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대승찬 풀이글)

대승찬 풀이글 2/큰 도는 수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선님 2021. 8. 1. 12:51

제124 지공 화상 17 /대승찬송십수 5-1

/큰 도는 수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도불유행득 - 大道不由行得

설행권위범우 - 說行權爲凡愚

득리반관어행 - 得理返觀於行

시지왕용공부 - 始知枉用功夫

큰 도는 수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행을 말하는 것은 방편으로 어리석은 범부들을 위한 것이다.

이치를 알고 나서 수행이란 것을 돌이켜 보면

그릇되게 공부한 것을 비로소 알리라.

 

해설 ; 진정으로 큰 삶[大道]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많이 쌓아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참선을 많이 해야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수행을 해야 하고, 지식을 쌓아야 하고, 참선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은 방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사실은 큰 삶은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본래부터 이미 갖추고 있는 사실이다. 이미 갖추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이치를 알고 난 뒤 수행한 것을 뒤돌아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라는 말이 있다. 본래 완성된 부처의 자리를 두고 아무리 훌륭한 수행을 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본래의 자리다. 난행과 고행을 통해서 어디엔가 지극한 곳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 역시 처음 출발하던 그 곳이다. 즉 온갖 10신 10주 10행 10회향 10지 등각 묘각에 이르렀더라도 그것 또한 처음 출발할 때의 사람의 삶 그곳이라는 뜻이다.

제124 지공 화상 18 /대승찬송십수 5-2 /알음알이를 집착하지 말고

 

미오원동대리 - 大理未悟圓通

요수언행상부 - 要須言行相扶

부득집타지해 - 不得執他知解

회광반본전무 - 廻光返本全無

유수해회차설 - 有誰解會此說

교군향기추구 - 敎君向己推求

자견석시죄과 - 自見昔時罪過

제각오욕창우 - 除却五欲瘡疣

원만하게 통하는 큰 이치를 깨닫기 전에는

반드시 말과 행동이 서로 일치해야 한다.

다른 알음알이를 집착하지 말고

빛을 돌이켜 근본으로 돌아가면 온전히 없으리라.

누가 있어 이 말을 알겠는가.

그대로 하여금 자기를 향해서 추구하게 하노라.

옛날의 허물을 스스로 살펴보아

오욕의 상처를 제해 버려라.

 

해설 ; 바르고 참되고 큰 이치는 본래로 원만하여 어디에도 막힌 데가 없이 툭 터져 있다. 툭 터져 있으므로 걸릴 것도 없다. 달리 말과 행동이 다르거나 나눠지질 않는다. 그래서 말이 그대로 행동이고 행동이 그대로 말이다. 또 다른 특이한 지식을 동원하거나 견해를 빌릴 필요도 없다. 집착할 것은 더욱 아니다. 공연히 현상의 차별을 쫓아다니느라 본래의 그러한 진실을 벗어나서 살고 있다. 본래의 저절로 그러한 진실에 머물면 아무 것도 분별하거나 갈등할 것이 없다.

실로 누가 있어 이 진실한 말을 알겠는가? 공자도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아.”라고 하였듯이 이러한 경지를 증득한 사람은 스스로 자족할 뿐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바랄 일이 아니다. 다만 자신만을 돌아볼 일이다. 큰 삶이란 역사에 기록이 남는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삶을 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큰 삶을 찬탄[大乘讚]한다.

제124 지공 화상 19 /대승찬송십수 5-3 /해탈하여 소요자재하고

 

해탈소요자재 - 解脫逍遙自在

수방천매풍류 - 隨方賤賣風流

수시발심매자 - 誰是發心買者

역득사아무우 - 亦得似我無憂

해탈하여 소요자재하고

아무데서나 풍류를 싸게 팔도다.

누가 마음 내어 살 사람인가.

그도 역시 나와 같이 근심걱정 없으리라.

 

해설 ; 원효 스님은 의상 스님과 함께 진정한 불법을 구한 뒤에 큰 삶을 살기 위하여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몸은 피곤하고 날은 어두워 아무데서나 잠을 청하였다. 너무나 목이 말라 잠을 깨고 어두운 곳을 헤매다가 물을 한 바가지 찾아 먹었다. 이튿날 날이 밝아 살펴보니 해골바가지의 물이었다. 그 순간 크게 구토하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크게 깨달았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의 장난이라는 사실을. 그 후 더 이상 중국으로 공부하러 가지 않고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면서 그야말로 해탈하여 소요자재하며 살았다. 가는 곳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이치를 공짜로 팔고 다녔다. 그를 이해하는 사람도 그와 같이 소요자재하며 걱정 없이 큰 삶을 살았다.

제124 지공 화상 20 /대승찬송십수 6-1 /불도와 마도가 다 틀린 것

내견외견총악 - 內見外見緫惡

불도마도구착 - 佛道魔道俱錯

피차이대파순 - 彼此二大波旬

경즉엽고구락 - 便卽猒苦求樂

생사오체본공 - 生死悟本体空

불마하처안착 - 佛魔何處安著

지유망정분별 - 只由妄情分別

전신후신고막 - 前身後身孤薄

내견과 외견이 모두 나쁘고

불도와 마도가 다 틀린 것이다.

피와 차의 두 큰 마왕이

곧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도다.

생사를 깨달으면 본체가 공한데

부처와 마군이가 어느 곳에 안착하랴.

다만 망녕된 생각을 말미암아 분별해서

전신과 후신이 외롭고 기구하도다.

 

해설 ; 내견(內見)이란 내면의 세계를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여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외견(外見)이란 반대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하는 온갖 경계들을 실재하는 것으로 알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 모두가 나쁘다고 말한 것은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고 집착하여 따라가면 미혹에 빠지기 때문이다. 불도(佛道)와 마도(魔道)라는 것도 역시 같은 의미다. 실은 모두가 존재하면서 한편 비존재다. 흔히 아는 말로 표현하자면 진공이면서 묘유며, 묘유이면서 진공이기 때문이다. 너니 나니 하는 문제도 치우치면 마군의 일이 되고 만다. 마군의 일이란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보면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면서 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삶이 모두가 마군의 삶이다. 소승적 삶이다. 양면을 초월하여 어디에도 초연한 큰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생사를 깨달으면 본체가 공한데 부처와 마군이가 어느 곳에 안착하랴. 다만 망녕된 생각을 말미암아 분별해서 전신과 후신이 외롭고 기구하도다.”라고 다음 게송을 말씀하였다.

제124 지공 화상 21 /대승찬송십수 6-2 /경영과 지략을 잘못내다

 

윤회육도부정 - 輪回六道不停

결업불능제각 - 結業不能除却

소이유랑생사 - 所以流浪生死

개유횡생경락 - 皆由橫生經略

육도를 돌고 돌아 머물지를 아니하여

업에 얽혀 제거할 수 없도다.

그러므로 생사에 유랑하는 일이

모두가 경영과 지략을 잘못 낸 때문이네.

 

해설 ; 사람의 삶은 하루든 한 달이든 일년이든 일생이든 모두가 윤회의 연속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는 순간부터 필요한 순서대로 윤회하기 시작한다. 화장실로, 세면장으로, 신문을 읽고, 옷을 입고, 식사를 하고, 식구들과 대화를 하고, 일터로 출근을 한다.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며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도 만난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지옥도 있고 축생도 있고 아귀도 있고 아수라도 있고 인간도 있고 천신도 있고 부처도 있고 보살도 있다. 하필 육도뿐이겠는가. 이 모두가 윤회인 것이다. 인연이 그렇게 맺어져 있으므로 모든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다. 다만 그 모든 경계와 대상에 팔려가고 끌려 다니며 자신의 진정한 존재가치를 망각하는 것이 문제다.

제124 지공 화상 22 /대승찬송십수 6-3 /몸은 본래 허무하여

 

신본허무불실 - 身本虛無不實

반본시수집작 - 返本是誰斟酌

유무아자능위 - 有無我自能爲

불노망심복탁 - 不勞妄心卜度

몸은 본래 허무하여 진실한 것이 아니니

근본으로 돌아감을 그 누가 짐작했던가.

있음과 없음은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니

허망한 마음으로 수고로이 헤아릴 것이 아니로다.

 

해설 ; 사람의 몸뚱이는 사실 허무하여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지공 화상께서는 사람들이 인생의 본질과 근본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짐작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안타까워 이와 같은 육신의 허구성을 깨닫기를 바란 것이다. 이 몸뚱이의 본질만 깨달으면 그 처지가 어떠하든 관계없이 인생은 나날이 좋은 날이라는 즐거움을 누리리라. 이 몸이 있고 없음도 자신이 만든 것이며 몸에 따른 사람과 재산과 명예와 부귀영화의 있고 없음도 역시 자기 자신이 만든 것이다. 허망하고 공연한 생각으로 쓸데없이 헤아리고 계산할 일이 아니다. 방하착하고 쉬어버리면 나날이 편안하고 즐거운 삶이 되리라.

제124 지공 화상 23 /대승찬송십수 6-4 /중생의 몸이 큰 허공과 같으니

 

중생신동태허 - 衆生身同太虛

번뇌하처안착 - 煩惱何處安着

단무일체희구 - 但無一切希求

번뇌자연소락 - 煩惱自然消落

중생의 몸이 큰 허공과 같으니

번뇌가 어느 곳에 안착할 것인가.

다만 일체 희구하는 것만 없으면

번뇌는 자연히 녹아지리라.

 

해설 ; 사람들의 부질없는 생각, 즉 번뇌는 모두가 이 육신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 육신이 저 허공과 같이 텅 비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여실하게 안다면 무슨 번뇌가 일어날 것이며, 번뇌가 없는데 또 무슨 갈등과 고민이 있겠는가. 일체 번뇌는 이 육신이 있고 육신이 있으니 필요로 하는 것이 많고 필요에 따라 구하는 것이 많다. 구하는 것이 있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아 갈등과 고통이 따른다. 첫째 사람이 그렇고, 일이 그렇고, 주거의 문제와 먹는 문제와 입는 문제가 그렇다. 직업의 문제와 직위의 문제 등등 온갖 것이 모두 이 몸뚱이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다. 이 몸뚱이가 허공처럼 텅 빈 것으로 알고 일체 구하는 것이 없다

제124 지공 화상 24 /대승찬송십수 7-1 /가소롭구나

가소중생준준 - 可笑衆生蠢蠢

각집일반이견 - 各執一般異見

단욕방오구병 - 但欲傍鏊求餠

불해반본관면 - 不解返本觀麪

면시사정지본 - 麪是邪正之本

유인조작백변 - 由人造作百變

소수임의종횡 - 所須任意從橫

불가편탐애련 - 不假偏耽愛戀

 

중생들이 꿈틀 그리는 모습이 가소롭구나.

각각 한 가지씩 다른 소견을 집착하네.

다만 냄비 옆에서 떡을 구하고자 하고

근본으로 돌아가 밀가루를 볼 줄은 알지 못하네.

밀가루는 삿되고 바른 것의 근본이니

사람이 조작하는 것에 따라 백 가지로 변하도다.

구하는 것은 자유로이 뜻을 따르라.

공연히 치우쳐서 탐내고 애착할 것 없어라.

 

해설 ; 중생들이 각자의 소견대로 꿈틀대며 살아간다. 그 살아가는 모습은 다 다르다. 누가 마음은 형상이 없다고 하였던가. 중생들의 일거수 일투족으로 움직이며 표현하며 살아가는 그 현상들이 모두가 그 사람 마음의 형상이다. 즉 사람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그대로 그 사람 마음의 형상이다. 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 형상인가. 그러나 그 각각의 형상들은 본질은 텅 빈 통일된 하나다. 이런 인생과 저런 인생이 달리 보여도 그 본질은 공성(空性)이라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무를 가지고 요리를 하는 것도 대단히 많은 것을 만들 수 있지만 밀가루로써 음식물을 만드는 것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 많은 음식물도 그 근본은 모두 밀가루라는 하나의 사실이듯이. 이러한 이치를 알아 밀가루만 있으면 모든 음식을 다 만들 수 있는데 공연히 떡을 굽는 냄비 옆에서 떡이 만들어 지기만을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제124 지공 화상 25 /대승찬송십수 7-2 /집착이 없는 것이 곧 해탈

 

무착즉시해탈 - 無着卽是解脫

유구우조라견 - 有求又遭羅罥

집착이 없는 것이 곧 해탈이요,

구하는 것이 있으면 또한 그물에 걸리네.

 

해설 ; 사람의 삶에는 행복한 삶도 있고 불행한 삶도 있다. 그러나 늘 불행한 것도 아니고 늘 행복한 것도 아니다. 행복하던 사람도 때로는 불행하기도 하고 불행하던 사람도 때로는 행복할 때가 있다. 그래서 아무리 행복하고자 하더라도 3분의 1은 불행이고, 아무리 불행하고자 하더라도 3분의 1은 행복이고, 3분의 1은 행복도 불행도 아닌 시간들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해결책은 행복과 불행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이다. 그 해탈의 길이란 행복하고자 하는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행복이든 성불이든 구하는 것이 있으면 날아가던 새가 그물에 걸린 것처럼 얽히고 만다. 그러므로 불교는 행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마저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일이다.

제124 지공 화상 26 /대승찬송십수 7-3 /

자비한 마음이 일체에 평등하면

 

자심일체평등 - 慈心一切平等

진여보리자견 - 眞如菩提自現

약회피아이심 - 若懷彼我二心

대면불견불면 - 對面不見佛面

 

자비한 마음이 일체에 평등하면

진여와 보리가 저절로 나타나리.

만약 남과 나라는 두 마음이 있으면

대면하고도 부처님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해설 ;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한다. 때로는 지혜를 우선으로 하지만 지혜를 구축한 뒤에는 자비를 베풀어야 지혜가 완성된다. 만약 지혜가 있는데도 자비를 베풀지 아니하면 그 지혜는 온전한 지혜가 아니다. 또 자비를 베풀 때도 지혜가 결여된 자비라면 그것도 역시 온전한 자비라고 할 수 없다. 지혜를 겸한 자비를 일체 중생에게 평등하게 베풀면 진여와 보리는 저절로 나타난다. 지혜를 갖춘 자비 앞에는 너와 내가 없다. 나와 남이 없다. 이러한 자세라면 눈에 띄는 사람마다 모두가 부처님이리라. 마치 법화경의 상불경 보살처럼 될 것이다.

제124 지공 화상 27 /대승찬송십수 8-1 /

도를 가지고 다시 도를 구하려고 하는 구나

 

세간기허치인 - 世間幾許癡人

장도부욕구도 - 將道復欲求道

광심제의분운 - 廣尋諸義紛紜

자구기신불요 - 自救己身不了

세간의 그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도를 가지고 다시 도를 구하려고 하는 구나.

여러 가지 뜻을 찾아 어지럽게 헤매지만

스스로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도다.

 

해설 ; 도란 사람의 삶이다. 시간적으로 한 순간도 떠나있지 않고 공간적으로 촌보도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도 만약 도를 달리 구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인 자기 자신을 등지고 책을 뒤지고 가르침을 찾아 분주하게 헤매던가. 그와 같은 자세로는 남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리라

제124 지공 화상 28 /대승찬송십수 8-2 /일생을 헛되게 보내면서

 

전심타문난설 - 全尋他文亂說

자해실리묘호 - 自稱至理妙好

도로일생허과 - 徒勞一生虛過

영겁침륜생사 - 永劫沈淪生死

온전히 다른 사람의 글을 찾아 읽고는 어지럽게 말하면서

지극한 이치가 매우 훌륭하다고 스스로 떠들도다.

한갓 수고로이 일생을 헛되게 보내면서

영겁토록 생사에 빠져들도다.

 

해설 ; 불교를 공부하는데 몇 가지의 길이 있다. 진실로 불법의 이치를 깨달아서 그것으로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려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불교의 이치를 공부하여 그 이치에 매료되어 그것으로 즐거움과 어떤 성공을 삼는 사람들이 있다. 또 불교공부를 영업삼아 생각하고 생업의 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세존께서 불교를 전파하신 것은 자리리타(自利利他)요, 자각각타(自覺覺他)가 그 본래의 뜻이다. 그 외의 일은 생사를 벗어나는 일과 무관하다. 자신의 생사도 벗어나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의 생사해탈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제124 지공 화상 29 /대승찬송십수 8-3 /혼탁한 애착이 마음에 얽혀

 

탁애전심불사 - 濁愛纏心不捨

청정지심자뇌 - 淸淨智心自惱

진여법계총림 - 眞如法界叢林

반작형극황초 - 返作荊棘荒草

혼탁한 애착이 마음에 얽혀 떠나지 않아

청정한 지혜에 대하여 마음만 스스로 고뇌하도다.

진여법계 총림이

도리어 가시덤불 우거지고 거친 풀밭이 되었네.

 

해설 ; 불교를 만나고도 재산과 명예와 사람과 부귀라는 평범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에 마음이 얽혀서 떠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한편 청정한 지혜의 세계에도 모르는 바가 아니어서 스스로 마음에 갈등하는 사람이 있다. 불교의 세계란 진여법계의 총림이다. 진여의 이치와 진리의 세계에서 그것으로 만복을 누리며 살아야 하거늘 그렇지 못하고 그 훌륭한 세계를 도리어 명예와 재산과 부귀라는 세속적 욕망으로 험한 가시밭으로 만들고 거친 잡초만 무성하게 한다. 지공 화상의 눈에 비친 현상이 비참하고 안타까워 이런 글을 쓴 것이리라.

제124 지공 화상 30 /대승찬송십수 8-4 /삼을 버리고 금을 구하라

 

단집황엽위금 - 但執黃葉爲金

불오기마구금 - 不悟棄麻求金

소이실념광주 - 所以失念狂走

강력장지상호 - 强力裝持相好

다만 낙엽을 가지고 금이라 여기고

삼을 버리고 금을 구할 줄은 깨닫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바른 생각을 잃어버리고 미쳐서 달아나며

애써서 형상만 꾸미고 좋아하도다.

 

해설 ; 불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람들의 근기와 수준이 각각 차별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차별한 법을 설하여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마치 우는 어린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누렇게 물든 낙엽을 가지고 금으로 만든 돈이라고 속여서 울음을 달랜다는 것이다. 시중에 나도는 대개의 불교가 모두 진금은 아니다. 낙엽을 가지고 금이라고 할 뿐이다. 사람들의 근기가 그런 말을 따라가는 수준이다 보니 아주 잘 먹혀든다. 그리고 더욱 한심한 일은 삼을 지고 길을 가다가 금을 주었는데도 그동안 지고 온 공이 아까워서 삼을 버리고 금을 지고 가지 못하는 경우다. 불교에 오래 인연을 맺다보면 혹 진실로 복이 되고 가치가 있는 내용을 듣게도 되지만 그동안 해 오던 신앙생활이 아까워서 그대로 지나치고 만다. 도대체 참다운 불법 속으로 들어올 줄 모른다. 성인의 눈으로 그와 같은 중생을 본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정신을 잃고 미쳐서 달아나는 미치광이와 무엇이 다르랴. 미친 상태이므로 자신이 하는 일을 아주 잘하는 짓이라고 자랑하기에 바쁘니 이 또한 가련한 일이 아니겠는가.

제124 지공 화상 31 /대승찬송십수 8-5 /입으로는 경을 외우고

 

구내송경송론 - 口內誦經誦論

심리심상고고 - 心裏心常枯槁

일조각본심공 - 一朝覺本心空

구족진여부족 - 具足眞如不足

 

입으로는 경을 외우고 논을 외워도

마음으로는 항상 메마름이라.

하루아침에 본심이 텅 비었음을 깨달으면

진여를 구족하여 하나도 모자람이 없으리라.

 

해설 ; 불교에서 경전이나 어록을 배우는 것은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그 가치대로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세속의 학문도 실은 인간의 심성을 다듬어서 훌륭한 세상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란 달리 표현하면 사람이 곧 부처님이요 보살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살고 다른 사람도 부처님이며 보살로 이해하여 받들어 섬기며 모두가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것이다. 성인의 가르침을 많이 배우고도 마음은 그렇지 못하며 인생을 메마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인생의 본질을 깨달으면 현재 그대로 모든 것이 만족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흠소삼마(欠少甚麽), 지금 여기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면 일체의 갈등과 번뇌는 저절로 사리지리라.

제124 지공 화상 32 /대승찬송십수 9-1 /끊는 그 마음도 곧 도적

 

성문심심단혹 - 聲聞心心斷惑

능단지심시적 - 能斷之心是賊

적적체상제견 - 賊賊遞相除遣

하시료본어묵 - 何時了本語黙

성문은 마음과 마음으로 미혹을 끊으니

능히 끊는 그 마음도 곧 도적이라.

도적과 도적이 서로 번갈아 제거하니

어느 때에 본래로 말하고 묵묵함을 알겠는가.

 

해설 ;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차원은 주관과 객관이 없으며 주체와 객체도 없다. 능(能)이란 주관을 말하며 소(所)란 객관을 말한다. 주체적으로 능히 끊는 마음이나 객체라고 생각하는 번뇌 망상은 끊어야 할 객관이라고 보는데 실은 주관도 객관도, 끊는 마음도 끊어야할 마음도 모두가 한 마음이다. 그것을 둘로 보면 모두가 도적이 된다. 그렇게 나눠놓고 보면 답이 없다. 서로가 도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말과 침묵이 본래 하나인 이치를 깨달을 날이 없다는 것이다.

제124 지공 화상 33 /대승찬송십수 9-2 /

입으로는 천권의 경전을 외우나

 

구내송경천권 - 口內誦經千卷

체상문경불식 - 體上問經不識

불해불법원통 - 不解佛法圓通

도로심행수묵 - 徒勞尋行數墨

 

입으로는 천권의 경전을 외우나

본체의 입장에서 경을 물으면 알지 못하네.

불법이 원통함을 알지 못하고

한갓 수고로이 글줄을 찾고 글자를 헤아리도다.

 

해설 ; 종이와 먹으로 된 경전을 읽는 뜻은 그것이 가리키는 본래의 의미를 아는데 있다. 즉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은 달을 보라는데 그 뜻이 있다. 만약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면 정말이지 그것은 웃기는 짓이다. 불교는 인생사 모든 일에 대해서 시원스럽게 툭 터져 통하는데 있다. 도시통류(道是通流)라고 하였다. 도란 어디에도 막히지 않고 툭 터져 마음껏 흐를 줄 아는데 있다. “본체의 입장에서 경을 묻는다.”는 말은 사람이 그대로 진정한 경전이다. 그 사람을 알자고 종이로 된 경전을 읽는데 사람을 모르고 수고로이 글줄이나 찾고 글자나 헤아린다면 성인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큰 인생이란 성인의 경전에도 메이지 않는다.

제124 지공 화상 34 /대승찬송십수 9-3 /큰 도를 언제 얻을 수 있겠는가.

 

두타아련고행 - 頭陀阿練苦行

희망후신공덕 - 希望後身功德

희망즉시격성 - 希望卽是隔聖

대도하유가득 - 大道何有可得

두타행을 하고 적적한 곳에서 고행을 해서

후신의 공덕을 바라니 바라는 그것이

곧 성스런 길과는 막혔음이라

큰 도를 언제 얻을 수 있겠는가.

 

해설 ; 두타란 두수(抖擻)라고 한문으로 번역하는데 즉 흔들어 떨어뜨린다는 의미다. 번뇌의 때를 벗고 의식주에 탐심을 일으키지 않고 심신을 단련하는 수행이다. 12두타행이라 하여 생화규칙에 열두 가지가 있다. 모두가 지극한 고행이다.

1,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할 것. 2. 걸식할 것. 3. 빈부 가리지 말고 7가식을 할 것. 4. 1일 1식만 할 것. 5. 절도 있는 생활을 할 것. 6. 오후 불식할 것. 7. 헌 옷만 입을 것. 8. 옷은 3벌만(5조, 7조, 9조 가사)만 가질 것. 9. 묘지에 머물 것. 10. 나무 밑에서 머물 것. 11. 거처할 처소를 따로 갖지 말 것. 12. 장좌불와할 것 등이다. 그 외에도 일보일배를 하면서 성지를 찾아가는 일이나, 무릎에 병이 생기도록 지나치게 절을 많이 하는 것도 해당된다. 모두가 다음생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진정으로 성스러운 가르침에는 그와 같은 바라는 바가 없다. 바라는 바가 있는 수행은 결론이 없다. 바라는 바가 이뤄지면 보다 큰 희망이 앞에 놓인다. 그래서 욕심만 더 증대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큰 인생이란 그와 같은 헛된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제124 지공 화상 35 /대승찬송십수 9-4 /

두 사람 모두 서로 알지 못하도다

 

비여몽리도하 - 比如夢裏渡河

선사도과하북 - 船師度過河北

홀각상상안면 - 忽覺床上安眠

실각도선귀칙 - 失却度船軌則

선사급피도인 - 船師及彼度人

양개본불상식 - 兩箇本不相識

비유컨대 꿈에서 강을 건너는데

뱃사공이 하북 땅에 건너 주었으나

홀연히 꿈을 깨고 보니 침상위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으니

뱃사공과 배와 강을 건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이라.

뱃사공과 강을 건너는 사람은

두 사람 모두 서로 알지 못하도다.

 

해설 ; 인생을 꿈이라고 생각하여 그 꿈을 깨고 사는 것을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라고 한다. 선지식이 미혹한 중생을 가르쳐서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였을 경우 꿈을 깨고 보면 실로 깨닫게 해 준 선지식도 미혹에 빠졌던 중생도 본래 없다. 행행본처(行行本處)요 지지말처(至至發處)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가고 가도 본래의 그곳이며 이르고 이르렀다 해도 역시 출발한 그곳이라는 뜻이다. 알고 보면 우리들 인생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성취했다하더라도 본래의 그 사람일 뿐이다. 달리 다른 사람은 없다. 설사 어떤 특별한 경지에 도달하였다하더라도 그 경지에 이르려고 하던 그 자리 일뿐이다.

제124 지공 화상 36 /대승찬송십수 9-5 /

구하는 마음이 저절로 쉬어지네

 

중생미도기반 - 衆生迷倒羈絆

왕래삼계피극 - 往來三界疲極

각오생사여몽 - 覺悟生死如夢

일체구심자식 - 一切求心自息

중생이 미혹하여 얽히고 설켜서

삼계에 가고 오느라 피로가 심하지만

죽고 사는 일이 꿈과 같은 줄을 깨달으면

일체 구하는 마음이 저절로 쉬어지네.

 

해설 ; 중생들의 삶이란 깨어있지 못하고 늘 미혹한 상태로 살아간다. 미혹한 상태란 정신이 캄캄해서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이 내키는 대로 산다는 뜻이다. 그렇다보니 바르고 참된 이치[眞理]와는 거리가 멀다. 바르고 참되지 못한 삶은 여기 저기 만나는 일마다 얽히고 설키게 마련이다. 그렇게 얽혀서 캄캄한 상태로 끌려 다니다 보면 그 고통과 피로가 어떻겠는가. 그러나 만약 인생사 세상사가 모두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구하는 마음은 저절로 쉬어지게 되고 어떤 고통도 사라지고 만다. 마치 꿈속에서 무엇엔가 쫓기어 갖은 애를 다 쓰다가 애를 쓰는 일이 지극하면 꿈을 깨게 되고 꿈을 깨고 나면 꿈속에서의 모든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진정한 대승적 삶은 꿈을 깨고 나서 사는 삶이다. 꿈속에서 대통령이 되는 것 보다는 깨고 나서 시골의 반장이 더 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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