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上士聞道(상사문도) : 뚸어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勤而行之(근이행지) : 힘써 행하려 하고
中士聞道(중사문도) : 어중간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若存若亡(약존약망) : 이런가 저런가 망설이고
下士聞道(하사문도) : 못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大笑之(대소지) : 크게 웃습니다
不笑不足以爲道(불소불족이위도) :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가 없다
故建言有之(고건언유지) : 그러므로 예부터 내려오는 말에 이르기를
明道若昧(명도약매) : <밝은 도는 어두운 것같아 보이고
進道若退(진도약퇴) : 앞으로 나아가는 도는 뒤로 물러가는 것같아 보이고
夷道若?(이도약뢰) :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것같이 보이고
上德若谷(상덕약곡) : 제일 가는 덕은 골짜기같이 보이고
大白若辱(대백약욕) : 희디흰 것은 더러운 것같이 보이고
廣德若不足(광덕약불족) : 넓은 덕은 모자라는 것같이 보이고
建德若偸(건덕약투) : 굳은 덕은 보잘 것 없는 것같이 보이고
質眞若?(질진약투) : 참된 실재는 변하는 것같이 보이고
大方無隅(대방무우) : 큰 모퉁이에는 모퉁이가 없고
大器晩成(대기만성) : 큰 그릇은 더디 이루어지고
大音希聲(대음희성) : 큰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고
大象無形(대상무형) : 큰 모양에는 형체가 없다<고 했다
道隱無名(도은무명) : 도는 숨어 있어서 이름도 없는 것
夫唯道(부유도) : 그러나 도만이
善貸且成(선대차성) : 온갖 것을 훌륭히 가꾸고 완성시켜 준다
41장 보이는 모습 너머의 삶 뛰어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성실하게 실천하고 어중간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일부만 간직하고 일부는 잊어버리고 못난 사람은 도를 들으면 조롱하며 비웃는다.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도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진다. 밝음으로 향하는 길은 어두운 듯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물러서는 듯하며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듯하다. 진정한 힘은 약한 듯하고 진정한 순수함은 탁한 듯하며 진정한 맑음은 분명하지 않은 듯하다. 위대한 예술은 정교하지 않은 듯하고 위대한 사랑은 무심한 듯하며 위대한 지혜는 철없는 듯하다. 도는 숨겨져 있고 이름도 없지만 도만이 온갖 것을 기르고 완성한다. |
생각을 바꿈으로써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현실”이라고 불러온 것이 겉으로 드러난 껍데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에고 중심의 습관이 하나 됨을 대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로막을 것이다. 익숙해 있던 것이 여전히 내면에서 생생히 울려 퍼지고, 도 중심의 세상은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너머의 진실을 확인하고 도를 직접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갖고 있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도를 따르기로 결심하면 자신의 내면과 주변에서 겪는 경험만이 보이던 이전과는 세상이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은 무시하고 진실 안에 머무르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놀려댈 테지만 그 조롱과 비웃음이 없다면 도가 아니라는 모순을 기억하라. 암울한 시간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새로운 비전이 내면세계를 밝게 비출 것이다. 때때로 뒷걸음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는 “도는 숨겨져 있고 이름도 없다.”는 마지막 구절을 떠올려라. 곧 열릴 문 앞에서 그 문을 두드리고 있거나, 삼키기만 하면 되는 알약처럼 쉽사리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삶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는 잠시 멈춰 서라. 그리고 평화로운 상태에서 조금 떨어져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라. 노자가 평범한 길은 울퉁불퉁한 듯하고, 진정한 힘은 약한듯하다고 말한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강하다고 느끼기 위해 안달복달하거나 다른 사람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
도를 따르는 사람은 세상을 전혀 다르게 바라본다. 내면의 평화가 곧 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애쓰지 않을수록 더 쉽게 이룬다. 마음을 느긋하게 갖고 도에 따라 저절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둘 때 일이 이루어진다. 이는 목표를 갖고 다른 사람들이 세워놓은 기준에 맞춰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에게 맡겨라. 그렇게 함으로서 순수함과 맑음을 봐라. 사람이나 사물의 겉모습은 변할 수 있지만, 본질적인 선함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숨겨져 있고 이름도 없으니 찾아서 꼬리표를 붙이는 데 집착하지 마라.
그러다 보면, 여전히 분명치 않더라도 조화를 이루고자 노력하는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도 이를 적용하라. 무심하게 보이는 것을 보면서 그 안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라. 도는 성실함을 증명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언제나 그 자리, 모든 곳에 존재한다. 에고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초월한다면 빛나는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에고는 우리가 사는 이 별을 차갑고 냉정한 곳이라고 세뇌시켰다. 그러나 도는 당신과 연결되어 있는 모두에게 순수한 사랑의 빛을 비춘다.
성실하라.
단약 당신이 “일부는 간직하고 일부는 잃어버리는” 어중간한 사람이라면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 헌신하라. 여기에 담긴 통찰 중에 몇 가지를 매일 실천하면 된다. 이를 실행하는 데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라. 분석하고 따지는 버릇은 옆으로 치워두라. 끈기를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 하루에 한 장씩 읽고 다짐하는 작은 일이 도를 따르는 삶의 여정 위에 서게 한다. 노자는 온 힘을 다 해 실천함으로써 그 길을 따라가라고 말한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 단신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월트 휘트먼의 시가 여기에 있다.
오, 난 당신의 고귀함과 영예로움을 노래할 수 있어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내 선잠에 빠졌던 당신,
당신의 눈꺼풀은 닫힌 것과 같았지요.······
당신이 누구이든, 어떤 위험 앞에 있던 당신만의 소리를 내요!
세상의 온갖 볼거리도 당신에 비하면 그저 평범하지요.
광대한 초원과 끝없는 강줄기처럼
당신은 크고 길어요.······
도의 진실은 언어로 증명할 수 없다.
무언가를 진실로 받아들이려면 물적 증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버려라. 도는 영원히 숨겨져 있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그러니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여라. 물질적인 형태 속에서는 찾지 못할 것이다. 과학자들이 직접 보지 않고도 모든 입자가 형태 없는 에너지나 정신의 파동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당신도 도를 믿기에 앞서 그것을 보고 만지려는 욕심을 버릴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어둠, 어려움, 결점, 무관심, 죽음 그 너머의 영역을 보게 될 것이다.
첫째 부분은 사람이 道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순위를 매기고 있는데, 이것은 제17장에서 군주에 대해 순위를 매긴 것을 떠오르게 한다. 최악의 군주는 백성들에게 조롱당한다. 하지만 정작 군주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도를 비웃기만 할 뿐이다.
최상의 군주는 물론 도를 실천한다. 도를 파악하고 실천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둘째 부분이 묘사하는 바와 연결된다. 즉 도가 하는 일과 효과는 역설적이다. 바로 앞의 제40장에서 그리고 제25장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도의 진행은 逆轉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군주는 뒤로 물러서야만 하는 것과 비슷하다.(제7장을 보라.) 물러서는 것이 이끌고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제41장의 마지막 부분은 또한 시작과 끝이 중첩되는 진행을 引誘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의 순환의 끝은 그 다음 순환의 시작이 된다. 적절한 끝맺음은 시작하기에 좋은 곳이다. 시간의 진행이 솔기가 없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예를 들어 한 계절이 적절한 때에 끝나면 바로 그 다음 계절이 바로 시작하는 것과 같다.
이 장은 또한 《노자》는 물론 도가 일반에 전형적인 수많은 이미지와 특성화를 포함한다. 도는 가물하다고(제1장을 보라.) 말해지며, 덕은 계곡(제6장을 보라.), 그리고 형체가 없고 이름이 없음은 물론 ‘침묵의 소리(제23장을 보라.)’와 연관되어 도의 範型的 특징이라고 말한다.
뛰어난 선비는 道를 들으면 열심히 행하고,
〈그에게〉 뜻이 있다는 의미이다.
보통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고, 못난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그런데 〈못난 선비가 듣고서〉 웃지 않으면 도라 하기에 부족하다.
그래서 세워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建은 ‘세우다’는 뜻이다.
밝은 도는 마치 어두운 듯하고,
빛나지만 눈부시지 않다는 뜻이다.
나아가는 도는 마치 물러서는 듯하며,
제 몸을 뒤로 하지만 몸이 앞서고, 제 몸을 도외시하지만 그 몸이 보전된다는 뜻이다.
너른 도는 마치 울퉁불퉁한 듯하고,
纇는 ‘울퉁불퉁하다’는 뜻이다.
크고 너른 도는 만물의 본성에 따르고 평평함에 집착하여 만물을 자르지 않으니 그 평평함이 드러나지 않기에 오히려 거꾸로 울퉁불퉁한 것 같다는 뜻이다.
높은 덕은 마치 계곡과 같고,
자신의 덕을 덕이라 여기지 않아 〈그 마음속에〉 품은 바가 없다는 뜻이다.
매우 흰 것은 마치 욕된 듯하고,
그 흼을 알아 그 검은 것을 지키니, 매우 희어진 연후에야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넓은 덕은 마치 부족한 듯하고,
넓은 덕은 가득 차지 않으니 텅 비어 있어 아무런 형체가 없어서 가득 채울 수 없다는 뜻이다.
우뚝 선 덕은 마치 〈만물 각각에〉 딱 들어맞는 듯하고,
偸는 ‘딱 들어맞다’는 뜻이다.
우뚝 선 덕은 만물의 자연스러움에 따라 〈어떤 가치와 기준도〉 세우거나 베풀지 않기 때문에 마치 딱 들어맞는 듯한 것이다.
질박한 참됨은 마치 더러운 듯하며,
질박한 참됨이란 자신의 참됨을 자랑하지 않기 때문에 더러운 듯하다고 했다.
크게 모난 것은 모서리가 없고,
모가 났지만 〈다른 것을〉 깎아내지 않기 때문에 모서리가 없다고 했다.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큰 그릇은 天下〈의 모든 것〉을 이루어줌에 있어 완전한 구별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늦게 이루어진다고 했다.
커다란 音은 소리가 희미하고,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음을 이름하여 ‘希(희미하다)’라 하니 알아들을 수 없는 음이다.
소리가 있으면 분별이 있고 분별이 있으면 宮音이 아니면 商音이라고 〈구분하게〉 된다. 〈따라서〉 분별하면 많은 수를 거느릴 수 없다.
그래서 소리가 있는 것은 커다란 음이 아니라고 했다.
커다란 형상은 형체가 없다.
형체가 있으면 분별이 있으니 분별이 있는 것은 따뜻하지 않으면 서늘하고 뜨겁지 않으면 차갑다.
그래서 형상에 해당되지만 형체를 갖춘 것은 커다란 형상이 아니라고 했다.
도는 은미하여 이름이 없으니 오로지 저 도만이 잘 꾸어주고 또 잘 이루어준다.
무릇 여기서 〈나열된〉 모든 큰 것들은 모두 도가 이루어주는 것이다.
형상에 있어서는 커다란 형상이 되지만 커다란 형상은 형체가 없다.
音에 있어서는 커다란 음이 되지만 커다란 음은 소리가 희미하다.
무릇 도란 만물이 그에 의해 완성되지만 만물은 그 형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은미하여 이름이 없는 것이다.
〈도가 만물에게 무언가를〉 꾸어주는 것은 그 부족한 것을 공급해줄 뿐만 아니라 〈도가〉 한번 〈만물에게〉 꾸어주면 그 덕을 영원히 다하기에 족하기 때문에 “잘 꾸어준다.”고 했다.
〈도가 만물을〉 이루어주는 것은 匠人이 하는 재단을 가하는 것이 아니지만, 어떤 사물이든 그 형체를 가지런하게 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잘 이루어준다.”고 했다.
42.
道生一(도생일) : 도가 <하나>를 낳고
一生二(일생이) : <하나>가 <둘>을 낳고
二生三(이생삼) : <둘>이 <셋>을 낳고
三生萬物(삼생만물) : <셋>이 만물을 낳는다
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 만물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가슴에 안았다
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 : <기>가 서로 합하여 조화를 이룬다
人之所惡(인지소악) :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唯孤寡不穀(유고과불곡) : <고아 같은 사람>, <짝잃은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 : 이것은 임금이나 공작이 자기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故物或損之而益(고물혹손지이익) : 그러므로 잃음으로 얻기도 하고
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 : 얻음으로 잃는 일도 있다
人之所敎(인지소교) :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
我亦敎之(아역교지) : 나도 가르친다
强梁者不得其死(강량자불득기사) : 강포한 자 제명에 죽지 못한다고 한다
吾將以爲敎父(오장이위교부) : 나도 이것을 나의 가르침의 으뜸으로 살으려 한다
42장 조화로 어우러지는 삶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陰)을 등에 업고 양(陽)을 품는다. 이러한 기들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룬다. 사람들은 부모가 없거나 먹을 것이 없거나 재산이 없는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왕과 군주들은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칭했다. 잃음으로 얻기도 하고 얻음으로 잃기도 한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 또한 가르친다. 난폭한 자는 제 명에 죽지 못한다. 이것이 내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
노자는 앞선 41개의 장을 통해 이야기해온 내용을 여기서 다시 되풀이한다.. 도는 우리가 하나됨 혹은 온전함이라고 생각하는 무형의 존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과 물질을 낳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만물은 서로 반대되는 음과 양 또는 여성상과 남성상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장은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 서로 반대되는 기운들을 융합하면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견해에 무게를 더한다.
노자는 부모를 잃는 것, 먹을 것이 없는 것, 재산이 없는 것을 고통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도의 관점에서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잃음으로써 얻는 것을 강조한다. 집, 부모, 재산, 자존심까지 잃으면 필요한 전부를 얻게 된다는 것일까? 도에서 태어났고, 도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무한한 자아는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세속적인 자아만이 부모와 재산과 자존심을 필요로 한다. 노자는 하나 됨 안에서 이 차이를 알아차리라고 이른다. 노자는 물질적인 조건들을 덜어냄으로써 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나 됨 안에서 세속적인 욕망이 커지면 거기에 비례해서 도적인 감성은 자리를 잃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세속적인 자아는 죽음을 맞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살아 있는 동안 죽는다는 것은 언젠가는 죽게 될 운명을 타고난 자아를 위한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도의 진정한 조화 속으로 녹아들기 위해서는 균형 잡힌 사고가 필요하다. 도를 품고 폭력과 증오를 멀리하는 사람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고 또 죽게 될 것이며, 이는 도의 완전함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죽음’이라고 불리는 그 순간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결국 생명이 태어난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폭력은 삶과 죽음의 조화로움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폭력과 관계된 모든 일을 끊고 조화롭게 살겠다고 다짐하라. 폭력을 조장하는 것이라면 어떤 형태의 오락거리도 멀리하라. 예를 들어, 증오를 일으키거나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도록 부추기는 표현들을 삼가라. 다툼을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을 찾고 폭력에 반대하는 단체의 활동에 참여하라. 야만적인 폭력을 지지하는 것은 똑같이 야만적인 최후를 예약하는 것과 같다는 도덕경의 근본 원칙을 기억하라. 겉으로 드러난 행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복수와 증오 대신,, 관대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추구하라. 폭력 없는 조화 속으로 녹아든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듯 삶을 대하라.
덜어냄으로써 얻고, 더함으로써 잃는다.
당신의 집착을 점검하라.
물건, 지위, 문화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 대한 애착도 위대한 도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막는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지켜보고, 걱정하고, 보호하고, 다듬고 구분한다. 그리고 그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달리 말하자면, 얻기 위해 애쓰느라 조화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재산을 대가 없이 나누어 주고, 가지고 있는 물건과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욕심을 놓아 버리는 연습을 하라. 당신이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사물들과 연결된 끈을 상상하고 그 끈들을 끊어버려라. 소유자가 아닌 관찰자의 입장에 서라. 이것이 바로 당신이 도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방법이다. 시인 하피즈는 말한다.
이제 모두를 산처럼 바라보라
그러나 이를 비밀로 하라.
제42장은 제40장과 내용상 관련이 깊다. 전반부는 道, 一, 二, 三, 萬物에 이르는 우주발생론적 설명이라면 후반부는 强梁함을 피하라는 교훈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는 이 두 가지 모두 제40장의 내용과 이어지는 부분들로 되어 있다. 다만 제40장은 竹簡本에 있으나 제42장은 竹簡本에 없다는 것이 주목할 사항이다.
獨逸學者 한스 게오르그 묄러(Hans-Georg Moeller)는 제40장과 제42장의 우주론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제40장에서 개념적 용어를 통해 말한 것이 여기서는 수적 상징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제40장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천하만물은 有에서 생겨나지만 有는 無에서 생겨난다.’ 제42장은 순서를 거꾸로 하여 이렇게 진술한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이러한 創生(generation) 과정의 중심에 도가 있는데, 無 또는 虛로서 숫자 하나 - 주목할 것은 0이 아니라는 점이다. - 와 동일시되는 이 도는 唯一性과 全體性을 동시에 나타낸다. 바퀴의 이미지를 통해 설명되는 도는, 비어 있으면서 하나의 중추가 되는 것(the empty and single hub) - 내적인 중심이자 바퀴의 기능의 ‘기원’ - 이면서 동시에 바퀴 전체 - 일어나는 모든 외적 총체 또는 일원론적 우주 - 이다. 도의 전체 시나리오는 이렇게 陰과 陽, 밤과 낮, 어둠과 밝음의 교체로 또는 생물학적인 세계에서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산과 재생산의 진행은 이러한 가장 일반적인 二元性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일원론적인 전체는 둘(twoness)을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이자 둘이 함께 만물로 이루어진 多의 세계(the multiplicity)를 나타내는 셋(the threeness)을 구성한다. 하나의 전체로서 볼 때 도는 하나이지만, 그 하나됨이란 다만 변화와 재생산의 중심에 있는 근본적인 둘로 이루어진 틀(the frame)일 뿐이다. 따라서 저기의 모든 것을 일으키는 이러한 이원성은 세계 속에 있다.
여기서 數的 상징으로 묘사되는 창생의 전체 과정은 〈기독교적인〉 創造論이나 단선적 進化論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차라리 바퀴의 이미지와 같이 ‘통합된 圓(the integrate circle)’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바퀴의 운동은 중심에 비어 있는 바퀴축을 둘러싸고 회전하지만, 그 축 자체는 바퀴의 회전을 앞서지도 않고 먼저 시작하지도 않는다. 도는 최초의 운동자나 창조주가 아니다. 그것은 생산과 재생산 과정의 중심에 있을 뿐이다.”
전통적인 주석에서는 道와 一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둘러싸고 논의되는데 대체로 두 가지 흐름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氣와 陰陽에 근거하여 우주발생론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莊子》를 원용하여 道와 萬物의 일체를 강조하는 흐름이다. 왕필은 후자의 입장에 서 있지만 이를 재해석하여, 一을 民心으로 연결하여 정치철학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뒤에 이어지는 强梁에 대한 경계는 제40장에서 ‘道의 用은 弱에 있다.’고 한 것과 상통하는 교훈을 말하고 있다.
道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陰을 등에 지고 陽을 끌어안아 沖氣로써 조화롭게 된다.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오직 홀로 되고[孤], 버려지고[寡], 가진 게 없는 것[不穀]이지만 王公은 이것들을 칭호로 삼는다.
그러므로 사물이란 혹 덜어내면 보태지고 혹 보태면 덜어진다.
萬物과 萬形은 아마도 ‘하나[一]’로 돌아갈 것이다. 무엇을 말미암아 ‘하나’에 이르는가? 無를 말미암아서이다.
無를 말미암아 하나가 되니 〈그렇다면〉 이 하나를 無라 일컬을 수 있는가?
이미 그것을 하나라 일컬었으니 어찌 ‘말[言]’이 없다 할 수 있는가?
말이 있고 하나가 있으니 둘이 아니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하나가 있고 둘이 있으니 셋을 낳기에 이른다.
無로부터 有로 나아감에 숫자는 여기에서 다하였으니 이 셋을 지나 더 나아가면 道의 부류가 아니다.
그러므로 萬物이 생성할 때에 나는 그 주인을 알고 있으니, 비록 萬形이 있더라도 沖氣는 하나가 된다.
百姓에게는 이 마음이 있으니 나라와 풍속이 달라도 王侯 가운데 이 ‘하나(沖氣, 心)’를 얻은 자가 그들의 주인이 된다.
이 하나로 주인이 되는데 그 하나를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많아질수록 더욱 멀어지니 덜어내면 그것에 가까워지고 그 덜어냄이 다함에 이르러야 이에 그 궁극을 얻는다.
이미 그것을 일컬어 하나라고 하면 오히려 이내 셋에 이르게 되니, 하물며 근본이 하나가 아닌데 도가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덜어내면 보태지고 보태면 덜어진다는 것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다른 사람이 가르치는 것을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니,
내가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가르침을 따르게 하지 않고, 저 자연스러움을 쓸 뿐이다.
〈나는〉 그 지극한 도리를 들어서 〈가르칠 뿐이니〉 그에 따르면 반드시 길하고, 그를 어기면 반드시 흉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가르칠 때에 그것을 어기면 반드시 그 흉함을 자초할 것이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나 또한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그것을 어기지 말라고 한다.
강하고 굳세기만 한 사람은 제명에 죽지 못하니, 나는 장차 이것을 가르침의 아버지로 삼는다.
강하고 굳세기만 하면 반드시 제명에 죽지 못한다.
사람들이 서로 강하고 굳세라고 가르치는 것은 내가 반드시 강하고 굳세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강하고 굳세기만 하면 제명에 죽지 못한다.”는 〈말을〉 들어 가르치는 것은 “내 가르침을 따르면 반드시 길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어기는 무리를 얻어 가르침의 아버지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43.
天下之至柔(천하지지유) : 세상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것이
馳騁天下之至堅(치빙천하지지견) :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단단한 것을 이겨 낸다
無有入無間(무유입무간) : <없음>만이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갈 수가 있다
吾是以知無爲之有益(오시이지무위지유익) : 그러기에 나는 <억지로 하지 않음>의 유익을 안다
不言之敎(불언지교) : 말없는 가르침,
無爲之益(무위지익) : 무위의 유익에
天下希及之(천하희급지) : 미칠 만한 것이 세상에 드물다
43장 부드러운 삶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이긴다. 형태 없는 것은 공간이 없는 곳으로도 들어간다. 그러기에 나는 무위(無爲)의 유익함을 안다. 말 없는 가르침 움직임 없는 행함 세상에 그것을 아는 이가 거의 없구나. 그것이 성인의 길이다. 이 세상은 아낌없이 주는데 이를 얻는 이는 참으로 드물다. |
[도덕경]은 자연에 대한 비유로 가득하다. 그러한 가르침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과 하나가 되었던 성인들을 따라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 장 첫 부분, 물은 도교의 상징으로 자주 인용된다. 부드럽게 사는 것은 물 흐르듯이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자는 단단함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우리에게 단단함의 개념은 강함과 같다. 손에서 쉽게 부스러지는 화산재보다 다이아몬드가 더 가치가 있는 걸까? 그렇다면 당신은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야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자연을 상징하는 물을 보라. 지구와 우리의 몸은 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을 보라. 확 움켜쥐어서는 느낌이 없다.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그 안에 손을 담가 보라.
물이 어떻게 단단한 돌과 바위를 뚫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 부드러운 물은 단단함을 넘어선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의 계곡은 수 세기에 걸쳐 고요하고 묵묵하게 흐르는 물에 의해 만들어졌다. 공간이 없어 보이는 곳에도 흘러갈 수 있다. 말없이 온전히 놓아둔 채로 낮은 곳, 조용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곳, 다른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로 오기를 희망하는 그곳으로 천천히 흐르는 상상을 해보라. 이것이 바로 물이 흐르는 방법이다. 물처럼 힘들이 지 않고 흐를 수 있는 무위(無爲)는 유익하다. 이것은 간섭하지 않는 행함이다. 어떻게 움직여야 한다고 머리가 몸에게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알아서 나아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삶에 노자의 행하지 않고 이루는 것을 적용하라. 일은 단순해지고 성취도는 높아질 것이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압박감도 사라질 것이다. 무술에서 상대방의 힘을 거꾸로 이용하는 것처럼 평화로운 조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부드러움은 단단함을 넘어선다. 골프 선수가 스윙할 때 억지로 힘을 쓰지 않는다. 훌륭한 선수들은 억지로 힘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다. 뛰어난 예술가는 힘들이 지 않고 부드럽게 춤을 추고, 힘들이지 않은 채 고요하게 그림을 그리고, 적절한 단어가 찾아오게 내버려 둠으로써 쉽게 글을 쓴다. 이들은 노자가 전한 성인의 방식을 실천하는 드문 사라들이다. 이들은 “세상이 아낌없이 주는 것을” 얻는다. 세상은 당신에게도 똑같이 준다.
부드러운 무위의 방식을 삶에 도입하라.
무위의 방식 혹은 애쓰지 않는 행함을 실천하라. 밀어붙이라는 내면의 요구를 내려놓음으로써 오히려 애쓸 때보다 더 잘하게 됨을 깨달을 것이다. 일할 때는 마음가짐과 태도를 부드럽게 함으로써 성취에 대한 압박을 견뎌내라. 더 많은 고객과 기회가 당신에게 올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도의 완전한 흐름에 자신을 맡기기 때문이다. 마치 왜가리가 먹이를 찾기 위해 썰물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주목하라. 마라톤 선수들이 골인 지점을 남겨놓고 극도로 피로해지면 억지로 밀어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들은 몸에 대한 간섭과 지시를 멈출 때 불가사리 하게도 결승점을 통과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부드러움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다.
욕망들이 상상 속에서 자유롭게 흐르도록 하라.
잠겨 있는 문 밖에 서 있는 것처럼, 가질 수 없지만 늘 갖고 싶었던 것을 떠올려 봐라. 당신이 갈망해 온 그러나 가질 수 없었던 재산, 건강, 행운, 성공 등에 대해 스스로 뭐라고 말해 왔는지 점검해 보라. 이제 막힌 벽을 넘어 마치 물처럼 흘러들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마음속으로 부드럽게, 온화하게 그리고 조용히 그렇게 해보라.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도의 방식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부드러움을 인생이라는 그림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면 단단하고 어려운 길도 부드러워질 것이다. 당신이 가진 욕망의 모든 영역에서 이 같은 애쓰지 않음을 연습하라.
제43장은 口碑文學이나 《노자》의 전형적인 말하기 방식으로 하나의 수수께끼와 같이 정식화된 격언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란 전통적으로 볼 때 그리고 제78장과 연관 지어 보면 물로 해석되며, 또한 ‘가장 딱딱한 것’은 그 물이 위로 흘러가는 돌이나 바위이다. ‘가진 게 없음[無有]’이라 하는 것은 道로 해석되어 왔는데, 이 해석은 필자가 가장 우선시하는 것이자 河上公 주석에 의해 지지된다. 이와 다른 대안으로서 왕필과 다른 주석자들은 그것을 보편적인 매개자이자 에너지인 氣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바로 앞의 장에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여기서 ‘無有’를 또한 구체적으로는 ‘가득 차 있지 않음(no fullness)’으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가득 차 있지 않으면서 비어 있는 것은 명백하게 도이다.
둘째 부분은 앞의 진술을 統治術과 연결시켜 준다. 여기서 ‘나’는 기대되는 독자 또는 청자로서의 ‘나’인데, 성인 통치자인 것은 물론이다. 일단 첫째 부분의 수수께끼가 풀이되면 물과 도의 역설적 기능은 자명한데, 즉 역전의 전술에 대한 통찰을 고려하는 것이다. ‘無爲’는 ‘有爲’보다 우월한 방식이자 가장 이로운 통치 형식이다.
마지막 부분은 무위의 격률을 ‘말하지 않는 가르침’에 연결시키고 있다. ‘無爲’와 ‘不言’은 동반되는 것인데, 여기서 ‘不言’은 언어를 완전히 끊는 것으로 이끌어지지는 않는다. 통치자를 위한 무위는 백성들을 위한 완벽한 행위(유위)의 토대이다. 비슷하게 추론될 수 있는 것은, ‘말하지 않기’ 또는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어느 편을 드는 것이 없는 것이란 모든 언어를 멈춘다는 뜻이 아니라 언어가 방해받지 않고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군주는 스스로 어떤 행동을 취하거나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군주에게 있어 어떤 행동이나 언어가 조화롭게 전개되도록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끼어들지 않는 것(noninterference) 그리고 치우치지 않는 것(impartiality)이다.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천하에서 가장 견고한 것을 몰아대고, 無有는 틈 없는 데까지 들어가니,
氣는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물은 지나지 못하는 곳이 없다.
나는 이로써 無爲가 유익함을 안다.
虛無와 柔弱은 통하지 못하는 곳이 없다.
無有는 다하지 아니하며, 지극히 부드러운 것은 꺾이지 않는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無爲의 유익함을 알 수 있다.
말 없는 가르침, 무위의 유익함은 천하에 미치는 자가 드물다.
대저 누가 이를 넘어설 수 있겠는가?
44.
名與身孰親(명여신숙친) : 명성과 내 몸 어느 것이 더 귀한가
身與貨孰多(신여화숙다) : 내 몸과 재산 어느 것이 더 중한가
得與亡孰病(득여망숙병) : 얻음과 잃음 어느 것이 더 큰 관심거리인가
是故甚愛必大費(시고심애필대비) : 그러므로 무엇이나 지나치게 좋아하면 그만큼 낭비가 크고
多藏必厚亡(다장필후망) : 너무 많이 쌓아 두면 그만큼 크게 잃게 된다
知足不辱(지족불욕) :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知止不殆(지지불태) : 적당할 때 그칠 줄 아는 사람은 위태로움을 당하지 않는다
可以長久(가이장구) : 그리하여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44장 멈춰야 할 때를 아는 삶 내 몸과 명성, 무엇이 더 귀한가? 내 몸과 재산, 무엇이 더 중요한가? 얻는 것과 잃는 것, 무엇이 더 문제인가? 사랑은 희생의 열매이고 풍요로움은 후한 마음의 결실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욕되지 않고 그칠 때를 아는 사람은 위태롭지 않다. 그러기에 오래 갈 수 있다. |
44장은 우선순위의 기준을 바꾸면 많은 결실을 얻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대한 생각을 전환하면 세상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노자는 자신의 내면을 깊게 들여다보고 무엇이 진정으로 소중한지 점검해 보라고 한다. 지금까지 노자는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삶의 중요한 사명이라고 조언했다. 이것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여행을 위해서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순간을 살면서 우리의 근원인 도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하다.
멈춰야 할 때를 아는 것은 본질적인 자아로 가는 여정의 일부이다. 그곳에 명예나 재산,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사물이나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도와 당신 사이 관계를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방해가 되는 것은 명예나 재산에 대한 자신의 집착이다. 성공이나 소유에 대한 가치의 의미를 바꾸라. 그것들은 도와 당신 사이의 유대감을 약하게 만들 뿐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힘을 쓰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는 혹은 만족을 찾아 끝없이 애쓰는 불합리한 순환의 덫을 경계하라. 이 장은 당신에게 멈추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고 간절하게 조언한다.
더 많이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재산, 명예, 친구, 여행, 음식 등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쫓는다. 당신도 이 같은 인생관을 갖고 산다면 만족과 좌절로 가득한 삶을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 추구 자체가 당신을 감옥에 가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노자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큰 병이라고 말한 이유이다. 삶에 있어 무엇이 정말 소중한지 따져보면, 사랑과 충만한 감정은 언제나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원천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기 때문에 당신은 온전히 사랑받고 있으며 모든 면에서 풍요롭다고 느낄 것이다.
노자는 또다시 모순으로 보이는 말을 건네고 있다. 그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달리하면 그 바라보던 대상이 변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그는 온 천지에서 사랑과 풍요로움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쫓아서는 결코 잡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언제나 손에서 잡을 수 있는 범위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를 바라본다. 그리고 도가 그 생명을 주는 본질을 모두와 나누고자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도 없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줄 때 큰 만족을 경험하게 된다. 맹목적인 추구를 멈추면 풍요로움과 사랑이 당신 앞에 전개된다.
당신과 도의 관계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라.
이를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의무로 삼아서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라. 근본적인 관계는 바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다. 가족, 사업, 국가, 문화 혹은 민족과의 관계가 아니다. 스스로 다짐하라. “내 삶에서 첫 번째 우선순위는 내 존재의 근원과 나 사이의 관계이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우선이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다른 것들도 더 많이 바라지 않게 될 것이다. 지상 낙원에 살며 애쓰지 않고도 도를 따르게 될 것이다.
멈춰야 할 때를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라.
너무 많이 요구하고,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말하고, 걷고, 일하고, 자고, 놀고, 쇼핑하고, 불평하고, 애쓰는 중에 언제 멈춰야 할지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깨어 있으라. 멈추는 연습을 통해 그 순간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을 것이다. 사업이 잘 되고 있는가? 너무 급하게 커가는 것을 멈추게 하라. 배가 부른가? 지금 당장 먹는 것을 멈추어라. 은행 잔고가 충분한가? 그렇다면 그 중에 일부는 기부하라. 소득공제를 받거나, 베풂의 대가로 좋은 평판을 얻는 일 같은 건 잊어버려라. 바라고 원하고 소유하는데 매달릴수록 당신은 도와의 관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멈추어야 할 때를 알면, 평생 애만 쓰고도 성취하지 못하는 어려움과 이별하게 된다.
河上公 주석은 제44장에 대해 ‘경고하는 말’이라고 특징짓는데 이것은 분명히 딱 들어맞는 것이다. 첫째 부분이 경고하는 바는, 名聲과 富에 관한 관심은 자신의 몸을 대가로 치르는 것일 수 있음을 말한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비법, 곧 아프다거나 걱정이 없게 되려면 물질적 재화나 관직을 추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 부분은 동일한 맥락에서 계속되는데, 정서와 물질을 소비하는 것을 피하라고 말하고 있다. 정서적인 투자와 물질적인 투자 모두 결국에는 손해를 낳게 되고 자신의 안녕을 해치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제44장의 道家的 메시지를 요약하고 있다. ‘멈출 줄 아는 것[知止]’(이 표현에 관해서는 제32장을 보라.) 이것이야말로 만족과 건강으로 이끌어준다. 족함을 아는 것은 흡족함의 기초이다.
명성과 몸 어느 것이 소중한가?
명성을 숭상하고 높은 지위를 좋아하면 제 몸은 반드시 소홀히 한다.
몸과 재화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재화를 탐함에 싫증냄이 없으면 제 몸은 반드시 사소하게 여긴다.
〈名利를〉 얻음과 〈제 몸을〉 잃음 어느 것이 병통인가?
명예와 이익을 얻었으나 제 몸을 잃으면 어떤 것을 병이라 하겠는가?
이 때문에 너무 아끼면 반드시 크게 쓰고, 많이 쌓아두면 반드시 크게 잃으니,
너무 아끼면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고, 많이 쌓아두면 다른 사람과 나눔만 못하다.
〈명성과 재물은〉 추구하는 사람은 많고 〈재산을 많이 쌓아두면〉 빼앗으려 하는 사람이 늘어나니 〈이것은〉 재물 때문에 병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크게 쓰고 크게 잃는다.
만족할 줄 알면 치욕당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오래 갈 수 있다.
45.
大成若缺(대성약결) :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하다
其用不弊(기용불폐) : 그러나 그 쓰임에는 다함이 없다
大盈若沖(대영약충) : 완전히 가득 찬 것은 빈 듯하다
其用不窮(기용불궁) : 그러나 그 쓰임에는 끝이 없다
大直若屈(대직약굴) : 완전히 곧은 것은 굽은 듯하다
大巧若拙(대교약졸) : 완전한 솜씨는 서툴게 보인다
大辯若訥(대변약눌) : 완전한 웅변은 눌변으로 보인다
躁勝寒(조승한) : 조급함은 추위을 이기고
靜勝熱(정승열) : 고요함은 더움을 이긴다
淸靜爲天下正(청정위천하정) : 말고 고요함 이것이 세상의 표준이다
45장 표면적인 것 너머의 삶 진정으로 완벽한 것은 모자란 듯하지만 그 쓰임에 다함이 없다. 진정으로 가득 찬 것은 빈 듯하지만 그 쓰임이 끝이 없다. 완전히 곧은 것은 굽은 듯하고 빼어난 솜씨는 어리석은 듯하고 훌륭한 웅변은 어눌한 듯하고 진정한 진실은 거짓인 듯하고 위대한 논쟁은 침묵인 듯하다. 움직이면 추위가 물러가고 가만히 있으면 더위가 물러간다. 고요함과 평온함이 세상을 올바르게 만든다. |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 당신은 겉으로 보이는 것들을 통해 모든 것들을 평가하도록 배워왔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제 더 이상 에고가 지배하는 문화를 통해 바라보기를 멈추라고 요구한다. 그 대신 내면에 존재하는 고요하고 평온한, 그 보이지 않는 공간에 주목하라고 이른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넘어서면 기존에는 불완전하고, 텅 빈 듯하고 서투르며, 심지어 어리석어 보였던 것들이 완전하고, 충만하고, 능숙하며, 총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기존의 사고방식은 이 세상이 불안정하다고 말한다. 정치인들은 극히 상식적이어야 되고, 날씨는 믿을 수 있어야 되며, 젊은이들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그동안 우리가 받아온 가치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분별 있는 상식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겉으로 드러난 표면만을 살핀 결과이다. 노자는 “잠시 멈추어 서서 다르게 보라.”라고 말한다.
노자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불완전하고 어리석다는 딱지를 함부로 붙이지 말고 내면의 고요함과 평온함을 발견하라고 한다. 겉모습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다면 모순적이게도 당신은 변화의 도구가 된다. 모자란 듯한 것은 쓰임에 다함이 없고 빈 듯한 것은 쓰임에 끝이 없다. 이것은 도가 하는 일이다. 도는 결코 마르지 않는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도는 고갈될 수가 없다. 노자는 당신에게 다함이 없고 언제나 가득한 도처럼 되라고 말한다. 편협해지지 말고 고요하며 평온해지라고 한다. 이 세상과 그 안의 모든 생명들을 존재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이 펼쳐지게 하라. 내면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간으로부터 느껴지는 그것으로 하여금 참된 운명의 방향으로 이끌게 하라.
비록 당신의 에고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불완전한 것들을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바라보라
무의식중에 사람, 장소, 환경들에 대해 완벽하지 못하다고 딱지를 붙이고 있는 당신 자신을 알아채라. 결함 속에 감춰진 완전함을 보라. 나는 아이들이 자랄 때 특정한 나이가 되면 그들의 도발적 행동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을 자주 발견했다. 예를 들어 몸에 좋은 음식들을 안 먹겠다고 버티는 아이들을 나는 그냥 지켜보았다. 더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 이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채소를 먹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은 아이들이 어리석거나 생각이 꼬여서가 아니다. 그것은 그 시기에 필요한 것이다. 당신도 이와 같이 느긋한 고요함을 즐겨라. 그럼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완전함을 허락하라.
겉으로 들어난 당신의 모든 불완전함에도
무엇보다도 먼저 스스로를 신의 피조물이라고 인식하라. 이것은 당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혹은 어떤 실수나 실패를 저질렀는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비록 이러한 표면적인 문제들이 평생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반복된다고 해도 말이다. 자아의 근원인 영원한 도는 흠이 없고, 곧으며, 완전하고, 진실하다.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것들을 싫어하고 비판하느라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고 결점 투성이라고 여겼던 도이자 완전한 자신의 자아에게 도움을 청하라. 스스로 애정을 갖고 감싸 안으면 사랑받지 못해서 상처받은 겉모습과 감정은 평온하게 가라앉을 것이다.
첫째 부분은 《노자》의 다른 부분들 예를 들어 제6장과 제2장 같은 부분들과 共鳴하는데, 비어 있음의 고갈되지 않는 성질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전혀 지치거나 피로함이 없이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그 주된 기능으로 ‘비어 있음’을 갖는다. 여기서 우리는 제2장에 나오는 그릇, 문, 창을 떠올릴 수 있다.
둘째 부분은 제25장에서 “크다는 것은 간다는 뜻이고, 두루 다닌다는 것은 멀어진다는 뜻이고, 멀어진다는 것은 되돌아온다는 뜻이다.”라고 한 것과 공명한다. 여기서 ‘큰[大]’ 것이란 그 시작으로 돌아오는 원의 그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선형적으로 전개되는 듯이 보이더라도, 거대한 우주적 시나리오로서 도는 ‘굽어 있다.’ 도는 낳고 낳고 또 되돌아오는 순환이다. 비슷하게 성인의 기술 또한 역설적이다.
서툴러 보이는 것은 바로 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특수한 기능을 훈련하지 않음으로써 성인 군주는 無爲에 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특수 활동의 중심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가장 위대한 장인은 어떤 특수한 기술을 완성하지 않는다. 커다란 재능이 있다는 것은 어떤 특수한 특질이나 재화를 이렇게 가지고 있지 않음에 있다.
크게 이룬 것은 모자란 듯하나 그 쓰임이 낡지 않고,
사물에 따라서 이루되 하나의 형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자라는 듯한 것이다.
크게 찬 것은 비어 있는 듯하나 그 쓰임이 다하지 않고,
크게 채워져 충족되어 사물에 따라 주되 아끼고 자랑할 것이 없다. 그래서 빈 듯한 것이다.
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듯하고,
사물에 따라 곧아지지만 곧음이 한 가지에만 있지 않다. 그래서 구부러진 듯한 것이다.
크게 정교한 것은 엉성한 듯하고,
크게 정교한 〈기술은 사물의〉 자연스러움을 따라 그릇을 만들지 독특한 것을 고안해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엉성한 듯한 것이다.
뛰어난 언변은 어눌한 듯하다.
뛰어난 언변은 사물에 따라서 말하되 스스로 조작하는 게 없다. 그래서 어눌한 듯한 것이다.
부지런한 움직임은 추위를 이기고, 고요히 가만 있음은 더위를 이기니, 맑고 고요히 가만 있으면서 〈백성을 부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천하가 바르게 된다.
바쁘게 움직인 후에야 추위를 이겨내고, 고요히 가만히 있음으로써 더위를 이겨낸다.
이로 미루어보면 맑고 고요히 가만 있으면서 〈백성을 부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천하가 바르게 된다.
고요히 가만 있으면 사물의 참됨을 보전하고, 바삐 움직이면 사물의 본성을 해친다.
그러므로 오로지 맑고 고요히 가만 있으면서 〈백성을 부리는 일을 하지 않아야만〉 위에서 말한 ‘큰 것들’을 얻을 수 있다.
46.
天下有道(천하유도) : 세상의 도를 따르면
却走馬以糞(각주마이분) : 달리는 말이 그 거름으로 땅을 비옥하게 한다
天下無道(천하무도) : 세상이 도를 져버리면
戎馬生於郊(융마생어교) : 전쟁에 끌려간 말이 성 밖에서 새끼을 치게 된다
禍莫大於不知足(화막대어불지족) : 화로 말하면 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咎莫大於欲得(구막대어욕득) : 허물로 치면 갖고자 하는 욕심보다 더 큰 것이 없다
故知足之足常足矣(고지족지족상족의) : 그러므로 족한 줄 아는 데서 얻는 만족감만이 영원한 만족감이다
46장 평화로운 삶 세상이 도를 따르면 전장에 있던 말이 땅을 갈기 위해 돌아오고 세상이 도를 따르지 않으면 전쟁터에 끌려갔던 말이 새끼를 낳는다. 도를 잃는 것보다 큰 잃음이 없고 지나친 욕심보다 더한 재앙이 없으며 만족을 모르는 것 보다 더한 비극이 없다. 가장 큰 허물은 언제나 더 많이 원하는 것이다. 만족만으로 충분하다. 만족 안에서 진정으로 영원한 환희를 찾을 수 있다. |
자신의 성취를 그동안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기준을 두고 있다면, 이제 커다란 변화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 [도덕경] 46장은 성공을 위해 더욱 평화로우면서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유혹한다. 더 많이 얻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면 그로 인해 그동안 알고 있던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내면의 평화를 얻는 것이 성취의 진정한 척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도와 관계를 잃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한다. 국가는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려고 한다. 그래서 넓은 땅, 강력한 힘, 다른 국가에 대한 지배를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한다. 노자는 상징적으로 이야기한다. 도와 준비를 이루면 말들이 땅을 기름지게 하고, 도에서 멀어지면 말들은 전쟁터로 끌려간다.
이 세상이 지금 도와 관계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는 땅을 기름지게 하는 여러 자원들을 고갈시키면서 군마를 키우고 있다. 세상은 이미 살상 무기로 가득하건만 계속해서 파괴를 위한 폭탄들을 만들어 낸다. “민족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비극은 없다.” 없다.”라는 노자의 말은 도처에서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걱정과 근심의 화염이 우리의 신성한 자아를 집어삼킬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신은 노자의 조언에 따라 실천하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평화롭게 산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때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욕망은 사라지고 만족감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그런 다음 당신의 가족, 이웃, 직장동료, 궁극적으로 자신이 속해 있는 나라와 이 별 전체의 삶들을 어루만져라. 더 많이 요구하는 자신이 느껴지거든 간단히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를 떠 올리는 것으로 시작하라.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그 평화의 도구로서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평온함을 전하게 될 것이고, 새롭게 특별한 성공의 불빛을 느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방황하든, 세상이 무엇을 세상이 무엇을 하라고 정하든 간에 당신은 도를 잃어버리지 않음으로써 조화롭게 살아갈 것이다.
매일 감사하고 만족하라
매일 아침, 당신의 발이 땅을 딛고 일어설 때마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당신을 통해 자유롭게 흐르는 도의 신비로운 힘을 불러들이고 하루 동안 당신의 반응을 살펴보라. 이러한 방법으로 감사와 만족을 간절히 원할 때 당신의 근원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본성을 따르라.
점점 더 강한 폭력을 만들어 내는 세상 속에서 평화의 도구가 되기로 결심하라. 땅을 갈고,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불완전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馬)이 되라. 마치 당신과 도가 하나인 것처럼 살라.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결정적 다수에 도달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위대한 도가 에고의 요구들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제46장은 慾望과 그것들이 초래하는 불리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째 부분은 천하의 두 가지 상이한 상태를 비교하고 있다. 천하에 道가 있을 때에는 어느 누구든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디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때에는 말이 農耕을 위해 사용되지 여행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전쟁을 위해서 말을 기른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情(emotions)이 절제되지 않고 욕망(desires)이 지배하게 된다. 즉 그것은 欲求(want)가 충족되지 않는 상태이다.
둘째 부분은 첫째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데, 군주는 그러한 상태의 욕망과 욕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욕망이란 사람들이 만족을 모르고서 더 많은 것을 갈구할 때 일어난다. 그러한 상태의 욕구는 전쟁, 사회의 무질서 그리고 갈등(strife)의 원인이 된다. 획득의 욕망은 정치적 불안과 국가간 혹은 사회간의 경쟁의 핵심적인 이유이다.
마지막 부분은 만족이란 소유의 양과는 무관하고 족함을 아는 데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만약 사람이 이러한 技藝(art)를 깨우치지 못한다면 그는 늘 더욱 더 많은 것을 열망할 것이다. 그러한 욕망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중독의 순환에는 한계가 없다. 오로지 그침을 깨우침으로써 비롯되는 만족감만이 오래갈 수 있다.
천하에 道가 있으면 잘 달리는 말을 되돌려 〈밭에〉 거름 주는 〈농사일에 쓰고〉
천하에 도가 있으면 만족할 줄 알고 멈출 줄 알아, 바깥에서 구함이 없고 각각 제 안을 닦을 뿐이다.
그래서 잘 달리는 말을 되돌려 〈밭에〉 거름 주는 〈농사일에 쓰는〉 것이다.
천하에 도가 없으면 軍馬가 군사 훈련장에서 새끼를 낳는다.
탐욕이 싫증낼 줄 모르면 그 안을 닦지 않고 각각 바깥에서 구한다. 그래서 군마가 군사 훈련장에서 새끼를 낳는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 없고 얻기만 바라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이 없다.
그래서 만족할 줄 아는 〈데에서 오는〉 만족이야말로 영원한 만족이다.
47.
不出戶(불출호) :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知天下(지천하) : 천하를 다 알고
不??(불규유) : 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見天道(견천도) : 하늘의 도를 볼 수 있다
其出彌遠(기출미원) :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其知彌少(기지미소) : 그만큼 덜 알게 된다
是以聖人不行而知(시이성인불행이지) : 그러므로 성인은 돌아다니지 않고도 알고
不見而名(불견이명) : 보지 않고도 훤하고
不爲而成(불위이성) : 억지로 하는 일 없이도 모든 것을 이룬다
47장 존재함으로 사는 삶 문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알고 창을 통해 내다보지도 않고도 하늘의 방식을 본다. 멀리 나갈수록 아는 것은 줄어든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가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꿰뚫고 애쓰지 않고도 성취한다. |
노력하고 힘을 써야만 성공한다는 믿음을 버려라. 47장에서 노자는 이러한 믿음이 우리가 완성을 이루고 조화를 경험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애쓰지 않고 그저 존재함으로써 사는 삶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과는 다른 관점이다. 노자가 말하는 것처럼 창문을 내다보지 않음으로써 더 많이 깨닫고 이룰 수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심장의 소리를 들어보자. 언제나 고동치는 신비한 생명체를 당신은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닌다. 심장은 잠을 잘 때도 멈추지 않고 펌프질을 계속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완전하게 작동한다. 심장은 스스로 생명을 전하는 놀라운 존재이다.
이것이 곧 당신이다. 당신 안에 있는 심장은 “존재함으로 사는 삶”의 교훈을 이해하고 작용할 수 있는 하나의 모델이다. 심장은 지금 당신을 살아 있게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미처 느끼지 못한다. 본성에 따라 해야 할 바를 정확히 알고 있는 심장처럼 당신의 온전한 자아에 대해 생각하라. 세상을 알기 위해 방황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이미 그 세상이기 때문이다. 심장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런 노력이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당신의 심장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고 도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인류라는 심장 속에서 뛰는 하나의 박동이다. 창밖을 내다볼 필요도 없고 앞으로 나설 필요도 없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심장과 마찬가지로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2,500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어렵다. 그러나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도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정보에 미친 세상 속에서 당신은 그저 존재함으로써 도의 지혜가 자유로이 흐르게 하는 심장의 박동이다. 노자는 나를 통해서 당신에게 새로운 깨달음과 효과를 시험해 보라고 재촉한다.
당신의 심장을 신뢰하라.
심장 박동에 귀를 기우리면,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는 모순적인 도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가장 깊은 느낌은 당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심장의 소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내면의 깊은 곳을 움직이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심장이 말하게 내버려두라. 고요하게 계속되는 박동에 주목하고 감사하라. 박동에 에너지를 주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 가슴 속에 있는 그 힘이 바로 도가 작용함을 알려주는 신호임을 깨달아라.
언제나 당신과 함께하는 깨달음의 느낌을 믿으라.
내면의 깨달음은 당신이 앞으로 나서는 것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깨달음은 당신이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에도 그 자리에 있다. 당신에게 방 안에 틀어박힌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구가 태양을 돌게 하는 그 힘이 당신을 이끌도록 하라하고, 그 힘이 당신을 완벽하게 인도할 거라고 믿어야 한다. 모든 일이 이치에 맞게 돌아갈 때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어서 타고난 창조성을 경험하라. 마치 흐르는 물이 썩지 않는 것처럼 당신은 간섭할 필요도 없이 내면에서 완전해지려고 노력하는 자연스러운 힘에 의해 움직일 것이다.
제47장은 “하는 게 없으되 하지 못하는 게 없다.[無爲而無不爲]”는 격률에 관하여 가장 유명한 해설을 담은 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孔子의 《論語》에 나오는 두 문장과 유사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함이 없이 다스리신 이는 아마도 舜임금일 것이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하였는가? 그는 단지 몸을 공손히 하고 앉아서 남쪽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덕으로써 다스리는 것은 비유컨대 북극성과 같다. 북극성은 제자리에 있는데 뭇별이 그를 중심으로 도는 것과 같다.’”
우주적 정치적 시나리오의 중심에 가만히 있음으로써 성인 통치자는 자연과 국가를 다스리는데 마치 바퀴축이 바퀴를 돌리는 것과 같다. 동시에 그는 나면서부터 天道를 아는 자이다. 제33장과 관련하여 이미 앞에서 주석하였듯이, ‘안다는 것(to know)’은 또한 ‘체득했다(to master)’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통치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법(how)을 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가 움직이지 않은 채 중심에 남아 있기에 성인 통치자는 자신이 우주와 사회에 대한 ‘노하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그가 자신의 자리를 떠난다면 더 많은 지식을 얻지 못하는 게 아니라 통치술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 된다. 통치자는 안으로부터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으며 또한 올바르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데, 즉 자신의 자리를 떠남이 없이 국가에서 고유한 기능들을 할당할 수 있다.
문밖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모든 일을〉 알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天道를 아니,
일에는 으뜸이 있고 사물에는 주인이 있으니 〈《周易》 〈繫辭傳〉에서 孔子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길은 비록 달라도 돌아가는 곳은 같고 생각은 비록 백 가지로 다양해도 이르는 곳은 하나이다.
도에는 커다란 원칙이 있고 이치에는 커다란 일치점이 있다. 〈제14장에서〉 “옛날 〈성왕이 다스리던 때의〉 도를 잡아 오늘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다.
비록 처한 현실은 오늘이지만 옛 시작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문밖을 나서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天道를 아는 것이다.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앎이 더욱 적어진다.
無는 하나에 있는데 많은 것에서 그것을 찾기 때문이다.
道는 〈제14장에서 말하였듯이〉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을 수 없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으니 만약 이것을 알면 구태여 문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고,
만약 이것을 모르면 〈문밖으로〉 나아가 멀어질수록 더욱 미혹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이리저리〉 다니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이름 지으니,
〈성인은〉 사물이 도달할 곳을 깨달았기에 비록 〈이리저리〉 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사물의 으뜸을 알기에 비록 보지 않아도 옳고 그름의 이치를 〈정확히 파악하여〉 이름을 정할 수 있다.
하지 않고도 〈모든 일을 다〉 이룬다.
〈성인은〉 사물의 본성을 밝게 알아 그에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비록 하지 않아도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이루게 한다.
48.
爲學日益(위학일익) :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 가는 길
爲道日損(위도일손) :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길
損之又損(손지우손) : 없애고 또 없애
以至於無爲(이지어무위) : 억지로 함이 없는 지경에 다다르라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 : 억지로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取天下(취천하) :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常以無事(상이무사) : 억지로 일 꾸미지 않을 때만 가능하다
及其有事(급기유사) : 아직도 억지 일을 꾸미면
不足以取天下(불족이취천하) : 세상을 다스리기엔 충분하지 못하다
48장 덜어내는 삶 학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이고 도는 하루하루 덜어내는 것이다. 덜고 또 덜어내면 무위에 이르고 무위에 이르면 못하는 것이 없다. 진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각자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둘 때 이루어진다. 간섭해서는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 |
우리는 “더 많이 가질수록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다.”라고 외치는 듯한 세상에 살고 있다. 48장에서는 이런 식의 관념을 이전과 다르게 바라보라고 한다. 재산을 모으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삶의 기준으로 삶던 생각들을 바꿀 수 있다. 덜어내는 삶은 세상을 다른 불빛 아래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더 깊은 완전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정규교육을 통해 자신에게 부과된 모든 것을 배우고 채워야 한다고 배웠다. 배움의 여정보다는 성적 증명서, 졸업장, 학위에 집중했다.
그러난 도는 학벌을 나타내는 외부적인 표시와 상징들에서 벗어나라고 이른다. 학문이 정보와 지식의 축적에 대한 것이라면 도는 지혜에 대한 것이다. 도는 자신의 근원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이야기한다. 도를 경험하고 도에 생기를 불어넣고 또 원칙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물질에 의지하는 마음을 덜어내야 한다. 이 장에서 자주 언급하듯이 자신의 삶에 추가한 외적 요소들은 결국 그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결과를 낳는다. 외부로부터 지켜야 하고 보호해야 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닦고, 칠하고, 청소하고, 보관해야 한다.
노자가 보여준 개념들, 특히 그중에서도 사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줄임으로서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무한한 지혜가 깃들여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 조상들은 땅을 소유한다는 용어가 없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땅 한 평을 사는 것부터 모든 법적 공작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구매하는 땅은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다. 그러나 소요하기 위해서는 소유권 저당권, 유치권 등등 장애물을 만들어 낸다. 노자는 이 땅의 소유주가 아니라 손님이 되라고 한다.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자연계에 간섭하는 것을 멈춰라. 즉 태어났고 결국은 다시 돌아 갈 운명인 ‘아무것도 없음’과 조화를 이루어 살라.
빼기 혹은 ‘일상의 줄임’ 속에 담긴 가치를 보라.
무언가를 사고 싶다는 욕구를 덜어내라. 광고는 그들이 선전하고 있는 모든 것이 행복과 직결된다고 설득한다. 무엇을 사는 대신 그동안 쌓아온 소요물들 중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것들이 있는지 보라. 그동안 모아온 세석적인 물건들을 내려놓으면 틀림없이 욕망이 잦아들고 상쾌한 자유를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여기 왔으며 아무것도 가지고 돌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즐겨라.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스스로의 삶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추가하느냐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한 깨달음 속에서 더 큰 기쁨을 만끽하라. 덜어내는 삶이 Rhe 도의 길이다.
소유를 통한 만족을 얻지 말고 자연에서 기쁨을 느껴라.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우주 속에서 소유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아라. 본질은 형태가 없기에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노자가 말한다. 사물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내버려 둘수록 당신은 도와 더 조화롭게 살고 있는 것이다. 꽃과 구름, 석양과 폭풍, 별, 산, 그리고 우연히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즐겨라. 세상과 함께 하라. 그것과 열애를 하며 그 속에 살되 소요하려 들지는 마라. 이것이 평화의 길이다. 500년 넘게 인도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카비르는 그의 글에 이 48장의 지혜를 다음과 같이 담았다.
물속에 살면서도 목이 마른 물고기는
전문가의 진지한 상담이 필요하다.
제48장은 앞 장에서 논의하였던 도가의 중심 주제 無爲를 계속하여 다루고 있다. 道를 행한다는 것은 일부 儒者들이 하듯 배움과 ‘사물에 대해 알기(knowing-that)’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자기-최소화(self-minimization)이다. 완벽한 성인은 스스로의 생각, 말, 행동을 비워야만 한다.
《노자》가 정치적 관점으로부터 이러한 실천을 본다는 것은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명백해진다. 무위란 성인 통치자의 실천이다. 성인 통치자는 국가에서 어떤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회라는 바퀴의 바퀴살이 되지 않기 때문이며, 그는 지도자의 자리 - 이른바 바퀴의 축 - 를 차지할 유일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어떤 특수한 의무를 수행한다면 그는 더 이상 지도자로서 적절한 자리에 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이러한 무위는 제48장이 명백하게 논의하고 있듯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모든 의무가 실현되고 모든 행위가 조화롭게 수행되기 위한 선결조건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즉 무위함으로써 성인 통치자는 그의 나라에서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게 없도록 하는 것이다.
배움을 추구하는 것은 날로 보태는 것이요,
〈이와 같이 하는 사람은〉 자신이 능한 것을 증진하고 자신이 익힌 것을 보태고자 힘쓴다는 뜻이다.
도를 추구하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사람은〉 ‘虛無’로 돌아가고자 힘쓴다는 뜻이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無爲에 이르면 하는 게 없으나 하지 못하는 게 없다.
함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따라서 함이 없어야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천하를 취하는 것은 늘 일삼음이 없음으로 하니
〈천하를 취하는 것은〉 움직일 때에 늘 〈상황과 사물에〉 따른다는 뜻이다.
일삼음이 있게 되면
자신으로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또한 천하를 취하기에는 부족하다.
〈천하를〉 통솔하는 근본을 잃었다는 뜻이다.
49.
聖人無常心(성인무상심) : 성인들에겐 고정된 마음이 없다
以百姓心爲心(이백성심위심) :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습니다
善者吾善之(선자오선지) : 선한 사람에게 나도 선으로 대하지만
不善者吾亦善之(불선자오역선지) :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으로 대한다
德善(덕선) : 그리하여 선이 이루어집니다
信者吾信之(신자오신지) : 신의 있는 사람에게 나도 신의로 대하지만
不信者吾亦信之(불신자오역신지) : 신의 없는 사람에게도 신의로 대한다
德信(덕신) : 그리하여 신의가 이루어진다
聖人在天下??焉(성인재천하흡흡언) : 성인은 세상에 임할 때 모든 것을 포용하고
爲天下渾其心(위천하혼기심) : 그의 마음에는 일체의 분별심이 없다
聖人皆孩之(성인개해지) : 성인은 그들을 모두 아이처럼 되게 한다
49장 비난하지 않는 삶 성인은 고정된 마음을 갖지 않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차린다. 착한 사람에게는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역시 착하게 대한다. 존재의 본성이 착하기 때문이다. 어진 사람에게는 어질게 대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에게도 역시 어질게 대한다. 존재의 본성이 어질기 때문이다. 신의가 있는 사람에게는 신의가 있게 대하고 신의가 없는 사람에게도 역시 신의가 있게 대한다. 성인은 하늘 아래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어 산다. 모든 것을 자신처럼 생각하고 모든 이를 자기 아이처럼 사랑한다. 모든 사람들이 눈과 귀를 그에게로 돌리고 그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
온화함으로 기득 한 이 장을 통해 노자는 우리에게 이 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라고 말한다. 비난하지 않은 삶을 통해 함께 조화롭게 존재할 가능성을 발견한 노자는 그 평화로운 세상을 탐험하라고 우리를 이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 말고 그들을 인정하라고 한다.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하늘 아래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세상을 떠올려보라. 자기 자신에게 쏟아내는 순간을 직시함으로써, 비난에 대한 자신의 관찰을 바꿀 수 있다. 비난하는 대신 그냥 바라보라. 그러면 자신과 감정에 대한 꼬투리를 잡는 것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을 더 좋아할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옳다’ 혹은 ‘그르다’라고 말하는 것은 경쟁, 처벌, 반감을 동기유발의 기제로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과 대립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경우에는 사랑, 친절, 포용을 믿지 못하고 증오, 분노, 협박을 필요로 한다. 자기비난에서 벗어나면 노자가 말한 “고정된 마음”을 필요로 하지도, 원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사람들과 대립하게 만들었던 총성이나 현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신분의 꼬리표를 나타내는 수많은 구분과 범주들은 당신이 그것들의 가치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는 순간 불필요하고 대수롭지 않게 된다. 가족이나 국가에 의해 길들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비난하지 않은 삶을 더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 도의 하나 됨이 사람들을 배척하는 당신 마음을 돌려 놓을 것이다.
이것은 전쟁이나 충돌을 막는 기본적 해결 방법이다. 비난을 멈추고 다른 사람들 속에 존재하는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들을 마치 친자식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다음에는 도의 하나 됨이 우리 모두를 빛나게 한다. 우리 신이 우리나라만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우리를 구하고 알라신이 당신과 믿음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축복한다. 신은 온 인류에게 은총을 베풀 것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스승들이 그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처럼, 당신도 선함과 어짊으로 모두를 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바를 다하라. 세계관이 변하면 당신의 그 선함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퍼져 나갈 것이다.
노자가 일깨워주는 것처럼 “우리 존재의 본성이 어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당신의 진짜 모습뿐이며, 당신 모습은 비판적이지 않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본다. 그들도 당신 자신도 비난할 필요가 없다. 생각을 바꾸고 비난하지 않는 삶을 살라. 이런 관점에서 잠시 흔들렸다고 해서 자신을 ‘그르다’고 비판하거나 잘하고 있다 해서 ‘대단하다’고 판단하지 마라. 당신은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무한한 ‘개방성’과 유한한 ‘한계’가 함께 뒤섞인 존재임을 명심하라. 때때로 비난하는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라.
자신에게 확고한 관점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보통 편견으로 나타나곤 한다. 확고한 관점을 버리고 자신을 유연하게 바라보라.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더 높은 덕이다. 기존에 배워온 것과 배치될지라도, 모든 면에서 선함과 어짊을 펼치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 비난하는 사람이 아닌 지켜보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인식하라. 주변 환경과 상관없이 하나의 관점에 매달리는 것은 삼가라. 모든 사람, 그중에서도 특히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조화롭게 지내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고 어질게 대하면서,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해야 함을 잊지 마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라.
이 장의 여러 번역본 중 하나는 “나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을 믿는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사람도 믿는다. 만약 내가 충분히 진실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심장 박동을 내 것보다 먼저 느낄 것이다.”라고 말한다. 당신이 그것을 ‘비난하기’라고 하든 아니면 ‘등급메기기’라고 하던 간에 다른 사람에 대해 악하고, 게으르고, 불성실하고, 어리석고, 못생겼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을 포착하라. 그러고는 나지막하게 다짐하라. ‘나는 이 사람에게서 나를 본다. 그리고 비난이 아닌 선함의 자리에 머물 것이다.’ 산스크리트 어로 ‘나마스테’라는 말은 “우리 모두가 하나다. 당신을 존경합니다.”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나는 사람에게 소리 없이 혹은 소리를 내어 “나마스테”라고 말하기 시작하라. 그 말이 모든 사람을 당신의 아이처럼 사랑하도록 일깨울 수 있게 말이다.
이상적인 통치자는 개인적인, 자기만의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그는 공동체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그의 마음은 어떤 개인적인 것으로부터도 비어 있으며, 그는 그 자신의 감정을 가지지 않으므로 그는 마음속에 모든 다른 것들의 마음을 위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는 세상과 함께 스스로를 융합할 수 있다. 그는 하나의 정치적인 본체 속으로 사람들을 결합하지만 여전히 이 통합 안에서 다른 부분으로 남겨진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에워싸고 중심에 있는 그에게로 향해 규합된다. 마치 아이들이 아버지를 향하고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말이다. 오직 그만이 사회의 중심부에 있는 혼자만의 공간에 머무른다.
통치자는 모든 자리 가운데 가장 낮은 곳을 취하기 때문에 그의 자리는 또한 특별하다. 역전의 전략에 따르면, 이것은 물과 여성의 이미지로 설명되는데 통치자는 ‘낮은 곳에 기대어’ 그의 절정의 힘과 잠재력을 나타내는 前兆가 된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위로부터의 ‘압력’을 가하지 않고 다만 낮은 곳에서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으니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성인은〉 움직일 때에 늘 〈상황과 사물에〉 따른다는 뜻이다.
뛰어난 자에 대해 나는 그를 뛰어난 사람으로 대접하고, 뛰어나지 못한 자에 대해 나는 또한 뛰어난 사람으로 대접하니
〈도를 행하는 성인이〉 각각 저마다의 쓰임새에 따르면 〈만물 각각의〉 뛰어남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덕 있는 자의 뛰어남이다.
〈도를 행하는 군주는〉 다른 사람을 버림이 없다는 뜻이다.
믿음직스러운 자에 대해 나는 그를 믿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자에 대해 나는 또한 믿으니 〈이것이〉 덕 있는 자의 믿음이다.
성인은 천하에 있으면서 〈천하 백성들과〉 화합하여 천하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천하 백성의 마음과〉 뒤섞으니, 백성이 모두 그에게 이목을 집중한다.
각각 총명함을 쓴다는 뜻이다.
성인은 〈백성을〉 모두 어린아이로 여긴다.
〈성인은 백성들을〉 모두 어린아이와 같이 화합하고 욕심이 없게 만든다는 뜻이다.
무릇 〈《周易》 〈繫辭傳〉에서〉 “천지는 만물 각각의 자리를 베풀어주고 성인은 만물 각각의 타고난 능력을 이루어주며 사람이 도모하고 귀신도 도모하니 백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다 내어준다.”고 했으니,
능력이 있는 자는 〈그에 합당한〉 자리를 주고 자질이 뛰어난 자는 〈그에 합당하게〉 취하여 쓰니, 능력이 크면 크게 쓰고 자질이 귀하면 귀하게 대한다.
만물에는 으뜸 되는 것이 있고 일에는 주인이 있으니
이와 같이 한다면 〈군주가〉 冕旒冠의 술[冕旒]이 눈을 가려도 〈신하가〉 속일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고, 귀막이 솜[黈纊]이 귀를 막아도 〈신하가〉 태만하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어찌 다시 제 일신의 총명함을 수고롭게 해서 백성의 실정을 〈까칠하게〉 살피겠는가!
무릇 〈군주가 자신의〉 밝음으로 만물을 〈까칠하게〉 살피면 만물 또한 다투어 자신들의 밝음으로 그에 응하고, 〈군주가〉 不信하는 마음으로 만물을 살피면 만물 또한 다투어 불신하는 마음으로 그에 응한다.
대저 천하의 마음이 반드시 같지는 아니한데 저들이 응하는 바를 감히 다르게 하지 못하면 제 마음을 드러내려 하지 않을 것이니, 심하구나! 폐해가 큼이여! 〈군주가 자신의〉 밝음을 쓰는 것보다 큰 게 없도다.
무릇 지혜에서는 사람들이 그와 訟事하고, 힘에서는 사람들이 그와 더불어 다툰다.
지혜가 남보다 못한데 법정에 서면 궁색해지고, 힘이 남보다 못한데 싸움터에 서면 위태로워진다.
아직까지는 다른 사람이 그 지혜와 힘을 자신에게 쓰지 못하게 만든 사람은 없으니, 이와 같이 한다면 나는 혼자 다른 사람을 대적하지만 다른 사람은 천만의 〈사람이〉 내게 대적하게 된다.
만약 이에 법망을 촘촘히 하고 형벌을 세세하게 하며 〈사람들이 도망할〉 좁은 길까지 막고 숨겨진 은신처까지 공격한다면,
만물은 자연스러움을 잃고 백성들은 수족을 둘 곳을 잃으며 새들은 위에서 어지러이 날고 물고기들은 아래에서 혼란스럽게 헤엄친다.
이 때문에 성인이 천하에 화합함은 마음에 〈사적인〉 주장이 없는 것이요, 천하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천하 백성의 마음과〉 뒤섞음은 그 뜻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림이 없는 것이다.
〈성인이 법망과 형벌로 까칠하게〉 살피는 것이 없으면 백성들이 왜 피하려 하겠는가! 〈성인이 불신하는 마음으로〉 구하는 것이 없으면 백성들이 왜 〈불신으로〉 응하겠는가!
〈백성들이〉 피하는 일도 없고 〈불신으로〉 응하는 일도 없으면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버리고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일이 없으며, 자신이 뛰어난 것을 버리고 모자라는 것을 하는 일도 없다.
이와 같이 한다면 말하는 자는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하고, 행하는 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고,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이목을 〈성인에게〉 집중하니 나는 〈백성들을〉 모두 어린아이로 여길 뿐이다.
50.
出生入死(출생입사) : 태어남을 삶이라 하고 들어감을 죽음이라 한다면
生之徒十有三(생지도십유삼) : 삶의 길을 택하는 사람이 십분의 삼 정도요
死之徒十有三(사지도십유삼) : 죽음의 길을 택하는 사람이 십분의 삼 정도요
人之生(인지생) : 태어나서
動之死地(동지사지) : 죽음의 자리로 가는 사람도
亦十有三(역십유삼) : 십분의 삼 정도이다
夫何故(부하고) : 왜 그러합니까
以其生生之厚(이기생생지후) : 모두 삶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다
蓋聞善攝生者(개문선섭생자) : 듣건대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陸行不遇虎?(륙행불우호시) : 육지에서 외뿔난 들소나 범을 만나지 않고
入軍不被甲兵(입군불피갑병) : 전쟁터에서 무기의 상해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無所投其角(무소투기각) : 들소는 그 뿔로 받을 곳이 없고
虎無所措其爪(호무소조기조) : 범은 그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兵無所容其刃(병무소용기인) : 무기는 그 칼날로 파고들 곳이 없다고 한다
夫何故(부하고) : 왜 그러합니까
以其無死地(이기무사지) : 그에게는 죽음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50장 불멸의 존재로 살아가는 삶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삶을 따르는 사람이 열중에 셋이요. 죽음을 따르는 사람이 열중에 셋이다. 그리고 태어나서 죽음으로 그저 흘러가는 사람이 또한 열중에 셋이다. 왜 그러한가? 지나치게 삶에 매달리고 흘러가는 세상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중에 하나가 있어 삶을 잘 다스린다. 호랑이와 코뿔소가 그를 피하고 전쟁터의 무기도 그를 상하게 하지 못한다. 코뿔소는 그 뿔을 박을 곳이 없고 호랑이는 그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으며 적군은 그 무기로 찌를 곳이 없다. 왜 그러한가? 그가 죽음에 이를 수 없는 곳에 살기 때문이다. 본질을 이해하라. 그러면 끝남이 없는 끝을 보게 될 것이다. |
노자는 당신의 운명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라고 한다. 죽음이라는 것은 머리를 싸매고 고심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무의미하고 사소한 일이라고 가르친다. 이 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죽음이 이를 수 없는 곳”이 존재한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바뀐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실상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다른 사람들의 걱정과 근심 목록의 맨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이를 수 없는 곳’이야말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곳이다. 그것은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당신은 그렇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이 육신을 거쳐 가는 영혼의 존재임을 받아들인다면 무한이라는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삶을 위협하는 사건들로부터 벗어나 우아하고 능숙하게 움직여 나갈 것이다. 눈 덮인 산과 혼연일체가 된 대담한 스키 선수처럼 그냥 삶과 뒹굴도록 내버려 두는 도와 당신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당신은 소문, 관료적인 복잡한 절차, 무관심, 자연재해, 범죄자, 계속해서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고 오롯이 바라보게 될 것이다. 도를 중심에 둔 이상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것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이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을 가볍게 다루게 될 것이다. 자신의 무한한 본질을 이해하고 깨달음이 이끄는 대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것이다.
도의 흐름을 통해 불멸성을 이해하게 되면 세속적인 관념과 형식적인 종교에 의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몸이라고 부르는 날고 지친 겉옷을 벗을 때가 오면 노자가 말한 것처럼 “끝남이 없는 끝을 보게 될 것이다.” 도덕경의 가르침을 천천히 되새겨 보라. 삶에 대해 이런 시각을 가지면 내면의 전쟁터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는 결코 당신을 위협하거나 상하게 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없다. 그들이 들이박고 할퀼 만한 단단함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죽음이 꿰뚫을 수 없는 곳에 머문다. 더 이상 만물을 움켜쥐려고 하지도 않고,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는 그 짧은 여정을 하나뿐인 삶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긍정의 주문을 만들어라.
스스로에게 말하라. “나 자신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죽지 않는다.” 당신은 절대로 상처를 입거나 파괴되지 않는다고 단언하라. 왜냐하면 육신이 당신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실과 연결된다면 위험하게 다가왔던 요소들은 자동으로 비켜나가게 될 것이다. 인도의 성인 무크타난다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 열광적인 추종자들은 그를 둘러싸고 애원했다. “제발, 우리 곁을 떠나지 마세요.” 그러자 그는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어디를 가겠느냐?”고 대답했다. 이 위대한 성인은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고 자신이 “끝남이 없는 끝”을 맞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죽어라.
당신의 물질적인 외피, 즉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 그 자리에 생명을 잃은 채로 누워 있는 장면을 마음속으로 떠올려보라. 주검과 분리된 목격자로서의 당신을 관찰하라. 그리고 당신의 육신에 주목하라. 영혼이 빠져나온 당신의 몸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간다. 당신은 몸에서 빠져나왔으니 이제 당신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이다. 당신을 식별할 수 있게 해 주던 세속적인 껍데기의 죽음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품고 머물러 보라. 이 새로운 깨달음 속에서 당신은 뚫리지 않을 만큼 강하고 자유롭다. 살아 있는 동안 죽어라.
삶과 죽음은 분명히 다르다. 사물들은 삶에서 죽음으로 바뀔 때 변형된다. 죽은 것은 잘 부러지고, 살아 있는 것은 탄력적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단계는 모두 동일하게 실재하며 相互補完的이다. 부서지기 쉬운 것은 탄력적인 것 못지않게 실제적이다. 제50장의 서두에서는 또한 삶과 죽음의 ‘同伴者’적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는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제76장과 관련해서 이러한 구절들은 삶과 죽음이 상호의존적이라는 또 다른 실례로 이해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대치되고 따라서 서로 따른다. 일생은 ‘죽음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삶으로 나오는 것은 동시에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道는 삶과 죽음 둘 모두로 구성되어 있고, 이 순환적인 운동은 항상 태어나는 것이기도 하고 죽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견해에서 볼 때, 老年에 이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때에 알맞은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았다는 것, 즉 그가 너무 빨리 生을 마감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가 不滅이 될 것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哲學的인’ 관점에서 늙어가는 것은 단지 너무 이른 시기에 죽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자연적 일시성을 중단시키지 않았다는 것만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제42장이 진술하는 것처럼, 위험하게 살고 그러므로 ‘그의 자연적인 끝을 보지 못할’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남자와는 다른 것이다. 이상 사회에서 사람들은 오래 살겠지만 끝없이 살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딱 알맞은 때 죽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집에 머물고 ‘노년에 이르고 생을 마감한다’는 제80장에 기술된다.
언급한 것과 같은 구절들은 죽음이 궁극적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는 반면, 다른 구절들은 만일 어떤 이가 단지 충분히 주의하기만 한다면 아마 예방될 병이나 사고의 일종으로 죽음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삶에서 나와 죽음으로 들어가니
살 곳을 나와 죽을 곳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삶으로 가는 무리가 열에 셋이요 죽음으로 가는 무리가 열에 셋인데, 백성 가운데 살고 또 살려고만 하여 움직이다가 모두 死地로 가는 것이 또한 열에 셋이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백성들이〉 살고 또 살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대저 듣건대 攝生을 잘하는 자는 육지로 다녀도 외뿔들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도 갑옷과 무기를 착용하지 않으니,
외뿔들소의 뾰족한 뿔에 치받힐 일이 없고 호랑이의 날카로운 발톱에 할퀼 일이 없고 兵仗器의 날카로운 칼날에 베일 일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섭생을 잘하는 자에게는〉 死地가 없기 때문이다.
‘열에 셋’이란 전체의 10분에서 3분을 차지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생명의 길을 취해 가능한 한 오래 살고자 하는 사람이 10분 가운데 3분이며, 죽음의 길을 취해 가능한 한 빨리 죽고자 하는 사람이 또한 10분 가운데 3분이다.
〈그런데〉 백성들이 살고 또 살려고 하는 마음이 강하면 도리어 생명이 없는 땅으로 가게 된다. 攝生을 잘하는 자는 살기 위해 살려고 함이 없다. 래서 사지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기물 가운데 〈전쟁에 쓰이는〉 칼이나 창보다 더 해로운 것이 없고, 짐승 가운데 〈뾰족한 뿔을 가진〉 외뿔들소나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호랑이보다 더 해로운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창칼로 찌를 곳이 없고 호랑이나 외뿔들소가 뿔이나 발톱으로 치받거나 할퀼 곳이 없게 하니, 이는 진실로 욕심 때문에 자신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이다.
그러니 어찌 사지가 있겠는가! 〈저 독을 가진〉 爬蟲類들은 연못을 얕다고 하며 그 속에 구멍을 파 들어가 살고, 매와 수리는 산을 낮다고 여겨서 나무 꼭대기 위에 둥지를 틀고 산다.
그래서 주살이 닿지 않고 그물이 미치지 못하니, 사지가 없는 곳에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달콤한 미끼 때문에 생명이 없는 땅으로 들어가니, 이것이 어찌 살고 또 살려는 마음이 강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만물 중에 자신이 구하는 것으로 인해 근본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타고난 본성[眞]을 더럽히지 않으면,
비록 군대에 들어가도 〈창칼에〉 해코지당하지 않고 육지를 다니더라도 〈맹수에게〉 당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렇게 볼 때〉 갓난아기야말로 본받을 만하고 귀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51.
道生之(도생지) : 도는 모든 것을 낳고
德畜之(덕축지) : 덕은 모든 것을 낳고 기르고
物形之(물형지) : 물는 모든 것을 낳고 꼴지우고
勢成之(세성지) : 세는 모든 것을 낳고 완성시킨다
是以萬物莫不存道而貴德(시이만물막불존도이귀덕) : 그러기에 모든 것은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道之尊(도지존) : 도를 존중하고
德之貴(덕지귀) :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夫莫之命而常自然(부막지명이상자연) : 명령 때문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故道生之(고도생지) : 그러므로 도가 모든 것을 낳고
德畜之(덕축지) : 덕이 모든 것을 기르고
長之(장지) : 자라게 하고
育之(육지) : 양육하고
亭之(정지) : 감싸주고
毒之(독지) : 실하게 하고
養之(양지) : 먹여주고
覆之(복지) : 덮어줍니다
生而不有(생이불유) : 낳으나 가지려 하지 않고
爲而不恃(위이불시) : 이루나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長而不宰(장이불재) : 기르나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是謂元德(시위원덕) :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한다
51장 숨은 덕에 의한 삶 도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근원과 이어준다. 도는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완전하고 자유롭게 생겨난다. 구체적인 모양새를 갖추고 주변 환경이 이를 완성하도록 놓아 둔다. 그러므로 만물은 도를 존중하고 그것이 더욱 귀하게 여긴다. 도를 숭배하고 덕을 공경하도록 요구한 적이 없지만 만물은 항상 자연스레 그리한다. 도는 만물을 낳는다. 덕은 만물을 기르고 자라게 하고 양육하고 안식처가 되어주고 보호한다. 도는 낳으나 소유하지 않고 주지만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않으며 그르나 지배하지 않는다. 이를 일러 숨은 덕이라고 한다. |
[도덕경] 51장은 우리를 보호하고, 기르고, 안식처가 되어주면서도 지배하려 하지 않는 내면을 발견하라고 한다. 숨은 덕에 의해 산다는 것은 만물의 장대한 계획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의미가 있다. 그 시작은 신비로움을 설명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만약 생물학적 방법으로 탄생의 비밀을 설명한다면 이는 숨은 덕의 자연스러움과 신비로움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의 관점이 달라짐으로 세상도 변한다.
숨은 덕에 따라 살면 삶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자신의 삶은 자신의 선택과 책임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숨은 덕에 따라 살지 않으면 태어날 때 가족과 문화 안에서 이미 자신의 삶이 결정된다고 확신한다. 삶이 정해져 있으므로 일상은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지게 되고, 가족 내의 성별이나 사열에 의한 압력에서 벗어나려는 욕망과 동시에 그들을 실망시킬지도 모른다는 끈질긴 자기비판을 경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노예나 아첨꾼의 역할 속에 가두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시야를 넓혀 자신을 도의 창조물로 보라고 요구한다. 당신이라는 작고 어린 묘목이 눈에 보이지 않는 근원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떠 올려보라. 생명을 불어넣은 ‘도’라 불리는 이 근원은 우리가 해야 할 일, 귀 기울여야 할 사람, 살아야 할 곳, 숭배하는 방법 등에 대한 일정한 원칙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위대한 어머니인 근원은 당신 삶의 여정 속에서 내리는 결정에 대해 참견을 하지 않는다. 근원은 당신이라는 묘목이 무엇을 선택하든 간에 그 안에서 스스로를 완성할 수 있을 만큼 완전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이 숨은 존재를 ‘덕(德)’이라 한다. 덕은 당신과 만물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다. 이것은 육체라는 껍데기를 죽지 않도록 보장하는 힘이나 기운이 아니다. 그보다는 창조적이고 근원적인 힘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육체를 젊어진 채로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는 하나의 지표이다. 이것은 현상의 세계에서 당신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과는 다르다. 헬렌 켈라가 “안전이라는 것은 대개의 경우 미신이다. 현실적으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도록 연습하라
.
자기 내면과 근원의 덕을 믿고 하루하루를 살라. 보살핌, 보호받고 있다는 안전한 느낌은 당신 소유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존재 안에 있는 덕의 기운과 당신이 항상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런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숨은 힘이 당신의 존재를 책임진다. 당신은 도에게서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행동은 삶 그 자체인 내면의 덕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힘은 이 글을 요약하는 내 손안에 담겨 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머릿속에 존재한다. 그 힘을 믿어라. 그 숨은 힘 안에서 안전함과 편안함을 느껴라. 이것이 완전함을 느끼는 데 필요한 전부이다.
도는 낳지만 소유하지 않는다는 기억하라.
도처럼 살라. 소유하기보다는 돌보는 사람이 되라. 그 누구도 통제하려 하지 마라. 지배하거나 조종하려 들지 말고 그저 성장하게 도와주라. 당신이 만약 다른 사람을 이끌어야 할 위치에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숨은 덕을 가능한 한 많이 발휘하게 하라. 당신이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고 싶고 생명을 불어넣은 보이지 않는 힘을 믿으려는 것처럼 당신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도 그러하다. 예외란 없다.
만물은 그들이 의지하는 존재와
그 온당함에 보답한다.
소유자가 아닌 부모가 되고
주인이 아닌 돌보는 사람이 되라.
복종이 아닌 베풂에 관여하라.
이와 같이 하라.
그러하면 삶의 중심에 서게 된다.
성인의 완벽한 지배 아래에서 백성들은 어떠한 강제 없이도 저마다 의무를 할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할 것이며, 이렇게 해서 모종의 ‘존재의 가벼움’을 느낌과 동시에 天體들이 자신의 궤도에 따라 운행하고 식물이 생장하고 시드는 것과 같이 자신들의 과업을 수행할 것이다. 그들은 어떤 뚜렷한 노력 없이 자신의 일만 할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결과 즉 ‘스스로 그렇게’ 일어나고 ‘자신의 과정’을 취하는 사물의 효과이다.
자연과 文明, 우주와 사회는 마치 영원한 운동계처럼 기능할 때, 즉 어떤 외적인 에너지의 투입이나 내적인 마찰에 따른 에너지의 손실도 없이 그 자신의 과정을 따라가는 기계처럼 기능할 때 가장 잘 기능한다. 외부 에너지의 원천, 말하자면 우주적 배터리에 의존하는 어떠한 기계도 그 배터리와 더불어 멈추게 될 것이다. 오로지 내재적으로 에너지를 자급하는 기계만이 절대로 다함이 없을 것이다. 만약 하나의 유기체가 전적으로 닫혀 있으면서 ‘스스로 그러하다’면 그것은 ‘새지 않을’ 수 있다. 그 힘이나 효력은 방해받지 않는다. 이것이 《노자》의 관점에서 우주와 국가 모두의 이상적인 시나리오이다. 여기의 제51장은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도가적 우주나 국가엔 道나 王에게 표하는 ‘尊敬’이 없다. 만일 존경을 표한다면 그 시나리오의 절대적 내재성을 방해할 것이다. 거기에는 외적인 기원이나 원천, 그 과정을 ‘인도하는’ 적극적인 힘이 없다. 완벽한 力學 안의 제요소들은 확실히 자신들의 방해받지 않는 ‘존재의 가벼움’을 소중히 여긴다. 완벽한 국가 안의 백성들은 자신의 왕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할 것인데, 마치 자연 속의 만물이 道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듯이, 즉 그들이 해야 할 것을 지속적이고 소박하게 하면서 말이다.
道는 〈만물을〉 낳고, 德은 〈만물을〉 길러주며, 物은 〈만물이〉 형체를 갖추게 하고, 勢는 〈만물을〉 이루어준다.
만물은 낳아진 이후에 길러지고 길러진 이후에 형체를 갖추고 형체를 갖춘 이후에 완성된다.
무엇을 말미암아 낳아지는가? 道이다.
무엇을 얻어서 길러지는가? 德이다.
무엇을 인하여 형체를 갖추는가? 物이다.
무엇이 부려서 이루어지는가? 勢이다.
오로지 인하기에 어떤 것이든 형체를 갖추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고, 오로지 부리기만 하기에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다.
무릇 만물이 생겨나는 까닭, 공이 이루어지는 까닭에는 모두 말미암는 바가 있으니, 말미암는 바가 있다면 도를 말미암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이를 끝까지 미루어보면 또한 도에 이른다. 〈만물은〉 저마다 인하는 바에 따르기 때문에, 각각 그에 적절한 칭호가 주어진다.
이런 까닭에 만물은 道를 받들고 德을 귀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도란 만물이 말미암는 것이고, 덕이란 만물이 얻는 것이다.
이 〈도를〉 말미암아 〈덕을〉 얻기 때문에 받들지 않을 수 없고, 그 〈덕을〉 잃으면 해롭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道가 높고 德이 귀한 것은 대저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항상 자연스럽게 된다.
(‘命’은 〈다른 곳에는〉 모두 ‘爵’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도는 〈만물을〉 낳고 덕은 〈만물을〉 기르며, 자라게 하고 기르며, 형체를 주고 바탕을 이루어주며, 먹을 것을 주고 덮어준다.
亭은 형체를 품부한다는 뜻이고, 毒은 바탕을 이루어준다는 뜻이니, 각각 저마다 의지할 곳을 얻어 그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낳으면서 가지지 않고, 하되 의지하지 않으며,
하면서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라게 하되 다스리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신묘한 덕’이라 한다.
덕이 있으나 그 주인을 알지 못한다.
그윽하고 어두운 데에서 나오는 까닭에 이를 일컬어 ‘신묘한 덕’이라 했다는 뜻이다.
52.
天下有始(천하유시) : 세상 만사에는 시작이 있는데
以爲天下母(이위천하모) : 그것은 세상의 어머니이다
旣得其母(기득기모) : 어머니를 알면
以知其子(이지기자) : 그 자식을 알 수 있고
旣知其子(기지기자) : 그 자식을 알고
復守其母(복수기모) : 그 어머니를 받들면
沒身不殆(몰신불태) : 몸이 다하는 날까지 위태로울 것이 없다
塞其兌(새기태) : 입을 다물어라
閉其門(폐기문) : 문을 꽉 닫으라
終身不勤(종신불근) : 평생토록 애쓰는 일이 없을 것이다
開其兌(개기태) : 입을 열어라
濟其事(제기사) : 일을 벌려 놓아라
終身不救(종신불구) : 평생토록 헤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見小曰明(견소왈명) : 작은 것을 보는 것이 밝음이다
守柔曰强(수유왈강) : 부드러움을 받드는 것이 강함이다
用其光(용기광) : 빛을 쓰라
復歸其明(복귀기명) : 그러나 밝음으로 돌아가라
無遺身殃(무유신앙) : 몸을 망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是爲習常(시위습상) : 이것이 영원을 배우는 것이다
52장 어머니에게 되돌아가는 삶 하늘 아래 모든 것은 공통된 시작이 있는데 그 시작이 바로 세상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를 알면 자식을 알 수 있고 자식을 알면 다시 돌아가 어머니를 받들어야 한다. 입을 다물고 감각을 붙들어라. 그러면 삶이 늘 가득하다. 입을 열고 분주하게 살라. 그러면 희망이 저 멀리에 있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은 맑음이고 부드러움을 만드는 것은 강함이다. 반짝임을 이용하여 그 빛으로 다시 돌아가고 재난을 피할 수 있다. 이를 일러 영원한 빛의 배움이라 한다. |
우리의 삶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순차적으로 겪는 경험 이상임을 깨달으라고 한다. 태어나서 성장의 단계를 거쳐서 죽음에 이를 것이고, 맞은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신비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노자는 우리에게 이 별의 생명이 태어난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여행이라는 걸 알려주려 한다. 또한 우리가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전에 이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깨달으라고 한다. 노자는 모든 만물 하나하나에 깃든 이 신비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이는 태어나고 죽는 것들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상정한다고 말한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은 공통된 시작이 있는데 그 시작이 바로 세상의 어머니이다.” 이 생각이 당신 존재 안으로 스며들게 하고, ‘아무것도 없음’에서 태어난 존재에 대해 경외심을 가져라. 보이지 않는 근원이 만물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낳았음을 기억하라. 마치 전선을 타고 흐르는 전류처럼 그 신비로운 ‘아무것도 없음’은 당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타고 흐르며 그들을 지탱한다.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 나 냄새도 없기 때문에 당신의 감각적 자아는 감지하기 어려운 한결같은 기운이다.
나이 영원한 어머니를 알아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지 않다. 존재함을 믿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면 된다. 일단 그 존재를 알고 공경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자신을 포함한 어머니의 자식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만물은 그 어머니의 소산으로 바라보면 겉으로 드러난 덧없는 모습 너머로 도가 펼쳐지는 세상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자가 자식인 만물을 어머니와 별개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머니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모든 창조물이 어머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다시 돌아가 어머니를 받들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 노자는 세속적인 행위들이 연혼을 갉아먹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고 귀를 덮으라고 충고한다. 달리 말하면 그 어머니를 닮은 내면의 부분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고 주변에서 도를 발견함으로써 밝음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경직된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강하게 하는 유연함을 길러라. 노자는 이것을 “영원한 배움”이라고 말하면서 장을 마무리한다. 아주 작은 존재에서 그 우주를 보라. 그것이 당신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고 빛이다. 직접 그 작음 안으로 들어가 밝음을 발견하라. 그러면 유연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을 키우게 될 것이다.
입을 열면 영혼이 도망칠 것이고
입을 다물면 영혼과 하나가 될 것이다.
입은 영혼을 지키는 문이다. 대화를 나눌 때 그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라. 영혼이 당신 내면에 안전하게 숨도록 하라. 귀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풍문과 가치 없는 대화로부터 귀를 막아라.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함부로 충고하지 말고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며, 험담하는데 끼어들지 마라. 언제 말하고 언제 들어야 할지를 의식적으로 조절하면서 당신의 강함을 길러라. 다른 사람의 일에 끼어들고 싶을 때는 어머니의 음성은 침묵이다. 그렇게 하라. 그러면 자유 속에서 어머니를 받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가장 작은 신비를 깨달으면 가장 큰 신비가 밝혀진다.
작은 것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밝음을 향한 희망을 키우게 된다. 한없이 작게 보이는 삶의 신비를 통해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만들어 내는 지혜의 빛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과 당신을 낳은 영원한 어머니, 그리고 다른 모두는 하나이다. 작은 것을 이해하면 밝음을 얻는데, 이는 당신이 곧 살아 있는 동안 경험해야 할 되돌아가는 여행과 같다. 도처에서 당신을 낳아준 영혼을 발견하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 무엇도 더 이상 평범하거나 열등하거나 혹은 불필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시간의 부분들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을 때, 한 부분의 종결은 또 다른 부분의 시작을 나타낸다. 이렇게 시작과 끝은 시간의 지속에 있어서 상호의존적이며, 둘 다 시간의 전개 과정 속에서 동일하게 중요한 부분이다. 만일 어떤 것이 ‘適時性’이 ‘탁월’하다면 누군가는 시작처럼 끝에 대한 고려를 해야만 할 것이다. 시간의 과정이 끝을 상정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특정한 단계들은 그것들의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종결되어야만 한다. 永續은 ‘중단의 통제(숙달)’에 의해 좌우된다.[知止]
영속과 같은 《노자》의 시간개념은 영속과 中絶을 구분하는 토대에서 확립되었다. 영속은 시간의 완벽한 형상이고 이것은 그 안에 중단이 없을 때 실현된다. 그러나 중단되지 않는 영속은 동일한 영속이 아니라 오히려 한 부분에서 그 다음 시간의 한 부분으로의 영속적이고 매끄러운 전환이다.
영속은 이와 같이 사물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 시간이 중단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질서 정연한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간을 교란시키는 두 가지 주요한 원인이 있다. 활동들이 너무 빨리 끝나버려서 그 활동의 목표에 도달하는 데 실패할 수 있거나, 그것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서 시간의 진행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속은 정확한 종결과 시작의 지속적인 감독에 기반을 둔다.
만일 시작과 종결이 영속을 탐구하는 道家에서 그렇게 중요하다면 아마도 질문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도가적 ‘시간의 사슬’은 때에 맞춘 ‘완전무결’한 시작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그것이 시작이나 끝이 없는 주기와 유사한 것인가?
《노자》에서의 몇몇 구절은 정말로 시간에 시작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작은 우리가 볼 것처럼, 사실 정말로 시간을 先行하지는 않는다. 시작은 시간요소의 안에 있다. 《노자》에서 몇몇 구절들은 ‘시작’의 문제나 혹은 제14장에서 표현하는 ‘고대에 시작이 있었다.’와 같은 것들을 논한다.
여기의 제52장은 말한다. ‘천하에는 시작이 있으면 이를 천하의 어미로 여긴다.’ 이런 문구들은 ‘시작’과 ‘母性’에 대해 말하는 제1장과도 共鳴한다. 그것은 시간이 어떤 것을 시작했던 것처럼, 그러므로 먼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에 이르는 화살의 형상처럼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자》의 제52장은 그러한 線形的 형식에서 진행되지 않다. 거기에는 이러한 상당히 수수께끼 같은 신비한 단어들을 덧붙인다.
천하에 시작이 있으면 이를 천하의 어미로 삼을 수 있으니,
잘 시작하면 잘 먹이고 기르게 된다.
그래서 천하에 시작이 있으면 천하의 어미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 어미를 얻어 이를 통해 그 자식을 알고, 이미 자식을 알아 〈이를 통해〉 다시 그 어미를 지키면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어미는 근본이요, 자식은 말단이다.
근본을 얻어 말단을 알아야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좇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욕심이 나오는〉 구멍을 막고 〈욕심이 나오는〉 문을 닫으면,
兌란 일 벌이려는 욕심이 생겨나오는 곳이요, 門이란 일 벌이려는 욕심이 따라 나오는 곳이다.
죽을 때까지 수고롭지 않겠지만
일이 없이 길이길이 편안하므로 죽을 때까지 수고롭지 않은 것이다.
〈욕심이 나오는〉 구멍을 열고 그 일을 다스리면 죽을 때까지 구제받지 못한다.
그 〈욕심의〉 근원을 막지 않고서 그 일을 다스리기 때문에 비록 그 몸이 다하더라도 구제받지 못하는 것이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다’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 하니,
다스림을 이루는 공은 큰 것에 있지 않으니 큰 것을 보는 것은 밝은 것이 아니며, 작은 것을 보아야 밝은 것이다.
강함을 지키는 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부드러움을 지켜야 강한 것이다.
그 밝은 빛을 써서
도를 드러내어 백성들의 미혹됨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다시 그 밝음으로 되돌아오면,
〈성인은 자신의〉 밝음으로 〈까칠하게〉 살피지 않는다는 뜻이다.
제 몸에 재앙거리를 남기지 않으니 이것이 ‘늘 그러함을 익힌다.’는 것이다.
도의 늘 그러함을 뜻한다.
53.
使我介然有知(사아개연유지) : 내개 겨자씨만한 앎이 있다면
行於大道(행어대도) : 대도의 길을 걸으며
唯施是畏(유시시외) : 이에서 벋어날까 두려워하리라
大道甚夷(대도심이) : 대도의 길이 그지없이 평탄하다
而民好徑(이민호경) : 사람들 곁길만 좋아한다
朝甚除(조심제) : 조정은 화려하나
田甚蕪(전심무) : 밭에는 잡초가 무성하여
倉甚虛(창심허) : 곳간이 텅 비었습니다
服文綵(복문채) : 그런데도 한 쪽에서는 비단옷 걸쳐입고
帶利劍(대리검) : 날카로운 칼을 차고
厭飮食(염음식) : 음식에 물릴 지경이 되고
財貨有餘(재화유여) : 계산은 쓰고도 남으니
是謂道?(시위도과) : 이것이 도둑 아니고 무엇인가
非道也哉(비도야재) : 정말로 도가 아니다
53장 부끄러움을 아는 삶 나에게 작은 지혜라도 있다면 오직 대도(大道)의 길을 걷고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두려워하리라. 대도의 길은 아주 평탄하고 곧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이것이 정부는 타락하고 밭은 황폐하고 곳간은 텅 빈 이유이다. 화려하게 입고 날카로운 검을 차며 물리도록 먹고 마시고 쓰고도 남을 재산을 모으는 것은 도둑과 같아지는 것이다. 남을 희생시키는 이런 호사는 도둑이 물건을 훔치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이는 도가 아니다. |
완벽한 존경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눈길이 가는 곳마다. 대도를 발견할 것이고, 그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전에 존재했거나 앞으로 존재할 사람들은 당신 근원이 낳은 당신의 일부이다. 동물과 식물, 땅과 바다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면 세상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결정적 다수의 사람들이 이 같은 관점을 갖는다면, 지구 전체를 자신의 일부로 보듯 개개인의 몸인 생명체들을 똑같이 존중하게 될 것이다.
기술문명이 아무리 발달하였지만 2500년 전에 쓴 이 글은 지금도 고스란히 들어맞는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도의 길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우리는 통일된 하나 됨이 아닌 분열을 향하고 있다. 이는 도가 아니다. 소수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부와 화려함을 누리며 사는 반면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은 배고픔을 경험한다. 수백만 사람들이 빈곤에 시달리는 동안에도 살상 무기를 만드는 위한 자금은 쌓여간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순간에도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주머니는 넘쳐흐른다. 우리는 에두르는 길을 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 매일 너무나 큰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누군가가 배고픔에 허덕이고 빈곤에 시달린다면 이를 당신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세계관을 품어라. 다른 사람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라. 그러면 남들과는 다른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과 믿음을 대신할 연민의 사랑, 그리고 기꺼이 행하는 마음을 발견할 것이다. 노자는 그가 살았던 고대 중국의 냉혹하고 냉담한 환경을 비통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분열된 에고의 관점을 버리라고 한다. 도를 따라서 부끄러움을 아는 삶을 살면 세상이 어떻게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되는지에 주목하라고 한다. 그러면 이 세상의 불균형을 바라보는 방식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궁전은 저리도 훌륭한데
농토는 어찌 이리도 황폐한가?
지주는 날카로운 검을 차고
자수 놓은 천으로 치장할 때
소작농의 곳간은 텅 비었구나.
그들은 더 가질수록 더 움켜진다.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은
그런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그들은 배가 터지도록 먹고 또 마신다.
연민을 개인의 철학적 토대로 삼아라.
재산을 쌓아온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거나, 굶주리는 사람들의 어려운 처지를 슬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연민을 철학적 토대로 삼으면 그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이것은 변화를 이루어내는 결정적 다수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다. 그러한 무리가 커질수록 어진 마음과 행동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별을 새롭게 조율할 것이다. 같은 생각을 가진 지도자들이 나타나고, 부조화와 부조리는 사라질 것이다. 마더 데레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방식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훌륭하게 보여준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의 더 비참한 가면 가운데 하나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본다.”
제53장은 1인칭 視點으로 말을 시작한다. 한스 게오르그 묄러(Hans-Georg Moeller)는 여기에 언급된 ‘나’는 著者가 아니고, 차라리 讀者나 聽者가 동일시하리라 생각되는 그 ‘나’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도는 하나의 평탄한 길이다. 그러나 너무 평탄하기에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흥분시킬 만한’ 또 다른 길을 찾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행동에 옮겨 평탄한 길을 떠나 더욱 고된 길로 가는 것은 성공으로 이끌지 못한다.
제53장의 나머지 부분은 무질서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명백하게 도에서 벗어난 지배 엘리트는 그 나라의 富를 거두어들이고, 통치의 의무는 소홀히 한다. 그러한 통치자들은 ‘도적놈’에 비교되고 있다. 그런데 도적놈을 뜻하는 ‘盜’는 ‘道’와 발음이 같다. 백성을 착취하는 통치자들의 道는 도적놈의 盜이지 진정한 道가 아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바가 있어 〈천하에〉 큰 道를 행하게 된다면 오로지 〈자연스러움을 거슬러 하는 것을〉 베풀게 될까 두려울 뿐이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바가 있어 천하에 큰 도를 행하게 된다면 오로지 그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에 거슬러〉 하는 것을 베풀게 될까 두렵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큰 길은 매우 평탄한데, 백성들은 샛길을 좋아한다.
큰 길이 널찍하고 바르며 평평한데 백성들은 오히려 그 길을 버려둔 채 다니지 않고 샛길로 다니기를 좋아하니, 하물며 다시 〈자연스러움을 거슬러〉 하는 일을 베풀어 큰 길의 한가운데를 막음에 있어서랴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큰 길은 매우 평탄한데, 백성들은 샛길을 좋아한다.”고 했다.
궁궐 안이 너무 깨끗하면
朝는 궁궐의 뜻이고, 除는 깨끗하고 좋다는 뜻이다.
〈농사짓는〉 밭은 〈잡초가〉 무성하고 창고는 텅텅 비며,
궁궐 안이 너무 깨끗하면 〈농사짓는〉 밭은 잡초가 무성하고 창고는 텅텅 비게 되니,
〈군주가 궁궐〉 하나를 설치하여 수많은 해로움이 생겼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무늬로 꾸민 비단옷을 입고 날카로운 검을 차고 싫증나도록 먹고 마시고도 재산이 남아돈다면 이런 이들을 일컬어 도둑질하여 사치 부리는 놈이라 한다. 〈도둑질한 것이지〉 道가 아니다!
어떤 물건이든 마땅한 도리로 얻은 게 아니면 모두 잘못된 것이요, 잘못된 것은 도둑질한 것이다.
귀한 〈지위는〉 마땅한 도리로 얻은 게 아니면 지위를 훔친 것이니, 훔친 것이라면 사치 부리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도가 아닌 것을 들어 밝혔으니, 도리가 아니라면 모두 도둑질하여 사치 부리는 것일 뿐이다.
54.
善建者不拔(선건자불발) : 도에 굳건히 선 사람은 뽑히지 않고
善抱者不脫(선포자불탈) : 도를 확실히 품은 사람은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子孫以祭祀不輟(자손이제사불철) : 그 자손은 대대로 제사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
修之於身(수지어신) : 도를 자신에게 실천하면
其德乃眞(기덕내진) : 그 덕이 참될 것이고
修之於家(수지어가) : 가정에서 실천하면
其德乃餘(기덕내여) : 그 덕이 넉넉하게 될 것이고
修之於鄕(수지어향) : 마을에서 실천하면
其德乃長(기덕내장) : 그 덕이 자라날 것이고
修之於國(수지어국) : 나라에서 실천하면
其德乃豊(기덕내풍) : 그 덕이 풍성해질 것이고
修之於天下(수지어천하) : 세상에서 실천하면
其德乃普(기덕내보) : 그 덕이 두루 퍼질 것이다
故以身觀身(고이신관신) : 그러므로 자신으로 자신을 보고
以家觀家(이가관가) : 가정으로 가정을 보고
以鄕觀鄕(이향관향) : 마을로 마을을 보고
以國觀國(이국관국) : 나라로 나라를 보고
以天下觀天下(이천하관천하) : 세상으로 세상을 보시오
吾何以知天下然哉(오하이지천하연재) : 내가 세상이 이러함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以此(이차) : 이를 통해서이다
54장 변화를 만들어 내는 삶 도에 굳건히 선 사람들은 쉬이 뽑히지 않고 도를 끌어안은 사람은 쉬이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자손 대대로 제사가 멈추지 않는다. 도를 자신에게 실천하면 덕이 분명해지고 도를 가정에서 실천하면 덕이 확장되며 도를 나라에서 실천하면 덕이 풍성해 진다. 도는 어디에든 무엇이든 있다. 도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도를 보아야 한다. 자신으로 자신을 보고 가정으로 가정을 보고 나라로 나라를 보고 세상으로 세상을 보라. 내가 어떻게 세상이 이러한 줄을 알겠는가? 바로 나 자신의 내면을 보기 때문이다. |
이 장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당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한다. 당신이 전 우주에 무한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깨달음을 품고 살면 도가 사방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당신은 마치 방을 비추는 빛과 같아서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영향을 받을 것이다. 자기 안에 있는 도의 본성을 눈치 채지 못한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알아차릴 것이고 삶을 소중이 여기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 빛에 매료되어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을 도의 일부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세상 속으로 균형을 불어넣어라. 54장에서 노자는 우리에게 자신의 신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라고 한다. 도가 모든 숨결과 생각에 생명을 불어넣는 곳, 바로 당신의 내면에 자리한 그 침묵의 공간 속에서부터 삶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집중할 분야를 선택하라.
당신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을 품지 마라. 세상을 위한 비전을 세우고 그 비전에 온전히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라. 증오도, 경멸도, 폭력도 없는 세상을 그려보라. 자연이 존중되고 보살핌 받는 세상 말이다.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미드는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려 깊고 헌신적인 소수의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마라. 진정으로 그렇게 할 수 잇는 사람은 그들뿐이다.”
당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아라.
나비가 그 날개를 펄럭이면 거기서 나온 에너지가 수천 킬로미터에 영향을 미친다고들 말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바깥으로 뻗어나가고 증식된다. 당신이 선택한 변화가 파괴가 아닌 온전함을 향한 것임을 명심하고 살라. 분명 어질지 못한 하나의 행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온 우주에 영향을 미칠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침묵 속 축복이나 사랑의 마음은 우주 전체에 걸쳐 울림을 준다. 당신이 모든 생명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를 깨달아라.
제54장은 아주 儒家的인 것처럼 보인다. 첫 부분은 家門의 연속성을 찬양하는데 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孟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 가지의 가장 커다란 不孝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이 後嗣가 없는 것이다.”
한 가문이 후사를 갖지 못하면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서 조상을 살아 있게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조상들의 家系를 단절시켜 가문 전체를 滅門에 이르게 한다. 이것이 《老子》 이외의 道家 문헌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것과는 다른 永遠의 추구이다. 도가에게 영원함이란 가문이나 씨족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나 국가 또는 우주에 결속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자연은 生死의 영원한 순환과정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와 셋째 부분은 애초에 儀禮 문헌의 일부였던 유가의 《大學》과 아주 유사하다. 이 두 부분의 주제와 《대학》의 주제는 모두 군주의 수양이 자신의 몸으로부터 천하로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유가와 도가 모두는 개인적 신체, 사회 공동체 그리고 자연을 상호 연결된 하나의 전체로 보았다.
잘 심어 세운 것은 뽑히지 않고,
그 뿌리를 굳건히 한 후에 그 줄기와 가지를 돌본다. 그래서 뽑히지 않는 것이다.
잘 끌어안은 것은 벗겨지지 않으니,
많은 것을 탐내지 않고 제 능력에 맞추어 한다. 그래서 벗겨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道를 子孫에게 전하는 자는 그〉 자손들이 지내는 제사가 끊기지 않는다.
자손이 이러한 도를 전하여 제사 지낸다면 제사가 끊기지 않는다.
〈그 道를〉 내 몸에 닦으면 그 德이 곧 참되며, 〈그 도를〉 내 집에 닦으면 그 덕이 곧 남음이 있으며,
제 자신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까지 미치는 것이다. 〈이러한 도를〉 제 몸에 닦으면 참되고(자신의 참된 본성이 실현되고,) 〈이 도를〉 집안에 닦으면 〈집안이〉 넉넉해진다.
이 도를 닦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 그 〈덕이 미치는〉 범위가 점점 커진다.
〈그 도를〉 내 마을에 닦으면 그 덕이 곧 자라날 것이며, 〈그 도를〉 내 나라에 닦으면 그 덕이 곧 풍성해질 것이며, 〈그 도를〉 천하에 닦으면 그 덕이 곧 두루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몸으로써 몸을 보고, 그 집안으로써 집안을 보고, 그 마을로써 마을을 보고, 그 나라로써 나라를 보고,
〈자기 자신, 집안, 마을, 나라는 물론 천하 등〉 저들 모두가 다 그러하다.
천하로써 천하를 보니,
천하 백성들의 마음으로 천하의 道를 본다는 뜻이다.
천하의 도는 거스르기도 하고 따르기도 하고 길하기도 하고 흉하기도 한데, 또한 모두 사람의 도와 같다.
내가 어떻게 천하가 그러함을 아는가? 이 때문이다.
‘이것’이란 위에서 말한 것이다. ‘내가 무엇으로 천하를 알 수 있는가?
내 자신을 살펴 그것을 아는 것이지 밖에서 구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니, 이른바 〈제47장에서〉 “문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안다.”는 것이다.
55.
含德之厚(함덕지후) : 덕을 두터이 지닌 사람은
比於赤子(비어적자) : 갓난아이와 같다
蜂?蛇不?(봉채사불석) : 독이 있는 벌레나 뱀이 쏘지도 못하고
猛獸不據(맹수불거) : 사나운 짐승이 덤벼들지도 못하고
攫鳥不搏(확조불박) : 무서운 날짐승이 후려치지도 못한다
骨弱筋柔而握固(골약근유이악고) : 그 뼈도 약하고 그 힘줄도 부드러우나 그 잡는 힘은 단단하다
未知牝牡之合而全作(미지빈모지합이전작) : 아직 남녀의 교합을 알지 못하나
精之至也(정지지야) : 음경도 일어서고 정기도 지극하다
終日號而不?(종일호이불사) :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和之至也(화지지야) : 이것이 완전히 조화이다
知和曰常(지화왈상) : 조화를 아는 것이 영원이다
知常曰明(지상왈명) : 영원을 아는 것이 밝음이다
益生曰祥(익생왈상) : 수명을 더하려 하는 것은 불길한 일이요
心使氣曰强(심사기왈강) : 마음으로 기를 부리려 하는 것은 강포이다
物壯則老(물장즉로) : 무엇이나 기운이 지나치면 쇠하게 마련
謂之不道(위지불도) : 도가 아닌 까닭이다
不道早已(불도조이) : 도가 아닌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끝장이 난다
55장 내려놓는 삶 덕과 조화를 이룬 사람은 마치 갓난아기와 같다. 독이 있는 벌레도 쏘지 않고 사나운 맹수도 덤벼들지 않으며 무서운 날짐승도 덮치지 않는다. 뼈는 약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나 잡는 힘은 단단하다. 남녀의 교합을 알지 못하나 음경이 일어서고 정기가 가득하다.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조호가 지극하다. 조화를 아는 것은 변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고 변하지 않음을 아는 것은 통찰을 갖는 것이다. 도와 조화를 이룬 것은 살아남고 억지로 된 것들은 잠시 자라는 듯하나 이내 시든다. 그것은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를 거스르는 것은 무엇이든 일찍 그친다. |
모든 혜택을 다 받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생명을 빼앗을 만큼 위험한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치명적인 독감이 유행하는 동안 그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어도 아프지 않은 사람을 알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다친 사고 현장을 조그만 상처 없이 벗어난 사람은 어떤가? 이렇게 운 좋은 소수의 사람들은 “독이 없는 벌래” “사나운 맹수”라고 표현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호천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자는 이러한 사람들이 그저 도와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삶에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사람들이 나타나는 듯 보이고, 어떤 이들은 돈이 필요할 때 그 돈을 만드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노자는 에고가 자리 잡지 않은 갓난아기들에게 기대를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기들은 불가사의하다고 생각될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큰 소리로 울어대도 결코 목이 쉬지를 않는다. 높은 데서 떨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는다. 이것이 노자의 조화이다.
“행운”은 우연히 오지 않는다. 내려놓는 삶을 선택한다면 행운은 살아가는 내내 당신의 것이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을 통제하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순간, 도의 힘을 끌어당기게 된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라. 당신 삶이 얼마나 행운 가득한 모습으로 변하는지 바라보라. 면역체계를 강화하여 질병을 견뎌낼 수 있는 “행운”을 얻기 위해 도의 조화 속으로 내려놓아라. 그리고 존재하라. 보호받기 위해 내려놓는다는 것은 모순적으로 들린다. 내려놓는 삶은 걱정, 긴장, 공포를 말한다.
위험해 보이는 일에 직면해서도 평안과 행복의 느낌을 끌어올릴 수만 있다면 근원과 조화를 이루게 되고 강압에 따라 행동하던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서 노자는 말한다. “억지로 된 것들은 잠시 자라는 듯하나 이내 시든다.”
파괴할 수 없는 자신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품어라.
위험한 상황을 지나는 동안 자신을 지탱해 줄 내면의 이미지를 만들라. 물질적인 육체의 이미지를 버리고, 정신이나 사고처럼 당신의 한결같은 부분을 보라. 이것이 당신의 본질이며, 본질은 어떤 식으로도 해하지 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범죄자에서 사나운 맹수, 감기에서 암에 이르기까지 그 무엇도 당신을 파괴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위험에 대비하려고 애쓰지 마라. 삶을 살아가는 내내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그 운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라.
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당신의 잠재력을 새롭게 바라보라.
스스로에게 “난 운이 없는 사람이니까, 일이 제대로 될 일이 없어.”라고 말하지 말고 “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행운이 나를 이끌어 줄 거야.”라고 다짐하라.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도의 흐름 속으로 당신을 안내 할 것이다. 조화가 수고의 자리를 채우며, 수용이 간섭과 강압을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행운이 공포를 몰아낼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될 것이다. 심지어 이전에는 불운의 증거라고 믿었던 것들도 이제는 더 큰 조화를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상징으로 보일 것이다.
갓난아기는 道家에서 말하는 聖人의 중요한 이미지이다. 제52장에서 말하는 ‘어미로의 회귀(the return to the mother)’는 道家的 修養의 목적으로 읽힐 수 있다.
사람은 幼兒 상태 또는 심지어 胎兒 상태로 회귀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때는 사람이 생명의 정기가 새나가는 어떠한 ‘구멍들’(제52장을 보라.)도 없는 상태이다. 갓난아기는 상처 입힐 수 없다고 묘사된다. 제50장의 언어로 말하자면 갓난아기나 태아는 ‘삶을 살려고 하는[生生]’ 것을 아직 시작하지 않은 상태이기에 아직 死地가 없다. 이것이 바로 야생동물이 해치지 못하는 까닭이다.
동시에 구멍이 없고 정기가 새나가는 일도 없기에 갓난아기는 잠재력이 무한한 精氣를 갖게 된다. 그래서 하루 종일 울어도 지치지 않고 손을 쥐면 꽉 쥘 수 있는 것이다. 비슷하게 性的 활동을 하지 않는데도, 즉 射精하지 않는데도 그 性器가 오랫동안 곧게 서 있다. 이런 것들은 정기의 지극함(the maximum of vital essence)의 사례들인데, 이것은 어떠한 힘도 낭비하거나 잃지 않음으로써 유지된다.
‘어미로의 회귀’ 그리고 ‘갓난아기로의 회귀’는 최소한 문자 그대로는 신체수양을 위한 처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도가적 수행은 자신의 신체를 ‘닫는 것(closing)’, 예를 들어 사정을 피하는 房中術이 잘 증명하듯이 자기 안의 모든 정기를 保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의식 출현 이전 상태로의 회귀라는 철학적 해석도 가능하다. 갓난아기나 태아는 아직 발달된 自我가 없으며, 자유의지도 도덕성도 없고, 옳고 그름도 분별할 줄 모른다. 갓난아기와 태아는 여전히 ‘동물적 본성’을 보존하고 있는 본능적 존재이다. 갓난아기와 태아는 無爲하듯이 행동하고, 하는 바가 ‘자연스럽게[自然]’ 일어난다. 삶의 변두리에서 갓난아기의 상태는 우리 삶의 최소의 ‘인간적’ 국면이다. 그래서 가장 자연적이다.
도가적인 정신 수양은 이러한 前意識的 상태(preconscious state)로의 회귀를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상태는 제30장에서 말하는 ‘强壯하면 늙는[壯則老]’ 상태와 대립된다. 갓난아기가 자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도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도타운 덕을 품은 사람은 갓난아기에 견줄 수 있다.
벌과 전갈, 도마뱀과 뱀도 쏘지 않고, 猛獸도 덤비지 않고, 날짐승도 낚아채지 않는다.
갓난아기는 구하는 게 없고 하고자 하는 것도 없어 뭇 사물을 범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으로 쏘는 벌레들도 〈갓난아기 같은〉 사람을 범하는 일이 없다.
도타운 덕을 품은 사람은 다른 사물을 범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것도 그 온전함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다.
뼈가 여리고 근육이 부드러운데도 꽉 움켜쥐면 빼기 어렵고
여리고 부드럽기 때문에 쥔 것이 아주 견고할 수 있다.
암수의 交合을 알지 못하는데도 온전하게 자라나는 것은
作은 ‘자라난다[長]’는 뜻이다.
어떤 것도 그 몸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다. 그래서 온전하게 자라날 수 있다.
도타운 덕을 품은 사람은 어떤 것도 그의 덕을 손상시키고 그 참된 본성을 바꾸는 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여리고 부드럽게 대하면서 다투지 않아 꺾이고 부러지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다.
정기의 지극함 때문이며, 하루가 다하도록 울어 젖히는데도 그 목이 쉬질 않는 것은
다투려는 마음이나 욕심이 없기 때문에 하루 종일 소리 내어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이다.
조화의 지극함 때문이다. 조화를 아는 것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만물은 조화로움을 늘 그러함으로 여기기 때문에 조화로움을 알면 늘 그러함을 얻는 것이다.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하며,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며, 따뜻하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니 이것이 늘 그러함이다. 형체가 없어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고 했다.
삶을 보태는 것을 ‘상서롭다’고 하며,
삶이란 보탤 수가 없으니, 보태면 요절한다.
마음이 몸의 氣를 부리는 것을 ‘강하다’ 한다.
마음속에 마땅히 아무것도 없으니 〈이 마음이〉 기를 부리면 강해진다.
만물은 强壯하면 곧 늙어버리니 이를 일컬어 道답지 못하다고 한다. 도답지 못하면 일찍 죽는다.
56.
知者不言(지자불언) :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言者不知(언자불지) :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塞其兌(새기태) : 입을 다물고
閉其門(폐기문) : 문을 꽉 닫는다
挫其銳(좌기예) :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解其分(해기분) : 얽힌 것을 풀어주고
和其光(화기광) : 빛을 부드럽게 하고
同其塵(동기진) : 티끌과 하나가 된다
是謂玄同(시위현동) : 이것이 <신비스런 하나됨>이다
故不可得而親(고불가득이친) : 그러므로 도를 터득한 사람은 가까이할 수만도 없고
不可得而疏(불가득이소) : 멀리할 수만도 없다
不可得而利(불가득이리) : 이롭게 할 수도 없고
不可得而害(불가득이해) : 해롭게 할 수도 없다
不可得而貴(불가득이귀) : 귀하게 할 수도 없고
不可得而賤(불가득이천) : 천하게 할 수도 없다
故爲天下貴(고위천하귀) : 그러기에 세상이 이를 귀하게 여긴다
56장 말없는 앎을 따르는 삶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모든 통로를 막아라. 입을 다물고 감각을 차단하라.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라.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을 가라앉혀라. 이를 태초의 하나 됨 혹은 신비의 포옹이라고 한다. 이 신비를 아는 사람은 집착이나 싫어하는 마음에 흔들리지 않고 얻음과 잃음에 동요하지 않으며 명예와 불명예에 좌우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관심 저 너머에 있지만 그들의 가슴속 가장 소중한 부분을 얻는다. 이것이 사람의 가장 귀한 모습이다. |
어쩌면 이 장이 [도덕경] 전체를 통틀어 대중에 널리 알려진 장인지 모른다. 특히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라는 구절은 너무 유명하다. 그럼에도 이 말의 근본 메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며 이를 실천하는 더욱더 찾아보기 힘들다. 노자는 내면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말 없는 앎의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한다. 이 장을 통해 그동안 지혜롭거나 박식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싶어질 수도 있다.
좋은 언변을 가진 연설가는 자신의 주장에 자신감이 넘치고, 이를 힘 있게 전달하고자 한다. 이들은 능력 있는 사람으로서 존중받는다. 그러나 진실은 이와 정반대라고 노자는 말한다. 말하는 사람은 말 없는 삶으로 살지 않고, 따라서 그들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으면 이전과는 다른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똑똑한 척 말하고 설득하려는 사람들은 항상 일종의 집착에 얽매여 있음을 알게 된다. 여기서 집착이란 하나의 이론, 정의, 승리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자기 이익과 관련 있을 수도 있다. 더 많이 말할수록 더욱 그런 집착들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
두 번째 발견은 당신 내면에서 벌어진다. 남을 설득하고 설득시키려는 성향과 욕구를 알아채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면 노자가 말한 “태초의 하나 됨” 혹은 “신비한 포옹”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더 기울여 듣게 된다. 박식하고 우월하고자 하는 욕심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이해한다. 인정받고 애쓰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말 없는 앎을 통해 당신의 존재는 다른 빛을 향하게 된다. 당신은 덜 날카롭게 되고, 안정되며, 부드럽고, 진중한 느낌을 갖게 된다.
총명하고 지혜롭다는 것에 대해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당신은 모순적인 아이러니와 마주치게 된다. 노자는 도에 따라 사는 성인은 “사람들의 관심 저 너머에 있지만 그들 가슴속 가장 소중한 부분을 얻는다."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을수록 더 인정받게 됨을 깨닫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명에나 불명예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기에 칭찬을 구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고요한 지혜로 인해 다소 냉담한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다.
모든 통로를 막아라!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당신 자신에 대해 솔직해져라. 당신은 누구에게 무엇도 증명할 필요가 없으며 계속해서 떠들어봐야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입을 다물어라. 침묵은 깨달음의 증거다.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하는 것은 들으려는 사람의 필요보다 자신의 욕심이 앞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설득하려 애쓰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그저 깊은 만족을 주는 내면의 깨달음을 즐겨라.
이 장의 네 가지 지침을 기억하라.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라]
당신의 판단이 다른 누군가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라. 더 좋은 방법은 우선 그냥 듣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애정이 담긴 연민의 마음을 자기 자신과 상대에게 건네라.
[얽힌 것을 풀라]
당신을 세속적인 규칙에 붙들어 매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라. 이익을 자랑하고 승리를 증명하는데 몰두하는 삶과 연결된 매듭을 풀어라. ‘신비한 포옹“ 속에서 고요히 도를 바라보아라.
[빛을 부드럽게 하라]
옳고자 하는 당신 욕심이 분명해지는 순간에 주목하라. 그리고 정직된 태도 대신 당신 존재가 가지고 있는 부드러운 모습을 찾고 그 방향으로 변화하라. 외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불쾌한 눈으로 노려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면 이응 당신 자신이 내면의 말 없는 앎과 멀어지고 있다는 경고이다.
[티끌을 가라앉혀라]
소동을 벌이지 마라. 다른 사람들의 행동방식에 분노가 터져 나오려는 순간, 그러한 자신의 성향을 자각하라. 화가 나서 탁자를 두드리며 소리치고 있다면 멈춰 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라. 마치 커다란 바다의 파도와도 같은 당신의 감정이 광대하고 차분하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라.
‘말하지 않음[不言]’이란 주제는 《老子》에 자주 보인다. 예컨대 제2장, 제23장, 제43장 그리고 제73장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不言은 無爲와 연결된다. 성인 군주는 무위를 행하여 모든 행동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수행되도록 한다. 이와 비슷하게 성인 군주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하는 모든 말 즉 명령이나 지시가 제23장에서 진술하듯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성인 군주의 말하지 않음은 또한 道의 無名에 상응한다. 도에 이름이 없다는 것이 천하에 어떠한 이름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성인 군주의 ‘不言’ 또한 천하에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름 없는 도는 모든 이름 있는 것들을 정박시켜주는 돛(the anchor of all the named)이며, 말하지 않는 성인 군주는 천하 모든 말의 중심(the center of all speech in society)이다.
또한 한 번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제33장에서 보았듯이 ‘안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를 아는’ 것이거나 ‘완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통치의 노하우를 가진 성인 군주는 무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하지 않을 것이며, 이와 반대로 이러한 노하우를 갖지 못한 군주는 자신의 言行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혼란해지게 될 것이다.
둘째 부분은 제50장과 제52장에서 보았던 ‘구멍 닫기’라는 주제를 언급하고 있다. 다소 ‘그윽한(dark)’ 언어로 둘째 부분은 사람에게 아끼고, 마찰이나 정력의 낭비를 피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다시 정치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인 군주는 어떠한 종류의 ‘특수한 관계’도 발전시키지 않으려 한다. 모든 바퀴살에 대해 동일하게 관계를 맺는 수레바퀴의 중심인 ‘轂(hub)’과도 같이 군주는 완벽하게 치우침이 없다. 예를 들어 제13장에서 선물도 받지 않고 호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하듯이, 군주는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않으며 또한 누구도 멀리하지 않는다. 이러한 ‘치우침 없음(indifference)’으로 인하여 성인 군주는 명성이 있게 되고 또한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른다는 뜻이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말하는 자는〉 사단을 만든다는 뜻이다.
〈성인은 감정이 나오는〉 구멍을 막고, 〈욕정이 나오는〉 문을 닫으며,
질박함을 품고 지킨다는 뜻이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엉킴을 풀며,
다툼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그 밝은 빛을 부드럽게 하고
유독 드러내는 게 없으면 누구도 특별히 다툴 게 없다는 뜻이다.
그 티끌을 고르게 하니,
유독 천시하는 게 없으면 누구도 특별히 수치스러울 게 없다는 뜻이다.
이것을 일컬어 ‘현묘한 고름’이라 한다. 그러므로 이는 친할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으며,
친할 수 있으면 멀리할 수도 있다.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으며,
이롭게 할 수 있으면 해롭게 할 수도 있다.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으니,
귀하게 할 수 있으면 천하게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아래 귀함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것도 그에 보탤 수가 없다는 뜻이다.
57.
以正治國(이정치국) :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올바름이 필요한다
以奇用兵(이기용병) : 전쟁에 임할 때는 임기응변이 있어야 한다
以無事取天下(이무사취천하) : 그러나 세상을 얻기 위해서는 <함이 없음>을 실천하라
吾何以知其然哉(오하이지기연재) : 이렇게 해야 할 까닭을 내가 어떻게 알까
以此(이차) :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天下多忌諱(천하다기휘) : 세상에 금하고 가리는 것이 많을수록
而民彌貧(이민미빈) : 사람이 더욱 가난해지고
民多利器(민다리기) : 사람 사이에 날카로운 무기가 많을수록
國家滋昏(국가자혼) : 나라가 더욱 혼미해지고
人多伎巧(인다기교) : 사람 사이에 잔꾀가 많을수록
奇物滋起(기물자기) : 괴상한 물건이 더욱 많아지고
法令滋彰(법령자창) : 법이나 명령이 요란할수록
盜賊多有(도적다유) : 도둑이 더욱 많아진다
故聖人云(고성인운) :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셨습니다
我無爲而民自化(아무위이민자화) : <내가 억지로 일을 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절로 바뀌고
我好靜而民自正(아호정이민자정) : 내가 고요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我無事而民自富(아무사이민자부) : 내가 일을 꾸미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부하게 되고
我無欲而民自樸(아무욕이민자박) : 내가 욕심을 내지 않으므로 백성이 저절로 통나무가 된다.>
57장 권위주의를 버린 삶 위대한 지도자가 되고자 한다면 도를 따르는 법을 알아야 한다. 지배하려 애쓰지 말고 고정된 계획과 개념을 놓아버려라. 그러면 세상이 저절로 다스려질 것이다. 내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세상에 금기와 제약이 많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날카로운 무기가 많을수록 나라는 더욱 혼탁해지며 사람들이 잔꾀가 많을수록 괴상한 것들이 더욱 많아지고 법이나 명령이 요란할수록 도둑이 더욱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말한다. 내가 억지로 행하지 않음으로 사람들이 저절로 바뀌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므로 사람들이 저절로 바르게 되며 내가 일을 꾸미지 않음으로 사람들이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음으로 사람들이 저절로 소박해진다. |
이 장과 앞으로 이어질 몇 개의 장을 통해 노자는 2500년 전의 통치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리더십을 보여야 할 이유와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57장의 기본 메시지는 간섭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갓난 아이를 찻길로 기어가도록 내버려 두거나 수영장 옆에서 혼자 놀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누군가를 감독해야 하는 경우에는 분명 상식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노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리더십이라는 점이다. 그는 과다한 제약과 금기를 가진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진다.”라고 말한다. 이는 엄격한 규율이 지배하는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권위적인 체제일수록 더 많은 무법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면에 아이들은 규칙이나 제제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호기심을 탐구하도록 격려 받을 때 자신감을 얻는다.
당신이 규율을 바라보는 방식을 달리하면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십대 자녀들에게 적용하던 엄격한 귀가 시간을 없애고, 그들에게 언제 올 것인가를 알아서 정하게 한다. 그리고 평소보다 늦을 경우 연락하도록 부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오히려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격한 귀가 시간이 있을 때보다 더 일찍 집에 들어오게 될지도 모른다.
가족들에게 강요하던 제약들을 살펴보라. 바람직한 부모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기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아이들이 누군가에게 기댈 필요가 없도록 교육한다. 당신은 자녀들이 책임감 있고, 건강하고, 성공하고, 거기에 더해 정직하기를 바랄 것이다. 감시하고 간섭해서가 아니라 그들 내면에 있는 본성에 따라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모법을 보여야 한다. 스스로 알아서 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라. 무엇을 결정할 때마다 지침서보다는 자신들의 고귀한 본성을 믿고 따르도록 하라.
자신을 내버려 두는 기술을 연마하라.
자신을 더 자연스럽게, 덜 통제 받도록 놓아두라. 아무런 계획 없이 짧은 여행을 떠나라. 본능적으로 끌리는 곳으로 가라. 당신이 가진 권위적인 부분에게 잠시 휴식 시간을 갖자고 말하라.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 어느 누구의 규칙에 따라 살 필요도 없으며, 나의 행동을 가로막던 규칙들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함으로써 자신과 세상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면을 보여주라.
다른 사람을 내버려 두는 기술도 연마하라.
자녀나 다른 누군가를 향해 “안 된다."라고 말하며 규칙을 들먹이려는 자신을 붙잡아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기만 했을 때 생길 수 있는 결과를 생각해 보라. 지도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바꾸면, 사람들이 직분을 수행하는데 규칙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지, 자신들의 꿈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도의 방식대로 존재하라. 다른 사람을 내버려 두라. 권위적이지 않은 당신의 리더십이 다른 사람들에게 각자 자신을 찾아가도록 영감을 불어넣고 있음을 즐겨라.
제57장은 두 가지 방식의 통치, 즉 어떠한 과업(tasks)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인수하는 ‘無爲의 통치(nonactive rulership)’와 사회를 불안케 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有爲의 통치(active rulership)’를 대조시키고 있다.
훌륭한 통치는 소박함에 근거한다. 그것은 단순한 방식의 지배로써 지배당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하지만 만족스러운 삶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제49장과 제55장에서 말하듯 백성들로 하여금 無知한 상태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어린이나 갓난아기와 같이 되게 한다. 백성들을 우쭐거리게 하지 않고 가혹하게 다루지도 않는다.
군주의 의무란 백성들로 하여금 자연 상태 속에서 어떠한 이기적 욕망 - 물론 食欲과 같이 자연스러운 생리적 욕구는 제외하고 - 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군주 자신이 無欲의 상태에 있을 때에만, 군주는 오로지 백성들이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수 있다. 군주가 만약 욕망을 내보이게 되면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로 그러한 욕망들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군주가 어떤 종류의 지배나 규칙을 도입하게 되면 군주는 사회의 자연스러운 조화와 소박함을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군주가 사회를 더욱 복잡하게 하면 할수록 질서를 유지하기란 더욱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규칙이 많다고 해서 삶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 많이 다투게 할 뿐이다. “줄일수록 늘어난다.(less is more)”는 것이야말로 道家的 통치술의 핵심이다.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운용하니 일삼음이 없음으로 하면 천하를 취할 수 있다.
道로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가 평안해지고,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奇兵이 일어나니, 일삼음이 없음으로 하면 천하를 취할 수 있다.
앞의 〈제48장에서〉 말하기를, “천하를 취하는 것은 늘 일삼음이 없음으로 하니, 일삼음이 있게 되면 또한 천하를 취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천하를 취하기에 부족하여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운용한다고 한 것이다.
대저 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근본을 받들어 말단을 그치게 하는 것이요,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법을 세워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니, 근본이 서지 않으면 말단이 천박해지고 백성들이 미칠 곳이 없다.
그래서 반드시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운용하는 데에 이르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알겠는가? 이 때문이다.
천하에 꺼리고 피해야 할 것이 많으면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에게 이로운 기물이 많으면 국가는 더욱 혼란해진다.
利器는 무릇 자신을 이롭게 하는 기물이니 백성이 강하면 국가는 약해진다.
사람에게 지혜가 많아지면 사악한 일이 더욱 일어나고,
백성에게 지혜가 많아지면 교묘함과 거짓이 생기니, 교묘함과 거짓이 생기면 사악한 일이 일어난다.
법령이 많아지면 도적이 늘어난다.
바름을 세워 사악함을 없애려 하나 奇兵이 사용되고, 꺼리고 피해야 할 것을 많게 해서 가난을 그치게 하려 하나 백성은 더욱 가난해지고, 이로운 기물을 많게 해서 나라를 강하게 하려 하나 나라는 더욱 혼란스럽고 약해진다.
이 모두가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내가 無爲하면 백성이 저절로 敎化되고,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면 백성이 저절로 바르게 되고, 내가 일삼음이 없으면 백성이 저절로 부유해지고, 내가 無欲을 바라면 백성이 저절로 소박해진다.”고 했다.
윗사람이 원하는 것을 백성은 재빨리 따른다.
내가 바라는 게 오로지 무욕이면 백성 또한 욕심을 없애고 저절로 소박해진다.
이 네 가지는 근본을 숭상하여 말단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
58.
其政悶悶(기정민민) : 정치가 맹맹하면
其民淳淳(기민순순) : 백성이 순박해지고
其政察察(기정찰찰) : 정치가 똑똑하면
其民缺缺(기민결결) : 백성이 못되게 된다
禍兮福之所倚(화혜복지소의) : 화라고 생각되는 데서 복이 나오고
福兮禍之所伏(복혜화지소복) : 복이라고 생각되는 데 화가 숨어 있다
孰知其極(숙지기극) : 누가 그 끝을 알 수 있겠는가
其無正(기무정) :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正復爲奇(정복위기) : 올바름이 변하여 이상스런 것이 되고
善復爲妖(선복위요) : 선한 것이 변하여 사악한 것이 된다
人之迷(인지미) : 사람이 미혹되어도
其日固久(기일고구) : 실로 한참이다
是以聖人方而不割(시이성인방이불할) : 그러므로 성인은 모가 있으나 다치게 하지는 않고
廉而不?(렴이불귀) : 예리하나 잘라 내지는 않고
直而不肆(직이불사) : 곧으나 너무 뻗지는 않고
光而不燿(광이불요) : 빛나나 눈부시게 하지는 않는다
58장 행운과 불운에 흔들리지 않는 삶 통치자가 자기 자신을 알면 백성들은 순박해진다. 통치자가 백성들의 삶을 간섭하면 백성들은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해진다. 화(禍)에는 복(福)이 기대어 있고 복에는 화가 숨어 있다.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옳음의 기준이 있는가? 옳은 것이 변하여 이상한 것이 되니 사람이 미혹된 지가 실로 오래되었다. 그러므로 성인은 기꺼이 모범을 보이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예리하나 찌르지 않고 곧으나 분열시키지 않고 빛나나 눈부시지 않는다. |
만물의 세상은 ‘변화의 세상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 속에서 모든 것이 안정되고 예측 가능하기를 바라면서 세상을 본다. 그러나 세상은 한결같이 움직인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58장은 세상을 보는 다른 방법, 사실상 행운과 불운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 장은 물질세계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에너지 흐름에만 집중하지 말고 결코 변하지 않는 도에 초점을 두라고 안내한다.
대부분 사람들처럼 당신 또한 변하지 않고, 안정적이고 믿을 수 있고, 예측 가능한 환경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들을 통해 그와 정반대인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요구한다. 결국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질서 정연한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다. 화창한 날에는 폭풍이 숨어 있고, 폭풍이 끝나면 가뭄이 기다리고 있다. 오르내리며 예기치 못하게 벌어지는 사건들이 자연계에는 그저 일상적인 일일뿐이다.
삶의 꼭대기와 바닥에 대한 당신의 관점을 바꿔라. 그 경험들 안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라. 행운과 불운이 아닌 온전한 전부를 보라.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하나 됨의 일부로 보라. 도의 세상에는 행운이나 불운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둘로 나뉠 수가 없다. 당신이 불운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행운이라는 나머지 반쪽을 포함하고 있다.
행운이나 불운이 아니라 온전함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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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하는 행운의 한복판에 삶이 있다면 그 삶이 언제라도 변할 수 있음을 깨달아라. 부유함은 그 속에 빈곤함을 감추고 있고 인기 있는 사람은 어느 순간 잊혀진다. 불운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삶은 행운이나 불운에 흔들리지 않는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완벽한 기회의 장이다. 당신에게 온전함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젊음을 행운, 노년을 불운이라 보는 대신 지나온 세월의 온전함으로 받아들여라. 삶은 죽음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의지를 스스로에게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도와 조화를 이루도록 행동하라.
불운의 상황이 버거워서 거리를 둘 수 없다면
거기에 기대어 있는 행운을 보라.
지금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버티기 힘들 정도로 낙담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이 삶의 전 부인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상황을 더 큰 그림의 일부로 볼 수 없다면, 가장 어두운 밤을 따라 아침이 오는 것과 같이 행운은 불운에 기대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온전함을 배경으로 밤이 지나면 낮이 찾아온다는 경험에 의지하라. 당신이 골짜기 바닥에 이르렀다면 이제 갈 수 있는 방향은 오로지 위쪽뿐이다. 모든 일들은 분명 나아질 것이고, 당신의 운도 틀림없이 바뀔 것이며, 결핍은 풍요로움으로 변할 것이다. 모든 절망의 순간 속에는 행운이 숨어 있고, 당신은 거기에 흔들리지 않고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제58장의 첫째 부분은 제57장의 둘째 부분과 연결된다. 훌륭한 통치자는 앞에 나서지 않고서도 다스린다. 그는 가만히 숨어 있듯 하면서 어떠한 명령도 제한도 가하지 않는다. 만약 그의 통치가 소박함을 지키면 백성들 또한 자연스럽게 소박하고 만족스러운 삶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만약 통치자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되면 백성들 또한 음모를 꾸미고 다투게 될 것이다.
《노자》는 확실히 모든 사람들의 정치 참여를 권장하는 市民社會(a civil society)를 주창하지 않는다. 최선의 통치는 백성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고 또한 정권에 참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제도를 만드는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 《노자》에서 훌륭한 통치란 은밀하고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고, 또한 스스로 통치에 참여해야겠다는 욕구를 느끼지 못한다.
둘째 부분은 하나의 禁言에서 시작한다. 행운과 불운은 상호의존적이다. 《노자》는 天地의 運行과 사회적 삶을 吉凶이 수반되는 사건(a rhythm of fortunate and unfortunate events)의 리듬으로 묘사한다. 사물의 진행은 하나의 상황에서 그 다음 상황으로 변화하면서 나아가며, 오늘 행운이라 여겨지는 것, 예를 들어 로또 당첨과 같은 것이 다음날에는 불운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즉 당신이 돈을 주고 산 차로 사고가 났을 때가 그렇다. 행운과 불운이란 단지 순간적인 인간의 평가일 뿐이며 하나의 특수한 관점에서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전혀 고정된 범주가 아니다.
〈군주의〉 정사가 어리숙하면 백성의 〈삶이〉 순박하고,
정사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고 일삼음도 없고 열거할 만한 정책도 없어 어리숙한데 어느새 큰 다스림에 이르렀다.
그래서 “〈군주의〉 정사가 어리숙하다.”고 했다. 〈또 그가 다스리는〉 백성이 싸우고 다투는 일이 없이 너그럽고 순박하다. 그래서 “백성의 〈삶이〉 순박하다.”고 했다.
〈군주의〉 정사가 깐깐하게 살피면 백성의 〈삶이〉 퍽퍽하다.
법률[刑名]을 세우고 賞罰의 〈조목을〉 밝혀 간사하고 거짓된 행동을 단속하기 때문에 “〈군주의〉 정사가 깐깐하게 살핀다.”고 했다.
부류에 따라 나누고 쪼개니 백성이 싸우고 다투려는 마음을 품기 때문에 “백성의 〈삶이〉 퍽퍽하다.”고 했다.
재앙이여! 복이 거기에 기대어 있도다. 복이여! 재앙이 거기에 숨어 있도다.
누가 그 〈善政의〉 극치를 알겠는가? 〈善政의 극치를 아는 자는〉 아마도 바름을 세우는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훌륭한 다스림의 극치를 알겠는가? 오직 열거할 만한 바름도 없고 이름 지을 만한 형체도 없이 어리숙하면 천하가 크게 교화되니, 이것이 〈다스림의〉 극치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바름은 다시 기이함이 되고,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결국 다시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운용하게 된다. 그래서 “바름은 다시 기이함이 된다.”고 했다.
선함은 다시 妖邪함이 되니
善이라는 〈기준을〉 세워 만물을 이롭게 하면 결국 다시 요사스럽게 아첨하는 우환이 있게 된다.
사람이 미혹된 날이 진실로 오래되었다.
사람이 미혹되어 도를 잃은 지 진실로 오래되었으니, 곧 善治로 바르게 되기를 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모남으로 〈만물을〉 해치지 않고,
모남으로 만물을 인도하여 사악한 것을 제거하게 하되 그 모남으로 만물을 해치지 않으니, 이른바 〈經41.11에서 말하였듯〉 ‘크게 모난 것은 모서리가 없다.’라는 것이다.
청렴함으로 〈만물을〉 상하게 하지 않고,
廉은 ‘청렴하다’는 뜻이고, 劌는 ‘상하게 하다’는 뜻이다.
청렴함으로 백성을 깨끗하게 하여 그 더러움을 없애게 하되 그 청렴함으로 만물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곧게 하되 〈다른 사람에게〉 뻗대지 아니하며,
곧음으로 만물을 인도하여 편벽됨을 없애게 하되 곧음으로 만물을 쳐서 다치게 하지 않으니, 이른바 〈經45.3에서 말하였듯이〉 ‘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듯하다.’는 것이다.
밝게 비추되 속을 들추지 않는다.
빛으로 그 미혹된 까닭을 비추되 그 빛으로 깊이 숨겨져 있는 것까지 비추지 않으니, 이른바 〈經31.3에서 말하였듯이〉 ‘밝은 도는 어두운 듯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근본을 받들어 말단을 그치게 하자는 것이고, 다스리지 않고도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59.
治人事天莫若嗇(치인사천막약색) : 사람을 지도하고 하늘을 섬기는 일에 검약하는 일보다 좋은 것은 없다
夫唯嗇(부유색) : 검약하는 일은
是以早服(시이조복) : 일찌감치 도를 따르는 일이다
早服(조복) : 일찌감치 도를 따른다는 것은
謂之重積德(위지중적덕) : 덕을 많이 쌓은 일이다
重積德(중적덕) : 덕을 많이 쌓으면
則無不克(즉무불극) : 이겨 내지 못할 것이 없다
無不克(무불극) : 이겨 내지 못할 것이 없으면
則莫知其極(즉막지기극) : 그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다
莫知其極(막지기극) : 그 능력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가 되면
可以有國(가이유국) : 나라를 맡을 만하다
有國之母(유국지모) : 나라의 어머니를 모시면
可以長久(가이장구) : 영원할 것이다
是謂深根固?(시위심근고저) : 이것이 바로 깊은 뿌리, 튼튼한 바탕으로서
長生久視之道(장생구시지도) : 영원한 삶, 오래봄의 길이다
59장 절약과 절제의 삶 사람을 다스리고 자연을 섬기는 데 절약과 절제보다 나은 것이 없다. 자제함은 자신의 의도를 포기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이는 그동안 쌓은 덕에 달려 있다. 덕을 많이 쌓으면 불가능이 없고 불가능이 없으면 한계가 없으며 한계가 없으면 나라를 이끌 만하다. 이것이 바로 도에 깊고 튼튼하게 뿌리내리는 길이며 영원한 삶과 깊은 통찰력의 비밀이다. |
이 장의 주요 메시지는 자제. 검소, 절제, 그리고 절약이다. 노자는 사람을 관리하거나 아이를 키우는 당신의 역할에 있어 이러한 덕목을 점검하라 한다. 방관자처럼 물러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닌, 진정한 자기 관리를 실천하라고 조언한다. “덕을 많이 쌓으면 불가능이 없다.”없다."라는 말처럼 덕을 쌓는 리더십을 갖추면 한계가 사라진다.
절약과 절제의 삶이란 당신의 너그러운 본성을 통해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끊임없이 재촉하고 지시하고, 명령 내리고, 규칙을 정하고, 복종을 강요하기보다는 도에 따라 덕을 쌓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해오던 이런 방식을 버리면 자연스레 덜 간섭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 본보기가 되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울 것이다. 이것이 도 중심의 리더십이다. 노자가 말하듯 “한계가 없으면 나라를 이끌 만하다.”
규칙과 도덕, 공포에 지배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저 지시 받은 것만 할 수 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방향성을 선택할 자유가 없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자제, 검소, 절제, 그리고 절약을 실천하라. 순종만을 강요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심한 편견을 갖는 경향이 있다.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 충분히 따져 보기보다는 그들을 이끌어주는 위치의 누군가를 따라서 결정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한층 높은 기준에 따라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노자는 “불가능이 없으면 한계가 없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덕을 쌓고 이를 본받음으로써 한계 없는 삶을 실천하라. 그렇게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이끌어야 했던 사람들 안에서 “깊은 통찰력의 비밀”을 발견할 것이고, 그 사람들은 반대로 당신 안에서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덕을 쌓아라.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관심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라.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곳이 많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 그러면 들어내지 않고 조용히 그들에게 다가가라. 그들을 도우면서 덕을 쌓아라. 덕을 쌓으면 사람은 항상 꼭대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봉사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는 노력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고행의 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덕을 쌓은 사람은 고통과 시련이 오더라도 그 곳을 벗어났을 때 사실상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는다. 그 이유는 덕을 통해 외부 환경과는 무관한 통찰력을 쌓았기 때문이다.
에고를 다스리는 연습을 하라
에고를 다스림으로써 이전과는 다르게 살라. 모아서 쌓아 두는 존재가 아닌 나눠주는 존재로 자신을 바라보고, 과시하며 소비하는 대신 필요한 것만 쓰며 살라. 당신의 삶이 에고의 요구보다는 도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욕구를 다스려서 자신과 가족에게 꼭 필요한 것만 소비할 때 당신은 축적하지 않고 베풂으로써 덕을 쌓게 될 것이다. 노자는 이것을 “영원한 삶과 깊은 통찰력의 비밀”이라고 상기시킨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희곡 [헨리 6세]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의 왕관은 머리 위가 아닌 마음속에 있다.
다이아몬드나 인도의 보석으로 치장된 것도 아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나의 왕관은 ‘만족’이라 불린다.
그것은 왕들이 결코 경험하지 못하는 왕관이다.
통상 제59장은 《老子》의 목적인 長生久視의 道가 서술된 文章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老子》는 자신의 몸과 국가를 유지 보전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략으로 ‘아끼는 것[嗇]’을 제시하는데, 이는 國家의 財政을 아끼는 것이나 신체의 精氣를 아끼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河上公의 이해는 여기에 바탕해 있다. 바로 이런 아낌이야말로 장생구시의 비결로서 신체적 장생에 도달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확립하는 핵심이라 말한다. 또한 정기를 보전하고 마찰을 피하고 고요히 숨어 있음으로써 덕이 쌓이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제59장의 내용은 漢代 초기에 유행하였던 黃老學의 핵심적인 사상을 잘 보여주는데, 河上公의 표현대로 하면 그것은 국가의 통치[治國]와 신체의 수련[治身]을 같은 원리로 보는 것과 통한다. 황로학이 바로 여러 종류의 《黃帝書》와 《老子》를 함께 아우르는 명칭이라고 王充이 설명한 것을 따른다면, 제59장의 사상은 황로학의 主題는 물론 그 論理를 잘 드러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王弼은 이러한 황로학과 일정한 거리를 둔 해석을 취한다. 왕필은 ‘嗇’을 농사일에 비유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根本에 충실함으로써 末端을 다스린다는 사상을 드러낸다. 즉 왕필은 “근본을 받들어 말단을 키운다.[崇本息末]”, 혹은 “근본을 받들어 말단을 세운다.[崇本擧末]”는 논리로 이 장을 해석한다.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것은 농사일보다 나은 게 없다.
莫若은 ‘……보다 나은 게 없다’는 말과 같다.
嗇은 농사일이다.
농부가 밭을 경작할 때에는 잡초[殊類]를 제거하여 가지런히 하는 데로 돌아가도록 힘쓰니,
〈이는 작물이 지닌〉 자연스러운 본성을 온전히 하되 가뭄과 병충해에 급급해하지 않고서 가뭄과 병충해가 드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위로는 天命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데 이보다 더 나은 건 없다.
대저 오로지 농사짓듯이 하니 이 때문에 일찍 따른다 하며
일찍 항상됨을 따른다는 뜻이다.
〈항상됨을〉 일찍 따름을 일컬어 거듭 德을 쌓는다고 하니,
오직 거듭 덕을 쌓되 날카롭게 하거나 서두르려고 하지 않은 후에야 능히 항상됨을 따를 수 있다.
그래서 “〈항상됨을〉 일찍 따름을 일컬어 거듭 덕을 쌓는다.”고 한 것이다.
거듭 덕을 쌓으면 〈무궁한 도를 얻어〉 이기지 못할 게 없고, 이기지 못할 게 없으면 그 끝을 알지 못하니
〈거듭 덕을 쌓으면〉 도는 다함이 없다.
그 끝을 알지 못하면 나라를 가질 수 있다.
끝이 있는 것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니 나라를 가질 수 없다.
나라의 어미를 가지면 오래오래 갈 수 있으니,
나라가 편안한 까닭을 일컬어 어미라 한다.
거듭 덕을 쌓음은 오로지 그 뿌리를 도모한 후에 말단을 다스려야 그 마침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일컬어 뿌리를 깊고 단단하게 하며 오래 살고 오래 보는 道라 한다.
60.
治大國若烹小鮮(치대국약팽소선) :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작은 생선을 조리하는 것과 같다
以道?天下(이도리천하) : 도로써 세상을 다스리면
其鬼不神(기귀불신) : 귀신도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非其鬼不神(비기귀불신) : 귀신이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其神不傷人(기신불상인) : 힘이 있어도 사람을 해칠 수가 없는 것이다
非其神不傷人(비기신불상인) : 그 힘이 사람을 해칠 수 없다기보다는
聖人亦不傷人(성인역불상인) : 성인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이다
夫兩不相傷(부량불상상) : 양쪽을 모두 해치지 않으니
故德交歸焉(고덕교귀언) : 그 덕이 서로에게 돌아간다
60장 악에 흔들리지 않는 삶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다. 지나치게 들쑤시면 망치기 마련이다. 도(道)로 세상을 다스리면 악(惡)은 힘을 쓰지 못한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인 자신도 해를 입지 않는다. 군주의 그 백성들이 서로 해치지 않는다면 덕은 그 나라에 쌓일 것이다. |
이 장의 주제는 당신 개인 안에 존재하는 악을 새롭게 바라보라는 것이다. 도의 보호막 안에 머물면 악은 당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자기 자신과 타인을 향한 해로운 생각들을 거부하고 도에 따라 살면 사악하고 나쁜 기운들은 힘을 잃고 물러날 것이다. 도는 누군가를 파괴하거나 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 원칙을 벗어난 사람들은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할 때만 겨우 성공할 수 있다. 이때 벌어지는 것이 바로 전쟁이며 가족과 공동체의 불화이다. 부정은 더 큰 부정을 초래하고, 집단에 큰 혼란이 가중되면서 지도자와 군주는 결국 몰락할 것이다.
악을 새롭게 바라보라. 그리고 다짐하라.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디를 가더라도 악의 존재는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고, 끼칠 수도 없다.’ 그러면 당신 내면의 풍경은 즉시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폭력적인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빛과 사랑의 존재이며 나에게서 쏟아지는 생각들은 사랑이 깃든 도와 어우러진다.’ 달리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 때문에 증오를 품고 복수의 계획을 세우지 않을 것이다. 도에 집중하면 부정적인 생각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부정적인 생각이 당신을 향하거든 마음속에 자리한 어짊과 사랑의 공간으로 물러서서 그 나쁜 기운을 피하라. 싸움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싸움을 거부하는 것이 악에 대항하는 당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해코지하려는 성난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고약한 사고 수준만큼 자신을 낮추지 말아야 한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 있으면 이러한 감정의 폭발을 쉽게 피해갈 수 있다. 그런 해로운 생각과 행동이 당신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것들에 대해 무감각해져라. 노자는 많은 사람들이 경쟁과 복수 대신 협동과 사랑의 정신으로 산다면 상처는 주는 행위는 무력해 짐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지혜를 받아들여라.
해로운 생각의 한복판에 있는 자신을 조절하여
부정적인 생각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라.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을 잡아라. 자신이 존경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울해진다. 그런 생각이 들면 자신에게 속삭여라. “나는 신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또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그 사랑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내 안에 있다.” 도처에서 벌어지는 증오와 악에 대한 소식을 접할 때 북수를 떠올리지 마라. 그런 행위는 자신을 해치는 일이다. 그리고 정신적인 기운을 담아 생각하라. ‘나는 모두에게 사랑의 마음을 보낸다. 그리고 이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증오의 어리석음을 깨닫도록 도와줄 것이다.’ 당신의 모든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필요하다면 그 흐름을 변화시켜라. 도의 이로움을 세상에 전하는 한 사람이 되라.
해로운 요구에 흔들리지 않겠다고 선언하라.
당신을 감싸고 있는 보호막을 떠올려보라. 이 보호막은 세상에서 악이라고 인식되는 것들로부터 당신을 지킨다. 오직 도와 조화를 이루는 기운만이 이 막을 통과할 수 있다. 사랑, 어짊, 자비 등의 기운은 모두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해로운 무엇이 당신에게 다가오면 이 막에 의해 튕겨나갈 것이다. 이는 당신이 도 안에서 단단한 믿음을 갖게 되었음을 뜻한다. 내면의 이런 믿음이 있다면 악의 기운이 아무리 사납게 몰아친다 해도 당신에게 직접 영향을 미칠 수가 없을 것이다. 당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사랑으로 다스리고, 그 무엇에도 상처입지 않는 사람이 되라. 그렇게 선언하고 실천하라. 위험의 한복판을 자유롭게 걸어라. 이것은 안전 불감증이 아니라. 당신과 도가 하나라는 깨달음이다.
제60장의 첫 부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문제는 작은 물고기가 어떻게 조리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자들과 번역자들은, 그것들을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전혀 수고로움도 없이 조리한다는 데 동의한다. 비슷하게 聖人 君主는 나라를 다스릴 때 많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것들을 이리저리 뒤집어가면서 복잡한 조리법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은 물고기를 요리할 때와 마찬가지로 道의 지배는 단순한 활동이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통치는 만물로 하여금 자신들이 타고난 자리를 차지하게 하고 또한 그들의 타고난 기능을 실현시켜주는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도와 조화를 이루며 세워진다면 鬼神과 神靈조차 떠돌면서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 될 것이다. 국가와 우주의 질서는 또한 귀신과 신령의 영역까지 포괄한다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이상적인 왕의 지배 아래에서 귀신은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며 사람 또한 귀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이것은 최소한 馬王堆 帛書가 암시하는 바를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 부분은 백성과 귀신이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이것이 군주의 德(efficacy)을 강화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귀신조차 그의 無爲의 통제 아래 복속될 것이다.
큰 나라를 다스림은 작은 생선을 삶듯 한다.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조급히 〈자연에 거슬러〉 하면 해가 많고 고요히 〈자연에 따라〉 하면 참된 본성을 보전한다.
따라서 그 나라는 크면 클수록 그 군주는 더욱 〈자연에 따라〉 고요히 한 후에야 뭇사람의 마음을 널리 얻을 수 있다.
道로써 천하를 다스리면 그 귀신조차 신령하지 않게 된다.
큰 나라를 다스림은 작은 생선을 삶듯 한다.
도로써 천하를 다스리면 그 귀신조차 신령하지 않게 된다.
그 귀신이 신령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신령함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요,
〈귀신의〉 신령함도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않는다.
만물이 자연스러움을 지키면 〈귀신의〉 신령함조차 보탤 게 없고, 〈귀신의〉 신령함조차 보탤 게 없으면 〈귀신의〉 신령함이 신령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된다.
〈귀신의〉 신령함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聖人 또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도가 〈만물을〉 윤택하게 적셔주면 〈귀신의〉 신령함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고, 〈귀신의〉 신령함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 〈귀신의〉 신령함이 신령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도가 〈만물을〉 윤택하게 적셔주면 성인 또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성인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 또한 성인이 성스럽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만물이 귀신의〉 신령함이 신령하다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성인이 성스럽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는 말과 같다.
대저 권위와 법망에 의지하여 만물을 부리는 것은 다스림이 쇠퇴한 것이다.
〈귀신의〉 신령함과 〈성인의〉 성스러움이 신령하고 성스럽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지극한 도이다.
대저 〈귀신의 신령함과 성인의 성스러움〉 둘이 서로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德이 서로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귀신의〉 신령함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으니 성인 또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성인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으니 〈귀신의〉 신령함 또한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둘이 서로 상하게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귀신의〉 신령함과 〈성인의〉 성스러움이 道에 합치하니 서로가 그에게로 돌아간다.
61.
大國者下流(대국자하류) : 큰 나라는 강의 하류
天下之交(천하지교) : 온 세상이 모여드는 곳
天下之牝(천하지빈) : 그것은 세상의 여인
牝常以靜勝牡(빈상이정승모) : 여성은 언제나 그 고요함으로 남성을 이긴니다
以靜爲下(이정위하) : 고요히 스스로를 낮춥니다
故大國以下小國(고대국이하소국) :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 아래로 스스로를 낮춤으로
則取小國(즉취소국) : 작은 나라를 얻고
小國以下大國(소국이하대국) :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향해 내려감으로
則取大國(즉취대국) : 큰 나라를 얻습니다
故或下以取(고혹하이취) : 그러므로 한 쪽은 스스로를 아래에 있음으로 남을 얻고
或下而取(혹하이취) : 다른 한 쪽은 스스로 내려감으로 남을 얻는다
大國不過欲兼畜人(대국불과욕겸축인) : 큰 나라가 오로지 바랄 것은 사람을 모아 보양하는 것
小國不過欲入事人(소국불과욕입사인) : 작은 나라가 오로지 바랄 것은 들어가 남을 섬기는 것
夫兩者各得其所欲(부량자각득기소욕) : 큰 나라 작은 나라가 자기들 바라는 바를 얻으려면
大者宜爲下(대자의위하) : 큰 나라가 먼저 스스로를 낮추어야 할 것이다
61장 낮은 곳에 머무르는 삶 큰 나라는 모든 물줄기가 흘러들어오는 낮은 땅과 같다. 하늘 아래 만물이 고여 있는 저수지이고 세상의 여인이다. 여성이 언제나 남성을 이기는 것은 고요함으로 스스로를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큰 나라가 작은 나라 앞에 스스로를 낮추면 우정과 신뢰를 얻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앞에 스스로를 낮추면 큰 나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 자신을 굽혀 이기기도 하고 낮은 곳에 머물러 남을 얻기도 한다. |
우리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정상을 차지해야 한다고 배웠다. 세상은 우리에게 ‘승자가 되라.’ ‘승자를 존경하라.’ ‘돋보이는 사람이 되라.’ ‘최고가 되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보통 돈을 가장 많이 벌고,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채 공포와 복종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이렇게 잘난 체하며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존경받을 가치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이 장은 우리에게 승자에 대한 믿음들을 다시 평가해 보라고 요구한다.
넓은 바다를 보라. 바다는 지구 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다. 그 힘은 다른 물줄기보다 낮은 곳에 머물기 때문에 가능하다. 모든 강물들이 바다와 하나가 되고자 흘러든다. 그래서 바다는 온 세상이 모여든 저수지가 된다. 노자는 [도덕경]의 전체에 걸쳐 이것을 “위대한 어머니‘ 또는 ”세상의 여인“이라고 부른다. 여성적인 음의 에너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고요히 그리고 조용히 머물러서 결국에는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남성적 양의 기운을 압도한다.
노자는 이 장에서 사람들을 이끌 때 낮은 곳에 머무름으로써 얻는 유익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큰 나라든 작은 나라든 모두 넓은 바다와 같아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노자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을 관찰한 결과, 그곳에 평화와 조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도를 따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정복해야 할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에고임을 깨달은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깨달음을 국가와 정치 지도자들을 향해 말하고 있지만, 국가는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위대한 성인이 전하는 지혜를 실천하는 개인이 많아지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결정적 다수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생각하는 방식에서 변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한다. 이를 위해 180도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지 모른다. 에고 중심의 사고를 줄인다면 세상은 노자의 이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강함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
겸손함, 고요함, 그리고 낮은 자리에 머무는 태도에서 힘을 느낄 수 있는가? 무도의 세계에서 최고의 고수는 적은 힘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폭력을 보라. 권좌에 눈이 멀었던 사람은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지만 나중에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개인 삶도 마찬가지이다.
눈에 띄지 않고 고요히 머물면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로 흘러와서 우정과 신뢰로 어우러질 것이다. 이 여성적인 음의 존재 방식 안에 머물면 당신은 강한 기운을 내뿜어 사람들을 끌어들일 것이다. 그중에는 변화에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넓은 바다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다가오도록 낮은 곳에 머물라. 머물기로 한 그 자리가 어디든 간에 그 자리는 큰 자리가 될 것이다.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도 인류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본받아라.
고요함과 음의 기운으로 낮은 곳에 머무는 삶을 산 본보기는 도처에 있다. 예수, 부처, 무함마드, 조로아스터, 성 프란체스코, 간디, 테레사 수녀 등은 우리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고 있다. 그들은 권력과는 정반대의 방법을 통해 인류 역사의 행로를 바꾸어 놓았으며 세월이 지나도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당신도 이들과 같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저 낮고 변함없는 바다처럼 자신의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가능하다. 당신을 누르고, 당신 위에 서고자 발부 둥치는 사람들도 결국에는 고요함과 겸손에 무너지고 당신에게로 흘러 들어온다.
제61장은 제28장에서 수컷[雄]의 행동방식보다 암컷[雌]의 행동방식을 권하는 내용과, 제66장에서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아래에 처하기를 잘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다.[江海 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也 故能爲百谷王]”는 이론을 함께 논의하고 있다. 이는 여성성에 대한 강조가 君主의 處世는 물론 國家間의 관계에까지 적용, 확대되는 일관된 사상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은 《論語》의 사상과는 분명하게 대비된다. “子貢이 말했다. ‘〈폭군〉 紂의 악행이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下流에 처하는 것을 싫어하니, 천하의 온갖 더러운 것이 모두 거기로 흘러들기 때문이다.’[子貢曰 紂之不善 不如是之甚也 是以君子惡居下流 天下之惡皆歸焉]” 이는 下流에 대한 전혀 상이한 생각이다.
또한 제61장은 자연 세계 속의 性的 측면, 즉 생식의 조건이 되는 性 구분에 관한 내용을 포함한다. 性交時에 암컷은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이 때문에 잉태하고 생산하는 결과에 도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 또한 아래쪽으로 흐르는데 큰 강과 바다는 낮은 데에 처하여 모든 물이 모여든다. 더 나아가 가장 낮은 지점에 도달하면 물의 운동은 멈추는데 이는 고요함[靜]과 연결된다.
또한 이 장에서는 小國과 大國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나오는데, 이는 《孟子》 〈梁惠王 下〉의 내용과 견주어볼 수 있다. “대국을 다스리는 자이면서 소국을 섬기는 자는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자이고, 소국을 다스리는 자이면서 대국을 섬기는 자는 하늘〈의 이치를〉 敬畏하는 자이다.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자는 천하를 보전할 수 있고, 하늘〈의 이치를〉 경외하는 사람은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保天下 畏天者保其國]” 孟子가 天에 대한 태도로 小國과 大國의 자세를 구분한다면, 《老子》는 大國이 아래에 처한다는 원리로부터 관계의 축을 이끌어간다.
큰 나라는 〈강과 바다처럼〉 아래쪽에 처하니
강과 바다가 큰 곳을 차지하고 아래쪽에 처해 있기 때문에 모든 시냇물이 그것을 향해 흘러들고, 큰 나라가 큰 곳을 차지하고 아래쪽에 처하면 천하 사람들이 그에게로 흘러들 것이다.
그래서 “큰 나라는 아래쪽에 처한다.”고 했다.
천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요,
천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나는 곳이다.
천하 사람들이 〈돌아오는〉 암컷이다.
〈암컷은〉 고요히 가만히 있으면서 구하지 않는데 만물이 스스로 그에게 돌아온다.
암컷은 늘 고요함으로 수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 아래가 된다.
〈암컷의〉 고요함으로써 하기 때문에 아래가 될 수 있다. ‘牝’이란 암컷이다.
수컷은 조급히 움직이고 탐욕스러운데 암컷은 늘 고요함으로 하는 까닭에 능히 수컷을 이길 수가 있다. 〈암컷의〉 고요함으로 다시 아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 아래에 처하면(자신을 낮추면)
‘큰 나라로서 아래에 처한다.’는 말은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 아래에 처한다(낮춘다)’는 말과 같다.
작은 나라를 취하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게〉 의지한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 아래에 처하면(낮추면) 큰 나라에게 취해지니.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거두어준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는 아래에 처하여 취하고 어떤 경우는 아래에 처하여 취해지는데
오로지 낮춤의 〈덕을〉 닦은 후에야 비로소 각자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큰 나라는 다른 사람들을 다 거느리기를 바랄 뿐이고, 작은 나라는 다른 사람 밑에 들어가 섬기기를 바랄 뿐이다.
〈큰 나라와 작은 나라〉 둘이 각자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큰 나라는 마땅히 아래에 처해야 한다.
작은 나라는 아래에 처하는 〈미덕을〉 닦아 스스로를 보전할 뿐 천하가 돌아오게 할 수는 없다.
큰 나라가 아래에 처하는 〈미덕을〉 닦으면 천하가 돌아온다.
그래서 “각자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큰 나라는 마땅히 아래에 처해야 한다.”라고 했다.
62.
道者萬物之奧(도자만물지오) : 도는 모두의 아늑한 곳
善人之寶(선인지보) : 선한 사람에게 보배요
不善人之所保(불선인지소보) :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은신처이다
美言可以市(미언가이시) : 아름다운 말은 널리 팔리고
尊行可以加人(존행가이가인) : 존경스런 행위는 남에게 뭔가를 더해 줄 수도 있다
人之不善(인지불선) : 사람 사이의 선하지 않다고 하는 것도
何棄之有(하기지유) : 어찌 버릴 것이 있겠는가
故立天下(고립천하) : 그러므로 천자를 옹립하고
置三公(치삼공) : 삼공을 임명할 때
雖有拱壁以先駟馬(수유공벽이선사마) : 네 필 말이 끄는 수레를 앞세우고 아름드리 옥을 바치나
不如坐進此道(불여좌진차도) : 오히려 무릎을 끊고 이 도를 바치는 것이 더 좋다
古之所以貴此道者何(고지소이귀차도자하) : 옛사람이 이 도를 귀하게 여긴 까닭이 무엇인가
不曰以求得(불왈이구득) : 도로써 구하면 얻고
有罪以免邪(유죄이면사) : 죄가 있어도 면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故爲天下貴(고위천하귀) : 그러므로 세상이 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62장 「道」라는 보물창고 안의 삶 「道」는 보물창고이자 진정한 본성이며 만물의 근원이다. 「道」는 선한 삶의 보배이며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은신처가 된다. 악한 사람이라도 내치지 마라. 좋은 말로 그를 깨우치고 행동으로 그를 일으키며 어진 마음으로 그의 무례에 대응하라. 악한 사람을 내치지 말고 다만 악함만을 내쳐라. 그러므로 새로운 지도자를 뽑았을 때 부의 지식으로 그를 돕기보다는 원칙을 되새기도록 돕고 도를 받치는 것이 낫다. 어찌하여 옛사람은 「道」를 이리도 귀하게 여겼을까? 모든 선의 근원이요. 모든 악을 치료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道」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 |
만물의 신성한 근원과 어울릴 수 있는 장소에 다가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곳에서 우리는 선한 사람에게는 보배요.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용서받을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 위대한 통치자와 현명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기도할 것이고, 우리는 사람을 내치지 않고 악함만을 내쫓을 수 있는 비밀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악을 치료하는 방법은 물론 선의 원천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장은 의식 있는 다른 모든 존재처럼 나 역시도 내면 깊은 곳을 다가갈 수 있는 등불이 되었고 세상 어두운 면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도록 해주었다. 또한 나도 모르는 나 안의 도가 있으며, 우주의 한 존재로서 내 역할을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증오, 시기, 질투 등을 짊어진 사람들을 살펴봄으로서 만물을 대하는 편파적인 방식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노자의 말처럼 악하고 나쁜 사람은 없다. 그저 「道」의 가르침을 거스르며 사는 사람이 악하게 보일 뿐이다.
「道」와 조화를 이루어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써 중심을 지켜라. 도의 근원은 어느 누구도 헤치지 않고, 가로막지 않으며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道」는 오직 생명을 줄 뿐이다. 부정적인 기운이 느껴지거든 신성한 공간을 찾아 헤매는 순수한 사랑과 어짊 쪽으로 시선을 바꿔라. 부정적인 기운은 강력하다. 그것은 근원으로 돌아가 영적 순환 속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멀어지게 한다.
악함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 차이를 깨달을 수 있도록 안내하라.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 것에 감사함을 지녀라. 당신은 물질 세상에서의 만족과 도의 풍요로움에 대한 차이를 편안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도의 보물창고에 이르는 지도를 그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지아푸 팽과 제인 잉그뤼쉬가 번역한 [도덕경]에서 이 62장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왜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도를 좋아하는가?
찾는 것을 얻고 저지른 죄를 용서받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까닭에 도는 우주의 가장 위대한 보배이다.
당신에게 열려있는 보물창고의 문을 열어라.
언제나 열려 있는 「道」, 그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가라. 또한 자신을 도의 신성한 창조물로 바라보라. 지금껏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라도, 보배로 가득한 도 공간 안에서는 결코 부정할 수 없음을 이해하라. 내부의 신성한 온기에 몸을 맡길 수 있는 편안한 집을 떠올려보라. 모든 불안과 공포를 뒤로한 채 그 문으로 들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하라.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는 명상 기술을 이용해서 이 집을 언제든 원할 때마다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피난처로 삼아라. 그것은 신성함 그 자체이며, 언제라도 당신의 성소가 되어줄 것이다.
악의 있고 비난받을 만한 것들을 보았을 때
용서하고 비난하지 않는 연습을 하라.
악한 행동과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을 분리함으로서 악하게 보이는 사람들을 대하는 노자의 조언을 받아들여라. 그들은 에고가 삶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을 뿐, 그들도 역시 도의 신성한 피조물임을 기억하라. 비열함, 중독증, 해로운 행위 등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려라.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서 벗어나 그냥 거기에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라. 그들 안에서 도가 펼쳐지는 것을 보라. 일시적으로 자극받았을 뿐인 순수한 아이들의 이미지로 마음속에 그려라. 가슴으로 악한 행동을 용서하고, 사랑의 마음을 담아 눈앞에 서 있는 그 아이들을 끌어안는 노력을 하라.
노자는 자기 자신도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행동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을 모두 던져버려라. 고통이 느껴지더라도 그대로 놓아두고, 자신을 용서하라. 자신을 포옹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자신이 밝게 빛나는 존재임을 알아차려라. 도에 어울리는 행동으로 자신을 끌어 올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어진 마음을 베풀어라. 이것이 이 장의 가르침을 당신 삶에 적용하는 방법이며 진정으로 모든 악을 치료하는 길이다.
이 장에서 말하는 ‘이것’은 王弼과 여러 편집자들이 그들의 주석에서 말하고 있듯이 道이다. 그럼에도 제62장을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셋째 부분은 군주에게 寶玉이나 말[馬]과 같은 통상적인 선물을 제공하는 것보다 도의 가르침을 선물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선물 증여는 훌륭한 상담보다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古典’ 중국 문헌에서 흔히 보이듯이 제62장은 그 다음에 ‘古代(antiquity)’를 賢者가 지배한 모범사회로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과거 군주들의 위대한 선례를 따르도록 조언하고 있다.
첫 번째와 특히 두 번째 부분은 ‘아름다운 말’, ‘훌륭한 행위’ 그리고 심지어 ‘좋은 사람’조차 반드시 善하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아름다운 말은 어떤 것을 팔 때 쓰이는 것이며, 또한 공손한 행동은 완전히 알랑거림일 수 있다. ‘善(goodness)’이란 전략적으로 사용될 수 있고 또한 그 반대의 것으로 변할 수도 있다. 이는 똑같이 그 반대도 참일 수 있다는 말이다. 말도 잘하지 못하고 행동도 미숙한 사람이 가장 나쁜 종류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읽다 보면 첫째와 둘째 부분은 儒者와 그들의 예의 바른 행동에 대한 주장을 암묵적으로 비판하는 것일 수 있다. 선하고 공손하게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표면적이거나 또는 심지어 더 나쁜 기만적인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道는 만물을 덮어 가려줄 수 있으니
‘奧’는 ‘가려준다’는 뜻이니, 덮어 가려줄 수 있다는 말이다.
선한 사람이 보배로 여기는 것이고,
보배로 쓰임을 삼는다는 뜻이다.
선하지 않은 사람이 지키는 것이다.
지킴으로써 온전케 한다는 뜻이다.
〈도에 대해〉 멋지게 말하면 시장에서 장사할 수 있고, 〈도를〉 받들어 행하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도는 앞서지 않는 것이 없으니 만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이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비록 진귀한 보옥으로 치장한 말이 있더라도 그것에 짝할 수 없다.
멋지게 말하면 뭇 재화를 파는 상인의 〈마음도〉 빼앗을 수 있으니 그래서 “멋지게 말하면 시장에서 장사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을 받들어 행하면 천리의 밖에서도 응하니 그래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선하지 않은 사람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선하지 않은 사람도 마땅히 도를 보존하여 쫓겨남을 면하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天子를 세우고 三公을 두는데
존귀함으로 도를 행한다는 말이다.
비록 보석을 끌어안고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앞세워 바치더라도 가만히 앉아 이 道를 進上하는 것만 못하다.
이 道는 위에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자를 세우고 삼공을 두어 그 지위를 존숭하고 그 사람을 중시하는 것이 도를 행하는 것임을 말한 것이다.
만물 가운데 어떤 것도 이보다 귀한 것은 없는 까닭에 비록 寶玉을 끌어안고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를 앞세워 진상하더라도 가만히 앉아서 이 도를 진상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옛날 이 도를 귀하게 여긴 까닭은 무엇인가? 구하면 〈이 도로〉 얻을 것이요 죄가 있어도 〈이 도로〉 사면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천하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로써 구하면 구하게 될 것이요, 이로써 면하면 면하게 될 것이니, 베풀지 못할 것이 없는 까닭에 천하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63.
爲無爲(위무위) : 억지로 함이 없는 함을 실천하고
事無事(사무사) : 일함이 없는 일을 실행하고
味無味(미무미) : 맛없는 맛을 맛보십시오
大小多少(대소다소) : 큰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고 많은 것을 적은 것으로 생각하라
報怨以德(보원이덕) : 원한을 덕으로 갚으시오
圖難於其易(도난어기이) : 어려운 일을 하려면 그것이 쉬울 때 해야하고
爲大於其細(위대어기세) : 큰 일을 하려면 그것이 작을 때 해야 한다
天下難事(천하난사) : 세상세서 제일 어려운 일도
必作於易(필작어이) :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天下大事(천하대사) : 세상에서 제일 큰 일도
必作於細(필작어세) :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是以聖人終不爲大(시이성인종불위대) : 그러므로 성인은 끝에 가서 큰 일을 하지 않는다
故能成其大(고능성기대) : 그래서 큰 일을 이루는 것이다
夫輕諾必寡信(부경낙필과신) : 무릇 가볍게 수락하는 사람은 반드시 믿음성이 없는 법이고
多易必多難(다이필다난) : 너무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려운 일을 맞게 마련이다
是以聖人猶難之(시이성인유난지) : 그러므로 성인이라도 일을 어려운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故終無難矣(고종무난의) : 그러기 때문에 끝에 가서 어려운 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63장 어려움 없는 삶 힘없이 힘을 실천하고 일 함 없이 일하며 맛없이 맛보라. 작은 것을 크게 여기고 작은 것을 많게 보며 원한을 덕으로 갚으라. 복잡한 속에서 단순함을 보고 사소함 속에서 위대함을 이루라. 어려운 일을 하려거든 그 일이 쉬울 때 하고 큰일을 하려거든 그 일이 작을 때 하라. 성인은 큰일을 벌이지 않기에 결국 큰일을 해 낸다. 너무 쉽게 대하면 신뢰를 얻지 못한다. 성인은 언제나 모든 일을 어렵게 대하기에 결코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
이 장은 짧은 문장 안에 함축적인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노자의 조언을 받아들인다면 삶에서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여러 날이 아니라 지금, 여러 달이 아니라 현재, 전 생애가 아니라 매 순간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언제나 우리가 가진 전부는 바로 지금뿐이다. 오직 그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사건을 확대하거나 결코 일어나지 않을 미래를 걱정하는 버릇을 버려야만 한다. 세상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들이며 삶을 단순하게 유지하면 혼란은 사라진다. “복잡함 속에서 단순함을 보고... 큰일을 하려거든 그 일이 작을 때 하라.”
사실 [도덕경] 81장을 블로그에 옮기는 작업은 어떻게 보면 지겹고 대단히 두려운 작업이다. 더군다나 독수리 타법으로 읽고, 음미하고, 깨닫는 전 과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려운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쉽게 “단순함을 보고”, “그 일이 아직 쉬울 때 어려운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아침에 명상을 한 후, 하나의 장에 몰두했고 글이 저절로 내 가슴을 지나 키보드에 옮겨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모든 일을 어렵게 대하기에 결코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이 63장의 모순적인 끝맺음을 깨우친 듯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지금하며, 항상 현재 순간에서 살아간다면 어려움은 없다. 이것이 이 장에 담긴 지혜이다. 삶에 있어 골칫거리라 고 여기는 것들에 대한 당신의 시선을 점검하라. 모든 일을 ‘그저 할 만하다’ 가 아니라 ‘쉽고 작다’ 로 받아들이도록 생각을 전환할 수 있겠는가? 끝마치려면 수년이 걸리는 학습 과정을 어떻게 따라 갈 수 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미래에서 헤매거나 현재의 순간을 걱정거리로 삼지 말아야 한다. 아이를 출산하는 길고 어려운 과정을 어떻게 견뎌 내는가? 시시각각 조금씩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지금의 이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복잡하다고
말하는 것에 숨은 간결함을 찾아라.
미래를 구성하는 모든 내일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필요하다고 믿는 것은 정신 나간 일이다.” 여기에 생각을 보태면 “ 미래가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만족하거나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정신 이상이다.” 지금 갖고 있는 것을 보라. 그리고 당신은 바로 이 순간에도 충분히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지금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지라도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을 깨달아라. 이것이 간결함이다.
작게 생각하라
‘크게 생각한다.’는 개념을 ‘작게 생각하고 크게 이룬다.’로 바꿔라. 너무 거대해 보여서 시작할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겁이 나는 일이 있다면 천천히 살펴보라. 오늘 당신의 소중한 현재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전체 그림 같은 건 깡그리 무시하라. 당신이 작은 일에 착수하면 그것이 크게 확장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역설적이게도 큰 결과를 이룰 것이다.
첫째 부분은 자기 설명적이다. 즉 無爲의 기술을 찬양하고 있다. 무위로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처음 단계에서 일어나는 발전을 쥘 수 있는 능력을 갖고서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 군주가 침착하되 유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만물을 취한다면 그는 역기능의 미소한 징후도 알아챌 수 있고, 따라서 그다지 수고스럽지 않게 만물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한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과 유사하다.
統治의 기술(the art of government)이란 豫防의 기술(the art of prevention)이다. 누구든 건강하게 살려는 사람은 몸에 해로운 모든 것을 피하고, 질환의 징후가 일어날 때 바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질환이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을 때 그것을 예방하거나 막는 것이 훨씬 쉽고 더욱 효과적이다.
이와 비슷하게 국가의 질서는 무질서를 처음에 예방하면 쉽사리 유지될 수 있다. 오로지 조금만 해야 하는 사람들 또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활동을 해서 악화된 위기를 처리해야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낫고 효과적인 군주가 될 것이다.
오로지 아주 오래 기다린 사람들, 말하자면 정치 신참자들은 더 많은 것을 행동에 옮겨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질병이 마지막 단계에까지 이른 환자를 처치해야 하는 의사와 같다. 가장 훌륭한 의사는 가장 훌륭한 통치자와 꼭 같이 해야 할 것이 거의 없다. 그들의 전문지식은 사물을 진지하게 다루는 능력 그리고 이 때문에 최소한의 수고로 그것들을 다룰 줄 아는 능력에 있다.
無爲를 행하고 無事를 일삼고 無味를 맛으로 삼으며,
무위를 거처로 삼고 말하지 않음을 가르침으로 삼고 고요하고 담담함을 맛으로 삼는 것이 다스림의 극치이다.
크든 작든 많든 적든 〈천하가 원하는 대로〉 德으로 원한을 갚으며,
작은 원망은 갚을 만한 것이 못 되고, 큰 원망은 천하 사람들이 죽이고자 하는 것이니 천하 사람들이 같이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 덕이다.
쉬운 데서 어려운 것을 도모하고 작은 데서 큰일을 행한다.
천하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천하의 큰일은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성인은 끝내 큰일을 행하지 않으니 그 때문에 그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
무릇 가벼이 승낙함은 반드시 믿음이 적고 매우 쉬운 일은 반드시 매우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성인은 오히려 그것을 어렵게 여긴다.
성인의 재주를 갖고서도 오히려 작고 쉬운 것을 어렵게 여기는데, 하물며 성인의 재주가 아닌데도 이를 소홀히 하고자 하겠는가? 그래서 “오히려 그것을 어렵게 여긴다.”고 했다.
그 때문에 끝내 어려운 일이 없게 된다.
작고 쉬운 일을 어렵게 여기기 때문에 끝내 어렵고 큰일이 없게 되는 것이다.
64.
其安易持(기안이지) : 안정된 상태에 있을 때 유지하기 쉽고
其未兆易謀(기미조이모) : 아직 기미가 나타나기 전에 도모하기 쉽고
其脆易泮(기취이반) : 취약할 때 부서지기 쉽고
其微易散(기미이산) : 미세할 때 흩어지기 쉽다
爲之於未有(위지어미유) : 아직 일이 생기기 전에 처리하고
治之於未亂(치지어미란) : 혼란해지기 전에 다스려야 한다
合抱之木(합포지목) : 아름드리 나무도
生於毫末(생어호말) : 털끝 같은 싹에서 나오고
九層之臺(구층지대) : 구층 누대도
起於累土(기어루토) : 한 줌 흙이 쌓여 올라가고
千里之行(천리지행) : 천릿길도
始於足下(시어족하) : 발 밑에서 시작된다
爲者敗之(위자패지) : 억지로 하는 자 실패하게 마련이고
執者失之(집자실지) : 집착하는 자 잃을 수 밖에 없다
是以聖人無爲故無敗(시이성인무위고무패) : 따라서 성인은 하지 않음으로 실패하는 일이 없고
無執故無失(무집고무실) : 집착하지 않음으로 잃는 일이 없다
民之從事(민지종사) : 사람이 일을 하면
常於幾成而敗之(상어기성이패지) : 언제나 거의 성공할 즈음에 실패하고 만다
愼終如始(신종여시) : 시작할 때처럼 마지막에도 신중하면
則無敗事(즉무패사) :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是以聖人欲不欲(시이성인욕불욕) : 그러므로 성인은 욕심을 없애려는 욕심만이 있고
不貴難得之貨(불귀난득지화) : 귀하다고 하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고
學不學(학불학) : 배우지 않음을 배우고
復衆人之所過(복중인지소과) : 많은 사람이 지나쳐 버리는 것으로 돌아갑니다
以輔萬物之自然(이보만물지자연) : 온갖 것의 본래적인 자연스러움을 도와 줄 뿐
而不敢爲(이불감위) : 억지로 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64장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삶 평온할 때 다루기가 쉽고 아직 분명히 나타나지 않을 때 막기가 쉽다. 약한 것이 잘 부서지고 작은 것이 잘 흩어진다. 일이 생기기 전에 행동하고 무질서해지기 전에 다스려라. 기억하라. 아름드리나무도 작은 씨앗에서 자라고 아홉 층 건물도 한 줌 흙에서 쌓여 올라가며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억지로 하면 실패하기 마련이고 얻으려고 하면 잃을 수밖에 없다. 성인은 억지로 하지 않아 실패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지 않아 잃지 않는다. 사람들은 보통 성공의 직전에서 실패하고 만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도 처음처럼 신중하면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성인은 얻기 어려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값비싼 것을 모으지 않으며 생각이 고정되지 않는다. 그저 만물이 제 본성을 찾도록 도울 뿐 함부로 끌고 다니지 않는다. |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는 [도덕경]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말이다. 이 구절이 그토록 자주 인용되는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라며 다독이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씨앗을 심고 가꾸면 숲으로 자란다. 마라톤도 첫 한 걸음을 내딛는 데서 시작한다.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괴테가 이 고대의 가르침을 운율이 있는 언어 속에 아주 멋지게 담았다.
그저 몰두하라. 그러면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그저 시작하라. 그러면 어느새 이루어질 것이다.
64장의 정수는 바로 이것이다. 모든 목표는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라. 이러한 생각은 너무 어려워서 엄두가 안 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된다.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하면 당신 앞에 놓인 문제들의 어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성인은 얻기 어려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큰 문제를 나눠서 작은 단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도를 따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꾸짖거나 지시를 내리거나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려 하지 않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혼란을 일으키기 전에 다스리는 방법을 찾는다. 노자는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이른다.
가족, 공동체, 국가의 문제는 물론이고 자기 앞에 놓인 어려운 난관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보라. 문제의 원인이 되는 사고방식을 미련 없이 버리고, 일이 커지기 전에 다스림으로써 그것들을 얼마나 쉽게 다스릴 수 있을지 느껴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명함에 이르기 위해 거치는 세 가지 단계를 살펴보자
1. 고통을 통과하는 단계
이 단계는 “얻기 어려운 것을 귀하게 여김”으로 인해 삶의 문제들이 주체할 수 없이 커져서 비참한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될 것처럼 보이는 시기다. 당신은 질병, 사고, 중독, 경제적 손실, 자녀들의 반항 그리고 이혼과 같은 커다란 문제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에 도달하게 되고, 그것들 또한 삶의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도의 길이 아니며, 성인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도 아니다.
2. 현재의 순간에 존재하는 단계
여기서 당신은 위기 상황이 터졌을 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도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지금, 이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나는 이 불행 속에 나를 위한 선물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찾는데 집중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도에 중심을 둔 것이기는 하지만 노자가 이 장을 통해 당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3. 커다란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빠져나오는 단계
이것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움직이고, 다가오는 혼란을 감지해서 사전에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야말로 도의 방식이다. 노자는 “작은 것이 잘 흩어진다.”고 말한다. 당신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관찰자가 된다. 통찰을 가지고 다툼을 예견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음속으로 이를 끝까지 따라간다. 그래서 결국 그 부정적인 기운을 가라앉힌다. 당신의 생각이 다툼보다 앞서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전에 문제를 일으키던 방식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따라서 도와 조화를 이룬다. 당신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예방한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는 구절을
실천하면서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일깨워라.
최종 결과는 잊어라. 가고 싶었던 곳에 도달하면 어느새 새로운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매 단계에서 모든 것을 즐겨라. 모든 목표는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그저 한 번에 한 가지씩 하라. 술을 끊겠다고 결심을 하면 그 계획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 목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지키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된다. 우리 미래를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오늘이다. ‘그저 순간순간, 하루하루씩 술을 마시지 않으며 살아갈 것이다.’라고 계획하고 실천하면 된다. 내 삶의 매 순간 도가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측의 달인이 되라.
삶에서 여러 문제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그것들을 완벽하게 예방하겠다고 마음먹어라. 예를 들어, 자신의 건강을 예측하라. 어려움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미리 예방하라. 균형 있게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삶의 방식으로 택하라. 몸의 독소를 제거하는 보조 식품을 복용하고, 장을 깨끗이 하고, 채소와 과일을 먹고, 육류 섭취는 줄이고 운동을 하고 명상도 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문제가 벌어지기 전에 그 문제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작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예측하고, 큰 문제가 벌어지기 전에 도와 조화를 이루어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다.
처음 세 부분은 분명 앞의 제63장을 잇고 있다. 위험스러운 현상이나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예방과 초기의 반동이라는 점을 다시 지적하고 있다.
셋째 부분은 이와 같은 格率과 유사하게 이해되는 세 가지 대중적인 格言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공통적이면서도 다소 다른 듯한 점이 있다. 이른바 아주 큰일을 할 때조차 작은 걸음에서 시작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이는 초기의 징후를 잘 살피라는 경고라기보다는, 처음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때조차도 큰일에 착수하라고 고무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64장의 맥락에서 이러한 ‘대중적인’ 해석은 의도되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넷째 부분이 한 번 더 단언하고 있듯이 적극적 實踐主義와 거대 사업을 벌이는 것은 정말로 도가의 ‘無爲’의 전략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마지막 부분은, ‘처음’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순간에 ‘끝’에 대해서도 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진술하고 있다. 서민들은 종종 이러한 조심성이 없으며 오로지 성인만이 ‘끝내기의 大家(a master of endings)’라고 말하고 있다.
어떠한 행위에 있어서도 適時性이 결정적이다. 나쁜 일이 보다 커지는 것을 반격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일찍 조치를 취하는 것만큼이나 적절한 때에 과업을 완수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물을 다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행동을 예방하고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행동해야만 한다면 적절한 때에 멈추기에 충분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전쟁 상황에서 처음의 성공 후에 승리감에 도취한 상태에서 계속 싸우는 것은 나중에 치명적인 패배로 이끌 수 있다. 모든 행동들은 나름의 적절한 시작과 끝이 있다. 만약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놓친다면 도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의 운행에 대해서도 또한 참이다. 계절이란 나름의 표준적인 길이를 갖는데 이것이 어긋나게 될 때 끔찍한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겨울의 酷寒이 봄까지 지속되면 그해의 곡물 수확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
적시성은 올바른 끝맺음만큼이나 매우 알맞은 시작에 의존한다. 순환하는 시간 진로에서 어떤 것의 끝맺음은 또한 새로운 어떤 것의 시작이다. 만약 사람이 그 끝을 놓치면 그 다음의 시작을 놓치는 것이다. 알맞은 끝맺음과 시작은 서로 의존한다.
편안할 때 유지하기 쉽고 아직 조짐이 드러나지 않은 때에 도모하기 쉬우며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보존될 때에 망하는 것을 잊지 않으니, 이와 같은 일들은 아무런 공이 없는 형세에서 도모하는 것이다. 그래서 “쉽다.”고 했다.
무를 때 쪼개기 쉽고 작을 때 흐트러뜨리기 쉽기 때문에,
비록 無를 잃고 有로 들어갔으나 그것이 아직 작고 무른 까닭에 커다란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니 그래서 쉬운 것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마침을 신중히 함을 말한다.
없다고 해서 잡아두지 않아서는 안 되고 작다고 해서 흐트러뜨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
없다고 해서 잡아두지 않으면 있음[有]이 생겨나게 되고, 작다고 해서 흐트러뜨리지 않으면 큰일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므로 시작할 때 재앙을 걱정하듯 마칠 때의 우환을 걱정한다면 실패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아직 있지 않을 때 실행하고
편안할 때와 조짐이 드러나지 않았을 때를 말한다.
아직 어지럽지 않을 때 다스린다.
작을 때와 무를 때를 말한다.
한 아름 되는 나무는 털끝만 한 〈작은 싹에서〉 자라나며 아홉 층이나 되는 누대는 바닥부터 쌓은 흙에서 세워지며 천 리의 먼 길은 발 아래 〈한 걸음에서〉 시작한다.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하는 자는 실패하고 〈形名으로〉 잡으려는 자는 잃는다.
마땅히 마침을 신중히 하여 작을 때에 제거하고 작은 것을 신중히 하여 어지러운 것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억지로 베풀어서 다스리고 形名으로 잡는다면 도리어 일의 근원을 낳아 교묘하고 편벽된 일이 더욱 일어난다. 그래서 실패하고 잃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억지로〉 함이 없으므로 패함이 없고, 잡음이 없으므로 잃음이 없다.
백성이 일을 할 때는 항상 일이 다 될 때쯤 잘못되게 마련이다.
〈잘못되는 것은〉 그 마침을 신중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을 신중히 하기를 시작할 때처럼 하면 실패하는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바라지 않기를 바라고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좋아하고 바라는 것은 비록 작아도 다투고 숭상하는 〈풍조가〉 일어나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는 비록 적어도 탐욕과 도둑이 일어나게 한다는 뜻이다.
배우지 않기를 배우고 뭇사람들이 지나치는 것을 돌이키는 것이니,
배우지 않았는데 능한 것은 자연이요, 〈이러한〉 배우지 않음을 넘어서는 것은 지나침이다.
그래서 ‘배우지 않음’을 배우고 뭇사람들이 지나치는 것을 돌이키는 것이다.
능히 만물의 자연스러움을 도와 감히 〈자연스러움에 거슬러 억지로〉 하지 않는다.
65.
古之善爲道者(고지선위도자) : 옛날 도를 잘 실천하던 사람은
非以明民(비이명민) : 사람을 총명하게 하려 하지 않고
將以愚之(장이우지) : 오히려 어리석게 만들었다
民之難治(민지난치) : 사람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은
以其智多(이기지다) : 아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故以智治國(고이지치국) : 그러므로 아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國之賊(국지적) : 나라에 해가 되고
不以智治國(불이지치국) : 앎이 없이 다스리는 것이
國之福(국지복) : 나라에 복이 된다
知此兩者亦稽式(지차량자역계식) : 이 두 가지를 깨닫은 것이 하늘의 법도를 깨닫는 것이다
常知稽式(상지계식) : 언제나 하늘의 법도를 깨닫고 있음을
是謂玄德(시위현덕) : 그윽한 덕이라 한다
玄德深矣(현덕심의) : 그윽한 덕은 너무나도 깊고
遠矣(원의) : 멀어서
與物反矣(여물반의) : 사물의 이치에 반하는 것 같지만
然後乃至大順(연후내지대순) : 결국 도에 크게 따름이다
65장 우직한 삶 옛날, 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우직했고 백성들과 잘 어울렸다. 그들은 앞으로 나서서 빛나지 않았고 총명함으로 다스리지 않았기에 나라에 복이 있었다.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다스리기 어렵고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는 각자 자기들만의 길을 찾는다. 속임 수 없이 다스리는 것이 그 나라에 복이 된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명확한 것이다. 평범한 삶에 만족하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본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 줄 것이다. |
지금 당신이 나라를 다스리거나 또는 공동체를 이끄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면, 이 장을 가슴속에 담으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면, 당신 개인의 삶에서 이 장을 들여다보기 바란다. 모든 삶 속에는 다른 사람을 이끄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람을 감독하고 지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어떤 규칙을 강요하거나 자신의 지성과 능력으로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힘 있는 사람은 교활하지 않고, “나서서 빛나지” 않으며 “총명함으로 다스리거나” 공포를 심어주지도 않는다. 노자의 말처럼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는 각자 자기들만의 길을 찾는다.” 달리 말하면 유능한 지도자는 사람들을 그들만의 본성으로 이끈다. 노자는 모르고 있음을 깨닫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당신의 임무라고 말한다. 그들 스스로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면, 결코 자신들이 품고 있는 도의 본성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에고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도록 방해할 뿐이다.
우월함이나 지적인 재주를 자랑하지 않음으로써 이 장이 주는 가르침을 실천하라. 사람들에게 당신이 다른 사람을 위한 최선의 방법은 고사하고 스스로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조차 전혀 모른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도의 방식에 따라 사는 법을 보여주라. 당신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려라. 당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일을 통제할 능력이 없음을 솔직하게 들어내 보여라. 겸허하고, 인생의 순한 속에서 평화롭게 살며, 우직하게 머무는 자연인의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줘라.
리더십을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에고를 단념하는 사람만 이 도의 기운과 하나 을 누리고 우직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지도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임무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 안에서 모든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 놀라운 모순을 전하면서 노자가 심술궂게 미소 짓고 있는 듯하다. 이 새로운 사고와 존재 방식을 통해 당신이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과 어우러져라.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하라.
‘모른다.’는 말은 강함을 상징한다. 그 안에는 약함의 흔적이 없다. 그러므로 거리낌 없이 “모른다.‘고 말하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말하라. 그러면 도가 그들의 고귀한 자아를 인도할 것이다. 자연은 억지로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소리 없이 보이지 않게 항상 그 자리에 존재한다. 당신도 가능한 다른 사람에게 당신 자신과 당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마라. 다만 어리거나 미숙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현명한 대비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물론이고 어느 누구도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소리 없는 운명은 항상 작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개인적인 의견과는 관계없이 모든 삶에는 불행과 행운이 함께 찾아든다.
단순하게, 단순하게 사는 연습을 하라.
당신이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모델이 되라. 다양한 각도에서 상황을 따지면서 눈에 보이는 분명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처음의 직관을 믿어라. 가장 단순하고 의지의 여지가 적은 길을 택하라. 엉뚱한 곳에 힘 빼지 마라. 당신에게 주어진 많은 선택 사항들을 곰곰이 살피다 보면 문제 스스로가 쓸데없는 자잘한 부분들을 알아서 정리하고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단순하게 살라.” 이것은 비효율적인 관료주의의 진창에 빠져 헤매는 국가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훌륭한 조언이다.
제65장은 ‘智’란 말의 이중적 의미를 연속적으로 보여주는데, 그것은 ‘〈어떠한 것의 방법을〉 안다’는 의미에서 ‘완성하다(to master)’는 의미와 ‘다스리다(to rule)’(이에 대해서는 제33장을 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상적인 군주는 백성들을 교육시키지 않는다.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주인’이지 더 이상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게 된다. 만약 백성들에게 앎이 생기면 제49장에서 진술한 말로 ‘미소 짓는 아이들(smiling children)’이 될 자질을 잃게 될 것이다. 백성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과업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완수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대체로 無意識的으로 또는 ‘스스로 그렇게’ 하는 한에서이다.
현대 심리학적인 방식으로 造語하여 표현해본다면 이러한 ‘自動反射性(automaticity)’은 그들의 ‘위대한 유순함’의 뿌리이자 욕구와 충족되지 않는 소망으로부터의 자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여기서 어리석음(dullness)이란 부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소박함’과 같이 그것은 道와 부합한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자질이다. 백성들을 지혜롭게 만드는 것은 죄가 된다. 이것은 백성들을 불행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무질서와 경쟁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유순함(compliance)’이라고 번역한 한자는 ‘順’인데 이것은 ‘시내’와 ‘나뭇잎’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道家에서 말하는 ‘順’의 개념은 글자 그대로는 ‘흐름에 맡기고 가다.(to go with the flow)’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물위에 떠다니는 나뭇잎과 꼭 같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순함은 자유 또는 자기 결정의 결핍이라는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되지 않고 차라리 수고스럽지 않고, ‘느긋한’ 자연적 운동(effortless and ‘easygoing’ natural motion)으로 이해된다.
옛날에 道를 잘 행한 자는 백성을 현명하게 만들지 않고 어리석게 만들었다.
明이란 꾀 많고 교묘히 속여 그 〈본래의〉 소박함을 가리는 것을 이른다.
愚는 꾀가 없고 참된 본성을 지켜 자연스러운 〈본성에〉 순응하는 것을 이른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백성이 꾀가 많기 때문이다.
꾀 많고 교묘히 속이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꾀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해악이고,
智는 꼼수[術]와 같으니, 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나라의〉 해악이라 일컬으니 이 때문에 그것을 꾀라고 일컫는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꾀가 많기 때문이니, 마땅히 〈욕심이 나오는〉 구멍을 막고 문을 닫아 꾀가 없고 욕심이 없게 힘써야 한다.
꾀와 꼼수로 백성을 동원하면 사악한 마음이 발동하게 되니,
다시 교묘한 꼼수로 백성들의 거짓된 행동을 막더라도, 백성도 그 꼼수를 알아 막는 것에 따라 그를 피하게 되니 생각이 정밀하고 교묘해지고 간사함과 거짓이 더욱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꾀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의 해악이다.”라고 했다.
꾀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은 나라의 福이다.
이 두 가지를 아는 것은 또한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준칙이다.
늘 동일한 준칙을 아는 것을 현묘한 덕이라 하니, 현묘한 덕은 깊고도 아득하다.
‘稽’는 ‘같다[同]’는 뜻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같이 본받는 것이니 폐할 수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준칙을 늘 아는 것을 현묘한 덕이라고 일컬으니, 현묘한 덕은 깊고도 아득하다.
만물과 함께 〈참된 본성으로〉 되돌아가니
그 참된 본성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크게 순응하는 데 이른다.
66.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 :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以其善下之(이기선하지) : 스스로 낮추기를 잘했기 때문이다
故能爲百谷王(고능위백곡왕) :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되는 것이다
是以欲上民(시이욕상민) : 백성 위에 있고자 하면
必以言下之(필이언하지) : 말을 스스로를 낮추어야 하고
欲先民(욕선민) : 백성 앞에 서고자 하면
必以身後之(필이신후지) : 스스로 몸을 뒤에 두어야 한다
是以聖人處上而民不重(시이성인처상이민불중) : 그러므로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이 그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고
處前而民不害(처전이민불해) : 앞에 있어도 백성이 그를 해롭게 여기지 않는다
是以天下樂推而不厭(시이천하락추이불염) :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즐거이 받들고
以其不爭(이기불쟁) : 싫어하지 않는다
故天下莫能與之爭(고천하막능여지쟁) : 겨루지 않기에 세상이 그와 더불어 겨루지 못한다
66장 바다를 닮은 삶 바다가 모든 물줄기의 왕인 까닭은 스스로를 낮추기 때문이다 겸손은 바다에게 그 힘을 준다. 그러므로 백성 위에 서고자 하는 이는 겸손하게 말해야 하고 백성을 이끌고자 하는 이는 먼저 그들을 따라야 한다. 성인은 위에 있어도 백성들이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앞에 있어도 해롭게 여기지 않는다. 성인은 낮은 곳에 머무르기에 세상은 그를 칭송하고 스스로 하인처럼 백성들을 섬기기에 세상은 그를 왕으로 삼는다. |
사람들은 보통 신에 대해 생각할 때 잘못을 저지르면 영원한 저주를 내릴 수도 있는, 세상을 창조한 백발의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반면에 도는 자연스러운 기운이라고 이해한다. 삶의 근원인 도는 왕이나 독재자처럼 사람들을 감시하는 신적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또한 도는 처벌을 내리거나 보상을 나중으로 미루지도 않는다. 도는 그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도록 할 뿐이라고 노자는 말한다.
노자에게 물은 자연을 나타내는 훌륭한 상징이며, [도덕경] 81개 장의 곳곳에서 물을 언급한다. 물의 성질을 본받으면 도 안에 비판과 배척의 공간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노자는 바다처럼 되라고 한다. 그러하면 세상은 당신을 칭송할 것이다. 바다는 낮은 곳에 머물 줄 안다. 모든 물줄기는 흘러서 결국 바다에 이른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바다는 모두를 섬긴다. 여기에 담긴 가르침은 명쾌하다. “겸손하라.” 절대로 다른 사람 위에 서거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가장 높은 힘은 자신을 낮추는 골짜기에 있다. 지배하지 말고 섬겨라.
가장 작은 물줄기조차도 자신만의 길을 열어 바다로 향한다. 그리고 거대한 바다는 그 위대한 힘을 강과 골짜기에 뽐내지 않는다. 그들 위로 솟아오르거나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며, 자신을 거스른다고 해서 처벌이나 사멸을 내세워 위협하지도 않는다. 바다는 강과 시내가 중력에 이끌려 낮은 곳으로 향할 것임을 알고 있다. [도덕경]의 곳곳에 담겨 있는 이 은유는 사람들이 낮은 곳에 머무르는 태도와 겸손함의 위염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리는 경향이 있음을 일깨워준다.
흘러들어오는 강물보다 스스로를 낮추며 끈기 있고 순응하는 거대한 생명의 바다로 시선을 돌려라. 그동안 모범적인 지도자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들을 버려라. 에고를 내려놓고 뽐내려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물을 본받아라. 그러하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그리고 물줄기 같은 도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강하게 끌릴 것이다. 노자는 물이 흐르는 방식을 배우고 가능한 한 따라 하라고 말한다. 당신이 오늘 바다의 지혜를 적용하는 방법이 있다.
모든 방법을 알고 있다는 주제넘은 생각을 버려라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연륜이 있고, 지혜롭고, 부유하고 거기에 대해 큰 영향력과 권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누군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작은 물줄기들이 흘러오도록 허락하고 격려하는 거대한 바다를 닮은 자신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라. 낮은 곳에 머무르고 부드럽게 말하며 겸손함을 잃지 마라. 사람들이 최대한 자신들의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라. 자기 자신을 바다처럼 여기면 에고는 사라지고 그럼으로써 당신은 이 장에서 언급한 지도자의 모습과 닮아간다. 아무도 당신이 내리는 지시를 무겁게 느끼지 않고, 명령을 해롭게 여기지 않는다.
섬기는 마음을 유지하라.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이 땅에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라. 특히 당신의 리더십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기회를 찾아라. 바다는 그 풍요로움을 함께 하고자 하는 모두를 받아들이고 그 생명을 유지해줌으로써 그들을 섬긴다는 것을 기억하라. 바다를 닮아라.
제66장은 다시 한 번 ‘낮은 데에 처하는 것’ - 제61장에서 보듯 물과 연관된 자질 - 을 찬양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장래가 촉망되는 군주가 익혀야 하는 자질이기도 하다. 그들은 제39장에서 보듯 스스로를 낮추는 용어들로 자신을 지칭한다.
道家的 성인 군주는 자신의 인격을 최소화한다. 즉 ‘적극적인’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는 데에 이를 정도로 모든 사사로움을 비운다. 그에게는 어떠한 특성, 행동, 욕망, 의도가 없다. 스스로를 가장 낮은 데에 처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이 그에게 향하게 된다. 물과 같이 그는 어떠한 ‘개인적인(personal)’ 형태가 없으며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가장 낮은 위치에 처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사회의 풍성한 활력소(the nourishing spring in society), 즉 〈정치적〉 생명의 원천(the source of political life)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도가적 규칙인 逆轉이 적용된다.
백성들은 利己心을 최소화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존경할 것이며,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권력을 양보하고자 할 것이다. 성인 군주는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누구도 그와 다툴 수가 없게 된다.
이상적인 도가적 국가는 오로지 자연적 힘이 지배하는 그러한 사회이다. 성인 군주는 이러한 자연적 힘들을 사용한다. 그는 백성의 지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지 않으며, 경쟁자와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 그는 비경쟁적인 전략을 차용하여 ‘스스로 그러하게’ 움직인다. 백성들이 군주와 그의 통치를 무겁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적극적인 노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백성들의 아래에 처하며 이렇게 하여 그들을 누르거나 하지 않는다.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王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아래에 잘 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聖人은 백성 위에 있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말을 낮추고, 백성 앞에 서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몸을 뒤로 물린다.
이러한 까닭에 성인이 위에 처해도 백성은 무겁다 여기지 않고, 앞에 처해도 백성은 해롭다 여기지 않으며, 이 때문에 천하가 즐거이 추대하고 싫어하지 않는다.
〈이렇게 성인은〉 다투지 않기 때문에 천하의 어느 누구도 그와 다툴 수 없다.
67.
天下皆謂我道大(천하개위아도대) : 세상 모든 사람 이르기를 나의 도는 크지만
似不肖(사불초) : 똑똑하지 못한 듯하다고 한다
夫唯大(부유대) : 크기 때문에
故似不肖(고사불초) : 똑똑하지 못한 듯한 것이다
若肖久矣(약초구의) : 만약 똑똑했다면 오래전에
其細也夫(기세야부) : 작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我有三寶(아유삼보) : 내게 세 가지 보물이 있어
持而保之(지이보지) : 이를 지니고 보존한다
一曰慈(일왈자) : 첫째는 <자애>
二曰儉(이왈검) : 둘째는 <검약>
三曰不敢爲天下先(삼왈불감위천하선) : 셋째는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이다
慈故能勇(자고능용) : 자애 때문에 용감해지고
儉故能廣(검고능광) : 검약 때문에 널리 베풀 수 있고
不敢爲天下先(불감위천하선) :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 때문에
故能成器長(고능성기장) : 큰 그릇들의 으뜸이 될 수 있다
今舍慈且勇(금사자차용) : 이제 자애를 버린 채 용감하기만 하고
舍儉且廣(사검차광) : 검약을 버린 채 베풀기만 하고
舍後且先(사후차선) : 뒤에 서는 태도를 버린 채 앞서기만 한다면
死矣(사의) : 이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夫慈以戰則勝(부자이전즉승) : 자애로 싸우면 이기고
以守則固(이수즉고) : 자애로 방어하면 튼튼하다
天將救之(천장구지) : 하늘도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면
以慈衛之(이자위지) : 자애로 그들을 호위한다
67장 세 가지 보물이 이끄는 삶 세상 모든 사람이 나의 도를 잘 안다고 말하지만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도는 저잣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거나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안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잊는다고 해서 잃는 것도 아니다. 만일 도가 그와 같았다면 오래전에 잊혀 사라졌을 것이다. 나에게 세 가지 보물이 있어 꽉 쥐고 가까이 살핀다. 첫째는 자애로움이고 둘째는 검소함이며 셋째는 겸손이다. 자애로움에서 용기가 나오고 검소함에서 너그러움이 나오며 겸손함에서 통솔력이 나온다. 용감하되 자애로움이 없거나 너그럽되 검소하지 않거나 앞으로 나서되 겸손하지 않으면 이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사랑으로 싸우면 이기고 사랑으로 지키면 튼튼하다. 하늘이 사람을 구하고자 하면 군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를 지킨다. |
노자는 67장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삶을 바라봄으로써 그 안에서 변화를 일궈내라고 한다. 이 장은 도의 관점에서 성공한 삶을 이루는데 필요한 세 가지를 루고 있다.
1. 자애로움
당신은 어쩌면 재산, 권력,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 등이 성공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배우며 자랐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하면 자신들의 목표에 편협하게 집중한 사람을 떠올린다. 오로지 정상에 오르는 것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무자비하게 훼방 놓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러나 노자는 가장 중요한 이 보물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라고 말한다. 용기는 차갑고 냉정한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애로움에 빠진 대담함은 죽음의 처방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므로 외적인 성공의 척도를 추구하기보다는 섬김과 어짐, 애정을 나눔으로써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2. 검소함
검소함은 절제, 절약 혹은 간소함이다. 오늘날 성취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면 검소함과 절제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노자는 많은 것을 추구하지 않고 적은 것에 만족할 때 너그러움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꼭 필요한 것만 취하고, 지나치게 모으거나 저장하지 마라. 덜 집착할수록 더 너그러워진다. 더 매달릴수록 더 필요해지고 다른 사람의 행복에는 관심을 기울이기 어렵다.
3. 겸손
겸손은 ““자연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음”,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않음”, “일등이 되려고 애쓰지 않음“이다. 노자는 이런 특성이 도의 기운을 갖는 진정한 리더십을 만든다고 일깨워준다.
힘, 강함, 승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종종 거만함, 고상함, 자만심과 같은 남성적인 양의 특성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현명한 리더십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버리면 앞서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배웠던 것을 당신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도나 신 혹은 뭐라고 부르든 간에 당신으로 하여금 쓰고, 말하고, 발명하게 하는 에너지의 매개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겸손함은 당신의 에고보다 더 거대한 힘 앞에 무릎 꿇는 것이다. 그 근원을 믿고, 그 힘이 당신에게 준 지혜와 영향에 감사하는 것이다. 겸손하라. 낮은 곳에 머물러라. 항상 너그럽고 감사하는 지도자가 되라.
무수히 나타나는 도의 징후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라.
조화로운 삶의 열쇠는 연민과 자애로움이다. 당신은 누구와도 경쟁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들을 물리쳐야 한다거나 자신을 어떤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자애로움과 연민을 모든 형태의 생명에게로 뻗어라. 당신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라. 모두를 향해 애정과 존중을 보낼 때 당신은 도와 조화를 이룰 것이고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처럼 보호받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나약하고 무능력한 지도자라고 비난했을
사람들 속에 숨겨진 간절함과 겸손의 힘을 발견하라.
재산을 축적하거나 소비에 빠져들지 않고 겸손함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훌륭한 지도자의 모범이다. 이에 비해 물질만을 추구하며 강압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도에 어긋나 있다. 그런 사람의 행동은 불화를 일으키기 쉽다. 노자가 말한 것처럼 자애로움이 없이 대범함만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마저 죽음으로 이끌게 된다. 검소함과 겸손함이 있는 지도자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이를 본받도록 최선을 다하라.
제67장의 첫째 부분에는 일종의 才談(pun)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不肖’는 글자 그대로는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표현은 또한 연장자나 윗사람에게 말할 때 자기를 낮추거나 온화하고 공손하게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말을 사용하게 되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못하다고 말하거나 또는 자신에게 어떤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덕이나 재능 또는 특질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은 스스로를 ‘쓸모없다’ 즉 불초하다고 표현하는데, 道家의 逆說의 논리 즉 통치자가 되기에 적당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셈이 된다.
첫째 부분에 나오는 ‘나’는 스스로를 ‘쓸모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오히려 국가에서 無爲하는 유일한 지위, 즉 통치의 首長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될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기능과 그에 해당하는 이름을 갖지만 군주는 오로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
제67장의 둘째 부분 또한 역설에 근거하고 있다. 세 가지 보물 즉 자애로움(com- passion), 아낌(frugality), 그리고 감히 나서지 않음(placing oneself behind)은 그 반대의 것으로 변화한다. 수동적인 자애로움은 과감한 용감함이 되고, 아낌은 넉넉함이 되고, 감히 나서지 않는 사람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오로지 이러한 결과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그 반대가 되는 자질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니,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실패하게 될 것이다. 세 가지 보물 가운데 첫째 것은 마지막 부분의 논제이다.
이 장에 대한 《韓非子》의 주석은 자애로움을 어미다움의 덕(the virtue of motherhood)으로 해석하고 있다. 어미는 자기 자식들을 자애롭게 돌보는데 그래서 자식들이 위험에 빠지면 본능적으로 그들을 지켜준다. 이렇게 해서 어미의 본능적인 자애로움은 과감하고 용감무쌍한 힘으로 변화되기도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의 용기가 역설적으로 자애로움에 뿌리하고 있다면 그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만약 한 나라의 군주가 어미다운 자애로움을 갖추고 있다면 그 나라는 보전되고 ‘둘러싸여지게’ 될 것이다.
천하가 모두 나의 道가 위대하지만 닮은 게 없는 듯하다고 한다. 오직 위대하기 때문에 닮은 게 없는 듯한 것이다.
만약 〈어떤 것과〉 닮았다면 오래 전에 〈나의 도의 위대함은〉 하찮게 되었을 것이다!
久矣其細(오래 전에 〈나의 도의 위대함은〉 하찮게 되었을 것이다.)는 ‘其細久矣(〈나의 도의 위대함이〉 하찮게 된 지 오래되었다.)’라는 말과 같다. 〈어떤 것과〉 닮았다면 〈나의 도가〉위대해진 까닭을 잃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어떤 것과〉 닮았다면 오래 전에 〈나의 도의 위대함은〉 하찮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나에게는 세 가지 보배가 있으니, 그것을 간직하고 지킨다.
첫째는 자애로움이고 둘째는 검소함이며 셋째는 감히 천하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무릇 내가 간직하고 지키는〉 자애로움 때문에 용감할 수 있고,
〈經67.6-7에서 말하듯이〉 대저 자애로움으로 〈전쟁에서〉 진을 치면 승리하고, 〈자애로움으로〉 지키면 견고하다. 이 때문에 용감할 수 있는 것이다.
검소하기 때문에 넉넉할 수 있고
절약하고 검소하며 불필요한 씀씀이를 아껴서 천하가 모자람이 없다. 그래서 넉넉할 수 있는 것이다.
감히 천하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기물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經7.2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인이〉 자신의 몸을 뒤로 하고 도외시하여 만물이 돌아오는 곳이 된 후에야 〈《周易》 〈繫辭傳〉에서 말하듯이 성인은〉 “기물을 완성하여 천하를 이롭게 하니” 만물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자애로움을 버리고 용감함을 취하며,
‘且’는 ‘취하다[取]’는 뜻과 같다.
검소함을 버리고 넉넉하기를 취하며, 자신을 뒤로 물리는 〈미덕을〉 버리고 앞에 나서는 것을 취하니 죽게 될 것이다.
무릇 자애로움으로 진을 치면 승리하고,
서로 사랑하여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다.
〈자애로움으로〉 지키면 견고하니, 〈이러한 사람을〉 하늘이 장차 구하는 것은 자애로움으로 지키기 때문이다.
68.
善爲士者不武(선위사자불무) : 훌륭한 무사는 무용을 보이지 않는다
善戰者不怒(선전자불노) : 훌륭한 무사는 성내지 않는다
善勝敵者不與(선승적자불여) : 훌륭한 승리자는 대적하지 않는다
善用人者爲之下(선용인자위지하) : 훌륭한 고용인은 스스로를 낮춘니다
是謂不爭之德(시위불쟁지덕) : 이를 일러 <겨루지 않음의 덕>이라 한다
是謂用人之力(시위용인지력) : 이를 일러 <사람 씀의 힘>이라 한다
是謂配天古之極(시위배천고지극) : 이를 일러 <하늘과 짝함>이라 하는데 예부터 내려오는 지극한 원리이다
68장 서로 돕는 삶 훌륭한 무사는 난폭하지 않다. 훌륭한 전사는 성내지 않는다. 훌륭한 승리자는 맞서 싸우지 않는다. 훌륭한 고용주는 일꾼을 섬긴다. 최고의 지도자는 사람들의 뜻을 따른다. 이 모두가 지루하지 않음의 덕을 나타낸다. 이를 일러 싸우지 않음의 덕이라고 한다. 이를 일러 사람들의 힘을 쓴다고 한다. 이것을 하늘과 짝을 이룬 지극함으로써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이 장은 어떻게 해야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과 출세는 다툼과 경쟁을 의미한다.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먼저 차지해서 상대를 물리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바꾸고 “겨루지 않음의 덕”을 실천하라고 충고한다. 이 덕목은 일등이 되기를 요구하는 사회 안에서도 도움이 된다.
[도덕경]은 만물이 존재하지 않음의 상태에서 나온다고 알려준다. 경쟁이 아니라 완벽하게 협력하는 하나 됨이 있을 뿐이다. 만약 당신이 사람들 안에서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면 누구를 무찌를 수 있겠는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싸움을 거는 셈이 되는 꼴이 된다. 노자는 이러한 충고를 받아들여 서로 돕는 삶을 살아가라고 충고한다.
이것은 운동경기도 적용된다. 상대를 적으로 여겨 대응하거나 화내지 말고 이때 노자의 말을 떠올려 보라. “훌륭한 무사는 난폭하지 않다. 훌륭한 전사는 성내지 않는다. 훌륭한 승리자는 맞서서 싸우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상대를 자신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고, 인생이라는 춤을 함께 추게 동료를 받아 들인다. 그러니 시합을 할 때 상대에게 화내거나 증오의 마음을 품지 마라. 오히려 자신의 발전을 돕는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라. 그들이 없다면 좋은 경기를 할 수 없고, 더 나의 질 수도 없으며, 승리를 거둘 수도 없다.
노자가 이르는 대로 “사람들의 힘을 쓰라” 그 힘을 통해 자신을 승리자의 위치로 끌어올려라. 상대가 최고 수준의 실력을 발휘하도록 그들과 협력하라. 화내거나 자책하지 말고 바로 앞에 놓인 임무에 집중하라. 공을 보고 공을 움직여라. 무술 시합에서는 자세를 바르게 하고 균형을 유지하라. 마음의 평형을 유지하면 경기는 새로운 수준에 도달한다. 싸우면 약해지고 협력하면 강해진다. 그러므로 일은 물론이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보다는 협력을 모색하라.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하라
감기나 질병 혹은 다른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것을 굴복시키려 하지 마라. 가족들과 논쟁하지 말고,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격론을 벌리지 마라. 중독 증상과도 다투지 마라.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싸우지 마라. 그 대신 서로 돕는 삶으로 이동하라. 만약 관절염이나 암에 걸렸다면 이렇게 말하라. “내 몸에서 살아야겠다면 함께 살자꾸나. 그러나 조화를 이루고 평화롭게 건강하게 같이 살도록 하자. 그럴 수 없다면 내 몸에서 떠나길 바란다.” 조금은 이상하게 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나면 당신은 한 걸음 물러서서 조화 속에 머물게 된다. 그 안에서 당신은 화내거나, 난폭해지거나, 분노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하라.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면 당신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경험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픈 말이나 행동을 할 때에는 자신에게도 똑같이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인식하고 이 기운을 인류에 적용하라. 결국 우리는 하나인 도를 이 우주 안의 모든 존재와 공유하는 것이다. 그 모든 존재들과 따뜻하게 포옹한 채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본다면 노자가 말한 “하늘과 짝을 이루는 지극한 원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표현한 파블로 카잘스의 멋진 글이 있다.
언제 우리는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 말해 줄 것인가?
우리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니?
너는 경이롭고 유일한 존재야.
지나간 온 시간을 통틀어 너와 똑같은 아이는 없었단다.
너의 다리, 팔, 귀여운 손가락 그리고 네가 움직이는 모습.
너는 셰익스피어가 될 수도 있고, 미켈란젤로가 될 수도 있어.
베토벤과 같은 음악가가 될지도 모르지.
네 안에는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능력이 숨어 있단다.
넌 정말로 놀라운 존재야.
그런 네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 너와 같은 존재인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겠니?“
‘天’ 즉 하늘 또는 자연‧본성에 어울려 道에 부합하는 전략은 정치는 물론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 것이다. 첫째 부분은 이와 같은 도가적 전략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도가적 전략을 따르는 사람은 공개적인 혹은 직접적인 대결을 추구하지 않고, 물러서고 감히 나서지 않는 전략을 취한다. 앞 장에서 묘사한 ‘자애로움’의 덕에 일치하게 도가적 戰士는 공세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대신 전쟁에 대한 태도는 방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도가의 兵法은 백성을 ‘부리고 쓰는(using or employing)’ 기술과 연관된다. 이 장에서 한 번 더 표현하고 있는 도가적 관념은, 지도자는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피통치자들의 아래에 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들의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것은 고대 즉 만물이 고요하게 질서를 이루고 있던 때인 고대의 ‘최고의 방법(the golden way)’이다. 도가는 儒家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立論을 지지하기 위해 현재를 위한 모델로 고대를 언급한다.
장수 노릇을 잘하는 자는 武勇을 뽐내지 않고
士는 병졸을 부리는 장수이다.
무용은 앞장서기를 숭상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싸움을 잘하는 자는 분노하지 않고
〈자신을〉 뒤로 물려 앞장서지 않고, 뒤에 응할 뿐 먼저 부르지 않는 까닭에 분노에 이르지 않는다.
적을 잘 이기는 자는 함께 다투지 않고
함께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을 잘 부리는 자는 〈자신을〉 아래로 낮추니 이것을 일컬어 다투지 않는 덕이라고 하며, 이것을 일컬어 남을 부리는 힘이라고 하며,
남을 부리면서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그의〉 힘을 〈내가〉 이용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일컬어 하늘에 짝한다고 하니 예로부터의 준칙이다.
69.
用兵有言(용병유언) : 전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吾不敢爲主而爲客(오불감위주이위객) : 내 편에서 주인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 노릇하고
不敢進寸而退尺(불감진촌이퇴척) : 한 치 전진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한 자 정도 물러서라는 것이다
是謂行無行(시위행무행) : 이를 일러 나아감이 없이 나아감
攘無臂(양무비) : 팔이 없어 소매를 걷음
?無敵(잉무적) : 적이 없이 쳐부숨
執無兵(집무병) : 무기 없이 무기잡음이라 한다
禍莫大於輕敵(화막대어경적) : 모든 화 중에 적을 가볍게 여기는 것보다 더 큰 것은 없다
輕敵幾喪吾寶(경적기상오보) : 적을 가볍게 여기다가는 내 편의 보물을 거의 다 잃고 만다
故抗兵相加(고항병상가) : 그러므로 군사를 일으켜 서로 맞서 싸울 때에는
哀者勝矣(애자승의) : 슬퍼하는 쪽에서 이기는 법이다
69장 적이 없는 삶 군인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먼저 움직이지 말고 손님처럼 행동하고 한 치 전진하지 말고 한 자 물러선다. 이를 일러 나아감 없이 나아감, 무력을 쓰지 않는 물리침이라 한다. 적이 있다고 느끼는 것 보다 더 큰 불행이 없다. ‘나’와 ‘적’이 함께 존재하기에 내 보물이 있을 자리가 없다. 따라서 두 상대가 만나면 적이 없는 자가 이길 것이다. 군대가 대등하게 맞서면 연민을 가진 쪽이 이긴다. |
이 땅의 존재들이 서로 연결된 공동의 운명을 가지고 있었던 세상을 떠 올려보라. 적이라는 말조차도 모르고, 우리 모두가 존재하지 않음의 근원에서 태어난 하나임에 기뻐하던 세상 말이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도 상처를 입히는 것임을 이해했던 그런 세상을 상상해 보라. 안타깝게도 인류의 문명이 기록된 이래로 그런 세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이런 세상이야말로 노자가 이 장을 통해 전하려고 하는 세상에 대한 비전이다.
이 장대한 비전은 바로 지금, 여기서, 당신과 함께 시작된다! 삶에서 적이라는 개념 자체를 지워 버려라. 이 결심을 주변 사람들에게 실천하라. 그 실천이 결국에는 전 세계인을 움직여 적이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할 것이다. 몇 년 전에 총기를 가지고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침입해 여러 명의 소녀들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학교는 장례식에 피해자 가족뿐만 아니라 살인범의 가족들도 함께 초대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우리에겐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의 자녀들이며 용서야말로 우리 믿음의 가장 핵심입니다. 길을 잃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아름다운 말은 노자가 말한 내용과 참으로 비슷하다. “적이 있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 없다.” 그리고 “두 상대가 만나면 적이 없는 자가 이긴다.”
노자는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먼저 공격할 것이 아니라 방어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교전을 먼저 시작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설사 전쟁이 일어나도 그 자체가 몹시 가슴 아픈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적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가슴속에 연민이 가득 차면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언어에 의한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전쟁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도와의 연결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모든 전쟁과 충돌은 장례식처럼 다루어져야 한다. 이겼다고 축하할 것이 아니라 가슴 아파해야 한다.
그 누구도 적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 장의 가장 중요한 구절을 다시 한 번 상기하라. “‘나’와 ‘적’이 함께 존재하기에 내 보물이 있을 자리가 없다.” 여기서 보물이란 당신과 도의 관계 그리고 마음의 평화이다. 사업 경쟁자, 운동경기에서의 상대편, 정치적 의견을 달리하는 정당의 당원들은 나의 적이 아니다. 그리고 적이라고 선언한 그 사람들도 결코 적은 아니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라. “나에겐 적이 없다. 세상에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때로는 그들로부터 내 삶의 방식을 보호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적이 없는 자가 이긴다.“는 노자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라.
절대로 싸움을 벌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논쟁이 생기면 방어하는 입장에 서라. 먼저 움직이지 말고 손님처럼 행동하라는 노자의 조언을 따르라. 다툼의 상대로 생각하는 동료의 모습에서 당신 자신을 발견하라. 적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당신의 한 부분인 상대에게 연민과 보살핌의 마음을 전하라. 싸움을 거부하라. 싸움이란 결국 자기 자신과 다투는 것임을 기억하라. 마주침 들 속에서 하나 됨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우리 모두가 도이기 때문이다
첫째 부분의 格言은 앞의 두 장에서 이미 언급했던 전략적 지침을 확인해주고 있다. 승리하는 전략은 방어와 회피에 의존한다. 적군은 그때 먼저 나서고자 할 것이고, 말하자면 ‘스스로 발목 잡히는 꼴(shoot himself in the foot)’이 된다. 방어 전술은 ‘無爲而無不爲’ 즉 “함이 없으나 하지 못함이 없다.”는 격률의 실천적 적용이며, 역설의 논리의 실제적 적용이기도 하다. 도를 따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움직이도록 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셋째 부분은 제64장의 조언 ‘처음을 유의하라’와 연관하여 해석할 수 있다. 적이 없으면 사람은 소홀해지게 되고 아마도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 뻔하다. 정치, 신체적 건강, 그리고 전쟁에서 조심스러운 것 혹은 걱정이 많은 것은 극히 중요하다. 그것은 어미다운 품성으로서 도와 일치하는 것이며(‘어미’에 대해서는 제1장, 제20장, 제25장, 제52장 그리고 제59장을 보라.), 이 때문에 결국에는 성공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用兵家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으니, 나는 감히 주인이 되지 않고 손님이 되고, 감히 한 치도 나아가지 않고 한 자를 물러난다고 한다.
이것을 행군할 때에는 흔적이 없고 팔뚝을 걷어붙이려 해도 팔뚝이 없으며, 잡으려고 해도 兵器가 없고 잡아끌려 해도 적이 없다 한다.
行이란 행군을 말한다.
이것은 겸손하고 물러서고 슬퍼하고 자애로움으로써 감히 만물에 앞장서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원리로〉 전쟁에 임할 때 오히려 행군하여도 흔적이 없고, 〈소매를〉 걷어붙여도 팔뚝이 없고, 잡으려고 해도 병기가 없고 잡아끌려 해도 적이 없는 것처럼 해야 하니, 이것은 더불어 대항하는 자가 없다는 말이다.
재앙은 적을 가볍게 여기는 것보다 큰 게 없으니, 적을 가볍게 여기면 거의 내 보배를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내가 슬퍼하고 자애롭고 겸손하고 물러나는 것은 강함을 취하여 천하에 적이 없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여 마침내 적이 없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바로 내가 큰 재앙이라 여기는 까닭이라 말한 것이다.
寶는 〈슬퍼함, 자애로움, 겸손히 물러남의〉 세 가지 보배이다. 따라서 “거의 내 보배를 잃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사를 동원한 것이 서로 대등할 때는 〈동료를〉 아끼는 사람이 이긴다.
抗은 ‘〈군사를〉 일으키다[擧]’는 뜻이다. 若은 대등하다는 뜻이다.
애통해하는 사람은 반드시 서로 아껴서 이로움을 추구하고 해를 피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한다.
70.
吾言甚易知(오언심이지) : 내 말은 알기도 그지없이 쉽고
甚易行(심이행) : 실행하기도 그지없이 쉬운데
天下莫能知(천하막능지) : 세상 사람들 도무지 알지도 못하고
莫能行(막능행) : 실행하지도 못한다
言有宗(언유종) : 말에는 종지가 있고
事有君(사유군) : 사물에는 중심이 있다
夫唯無知(부유무지) : 사람들 이를 알지 못하기에
是以不我知(시이불아지) : 나는 알지 못한다
知我者希(지아자희) : 나를 아는 사람 드물고
則我者貴(즉아자귀) : 나를 따르는 사람 귀하다
是以聖人被褐懷玉(시이성인피갈회옥) : 이래서 성인은 굵은 칡베옷을 입지만 가슴에는 구슬을 품고 있다
70장 신의 존재를 깨닫는 삶 내 말은 이해하기도 아주 쉽고 행하기도 더할 나위 없이 쉬운데 세상에는 이해하는 이가 드물고 행하는 이가 거의 없다. 내 말에 근본이 있고 내 행위에 주인이 있다. 사람들이 이를 알리지 못하기에 나를 알지 못한다. 성인은 거친 베옷을 걸치고 있지만 가슴에는 아름다운 옥을 품고 있다. |
이 장이 21세기에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다시 노자에게 길을 묻는다. 노자는 도에 뿌리를 둔 삶을 즐기고 다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권했던 도의 지도자였다. 이 신성한 존재가 자신을 따르는 고대 중국인 사람들 사이로 걸어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노자는 삶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기만 하면 인류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깨달음을 간직한 체, 그들의 호전적인 행동에서 느낀 회의적인 마음을 갖고 글로 써 내려갔을 것이다. 자유, 마음의 평화, 만족 등 모든 원리들은 그저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 쉽고, 간단해서 누구라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펼쳐진 낙원의 본질을 이해하려 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노자는 “내 말에 근본이 있고 내 행위에 주인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곧이어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덧붙인다. 노자의 근본은 도다. 그 행동의 주인은 한결같은 존재의 근원이다. 노자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신이 생각하는 듯 생각하고, 우주의 창조자인 신이 말하듯이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러한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 당신도 이와 같이 할 수 있다. 삶을 지탱하는 도에 자신을 맡기고 그 힘이 당신을 인도하도록 한다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툼을 멈추라. 폭력적인 생각과 행동을 멀리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들지 마라. 겸손함 속에 머무르고, 간섭하지 마라. 타인과 당신 자신이 타고난 창조적 재능을 존중하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당신의 근원으로 돌아가라. 말썽만 부리는 에고에게 결별을 고하라. 만약 이 모두를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비난하지 않고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려울 것 같지만 실로 간단하다. 선택과 행동만 남아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이것이 노자가 이 단순한 메시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너무 적은 것에 대한 당혹스러움을 털어놓으며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도덕경]을 이해하라.
[도덕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하는 대중의 하나가 되려는 마음을 버려라. 노자는 [도덕경]을 따르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말한다. 당신의 신성함이 곧 도의 일부라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기적 수업 A Course in Miracles]에 따르면 “당신의 신성함은 세상의 모든 법칙들을 뒤집어 놓는다. 그것은 시간, 공간, 거리의 제약뿐만 아니라 어떤 종류의 한계도 뛰어넘는다.” 스스로에게 이런 지혜를 품은 사람이 되겠다고 선언하고 다짐하라. 그리고 매일 신의 존재를 깨닫는 삶을 기꺼이 실천하라.
모든 곳에서 신을 발견하라.
보고 듣는 모든 것 속에서 신의 보이지 않는 힘을 발견하는 연습을 하라. 에크하르트Eckhart는 이 70장의 지혜를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충고를 던져 주었다. “이 신성한 탄생을 경험하였는가? 잘 들어라. 만약 이 탄생이 온전히 당신에게 일어난 것이라면 모든 창조물들이 당신을 신으로 여길 것이다.” 그의 조언은 이어진다. “전 생애에 걸쳐해야 할 기도는 ‘감사합니다.’ 하나면 된다. 그것으로 족하다.” 범사에 신께 감사한다고 말하는 습관을 가져라. 이것이 신을 깨닫는 길이다.
제70장은 ‘知’가 ‘안다’는 뜻과 ‘완성하다’라는 뜻을 이중적으로 갖는다는 것을 이용하여 논의하고 있다. ‘知’에 대한 논의는 제33장과 제56장에서도 다루고 있다.
聖人의 말은 알기 쉽고 행하기도 쉽다. 그런데도 그것을 행하거나 배울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도가에서 말하는 〈통치의〉 技藝의 역설적 완성은 오로지 자신의 행동, 행위, 의도를 최소화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게다가 성인은 이러한 탈인간화의 기예(art of dehumanization)를 완벽하게 완성한 유일한 인간이다. 轂, 즉 바퀴 중심부의 비어 있는 허브는 단 하나이다. 비록 虛靜과 無爲의 길을 따르는 것이 이론상으로 쉽다 해도, 이 중심의 자리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부분을 反響하면서 셋째 부분은 도가적 통치술의 논리(logic of rulership)에 완벽하게 상응한다. 성인 군주가 군주가 된 까닭은 그가 어떤 특정한 과업도 수행하지 않는, 즉 無를 체득한(to master nothing)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를 체득함(mastering)으로써 성인 군주는 모두의 주인(the master)이 되는데 이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지배하지(to master) 못하는 것이다. 성인 군주의 명성(esteem)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어서 제70장은 성인 군주의 아낌과 소박함을 찬양하면서 결론짓는다. 즉 성인 군주는 허름한 베옷을 입는다. 그런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예외적인 존재임을 표현해준다.
때때로 제70장은 《老子》의 저자로 추정되는 사람의 우울한 불만, 즉 사람들이 도가적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이를 행하고자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우울한 불만의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는 《노자》에 어떤 한 사람의 著者나 한 사람의 話者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노자》에 등장하는 ‘나’, 특히 여기 제70장에 등장하는 ‘나’는 장래가 촉망되는 讀者 또는 聽者의 ‘나’, 이른바 성인 군주가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해석에 따르면 제70장은 오해되고 있다는 점에 불만을 말하고 있지 않고, 차라리 도가의 역설의 규칙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이 ‘不知’라는 ‘쉬운’ 기예를 완성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좋은 것이기도 하다. 제70장은 지성적인 讀解法(intelligent readership)의 결핍을 비난하지 않지만, 오히려 이상적으로는 오직 한 사람만이 도의 가르침을 완성하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밖의 어느 누구도 도를 완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제70장은 《노자》가 이상적으로는 오로지 단 한 사람의 독자나 청자를 의도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말은 무척 알기 쉽고 무척 행하기 쉽지만 천하의 〈누구도〉 알 수 없고, 행할 수 없으니,
문을 나서거나 창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기 때문에 “무척 알기 쉽다.”고 했다.
하는 게 없으나 이루기 때문에 “무척 행하기 쉽다.”고 했다.
조급한 욕심에 혹하기 때문에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했다.
榮利에 미혹되기 때문에 “누구도 행할 수 없다.”고 했다.
말에는 으뜸이 있고 일에는 주인이 있는데
宗은 만물의 으뜸이요, 君은 만사의 주인이다.
저들(으뜸과 주인)을 모를 뿐이다. 이 때문에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말에는 으뜸이 있고 일에는 주인이 있는 까닭에 지혜가 있는 사람은 알지 못할 수 없다.
나를 아는 자가 드물면 나는 귀해지리라.
오로지 깊기 때문에 아는 자가 드물다.
나를 아는 자가 더욱 드물어지면 내게는 또한 필적할 만한 이가 없기 때문에 “나를 아는 자가 드물면 나는 귀해지리라.”고 했다.
이 때문에 성인은 〈겉으로는〉 갈옷을 입고 〈안으로〉 옥을 품는다.
‘〈겉으로는〉 갈옷을 입는다.’는 것은 티끌(세속)과 같이한다는 뜻이요, ‘〈안으로〉 옥을 품는다.’는 것은 그 참된 본성을 보배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성인이 알기 어려운 까닭은 그가 티끌과 같이하면서 두드러지지 않고 〈안으로〉 옥을 품었으면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기가 어렵고 귀하게 되는 것이다.
71.
知不知上(지불지상) :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훌륭하다
不知知病(불지지병) :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하는 것은 병이다
夫唯病病(부유병병) : 병을 병으로 알 때만
是以不病(시이불병) : 병이 되지 않는다
聖人不病(성인불병) : 성인은 병이 없다
以其病病(이기병병) :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에
是以不病(시이불병) : 그래서 병이 없다
71장 병들지 않는 삶 모름을 아는 것은 강함이다. 앎을 묵살하는 것은 병이다. 병을 병으로 알때만 병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성인은 병이 없는데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건강의 비결이다. |
이 장에 담긴 이야기는 대단히 보수적이다. ‘병이, 병이 될 때 병은 사라진다.“는 의미는 모순적으로 들린다. 노자는 질병을 피하기 위해서는 실재로 아파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장에서 ’병‘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내게 있어 병은 육체나 정신적 일부가 최초의 좋은 상태에서 멀어져 균형을 잃어버린 것을 뜻한다. 즉 도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열, 통증, 호흡곤란, 피로, 코 막힘 등등의 증산은 병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그리고 공포, 불안, 분노, 증오, 좌절, 죄책감, 스트레스, 조급함 등은 정신적 측면에서 그런 징후를 나타내는 증상들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우리 근원과 조화를 잃었다는 신호들이다.
성인은 오랫동안 병을 관찰했고, 마침내 그것이 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사고의 육체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열병, 감기, 통증 등은 모두 도와 어울리지 않는 조급함, 공포, 분노, 혹은 에고가 이끄는 다른 충동 등의 표현들이다. 성인들은 이런 사고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보아왔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음에 동참하기를 거부한다. 성인은 이야기한다. “아픈 생각이 병을 만든다.” 이러한 생각이 결국은 병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다. 남인도에 도덕경을 실천하는 사티아 사이 바바라는 성인이 있다. 그는 엉덩이뼈 복합골절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한 신자가 그에게 물었다. “신을 깨달은 존재가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은 어떵 것입니까? 왜 자신을 치료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사이 바바가 대답을 한다.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 안에 있는 자신의 신성함을 경험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고통는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지요. 나는 괴롭지 않습니다. 육체가 나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이 바바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한다. 도와 조화를 이루고 살면 병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은 선택 사항도 되지 못한다.
행복한 마음을 품어라.
중국 속담에 ‘마음이 행복하면 몸도 행복하다.’는 말이 있다. 행복한 마음은 병을 병으로 아는 것이다.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다. 감기, 복통, 관절통, 피로 같은 증상들을 원래의 행복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몸이 보내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행복한 마음은 육체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도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마음은 질병이나 그로 인한 괴로움 없이 살 수 있는 육체의 능력을 믿는다. 그러므로 이 행복한 마음으로 건강을 유지하라.
습관을 점검하라.
타고난 습관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상적은 습관은 무엇인가? 모든 중독은 그것이 크던 작던 간에 그 속으로 완전히 빠져 들도록 당신을 유혹한다. 지나치게 빠져들어서 몸이 쇠약해진다면 그것을 병으로 받아 들여라. 당신은 무엇이 그토록 당신을 잡아끄는지 알고 있다. 또한 음식, 술, 약물 혹은 그것들을 탐닉한 뒤에 이어지는 죄책감과 수치심이 자신을 괴롭히도록 방치했던 순간들도 기억하고 있다. “앎을 묵살하는 것은 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당신이 어떤 병적 집착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하라. 그리고 그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당신이 깨달은 바를 외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라.
제71장은 계속 ‘不知의 知’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최상의 知의 형식은 역설적이다. 성인의 노하우(知, know-how)는 어떠한 노하우도 갖지 않는 데 있지, 국가에서 어떤 특수한 기능을 맡는 데에 있지 않다.
모든 기예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否定의 기예(negative art)이다. 만약 군주가 이러한 기예를 터득하지 못한다면 결국 흠이 된다. 이러한 결점을 터득한 사람만이, 즉 이러한 역설적인 흠을 하나의 흠으로서 아는 사람만이 훌륭한 다스림 혹은 완성(mastery)의 기예에 성공할 수 있다.
道家에서 말하는 非完成(non-mastery) 혹은 ‘노하우가 없음(non-knowhow)’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식의 ‘無知의 知’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는 철학자로 하여금 지혜를 추구하게 만들어서 感覺 -知識과 전통적 진리가 불충분하다는 점에 대해 통찰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진정한 진리의 추구자는 완전하게 진리라고 이해할 수 있는 더 고차원적인 진리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다.
도가에서 말하는 ‘無知’는 오로지 어떠한 노하우도 갖지 않는 데에 달려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는 게 없으나 하지 못하는 게 없다.”는 역설적 격률에 근거하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정치 전략이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좋다. 앎의 〈부족함을〉 모르는 것은 병이다.
앎이란 것에 맡기기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병이 된다.
대저 오로지 병을 병으로 여기는 까닭에 병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성인이 병폐가 없는 것은 그 병을 병으로 여기는 까닭에 병이 되지 않는 것이다.
72.
民不畏威, 則大威至. : 성인은 병됨이 없다. 그것은 병을 병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되지 않는 것이다.
無押其所居, 無厭其所生, 夫唯不厭, 是以不厭. :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으면 곧 큰 두려움이 닥쳐올 것이다.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삶에 자연스럽게 순응하여 편안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부자연하게 욕망을 추구하는 것 같은 행동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是以聖人自知不自見, 自愛不自貴. : 자기의 환경을 좁다고 생각하지 말며 자기의 삶을 싫어하지 말라.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이 어떤 것이든 간에 자연스럽게 순응하고 싫어하지 말아야 그 삶이 싫어지지 않을 것이다.
故去彼取此. : 그런 까닭에 성인은 스스로 아는 것으로 자족(自足)할 뿐 그것을 나타내어서 스스로 과대(誇大)하게 보이려고 하지 않으며, 성인은 사랑하지만 스스로 존귀하게 되기 위하여 부자연하게 욕구하지 않는다.
72장 경외하고 수용하는 삶 경외하는 마음이 부족하면 재양을 겪을 것이다. 세속적인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더 큰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자신의 시야에 한계를 두지 마라. 태어난 환경을 원망하지 마라. 삶의 자연스러운 행로에 저항하지 마라. 그리하면 세상에 지치지 않는다. 그러기에 성인은 스스로를 알되 스스로를 드러내 뽐내지 않고 스스로를 사랑하되 스스로를 치켜세우지 않는다. 성인은 외면의 것을 버리고 내면의 것을 취한다. |
이 장은 조화로운 삶을 위한 두 가지 요소를 밝힌다. 그중 하나는 경외하는 마음이고 나머지는 전적인 수용이다. 이 두 가지가 어우러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도의 존재를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다. 16세기 고난의 성자 요한의 글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내가 사랑한 것은
산과 수풀이 우거진 외딴 골짜기
낯선 섬과 메아리치는 강
사랑을 자극하는 산들바람의 휘파람 소리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고요한 음악
울려 퍼지는 고독
사랑을 새롭고 깊게 만드는 저녁 만찬
환희와도 같은 절박함을 가슴에 품고 나만의 신성한 공간에 앉아 있으니 노자가 “경외하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전하라고 재촉한다. 말에 담긴 의미는 시간을 초월한 거대한 힘만큼 깊고 크다. 나는 바로 지금 내 주변의 아름다운 환경에서 그 힘을 느낀다. 지구의 심장박동과도 같은 파도가 끊임없이 철썩거리는 것처럼, 자연의 숨소리가 대기를 가득 채운다. 쪽빛의 밝은 하늘, 초록으로 빛나는 나뭇잎, 먼 하늘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창문에 닿을 듯 보이는 무지개, 이 모든 것에 담긴 색들은 아름답기만 하다.
72장은 자신과 자신의 관심사들을 온전히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노자는 당신에게 스스로를 제한하지 말고, 자신의 몸을 온전한 창조물로서 받아들이며, 타고난 본성과 삶이 조화를 이루게 하라고 제안한다. 나는 자연에 대한 비유를 좋아하는데 이는 성인의 태도에 대한 훌륭한 지침이 도기 때문이다. 노자는 [도덕경] 전체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도와 연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13세기 신비주의 철학자 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무지한 사람들이 잘못 상상하듯 신은 자신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만물을 창조했다. 반대로 모든 피조물들은 밖을 향해 흐르지만 신의 안쪽에 머문다.”
주변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도를 배워라. 비, 눈, 추위, 바람을 견디는 나무들을 생각하라. 혹독한 시절이 오면 그들 내면의 자아는 충실하게 이내를 가지고 기다린다. 등명도는 자신의 책 《마음의 눈을 밝혀주는 도 365일》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서 있다. 그리고 기다린다. 그들이 자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안쪽에서는 조금씩 싹이 자라고 있다. 행운이나 불운은 그들을 바꾸지 못한다. 우리도 이와 같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만물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 안에서 자라고 있는 싹을, 언젠가는 열매를 맺게 될 보이지 않는 내면의 그 본성을 사랑해야 한다. “성인은 외면의 것을 버리고 내면의 것을 취한다.”고 한 노자의 말처럼 자신을 사랑하되 뽐내지 마라. 경외하고 받아들여라.
모든 일에서 기적을 보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라. 기적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모든 일을 기적으로 바라보라.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정신적인 권태나 실망을 피할 수 있다. 모든 사람과 사물을 통해 흐르며 그들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도를 보라고 노력하라. 폭풍우가 불가사의한 사건이 되고, 번개는 매혹적인 사건이 된다. 그리고 천둥은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을 일깨우는 놀라운 충고가 된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봄으로써 신비로운 삶을 경험하라.
자신의 몸과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사랑하라.
자신의 몸과 자신의 모든 면을 사랑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라. 그리고 이렇게 다짐하라. 나의 몸은 완벽하다. 아주 적절한 시기에 태어났고, 지금 내 나이도 딱 좋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우주의 완전한 조화 속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내 몸의 자연스러운 행로에 나를 맡긴다.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자신을 몸을 보라. 그러면 노자가 말한 것처럼 “세상은 지치지 않는다”
백성들이 지도자를 존경하지 않고 법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 나라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역으로 만약 백성들이 권력이 있는 사람들, 특히 성인 군주를 존경할 때에는 천하가 다스려지고 정치적으로 안정될 것이다.
다른 한편 군주는 단순하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제17장에서 진술하듯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군주는 그 아래에 최악이 있다 하더라도 최상의 통치자 가운데 세 번째에 지나지 않는다.
군주는 거꾸로 자신의 臣民들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고 백성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어야만 한다. 제17장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최상의 통치자는 아랫사람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을 안다.”고 하였다.
군주는 백성들을 해쳐서도 안 되고 그들의 어깨 위에 무거운 짐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의 다스림은 권력과 富에 대한 이기적 관심에 의존해서도 안 되고, 道와 조화를 이루려는 의도에 근거해야 한다. 그가 백성을 억누르지 않을 때 백성들은 그를 무겁다고 여기지 않는다.(이에 대해서는 제66장과 비교해보라.)
이렇게 해서 互惠的 循環이 확립된다. 이때 백성은 군주를 존경하고 법을 두려워하며 군주는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수고한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서로를 지지하며, 다투거나 싸우는 일이 없게 된다.
백성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큰 위엄이 이르니, ‘가만히 있음’에 소홀함이 없고, ‘조용히 살아감’에 싫증냄이 없다.
맑고 고요하게 〈억지로〉 함이 없는 것(어떤 특정한 기준을 세우거나 일을 벌이지 않아 백성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며 치우침이 없이 하는 것)을 일컬어 ‘가만히 있음[居]’이라 하고,
겸손한 자세로 물러나 채우고자 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조용히 살아감[生]’이라 한다.
〈군주가〉 청정한 〈마음에서〉 떠나 조급히 무언가 하려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고, 겸손한 자세로 물러나는 것을 버리고서 자신의 위엄과 권력에 맡기면 만물이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그의 감시와 법망을〉 피한다.
〈그래서〉 위엄은 백성을 다시 통제할 수 없고 백성들은 그의 위엄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면 위와 아래가 크게 혼란스러워지니 하늘의 징벌이 장차 닥치게 된다.
그래서 “백성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큰 위엄이 이르니, 가만히 있음’에 소홀함이 없고, ‘조용히 살아감’에 싫증냄이 없다.”고 했으니,
이는 ‘위세의 힘[威力]’이란 〈몸을〉 맡길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말한다.
대저 오로지 싫증내지 않으니
스스로 싫증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싫증내지 않는다.
스스로 싫증내지 않기 때문에 천하가 싫증내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스스로 알지만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자신이 아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어 빛을 내거나 위세를 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스스로 아끼지만 스스로 귀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스스로를 귀하다고 여기면 만물이 ‘가만히 있음’을 소홀히 하고 ‘조용히 살아감’에 싫증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73.
勇於敢則殺(용어감즉살) : 감행하는 데 용감한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勇於不敢則活(용어불감즉활) : 감행하지 않는 데 용감한 사람은 살아남는다
此兩者或利或害(차량자혹리혹해) : 이 둘 가운데 하나는 이롭고 하나는 해로운 것이다
天之所惡(천지소오) : 하늘이 싫어하는 것
孰知其故(숙지기고) : 누가 그 까닭을 알리까
是以聖人猶難之(시이성인유난지) : 성인마저도 그것을 어려운 것으로 여긴다
天之道(천지도) :
不爭而善勝(불쟁이선승) : 하늘의 도는 겨루지 않고도 훌륭히 이기는 것이고
不言而善應(불언이선응) :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고
不召而自來(불소이자래) :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고
?然而善謀(천연이선모) : 느슨하면서도 훌륭히 꾸미는 것이다
天網恢恢(천망회회) : 하늘의 그물은 광대하여
疏而不失(소이불실) : 엉성한 것 같지만 놓치는 일이 없다
73장 하늘의 그물 안에서 사는 삶 다른 이들과 부딪치는 용감한 행동은 죽음으로 향하고 도와 조화를 이루는 용감한 행동은 삶으로 향한다. 이 둘 가운데 하나는 이롭고 하나는 해롭다. 하늘의 도는 싸우지 않고도 충분히 이기고 말하지 않고도 적절히 답하며 요구하지 않아도 충분히 채우고 서두르지 않고도 제때에 이룬다. 하늘의 그물은 모두를 제때에 붙든다. 굵고 거칠지만 놓치는 법이 없다. |
다시 한 번 모순의 렌즈를 통해 도를 보라. “하늘의 그물” 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만물이 시작된 보이지 않는 세상이다. 그 그물에는 많은 빈틈이 있고, 그 틈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만 무엇도 도의 조화를 피해서 존재할 수 없다. 73장은 우리에게 하늘의 그물 아래에서 정중하고 주의 깊게 행동하라고 말한다. 여기에 그 핵심을 찌르는 글이 하나 있다.
부주의한 용맹 = 죽음
신중한 용맹 = 삶
그러므로 성인은 신중하게 생각한다.
노자는 우리에게 용기와 허세를 새롭게 바라보라고 한다. 그것을 흠모하며 영웅이 되려 하지 말고 더 주의 깊고 조심스러워져야 한다고 이른다. 무모한 행동을 삼가고 신중하게 머무르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방식임을 명심하라. 노자는 하늘의 그물이 강압적이거나 무모한 방법을 쓰지 않고도 어떻게 모두를 그 품 안에 가두는지 네 가지 보기를 제시한다.
1. “싸우지 않고도 충분히 이긴다.”
평화롭고 고요한 도가 어떻게 해서 항상 이기고 있는지 보라. 태양열을 식히고, 포효하는 바다를 진정시키고, 바람을 가라앉히고, 비를 멈추게 하고, 작물이 그만 자라게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의 노력 없이도 도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자연은 항상 이긴다. 도는 애쓰지 않고도 이 모두를 행한다. 이렇게 하라. 하늘의 그물 안에서 편히 쉬라.
2. “말하지 않고도 적절히 답한다.”
하늘의 그물은 고요하고 보이지 않는다. 그 힘은 명령을 내리거나 고함을 치거나 구슬리지 않고도 당신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우주를 하나로 결합시킨다. 그러므로 더 신중하게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하늘의 방식에 따르라. 더 많이 듣고 덜 말하라. 그리고 당신에게 필요한 대답은 아무런 예고 없이 당신을 찾아올 것임을 믿어라.
3. “요구하지 않아도 충분히 채운다.”
당신은 필요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부탁할 필요가 없다. 하늘의 방식에 따라 신성하고 완벽한 질서 속에 모든 것이 이루어가고 있으며 당신은 그 질서의 한 요소다. 다가오는 모두를 기꺼이 맞아하면 필요한 것을 얻게 될 것이다. 하늘의 그물에 수많은 틈이 있다 하더라도 쉽게 그 사이로 빠져나갈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정해진 때에 맞춰서 이루어진다. 당신은 운명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요구하거나 애쓰지 않고도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경탄할 것이다.
4. “서두르지 않고도 제때에 이룬다.”
도가 어찌 서두를 수 있을까? 하늘에게 다음과 같은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겨울이 지겨워요. 이 길고 추운 밤이 다 가기 전에 아름다운 봄꽃을 가져다줘요. 그리고 감자가 먹고 싶어요. 그 씨를 어제 심었지만 빨리 여물게 해 줘요.” 도는 신의 적절한 타이밍에 따라 적용한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할 때 이루어진다. 도는 하늘의 방식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속도를 조금 늦추라고 조언한다. 당신이 더디다고 생각할지라도 사실은 모두 제때에 일어나는 것이다.
서두를수록 더 적게 이룬다. 10킬로미터를 달린 후에 급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면 땀이 멈추기는커녕 계속해서 흐른다. 그러나 마음을 늦추고 긴장을 푼 채로 땀이 몸을 타고 흐르도록 내버려 두면, 서둘러 샤워를 하는 것과 같은 시간에 땀은 멈추고 더 상쾌한 느낌을 받게 된다. 당신의 에고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진실이다. 모든 것은 하늘의 그물 아래 자기만의 때가 있기 마련이다.
신중함이 약점이나 공포를 드러내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신중함을 한 걸음 물러서는 방법으로 받아들여라. 자연스럽게 상황이 펼쳐지게 하라. 용기는 훌륭한 덕목이지만 무모함, 즉 생각하지 않고 달려드는 것은 재앙을 불러들인다. 노자는 행동하기 전에 먼저 생각하라고 이야기한다. 누군가와 다퉈서 이기려 하지 말고 하늘이 그만의 방식으로 이기도록 내버려 두라.
능동적인 경청자가 되라.
소리 높여 말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 들지 말고 능동적인 경청자가 되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말하지도, 묻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대답과 결과들이 나타날 것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살라. 원하고, 애쓰고, 밀어붙이는 대신 먼저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감히 ~한다(daring)’는 것은 삼가는 것을 선호하는 道家에서 볼 때는 이상해 보인다. 성인은 제3장과 제64장에서 말하듯이 감히 무언가를 하고자 하지 않으며, 제67장에서 말하듯이 앞에 나서고자 하지 않으며, 제69장에서 말하듯이 주인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감히 무엇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노출시켜 위험에 빠지거나 실패할 수 있게 만든다. 적극적인 양식의 행동 대신에 도가적 성인은 逆說的으로 감히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을 감히 한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은 또한 감히 무언가를 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도가의 受動的 성격은 또한 둘째 부분의 논제이다. 대면하지 않고서 성인은 자신의 적을 이겨낸다. 성인의 無爲는 그의 침묵과 나란히 간다. 어떠한 명령도 내리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따르게 된다. 텍스트가 말하는 미리 계획하는 것의 중요성은 제63장과 제64장에서 논의된 ‘시작’에 신중한 것의 중요성에 상응한다.
감히 〈무엇을 하는〉 데에 용감하면 죽을 것이요,
반드시 제대로 된 죽음을 맞을 수 없다는 뜻이다.
감히 〈무엇을 하지〉 않는 데에 용감하면 살 것이다.
반드시 제 명을 다할 때까지 산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는 어떤 것은 이롭고 어떤 것은 해롭지만,
모두 용감함이지만 적용되는 것이 다르고 〈그것이 초래하는〉 이로움과 해로움이 같지 않다.
그래서 “어떤 것은 이롭고 어떤 것은 해롭다.”고 한 것이다.
하늘이 싫어하는 그 이유를 누가 알겠는가? 이 때문에 성인은 오히려 그것을 어렵게 여긴다.
孰은 ‘누구[誰]’란 뜻이다.
이 말은 ‘누가 능히 하늘의 뜻을 알겠는가? 아마도 성인뿐일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대저 성인의 밝음으로도 오히려 감히 무엇을 하는 데에 용감한 것을 어렵게 여기는데, 하물며 성인의 밝음이 없는데도 그렇게 행하고자 함에 있어서랴. 그래서 “오히려 그것을 어렵게 여긴다.”고 했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으면서도 잘 이기고,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않는 까닭에 천하의 어느 누구도 그와 더불어 다툴 수가 없다.
말하지 않아도 잘 응답하며,
〈이러한 하늘의 도에〉 따르면 길하고 거스르면 흉하니, 말하지 않아도 잘 응답한다.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오고,
아래에 처하면 만물이 스스로 돌아온다.
느긋하게 하지만 잘 계획하니,
象을 드리워 吉凶을 보이고 일을 벌이기에 앞서 정성을 다하며 편안할 때에 위급한 때를 잊지 않고 아직 조짐이 드러나지 않을 때에 미리 계획한다.
그래서 “느긋하게 하지만 잘 계획한다.”고 했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커서 엉성하지만 놓치는 것이 없다.
74.
民不畏死(민불외사) :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奈何以死懼之(나하이사구지) : 어떻게 죽음으로 그들을 위협할 수 있겠는가
若使民常畏死而爲奇者(약사민상외사이위기자) : 사람들이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하도록 하고 이상스런 짓을 하는 자가 있어
吾得執而殺之(오득집이살지) : 내가 그를 잡아 죽인다 한들
孰敢(숙감) : 누가 감히 그런 일을 하겠는가
常有司殺者殺(상유사살자살) : 언제나 사람 죽이는 일을 맡은 이가 있어 사람을 죽인다
夫代司殺者殺(부대사살자살) : 사람 죽이는 일 맡은 이를 대신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是謂代大匠?(시위대대장착) : 이것을 일컬어 위대한 목수를 대신해서 나무를 깎는 일과 같다고 하겠다
夫代大匠?者(부대대장착자) : 위대한 목수를 대신해서 나무를 깎는 자
希有不傷其手矣(희유불상기수의) : 그 손을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74장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모든 것이 변함을 알면 아무것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언제나 죽음을 관장하는 이가 있는데 죽음을 관장하는 이를 대신하여 죽이는 것은 위대한 목수를 대신하여 나무를 베는 것과 같다. 위대한 목수를 대신하여 나무를 베는 자는 자신의 손을 베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
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죽음은 우리를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려 놓을까? 아니면 죽음은 모든 생명과 의식의 끝일까? 한 가지만 분명하다. 죽음은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수수께끼라는 점이다. 도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죽음을 시간과 공간과 모든 만물이 그 의미를 잃어버리는 하나 됨의 장소로 생각해 왔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인 셈이다. 외면적인 껍데기 안에 존재하는 형태가 없는 그 무엇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질 것이다. 자신이 가진 무한한 도의 본성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무한한 삶을 살 수 있다. 도의 본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태어남, 삶, 죽음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변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애쓰지 마라. 모든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그러니 어떤 것에도 집착할 필요가 없다. 하나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다른 무언가를 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속적인 재물뿐만 아니라 당신의 육체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자각을 하든 못하든 간에 당신의 몸은 이 글을 읽기 시작할 때와 다르며, 같은 상태에 머무르려고 시도하는 순간 또 다시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본질이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불안해 할 것이고, 결국에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노자가 단언하듯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당신이 가진 도의 본질은 무한하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사물이 아니다. 세상 어디에도 당신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은 육체는 없다. 당신은 참이며 참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당신의 진정한 자아는 도의 일부분이다. 무한한 도와 조화를 이루어 살 때 죽음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가장 고귀한 자아를 깨달아라.당신이 이룰 수 없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라. 이 장의 두 번째 단락은 죽이는 것에 다루고 있다. 여기서 노자는 “언제나 죽음을 관장하는 이가 있다.”라고 아주 명확하게 말한다.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던 바로 그 순간 이 여정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이에 의해 결정된다.
노자가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은 T. S. 엘리엇의 시 [리틀 기딩 Little Giddind] 속에 아름답게 담겨 있다.
우리는 탐험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탐험이 끝날 때면
출발했던 곳에 닿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곳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죽음이다. 두려워할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다. 나는 이것이 노자가 이 장을 통해 당신에게 말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라고 믿는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피부색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도는 태어남, 삶, 죽음, 그 모든 과정 속에 있다. 죽음으로 돌아감으로서 당신은 진정으로 도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다른 생명을 죽이는 습관을 점검하라.
더 이상 사형 집행자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라.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생명조차도 죽이지 않게다고 마음먹고 그렇게 행동하라.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이가 돌아갈 시기를 결정하게 하라. 입을 크게 벌리지 말고 그저 도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자신만의 약속으로 삼아라. 그리고 절대로 당신의 신념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마라. 간섭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도덕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통행본 텍스트와 달리 馬王堆 帛書本은 첫째 부분에 ‘死刑(the death penalty)’에 해당하는 용어가 있어서 - 왕필본은 물론 다른 고대 판본들에도 단지 ‘죽음’을 뜻하는 ‘死’로만 되어 있다. - 말하고자 하는 주제(issue)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사형 제도가 있다는 것은, 전형적으로 역설적인 변화에 따라 결국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제74장은 道家的 抑制 모델(a Daoist model of deterrence)을 묘사하고 있다. 만일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을 즐기며 산다면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들은 사형을 무서워 할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누구도 ‘감히’(이는 앞장의 ‘감히 ~함’에 관한 도가적 견해와 비교해보라.) 법을 어기거나 사회의 자연적 질서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둘째 부분에 나오는 ‘나’는 성인 군주를 가리킨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오로지 성인 군주만이 사형제도를 관리할 수 있다. 그만이 홀로 사사로움이 없기에(because of his empty self)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어떤 적을 제거하기 위해 사형제도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도에 따라 행하는 완전히 치우침이 없는 군주에게만이 生死與奪權(the power over life and death)을 맡길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를 대신하여 이러한 기능을 맡는다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모델에서 사형은 오로지 예방 차원으로만 작동할 것이다. 사형제도는 그것이 사용되지 않는 동안만큼만 작동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스스로 폐기될 것이다.
만약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지도자가 사형제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는 反目과 對立을 낳고야 말 것이다. 백성들은 그의 통치를 獨裁로 보고 그에 대항할 음모를 꾸미게 될 것이다.
결국에는 적극적으로 사형제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그 제도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만약 누군가 폭력과 복수가 난무하는 사회적 풍토를 만든다면 그 자신 또한 그러한 풍토에서 벗어날 수 없다. 권력이 이동할 때 그가 다른 사람을 다루었던 것과 유사하게 그 또한 다루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백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죽음으로 두렵게 하겠는가!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게 하여도 기이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잡아서 죽일 수 있으니, 누가 감히 그렇게 하겠는가?
속임수와 신기한 것으로 무리를 어지럽히는 것을 일컬어 ‘기이하다[奇]’고 한다.
늘 죽이는 일을 담당하는 자를 두어 죽인다.
대저 죽이는 일을 담당한 자를 대신해서 죽인다면 이것은 뛰어난 목수를 대신해서 나무를 다듬는 격이니, 무릇 뛰어난 목수를 대신해 나무를 다듬는 자는 손을 다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반역은 순종하는 자들이 미워하고 분노하는 것이요, 어질지 못한 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늘 죽이는 일을 담당하는 자를 둔다.”고 했다.
75.
民之饑(민지기) : 백성이 굶주리는 것
以其上食稅之多(이기상식세지다) : 윗사람이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 먹기 때문이다
是以饑(시이기) : 그 때문에 굶주리는 것이다
民之難治(민지난치) :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
以其上之有爲(이기상지유위) : 윗사람이 뭔가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是以難治(시이난치) : 그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民之輕死(민지경사) :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
以其上求生之厚(이기상구생지후) : 윗사람이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是以輕死(시이경사) : 그 때문에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夫唯無以生爲者(부유무이생위자) : 삶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
是賢於貴生(시현어귀생) : 삶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보다 더 현명하다
75장 덜 요구하는 삶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세금을 지나치게 거두어 가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영혼을 잃는 것은 나라가 지나치게 간섭하기 때문이다. 백성의 이로움을 위해서 행하라. 그들을 믿고 그냥 내버려 두라. |
이 장는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 계층과 귀족들을 향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여러 전쟁을 거치면서 군주들이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재화를 계속해서 거둬들였다. 과중한 세금과 부역의 부담을 짊어진 사람들은 충성심과 영혼을 잃어갔고 결국에는 자신들에게 씌워진 굴레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신은 어쩌면 자녀들이나 직장의 부하직원들같이 당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요구해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자는 오히려 정반대라고 말한다. 너무 많이 요구하지 말고 가능한 그냥 내버려두라. 정치인이 대중에게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당신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있다.
정부 관리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사업을 진행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더 많은 돈을 거둬들이고자 한다. 그들은 특권을 이용해 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이 자신들에게 급여를 주고 자신들의 모든 유익을 제공하는 바로 그 사람들을 향해 악용되도록 방치한다. 사실 세금을 내는 사람은 세금을 거두는 사람에 비해 그 혜택을 헐씬 덜 누린다. 달리 말하면 규칙을 만드는 자와 권력을 가진 자는 그 지위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지나치게 되면 사람들은 불안해지고 갈등이 생기며 권위를 인정하는 마음도 사라진다. 그렇게 “백성들은 영혼을 잃는다.”
스스로에게 너무 높은 세금을 강요하지 마라.
너무 많은 세금을 거두면 사람들의 영혼이 피폐해질 거라는 노자의 조언은 당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신에게 과도한 요구를 해서 부담을 갖게 되면 당신은 우울, 불안, 근심, 심장질환, 혹은 다른 수많은 육체적 질병에 시달리거나 지쳐서 쓰러져버릴 것이다. 부담을 떠안은 중압감에서 쉴 수 있도록 자신에게 휴식을 주라. 자연을 가까이하고, 아이들과 어울리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혹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시간을 충분히 허락하라.
당신이 이끌도록 위임받은 사람들을 신뢰하라.
당신이 돌보고 감독해야 하는 사람들을 감시하려 하지 마라. 그들이 능숙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들을 신뢰하라. 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도의 운명을 충실히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덜 요구하고 더 많이 격려하라. 자기만의 탁월함을 갖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라. 당신이 그들을 믿으면 그들도 스스로를 그리고 도의 지혜를 믿게 될 것이다.
살아 있을 때 중요한 것은 지나치지 않게 사는 것(to live excessively)이다. 오로지 이렇게 할 때에만 衰弱과 夭折을 피할 수 있다. 어떠한 종류의 탐닉이건 생명에 해가 된다.
한 나라에서 백성들이 겪는 飢餓는 그 나라 통치자들의 過慾 때문이다. 나쁜 통치자(a bad regent)는 글자 그대로 백성들에게 죽음을 부과할 수 있다. 그런 근시안적인 통치자는 오로지 단기간에 개인적 이익을 챙기고자 ‘적극적인’ 척도를 취하기에, 그의 권위를 뿌리부터 파먹고 국가의 무질서를 초래한다. 이것이 첫째와 둘째 부분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와 유사하게 지나치게 산다는 것은 죽음을 가벼이 다루는 것이며 따라서 삶 또한 그러하여 결국 요절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지나친 군주가 ‘좋은 삶(the good life)’에 대한 그의 갈망으로 인하여 그의 나라를 파괴하듯이 그러한 사람 또한 모든 종류의 지나침에 빠짐으로써 자신의 몸을 파괴할 것이다.
道에 따라 산다는 것은 이와 달리 사람이 바랄 수 있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산다는 것은 동시에 제50장에서 진술하듯이 죽음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자신의 자원을 함부로 쓰지 않는 사람들만이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다.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윗사람들이 받아먹는 세금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굶주리는 것이다.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윗사람들이 무언가 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윗사람들이〉 풍요로운 삶만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오직 〈풍요로운〉 삶을 위함이 없는 것이 삶을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낫다.
백성이 〈법망을〉 피하는 까닭과 다스림이 어지러워지는 까닭은 모두 위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그 아랫사람들로부터 말미암는 게 아니니 백성은 윗사람을 따르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76.
人之生也柔弱(인지생야유약) :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其死也堅强(기사야견강) : 죽으면 단단하고 강해진다
萬物草木之生也柔脆(만물초목지생야유취) : 풀과 나무같은 온갖 것들도 살아 있으면 부드럽고 연하지만
其死也枯槁(기사야고고) : 죽으면 말라 뻣뻣해진다
故堅强者死之徒(고견강자사지도) : 그러므로 단단하고 강한 사람은 죽음의 무리이고
柔弱者生之徒(유약자생지도) : 부드럽고 약한 사람은 삶의 무리이다
是以兵强則不勝(시이병강즉불승) : 그래서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木强則兵(목강즉병) : 나무가 강하면 꺾이고 만다
强大處下(강대처하) : 강화고 큰 것은 밑에 놓이고
柔弱處上(유약처상) :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놓이게 된다
76장 굽힐 줄 아는 삶 사람이 태어날 때는 온화하고 약하지만 죽으면 단단하고 뻣뻣해진다. 만물 초록도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약해지만 죽으면 마르고 쉽게 부서진다. 그러므로 단단함은 죽음의 동반자요. 유연함은 삶의 반려자이다. 물러설 줄 모르는 군대는 패하고 굽힐 줄 모르는 나무는 부러진다. 단단하고 뻣뻣한 것은 깨지고 부드럽고 유연한 것은 널리 퍼진다. |
노자는 강하다는 개념을 다르게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그는 부드럽고 유연하고 심지어는 약하기도 한 것들이 어떻게 해서 세상에서 가장 견고하고 오래가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이야기한다. 만약 단단하고 경직되고 완고한 것을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인식을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 노자에 따르면 삶은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들을 바라보라. 그 아이들은 너무나 유연해서 자신의 발가락을 입으로 빨기도 하고 발을 쉽게 목뒤로 올리기도 한다. 태어 난지 몇 달이 지나면 아이들은 요가의 달인이 된다. 좀 더 크면 더 경이로운 모습과 마주친다. 아이들은 넘어져 머리가 땅에 부딪치기도 하고, 앞을 보지도 않고 달리다 벽을 들이 박기도 한다. 또 지저분헤 보이는 도랑에 처박히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금세 털고 일어난다. 어른들은 뼈나 관절이 상했을 만한 일을 겪고도 아이들은 상처하나 입지 않는다.
같은 이유로 고목은 죽음에 다가설수록 단단하고 부서지기 쉬워서 불이나 바람을 견디기 어렵다. 잘 굽혀지지 않기 때문에 강한 바람이 불면 꺾여 넘어질 수도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무가 약해지는 것은 바로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강함이라고 생각하는 이 단단함이 사실은 나무를 약하게 만들어버린다.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은 죽음을 맞으면 사후 경직이 일어난다. 이는 완벽한 단단함이며, 그러한 강함은 결국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굽힐 수 있고 유연하다는 것은 노화의 과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원리를 당신의 사고 과정과 행동에 적용하라고 말한다. 또한 유연함과 약함이 곧 삶이며, 단단함과 뻣뻣함은 죽음을 동반한다고 일깨워준다. 그동안 얼마나 굳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지로 강함을 가늠하고, 굽히는 것은 약함이라고 배워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직되어서는 오래갈 수 없으며, 유연해야만 모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음을 잊지 말라.
굽힘으로써 강해져라.
태풍의 한복판에 서 있는 갈대가 되라. 갈대의 약함이 혹독한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게 하는 강함이 된다. 당신과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더 많이 들어라. 사람들이 당신의 관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하라. 필요하다면 굽혀라. 그렇게 하는 것이 사실은 강함을 선택하는 길임을 이해하라. 다름을 거부하고 경직된 방식으로 생각할수록 더 쉽게 깨진다. 노자가 말해 주는 것처럼 “부드럽고 유연한 것은 널리 퍼지는” 반면 “단단하고 뻣뻣한 것은 깨지게” 된다.
굽힐 줄 모르는 태도를 점검하라.
사형제도, 특정 약물의 합법화, 낙태, 총기 소지, 산아 제한 방법, 세금제도, 에너지 절약, 그리고 당신의 확고부동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기타, 다른 문제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지켜보라.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 보라고 노력하라. 그들이 제시하는 반론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래의 오래된 농담 속에 뼈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내 방식이다.
네 방식은 어떤 것이냐?
그런 방식은 없다.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양쪽의 지도자들이 최소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한다면 죽고 사는 정도로까지 대립이 악화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귀를 기울이고, 굽힐 줄 알고, 온화해질 때 우리는 모두 삶을 통해 배우게 된다.
柔弱함과 堅强함은 각각 살아 있음과 죽어 있음의 특질이다.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유연한 데 반해, 죽으면 이러한 특질을 잃어 딱딱하고 말라비틀어진다. 자연에서 이러한 특질들은 동물과 식물 또는 인간의 상태를 나타내준다.
《노자》의 맥락에서 ‘지배’는 한 사회의 상태 그리고 통치와 전쟁의 전략에 적용될 수 있다. 국가나 군대를 이끌고자 하는 사람들은 만약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부드러움과 유연한 전술을 따라야만 한다. 경직되게 다스리거나 전쟁에 직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깨지거나 패배하게 될 것이다. 부드러운 것과 연약한 것은 딱딱한 것과 강한 것보다 우월하며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이겨낼 것이다. 제36장과 제78장이 설명하고 있듯이 말이다.
마지막 부분은 부드러운 것과 연약한 것을 위에 있는 것과 동일시하고 딱딱한 것과 강한 것을 아래에 있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것은 제61장과 같이 낮은 자리를 지배적인 자리와 동일시하는 다른 장들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래’와 ‘위’라는 말은 헨릭스(Robert G. Henricks)의 견해처럼 ‘열등한’과 ‘우월한’이란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게 되면 딱딱하고 굳어진다.
萬物과 草木도 살아 있을 때에는 부드럽고 여리지만 죽게 되면 마르고 딱딱해진다.
그러므로 딱딱하고 굳은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이 때문에 군대가 강하면 이기지 못하고,
강한 군대로 천하에 난폭한 짓을 하는 것은 만물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승리할 수 없다.
나무가 강하면 베어지고
〈이러한 베어짐은〉 만물이 가하는 것이다.
강하고 큰 것은 아래에 처하고,
나무의 뿌리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위에 처한다.
나뭇가지가 이에 해당한다.
77.
天之道(천지도) : 하늘의 도는
其猶張弓與(기유장궁여) : 활을 당기는 것과 같다
高者抑之(고자억지) : 높은 쪽은 누르고
下者擧之(하자거지) : 낮은 쪽은 올린다
有餘者損之(유여자손지) : 남으면 덜어주고
不足者補之(불족자보지) : 모자라면 보태 준다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천지도손유여이보불족) : 하늘의 도는 남는 데서 덜어내어 모자라는 데에 보태지만
人之道則不然(인지도즉불연) : 사람의 조는 그렇지 않아
損不足以奉有餘(손불족이봉유여) : 모자라는 데서 덜어내어 남는 데에 바친다
孰能有餘以奉天下(숙능유여이봉천하) : 남도록 가진 사람으로 세상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唯有道者(유유도자) : 오로지 도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是以聖人爲而不恃(시이성인위이불시) : 그러므로 성인은 할 것 다 이루나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고
功成而不處(공성이불처) : 공을 쌓으나 그 공을 주장하지 않는다
其不欲見賢(기불욕견현) : 자기의 현명함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 아니겠는가
77장 남는 것을 나누는 삶 하늘의 도는 마치 활을 당기는 것과 같아서 높으면 누르고, 낮으면 올린다. 하늘의 도가 남는 것을 덜어내고 모자란 것을 채운다면 사람은 그와 반대다. 모자라는 데서 덜어내어 남는데 바치고 넘치게 가진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곤궁한 사람에게서 빼앗는다. 넘치게 가진 사람 중에 세상을 위해 그것을 내놓을 자 누구인가? 오직 도를 품은 사람만이 남은 것을 남에게 준다. 성인은 끊임없이 주는데, 이는 그의 넉넉함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기대 없이 행하고 공을 이루고도 주장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누구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하늘의 도를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자연이 완벽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도는 보이지 않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가뭄, 홍수, 태풍, 폭우와 같은 자연 현상들이 때로는 매우 끔찍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현상들로 인해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실은 곤충이나 새, 동물 무리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취미와 오락을 위해 생명을 죽이는 것은 넘치는 과잉을 스스로 해결하는 자연의 체계를 뒤엎는다. 도는 “남는 것을 덜어내고, 모자라는 것을 채운다.” 자연을 관찰하고 만약 모자라는 것이 있다면 그 모자란 데서 덜어내지 말라고 노자는 말한다.
[도덕경] 마지막 부분의 장들은 도를 통해 대중을 다스리는 법에 대해 다루고 있다. 노자는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수탈하는 정치권력자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악습의 증거들을 무수히 발견한다. 특히 법률을 만드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더 큰 혜택을 주는 법안에 동의한다. 그들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로부터 빼앗아서 넘치도록 가진 사람들을 섬기고 스스로에게 후하게 베푼다. 기아 문제가 심각한 나라에서도 한쪽에선 영양실조로 사람들이 죽어갈 때, 다른 한쪽에선 음식과 생필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77장은 세상의 다른 한편에 존재하는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남는 것들을 다시 순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제안한다. 노자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만 필요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도를 실천할 기회로 삼으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장의 지혜가 우리 삶 속에 살아 움직이게 하라고 요청한다. 정부 정치 지도자들은 혹은 산업계의 장들이 아닌 바로 우리를 향해 이야기한다. “남도록 가진 사람 중에 세상을 위해 그것을 내놓을 자 누구인가? 오직 도를 품은 사람들뿐이다. 많은 사람이 도를 품으면 그중에서 다스리는 위치에 오를 사람이 나오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이 장에서 제안하는 삶의 방식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남는 것을 덜어 내라.
삶에서 남는 것을 덜어내어 그것이 활용할 수 있는 곳에 가져다주라. 가지고 있는 물건들로부터 시작해 보자. 옷, 가구, 공구, 비품, 라디오, 카메라 등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필요한 사람에게 주라. 가능하면 팔지 말고 그냥 주라. 베풀었으니 알아달라고 보채지 마라. 남는 것을 덜어 내는 것으로 도와 조화를 이루어 행동하라.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건강, 기쁨, 어짊, 사랑, 그리고 내면의 평화와 같은 무형의 풍요로움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러한 멋진 감정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건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
부족함을 채우는 도구가 되라.
순환을 통해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자연처럼 결핍이 있는 곳이 눈에 띄거든 그 부족함을 채우는 도구가 되라. 벌어들인 것 중 일부는 부족함을 채우는 데 쓰일 수 있도록 하라. 노자가 강조하는 것처럼 “성인은 끊임없이 주는데, 이는 그의 넉넉함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돈을 주기 어렵다면 고요한 축복의 말을 건네라. 구급차나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기도를 올려라. 돈이나 재물과 같은 물질적인 수단을 통해서 혹은 어짊, 열정, 환희, 용서와 같은 비 물질적인 형식에 담긴 사랑으로 빈 공간을 메울 수 있는 기회를 찾아라.
제40장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逆轉(reversal)은 道의 운동이다. 첫째 부분은 자연 속에서 그러한 역전을 묘사하고 있다. 하늘 또는 자연은 심지어 사물을 탈락시키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종종 역전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제77장은 함축하고 있다.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 이것은 사회를 ‘부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이끈다. 그러한 경향을 예방하고 대신 사회가 자연과 道에 일치하도록 발전시키고 지키는 것이 성인 군주의 의무이다.
만약 성인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자연의 리듬에 사회가 일치하도록 한다면, 공급의 부족이나 음식의 결핍은 사라질 것이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농업 활동을 통해 자연의 향상에 공헌하게 될 것이다.
오로지 도에 따라 작동하는 사회만이 이런 식으로 번영할 수 있다. 그러한 사회에서는 성인 군주는 스스로를 위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으며, 심지어 名譽조차 거부할 것이다. 그의 지배는 인간적 존경에 근거하지 않고 도와의 조화에 근거하고 있다.
하늘의 道는 아마도 팽팽하게 당겨진 활과 같을 것이다! 높은 것은 눌러주고 낮은 것은 들어올리며, 남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태준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내고 부족한 것을 보태어주지만, 사람의 도는 그렇지 않아
〈대인은〉 天地와 더불어 德을 함께하니 능히 〈만물을〉 끌어안음이 하늘의 도와 같다.
〈만약 성인의 도가〉 사람과 같은 역량이라면 각각 제 몸을 갖고 있기에 서로 고르게 할 수가 없고, 만약 자연스러움의 경지에서 제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사로움이 없이 한다면 그런 후에야 비로소 천지와 더불어 덕을 함께할 수 있다.
부족한 것을 덜어 남는 것을 받드니 누가 남는 것으로 천하를 받들 수 있겠는가? 오로지 道가 있는 자만이 그럴 것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하되 의지하지 않고, 공이 이루어져도 처하지 않으며, 자신의 현명함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
누가 가득한 데에 처해 있으면서 비움을 온전히 하고, 있는 곳에서 덜어서 없는 곳에 보태며, 〈눈부신〉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함께하고, 평평하면서도 고르게 할 수 있는 자인가? 오직 도를 가진 자일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자신의 현명함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고르게 한다는 말이다.
78.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强者, 莫之能勝, 以其無以易之. : 그런 까닭에 성인은 자신이 해놓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도 자기의 공이라고 자처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현명한 것을 나타내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의 유여(有餘)한 것을 덜어서 남의 부족한 것에 보충하는 것이다.
弱之勝强, 柔之勝剛, 天下莫不知, 莫能行. : 천하에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는 능히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 어떤 것도 물과 바꿀 만한 것이 없다.
是以聖人云, 受國之垢, 是謂社稷主, 受國不祥, 是謂天下王. : 약한 것(물)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모진 것을 이기는 것을 천하에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을 능히 자신에게 옮겨서 실행하지는 못한다.
正言若反. : 그런 까닭에 성인은 말한다. '나라의 온갖 구욕(垢辱)을 자신에게 받아들여 용납하는 자를 사직(社稷)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온갖 상서롭지 않은 일을 자신에게 받아들여 참는 자를 천하의 왕자(王者)라고 한다.'
78장 물처럼 사는 삶 세상에 물처럼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나 강하고 단단한 것을 부수는 데는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세상에 이를 대신할 것이 없다. 약함이 강함을 이기고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넘어선다는 것을 온 세상에 모르는 이가 없지만 누구도 이를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불행의 한복판에 고요하게 머무름에도 나쁜 기운이 그의 심장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는 도우려고 하지 않기에 사람들에게 가징 큰 도움이 된다. 진실의 말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
노자는 바다, 비, 안개, 눈, 그리고 강과 작은 물줄기의 비유를 통해 계속해서 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노자는 정신적인 힘을 모든 자연 속에서 찾고 있지만, 특히 물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특별히 경외의 마음을 품고 있다. 물과 같아야 한다는 말은 [도덕경] 전체에 걸쳐서 계속 등장한다. 물은 이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도에 가깝고, 따라서 이는 도를 가르치는 데 있어 완벽하게 어울리는 상징인 셈이다.
물은 우리에게 도만큼이나 신비롭고 오묘하다. 당신이 강물 속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단단히 움켜쥐려고 하면 결국 모두 잃고 만다. 잡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손에 힘을 뺀 채 물과 하나가 되기 전에는 붙잡을 수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놓음으로서 그것을 얻는다. 노자는 신비로운 물의 모든 방식들을 따르라고 말한다. 설령 그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해도 말이다.
1. 굽힘으로서 삶의 단단한 부분들을 극복하라! 부드럽게 흐르는 물이나 끊임없이 떨어지는 낙수처럼 뻣뻣함과 경직됨은 지속된 온화함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부드럽게 행하고 기꺼이 굽혀라. 가혹함과 무자비함의 저항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라. “강하고 단단한 것을 부수는 데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2. 물은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물은 매우 유연해서 강한 것들 아래에서 자신만의 높이를 찾고, 단단한 것들이 방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제방을 쌓아 물이 새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하라. 그러나 그렇게 해보았자. 시간이 흐르면 물이 승리할 것이다. “약함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에는 당신을 위한 힘 있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부드럽게 행하고 기꺼이 자신을 낮추며, 약함을 드러내 보여라. 그러면 나쁜 기운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3. 물은 너무 부드러워 해칠 수도, 상처를 입힐 수도, 부술 수도 없다. 물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뿐이다. 끓여보라. 그러면 그것은 증기가 되어 공기 속으로 되돌아간다. 마셔보라. 그러면 그것은 당신의 몸을 적시고는 마찬가지로 되돌아간다. 더럽혀 보라. 충분한 세월이 흐르면 다시 이전의 맑은 상태로 되돌아 갈 것이다. 당신도 부드러움을 실천해서 단단함을 넘어 선다면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강함과 약함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라.
단단함, 경직됨, 강압, 독단 등과 같은 상투적인 이미지는 결코 강함의 속성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특성들 때문에 부드러움 혹은 약함이라고 불러온 것들에게 압도되고 제압당할 것이다. 이 모두를 이제는 다르게 바라보라. 그리고 당신의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라. 약하고 부드러운 상태에 머무르는 사람에 감탄하고 그들을 따라할 때 자신의 내면에서 도를 실천하는 진정한 강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간섭하고 도와주는 것은 그만 두라. 그 대신에 당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물처럼 흐르는 쪽을 택하라. 온하하게. 부드럽게. 겸손하게.
물처럼 부드러워 져라.
마치 물처럼, 열린 곳이라면 어디로든 흘러라. 우격다짐으로 지배하려 들지 마라. 반대되는 의견들을 너그럽게 받아 들여서 자신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다듬어라. 덜 간섭하라. 말하고 지시하기보다는 귀를 기울여라. 다른 누군가가 무엇을 제시하면 “감사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고려해보겠습니다.”라고 답하도록 노력하라.
물은 道의 형상이고 聖人의 길잡이이다. 제61장에서 말하듯이 萬物은 아래에 처하는 강과 바다로 흘러든다. 이 장에서는 물의 다른 특징으로, 물은 氣로 이루어진 것 가운데 가장 부드러운 것이지만 또한 단단한 바위조차 이긴다고 말한다. 마치 물은 ‘함이 없으나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無爲而無不爲]’ 것처럼 작용한다. 또한 “바른말은 마치 반대로 하는 말과 같다.”는 것은 《老子》의 유명한 逆說의 언어를 잘 보여준다.
이 장의 첫 부분도 제28장과 제67장처럼 性的으로 이해될 수 있다. 柔弱이 암컷과 연결된다면 强剛은 수컷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의 비유에 의존하는 이 장은 제28장의 “수컷다움을 알고서 암컷다움을 지킨다.”는 생각과도 통한다. 《老子》는 이와 같이 雌雄의 이미지에서 柔弱의 이미지로, 그리고 水와 같은 이미지로 다양하게 이동하면서 사유와 실천의 지침을 암시하는 특징적인 수사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또 1930년대에 美國에서 활동한 中國의 文人 林語堂은 이 장에 나오는 “나라의 더러움을 받아들이는 자를 일컬어 社稷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상서롭지 못한 일을 받아들이는 자를 일컬어 천하의 왕이라 한다.[受國之垢 是謂社稷之主 受國之不祥 是謂天下之王]”는 말을, 기독교의 《성경》 〈요한복음〉 1:29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와 유사한 톤으로 번역하여 서구의 독자들을 주목시키기도 했다. 《老子》의 警句的이고 詩的인 표현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이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지만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는 데에는 〈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물〈의 부드럽고 약한 성질〉을 쓰지만 어떤 것도 그것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注
以는 ‘쓰다[用]’는 뜻이고, 其는 ‘물’을 이른다.
물의 부드럽고 약한 〈성질을〉 쓰지만 어떤 것도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것과 부드러운 것이 강건한 것을 이기는 것은 천하 사람이 다 알지만 능히 행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이 때문에 성인의 말씀에 “나라의 더러움을 받아들이는 자를 일컬어 社稷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상서롭지 못한 일을 받아들이는 자를 일컬어 天下의 왕이라 한다.”고 했다.
바른말은 마치 반대로 하는 말과 같다.
79.
和大怨(화대원) : 깊은 원한은 화해하더라도
必有餘怨(필유여원) : 여한이 남는 법이다
安可以爲善(안가이위선) : 이것이 어찌 잘된 일이라 하겠는가
是以聖人執左契(시이성인집좌계) : 그러므로 성인은 빚진 자의 입장에 서서
而不責於人(이불책어인) : 사람을 다그치는 일이 없다
有德司契(유덕사계) : 덕이 있는 사람은 계약을 관장하고
無德司徹(무덕사철) : 덕이 없는 사람은 조세를 관장한다
天道無親(천도무친) : 하늘의 도는 편애하는 일이 없이
常與善人(상여선인) : 그저 언제나 선한 사람의 편에 설 따름이다
79장 원한을 남기지 않는 삶 크게 다투면 화해를 하더라도 원한이 남는다. 거기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언제나 결국에는 최선이다. 손해가 있어도 어진 마음으로 감당해야 한다. 적의는 결코 선의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성인은 항상 주되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 덕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줄 방법을 찾고 덕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받을 방법만 찾는다. 주는 사람에겐 삶의 충만함이 함께하고 받기만 하는 사람에겐 빈손만 남는다. |
논쟁 후에 짜증과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대대의 경우 다른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했고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했는지 상세한 목록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그따위로 말하면 나에게도 충분히 화를 낼 권리가 있다!”라고, 그러나 당신이 도를 따르는 삶을 원한다면 이런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원한은 상대방의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원한이라는 것은 어진 마음이나 사랑, 진정한 용서를 통해 그 다툼을 끝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돌아오는 손해를 어진 마음으로 감당해야 한다. 적의는 결코 선의가 되지 못한다.”라고 노자는 말한다. 악쓰고, 소리치고, 윽박지르는 모든 일들이 벌어지고 나면 고요함을 위한 시간이 찾아온다. 영원히 몰아치는 폭풍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는 언제나 평온함의 씨앗이 숨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대립하는 순간이 있다면 평화를 위한 시간도 있게 마련이다. 다툼의 폭풍이 잠잠해지면 당신의 에고는 옳음을 주장하려고 하는데, 이런 욕구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분노를 내려놓고 어진 마음을 펼칠 시간이다. 그걸로 끝이다. 그러니 상대방과 자신을 용서하고 원한을 날려 버려라. 노자가 이 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라. 당신이 진정한 덕을 품고 산다면 언제나 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도와 완벽하게 어우러진 삶이다. 즉 생명의 창조자는 언제나 주되 결코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족함과 원한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어떻게 하면 섬길 수 있을까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해 보라. 온 우주가 반응할 것이고, 당신도 결국 행하게 될 것이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을 향해 나아가라.
싸움이나 격렬한 논쟁을 끝마친 당신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라. 분노와 복수에 대한 욕망 그리고 상처를 남기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어짊과 사랑과 용서를 건네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라.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 이렇게 진정한 덕을 통해 당신이 지금 품고 있는 모든 원한들을 녹여내라. 미래에 어떤 다툼을 겪게 되더라도 다음과 같은 대답을 기본으로 삼아라. “나는 무슨 일리 있어도 사랑을 향해 나아간다.”
◎ 주는 연습을 하라.
논쟁과 다툼이 생기면 먼저 주는 연습을 실천하라. 헐뜯고 비방하기보다는 어진 태도를 보이고 상대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는 존중의 신호를 보냄으로써 도와 덕을 실천하라. 주는 것은 에고를 잊는 것이다. 에고가 우월함을 뽐내고 이기기를 원하는 반면에 도의 본성은 화해하고 조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이처럼 받는 대신에 나눠줌을 실천하면 다투는 시간을 없애 수 있다.
제79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 따라서 설명될 수 있다. 군주의 의무에는 정치와 전쟁과 함께 법적 문제와 徵稅가 포함된다. 道家的 관점에서 볼 때 주요 목적은 전쟁에 대한 최선의 태도가 그것을 피하는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선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불평불만이 진정된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유해한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분쟁의 씨앗(quarrel)조차도 조화로운 사회(frictionless society)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대 중국에서 契約의 징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왼쪽 반은 채권자측(the side that had some claims)이 갖고, 반면 오른쪽 반은 채무자측(the indebted one)이 갖는다. 군주는 평소 징표의 왼쪽과 동일시되는데, 이는 그가 채권자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역설이라는 도가적 규칙은, 모든 것을 합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군주는 결국에는 그의 신민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함축한다. 군주는 왼쪽 반의 징표를 꽉 쥐고는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으며, 특히 피통치자들에게 불이익이 될 경우에 그러하다.
그의 통치는 오로지 그의 ‘德’에 의해 가능해진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는 도전받지 않는 상태로 있게 되고 또한 어떠한 불만도 예방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왼쪽 징표 모두를 갖고 있을 때조차 그것을 자신의 사적인 이익이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니, 백성들에게 과하게 징세하는 것을 피한다.
비슷하게 군주는 어떤 특별한 호의도 베풀지 않는다. 그는 어떤 특정 집단을 자신의 親族처럼 대하지 않는다. 완벽한 공평함을 유지함으로써 그는 백성들 사이의 불만 그리고 그와 그의 권력에 대한 원망 모두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커다란 원한은 풀어주어도 반드시 원한의 앙금이 남기 마련이니,
注
본래 맺었던 계약을 밝게 다스리지 못하여 커다란 원한이 생겼는데 이를 덕으로 화해하고자 하나 그 상처는 회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반드시 원한의 앙금이 남는 것이다.
어찌 잘했다고 여기겠는가? 이 때문에 성인은 左契를 잡고서도
注
左契는 원한이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을 막아준다.
다른 사람에게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덕이 있는 사람은 계약을 잘 살피고,
注
덕 있는 사람은 계약을 잘 생각하여 원한이 생기지 않도록 한 뒤에 다른 사람에게 〈갚으라고〉 요구한다.
덕이 없는 사람은 사람들의 過誤를 살펴보는 일을 담당하니
注
徹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살펴본다는 뜻이다.
하늘의 도는 끈끈한 정이 없어 늘 훌륭한 사람과 함께한다.
80.
小國寡民(소국과민) : 인구가 작은 나라
使有什佰之器而不用(사유십백지기이불용) : 열 가지 백 가지 기계가 있으나 쓰이지 않도록 하라
使民重死而不遠徙(사민중사이불원사) : 백성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가는 일이 없게 하라
雖有舟輿(수유주여) :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無所乘之(무소승지) : 타는 일이 없고
雖有甲兵(수유갑병) : 비록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無所陳之(무소진지) : 내보일 일이 없다
使人復結繩而用之(사인부결승이용지) : 사람들 다시 노끈을 매어 쓰도록 하고
甘其食(감기식) : 음식을 달게 여기며 먹도록 하고
美其服(미기복) : 옷을 아름답게 생각하며 입도록 하고
安其居(안기거) : 거처를 편안하게 생각하여 살도록 하고
樂其俗(락기속) : 풍속을 즐기도록 하라
隣國相望(린국상망) :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이고
鷄犬之聲相聞(계견지성상문) :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리지만
民至老死不相往來(민지로사불상왕래) : 사람들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다
80장 자신만의 낙원에서 사는 삶 백성이 적은 나라를 떠올려보라. 그들은 무기가 있으나 쓰지 않는다. 그들은 직접 손을 써서 일하기를 즐기고 도구를 만드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멀리 가지 않는다. 거처가 편안하여 이동에 관심이 없다.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는 이가 없다. 그들은 음식이 좋아 만족하고 옷이 편안하여 기뻐하며 집이 아늑하여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의 풍속을 이어간다. 이웃나라가 서로 바라다 보이고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만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평화롭게 내버려 둔다. |
이 장에서 노자는 충돌이 없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무기가 있을지언정 쓸 일이 없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다. 고대 중국의 성인은 자연에 가까이 머무르고 삶의 기본적인 요소들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기술문명의 이로움과 고급 자동차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만족을 준다고 말하는 듯하다. 땅을 가까이하고, 직접 손을 써서 일하며 이웃과 경쟁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2500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세상이 엄청나게 변한 것은 틀림없지만 이 장에 담긴 노자의 충고는 21세기를 위한 지혜 그 이상을 전한다.
무기라는 것이 그저 과거의 흔적으로서 존재하며 폭력적이고 어리석었던 역사를 보여주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박물관에 전시된 세상을 상상해 보라. 당신은 거기에 전시된 다양한 다툼들을 보면서, 같은 몸에 기생하고 생존을 위해 그 몸과 서로에게 의존하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죽이고 결국에는 그 숙주마저 파괴하는 미생물과 인류가 서로 닮아 있다고 느낄 것이며, 전쟁은 무분별하고 파괴적인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 도처에서 벌어졌던 다툼들을 살펴보면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증오와 대립이 이치에 맞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어째서 땅을 공유하고 평화롭게 어울려 살 수 없었을까? 무엇이 다른 사람들을 죽여야 할 만큼 중요했던 것일까? 최근에는 앙숙이었던 나라들이 서로 동맹을 맺기도 한다. 그토록 서로를 죽이려고 했던 그 모든 다툼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생명을 주는 도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대단히 복잡하게 뒤얽혀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질문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이 장은 자신만의 낙원에 살고자 한 당신의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증오, 살인, 전쟁, 그리고 뒤를 잇는 협력을 거쳐 다시 폭력의 사이클로 이어지는 불합리한 순환에서 빠져나오라고 제안한다. 단순하게 살고 누군가를 지배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당신은 평화로운 존재의 근본으로 돌아갈 수 있다. 전쟁 도구들을 자꾸 만들어내려는 낌새가 보인다면 충돌을 평화롭게 해결하고자 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던져라. 당신은 그런 선택을 통해 본질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새 기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일하는 쪽을 택할 수 있고, 손으로 직접 글을 쓰며 그 느낌을 택할 수도 있다. 차를 운전하는 대신에 걷기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계산기의 도움 없이 셈을 하고 관계를 친밀하기 위해 전화번호를 외우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수고를 덜어주는 수많은 기구들이 있지만 단순한 삶을 살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순하게 유지하고 싶은 삶의 영역들을 깨닫고 동시에 현대 사회가 정보와 기술을 매개로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이해할 수 있다. 너무 많은 도구와 복잡함이 느껴지는 순간을 찾아내라. 그리고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옮겨가라.
◎ 작은 것에 감사하라.
당신이 당연히 여기는 것들과 행복한 전투를 시작하라. 거기에는 당신이 매일 접하지만 결코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집, 정원, 식사, 옷, 가족 그리고 친구들처럼 편암함을 주는 존재들이 있다. 관심을 기울여라. 애정이 깃든 감사를 표현하라. 당신의 삶을 구성하는 작은 보물들에 대해 경외의 마음을 갖고 가까운 주변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라.
◎ 주위에서 친구를 발견하라.
더 나은 삶을 찾아 여행을 하고, 세속적인 이익을 구하고,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사람들을 경험해야 한다는 믿음을 버려라. 실제로 당신은 일생 동안 이사 한 번 가지 않고 같은 곳에 살면서도 도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인 볼테르는 “내가 서 있는 곳이 천국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명심하라. 만약 당신이 지금 있는 곳에서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사진들, 그리고 똑같은 기구들로 인해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곳을 다인의 천국으로 삼아라. 단순한 삶에서 기쁨과 위로를 발견하라. 당신이 가진 것, 머물고 있는 곳,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 안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도록 사고방식을 전환하라. 모든 공간 속에서 도를 느낌으로써 당신만의 낙원을 가꾸어라.
제80장은 이상적인 道家的 國家를 묘사하고 있다. 절제 있는 사회(a society of moderation)는 세계와 평화롭게 산다. 모든 것이 현존하지만 그것 가운데 많은 것이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제74장에서 보았듯이 백성들이 “죽음을 무겁게 여기기에” 군대와 사형제도는 그것들이 금지하는 기능을 실현하고 따라서 결코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다.
內的으로든 外的으로든 武力을 사용하고자 하는 욕구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얻기 어려운 재화(luxury goods)나 자신의 마을을 떠나고자 하는 욕구도 없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 남아 있으면 어떠한 갈망도 일어나지 않는다.(이에 대해서는 제46장을 보라.) 이렇게 하여 모든 기능들이 실현된다.
그러한 나라에서 滿足이 있다. 역전의 규칙과 나란히 속박은 만족으로 변화한다. 음식, 의복 및 생필품이 제공됨으로써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에 이르게 된다.
그 나라는 가장 古代的이고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문자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가장 단순한 형태의 행정과 통치로 회귀한다. 이것은 《易經》에서 발견되는 전설을 가리키는 儒家의 정치적 이상에 대한 암시적인 비평이다.
유가에 따르면 사회란 고대의 성인 군주에 의해 세워지는데 이들 성인 군주들은 ‘문명화된’ 사회의 기본 요소를 발명한 作制者이다. 다음 글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아주 오랜 옛날 매듭을 묶어서 통치 목적에 사용하였다. 그 후대의 성인들은 이것들을 문자 기록으로 바꾸어 많은 관리들을 다스렸고 다수의 백성들을 단속하였다.”(《周易》 〈繫辭傳〉)
이 문장과 연결하여 읽을 때 《노자》 제80장은 명백하게 ‘유가 이전의’ 통치 형태로의 회귀를 주창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라의 규모를 작게 하고 백성의 수를 적게 하되,
注
나라가 이미 작고 백성이 또 적더라도 〈옛 성왕이 다스리던〉 옛날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물며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 경우에는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작은 나라를 들어 말한 것이다.
백성들에게 열 가지 백 가지 〈이로운〉 기물이 있다 해도 쓰지 않게 하고,
注
백성들에게 열 가지 백 가지 〈이로운〉 기물이 있다 해도 쓸 곳이 없게 하니, 어찌 부족함을 걱정하겠는가를 말한 것이다.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 다니지 않도록 하라.
注
백성들로 하여금 〈이로운 기물을〉 쓰지 않고 오로지 제 몸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값비싼 재화를 탐하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각자 제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죽음을 중히 여겨 멀리 이사 다니지 않는 것이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그것을 탈 일이 없고, 갑옷과 병기가 있어도 그것을 쓸 일이 없게 하라.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새끼를 꼬아서 〈문자생활에〉 쓰게 하라.
그 음식을 맛있게 여기도록 해주고, 그 옷을 아름답게 여기도록 해주며, 그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도록 해주고, 그 風俗을 즐겁게 여기도록 해주어라.
〈그러면〉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다 보이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늙어서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注
〈백성들이〉 바라고 구하는 것이 없다.
81.
信言不美(신언불미) : 믿음직스러운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美言不信(미언불신) :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善者不辯(선자불변) : 선한 사람은 변론하지 않고
辯者不善(변자불선) : 변론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는다
知者不博(지자불박) :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못하고
博者不知(박자불지) :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하다
聖人不積(성인불적) : 성인은 쌓아 놓지 않는다
旣以爲人(기이위인) : 사람들을 위해 뭐든지 하지만
己愈有(기유유) : 그럴수록 더욱 많이 가지게 되고
旣以與人(기이여인) : 사람들을 위해 모두들 희사하지만
己愈多(기유다) : 그럴수록 더욱 많아지게 된다
天之道(천지도) : 하늘의 도는
利而不害(리이불해) : 이롭게만 할 뿐 해로운 일이 없다
聖人之道(성인지도) : 성인의 도는
爲而不爭(위이불쟁) : 하는 일이 있더라도 겨루지를 않는다
81장 쌓아두지 않는 삶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하지 못하다. 선한 사람은 따지지 않고 따지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덕이 있는 사람은 흠을 찾지 않고 흠을 찾는 사람은 덕이 없다. 성인은 쌓아두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모두 준다. 더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준다. 하늘의 도는 모두를 이롭게 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성인은 이를 따라서 모두를 이롭게 하고 누구와도 겨루지 않는다. |
마지막 장은 [도덕경]에 담긴 모든 생각들을 마무리하고 있다. '당신은 아무것도 없음(no-thing-ness)'에서 태어났다. 당신이 시작된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당신이 돌아갈 그곳에도 역시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노자는 물질을 모으려고만 하지 말고 우리의 진정한 본질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도의 ‘형태 없음’ 속에 순수한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처럼 당신의 진정한 본질은 형태가 없다. 바로 당신이 도이기 때문이다.
[도덕경]은 ‘아무것도 없음’이 곧 도임을 인식하는 존재의 방식으로 당신을 이끈다. 이것은 신을 인식하는 존재의 방식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쌓아두지 않는 삶을 통해 자신의 비존재(nonbeing), 즉 도적인 자아에 다가서라고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더 많이 내주고, 덜 따지며,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는 것을 뜻한다. 궁극적으로 당신의 생명과 육체에 대한 집착까지 내려놓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살아서 이를 실천할 수 있다.
고난의 성자 요한은 삶을 대하는 이런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모든 것에 만족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로 소망하라.
모든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않기를 소망하라.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기를 소망하라.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기를 소망하라.
‘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지혜는 누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이 고대의 현인은 우리가 쌓아두지 않는 아무것도 없음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존재 자체를 축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물들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그런 세상을 이야기한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말이 필요 없다. 묘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다툴 것도 없고, 서로 차지하기 위한 소유물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도의 숨은 덕뿐이기에 비난하거나 흠잡을 일도 없다. 그리고 그곳에는 모으고 축적하고, 쌓아 올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당신은 가진 것을 나눠주고, 다른 사람을 지지하게 된다. “하늘의 도는 모두를 이롭게 한다.”고 노자가 말했는데, 여기서 이롭다는 것은 곧 신의 덕목이며, 신은 참으로 도와 같다. 에크하르트는 신과 도라는 말이 서로 교환될 수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그린다.
신은 존재 너머의 존재이며
존재 너머의 존재하지 않음이다.
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신은 아무것도 없음이다.
그럼에도 신은 대단한 무언가이다.
[도덕경]은 이 마지막 장을 통해 당신이 육신을 갖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 하늘의 도를 따르기 위해 할 수 있는 전부를 다 하라고 격려한다. 당신의 생각이 변하고, 결국에는 삶이 영원히 달라질 수 있도록 노력하라.
◎ 점수 쌓기는 이제 그만 두라
따지고 다투려는 성질을 버리고 당신과 의견이 다른 누군가가 옮을 수 있음을 인정하라. 상대방에게 그저 “당신이 옳다. 당신의 의견을 들려줘서 고맙다.”라는 의미의 말을 전함으로써 다툼을 마무리 지어라. 이렇게 하면 싸움은 끝나고 동시에 비난과 책망도 남지 않는다. “당신이 옳다."라는 말을 건네는 것으로 자신만 옳기를 바라는 에고를 다스려라. 이 한마디가 당신의 삶을 훨씬 더 평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 스스로를 ‘아무것도 없음’의 수준까지 낮춰라
당신의 몸과 모든 소유물을 관찰하라. 그러고 나서 그 모두가 변화하는 세상의 일부분임을 받아들여라. 마하트마 간디는 “당신이 진실의 대양 한복판에서 헤엄칠 거라면 당신 자신을 ‘0’의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명심하라. ‘아무것도 없음’ 혹은 ‘0’의 자리에서 관찰자가 되어 물질의 세상 속에 당신이 쌓은 것들을 살펴보라. 그럼으로써 세상에 확실하게 실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유물이나 사고방식에 집착하고 있는 자신이 느껴질 때마다 이를 실천하라. 생각을 바꾸면 삶이 달라진다. 기쁘게 변화하라.
신뢰받고 좋은 사람은 성인 군주이다. 그런 사람의 말은 부드럽고 절제되어 있다. 그는 ‘아름답게’ 말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대개 침묵한다.(이에 대해서는 제23장을 보라.) 스스로를 낮추는 아름답지 않은 명칭으로 부르면서 그는 신뢰받게 된다.(이에 대해서는 제66장을 보라.) 특정한 지식도 능력도 없는 그 사람, 즉 통치의 道를 완성한(master the Dao of rulership) 바로 그 사람은 ‘박식하다(erudite).’ 어떠한 앎도 갖지 않음으로써 그는 모두의 주인이 된다.
오로지 통치를 받는 사람들만이 특별한 능력과 지식을 갖고서 특수한 기능을 완수하게 된다. 제33장에서 보았듯이 그들의 앎은 성인의 앎과는 다르다.
道家的 君主는 또한 단 한 사람일 뿐이다. 한때에 한 사람 이상의 군주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좋은 것은 다면적이지 않다. 오로지 단 한 사람의 군주만이 백성을 통합시킬 수 있다.
즉 그는 사회의 일체감을 제공한다.(제39장을 보라.) 사회의 비어 있는 중심으로서 성인 군주는 어떤 개인적인 소유물도 축적하지 않는다. 그의 유일한 기능은 사회의 軸이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하여 그는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회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이에 대해서는 제77장을 보라.)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는 그 누구에게도 그와 다툴 만한 이유를 주지 않는다. 그가 다투지 않기에 따라서 그 누구도 그와 다투지 않는다.(이에 대해서는 제66장, 제68장 그리고 제73장을 보라.)
믿음직스런 말은 아름답지 않으며,
注
실질은 바탕에 있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말은 믿음직스럽지 않으며
注
근본은 소박함에 있다는 뜻이다.
선한 자는 말을 잘하지 못하고, 말을 잘하는 자는 선하지 못하며, 지혜로운 자는 넓지 못하고,
注
궁극의 표준[極]은 하나에 있다는 뜻이다.
넓은 자는 지혜롭지 못하다. 성인은 쌓아두지 않으니
注
자신의 소유를 사사로이 함이 없으니 오로지 선한 자에게 주고, 사물에 맡길 따름이다.
이미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위했으니 자신은 더욱 가지게 될 것이요,
注
만물이 존숭한다는 뜻이다.
이미 그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주었으니 자신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注
만물이 돌아간다는 뜻이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하지 해롭게 하지 않고,
注
움직일 때마다 항상 〈만물을〉 낳고 이루어준다는 뜻이다.
성인의 도는 하되 다투지 않는다.
注
하늘이 이롭게 하는 도리를 따르니 서로 상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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