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 지공 화상 1 /대승찬송십수(大乘讚頌十首)
대도상재목전 -大道常在目前
수재목전난도 - 雖在目前難覩
야욕오도진체 - 若欲悟道眞體
막제색성언어 - 莫除色聲言語
큰 도는 항상 눈앞에 있다.
비록 눈앞에 있지만 보기는 어렵네.
만약 도의 참 모습을 깨닫고자 한다면
사물과 소리와 언어를 없애지 말라.
해설 ; 대승찬송십수(大乘讚頌十首)를 쓰신 양보지공(梁寶誌公,418-514) 화상은 전기에 의하면 지공(誌公), 보공(寶公), 보지공(寶誌公) 보지(寶誌)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 지공 화상이라는 호칭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중국 남조 때의 스님이다. 성은 주(朱)씨고 협서성 남쪽에 살았으며 어려서 출가하였다. 처음 출가하여 은사의 인연을 맺고 공부하던 수업사(受業師)는 도림사의 승검이라는 스님이었다. 지공 화상은 예언을 잘 하였으며 시와 문장에도 능하였다. 특히 민중들에게 덕화를 많이 끼친 인연으로 훗날 왕이나 천자들이 그의 덕을 추앙해서 시호를 내리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관재대사, 묘각대사, 도림진각보살, 도림진각대사, 자응혜감대사, 보제성사보살, 일제진밀선사 등등의 시호가 많이 있다.
지공 화상에 대한 기록은 불조역대통재(佛祖歷代通載), 양고승전(梁高僧傳), 보화산지, 신승전(神僧傳)등 여러 책에 나와 있다. 특히 신승전이라고 하는 것은 신비한 스님들에 대한 기록인데 이와 같은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보면 도사다운 특이한 스님의 행적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당시 고구려에까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질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고승이다.
지공 화상이 남긴 글들은 문자석훈 30권, 십사과송 14수, 십이시송 12수, 대승찬송 10수가 있다. 대승찬송십수(大乘讚頌十首)는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황제에게 지어 바친 글로 알려져 있다. 짧은 시구 속에 불교적 삶의 진수를 잘 표현한 대승찬송은 흔히 대승찬(大乘讚)이라고도 하는데 제목 그대로 대승적 삶에 대한 찬탄의 노래다. 신심명, 증도가와 함께 선불교의 삼대선시(三大禪詩)로 꼽힌다. 대승찬송10수라고는 하였으나 매 수마다 구절의 수효가 꼭 같은 것은 아니다. 내용에 따라 10수로 나누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의미에 따라 또 다시 세분하여 자유롭게 해설하였다.
대승의 진리를 찬탄하는 첫 구절부터 도를 이야기 하고 있다. 큰 도[大道)란 무엇일까? 신심명에도 그 첫 구절이 지극한 도[至道]를 말하고 있다. 인생의 지복이며, 인생의 이상적 삶을 당시의 불교에서는 도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불법이니, 불도니, 깨달음이니, 보리니, 열반, 해탈, 또는 대승의 진리 등과 같은 뜻이다. 다만 도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시대에 나타난 표현이다. 아무튼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가장 이상적인 길이다. 즉 대승적 삶이다.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 지금 이곳의 눈앞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 눈앞에 있지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누리지 못할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인생의 의미를 누리지 못한다면 언제 어디서 다시 인생의 의미와 보람이 있겠는가? 고등고시에 패스를 한 이후라야 꼭 그 사람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올림픽에서 금 매달을 딴 이후라야 꼭 그 사람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견성성불을 한 이후라야 꼭 그 사람의 삶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삶의 가치는 그런 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무엇을 하며 살든 태어나서부터 죽는 순간까지 매 순간 모두가 그 사람의 금쪽과 같고 다이아몬드와 같이 소중한 삶이다. 이 사실을 알고 사는 것이 곧 대승적 삶이다.
그러므로 만약 도의 참모습을 깨닫고자 한다면 지금 이렇게 보는 사물과 듣는 소리와 말하는 이 사실을 제외하고 따로 찾지 말라. 보고 듣고 말하는 이 순간의 이 사실이 곧 도의 참다운 모습이다. 그대로가 진정한 인생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삶이다. 이것이 진정 큰 삶이라는 진리를 찬탄한 것이다.
「대승찬」은 여섯 자, 「증도가」는 일곱자, 신심명은 넉 자로 한 행이
구성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글의 형식도 재미있습니다.
「신심명」에서는 ‘대도’를 ‘지도무난至道無難’ 이라 했습니다.
대승찬에서는 ‘대도상재목전大道常在目前’이라 하고 있습니다.
「신심명」 특강 때 ‘지극한 도’란
참된 삶, 진정한 행복, 가치 있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대승찬』에서 도는 항상 목전目前에 있다고 합니다.
비록 목전에 있으나 그 도를 보는 사람은 드물지요.
아마 도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 하여도 일단 도란 목전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고 따르면 됩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해 옵니다.
진일심춘불견춘 盡日尋春不見春
망혜변답롱두운 芒鞋遍踏隴頭雲
귀래우과매화하 歸來偶過梅花下
춘재지두이십분 春在枝頭已十分
하루 종일 봄을 찾아 다녀도 봄을 보지 못하고
짚신이 다 닳도록 언덕 위의 구름 따라 다녔네.
빈손으로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
봄은 이미 매화 가지 위에 한껏 와 있었네.
우리는 보통 ‘언어도단言語道斷’,
즉 ‘언어의 길이 끊어진 그 자리에 도가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성색언어聲色言語’,
즉 ‘듣고, 보고, 말하는 것’ 밖에 따로 도가 없다고 말합니다.
황벽 스님의 『전심법요』에서도 ‘견문각지見聞覺知’,
즉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 마음’이 본래심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귀에 들리는 일체 소리를 제외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을 떠나서
무슨 도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과 역대 조사 스님들도 언어를 떠나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제124 지공 화상 2 /대승찬송십수(大乘讚頌十首) 1-2 언어가 큰 도다
언어즉시대도 - 言語卽是大道
불가단제번뇌 - 不可斷除煩惱
번뇌본래공적 - 煩惱本來空寂
망정체상전요 - 妄情遞相纏繞
언어가 곧 큰 도다.
번뇌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번뇌는 본래로 공적한 것인데
망녕된 생각이 서로 번갈아 얽히고설키네.
해설 ; 사람이 일생을 통해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말이다. 잠을 자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말을 하고 말을 듣는 것이 곧 삶의 대종(大宗)이다. 어떤 불교에서는 묵언을 한다느니, 말을 삼가야 한다느니, 말을 조심해야한다느니 하는 말을 많이 한다. 그것은 소승적 삶이다. 큰 삶은 그렇지 않다. 진짜불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사람의 삶에서 말처럼 소중한 것이 또 있는가?
번뇌라는 문제도 그렇다. 번뇌는 본래 공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없는 번뇌를 끊을 수 있겠는가?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허구다. 공연한 생각을 일으켜서 본래 없는 번뇌를 끊어야 한다느니 말아야 한다느니 할 뿐이다. 마음의 순수한 작용을 공연히 번뇌라고 이름지어놓고 하는 말이다. 사람의 희로애락이 모두 마음의 순수한 작용이며 그 또한 공적한 것이다. 저절로 없는 것이다. 그것을 끊으라니 이 얼마나 허망한 노릇인가? 이와 같이 사는 삶이 대승적 큰 삶이다.
지공 스님의 가르침은 그동안 우리가 들어온 이야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언어가 그대로 큰 도라는 견해가 아주 기상천외합니다.
사실은 말 외에 다른 무엇이 더 있습니까?
말로써 자기가 터득한 도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지요.
언어가 도인데, 번뇌야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이 도라면 그 말은 번뇌로부터 나왔으니, 말의 어머니는 번뇌라는 말입니다.
번뇌야말로 진짜 도이지요. 그러니 번뇌를 끊으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어둠은 본래 실체가 없습니다.
어둠은 어떤 특정 공간에 해가 비추지 않거나 불이 꺼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즉, 조건과 환경에 의해 일어나는 것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번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공적한데 망령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이 번뇌입니다.
번뇌라는 실체가 있어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번뇌는 우리 마음이 집착이나 분별에 의해 얽히고설킨 결과입니다.
「신심명」에서 말하는
간택, 증애, 순역, 위순, 취사, 유공, 지동, 근경, 적조, 진망 등의
마음 작용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괜히 있지도 않은 ‘마음의 번뇌’를
벗어 버려야 한다며 애써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124 지공 화상 3 /대승찬송십수 1-3 일체가 그림자요 메아리다
일체여영여향 - 一切如影如響
부지하오하호 - 不知何惡何好
유심취상위실 - 有心取相爲實
정지견성불료 - 定知見性不了
모든 것이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으니
무엇이 나쁘고 무엇이 좋은지 알 수 없어라.
마음으로 형상을 취하여 실다운 것으로 여긴다면
견성하지 못했음을 결정코 알리라.
해설 ; 금강경 전권의 의미를 이 한 구절에 담았다. “일체의 것은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이요, 번갯불이요, 메아리니라.” 분명 인간 모두의 삶은 그와 같은데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어떻게 알겠는가? 환영을 보고 진실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존재의 실상을 알았다[見性]고 할 수 있겠는가? 어젯밤 꿈속에서 큰 부자가 되고 큰 횡재를 하였다고 아침에 일어나서 혼자 히죽거리고 있다면 상상해보라 그 사람이 옳은 사람인가?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그 모든 존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삶은 진정 큰 삶이다.
‘일체’란 「신심명」에서 말하는 ‘일체이변一切二邊’,
즉 주객, 선악, 시비, 능경 등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분별 망상에 의한 마음은 그 실체가 없기 때문에
모두 그림자나 메아리 같다는 말입니다.
그림자와 메아리에 불과한 허상을 가지고 싫어 하거나 좋아할 이유가 없습니다.
번뇌와 보리, 부처와 중생뿐만 아니라 육신, 재산, 명예 등 모두가 해당됩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나 부귀공명 혹은 명예와 같이
나와 관계한 모든 것에 대하여 '무너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 실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어떤 형상을 취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형상에 꺼들리고 집착하게 되어 본래 마음자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즉, 결코 견성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금강경에도 이와 관련한 사구게가 있습니다.
범소유상 凡所有上
개시허망 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 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 卽見如來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다 허망한 것이니
상을 상이 아닌 줄로 보면
즉시 여래를 볼 수 있다.
제124 지공 화상 4 /대승찬송십수 1-4 업을 지어 부처를 구하면
약요작업구불 - 若欲作業求佛
업시생사대조 - 業是生死大兆
생사업상수신 - 生死業常隨身
흑암몽중미효 - 黑暗獄中未曉
만약 업을 지어 부처를 구하려하면
업은 생사의 큰 원인이 된다.
생사의 업은 항상 몸을 따르거늘
캄캄한 지옥에서 알지 못하네.
해설 ; 본래 존재하는 부처를 버리고 다른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생사의 큰 원인이 된다. 소승불교에서는 6바라밀을 닦고 참선을 하고 계행을 가지고 기도를 하고 하는 등등의 일을 통해서 부처가 되고자 한다. 그렇다면 본래로 자신이 변함없는 부처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는 증거다.
대주 화상이 마조 선사를 찾아가서 “어디서 왜 왔느냐?”는 질문에 “부처를 구하려고 왔다.”는 말을 하였다. 그랬더니 마조 선사가 말하였다. “자신의 보물창고[부처]를 버리고 돌아다니는 구나. 이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무엇이 저의 보물창고입니까?” “지금 나에게 질문하는 그것이 곧 그대의 보물[부처]이니라.”라고 하였다. 이 사실을 모르면 아무리 복을 짓고, 6바라밀을 닦고, 참선을 하더라도 모두가 헛일이다. 공연히 짓지 않아도 될 업만 짓는 일이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와 같은 이치를 바르게 알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해서 정견(正見)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위대한 삶[大乘]은 곧 이와 같은 안목으로 사는 삶이다.
「대승찬」에서 후대의 조사 스님들이 제일 많이 인용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업이라고 하는 것이 뭡니까?
보통 업이라 하면 악업이니 중생업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업의 의미는 다릅니다.
대승의 차원에서는 악업과 중생업만이 아니라
선한 일도 선업이요, 불보살의 행을 해도
불보살업을 짓는 일로 일체 모든 행이 업입니다.
「증도가」의 ‘구불시공조만성求佛施功早晩成’,
즉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을 베푼들 언제 이루겠는가?’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참선, 기도, 염불, 육도만행 등
팔만사천 방편문의 업을 지어서 부처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며,
오히려 생사에 빠져드는 원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불교는 바른 견해 즉, 중도정견의 입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기가 원만구족한 본래 부처인 줄 알아야 합니다.
도를 닦아서, 복을 지어서 ‘부처가 된다’,
즉 팔만사천 방편의 업을 통해 부처를 구한다면 그것은 틀린 겁니다.
선불교에서는 일관되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증도가」에서도
‘주상보시생천복住相布施生天福 유여양전사허공猶如仰箭射虛空’,
상에 머물러서 보시를 행하는 것은 하늘에 나는 복이니
마치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처라는 모양을 취하고 또 그것을 구하려는 행위가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말은 ‘사람이 부처님이다. 당신은 부처님입니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궁극적 사상은 인불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124 지공 화상 5 /대승찬송십수 1-5 열반의 법식(法食)
오리본래무이 - 悟理本來無異
각후수만수조 - 覺後誰晩誰早
법계양동태허 - 法界量同太虛
중생심지자소 - 衆生心智自小
단능불기오아 - 但能不起吾我
열반법식상포 - 涅槃法食常飽
이치를 깨달으면 본래 다르지 않거늘
깨달은 뒤에 누가 늦고 누가 이르리오.
법계는 그 양이 허공과 같거늘
중생의 지혜가 스스로 작도다.
다만 자기라는 것을 일으키지 않으면
열반의 법식으로 항상 배가 부르리라.
해설 ; 시간적으로 선후와 공간적으로 대소를 설명한 내용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깨달음의 문제에서부터 젊고 늙고 한 점에 이르기까지 선과 후가 있고 빠르고 늦은 것이 있는 줄로 안다. 큰 집 작은 집이 따로 존재한 것으로 안다. 실은 그 모두가 한 낱 꿈속의 일이다. 꿈을 깨고 나면 모두가 같은 순간의 일이며 같은 공간의 일이다. 선후도 없고 대소도 없다. 시간도 공간도 툭 터져서 경계라는 것이 도무지 없다. 그러므로 나다. 남이다. 라는 분별이나 선이다. 악이다. 라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모든 문제와 모든 고통이 사라진 열반이라는 진리의 음식으로 항상 배가 부를 것이다. 배만 부른 것이 아니라 온 천지가 모두 나의 집이며 내가 돌아가 쉴 곳이리라. 이와 같은 안목이 있으면 비록 누더기를 입고 밥을 빌어 먹으며 다리 밑에서 잠을 청하는 삶일지라도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인생이리라.
깨닫기 전에는 선후가 있습니다.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고, 선불 후불이 있으며,
부처님과 중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깨닫고 나면 그런 것이 모두 무너져 버립니다.
깨달음의 세계는 시공을 초월하기 때문에 선후가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내가 똑같습니다.
우리 본래 마음의 위치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황벽 스님의 가르침을 담은 『전심법요』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마음의 도리를 깨닫는 길은 느리기도 하고 빠르기도 하나니,
누군가는 법문을 듣고 일순간에 무심을 얻는 사람도 있으며,
어떤 이는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에 이르러서
무심을 얻는 사람이 있으며,
어떤 이는 십지에 이르러서 비로소 무심을 얻는 사람이 있다.
길고 짧건 무심을 얻어야 비로소 안주하는 것이니
더 이상 닦고 수행하고 증득하는 것이 없으며
실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니 진실해서 헛되지 않다.
한순간에 얻은 것과
십지를 거쳐서 얻은 것은, 그 공덕은 같으며
다시 깊고 얕음의 차이는 없나니,
깨닫지 못한다면 긴세월 지나도록 잘못 고생했을 따름이다.
진리의 세계는 허공과 같이 큰데
우리가 활용하여 쓰는 마음이 작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본래 마음자리는 허공과 같아서
지혜의 작용도 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상에 꺼들리고 분별 망상에 집착하여
지혜를 온전히 발현하지 못할 뿐입니다.
황벽 스님은 『전심법요』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유차일심즉시불(唯此一心卽是佛)
불여중생갱무별이(佛與衆生更無別異)
단시중생착상외구(但是衆生著想外求)
구지전실(求之轉失)
오직 이 한마음이 곧 부처이니
부처와 중생이 다시 다른 것이 아니거늘,
다만 중생이 상에 집착해서 밖으로 구하므로
구할수록 더욱 멀어진다.
자나 깨나 ‘나다’, 가나오나 ‘나다’, 앉으나 서나 ‘나다’하는
그 자아의식自我意識 때문에 도를 통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괴로움은 ‘나’가 있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나’의 문제가 근본 뿌리입니다.
뿌리만 해결되면 가지를 치고 잎을 따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속의 차별, 분별, 간택, 증애만 없애면 바로 열반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삶입니다.
제124 지공 화상 6 /대승찬송십수 2-1 몸과 그림자
망신임경조영 - 妄身臨鏡照影
영여망신불수 - 影與妄身不殊
약욕거영유신 - 若欲去影留身
부지신본동허 - 不知身本同虛
신본여영불수 - 身本與影不殊
부득일유일무 - 不得一有一無
약욕존일사일 - 若欲存一捨一
영여진리상소 - 永與眞理相疎
허망한 몸이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림자를 비춘다.
그림자와 허망한 몸은 다르지 않는데
만약 그림자를 제거하고 몸만 남겨두고자 하면
몸도 본래 허망한 것인 줄 모르는 것이다.
몸은 본래 그림자와 다르지 않으니
하나는 있고 하나는 없을 수 없다.
만약 하나를 두고 하나를 버리려고 하면
영원히 참된 이치와는 멀어지리라.
해설 ; 사람들이 몸을 거울에 비춰볼 때 거울에 비춰진 영상은 거짓인줄을 잘 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은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거울에 비춰진 영상이나 비추고 있는 그 몸이나 모두가 진실이 아니다. 다 같이 텅 빈 허망한 것이다. 상관관계는 하나로 묶여져있다. 같은 것이다. 하나는 두고 하나는 없애지 못한다. 만약 하나는 두고 하나는 버리려고 하면 그는 영원히 참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대승적 삶을 살지 못한다. 요컨대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이 육신도 거울에 비친 영상과 같은 것으로 알라는 뜻이다.
우리는 보통 거울에 비친 나와 거울 앞에 선 내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거울에 비친 나는 거짓된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지공 스님은 거울에 비친 것이나
거울 앞에 선 나나 다르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모든 존재의 상대적인 관계를 지적합니다.
진망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분의 안목으로는
거울 속 그림자나 거울 밖 몸이나 모두 허상이라는 말입니다.
공을 이해하는 견해 중에는 종국에는 모든 존재가 사라진다는
‘필경공’과 하나하나 분해하면 결국은 없다는 ‘분석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승찬』에서의 공은
시간의 경과나 사물의 분석으로 이해하는 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공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를 당체즉공 當體卽空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거울에 있는 그림자나
거울 앞에 있는 내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지요.
몸뚱이나 거울에 비친 그림자나 똑 같이 본래 공합니다.
연기적 관계, 혹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이해되는 공이 아닙니다.
지공 스님은 모든 존재의 본질적 속성인 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깨달음의 안목으로 보면,
몸의 근본은 그림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거울에 비친 나의 그림자만 그림자인 것이 아니라, 이 육신 또한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본래 마음자리는 허공과 같이 텅 빈 하나입니다.
상대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 결국 하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시비, 증오, 선악으로 하나를 취하고
또 다른 하나를 버리면 영원히 참 이치와는 멀어지게 됩니다.
즉, 이 몸뚱이와
거울에 비친 그림자가 본래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124 지공 화상 7 /대승찬송십수 2-2 무심하면 번뇌도 없다
갱약애성증범 - 更若愛聖憎凡
생사해리부침 - 生死海裏浮沉 (浮沉:뜰부, 잠길침)
번뇌인심유고 - 煩惱因心故有
무심번뇌하거 - 無心煩惱何居
불로분별취상 - 不勞分別取捨
자연득도수유 - 自然得道須臾
만약 성인을 좋아하고 범부를 싫어한다면
생사의 바다 속에서 부침하리라.
번뇌는 마음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마음이 없으면 번뇌가 어디에 있으리오.
수고로이 분별하여 취하고 버리지 아니하면
자연히 순식간에 도를 이루리라.
해설 ; 보통 사람들의 삶이란 자신이 만들어 둔 기준과 틀에 바탕을 두고 사람이든 물질이든 아니면 어떤 사건이든 좋아하고 싫어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취하고 버리고 하며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보니 항상 시시비비의 물결 속에 부침하며 슬픔과 기쁨, 분노와 환희로 얼룩져 있다. 하루 중에도 평정심을 온전히 가지고 지내는 일이 거의 없다. 자신의 알량한 잣대로 온갖 것을 재며 살아가는 습관 때문이다. 참으로 가엽고 불쌍한 소승적 삶이다. 그래서 지공 화상은 “무심하라. 무심하면 번뇌도 망상도 다 사라져서 수고로이 분별하며 취하고 버리지 않아도 된다.”라고 한 것이다. 큰 삶, 큰 인생은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고 역사에 기록되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 사랑도 미움도 다 벗어버린 무심한 삶이란 것이다.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지요.
「신심명」에서의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다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만 없으면 환하게 밝을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성인은 좋아하고 범부는 싫어한다는 ‘애성증범愛聖憎凡’,
즉 ‘간택, 증애, 순역, 위순, 취사, 유공, 지동, 근경, 적조, 진망’ 등의
심리 상태가 바로 생사의 윤회를 계속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존재는 본래 공하기 때문에 번뇌 역시 공입니다.
번뇌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망령된 정으로 서로서로 얽혀 있습니다.
원효스님은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
즉 마음이 일어나니 온갖 법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나 법이나 모두 번뇌입니다.
팔만사천 번뇌가 모두 한 생각에서 일어납니다.
따라서 마음이 없어져 무심할 것 같으면,
즉 분별, 망심 등이 없으면 번뇌역시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전심법요』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무심이란 일체의 마음자리가 없는 것이다.
여여한 체가 안으로는 목석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서 막힘이 없고 장애가 없으며,
능소도 없고, 방소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득실도 없다.
제가 「신심명」 구절을 자주 인용합니다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몽환공화夢幻空華 하로파착何勞把捉’,
‘꿈이요 환이요, 헛꽃인 것을 수고로이 잡으려 하는가?’입니다.
상을 취한다는 말은 ‘좋다, 싫다’, ‘있다 없다’ 등
나름대로 어떤 기준을 설정하고 그 기준에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금강경』에서도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 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 應作如是觀’이라 했습니다.
상을 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떠한 분별과 집착을 떠나면, 바로 그 순간 도와 계합합니다.
제124 지공 화상 8 /대승찬송십수 2-3 꿈과 생시
몽시몽중조작 - 夢時夢中造作
교시교경도무 - 覺時覺境都無 (覺 꿈깰교)
번사각시여몽 - 飜思覺時與夢
전도이견불수 - 顚倒二見不殊
꿈꿀 때 꿈속에서 하는 일과
깨었을 때 깨어있는 경계가 모두 없다.
깨었을 때와 꿈꿀 때를 바꿔서 생각하니
전도된 두 가지 견해가 다르지 않네.
해설 ; 월창 거사의 술몽쇄언(述夢瑣言)이라는 글이 생각나는 내용이다. 우리는 흔히 꿈을 꿀 때 꿈속의 모든 내용은 허망한 것이고, 깨었을 때 보고 듣고 하는 일은 모두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꿈속에서의 정승보다 깨었을 때의 거지가 낫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므로 현실의 삶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고통을 불러와서 어려움을 스스로 격는다. 꿈도 꿈으로서 허망한 것이고 꿈을 깨었을 때도 역시 허망한 것이라고 알면 나날이 가볍고 편안한 삶이 될 것이다.
삼국유사에 ‘조신의 꿈’이라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룻밤 꿈속에서 천신만고를 겪으며 일생을 산 이야기로,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이 허망함을 깨닫는 이야기입니다.
김동인은 이를 소재로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꿈꿀 때는 꿈속에서 이것저것 별것을 다합니다.
벼슬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일도 하고 공부도 합니다.
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참 허망한 것이지요.
흔히 살아 있는 동안, 깨어 있을 때를 일컬어 생시라는 말을 씁니다.
하지만 생시라는 이 사실도 꿈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하룻밤 꿈이지요.
그래서 불교에는 꿈에 대한 비유가 많고, 꿈 이야기가 많습니다.
꿈과 현실 모두 실재하지 않는 공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꿈과 현실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도된 생각입니다.
서산 스님은 꿈에 대해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주인몽설객 主人夢說客
객몽설주인 客夢說主人
금설이몽객 今說二夢客
역시몽중인 亦是夢中人
주인은 나그네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나그네는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지금 꿈 이야기하고 있는 두 사람
역시 꿈속의 사람들이네.
제124 지공 화상 9 /대승찬송십수 2-3 왕복(往復)은 무제(無際)나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라
개미취각구리 - 改迷取覺求利
하이판매상도 - 何異販賣商徒
동정양망상적 - 動靜兩亡常寂
자연계합진여 - 自然契合眞如
미혹을 고쳐 깨달음을 취해 이익을 구한다면
물건을 파는 장사꾼과 무엇이 다르랴.
움직이고 고요함을 다 없애고 항상 고요해지면
자연히 진여에 계합하리라.
해설 ; 수행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가끔 소영웅 심리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도를 통하면 무슨 특별한 능력이라도 생기는 줄 안다. 그 능력으로 사람들을 제압하여 영웅행세를 해 보려는 것이다. 만약 깨달음을 이루어 어떤 이익이 생기고 존경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장사치들의 가치관과 다를 바 없다. 이익을 얻자고 도를 닦는가?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일이다. 평생을 참선해서 주지가 되고자 선거전에 뛰어 들거나 신도가 낸 그 무서운 시줏돈을 써가며 명예를 얻는데 골몰한다면 그도 역시 수행을 세속적 이익으로 생각하는 장사치에 다름없다.
왕복(往復)은 무제(無際)나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라는 말이 있다. 동정이 한 근원이라면 동과 정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차별이 없으면 서로 상대되는 동정이 이미 아니다. 없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면 항상 고요하리라. 고요한 그 자리가 바로 진여의 자리다.
지공 스님께서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참선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하고, 어떤 행사를 통해 이익을 구하려고
할 것 같으면 장사꾼과 뭐가 다르겠냐는 뜻입니다.
만약에 공부를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그것으로 어떤 세속적인 이익인
명예와 부를 구하려고 한다면 그 도인은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능엄경』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운하적인 云何賊人이 가아의복假我衣服하고 패판여래稗販如來하야
조종종업造種種業고’, 즉 ‘어찌하여 도둑들이 나의 옷을 빌려 입고,
부처를 팔아서 가지가지 나쁜 업을 짓느냐?’ 고 하셨습니다.
불교의 단편 중에서 최고 가는 글이 청량 스님의
『화엄경』 서문에 해당하는 「왕복서往復序」입니다.
왕복서 첫 구절이 ‘왕복往復이 무제無際나 동정動靜은 일원一源이라’,
즉 ‘가고 오는 것은 끝이 없지만, 움직이고 고요한 그 근원은 하나다’입니다.
‘동정양망상적動靜兩亡常寂’과 같은 말입니다.
동動과 정靜은 항상 근본은 하나이며, 가고 오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죽고 태어나고, 태어나고 또 죽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여름 가고 가을 오고, 가을 가고 겨울 오고, 겨울 가고 봄이 오는 등
춘하추동春夏秋冬은 끊임없이 바뀝니다.
생주이멸生住異滅로 바뀌고, 생로병사生老病死로 바뀌고,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바뀝니다.
동정은 상대적인 견해에 꺼들린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세계관은 분별, 시비,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따라서 이러한 상대의 세계를 벗어나기만 하면
저절로 괴로움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즉,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제124 지공 화상 10 /대승찬송십수 2-4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약언중생이불 - 若言衆生異佛
초초여불상소 - 迢迢與佛恒殊
불여중생불이 - 佛與衆生不二
자연구경무여 - 自然究竟無餘
만약 중생이 부처와 다르다고 말하면
부처와는 아득히 멀어서 영원히 다르리라.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니
자연히 구경에는 다른 것이 없으리라.
해설 ; 화엄경에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에게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 공연히 여러 가지의 이름을 만들었을 뿐이다. 실로 그 본질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그런데 만약 중생과 부처가 다르다고 말한다면 사실은 아닌데도 부처와 중생이 아득하게 멀어지리라.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외의 보살이니 아라한이니 성문이니 연각이니 하는 다른 나머지의 문제들도 저절로 해소될 것이다. 오직 하나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공연히 부처라는 헛된 이름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누리려고 한다.
저는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는 게송을
『화엄경』을 이해하는 열쇠 중의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나 부처나 중생이나 다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공 스님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다고 한다면, 부처는 부처이고
중생은 중생일 뿐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와 중생이 그야말로 부처인 중생이고, 중생인 부처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직 사람일 뿐입니다. 단지 사람일 뿐인데
편의상 중생, 부처, 성인, 범부라는 이름을 붙여서 부를 뿐입니다.
그냥 부르는 것이지요.
본질의 측면에서는 그 누구도 우월하거나 열등한 차별상이 없습니다.
제124 지공 화상 11 /대승찬송십수 3-1 법성이란 무엇인가?
법성본래상적 - 法性本來常寂
탕탕무유변반 - 蕩蕩無有邊畔
안심취사지간 - 安心取捨之間
피타이경회환 - 被他二境回換
법성은 본래 항상 고요하고
넓고 또 넓어 그 끝이 없는데
마음을 취하고 버리는데 두면
그 두 가지 경계에 끌려감을 당하리라.
해설 ; 법성이란 무엇인가? 곧 사람의 삶의 전부다. 사람의 삶은 일견에 온갖 천 가지 만 가지로 차별하여 어지럽고 복잡하게 나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본래부터 항상 고요하다. 바다의 물결이 아무리 많이 출렁거려도 언제나 항상 그 물인 것과 같다. 법성게(法性偈)에도 “법의 성품은 원만하고 융통해서 두 가지 모양이 없다. 모든 현상은 움직이지 아니하고 본래로 고요하다.”라고 하였다. 그 내용도 역시 사람 사람의 삶의 본 모습을 설명한 내용이다. 이러한 삶의 본질을 외면하고 차별된 현상에만 눈이 팔리면 탕탕하고 끝없고 드넓은 큰 삶[大乘]을 살지 못하고 소승적으로 좁은 인생을 살게 된다. 소승적 삶이란 “이것은 내가 취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버릴 것이다.”라고 하는 끊임없는 갈등의 삶이다. 취하고 버리는 데는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악이다, 이것은 좋다. 이것은 나쁘다.”라는 분별심으로 어지러운 마음뿐이다. 어찌 진정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으랴.
여기에서 말하는 법은 모든 존재를 일컫습니다.
사물뿐 아니라 소리와 향기, 변화와 작용 등 일체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모든 존재는 본래 항상 고요하고 그 넓이는 끝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세상의 이치를 꿰뚫는 안목의 입장입니다.
상대적인 분별의 세계관으로 인한 시비, 갈등,
번뇌의 삶을 여윈 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의 삶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 주체적으로 살면, 서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지요.
취사取捨, 즉 취하고 버리는 마음은 도의 가장 큰 장애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은 취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버리는 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입니다.
취사선택의 일상생활은 분별 망상의 삶입니다.
바깥 경계에 꺼들리게 되어 휘말리고, 집착하고, 빠지고, 좇는 삶입니다.
당나라 때의 선승 임제 의현의 가르침을 담은 『임제록』에
‘촉비양觸鼻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코가 닿으면 뭐든지 먹어 치우는 양으로, 중생의 삶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간택揀擇’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제124 지공 화상 12 /대승찬송십수 3-2
나무로 조각한 사람이 도를 닦는 격이니
염용입정좌선 - 斂容入定坐禪
섭경안심각관 - 攝境安心覺觀
기관목인수도 - 機關木人修道
하시득달피안 - 何時得達彼岸
모양을 거둬들이고 선정에 들어 좌선하며
경계를 포섭하고 마음을 안정시켜 각관(覺觀)하는 것은
나무로 조각한 사람이 도를 닦는 격이니
언제나 저 언덕에 이르리오.
해설 ; 보다 위대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수행에게는 여러 가지 길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좌선도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다. 흔히 좌선이란 몸으로 일상생활에서 움직이는 일체의 모습을 멈추고 선정에 들며, 바깥의 일체 경계에 빼앗긴 생각들을 거두어 드려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호흡이나 현재의 나의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고 살핀다. 곧 현재를 예의주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어쩌자는 것인가?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과 두 귀가 있고 무엇보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활발발하게 작용하며 신령하게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내가 있다. 이 능력 이 사실을 버려두고 나무로 깎아 만든 조각품이 되어 그렇게 도를 닦아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말살하는 행위다. 피안에 이르려고 그와 같은 좌선을 한다지만 목석이 언제 피안에 이르겠는가? 생사람을 목석으로 만드는 수행은 수행이 아니라 바보짓이다.
‘염용斂容’은 가사와 장삼을 반듯하게 걸쳐 입고,
방석도 가지런히 하고, 자세를 가다듬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여 선정에 들어서
경계를 좇던 마음을 거둬들이고 각관을 한다고 했습니다.
‘각관覺觀’이란 호흡을 살피는 것, 망상을 살피는 것 등을 뜻합니다.
그렇게 모양을 갖춰 관법 수행을 한다는 말입니다.
지공 스님이 살았던 시대는 달마 스님이 살았던 시대와 같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는 화두선이 생기기 훨씬 이전입니다.
달마스님께서‘관심일법 觀心一法 총섭제행 總攝諸行’이라 했듯이
이때의 선법禪法은 ‘마음이 무엇인가?’를 앉아서 관찰하는 수행법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염용입정좌선斂容入定坐禪 섭경안심각관攝境安心覺觀’,
수행을 하나 그것은 꼭두각시가 도를 닦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마치 조각해 놓은 사람이 도 닦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야 도를 잘 닦습니다.
하루 종일 아니 10년, 20년 앉아 있으라 해도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습니다.
숨도 한 번 안 쉬고 그냥 앉아 있습니다.
다리 저린다는 소리도 하지 않습니다.
배고프다는 소리도 없습니다.
나무를 깎아서 앉혀 놨으니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슨 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와 같은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수레가 가지 않고 있으면
‘소를 때려야 옳으냐, 수레를 때려야 옳으냐?’에 바로 열쇠가 있습니다.
제124 지공 화상 13 /대승찬송십수 3-3 /
지혜 없는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제법본공무착 - 諸法本空無着
진사부은회산 - 眞似浮雲會散
홀오본성원공 - 忽悟本性元空
흡사열병득한 - 恰似熱病得汗
무지인전막설 - 無智人前莫說
타이색신성산 - 打你色身星散
모든 법은 본래 공하여 집착할 바 없는 것이
참으로 뜬구름이 모이고 흩어짐과 같네.
본성이 원래 공한 줄을 홀연히 깨달으면
흡사 열병을 앓다가 땀을 흘리는 것과 같네.
지혜가 없는 사람 앞에서는 말하지 말라.
그대의 몸을 두들겨 패서 마치 별이 흩어지듯 하리라.
해설 ; 제법(諸法)이란 세상사와 인생사 모든 것이다. 재산도 명예도 모두가 제법이다. 사람도 산천초목 산하대지도 모두 제법에 속한다. 죽도록 사랑하고 죽도록 미워함도, 울고 웃고 기뻐하고 분노하는 일도 모두 제법이다. 삶과 죽음까지도. 그런데 그 모두가 소중하고 귀한 것이지만 조금만 깨어 있어도 그것들이 모두 텅 빈 것임을 안다. 텅 빈 것이므로 아무것도 집착하여 울고불고 할 것이 없다. 실재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결코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공 화상은 마치 뜬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듯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홀연히 이와 같은 이치를 알면 흡사 열병을 앓다가 땀을 흘리고 나서 몸이 가뿐하여 날아갈 듯하여 진 것과 같다고도 하였다. 이런 사실을 물질에 찌들리고 사람에 찌들리고 온갖 감정에 사로잡힌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돈도 명예도 사랑도 미움도 다 뜬구름과 같으니 집착을 버리라고 한다면 아마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몸이 산산조각이 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법諸法, 즉 일체 유무위의 법은 공하다고 했습니다.
본래 공하다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혹은 공간의 이동에 따라 변화하는 공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자체 그대로 공이라는 의미입니다.
본래 공이기 때문에 집착할 그 무엇도 없습니다.
바깥 경계는 다만 인연에 따라 모였다 흩어질 뿐입니다.
역시 서산 스님께서 이와 관련한 좋은 시를 한 편 남기셨습니다.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삶은 어디서 왔는가.
죽음은 어디로 가는가.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짐이라.
뜬구름 자체가 본래 아무것도 없듯이.
삶과 죽음의 오고 감 또한 그러하리.
열병은 땀을 흠뻑 흘리면 씻은 듯 낫습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성이 공한 줄 알면,
마치 열병이 없어져 가뿐하고 시원해지듯이, 얽히고설킨 게
모두 풀려 버린다는 말입니다. 당나라때 스님인 대주 혜해 선사는
『돈오입도요문론』에서 선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망념이 생기지 않는 것이 선이고
앉아서 본성을 보는 것이 정이니, 본성이란 무생심이다.
정이란 경계를 대함에 무심하여 팔풍에 움직이지 않는 것이니,
이러한 정을 얻은 사람은 비록 범부일지라도 곧바로 부처님 지위에 들어간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 궁극의 행복의 길은
이를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웃음을 사거나 오히려 삿된 무리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
아무리 이야기해 본들 도란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상대의 근기에 따라 설법을 하셨습니다.
이를 ‘대기설법’,‘응병여약’이라 합니다.
제124 지공 화상 14 /대승찬송십수 4-1 /본래 참되고 여여한 자리
보타중생직도 -報你衆生直道
비유즉시비무 - 非有卽是非無
비유비무불이 - 非有非無不二
하수대유논허 - 何須對有論虛
유무망심입호 - 有無妄心立號
일파일개불거 - 一破一介不居
양명유타정작 - 兩名由你情作
무정즉본진여 - 無情卽本眞如
그대 중생들에게 바로 이르노라.
있지 않는 것이 곧 없지 않는 것이다.
있지 않는 것과 없지 않는 것이 둘이 아니니
어찌 있는 것에만 대하여 허망을 말하리오.
있음과 없음은 허망한 마음으로 이름 붙인 것이니
하나를 깨트림에 다른 하나도 없어짐이라.
두 가지 이름이 그대의 생각으로 지어진 것이니
생각이 없으면 본래 참되고 여여한 자리니라.
해설 ; 현상계는 모두가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있음과 없음, 밤과 낮, 안과 밖, 남자와 여자, 동과 서, 남과 북, 오른 쪽과 왼쪽, 노동자와 사용자, 진보와 보수 등등 모두가 상대적이다. 이렇게 이루어져 있는 현상을 그대로 보고 이끌려 다녀야 하는 길이 있고 그 모든 상대적인 것을 초월해서 유유자적하는 길이 있다. 대승적 삶의 길이란 아무래도 상대적 현상을 초월해서 유유자적해야 하리라. 그르려면 모든 상대적 현상을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 두 가지 문제에 집약시켜놓고 그것만 꿰뚫어 보는 안목이 있으면 모든 문제는 한꺼번에 다 해결이 된다.
있음과 없음이란 어디서부터 생긴 것인가? 있음과 없음의 그 본질은 무엇인가? 참으로 그렇게 엄연히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것에서부터 따져봐야 하리라. 지공 화상은 “있음과 없음은 허망한 마음으로 이름 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유무有無 이변二邊에 떨어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역대 조사 스님들은 한결같이 양변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나병 환자였던 승찬 스님의 「신심명」,
주변의 온갖 비방을 감수해야 했던 영가스님의 「증도가」역시
중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무가 본래 공한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 바른 도입니다.
있음이 있음 아니고 없음이 없음 아닙니다.
또한 있음이 없음도 아니고,없음이 있음도 아닙니다.
「신심명」에서 ‘견유몰유遣有沒有 종공배공從空背空’,
즉 ‘유를 보내면 유에 빠지고, 공을 따라가면 공을 등진다’고 했습니다.
유무, 비유비무는 모두 상대적인 견해입니다.
‘있다,없다’라는 것은 실제로 경계가 있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어서 없는 것도 아닙니다.
망령된 마음으로 ‘있다,없다’라고 이름을 지어 붙인 겁니다.
우리는 텅 빈 공간을 보고 아무것도‘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빈 공간도 무수한 요소로 가득 채워져 있음이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또한 ‘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허공이 그 무엇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면 아무것도 건립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허공은 무엇이든 다 받아들입니다.
있음과 없음은 본래 공할 뿐입니다.
다만, 상대 유한의 세계에 꺼들려 집착하고,
분별하는 망령된 생각이 있음과 없음을 구별할 뿐입니다.
유무의 상대적인 입장에서 그 하나가 없어지면
또 다른 하나는 당연히 있을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두 단으로 세워진 갈대 중 하나를 치우면
다른 갈대도 반드시 넘어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본래는 참되고 여여한데, 좋고 싫다는 생각이나
옳고 그르다는 생각, 나와 너라는 생각, 상대적인 생각,
집착과 분별이라는 망령된 생각으로 오염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색안경만 걷어 내면 참되고 여여한,
지극한 도, 궁극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124 지공 화상 15 /대승찬송십수 4-2 /감정으로 부처를 찾으면
약욕존정멱불 - 若欲存情覓佛
장망산상리어 - 將網山上羅魚
도비공부무익 - 徒費功夫無益
기허왕용공부 - 幾許枉用功夫
만약 감정으로 부처를 찾으면
그물을 들고 산에 가서 고기를 잡음이라.
한갓 헛된 공부라 이익이 없음이니
얼마나 많은 세월을 그릇되게 공부하였는가?
해설 ; 불교는 두말 할 것 없이 성불이 목적이라고 한다. 즉 부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를 좋아하고 중생을 싫어하는 그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한 부처가 되는 것은 요원하다. 마치 그물을 들고 산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으려는 겪이다. 이 얼마나 헛된 공부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이익이 없는 헛된 공부를 하면서 세월을 보냈던가?
선사들은 대부분 극적으로 표현을 합니다.
할과 방 등의 충격을 통해 깨달음의 기연을 만드는 것이지요.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께 “무엇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라고 묻자
황벽 스님은, 사정없이 방망이질을 해 버렸습니다.
얼굴에 떨어지든지, 머리를 깨든지, 팔이 부러지든지 전혀 개의치 않고
후려쳐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다 충격요법입니다.
지공 스님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에서 어떻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 비유를 그렇게 들었습니다.
생각으로 부처를 찾는 일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다른 말로 부처의 세계는 망정이 떨어진, 색안경을 벗어 버린 세계라는 뜻입니다.
앞에서 용모를 가다듬고 정좌하여 선정을 해 봐야
나무로 만든 꼭두각시가 도를 닦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도를 구하고 부처를 찾으려는 망정,
즉 상대적인 집착과 분별 때문입니다.
‘본진여本眞如’, ‘본래 참되고 여여한’ 마음과
망령된 마음 상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망령된 마음과 참된 마음을 따로 구별하는 순간,
산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공부라는 말입니다. 아무련 이익이 없습니다.
제124 지공 화상 16 /대승찬송십수 4-3 /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격이니
불해즉심즉불 - 不解卽心卽佛
진사기려면려 - 眞似騎驢覓驢
일체부증불애 - 一切不憎不愛
차개번뇌수제 - 這箇煩惱須除
제지즉수제신 - 除之則須除身
제신무불무인 - 除身無佛無因
무불무인가득 - 無佛無因可得
자연무법무인 - 自然無法無人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진실로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격이니
모든 것을 미워하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아니하여
이러한 번뇌를 반드시 제거하라.
번뇌를 제거하면 반드시 몸을 제거하게 되고
몸을 제거하면 부처도 없고 원인도 없다.
부처도 없고 원인도 없게 되면
저절로 법도 없고 사람도 없으리라.
해설 ;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모르고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은 참으로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일과 같다. 머리가 있는 사람이 다시 자신의 머리를 찾으려는 것과 같다. 이미 있는 머리위에 다시 머리를 하나 더 올린다면 그 얼마나 괴상망측한 일이겠는가? 부처가 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왜냐? 이미 다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수 억 만년전에 이미 되어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번뇌 망상 버려라. 번뇌를 버리면 이 몸도 나에게서 이미 떠난 존재다. 몸이 없으면 부처고 무엇이고 있을리 없다.
‘즉심즉불卽心卽佛, 심즉시불心卽是佛, 심시불心是佛’이라는 표현과
‘즉심卽心’이라는 표현은 맛이 다릅니다. 즉심은 바로 현재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사실 현재의 마음은 없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려서 과거 마음이고, 그 외에는 오지 않은 마음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파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나마 현재와 가장 가까운 마음이 즉심입니다.
앉은자리에서 바로 구워 먹는 음식을 ‘즉석구이’라고 하듯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즉심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지금 이 순간 곧바로 깨어 있는 마음이 그대로 부처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마음 그대로가 아닌 다른 마음이 있어서 부처가 아닙니다.
다른 마음으로 부처를 찾는다면 당나귀를 타고 당나귀를 찾는 꼴이며,
소를 탄 채로 소를 찾는 꼴입니다.
선불교의 안목에서는 성인 ‧ 진리 ‧ 부처 ‧ 보리 등을 좋아해도
그것은 번뇌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불교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물며 중생 ‧ 번뇌 ‧ 미혹 등을 싫어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심명」에서도 ‘단막증애但莫憎愛 통연명백洞然明白’,
마음에 증오하고 애착하는 마음만 없으면 환하게 명백하리라고 했습니다.
번뇌는 본래 공합니다. 취사 간택하는 마음 그 자체가 번뇌입니다.
내가 없으면 부처도 없고, 부처될 인도 없다는 말입니다.
인과因果가 없다는 말은 내 자신을 당체즉공當體卽空으로 보는 것입니다.
당체, 즉 본체 그 자체가 바로 공이니 부처가 붙을 자리가 없으며,
부처가 붙을 자리가 없으니 부처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원인을 심는 일 또한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신심명」의 ‘이견부주二見不住 신막추심愼莫追尋’,
‘두 가지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추심하지 말라’는 가르침과 같은 의미입니다.
부처와 중생, 객관과 주관의 상대적인 두 가지 견해를 떠나라는 말입니다.
두 가지 견해에 대해 옳고 그르다, 좋고 나쁘다는 분별심을 내는 것이 이견二見입니다.
집착하고 분별하는 마음만 떠나면 존재의 실상인 본래 공의 이치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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