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오 스님의 티베트 불교 강의 - 귀의와 금강살타 수행
설오스님(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불교 수행中)
귀의(歸依)
법회를 거행하는 티베트 사원에 참석하게 되면 법사는 제일 먼저 귀의의 중요성과 함께 순수한 보리심(菩提心)에 대한 가르침을 설한다.
귀의(歸依)란 불교도와 비불교도, 곧 내도(內道)와 외도(外道)를 구분짓는 관건이다. 어린아이가 무서운 개한테 쫓기어 어머니 품안으로 달려오듯이, 불법승 삼보님만이 두렵고 엄청난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주실 수 있다는 확실한 신뢰를 갖고 몸과 마음을 다바쳐 완전히 의지하라는 것이다.
물론 삼귀의는 우리 나라 불자들도 기본적으로 하지만, 티베트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다. 티베트 사람들은 차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사고의 위험에 직면했을 때에 '귀의금강상사 . 귀의불 . 귀의법 . 귀의승'이라는 귀의문을 간절히 외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운세가 안 좋다고 느끼거나 가정이나 사업상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큰스님을 찾아 뵙고 해결책을 상의하는데, 그때 큰스님은 그에게 귀의문을 많이 외우는 기도를 하라고 일러주시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귀의문을 외우며 기도하는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으며, 부처님께서는 수발타라라는 제자의 귀의와 도를 깨달은 인연을 설하시어 이를 증명하셨다.
수발타라는 집이 빈곤한데다 아무도 의지할 사람 없이 외롭게 살다가, 괴로움이 극도에 달하자 석가모니 부처님께로 나아가 출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가 찾아갔을 때 공교롭게도 부처님께서는 외출중이셨고, 여러 큰비구들은 그가 그곳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과거 인연을 관하여 보았으나 팔만 겁 동안 선근을 심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두터운 업장에 낙담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수발타라는 괴로움이 극에 달해서 성 밖으로 달려나가 막 자살을 하려고 하였다. 그 순간 부처님께서 나타나시더니 그에게 까닭을 물으셨다.
수발타라는 울면서 자초지종을 고하였고, 부처님께서는 그를 제자로 받아주셨다. 그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깊이 명상하여 7일만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나중에 제자들이 그 연유를 여쭈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단지 팔만 겁 동안의 인연만 알고 팔만 겁 이전에 일찍이 그가 선근을 심은 것을 몰랐기 때문이니라.
팔만 겁 이전, 그는 가난하여 나무를 해다 팔면서 살았다. 하루는 산에서 호랑이를 만났는데, 도망칠 곳이 없자 그는 급히 나무 위로 올라갔느니라. 호랑이는 나무둥치를 물어뜯고 흔들어 나무가 부러지려 하였으나 누구하나 구해줄 사람이 없었느니라. 그토록 다급한 상황 속에서 문득 '대각자이신 부처님은 자비력이 있어 능히 모든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쳐 그는 크게 외쳤느니라.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저를 구해주옵소서!'
그런데 놀랍게도 호랑이가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 소리를 듣더니 멀찍이 도망을 쳤고, 그는 무사하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느니라. 그리고 바로 그때 그가 '나무불 나무법 나무승'을 외우며 깨달음의 바른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연이 성숙되어 아라한과를 증득한 것이다."
여러 제자들은 부처님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찬탄하였다.
이와 같은 전통 기도법을 이어받아 티베트 사람들은 귀의를 수행과 기도의 일환으로 중요시하고 있으며, 귀의의 철저한 생활화를 통하여 불교도와 외도의 구분을 분명히 짓고 있다.
그리고 티베트불교 수행에 입문하게 되면 제일 먼저 귀의 대예배 10만 번을 하여야 한다. 귀의의 대상을 묘사한 탕카(티베트의 탱화)를 앞에 모셔 놓고 오체투지를 하면서 입으로는 귀의문을 외우고, 마음으로는 '육도의 중생들이 다 나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면서, 모두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삼보께 귀의를 하는 것을 관상한다.
이때는 불법승 삼보와 함께 삼근본(三根本)을 귀의의 대상으로 삼는데, 삼근본은 다음과 같다.
① 가피의 근본 : 자신에게 법을 전수해 준 스승과 그 법을 전수해 온 전승조사들.
② 성취의 근본 : 그 법의 수호본존이신 각 파(派)의 본존들
③ 외호(外護)의 근본 : 남녀 호법신인 '타카 . 타키니', 자량(資糧)을 구족하게 하신 재신(財神)들.
이렇게 오체투지를 하며 간절히 삼보님과 삼근본을 향해 진정코 귀의하여 신심이 생겨났을 때라야 비로소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해탈을 이루게끔 하는 불법의 수행에 입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 삼보에 귀의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윤회의 고통을 뼛속 깊이 느끼고 깨달아, '윤회계를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바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마음가짐을 염리심(厭離心), 또는 출리심(出離心)이라고 한다.
윤회의 세계가 고통을 본질로 삼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염리심, 곧 두려운 마음을 내게 된다는 것이며, 그 염리심이 불법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간절한 염리심과 함께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생겨났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귀의가 이루어지고 수행에 입문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티베트불교에서는 '염리심은 도(道)의 시작이요, 수행자의 머리'라 칭하고 있다.
발보리심(發菩提心)
"염리심을 수행자의 머리라고 한다면 보리심(菩提心)은 수행자의 마음이다. 그리고 우리가 도를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은 일체 중생을 해탈케 하는 데 있다."
나의 구루(영적인 스승)는 항상 이렇게 깨우쳐 주셨다. 이 말씀은 '나' 혼자만의 해탈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모두 해탈케 하겠다'는 깨달음의 마음을 발하라는 것이다. 곧 과거생에 나의 부모가 아니었던 중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일체 중생이 나의 부모이자 가장 은혜로운 어머니라는 생각으로 보리심을 발하라는 것이다.
용수보살은 {보행왕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지구의 흙을 다 부수어 노간주나무 씨앗만한 크기의 환을 만든다 해도 한 사람이 무수한 삶을 되풀이하며 인연 맺었던 어머니의 숫자에는 미치지 못한다."
온 우주에 가득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어머니와 같은 중생들이 윤회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어찌 방관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티베트불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일체중생과 더불어 해탈하는 최상의 보리심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수행의 목표로 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보리심은 깨달음의 전제이자 뿌리이며, 고갈되지 않는 보물이다.
보리심을 발하는 데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양치는 목자와 같은 발심이다. 양치는 목자는 양들을 다 앞에 보내고 자신은 맨 뒤에 따라가듯이, 일체 중생을 다 성불시킨 후에 자신이 성불하겠다는 발심이다.
둘째는 뱃사공과 같은 발심이다. 뱃사공이 손님을 모두 배에 싣고 함께 강을 건너듯이, 중생과 내가 함께 성불하고자 하는 발심이다.
셋째는 왕과 같은 발심이다. 항상 자신을 만 백성의 위에 놓는 왕과 같이, 내가 먼저 성불한 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심이다.
구루는 이 가운데 목자와 같은 발심을 가장 수승한 보리심이라고 설하신다. 하지만 수행성취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생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보살행을 하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라는 경고를 잊지 않으신다.
그것은 마치 두 팔이 없는 어머니가 물에 빠진 아기를 보고 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아서, 함께 죽을 뿐 서로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력보살의 환생자가 아닌 보통 근기를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비와 방편, 공성(空性)과 지혜의 두 팔이 자라날 수 있게끔 먼저 고요한 곳에서 수행을 하여 힘을 얻도록 지도하고 있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행에 앞서 반드시 보리심을 일으키고 자라나게 하는 기도를 한다.
"보리심의 보배를 일으키지 못한 자는 일어나게 하시고, 이미 일으킨 자는 더욱더 자라나게 하소서."
아울러 '일체 중생을 모두 성불시키기 위해 더욱 열심히 정진 수행하여 성불하겠다'는 보리심을 굳건히 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상황에 부딪쳤을 대 보리심을 발한 것과 같은 자비를 베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영적 스승의 구루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모든 이익과 기쁨을 남에게 주고, 모든 손실과 고통을 자기 자신이 취하라."
실로 거의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자비이지만, 이 글귀 속에 보리심의 내용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 병원에서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환자의 고통과 병을 대신 받는다는 것! 결코 상상조차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성불하기를 바란다면 이 가르침대로 수행을 해야만 한다.
티베트불교에는 보리심을 증장시키기 위해 자비심을 기르는 구체적인 수행방편이 많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널리 쓰여지는 수행법이 '통렌 수행'이다.
통렌 수행은 호흡에 맞추어 행하여 진다. 숨을 내쉴 때는 밝고 흰빛이 나의 몸에서 나와 삼악도에 있는 고통받는 중생들은 물론 육도에 있는 모든 중생들에게 비추되, 그들이 그 빛으로 인하여 행복하고 편안해진다고 관상한다. 또 숨을 들이마실 때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이 검은빛으로 나에게 다 들어와서 내가 그들의 고통을 대신 받는다고 관상한다. 이렇게 매일 21번 정도 수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원한다.
'모든 중생들의 고통은 내가 대신 다 받고, 행복과 기쁨만이 그들에게 충만하여지이다.'
달라이라마는 티베트 명절 법문에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세생생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왔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행복을 얻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다면, 자신만을 위했던 삶의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이야말로 그 방법을 바꿀 때가 아닐까?"
진정 자비야말로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을 실현시켜 주는 보배이며, 그 축복의 빛은 온 우주에 두루 미치는 것이다.
소걀린포체({티베트의 지혜}의 저자)는 말씀하셨다.
"자비는 동정보다 훨씬 위대하고 고귀하다. 동정은 두려움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건방진 우월감에 젖은 듯한 느낌이 배어 있기도 하다. 자비심을 기르면 중생들 대부분이 비슷한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중생을 섬기게 된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어느 누구보다 우월하지 않음도 알게 된다.
따라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첫 반응은 단순한 동정이기보다는 자비심이어야 한다. 그를 존중해야 하며 감사의 마음까지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우리에게 자비심이라는 거룩한 선물을 준 것이고, 영적인 깨달음에 가장 필요한 자질이 계발되도록 도와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자비의 보리심에는 상대적 보리심과 절대적 보리심이 있다.
성불의 경계인 구경각(九竟覺 :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하게 되면 공성을 체득하게 되고, 그 공성(空性)의 텅 빈 우주로부터 자비심은 저절로 넘쳐 나온다. 한낮의 태양이 만물을 두루 비추듯이 온 법계에 두루 미치는 자비, 곧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 동체대비(同體大悲)에서 우러나온 자비가 절대적 보리심이다.
반면 중생들이 부처의 본래면목을 회복하고자 육바라밀 등의 자비행을 실천하여 보리심을 단련해 가는 것은 상대적 보리심이다.
다람살라에는 손과 발이 문드러지고 코가 없는 문둥병 환자와 거지들이 가족 단위로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면 그 문둥병 환자나 거지들에게 동전과 먹을 것을 준비하여 나누어주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사무량심(四無量心)
발보리심과 함께 수행의 전제가 되는 마음이 사무량심이다.
성불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체법에 자성(自性)이 없음을 깨달아 공성을 증득해야 하는데, 그러한 공성(空性)과 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리심을 증장시켜야 하는데, 이 보리심은 사무량심을 통해서 증장되는 것이다.
사무량심은 자(慈) . 비(悲) . 희(喜) . 사(捨)의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이다. 이 넷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자심(慈心) : 고통은 크게 없으나 행복을 얻지 못한 중생들을 자애하는 마음.
비심(悲心) : 병이나 어려움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중생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
희심(喜心) : 이미 행복을 갖춘 중생들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고 그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
사심(捨心) : 일체 중생 누구에게나 불평등한 마음을 버리고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
사무량심을 다시 설명하면 이렇다.
자심(慈心)을 냄으로써 다른 이를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듯, 자애로운 마음은 자연히 중생들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마음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심(悲心)을 냄으로써 중생들을 해치는 직접적인 행위를 하지 않게 된다.
희심(喜心)을 냄으로써 중생들을 질투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사심(捨心)을 냄으로써 중생들을 일체 중생들에 대하여 애착하거나 싫어함이 없이 평등한 마음을 성취하게 된다.
이상의 사무량심은 곧 청정심으로, 성불에 이르게 하는 복덕을 가장 빠르게 쌓는 길이라고 한다.
아울러 티베트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식으로 사무량심을 익혀야 보리심을 낼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첫째, 중생들이 다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을 낸다.
둘째, 중생들을 다 행복하게 해주어야겠다고 맹세한다.
셋째, 중생들이 다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넷째, 중생들이 다 행복할 수 있도록 가호를 내려 달라고 부처님 전에 간청을 한다.
이와 같이 티베트불교에서는 자 . 비 . 희 . 사의 무한히 넓은 마음을 하나씩 깊이 새기면서, 그 마음을 반복하여 일으킬 때 진정한 보리심이 일어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생기차제와 원만차제
티베트불교 수행은 크게 생기차제(生起次弟)와 원만차제(圓滿次弟)의 두 단계로 구분짓고 있다. 차제는 행법(行法)이라는 뜻이며, 이 두 차제는 모두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한 방편이다.
생기차제는 본존불에 대한 관상과 진언을 통하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는 인(因)을 심게 하는 수행이요, 원만차제는 스승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자리에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하게 해주는 수행이다. 이 둘을 우리식으로 풀이하면, 원만차제는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 가장 원만한 깨달음에 이르는 돈오(頓悟)의 수행법이요, 생기차제는 한 단계 한 단계씩 깨달음을 이루어가는 점수(漸修)의 수행법과 비슷하다.
원만차제는 중생과 부처가 둘인 상대적인 경계를 인정하지 않고, 일체 유정이 다 본래 부처라는 지견으로 수행한다. 곧 방편을 빌리지 않고 본연의 절대적 진리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다. 근기가 아주 수승한 사람은 생기차제의 수행을 거칠 필요 없이 직접 원만차제의 수행을 하게 된다. 따라서 제자의 근기를 성숙시키고, 그 후에 자성의 본모습을 인지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먼저 생기차제의 수행을 거치되, 먼저 업장부터 정화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불보살의 관상을 통하여 부처의 색신(色身)을 성취하고, 마지막으로 공성(空性)의 수행을 통해 부처의 법신을 성취하게 된다.
이 생기차제법에 따라 , 대부분의 티베트 사람들은 자신과 특히 상응하는 본존불을 정하여 진언을 외우고 관상을 한다. 먼저 공성진언인 '옴 숴바와 수다살바 달마 숴바하 수다함'을 하여 공성을 견고히 관상한 다음, 본존의 모습을 생각으로 일으킨다. 일단 본존을 일으킨 후에는 자신이 관상으로 지은 부처가 아닌 무시 이래의 본래 부처라는 확신을 확고하게 갖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공성을 수행하여 견고한 기초 위에 본존을 생기해야 하기 때문에, 공성의 수행은 본존요가(본존불을 이루는 수행)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존요가를 오직 생기차제라고만 보기보다는 원만차제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밀교의 원만차제 수행 가운데에서도 공통적으로 본존요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불교 안에는 각 파(派)마다 고유한 전승을 가진 수행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공통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수행이 본존요가이다.
시방에 본래 있는 불보살을 본존불인 지혜존(智慧尊 : 관상의 대상이 되고 자신에게 성취와 가피를 내려 주는 본존불)으로 모시고, 자신의 몸을 수행의 대상으로 정한 불보살과 똑같은 모습으로 관상하는 것을 삼마야존(三摩耶尊 : 계율존이라 번역되며, 범부인 중생이 수행의 방편으로 자신을 본존불로 관상했을 때의 본존불)이라 부른다.
본존 만트라를 모시고 삼마야존을 선명히 관상하여 자신이 진실로 본존불과 똑같은 부처라는 확신과 신심이 확고해졌을 때 지혜존인 본존불과 상응할 수 있게 되고, 그의 가피를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혜존과 삼마야존이 잘 상응하여 가피가 충만해졌을 때 자타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공성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단계를 원만차제의 단계라 한다.
이를테면 한 가지 수행 안에 생기차제와 원만차제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원만차제 수행만을 할 때는 고요하면서도 지극히 또렷한 광명의 상태로 생기차제를 대신한다.
원만차제 수행을 대표하는 법으로 '마하무드라'라 불리우는 까규파(닝마파, 겔룩파, 샤캬파와 함께 티베트불교의 대표적인 4개 종파 가운데 하나)의 대수인(大手印) 수행과 '마하무디'라고 불리우는 닝마파의 대원만 수행을 들 수 있다. 이 두 수행은 모두 지관(止觀)수행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국의 참선법과 흡사한 면이 많이 있다.
금강살타(Vajrasattva ; 金剛薩唾) 수행
금강살타(金剛薩唾)는 업장이 다 소멸되었을 때 회복하게 되는 본래의 청정한 부처님으로, 그분을 의지하여 닦는 금강살타 수행은 생기차제의 대표적인 수행이다. 이 수행은 티베트불교의 각 파에서 필수로 하고 있는 정화수행법으로, 기초적인 네 가지 수행[四加行] 중에서 귀의 대예배를 한 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많은 성취자들이 강조하는 금강살타 수행은 수행의 시작이자 구경(究竟)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수행자는 먼저 자신의 업장을 청정히 하여 오독번뇌(五毒煩惱 : 탐욕 . 분노 . 어리석음 . 교만 . 의심)로 물들여진 법기(法器)를 완전히 정화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법수(法水)가 담겨지게 되어 성불에 이를 수가 있다.
그래서 업장 소멸을 위한 수행으로서 금강살타가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업장이 다 소멸되면 본연의 불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구경의 금강살타라고 말하여진다.
많은 사람들은 번잡한 관상과 만트라를 모셔야 하는 생기차제 수행보다는 그대로 자성의 본모습을 관조하는, 언뜻 보기에 무척 간단하게 느껴지는 원만차제 수행만을 하기 원한다.
그러나 황달에 걸린 환자의 눈에는 흰그릇도 누렇게 보이는 법이다. 그런 환자에게는 그릇이 흰색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보다 황달을 고쳐 스스로 흰 것을 희게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본래 부처이지만 무시 이래로 지어온 업장에 가리워져 자신이 부처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 업장을 정화하여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생기차제 수행이요, 그 중에서 가장 수승하고 효율적인 수행이 바로 금강살타 수행이라는 것이다.
금강살타 수행법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수행자는 먼저 자신의 머리 위 30센티미터 정도 거리 위에 연화대가 있고, 그 연화대와 자신의 범혈(梵穴 : 정수리)이 연꽃 줄기 같은 대롱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관상한다.
② 연화대에는 일륜과 월륜이라는, 달과 해를 겹쳐 놓은 것 같은 방석이 놓여져 있고, 방석 위에 금강살타께서 앉아 계신다고 관상한다. 금강살타께서는 흰 색의 몸을 하고 계신데, 마치 설산에 햇빛이 비추었을 때 눈이 부셔서 똑바로 볼 수 없을 만큼 빛나는 모습이다. 그리고 지혜의 상징인 금강저(金剛杵)를 쥔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자비의 상징인 요령을 든 왼손은 허리에 대고 계신 모습이다.
③ 이때 금강살타의 가슴 중앙 부분에 흰색의 '훔'자가 나타났다고 관상하고, 그 주위를 금강살타 만트라가 한 글자씩 동그랗게 에워싼 채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있는 형상을 떠올린다. 그리고 '훔'자와 만트라의 각 글자에서 빛이 나오고, 감로가 흘러나온다고 관상한다.
④ 이윽고 만트라에서 나온 감로는 범혈과 연결된 대롱을 타고 흘러들어온다. 그리고 자신이 세세생생 지어온 무명 업장들을 씻어내며 석탄 같은 검은 물이 되어 각 털구멍으로 빠져나간다고 생각한다. 또 병이 있는 사람은 감로에 의해 병의 장애가 피고름의 모양으로 빠져나간다고 생각하고, 사업이나 공부 등의 장애가 있는 사람은 나쁜 업장이 전갈이나 독거미 등 독충의 모습을 하고 항문 쪽으로 빠져나간다고 관상한다.
⑤ 초보자로서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관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금강살타의 모습 . 만트라 . 감로가 흘러나오는 모습 등을 잠깐잠깐 떠올리며 금강살타 만트라를 원하는 만큼 외운다.
금강살타 만트라는 그 음절이 백개라 하여 일명 '백자명진언(百字明眞言)'이라고 불린다. 불보살님들의 모든 만트라가 이 백자명에서 파생되어 나갔기 때문에, 이 진언을 수지독송하게 되면 모든 불보살의 심주(心呪)를 모시는 것과 같아서 가피의 힘도 그만큼 크다고 한다.
금강살타 만트라를 한글로 표기하면 아래와 같다.
옴 벤자 싸또싸마야 마누 빠라야
벤쟈 싸또띠노빠
티타디또 메바와
쑤또쇼 메바와
아누라또 메바와
쑤뽀쇼 메바와
싸르와 씨띠 메빠야차
싸르와 깔마 쑤짜메
찌땀 씨리얌 꾸루훔
하하하하호
바가완 싸르와 타타가따
벤자 마메무짜 벤자 바하와
마하 싸마야 싸또아
⑥ 금강살타 만트라를 다 외우고 나면 '옴 벤자 싸또 훔' 이라는 보궐진언(망상 등으로 수행에 집중하지 못했던 것을 보충하는 진언)을 108번 염송한다.
⑦ 그리고 나서 금강살타를 향해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는 기도를 올린다. 그런 뒤 금강살타께서 "너의 업장이 이제 모두 청정해졌느니라"라고 기쁘게 말씀하셨다고 관상하고, 금강살타께서 빛으로 화하여 자신과 하나가 되는 모습으로 회향되는 것을 떠올린다.
⑧ 마지막으로 수행자는 잠시 동안 명상을 하고 기도를 마친다.
수행자가 수행 과정에서 계율을 범한 것 등의 모든 허물을 정화시켜 주는 데도 금강살타 수행은 가장 효율적이라고 한다. 물론 자신의 허물을 간절히 뉘우치고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강한 결심이 전제가 된 상태라야 효과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금강살타 만트라는 자신의 업장뿐만 아니라 죽은 영혼의 업장을 정화시켜 주기 위해서도 사용되며, 특히 수행 중에 오는 장애나 병 등을 막아준다고 한다. 또한 수행 중에 여법(如法)하지 못했던 부분이나, 내용을 빠뜨렸거나 산란했던 부분들을 보궐하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모든 수행을 하고 난 뒤에는 마지막으로 반드시 이 만트라를 7번 내지 21번 염하여 보궐진언을 대신하기도 한다.
나는 인도 따시종 사원에 있으면서 한국 스님들이나 많은 외국인들이 기초 수행의 단계, 특히 금강살타 수행을 할 때, 실제로든 꿈으로든 자신들의 업장이 많이 정화되는 것을 느끼고 기뻐하는 경험담들을 많이 들었다.
이제 금강살타 수행에 얽힌 짧은 일화 하나를 소개하며 이번 호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따시종에서 근래의 최고 성취자로 꼽는 독댄(무문관 수행자로써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을 가리킴) 암잠은 일생 동안 금강살타 수행을 위주로 정진을 하셨다.
그는 무문관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자신의 몸 하나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벼랑 위 좁은 동굴에서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보리 가루만 먹으며 6년 동안 백자명진언을 1백만 독씩 1백 번을 하였다.
이후 그는 깊은 삼매를 성취하여 잠을 조복받고 무문관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음은 물론 마침내 최고의 수행성취를 하였다.
암잠은 1988년 86세를 일기로 열반하였는데, 다비를 하였을 때 150여 과의 오색 사리와 함께 심장과 혀가 불에 타지 않고 싱싱하게 남는 이적을 보여, 후세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현재 따시종의 티베트 스님들은 무문관을 하기에 앞서, 백자명진언을 100만 독하고 나서야 무문관에 들어가는 것을 불문율로 하고 있다.
▶ 출처 문헌
- 월간『법공양』 254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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