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해설(老子와 똥막대기)

도덕경/또다른 해석1/열반이란 말에는 아무 뜻이 없다. 그저 이름이 열반일 뿐이다

수선님 2021. 9. 21. 15:03

도덕경/...님의 또다른 해석

 

도덕경 제1장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이 첫 문장은 노자가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무엇에 대해서 이름을 ‘도(道)’ 라고 붙인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자기가 지금부터 그것의 이름을 ‘도(道)’ 라고 하기는 하지만 꼭 그것의 이름이 ‘도(道)’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후대의 엉터리 학자들이 그 말을 못 알아먹고 2천 년 동안 헛소리만 해온 거라. 이름을 ‘깨달음’ 이라 해도 좋고, ‘섭리’라 해도 좋고, ‘법칙’이라 해도 좋다는 말이다. 그냥 이름을 붙이다 보니 ‘도(道)’라 했을 뿐이니 이름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지 않는가 고민하지 말라는 친절한 설명이다. 《도덕경》의 제1장은 노자가 어떤 것에 붙인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불교가 동양정신의 거대한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의 탁월한 한역에 힘입은 바가 크다. 만약 범어로 된 불경을 현장이 한문으로 번역해서 중국에 소개할 때도 엉터리 짓을 했더라면 불경도 코미디 대본으로 전락했을 거다.

 

현장은 범어의 ‘니르바나’를 의역(意譯)하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소리나는 대로 ‘열반(涅槃)’이라고 음역(音譯)한 것이다. 이게 위대한 번역이다. 열반이란 말에는 아무 뜻이 없다. 그저 이름이 열반일 뿐이다. 열반이란 이름에 어떤 뜻을 담으면 그건 이미 열반이 아닌 것이 돼버린다. 노자가 그것을 염려하여 첫머리에 저 말을 써놓은 것이다. ‘도라는 것은 그저 이름일 뿐이고 그것(이름)은 꼭 도가 아니어도 무방하다’라고 뒤에 가보면 알겠지만 이런 문장의 의미를 모른채 《도덕경》을 해석한답시고 사람 속 뒤집는 짓을 하고 있으니 도(道)를 ‘길’이란 뜻으로 받아들이는 촌극을 벌이게 된다. 

 

다음 구절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은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를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이름으로 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꼭) 그 이름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말이다. 사과나 애플이나 능금이나 이름은 어떻게 붙이든 그 가르치는 대상이 하나의 약속으로 받아들여지면 좋지 않은가라는 말이다.

도라는 이름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는 문장을, 도라는 것 자체의 본질에 대한 설명으로 오역해버리면 책 내용을 완전히 뒤바꾸게 된다. 《도덕경》이란 심오하고 고매한 철학사상서를 오역과 악역으로 황칠을 해놓은 탓에 누군가의 말처럼 초등학생 도덕교과서보다 못한 황당무계한 잡서가 돼버린 거다.

왜 그러냐? 한 줄을 잘못 읽어버리니까 그 다음 구절이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앞줄과 뒷줄이 내용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전혀 연결이 안 된다. 그러니 이게 고전이라 대접을 받겠느냐 말이다. 《도덕경》이 그런 책일까? 노자가 문장 실력이 없어서 앞뒤 연결도 안 되는 수작을 그토록 늘어놓았을까? 노자 할아방은 개똥철학자가 아니다. 《도덕경》 전체 5천 글자는 그야말로 한 글자도 잘못 끼여든 것 없이 전체가 물 흐르듯 한 일관성과 논리성을 갖춘 경탄할 만한 명저다. 

앞으로 자연히 알게 되겠지만 《도덕경》은 결코 그렇게 허술한 짜임새를 가진 책이 아니다. 소름이 끼치도록 논리 정연하고 완벽하게 짜여진 서술구조와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문장의 절약을 보여준다. 그 전체가 가히 천하의 미문이요, 명문이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앞서 말했듯이 제1장은 ‘도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때는 천지의 시작이고, (도라는)이름을 붙이고 보면 이것은 만물의 어머니가 되는 무엇이다’라는 말이다. 바로 도라는 이름을 붙여 노자가 지금부터 설명하려는 그 무엇은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냥 천지의 시작이니 언급할 이유가 없고, 도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부터는 만물의 어머니로서 설명이 가능해진다. 고로 어쩔 수 없이 (도라는)이름을 붙이게 되었노라, 하고 작명의 동기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름을 붙이든 안 붙이든 우주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주’라는 이름을 붙여놓기 전에는 우리는 ‘우주’에 대해서 논할 수가 없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이 세상의 근본 공간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인식 세계에 편입되는 것은 이름을 갖게 되는 순간부터다. 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노자는 이름을 붙이기 전의 무엇은 천지의 시작이니 따지기 어렵고, 도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서야 만물의 모태로서 하나의 인식 대상이 되고 설명이 가능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천지지시(天池之始)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고 철학적 사변의 범주가 아니다. 그러나 만물지모(萬物之母)는 언어로 설명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무엇이 된다. 그 경계가 바로 무명(無名)과 유명(有名)인 것이다. 그 어떤 초월적이고 불가사의하며 전세계(全世界)적인 대상일지라도 우리는 이름만 붙이고 나면 그때부터 사유로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음이다. 우주의 이전, 태초의 태초, 빅뱅 이전의 세계도 ‘무극(無極)’이라든가 ‘태극(太極)’이라든가 물리학적 용어로 ‘우주알(Cosmos egg)'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이름만 붙이면, 일단 언어적 표현의 대상물이 되고 언어의 범주에 포함되면 인식과 사유의 대상물이 된다는 철학적 통찰의 압축이다.

 

다음 구절을 보자.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

 

 ‘요’라는 글자는 ‘지름길,샛길 요’자다. ‘돌 요’로도 쓰인다. 우리가 ‘요행을 바란다’는 말을 쓸 때 저 ‘요’자를 쓴다. 글자의 어원을 거슬러 가면 아주 고대에는 ‘변방의 요새’를 뜻하기도 했다.

 

노자가 도라는 이름에 대해 말하다가 왜 뜬금없이 전혀 엉뚱해 보이는 이런 소리를 이런 위치에서 불쑥하고 나오냐는 것이다. 도라는 이름과 무명이니 유명이니 하는 소리들과 천지지시나 만물지모가 나온 앞구절하고 이 구절이 도저히 연결이 안 되잖아. 

이 구절에 쓰인 ‘욕(欲)’이라는 글자의 뜻을 생각해보자. 이름(名)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욕(欲)이란 글자가 튀어나오냐 말이다. 욕(欲)은 ‘하고 싶어하다’는 뜻을 가진 글자다. 무욕(無欲)은 당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되겠다.

 

그렇다면 위의 문장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냐를 생각해야 한다. ‘욕(欲)’의 목적어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름(명)이다. 그래서 ‘고상무욕(故常無欲)’은 ‘꼭(굳이)(도의)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하는 뜻이다. ‘이관기묘(以觀其妙)’ 이 말은 ‘그(도의) 묘(妙)를 볼 것이고’로 해석하면 된다.

이어서 역하면 ‘도에 이름을 꼭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도의 묘함을 볼 것이고’가 되겠다. 앞에서 노자가 뭐라고 했지? 무명이면 천지지시라고 했잖아.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천지지시의 묘를 보게 된다는 말이다. 다음 문장의 뜻은 자연히 이와 같다. 상유욕(常有欲), 즉 ‘도에 굳이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그 요를 볼 것이다.’ 두 문장을 연결해서 주해를 달아 읽어보자.

‘굳이 도에 이름을 붙이고자 하지 않으면 (천지지시의) 묘를 볼 것이고, 이름을 붙이고자 하면 (만물지모)의 요를 보게 된다’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묘와 요의 의미가 무엇이냐다. 무엇일까? 노자는 무엇을 묘라 하고 무엇을 요라 했을까? 그 것은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알게 된다.

 

차양자동 출이이명

此兩者同 出而異名

 

한자는 소리글자가 아닌 뜻글자이기 때문에 말을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쓰는 기능이 적다. 검인정 교과서의 문법이 없던 시대의 기록인 《도덕경》을 읽으려고 하면 우리는 노자란 사람의 필법을 먼저 살펴야 하고 그가 주로 사용하는 어순과 글 버릇을 파악하지 않으면 오역이 나오기 쉽다.

그리고 고려해야 할 또 한 가지 문제는 문장으로서의 한문은 띄어쓰기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읽을 때는 오히려 정확하고 규칙적인 띄움을 사용한다. 그래서 만약 엷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이라면 전후 네글자씩 둘러 갈라지지 세 글자, 다섯 글자, 혹은 여섯 글자 두 글자 식으로 문장을 만들지 않는다.

만약 앞의 네 글자가 ‘◎◎◎◎’이면, 뒤의 네 글자도 ‘◎◎◎◎’가 되고 앞부분이 ‘◎◎◎ ◎’이면 뒤도‘◎◎◎◎’이 되도록 문장을 틀에 맞춘다는 것이다.

노자도 《도덕경》을 기술할 때 이런 규칙성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차양자동 출이이명(此兩者同 出而異名)’이란 문장을 해석할 때 우선 이 문장의 구조를 살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차양자동(此兩者同)’이란 앞부분을 띄워쓰면 ‘차양자 동’이 된다. 즉 ‘이 두가지(此兩者)는 같다(同)’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뒷부분도 같은 구조로 띄어 읽으면 정확한 의도가 나온다. ‘출이이 명’이 되는 것이다. 즉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出而異)이름(名)이다’와 ‘다른 이름으로 나온 것이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의미가 다르다. 후자를 택하면 앞에 나온 내용들과 논리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노자가 이야기해왔던 것은 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와, 이름을 붙이고 안 붙이는 것의 차이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다. 무명(無名)이냐 유명(有名)이냐 즉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말한 것이지, 이름이 같으냐 다르냐를 말한 것이 아니다. 천지지시와 만물지모의 차이는 이름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묘와 요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붙여 부를 때와 이름이 없어 부를 수 없을 때의 차이이다. 따라서 저 문장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되어야 정확한 것이 된다.

 

‘저 두 가지는 같은 것인데, 차이가 나는 것은 이름이다(있느냐,없느냐)’

보고 있듯이 노자의 글은 건너뛰거나 난데없이 엉뚱한 글이 하나씩 끼어들거나 논리가 엉뚱한 곳으로 튀거나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돼서 물처럼 끊기지 않고 흐르는 사상의 강이다. 

 

同謂之玄 玄之又玄

동위지현 현지우현

 

‘현(玄)’은 ‘검을 현’이다. 그러나 검은 색을 가리키는 ‘흑(黑)’자와는 쓰임이 다르다. 천자문의 첫 구절에 나오는 천지현황(天池玄黃)이란 말처럼 하늘의 색이고, 신비스러운 궁창의 색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붉은 빛을 띤 검은 빛으로 검붉은 빛이라 할 수 있으나, 빛깔이 짙어서 무슨 색인지 구별이 안 가는 그런 색이다. 그래서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성질을 나타내는 색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것을 ‘가물한 색깔’이라고 표현해서 안 될 것은 없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표현이 아니라 내용이다.

 

‘동위지현(同謂之玄)’을 직역하면 ‘검은 것으로서 같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검기는 마찬가지다’가 된다. 뭐가? 바로 이름을 붙이기 전의 그 무엇(도)이나 (도라고)이름 붙인 그 무엇은 사람이 뭐라고 나발을 불든지 검기는 마찬가지니 똑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앞의 현(玄)은 묘(妙)의 성질이고 뒤의 우현(又玄)은 요(徼))의 성질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 묘를 보거나, 굳이 이름을 붙여서 요를 보거나 간에 이 두 가지가 검기는 마찬가지고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이 검어서 양자는 결국 같다’는 설명이다. 여기서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자기가 지금 ‘도(道)’라고 이름을 붙여서 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것의 이름을 편의상 ‘도’라고 붙이긴 했지만 그 이름에 신경쓰지 말자는 소리다. 그 이름이 도건 다른 무엇이건, 굳이 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보건 이름 없이 보건 그것이 검기는 마찬가지고, 이라 봐도 검고 저리 봐도 검은 놈이니 검은 것만 보면 되지 이름이 무슨 상관이냐?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다음에 노자가 하고 싶은 말, 즉 결론이 나온다.

 

衆妙之門

중묘지문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름을 붙이든 안 붙이든, 묘를 보건 요를 보건 자기가 지금 도라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모든 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이런 말이다.

제1장의 중심어는 ‘명(名)’이고, 결론은 ‘도이중묘지문(道以衆妙之門)’이다. ‘도는 모든 오묘함이 나오는 문이니라. 그러니까 그쯤만 알고 다음 설을 들어보란 말이야’ 하고 《도덕경》의 서두를 꺼내고 있음이다. 혹시나 사람들이 ‘도(道)’라는 이름에 사로잡힐까봐 노파심으로 서두에 못을 박아두는 것이다.

  

도(는 그 이름을)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그 이름이) 꼭(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이름으로(어떤 것의)이름을 삼을 수는 있지만

꼭(항상) 그 이름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천지의 시작이니 따질 수 없고

(우리가)이름을 붙이면 만물의 모태로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니

이름을 붙이기 전(도의 이전)에는 (천지지시의)묘함을 보아야 하지만

(※묘함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을 붙인 후(도의 이후)에야 그것의 요(실상계의 모습)를 파악할 수 있느니라.

이 두 가지는 똑같은 것인데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 이름뿐이니

(도 이전의 세계와 도 이후의 세계가)검기는 마찬가지여서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은 것이니

(도와 도 이전의 무엇은 같은 것이니라)

도는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니(지금부터 그것을 말하려 하느니)라. 

 

도덕경 제2장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제2장의 첫 줄은 서두의 첫 구절과 마찬가지로 《도덕경》전체를 파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문장이다. 이 문장 속에 《도덕경》의 열쇠를 푸는 키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뭔지 못 보는 사람이 노자를 떠들어서는 안 되는 거다.

그 열쇠는 바로 ‘위(爲)’라는 한 글자이다. 노자는 《도덕경》전체를 통틀어 이 ‘위’라는 글자를 대부분 한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물론 뒤에 가면 예외적인 사용도 있긴 하다). 

 

노자의 언어는 경이롭다. 노자는 美의 상대어로서 ‘醜(추)’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美의 상대어는 惡(오)인 것이다. 중국 고대어에서는 惡를 모두 요새 우리가 생각하는 ‘악’으로 읽어서는 아니된다. 惡는 악이 아니라 오인 것이다. 오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싫음’이요, ‘추함’이다. 다시 말해서 ‘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 글을 우리말로 옮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원저자의 의도하는 바에서 벗어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한 것이다. 그을 다듬고 꾸미는 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한 것이다. 글을 다듬고 꾸미는 것은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원문에 충실한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원저자의 의도와 원문의 뜻을 벗어나서 역자의 생각을 펼쳐놓는 것은 번역이나 해설에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노자의 생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오라고 멋대로 바꾸는 것은 허락될 일이 아니다. 그것을 바꾸기 전에 노자가 왜 惡이란 글자를 사용했는지 생각하는 게 바른 순서다. 위의 문장에서 惡은 美의 반대어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노자는 제1장에서 ‘도(道)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2장으로 넘어오면서 곧바로 이 ‘위(爲)’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노자가 《도덕경》을 써나간 순서는 대단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다. 제2장의 첫 번째 줄은 바로 ‘위(爲)’에 대한 설명이지, 아름다운 게 아름답고 추하고 이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제1장에서 도(道)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설명했잖아. 그럼 그 다음에 무슨 소리가 나와야 되겠어? 자기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그게 본론이잖아. 그런데 갑자기 아름답고 추하고 이딴 소리가 왜 나오냐 말이다. 글을 그렇게 쓰면 유치원생이지 사상가겠어?

제2장의 첫 줄은 바로 노자사상의 핵심인 ‘위(爲)’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느니 추하게 보느니 해대고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으니 노자가 억장이 막혀 돌아가실라 한다. 노자 딴에는 앞으로 자기가 계속 써야 될 ‘위(爲)’라는 글자에 대한 의미를 헷갈리지 말라고 고심고심해서 알아듣기 좋도록 예문을 적어줬더니 얼래! 알아봐야 될 ‘위(爲)’자는 쳐다도 안 보고 ‘미(美)’ 자나 ‘악(惡)’자를 갖고 악다구를 해대니 이게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암만 노자가 쉽게 써줘도 돌대가리들한테는 소용이 없다.

 

《도덕경》의 원문으로 함 가보자. 우선 ‘천하개지미지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부터 보자. ‘개(皆)’는 ‘모두 개’니까 ‘천하개지(天下皆知)’는 ‘온 세상이 다 안다’는 뜻이다. 뭐를? ‘미지(美之)’니까 ‘아름답다는 것을’이다. 그러니까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다.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문제의 두 글자가 있다. 바로 ‘위미(爲美)’다.

‘위(爲)’자는 ‘만들 위’,‘꾸밀 위’다. 그러니까 ‘위미(爲美)’는 ‘꾸며진 아름다움’이다. 이제 감이 잡히지? 그러니까 저 문장의 올바른 의미는 ‘온 세상 사람들이 아릅답다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꾸며진 아름다움이다’라고 옮길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사악이(斯惡已)’라고 했다. 즉 ‘그것은 나쁜 일이다’이다.

이 한 줄만 가지고는 혹시 부족해서 헷갈릴까봐 노자가 또 한 줄을 써 놨다.

‘천하개지 선지위선 사불선이(天下皆知 善之爲善 斯不善已)’라. ‘천하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이 실은 꾸며진 선(위선)이니 이것은 불선이다’

 

《도덕경》전체를 보고 나면 자연히 알겠지만, 노자는 아름다움(美)과 착함(善)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추(醜)함과 악(惡)함을 멀리하지도 않는다. 노자는 미추(美醜)와 선악(善惡)의 구별 자체를 싫어한 사람이다. 뒷장에 가면 ‘너와 나의 거리가 얼마이며, 선과 악의 거리가 얼마이냐?’ 라는 말이 나오는데 노자는 미추와 선악을 함께 인정하고 수용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노자가 가장 경계했던 것은 바로 ‘위(爲)’다. 악(惡)을 멀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위선(爲善)을 멀리했고 ‘추(醜)’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위미(爲美)’를 미워했다.

 

자연(自然)이란 ‘저절로 그러함이고’, 무위(無爲)는 ‘있는 그대로’이다. 그래서 ‘무위자연’이란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함’을 말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대로, 못난 것은 못난 대로, 착한 것은 착한 대로, 악한 것은 악한 대로, 세상 모든 것이 지 생겨먹은 그대로 ‘저절로 그러한 상태’가 바로 노자가 말하는 도의 상태이다. 선악미추가 모두 있는 그대로 저절로 그러해야지 위선,위악,위미,위추가 있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이야기다. 만약에 세상 모든 일에 ‘위(爲)’가 끼어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을 설명한 내용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도덕경》에서 노자는 이 ‘위(爲)’를 ‘꾸며놓은 것, 가식해 놓은 것, 위장해 놓은 것, 사실과 다르게 만들어 놓은것’이라는 의미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글자가 이런 뜻으로 쓰인 문장은 대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구절이라서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도덕경》을 번역하면서 《도덕경》전체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어를 빼먹은 번역을 어찌 번역이라 말할 수 있나?

 ‘무위(無爲)’란 꾸미지 않은 상태,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인데 대부분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란 뜻으로 풀고 있다. 즉 ‘무위(無爲)’를 ‘무행(無行)’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잘못알고 있는 개념중에 무소유 가 있다

무소유는 소유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산속에 혼자살던 사람이 장을 보러 산을 내려온다

한길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저멀리 버스가 떠나버린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버린 버스를 내가 놓친 버스로 여기고 아쉬워한다

순리대로라면 내가 타야할 버스는 내가 놓친 버스가 아니라 다음에 올 버스다

놓친버스-과거에 대한 집착-을 하지않는것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바로 무소유적 삶이다

기다리면 버스는 또 온다

여름이 가고 꽃무릇 피는 가을이 오듯 

 

노자는 미(美)와 위미(爲美), 선(善)과 위선(爲善)이 들어간 문장을 두 개나 써서 위(爲)에 대한 용례를 보여줬다. 그래서 아마도 후대 사람들이 ‘위(爲)’라는 글자의 뜻을 헷갈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야 

노자는 혹시나 남이 이해를 못 할까, 잘못 알아듣지는 않을까 세밀하고 섬세하게 살펴서 그런 오해가 없도록 여러 가지 장치를 글 속에 마련해놓는 사람이다. 그래도 못 알아먹는 거야 어쩌겠나? 그거야 읽는 사람 잘못이지. 안 그래? 쓰는 사람이 그 이상 어떻게 해줄 수 있나?

《도덕경》은 앞줄을 못 알아들으면 다음 줄의 번역이 안 된다. 그 좋은 예가 여기 제2장이다. 다음 문장들을 보자.

 

故有無相生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유무상생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이 문장이야말로 이 대목에서 꼭 필요한 내용이며, 노자가 왜 위미(爲美)와 위선(爲善)을 악(惡)과 불선(不善)으로 기피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대목인 거야. 노자가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을 정리해줄게.

 

‘유가 있어야 무가 성립이 되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 수 있고, 높은 것이 있어야 낮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에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놓고 사람을 속이면 진짜 없음이 나타날 수가 없고, 실제로는 짧은 것을 긴 것처럼 꾸며놓고 속이면 진짜로 긴 것이 긴 줄을 모르게 된다. 이것을 미(美)와 선(善)에 소급해서 말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으로 믿게 만들면 진짜 아름다운 것이 드러날 수가 없고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한 것처럼 꾸며서 속이면 진짜 선한 것이 선한 줄을 모르게 된다. 그러하므로 아름다움을 지어내거나 선을 가장하는 짓은 나쁜 짓이니라.

→惡, 不善

 

다음에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무위란 노자철학의 핵심적 사상을 이루는 개념으로 통상 유위와 대비되는 것이다. 무위는 ‘함이 없음’이다. 그렇다고 무위가 곧 아무 것도 하지 않음(actionless)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위는 곳 무위다.

무위의 ‘위’는 유위적이고 조작적인, 도의 흐름에 배치되는 사특한 행위인 것이다. 그것은 위선적인 행위이며 거짓적인 행위이며, 독선적인 행위이며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적인 행위이다. 당연히 모든 사회의 리더는 그러한 조작적인 인간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리더는 잔일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작은 일에 집착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리더는 자기는 함이 없이 남으로 하여금 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인 것이다.

 

 

노자의 위(爲)를 ‘무엇을 하는 것’ 즉 (行)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그 순간부터 노자하고는 빠빠이다. 노자의 생각은 고사하고 뒤통수나 발굼치도 볼 수 없다. 노자의 위(爲)는 ‘꾸밈이 있는 것’이고 무위(無爲)는 ‘있는 그대로’를 의미하는 말이다. 뭘 하고 안 하고의 뜻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무위(無爲)요 추한 것이 있는 그대로 추한 것도 무위(無爲)다. 선한 것도 무위(無爲)요, 악한 그대로 드러난 악도 무위(無爲)다. 노자는 미추와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다만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위장되거나 악한 것이 선한 것을 가장하는 것을 유위(有爲)라 하여 멀리할 뿐이다. 선악미추장단고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은 모두 무위(無爲)인 것이다. 위(爲)란 꾸밈이요, 무위(無爲)는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남이다. 

 

 노자는 말로 꾸며서 사람들을 속이지 말고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 가르치라고 권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가 아니라 ‘하라(行)’고 말한다. 하되, 말로 꾸미거나 속이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하라고 말하고 있다.

 

노자사상의 핵심은 바로 이 행(行)에 있다. ‘무위(無爲)의 행(行)’ 이것이 바로 노자사상이다. 꾸미고 지어내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함이 바로 무위의 행이다. 말로 속이고 말로 사람을 부려먹지 않고 스스로 실천하는 행이 바로 무위의 행인 것이다. ‘무위(無爲)’를 ‘함이 없음’이라고 받아들이면 대책이 없다. 

 

우선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다. 여기서 사(辭)자는 ‘말할 사’다. 그러니까 ‘불사(不辭)’는 ‘말하지 않는다’ 또는 ‘말이 없다’란 뜻이다. 

‘작(作)’은 ‘짓다’ ‘만든다’는 뜻이잖아. 행(行)과 같은 의미로 봐도 무방하지. ‘언(焉)’은 ‘어찌 언’인데 문미에 쓰일 경우 강조하는 기능을 갖는 거고 그러면 다 끝났잖아. ‘성인은 만가지 사물을 만들지라도 말로 떠들지 않는다. 즉 자랑삼지 않는다. 공치사를 하지 않는다’ 이런 뜻이지. 

 

 ‘생이불유(生而不有)’ 즉, ‘살면서도 없는 듯하다’는 뜻이다. 우리 주위에서도 드물지만 이런 유의 사람을 가금 만날 수 있다. 함께 있으면서도 말로 떠들거나 다투는 법이 없이 항상 조용하게 자기 일만 성실히 하는 사람이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없는 듯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인의 사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없는 듯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인의 사는 모습’이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다. 

노자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것이 바로 ‘살면서 튀지 마라’는 당부다. 잘난 척 튀지 말고 파묻혀서 없는 듯 사는 게 만수무강의 첩경이라는 것이다.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앞서 말했다시피 ‘위(爲)’라는 글자는 《도덕경》전체의 중심어 역할을 하고 있는 글자다. ‘만들 위’,‘지을 위’다. 그런데 노자는 이 책 속에서 위(爲)라는 글자를 좋은 의미로 사용한 적이 별로 없다. 언제나 ‘(허위로)꾸며낸다’ ‘(거짓으로)지어낸다’ 또는 ‘가식한다’ 따위의 의미로서, 그렇지 말아야 할 불선(不善)과 악(惡)의 원인 내지는 근원으로 보고 있다. 해서 노자는 무위(無爲)를 지향해야 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지. 《도덕경》에서 가장 중요한 한 글자를 고르라고 하면 바로 이 위(爲)자가 정답이기 때문에, 《도덕경》을 볼 때 이 글자가 사용되어 있으면 한번 더 유의해서 살펴봐야 된다 말이다.

위 문장에 이 위(爲)가 첫머리에 나오잖아. 그럼 이게 뭔 말이겠나? ‘위이불시(爲而不恃)’는 바로 ‘꾸며대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주어는 ‘성인’이다. ‘성인은 자기 일을 할 때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살아가기를 마치 없는 듯이 하며, 꾸며서 지어내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잖아. 즉 성인은 자기를 내세워 자랑하지 아니하고, 드러내지 아니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지 결코 꾸미거나 지어내는 법이 없다는 말이다.

위(爲)라는 글자를 ‘잘되어가도록 한다’는 뜻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노자의 사상은 무위(無爲) 지향이 아니라 유위(有爲) 지향의 사상이 돼버려. 무위(無爲)란 ‘잘되어가도록 함을 없앤다’는 뜻이 될 터이니 이게 무슨 철학이요 사상이 되겠느냐 말이다. 

 

사상이고 나발이고 인간사 모든 것이 잘되자고 하는 일인데 잘되도록 해주는 것을 없애자는 말이 어찌 사상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느냐 말이다. 노자는 사상가지 결코 노망든 영감탱이가 아니다.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도 마찬가지.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속에 살지 않는다’는 해석이 명색이 학자란 인간이 내놓을 물건인가? 왕삐야 당시 나이가 중학생 정도였으니 봐줄 수 있다. 그 정도 나이에 그만한 답안이면 칭찬을 받을지언정 구지람 들을 일은 없다. 

저 문장에서 거(居)자를 ‘살 거’로 읽으면 바로 다음 문장의 해석이 불가능해진다. ‘살 거’가 아니라 ‘쌓을 거’로 읽어야 한다. 문맥상의 뜻으로 보면 ‘차지한다’라는 의미가 더 어울릴 수 있다. 즉 ‘공을 이루어도 그것을 쌓아두지 않는다’ 또는 ‘차지하지 않는다’이다. 

 

夫唯不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바른번역

 

세상 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꾸며진 아름다움이면

이것은 악한 짓이며,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선함을 가장한 것이면

이것은 불선이니라.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게 되고

긴 것을 두고 짧은 것을 재는 법이며

높은 것과 견주어 낮은 정도를 보고

소리와 비교해서 음악을 알아듣고

앞이 정해져야 뒤가 다를 수 있음이니라.

(만약에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게 지어내거나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꾸미거나

어려운데 쉬운 것처럼 가장하거나

잛은데도 긴 것처럼 속이거나

낮은 것을 높은 것처럼 과장하거나

소리를 음악이라고 우기고 앞과 뒤가 헷갈리면,

세상 사람들이 진실로 아름답고 추한 것과 선한 것과 악한 것과 있고 없음과 길고 짧음과

어렵고 쉬운 것과 높고 낮음과

음악과 소리의 구별을 하지 못하며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뒤인지를 알지 못하나니)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성인은 꾸미지 않고 일을 처리하며

말없이 가르침이 되게 실천하며,

천하 만물을 자기 손으로 만든다 해도

떠들어 자랑삼지 않는도다.

살면서도 (드러내지 않기를)없는 듯이 하고

꾸며서 지어내는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차지하지 않음이니.

대저, 오로지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 공이 없어지지 않느니라.

 

도덕경3장

 

不尙賢 使民不爭

불상현 사민부쟁

 

 

‘상(尙)’은 ‘높일 상’ ‘숭상할 상’ ‘우러를 상’이다. 그러니까 ‘상현(尙賢)’이란 말은 ‘현명함을 높이 산다’는 의미다. 이때는 현명함이나 유식함, 똑똑함 등을 총칭하는 것으로 봐도 되겠고, 현명한 사람, 유식한 사람의 뜻으로 읽어도 큰 문제는 없다. 그래서 번역을 하면 ‘현명함(또는 현명한 사람, 현자)’을 높이 받들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투지 않게 된다. 똑똑하고 유식하고 현명한 것을 높이 사는 사회는 경쟁사회다. 똑똑하고 아는 것을 서로 재고 경쟁해서 보다 잘난 놈이 위로 가는 세상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연히 경쟁과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세상은 이러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겠지. 지금의 우리 기준으로 보면 아프리카나 인도네시아의 오지에나 가야 똑똑한 게 별 볼일 없는 동네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불귀난득지화 사민불위도

 

이 쉬운 문장을 하나같이 ‘불귀 난득지화’로 엉터리로 읽고들 자빠진다. 이 문장의 올바른 읽기는 ‘불 귀난득 지화’다. ‘얻기 힘든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마라’고 하면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귀하니까 얻기 힘든 재화지.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 같으면 그게 ‘난득지화’일 수가 있느냐 말이다. 얻기 힘든 재화를 귀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냐 하면 귀하지 않으면 그것은 이미 ‘난득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얻기 힘든 재화를 귀하게 하지 마라’는 말은 그 자체로서 모순이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여기서의 ‘화(貨)’라는 것은 보물(寶物)을 말하는 글자가 아니다.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재화를 뜻하는 글자다. 만약에 ‘얻기 힘든 재화’의 의미가 귀한 보물과 같은 뜻이었다면 ‘난득지보(難得之寶)’라고 썼을 것이다. 한번 누군가가 ‘난득지화’라고 읽어버리니까 2천5백 년 동안 ‘난득지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정관념이란 이렇게 무섭다. 한번 굳어진 고정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불귀 난득지화’가 아니라 ‘불 귀난득 지화’이다. ‘귀난득(貴難得)’은 ‘귀하고 얻기 어렵다’는 말이다. ‘불(不)’은 ‘귀(貴)’와 ‘난득(難得)’의 양자에 똑같이 붙는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풀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불귀(不貴),불난득(不難得)’ 즉 ‘귀하거나 얻기 어렵게 하지 않는다’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필수적인 요소들이 귀하고 얻기 어려우면 사람들은 도적으로 변하게 된다는 뜻인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사흘 굶고 담 안 넘는 사람 없다’는 속담들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러므로 어찌해야 한다?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리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공자나 맹자보다 노자가 위대한 점은 바로 이런 데 있다고 나는 본다. 아무리 인의예지신을 떠들고 예의와 범절을 가르치고 인이니 예니 나발을 불어도 근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 배부른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노자는 갈파하고 있다. 인이니 예니 도덕이니 하는 것보다도 우선 창자를 채우고 따뜻하게 자는 것이 선결문제라는 것을 노자는 냉정하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도외시한 도덕적 규범들을 노자는 냉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고로 성인의 다스림이란…’하고 다음 구절의 말들을 하고 있다.

 

不見可欲 使民心不亂

불견가욕 사민심불란

 

‘욕심 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는 것이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지 않는 길이다.’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시이성인지치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

 

‘시이성인지치(是以聖人之治)’는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이란…’의 뜻이다. 여기서 ‘그러하므로’가 무엇인지는 앞에서 설명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허기심(虛其心)’이니까 이거는 ‘마음을 비우고’라는 소리네. 그 담에 ‘실기복(實其腹)’은 ‘배를 채우라’는 소린가 보네. 그러면 ‘약기지(弱其志)’는 뭘까? ‘뜻을 약하게 해라’는 말씀이겠고, ‘강기골(强其骨)’은 ‘뼈를 튼튼하게 해라’ 이 소리네. 에이, 뭐 별로 어려운 소리도 아니네. 괜히 쫄았잖아.

 

쭉 붙여서 함 읽어볼까?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이란 백성들의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워주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소리네.

조금 해설을 붙이면, ‘성인이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는 마음과 뜻 즉 심지(心志)를 비우고 약하게 만들고(虛弱), 반면에 그 배와 뼈는 채우고 강하게(實强)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로써 노자정치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구절이다. 다시 말하면 백성이 쓸데없는 야심이나 큰 뜻을 세우는 주제넘는 생각을 못하게 하면서 그 대신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해주라는 소리다. 복실골강(腹實骨强)이란 쉽게 말하면 ‘배부르고 등 따시다’는 말이다. 노자는 정치사상적으로는 우민정책(遇民政策)의 주창자로 보이기도 한다. 단 그의 우민은 애민을 위한 우민인 것이 마키아벨리즘의 우민정책과의 차이점이다. 즉 다스리는 자를 위한 우민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백성을 위한 우민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부르고 등따신 백성이 제일 행복한 백성이라고 보는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성인의 정치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라의 다스림에 있어서 백성의 기본적 생존권 보장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지상의 과제라는 것’이 노자가 말하는 이 장에서의 핵심이다. ‘일단 사람들의 배가 불러야 된다’가 노자정치사상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정치사상의 핵심이라 하기에는 너무 번하고 쉬운 소리인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이것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있었던 모든 정치론의 온갖 구라들과 잡소리를 전부 다 합친 것보다 훨씬 가치로운 한마디다.

‘백성의 배를 채워주고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라!’ 이 소리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소리인 거 같나? 노자 아니면 못 하는 소리다. 이게 위해한 사상이다. ‘원수를 사랑하라’ 얼마나 쉬운 소리야? 그래도 예수 아니면 못하는 소리다. ‘백성들 배부터 채워줘’ 오직 노자라 할 수 있는 소리다.

 

공자 말씀 전부를 놓고 노자의 이 한마디를 놓고 저울에 달면 노자쪽으로 추가 기우는 거야. 정치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어. 정치란 어떤 의미에서는 이 한마디가 시작이고 긑이고 알파요 오메가고 이게 전부야. 이거 외에 정치가 뭐 있겠어? 이거만 하면 정치는 다 된 거야. 나머지는 사실 잘 안 돼도 심각할 일이 없어. 듣고 보면 뻔하고 뻔한 소리고 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 같지만 이 한가지를 못 해내는 것이고 가장 쉽고 기본적인 것이 가장 어려운 거야. 그리고 그런 것을 잘라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상가인 거고, 사상이나 철학이 무지 어렵고 난해한 구라를 풀어내서 사람들 골에 쥐나게 만드는 게 결코 아니야. 노자의 위대함은 바로 이런 것에 있어.

이것을 얼핏 보고 설핏 보면 마치 백성을 힘센 소나 배부른 돼지로 만들자는 우민정책으로 보이지만 백성들 배 채워주는 정치가 제일 아냐? 맞지?

 

그러면 심허지약이 왜 나왔겠어? 백성이란 건 복허(腹虛)하고 골약(骨弱)하면 자연히 심실(心實)하고 지강(志强)하게 되는 거야. 복허골약하면서 심실지강한 것이 뭐겠어? 바로 투사들이고 혁명가들이야. 복실골강하면 심허지약해지니까 어떻게 해서는 백성들 배는 부르게 해라.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귀하게 만들거나 얻기 힘들게 해서는 정치고 나발이고 쥐뿔도 되는 게 없을 거라고 노자는 말하고 있어. 

 

인간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배로 산다! 이것은 우리의 통념을 깨는 노자의 지혜다. 그리고 이것은 뇌 중심의 서양 인체해부학에 대하여 복부중심의 한의학적 인간학의 지혜로운 가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청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불러지는 배를 갖고 있다면 세계의 식량난이 사라질 것이고 뜻을 약하게 하면 강해지는 것이 사람의 뼈라면 의술이 필요 없겠다. ‘A도 하고, B도 한다’는 문장을 ‘A를 해서 B가 되게 한다’로 바꿔버리면 이 두 문장은 전혀 다른 것이 돼버린다. 

 

常使民無知無慾 使夫智者不敢爲也

상사민무지무욕 사부지자불감위야

 

‘사부지자 불감위야(使夫智者 不敢爲也)’ 이 한마디야말로 노자의 정치사상이 단순한 우민정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노자 할아방이 이 한마디를 넣어놓은 이유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공부 헛했다는 증거지.  

앞 구절에서 노자가 뭐라고 했나? ‘언제나 백성들을 잘 모르게 하고 욕심이 없게 만들어라’ 했잖아. 이 말은 이것만 가지고 보면 대단히 반인류적이고 비인도적인 반동사상가로 오해받을 만하다. 그래서 노자가 2천 년 동안 유자(儒者)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거잖아.

 

 ‘상사민무지무욕(常使民無知無慾)’이라는 말은 쉽게 풀면 백성을 아무 것도 모르고 욕심도 낼 줄 모르는 촌무지렁이로 만들어야 된다는 소리다. 그저 ‘송충이는 솔잎 먹고 살아야 한다’ 하면서 자기 주제파악을 확실히 하고 땅이나 파면 된다는 그런 말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백성을 그렇게 만든다 쳤을 때 아는 것도 없고 욕심 낼 줄도 모르는 어린 백성은 그야말로 통치자의 노예가 될 게 뻔하다. 무지하고 무욕한 백성이야 사실 지배 세력에게는 이상적인 백성일 테고 심하게 말하면 그들이 소유한 가축 무리와 마찬가지 일테니까. 많이 알고, 욕심 만만한 소수의 무리(지배계층)와 아무 것도 모르고 욕심도 없는 어린 백성으로 이루어진 나라를 과연 노자는 이상국가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배계급과 일반 백성의 구별이 없이 몽당 다 무지하고 무욕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만약에 전자라면 노자는 우민화를 부르짖은 반동이요, 후자라면 노자는 사상가가 아니라 몽상가다.

그러나 문맥상 후자를 말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使)란 글자는 ‘만든다’ ‘하게시킨다’라는 뜻의 글자이므로 ‘백성을 무지하고 무욕하게 만들어라’하고 노자가 사주하고 있는 어떤 상대가 있다. 바로 지배계층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배계층이 바로 ‘많이 아는 무리’다. 다음 구절에 나오는 ‘지자(智者)’가 바로 그들이다. 즉 식자(識者), 지식층(知識層)을 말한다. 이 지자(智者)들의 우두머리가 바로 성인(聖人)이다.

 

따라서 뒤의 구절은 지식층에 대한 당부이고 그들이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만들어 통치하는 반대급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백성이 무지무욕하여야 한다면 반면에 너희 지식층은 어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것이 뭐냐? 바로 ‘지자불감위야(智者不敢爲也)’다. 백성들과는 다르게 많이 아는 지자(智者)들은 절대로 무지무욕한 백성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즉 백성을 무지무욕하게 만드는 것이 허용되기 위해서는 무지무욕한 백성을 속이는 지자(智者)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있다.

 

‘불감위야(不敢爲也)’는 ‘감히 속이거나 꾸며대지 않는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노자는

《도덕경》에서 위(爲)라는 글자를 ‘속이는 일’‘꾸며대는 일’‘가장하는 일’‘가식하여 하는 일’이란 의미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때문에 여기서의 위(爲)도 ‘어떤 일이든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속이고 꾸며대는 짓을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만약에 한 나라의 지도층이 백성을 속이고 꾸며대지 않는다면(不爲), 일반 백성은 설사 무지하고 무욕하다 해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노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이게 노자정치사상의 핵심이다.

노자는 앞에서 그런 지도층이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자(智者)들이야 말로 사명감을 가지고 많은 일을 맡아서 해야 할 사람이다. 이 사람들이 제대로 까불어야 나라꼴이 똑바로 될 터인데 못 까불게 하자? 그게 노자의 사상인가? 그런 게 노자의 사상이라면 미련 없이 갖다버려야 마땅하다. 

 

여기까지 이해를 하더라도 노자의 정치사상이 비판받을 소지는 남아 있다. 즉 현실 정치를 도외시한 이상가의 꿈같은 소리라는 공박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 지도층이 과연 국민에게 한 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고 어떤 것도 숨기거나 꾸며대지 않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냐 하는 것이다. 노자의 놀라운 점은 바로 그런 비판에 대한 대답까지도 제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노자의 통찰력은 바로 다음 한 줄에 집약되어 있다.

처음 출발을 잘못하면 끝까지 빗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도덕경》이란 책이다. 아니면 앞 줄 얘기가 틀리고 뒷줄 얘기가 따로 노는 비논리적이고 몽환적인 이상한 책이 돼버린다. 어쟀거나 이 다음에 노자가 해놓은 소리를 보면 진짜 기가 막힌다. 그런 걸 읽어낼 수 있어야 노자를 만날 수가 있다.

 

爲無爲 則無不治

위무위 즉무불치

노자에게 감탄하고 반해야 하는 대목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도덕경》은 여러 번 탄복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는데, 물론 그것은 《도덕경》의 뜻을 제대로 알고 읽을 때의 이야기다. 

 

 ‘위무위’는 뭐겠나? 바로 ‘꾸미지 말고 하라’는 말이거나 ‘꾸미지 않은 것처럼 꾸민다’는 말이다. 즉 정치를 함에 있어서 완벽한 무위(無爲)가 불가능할지라도 최소한 무위(無爲)한 것처럼 꾸미기라도 하라는 말이다. 즉 백성을 어쩔 수 없이 속여야 할 경우에도 백성이 속는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속이라는 정치술의 요체를 말하고 있는 거다. 그게 바로 ‘위무위(爲無爲)’다. 현실 정치에서는 무위(無爲)의 치(治)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무위(無爲)를 위(爲)하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노자의 위대함이 있다.

 

무위(無爲)가 어렵다 해서 유위(有爲)를 택하지 말고 무위(無爲)를 위(爲)함으로써 현실에 대처하라는 가르침이다. 백성이 무지무욕(無知無慾)하고 지자(智者)들은 무위(無爲)한 척이라도 해야 되겠다는 노자의 희망사항이다.

백성이 무지하고 욕심이 없어서 단순 소박하다 해도 그것을 기화로 지도층이 백성을 속이고 꾸며대는 짓이나 하면 백성의 단순 소박함이 유지될 수가 없고, 반드시 소요와 혼란이 일어남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하지만 지도층이 최소한 백성이 그런 사실을 모르도록 숨길 수 있는 염치와 지혜로움만 있어도 나라는 잘 다스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정치에서 유위(有爲)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백성에게 알려졌을 때다. 백성이 모르게 하는 정도의 위(爲)는 눈감아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위무위(爲無爲)하면 즉무불치(則無不治)’라 한 것이다.

 

잊을 만하면 ‘검은 돈’ 문제로 온 세상이 시끄러운 것도 다 정치하는 놈들이 ‘위무위’를 할 줄 몰라서 그렇다. 현실정치라 하는 게 돈 없이 될 수 있나? 정치 자금이라는 게 필요하지. 그런 걸 해먹더라도 정도껏하고 받을 돈을 받고, 받더라도 국민이 모르게 좀 요령껏 재주껏 해야지 임마들이 하는 짓을 보면 그냥 내놓고 도둑질하는 거야. 그리고 서로 캥기는 넘들끼리 동네방네 나발을 불면서 물고 뜯고 싸우고 그러니 어찌 백성이 그 추잡한 짓거리를 모를 수가 있겠나? 암만 무지하고 무욕한 백성이라도 그런 꼬라지를 자꾸 보게 되면 무지무욕이 유지될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노자가 제발 백성 모르게 ‘위무위’하라고 당부하는 거다. 그래야 백성이 속는 줄 모르니 지도자들을 믿고 맘 편하게 산단 말이다.

 

물론 이게 백성의 눈과 입을 강제로 막고 속이라는 말은 아니다. 성인의 치는 불위함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게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위무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염치껏 요령껏 하라는 소리다. 알겠지?

 

노자가 말한 것은 ‘백성이 도적이 될 만큼 헐벗고 굶주리게 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이지 ‘재화의 유통’이나 ‘자본주의의 해악’을 말한 것이 아니다. ‘소유 없는 생산’이니 하면서

노자를 원시공산주의자로 모는 것도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다. ‘오직 생활에 필요한 정도의 의식주에 궁핍하지 않게 하되 그 이상의 욕심을 갖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노자의 경제 노선이다.

 

바른 번역

 

현명함을 높이 사지 않으면

백성이 서로 다투지 않으며

재화를 귀하고 얻기 어렵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도적이 되지 않는다.

욕심이 날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으면

백성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그러하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의 마음을 비우게 하는 대신 그 배를 채워주고

백성의 뜻을 약하게 하는 대신 몸을 튼튼히 해주어

모름지기 아는 것과

욕심이 없게 한다.

반면에 다스리는 자들은

꾸밈이 없어야 한다.

꾸밈이 있더라도 백성이 모르게 한다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출처] 도덕경/또다른 해석1/열반이란 말에는 아무 뜻이 없다. 그저 이름이 열반일 뿐이다|작성자 명신산업안전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