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능엄경楞嚴經과 이근원통耳根圓通

수선님 2021. 8. 15. 13:01

지혜의 샘 - 김계유
2009년 05월 327호

 

장자莊子는 인간이 바깥 경계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이렇게 풍자한다.
사냥을 위해 어느 날 조릉을 찾았을 때였다.
날개 폭이 일곱 자에 눈은 한 치나 되는 이상한 까치 한 마리가 남쪽으로부터 날아와 앉았다. 그 새는 장자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 주변 밤나무 숲에 앉았다.
“참 묘한 새다. 큰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잘 날지 못하고, 큰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눈뜬장님 같지 않은가!”
장자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옷소매를 걷어붙인 뒤 재빨리 밤나무 숲의 그 새를 향해 화살을 겨눴다.
그런데 화살을 겨누던 장자는 거기서 깜짝 놀랄 만한 일에 직면했다.
까치는 나무에 붙어 있는 사마귀를 노리고 있었고, 그 사마귀는 또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신나게 울고 있는 매미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귀나 까치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먹이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앞에 닥친 죽음의 위험에 대해서 전혀 의식조차 못했다.
장자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먹이를 노리는 자, 또 먹이가 된단 말인가? 이익을 쫓는 자는 해를 부른다.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구나.”
장자는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급히 밤나무 숲을 빠져 나왔다.

더구나 장자는 뒤쫓아온 밤나무 숲지기에게 붙잡혀 밤도둑이라고 실컷 욕을 얻어 먹기까지 했다. 그 뒤 장자는 석 달 동안 방에 틀어박혀 뜰에도 나오지 않았다.
제자인 인저가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요즘은 집안에만 칩거해 계시니.”

장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나 자신의 우매함을 모르고 있었다. 흐린 물에 마음을 빼앗겨 맑은 못에 몸을 비춰보는 것을 잊고 있었다. 스승의 가르침 가운데‘세속에 살고 있는 한 세
속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는 교훈이 있다. 그런데 나는 조릉에서 한 마리 까치에게 정신이 팔려 금지되어 있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밤나무 숲으로 들어가지 않았겠나? 그 때문에 숲지기에게 엉뚱한 의심을 받아 욕까지 먹었다. 나는 그런 자신이 정말 부끄러워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 자기 자신의 본질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의 자취는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다. 거론할 만한 하나의 인물로는 간문제簡文帝때 활동한 축법 선사竺法禪師를 떠올려 볼 수 있다. 당시 축법 선사는 회계산에 머물며 법을 펼치고 있었다.
황제는 그의 덕망을 사모하여 그를 궁 안으로 초청하였다.
그래서 잠시 그가 궁중에 머물자 유윤劉尹(이름이담 )이 이렇게 물었다.

“선사께서 어떻게 이처럼 화려한 곳에 머물러 지낼 수가 있습니까?”

축법 선사는 그 말끝에 이렇게 대꾸했다.

“나리께서는 이곳이 화려한 곳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제게는 초라한 초가집에 불과합니다.”

고일사문전高逸沙門傳에 소개되고 있는 이야기다.
법사는 비록 화려한 궁궐에 머물고 있었지만 초가집이나 다름없는 마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한 편의 고사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이를 어떻게 터득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여기서는 ≪능엄경≫의 예를 통해 그 해답을 찾아 보여주고자 한다.
≪능엄경≫의 본래 이름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丁如來密印修證了義諸菩薩 萬行首楞嚴經≫이다.
그 의미는 거룩하신 부처님의 이마와 같은 여래께서 밀인으로 최고의 깨달음을 닦아 증득하신 데 대해 거기에 이르고자 하면 여러 보살님들의 만행을 닦아 행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여러 보살님들의 만행은 당연히 불교의 교리에 나타나는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등의 그 보살님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치는 수행의 방편은 관세음보살님의 이근원통耳根圓通이다. 즉 우리의 신체기관 중 귀에 의존하는 소리의 본질에 주목하게 하는 수행의 한 방법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의사소통을 하고자 할 때 목소리에 의지한다.
그 목소리의 실상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기 어렵고 분명히 우리의 마음에 어떤 움직임을 남기지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이를테면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도리다.
한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의 의미에 주목해보면 그 소리의 본질은 끝없는 욕구이다.
무엇인가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욕구, 대신 그 욕구가 자기의 기대치만큼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고통스러워한다. 이를 관세음보살님께서는 낱낱이들어 알고 계시고 그 고통을 어떻게 하면 덜어줄 수 있을까를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고민해주신다.
이와 같은 관세음보살의 두 가지 측면이 강조되어 나타나는 게 ≪능엄경≫에서의 이근원통이 지닌 참된 의미이다.

쉽게 정리를 해보자 하나는 소리의 본질을 통해 삶의 진실에 눈뜨게 하고자 함이고 하나는 소리의 속성을 통해 끝없는 이웃사랑에의 원력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전자가 개인의 수행문제에 관한 접근이라면 후자는 그와 같은 수행상의 공덕을 어떻게 이웃에게 돌려줄 것인가 하는 회향의 문제다. 그밖에 달리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경전의 가르침에 나타난 도의 본질이기기도 하다.

진리란 멀리 있는가 또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누구나 그 반문 끝에 능엄경의 이근원통을 당연히 떠올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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