태로 돌아간다.
노자는 다툼이나 긴장의 한 복판에 있다면 잠시 멈춰서 고요와 평화가 다가오고 있음을 떠올리라고 이른다. 언제나 선택의 여지는 남아 있다. 당신은 과장되거나 강요된 에너지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 에너지는 상황을 통제하려고 하거나 삶에 저주를 퍼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에너지도 도에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이끄는 장치일 수 있다. 이것이 도를 따르는 방법이다. 도의 선함을 따르면 바로 그 선이 될 것이고, 선함에서 멀어지면 실패한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순환 법칙의 일부이다.
이 자연스러운 선한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불안과 실패 속에서 주어진 순간들을 낭비하길 원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신의 에고 속에 있지 않다. 에고는 밀어붙여서 일을 성취하거나 높은 위치에 오르려는 당신의 능력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가 억지가 아닌 자연스러움으로 만물을 책임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파괴적으로 보이는 것이 다른 순간에는 완전한 자애로움일 수 있다. 우주의 자연스러움에 순응하면 만물을 창조하는 힘이 당신을 통해 흐른다. 에고가 이끄는 계획은 뒤로 미루고 창조의 힘과 함께 하라.
자연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관찰함으로서 삶을 변화시켜라.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풍, 무시무시한 바람을 파괴적이고 불편한 사건으로 보지 말고 곧 지나갈 일시적인 현상으로 받아 들여라. 강압적이고 불편한 상황이 닥치면 자연의 순환 고리를 찾아내라. 그러고는 이렇게 다짐하라. ‘이것은 일시적인 방해 일 뿐이다. 나는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런 후 이 순간의 상황에 마음을 열고 그 안에서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관찰하라. 이것이 자연의 방식임을 기억하라. 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자연의 법칙에 마음을 집중하라.
모든 상황들에 자연스럽게 대응하는
자신의 힘을 믿음으로써 삶을 변화 시켜라.
여기에는 즉각 대응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 포함된다.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우려라. 당신의 육체는 평화로워지는 법과 삶의 폭풍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알고 있다. 육체의 그러한 신호가 환영받고 있음을 알게 해 주어야 한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 힘을 향해 자신을 열어 창조적인 도와 조화를 이루게 하라. T.S. 엘리엇은 그의 시,〈성회 수요일〉을 통해 자연의 순환을 되살려 낸다.
시간은 언제나 시간이고
공간은 언제나 공간일 뿐이며
현실은 언제나 한 순간만
그리고 오직 한 곳에서만 현실임을 알기에
나는 만물을 있는 그대로 기뻐한다.……
제23장은 老子의 말하기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이는 儒家가 취하는 것과는 사뭇 구분된다.
《論語》 〈陽貨〉에서 이렇게 말한다.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자공이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안 하시면 저희들은 무엇을 기술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네 계절이 돌아가고 만물이 생장하는데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스승 공자가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말이란 무엇일까? 말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공자는 그것을 거부한 것일까?
고대 중국의 稷下 계열의 문헌인 《管子》 〈內業〉에서는 “한마디 말이 얻어지면 하늘 아래 모두가 복종하고, 한마디 말이 정해지면 하늘 아래 모두가 경청한다.[一言得而天下服 一言定而天下聽]”고 한다. 고대 중국의 지식인 세계에서 ‘말한다는 것[言]’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말을 한다는 것, 특히 도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천하와 관련된다. 천하에 대고서 어찌 虛言을 하겠는가? 어쩌면 공자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독실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죽어도 도를 지키고 보전해야 한다. 그러나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러운 나라에서는 살지 않는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면 나와 일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숨는다.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는데도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치욕이요, 나라에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부유하거나 귀한 것은 치욕이다.[子曰 篤信好學 守死善道 危邦不入 亂邦不居 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그런데 《노자》의 말은 이와 다르다. 《노자》는 공자처럼 ‘不言’을 말하지 않는다. 물론 《노자》도 ‘불언’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行不言之敎”를 외치는 듯하지만, 실상 그가 말하는 진의는 다른 곳에 있다. 제왕은 말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河上公注는 아주 단순하다. “희언이란 말을 아끼라는 뜻이다. 말을 아끼는 것이 자연의 도이다.[希言者 謂愛言也 愛言者 自然之道]” 황제가 하는 말은 그 자체로 법과도 같다.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失言은 용서되지 않는다. 아낄수록 좋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王弼은 말을 돌린다. ‘希言’에 나름 심원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노자》 經14.1에서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이름하여 ‘希’라 한다.”고 했고, 《노자》 經35.3에서는 “도에 대해 입으로 내뱉는 말은 담담하여 아무 맛이 없고 쳐다보아도 잘 보이지 않고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무 맛이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란 곧 自然의 지극한 말이다.
‘希’는 이미 《노자》에서 말하듯,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단순하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감각이나 경험을 초월하여 있는 실체나 선험적 존재에 대한 말은 아니다. 왕필은 그것이 ‘자연의 지극한 말’ 또는 ‘도에 대해 하는 말’이라고 부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 맛이 없고〉 들리지 않는 말이 자연〈에 대한〉 지극한 말이다.
〈《노자》 經14.1에서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이름하여 ‘희미하다[希]’”고 했고, 뒤의 장 〈《노자》 經35.3에서는〉 “도에 대해 입으로 내뱉는 말은 담담하여 아무 맛이 없고 보아도 잘 보이지 않고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아무 맛이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란 곧 自然에 대한 지극한 말이다.
그러므로 사나운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을 넘기지 않고, 퍼붓는 소낙비는 한나절을 가지 않는다.
누가 이렇게 하는가?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도 오래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사납고 빠르고 아름답고 급히 일어난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도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자는 도를 행하는 것이 도와 같아지고,
從事란 거동함에 있어 도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도는 형체도 없이 함도 없이 만물을 이루고 다스린다.
그래서 도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자는 〈《노자》 2장에서 말한 성인과 같이〉 “無爲로써 거하고 말하지 않음을 가르침으로 삼으며”,
〈《노자》 6장에서 하늘과 땅의 뿌리처럼〉 “면면히 이어지는 듯이” 하는데 만물은 저마다의 ‘참된 본성[眞]’을 얻는다.
도를 행하면 도와 한 몸이 된다. 그래서 “도와 같아진다.”고 한 것이다.
〈도를〉 얻도록 〈적게 행하는〉 자는 얻음과 같아지고,
得은 ‘적어진다’는 뜻이다. 〈《노자》 經22.5에서 말하였듯이〉 적어지면 얻는다.
그래서 ‘얻는다’고 했다. 〈이와 같은 방식의〉 얻음을 행하면 얻음과 한 몸이 된다. 그래서 “얻음과 같아진다.”고 했다.
〈도를〉 잃도록 〈매이는 게 많은〉 자는 잃음과 같아질 것이다.
失은 ‘매이는 게 많다’는 뜻이다. 매이는 것이 많으면 〈도를〉 잃게 된다.
그래서 “잃는다.”고 했다. 〈이와 같은 방식의〉 잃음을 행하면 잃음과 한 몸이 된다. 그래서 “잃음과 같아진다.”고 했다.
도와 같아진 사람은 도 또한 그를 즐거이 얻을 것이요, 얻음과 같아진 자는 얻음 또한 즐거이 그를 얻을 것이요, 잃음과 같아진 자는 잃음 또한 즐거이 그를 얻을 것이다.
저마다 그 행하는 바에 따르기 때문에 같은 것이 그에 응한다는 말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윗사람에게〉 믿음이 부족하면 〈백성들 사이에〉 불신이 생겨난다.
〈나라를 다스리는〉 윗사람에게 충실함과 믿음이 부족하면 〈백성들 사이에〉 불신이 생겨난다.
24.
企者不立(기자불립) :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단단히 설 수 있고
跨者不行(과자불행) : 다리를 너무 벌리는 사람은 걸을 수 없다
自見者不明(자견자불명) :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사람은 밝게 빛날 수 없고
自是者不彰(자시자불창) : 스스로 의롭다 하는 사람은 돋보일 수 없고
自伐者無功(자벌자무공) :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自矜者不長(자긍자불장) :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오래갈 수 없다
其在道也(기재도야) : 도의 입장에서 보면
曰餘食贅行(왈여식췌행) : 이런 일은 밥찌꺼지 군더더기 같은 행동으로
物或惡之(물혹악지) :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 그러므로 도의 사람은 이런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24장 넘치지 않는 삶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단단히 서 있을 수 없고 큰 걸음으로 걷는 사람은 멀리 갈 수가 없다. 과시하는 사람은 밝게 빛나지 않고 자랑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며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존경받지 못하고 뽐내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한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밉살스럽고 불쾌하다. 그것들은 불필요한 찌꺼기이다. 그것들은 마치 뱃속의 통증과 같고 몸속의 종양과 같다. 도의 길을 갈 때는 이런 것들을 버리고, 뽑아내고, 내던져야 한다. |
도를 추구함에 있어 개인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안 된다. 모든 성취는 만물을 창조하는 근원인 도에서 비롯된다. 보고 만지고 소유하는 것들이 도가 주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에고를 배제하고 도의 창조성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과 감사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도와 닮아가고 그 길을 가게 된다. 이 장은 이처럼 끝없이 내어주는 상태로 돌아가라고 재촉한다. 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주목하라. 도는 음식, 공기, 땅, 햇빛, 등등 모든 아름다움까지 다 주지만 그 보담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도는 모두의 이익을 위해 창조한다. 교만하게 뽐내거나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태양은 활동하는 도를 상징한다. 태양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지구를 비추며 그 따뜻함과 빛과 생명의 에너지를 나누어 준다. 만약 태양이 대가로 칭찬을 요구했다면 어땠을까? 감사나 대가를 받았을 때만 빛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지구는 전쟁이 벌어져 어둠으로 덮일 것이다. 자랑하며 옳다고 하는 성향을 노자가 “밉살스럽고”, “몸속의 종양과 같다.”고 말한 까닭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됨으로서 도의 길을 가라. 보답을 바라지 말고 베풀어라. 자랑하거나 칭찬받고 싶은 욕망을 쓸데없는 것들로 간주하라. 당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에고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갖고
당신의 삶을 변화시켜라.
현재 당신의 상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면 삶이 변화할 것이다. 깨어있는 동안, 그리고 잠들 때와 일어 날 때, “감사합니다.”라고 반복해 보라. 그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없다. 하느님, 부처, 알라, 자기 자신이어도 좋다. 햇빛, 비 그리고 당신의 육체에 감사하라. 이렇게 감사하는 연습을 하면 에고에 갇히게 되더라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만물의 진정한 근원에 집중할 수 있다. 이 조용한 연습을 매일 실천하라. 아침이 되면 눈앞에 놓인 것들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그러고 나서 이 땅의 다른 누군가에게 다정한 무언가를 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라.
자랑하거나 옳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을
돌아보면서 삶을 변화시켜라.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경력이나 성취에 대해서 자랑하기 전에 먼저 그 충동을 감지하라. “이런 것들은 버리고, 뽑아내고, 내던져야 한다.”라고 말한 노자의 충고를 생각하라. 도의 길에서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것은 건강하고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옳음을 주장하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일이다.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고 남의 실패를 비웃는 버릇이 고개를 들면 이 24장을 기억해냄으로서 도의 길로 되돌아 올 수 있다. 그러면 잘난체하는 말들과 거들먹거리는 행동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본래의 겸손함으로 돌아가 모든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위대함을 발견하는 순간, 당신의 삶에서 자만심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도의 방식이다.
제24장은 자신의 능력을 어찌 쓸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겅중겅중 걸으면 오래 갈 수 없다. 스스로 드러내면 밝지 못하다. 스스로 옳다고 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스스로 자랑하면 공이 없다. 스스로 뽐내면 오래가지 못한다.” 왕필은 ‘物尙進則失安’이라고 해서 “나아가는 것을 숭상하면 안정을 잃는다.”고 했다. 나아간다는 건 ‘進(출사)’을 말하는데, 발돋움해 출사하면 즉, 자기 능력보다 지나치게 앞서 나아가면 편안하지 않아 오래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가는 게 뛰어나고 좋은 것 같아 보여도 그게 “다 먹다 남은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企’는 ‘고대 導引術의 한 동작’을 가리키는 단어로 ‘발뒤꿈치를 든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편으론 내 능력을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 왕필은 인간 사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各得其所’한 상태라고 보았다. 즉, 각자(物)가 있어 마땅한 자리, 능력에 맞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各得其所’란 원래 《漢書》 〈東方朔傳〉에 나오는 이야기로 생각해볼 수 있다.
漢 武帝 때, 무제의 누이인 隆慮公主는 아들 昭平君을 한 무제의 딸과 맺어주었는데, 소평군이 망나니였나 보다. 병으로 위독하던 융려공주가 황금과 돈을 무제에게 바치고 다음과 같이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이 담에 내 아들이 죽을죄를 짓더라도 부디 용서해주세요.”
어머니의 기우대로 소평군은 날로 교만해졌고, 술에 취해 공주 보모를 죽여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사법을 담당하던 관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자, 한 무제 주위에 있던 신하들은 모두 소평군 편을 들었다.
“돌아가신 융려공주의 아드님이니 봐주시지요. 전에 속죄금까지 바치지 않았습니까?”
무제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는데, 동생에 대한 동정보다는 임금의 도리를 택하고 만다. 그것을 본 동방삭이 임금의 용기 있는 행동을 칭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이 듣건대, 聖王께서는 정사를 베푸시매 상을 줌에는 원수도 꺼리지 아니하고, 죄 지은 자를 죽임에 骨肉之親이라도 골라내지 않는다 했습니다. 《尙書》에 이르기를 ‘한 곳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무리를 짓지 아니하니 왕의 길은 넓고도 넓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두 가지 것은 五帝께서 소중히 여기신 법이며, 三王도 하기 어려워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행하셨으니 이로써 四海의 만백성들은 모두 자기의 맡은 바를 지키며 살 수 있을 것이니[是以四海之內 元元之民 各得其所] 천하를 위해서는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능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適性이란 말을 많이 쓰는데, 적성이란 말이 원래 의미와는 약간 다르게 쓰인다. 적성이란 郭象이 쓴 용어인데, 지금은 “타고난 재주와 능력”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지만, 원래 의미는 “타고난 본분에 맞춘다.”는 뜻이다. 왕필이 말한 ‘適用’과 비슷한 의미이다. 하지만 왕필과 곽상은 방점을 찍는 부분이 다른데, 곽상은 性 즉 출신성분, 명분에 포인트를 두고 있지만 왕필은 用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 곽상은 晉代 사상가로 《莊子》에 주석한 학자이다. 계층적 신분 질서를 天理라고 인정했고, 개별적인 개체도 ‘性分’이나 ‘位階’에 몸을 맡김으로써 자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발꿈치를 들고 서는 자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만물이 나아감(출세)을 숭상하면 安定을 잃는다. 그래서 “발꿈치를 들고 서는 자는 제대로 서지 못한다.”고 했다.
겅중겅중 걷는 자는 오래 길을 다니지 못하니, 스스로 드러내는 자는 밝지 않고, 스스로 옳다고 하는 자는 드러나지 않고, 스스로 뽐내는 자는 공이 없고, 스스로 자랑하는 자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것을 道에 있어 먹다 남은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동이라고 하니,
오로지 도의 측면에서 논하자면 郤至의 행동과 잘 차려진 잔치상의 남은 음식과 같다.
본래 아름답다 해도 다시 더러워질 수 있으니, 본래 공이 있어도 스스로 자랑하는 까닭에 다시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되는 것이다.
만물은 대체로 그런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도가 있는 자는 그렇게 처신하지 않는다.
25.
有物混成(유물혼성) : 분화되지 않은 완전한 무엇
先天地生(선천지생) :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다
寂兮寥兮(적혜요혜) :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고
獨立不改(독립불개) : 무엇에 의존하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周行而不殆(주행이불태) : 두루 편만하여 계속 움직이나 없어질 위험이 없다
可以爲天下母(가이위천하모) : 가히 세상의 어머니라 하겠다
吾不知其名(오불지기명) : 나는 그 이름을 모른다
字之曰道(자지왈도) : 그저 <도>라 불러 본다
强爲之名曰大(강위지명왈대) : 구태여 명명하라 한다면 <크다>고 하겠다
大曰逝(대왈서) : 크다고 하는 것은 끝없이 뻗어 간다는 것
逝曰遠(서왈원) : 끝없이 뻗어 간다는 것은 멀리 멀리 나가는 것
遠曰反(원왈반) : 멀리 멀리 간다는 것은 되돌아가는 것이다
故道大(고도대) : 그러므로 도도 크고
天大(천대) : 하늘도 크고
地大(지대) : 땅도 크고
王亦大(왕역대) : 임금도 크다
域中有四大(역중유사대) : 세상에는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而王居其一焉(이왕거기일언) : 사람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人法地(인법지) : 사람은 땅을 본받고
地法天(지법천) : 땅은 하늘을 본받고
天法道(천법도) : 하늘은 도를 본받고
道法自然(도법자연) :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25장 위대한 삶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에 형태가 없으면서 완전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다. 홀로 서 있으며, 변하지 않는다.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하고 영원히 존재하니 천하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더 나은 이름을 알지 못하여 나는 그저 도(道)라 부른다. 이를 굳이 표현하자면 거대함이라고 하겠다. 거대하면 끝이 없고 끝이 없으면 영원히 흘러가며 영원히 흘러가면 변함없이 돌아온다. 그런 고로 도는 거대하고 하늘도 거대하고, 땅도 거대하고, 사람도 거대하다. 사람을 알기 위해 땅을 알고 땅을 알기 위해 하늘을 알며 하늘을 알기 위해 도를 알고 도를 알기 위해 자기 안의 그 거대함을 안다. |
수세기에 걸쳐《도덕경》을 연구해 온 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 25장을 가장 중요한 장 중 하나로 생각한다. 이 장은 천지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형태가 없으면서 완전한 무언가”가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이 형태 없는 완전함이 “천하의 어머니”라며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는 이를 ‘도(道)’라고 부른다. 모든 만물에 존재하는 완전하고 영원한 에너지이다. 도에서 생명을 얻은 당신에게 이 이야기가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고, 삶이 변해가는 것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노자의 놀라운 지혜는 역사상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켜 왔다. 그의 견해와 상반되 사상과 관념들을 점검해 보는 것으로 당신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릴리안 스미스는 그녀의 책 《여정》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사람이 삶의 하루하루를 느끼는데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보다 큰 무언가, 자기 자신보다 더 활기찬 무언가, 자기 자신보다 더 오래된 무언가,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무언가, 즉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이어질 무안가와 교감하는 것이다.
이 영속적인 ‘무언가’는 당신의 거대함, 그리고 당신의 무한함과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거기에서 우리는 거대함 그 자체인 더 높은 단계의 상대와 영원한 조화를 이룬다. 노자는 하늘을 깊이 살피고 거대함을 깨달으라고 이른다. 그 다음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 역시 일부임을 깨달으라. 자신 안에 숨겨진 거대함을 발견함으로서 창조의 신비와 친구가 되는 것이다. 하늘과 땅 그 안의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힘을 알아채라. ‘거대함이라는 유산’을 가지고 도를 의식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거대함을 마음에 품고 있다면 당신에게는 그것만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내면에 열등함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믿음에 걸맞은 사건들만 벌어질 것이다. 교실에서는 거대함을 발견할 수 없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내면에 있다. 내면에 흐르는 거대함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감사의 명상 속에서 만나라. 그 반대의 관점들에 흔들리지 마라. 특히 내면에 떠오르는 비판적인 생각들이 떠오르면 그 생각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도록 내버려두라. 그렇게 하면 그 생각들이 원하는 것은 만족임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거대함을 믿어라.
지금 당신이 갖고 있는 육체가 당신의 전부가 아니다. 육체는 일시적인 것이며 당신은 자신이 태어난 미지의 세계로 돌아가고 있다. 당신은 순수한 거대함이다. 생명을 창조한 그 거대함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 생각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라. 그러면 창조의 힘을 당신에게로 끌어당기게 될 것이다. 적절한 사람이 나타날 것이고 당신이 바라던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거대함은 더 큰 거대함을 스스로에게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현실을 불평하면 그러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요동치는 것처럼 말이다. 계속 다짐하라. “나는 거대함에서 비롯되었고, 거대함을 끄ㄹ어 당긴다. 내가 바로 거대함이다.”
당신이 거대한 존재임을
부정하는 생각들을 찾아라.
자신이 보잘것없다고 믿는 말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자신을 구해내라. 조용하게 그리고 따뜻한 목소리로 그런 믿음을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 믿음은 어떠한 실망이나 고통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속 관심을 기우리다 보면 결국에는 그 생각 안에서 거대하다고 느끼고 싶은 욕구를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놓아두라! 당신은 실망과 고통을 견뎌낼 만큼 충분히 훌륭하다. 자신이 탁월하지 않다는 믿음 뒤에 숨어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애쓰는 것은 지나친 반응이다. 이런 그릇된 신념들을 찾아라. 그리고 그들에게 변모할 기회를 주라. 되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 일은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거야.’가 아닌 ‘조만간 그렇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내면의 변화를 이루어내라. 그러고 나서는 당신이 소망하는 것이 정말로 이루어질 것임을 믿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증거라도 찾아내는 과정을 시작하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생각대로 된다.’
제25장에서 老子는 ‘무엇인가 섞여 이루어진 것’이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왕필은 “누구의 자손인지 알지 못하므로 천지보다 먼저 생겨났다고 했다.”라고 하면서 그걸 약간 비틀어 이야기하고 있다.
‘混成’이란 만물의 다양성을 말하는 것이고, 도의 출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混成’에서 ‘混’은 《장자》에 나오는 ‘渾沌(混沌)’을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건 중국 신화에 나오는 혼돈 이야기와 《장자》에 나오는 혼돈 이야기가 다르다는 점이다. 신화에서는 혼돈을 어둑한 한 덩어리, 하나의 달걀 같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어두침침해 앞이 잘 보이지 않자 화가 난 盤古가 도끼를 힘껏 휘둘렀고, 그 바람에 달걀이 깨져 달걀 속에 있던 가볍고 맑은 기운은 점점 올라가 하늘이 되었고, 무겁고 탁한 기운은 가라앉아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혼돈으로부터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자》에서는 이 이야기를 다르게 변주하고 있다. 눈, 코, 입, 귀가 없는 존재인 혼돈을 답답하게 생각한 북해의 천제인 忽과 남해의 왕 熟이 매일 한 개씩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주어, 혼돈을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有爲와 無爲의 의미도 생각해볼 수 있다. 儒家가 말하는 有爲란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을 말하며, 無爲란 有爲하는 사람들 위에서 내려다보는 행위이다. 노자는 근본적으로 有爲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인데, 無形(無名)을 통해서 心(道)을 말하려고 했다. 얼굴 표면 속에 감추어진 마음(내면)을 읽고자 했다는 것. 도를 통해 陰陽, 四時, 우리 삶의 이치를 설명하고 싶어 했던 것! 그럼으로써 주기적이며 규칙적인 규범적이고 규율적인 道(길)를 찾고 싶었던 것이 노자의 관심이다.
뒤섞인 가운데 〈만물을〉 이루어주는 것이 있으니,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겨났다!
뒤섞여 있어 알 수 없는데 만물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그래서 “뒤섞인 가운데 이루어준다.”고 했다. 〈이미 《노자》 經4.1에서 말하였듯이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것은 天地보다 먼저 생겨났다.
고요하고 텅 비었구나! 홀로 서서 〈변화의 한가운데에서도〉 바뀌지 않고,
‘寂寥’는 아무런 형체가 없는 것이다.
만물 가운데 〈어느 것도 그에〉 짝할 수 없으므로 ‘홀로 서다.’라고 했다.
돌아오고 변화하고 마치고 시작함에 그 항상됨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바뀌지 않는다.’라고 했다.
두루 다니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어미가 될 만하다.
두루 다녀서 이르지 못할 곳이 없으면서 위태로움을 면하고, 커다란 형체를 낳고 온전히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천하의 어미가 될 만한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여
이름이란 〈어떤 사물의〉 형체를 규정하는 것이다. 뒤섞인 가운데 이루어주고 형체가 없어 〈그 이름을〉 규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라고 했다.
字를 붙여 道라고 하고
무릇 이름이란 그것을 통해 〈어떤 사물의〉 형체를 규정하는 것이요 字란 그것을 통해 대략[可]을 지칭하는 것이다.
도는 만물 가운데 어느 것도 그것을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는 데에서 취한 것이다.
이것은 〈道가〉 뒤섞여 있으면서 〈만물을〉 이루어주는 중에 말로 할 수 있는 지칭 가운데 가장 큰 것임을 말한 것이다.
억지로 이름을 지어 ‘크다’고 말하였다.
내가 字를 지어 道라고 말한 까닭은 그것이 말로 할 수 있는 지칭 가운데 가장 큰 것을 취했기 때문이다.
字를 정하게 된 까닭을 너무 깊이 따지면 ‘크다’는 말에 매이게 된다.
크다는 말에 매이게 되면 반드시 나뉨이 있고, 나뉨이 있으면 그 궁극성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억지로 이름을 지어 ‘크다’고 하였다.”라고 했다.
큰 것은 가기 마련이고,
逝는 ‘다니다[行]’는 뜻이다. 하나의 커다란 몸을 지키며 머물지 않고, 두루 다녀서 이르지 못할 곳이 없다.
그래서 “가기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가는 것은 멀어지기 마련이고, 멀어진 것은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遠은 ‘다한다’는 뜻이다. 두루 다녀서 끝까지 다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나 한쪽으로 가는 데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그래서 “멀어지기 마련이다.”라고 했다.
나아간 곳을 따르지 않으나 그 몸이 홀로 선다. 그래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도가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고, 왕 또한 크다.
“하늘과 땅이 낳은 만물의 본성 가운데 사람이 가장 존귀하다.”고 하였는데 왕은 바로 사람의 주인이다.
비록 큰 것을 맡지는 않았으나 또한 다시 큰 것이 된다. 다른 세 가지 큰 것과 짝이 되기 때문에 “왕 또한 크다.”고 했다.
〈이름 지을 수 없는〉 영역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네 가지 큰 것이란 도, 하늘, 땅, 왕이다.
무릇 만물 가운데 지칭이 있고 이름이 있으면 그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道라고 말하면 말미암는 것이 있는데 말미암는 것이 있은 후에야 그것을 일컬어서 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도는 곧 지칭되어지는 것 가운데 큰 것으로 지칭이 없는 큰 것만 못하다.
지칭이 없으면 이름 지을 수 없는 까닭에 ‘域’이라 하였다. 도, 하늘, 땅, 왕은 모두 지칭이 없는 영역 안에 있다.
그래서 “〈이름 지을 수 없는〉 영역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다.”고 했다.
왕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의 자리를 차지한다.
〈왕 또한〉 사람의 주인이라는 커다란 〈자리에〉 처한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法이란 ‘본받는다[法則]’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주인이 되는〉 사람은 땅을 어기지 않아야 〈자신의〉 평안함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땅을 본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땅은 하늘을 어기지 않아야 온전하게 〈만물을〉 실을 수 있다. 이것이 “하늘을 본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하늘은 도를 어기지 않아야 온전하게 〈만물을〉 덮어줄 수 있다. 이것이 “도를 본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어기지 않아야 〈만물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다는 것은 네모난 데 있으면 네모남을 본받고 동그란 데 있으면 동그람을 본받으니, 스스로 그러함에 대해서 어기는 게 없는 것이다.
‘自然’이란 말은 지칭하는 게 없는 말이며 궁극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세상의 왕이 습관처럼 그렇게 하듯이〉 꾀를 쓰는 것은 ‘無知’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땅처럼〉 ‘물리적 형태[形魄]’가 있는 것은 〈하늘처럼〉 ‘정미한 기로 이루어진 상[精象]’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정미한 기로 이루어진 상’은 〈도와 같이〉 ‘無形’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陰陽과 같이 두 가지〉 ‘기준을 갖는 것[有儀]’은 〈스스로 그러함과 같이〉 ‘기준 없는 것[無儀]’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이와 같은 까닭에 돌아가며 서로 본받는 것이다. 도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으니 하늘이 이러한 도를 바탕으로 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늘이 도를 본받으니 땅이 이러한 하늘을 본받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땅이 하늘을 본받으니 〈다른 사람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 이러한 땅을 본받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누구든 다른 모든 사람의〉 주인이 되는 까닭은 아마도 〈이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것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26.
重爲輕根(중위경근) :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이다
靜爲躁君(정위조군) : 조용한 것은 조급한 것의 주인이다
是以聖人終日行(시이성인종일행) : 그러므로 성인은 하루 종일 다닐지라도
不離輜重(불리치중) : 짐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雖有榮觀(수유영관) : 화려한 경관이 있을지라도
燕處超然(연처초연) : 의연하고 초연할 뿐이다
柰何萬乘之主(내하만승지주) : 만 대의 전차를 가진 나라의 임금이
而以身輕天下(이이신경천하) : 어찌 세상에서 가볍게 처신할 수 있겠는가
輕則失本(경즉실본) : 가볍게 처신하면 그 근본을 잃게 되고
躁則失君(조즉실군) : 조급하게 행동하면 임금의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26장 평온한 삶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이고 고요함은 조급함의 주인이다. 이를 깨달아 성인은 모든 행동을 함에 있어 침착하고 집중한다. 화려한 생활 속에 있을지라도 흔들이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어찌 나라의 군주가 어리석고 경솔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바람에 흔들리게 내버려두면 그 근본을 잃게 되고 침착하지 못하면 자기 통제력을 잃는다. |
노자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을 보더라도 침착함을 잃지 말라고 권한다. 또한 진정한 성인은 고요한 상태에 머무르는 능력이 언제나 우리 내면에 있음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느끼는 것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필요가 없다. 비록 세상에 비난과 모함이 가득할지언정 우리의 감정과 행동은 자신의 몫이며, 주변 환경이 우리의 마음 상태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정하는 힘은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다. 혼란의 한복판에 서있다 할지라도 평화로운 내면을 유지하면 삶은 달라진다.
노자는 그런 삶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혼란스러운 상태에 머물고 싶은가? 아니면 고요한 내면의 풍광을 갖고 싶은가? 이것은 당신에게 달려 잇다! 이러한 통찰로 무장한 성인은 어ㄸ너 외부의 사건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다. 평온하지 못한다고 원망을 늘어놓는 것으로는 당신이 원하는 존재의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 자기 통제력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그 느낌에 대해서 책임질 때에야 피어난다.당신은 도덕경의 글 속으로 깊이 빠져들고 싶을 것이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을 것이다.
현재 당신이 어떤 기분상태이든 간에 변화하는 경제상황이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건들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외부 요인들을 이유로 들어 내적 마음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당신의 근원과의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신을 변하기 쉬운 환경의 바람 속에 “흔들리게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조급한 삶에 대한 처방은 고요함을 택하는 것이다. 만물의 세상에서 온갖 소란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다. “고요함은 조급한의 주인아디.” 당신은 매 순간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당신을 둘러싼 환경이 어떻든
내면으로부터 고요하게 반응하겠노라고 다짐하라.
어떤 종류의 조급함속에 있더라도 자신의 고요한 중심을 찾겠다고 결심하라.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크게 심호흡을 하고 비판하는 마음을 없애면 결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거나 경솔해지지 않는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조차도 당신은 고요함을 선택할 수 있다.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 먹는 순간 당신은 “조급함의 주인인 고요함”이 될 것이다. 과거에 혼란과 분노를 선택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나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가장 골치 아픔 상황 속에서도 내가 선택한 것은 도의 방식인 고요함을 알고 있다.
자신의 근원을 잃지 마라.
집에나 직장에 위와 같은 문구나 그림을 놓아둠으로서, 당신의 동의 없이는 그 누구도 당신의 근원을 훼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켜라. 매순간 이렇게 다짐하라.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침착하게 중심을 잡을 수 있다.” 앞으로 조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이 새로운 존재의 방식을 실천하겠다고 맹세하라. 이 과정을 머릿속에 그려보라. 그러면 노자가 이 장에서 말한 자기 통제력을 갖게 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신의 궁극적 소명인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조용한 공간에 앉아 오랫동안 대립해 온 사람이 눈앞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제 큰 소리로 말하라. “당신을 용서합니다. 사랑과 빛으로 당신을 감싸겠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26장은 크게 보아서 군주가 따라야 하는 신중하고 무게 있는 행동[重],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는 것[靜]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김홍경은 《노자》에서 이것이 ‘勢’의 통치술을 강조하는 愼到 사상을 담은 문헌인 《呂氏春秋》 〈愼勢〉와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역대의 학자들은 ‘輜重(물자를 실은 무거운 짐수레)’과 같은 표현에 착안하여 전쟁 중의 이동 상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든 큰 차이는 없는 듯하다. 또한 《韓非子》 〈喩老〉에서는 趙나라 武靈王(主父)의 사례를 들어 이 내용을 해석한다.
《노자》 제26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해석은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 《韓非子》 〈喩老〉이다. 이 부분에 대한 한비자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통제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무게 있다[重]’고 하고 자신의 자리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을 ‘고요하다[靜]’고 한다. 무게가 있으면 능히 가벼운 자를 부릴 수 있고, 고요하면 능히 조급한 자를 부릴 수 있다. 그래서 《노자》에서는 “무거움은 가벼움의 근본이 되고, 고요함은 조급함의 군주가 된다.”고 하였다. ‘나라[邦]’란 군주에게 〈전쟁 시에 군수물자를 실은 무거운 수레인〉 輜重이다. 그래서 “군자는 종일토록 길을 다녀도 치중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조나라의 무령왕〉 主父는 살아 있을 때에 〈둘째 아들 何(惠文王)에게〉 나라를 물려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치중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북쪽의〉 代와 〈서쪽의〉 雲中을 〈경략한 후에 돌아와서 큰 잔치를 벌이는〉 즐거움이 있었으나 초연하게 이미 조나라를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주보는 만승의 군주이면서 자신의 몸을 천하에 가볍게 굴린 것이다. 권세를 잃는 것을 ‘가볍다[輕]’고 하고 그 자리를 떠난 것을 ‘조급하다[躁]’고 한다. 이 때문에 주보는 생전에 유폐되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에서 말하기를 “가볍게 처신하면 신하를 잃고 조급히 굴면 군주의 지위를 잃는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주보를 가리켜 한 말이다.
《한비자》의 《노자》 풀이는 간단하고 합리적이다. “통제력이 자신에게 있는 것[制在己]”이 ‘무거움[重]’이고, “권세가 없는 것[無勢]”이 ‘가벼움[輕]’이다. “자신의 지위(자리)로부터 떠나지 않는 것”이 ‘고요함[靜]’이요, “자신의 자리(지위)를 떠난 것”이 ‘조급함[躁]’이다. 아주 단순하지 않은가? 상황에 대한 통제력이 있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고 떠나지 않는 것이 무거움이라면 권세나 세력을 잃고 자신의 지위나 자리에서 떠나거나 제 처지에 맞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가볍거나 조급한 행동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싶다. 《노자》가 염두에 두었던 상황은 이와 조금 다르다. 《노자》에서 말하는 상황은 ‘榮觀’과 ‘燕處’의 대비를 통해 드러난다. 그것이 화려한 궁실이든 아니면 전쟁터에서 행군하던 중에 마주치게 되는 적의 진지와 망루를 눈앞에 둔 상황이든 초연함을 잃지 않는 것과 통한다. 왕필은 이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주석한다. “마음을 흩뜨리지 않는 것[不以經心]”일 뿐이다. 온갖 환락과 유흥이 즐비할 때 마음이 흩어지지 않을 사람은 드물다. 그렇기에 무거움이란 사실 초연함과 같은 것이고, 그래서 그는 가볍게 행동하거나 조급히 굴지 않는다.
孔子는 일찍이 “군자가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않고, 학문을 해도 굳건하지 않다. 충실함과 신의를 위주로 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고, 잘못을 저지르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論語》 〈學而〉)고 했다. 무거움이든 중후함이든 이른바 사회의 지도자나 리더에게는 이것이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가벼운 사람보다는 신중하고 중후한 사람이, 조급하고 경솔한 사람보다는 초연하고 침착한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다. 심지어 위험한 상황에서는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노자》의 ‘무거움’이란 이렇게 왕필이 다시 긍정하듯 ‘자리를 잃지 않기 위한 失位’이다. 하지만 공자의 무거움은 이로부터 조금 더 나아간다. 증자는 공자가 생각했던 무거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선비는 포용력이 있고 강인해야 한다.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仁이 바로 자기의 책임이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다음에야 그칠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論語》 〈泰伯〉) 책임이 무겁다! 인을 실현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무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하에 대한 책임, 어쩌면 그것이 선비와 군자, 성인에게 무거움을 주는 것인지 모른다.
무거움은 가벼움의 근본이 되고, 고요함은 조급함의 군주가 된다.
무릇 사물은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을 실을 수 없고, 작은 것은 큰 것을 진압할 수 없으며, 행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을〉 행하게 하고, 움직이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움직임을 제재한다.
이러한 까닭에 무거움은 반드시 가벼움의 근본이 되고 고요함은 반드시 조급함의 군주가 되는 법이다.
이런 까닭에 聖人은 종일토록 길을 다녀도 輜重을 떠나지 않고
무거움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래서 〈전쟁 시에 군수물자를 실은 무거운 수레인 輜重에서〉 떠나지 않는다.
비록 영화롭게 호사를 누리며 살더라도 한가로이 초연함을 잃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들로 마음을 흐뜨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전차 만대를 부리는 주인이면서 어찌 그 몸을 천하에 가볍게 처신하겠는가.
가볍게 처신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히 굴면 군주의 지위를 잃게 된다.
가벼움은 무거움을 진압할 수 없다. ‘失本’이란 목숨을 잃게 된다[喪身]는 뜻이고, ‘失君’이란 군주의 지위를 잃는다는 뜻이다.
27.
善行無轍迹(선행무철적) : 정말로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달린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善言無瑕謫(선언무하적) : 정말로 잘하는 말에는 흠이나 티가 없다
善數不用籌策(선수불용주책) : 정말로 계산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계산기가 필요없다
善閉無關楗而不可開(선폐무관건이불가개) : 정말로 잘 닫힌 문은 빗장이 없어도 열리지 않는다
善結無繩約而不可解(선결무승약이불가해) : 정말로 잘 맺어진 매듭은 졸라매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다
是以聖人常善求人(시이성인상선구인) :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 주고
故無棄人(고무기인) : 아무도 버리지 않는다
常善救物(상선구물) : 물걸을 잘 아끼고
故無棄物(고무기물) :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
是謂襲明(시위습명) : 이를 일러 밝음을 터득함이라 한다
故善人者(고선인자) :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不善人之師(불선인지사) :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요
不善人者(불선인자) : 선하지 못한 사람은
善人之資(선인지자) : 선한 사람의 감이다
不貴其師(불귀기사) : 스승을 귀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나
不愛其資(불애기자) : 감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雖智大迷(수지대미) : 비록 지혜롭다 자처하더라도 크게 미혹된 상태이다
是謂要妙(시위요묘) : 이것이 바로 기막힌 신비이다
27장 내면의 빛을 따르는 삶 진리를 아는 사람은 길을 갈 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일을 할 때 상처를 주지 않으며 줄 때 계산을 하지 않는다. 문을 닫으면 열쇠로 잠그지 않아도 열리지 않고 매듭을 묶으면 노끈이 아니어도 풀리지 않는다. 지혜를 갖고 모든 존재를 치우침 없이 도와주라. 어느 하나 포기하지 마라. 기회를 그냥 흘러 보내지 마라. 이를 일러 빛의 따름이라고 한다.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며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과업이다. 스승을 존경하지 않고 학생을 보살피지 않으면 반드시 혼란스러운 상황이 생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신비이다. |
돈이나 값비싼 물건들이 방 안 탁자에 놓여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당신은 방문을 마주 보고 서 있다. 이제 탁자에 가득 쌓여 있는 진귀한 장신구, 돈, 그리고 문서들이 더없이 안전하다고 상상하라. 보험도 필요 없다. 안전 보안 장치도 필요 없다. 그럼에도 아무도 당신의 보물을 훔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완전히 믿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노자는 “문을 닫으면 열쇠로 잠그지 않아도 열리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빛을 따라 산다. 이 내면의 빛은 훔치는 행위가 진실된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 그 위에서 빛난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 잠글 필요가 없다.
노자는 계산하거나 보답을 바라지 말고 그냥 주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도의 본성이며 당신이 곧 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 빛에 따라 살 때, 주는 것과 받는 것은 하나가 된다. 당신을 이끄는 내면의 빛을 믿어라. 그것이 당신의 숙명이다. 당신은 부모나 국가, 또는 어떠한 문화로부터 받은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도로부터 물려받았다. 좀 더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삶에서 일어나는 작고 사소한 일들까지 처리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철저한 계획을 세우지 않고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내면의 빛은 그 어떤 여행안내서 보다도 믿을 만 하다.
노자는 “지혜를 갖고 어느 하나 포기하지 말고 존재를 치우침 없이 도와주라.”고 말한다. 남을 돕는 데 있어 다른 사람의 규칙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아낌없이 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방향이다. 도라는 내면의 빛을 따르기 때문이다. 주는 것과 당신은 하나이다. 받는 것과 당신도 둘이 아니다. 이런 결합 속에서 당신은 모든 사람과 하나이다. 이 장의 의미 있는 부분은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는 사람의 스승이며,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과업”이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삶을 이해하고 화를 없애는 깨달음이다. 당신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하며 우주 에너지를 높인다. 내면의 빛을 발견하는 힘을 길러라. 도가 되라.
기회를 그냥 흘러 보내지 마라. 여기에 그 기막힌 비밀이 있다.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마라. 스승을 존경하고 학생을 보살펴라. 2500년이 지난 우리들에게 도의 이런 실천은 너무도 드물게 행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진정으로 도의 밝음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도는 반드시 우리 내면으로 스며들 것이다. 노자가 말한 것처럼 열쇠, 구속, 지도, 계획 같은 것들을 잊음으로써 진리를 아는 사람이 되라. 길을 가되 흔적을 남기지 말고 모든 사람의 근본은 선하다는 것을 믿어라. 그리고 온 천지를 뒤덮은 어둠에 욕을 퍼붓기보다는 내면의 빛을 가지고 손을 뻗어 도의 유산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그 빛을 빛나게 하라.
자신의 믿어라.
도와 변함없는 내면의 행동 수칙을 만들라. 당신을 창조한 도의 지혜를 믿는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 무엇도 내면에 자리한 정직함에서 당신을 멀어지게 할 수 없다. 이러한 원칙을 지켜라. 최소한의 계획만 가지고도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라. 다른 사람이 마련한 획일적인 계획에 의존하지 말고, 당신을 이끌어줄 도의 에너지를 믿도록 스스로를 허락하라.
자신 혹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지 마라.
사람들의 행동이나 겉모습을 비판하지 마라. 대신 다음의 문장에 따라 생각을 바꾸어라. “나는 나 자신의 학생이며, 이것을 기회로 하여 비판하기보다는 교훈을 얻는 법을 배울 것이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대신에 도를 실천함으로써 서로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라는 단순한 진리를 알게 된다면 전쟁, 다툼, 혼란 그리고 심지어 질병까지도 사라질 것이다. 어떻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스승이면서 동시에 학생으로 존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도움 줄 수 있는 기회가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한 번에 하나의 생각과 행동을 이어간다면 당신은 내면의 빛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제27장은 《老子》의 人才登用策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이석명은 《帛書老子》에서 이 구절의 본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사람은 누구나 적어도 한 가지 재주나 능력이 있는 법이다. 노자는 심지어 악인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찾아 쓰니, 버리는 사람이 없고 버리는 물건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黃老學의 인재등용론에서 매우 중요한 명제가 된다. 그러므로 황로학의 대표작품인 《淮南子》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크고 작음 또는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각각 그 마땅한 사람을 얻으면 천하가 고루 다스려진다. 성인은 두루 아울러 쓰기에 버리는 인재가 없다.’”
《노자》의 이러한 취지에 더해 王弼은 맡김[任]의 방법을 강조하고 이것은 각각의 사물이 타고난 자연스러운 본성을 따르는 데 있다고 본다. 이는 《노자》 3장에서 논의된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특히 왕필은 “각각 제자리를 얻는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論語》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 왕필에 따르면 군주의 無爲는 맡김에 있는데, 타고난 능력과 자질에 맡김으로써 각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면 숭상하고 경쟁하는 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길을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않고
자연에 따라 행하여 만들지도 않고 시작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만물이 지극함을 얻어 아무런 흔적이 없다.
말을 잘하는 자는 허물을 남기지 않고
만물의 본성에 따르고 나누거나 가르지 않는다. 그래서 허물을 남기지 않고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된다.
수를 잘 헤아리는 자는 계산기를 쓰지 않고
사물 자체의 수에 따르니 외형을 빌리지 않는다.
잘 닫는 자는 빗장으로 잠그지 않아도 열 수 없고, 잘 묶는 자는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 없다.
사물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되 세우거나 베풀지 않는다.
그래서 빗장을 사용하여 잠그거나 밧줄을 사용하여 묶지 않아도 열거나 풀 수가 없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만들거나 베풀지 않고 사물의 본성을 따르니 형체로써 사물을 제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인은 늘 사람을 잘 구하는 까닭에 사람을 버리지 않고,
성인은 形名을 세워서 사물을 단속하지 않고 어떤 목표를 만들어 세워두고서 그에 모자라는 사람을 골라 버리지 않고 만물의 자연스런 본성을 돕되 먼저 시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현명하거나 능력 있는 사람을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적질을 하지 않고,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으니, 늘 백성들의 마음이 욕심도 없고 유혹당함도 없게 하면 사람을 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늘 만물을 잘 구하는 까닭에 버려지는 물건이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밝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요,
선한 사람을 들어 선하지 못한 사람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를 스승이라고 했다.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취하는 것인데,
資는 ‘취하다’는 뜻이다. 선한 사람은 〈자신의〉 선함으로 선하지 못함을 다스리고 〈자신의〉 선함으로 선하지 못함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이 취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취함을 아끼지 않으면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니,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지혜에 맡기고 사물에 따르지 않으면 그 도를 반드시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그 요체가 신비롭다.”고 한다.
28.
知其雄(지기웅) : 남성다움을 알면서
守其雌(수기자) : 여성다움을 유지하라
爲天下谿(위천하계) : 세상의 협곡이 될 것이다
爲天下谿(위천하계) : 세상의 협곡이 되면
常德不離(상덕불리) : 영원한 덕에서 떠나지 않고
復歸於?兒(복귀어영아) : 갓난아기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知其白(지기백) : 흰 것을 알면서
守其黑(수기흑) : 검은 것을 유지하라
爲天下式(위천하식) : 세상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爲天下式(위천하식) : 세상의 본보기가 되면
常德不?(상덕불특) : 영원한 덕에서 어긋나지 않고
復歸於無極(복귀어무극) : 무극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知其榮(지기영) : 영광을 알면서
守其辱(수기욕) : 오욕을 유지하라
爲天下谷(위천하곡) : 세상의 골짜기가 될 것이다
爲天下谷(위천하곡) : 세상의 골짜기가 되면
常德乃足(상덕내족) : 영원한 덕이 풍족하게 되고
復歸於樸(복귀어박) : 다듬지 않은 통나무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樸散則爲器(박산즉위기) :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쪼개면 그룻이 된다
聖人用之(성인용지) : 성인은 이를 사용하여
則爲官長(즉위관장) : 지도자가 된다
故大制不割(고대제불할) : 정말로 훌륭한 지도자는 자르는 일을 하지 않는다
28장 덕이 있는 삶 남성의 힘을 알고 여성의 배려를 간직하라. 세상의 계곡이 되라. 그리하면 변함없이 덕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고 다시 어린아이와 같아질 것이다. 흰 것을 알고, 검은 것을 간직하라. 세상의 본보기가 되라. 세상의 본보기가 되는 것은 덕의 길을 벗어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이며 무한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영광을 알고 겸손함을 간직하는 사람은 영원한 힘과 조화를 이뤄 행동한다. 세상의 골짜기가 되는 것은 덕이 가득한 삶을 사는 것이다. 형태 없는 것에 형태를 주면 본래의 성질을 잃어버린다. 본래의 성질을 잃지 않으면 그 무엇도 다스릴 수 있다. 진정 최고의 통치자가 가장 적게 다스린다. |
이 장에서 덕은 자연이나 도와 같은 것이다. 자연과 하나가 됨으로써 성인은 도와 조화를 이루고 덕이 있는 사람이 된다. 노자는 도를 지향하면서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도덕경》의 많은 부분은 도의 원칙과 잘 어우러진 조직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 모든 사람은 평온함, 조화, 평화로움으로 변화를 이끌어낼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노자는 이것을 우리가 가진 “본래의 성질”이라 말한다. 이러한 성질들은 최소한의 통제만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도와 같은 우리의 본성은 그대로 놓아둘 때 가장 잘 다스릴 수 있다. 덕이 있는 삶은 도로 하여금 당신을 인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노자의 조언은 다음의 특별한 네 가지 이미지 속에 담겨 있다.
“세상의 계곡이 되라”
삶의 강물이 당신을 통해 흐르게 해라. 하늘 아래 계곡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허락하는 비옥한 자비의 공간이 되라. 계곡을 가장 낮은 자리, 혹은 모든 것이 그 위로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는 위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겸손함이 공간 속에서 도의 변하지 않는 덕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근본적인 겸손함을 바탕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면 어린아이의 눈높이로 몸을 낮춰라.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본래의 성질들이 어떻게 더 잘 보이는지 확인하라. 당신의 길을 가로막는 원인들을 모두 끌어안고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의 계곡이 되라.
“세상의 본보기가 되라.”
아무런 조각도 하지 않은 나무의 완전함처럼 문명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보라. 사람에 의해 손상되지 않은 세상의 본보기는 도가 그린 밑그림이다. 억ㅈ로 바꾸거나 바뀌지 않으려고 버티지 말고 삶의 배를 저어 부드럽게 흘러가라. 당신이 시작된 그곳으로 당신을 데려갈 도의 완전함을 믿어라. 노자는 결국 마음을 내려놓고 도에 맡기라고 말한다. 당신이 만들어낸 에고를 무너트려라.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자신을 그 세상 안에 존재하게 하라.
“영원한 힘과 조화를 이뤄 행동하라.”
결코 사라지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으며 만물의 출발과 도착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의 골짜기라는 관념에 대해 잠시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이런 종류의 힘은 창조하고 물러나고 형태를 이루었다가는 다시 사라진다. 덕이 넘치는 삶을 끊임없이 뿜어내는 간헐천과도 같은 그 힘은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한다. 에고에 따라 살기를 멈추고 당신의 골짜기 안으로 흐르는 도를 의식할 때 영원한 힘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자만심과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욕구가 아닌 무한한 본질과 조화를 이룬 선과 덕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라. 그러면 깨달으려고 하는 덕 있는 삶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본래 성질을 잃지 마라.”
본래의 성질이란 당신이 존재하기 전부터 당신이었던 것들이다. 예수가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노자가 말하는 본래의 성질이란 당신이 미립자가 되었다가 다시 인간이 되기 전부터 본질을 특징 지었던 사랑, 친절, 아름다움이다. 달리 말해 덕이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법을 지키거나 좋은 시민이 되는 것 혹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외부의 규정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동안 믿어야 한다고 배웠던 것들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들을 즐겨라
당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계곡과 같은 자아상을 택하라. 흔들림 없고 창의성 넘치며 포용적인 입장에 서서 기꺼이 듣고 받아들여라. 충고를 하고 싶다면 먼저 열심히 들어라. 에고로 둘러싸인 거만한 사람이 되지 말고 겸손한 대지의 골짜기가 되라. “진정 최고의 통치자는 가장 적게 다스린다.” 이것은 결코 스스로에 대한 소신을 낮추라는 조언이 아니다. 노자는 오히려 자신이 그 한 부분인 존재의 근원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라 말한다.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사랑으로 대신하라.
레바논의 영적 시인 칼란 지브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당신이 애정 없이 그저 마지못해 일한다면 일터를 벗어나 사원 앞에 앉아서, 환희로 가득 차, 일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당신 본래의 성질을 지키는 과정에 착수하라. 특히 자신의 참되고 덕 있는 자아를 잊어버리기 쉬운 곳에서부터 시작하라.
제28장은 王弼本, 河上公本과 帛書本 사이에 내용상의 差異는 크지 않으나 文章의 順序에 조금 차이가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王弼本, 河上公本은 雄雌, 白黑, 榮辱이 대구를 이루며 나오지만 백서본은 榮辱을 白辱이라 하여 아직 온전한 대구를 이루지 못한다. 이는 《老子》가 帛書本에서 河上公本, 王弼本으로 傳承되는 과정을 거치며 整理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 장은 제6장과 연결되어 陽에 대해 陰을 강조한다거나 남성성에 대해 여성성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노자》의 언급들은 이른바 현대의 페미니즘 사상가들에 의해 《노자》를 높이 평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묄러는 《도덕경의 철학(The Philosophy of Daodejing)》에서 《노자》가 雌雄, 牝牡 등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제 인간의 性을 구분하는 男女라는 표현이 아니라 動物的 표현에 국한된다는 점을 들어 인간의 영역에까지 확장해서 해석할 근거는 적다고 본다.
오히려 최근에는 《노자》의 聖人이 남성이지만 여성처럼 부드럽고 낮추며 뒤에 자신을 둠으로써 오히려 강해지고 높아지며 앞서게 된다는 역설적 결과에 근거한 처세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이 부상하고 있다. 최근 발굴된 《黃老帛書》 〈수컷의 절도와 암컷의 절도[雌雄節]〉라는 편의 내용은 이런 맥락을 잘 보여준다.
“황제는 부단히 吉凶의 일정함을 헤아려서 이를 통해 암컷과 수컷의 절도를 가려낸다. 그러고 나서 화복의 향방을 구분한다. 뻔뻔스러울 정도의 오만함과 교만한 태도를 일컬어 수컷의 절도라 하고, □□하고 공손히 낮출 줄 아는 자세를 일컬어 암컷의 절도라 한다. 무릇 수컷의 절도는 거침이 없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암컷의 절도는 겸허하게 낮추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무릇 사람이 수컷의 절도를 쓰기 좋아하는 것을 일컬어 생명을 함부로 한다고 말한다. 大人은 무너질 것이고 小人은 스스로를 망치게 된다. 무릇 암컷의 절도를 쓰기 좋아하는 것을 일컬어 봉록을 잇는다고 말한다. 부자는 더욱 창성할 것이고, 가난한 자는 먹는 것이 충족될 것이다.[皇后屯歷吉凶之常 以辨雌雄之節 乃分禍福之向 憲傲驕倨 是謂雄節 □□恭儉 是謂雌節 夫雄節者 浧之徒也 雌節者 兼之徒也……凡人好用雄節 是謂妨生 大人則毁 小人則亡 凡人好用雌節 是謂承祿 富者則昌 貧者則穀]”
이와 같은 예시를 통해 보면 여성성에 대한 강조는 현대의 일부 학자들이 여성주의적 사상으로 보는 것과 달리 남성 군주에게 포용적이고 부드러운 처세를 요구하는 정치적 지침으로 볼 여지가 많다.
수컷다움을 알고 암컷다움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늘 그 덕이 떠나지 않아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고
수컷은 앞에 나서는 부류이고 암컷은 뒤따르는 부류이다. 천하에 앞서는 법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뒤따른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그 몸을 뒤로 하지만 몸이 앞세워지고, 계곡은 만물을 구하지 않지만 만물이 저절로 그에게 돌아오며, 어린아이는 지혜를 쓰지 않지만 스스로 그러한 지혜에 합치한다.
그 흼을 알고 검음을 지키면 천하의 모범이 되니,
式이란 모범이다.
천하의 모범이 되면 늘 그 덕이 어긋나지 않아
忒은 어긋난다는 뜻이다.
다시 다함이 없는 데로 돌아간다.
다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 영화로움을 알고 그 욕됨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되니, 천하의 계곡이 되면 늘 그 덕이 넉넉하여 다시 통나무로 돌아간다.
이 세 가지 〈수컷다움, 흼, 영화로움은〉 늘 마칠 곳으로 되돌아와야 뒤에 덕이 〈얻어져〉 자신이 처하는 곳을 온전케 함을 말한 것이다.
뒷장에서 “되돌아오는 것이 도의 움직이다.”라고 하였으니, 功이란 취할 만한 것이 못 되고 늘 그 어미에 처하는 법이다.
통나무가 흩어져 그릇이 되니 성인은 그것을 써서 〈본받을 만한 모델로서 조정의〉 관리와 〈마을의〉 어른[官長]을 세운다.
樸은 참된 본성[眞]이다.
참된 본성이 흩어져 온갖 행동이 나오니 갖가지 종류가 생겨나는 것이 마치 〈통나무를 깎아 만든 갖가지〉 그릇과 같다.
성인은 그러한 나뉘고 흩어짐에 따라 그것들을 위해 官長을 세운다.
선한 사람은 스승으로 삼고 선하지 않은 사람들은 〈버리지 않고〉 취하니 풍속을 바꾸어 다시 〈통나무가 흩어지기 전의 참된 본성이 보전된〉 하나로 돌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크게 재단하는 것은 자르지 않는다.
크게 재단한다는 것은 천하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기 때문에 잘라내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29.
將欲取天下而爲之(장욕취천하이위지) : 세상을 휘어잡고 그것을 위해 뭔가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吾見其不得已(오견기불득이) : 내가 보건대 필경 성공하지 못하고 만다
天下神器(천하신기) : 세상은 신령한 기물
不可爲也(불가위야) : 거기다가 함부로 뭘 하겠다고 할 수 없다
爲者敗之(위자패지) : 거기다가 함부로 뭘 하겠다고 하는 사람 그것을 망치고
執者失之(집자실지) : 그것을 휘어잡으려는 사람 그것을 잃고 말 것이다
故物或行或隨(고물혹행혹수) : 그러므로 만사는 다양해서 앞서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뒤따르는 것도 있고
或?或吹(혹허혹취) : 숨을 천천히 쉬는 것이 있는가 하면 빨리 쉬는 것도 있고
或强或羸(혹강혹리) : 강한 것이 있는가 하면 약한 것도 있고
或挫或?(혹좌혹휴) : 꺾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떨어지는 것도 있다
是以聖人(시이성인) : 따라서 성인은
去甚去奢去泰(거심거사거태) : 너무함, 지나침, 극단 등을 피한다
29장 자연법칙에 따르는 삶 세상을 휘어잡고 보다 나아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것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지 않는다. 하늘 아래 만물은 신성한 그릇이어서 억지로 조정할 수가 없다. 억지로 조정하려고 하면 망칠 것이고 억지로 잡으려고 하면 잃을 것이다. 삶이 자연스럽게 펼치도록 내버려 두라. 그것 역시 완전한 그릇임을 깨달아라. 마치 들숨과 날숨처럼 앞설 때가 있는가 하면 물러서서 쉴 때도 있다. 기운이 넘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지쳐 쓰러질 때도 있고 안전할 때가 있는가 하면 위험에 빠질 때도 있다. 성인에게 모든 삶은 완전함으로 향하는 움직임이다. 그래서 성인은 지나친 것과 사치스러운 것 그리고 극단적인 것은 피한다. |
이 장은 에고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연법칙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안에 담긴 메시지는 모든 게 당신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결코 당신 책임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포함한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지배하려는 모든 생각을 놓아버리라고 이른다. 이것은 대부분의 우리들이 따르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노자가 말한 것처럼 “나는 그것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지 않는다.” 세상의 신성한 완전함에 대해 강렬한 흥분과 감탄을 가지면 당신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자연법칙과 조화를 이룬 삶이다.
노자는 “하늘 아래 만물은 신성한 그릇”이며 무엇을 채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당신 또한 만물의 일부이다. 따라서 삶에 대한 비전뿐 아니라 삶 자체, 그 안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당신이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 모든 것은 에고 영역 밖에 존재한다. 계절이 자연스레 바뀌듯이 새들이 항법 장치의 도움 없이도 이동하는 것과 똑같은 자연법칙에 따라 모든 일들이 펼쳐진다. 삶을 이런 방식으로 바라보면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삶의 매 순간이 신성한 도 안에서 흐른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그렇게 함으로서 기운이 없거나 넘치는, 불안하거나 편안한, 사랑받지 못하거나 반대로 사랑을 받고 있다는 서로 상반된 감정에 대해서 비판을 쏟아내기보다는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 모두는 자연법칙의 일부분이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에고 중심의 마음은 삶의 어떤 측면을 없애서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당신 내면의 지혜로움은 도의 완전함과 조화를 이루기를 소망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노자는 지나친 것과 사치스러운 것 그리고 극단적인 것을 피하고 모든 것이 완전히 펼쳐질 것임을 깨달으라고 이른다. 비록 그것이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말이다. 그러한 생각들조차 그들만의 대가 있다. 자연스러운 속에서 그런 생각들은 때가 되면 다시 새로운 생각들에게 자리를 내줄 것이다.
통제하려는 마음을 버려라.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대로 내버려 둘 수 있는,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과정을 시작하라. 여기서 항복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과정이다. 비난이나 좌절의 순간에 처했을 때 잠시 멈추고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짧은 시간을 갖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냥 한 걸음 물러나서 주인공보다 관객이 되도록 자신을 독려하라. 상대방을 비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를 대비하여 마음속 안식처를 마련해 두면 더 수월하게 관객의 입장에 설 수 있다. 비판이나 통제를 가하지 말고 당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 계속 진행하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신성한 자연의 질서를 불러들여라. 이런 방법을 통해 당신은 중심으로 다가서게 된다. 에고가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한낱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음을 받아들여라.
한창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 노자가 일러준 문장들을 되풀이하라.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입장을 고수하느라 지쳤다고 느껴지면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지쳐서 녹초가 될 때도 있고 반대로 활기가 넘칠 때도 있는 법이다.’라는 생각을 하면 너무 많이 요구하는 에고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삶의 어떤 순간에서도 이와 같이 할 수 있다. 고통, 상실, 공포, 분노, 심지어 증오의 경험들조차 이들이 완전히 피어나는 자연법칙의 일부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금세 희미해진다. 그리고 머지않아 안락함, 평화, 그리고 사랑의 시간이 찾아 온다. ‘그래 이런 상황도 있지. 하지만 나는 극단적인 노여움이나 분노에 빠지지 않겠어.’라고 해보자 이런 방법은 내면의 평화로움을 유지하고 극단을 피함으로써 도가 사랑을 드러내는 것처럼 세상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제 나오미 롱 마젯의 시를 음미하면 이 시가 당신의 소망을 지켜줄 것이다.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 나무를 구슬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조심스레 키우는 것은 오히려 해가 된다.
끊임없이 파헤침을 멈추고 땅을 쉬게 하라.
물을 주기 전에 마르기를 기다려라.
잎사귀는 스스로 제 길을 찾는다.
잎사귀에게 스스로 햇살을 찾도록 기회를 주라.
성장을 막는 것은
지나친 자극, 지나친 친절.
우리는 사랑하는 것들을
홀로 내버려 두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제29장은 매우 政治的 性格이 강한 논의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이 장은 ‘억지로 하려는 것’ 혹은 이 번역에서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하려는 것’이라 옮긴 ‘爲’에 대한 반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분명 無爲 사상의 일종이며 더불어 因順 사상의 표현이다.
因順이란 순응을 의미한다. 하지만 같은 因順이라해도 김홍경의 《노자》에 따르면 “유가의 인순은 朱熹가 말하듯이 이치[理]에 따르고, 《老子》의 인순은 道에 따른다. 유가의 이치도 도라 할 수 있고, 도도 이치라고 할 수 있지만 구체적 함의는 다르다. 유가의 도는 결국 禮이고, 도가의 이치는 결국 反禮이다.” 《老子》의 本文은 분명 이런 취지를 드러내는 듯하다.
하지만 王弼은 이와 다른 방향에서 풀이한다. 王弼은 《老子》가 도를 따르라는 주장을 ‘만물의 자연스러운 본성[萬物自然之性]’을 따르라는 말로 대신한다. 그런데 이러한 본성은 곧 性命이다. 그것은 곧 유가적 함의를 지닌다. 이렇게 본다면 王弼은 《老子》를 《周易》과 《中庸》의 言語를 통해 결국 理를 따를 것을 주장한 것이나 다름없다.
장차 천하를 취하고자 하면서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행동한다면
爲란 조작하고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할 뿐임을 안다. 천하는 신령한 그릇이니
신령함[神]이란 형체도 없고 방향도 없다.
그릇[器]은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하는〉 형체가 없이 합해졌기 때문에 신령한 그릇이라 했다.
〈본성을 거슬러〉 할 수는 없다. 〈본성을 거슬러〉 하려는 자는 패할 것이요 잡으려 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
만물은 자연스러움을 본성으로 삼기 때문에 〈그 본성을〉 따를 수는 있어도 〈그 본성을 거슬러〉 할 수는 없으며 통할 수는 있어도 잡을 수는 없다.
만물은 늘 〈자연스러운〉 본성이 있지만 〈그 본성을〉 조작하거나 〈거슬러〉 하기 때문에 반드시 실패한다.
만물은 오고 감이 있지만 그것을 잡기 때문에 반드시 잃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만물이란 혹은 가고 혹은 따르며 혹은 내쉬고 혹은 들이쉬며 혹은 강하게 하고 혹은 약하게 하며 혹은 꺾고 혹은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러한 까닭에 성인은 지나친 것, 사치스러운 것, 태만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或’이란 것들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만물만사란 거스르기도 하고 따르기도 하며 되돌아오기도 하고 덮어지기도 하지만 잡거나 잘라버리지는 않는다.
성인은 자연스러운 본성에 통달하고 만물의 실정을 꿰뚫고 있다.
그래서 〈그 본성에〉 따르지 〈거슬러〉 하지 않으며 순응하지 베풀지 않아 그 미혹되는 까닭은 제거하고 유혹당할 원인은 없애버린다.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지지 않고 만물의 본성이 저절로 얻어진다.
30
以道佐人主者(이도좌인주자) : 도로써 군주를 보좌하는 사람은
不以兵强天下(불이병강천하) : 무력을 써서 세상에 군림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其事好還(기사호환) : 무력을 쓰면 반드시 그 대가가 돌아오게 마련이어서
師之所處(사지소처) : 군사가 주둔하던 곳엔
荊棘生焉(형극생언) : 가시엉겅퀴가 자라나고
大軍之後(대군지후) : 큰 전쟁 뒤에는
必有凶年(필유흉년) : 반드시 흉년이 따르게 된다
善有果而已(선유과이이) : 훌륭한 사람은 목적만 이룬 다음 그만둘 줄 알고
不敢以取强(불감이취강) : 감히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果而勿矜(과이물긍) : 목적을 이뤘으되 자랑하지 않고
果而勿伐(과이물벌) : 목적을 이뤘으되 뽐내지 않고
果而勿驕(과이물교) : 목적을 이뤘으되 교만하지 않는다
果而不得已(과이불득이) : 목적을 이뤘으나 할 수 없어서 한 일
果而勿强(과이물강) : 목적을 이뤘으되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物壯則老(물장즉로) : 무엇이나 기운이 지나치면 쇠하게 마련
是謂不道(시위불도) : 도가 아닌 까닭이다
不道早已(불도조이) : 도가 아닌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끝장이 난다
30장 폭력 없는 삶 군주를 보좌하는 이는 무력을 써서 군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기는 흔히 사용하는 자를 향해 휘둘러지기도 한다. 군대가 머문 곳에는 가시덤불만 자라고 큰 전쟁이 있은 후에는 땅이 저주받아 흉년이 들며 흙은 그 모성을 잃어버린다. 목적을 이룬 후에는 성공을 자랑하지 말고 능력을 뽐내지 말며 교만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 전쟁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을 뉘우쳐야 한다.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복하는 일은 생각하지도 마라. 힘으로 얻은 것은 머지않아 쇠퇴한다. 그것은 도가 아니다. 금세 끝내버린다. |
[도덕경] 30장에 담긴 지혜를 따른다면 당신은 대립과 충돌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로 수많은 전쟁들이 벌여놓은 파괴와 긴장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강압은 그에 대한 반대 세력을 만들고, 이런 상호작용은 전면적인 전쟁으로 치달을 때까지 계속된다. 전쟁이 시작되면 굶주림과 대규모 학살이 시작된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은 작물을 길러낼 수 없다. 개인의 삶 역시 사라지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당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신성한 모성을 빼앗아 간다. 노자는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지 말고 다른 대안을 찾으라고 한다. 만약 찾을 수 없다면 승리나 정복과 관련된 것을 모두 단념하라고 말한다.
폭력에는 증오와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인 학대가 포함된다. 그러한 폭력에는 언제나 그에 대항하는 세력이 생길 것이고 그렇다면 당신이 취해 온 행동들이 “도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당신은 지고 말 것이다. 적을 친구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면 분노와 복수가 그에 대응하는 수단이 된다. 적이라고 이름 붙여진 사람들을 죽이면 그들의 아들딸들은 원수를 증오하며 자랄 것이고, 그 가운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원수를 갖기 위해 무기를 들 것이다. 폭력을 사용하면 이렇게 모든 세대를 끊임없는 전쟁으로 내몰게 된다. 노자는 말한다. “무기는 흔히 사용하는 자를 향해 휘둘러지기도 한다.”
도와 조화를 이룬 생각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충돌에 적용된다. 폭력의 힘을 빌게 되면 배우자, 자녀, 이웃과의 분쟁이 더욱 과격해질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도의 방식은 협력이지 다툼이 아니다. 만물을 창조하는 근원은 나누어 줄 뿐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그 근원은 타고난 사랑을 나누는데서 비롯된다. 또한 모든 것이 만물의 일부이며 하나의 기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협력해야 함을 알고 있다. 폭력을 사용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은 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판단을 잃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관점을 관찰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집단도 도와 조화를 이루고 있지 않다. 당신이 도를 실천하겠다고 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이 장의 가르침에 거슬리는 그 무엇에도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든 상황 속에서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없애라.
당신이 충돌하고 있는 관계들을 점검해 보라. 말다툼을 풀어가는 데 있어 거친 표현을 자제하고 절대로 다툼이 격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마음을 모아라. 폭력적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곧바로 경청하는 자세로 옮겨 감으로써 그런 생각들을 멈춰라. 혀를 깨물어라! 스스로를 억제하라! 잠시 동안 어떤 반응도 자제하라. 이러한 방법들은 당신이 도와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다. 기억하라, 폭력적인 모든 행동들이 반대 세력을 만들어 낼 것이다. 폭력적인 파괴를 자행하려고 한다면 손에 들린 무기가 거구로 당신을 향하게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폭력적인 행위에 가담하지 마라.
어떤 형태의 폭력도 멀리하라. 여기에는 지구촌 곳곳에서의 폭력을 보여주는 매스컴의 보도나 기사를 접하는 것도 포함된다. 혹시 적대적인 행동들에 대한 내용을 듣거나 읽는 것에 대해 스스로 정당화시키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다른 사람들을 복종시킨다는 명목으로 어디에서든 폭력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이런 뉴스가 결과적으로 당신을 폭력에 가담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수동적인 관찰자 입장에서조차 이런 불순의 기운이 당신의 삶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면 도와 조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던 형태의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 폭력을 몰아내는 데 한 걸음 더 가까워질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폭력은 대항 세력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장의 첫째와 둘째 부분은 다음 제31장의 평화주의적 논조(the pacifist tone)와 유사하다.
전쟁이란 파괴적이며 사람을 죽이고 전답을 황폐하게 하며, 이런 까닭에 전쟁을 아예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상 정치가 안정되려면 전쟁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은 군주의 주된 과업 가운데 하나이다. 강제력을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나쁜 종류의 행동이며, 오로지 전쟁을 피할 수 없을 때 성인 군주는 방어적이며 기묘한 전술을 구사하여 손실을 최소화한다.
제29장의 마지막 부분과 같이 셋째 부분은 겸손함을 묘사하고 있다. 이상적인 군주는 숨은 채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어떠한 소유물도 지키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특별히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서 그는 소유하지 못하는 게 없다. 성인 군주가 전쟁을 싫어하는 것은 그가 자기 강화가 없고 재화 획득이 없는 것과 일치한다. 그는 명성이나 富조차 추구하지 않는다. 바로 이와 같은 열망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주된 이유가 되기에 성인 군주가 이런 것들을 갖지 않을 때 전쟁은 줄어든다.
마지막 부분은 韻이 맞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체적으로 불분명하다. 그것이 말하는 바는 아마도 이른 그리고 때에 맞지 않는 終焉(end) 또는 조숙함(premature aging)은 도와 맞지 않는다는 의미인 듯하다. 도는 만물이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정력이 함부로 낭비되면, 예를 들어 강제력의 사용이나 전쟁과 같은 것의 경우, 만물은 자신의 수명을 제대로 살 수가 없다. 만물이 아껴서 행동할 때만큼 오래 지속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와 동일한 부분이 제55장의 끝에 다시 나온다.
道로 임금을 보좌하는 자는 군사로 천하에 강자 노릇 하지 않으니,
도로써 임금을 보좌할 때에 오히려 군사력으로 천하에 강자 노릇을 할 수 없는데, 하물며 군주가 몸소 도를 행하는 경우에는 어떠하겠는가?
그런 일을 되돌리기를 좋아한다.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다스리는 자는 공을 세우고 일을 벌이고자 하는 데 힘쓴다.
그러나 도가 있는 사람은 無爲하는 데로 돌아가고자 하는 데 힘쓴다.
그래서 “그런 일을 되돌리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군대가 머물던 자리에는 가시덤불만 돋아난다. 큰 군대가 일어난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온다.
군대는 흉하고 해로운 것임을 말한 것이다. 〈군대란〉 구제하는 것은 없고 반드시 상하게 하는 일만 있다.
그리고 인민을 해치고 논밭을 황폐하게 한다. 그래서 “가시덤불만 돋아난다.”고 했다.
〈용병을〉 잘하는 사람은 〈환란을〉 구제할 뿐 감히 〈군대의 힘으로 천하의〉 강자가 되려 하지 않으니,
果는 ‘구제한다[濟]’는 뜻이다.
군대를 잘 쓰는 사람은 가서 어려움을 구제할 뿐 군대의 힘을 사용해서 천하에 강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구제하면서 자랑하지 않으며 구제하면서 내세우지 않으며 구제하면서 교만하지 않으며
나는 군대 부리는 방법을 숭상하지 않으니 부득이해서 사용할 뿐이다. 그런데 어찌 자랑하고 교만할 일이 있겠는가.
구제하면서 부득이해서 〈군대를 쓰며〉 구제하면서 〈천하에〉 강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군대를 사용하는 것이 공을 이루고 어려움을 구제하는 데 있지만 그때의 사정상 부득이해서 쓴 것이니,
다시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다만 마땅히 포악함과 혼란을 제거하되 마침내 구제함을 이용하여 강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만물은 억세어지면 곧 늙어버리니 이것을 일러 道답지 않다고 한다. 도답지 않은 〈일을 행하면〉 일찍 끝난다.
壯은 무력이 갑자기 흥한다는 뜻이니, 군대로 천하에 강자가 되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을 넘기지 않고 소낙비는 한나절을 넘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갑자기 흥한 것은 반드시 도답지 않으니 일찍 끝난다.
31.
夫佳兵者(부가병자) : 훌륭하다는 무기는
不祥之器(불상지기) : 상서롭지 못한 물건
物或惡之(물혹악지) : 사람이 모두 싫어한다
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 : 그러므로 도의 사람은 이런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君子居則貴左(군자거즉귀좌) : 군자가 평소에는 왼쪽을 귀히 여기고
用兵則貴右(용병즉귀우) : 용병 때는 오른쪽을 귀히 여긴다
兵者不祥之器(병자불상지기) :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
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 : 군자가 쓸 것이 못 된다
不得已而用之(불득이이용지) : 할 수 없이 써야 할 경우
恬淡爲上(념담위상) : 조용함과 담담함을 으뜸으로 여기고
勝而不美(승이불미) : 승리하더라도 이를 미화하지 않는다
而美之者(이미지자) : 이를 미화한다는 것은
是樂殺人(시락살인) : 살인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 : 살인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 : 세상에서 큰 뜻을 펼 수 없다
吉事尙左(길사상좌) : 길한 일이 있을 때는 왼쪽을 높이고
凶事尙右(흉사상우) : 흉한 일이 있을 때는 오른쪽을 높인다
偏將軍居左(편장군거좌) : 둘째로 높은 장군은 왼쪽에 위치하고
上將軍居右(상장군거우) : 제일 높은 장군은 오른쪽에 위치한다
言以喪禮處之(언이상례처지) : 이는 상례로 처리하는 까닭이다
殺人之衆(살인지중) : 많은 사람을 살상하였으면
以哀悲泣之(이애비읍지) : 이를 애도하는 것
戰勝以喪禮處之(전승이상례처지) :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이를 상례로 처리해야 한다
31장 무기 없는 삶 무기는 폭력의 도구에서 바른 사람들은 모두 싫어한다. 그러므로 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다. 무기는 사악함을 섬긴다. 그것은 현명한 규칙을 거부한 사람들의 도구이다. 최후의 수단으로만 무기를 사용하라. 바른 사람은 평화로움과 고요함을 소중히 여기고 승리하더라도 그것을 미화하지 않는다. 승리를 미화하는 사람은 성인을 즐기는 사람이고 상인을 즐기는 사람은 결코 세상에서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다. 높은 본성이 나서는 것은 좋은 징조이고 낮은 본성이 나서는 것은 나쁜 징조이다. 많은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애도하고 슬퍼한다. 모든 승리는 장례식과 같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이기면 장례의 예를 올려야 한다. |
[도덕경] 31장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사악함을 섬기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는 삶에 불필요한 도구이며, 도의 원칙에 따라 살기로 했다면 이를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기를 설계, 제작, 생산, 판매하는 모든 행위가 그러하다. 도가 생에 대한 것이라면 무기는 죽음에 대한 것이다. 도는 창조의 힘이지만 무기는 파괴의 힘이다. 관찰자의 눈과 신성한 지혜를 가진 노자는 살인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는 어떠한 승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곳이나 신념 따위에 상관없이 그들이 낳아준 영혼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에서 태어나고 도를 통해 살고 도에게로 돌아간다. 우리가 서로를 파괴하는 것은 도가 우리에게 말 걸고 우리를 통해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기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에고의 세계에서는 축하해야 할 승리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결국은 장례식이며 애도를 위한 시간이다. 노자는 우리에게 전투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것은 살인하려는 에고의 의지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일깨운다. 도는 오직 창조하고 돌보고 사랑하는 의지만을 품고 있다. 우리의 가장 질 높은 본성은 도의 가르침을 통해 드러나는 반면 가장 질 낮은 본성은 살인에 참여함으로써 표출된다. 인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언제나 전쟁과 얽혀 있다. 그리고 무기의 수준을 통해 문명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가늠한다. 무기는 창과 방패로부터 화살, 총, 폭발물, 그리고 수많은 인명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핵 폭탄까지 만들어 냈다. 이 위험천만한 상태는 도덕경의 기본적인 사상 “무기는 사악함을 섬긴다. 그것은 현명한 규칙을 거부한 사람들의 도구이다.”라는 지혜의 가르침을 무시해 온 데서 비롯된 것이다.
노자는 물리적인 무기뿐만 아니라 그만큼이나 파괴적인 행위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인류의 높은 본성과는 거리가 먼 폭력적인 언어와 몸짓, 위협 등이 포함된다. 만약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려 한다면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행동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당신은 삶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더라도 이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인가?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만약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상대방에게 연민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가? 살인을 위해 만들어진 무기는 도의 순수한 정수와 어우러지지 못한다. 생명을 주는 도의 에너지와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물리적이거나 언어적인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라.
자신을 보호하려는 욕구가 생기면 존재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임을 자각하라.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와 어휘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속에 담긴 증오를 없애버림으로써 어떤 형태로든 폭력적인 무기를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 무기를 소지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지 말고 그런 무기들이 비롯된 모든 죽음과 상처는 도의 지혜에서 어긋났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생각하라. 무기를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세상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더 이상 무기에 대한 억지 이론으로 문명화 수준을 평가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서로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보살피는가 하는 도의 척도가 그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공손하고 예의 바른 마음과 태도가 문명화의 뿌리라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죽음이나 폭력을 기리는 모든 형태를 그만두라.
죽음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뉴스, 영화, TV 등에서 자신을 멀리하라. 자녀들에게 생명을 신성하게 여기도록 가르쳐라. 아이들에게 적 또는 폭도들의 죽음에 기뻐하지 않도록 가르쳐라. 죽음은 그것이 전장에서건 도시의 한복판에서건 우리의 살인 의지가 모아졌다는 증거이다. 증오와 분노를 드러내지 마라. 무기로 성취한 모든 승리는 애도해야 할 장례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깨닫게 하라.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글에 그러한 깨달음이 있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은
영겁의 시간 동안 어찌 그리 조화롭게 존재하는가?
우리는 누군가를 향해
마음속으로 전쟁을 선포하지 않고는 한시도 못 견디는데
승리하는 이 없는 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그로 인해 사상자는 늘어만 가지
우리의 마음은 이 땅을 비옥하게 일구고
우리는 서로의 앞에 펼쳐진 대지진일지니
어떻게 해야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을
제31장의 眞僞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通行本인 王弼本에 주석이 없는 두 개의 장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왕필이 실제로는 주석을 했는데 나중에 본문으로 끼어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이 이론은 왜 제31장이 다소 낯설게 읽혀지는지를 설명해주는 데 이용되곤 했다.
제31장은 논조가 꽤 儒家的이다. 《老子》는 ‘君子’를 언급하지 않는데 이 장에서만 유일하게 군자가 언급된다. 게다가 유가에서 매우 중시하는 禮와 함께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내용은 《老子》의 다른 부분에 비추어볼 때 매우 그것은 유가 철학 문헌에서 훨씬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의례에 관한 문장은 의식에서 좌측을 상서로움과 연결시키는 반면 우측을 상서롭지 못함과 연결시키고 있다. 군대는 凶事라 말하고, 그리하여 전쟁은 결과적으로 ‘우측’에 상응한다. 앞의 제30장과 같이 전쟁이란 커다란 재앙이자 사회적 대참사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도가의 통치자는 그것을 슬프고 비탄스러운 사건으로 다룬다. 그리고 승리나 기쁨으로 다루지 않는다. 전쟁이란 언제나 실패한 정치의 결과물이며 심지어 성공적인 전쟁조차 물자와 인명에서 값비싼 대가가 따른다.
뛰어난 군대는 상서롭지 못한 器物이니 사람들이 종종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도를 지닌 사람은 거기에 처하지 않는다.
군자는 평소에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군대를 사용할 때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군대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이고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
〈군대를〉 부득이하여 사용한다면 담담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으니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다.
〈군대의 사용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殺人을 즐기는 것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사람은 천하에 뜻을 얻을 수 없다.
길한 일에는 왼쪽을 높이고 흉한 일에는 오른쪽을 높인다.
그러므로 偏將軍은 왼쪽에 거하고 上將軍은 오른쪽에 거하는 것은 喪禮로 처리하라는 것이니, 살인이 많으면 애통하고 슬퍼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싸움에서 이기면 상례로 처리한다.
32.
道常無名(도상무명) : <도>는 영원한 실재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엇인데
樸雖小(박수소) :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비록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天下莫能臣也(천하막능신야) : 이를 다스릴 자 세상에 없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 임금이나 제후가 이를 지킬 줄 알면
萬物將自賓(만물장자빈) : 모든 것이 저절로 순복할 것이요
天地相合(천지상합) : 하늘과 땅이 서로 합하여
以降甘露(이강감로) : 감로를 내릴 것이요
民莫之令而自均(민막지령이자균) : 명령하지 않아도 백성이 스스로 고르게 될 것이다
始制有名(시제유명) : 다듬지 않은 통나무가 마름질을 당하면
名亦旣有(명역기유) : 이름이 생깁니다
夫亦將知止(부역장지지) : 이름이 생기면 멀출 줄도 알아야 한다
知止可以不殆(지지가이불태) : 멈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는다
譬道之在天下(비도지재천하) : 이를테면 세상이 도로 돌아감은
猶川谷之於江海(유천곡지어강해) : 마치 개천과 계곡의 물이 강이나 바다로 흘러듦과 같다
32장 도의 완전한 선함을 따르는 삶 영원한 도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단순하고 소소하지만 이를 다스릴 자 세상에 없다. 왕과 제후가 도를 실천한다면 만물은 자연스럽게 그에 복종할 것이다. 천지가 달콤한 이슬을 내려 기뻐할 것이다. 사람들은 명령이 없어도 스스로의 성함으로 조화를 이룰 것이다. 전체를 나누면 각각의 이름이 생긴다. 이름이 생겼으면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 멈출 때를 알면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강과 시내는 바다에서 태어났고 모든 만물은 도에서 태어났다. 마치 모든 물이 흘러 바다로 돌아가는 것처럼 만물은 흘러 도로 돌아간다. |
노자는 자신의 근원을 깨달을 때의 황홀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활짝 열린 마음이나 환희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 느낌은 모든 생명을 책임지는 도의 “단순하고 소소한” 에너지 흐름이다. 노자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나 통치자라도 이 힘을 다스리거나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면서 이 장을 시작한다. 우리가 이 힘을 활용할 수 있다면 자연과 그 안의 만물들은 축배를 들 것이다. 모두가 평화와 조화 속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완전한 도의 선함을 생활 방식으로 삼고 이를 호흡할 때 전쟁, 기근, 다툼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 낸 부정적인 창조물들이 사라질 것이다.
이루어지길 바라는 소망이 있다면 떠올려보라. 그리고 우연히 마주치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라. 당신 존재의 흐름에 올라타서 그 흐름의 동반자가 됨으로써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라. 그 흐름을 타는 유쾌한 기분을 즐기면 당신은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흐름에 거슬리기로 마음먹는다면 결국 좌초되고 말 것이다. 이는 삶의 모든 방면에 적용되는 진실이다. 더 세게 밀어붙일수록 더 많은 저항에 부딪히는 법이다. 당신 열정에 불을 지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라. 지금 하고 일에서 새로운 변화의 조짐이 보이거나 직업과 사는 장소를 바꾸라는 신호들이 나타나면 주의를 기울여라.
움직이기를 거부하고 틀에 박힌 일상을 반복하면서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정당화하여 자신을 좌초시키지 말라. 삶을 휘감는 도의 기운을 인식하고, 자신의 소명과 다투기를 멈춰라. 우리는 모두 노자가 말한 강이나 시내와 같다. 도에서 태어나 도로 다시 돌아간다. 이 여정은 피할 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다. 강물이 바다를 만나 하나가 되기 위해 흐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육체도 변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자신의 몸을 관찰하라. 중요한 자리에 서려는 욕심을 버려라. 초과 근무를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바로 당신의 에고이다. 도에게 강요할 수 없다.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그 속으로 녹아 들어가 도가 당신을 이끌게 하라.
삶의 흐름에 집중하라.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당신 자신에게 일깨우라. 사실 당신이 책임을 지는 거 자체가 불가능하다. 노자가 “도”라고 부른 이름 없는 힘은 모든 것을 움직인다. 그러므로 당신이 계속해서 이에 맞서 논쟁을 벌이는 것은 계속해서 불평만 가져올 뿐이다. 매일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바라보는 연습을 하라. 누가 언제 나타나는지에 주목하라. 당신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낯선 우연의 일치를 발견하라. 당신이 통제하는 범위를 벗어나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상황을 놓치지 말고 따라가라.
새롭고 즐거운 느낌을 발견하라.
고삐를 늦추는 방향으로 움직여간다면, 도가 당신을 통해 흐르는 유쾌한 기분을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에고가 아니라 당신의 근원이 이끄는 방향으로 자신을 흐르게 내버려 두고 어떤 열정들이 피어오르는지 보라. 이러한 즐거운 느낌들은 노자가 말한 “스스로의 선함”과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내면에서 열렬히 타오르는 감수성이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하므로 그 힘을 믿으라고 일깨우는 신호인 것이다.
제32장은 여러 가지 道家的 개념들을 얽어서 말하고 있다. 제32장은 道가 이름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름 없음은 그 다음에 통나무와 연결된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는 또한 특정한 기능을 갖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직 어떤 특수한 형태도 취하고 있지 않다. 형태를 가진 것은 따라서 이름이 있지만, 형태를 갖지 않은 것 그래서 여전히 형태가 없는 것은 이름 지어지지 않는다. 통나무는 도의 無形性 - 그렇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그 궁극적인 潛在性을 가리킨다. - 을 나타낸다. 이러한 도의 무형성이란 또한 도의 이름 없음에 상응한다.
그 다음에 도는 정치권력의 행사라는 맥락에 놓인다. 이름이 없는 것은 기능이 없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그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사회적 맥락에서 이름이란 사회 속에서의 특정한 역할, 관직, 의무를 나타낸다. 이름이 없는 것은 특정한 업무가 없다. 이름 없음(Nameless)은 그러므로 군주권(rulership)에 상응한다.
도에 따라 다스리는 군주는 無爲를 통해 행위하고, 이는 또한 ‘스스로 그러함(自然)’ 또는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복종(natural subordination)으로 이끈다. 그런 군주는 강압적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제17장에서 말하였듯이 백성들은 오로지 그가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은 그런 군주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하늘과 땅, 즉 천지는 ‘甘露(sweet dew)’를 내리는데, 이 말은 자연이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생명이 번성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32장의 끝에 이르면 ‘그침의 완성(mastery of cessation)’ 또는 ‘멈출 때를 아는 것[知止]’이 언급되고 있다. ‘그침의 완성’이란 탐욕, 열망, 중독에 빠지는 것을 회피하는 기예로서 중요한 도가적 기술이다.
마지막 행은 제32장의 나머지와는 다소 연관성이 없다. 여기서 물의 상징이 다시 도입된다. 도는 가장 낮은 곳에 머물면서 다른 모든 물줄기가 끊임없이 흘러드는 수체(body of water)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多産의 축으로서 도는, 생명이 자라나는 낮은 곳에 머무는 물로부터 나온다. 이렇게 해서 도는 바다에 비유된다.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
통나무는 비록 보잘것없지만 천하의 누구도 신하로 삼을 수 없으니, 제후와 왕이 만약 이 〈도리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손님으로 올 것이다.
도는 형체가 없고 매이지 않으니 늘상 이름 지을 수 없다.
이름 없음을 늘상으로 하기 때문에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고 했다.
통나무라는 것은 ‘없음’을 마음으로 삼으니 또한 이름이 없다.
그러므로 장차 도를 얻으려면 통나무를 지키는 것보다 나은 게 없다.
무릇 지혜로운 자는 그 능력을 요구하는 신하로 삼을 수 있고, 용기가 있는 자는 군무를 담당하게 할 수 있으며, 기예가 뛰어난 자는 〈국가적인〉 사업을 담당케 할 수 있고, 힘이 강한 자는 막중한 임무를 맡길 수 있다.
그런데 통나무라는 것은 뒤섞여 있어서 치우치지 않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無有]’에 가깝다.
그래서 “누구도 신하로 삼을 수 없다.”고 했다.
통나무를 끌어안고 무위하되 외물로 참된 본성을 매이게 하지 않고 욕심으로 정신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면 만물이 스스로 손님으로 오고 도가 저절로 얻어질 것이다.
천지가 서로 합하면 甘露가 내려오고 백성은 명령하지 않지만 저절로 균평해진다.
천지가 서로 합하면 감로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내리며,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참된 본성과 무위의 〈도리를〉 지키면 백성이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균평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처음 〈官長을〉 제정함에 이름이 있게 되니 이름이 또한 이미 있다면 장차 그칠 줄 알아야 한다.
그칠 줄 알아야 위태롭지 않다.
始制란 것은 통나무가 쪼개져 비로소 〈성인이〉 관장이 되는 때를 말한다.
처음 관장을 제정할 때에는 名分을 세워 尊卑를 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처음 〈관장을〉 제정함에 이름이 있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을 넘어서서 더 나아가면 장차 송곳이나 칼끝같이 작은 일에도 다투기 때문에 “이름이 또한 이미 있다면 장차 그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모름지기 이름에 맡겨 만물을 호명하면 다스림의 어미를 잃게 되기 때문에 “그칠 줄을 알아야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비유하건대 道가 천하에 행해지는 것은 시내와 골짜기〈의 물이 스스로〉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다.
시내와 골짜기는 강과 바다를 구하지 않으니, 강과 바다가 〈시내와 골짜기를〉 부르지도 않는다. 〈강과 바다가〉 부르지도 않고 〈시내와 골짜기가〉 구하지도 않는데 스스로 흘러드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하에 도를 행하는 것은 명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균평해지고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진다.
그래서 “시내와 골짜기〈의 물이 스스로〉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33.
知人者智(지인자지) : 남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自知者明(자지자명) :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이다
勝人者有力(승인자유력) : 남을 이김이 힘있음이라면
自勝者强(자승자강) : 자기를 이김은 정말로 강함이다
知足者富(지족자부) : 족하기를 아는 것이 부함이다
强行者有志(강행자유지) : 강행하는 것이 뜻있음이다
不失其所者久(불실기소자구) : 제자리를 잃지 않음이 영원이다
死而不亡者壽(사이불망자수) : 죽으나 멸망하지 않는 것이 수를 누리는 것이다
33장 자신을 다스리는 삶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은 지식이고 나를 아는 것은 지혜이다. 힘으로 다른 사람을 다스리고 진정한 강함으로 자신을 다스린다. 충분히 가졌음을 깨닫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이다. 제자리를 잃지 않은 사람이 오래 산다. 도에 자신을 내맡긴 사람은 영원히 산다. |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모든 종류의 주제, 특히 학문적인 것에 대해 지적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떠 올린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지식을 쌓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손을 내밀기도 한다. 그들은 마치 다른 삶들의 속마음을 정확히 읽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이런 사람들의 권력과 지위는 그들이 감독하는 사람들 수에 비례해서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33장에서 노자는 지식과 권력이라는 두 관념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이 세상 안에 자리 잡은 당신의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를 통해 주체성을 가늠해 보도록 한다.
도가 중심이 되는 삶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며 지식을 쌓고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 데서 벗어나 자신을 이해하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도의 지혜에 따라 사는 내면의 강함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도 극적으로 즐겁게 변한다. 사람들의 행동에 반응하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는다면 다른 사람의 행동이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저 사람의 언행이 왜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면 그 상황을 자신을 탐험하는 초대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내면으로의 탐험은 자신에 대한 관대한 마음을 갖고 내적 반응을 살핌으로써 그 반응들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생각의 흐름을 찾아서 따라가다 보면 다른 사람의 행동은 그 즉시 영향력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내면을 통해 영원히 흐르는 도와 온전하게 조화를 이룬 세상을 보개 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에게 힘을 행사하는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통제권을 어떤 사람이나 환경에 넘겨주지 않음으로써 당신은 폭력적인 힘이 아니라 진정한 경험을 갖게 된다. 내면을 다스리는 이 새로운 상태는 당신이 도와 조화를 이루어 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얻은 것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말고 자신을 이해하는데 집중해라.
다른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해 걱정이 되거나, 고통스럽거나, 화가 날 때도 고민의 원인으로 지목한 그들에게서 관심을 거둬라. 정신의 에너지를 이동시켜라. 자신의 감정에 대한 원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말고 도가 흐르게 하라. 당신 자신도 나무라지 마라. 그냥 도가 펼쳐지도록 하라. 당신 동의 없이 그 누구도 불편하게 만들 수 없다고, 그런 권한을 주지 않을 거라고 말하라. 감정들을 자유롭게 경험하되 그것을 폄하하거나 몰아내지 마라. 비난뿐만 아니라 욕망까지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대신 자기를 이해하는데 집중하라.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스스로 책임을 짐으로서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타인이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꾼다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소망하라
폭력적인 본성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욕망을 없애라. 에고는 다른 사람들이 삶을 꾸려갈 능력이 없으며 폭력적인 힘에 의해 통제 받기를 원한다고 속삭인다. 그런 방식을 포기함으로써 내면의 강함을 보여줘라. 충고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잡아라. 사람들이 방해받지 않고 깨우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기회로 활용하라.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언어폭력을 사용하는지 깊게 살펴보라. 도의 판단력이 강해지면 도의 흐름은 약해진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삶을 진심으로 소망할 때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라. 그들은 결국 도의 위대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제32장에서는 ‘그침의 완성’ 또는 ‘멈출 때를 아는 것[知止]’에 대해 언급하였다. 제33장에서는 ‘만족함의 완성’ 혹은 ‘만족할 줄 아는 것[知足]’을 말함으로써 앞의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멈추어야 할 때를 아는, 그래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만족의 기술을 이미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침의 완성과 만족함의 완성은 같은 것이다. 만족하게 되는 것 또는 부유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소유물의 양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감을 느낄 줄 아는 능력에 달린 것이다. 만족감이란 자신이 소유한 것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충족되지 않은 소망의 부재에 의해 측정된다.
자기 극복(the overcoming of oneself)은 이렇게 해서 즉각 만족의 기예와 연결된다. 이러한 기예는 자기 자아의 동경이나 갈망을 극복하는 것이다. 앎과 극복의 개념들은 제33장의 첫 행에서 대구를 이룬다. 영어에서도 그것들의 의미는 관계가 있는데, 영어의 ‘to master’가 ‘알다(to know)’와 ‘지배하다(to dominate)’ 모두를 뜻한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우며, 만약 사람이 자아를 마스터할 수 있다면 - 그 단어의 이중적 의미에서 - 사람은 진정으로 만족한 삶을 사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역자는 제33장의 마지막 행을 馬王堆本에 따라 번역하였다. 王弼本은 ‘잊혀지지 않다[不忘]’라고 하는 대신에 ‘사라지지 않다[不亡]’라고 되어 있다. 마왕퇴본은 논조가 더 儒家的이다. 유교 전통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기억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였고, 예로부터 조상에 대한 제사는 정확하게 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조상의 귀신들이 살아 있는 그들의 자손들과 접촉하게 해주는 제사가 지속되는 만큼 조상의 귀신들은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롭고 스스로를 아는 사람은 밝으며,
남을 아는 사람은 지혜가 있을 뿐 아직 스스로를 아는 사람만은 못하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아는 것은〉 최상의 지혜조차 넘어서기 때문이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고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은 강하며,
다른 사람을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을 뿐 아직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만 못하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이기는 사람은〉 그 어떤 것도 그의 힘을 잃도록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혜를 다른 사람에게 쓰는 것은 그 지혜를 자신에게 쓰는 것만 못하고, 자신의 힘을 다른 사람에게 쓰는 것은 아직 자신의 힘을 자신에게 쓰는 것만 못하다.
밝음을 자기에게 쓰면 누구도 그를 피하지 않으며, 힘을 자기에게 쓰면 누구도 그를 바꾸지 못한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유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스스로 잃을 게 없기 때문에 부유한 것이다.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으며,
열심히 그것을 행할 수 있으면 그 뜻이 반드시 얻어진다. 그래서 “힘써 행하는 사람은 뜻이 있다.”고 했다.
제자리를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가고,
밝음으로 스스로를 살피고 자신의 역량을 헤아려서 행하고 제자리를 잃지 않으면 반드시 얻은 것이 오래갈 것이다.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다.
비록 〈몸은〉 죽었으나 그를 살아 있다고 여기니 도가 사라지지 않아야 그 수명을 온전하게 누렸다고 할 수 있다.
몸은 죽었어도 도가 오히려 보존되는데 하물며 몸이 살아 있고 도가 죽지 않은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34.
大道氾兮(대도범혜) : 큰 도가 넘쳐 있음이여
其可左右(기가좌우) : 이쪽 저쪽 어디에나
萬物恃之而生而不辭(만물시지이생이불사) : 온갖 것이 이에 의지하고 살아 가더라도 이를 마다하지 않고
功成不名有(공성불명유) : 일을 이루고도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衣養萬物而不爲主(의양만물이불위주) : 온갖 것 옷입히고 먹이나 그 주인 노릇하려 하지 않는다
常無欲(상무욕) : 언제나 욕심이 없으니
可名於小(가명어소) : 이름하여 <작음>이라 하겠다
萬物歸焉(만물귀언) : 온갖 것 다 모여드나
而不爲主(이불위주) : 주인 노릇하려 하지 않으니
可名爲大(가명위대) : 이름하여 <큼>이라 하겠다
以其終不自爲大(이기종불자위대) : 그러므로 성인은 스스로 위대하다고 하지 않는다
故能成其大(고능성기대) : 그러기에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34장 위대한 도를 따르는 삶 대도는 막힘이 없어서 왼쪽 오른쪽 어디로든 흐른다. 모든 존재가 도에 의지해 살지만 도는 그들을 소유하지 않는다. 공을 이루되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만물을 감싸 보살피되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 만물이 제 집처럼 모여들지만 그들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위대하다고‘하는 것이다. 성인은 이를 따라서 위대함을 내세우지 않기에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
노자는 우리에게 위대함에 대한 인식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우리는 한 사람의 위대함을 그의 평생 쌓아온 명성과 재산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권력이 그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군대를 거느리는 지휘관이나 국가 지도자들을 위대하다고 말한다. 또한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위대함은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특출한 개인들에게 국한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장은 위대함에 대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그 특성이 바로 도이다.
도는 매우 포괄적이어서 모든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태어나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나 사물도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정도 바라지 않는다. 베푼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받거나 그로 인해 명성을 얻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러한 평판에 대한 무관심이 진정한 위대함을 만든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바꾸면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재산을 가지고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한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새로운 사고방식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 안에서 도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도의 관점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내면에 자리한 위대함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위대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선을 바꾸면 다른 세상이 보인다. 이전에 까다롭거나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조차 소중한 존재로 느껴진다. 우주를 활기 있게 하는 그 신성함이 당신과 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내면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위대함은 태어날 때부터 물려받은 유산임을 믿게 된다. 도는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이 위대한의 특성을 엿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당신이 결정하지 마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강요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삼가라. 당신 주변의 누구도 당신 소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라. 시인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니다.
그들은 그 자체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이며 딸이다.
그들은 당신을 통해 왔지만 당신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이는 틀림없는 진실이다. 관계 속에서 지배하려고 하는 마음을 외면하라. 설명하기에 앞서 들어라. 비판적인 생각이 떠오르거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당신을 사로잡거든 주의를 기울여라. 소유하려는 사고방식 대신 마음을 내려놓고 허락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당신과 사람들 사이에서 도가 ᅟᅧᆯ쳐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순간부터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으로 인해 생기는 좌절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위대함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발견하라.
위대함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려라. 많이 베풀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재능을 길러주고도 보상이나 거절하는 사람들에 주목하라.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목록에 그들을 포함시켜라.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실천하라. 도가 모든 것을 주고 자랑하지 않으며 요구하지도 소유하지도 않는 모습으로 한결같이 흐르는지 살펴라. 그것의 위대함이 느껴지는가? 당신의 생활 속에도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다. 그들을 찾아내 인정하라. 그와 동시에 묵묵히 그들을 따라라. 성인은 결코 위대함을 지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위대함의 정의를 바꾸면 당신 자신 안에서 그것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老子》의 많은 章들이 물을 통해서 도에 대해 설명한다. 이 장에서는 도는 흘러 넘쳐서 어느 쪽으로든 흘러가는 물의 움직임에 비견하고 있다. 물의 흐름은 가장 ‘자연스러운(natural)’ 운동이다. 물은 늘 완벽하게 환경에 적응하며, 또한 전혀 힘들이지 않고 움직인다. 도의 운동 또한 어떠한 수고 없이 그렇게 일어나고, 또는 특정한 방향으로 가게 하는 推動力(driving force)도 없이 일어난다. 자연과 물은 ‘저절로 그렇게[自然]’ 움직인다.
제34장의 둘째와 셋째 부분은 성인 즉 성인 군주의 행위를 도의 수고스럽지 않은 움직임과 관련시키고 있다. 도는 군주처럼 무위하는데 왜냐하면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본성)에 대해 어떠한 것도 강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이렇게 특수한 의도나 특정의 기능이 없기에 도를 어떤 배타적인 역할과 동일시하게 되는 이름이 없는 채로 도는 남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한편으로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작다. 그것은 모든 적극적인 특징이 없으며 물과 같이 부드럽고 형태가 없다.
다른 한편 道家의 역설의 논리에 일치하게도, 특수한 자질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또한 도를 물과 같이 위대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만물이 모두 그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영양을 공급하는 물의 성질에 의존하며, 자연 속에서 만물은 ‘위대한’ 도를 따른다. 성인 군주는 이러한 모델에 따라 그의 사적인 뜻이나 의도적인 행동을 최소화한다. 자연의 진로에 따라 無爲함으로써 그는 자연의 길 또는 도가 방해받지 않고 진행하도록 한다.
큰 도는 〈물처럼〉 넘쳐흘러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갈 수 있다.
도는 〈물처럼〉 넘쳐흘러 가지 못하는 곳이 없어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위로나 아래로나 두루 돌고 돌면서 쓰이니,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만물은 〈그 도에〉 의지하여 생성하는데도 잔소리하지 않으며 공적을 이루면서도 자기 것이라 이름하지 않고 만물을 입히고 기르면서도 주인 노릇 하지 않는다.
언제나 욕심이 없으므로 작다고 이름할 수 있다.
만물은 모두 이 도를 말미암아 생성되지만 이미 생성되고 나서는 그 말미암은 바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1장에서 말하였듯이〉 天下 사람들이 언제나 욕심이 없을 때에는 만물이 각각 제자리를 얻으나 도가 만물에 베푸는 게 없었다.
그래서 “작다고 이름할 수 있다.”고 했다.
만물이 〈그에게〉 돌아가는데도 주인을 알지 못하니 크다고 이름할 수 있다.
만물은 모두 도에 돌아가서 생성하는데 〈도는 만물이〉 그 유래를 알지 못하게 하는 데에 힘을 쓴다. 〈따라서 이러한 도에 대해〉 작다고 하지 못하는 까닭에 다시 크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도와 같이〉 끝내 스스로 큰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루어 만물이 그에게 돌아가므로〉 자신의 위대함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큰일을 할 때에는 작은 것에서부터 하고, 어려운 일을 도모할 때에는 쉬운 것에서부터 한다.
35.
執大象(집대상) : 위대한 형상을 굳게 잡으십시오
天下往(천하왕) : 세상이 모두 그대에게 모여들 것이다
往而不害(왕이불해) : 그대에게 모여들어 해받음이 없을 것이다
安平太(안평태) : 오직 안온함과 평온함과 평화만이 깃들 것이다
樂與餌(락여이) : 음악이나 별미로는
過客止(과객지) : 지나는 사람 잠시 머물게 할 수 있으나
道之出口(도지출구) : 도에 대한 말은
淡乎其無味(담호기무미) : 담박하여 별맛이 없다
視之不足見(시지불족견) : 도는 보아도 보이지 않고
聽之不足聞(청지불족문) :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用之不足旣(용지불족기) : 써도 다함이 없다
35장 세속적인 기쁨 너머의 삶 도를 따르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모여든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아무런 해를 입지 않는다. 그 안에서 평화와 안정, 행복을 발견한다. 좋은 음악과 맛있는 식사는 즐거움을 주지만 잠시 걸음을 멈추개 할 이다. 이 세상의 것들은 도와 비교하면 얼마나 밋밋하고 지루한가! 도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써도 다함이 없다. |
기쁨이란 단어를 생각했을 때. 어떤 것들이 떠오르는가? 즐거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기쁨이라고 하면 감각적인 것으로서 외부 세계에서 얼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호화로운 식사, 좋아하는 음악이나 운동 속에서 기쁨을 경험할 것이며, 이들은 분명 당신에게 기운을 불어넣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기쁨에 인생의 초점을 맞추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세속적인 것만 추구하다 보면 당신은 너무나 쉽게 불안정해지고 결국 타락의 길로 떨어진다. 비만, 거식증과 같은 섭식장애, 마약이나 알코올, 성형중독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중독 현상은 이러한 결과의 일부일 뿐이다.
노자가 “밋밋하고 지루하다.‘고 표현한 세속적인 기쁨의 황량함도 도의 황홀경과 비교해 보라. 균형 잡힌 도의 관점을 가졌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이 기쁨이라는 관념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어보라. 도와 조화를 이루면 모든 사람들이 당신에게로 모여들 것이고 평화와 안정,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으로부터 이 세 가지를 발견하는 것은 당신이 그런 향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지금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있는 중이다. 이제 기쁨은 오감을 느끼는 세속적인 영역 너머로 옮겨간다. 변화하는 세상 뒤편에 있는 변하지 않는 것이 새로운 기쁨의 원천이 되고, 이는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으로 표현된다.
당신은 근원을 찾을 수도, 들을 수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근원은 존재하며 고갈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도는 빈 공간을 채우고, 당신에게 환희를 안겨주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이다. 그것을 통해 느끼는 행복은 영원하며 당신은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토록 갈망하던 즐거움을 누린다. 도를 통해 얻는 만족은 그 어떤 감각적인 기쁨을 넘어선다. 당신은 더 이상 세속적인 기쁨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중독에 빠지는 일이 없다. 그것은 마치 빨릴 달리다 보면 언젠가 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결국 날기에 충분한 속도에는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과 같다. 자연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라. 자연은 더 많이 원하지도 않고 더 많이 소비하지 않으며, 완전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언제나 당신 주변에 존재하는 영원한 환희에 주목하라.
비록 당장은 그것을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물질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버려라. 세속적인 기쁨들은 물질적 한계를 초월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라. 물론 물질적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도와 당신 사이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이용해야 한다. 감각적인 즐거움과 도에서 얻는 환희를 같은 것으로 여기지 마라. 감각을 타고 흐르는 모든 경험을 즐겨라. 멋진 저녁 만찬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음악에 빠져들라. 성적인 에너지가 건네는 흥분에 감사하라.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세상과 어울리려는 당신의 감각적인 자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이 물질적인 세상을 초월할 수 있는 당신의 ‘도적 자아’를 찾아라. 그리고 그 즐거움을 탐험하라. 진짜 즐거움이 무엇인지 점검하라.
당신 일상에 감사하라.
영원한 도에 감사하라. 감사하면 세상이 달라져 보일 것이다. 세속적인 기쁨이 사라질 때 나타나던 불안정한 느낌의 빈자리에 도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차게 된다. 때때로 나타나던 쾌락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고 물질적인 세상의 한계와 억압에서 벗어나 도와 조화를 이룬 모습을 깨닫고 감사와 만족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의식적으로 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 더 많은 사람과 경험을 끌어당기게 될 것이며, 필멸과 불멸에 대한 당신의 깨달음은 균형을 이를 것이다. 한없는 도의 사랑과 풍요로움을 향해 당신 자신을 활짝 열라. 그러면 그와 똑같은 사랑과 풍요로움이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다. 세속적인 기쁨만을 탐하던 당신이 도를 이해하는 순간, 당신의 세상은 변한다.
‘위대한 상[大象]’은 대부분 河上公 注와 같이 일찍부터 道로 해석되었다. 《周易》에서 ‘象’이란 용어는 특히 중요하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고대 중국 占筮의 기호론적 패턴과 우주론적 질서를 구성하는 陰陽의 네 가지 기본형(the four primary constellations)을 나타낸다. 《周易》 〈繫辭傳〉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진술이 나온다.
“한 번은 陰이 되고 한 번은 陽이 되는 것, 이것을 일컬어 道라고 한다.[一陰一陽之謂道]”
‘大象’이란 도로서, ‘음양의 리듬’이자 ‘천하의 맥박(the pulse of the world)’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5장에 나오는 풀무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첫 부분은 성인 군주를 향해 말하고 있는 듯하며, 그가 그 리듬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함축하며,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고 사회가 질서 있고 평화롭게 될 것이라 한다.
둘째 부분은 하나의 격언처럼 읽혀진다. 잔치가 벌어진 곳에는 지나가는 나그네가 머문다. 아마도 이것은 첫째 부분과 공명하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들은 음악이 연주되고 향연이 벌어진 곳으로 무리 지어 몰려들 듯이, 도의 우주적 리듬과 조화를 이루는 군주의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몰려들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도에 관한 격언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소개하고 있다. 도의 無特性(nonqualities)이 다시 한 번 찬양되고 있다. 그것은 특별한 맛이나 형태, 소리가 없으니 또한 아무리 써도 다함이 없다. 제11장의 형상을 사용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문, 그릇, 바퀴와 같아서 그 비어 있음으로 인하여 다할 수 없는 기능성을 갖게 된다.
大象을 잡으면 천하가 〈그에게로〉 가니
대상이란 天象의 어미이다. 이것은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며, 따뜻하지도 않고 서늘하지도 않다.
이 때문에 만물을 감싸 안고 거느리면서도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게 없다.
군주가 만약 그것을 잡는다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갈 것이다.
〈만물이 그에게〉 가서 해치지 않으면 태평을 누릴 것이다.
형체가 없고 표지도 없으며 치우치지 않고 드러냄도 없다. 그래서 만물이 〈그에게〉 가서 해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음악과 음식은 과객을 멈추게 할 뿐이다.
그러나 도를 입으로 말하면 담백하여 아무 맛이 없으며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으나 쓰임에 다함이 없다.
道가 깊고도 큼을 말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도에 관한 말을 들어도 이내 〈흥겨운〉 음악이나 〈맛있는〉 음식이 때맞추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흥겨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를 말로 표현할 때에는 담담하여 아무런 맛이 없으며, 보아도 볼 수 없으니 눈을 기쁘게 할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으니 귀를 기쁘게 할 수 없다.
제 마음에 쏙 든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므로 아무리 그것을 써도 다할 수가 없는 것이다
36.
將欲?之(장욕흡지) : 오므리려면
必固張之(필고장지) : 일단 펴야 한다
將欲弱之(장욕약지) : 약하게 하려면
必固强之(필고강지) : 일단 강하게 해야 한다
將欲廢之(장욕폐지) : 폐하게 하려면
必固興之(필고흥지) : 일단 흥하게 해야 한다
將欲奪之(장욕탈지) : 빼앗으려면
必固與之(필고여지) : 일단 줘야 한다
是謂微明(시위미명) : 이것을 일러 <미묘한 밝음>이라 한다
柔弱勝剛强(유약승강강) :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깁니다
魚不可脫於淵(어불가탈어연) : 물고기가 연못에서 나와서는 안됨같이
國之利器(국지리기) : 나라의 날카로운 무기도
不可以示人(불가이시인) :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36장 드러나지 않는 삶 줄이고 싶다면 확장하도록 해야 하고 약하게 만들고 싶다면 먼저 강해지게 해야 하고 망하게 하고 싶다면 번성하도록 두어야 하고 물러가게 하고 싶다면 접근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이 가르침을 미묘한 밝음의 지혜라고 한다.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기고 모호함은 명백함을 넘어선다. 물고기는 깊은 물을 나가면 안 되고 나라의 무기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서는 안 된다. |
우리가 성장하면서 배운 것들은 대부분 “나를 주목해 주시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배운다. 1등이 되라. 좋은 성적을 받아라. 챔피언이 되라. 대표가 되라. 좋은 학교에 진학하라. 등의 말들을 들어왔다. 그런 가르침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을 위에 서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어떠했는가를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한다. 만물의 조화 안에서 우리 위치를 생각하면 “미묘한 밝음의 지혜”가 생겨날 것이다. 경쟁이 없는 고요한 강함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될 것이다.
이번 장은 물질세계를 둘로 나누는 성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 삶에 대해 예리한 관찰자가 되라고 독려한다. 한심하다는 느낌을 이해하려면 먼저 대단하다고 여기는 느낌부터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약하다는 느낌은 강하다는 느낌으로부터 나온다. 워터 바이너의 [도덕경] 번역서인 [노자를 따르는 삶의 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크게 실망한 사람은
한때 기대에 부풀었던 적이 있고
맨몸이라서 불안한 사람은
무기를 들고 다녔던 적이 있으며
불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특권을 가졌던 적이 있다.
무기력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두려움에 떠는 삶의 함정에서 벗어나라. 자신이 그런 사고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라. 지금 약하다고 느낀다면 최소한 한 번은 강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그것을 받지 않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도 알고 있다. 비교하고 상황에 끼워 맞추려는 욕망에서 벗어나게 되면 당신은 노자가 “미묘한 밝음”이라고 말한 길을 택하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욕심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노자는 물고기를 비유로 들어 이 장을 마무리한다. 물고기가 깊은 물을 벗어나려 하면 얼마 가지 않아 그물에 걸린다. 여기에 36장이 주는 교훈이 있다. 차분히 기다려라 그러면 눈에 띄고자 하는 사람들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미묘한 밝음에 대한 소망이 다른 사람들보다 강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을 앞서게 될 것이다. 성장과 트로피 사이에서 홀로 쓸쓸하게 남겨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깨달아
하나 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마음속으로 하나 됨의 상태에 머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라. 피곤함이 느껴지면 충분히 휴식을 취했을 때의 느낌이 어떤지를 떠올려라. 두 가지를 동시에 알 수 있도록 반대되는 느낌도 함께 가져라. 무기력하고 질투가 솟아오르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면 지금 그 감정과 정반대의 것들이 이미 경험 안에 존재한다. 그 반대의 감정을 찾아내서 마음속으로 하나가 되라. 이렇게 하면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균형감각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하나 됨이다. 이렇게 되면 당신은 극단적인 상황마저 즐기게 되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도를 닮아가게 된다. 도는 그 무엇도 나누고 쪼개는 법이 없다. 어떻게 하나 됨이 따로따로 나뉘어 흩어질 수 있단 말인가? 나뉠 수 있다면 하나 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을 내리고 남을 세워라.
자신을 남과 비교하면서 ‘조직’의 틀 안에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성향을 감시하라. 조직은 비교를 통해 성공과 행복을 판단하게 하여 사람들의 행동을 구속하려고 만든 것이다. [도덕경]은 당신에게 미묘한 밝음을 찾으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지 마라. 인정받으려고 애쓰지도 마라. 대신 내버려 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다른 사람이 번창하게 하라. 그들의 힘과 인기가 빛나게 하라. 노자가 말한 것처럼 느긋하게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허락하라. 그러면서 깊은 물속에서 인내하며 머무르는 물고기의 가르침을 기억하라.
만약 당신이 성공하고자 한다면 제36장이 진술하듯이 당신은 逆說의 전략을 완성해야만 한다. 통치의 기술 그리고 권력을 취하고 유지하는 수단은 道의 역설적인 기능에 일치시키는 능력에 근거한다.
지나치게 확장된 것은 결국에는 스스로 몰락하게 될 것이다. 너무 강해진 것은 결국에는 스스로를 약하게 할 것이다. 정치에서 사람들은 먼저 취임했거나 강해진 사람들을 떠나게 하거나 약화시킬 수만 있다. 당신이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물을 주거나 호의를 보여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장의 메시지인 듯하며, 제36장의 전반부는 이러한 전략적 방식으로 韓非子에 의해 해석되었다.
이러한 규칙들을 다른 사람을 극복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그러한 규칙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당신에게 대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중요하다.
이러한 역설의 전략의 완성은 도의 작동원리에 대해 ‘미묘한 밝음[微明]’을 갖게 한다. 逆轉(reversal)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규칙은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결국에는 강하고 딱딱한 것을 이겨내리라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제76장과 제78장을 보라.)
또 하나의 전략적 格率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물속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아 스스로를 드러내게 되면 실패하거나 무너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스스로를 활짝 열어 드러내는 군주는 그로 인해 스스로를 약화시키게 된다.(이에 대해서는 제24장을 보라.)
이와 비슷하게 무기를 보여주는 것 또한 피해야 한다. 이것은 오로지 전시체제로 가게 만들 것이며 전쟁의 가능성 또한 늘어난다.(이에 대해서는 제31장, 제68장, 제69장, 제80장을 보라.)
전쟁에서 이기는 전략, 즉 첫째 부분에서 언급된 격률과 같은 전략들은 전쟁이 불가피할 때에만 사용되어야 한다. 선호할 만한 선택은 무엇보다 하나도 갖지 않는 것이다.
장차 움츠러들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벌리게 하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하며 장차 없애려면 반드시 먼저 높이고 장차 빼앗으려면 반드시 먼저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미묘한 데서 밝다고 한다.
장차 强梁한 것을 없애고 사납고 어지러운 것을 제거하려면 마땅히 이 네 가지 처방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 네 가지 처방은〉 만물의 본성에 따라 스스로 해치도록 만드는 것이니 형벌에 의존하는 것을 크게 생각하여 강량한 만물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미묘한 데서 밝다.”고 한 것이다.
그 벌림을 충분히 하여 만족하게 해주었는데 다시 더 벌리기를 바란다면 뭇사람들에 의해 움츠러들게 될 것이다.
이와 달리 벌린 것이 부족한 것을 다시 움츠러들게 하여 벌려지기를 구하는 것을 고치고자 한다면 〈상대에게〉 더욱 유익해지지만 나는 도리어 위태롭게 될 것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날 수 없으며 나라를 이롭게 하는 물건은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이로운 그릇[利器]’이란 ‘나라를 이롭게 하는 그릇’이다.
오직 만물의 본성에 따를 뿐 형벌을 빌려서 만물을 다스리지 않는다.
그릇을 볼 수 없으나 만물이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되면 그것이 곧 나라의 이로운 기물이다.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형벌에 맡기는 것이다. 형벌로 나라를 이롭게 하면 〈나라를〉 잃을 것이다.
물고기가 연못에서 벗어나면 반드시 잃게 되는 것이다.
나라를 이롭게 하는 기물과 형벌을 세워 사람들에게 보이면 또한 반드시 잃게 될 것이다.
37.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 도는 언제든지 억지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 된 것이 없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 임금이나 제후가 이를 지키면
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 : 온갖 것 저절로 달라집니다
化而欲作(화이욕작) : 저절로 달라지는데도 무슨 일을 하려는 욕심이 생기면
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 : 이름없는 통나무로 이를 누른다
無名之樸(무명지박) : 이름없는 통나무로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 욕심을 없애노니
不欲以靜(불욕이정) : 욕심이 없으면 고요가 찾아들고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 : 온누리에 평화가 깃들 것이다
37장 단순한 삶 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다스리는 자가 이를 지키면 세상은 각자의 박자에 따라 저절로 변한다. 삶이 단순하면 겉치레가 사라지고 우리의 순수한 본성이 빛난다. 욕심이 없으면 고요하고 세상은 저절로 바르게 된다. 침묵이 있어야만 내면에서 우주의 중심을 발견한다. |
혀를 깨물어서라도 그 입을 다물라. 이것이 이 장의 핵심이다. 첫 두 줄의 모순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당신과 내가 그동안 배워온 것을 부정한다. 우리 문화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게으르고 실패한, 그리고 가치 없이 여겨지는 개인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단순하게 사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전쟁, 테러, 기아, 증오, 범죄, 질병 등을 포함해서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고되는 모든 사건들 중 얼마나 많은 수가 창조의 자연스러움을 거스른 결과인가? 우리 본성과 이 지구는 얼마나 빛날 수 있을까? 정부가 개인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 아무도 서로를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거나 간섭하고 정복하려 하지 않는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바다, 산, 천연자원, 공기, 나무, 동물들이 존중받고,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며 번성할 수 있다면 만약 이처럼 단순한 세상이 있다면 도가 작용하는 것과 정확히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 도처럼 말이다.
자연의 리듬을 거스른다면 결국 도의 이치에 맞지 않는 장애물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도의 흐름에 따르는 지도자를 마음속에 떠올려보라. 그들은 적대적인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어서라도 입을 다문다. 이 땅의 어떤 존재에게라도 해를 끼치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현자처럼 사고하고 도에 중심을 둔다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성공과 능력에 대한 모든 관념을 바꿔라. 성공은 극단적인 성취와 더 큰 목표를 추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쓸데없이 참견하지 않을 때 세상이 훨씬 더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안에서 살아가라. 모두가 스스로를 중심에 둠으로써 자신들이 가진 힘에 다가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라.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자신에게 강요하지 마라. 그보다는 당신의 순수한 본성이 빛나도록 하라. 다른 누구보다 뛰어날 필요가 없다. 승리할 필요도 없다. 1등이나 27등 같은 특정한 등수가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에게 그저 타고난 그대로 존재할 권리를 허락하라. 하나뿐인 당신의 존재를 간섭하는 일은 그만두라.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 있고, 부유하며, 성공한 것으로 보이기 위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짐을 내려놓아라. 그 자리에 도를 향해 다가서는 내면의 다짐을 채워라. “나는 도에 집중한다. 나는 나 자신과 세상을 올바르게 다잡는다.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것을 알고, 침묵 속으로 한 걸음 물러선다.”
침묵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기질을 보라.
주변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고 싶은 바로 그 순간, 한 번 더 생각하고 입을 다물어라. 다른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가족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려는 성향이 당신에게 있음을 알아차려라.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기 전에 잠시라도 머뭇거린다면, 당신은 이미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내면에서 우주의 중심을 찾도록 돕는 길에 접어든 것이다. 끼어들기 전에 잠시 멈추는 훈련을 통해서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둘 때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능력을 훨씬 잘 발휘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제37장은 제32장에서 다루었던 주제와 연결되는데, 심지어 일부는 같은 구절을 반복하고 있다. 道는 적극적인 특성이 없고, 만약 성인 군주가 그와 일치하도록 다스린다면 치우침이 전혀 없고 無爲한다면 백성들이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고서 따를 것이다.
제32장에서도 언급되었던 통나무는 통치술의 형상으로 사용되고 있다. 통나무는 아직 특정한 형태를 취하지 않은 도의 무한한 잠재력을 상징한다. 바로 이러한 힘을 통해 군주가 다스리는 것이며, 만약 국가 안의 누구든 도의 진로에 반하여 행동하고자 할 때 그들이 진압되는 것은 바로 이 힘을 통해서이다. 이른바 黃老 道家學派로 불리는 문헌으로서 馬王堆 《노자》와 함께 발굴된 《황로백서》의 첫 행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도는 법을 낳는다.[道生法]”
이 문장은 제37장에서 말하는 것과 연관 지어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군주가 제정하는 표준들은 도에서 비롯된다. 만약 어떤 것이 그 자연스러운 역할을 손상시킨다면 군주는 그것을 제한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천하에 그리고 하늘에 그리고 지상에 ‘고요함’이 있게 되는데, 그것은 또한 자연이 자연스럽게 질서를 이룰 것이라 말한다.
道는 언제나 無爲하는데
스스로 그러함에 따른다는 뜻이다.
하지 못하는 게 없으니
만물은 모두 〈도를〉 말미암지 않음이 없고, 〈또한 바로 이 도에〉 의해 시작되고 이루어진다.
侯王이 그것을 잘 지키면 만물이 저절로 교화될 것이다.
교화되었는데도 억지로 하려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를 것이다.
‘化而欲作(교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하려는 마음이 일어난다.)’이라 한 것은 억지로 하려는 마음이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장차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를 것이니, 주인 노릇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르면〉 장차 욕심이 없어질 것이니,
경쟁하고자 함이 없다는 뜻이다.
욕심이 없어져서 고요해지면 천하가 저절로 바르게 된다.
38.
上德不德(상덕불덕) : 훌륭한 덕의 사람은 자기의 덕을 의식하지 않는다
是以有德(시이유덕) : 그러기에 정말로 덕이 있는 사람이다
下德不失德(하덕불실덕) : 훌륭하지 못한 덕의 사람은 자기의 덕을 의식한다
是以無德(시이무덕) : 그러기에 정말로 덕이 없는 사람이다
上德無爲而無以爲(상덕무위이무이위) : 훌륭한 덕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하지 않으니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이 없다
下德爲之而有以爲(하덕위지이유이위) : 훌륭하지 못한 덕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하나니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이 많다
上仁爲之而有以爲(상인위지이유이위) : 훌륭한 인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하나니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이 있다
上義爲之而有以爲(상의위지이유이위) : 훌륭한 의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하나니 억지로 일을 할 까닭이 많다
上禮爲之而莫之應(상례위지이막지응) : 훌륭한 예의 사람은 억지로 일을 하나니 그러나 아무도 응하지 않기에
則攘臂而?之(즉양비이잉지) : 소매를 걷고 남에게 강요한다
故失道而後德(고실도이후덕) : 도가 없어지면 덕이 나타나고
失德而後仁(실덕이후인) : 덕이 없어지면 인이 나타나고
失仁而後義(실인이후의) : 인이 없어지면 의가 나타나고
失義而後禮(실의이후례) : 의가 없어지면 예가 나타난다
夫禮者(부례자) : 예는
忠信之薄(충신지박) : 충성과 신의의 얄팍한 껍질이며
而亂之首(이란지수) : 혼란의 시작이다
前識者(전식자) : 앞을 내다보는 것은
道之華(도지화) : 도의 꽃이며
而愚之始(이우지시) :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是以大丈夫處其厚(시이대장부처기후) : 그러므로 성숙한 사람은 두꺼운 데 머무르고
不居其薄(불거기박) : 얄팍한 데 거하지 않는다
處其實(처기실) : 열매에 머무르고
不居其華(불거기화) : 꽃에 거하지 않는다
故去彼取此(고거피취차) : 후자는 버리고 전자를 택한다
38장 타고난 본성을 따르는 삶 덕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덕을 의식하지 않아 참된 덕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덕이 있고자 애쓰기에 참된 덕이 없다. 성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범인은 항상 무언가를 하지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가장 높은 덕(德)은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고 가장 높은 인(仁)은 조건 없이 베풀고 가장 높은 의(義)는 편견 없이 바라본다. 도가 사라지면 덕이 나타나고 덕이 사라지면 인이 나타나고 인이 사라지면 의가 나타나고 의가 사라지면 예가 나타난다. 예는 진정한 신념의 껍질에 불과하며 혼란의 시작이다. 위대한 성인은 타고난 본성을 따르고 삶의 얄팍한 일에 빠지지 않는다.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성인은 쭉정이가 아닌 열매에 머문다. 성인은 종잇장이 아닌 반석 위에 머문다. 성인은 거짓이 아닌 진실에 머문다. |
모순으로 보이는 이 장에 숨은 메시지가 있다. 덕은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가 태어난 도가 곧 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을 얻으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본성이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않게 된다. 덕이란 인을 가지려고 애쓰는 가운데 우리는 자신이 가진 도의 본성과 멀어진다. “도가 사라지면 덕이 나타난다.” 문장은 [도덕경]이 말하고 있는 내용과 다르다. 그러나 “자연은 德이 있지만 德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우리가 타고난 본성인 도를 따라 살라. 도는 하나 됨이다. 서로 반대되는 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덕이 있다고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덕이 있음”과 “덕이 없음”이라는 정반대의 극성과 대면하게 된다. 이는 우리와 도의 관계를 방해한다. 그때 우리는 새로운 무언가를 끌어들인다. 만약 덕을 얻지 못한다면 인을 갖추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仁 역시 우리가 따르고자 애쓰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도는 우리가 지켜야 하는 규범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인은 없다. 그저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은 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정당함도 공평함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본성이다. 우리는 자신의 본성에 순수해야 한다. 인과 의가 사라지면 예의 관념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당신은 수 세기 동안 편 가르기를 해온 규칙이나 관습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규칙과 관습은 당신을 도와 나를 분리시킨다. 그것을 지킬수록 더욱 멀어진다. 그래서 자신을 분열과 혼돈 속으로 몰아넣는 법규들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도는 고유의, 진정한, 중요한 본성이다. 도에는 예, 인, 덕이 없다. 도를 관찰하고 그 본성과 어울려 살라. 자신의 에고에 신경 쓰지 말고 행동하라. 도가 그러하듯 조건 없이 베풀라. 덕, 인, 의를 위해 애쓰지 마라. 그저 노자가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편견 없이 줘라.
인위적인 원칙들을 거부하고 타고난 본성을 따라 살라.
이러한 원칙들을 살펴보면 덕, 인, 의, 예, 규칙이나 규범의 순이다. 인위적인 덕은 ‘악하지’ 않게 살려는 시도이다. 사람들은 덕이라는 기준에 당신을 끼워 맞춘다. 이제 이렇게 다짐하라. “나는 도에서 태워 났고 신의 한 조각이다. 이것을 측정하는 장치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덕과 신성은 하나이다. 나는 현재의 나를 믿으며 도의 관점에 맞게 행동할 것이다. 나는 이 진리와 함께 머물러 옳지 않은 것을 멀리한다.” 또한 도가 仁이나 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라. 인이나 의는 하나 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존재할 수 없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치들임을 깨달으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당신은 그 하나 됨에서 태어났으며 되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버리고 관대하게 마음을 열어라.
시대에 뒤떨어진 혈통과 문화 중심의 관습을 버려라.
항상 그래 왔으니까 따라야 한다고 여기는, 특히 그중에서도 가족 내에서 행해져 온 의식이나 관습들을 잊어버려라. 그리고 다짐하라. “나는 영원한 도를 믿으며 자유롭게 살 것이다. 나는 나보다 앞서 살아간 사람들을 좇을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의미도 없이 분열과 증오를 만들어내는 오래된 관습을 버릴 것이다.” 법규를 준수해야만 덕에 이르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 덕은 당신의 순수한 본성과 공명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에게 무엇이 적절하고, 선하며, 무엇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합법적인지를 말해 주는 어떤 법전도 필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법에 미혹되기보다는 자신의 높은 본성이 이끄는 사랑을 실천하도록 자신을 믿어라.
어느 날, 나는 슬펐고 그래서 산책을 나섰다.
나는 들판에 주저앉았다.
토끼 한 마리가 내 처지를 눈치채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때로는 누군가를 돕는 데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심으로 가득하고
사랑이 넘치는 피조물들과
그저 조금 가까이에 있는 것.
그들은 단지
아름다운 이해의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다.
------ 16C 고난의 성자 요한-----
제38장은 《道德經》 후반부의 첫 장이다. 馬王堆 帛書에서는 ‘道經’과 ‘德經’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으므로, 제38장은 前半部의 첫 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38장은 분명 ‘德’을 다루고 있으며, 그래서 後半部 전체는 나중에 ‘德經’이라는 제목이 붙여지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이른바 ‘道德經’, 즉 ‘道’와 ‘德’에 관한 경전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제38장의 처음 세 절은 제18장과 유사한 주제로서 儒家의 ‘德’을 비판하고 있다. 유가의 ‘德’은 영어권에서는 ‘virtue’라고 번역하는 반면, 《老子》의 맥락에서 ‘efficacy(效力)’ 또는 ‘power(힘)’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유가에서 ‘덕’은 강력한 도덕적 함축을 가지면서 仁義禮智와 같은 개념들과 연결되지만, 《노자》에서 ‘德’은 이러한 도덕적 함축은 사라지고 대신에 ‘道’와 더욱 밀접하게 연관된다.
《노자》의 德은 일종의 효력으로 ‘道’에 부수되는 것이다. 첫째 절에서 말하는 더 높은 차원의 ‘덕’, 즉 ‘上德’은 유가의 도덕적 의미의 덕이 아니다. 진짜 덕은 그러한 덕 너머(beyond)에 있으며, 도덕적이지 않다. 그것은 순수한 효력이 된다. 儒敎的 價値에 매달리는 덕은 《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무력하기(powerless) 짝이 없다.
따라서 제38장은 제18장과 같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유교적 가치의 하향적 악순환을 묘사하고 있다. 일단 삶을 도덕적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강제적인 행위로 가는 길이 시작되고 따라서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우주적 질서로의 회귀는 더욱 더 어려워지게 된다.
마지막 두 절은 흔히 상호 해명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마지막 절은 분명 ‘大丈夫’가 ‘禮’나 ‘前識’에 매달리지 않을 것임을 함축한다. 따라서 ‘前識’의 개념은 부정적인 것이다. 河上公 注에서는 ‘전식’이 실질을 놓친 부적합하고 겉치레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표면적이거나 도의 ‘꽃’ 수준에 머무는 것이라고 주석한다. ‘전식’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 장의 맥락에서는 근거가 충분하지만, 다른 장들과 연결하여 읽을 때에는 약간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있다.
여기서 언급된 ‘단순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愚’가 제10장과 제65장에서는 부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이다. 도와 일치하게 되는 것은 흔히 어떤 특정한 지식이 없이 그렇게 사물의 추이에 직관적으로 따를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한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읽게 되면 ‘전식’에 관한 경구는 또한 지적인 소박성에 대한 찬양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前識’은 도의 추이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 된다.
王弼은 上德이 無爲하지만 無不爲(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하는 반면, 下德은 爲之(무언가를 추구)하지만 無以爲(무언가를 가지고 함이 없이)하는 것으로 크게 大別하여 나눈 뒤에 다시 下德을 位階的으로 나눈다. 上仁은 無以爲하고, 上義는 有以爲(무언가를 가지고)하는 것으로 다시 구분하여 《노자》에 보다 확실한 위계를 부여하고자 한다.
하지만 王弼은 이렇게 道에서 德으로, 그리고 다시 仁‧義‧禮로 멀어지는 과정이 仁‧義‧禮 자체의 한계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母와 本에 해당하는 道와 素樸함을 잃고 겉을 꾸미는 데에만 치중하는 데서 온 것이라 본다. 그러면서 근본을 되찾으면 다시 긍정될 수 있는 것이라는 “어미를 지켜 자식을 보존하고 근본을 지켜 말단을 받든다.[守母以存其子 崇本以擧其末]”는 논리를 통해 仁義의 회복을 긍정하는 암시를 한다. 이는 《노자》의 逆說의 논리를 통해 오히려 仁義를 긍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덕을〉 덕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때문에 덕이 있고,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덕을 가지고 있으면 〈그 덕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버리고, 〈자신의 덕을〉 덕으로 여기지 않으면 〈그 덕을〉 얻으려고 하는 〈마음을〉 버린다.
낮은 德을 지닌 사람은 그 덕을 잃지 않으려 하니 이 때문에 덕이 없다.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함이 없으나 하지 못하는 게 없고, 낮은 덕을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다.
높은 仁을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으며,
높은 義를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있으며,
높은 禮를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는데 〈사람들이〉 그에 응하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사람을 잡아당겨 〈억지로〉 한다.
그러므로 道를 잃은 후에 덕이요, 덕을 잃은 후에 인이요, 인을 잃은 후에 의요, 의를 잃은 후에 예이다.
무릇 예란 진실함[忠]과 믿음[信]이 얇으니 어지러움의 머리이고,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이 때문에 大丈夫는 그 두터운 곳에 처하지 얇은 데에 머물지 않으며, 실질적인 것에 처하지 그 〈허황된〉 꽃에 머물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德이란 것은 ‘얻음’이다.
늘 얻어 잃음이 없고, 늘 이로워 해를 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덕’으로 이름한 것이다. ‘덕’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도를 말미암아서이다.
어떻게 그 덕을 다하는가? ‘無’를 그 쓰임으로 삼아서이다. 無를 쓰임으로 삼으면 싣지 못하는 게 없다.
이 때문에 어떤 사물이 無의 상태이면 경유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有의 상태이면 生을 온전히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天地는 비록 넓어도 無를 마음으로 삼고, 聖王은 비록 위대하나 虛를 기본원칙으로 삼는다.
그래서 〈《周易》에서〉 “復卦를 가지고 보면 天地의 마음이 드러나고”, “동짓날에 〈이르러 이에 대해〉 생각하면 先王의 기본원칙이 보인다.”고 했다.
그러므로 〈군주가〉 자신의 사사로움을 버리고서 제 몸이 없는 〈경지에〉 있게 되면 四海 〈안의 모든 백성들이〉 존경하지 않음이 없고,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자신을 남과 다르게 하고서 제 〈사사로운〉 마음을 갖게 되면 한 몸뚱이조차 스스로 온전히 할 수 없고 〈몸 안의〉 살과 뼈마저 서로 용납할 수 없어 〈다투게〉 된다.
이 때문에 높은 德을 지닌 사람은 오로지 道를 쓴다.
자신의 덕을 덕이라 여기지 않고, 〈어떤 원칙에〉 집착함도 없고 〈어떤 것만을〉 쓰려고 함도 없다.
그래서 덕이 있고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을 수 있으니, 구하지 않아도 얻고 하지 않아도 이루어낸다. 그래서 〈높은 덕은〉 비록 덕이 있으나 그 덕의 이름이 없다.
〈이와 달리〉 낮은 덕은 구해야 얻고 해야 이루어내니, 〈이것은〉 곧 〈일정한〉 善을 세워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래서 덕의 이름이 있게 된다.
구해야 그것을 얻는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잃는 게 있고, 해야 이룬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실패가 있게 되며, 善의 이름이 생겨나면 不善이 그에 응하여 〈생겨난다.〉
그래서 “낮은 덕을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다.”고 했다.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다.’는 것은 치우치게 하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무릇 無爲를 할 수 없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은 모두가 낮은 덕에 해당하니 仁과 義, 禮節이 이것이다.
〈이는〉 덕의 높고 낮음을 밝히려고 번번이 낮은 덕을 들어 높은 덕에 대비시킨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는’ 데에 이르는 것은 낮은 덕의 역량을 다한 것이니 높은 仁이 이에 해당한다.
〈높은 인은〉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는 데에는 충분히 도달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오히려 무언가를 하니, 무언가를 하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는 까닭에 有爲의 우환이 있다.
근본은 無爲에 있고, 어미는 無名에 있는데, 〈높은 인의 경우〉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나아갔고, 어미를 버리고 자식을 쓰니, 공이 비록 커도 반드시 다스리지 못하는 게 있고, 이름이 비록 아름다워도 반드시 거짓이 생겨날 것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고 일으켜 세우지 않고서는 다스릴 수 없으면 곧 무언가를 하게 되기 때문에 두루두루 널리 仁愛를 베풂이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랑에 치우침이나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높은 인을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없는 것이다.
사랑은 모두에게 똑같이 할 수 없으면 어느 쪽은 누르고 어느 쪽은 막으면서 正直을 義理로 따지는 사람이 나오니,
〈이런 사람들은〉 구부러진 것에는 성내고 바른 것은 도와 저것은 도와주고 이것은 공격하니 일에나 사람에 대해 〈일정한〉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높은 의를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나 무엇을 가지고 함이 있는 것이다.
곧음이 돈독하지 못하면 文飾을 잘 꾸미고 닦아 禮敬을 갖춘 사람이 나오니, 〈이런 사람은〉 예경을 닦는 것을 숭상하고 좋아하며 관계 맺음의 사소한 것까지 따지면 서로 맞지 않는 사이에는 분노의 감정이 생겨난다.
그래서 높은 예를 지닌 사람은 무언가를 하는데 〈사람들이〉 그에 응하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사람을〉 잡아당겨 〈억지로〉 하는 것이다. 저 지극히 큰 것은 아마도 道뿐일 것이다.
이로부터 이미 나아간 것이 어찌 존경받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周易》 〈繫辭傳〉에서 聖人에 대해 말하였듯이〉 비록 德業이 盛大하고 萬物을 다 갖추었으나 오히려 각자 저마다의 덕을 갖고 있어 아직 두루 다 포괄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늘은 〈땅이 하는 만물을〉 싣는 일을 할 수 없고, 땅은 〈하늘이 하는 만물을〉 덮어주는 일을 할 수 없고,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만물 모두를〉 풍족하게 할 수는 없다.
만물은 비록 귀하나 無를 쓰임으로 삼는 것이니, 無를 온전히 體로 삼는 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無를 온전히 체로 삼는 데에 이르지 못하면 그 위대함을 잃으니, 이른바 ‘도를 잃은 후에 덕’이라는 것이다.
無를 쓰임으로 삼으면 어미를 얻기 때문에 몸소 수고하지 않아도 만물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이 이하로 나아가면 쓰임의 어미를 잃으니 무위할 수 없어 널리 베푸는 것을 귀히 여기고,
널리 베풀 수 없어 바르고 곧음[正直]을 귀히 여기고,
바르고 곧게 할 수 없으니 꾸미고 공경함을 귀히 여기게 되니,
이른바 ‘덕을 잃은 후에 仁이고, 인을 잃은 후에 義이고, 의를 잃은 후에 禮이다.’라는 것이다.
저 禮는 진실함과 믿음이 돈독하지 못하고 소통과 쉬움이 분명하지 않은 데서 시작되니 겉꾸밈만 따지고 갖추며 하찮은 것을 가지고 싸우고 나뉜다.
저 仁義란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이를 〈일부러 하려고〉 하면 오히려 거짓이 되니, 하물며 바깥을 꾸미는 일에 힘을 쓰는데 오래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무릇 예란 진실함과 믿음이 얇으니 어지러움의 머리이다.”라고 한 것이다.
前識은 남보다 먼저 아는 것이니 곧 낮은 덕의 부류이다.
자신의 총명함을 다해 남보다 먼저 알려 하고, 자신의 智力을 써서 사소한 일까지 헤아리고자 하니,
비록 실정을 파악해도 간교함이 더 치밀해지고
비록 칭송하는 소리가 가득해도 돈독함과 실효성이 더 사라지니, 수고해도 일처리는 혼란스럽고 힘써서 해도 다스림은 거칠어지니, 聖智를 다해도 백성들은 오히려 더 해롭다 여긴다.
자기를 버리고 사물 〈그 자체에〉 맡기면 無爲해도 평안하고, 저 소박함을 지키면 전장제도가 필요치 않으니 저 〈미리〉 얻은 것에 사로잡혀 이 지켜야 할 것을 버린다.
그래서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허황된〉 꽃이요 어리석음의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진실로 공을 이루는 어미를 얻으면 만물이 그에 의해 자라지만 잔소리 않고, 만사가 그에 의해 보존되지만 수고롭지 않다.
〈사람을〉 쓸 때 그의 형체[形]로 하지 않고 〈사람을〉 부리되 그의 이름[名]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仁義를 드러낼 수 있고 禮敬을 빛나게 할 수 있다.
무릇 〈만물을〉 실을 때에는 큰 도로 하고 〈《노자》 37.3에서 말하듯이 만물을〉 진압할 때에는 無名으로 하면, 사람들이 숭상할 것이 없고 야심 있는 사람들이 바빠질 까닭이 없다.
각자에게 합당한 일을 맡기고 저마다 성실함을 다하면 仁德이 후해지고 義를 행함이 바로잡히고 예경이 맑게 된다.
실어야 할 것을 버리고 살려야 할 것을 버리며 이미 자신의 완성된 형체를 쓰고 자신의 총명함을 쓰면 仁은 숭상의 대상이 되고 義는 경쟁의 대상이 되고 禮는 다툼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인덕의 후함은 인을 써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요, 의를 행하는 바름은 의를 써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요, 예경의 맑음은 예를 써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만물을〉 실을 때에 도로 하고 〈만물을〉 통솔할 때에 어미로 하기 때문에 드러나도 숭상할 게 없고, 빛나도 다툴 게 없는 것이다.
저 無名을 쓰기 때문에 이름이 돈독해지고 저 無形을 쓰기 때문에 형체가 이루어진다.
어미를 지켜 자식을 보존하고 근본을 숭상하여 말단을 받들면 形名이 함께 갖추어져 사특함이 생겨나지 않고, 큰 아름다움이 하늘에 짝하여 〈허황된〉 꽃이 피지 않는다.
그래서 어미는 멀리해서는 안 되고 근본은 잃어서는 안 된다.
인의는 어미가 낳은 것이니 어미가 될 수 없고, 그릇은 匠人이 만든 것이니 〈그릇 그 자체가〉 장인이 될 수 없다.
어미를 버리고 자식을 쓰며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나아가면, 이름에 나뉨이 생기고 형체에 그침이 있게 될 것이니,
그 큼을 끝까지 다해도 반드시 두루 다 하지 못하는 게 있고 그 아름다움을 융성히 해도 반드시 우환이 있게 되니, 공이 무언가를 하는 데에 있다 해도 어찌 처할 만하겠는가.
39.
昔之得一者(석지득일자) : 예부터 <하나>를 얻은 것들이 있다
天得一以淸(천득일이청) :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고
地得一以寧(지득일이녕) : 땅은 하나를 얻어 편안하고
神得一以靈(신득일이령) : 신은 하나를 얻어 영묘하고
谷得一以盈(곡득일이영) :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 가득하고
萬物得一以生(만물득일이생) : 온갖 것 하나를 얻어 자라나고
侯王得一以爲天下貞(후왕득일이위천하정) : 왕과 제후는 하나를 얻어 세상의 어른이 되고
其致之(기치지) : 이 모두가 하나의 덕이다
天無以淸(천무이청) : 하늘은 그것을 맑게 하는 것 없으면
將恐裂(장공렬) : 갈라질 것이고
地無以寧(지무이녕) : 땅은 그것을 편안하게 하는 것 없으면
將恐發(장공발) : 흔들릴 것이고
神無以靈(신무이령) : 신은 그것을 영묘하게 하는 것 없으면
將恐歇(장공헐) : 시들 것이고
谷無以盈(곡무이영) : 골짜기는 그것을 가득하게 하는 것 없으면
將恐竭(장공갈) : 마를 것이고
萬物無以生(만물무이생) : 온갖 것 그것을 자라게 하는 것 없으면
將恐滅(장공멸) : 없어져 버릴 것이고
侯王無以貴高(후왕무이귀고) : 왕과 제후는 그들을 어른되게 하는 것 없으면
將恐蹶(장공궐) : 넘어질 것이다
故貴以賤爲本(고귀이천위본) : 그러므로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하고
高以下爲基(고이하위기) :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바탕으로 한다
是以後王自謂孤(시이후왕자위고) : 이런 까닭으로 왕과 제후는 스스로를 <고아 같은 사람>,
寡不穀(과불곡) : <짝잃은 사람>, <보잘 것없는 사람'이라 부른다
此非以賤爲本邪非乎(차비이천위본사비호) : 이것이 바로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 아니겠는가
故致數輿無輿(고치수여무여) : 지극히 영예로운 것은 영예로움이 아니다
不欲??如玉(불욕록록여옥) : 구슬처럼 영롱한 소리를 내려 하지 말고
珞珞如石(락락여석) : 돌처럼 담담한 소리를 내시오
39장 온전한 삶 예로부터 하나에서 비롯된 것들이 있다. 하늘은 하나여서 맑고 땅은 하나여서 단단하고 영혼은 하나여서 가득하고 만물은 하나여서 온전하며 나라는 하나여서 바르게 된다. 이 모두는 온전함의 덕 안에 있다. 사람이 도의 일에 끼어들면 하늘이 탁해지고 땅은 황패해지며 균형은 무너지고 만물은 소멸한다. 그러므로 귀함은 겸손함에 뿌리를 두고 높음은 낮음을 근본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높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의롭고, 부족하며, 보잘것없다고 하는 까닭이다. 천체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면 마차의 각 부분들은 소용이 없고 우주와 어울리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우주와 조화를 이루어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겸손이다. 지나친 영광은 영광이 아니다. 옥처럼 빛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니 돌처럼 소박한 소리를 내라. |
우리는 온전함이라고 하면 어떤 완벽한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노자는 달리 보고 있다. 노자는 온전함이 겸손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겸손함이 우리의 온전함을 불러낼 때 우리는 전체의 일부로서 살아가게 된다. 온전함을 가지면 전체의 다른 부분들과 협동하고 순응하여 우주와 조화롭게 존재한다. 전체 어느 한 부분을 방해하고 간섭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전체와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우월한 위치에 두는 순간, 도의 흐름을 가로막는 것이다.
노자는 우주가 온전하다고 주장한다. 우주는 하나됨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어떤 부분도 이 상태에서 떨어져 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늘, 땅, 영혼 그리고 만물이 모두 전체의 일부이다. 그것이 그들이 마력이다. 하늘과 나무는 잘 어우러져 있는데 사람들의 에고는 독립되어 있고, 개성이 넘치며, 우월하다고 억지를 부린다. 이러한 에고의 관점을 바꾼다면 당신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마음을 열고 하나 됨의 신호를 찾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몸은 그 자체로 우주이다. 그것은 하나의 개체이지만 서로 연결된 수없이 많은 개별적 개체들을 포함하고 있다. 전체이기를 거부하는 하나의 개체는 모든 개체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결국에는 소멸하게 한다. 인간들이 하늘을 오염시키고 땅을 고갈시키며, 전체의 균형을 교란함으로써 도를 방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접해 있는 세포와 협조하기를 거부하는 암세포는 결국 다른 세포들을 급하게 먹어 치울 것이고, 전체를 파괴할 것이다. 암세포는 전체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기 때문이다. 암세포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숙주를 죽임으로써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간다.
당신과 지구의 관계를 조화시켜라.
온전함의 정신을 품고 살라. 당신이 도의 일부임을 깨달아라. 도와 조화를 이루지 않고는 위대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지각하라. 이는 하나 됨의 일부로서 자연의 흐름에 맞게 살며 모든 면에서 자연을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을 내어 쓰레기를 줍고 재활용하라. 평화로운 마음으로 많이 걸어라. 온전함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나누 주고, 온하하며, 앞서 나서지 않는 도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겸손함 속에서, 당신의 근원을 연출하는 위대한 드라마의 한 역할을 자각하게 된다. “우주와 어울리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라고 말한 노자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자신의 독립된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고
마주치는 모든 것들 속에서 자신을 보라.
온전한 삶을 살게 되면 에고가 원하는 독립성에서 벗어나 삶의 모든 부분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주의 깊게 관찰하라.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라. 이 지구 상 모든 생명체 중에서, 숲과 바다 그리고 하늘의 모든 존재들 속에서 자신을 보라. 그렇게 할수록 당신은 경쟁하기보다는 서로 돕기를 원할 것이다. ‘그들’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 존재의 방식을 실천하라. 행복이 당신을 지나쳐갔다고 느꼈었지만 사실은 행복 또한 하나 됨의 일부라는 것을 알아차려라.
數的 상징으로서 ‘하나(one)’ 또는 ‘하나됨(oneness)’은 道를 나타낸다. 도의 하나됨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 사회의 영역 - 여기에는 신령(spirits)의 영역까지 포함된다. - 을 통합시켜준다. 이것은 이들 세 영역을 통일시키는 포용적 패턴으로서 도를 말하는 제25장과 共鳴한다.
둘째 부분은 말하는 의미가 아마도 이들 세 영역이 도의 패턴으로 통합되기 때문에 - 그리고 그것들은 도가의 역설의 규칙(the Daoist rule of the paradox)을 따르기 때문에 - 이들 세 영역은 그들이 하는 대로 기능할 뿐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이것은 특히 제6장에서 말하듯이 계곡이 비었음으로 인하여 만물이 자라날 수 있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치적 군주가 비천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가리키는 것(즉 ‘홀로 된 사람[孤]’, ‘버려진 사람[寡]’, ‘가진 게 없는 사람[不穀]’이란 말은 고대 중국에서 군주들이 실제로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었다.)은 바로 자신들이 비어 있음 -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자신의 족친에만 편애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유대가 없으며(the lack of social bonds) - 또한 자신을 얽어매는 개인적 재산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비어 있음’으로 해서만 군주는 도를 드러낼 수 있고 또한 이렇게 하여 최고의 통치자가 되는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가장 낮은 것을 가장 높은 것으로 바꾸어주는 역설적인 顚倒의 규칙은 그들 지위의 토대가 된다.
마지막 부분은 도가적 군주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과 자신의 통치 방식을 부드러움(여성성)과 동일시하지 딱딱함(남성성)과 동일시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진술하고 있다.
옛날 하나를 얻은 것은,
昔은 처음이다. 〈《노자》가 말하는〉 하나는 數의 시작이자 사물의 궁극이다.
이 하나는 〈아래에서 논의되는 天‧地‧神‧谷과 같은〉 각각의 物이 주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物은 각각 이 하나를 얻어 완성되는데 이미 완성되면 이 하나를 버리고서 그 완성된 것에 머무른다.
완성된 것에 머무르면 저들을 〈낳아준〉 어미를 잃게 된다. 그러므로 모두 찢어지고 꺼지고 다하고 말라버리고 없어지고 넘어지는 것이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 맑아지고, 땅은 하나를 얻어 안정되고, 신령은 하나를 얻어 영험해지고,
계곡은 하나를 얻어 가득 차고, 만물은 하나를 얻어 생장하고, 侯王은 하나를 얻어 천하가 바르게 되니, 〈하늘‧땅‧신령‧계곡이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바로 ‘하나’를 〈얻어서〉이다.
〈하늘‧땅‧신령‧계곡이〉 각각 그 하나로 이와 같은 맑아지고, 안정되고, 영험해지고, 가득 차고, 생장하고, 바르게 됨에 이른다는 뜻이다.
하늘이 〈이 하나〉로써 맑게 됨이 없으면 장차 찢어질까 두렵고,
하나를 써서 맑음에 이를 뿐이지 맑음을 써서 맑게 되는 게 아니다.
하나를 지키면 맑음을 잃지 않지만 맑음을 쓰면 찢어질까 두려워하게 된다.
그래서 공을 이루는 어미를 버릴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모두 그 〈어미의〉 공적을 쓰지 않으면 그 근본을 잃을까 두려운 것이다.
땅이 〈이 하나〉로써 안정됨이 없으면 장차 꺼질까 두렵고, 신령이 〈이 하나〉로써 영험함이 없으면 장차 그 영험이 다할까 두렵고,
계곡이 〈이 하나〉로써 가득 참이 없으면 장차 〈계곡의 물이〉 말라버릴까 두렵고, 만물이 〈이 하나〉로써 생겨남이 없으면 장차 없어질까 두렵고, 侯王이 〈이 하나〉로써 고귀해짐이 없으면 장차 넘어질까 두렵다.
그러므로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고, 높임은 낮춤을 기반으로 삼는다.
이런 까닭에 후왕이 스스로를 일컬어 외로운 자[孤], 버려진 자[寡], 가진 게 없는 자[不穀]라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천함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자주 〈스스로를〉 명예롭게 하면 〈오히려〉 명예가 없어지니 寶玉처럼 반짝반짝 빛나거나 돌처럼 거칠게 〈그 빛을 그 안에 갈무리하여〉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맑음이 〈스스로〉 맑게 할 수 없고 가득 참이 〈스스로〉 가득 차게 할 수 없으니 모두 그 어미가 있어 그 형체를 보존하게 된다.
그러므로 맑음 〈그 자체는〉 귀하게 여길 만하지 못하고, 가득 참 〈그 자체는〉 많다고 여기기에 부족하니, 귀함은 그 어미에게 있으나 어미는 형체를 귀하게 여김이 없다.
〈이렇게 볼 때〉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고 높임은 낮춤을 기반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자주 〈스스로를〉 명예롭게 하는 것은 이내 명예가 없어지는 법이다.
옥의 반짝거림과 돌의 거침은 그 몸뚱이가 형체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다할 뿐이다. 따라서 욕심내지 않는다.
40.
反者道之動(반자도지동) : 되돌아 감이 도의 움직임이다
弱者道之用(약자도지용) : 약함이 도의 쓰임이다
天下萬物生於有(천하만물생어유) : 온 세상 모든 것은 <있음>에서 생겨나고
有生於無(유생어무) : 있음은 <없음>에서 생겨났다
40장 되돌아감과 약함의 삶 되돌아감이 도의 움직임이고 약함은 도의 방식이다. 만물은 있음에서 태어나고 있음은 없음에서 태어난다. |
[도덕경] 81장 중에서 이 네 줄에 담긴 지혜를 터득한다면 당신은 어떤 성인 이상으로 행복하고, 만족스러우며 도의 중심을 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첫 문자의 “되돌아감”이라는 말은 존재의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하라는 것이다. 노자는 육체를 떠나지 말고 살아 있는 동안 죽으라고 한다. 당신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만물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수 세기가 지난 후 현대 양지 물리학이 증명해 냈다. 입자들은 가장 작은 소립자 수준의 입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세한 조각들이 입자 가속기 안에서 충돌하면 거기엔 입자가 없는 파동 에너지만 남는다. 따라서 당신의 근원적인 정신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양자물리학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기원전 6세기의 노자는 이미 정신이 생명을 낳는다는 근본적인 정신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도의 한 부분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에고를 버리고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육신이 죽어야만 비로소 되돌아가는 여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삶의 방식을 바꾸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모든 생명체들은 생의 왕복 티켓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그들이 정신에서 태어났으며 다시 돌아가리라는 것을 안다. 태어나면서 죽음도 함께 선고받았다는 인식이 자유롭고 유쾌한 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 신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품었던 애정이 가득한 그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살아 있는 동안 되돌아가는 “티켓”으로 사용된다. 돌아가는 여행을 하면서 에고의 신분증을 잃어버리게 될 뿐 아니라 우주의 힘과도 같은 당신 근원의 힘을 회복하는 선물까지 받게 된다. 당신은 걱정과 근심이 없는 존재의 하느님 속으로 녹아들고, 당신이 지금 바라보는 세상은 더할 나위 없이 완전하고 무한하다. 거기에는 더 이상 걱정도, 근심도, 재산에 따른 신분의 구별도 없다. 당신은 자유인이다.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정신적인 존재이다.
되돌아감과 약함을 중시하면서 당신이 나아가는 방향을 살펴보라.
삶의 모든 면에서 당신이 내딛는 걸음을 살펴보라. 당신의 경력, 관계, 건강 문제 등에 있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 생각하라.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라. “나는 진정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시작된 곳에서 멀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있는가?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도에서 멀어지기보다는 그리로 되돌아감에 대해 한층 솔직한 자세를 가질 수 있다. 운동을 하고 더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먹겠다는 결심은 그저 웰빙의 수준만 유지하게 해줄 뿐이다. 에고의 작용을 멈추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려는 결의야말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관대해지려는 결단도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당신이 지금 향하고 있는 방향, 그러니까 당신의 근원적인 정신에서 멀어지는 혹은 그리로 돌아가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대서 나온다.
항복하라!
이것이 약함의 전부이다. 당신의 보잘 것 없는 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반면에 도는 당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나는 항복했다. 나는 신이 모든 책을 쓰고, 모든 음악을 작곡하고, 모든 건물을 짓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하는 힘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모든 만물이 “있음”의 세상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존재함 그 자체는 ‘없음’에서 태어났다. 내가 무릎을 꿇어 향한 것은 이 실재하지 않는 영성의 빛나는 상태이며 이는 곧 도이다. 당신도 이와 같이 하기를 권한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어떻게 완전하게 어울려 흘러가는지 평화롭게 지켜보라.
제40장은 뒤의 제42장과 연결된다. 제40장은 《道德經》에서 가장 짧은 장이지만 가장 잘 알려진 장이면서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이기도 하다. 크게 보면 이 장은 道의 운동과 작용 그리고 萬物의 기원과 관련하여 有無에 관해 언급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 부분은 竹簡本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老子의 사상 가운데 아주 핵심적인 부분으로 여겨진다.
특히 주목할 것은 기존에 天下萬物은 有에서, 有는 無에서 비롯된다는 명확한 논리가 竹簡本에는 天下萬物이 有와 無에서 동시에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어서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통상적으로 道는 無와 가깝고 萬物은 有와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어 왔는데, 竹簡本에 따르면 유와 무 모두 道에 가까운 것이 된다.
有와 無는 오늘날 많은 경우 西洋哲學의 存在論的 개념인 存在(being)와 非存在(non-being)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는데, 그레이엄(Angus C. Graham)은 이 두 말의 의미가 “……에 있다.(there is)” 혹은 “……에 없다.(there is not)”라는 뜻이 기본 의미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로부터 더 나아가서 보다 추상화된 의미를 갖게 되더라도 그 의미는 존재와 비존재의 의미라기보다 ‘무엇이라고 규정하여 말할 수 있는 것(something)’과 ‘무엇이라고 규정하여 말할 수 없는 것(nothing 혹은 no- thing-ness)’이란 의미로 옮기기도 한다. 이러한 까닭에 최근의 英譯者들은 이를 다른 방식으로 다양하게 옮기고 있는데, 에임스(Roger T. Ames)는 有無를 각각 ‘규정된 것(the determinate)’과 ‘규정되지 않은 것(the indeterminate)’으로, 에드먼드 라이덴(Edmund Lyden)은 ‘있음(being)’과 ‘없음(beingless)’으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어의 흐름은 동양의 전통개념이 어떻게 서양식으로 이해되는지 살피는 데 참고할 만하다.
또한 《老子》의 유명한 ‘역전[反]’의 사상 혹은 역설의 논리가 표현된 곳이 이 장인데, 이 ‘역전’의 사상은 20세기 중국에서는 서양의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辨證法 사상과 전통철학을 연결하려는 시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 역전의 사상을 변증법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은 여전히 토론의 여지가 있다.
王弼은 道의 운동과 쓰임에 대한 《老子》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지만, 道와 有無의 관계에서는 우주론적 해석보다 쓰임의 입장에서 그 의미를 이해한다. 즉 有에 대해 無가 우선성[本]을 갖는다는 것은 無의 有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有의 완전함을 위해 無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 또한 왕필에게서 늘 반복하여 볼 수 있는 해석의 방식이다.
되돌아가는 것은 道의 운동이요,
높임은 낮춤을 기반으로 삼고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하고 有는 無를 쓰임[用]으로 삼으니, 이렇게 〈서로 상대되는 것이 순환하는 것이 도의〉 되돌아감이다.
움직일 때에 모두 無로 나아가면 만물이 통한다.
이 때문에 “되돌아가는 것은 도의 운동이다.”라고 했다.
〈도의〉 부드러움과 약함은 〈다하지 않는〉 도의 쓰임이다.
〈도의〉 부드러움과 약함은 〈만물에〉 똑같이 통하니 〈그 쓰임이〉 다할 수 없다.
天下의 萬物은 有에서 생겨나고 有는 無에서 생겨난다.
天下의 만물은 모두 有로 해서 생겨나지만 유가 시작되는 곳에서는 無를 근본으로 삼는다.
장차 有를 온전케 하려면 반드시 無로 되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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