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의 첫 구절이다.
道沖 而用之或不盈
도충 이용지혹불영
이 문장에서 우리한테 생소한 글자라 해봐야 ‘충(沖)’하고 ‘영(盈)’뿐이다. 그리고 문장이 어렵지도 않다.
원문을 같이 볼까? ‘충(沖)’은 ‘빌 충’ 또는 ‘깊을 충’이다. 그래서 ‘도충(道沖)’이라 하면 ‘도는 비었다’ 또는 ‘도는 깊다’ 혹은 ‘도는 그윽하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중 어떤 의미로 쓰인 충(沖)이냐는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 다음 구절에 가서 ‘깊을 연(淵)’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충(沖)은 비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일단 ‘도충(道沖)’을 ‘도는 텅 비었다’로 번역하자. 문제는 역시 그 다음이다.
盈은 ‘찬다’, ‘채운다’의 뜻인데, 한문은 한 글자가 때로 그 정반대 되는 의미를 내포한다. 여기서의 盈은 채우다의 반대 뜻인 ‘고갈시킨다(窮)’,‘다한다(盡)’의 뜻이 있다. 45장에 ‘大盈若沖,其用不窮’(크게 차 있는 것은 텅 비어 있는 듯하다. 아무리 써도 고갈됨이 없다.)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 뜻이 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서 ‘不盈’은 ‘不窮’이다.
한자가 처음 만들어져서 글자의 의미들이 혼란스럽고 용례가 확실치 않을 때 만들어진 상서(尙書) 같은 고대의 책들에서는 한 글자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자가 어느 시대 사람이야? 공자, 아니 꽁쯔가 춘추필법을 세운 시대의 사람이다. 도대체 그 시대에 누가 한자를 정반대 되는 뜻으로 쓰더냐? ‘찰 영(盈)’을 ‘다할 궁(窮)’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빡빡 우기는 이유가 대체 뭐야? 이유는 한 가지뿐이 없지. 지 대갈빡으로는 해석이 안 되니까 글자의 뜻까지 바꾸는 거야. 외국말을 옮기는데 그래. 원문의 의미를 지 맘대로 바꾼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기가 막히는 게 원문의 뜻 그대로 옮겼을 때는 도저히 말이 안 된다든가 문맥이 연결이 안 된다든가 하면 최후의 방법으로 반대어를 넣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원문의 한자 뜻 그대로 읽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된다.
저 문장의 올바른 뜻은 ‘도는 텅 빈 것과 같아서 막상 쓸려고 하면 아무 것도 안 잡힐지 모른다’는 것이다. 불영(不盈)은 ‘채워져 있지 않다’는 의미잖아? 한자를 보고도 뜻을 몰라, 그래?
‘이용지(而用之)’ 즉, 쓰고자 하면, ‘혹불영(或不盈)’ 아마도 채워져 있지 않을 것이다(손에 잡히는 게 없을 걸)‘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도라는 것을 무슨 천도복숭아처럼 따먹거나 주인 없는 소처럼 타고 다니거나 우물물처럼 두레박으로 퍼 올려 마실 수 있는 것처럼 생각지 말라 이거다. 도는 텅 비어서 소용이 없는 물건이라는 소리다. 쓸려고 하면 서먹을 수가 없다는 거다.
淵兮 似萬物之宗
연혜 사만물지종
혜(兮)는 의미 없는 어조사니까 신경 쓸 거 없고, 연(淵)은 ‘도는 깊다’라는 소리다. 텅 비어서 쓸려고 하면 써먹을 데가 없는 도이지만 그러나 그 텅 빈 것이 깊기는 아주 깊어서 만물지종(萬物之宗)이 뭔가? 쉽게 말하면 만물의 씨앗이고 만물의 부모다. 즉, ‘도는 텅 빈 것이어서 쓰고자 해도 소용이 없는 물건이지만 그 속이 깊고도 깊어서 세상 만물이 다 그것에서 나온다’이다. 이 대목에서 훗날의 음양가(陰陽家)들의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이 나왔다. 무극에서 태극이 나오고 태극에서 음양이 갈라져 음양에서 오행이 비롯되고, 어쩌고저쩌고….
무극이라는 것은 음양오행과 세상 만물의 시작이지만 구극 자체는 볼 수도 만질 수도 파악할 수도 써먹을 수도 없는 텅 빈 무엇이다.
무극은 퍼내서 쓰고 자시고 할 물건이 아니다. 바로 노자가 앞에서 말했던 ‘천지지시’다. 이 천지지시가 이름을 붙이는 순간 뭐가 된다? 바로 만물지모가 된다. 이게 무엇이다? 바로 태극이다. 태극은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고 음양이 조화를 일으키고 있는 상태다. 도올은 이것을 사람이 쓰고 이용할 수 있는 양넘들의 창조주 비슷한 개념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노자는 ‘도는 쓸모 없는 물건이다. 소용이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만물을 낳기는 해도 만물한테 소용되는 구석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에다가 기도하고 찬송해봐야 응답도 없고 가피공덕도 바랄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나 야훼 같은 창조주, 조물주는 다르다. 이런 건 소용이 있다. 아플 때 기도하면 병을 낫게 해주는 의사로도 쓰이고 사업이 안될 때는 고문역도 되고 컨설턴트로도 쓰이고, 심지어 어느 종목이 오를 것인지도 가르쳐주는 주식투자 자문에 펀드매니저 역할도 해준다. 가끔씩은 미운 놈 패주는 청부폭력 해결사 역할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전쟁도 하지만 그런 건 모른 척하자.
아무튼 노자는 도는 그런 데 소용이 없으니 도를 어디에 써먹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좌기예(挫其銳)의 세 글자 가운데 ‘좌(挫)’는 ‘꺾을 좌’다. ‘其’는 ‘그 기’이고, ‘예(銳)’는 ‘날카로울 예’다. 가운데 ‘其’가 가리키는 ‘그것’이 뭔가 하면 바로 ‘도(道)’다. 그래서 이 말은 ‘도의 날카로움을 꺾고’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면 도리는 물건의 형상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물건에서 날카롭게 삐쳐나온 것들, 즉 튀어나온 가지들을 꺾어버린다는 말이다. 삐죽삐죽 나온 것을 모조리 꺾으면 둥글든 육방체든 그 속의 틀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도라는 물건의 뾰족하게 나온 부분을 모두 쳐내면 바탕 틀이 어떻게 생겼느냐? 그 모습을 묘사해놓은 말이 바로 화기광(和其光)이다. 여러 개의 빛이 어우러진 상태라 영롱하지만 형체가 없는 모습이다.
해기분(解其紛)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해(解)’는 풀어헤쳐서 가른다는 글자다. ‘분(紛)’은 어지럽고 난잡한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어지럽고 복잡하게 얽힌 것을 풀어서 헤치면 도가 어떻게 되느냐? 바로 ‘동기진(同其塵)’ 즉, 티끌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알기 쉽게 문장의 순서를 정리하면 이렇다. ‘좌기예즉화기광(挫其銳則和其光)이요,해기분즉동기진(解其紛則同其塵)이니’라는 하나의 문장이 된다. 다시 조선말로 풀면, ‘도라는 물건의 튀어나온 부분들을 잘라내서 그 바탕의 모습을 보면 비이 어우러지는 모습이요, 도의 복잡하고 난잡한 것을 풀어헤쳐서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낱낱의 티끌과 같다’이다. 고로 천하 만물이 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아무리 그것을 잘라보고 가루로 빻아보고 실타래를 풀 듯이 헤쳐봐도 빛이 어울리는 화광이나 먼지보다 작은 티끌 같은 것이어서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괜히 도가 어떤 건지 확인해보겠다고 파보고, 뒤집어보고, 헤쳐보고, 세워보고, 눕혀보고, 튀겨보고, 찔러보고, 잘라보고, 녹여보고 기타 등등 헛지랄 하지 말라는 충고다. 그 말을 못 알아듣고 도라는 것이 뭘 무디게 하고 풀고 고르고 하는 거라고 헛다리 짚고 자빠지면 어쩌자는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어.
노자는 뭘 다듬고 풀어 주고 하는 어떤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도를 그런 것으로 착각하고 혹시라도 절하고 기도하고 자빠지는 중생이 있을까봐 ‘도는 쓰려고 하면 텅빈 것이고 차 있지 않아서 서먹을 수 없다. 그 생긴 모양을 볼 것 같으면 그냥 어우러진 빛이고 티끌과 같아서 정체도 알 수 없는 것이니라’ 하고 거듭 말하고 있는 거다.
湛兮 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담혜 사혹존 오부지수지자 상제지선
사람뿐만이 아니라 지나인들에게는 별의별 것들이 다 신이 된다. 색깔이나 방위도 어엿한 신이다. 노랑 신은 황제(黃帝)라 하고 중앙의 신이며, 검정 신은 흑제(黑帝)로 북쪽의 신이고, 파랑 귀신은 청제(靑帝)면서 동쪽의 신이라고 하는 식이다. 유대인들이 여호와나, 창조주 혹은 절대자라는 의미로 부르는 하나님과 지나인들이 말하는 제(帝) 혹은 신(神)은 전혀 다르다. 무당들이 섬기는 관운장신이나 동자신 또는 할아방신의 개념과 비슷하다. 그러니 동물들도 신이 안 되란 법이 없지. 생명 있는 것이든 사물이든 그것의 영화(靈化)된 것들을 총칭해서 신이라 하는 거다. 그런 세계의 사상을 논하는 자리에 하나뿐인 유일신이라는 뜻의 하나님을 갖다 붙이는 것은 난센스다.
또, 이 온갖 잡다한 지나의 신들은 끗발에 따라 위계 질서가 있다. 신들의 세계는 군대식 계급사회다. 그래서 최고 대빵을 상제, 천제, 또는 옥황상제라 하고 저 아래 서낭당 고목 신가지 셀 수도 없는 신이 줄을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은 그런 신들이 종종 겸직을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황제(黃帝)’라고 하면 복희,신농과 더불어 중국에서 삼황 중의 한 사람이고 도교의 교조로 숭상받기도 하는 전설상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방위 중 한가운데를 상징하는 중앙신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5원색 중 노란색의 신을 뜻하기도 하고 오행(五行) 중 토(土)로서 흙의 신을 말하기도 하고 동물로서는 용신(龍神)이 되기도 한다. 이 전부는 같은 신이기도 하고 각각 다른 여러 개의 신이기도 하다. 지나인들이 생각하는 신의 계급으로 볼 때 아마 황제(黃帝)는 옥황상제의 아래쯤 될 것이다. 오행 중의 으뜸인 황(黃)의 레벨이다. 옥황상제는 오행(五行)을 낳은 음양(陰陽) 즉 태극의 레벨이다. 태극 위에는 뭐가 있어? 바로 무극(無極)이 있다.
태허(太虛) 또는 노자가 말하는 도(道)가 있다. 그렇다면 동물나라의 계급은 어떻게 될까? 일단 지나인 하면 용이 생각나는데 용의 계급이 황제와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면 옥황상제와 같은 레벨의 동물이 무엇이냐? 아마 노자는 그것을 코끼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나는 노자나 공자가 코끼리를 직접 보았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인도 전문(傳聞)을 통해서 들었을 것이고 그것의 이빨이라고 하는 상아는 보았을 것이다. 이빨 하나가 이 정도로 큰놈이면 덩치가 용보다 더 크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코끼리를 용이나 봉황 앞에 세워 제일 계급이 높은 신의 상징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노자가 말하는 상제(象帝)란 끗발이 제일 높은 신이다.
그런데 왜 노자는 상제(上帝)나 천제(天帝) 같은 단어를 사용치 않고 ‘상제(象帝)’라고 썼겠느냐 말이다. 《도덕경》을 읽으면서 그 이유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아직 이 책을 읽을 때가 안 된 것이다. 내가 앞에서 하나 하나의 글자의 뜻만을 볼 게 아니고 노자의 필법과 글 버릇까지 살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가 이런 대목 때문이다. 노자가 《도덕경》5천 글자를 쓰면서 다른 사람이 한번이라도 사용한 적이 있는 ‘의미태의 고유명사’는 절대 쓰지 않았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어야 《도덕경》을 번역한다고 덤빌 자격이 있다.
내가 노자의 글을 읽으면서 감탄한 것은 그 내용만이 아니라 이런 철학사상적 개념을 그 이전에 사용된 적이 있는 의미태의 고유명사를 단 하나도 글 속에 넣지 않고서 문장을 완성해냈다는 점이다. 《도덕경》에 사용된 모든 의미태의 고유명사는 노자가 직접 만든 오리지널 창조어 뿐이다. 모든 이름은 그 지적소유권이 오로지 노자한테 있는 말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인 한자어 가운데 노자가 그 원작자인 말은 무척 많다. 《도덕경》이 그 말들의 시원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남이 만들어 붙인 이름을 노자는 자기 글 속에서 단 한 마디도 쓰지 않는다. 이것은 노자의 엄청난 자존심 탓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도’라는 것은 노자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설명하는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설명에 필요한 모든 단어까지도 노자가 만들 수 밖에 없고 다른 어떤 글에 쓰여진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고집의 산물이라고. 즉 그대까지 사용되던 상제니 천제니 하는 것들도 노자가 말하는 상제와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노자는 자기가 ‘상제’라는 이름을 만들어서 슨 것이다 뒤에 나오는 ‘현빈’과 같은 단어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마치 불교에서 나오는 열반이나 도솔천 같은 지명, 여러 신장의 이름과 마찬가지다. 전부 석가모니가 지어낸 오리지널 창작 이름들이다.
그래서 《도덕경》을 해석할 때 노자가 지은 신의 이름인 《상제》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바꿔 번역할 수도 없고 번역해서도 안 된다. ‘상제(象帝)’가 뭐냐? 그냥 ‘상제(象帝)’다. 이 말을 ‘상제(上帝)’나 ‘천제(天帝)’ 또는 다른 신의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은 노자에 대한 모욕이다. 《도덕경》이 어떤 책인지도 모르는 맹꽁이들이나 이런 노자 고유의 창조어를 번역하려고 육갑을 떠는 거다.
노자의 말뜻을 풀어보면 도라는 것이 코끼리 신보다도 윗길에 있을 거다. 신들 중에 제일 끗발 높은 신보다도 먼저 생겼을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노자는 도라는 것이 있어 보이기는 하나 하도 맑아서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짐작컨대 최고 높은 신보다도 먼저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도를 신(神)이나 제(帝)보다 앞서 존재하는 무엇으로 보는 것이다. 무엇을 다듬고 얽힌 것을 풀고 조화를 부리고 사람의 기도를 듣고 소원을 풀어주고 하는 영적인 존재들, 즉 신이란 것은 도의 다음에 나오는 개념이고 도는 그런 존재보다 선행하는 무엇이다. 이 소리다. 이제 알겠지?
그대들이 帝를 말한다면 만물의 근원자인 道는 그 제보다 분명히 앞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 왜 노자가 ‘象’자를 썼는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우리는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한다. 道는 여호와 하나님(여호와 하나님에 밑줄 쫘악)보다 앞서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순간에 노자는 바로 앞서 ‘나는 누구의 아들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직선 시간적 계시성(직선 시간적 계시성에 밑줄 쫘악)을 부정했던 그 부정의 논리에 위배되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근원적으로 도가 그러한 존재의 시간적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서 개념화될 수 있고,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帝)보다 앞서는 것 같네’(象帝之先)라고 하여, 그 초개념적 문의의 맥락(초개념적 문의의 맥락에 밑줄 쫘악)을 명료히 한 것이다. 이로써 노자는 러셀 경이 비판하는 기독교의 논리적 위선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여호와는 창조주다. 모든 것의 시작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태초의 아버지다. 이러한 모든 것에 선재(先在)하는 창조주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불합리한 것인지는 새삼 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러한 인격신(영적 권능 또는 힘의 행사자)의 존재 이전에 무엇인가를 상정하지 않으면 신학은 풀 수 없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그 존재의 이름을 노자는 ‘도’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신이나 제 등은 도에서 나온 것들이다. 도가 만물지모라고 할 때 신의 존재들조차도 그 만물에 포함된다. 이러한 ‘도’가 만물에 직접적인 효용가치가 있다고 하면 노자의 도론(道論)은 출발부터 무지막지한 반론과 공박의 목표가 되었을 것이다.
일단 노자의 결론은 그렇다. ‘도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 도는 설명이 가능한 무엇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떤 방법으로 이해를 할 것인가? 바로 도가 낳은 만물의 법칙에서 그것을 유추해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도’에 기반한 생활 윤리이며 규범이다. 그리고 그것에서 도출한 정치사상이 바로 노자의 ‘성인정치’다. 이 성인정치는 공자의 ‘왕도 정치’와 확실히 다른 정치론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와 비슷한 철학적 토대 위에 서 있는 정치사상을 꼽는다면 나는 니체의 ‘초인정치’를 들고 싶다. 물론 양자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지만 위대한 두 스승의 응시점은 같다고 본다.
그건 그렇고 이 기회에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도덕경》이란 책의 성격에 대해서다. 인류 역사상 《도덕경》만큼 그 성격이 그토록 오랫동안 오해와 편견 속에 묻혀 있던 책은 없다. 주로 음양사상가에 의해 성립된 황노학으로부터 훗날의 도교에 이르기까지 노자의 얘기는 ‘도’에 대한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도’라는 하나의 종교철학과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법의 지침서인 것처럼 곡해되었고 왜곡되어 온 것이다. 지금가지의 수많은 해석이 《도덕경》의 원문을 그런 방향으로 비틀어서 해석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도’란 노자의 이야기처럼 보거나 만지거나 설명하거나 분석해서 그 실체와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기 때문에 노자도 ‘도’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바른 번역
도는 텅 빈 것이어서
쓰려고 하면 잡히지 않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도는 깊어서
온갖 만물이 그에서 비롯되니
도의 가지를 쳐내고 본래 모양을 보려 하면
빛이 어우러져 춤추는 것과 같고
어지럽게 얽힌 것을 풀어 헤쳐 그 속을 보려 하면
다만 낱낱의 티끌이 있을 뿐이며
맑고 맑아서 어찌 보면 있는 듯도 하건마는
그 비롯됨을 알 수 없구나.
다만 가장 높은 신보다도 먼저 있었음만 알겠구나.
제5장의 첫 줄이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천지는 그야말로 두려움과 외경의 대상이었다. 하늘은 인간에게는 비정하고 박절하며 아주 잔인한 무엇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겠지? 그리 생각되지?
그런데 노자는 자연의 그런 불인함이야말로 성인의 도와 합치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말을 천지와 성인은 비정하고 박정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천지와 성인은 비정과 온정, 혹은 인자하거나 매정하거나 하는 차원을 벗어나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동시대 사람들이 자연을 인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노자가 ‘아니다. 노자가 보는 천지와 성인은 인자하지도 않으며 인자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다정한 것도 아니고 다정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가혹하지도 않고 가혹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노자가 말할 때의 ‘인(仁)’은 공자가 말할 때의 ‘인(仁)’과 전혀 다른 소리라는 것이다. ‘무위’ 차원의 도를 보고 있는 노자의 눈에 공자의 인은 ‘유위’의 차원이다. 불경에 보면 ‘보살행을 행한다고 생각하면 이미 보살행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보살행을 행한다고 생각하고 행하는 행위는 이미 보살행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보살행을 행하고 자비를 베풀고 선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 마음의 의지가 불러오는 것이고 이것은 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위(爲)’에 속할 것이다. 만들어지는 것, 또는 지어내는 것이다. 진정한 보살행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살행을 행한다는 생각조차를 떠나 있는 것이다. ‘인’이란 군자지도의 수양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본래적인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상태’와는 거리가 있다고 노자는 생각한다. 태양의 따스한 기운이 만물을 소생시키고 온갖 생명을 키워도 태양에게 자비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이 대지를 말리고 초목을 태워도 태양이 잔혹하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태양은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할 뿐’이고 스스로 그러한 태양이 때로는 생명을 살리고 때로는 생명을 죽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천지야 말로 무위자연의 차원으로서 지극한 것이라고 본다. 천지나 성인의 불인은 인자하지 않거나 매정하거나 잔인하다는 뜻이 아니라 구미거나 지어내거나 만들어내는 행위가 아닌 ‘무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불인(不仁)’은 ‘무위(無爲)’의 다른 표현이다. 뒤의 18장에 가면 ‘대도폐유인의(大道廢有仁義)’라 하는 말이 나오는데 ‘지극한 도가 없는 자리에 인의가 있다’는 의미이고, 또 38장에 나오는 ‘상덕부덕시이유덕(上德不德是以有德)’이란 말도 ‘지극한 덕은 부덕한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덕이 있다’는 것도 비슷한 말들이다. 때문에 ‘천지불인’이라는 말은 천지의 인이야말로 ‘최상의 인’이라는 소리인 것이다. 이 말에 이어서 뒤따라 나오는 말들이 바로 이와 같은 ‘최상의 인’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 이 말은 만물을 풀강아지(芻狗)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추구(풀강아지)라는 것은 중국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사상에 올리는 풀로 만든 개를 말한다. 잡귀를 쫓는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물건이다. 이 풀강아지가 진짜로 잡귀를 쫓는지 귀한 신을 모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제상에 올려진 풀강아지를 눈여겨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있기는 해야 하는 물건이지만 있다 해서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물건이 바로 추구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추구를 대하는 것이나 천지가 만물을 대하는 것이 비슷하다는 말이다. 이것을 잘못 헛짚으면 ‘하찮게 여긴다’ ‘무시한다’ ‘능멸한다’ 라는 말로 오해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학자가 ‘추구’라는 것의 의미를 찾기를 제사를 지낼 때는 소중히 여기다가 제사가 끝나면 길에 갖다버리거나 불에 태워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서 필요할 때는 소중히 여기고 일이 끝나면 매정하게 버리는 것에 대한 비유일 거라고 보고 있다. 노자의 말을 왜곡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 제사를 지내는 광경에 대한 상상력 부족이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에도 추구가 그리 소중한 제물은 아닐뿐더러 제가사 끝났다 해서 매정씩이나 한 마음을 가지고 일부러 홀대하는 물건도 아니다. 제사 지내는 사람이 추구를 소중히 받들거나 잔인하게 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저 별 생각 없이 올렸다가 별 생각 없이 내리는 물건이다.
적당한 비유를 찾자면 ‘소가 닭 쳐다보듯이 한다’는 말에 가까울 것이다. 닭을 쳐다보는 소의 눈길에는 애정도 연민도 호감도 적의도 없다. 그냥 무심한 눈길이다. 소가 닭을 쳐다보는 눈길이야말로 천지가 만물을 바라보는 눈이요, 성인이 백성을 바라보는 눈이다. 소가 마당을 가로질러 가다가 닭이 낳아놓은 알을 밟아서 깨드린다 해도 소가 닭한테 감정이 있어서 한 짓이 아니다. 소는 그저 마당을 지나 밭으로 걸어갔을 뿐이다. 배고픈 닭이 소똥 마른 것을 주워먹어도 소는 닭을 위해 똥을 싼 것이 아니다. 그냥 나오니까 쌌을 뿐이다. 닭도 소가 자기 알을 밟고 지나가도 소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 알이 깨졌구나. 저절로 깨졌겠지(謂我自然)’ 소똥을 맛있게 먹어도 소한테 감사할 줄 모른다. ‘먹이가 저절로 땅 위에 생겨났다(謂我自然)’고 생각할 뿐이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일어나고 절로 이루어졌을 뿐 ‘소가 했다느니, 닭 때문이라느니’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천지성인(天地聖人)과 만물백성(萬物百姓)의 관계가 이런 소하고 닭과 같다는 것이 노자의 말씀이다. 반면에 공자의 인(仁)은 사람이 키우는 닭과 같다. 집도 지어 주고 먹이도 주고 물도 주고 춥지 않게 덥지 않게 보살펴주지만 언젠가는 손에 칼을 들고 닭의 모가지를 딴다. 이게 인(仁)이다. 노자는 백성이 잘살도록 도와주지도 않고 못살게 굴지도 않는 게 최고의 통치라고 본다. 인이니 군자의 도리니 쓸데없는 나발을 불어대던 인간들이 죄없는 백성을 괴롭히고 전쟁터에 내몰고 재산을 뺏고 죽이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말고 아예 백성을 무지무욕(無知無慾)하게 내버려두라는 심오고매한 노자의 주장이시다. 그러면 백성은 절로 행복할 것이요 자기가 행복해져도 그것을 통치자(성인)의 덕택으로 생각지 않고 내가 저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도의 정치라는 가르침이다. ‘백성이 자기가 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하게 하는 정치야말로 최고 최선의 정치라는 것’이 이 대목의 골자요, 노자정치상의 핵심이다.
天地之間 其猶槖籥乎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虛而不屈 動而愈出
허이불굴 동이유출
풀무라는 기계에서 나오는 바람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고 강강익선(强强益善)이다. 많이 나오고 세게 나올수록 좋은 것이 풀무의 바람이다. 만약에 천지지간에 비유한 것이 풀무라면 그리고 천지지간은 무엇이든지 많이 만들어내고 세게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뜻이라면 사람의 말도 많을수록 좋은 것이 되어야 앞뒤가 맞는 소리가 된다. 그런데 바로 뒤에 노자가 하는 말은 ‘다언삭궁(多言數窮) 불여수중(不如守中)’이란 말이다. ‘말이 많으면 금세 막히는 법이니 가슴에 담아둠만 못하다’이다. 이 말을 가지고 유추해 보면 노자는 ‘뭔가 많이 내놓은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풀무’는 아닌 것이다.
반면에 절구와 피리는 이 경우에 대단히 적합한 비유가 된다. 절구는 너무 심하게 절구질을 하면 곡물 가루가 밖으로 마구 튀어나오고 피리도 너무 힘껏 불어 젖히면 쓸데없는 고음에 깨지는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많이 나오는 것은 좋지 않다’는 말에 어울리는 비유는 ‘풀무’가 아니라 ‘절구와 피리’이다.
앞 뒤 문장의 연결 관계도 그렇지만 문장 자체의 구조로 볼 대도 ‘탁’과 ‘약’은 ‘절구와 피리’로 볼 수밖에 없다. ‘탁약’이 도올의 설명대로 풀무라 하면 앞의 ‘기(其)’자하고 그 담의 ‘유(猶)’ 자는 ‘움직일 유’, 또는 ‘원숭이 유’잔데 ‘움직일 동(動)’과는 쓰임새가 약간 다르다. 원숭이 까불듯 촐싹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하는 글자다. 노자는 이 ‘유(猶)’를 절구질과 피리 부는 동작을 묘사하는 글자로 고른 것이다. 그래서 ‘유탁약(猶槖籥)’은 ‘절구질과 피리 부는 일’로 옮길 수 있다.
‘기(其)’를 붙여서 읽으면 ‘기유’는 ‘그 움직임은’이 된다. 맨 뒤의 감탄어조사 ‘호(乎)’와 호응해서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동작이란!’하는 뜻이 되는 것이다. 물론 생략된 말은 ‘얼마나 경망스러운 것이냐?’ 가 되겠다. 이런 문장을 ‘유’는 버리고 ‘호’자는 빼버리고 풀무라 하면 이건 번역이 아니라 창작이다. 그것도 황당무계한 창작이다. 탁약을 ‘풀무’라고 하고 나니까 그 다음 번역이 안 되는 거야. 당근 횡설수설을 시리즈로 할 수밖에 없지. 그건 좀 있다가 보기로 하고 이 문장의 전체적인 의미를 알아보자.
노자의 글버릇을 살펴보면 한 가지 특이한 필법이 눈에 띄는데 그건 바로 ‘Aa Bb’ 구조의 글을 ‘AB ab’로 쓰는 버릇이다. 그것을 알아야 뜻이 통하는 부분이 더러 나온다. 앞에서도 그런 구조의 글이 나온 적이 있었다. ‘허기심 실기복(虛其心 實其腹) 약기지 강기골(弱其志 强其骨)’이란 말과 ‘좌기예 해기분(挫其銳 解其紛) 화기광 동기진(和其光 同其塵)’이 그런 예이다. 이 문장을 읽기 쉽게 배열을 고치면 ‘허기심 약기지(虛其心 弱其志)’ ‘실기복 강기골(實其腹 强其骨)’이 된다. 뒤의 문장도 ‘좌기예 화기광(挫其銳 和其光)’ ‘해기분 동기진(解其紛 同其塵)’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게 하고 뜻을 약하게 하며, 배를 부르게 하고 뼈를 튼실하게 만든다’라는 문장을 노자는 ‘마음을 비우게 하고 배를 부르게 하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는 어순으로 써놓은 것이다.
‘그 뾰족한 부분을 쳐내고 모습을 보면 빛이 어우러지는 영롱함이요, 그 얽힌 것을 풀어 헤쳐서 속을 보면 그것은 먼지와 같은 것이다’ 라는 문장을 어순을 바꿔서 ‘뾰족한 부분을 쳐내고 얽힌 것을 풀어보면 빛이 어루어지고 먼지와 같다’ .천지지간(天地之間) 기유탁약호(其猶槖籥乎) 허이불굴(虛而不屈) 동이유출(動而愈出)로 어순을 바로 잡으면 아주 쉽게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하늘과 땅 사이는 텅 비어 있어 찌그러지지 않을 분이나, 절구질이나 피리를 불 때는 찧거나 불수록 튀어나온다(곡물 찌꺼기와 소리)’라는 뜻이다. 그러면 노자가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만 알면 된다. 천지지간이라는 대자연의 공간과 절구나 피리처럼 인위적으로 파놓은 공간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광대한 공간은 텅 비어 있어서 그것(빔)의 소용은 다만 찌그러지지 않을 뿐이지만 절구와 피리의 속은 똑같이 비어 있으면서도 그것은 움직일수록 무엇인가가 경망스럽게 튀어나온다는 뜻이다.
고로 같은 ‘빔’이라도 자연의 ‘빔’과 인공적인 ‘빔’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떠해야 한다? 절구나 피리처럼 움직일수록 경망스럽게 뭔가가 튀어나오는 절구나 피리 같은 ‘빔’이 되지 말고 천지지간의 ‘빔’처럼 그저 찌부러지지 않으면서 고요한, 그런 ‘빔’을 가지라는 가르침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다음 구절에 따라 나온다.
절구와 피리라는 물건은 사람이 그 속을 파서 비게 만든 물건이다. 이 빈 것이 절구와 피리를 쓸모 있는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공적인 빔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람의 부가적인 노동이 필요하다. 절구는 공이로 부지런히 찧어야 곡식이 빻아지고 피리는 입과 손을 열심히 움직여야 소리가 난다. 열심히 할수록 더욱 많은 곡식을 빻고 더 요란한 소리를 낼 수가 있다. 그러나 절구질은 세게 할수록 가루가 밖으로 튀어나오고 피리도 너무 세게 불면 음이 깨져서 나온다. 이게 바로 ‘동이유출(動而愈出)’이다. 즉 절구나 피리를 불 대 너무 세게하면 곡식가루나 음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이 ‘말이 많으면 금세 막히니 가슴속에 아껴둠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만물을 보고 아무 소리 안 하고 성인이 백성을 간섭하지 않으며 천지간의 공간이 비어 있음으로써 찌그러지지 않는 것을 본받고, 절구와 피리처럼 경망되이 움직여 쏟아내지 마라. 모름지기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는 법이니 모쪼록 말을 아껴 가슴속에 담아둬라, 이런 가르침이다.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니라’ 얼마나 좋은 말인고?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마음속에 담아둠만 못하느니라’사람이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 가지가 따라서 많아지는 거야. 틀린 말이 많아지고, 거짓말이 많아지고, 책임 못 질 말이 많아진단 말이다. 이 세 가지 때문에 사람이 궁지에 빠지게 되는 거고. 요새 사람이 비명에 횡사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이 뭔가? 교통사고지. 그러나 옛날 사람이 비명에 돌아가시는 이유 중에 으뜸이 뭐였겠나? 바로 말이다. 횡액의 대부분이 말에서 비롯됐다.
연산군이 대신들한테 걸어준 묵언패의 내용이 ‘입은 화를 부르는 구멍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였잖아. 그래서 현대인은 싸돌아다니지 않으면 죽을 일이 없고 옛날 사람은 말을 안 하면 죽을 일이 없었다. 말로써 궁지에 몰리기는 백성이나 위정자나 범인이나 군자나 다를 바가 없었지.
그래서 노자가 말하기를 대저 성인은 백성을 추구를 보듯이 하여 간섭치 않고 장담도 하지 않고 약속도 아니하며 거짓말도 아니하니, 이와 같이 말을 아끼라고 재삼 당부하는 것이다 위정자가 말을 아끼면 백성은 위정자의 말에 따라 흔들리지 아니하고 약속을 하지 않으면 기대를 하지 않고, 장담을 하지 않으면 믿지도 않으며, 거짓말을 아니하면 분노할 일도 없으므로 그저 묵묵히 지 할 일이나 하며 산다는 얘기다. 그래서 불행해도 당연, 행복해도 당연, 그저 그런 것이려니, 이게 인생이거니 하고 살아갈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보는 것이지.
자연(自然)! ‘천지지간(天地之間)은 텅 비었으므로 굽히지 않는데, 사람은 절구나 피리와 같이 경망되이 움직이고 말이 많아서 자주 궁지에 몰리는도다. 모름지기 다언삭궁이니 불여수중이니라!’
노자철학을 총괄해서 보면 그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분명 어떤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은 무엇인가? 노자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바로 만물의 존재방식이 ‘빔’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될 때 스스로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항상 도는 스스로 그러할 때, 빔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 빔을 채워버리는 방향, 그 빔을 근원적으로 파괴시키는 방향으로의 사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함이없음(無爲)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빔을 유지하는 함이요, 그 빔을 유지하는 함이야말로 바로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當爲가 아니라 自然이다. 이것은 곧 모든 존재를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둘 때는 반드시 스스로 그러하게 허를 유지한다고 하는 자연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의 有爲的 행동만이 빔을 유지시키지 않으며 스스로 그러함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存在의 自然이다. 여기서 우리는 虛와 無爲와 自然이 하나로 노자철학에서 관통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道의 쓰임(用)이다.
도(道) ≡ 빔(虛) ≡ 본래 그대로(無爲) ≡
스스로 그러함(自然) ≡ 쓰임이 없음(無用)
노자는 앞에서 ‘이용지혹불영(而用之或不盈)’이라 하여 ‘도무용(道無用)’임을 명백히 한 바 있다. 적어도 하나의 사상체계가 되고자 하면 앞뒤 말에 어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앞에서 ‘아’라 했던 것을 뒤에 가서는 ‘어’라 하는 수상쩍은 구석이 보이면 그것은 이미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절구나 피리는 스스로 그러해서 속이 빈 것이 아니다. 사람이 속을 파내고 긁어서 비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천지간의 빔은 쓰임이 없다. 그저 짜부러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쓰고자 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절구와 피리의 빔은 쓰임이 있다. 곡식을 빻고 소리를 낸다. 그 쓰임(用)을 위해서 움직임(猶)이 필요하다. 이것이 스스로 그러한 천지간의 빔과 용을 위해 만들어낸 빔(극대화시킨 빔)의 차이점이다. ‘빔을 극대화 하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이 아니라 절구나 피리를 파서 속이 비게 만드는 짓이다.
비장과 위장은 오행상 토(土)에 속하는 장부지. 당근 토기(土氣)를 그 기운으로 삼는단 말이다. 화(火)는 심장과 소장을 관장하는 기운이야. 오행의 상생상극으로 볼 때 화생토(火生土)요, 목극토(木剋土)의 관계가 있어. 그래서 토에 속하는 비장과 위장은 심장과 소장의 화기로부터 도움을 받고 간과 담의 목기(木氣)로부터는 상함을 받게 되는 거야. 위치상으로도 비장과 위장은 위로는 심장 아래로는 소장 사이에 딱 끼여 있잖아. 그래서 심장과 소장의 화기(火氣)가 비장과 위장이란 그릇(土)을 굽는 가마가 되는 거다. 화력이 셀수록 도자기는 단단해지고 광택이 좋아지는 것처럼 심장과 소장의 기운이 좋을수록 비장과 위장도 튼튼해지는 것이다.
반면에 간과 담(쓸개)은 토를 극하는 목기(木氣)의 장부여서 간의 기능이 승하면 비장의 기운을 억제하고, 담의 기운이 강하면 위장을 손상시키는 것이야. 이런 것은 한의학의 기본 상식이다 비장의 기능은 생리기능 조절에 있고 위의 기능은 해체(解體)와 혼합(混合)에 있는 거다. 위장이 하는 일은 잘게 부수고 섞는 것이지 썩히는 게 아니다. 썩힘과 섞음은 발음은 비슷해도 전혀 다른 소리잖아. 위장에 화기가 모이면 바로 위열(胃熱)이 되고 그건 바로 위궤양으로 직행하지. 흙(土)의 성질이 바로 이와 같은 해체와 혼합이며, 부숙 즉 썩히는 것은 습기(濕氣)인 물(水)의 작용이다.
오행을 각각 대응하는 색으로 나타낼 때 토는 누를 황(黃)이고, 화(火)는 붉을 적(赤)이고, 목(木)은 푸를 청(靑)이다. 그럴듯하잖아. 그런데 수(水)의 색이 검을 흑(黑)이라 하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한다. 선뜻 납득이 안 가지? 오행에 대입시킬 때 물의 색이 왜 검은 흑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이것 하나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게 우리나라 한의학이다.
물의 색이 오행상 왜 흑이 되느냐 하면 그건 바로 수기(水氣)가 부숙(腐熟)의 기운이기 때문이야. 물은 모든 생명을 길러내지만 동시에 그것을 불러들여 썩히는 것이 바로 물이야. 그리고 썩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 색이 검게 변하게 돼 있어. 바로 습기의 작용으로 수의 색깔을 띠게 되는 거지. 우리는 ‘시커멓게 썩었다’고 말하지 ‘시퍼렇게’ 또는 ‘시뻘겋게 썩었다’고 하지 않아. 그리고 물 없이 썩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고 (수분 없는 부패 없다), 소금이 썩은 간장도 검은 색이고, 낙엽이 썩어도 검은 색이고, 고추장을 오래 둬보며 알듯이 빨간 고추도 석으면 검어진다.
그래서 인체에서 볼 때 수(水)의 장부인 신장(腎臟)이 바로 부숙(腐熟)의 역할을 한다. 인체에서 썩은 물을 걸러내는 것이 신장이고, 그게 바로 오줌이잖아. 불의 기운이란 썩어가던 물건도 소독을 해버리는 것이지. 위장의 작용이 화(火)라 해놓고 이 화가 부숙을 시킨다 하면 21세기에는 물로 소독하고 불로 썩히는 시대가 되는 모양이지? 그러면 뭔 줄 아나? 그게 말세다.
곰팡이가 피고 균이 번창하는 것은 오로지 습기 대문인 것이니 썩어가는 것을 햇볕에 말려보면 당장에 썩는 것이 멈취져.
물을 불이라 우기는 짓이 바로 지랄병이다. 비장은 곧 지라인데 인체의 생리기능 조절에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지라가 나쁜 사람의 증세를 일컬어 지랄병이라 한다. 지라 바로 위에 있는 심장의 화기가 너무 승할 때 지랄병이 생긴다. 은행까지 갔다가 통장을 안 가져와서 되돌아오거나 차 속에 키를 꽂아두고 문을 잠가버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지라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은행까지 가서 집에 전화해서 구좌번호를 물어보거나, 철사를 구해서 차 문짝에 쑤셔 넣고 낑낑거리는 것이 바로 지랄하는 짓이란 말이다.
이 ‘지랄염병’이 어떤 병이냐? 염병은 ‘염통’이 나빠서 생기는 병이다. 한의학적 소견으로 이 염병은 심장이 허(약)해서 오는 심장병이다. 심장의 기운인 화기가 약해지면 어찌되느냐, 바로 지라가 같이 허에 빠진다. 왜냐하면 지라(비장)는 심장의 화기를 받아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장부이기 때문이다. 비장은 토(土)에 속하기 때문에 화생토(火生土)의 관계상 화기를 못 받으면 힘을 못 쓴다. 그래서 심장이 나쁜 사람은 반드시 지라가 안 좋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염병은 지랄병을 부르고 지랄병은 반드시 염병과 같이 온다. 그래서 우리가 이 둘을 항상 붙여서 ‘지랄염병’이라 하는 거다.
그 담에 ‘미치고 환장하겠다’ 하는 말을 자주 쓰잖아. 이게 무슨 병이냐? 미치고 환장하는 증세의 원인은 신장(콩팥)에 잇다. 심장의 화기를 억제해주는 것이 바로 신장의 수기(水氣)인데 신장이 약해서 몸에 수기가 부족하면 화기가 위로 올라가서 골에 미치게 된다. 사람은 화기가 머리에 미치면 미쳐버린다. 수기가 부족해서 몸이 말라버리면 미치기만 하느냐? 그게 아니다. 환장을 같이 하게 된다. 환장은 ‘간이 말라서 비틀어지는 병’이다. 물이 없으면 나무는 마른다. 간은 목(木)이다. 그래서 신장의 수기가 부족하면 간이 마르게 되고 심하게 마르면 이게 비틀려서 뒤집어지는 거다. 이게 바로 ‘환장’이다. 그렇다고 배를 째서 간을 보고는 ‘간이 제자리에 있는데 무슨 소리냐?’ 하고 묻는 것은 무식한 짓이다. ‘간이 뒤집어진다’는 말은 부침개 뒤집듯이 엎어진다는 게 아니고 그 기운이 뒤집어진다는 소리다. 때문에 미치는 증상은 환장하고 같이 온다. 그래서 ‘미치고 환장하겠다’ 소리를 하는 거다.
이런 원리로 볼 때 ‘지랄염병’과 ‘미치고 환장하는’ 증세는 같이 오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인체라는 것은 하나가 나빠지면 도미노 카드가 쓰러지듯이 줄줄이 상하게 마련이라서 ‘미치고 환장’ 하는 증세가 계속 심해지면 ‘지랄염병’도 오게 된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바른 번역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보듯이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고
성인도 불인하여
백성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대하듯
간섭하여 말하지 않는다.
천지 사이의 공간이 어떠한가?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것은 어떠한가?
천지지간은 텅 비어서
찌그러지지는 않을 뿐이지만
절구와 피리가 속이 빈 것은
부지런히 움직일수록 많은 것을 흘리고 있으니
그와 같이 말이 많을수록 자주 막히는 바이니
흉중에 담아두어 밝히지 않음만 못하니라.
'도덕경 해설(老子와 똥막대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덕경/또다른해석3/신이 죽지 않는 계곡 (0) | 2022.12.18 |
---|---|
노자 도덕경의 명언 (0) | 2022.12.11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명언 프리미엄 10선選 (0) | 2022.06.05 |
도덕경/또다른 해석1/열반이란 말에는 아무 뜻이 없다. 그저 이름이 열반일 뿐이다 (0) | 2021.09.21 |
노자 도덕경 원문 풀이글/41-81 (0) | 2021.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