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불교교리 문답 총정리 (대한불교조계종)

수선님 2021. 10. 1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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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법(緣起法)]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법으로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된 일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하는 여러 가지 조건에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기(生起)와 소멸(消滅)의 법칙을 말한다. 즉 모든 현상은 무수한 인(因)과 연(緣)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성립되기에 독립ㆍ자존적인 존재는 없으며, 조건과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설이다. 소위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의식(意識)이 있다. 이렇게 전개되어 고통이 쌓이고 모이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현상계의 변하지 않고 존속하는 이치이며 현상계의 근원적인 원리로서, 부처님은 다만 이 법을 스스로 깨닫고 알아서 보편타당한 깨달음[等正覺]을 이루고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분별해 연설하고 드러내 보이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5온(五蘊)] 불교는 인간을 어떤 존재라고 파악하는가?


오온은 5음(五陰), 5중(五衆), 5취(五聚)라고도 하는데, 12처(十二處)와 마찬가지로 중생의 현실 세계의 구조와 성질을 설명하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관으로 일체 만유에 대한 일종의 분류법이다. 즉 이 몸뚱이는 물질 현상인 색(色)과 정신 현상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요소가 모아 쌓인 것, 화합하여 모인 것이라는 뜻이다. 5온설은 우리 육신은 인연에 의해 5온이 잠정적으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집착할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부처님께서는 5온 그 자체가 진실한 ‘나’가 아니 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집착할 때 괴로움이 발생한다고 하여 5취온(五取蘊)이라고도 하였는데, 이와 같은 5온은 중생에게 여러 가지 잘못된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다섯 가지 망상이라고도 불린다. 5온설은 단순히 우리들의 존재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그릇된 자아의 의식에서 해방하기 위하여 말해진 것으로 후에 무아설(無我說)로 발전하여 간다.

[12처(十二處)] 불교는 현실 세계를 어떠한 입장에서 파악하는가?


구역(舊譯)에서는 12입(十二入)이라고도 하는데,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6근(六根)과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6경(六境)을 12처라고 한다. 부처님은 “모든 것은 눈과 빛,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뜻과 법이라는 열두 가지 속에 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즉 어떤 존재도 안이비설신의(六根)의 인식 기관과 색성향미촉법(六境)이라는 인식의 대상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전체인 일체의 모든 것이 전부 이 12처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12처는 5온(五蘊)의 색온(色蘊)을 전개하여 5근 5경, 수상행식의 4온(四蘊)을 합하여 나타난 의근ㆍ법경을 말하는 것으로, 모든 존재가 연기(緣起)에 의한 것일 뿐 실체가 없다는 무상과 무아의 불교적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다. 이 12처설은 당시 바라문교가 범(梵)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전개하고 있음에 반하여, 인간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천명, 모든 존재를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인식의 주체인 6근이 인간 존재를 나타내고 인식 객체인 6경은 인간의 자연환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불교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법인(三法印)] 불교에서는 현실 세계의 구조와 성질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불교의 근본 교의로 인(印)은 인인증가(印認臧可)의 뜻이고, 법인(法印)이란 가르침의 깃발이란 의미로서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은 법의 특성이라는 뜻이다. 삼법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일체개고인(一切皆苦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을 말하기도 하고, 일체개고인 대신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을 대신하여 삼법인, 또는 사법인이라 하기도 한다. 즉 제행은 인연에 따라 나고 꺼지는 만유의 현상을 말하는데, 이러한 온갖 물(物)ㆍ심(心)의 현상은 모두 생멸 변화하여 불변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제행이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과 즐거움, 즐거움과 괴로움도 아닌 모든 것까지도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법이란 물질적ㆍ정신적인 모든 현상적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아함경』에서는 ‘내가 삼법인으로 일체법(一切法)을 인증(印臧)하는 것이니, 삼법인의 교의(敎義)에 맞는 것은 불법(佛法)이요, 이와 다른 것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하여 삼법인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사성제(四聖諦)]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사성제에서 제(諦)란 불변여실(不變如實)의 진실․사실․진리라는 뜻이며, 사진제(四眞諦), 사제(四諦)라고도 한다. 사성제는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설한 불교의 기본 교리에 대한 최초의 설법으로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말하는데, 현실과 이상세계의 원인과 결과를 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기설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중생의 생존하는 현실이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것이요, 모든 고통은 원인들이 모여서 일어난다는 것이며, 중생이 직면하는 고통은 없앨 수 있다는 것이며, 고통을 없앨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제시한 불교의 실천적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사성제는 고집멸도의 차례로 알게 되는 것이요, 한꺼번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그 환자의 증상을 정확히 진찰하고, 그 원인을 규명 고, 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란 어떤 것이며, 그런 건강에 이르려면 어떤 치료를 해야 하는가 하는 의료의 4단계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을 대의왕(大醫王)이라고도 한다. 사성제설은 선악의 근저에 있는 올바름과 그릇됨의 결택을 통해 생사의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려는 해탈에의 길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가르침은 범속한 세간의 생사를 벗어나는 신성한 진리라고 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오음성고(五陰盛苦)] 무엇이 중생의 고통인가?


8고[八苦 :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의 4고와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의 하나로, 오음이란 곧 5온(五蘊)으로 다섯 가지 집착의 쌓임이 모두 고통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다섯 가지 집착의 쌓임이란 육신에 집착하는 것, 감각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 지각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 의지에 집착하는 것, 의식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오음성고는 우리 육신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요소가 치성해서 일어나는 고통을 말한다. 대개 물리적ㆍ심리적ㆍ정신적 5종 요소로 형성되어 있는 생명 존재를 오음신(五陰身)이라 부른다.

[공(空)] 공사상은 우주의 실상인가, 허무주의인가?


공은 비어 있음, 무(無)ㆍ공적(空寂)ㆍ공정(空淨)이라고 번역한다. 허무나 멸무(滅無)와는 다른 실상(實相)의 의미이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 교리이다.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멸하는 존재이며, 고정불변하는 자성이 없다.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아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이때의 공은 고락(苦樂)과 유무(有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이며,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다. 공사상은 인간의 그릇된 입장을 파사(破邪)하여 현정(顯正)하는 데 있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가지가지 대상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원시불교 경전에서는 존재를 5온ㆍ12처ㆍ18계 등으로 분석함으로써 아(我)의 집착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공과 연기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또 부파불교에 오면 설일체유부에서는 아공법유(我空法有)를, 성실론에서는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주장한다.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은 원시불교의 연기관과 부파불 교의 공관을 총합하여 일체제법이 공이라고 주장한다.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관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집착의 대상이 공함을 밝히고, 마침내는 그 공도 또한 공임을 설한다. 이는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하는 관념에 집착하여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빠져 버리는 공병(空病)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설이다. 이러한 교설은 대립적인 상대 의식이 공하다는 것일 뿐 아니라, 상대를 넘어선 절대 또한 공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인연에 따라 생겨지는 현상을 공이라 하고, 또한 이것을 가명(假名)이라 하고, 또 이것을 중도라고 칭한다. 일찍이 하나의 현상도 인연에 따르지 않고 생한 것은 없으니, 이런 고로 일체 현상은 공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공은 객관적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무(絶對無)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특히 반야심경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떠날 수 없는 상관관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사물의 본질이 공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공은 그 파악되는 사물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공이라고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이라 한다. 공은 허무가 아니고, 공을 관하는 것은 진실한 가치의 발견이므로, 진공(眞空) 그대로가 묘유(妙有)라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공을 허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악취공(惡取空)이라 한다.

[중관(中觀)]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편벽되고 삿된 미망을 여읜 법의 실리, 곧 절대 이성을 관함을 말한다. 삼론종에서는 제법이 불생불멸하며 무거무래(無去無來)한 것이라 관하는 것을 중관이라 하고, 천태종에서는 삼천(三千)의 제법(諸法)은 낱낱이 모두 절대(絶對)라고 관하는 것을 중관이라 한다. 중관학파는 인도의 대승불교를 지탱해 온 교학 체계에 있어서 유가행파와 함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사상가는 용수와 그의 제자 아리야제바이다. 용수의 공사상은 완전한 지혜인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모든 것은 공임을 자각하는 데서 그 방법을 구하고, 이것을 논리적인 동시에 실천적으로 전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떤 것을 막론하고 먼저 자기에게 부정적으로 대립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다시 그런 부정적 대립자를 부정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은 내가 없다는 사실이 먼저 전제되고, 그 없다는 사실이 부정됨으로써 확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내가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있다는 그 사실이 부정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공의 이치는 상호간에 대립하고 있는 여러 개념의 어는 한쪽에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또한 중도라고 한다. 따라서 중관 사상은 대상을 인식할 때 집착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편견과 사견, 즉 분별심을 세척하여 올바른 진리관을 정립해 주는 사상으로 엄밀히 말하면 중도라 할 수 있다. 용수의 학파를 중관학파라고 하는 이유는 그의 저서인 『중론』의 사상을 계승한다는 의미이고, 『중론』 외에 『십이문론』과 제자인 아리야제바의 저서 『백론』을 합해 삼론이라 하여 중국 삼론종에서는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다.

[팔부중도(八不中道)] 중도의 진리를 올바로 관찰하는 지혜란 무엇인가?


팔불중관(八不中觀), 팔불정관(八不正觀), 무애중도(無碍中道), 무득중도(無得中道)라고도 한다. 즉 중생들은 일체 존재를 잘못 알고 생(生)ㆍ멸(滅)ㆍ거(去)ㆍ래(來)ㆍ일(一)ㆍ이(異)ㆍ단(斷)ㆍ상(常)이라는 그릇된 고집을 일으키므로 이것을 깨뜨리기 위하여 일체 현상이 모두 자성이 없다는 도리를 밝히고 불생ㆍ불멸ㆍ불거ㆍ불래ㆍ불일ㆍ불이ㆍ부단ㆍ불상의 팔불(八不)의 정관을 닦는 것을 말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생멸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일체법의 생은 인연이 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며 멸하는 것도 인연이 다 되어 사라지는 것뿐이다. 이는 인연의 유무에 따라 생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생멸에 대한 착각과 집착하는 것을 고쳐 주기 위한 것이다. 둘째, 불상부단(不常不斷)이란 모든 법은 인연의 집합으로 모이고 흩어지고 하는데, 영원히 상주한다거나 단멸한다고 착각하는 극단적인 사고를 타파한 것이다. 셋째, 불이불이(不一不異)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서로 다르나 그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한 것이기에, 영원히 다르다거나 동일하다는 집착을 부정한 것이다. 넷째, 불거불래(不去不來)는 일체 중생이 무명 망상으로 윤회하여 왔다 갔다 하지만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 가는 체성이 아닌데, 임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함을 타파한 것이다. 이같은 팔불의 중관 사상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을 기치로 한 것이니, 팔불로써 집착을 타파하여 공임을 보인 것이 파사요, 그리하여 중도를 드러낸 것이 현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구부정(四句否定)] 부정을 반복하는 중관의 논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물에 관해서 그 진상을 알리기 위하여 몇 번이고 부정을 거듭하여 유무(有無)의 견해를 명백하게 해주는 변증법적인 문답법을 말하는데, 사구분별(四句分別), 또는 사구백비(四句百非)라고도 한다. 중관파에서는 통상 사구분별의 각 구는 모두 부정된다. 사구는 정립(定立), 반정립(反定立), 긍정종합(肯定綜合), 부정종합(否定綜合)을 말한다. 즉 유(有)와 공(空)으로 만유 제법을 판정할 때에, 제1구의 유(有)는 정립, 제2구의 공(空)은 반정립, 제3구의 역유역무(亦有亦無)는 긍정 종합, 제4구의 비유비공(非有非空)은 부정 종합이며, 이러한 사구를 몇 번이고 부정하는 것을 백비(百非)라고 한다. 예를 들면 아함 경전에서는 ‘세계는 상주한다. 무상이다. 상주 또는 무상이다.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 등의 질문에 대해 결코 답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사구의 어느 것이든 특정한 견해를 지니는 것을 부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부처님은 당시 외도들의 질문 중 세상의 상주와 무상에 관한 사구, 세계의 유한과 무한에 관한 사구 및 혼과 신체가 동일한가, 다른가, 등 14개 항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은 일은 잘 알려져 있다[十四無記]. 중론에서는 ‘일체는 진실이다. 혹은 비진실이다. 진실이고 비진실이다. 비진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주석가는 이를 교육적 단계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4연(四緣)] 일체 현상이 생기는 과정은 무엇인가?

 

4연은 물(物)ㆍ심(心)의 온갖 현상이 생기는 것에 대하여 그 연(緣)을 넷으로 나눈 것, 즉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인연은 일체의 현상이 직접적ㆍ내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ㆍ외적인 원인인 연(緣)이 화합하여 생멸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며, 등무간연은 심(心)ㆍ심소(心所)가 전념(前念)ㆍ후념(後念)으로 옮아 변할 때에, 전념이 없어진 마음이 길을 열어 뒤에 생기는 마음을 끌어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소연연은 소연, 즉 심식의 대상이 우리의 마음 작용을 일으키는 연(緣)이 된다는 것이며, 증상연은 유력증상연과 무력증상연이 있는데, 전자는 다른 현상이 생기는 데 힘을 주는 연(緣)이요, 후자는 다른 현상이 생기는 것을 방해하는 연(緣)을 말한다.

[이제설(二諦說)] 세간의 진리와 출세간의 진리는 어떻게 다른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말한다. 진제란 승의제(勝義諦), 제일의제(帝一義諦)라고도 하여 출세간적 진리를 말하며, 속제란 세속제(世俗諦), 세제(世諦)라 하여 세간의 진리를 말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에 무슨 세간적이니 출세간적이니 하는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을 할 수도 있으나 쉽게 말해, 속제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 즉 모든 것은 인과 연으로 이루어진 과(果)이며, 이것은 생멸의 원리로 되어 있으며 생멸은 공의 상태이며 신진대사의 원칙에 따르고 있다는 등의 비교적 초보적인 것을 말한다. 진제는 이와 같은 원칙을 기준으로 해서 점차로 고차적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체를 부정하고 언어를 초월하여 불생불멸하고 비인비과(非因非果)인 것을 말한다. 원시 경전에서는 승의(勝義)란 궁극적 진실인 열반에 해당하고, 세속이란 언어 표현 혹은 언어 습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여졌지만, 반야경에서는 5온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모든 교설은 일체법의 공성(空性)이라고 하는 승의의 진리를 위한 방편설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반야경의 이제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일체법공설(一切法空說)의 의미를 천명한 것이 용수이다. 용수의 이제설은 세속의 진리와 승의의 진리를 둘 로 구분하여 교설의 측면에서는 이제(二諦)로 중심을 두면서 동시에 언어 습관 일반과 승의의 진리를 준별하는 도리의 측면으로 본 이제의 성격을 겸비하고 있다. 용수의 이제설은 중국에 와서는 길장, 승랑 등에 의해서 더욱 발전된다.


[유식(唯識)] 만물을 인식하는 근원은 무엇인가?


유식이란 글자 그대로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외계(外界)로 이해되고 있는 일체의 것이 마음에 비친 표상(表象 : 識)에 지나지 않으며, 외계의 존재물은 없다는 사상이다. 이 표상이 나타내는 것은 대상을 식별하는 마음의 작용인 식(識)이 변하여 나타난 마음의 그림자라고 본 것이다. 이 유식사상은 중관파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학파를 형성하고 있는데, 유식의 사상을 신봉하는 학파를 유가행파(瑜伽行派), 또는 유식론자라고 한다. 이와 같은 유식사상은 용수의 공사상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원래의 뜻과는 달리 지나치게 공허한 사상으로 치우치게 되자 중관 철학의 진리에 대한 부 정적 접근 방식에 만족하지 않고 공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이론을 전개한 것이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사물들이 자성이 없이 공하며 순전히 우리의 마음에 의하여 구성되거나 조작된 것이라면, 결국 이들 사물은 우리의 식(識)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존재를 인식으로 환원하는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유식의 식(識)은 근본적으로 아뢰야식(阿賴耶識, 제8식)이며, 혹은 8종 의식(八識 :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末那識, 阿賴耶識)을 가리킨다. 유식학에서는 일체 제 법의 분류가 아비달마구사론과 비슷한 면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비달마 사상까지는 6식을 들고 있는데, 유가행파는 6식 속에 이들 식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식으로서 아뢰야식을 발견하고, 이어서 아뢰야식을 자아라고 집착하는 말나식을 상정하였다.

[아뢰야연기론(阿賴耶緣起論)] 윤회의 주체는 과연 무엇인가?


『해심밀경』, 『유가사지론』, 『성유식론』 등의 경론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유식종, 법상종이 주장하는 연기설로 제8식인 아뢰야식을 두어 연기를 설명한 이론이다. 부파불교에서는 자기가 지은 업의 세력에 의해서 삼계가 생사윤회 한다는 업감연기설(業減緣起說)을 주장하였는데, 과연 그 업의 영향이 결과를 초래할 때까지는 대체 어디에 보존되었다가 차례로 나타나는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에 업의 영향을 저축하여 윤회를 반복케 하는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윤회의 주체를 추구해 간 정점에서 발견된 것이 아뢰야식이다. 본래 아뢰야라는 말은 ‘물건을 넣는 창고’ 내지 ‘곳간’을 의미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숨는 것[能藏], 받아들이는 것[所藏], 집착하는 것[執藏]의 의미가 있다. 즉 선악의 행위에 의한 업력을 받아들여 보존하는 의미가 있으며, 수행에 의하여 아집이 없어지면 그 명칭마저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아뢰야식은 모든 업의 종자를 보존하면서 선악 업력을 다른 식에 공급하여 발동케 하며 모든 선악의 행동을 나타나게 하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윤회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도 과거세의 업력을 보존한 이 식이 최초로 태어난 것이며, 내생으로 떠날 때도 금생의 업력을 보존하고 있다가 육체로부터 최후에 떠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다른 식에 비하여 그 체성이 단절되지 않고 과보를 받는다는 점에서 과보식(果報識)이라 하고, 또 전생과 금생 그리고 내생의 삼세에 윤회하면서 다른 과보를 받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숙식(異塾識)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아뢰야식에 보존된 업력 가운데 별업(別業)은 자신만이 수용하고, 공업(共業 : 공동으로 선악의 행위를 하고 공동으로 과보를 받는 업)은 다른 이와 함께 수용하면서 중생의 현실을 전개함으로 이를 아뢰야연기라고 하는 것이다.

[근본번뇌(根本煩惱)] 번뇌란 무엇인가?


번뇌란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거나 어지럽히고 괴롭히는 등 미혹하게 하는 정신작용을 말하는데, 혹(惑)이라고도 한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 업을 짓게 되며, 괴로움의 과보를 받아 미혹의 세계를 헤매게 된다. 이것을 혹(惑)ㆍ업(業)ㆍ고(苦)의 삼도(三道)라고 한다. 유식에서는 번뇌를 근본번뇌와 지말번뇌(枝末煩惱)로 구분한다. 근본번뇌란 번뇌의 체(體)로서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며, 본혹ㆍ근본혹이라 하거나 수면(隨眠)이라 한다. 지말 번뇌란 근본 번뇌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종속적인 번뇌로서 수혹ㆍ지말혹ㆍ수번뇌라 한다. 다만 수번뇌는 ‘심왕에 붙어 다니는 번뇌’란 의미로 이해하고 근본 번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유식에서는 아집(我執) 때문에 중생을 미혹의 세계에 유전시켜 열반의 길을 방해하는 혹을 번뇌장(煩惱障)이라 하고, 법집(法執) 때문에 진리의 체득을 방해하는 혹을 소지장(所知障)이라 구분하고 있다. 근본 번뇌에는 탐욕(貪)ㆍ분노(瞋)ㆍ어리석음(癡)ㆍ교만(慢)ㆍ의심(疑)ㆍ악견(惡見)이 있는데, 이 가운데 악견을 다시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으로 나누어 10번뇌라 한다.

[5위100법(五位百法)] 인간의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가?


인간의 내면세계와 객관세계를 분석하여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방법은 불교의 여러 학파에서 행해져 왔다. 이러한 제법의 분류로서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서는 5위75법, 유식학에서는 5위100법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5위란 정신과 물질세계를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이고, 75법과 100법은 5위의 내용을 세분한 것이다. 즉 5위란 일체 만유를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색법(色法 : 물질), 심법(心法 : 정신ㆍ사물을 의식하는 마음), 심소법(心所法 : 심법에 따라 일어나는 정신작용), 불상응법(不相應法 : 심법에 따르지 않는 것, 물질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면서 법인 것), 무위법(無爲法 : 인과관계를 여의어 상주 불변하는 법)을 말한다. 다시 5위를 설일체유부에서는 색법 11종, 심법 1종, 심소법 46종, 불상응법 14종, 무위법 3종으로 세분하여 이 75법이 삼세에 걸쳐서 법의 실체가 존재하며 공간적으로도 항상 변화 없이 존재한다고 하는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유식에서는 5위를 심법 8종, 심소법 51종, 색법 11종, 불상응법 24종, 무위법 6종으로 세분하였다. 또 유식학에서는 성불을 위한 보살의 길을 다섯 단계로 구분한 것을 유식5위라고 하는데,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를 말한다.

[아승기겁(阿僧祇劫)] 불교에서 겁(劫)이란 어느 정도의 시간인가?


아승기란 아승기야(阿僧企耶), 아승가(阿僧迦), 아기(阿祇)라고도 쓰며, 무수(無數), 무진수(無盡數)라 번역한다. 그리고 겁(劫)이란 인도에서 큰 수,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의 단위를 말한다. 따라서 아승기겁은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을 말하며, 대개 아승지겁이라고도 한다. 겁이라는 시간은 인도에서는 범천의 하루, 곧 인간세계의 4억 3천 2백만 년을 1겁이라 하며, 불교에서는 보통 연월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대개 겁으로 표현하는데, 『대지도론』에서는 개자겁(芥子劫)과 불석겁(拂石劫)의 비유가 설해지고 있다. 개자겁이란 사방 4천리 되는 성(城)중에 개자를 가득 채워 놓고 장수천인(長壽天人)이 백년마다 한 알씩 가지고 가서 모두 없어질 때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불석겁은 사방 4천리 되는 돌산을 천인이 무게 3수(銖)되는 천의(天衣)를 입고 백년마다 한 번씩 스쳐 그 돌산이 잘라져 산가지를 만들어 놓고 백년에 한 가지씩을 취하여 이것을 모두 취하였을 때를 1겁으로 하는 초목겁(草木劫), 갠지스 강의 너비 40리 중에 가는 모래를 묻어 놓고 백년에 한 번에 한 알씩 집어내어 그것을 모두 취한 때를 1겁으로 하는 세겁(細劫) 등이 있다. 한편 세계가 성립하고 계속 파괴를 거쳐 다음의 성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4겁이라 하고, 4겁의 기간을 일대겁(一大劫)이라 하기도 한다.

[십법계(十法界)와 육도윤회(六道輪廻)]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삼라만상은 모두 십계의 범주에 들어가 서로 다른 경계를 형성하는데 이를 십법계라고 한다. 『법화경』에서는 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ㆍ수라(修羅)ㆍ인ㆍ천의 미혹한 세계와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불(佛)의 깨달음의 세계를 합하여 십법계라고 하였다. 중생들은 자기가 지은 죄업에 따라 죽은 다음 그 과보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하늘 등에 떨어진다고 한다. 이를 육도윤회라 부른다. 특히 이 중에서 지옥, 아귀, 축생은 인간이 죄악을 많이 범한 과보로 태어나서 온갖 고통을 받는 세계로 삼악도(三惡途, 三惡趣)라고 한다. 불교의 경전에서는 이러한 지옥의 세계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지옥에도 뜨거운 불길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8종의 지옥(八熱地獄)과 팔한지옥(八寒地獄) 등이 있다. 팔열지옥에도 다시 ①무간지옥(無間地獄 : 아비지옥이라고도 하며, 쉴새없이 고통을 받는 지옥), ②대초열지옥(大焦熱地獄 : 뜨거운 고통이 더욱 심한 지옥), ③초열지옥(焦熱地獄 : 뜨거운 불길이 몸을 둘러싸서 그 뜨거움을 견디기 어려운 지옥), ④대규환지옥(大叫喚地獄 : 지독한 고통에 못 견디어 통곡을 터뜨리게 되는 지옥), ⑤규환지옥(叫喚地獄 : 온갖 고통이 못 견디게 해서 원망하는 슬픈 고함소리를 지르게 되는 지옥), ⑥중합지옥(衆合地獄 : 여러 가지 고통을 주는 기구가 한꺼번에 닥쳐와서 몸을 핍박하여 해치는 지옥), ⑦흑승지옥(黑繩地獄 : 뜨거운 쇠사슬로 몸과 팔다리를 묶어 놓고 큰 톱으로 끊는 지옥), ⑧등활지옥(等活地獄 : 고통을 받아 죽었다가 찬바람이 불어와서 살아나면, 또 다시 뜨거운 고통을 받는 지옥)이 있다. 그리고 전생에 탐욕과 질투를 한 자가 받게 되는 아귀 지옥은 육체적인 고통은 덜 받으나 마실 수도 먹을 수도 없어 심한 고통을 받게 되는 세계로 이곳에 사는 중생들은 음식을 보면 불로 변하여 늘 굶주리고 항상 매를 맞는다고 한다. 또한 축생 지옥은 성질이 어리석어서 탐욕과 음욕만을 가지고 부모나 형제의 구별도 없이 사는 사람이 받게 되는 세계로 서로 다른 동물을 자기 생존의 먹이로 하고 살아가는 고통스러운 세계를 말한다. 그 외에도 수라의 세계는 노여움이 가득 찬 세상으로서 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 질투와 교만이 가득 찬 사람, 분명한 주관 없이 다른 사람의 말에 잘 끌려다니는 사람이 받게 되는 세계로 아수라(阿修羅)라고도 한다. 이러한 지옥세계와 인간, 천상의 세계는 인간이 현세에 지은 업에 따라 태어나게 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 윤회의 여섯 세상에는 절대적인 영원이란 없다. 수명이 다하고 업이 다하면 지옥에서 다시 인간으로, 천상에서 아귀로 몸을 바꾸어서 태어난다. 이것이 불교의 윤회관이다. 이 윤회는 철저하게 스스로 지은 대로 받는다는 자업자득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행복이 두루 갖추어진 천상의 세계라도 윤회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괴로움이므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과 열반의 경지를 불교는 추구하는 것이다.

[37도품(三十七道品)]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과 단계는 무엇인가?


불교의 목적인 깨달음을 실현하고 또한 지혜를 얻기 위한 실천 수행법이란 뜻으로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 37보리분(三十七菩提分)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도를 닦는데 보조적인 역할이 되는 것’, ‘깨달아 가는 단계’에 나타난 4념처(四念處), 4정단(四正斷), 4여의족(四如意足), 5근(五根), 5력(五力), 7각분(七覺分), 8정도(八正道)의 수행법을 합한 것을 말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념처 : 신념처(身念處)ㆍ수념처(受念處)ㆍ심념처(心念處)ㆍ법념처(法念處)
▶사정단 : 단단(斷斷)ㆍ율의단(律儀斷)ㆍ수호단(隨護斷)ㆍ수단(修斷)
▶사여의족 : 욕(欲)ㆍ염(念)ㆍ정진(精進)ㆍ사유여의족(思惟如意足)
▶오근 : 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전근(定根)ㆍ혜근(慧根)
▶오력 : 신력(信力)ㆍ정진력(精進力)ㆍ염력(念力)ㆍ정력(定力)ㆍ혜력(慧力)
▶칠각분 : 택법각분(擇法覺分)ㆍ정진각분(精進覺分)ㆍ희각분(喜覺分)ㆍ제각분(除覺分)ㆍ사작분(捨覺分)ㆍ정각분(定覺分)ㆍ염각분(念覺分)
▶팔정도 : 정견(正見)ㆍ정사(正思)ㆍ정업(正業)ㆍ정어(正語)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 정정(正定)

이는 신ㆍ수ㆍ심ㆍ법을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으로 보는 전도된 생각을 버리고 부정(不淨)ㆍ고(苦)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로 관하라는 것이며, 이미 일어난 악을 없애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을 미리 막으려고 부지런히 노력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은 생기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며, 이미 일어난 선은 잘 길러내어 더욱 증장하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갈등 없이 자기 확신의 땅에 마음의 뿌리를 내리게 하려는 것이며, 오근의 뿌리를 바탕으로 정진하여 불선법(不善法)에 동요되지 않고 나아가 모든 불선법을 엎어 버릴 힘을 얻도록 수행하라는 것이다. 또한 불도를 수행하는 데 지혜로써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살펴서 골라내고 알아내야 하며, 마음이 혼침하거나 들뜨면 마음을 일깨우고 가라앉히도록 하였다. 뿐만아니라 고통을 소멸하여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닦아야 할 여덟 가지의 구체적인 중도적 실천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 37도품은 삼학(三學)의 입장에서 보면, 사정단은 계학(戒學)에 해당하며, 사념처는 혜학(慧學)에 해당하고, 오근, 오력, 칠각분, 팔정도는 삼학을 모두 겸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모든 불자들이 닦아야 할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계정혜(戒定慧) 삼학이라고 할 수 있다.

[3해탈(三解脫)] 해탈의 실체는 무엇인가?


삼공(三空), 삼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즉 해탈을 얻어 가는 세 가지 방법으로 공해탈문(空解脫門)은 일체 만유가 모두 공(空)이라고 관하는 것이요,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은 공이기 때문에 상대적 차별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고,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은 일체 만유가 공이고 무상이기 때문에 원해서 구해야 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여기서 해탈이란 고통으로 가득 찬 윤회로부터 단호하게 벗어나서 두 번 다시 생존의 세계에 이르지 않은 것을 말한다. 모든 욕망이 소멸하였다는 점에서는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열반(깨달음)과 같은 의미이다. 이러한 해탈은 다시 육체를 동반한 상태에서의 해탈인 ‘생신해탈(生身解脫)’과, 육체의 속박을 완전하게 벗어난 해탈인 ‘이신해탈(離身解脫)’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번뇌를 끊고서 마음의 속박을 없게 하여 신체를 갖춘 제자의 교육이나 사람들의 구제에 힘쓰는 이타적 해탈의 상태를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 나머지가 있는 불완전한 깨달음),’ 죽음과 동시에 심신과 함께 속박을 떠나서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 한다. 특히 부처님의 죽음을 ‘반열반(般涅槃 : 완전한 깨달음)’이라 하여 따로 구분한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는 윤회의 근본적인 원인인 욕망과 무지로부터 벗어난 심해탈(心解脫 : 마음에 탐욕을 없앤 것)과, 혜해탈(慧解脫 : 지혜에 의해 무명에서 벗어난 것) 등으로 구분함으로써 지혜와 선정을 동시에 갖춘 수행자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번뇌와 깨달음을 실체적 존재로서 파악하려는 부파불교의 해탈에 대한 해석은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깨달음 그 자체도 공이라고 파악한다. 즉 대승불교에서는 미혹함도 깨달음도, 윤회도 해탈도 실체가 없는데, 다만 인간의 고통은 아뢰야식에 의해서 이미지화된 환영(幻影)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여 명상의 실천에 의해서 깨닫고 나아가 다른 사람의 구제를 지향할 것을 주장하였다.

[일승(一乘)과 삼승(三乘)] 성불에 이르는 보살의 길은 하나인가?


승(乘)이란 타고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한다는 견지에서 그 구제하는 교법이 하나뿐이고, 또 절대 진실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일승이라면, 삼승으로 설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을 셋으로 분별하여 설한다는 것이다. 삼승은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말하는데, 성문승이란 가장 원시적인 해석으로는 부처님의 음성을 들은 불제자를 말하지만, 대승의 입장에서 보면 부처님의 교법인 사성제와 팔정도를 닦아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교법을 말하며, 연각승이란 12연기를 잘 닦아 모든 법의 인연을 잘 아는 길인 벽지불(隻支佛 : 구역에서는 緣覺, 신역에서는 獨覺)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교법을 말한다. 그리고 보살승이란 성불하기를 이상 목적으로 삼는 보살들이 수행하는 육바라밀 등의 법문을 말한다. 대개 성문승과 연각승은 소승,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두 승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고 있는데, 소승은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으며, 대승은 생사와 열반을 분별해서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라한이나 벽지불을 자처하면서, 모든 부처님이 오로지 보살만을 교화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는 불자가 아니며, 또 스스로 이르기를 구경열반을 얻었다고 하면서 무상정등정각을 다시 구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설하셨다. 한편 『법화경』에서는 불교를 실천하는 데에는 삼승의 수행 방법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유일한 부처의 입장인 일불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이는 삼승이 한결같이 성불에 이르는 보살의 길임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일승 사상은 성문이나 독각의 수행자들도 미래에는 성불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대승과 소승, 또는 삼승으로 상징되는 사회의 분열과 반목, 대립을 해소하여 조화와 평등의 통일된 사회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교상판석(敎相判釋)과 오시팔교(五時八敎)] 천태종의 오시팔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이 일생 동안 설한 가르침을 그 내용과 설해진 시기 등에 따라 분류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천태종의 오시팔교, 화엄종의 오교십종(五敎十宗) 등을 말한다. 이는 인도에서 성립한 대소승의 불교경전 들이 성립 순서에 관계없이 전해졌기 때문에 다시 분류, 재편할 필요에서 생긴 것으로 모든 경전을 불설로 간주하고 문헌학적인 비판 없이 분석자의 입장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경전을 성도 후 입멸까지 45년 간의 각 연대에 분류 배당한 것이다. 오시팔교란 천태종의 교판으로 여러 가지 설법을 모두 법화경을 설하기 위한 준비로 보고 불교 전체를 조직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오시란 ①화엄시(華嚴時 : 성도 후의 21일 동안 화엄경을 설한 시기), ②아함시(阿含時 : 이후 12년 동안 녹야원에서 아함경을 설한 시기), ③방등시(方等時 : 이후 8년 동안 유마경, 금광명경, 능가경, 승만경, 무량수경 등 방등부의 여러 경전을 설한 시기), ④반야시(般若時 : 이후 22년 동안 반야부 계통의 경전을 설한 시기), ⑤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 : 최후 8년 동안 법화경을 설하고 입멸 시에 열반경을 설한 시기)를 말한다. 그리고 팔교는 교화하는 가르침의 내용에 따라 화의사교(化儀四敎)와 화법사교(化法四敎)로 분류한 것인데, 화의사교는 ①돈교(頓敎) : 아무런 방편 사용 없이 깨달은 내용을 곧바로 설한 것, ②점교(漸敎) : 점진적으로 깨닫도록 설한 것, ③밀교(密敎) : 가지가지의 능력자가 한자리에 있을 때 이들 서로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가만히 각기 다른 이익을 주도록 설한 것, ④부정교(不定敎) : 함께 듣고 있으나 다르게 듣고 다양하게 이해하여 체득하는 바의 교법이 일정하지 않은 설법을 말하고, 화법사교란 다시 ①장교(藏敎) : 아함경을 비롯한 모든 소승교의, ②통교(通敎) : 모두에게 공통되는 가르침, 대승의 기본 교의, ③별교(別敎) : 순수한 대승의 가르침, 보살에 대한 가르침, ④원교(圓敎) : 부처님의 깨달음을 그대로 설한 가르침을 말한다.

[오교십종(五敎十宗)] 화엄종의 오교십종이란 무엇인가?


중국 당나라 때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의 형식과 내용상으로 얕고 깊음을 정하여 천태종의 오시팔교를 본따 판석한 것으로 화엄경에 최고의 권위를 가져다주었다. 여기서 오교는 ①소승교(小乘敎) : 소승을 위해서 사성제, 12인연 등을 설한 아함경 등의 가르침, ②대승시교(大乘始敎) :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반야경이나 연기에 의하여 모든 존재와 현상을 설명하는 해심밀경 등의 가르침, ③대승종교(大乘終敎) : 모든 것은 본래 불변의 진여인데 그것이 연(緣)으로 말미암아 오(汚)와 정(淨)으로 나타나는 것을 설하는 기신론의 가르침, ④돈교(頓敎) : 당장 깨침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설하는 유마경의 가르침, ⑤원교(圓敎) : 일승(一乘)을 설하는 화엄경, 법화경의 가르침, 특히 화엄경의 가르침을 말한다. 또한 10종이란 ①아법구유종(我法俱有宗) : 주관도 객관도 모두가 실체라고 주장, ②법유아무종(法有我無宗) : 객관은 실체지만 주관의 아(我)는 무(無)로 봄, ③법무거래종(法無去來宗) : 모든 것은 현재에 있어서만 실체가 있고 과거 미래는 없다고 하는 법, ④현통가실종(現通假實宗) : 5온 외는 실체가 없고 헛된 존재로 봄, ⑤속망진실종(俗妄眞實宗) : 세속 일은 모두 헛된 일이고, 불교의 진리만이 실재한다고 봄, ⑥일체개공종(一切皆空宗) : 모든 존재는 그대로 공이라고 설함, ⑦제법단명종(諸法但名宗) : 모든 존재는 헛된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으로 봄, ⑧진덕불공종(眞德不空宗) : 모든 존재의 본성은 진여라고 설함, ⑨상상구절종(相想俱絶宗) : 진리는 주객을 초월한 불가설 불가사의한 데 있다고 봄, ⑩원명구덕종(圓明具德宗) : 모든 존재는 서로 방해함이 없이 중중무진(重重無盡)한 관계를 갖고 일체 공덕을 모두가 구족하고 있다고 봄을 말한다.

 

[법계연기(法界緣起)]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이치는 무엇인가?


중국 화엄종의 중요 명제이며, 기본 교의로 법계무진연기(法界無盡緣起), 무진연기, 성기연기(性起緣起)라고도 한다. 여기서 법이란 곧 사물이며, 계란 곧 성(性)을 말한다. 즉 법계란 법성(法性)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체 만유는 법계에서 생기(生起)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법계는 서로가 걸림 없이 통하며[相卽相入],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重重無盡]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어떠한 일도 걸림이 없다는 사사무애(事事無碍)라고 하는데, 사사무애 법계란 이(理 : 본체, 사물의 보편성을 인식하는 것)가 사 (事 : 현상, 세속의 사물 등을 차별로써 인식하는 것)에 융화되어 사사간(事事間)에 받아들여져 융합함에 무애(無碍)하며 서로가 서로를 포함함이 무궁하며 무진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중중무진의 법계 연기를 깨우쳐주기 위해 법장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캄캄한 암실에 불상 다섯을 안치해 두고서 각각의 불상 앞에 등불을 하나씩 밝히고, 둥근 거울 열 개를 열 방향에 배치함으로써 거울과 거울, 영상과 영상을 서로 맞비춰 보였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사무애의 법계 연기는 화엄종의 독특한 설법이며, 부처님의 순수하고 청정한 마음에 비친 만상의 세계라고 할 수 있으며,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이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너와 내가 대립하는 잡다한 현상계인 양 비치는 세계가, 깨달은 사람에게는 법계로서 비침을 암시해 주고 있다.

[육상원융(六相圓融)] 우주 법계의 구성 원리는 무엇인가?


화엄종에서 법계 연기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모든 존재는 여섯 가지의 상(相), 즉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육상은 서로 다른 상을 방해하지 않고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이 한 몸이 되어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집에 비유하면 총상은 모든 존재는 반드시 여러 가지의 인연이 모여서 성립되는 것처럼, 기둥ㆍ서까래ㆍ대들보 등을 총괄하여 형성된 집이라는 보편성을 뜻하며, 별상은 기둥ㆍ서까래ㆍ대들보 그 자체가 지닌 특수성을 말한다. 그리고 동상이란 기둥ㆍ서까래ㆍ대들보 등이 서로 힘을 합쳐 집을 조립하고 있는 유사성을 의미하며, 이상은 별상이 전체 속에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제각기 상을 잃지 않는 것처럼, 기둥은 세로로, 대들보는 가로로 있어 다른 유형이 되고 있듯이 다양성을 의미한다. 또한 성상이란 기둥ㆍ서까래ㆍ대들보 등이 각각 구조적 인연이 되어서 집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처럼 통합성을 나타내며, 괴상이란 기둥ㆍ서까래ㆍ대들보 등이 집을 성립시키고 있으면서도 각기 스스로 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별상이 제각기의 개성을 지키어 총상으로 혼융되지 않는 차별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육상의 원칙은 이 우주 전체가 하나의 통일적 화합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으며, 각 상들은 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우주 법계의 실상임을 말해 주고 있다.

[화엄보살도(華嚴菩薩道)] 보살의 삶이란 무엇인가?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수행하는 과정을 42단계로 설하고 있는데,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단계를 차례로 설하고 있다.

▶십주(十 住) 여기서 십주란 보살이 십신(十信 : 信心, 精進心, 念心, 慧心, 定心, 施心, 戒心, 護法心, 願心, 廻向心)의 단계에 올라가서 편안하게 머무는 경지란 뜻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발심주(發心住) : 참 마음을 깨닫고자 발심하는 것이다. ②치지주(治地住) : 잘못된 마음을 다스려 가는 것이다. ③수행주(修行住) : 열심히 닦고 익혀 가는 것이다. ④생귀주(生貴住) : 그래서 귀한 마음이 나는 것이다. ⑤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 : 수행에 편이한 여러 가지 방편을 이해하는 것이다. ⑥정심주(正心住) : 마음을 바르게 갖는 것이다. ⑦불퇴주(不退住) :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⑧동진주(童眞住) : 천진난만한 마음을 얻는 것이다. ⑨법왕자주(法王子住) : 법왕의 아들이 됨을 자부하는 것이다. ⑩관정주(灌頂住) : 진리의 물로 이마를 씻는 것이다.
▶십행(十行) 이어서 보살이 불과(佛果)의 지위를 확인한 뒤에 이타의 행위를 베푸는 계위이다. ①환희행(歡喜行) : 기쁜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②요익행(饒益行) :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③무진한행(無瞋恨行) : 성내고 한탄하지 않는 것이다. ④무진행(無盡行) : 끝없는 행을 하는 것이다. ⑤이치란행(離痴亂行) : 어리석고 혼란 행이 없는 것이다. ⑥선현행(善現行) : 하는 일마다 착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⑦무착행(無着行) : 집착 없는 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⑧존중행(尊重行) : 누구든지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⑨선법행(善法行) : 착한 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⑩진실행(眞實行) : 진실한 행을 하는 것이다.
▶십회향(十廻向) 보살이 중생의 제도를 위해 이타행을 닦은 십행위에서의 온갖 공덕을 중생을 위해 돌려주고 불과(佛果)를 향해 더욱 가까이 접근하는 계위이다. ①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 중생을 구호하면서도 구호했다는 상을 나 타내지 않는 것이다. ②불괴회향(不壞廻向) : 베풀어 준 것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③등일체불회향(等一切佛廻向) : 평등한 마음으로 회향하는 것이다. ④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廻向) : 어느 곳에나 구분 없이 베푸는 것이다. ⑤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廻向) : 무진한 공덕을 베푸는 것이다. ⑥입일체처평등선근회향(入一切處平等善根廻向) : 일체처에 평등 선근으로 회향하는 것이다. ⑦등수순일체중생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 : 중생을 평등하게 따라 주는 것이다. ⑧진여상회향(眞如相廻向) :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따라 주는 것이다. ⑨무박무착해탈회향(無縛無着解脫廻向) : 대자유를 얻게 해 주는 것이다. ⑩입법계무량회향(入法界無量廻向) : 한량없는 세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십지(十地) 불지(佛地)를 평정하여 마치 대지가 만물을 싣고도 흔들림 없이 주지(住地)하듯 흔들림 없는 마음으로 일체를 유익하게 하는 계위이다. ①환희지(歡喜地) : 항상 기쁜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②이구지(離垢地) : 때 없이 청정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③발광지(發光地) : 밝은 빛을 말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④염혜지(焰蕙地) : 불꽃과 같은 지혜를 계발하는 것이다. ⑤난승지(難勝地) : 참기 어려운 일을 잘 참고 이겨내는 것이다. ⑥현전지(現前地) : 부처님 마음을 항상 앞에 드러내는 것이다. ⑦원행지(遠行地) : 끊임없이 정진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⑧부동지(不動地) : 흔들림이 없는 마음을 얻는 것이다. ⑨선혜지(善慧地) : 모든 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다. ⑩법운지(法雲地) : 진리의 구름을 일으켜 세상을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등각(等覺) : 등정각(等正覺), 금강심(金剛心), 일생보처(一生補處), 유상사(有上士)라 번역하는데, 지혜가 만덕 원만하여 부처님과 똑같은 계위를 말한다.
▶묘각(妙覺) : 마지막 1품의 무명을 끊고 부처님의 경계에 오르는 계위를 말한다. 이렇게 묘각 위에 오르면 이미 부처가 된 것이므로 따로 그 위를 설정할 필요가 없으나 부처와 보살의 위와는 다르므로 때로 부처의 의를 하나 더 설정하기도 한다.
▶불(佛) : 자각각타(自覺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한 지위, 복과 지혜가 원만한 양족존(兩足尊)의 계위 이다.
이러한 보살의 수행 단계는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역참한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의 낱낱 해탈문도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 완전한 해탈문이며, 선재의 역참은 구체적으로 불세계를 구현시켜 나가는 역정인 것처럼, 그 단계마다 그 의의가 있다. 중생은 본래 부처이지만 그러나 중생은 자기가 바로 부처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신심과 발심이 필요하다. 신심이란 자기가 부처인 줄을 확실히 믿는 것[淨信]이다. 이 신심을 성취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게 된다[發心]. 처음 발심할 때가 바로 깨달음을 이루는 때[初發心時便成正覺]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정토(淨土)와 예토(穢土)] 정토 세계는 중생의 마음속에 존재하는가?


정토란 부처님과 보살이 머무는 세계란 뜻으로 불국토 또는 보살국토라고 한다. 그리고 예토, 즉 사바세계는 감인세계(堪忍世界), 인토(忍土), 감인토(堪忍土), 인계(忍界)라고 한역되어지고 있는데, 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에 의해서 이루어진 중생의 세계를 말한다. 예를 들면 아미타불의 서방극락 정토, 약사여래의 동방정유리세계, 아촉불의 동방묘희세계 등이 불국정토로 알려져 있고, 미륵보살의 도솔천, 관음보살의 보타락가산 등은 보살정토로 불려지고 있다. 이러한 불국정토는 이들 제불(諸佛)이 보살이었을 때 세운 원을 완성한 결과로 만들어진 국토인데, 사람들은 이 불국토에 왕생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와 같은 불국토에 대하여 현실의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나 번뇌를 맑은 눈으로 보았을 경우에 그대로 정토라고 부르는 사고방식이 있다. 이를 사바즉적광토(裟婆卽寂光土)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석가모니불의 영산정토(靈山淨土)나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등이다. 이처럼 같은 정토라는 말 가운데에는 여러 가지 정토가 포함되어 있지만, 정토교가 성행한 이후에는 거의 대부분 정토의 세계는 아미타불의 서방극락 정토를 나타내고 있다. 『유마경』에서는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도 청정하다”고 하면서, “깨달음을 성취하면 사바세계가 그대로 정토가 된다”고 설하고 있다.

[십육관법(十六觀法)] 극락세계에 왕생하기 위한 수행법은 무엇인가?


『관무량수경』에서 설하는 십육관법은 부처님께서 친히 위제히 부인 앞에 나투시어 고통받은 위제히 부인을 위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기 위한 마음가짐과 바른 수행법을 설하신 것이다. 즉 부처님께서는 서방극락 세계를 관하는 방법으로 13가지의 관법을 설하시고 다시 3관을 설하셨다. ①일상관(日想觀) :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정토의 존재와 아름다움, 자기 죄업을 관함. ②수상관(水想觀) : 맑은 물을 보고 물을 변화시켜 유리와 같은 정토의 대지를 관함. ③보지관(寶地觀) : 유리와 대지 위에 있는 황금의 길, 누각 등을 관함. ④보수관(寶樹觀) : 정토에 있는 칠보의 나무와 그 나무로부터 나오는 광명을 관함. ⑤보지관(寶池觀) : 여덟 가지 공덕수가 충만한 칠보의 연못을 관하고, 그 물이 흘러 개울이 되고, 연화의 꽃이 피고, 흐르는 물소리는 무상 무아의 법을 설하고 있음을 관함. ⑥보루관(寶樓觀) : 정토의 칠보 누각에서 천인이 연주하는 음악이 모두 삼보를 염하도록 설하고 있음을 관함. ⑦화좌관(華座觀) : 부처님이 앉아 계신 연화좌가 찬란하게 정토를 비추고 있음을 관함. ⑧상상관(像想觀) : 하나의 큰 연화 위에 빛이 찬란한 아미타불의 앉아 계신 모습을 관함. ⑨진신관(眞身觀) : 아미타불의 상호에서 광명이 비춰 중생을 섭수하고 계심을 관함. ⑩관음관(觀音觀) : 관세음보살의 몸이 광명으로 빛나는 영락을 두루고 있음을 관함. ⑪세지관(勢至觀) : 아미타불, 관음, 세지의 3존이 정토에 모여 중생을 위해 설법하시며 고통 받는 중생을 인도하시는 것을 관함. ⑫보관(普觀) : 불보살이 허공에 가득한 정토에 왕생한 것을 관함. ⑬잡상관(雜想觀) : 잡다한 불신을 관하는 것으로 정토의 보배 연못에 있는 불상이 시방세계에 몸을 변현시켜 여러 가지 몸으로 일체를 교화함을 관하는 것이고, 나머지 3관은 상품, 중품, 하품의 세 가지이다. 이와 같은 13관에 의해 무량겁 동안 더럽혀진 생사의 죄를 멸하고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한다.

[법장비구 48원] 염불로 극락정토에 왕생은 가능한가?


법장(法藏)이란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기 전 보살 때의 이름을 말한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본래 국왕으로서 발심 출가하여 호를 법장이라고 하였는데,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에게 큰 원을 세우고, 오랫동안 수행을 하여 그 결과 아미타불이 되어 지금 극락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며, 항상 법을 설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법장보살이 수행할 때 발원한 서원을 특히 본원(本願)이라 하는데, ‘48원’으로 유명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섭법신원(攝法身願) : 모든 부처님이 보살 때 세운 본원 중에 불(佛) 스스로의 법신(法身)을 성취하기를 원함 - 48원 중 제12 광명무량원(光明無量願), 제13 수명무량원(壽命無量願), 제17 제불칭양원(諸佛稱揚願)이 여기에 속한다.
②섭정토원(攝淨土願) : 보살이 성불할 때에, ‘그 정토의 장엄은 이렇게 하고 싶다.’고 원함- 48원 중 제 31 국토청정원(國土淸淨願), 제32 국토엄식원(國土嚴飾願)이 여기에 속한다. ③섭중생원(攝衆生願) : 모든 부처님이 보살 때 세운 본원으로 중생을 이익케 하고 구제하려는 원 - 나머지 43원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48원을 세운 것은 널리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는 자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48원 중 18원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 : 아마타불의 제도를 믿고, 염불하는 중생은 반드시 서방극락 정토에 왕생케 하겠다는 서원)은 왕본원(王本願)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정토 신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세존이여, 제가 만일 깨달음을 얻은 후에 다른 온갖 세계에 태어난 이들이 이 최상의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저의 이름을 듣고, 지극한 신심으로서 저를 생각하고 있다면, 그들이 임종의 시기가 닥칠 때 그 마음을 산란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수행하는 승려들이 저의 주변에 모여서 존경하는 일이 없게 되고 제 앞에 서는 일이 없게 된다면, 그 동안에는 저는 이 최상의 바른 깨달음에 바로 드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뒤의 구절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그들이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자신도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이해되며, 앞의 구절은 아미타불 자신을 믿는 사람을 극락세계로 이끌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 자력과 타력은 별개의 수행인가?


난행도는 자력에 의하여 수행의 공을 쌓아서 이 세계에서 깨달음에 드는 길을 말하고, 이행도란 깨닫는 경계에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가르침을 말한다. 이 말은 “불법에는 무량한 문이 있고, 세간의 도리에는 어려운 것도 있고 쉬운 것도 있다. 보살의 도도 역시 같다. 혹은 근행정진(勤行精進)의 것이 있고, 혹은 신방편(信方便)의 쉬운 행으로서 빨리 불퇴위(不退位)에 이르는 것도 있다”라고 말한 용수의 「이행품(易行品)」에서 기인한다. 중국의 담란(曇鸞)은 「왕생론주」에서 난행도와 이행도를 설명하고, 도작(道綽)의 「안락집」에서는 성도문과 정토문으로 나누었는데, 일본 정토종의 시조인 원공(源空)은 「선택집」에서 정토문을 타력이행도라 하고, 성도문을 자력난행도라고 하였다. 후에 이행도는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다고 하는 쉬운 일로써 불퇴위에 이르러 성불한다는 것에 쓰였는데, 특히 신(信) 뿐만 아니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름으로써 왕생성불(往生成佛)하는 것도 또 이행이라 하였다. 오늘날에는 정토교에서 아미타불의 타력본원(他力本願)에 의지하는 것을 이행도라 한다. 이와 같은 불교의 두 가지 실천 수행의 입장은 대립된 것으로 이해되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나치게 어느 한쪽에만 치우친다면 믿음이 결여된 학문 불교, 사변철학의 범주에 빠지게 되거나, 기복적 신앙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단순한 믿음에 의해서만 구제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믿음의 대상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려는 스스로의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삼처전심(三處傳心)] 선법의 최초 전래 모습은 무엇인가?


선종상감(禪宗象鑑)에서는 ‘세존의 삼처전심은 선지(禪旨)가 되고, 일대소설(一代所說)은 교문(敎門)이 된다.’라고 하였는데, 삼처전심이란 선종에서 말하는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세 곳에서 가섭에게 법을 전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첫째,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微笑)란 영산회상에서 부처님이 연꽃 한 송이를 들고 아무런 말도 없이 있을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으나, 가섭만 이 그 뜻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둘째,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란 부처님께서 일찍이 가섭을 알아보고 다자탑 앞에서 자리의 반을 내주어 나누어 앉음을 말한다. 셋째, 곽시쌍부(槨示雙趺)란 부처님이 열반하셨을 때 가섭이 나중에 오니 관 속에서 두 발을 내밀어 마음을 전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사례를 통해서 볼 때, 문자나 언설을 내세우지 않는 선가에서는 가섭을 부처님의 법을 전수한 제1조로 간주하고 있다. 실제로 가섭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하여 확정하는 제1결집을 주도하였다.

[일행삼매(一行三昧)] 일체 생활 가운데서 항상 직심(直心)을 행하라.


마음을 정(定)하고 하나의 행(行)에 전념하여 닦는 삼매로 천태가(天台家)에서는 행주좌와(行住坐臥)의 4종삼매 중 행주와(行住臥)의 셋을 멎게 하고, 상좌(常坐)의 일행만으로 다른 것을 겸하지 않고 좌선 입정하여 법계 평등의 이치를 관하는 것으로 상좌삼매라고도 한다. 일행삼매의 실천수행법은 특히 중국 선종의 제4조인 도신에 의해 중시되었는데,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신도의 보시만으로는 교단을 유지할 수 없어 자급자족의 경제체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경작과 잡역에 종사하면서 불법의 대의를 얻으려 하였고, 거기서 선을 체험적, 정신적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입장은 마침내 선을 출가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개방하여 일상생활에 전개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집단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선원 생활의 규범인 청규(淸規)를 형성하려는 기운이 나타나게 되었다. 『문수설반야경』에 설하기를 ‘법계는 하나의 모양인데(法界一相), 법계에 계합함(繫緣法界)’이 일행삼매라고 하였다. 훗날 혜능은 ‘일체 생활 가운데서 항상 직심(直心)을 행하는 것’이 일행삼매라고 정의하였다.

[삼보(三寶)] 불교 신앙의 대상은 무엇인가?


삼보란 불교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 불보, 법보, 승보를 말하는데,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위덕(威德)이 있는 최상의 것이며, 변하지 않음이 세간의 보배와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는 불교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 요소이기도 하다. 불보(佛寶)는 천상 천하에 으뜸가는 참스승으로서 깨달음을 성취한 모든 부처님, 즉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비롯하여 과거, 현재의 부처님뿐 아니라 앞으로 깨달음을 얻을 미래의 모든 부처님까지도 포함한다. 모든 법을 통달하여 세상을 비추어 보는 지혜인 대원경지(大圓鏡智), 모든 법이 본래 평등하여 하나의 본바탕을 지니고 있음을 통찰하는 지혜인 평등성지(平等性智), 모든 중생의 업(業)과 근성(根性)을 빠짐없이 살펴보는 지혜인 묘관찰지(妙觀察智), 중생을 제도하는 데 자유자재한 방편의 지혜인 성소작지(成所作智) 등을 고루 갖추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救濟)해 주는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 복덕이 원만하며, 모든 중생의 복밭이다. 법보(法寶)는 부처님의 설법을 담아 놓은 경(經), 율(律), 논(論) 3장(藏)을 가리킨다.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온갖 탐욕과 집착,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위없는 즐거움과 밝은 지혜를 얻게 하며,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길잡이가 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모두 법보에 속한다. 승보(僧寶)는 부처님을 따르고 그 가르침대로 살기를 서원한 제자의 집단을 말하는데, 승(僧)이란 승가(僧伽)를 줄인 말이다. 본래 산스크리트 어인 ‘상가’의 음역어인 승가는 ‘화합대중(和合大衆)’을 뜻한다. 승가는 4중(衆) 또는 7중으로 분류된다. 4중이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을 말하며, 7중은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 외에, 사미, 사미니, 식차마나 등을 포함하여 일컫는 말이다. 비구와 비구니는 남녀 스님을 각각 말하며, 우바새, 우바이는 각각 남녀 재가(在家) 신자를 뜻한다. 7중 중에서 우바새와 우바이를 제외한 5중은 모두 출가 수행자이다. 이와 같은 삼보는 불법승 삼보가 각각 독립적인 존재라고 보는 별상삼보(別相三寶), 의미상으로는 불법승이 각각 다르나 그 본질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동체삼보(同體三寶), 불상과 경전과 출가 비구로서 후세에 까지 불교를 계속해서 지키고 전승하게 한다는 주지삼보(住持三寶)의 해설법 등이 있다.

[삼신설(三身說)] 부처님이 나투신 여러 형상은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삼신설은 대승경론상의 대표적인 불신관(佛身觀)으로,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을 말한다. 이 삼신설은 석존을 항시 대할 수 있었던 석존 재세 시의 제자들이나 그의 교법만을 따르던 불멸 직후의 제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깊은 사상으로 그들의 생각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어 부처님의 진면목을 찾고 부처님 교법의 원천을 찾으려 노력한 수많은 제자들에 의해 오랜 기간에 걸쳐 정립된 근본 당체(當體)와 그 모습과 작용인 체ㆍ상ㆍ용(體 相 用)의 삼면으로 파악된 원융한 불신관이다. 법신(法身)이란 불타의 자성(自性)인 진여(眞如) 당체(當體)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우주 만유의 근본이 되며 질서와 조화를 이룩하는 말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생(生)도 떠나고 멸(滅)도 떠난, 그러나 생생히 약동하는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이를 여래의 몸으로 삼는 까닭은 진리는 만법의 실성(實性)이기 때문이다. 이를 독립시켜 인격화해서 부를 때에는 흔히 청정법신비로자나불(淸淨法身毘盧遮那佛)이라고 한다. 보신(報身)이란 위의 보이지 않는 진여 당체인 법신이 형태를 취하여 나타난 몸을 말한 것으로 곧 법신을 원인으로 삼아 그 과보로 나타난 몸이기에 보신이라고 한다. 즉 과거 무량한 시간에 걸쳐 온갖 수행을 한 결과 모든 것이 진리와 하나가 된 채 만덕(萬德)이 원만하여 얻어진 몸으로서 진여 당체의 모든 참되고 아름답고 깨끗한 속성이 그대로 나타난 몸을 말한다. 48원(願)을 성취하여 극락세계를 이룩한 아미타불과도 같은 몸이며 또한 지상의 보살(초지 이상의 보살)에게 법락(法樂)을 수용시키는 부처님의 몸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독립시켜 인격화해서 부를 때에는 통상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이라고 한다. 응신(應身)이란 자비와 지혜의 화용(化用)인 현실 세계에 나타난 석가모니불을 말하는 것으로 보신불을 보지 못하는 이를 제도하기 위해 갖가지 근기에 맞추어 갖가지 방편으로 나타난 역사적인 부처님의 몸을 말한다. 즉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중생과 같은 육체를 지니고 중생과 더불어 생존하시는 면에서의 부처님의 몸으로 이를 보통 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이라고 하며, 과거칠불, 석가모니불, 미래의 미륵불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과거칠불(過去七佛)] 과거칠불의 칠불통게(七佛通偈)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우주의 시간을 3대겁(三大劫)으로 나누어 과거의 대겁을 장엄겁(莊嚴劫), 현재의 대겁을 현겁(賢劫), 미래의 대겁을 성숙겁(星宿劫)이라 한다. 또 각 대겁은 20겁 동안씩 성립되고[成], 머물고[住], 무너지고[壞], 비어 있는[空] 네 과정을 거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겁 기간 동안 1천명의 부처가 탄생한다고 한다. 과거의 부처 시대로 갈수록 인간의 수명도 길어 첫 번째 부처인 비바시불이 출현하였을 때의 인간 수명은 8만 4천세이다. 불교에서 겁을 말할 때 인수(人壽) 8만 4천을 기준으로 삼는 연유이다. 과거칠불은 장엄겁에 나타난 비바시불(毘婆尸佛)ㆍ시기불(尸棄佛)ㆍ비사부불(毘舍浮佛)의 3불과, 현재 현겁에 나타난 구류손불(拘留孫佛)ㆍ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ㆍ가섭불(迦葉佛)ㆍ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의 네 분의 부처님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불타는 석가모니 부처님 혼자이지만, 불교 교리로는 진리를 깨달은 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현시대뿐만 아니라 과거는 물론 미래에 부처님이 등장할 것이다. 따라서 과거칠불과 함께 현재불ㆍ미래불의 사상이 더욱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사상은 본생담(本生譚)의 구도자 상과 어울려 보살 등 대승불교의 사상적 연원이 되기도 하였다. 과거 ‘비바시’ 부처님으로부터 ‘석가모니불’에 이르기까지의 일곱 부처님은 불교의 진리에 대해서 똑같은 말을 하는데 이를 칠불통게(七佛通偈)라고 한다. 이 칠불통게는 불교를 이해하는 데 유익 한 게송이다. ‘제악막작(諸惡莫作)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하라. 자정기의(自淨其義)하면 시제불교(是諸佛敎)이니라.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부처님이 지닌 덕성은 무엇인가?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은 십팔불공불법(十八不共佛法)이라고도 하는데, 범부는 물론 아라한이나 벽지불 또는 보살과도 구별되는 부처님 독자의 법이라는 뜻으로 십력(十力), 사무소외(四無所畏), 삼념주(三念住), 대비(大悲)의 열여덟 가지를 말한다. 여기서 십력이란 부처님은 일체를 깨달아 아는 열 가지 지혜의 힘을 갖추어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며, 사무소외란 부처님이 설법함을 당하여 사자후를 토하되 네 가지 확신을 얻어, 어떤 이가 비난할지라도 일체 두려운 바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삼염주란 부처님께서는 항상 바른 마음에 머물러 중생들의 어떤 태도에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이 동요치 않음을 셋으로 나눈 것이다. 그리고 이 부처님의 일대 교화란 오로지 대비심(大悲心)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비가 부처님 특유의 덕이라 한 것이다. 경론상에는 위의 십력이나 사무소외 등을 구족한 여래는 사자후(獅子吼)로써 범륜(梵輪 : 法輪의 다른 이름)을 굴린다고 되어 있다. 이외에도 대승에서 말하는 십팔불공법은 다음과 같다. ①제불신무실(諸佛身無失) : 부처님께선 무량한 아승지겁(阿僧祗劫) 이래로 지계(持戒)가 청정하여 몸에 아무런 오실(誤失)이 없다. ②구무실(口無失) : 부처님께서는 무량한 아승지겁 이래로 지계가 청정하여 일체의 미묘한 지혜를 얻고 번뇌를 다 끊었기 때문에 고성(高聲) 대승(大乘) 등의 온갖 말씀에 있어서 조금도 오실(誤失)이 없이 중생으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③념무실(念無失) : 부처님께서는 사념처(四念處) 등의 깊은 선정을 닦아 마음이 산란치 않으며 법에 집착하는 바 없이 항상 편안하다. ④무이상(無異想) : 부처님께서는 항상 일체중생을 분별치 않아 중생을 보되 자기 몸과 같이 하여 대비(大悲)로써 제도하되 멀고 가깝고 친하고 등의 차별이 조금도 없다. ⑤무불정심(無佛定心) : 부처님께서는 항상 선정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일상의 어떤 동작이건 간에 하나도 선정을 여읜 것이 없다. ⑥무불지이사(無佛知已捨) :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아는 바를 버리고 일체에 집착치 않아 적정(寂靜), 평등(平等)에 임한다. ⑦욕무감(欲無減) :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공덕을 구족하였으면서도 제법(諸法)에 있어서의 지욕(志欲)이 항상 쉼이 없다. 또는 부처님이 일체의 중생을 제도하려는 뜻과 욕망에 조금도 덜함이 없다. ⑧정진무감(精進無減) : 부처님께서는 지욕(志欲)이 중장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편을 행하나 항상 쉼이 없다. ⑨념무감(念無減) :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지혜를 구족하고 중생을 제도하되 마음에 하나도 넉넉한 생각 이 없다. ⑩혜무감(慧無減) :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지혜를 얻고 또 삼세의 지혜가 하나도 장애가 없기 때문에 지혜에 있어서 아무런 잃음이나 덜함이 없다. ⑪해탈무감(解脫無減) :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에서 해탈함을 얻어 일체의 번뇌를 끊었으므로 아무런 잃음이나 덜함이 없다. ⑫해탈지견무감(解脫知見無感) :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자신이 일체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의 모습을 지견하여 아무런 장애가 없다. ⑬일체신업수지혜행(一切身業隨智慧行) :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신업(身業)을 조작(造作)하되 먼저 득실(得失)을 관찰한 연후에 지혜에 따라 행하기 때문에 아무런 과실이 없다. ⑭일체구업수지혜행(一切口業隨智慧行) : 구업을 조작함에도 먼저 득실을 관찰한 연후에 지혜에 따라 행하기 때문에 아무런 과실이 없다. ⑮일체의업수지혜행(一切意業隨智慧行) : 의업을 조작함에도 먼저 득실을 관찰한 연후에 지혜에 따라 행하기 때문에 아무런 과실이 없다. ⑯지혜지과거세무애무장(智慧知過去世無碍無障) : 부처님께서는 지혜로써 과거의 일을 모두 통달하여 하등의 장애도 없다. ⑰혜지미래세무애무장(智慧知未來世無碍無障) : 부처님께서는 지혜로써 미래의 일을 모두 통달하여 하등의 장애도 없다. ⑱지혜지현재세무애무장(智慧知現在世無碍無障) : 부처님께서는 지혜로써 현재의 일을 모두 통달하여 하등의 장애도 없다. 이는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가 부처님의 육신상에 구족한 위덕(威德)이라 한다면,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은 정신상에 구족한 위덕(威德)이라 할 수 있다.

[여래십호(如來十號)] 부처님은 누구인가?


부처님께서 지닌 위덕을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것에는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는 여래십호(如來十號), 육신상의 특징인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 부처님만이 지니고 있는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등이 있다. 여래십호란 그 덕의 내용에 따라서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ㆍ명행족(明行足)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조어방부(調御丈夫)ㆍ천인사(天人師)ㆍ불세존( 佛世尊)을 말한다. ①여래(如來) : 진리 그대로를 여(如)라 하고, 그것을 바로 깨친 이를 래(來)라 한다. 즉 여래란 진리에 도달한 사람[如去], 진리로부터 온 자[如來]란 뜻이다. ②응공(應供) : 부처님이 행을 원만하게 이루고 복과 지혜가 구족해서 천상이나 인간세에서 존경을 받으며 능히 공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 ③정변지(正遍知) : 정변각(正遍覺), 정등각(正等覺), 정진도(正眞道)라고도 하는데, 고집멸도(苦集滅道)를 알되 그대로의 그 모습대로 알며 일체의 법을 모두 다 알아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④명행족(明行足) : 천안(天眼), 과거세를 아는 숙명명(宿命明), 불교의 진리를 알아서 번뇌를 끊어 없 애 버릴 수 있는 누진명(漏盡明)의 삼명(三明)과 신구의(身口意)의 행업(行業)이 구족하여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계ㆍ정ㆍ혜(戒 定 慧)의 삼학(三學)에 의하여 무상정변지(無上正遍知)를 얻었음을 의미한다. ⑤선서(善逝) : 어두운 세계를 초월해서 또다시 어리석은 세계에 돌아오지 않고 묘하게 간다는 뜻이다. 여러 가지 삼매(三昧)와 무량한 지혜에 들어감을 말하는데, 즉 여실(如實)히 저 언덕에 가서 다시 생사고해(生死苦海)에 돌아오지 않음을 의미한다. ⑥세간해(世間解) : 세간이나 출세간의 인과법에 의해 온갖 일을 다 아신다는 뜻이다. ⑦무상사(無上士) :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 독존(獨尊)이라는 뜻이며 번뇌가 다 끊어지고 다시 끊을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열반법을 스스로 알고 남에게서 듣는 것이 아니므로 열반이 모든 법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것처럼 부처님도 모든 이 가운데 위없이 가장 높은 이라는 뜻이다. ⑧조어장부(調御丈夫) : 여러 가지 법을 해설하여 일체중생을 조복(調伏)하고 제어해서 열반을 얻게 하는 위대한 분을 말하는 것이다. ⑨천인사(天人師) : 천인사(天人師)는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천인교사(天人敎師)라고도 하며, 마땅히 할 것과 안 할 것, 선한 것과 선하지 않는 것을 보이고 이끌며 교(敎)에 따라 행하여 도법(道法)을 버리지 않고 해탈의 과(果)를 얻게 하는 천(天)과 인(人)의 스승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⑩불세존(佛世尊) : 불은 부처님, 또는 깨달은 사람이며, 불타(佛陀)의 준말로 각자(覺者)라고 번역한다. 스스로 깨달아서 다른 이를 깨닫게 하여 각행(覺行)이 원만하여 삼세일체제법(三世一切諸法)을 모두 아는 부처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존(世尊)은 부처님께서는 온갖 공덕을 갖추어 세간을 이익케 하며 세간에서 존중을 받기 때문에 세존이라고 하며 또 세간에서 가장 높다는 뜻에서 세존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불과 세존을 나누고 ⑦과 ⑧을 하나로 헤아리거나, 세존을 제외하고 여래십호라 하기도 하며, 여래를 총체적인 이름으로 하고 불과 세존을 구분하여 여래십호라 하기도 한다.

[삼계(三界)] 불교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삼계란 불교에서 전체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삼유(三有)라고도 하는데,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세 가지이다. 욕계는 맨 아래에 있으며 식욕, 음욕, 수면욕 등의 5욕이 강한 세계인데, 천상계와 천하계로 나눈다. 천상계는 육도 중의 천도(天道 : 6욕천-사천왕천, 도리천, 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 천하계는 인도(人道), 수라, 축생, 아귀, 지옥 등을 말한다. 색계는 욕계 위에 있으며, 욕계와 같은 탐욕은 벗어났으나 청정 미묘한 형체가 있는 세계를 말한다. 여기에는 초선천, 이선천, 삼선천, 사선천의 사천이 있어 색계 사천이라 하며, 이를 세분하여 색계 18천이라 하기도 한다. 무색계는 색계와 같은 청정 미묘한 형체는 없지만, 다만 정신적인 세계, 즉 수 상 행 식의 4온(四蘊)이 존재 하는 세계로서 아직 존재에 대한 욕망이 남아 있는 세계이다. 여기에는 공무변처천, 식무변처천, 무소유처천, 비상비비상처천의 4천이 있다. 이러한 삼계는 세간(世間)이라고도 하는, 중생이 육도(六道)에 생사 유전하는 범부계(凡夫界)를 말한다. 이에 반해 출세간(出世間)은 생사윤회를 초월한 성자의 무루계 (無漏界)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삼계와 출세간이 구별되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무루계도 삼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고 한다.

[삼장(三藏)] 불교의 경전인 삼장이란 무엇인가?


삼장이란 불교 성전의 총칭으로 그 형식이나 내용에 따라 경장, 율장, 논장으로 분류된다. 경장(經藏)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것을 기록한 것으로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과 같이 ‘경’자가 붙은 것은 모두 이에 해당한다. 율장(律藏)은 교단의 관리 운영 등에 관한 규칙집으로 부처님께서 제자들 이 수행하는 데 있어 불필요한 행동을 삼가라는 법을 설하신 일종의 계율로 5계, 10중금계, 48경계, 250계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논장(論藏)은 후대에 부처님의 설법이나 교리의 요점 등을 각 부파들이 해석한다든지 부연해서 기술한 것으로 「구사론」, 「대지도론」, 「대승기신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삼장 중 경장, 율장은 부처님의 교설을 직접적으로 기술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저술의 체제성과 전통적 신념관에 의한 것일 뿐, 현존하는 경전과 율전 치고 부처님의 교설을 그대로 기술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부처님의 교설을 근본으로 하여 후세에 개인 또는 단체가 계획적이거나 비계획적으로 부처님의 교설을 기술하는 형식으로 편집한 문서가 다름 아닌 경장이요 율장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족계(具足戒)] 출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은 무엇인가?


계율이란 계와 율을 의미하는데, 계(戒)란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것으로서 자신의 내면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라면, 율(律)은 타율적이며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율은 부처님이 제정한 교단의 규율이고 출가자가 마땅히 지켜야 할 생활 규범으로서 모두가 금지 규정이고 그에 따르는 처벌 조항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율이라고 할 때는 계와 율이 함께 쓰이고 있다. 구족계란 출가한 비구,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로, 분파에 따라 계의 수는 다르지만 보통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계를 구족계라 하는 것은 그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다. 그 계의 숫자는 단지 긴요한 것만을 열거한 것이며,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일체의 행위에 청정(淸淨)을 약속하는 것이므로 구족이라고 한다. 이 계를 받기 위해서는 특별한 수계작법(受戒作法)을 필요로 하는데, 이를 통하여 불교교단에 들어감을 의미한다. 구족계는 5계ㆍ8계ㆍl0계 등의 재가계(在家戒)와, 나아가 대승 불교의 보살계(菩薩戒)와 구별된다.

[십선계(十善戒)] 재가자가 지켜야 할 십선계란 무엇인가?


대승계 또는 보살계의 대표적인 것이 십선계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세속인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계율인데, 인과의 도리에 따라서 선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을 3가지 신체적 행위, 4가지 언어적 행위, 3가지 마음의 활동으로 분류한 십선업도(十善業道)를 그대로 계율의 조항으로서 삼은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5계 중에서 불음주를 제외한 나머지 넷에 새로운 조목을 첨가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①불살생(不殺生) :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②불투도(不偸盜) :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된다. ③불사음(不邪淫) : 남녀의 도를 문란케 해서는 안 된다. ④불망어(不妄語) :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⑤불기어(不綺語) : 현란스러운 말을 해서는 안 된다. ⑥불악구(不惡口) : 험담을 해서는 안 된다. ⑦불양설(不兩舌) : 이간질을 해서는 안 된다. ⑧불탐욕(不貪欲) : 탐욕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⑨부진에(不瞋等) : 화를 내서는 안 된다. ⑩불사견(不邪見) : 그릇된 견해를 가져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십선은 종래의 신(身)구(口)의(意) 삼업(三業)의 확충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즉, ①~③은 신업(身業), ④~⑦은 구업(口業), ⑧~⑩은 의업(意業)이 된다. 이를 범하는 것을 십악(十惡)이라고 한다.


[6재일(六齋日)과 팔관재계(八關齋戒)] 바람직한 재가 불자의 신행생활은 무엇인가?


재계란 식사와 행동을 삼가고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을 말한다. 재계에는 팔관재계가 있는데 이는 오계를 수지한 재가 신자가 매년 삼장재월(1월, 5월, 9월)의 육재일(六齋日: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의 6일)에 지켜야 하는 여덟 가지 계율이다. 이러한 팔관재계가 나타나게 된 배경은, 출가 수행자는 엄격한 집단생활 속에서 수행하기 때문에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지만 재가자는 세속의 잡다한 일과 얽힌 인간관계로 인해 수행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비록 재가자라 할지라도 불교교단의 구성원이며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수행을 게을리 할 수 없다. 따라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부처님 제자로서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출가자들과 같은 수행생활을 통해 자신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출가 수행자의 포살일에 재가자를 참석토록 했으며 이때 8재계를 주어서 출가수행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6재일 가운데 14일과 15일, 29일과 30일이 잇달아 있는 것은 보름 단위로 계목(戒目)을 읽으면서 자기가 받은 계를 잘 지켜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하는 포살일(布薩日)이기 때문이다. 포살은 보름마다 동일한 지역 내에 거주하는 출가자들 이 한 곳에 모여 지난 보름간의 자기 행위를 반성하고 죄가 있으면 참회하는 의식이다. 이 포살 의식에 동참하는 재가자는 8가지 계를 받아야 하는데, 그 8가지 계를 8관재(八關齋)라 말한다. 8관재는 5계에다 3가지를 더한 것이다. 그 세 가지는 높고 넓은 침상을 쓰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지 않고 일부러 그것을 구경하지도 않으며, 향수 등을 바르지 않고, 정오가 지나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육재일을 살펴보면 부처님 시대에 재가 불자들의 신행 생활이 얼마나 철저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당시의 재가 불자들은 단순히 부처님을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출가 수행자들의 수행을 체험적으로 경험시키는 제도를 두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육재일은 불자들이 피상적으로만 불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출가의 삶을 본받아 정진하는 정진일(精進日)이다. 이러한 육재일에 대한 불교의 전통이 차차 변하여 10재일로 바뀐 듯하다. 10재일은 6재일에다 1일, 18일, 24일, 28일을 더한 것이며, 각 재일에 특정한 불보살을 배대(配對)하여 의미를 두었다. 각 재일에 배대된 특정한 불보살을 보면 1일은 정광불(定光佛), 8일은 약사여래(藥師如來), 14일은 보현보살(普賢菩薩), 15일은 아미타불, 18일은 지장보살(地藏菩薩), 23일은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24일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28일은 비로자나불, 29일은 약왕보살(藥王菩薩), 30일은 석가모니불이다. 이것을 십재일불(十齋日佛)이라 부른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과 32응신(三十二應身)] 자비의 화신이신 관세음보살은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관세음은 한자로 볼 관(觀), 인간 세(世), 소리 음(音)자를 쓰는데 ‘인간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인간 세상의 고통스런 소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들으시고 그 고통을 구제하신다는 뜻이 관세음이란 이름 가운데 담겨져 있다. 이와 같은 관세음보살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몸을 변신하여 나타내는데, 이는 제도할 상대편에 따라 다양한 몸으로 변신하고 있다. 예를 들면 『능엄경』에서는 불신, 독각신, 연각신, 성문신, 범왕신, 제석신, 자재천신, 대자재천신, 천대장군신, 사천왕신, 사천왕태자신, 인왕신, 장자신, 거사신, 재관신, 바라문신, 비구신, 비구니신, 우바새신, 우바이신, 여 주국부인명부대가신, 동남신, 동녀신, 천신, 용신, 약차신, 건달바신, 아수라신, 긴나라신, 마후라가신, 인신, 비인신 등이다. 이런 다양한 신분과 직업의 화신(化身)을 32응신(應身)이라 말하는데, 이 32응신을 꼭 서른두 가지만으로 국한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님은 필요에 따라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달달박박과 노힐부득이라는 두 스님이 아기를 밴 여인으로 변하여 나타나신 관세음보살님을 만나 성불한 일화는 대표적인 예이다.

[약사여래(藥師如來)와 12대원(十二大願)] 약사여래는 누구인가?


약사여래는 약사유리광여래의 약칭으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 한다. 약사여래는 동방의 유리광(琉璃光)세계에 주불(主佛)로 계시면서 왼쪽에는 일광변조(日光邊照)보살과 오른쪽에는 월광변조(月光邊照)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약사여래의 특징은 약병이나 약그릇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 동방은 희망을 상징하고 유리광세계의 부처님이란 유리처럼 밝게 빛난다는 형상이므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밝고 맑은 빛으로 충만하게 한다는 의미다. 일월광조 두 보살은 해와 달의 빛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변조(邊照)보살이라고도 한다. 약사여래 부처님이 세운 12가지의 대원은 다음과 같다. ①광명보조(光明普照) : 내 몸과 남의 몸이 광명이 들도록 치성하려는 원. ②수의혹변(隨意或辨) : 위덕이 높아서 중생을 모두 깨우치려는 원. ③시무진물(施無盡物) : 중생으로 하여금 욕망에 만족하여 부족하지 않도록 하려는 원. ④안립대승(安立大乘) :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교에 들어오게 하려는 원. ⑤구계청정(具戒淸淨) : 깨끗한 업을 지어 삼취계(三聚戒)를 구족하게 하려는 원. ⑥제근구족(諸根具足) : 모든 불구자의 병고를 구원하려는 원. ⑦제병안락(際病安樂) : 몸과 마음이 안락하여 부처님 세계를 증득케 하려는 원. ⑧전여득불(轉如得佛) : 여성이 불리한 조건으로 성불할 수 없다면 나의 이름을 듣고 남성으로 변성하여 성불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원. ⑨안립정견(安立正見) : 외도의 유혹에 빠지거나 외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건져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부처님의 정법에 의지하도록 하겠다는 원. ⑩제난해탈(濟難解脫) : 나쁜 왕이나 강도 등의 고난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려는 원. ⑪포식안락(飽食安樂) : 일체 중생의 기갈(飢渴)을 면하게 하려는 원. ⑫미의만족(美衣滿足) : 의복이 없는 사람에게 옷을 얻게 하려는 원. 약사여래불은 이렇게 12가지 서원을 하고 수행 정진하여 성불하고 동방 만월 세계의 약사유리광부처님이 되셨다. 이에 중생들도 그 원력에 힘입어 정진할 수 있고, 그 정진의 힘으로 반드시 성불하여 역시 12가지 대원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참(理懺)과 사참(事懺)] 진정한 참회는 무엇인가?


참회란 자신(중생)이 바로 진리의 생명인 부처님의 씨앗임을 불신해 온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쳐 자각하고 진리 자체의 생명인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원천적인 행위를 뜻한다. 즉 청정무구한 본래의 자기 세계로 회귀(回歸)하려는 근원적인 충동에 의하여 나타난 마음의 작용과 몸짓인 것이다. 참회는 일반적으로 이참(理懺, 이치로 참회하는 것 : 죄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참회)과 사참(事懺, 부처님의 법식에 따라 몸과 마음을 바쳐 발원하는 참회)을 말하는데, 이참은 죄란 본래 무자성(無自性)이라는 사실과, 자성 청정심 역시 어떤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정 삼매 속에서 관찰하여 훨훨 털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참은 예배, 절 등 몸으로 하는 것과 염불, 경을 읽는 것 등 입으로 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참에는 사참의 행위가 수반되어야 하고 사참에는 이참의 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영명 선사는 “성불의 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사참을 행해야 한다. 몸과 마음을 바쳐 부처님께 귀명(歸命)하고 비 오듯 슬피 울며 정성을 다하면 부처님의 가피를 받으리니 마치 연꽃이 햇볕을 받아 활짝 피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육조대사(六祖大師)는 “참(懺)이란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망되이 시기 질투한 죄를 뉘우쳐 지난날에 지은 악업을 다시는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회(悔)란 이다음에 저지르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 됨을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라고 하셨다. 이러한 참회는 세상에 탐욕과 거짓과 어리석음이 있는 한 계속되어야 한다. 올바른 삶으로 회귀하려는 참된 마음인 참회 정신이 침체되지 않도록 생활화되어야 한다.

[비파사나 수행법] 초기 불교의 비파사나 수행법이란 무엇인가?


불교의 여러 가지 수행법 가운데서 가장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명상법으로서, 한역에서는 관(觀) 혹은 능견(能見)ㆍ정견(正見)ㆍ관찰(觀察)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관이란 지혜로써 객관의 경계를 관찰하여 비추어 본다는 것으로, 가령 부정관(不淨觀)이라 하면 인간의 육체가 추하고 더러운 것임을 관하여 탐욕의 번뇌를 멸하는 것이다. 또한 이 수행법으로 가장 널리 알려지고 대중적이며 실제적인 것으로 수식관이 있다. 이러한 비파사나 수행법은 지혜로써 일정한 대상을 관찰하고 생각으로 염하여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인데, 부처님은 그 당시 모든 수행의 정상인 8선정까지 통달하고서도 생사해탈이나 궁극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홀로 보리수 밑에서 12연기로 깨치셨다. 이것을 4성제로 정리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는 주로 오온 관찰로 지도하셨다. 부처님 수행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이 『대념처경』인데, 이를 중심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몸의 관찰[身念處] : ‘몸을 정복하지 못하면 마음을 정복하지 못한다’고 설하고, 몸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본래의 마음자리를 찾는 것이다. ②감각의 관찰[受念處] : 좋은 느낌, 싫은 느낌, 중간의 느낌 등 감각의 변화를 통하여 몸과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다. ③마음의 관찰[心念處] : 탐ㆍ진ㆍ치가 있는 마음과 없는 마음, 무기력한 마음, 산란한 마음, 선정이 있는 마음, 해탈한 마음 등을 알아차린다. ④법의 관찰[法念處] : 법에 대한 관찰은 현상이 일어나기 전과 이후의 상태를 직관적인 의심을 수반하여 회광 반조로 의관(疑觀)한다. ㉠다섯 가지 장애인 욕망ㆍ선냄ㆍ혼침ㆍ불안정한 마음ㆍ회의 등이 일어나기 이전, 진행, 사라진 상태를 입체적으로 알아차린다. ㉡오온에 대한 관찰 : 부처님 제자들은 대부분 오온에서 무상ㆍ고ㆍ무아를 보아 깨친다. 오온의 생ㆍ멸 을 관찰한다. ㉢여섯 감각 기관(六根六境)의 관찰 : 육근ㆍ육경ㆍ육식에서 탐ㆍ진ㆍ치를 제거한다. ㉣칠각지(七覺支)의 관찰 : 37도품의 칠각지 등을 관찰한다. ㉤사성제에 대한 관찰 : 고(苦)와 집(集)은 현상이고, 멸(滅)은 열반이며, 팔정도는 고와 집에서 열반으로 가는 길로 불교의 모든 수행은 여기에 포함된다. 이와 같은 비파사나 수행은 형상적인 생각을 마음에 떠올려서 관하는 초보적인 것에서부터 형상적인 것에 기탁된 교의(敎義)나 불교의 진리를 관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이 다양하다.

[간화선(看話禪)] 간화선이란 무엇인가?


간화선이란 우주 인생의 근원을 철저히 구명(究明)해 가는 데 있어서 화두(話頭)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부해 나가는 불교의 참선법이다. 다시 말하면 화두라고 하는 정형화되어 있는 어떤 사항을 참구하면서 수행함으로써 평등일여(平等一如)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간(看)은 본다는 것이고, 화(話)는 공안(公案)이라는 것으로, 즉 공안을 보고 그것을 참구하여 마침내 크게 그리고 철저하게 깨닫는 선(禪)이다. 여기서 화두란 공안 또는 고칙(古則)이라고 하는데, 공정하여 범 치 못할 법령, 옛 어른들이 남겨 놓은 법칙이란 뜻이다. 즉 진리를 깨친 부처님이나 조사의 말이기도 하고, 몸짓이나 그 밖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범부의 생각이나 말로는 견줄 수 없는 부처님의 깨달은 법, 진리 그 자체를 온전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참선 공부에 있어서 문제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무(無)자 화두가 그이다. 이러한 간화의 방법은 화두를 어미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를 잡듯 참구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가는 수행법이다. 이 간화선은 중국 송나라 말기 조동종(曹洞宗)의 굉지정각(宏智正覺)이 묵조선(默照禪)을 표방하고 나오자, 임제종의 대혜 종고(大慧宗) 선사에 의해서 제창되었는데, 현재 우리나라 선원에서 행해지고 있는 선법은 이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묵조선(默照禪)] 묵조선이란 무엇인가?


묵조선은 간화선(看話禪)과 대비되는 표현법으로, 참선을 할 때 화두나 공안을 들지 아니하고 본래 그대로의 체(體)를 비추어 보는 선, 즉 고요히 묵묵히 앉아서 모든 생각을 끊고 참선하는 선법을 말한다. 묵조선의 방법은 육근 작용의 문을 막고 지관타좌(只觀打座), 즉 잡념을 두지 않고 오직 성성적적한 마음으로 좌선을 하여 한 기운을 오래 조절하면, 자연 적조원명(寂照圓明)한 본연의 빛이 밝아진다고 한다. 이러한 묵조선은 중국 송나라 시대 조동종(曹洞宗)의 굉지정각(宏智正覺)이 그 당시 임제종의 대혜종고선사와 쌍벽을 이루자, 대혜종고선사가 그의 가르침이 ‘오직 앉아서 묵묵히 말을 잊고 쉬어 가고 쉬어 가게 한다’ 하여 이를 비난하기 위하여 묵조사선(默照邪禪)이라고 지칭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묵조선은 본래 자성청정(自性淸淨)을 기본으로 한 수행법으로, 갑자기 대오(大悟)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내재하는 본래의 청정한 자성에 절대로 의뢰하는 선이다. 이에 반해 간화선은 큰 의문을 일으키는 곳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하여, 공안(公案)을 수단으로 자기를 규명하려 하는 선법이다. 대혜선사는 묵조선을 사선(邪禪)이라 공격하였지만, 결국 양자의 차이는 본래의 면목(面目)을 추구하는 방법의 차이이다. 굉지정각은 「묵조명」을 통하여 묵조선이 불조정전(佛祖正傳)의 참된 선이라고 주장하면서 묵조선의 원천은 달마에게 있다고 하였다.

[유위의 복과 무위의 복] 최상의 복이란 무엇인가?


복에는 유위복(有爲福=有漏福)과 무위복(無爲福=無漏福)이 있다. 여기서 누(漏)는 누설(漏泄)의 준말로 번뇌를 뜻하는데, 번뇌를 끝낸 것을 무루법(無漏法), 번뇌가 없는 육체를 무루신(無漏身), 번뇌가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무루의 길이라고 하며, 범부의 지혜를 유루지(有漏智)라 하는 데 비하여 도를 이룬 성자의 지혜를 무루지(無漏智)라 하고, 성자가 일으키는 선을 무루선(無漏善), 무루지로 닦은 관행을 무루행(無漏行) 이라 부른다. 무루행으로 열반의 깨달음인 무루과를 얻는 것을 무루인(無漏因)이라고 하며, 성자가 무루지로 얻은 선정은 무루정(無漏定)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유위복이란 내가 누구에게 복을 지었다는 생각이 항상 남아 있는 마음을 말한다. 이 복은 또 다른 말로 주상보시(住相布施)라 하며 생천복(生天福)이라 하여 우선 남에게 베풀 때면 자신이 흐뭇하고 타인으로부터 찬사를 받겠지만 베풀었다는 마음이 남아 있는 한 언젠가는 그것을 다시 보상받고 싶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복을 지은 만큼의 복은 받겠지만 그 복이 다하고 나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이다. 그렇지만 무위복이란 내가 누구누구에게 복을 지었다는 생각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른 말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하는데 마음에 남아 있지 않으니 복에 걸림 없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일을 많이 해 놓고서 입으로 소멸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복을 짓지 않은 사람은 복 받을 일을 안 했기 때문에 받을 생각도 하지 않겠지만, 복을 지은 사람들도 좋은 일을 많이 했다는 상(相)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불교교리 문답 총정리 (대한불교조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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