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불사상(過去佛思想)---석가모니 그 이전 세상에 출현했다고 하는 여섯 부처님과 석가모니불을 합쳐 과거칠불(過去七佛)이라 하는데, 석가모니 이전에도 깨달음을 얻은 불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과거칠불(過去七佛) 참조.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과거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말로서, <금강경)> 제18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세계 가운데 있는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아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니, 그것은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이를 이해하기 위해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아침이 밝아서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출근을 한다.」
이것은 일상으로 행하는 자연스런 행동이다. 그러므로 이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이처럼 별일이 없을 때는 우리 마음은 없다. 이것이 우리들의 본래 모습이고, 본래 마음이고, 본성이다. 이와 같이 최초의 우리 마음은 텅 빈 무심(無心)이고, 무위(無爲)이며, 무작(無作)이고, 무주(無住)이다.
그러던 것이 상황이 바뀌면 돌변해서 문제가 생긴다. 없던 마음이 일어난다.
「어제, 하루 종일 분주히 일하다가 퇴근 무렵, 친구하고 약속 시간에 쫓겨 미처 처리하지 않은 계약에 관한 건에 문제가 생겼다. 출근해서 보니까. 미처 처리하지 않은 그 건을 눈치 챈 다른 회사 직원이 약삭빠르게 비집고 들어와서 그 계약 건을 그 회사 쪽으로 가져가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터져 회사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히게 됐고, 그래서 상사에게 야단맞고, 시말서까지 썼다.」
이렇게 되고나니, 자리에 와 앉아 있어도 안절부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하루 종일 번뇌 망상에 시달렸다. 별별 생각을 다 했다. 심지어 사표 내고 그만둘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이처럼 엉뚱한 사단이 생기니, 이런 조건이 발생하니, 온갖 마음이 함께 일어난다. 마음이란 이런 것이다.
그런데 퇴근 무렵에 경사가 터졌다.「며칠 전 처리했던 건에 대박이 터졌다. 아침에 야단맞은 그 계약 건보다 훨씬 큰 계약 건에 대박이 터진 것이다. 회사에 막대한 이익이 생기는 경사였다. 과내에 소동이 벌어지고, 과장이 불러서 갔더니 아침에 썼던 시말서를 되돌려주며 함박웃음이다.」 일이 역전된 것이다.
그러니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진다. 마음이란 게 이와 같다. 조건과 상황에 따라 온갖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은 독자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조건적이다. 그리고 이렇듯 마음엔 실체가 없다. 현재 이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조차 고정된 실체가 없는 찰나 생 찰나 멸하는, ― 상황과 조건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니 내 마음, 현재의 내 마음조차 내가 잡을 수가 없다. 그런데 과거에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지금까지 붙잡고, 그 과거의 마음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괴로워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마찬가지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지레 분별하고 상상하고 추측하면서 울고 웃는다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이미 지나가 흘러가버린 마음을 붙잡아서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고, 아직 오지도 않은 마음을 미리 붙잡아서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으며,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일어난 마음도 찰라 멸하는지라 이미 흘러 지나가버린 과거 마음이 돼버리기 때문에 그 마음도 붙잡아서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도 없다.
그래서 과거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즉, 공연히 마음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그 마음에 빠지고, 집착하며, 또한 그 마음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즐거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 <금강경>에 마음이 만들어낸 것은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했다. - 법상 스님의 <금강경과 마음공부>에서 요약.
결국 <금강경>에서 말하는, “과거심도 얻을 수가 없으며, 현재심도 얻을 수가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가 없다”고 설한 것은, 마음은 모양도 형체도 색깔도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의 본체는 얻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낸 것이 중생의 삼계이니, 삼계도 불가득인 것이다. 즉, 일체의 모든 존재나 삼라만상은 텅 비어 공(空)한 것이기 때문에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을 모양이 아닌 것으로 본다면 여래를 친견하리라”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무심의 경지에서 지금 여기 자기의 일을 지혜롭게 하고 있는 그 당체가 여래이며 법신이라는 사실을 체득하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달마(達磨) 대사가 혜가(慧可)에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오라! 내가 그대를 위해 안심시켜 주마!”라고 말하자 혜가는 “불안한 마음을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不可得)”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래서 달마는 “내가 그대를 안심시켜 주었다”고 해, 혜가는 얻을 수가 없는(不可得) 그 마음이 안심을 체득한 경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유명한 안심법문을 전하고 있다. 반산 화상이 “삼계에 무법(無法)인데 어디서 마음을 구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마음은 어느 곳에서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일체가 텅 비어 공(空)한데 어디서 얻을 수가 있겠는가? 구하고 얻을 수도 없는 마음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물속에 비친 달을 주우려고 하는 것과 같이 착각과 환상에 떨어지게 된다. 불법은 심법(心法)이다. 마음 밖에서 불법이나 진실을 추구하고 불도를 구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그래서 “마음 밖에 법은 없다” “마음 밖에서 불도를 구하는 것은 외도”라고 선승들이 강조하고 있다.
중국 당나라시대에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선사가 말했다.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時現今 更無時節)”이라고, 한번 지나가 버린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직 않은 미래에 기대를 두지 말며,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자신답게 주인답게 최선을 다해 살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인데, 그 한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삶의 빛깔이요 무게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리고 나는 지금 무엇이 돼가고 있는가. 바로 지금 현재만 있을 뿐, 또 다른 시절이란 없다. 이처럼 자신답게 산다면 지금 이 순간 성불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갔고, 현재의 마음은 순간순간 흐르고 있으며, 미래의 마음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그러면 어느 마음에 점을 찍어야[點心] 할까?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과 점심(點心)에 얽힌 덕산 선감(德山宣鑒, 782~865) 선사의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덕산 선감(德山宣鑒, 782~865) 참조.
*과거2인(過去二因)---12연기(十二緣起)를 태생학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열두 가지 가운데 무명(無明)ㆍ행(行)이 과거세의 2인(因)이 돼 식(識)ㆍ명색(名色)ㆍ육처(六處)ㆍ촉(觸)ㆍ수(受)라는 현재세의 5과(果)를 초래하고, 다시 애(愛)ㆍ취(取)ㆍ유(有)가 현재세의 3인(因)이 돼, 생(生)ㆍ노사(老死)라는 미래세의 2과(果)를 초래해 괴로운 생존을 되풀이 한다는 견해이다. 이는 삼세에 걸쳐 인과가 겹침으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한다. 즉, 괴로움을 멸해 해탈로 향하는 과정―삼세양중인과를 설명함에서 나오는 말이다. 이 열두 가지 가운데 무명(無明)과 행(行)은 과거세의 번뇌와 선악의 행위, 식(識)은 수태(受胎)하는 찰나, 명색(名色)은 수태 후 약 1개월 사이, 육처(六處)는 태내에서 눈ㆍ귀ㆍ코 등의 기관이 완성되는 단계, 촉(觸)은 출생해서 단순한 감각 작용을 일으키는 단계, 수(受)는 단순한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느끼는 단계, 애(愛)는 재물이나 애욕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단계, 취(取)는 집착이 증대하는 단계, 유(有)는 집착으로 그릇된 행위를 일으키는 단계, 생(生)은 미래세에 태어나는 단계, 노사(老死)는 미래세에 태어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로 해석한다.
*과거칠불(過去七佛)---과거칠불은 석가모니까지(석가를 포함해) 등장한 7명의 부처를 말한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누구든지 깨달음을 얻어서 불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석가모니 이전에도 깨달은 불타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불타는 오직 석가모니 한 사람일 뿐이며, 나머지 6명의 불타는 과거불 사상이 전개됨에 따라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과거불 사상은 불타의 본생담 및 미래불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며, 대승불교에서 전개된 불타관의 원천이 됐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불이 불교라는 종교를 이룬 것은 단지 석가모니 일대만의 사업이 아니고, 과거에서 이미 성도해 성불한 전생의 공덕이 누적한 결과라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불국토설(新羅佛國土說)과 관련해 과거칠불에 대한 신앙이 전개됐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는 과거칠불을 각기 모시는 가람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의 부처님은 무수히 많지만 불전에서는 그 중에서도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출현하신 일곱 부처님을 과거불로 정리하고 있다. 그러고 이러한 부처님들의 일대기를 모은 경전이 바로 초기경전 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aya, 소부)에 포함돼 있는 <불종성경(佛種姓經, Buddhavaṃsa)>이다. 과거칠불은 아래와 같다.
➀ 비바시불(毘婆尸佛, Vipassi Buddha)-위빠시불,
➁ 시기불(尸棄佛, Sikhi Buddha)-시키불,
➂ 비사부불(毘舍浮佛, Vessabhu Buddha)-웨사부불,
④ 구류손불(拘留孫佛, Kakusandha Buddha)-까꾸산다불,
⑤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Konagamana Buddha)-코나가마나불,
⑥ 가섭불(迦葉佛, Kassapa Buddha)-까사빠불,
⑦ 구담불(瞿曇佛, Gotama Buddha, 석가모니불)-고따마불이다.
이 중에서 ①비바시불(毘婆尸佛), ②시기불(尸棄佛), ③비사부불(毘舍浮佛), 세 분은 장엄겁(莊嚴劫)에 나타나신 부처님이라 해서 과거삼불이라 한다.
그리고 현겁에 출현하신 부처님은 ④구류손불 ⑤구나함모니불 ⑥가섭불 ⑦석가모니불, 네 분이다. 그리고 현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미래에 오실 부처님은 미륵불(彌勒佛, Metteyya Buddha)이다.
주석서에 따르면 미륵불을 포함해서 다섯 분 부처님들께서 출현하시어 장엄하시는 멋진 겁이요, 핵심이 되는 겁이라고 세존께서 칭찬하셨기 때문에 현재의 겁을 ‘행운의 겁(賢劫, bhadda-kappa)’이라고 한다. 즉, 부처님이 출현하시는 겁보다 출현하시지 않는 겁이 훨씬 더 많은데, 현재 겁에 무려 다섯 분의 부처님들이 출현하셨고 또 출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누구든지 깨달음을 얻어서 불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석가모니 이전에도 깨달음을 얻은 불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불타는 오직 석가모니 한 사람일 뿐이며, 나머지 6명의 부처님은 대승불교에서 과거불사상이 전개됨에 따라 창작된 부처이다.
※장엄겁(莊嚴劫)---과거ㆍ현재ㆍ미래의 3대겁(三大劫) 가운데서, 현재를 현겁(賢劫), 미래를 성수겁(星宿劫)이라함에 대해 과거의 대겁을 장엄겁이라 함.
*과거칠불(過去七佛) 성립 배경---과거칠불의 성립 배경에 대해서는 붓다시대의 종교사상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기원전 6세기 정통 바라문 사상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신흥 사상가였던 사문 그룹에서 자이나교의 개조였던 니간타 나따뿟따(Nigantha Nataputta)와 사캬무니 붓다(Sākyamuni Buddha)는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두 종교의 조직이나 운영 체제 등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니간타 나따뿟다가 사캬무니 붓다보다 12년 정도 선배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출신 성분과 행적도 거의 비슷하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자이나교의 제도를 불교가 모방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자이나교에서 먼저 여성을 출가시켰다. 그것을 본 붓다도 여성의 출가를 허락했다. 불교의 칠불사상도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니간타 나따뿟따는 붓다와 같은 시대 왓지(Vajji)의 웨살리(Vesali) 부근에서 왕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32세에 출가해 사문이 되어 12년간 고행한 끝에 마침내 완전지(完全智)를 얻었으며, 그 후 30년간 교화활동을 하다가 72세에 입멸했다. 니간타 나따뿟따는 자신이 자이나교를 최초로 개창한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있던 니간타의 전통을 계승한 자라고 했다. 이를테면 자이나교의 중흥조라고 자처한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교설에 대한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기 자신이 최초로 자이나교를 창시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니간타의 제22대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니간타의 영향을 받아 붓다도 자신이 불교의 개조가 아니고, 그 이전에 이미 여섯 명의 붓다(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루손불, 구나함불, 가섭불)가 있었다고 말하게 됐다. 불멸후에는 제자들이 석가모니불까지 포함시켜 과거칠불이 있었다고 주장하게 됐다. 세상 사람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붓다가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이루고 다섯 고행자들을 교화하기 위해 바라나시로 가는 도중에 아지비까 교도였던 우빠까(Upaka)를 만났지만, 그는 붓다의 말을 믿지 못하고 수행하다가 정신 착란을 일으킨 사람으로 취급해 버렸다.
인지가 발달하지 않았던 기원전 6세기에 붓다의 사성제나 연기법을 그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붓다는 그 연기법은 내가 발명한 것이 아니고 발견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그 길(팔정도)을 따라가기만 하면 옛 궁전(열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인도에 과거불의 스뚜빠(stupa, 塔)가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과거불을 추모하기 위해 후대에 조성한 것일 뿐, 실제로 과거불이 실존했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자이나교의 과거 니간타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자신의 교설이 틀림없는 진리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해야만 한다. - 마성 스님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줄여서 <인과경>이라고도 한다. <과거현재인과경>은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송나라 때인 444년~453년경에 총 4권으로 번역했다. 경전의 명칭은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결과를 설명한다는 뜻이다. 붓다가 스스로 자신의 전기(傳記)를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꾸며졌다. 붓다 자신이 과거세에 보광여래(普光如來) 밑에서 선혜선인(善慧仙人)으로 태어나 출가해 득도했으며, 그 인연이 영겁의 세월이 흘러서도 사라지지 않아 현세에서 부처로 태어났다는 내용이다. 선혜선인의 출가와 득도, 보광여래의 예언, 도솔천에 태어난 일 등 전생 이야기에서 시작해 이 세상에 태어난 뒤에 일어난 여러 일화들을 나열했다. 전생의 이야기는 과학적으로는 근거 없는, 완전히 창작된 내용이다.
그리고 서역 출신의 축대력(竺大力)과 강맹상(康孟詳)이 공동 번역한 <수행본기경>, 월지국 출신의 지겸(支謙)이 번역한 <태자서응본기경>, 서진의 섭도진(攝道眞)이 번역한 <보살본기경> 등도 같은 경으로 무두 <과거현재인과경>의 다른 번역이라고 한다.
이 경은 문장이 유려하고 때로는 대승적인 사상도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경은 붓다 자신이 설한 형식을 갖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기이지만,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과거의 종자 인연은 무량겁을 지날지라도 마침내 멸하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고 설함으로써 과거의 종자 인연으로부터 현재의 과보를 얻는다고 강조한 데서 <과거현재인과경>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경은 중생이 받고 있는 현재의 과보가 천차만별한 것은 다 전생의 업인이라고 설한 점으로 달리 <선약인과경>이라고도 한다.
*과문(科文)---과문(科文)에 관한 유학(儒學)에서 개념과 불교에서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 유학 입장에서 ‘과문(科文)’이란 고려ㆍ조선시대 과거 문과(文科)에 통용되던 여러 가지 문체의 글을 말한다. 과문의 주종은 시(詩)ㆍ부(賦)ㆍ표(表)ㆍ책(策)ㆍ의(疑)ㆍ의(義)로서 흔히 ‘과문육체(科文六體)’라 불렀다. 이 가운데 의(疑)ㆍ의(義)는 경서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는 것으로 특별한 정식(程式-표준방식)이 요구되지 않는 고문체이다. 그러나 표(表)ㆍ책(策) 등은 주로 내용이 시무(時務)에 관련된 것이고, 일정한 정식이 요구되고 격률의 형식이 까다롭고, 전고(典故)를 많이 사용하므로 특별한 훈련 없이는 쉽게 지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유생들은 과문법을 익히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과문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과거시험 때 응시자가 제출하는 답안지를 과문이라 하기도 했다.
• 불교에서 ‘과문(科文)’이란 경론(經論)을 구조적으로 분석해 도표 등 시각적으로 표시하는 것을 말했다. 이를 위해 경론을 내용에 따라 단락을 나누어 경전 해설의 이해를 돕기도 했다. 그리고 경전(經典)이나 논서(論書)를 해석함에 있어서 내용에 따라 문단(文段)을 짓는 것을 과문(科文)ㆍ과장(科章)ㆍ과절(科節)ㆍ과단(科段)ㆍ분과(分科) 등의 용어를 썼다.
형식은 간단한 어구와 줄을 그어 그 내용을 도표ㆍ그림 등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따라서 과문이란 경론을 구조적으로 분석해 시각적으로 표시하든가, 또는 알기 쉽게 해석하기 위해 내용에 따라 문단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실행되면서 불교의 학문전통과 교육전통 전승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과문은 현재 한국 강원에서 실행되고 있는 불교의 살아있는 전통이기도 하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불교의 문헌해석학과 과문(科文)의 전통’이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 관한 불교신문 기사를 일부를 게재한다.
『‘과문’이란 경론의 해석을 위해 구조를 장절(章節)로 분석해 트리(tree) 구조로 시각적으로 표시하는 것으로, 아시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실행되면서 불교의 학문전통과 교육전승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문을 통한 해석학 전통은 10세기 후반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그 명맥을 한국의 일부 강원교육 등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이날 불교학연구회장 조은수 서울대 교수는 과문이 디지털 불교문헌연구의 지평을 넓히고 전통 불교문헌의 활용도를 높이는 실험의 시금석이 될 것 이라고 강조했다.
조은수 교수는 “과문에 대한 구조적 연구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인문학 문헌전산화를 위해 좋은 모델이 된다”며 “아시아 각국이 경쟁적으로 문헌전산화를 추진하는 현실에서 과문과 장소에 대한 구조적 연구는 불교 문헌 및 인문학 문헌 일반의 전산화를 위한 새로운 지평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과문의 방법과 체계가 독창적인 특성과 장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조 교수에 따르면 과문은 대량의 주석문헌이 생산됨에 따라 그 문헌을 읽고 연구ㆍ비교하는 중요한 도구이자 문헌간의 관계를 정하고 평가하는 일종의 표준으로서 역할을 했다. 대규모 원전과 다층의 장소들을 수십 단계에 달하는 구조로 분석하고 이를 다시 하나의 체계로 묶어 통합시키는 방법을 통해 주석문헌을 체계화 한 일종의 ‘문헌분석시스템’이라는 것이다.』- 2014,5,3 불교신문기사
결국 과문(科文)이란 경론을 구조적으로 섬세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불교의 문헌분석 방법론의 백미라고 한다. 그리고 경전 해석학으로서 동양에서도 분석적 사유를 했다는 증거로서, 과문의 존재는 불교의 종교전통으로서 뿐만 아니라 동양의 대표적인 학문전통으로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과보(果報)---인과응보(因果應報)의 줄인 말이다. 과보(果報)란 앞서 한 행동에 대한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를 말한다. 즉 선한 행동을 했으면 선한 열매를 얻는 것이고, 악한 행동을 했다면 악한 열매를 얻는 것이니[善因善果 惡因惡果], 행동과 결과에는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를 통틀어 과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제가 저지른 일의 과보(果報)를 제 스스로 받음을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한다.
과보는 어느 때 어떻게 받을 것인지 다 확정돼 있어 도저히 면(免) 하려야 면할 수 없는 강력하고 무서운 과보로써 오직 순응하고 감수해야 한다. 과보는 정해져 있으나 받을 시기는 기연에 따라 갚아야 한다. 어떤 과보를 어떻게 받으라는 것은 이미 결정돼 변경할 수 없으나, 어느 때 받아야 될 것인가의 문제만 미정(未定)돼 있는데, 과보(果報)에는 현보(現報)ㆍ순보(順報)ㆍ순후보(順後報)가 있다.
과보는 인을 심어서 곧바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의 환경이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무거운 쪽부터 먼저 실현된다고 본다. 짓는 그 즉시로 받게 되는 것을 순현보(順現報), 짓는 즉시 받지 않고 그 다음 시기에 받는 것을 순생보(順生報), 받기는 받되 언제 받게 될지가 일정하지 않은 순후보(順後報)로 구분한다.
*과보심(果 報心)---마음은 있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나의 마음이 아니고 무아(無我)다. 마음은 매순간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므로 나의 것이 아니며, 나의 소유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 마음은 현재의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에 행위를 원인으로 인해서 생긴 결과의 마음도 함께 있다. 이것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마음이라고 하는데 이를 줄여서 과보심(果報心)이라고 한다.
그런데 선심은 선 과보심(善果報心)과 어울리고 불선심은 불선 과보심(不善果報心)과 어울린다. 선심을 갖고 싶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불선 과보심이 많으면 선심이 있어도 불선심으로 바뀐다. 불선심을 갖지 않으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선 과보심이 많으면 불선심이 있어도 선심으로 바뀐다. 과보심은 조건에 의해서 생긴 인과응보의 마음이다. 과보심은 과거에 행위를 한 원인으로 인해 생긴 결과의 마음으로 자신의 그림자와 같다. 이처럼 마음은 현재의 마음만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과보심이 있어서 항상 영향을 미친다.
과보심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습관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축적된 성향이다. 선 과보심이 생기도록 하려면 수행을 해서 선업을 쌓아야 한다. - 묘원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인분가설(因分可說)과 과분불가설(果分不可說)’ 참조.
*과성삼매(果成三昧)와 인행삼매(因行三昧)---염불을 함에 있어서 일심으로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든지, 또는 일심으로 부처님의 상호를 관찰한다든지, 또는 일심으로 법신불(法身佛)을 실상으로 관조하는 수행법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인행삼매]라 한다. 그리고 인행의 염불삼매가 성숙되면 마음이 선정에 들어가고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法身)의 실상에 계합되는데 이를 과성의 염불삼매[과성삼매]라 한다.---→인행삼매(因行三昧) 참조.
*과위(果位)---과위는 수행에 의해 증득된 결과로서의 불위(佛位), 즉 부처의 지위ㆍ경지 또는 계위(階位)를 말한다. 과지(果地)라고도 한다. 불과(佛果)란 부처라는 결과라는 뜻이며, 부처 또는 여래의 계위 또는 지위라는 뜻에서 불지(佛地) 또는 여래지(如來地)ㆍ불과위(佛果位)라고도 한다. 여기서 지(地)와 위(位)는 모두 수행상의 지위 또는 경지, 즉 수행 계위를 뜻한다.---→인위(因位) 참조.
*과해(果海)---붓다의 경지, 즉 불과(佛果)의 덕이 넓고 큰 것을 바다에 비유한 말이다. 중국 화엄종 제4조인 청량 징관(淸凉澄觀, 738~839) 조사는 붓다의 깨달음은 말을 떠나있다고 했고, 또 “성해(性海)의 과분(果分)은 마땅히 가히 설할 바 없다”고 했으며, “과해(果海)는 생각을 떠나있으면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성해(性海)---변하지 않는 진리나 청정한 본성을 바다에 비유한 말. 진리의 세계.
*과현인과경(過現因果經)---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의 줄인 말이다.---→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참조.
*곽시쌍부(槨示雙趺)---중인도(中印度) 쿠시나가라(kuśinagara)라는 도시의 성(城)밖에 있는 발제하(跋提河)라는 언덕에는 사라(sala)나무 네 쌍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사라수가 둘씩 쌍으로 네 쌍이 서 있었다고 해서 사라쌍수(娑羅雙樹)라 한다. 붓다는 그 나무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 무렵 부처님 수제자인 가섭(迦葉) 존자는 여러 제자들과 함께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의 동북쪽에 있던 기사굴산(빠알리어 기자쿠타/Gijjhakūṭa, 耆闍崛多山-영축산)이라는 곳에서 선정을 닦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천지가 어두워지고 해와 달빛이 없어졌으며 동시에 새와 짐승들이 슬프게 울고 있었다. 가섭 존자는 이러한 광경을 보고 이것은 부처님께서 몸이 쇠약해서 입적을 알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섭은 바로 신통력으로 곧 달려가고 싶었으나 경망스럽게 행동을 할 수가 없어 7일간을 걸어서 발제하에 도착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칠일이 지난 뒤라서 이미 입관이 이루어진 후였는데, 가섭이 늦게야 와서는 관 주위를 세 번 돌면서 슬피 울며 경례를 드리고 말하기를 “이제 부처님을 대하니 어떤 면으로 봐도 열반하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원하옵건대 제가 경례를 드린 것에 대한 표시를 해 주소서.”라고 발원을 했다. 그 때 부처님 두 발이 널 밖으로 나왔다. 그 발에서는 천개의 해가 환하게 조명한 것과 같이 밝게 빛났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두 발이 관 속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이러한 부사의한 경지를 곽시쌍부(槨示雙趺)라 하고, 이에 대해 <선문염송(禪門念誦)>에서는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다. “영혼의 근원은 본래 담적(湛寂)한 것이기 때문에 과거가 없고 현재도 없다. 마음의 묘체(妙諦)는 신령스럽고 밝은 것인데 어찌 생(生)과 사(死)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이 발제하 언덕에서 부처님이 널 밖으로 두발을 보이실 수 있었느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 ‘두 발을 관(棺) 밖으로 내보인 것[槨示雙趺]’은 부처님 마음을 가섭에게 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따라서 이는 선종에서 가섭 존자가 부처님 법을 이어받았다고 인용되는 삼처전심(三處傳心) 가운데 하나이다.
*곽연무성(廓然無聖)---당나라시대 도선(道宣, 596~667)에 의해 645년에 쓰여진 <속고승전(續高僧傳)> 속의 <달마전(達磨傳)>에 보면,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곽연무성(廓然無聖)” 드넓게 트였으니 성스러운 것도 없다고 답했다.
'곽연(廓然'이란 드넓게 트여 한 점도 걸릴 장애가 없고, 모든 대립이 사라진 대오(大悟)의 경계를 말한다. 따라서 ‘곽연무성(廓然無聖)’이란 그렇게 드넓게 트인 경계에는 성스러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최고의 진리는 일체의 분별을 넘어선 것으로 성ㆍ속(聖俗) 또는 성ㆍ범(聖凡)의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성과 속을 분명하게 나누는 양무제(梁武帝)의 집착을 타파하는 법문이다.
불교 원리가 공(空)을 밝힌 것이고, 현상은 공에서 나타난 것이며, 그 현상은 다시 공으로 사라지는 것이므로, 성스러운 진리마저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부처와 법을 밖으로만 구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를 향해 본래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자성불(自性佛)을 회복하라는 것이다.
우주의 분별없는 자리를 깨쳐 아는 것을 부처의 지견을 얻었다 하고, 우주의 분별 있는 자리를 알아서 천만 경계에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을 부처의 행을 한다고 한다. 따라서 수행 정진하는 이는 모두 분별을 넘어서 둘이 아닌 불이문(不二門)의 이치를 체득해 생활에서 심법과 행동으로까지 나타나도록 정진해야 한다고 했다.
*관(觀)---불교에 있어서 ‘관(觀)’의 의미는 특별하다. 단순히 ‘본다’는 차원을 넘어서 보고, 듣고, 공감하고, 심지어 겉으로 드러난 것을 초월해 본질과 핵심을 꿰뚫어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들고나는 생각을 마음 한자리에 놓고, 무(無)의 상태로 집중해, 산란을 멈추고 평온하게 된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어떤 현상이나 진리를 마음속으로 떠올려 그것을 자세히 주시하되, 관(觀)은 자기 생각을 떨쳐버리고 염(染)이 없는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함을 말한다.
본래 ‘관(觀)’은 중국 고전에서는 황새를 의미하는 관(鸛)과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견(見)이 합쳐진 형성문자라 한다. 그리하여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을 본다는 견(見)의 의미가 아니라 신비의 새라고 할 수 있는 관(鸛)이 들려주는 신령스런 소리까지 듣고 보는 형이상학적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관(觀)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말로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에서의 ‘관(觀)’을 들 수 있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해서 세상 모든 존재가 토해내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소리를 단지 듣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심지어 그 고통을 함께 하며, 해탈에 이르도록 보살펴 준다.
<주역(周易)>에서는 관(觀)할 때는 몸을 씻고도 감히 두려워 제사를 올리지 못하듯, 그렇게 경건하고 엄숙하게 하라고 말하고 있다. 관(觀)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처럼 경건하고 엄숙하게 하라는 것인가. 그것은 생각이 행동을 만들고 행동이 습관을 만들며, 그렇게 만들어진 습관이 인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관(觀)에는 본다는 뜻뿐만 아니라 반복된 생각과 행동으로 만들어진 정신의 습관까지 포함하며, 일관성 있는 생각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역사관(歷史觀)이라든가 인생관(人生觀), 세계관(世界觀) 하는 경우의 ‘관(觀)’이 그것이다. 그리고 어떤 인생관, 어떤 세계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위가 결정되고, 결국엔 그 사람의 인격과 인생이 결정된다.
그런데 불교에서 ‘관(觀)’은 산스크리트어 위빠사나(vipasyna, 毘鉢舍那)의 의역이다. 지관(止觀) 수행에서 지(止) 수행을 통해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마음속에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관을 통찰명상(洞察瞑想)이라 하며, 통찰명상을 하면 자신이 그동안 무엇에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을 부리고 조급해 했는지 알게 된다. 즉 관(觀)은 대상의 변화를 지켜봄으로써 그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이에 의해 얻은 앎은 자신을 지혜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즉, 관(觀)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인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위빠사나란 법(法)을 사유(思惟)하는 것을 말한다. 위빠사나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찰나삼매, 즉 순간적인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얻어야 한다.
삼매(三昧)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의 음사로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가 깊어져서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고자 한 대상에 마음이 일심불난(一心不亂)하게 몰입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삼매,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고, 또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을 한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정(定)이라 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 지(止)는 정(定)에, 관(觀)은 혜(慧)에 해당한다고 한다. 즉, 지는 주체의 확립, 관은 이 주체의 확립에서 모든 현상을 전체적 ‧ 객관적으로 관찰해 정확히 판단하고 자유로이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지관(止觀)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균등하게 담는 수행법으로서, 지(止)는 멈추어 모든 번뇌를 그치는 것이고, 관(觀)은 자신의 본래마음을 관찰하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지(止)와 관(觀) 참조.
*관(觀)과 견(見)---관(觀)의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선 견(見)과 견주어 살펴보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관이나 견, 모두 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가까이 있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을 ‘견(見)’이라 하고, 멀리 있는 것을 큰 눈으로 살피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이와 같이 겉으로 나타난 뜻은 같으나 사용에 따라서 다름이 있다.
견(見)은 형체인 모양을 보고, 관(觀)은 그 속의 마음을 본다. 그래서 관(觀)자는 모양 속에 들어있는 근본을 본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견(見)이 바깥에 중심을 둔다면 관은 내면에 보다 집중하는 것이다.
관의 눈이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고, 견의 눈은 육안으로 보는 것이다. 육안으로 상대를 보면 보이는 것에만 마음이 이끌리고 변화에만 현혹돼 뜻하지 않은 함정에 빠지기 쉽다. 항상 마음의 눈으로 전체를 꿰뚫어보고 상대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마음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일상의 경험에서도 사물을 보는 시각과 안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을 본다. 눈이 트이지 않고 식견(識見)이 막혀 있으면, 그는 흡사 죽통(竹筒) 속으로 하늘을 보는 것과 같다. 다른 발상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기보다 더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이용하는 법을 모른다. 이게 어디 세속의 일만이겠는가. 초세간(超世間)을 지향하는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삶을 살고 싶다면 이제까지 사물을 보던 방식을 확 바꾸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안목’이다. 사물과 안목은 둘이 아니다. 사물은 우리의 안목에 종속된다. 삼계유심(三界唯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지 않던가. 이는 사물은 없고 안목만이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쉽게 ‘사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기실 물건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눈앞에 드러난 것들을 판단하고, 그것들을 연관시키는 방식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러니 <금강경>에서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했다.
사물을 판단하고 연관시키는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사물은 각자에게 서로 달리 나타난다. <법화경>의 비유에, 같은 물이라도 사람에게는 마실 물로 보이고, 물고기에게는 집으로 보이며, 아귀에게는 피고름으로 보인다고 했다.
망상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멈추어 서서(止), 달리 생각하는 법(觀)’을 닦아야 한다. 멈추어 서지 않으면 망상은 해오던 대로 계속 빠른 속도로 삐꺽대며 굴러간다. 수레바퀴의 동력을 멈추기 위해서는 ‘고요한 곳(靜處)을 찾아 틀어 앉아야 한다(坐禪).’ 흐르는 물에서는 얼굴을 비출 수 없고, 더러운 거울은 사용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다르게 보라고, 제발 다르게 보라고 주문한다.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실제,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조건(照見)함으로써 일체의 고액(苦厄)을 뛰어넘으셨다”고 했다. 이는 조견, 즉 보는 행위가 해탈의 관건이며, 실천의 최상승이라는 것을 역력히 일러주고 있다.
• 견(見)---눈으로 보는 것→견학
• 관(觀)---마음으로 보는 것,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것→관찰
• 간(看)---마음을 거치지 않고 손이 먼저 나가는 것→간호사
*관견(管見)---자신의 욕망과 관심이라는 좁은 대롱(竹筒)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편견이다. 때문에 사태의 다른 측면은 물론이고, 전체를 보기는 더욱 아득하다. 즉, 중생들에게 세상은 모두 나(我)의 이미지(相)로만 존재한다. 중생은 자기 욕망과 관심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불교는 이와 같은 세속의 좁은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올라 거기서 세상을 조견(照見)하라는 ‘조감(鳥瞰)’을 권고하는 종교이다. 꿈 깨서 꿈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흔히 “근시안적(近視眼的)이다”라든지,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도 있다. 이것들이 모두 관견과 같은 맥락의 말들이다.
※조감(鳥瞰)---새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서 굽어보는 것.
*관견(觀見)과 관지(觀知)---<관무량수경>은 극락정토의 장엄함과 그곳에 주재하시는 무량수불(아미타불), 그리고 그 좌우에 보좌하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생각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관견(觀見)이란 여기서 이러한 극락정토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을 말하고, 관지(觀知)란 여기서 무량수불에 귀의해 구원을 받는 타력신앙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정토사상에서 강조하는 것으로, 관견이란 극락정토의 아름답고도 불가사의한 장엄을 마음속에 그려 보는 것을 말하며, 관지란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하는 절대 신심을 말한다.
*관기음성(觀其音聲)---<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나오는 말이다. 깊은 선정에서 나오는 지혜로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관(觀)’은 시각(視覺)으로 보는 영역을 넘어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음성을 본다[관기음성(觀其音聲)]는 것도 소리를 청각을 통해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소리를 낸 동기와 나아가서 그 사람의 온갖 정신 상태까지도 이해한다는 말이다.
*관(觀)·련(練)·훈(熏)·수(修)---천태대사(天台大師) 지의(智顗, 538~597)가 출세간 선법을 네 부류로 나눈 것을 말한다. 출세간 선법들을 관찰하고[觀], 단련하고[練], 몸에 배게 해[熏], 마침내 자재로움을 얻게 되는[修] 순서로 소개한 것이다. 불교의 초기 선법을 행함에 있어 지의가 몸소 체험한 것을 대중들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수련과정이다.
*관륵(灌勒)---백제 승려. 백제 무왕 3년(602)에 천문 ․ 지리 ․ 역서(曆書) ․ 둔갑술(遁甲術) ․ 방술(方術) ․ 의학 분야 등 책을 일본에 전했으며, 삼론종(三論宗)을 강하고, 일본 최초 승정이 돼, 일본 불교계를 이끌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십육관경(十六觀經)>, <관경(觀經)>이라고도 한다. 유송(劉宋)시대인 AD 424년에 서역 출신 역경승 강량야사(畺良耶舍, 산스크리트어 kālayaśas/칼라야사, 383∼442)가 한역한 것이 전하고 있으며, <아미타경>, <무량수경>과 함께 정토삼부경의 하나로서 우리나라 정토신앙 중심경전으로 유통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 본이나 티베트 본은 산실되고 한역본만 남아있다.
부처님 생존 당시 인도 마가다국 아사세(阿闍世) 태자가 부왕인 빈비사라(頻毘娑羅, 산스크리트어 Bimbisara)왕을 가두어 왕위를 찬탈했으므로 모후인 위제희(韋提希) 왕후가 몰래 왕에게 음식을 가져다줘 목숨을 연명하게 했다. 그것을 알아챈 아사세 태자가 모후인 위제희 왕후마저 옥에 가뒀다. 이에 왕후는 부처님이 계신 곳을 향해 지성으로 예배하고 자기를 교화해 주기를 빌었다. 이에 부처님은 극락세계를 보여주시고 16관법을 일러줘 왕비와 시녀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했다. 왕비는 16관법 등 법문을 듣고 생사를 초월한 무생인(無生忍) 경지 -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500명 시녀들도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상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관무량수경의 주요내용이다.
<관무량수경> 중심내용은 16관법이다. 16관법이란 지는 해를 보고 극락세계를 관하는 일상관(日想觀), 극락세계의 대지가 수면이나 얼음처럼 평탄함을 관하는 수상관(水想觀) 등 16가지 관법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정토신앙이 성행하면서 널리 행해졌던 관법이다.
※무생인(無生忍)---무생법인(無生法忍)의 준말이다. 무생법인은 말 그대로 무생의 이치, 모든 존재가 다 본래 생한 바가 없다는 진리, 즉 ‘남[生]이 없는 진리’, 따라서 ‘불멸의 진리’를 이르는 말로서 모든 사물에 불성이 있으며, 일체의 것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진리를 확실히 알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즉, 무생법인이란 불생불멸이라는 실상법(實相法)을 잘 알고, 그 진리에 머물러 흔들리지 않는 지혜를 말한다.---→무생법인 참조.
※유송(劉宋)---양자강 이북을 5호16국에 잃어버리고, 서진(西晉) 황실의 계승을 천명한 동진(東晉)은 서진의 영토를 되찾으려 여러 차례 노력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따라서 세력권은 주로 장강 이남으로 한정됐다. 동진을 계승한 국가들이 이어진 왕조를 남조라고 하며, 송(宋)=유송(劉宋), 제(齊)=남제(南齊), 양(梁), 진(陳)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수(隋)나라에게 멸망당했다.
*관문(觀門)---마음으로 보는 것을 ‘관(觀)’이라 하니 관문이란 마음의 문이란 말이다. ‘문(門)’이라고 비유하는 까닭은 관하는 것은 법문(法門)에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나 부처, 정토 등을 관하는 것은 법문(法門)에 들어가는 것과 같으므로 관문이라 한다. 그리고 관문이란 관법(觀法)과 같은 말로서 법을 관찰한다는 말이다. 마음의 본성이나 진리를 자세히 주시하는 관법수행,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주시하는 수행법을 일컬음이다.
또한 관문이란 천태종에서 말하는 육통묘문(六通妙門=6묘문/妙門)의 하나이기도 하다. 즉, 천태종에서 세운 6종 선관(禪觀)인 6묘문(妙門)의 하나란 말인데, 천태사상체계는 이론체계인 교문(敎門)과 실천체계인 관문(觀門)으로 구성돼 있다. 교문과 관문을 하나로 하면서 완벽한 조화와 하모니를 이루어 거대한 대승사상의 오케스트라를 만든 사람이 천태대사 지의(智顗)이다.---→육통묘문(六通妙門=6묘문/妙門) 참조.
*관문상(慣聞想)---누구나 다 아는 쉬운 것이라고 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 그것쯤이야 다 아는 것인데 - 하듯이 함부로 용이심(容易心)을 내는 것을 말한다.---→반대말 ; 현애상(縣崖想) 참조.
*관문상(慣聞相)---수행자가 걸리기 쉬운 병폐의 한 가지. 법문의 뜻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 번 들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법문의 뜻을 잘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 법문이란 똑 같은 것을 여러 번 들어도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항상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여러 번 들었다고 스스로 아는 체하고 보면 법문의 참 뜻을 알기 어렵고, 아만심이 커지게 된다. 수행자는 관문상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관법(觀法)---관조(觀照)하는 정신수행방법이다. 지혜로써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주시하는 수행, 마음으로 마음의 본성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 어떤 현상이나 진리를 마음속으로 떠올려 그것을 자세히 살피는 수행이다. 이 관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크게 분류하면 진리(法)를 관조하는 관법(觀法)과 마음을 관조하는 관심(觀心)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천태종에서 말하는 십승관법(十乘觀法), <관무량수경> 16관법(觀法) 등이 있다.---→관상(觀想), 십승관법(十乘觀法), 십육관법(十六觀法) 참조.
*관법무아(觀法無我)---법념처(法念處)수행을 말함.---→‘사념처(四念處) 수행’ 참조.
*관불(灌佛)---청정한 감로수로 아기부처님의 몸을 씻는 의식이다. 즉, 불상을 물로 깨끗이 씻는 의식으로 부처님 오신 날 주요의식의 하나이다. 관욕(灌浴), 욕불(浴佛)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보요경(普曜經)>에 부처님이 탄생할 때 9마리 용(龍)이 갓 태어난 아이를 향수로 목욕시켰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부처님 형상을 깨끗이 씻으면 자신의 마음에 쌓인 죄와 번뇌를 씻고 맑고 깨끗해지며 복을 누리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고대 인도에서 관정(灌頂)이라 해 국왕이 왕위에 오를 때 4대해의 바닷물을 그 정수리에 뿌려 축하한 의식에서 유래돼 후에 수계자나 일정한 지위에 오르는 수도자의 정수리에 향수를 끼얹는 의식으로 변형 됐다.
*관불삼매(觀佛三昧)---일심으로 부처님을 생각해 부처님이 현전(現前)하는 경지를 관불삼매라 한다. 즉, 부처님을 마음에 떠올리고 삼매에 들어가면, 부처님이 수행자 앞에 현전(現前)하는 것이다. 당시에 불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수행법이 불탑 앞에서 행해진 것으로, 불탑예배와 관련해 발생한 것으로 생각된다.
관불삼매(觀佛三昧)와 염불삼매는 서로 다른 것으로, 이름도 다르고 마음도 다르다. 잘 모르고서, 이를 분별하지 못해 잘못 알아서는 안 된다. 삼매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통해 삼매의 경지에 이르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의 삼매가 있다. 그 중 불타의 모습이나 위대성을 관상(觀想)함으로써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관불삼매라 한다.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산스크리트어 buddha-dhyaha-samadhisagara-sutra)---<관불경>이라고도 한다. 동진(東晋)시대에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覺賢, 359-429)가 한역한 것으로서, 산스크리트어본이나 티베트어 역은 현존하지 않는다. <관불삼매해경>의 성립장소에 관해서는, 이 경에서 설하는 부처님 상호와 간다라 불상 모양이 일치되는 점, 이 경에서 설하는 전설이 간다라 유물의 그림과 합치하는 점 등으로 보아 간다라지방이나 그 부근에서 대략 2~3세기경에 조성됐을 것으로 본다.
*관상(觀想)---‘관(觀)’이란 생각을 쉬고 마음을 모아 일정한 경계를 응시하는 것이고, 관상이란 ‘마음의 상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뚜렷이 그리는 심상화(心想化-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것)나 상상을 의미한다. 그렇게 지속적인 의도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면, 그 결과 대상사물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관상이란 내적 관조(觀照)를 통해 진리를 직관적(直觀的)으로 인식하는 행위를 말한다.---→관법(觀法) 참조.
*관상염불(觀像念佛)---정토종 4종 염불의 하나. 관상염불에는 생각하는 관상염불(觀想念佛)과 보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이 있다. 관상염불(觀像念佛)은 염불하면서 부처님의 상호를 관함을 말한다. 즉, 단정히 앉아 순일한 마음으로 부처님 상호를 관하며 염불하는 것. 즉, 32상(三十二相) 80종호(八十種好)라는 원만 덕상을 갖춘 부처님 성상(聖像)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삼매에 들면 분명히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관상염불은 일심(一心)으로 한 부처님의 성상을 관하고 생각하는 것인데, 한 부처님을 보게 되면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다고 하며, 이렇게 닦으면 죄장(罪障)이 소멸돼 불토에 왕생한다고 한다. 즉, 이 염불을 닦은 수행자는 죽은 뒤에 그 부처님 정토에 왕생한다고 한다.
※정토종 4종 염불---칭명(稱名)염불, 관상(觀像)염불, 실상(實相)염불, 관상(觀想)염불의 네 가지 염불법을 말한다.
*관상염불(觀想念佛)---정토종 4종 염불 - 칭명(稱名)염불, 관상(觀像)염불, 실상(實相)염불, 관상(觀想)염불의 하나이다. 염불하면서 극락세계를 관함을 말한다. 정토종에서 염불은 아미타불에 생각을 응집시켜, 그 광대한 대비원력에 의해서 극락에 왕생하고자 하는 행이다. 이러한 염불 행에는 아미타불의 법신(法身)을 염하는 실상염불(實相念佛)과 아미타불의 상호를 관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과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다. 관상염불(觀像念佛)과 관상염불(觀想念佛)은 발음은 같으나 앞의 것은 부처님 상(像)을 관찰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부처님 공덕을 상상하는 것이다.
즉, 관상염불(觀想念佛)이란 부처님의 공덕을 마음속으로 살피고 생각하는 것인데, 고요한 곳에서 정신을 통일해 부처님 자비공덕(慈悲功德)이나 훤히 빛나는 지혜광명(智慧光明) 등 부처님 공덕을 상상하는 염불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공덕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부처님 이름만 외우는 것만이 염불은 아니다. 염불소리를 아니 내더라도 부처님의 모양만 바라보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이 있고, 공덕을 생각하는 관상염불(觀想念佛)이 있어, 그냥 부처님 이름만 부르는 칭명염불보다는 더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관상염불(觀想念佛)의 경우, 일반 대중이 하기는 어렵다. 부처님에겐 무량한 공능(功能)이나 공덕(功德)이 있지만 대중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관상염불(觀相念佛)---칭명염불(稱名念佛)은 공(空)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이치를 따라 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하는 하배(下輩)가 행한다. 이에 비해 관상염불(觀相念佛)의 관법은 반드시 공(空)의 도리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 가능하다. 공관(空觀)이 확립되고 순리발심(順理發心)해야 지관(止觀)으로 보신불의 경계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은 칭명염불로 믿음을 견고히 할 필요가 있다.
관상염불(觀相念佛)은 호흡의 조절과 지관(止觀)의 고요한 자세가 요구되는데, 지관에 의지해 깨달음을 성취하는 법으로서, 생각을 쉬고 마음을 모아 고요한 가운데 최상의 선행(禪行)을 실천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요한 가운데 선을 행하는 정선문(定善門)이다.
관상염불(觀相念佛)은 정토의 모습을 관하는 것으로서 금생에 정토의 경계를 감득함으로써 문득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 관상염불(觀相念佛)의 첫 번째 단계는 일상관(日想觀)이다. 칭명염불 행자도 이 관을 행하면 매우 효과적이다. 관하는 과정에서 염불은 소리를 내거나, 마음속으로 해도 상관없다. 염불은 믿음이 결정되고, 관법이 익숙해지면 어떤 자세에서도 가능하다. 다만 졸음은 도적이다. 두 번째는 수상관(水想觀)이다. 관법은 일상관만 익히면 그 외는 쉽게 이루어진다.
※수상관(水想觀)---정토의 대지(大地)를 관상(觀想)하는 방편으로서 행하는 관법. 먼저 물의 맑은 것을 관하고 차차 생각을 나아가게 해서 유리와 같은 정토의 대지가 넓고 편편해 높고 낮은 데가 없으며, 또 그 광명이 안팎에 두루 비친 모양을 관함에까지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관상염불(觀相念佛)은 보신불의 경계를 깊이 관찰함으로써 관불삼매(觀佛三昧)를 성취하고 법신(法身) 경계를 감득해 ‘일체 경계는 일심(一心)인 지혜’를 증득하도록 인도한다. 이러함 때문에 관상염불을 염불선이라고 말한다.
‘관(觀)’이란 생각을 쉬고 마음을 모아 일정한 경계를 응시하는 것으로, ‘상(相)’이란 정토의 경계이다. 염불은 아미타불 덕상(德相)을 생각(念)하는 것이다. 따라서 관상염불은 정토의 경계를 관하고 아미타불의 덕상을 염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유념유상(有念有相)의 도라고 부른다. 관상(觀相)을 심화함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쉬고 법(法)을 받아들여 관하는 마음과 경계가 일치되면 밝은 거울과 같이 무심한 경계를 거두어들이는 심적 상태를 체험하는데 이것을 관불삼매(觀佛三昧)라고 부른다. 이 관불삼매로써 정토의 경계를 감득(感得)하게 된다.
※정선문(定善門)---정토 수행문에는 정선문(定善門)과 산선문(散善門)이 있는데, 정선문은 생각을 쉬고 마음을 모아 염불하는 것이고, 산선문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산란한 마음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닦으며 염불하는 것이다.
※순리발심(順理發心)---발보리심(發菩提心)에는 수사발심(隨事發心)과 순리발심(順理發心)의 두 가지가 있는데, 수사발심은 번뇌가 무수하지만 모두 끊기를 원하며, 선법(善法)이 무량하지만 모두 닦기를 원하고, 중생이 무변하지만 모두 제도하기를 원한다. 이 세 가지 일을 결정해 기약하고 원하는 것이다. 순리발심은 모든 법이 다 허깨비 같고 꿈과 같아서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므로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진 경계임을 믿고 이해해, 이 믿고 이해하는 데에 의지해 광대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구마라습은 관세음(觀世音), 현장(玄奘) 법사는 관자재(觀自在)라 번역했다. 줄여서 관음(觀音) ‧ 관세음(觀世音) ‧ 관음보살(觀音菩薩)이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타(Avalokita)’는 관(觀)하다는 뜻이고, ‘이스바라(Isvara)’는 자재천(自在天)이란 의미로서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이스바라(산스크리트어 Īśvara)는 힌두교 시바(Śiva) 신의 별칭이다. 시바 신이 불교에 받아들여져서 자재천(自在天, Mahesvara)이 됐다. 따라서 이스바라 역시 자재천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장(玄奘) 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관자재보살이 바로 자재천을 말한다고 했다.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라 불리는 관자재는 자재천을 말하는데, 자재천은 산스크리트어로 이스바라(Isvara)라 하고 시바(siva)와 같은 뜻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의 시바신앙이 불교에 전이 돼 관세음보살이 되고 천수다라니가 만들어 졌다고 본다.
그리고 관세음은 ‘세간의 소리’를 관한다, 즉 이타행(利他行)에 비중을 둔 뜻이고, 관자재라 함은 지혜로 관한다, 즉 자리(自利) 수행에 비중을 둔 뜻이다. 따라서 관자재(觀自在)라고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편이지만 큰 차이가 없으므로 문제될 것은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관세음보살로 일반화돼 있다.
인도에서 관세음보살 신앙이 형성된 시기는 AD 1세기말 무렵이며, 먼저 인도 북부지방에서 성행했고, 6세기경에는 모든 불교사원에서 관음상을 모실 정도로 널리 퍼졌다. 중국에 전해진 것은 2세경으로 인도에서 서역을 거쳐 비교적 일찍 전해졌다.
관세음보살 형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버드나무가지 또는 연꽃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형상 또한 부드럽고 자비로운 여상(女相)이다. 천변만화하는 형태를 띠는데, 이것을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나타나는 형태에 따라 천수관음(千手觀音), 십일면관음, 여의륜광음(如意輪觀音), 준제관음(准提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혹은 32면관음의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천수관음은 천개의 눈을 가졌다는 인드라 신이나 비슈누, 시바와 같은 힌두교 신의 특성을 불교적으로 변용한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부처님 입멸 이후 미륵이 출현할 때까지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지켜주는 대자대비를 근본 서원(誓願)으로 하는 보살이며, 현세에 이익을 주는 보살로 알려져 신도들에게 영향력이 대단히 크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피할 수 있는 곤경은 화란(火難), 수난(水難), 풍난(風難), 검난(劍難), 귀난(鬼難-귀신난), 옥난(獄難), 도난(盜難)의 일곱 가지이다. 이것을 7난이라 한다.
화엄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은 인도 남쪽에 있는 보타락가산(普陀洛迦山)에 머문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보타락가산이란 이름의 산이 있다. 관세음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전각을 원통전(圓通殿) 또는 관음전(觀音殿)이라 하는데, 그 절의 중심 전각일 경우에는 원통전이라 하고, 부속 전각일 경우 관음전이라 한다.
관음에는 6관음, 7관음, 32관음, 33관음이 있는데, 이 중 일반적으로 관음이라 하는 것은 6관음 중 성관음(聖觀音)을 가리킨다.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에 나오는 관음은 성관음을 뜻한다.
*관세음보살 보문품---<법화경> 7권 본 28품 가운데 제25품인데, <관음경(觀音經)>이라고도 한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중생의 온갖 재난을 잘 구원하고 소원을 이루게 하며, 널리 교화하는 일을 설파한 글로서 우주 어느 곳에서든 기도해 구하면 어느 곳에서든 감응하고 고(苦)의 바다에서 항상 사람을 건너는 배가 돼주시고, 30응신으로 시현(示現-나타남)하시여 유정들로 하여금 불도를 이루게 하고, 법계에 두루 미치는 문을 열어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까닭에 ‘보문품(普門品)’이라 한다고 했다.
또한 “만약 갖가지 고통을 받고 있는 무량 백 천 만억의 중생이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은 곧 바로 그들의 음성을 혜안으로 보고 모두 갖가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했다.
이 구절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염원을 단적으로 표출시킨 말이며, 관세음보살은 현실세계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인간의 음성을 마음으로 듣고 있는 절대 전능자이며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과 소원을 쫓아 몸을 나타내는 보살이다.
“중생이 갖가지 공포와 고뇌로 근심하고 슬프고 외롭고 궁핍해도 구호를 받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 만약 나를 염하고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나는 어느 곳에서라도 천 개의 눈으로 보고 천 개의 손으로 그들의 고뇌를 구제할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그 고뇌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영원히 성불하지 않겠다.”
이와 같은 서원을 세운 관세음보살이기에 불교의 깊은 교리를 알고 모름에 관계없이 고난에 처해있는 그 어떤 중생이라도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어려움을 피할 수 있고 복을 받을 수 있으며 중생의 원함에 따라 몸을 나타내주는 자비로운 보살이 관세음보살이다.
<법화경>보문품에서는 관세음보살로부터 구제 받을 수 있는 일곱 가지 재난과 삼독을 말하고 있다.
첫째 입으로 관세음보살을 지성껏 부르면,
1.불로 인한 재난
2.물로 인한 재난
3.바람에 의한 재난
4.각종 무기로 인한 재난
5.귀신에 의한 재난
6.감옥에 가는 재난
7.원수나 도적에 의한 재난
위 일곱 가지 재난을 면하게 된다고 했다.
둘째 마음으로 관세음보살님을 생각할 때는 탐ㆍ진ㆍ치의 삼독이 녹아내려 청량을 얻고 기쁨을 누리고 지혜를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셋째 몸으로 예배하고 공양하면 훌륭한 자녀를 얻게 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관세음보살의 한량없는 자비와 공덕은 세간의 낙을 추구하는 사람의 소원까지도 저버리지 않는다고 했다.
38가지 세상 낙에 어떠한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관세음보살은 그들의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고 했다. 고통과 재난으로부터 우리를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실천하는 관세음보살은 우리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음식도 돈도 희생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잡됨이 조금도 없는 순수한 사모의 마음으로 현재 우리가 처한 어려움과 어둠의 길을 열고자 하는 간절한 생각만을 바랄뿐이다.
왜냐하면 간절히 구하는 한마음이라야 관세음보살과 우리가 하나로 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고픈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찾듯이 병자가 훌륭한 의사를 찾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애타는 믿음을 일으켜 관세음보살께 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굳어있어서는 안 되고 마음을 곧고 부드럽게 해 오로지 일심으로 귀의해 받들다가 보면 저절로 관세음보살과 하나가 돼 관세음보살과 함께 말하고 함께 행동하고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북방 불교권에서 많이 신앙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은 우리인간 속세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소한 문제들까지 일일이 듣고 자비로서 해결해 주신다. 자녀들 진학문제, 남편 승진 문제, 자녀 건강, 가족 건강, 자손 생산, 재물 성취 등 현실 소원들을 관음예불과 기도로서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관심(觀心)---관심이란 참선과 같은 수행으로서 자기 마음을 관조(觀照)해 그 본성을 밝히는 것이다. 마음이 모든 것의 중심이기 때문에 마음을 관조하면 일체를 관조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을 포함한 일체사물에 대한 올바른 정찰(正察)은 해탈에 이르는 방도로서 중요시돼 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본다는 것은,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본질적인 수행의 의의를 지닌다. 수행이란 흐트러진 마음, 즉 방심(放心=散心)을 챙겨서 관심(觀心)을 하는 것이다. 우주 사이의 모든 사(事)와 물(物)이 항상 변화하고 그 자체로서 고유한 것이 아니므로 진실한 자태로 있는 원래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형상에 집착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마음의 본성을 관찰하는 일이다. 따라서 인간이 그 본성을 깨달았다고 하면, 모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됨을 의미한다. 선가 스님들이 좌선을 통해 마음의 본성을 찾기 위해 용맹 정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관심간정(觀心看淨)---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 선사 계통의 북종선 선법으로, 마음을 관하여 청정한 자리를 봄을 말한다. 즉, 마음이 깨끗하다고 관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하려면 좌선섭심(坐禪攝心)을 해야 한다. 섭심(攝心)은 마음을 모으는 것이다. 즉 망념을 다스려 고요히 머무는 수행이다.
신수(神秀)의 관심법문의 사상적 근거로는 대승불교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들 수 있는데, 자성청정심은 4조 도신(道信)의 “수일불이(守一不移)”한 본래심이며, 5조 홍인(弘忍)의 “수본진심(守本眞心)”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성청정심은 마치 구름에 가린 태양과 같으므로 본래의 청정심을 관해 밖으로 들어내는 작업이 관심수행의 요체이다.
묻기를, 만약에 어떤 사람이 불도를 구함에 마땅히 어떤 수행법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 되는가라고 하면, 그 답은, 오직 관심의 한 법이 일체법을 포괄하니 불법수행의 최고 덕목이다. 그리하여 신수는 일체 모든 법을 포괄하고 있는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선수행의 요체임을 주장하고 있다.
“지ㆍ수ㆍ화ㆍ풍 사대가 모여 몸을 이루고, 만법을 세우는 것은 마음이 주체가 된다. 몸은 허망해서 곧 몸을 공함을 보니 비로소 묘용을 나타내고, 마음은 실체가 없어 마음이 환(幻)인 줄 관하면 바로 진여와 같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관심론>에서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다.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의 소생이다. 만약 능히 마음을 요달하면 만행을 모두 갖추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을 닦아 해탈하는 것이나 삼계에 윤회함도 모두 이 마음에 의지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음은 출세의 문이 되며, 마음은 해탈의 나루터이다”라고 했다.---→간심간정(看心看淨) 참조.
*관심론(觀心論)---마음을 관함에 대한 이론인데 관심론에는,
① 수(隋)나라시대의 천태대사 지의(智顗)가 지은 <관심론>.
② 당(唐)나라시대의 신수(神秀)가 지은 <관심론>이 있으나
③ 달마 관심론(達磨觀心論)이 가장 유명하다.
2조 혜가(慧可)가 달마대사께 불도를 구하려면 어떤 법을 닦아야 가장 요긴한가라고 묻자, 이에 달마대사는 관심법이 가장 요긴하다고 답했다. 마음을 관하는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하기 때문이다. 관심법이란 자기 마음을 언제든지 잊지 않고 들여다보고 비춰 보는 방법으로서, 이 법 말고 다른 법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열반경(涅槃經)>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佛性)이 있으나 무명(無明)에 덮인 까닭으로 해탈할 수 없다' 하시니, 불성(佛性)이라는 것은 깨달음이다. 다만 능히 스스로 깨달아서 깨달은 지혜가 명료(明了)하게 그 덮인 바를 여의면 이름 하여 해탈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알라 일체 모든 선이 깨달음으로써 근본을 삼으니, 그 깨달음의 근본으로 인해서 마침내 능히 모든 공덕의 나무를 나타나게 하며 열반의 열매가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나니 이와 같이 마음을 관하는 것을 이름 하여 깨닫는 다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관심무상(觀心無常)---심념처(心念處)수행을 말함.---→‘사념처(四念處) 수행’ 참조.
*관심문(觀心門)---불교의 교리와 사상을 연구하는 이론적 방면을 교문(敎門) 또는 교상문(敎相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 실천 수행을 중시하는 방면을 관심문이라고 한다.
*관심석(觀心釋)---천태대사 지의(智顗, 538~597)가 <법화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네 가지 입장에서 해석을 했다. 이것을 사종석(四種釋) 혹은 천태 4대석례(大釋例)라고 하는데, 그 하나가 관심석이다. 관심석이란 <법화경>의 각 구절에 대해 마음으로 관하는 수행의 측면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즉, 경문의 뜻을 직접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보는 수행의 관점에서 거듭 해석한다. 낱낱의 경문을 자기 마음에 비추고, 그 마음을 관함에서 해석한다. 일반적으로는 불법의 사상과 실천정신에 의거해 독자적인 해석을 펼치는 법문이 관심석이다. 선승들이 많이 하는 실천 해석이다.---→사종석(四種釋)
*관심선(觀心禪)--마음을 관하는 선으로, 달마(達磨) 대사가 중국에 전한 선(禪)이 순수한 인도의 관심선(觀心禪)이었다. ‘마음의 문제를 잘 관찰하는 것, 이것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하고 있다’, 이런 기치 아래 선불교를 주창한 것이 관심선(觀心禪)이다. 관심선이 초기 선불교이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간화선도 생기고, 염불선도 생기고, 관조선도 생겼다.---→‘선법(禪法)의 종류’ 참조.
*관심일법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보리 달마(菩提達磨)가 한 말이다.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 달마 대사가 중국으로 와서 대혁명을 일으켰다. 경(經), 염불 등을 다 부인하고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마음을 지키는 한 가지 공부에 모든 법(法)이 들어있으니, 곧 바로 진심(眞心)을 관(觀)해 성품을 보고 깨달아 부처가 되라.”고 했다.
그리고 “마음은 모든 것이 자라나는 뿌리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것은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그 나무의 모든 열매와 꽃들, 모든 가지와 잎들이 뿌리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그 뿌리를 자른다면 그 나무는 죽는다.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수행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모든 선과 악이 그대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 너머에서 무엇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법정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상은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사물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고 나의 내면의 흐름을, 내 생각의 실상을 조용히 지켜보는 일이다.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보리 달마는 “관심일법(觀心一法)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는 말을 했다. ‘마음 하나 살펴보는 이 한 가지 일이 이 세상 모든 현상을 다 거두어들인다.’는 말이다. 지식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지혜는 명상으로부터 온다. 지식은 밖에서 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움튼다.”
*관음경(觀音經)---<법화경(法華經)> 제25「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따로 떼 내어 독립된 경으로 만든 것이다. 송나라시대 성리학학자들은 애초에 예기(禮記)를 구성하는 편명(編名) 중 하나에 불과하던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각각 분리시켜 전혀 별개의 경전처럼 독립케 한 소이와 같다 하겠다,
<관음경>은 본문과 5언 4구체인 게송 26수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이 경은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이 부처님께 관세음보살은 도대체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觀世音)이라 일컫게 됐는지, 그 명호의 유래를 묻는 질문으로 시작해 그에 대한 부처님 답변 형식으로 관음보살이 지닌 여러 위력을 설파하는 식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5호16국의 하나인 북량(北涼)의 지배자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인도 출신 역경승 담무참(曇無讖, 358~433)이 <법화경> 보문품을 외우라고 권했고, 이 경을 읽고 건강을 회복한 저거몽손이 보문품을 따로 떼 내어 널리 유통시키면서 <관음경>이라 이름 했다. 그리고 <반야심경>이 <대반야경>의 진수이듯이 <관음경>은 <법화경>의 진수이다. 아래 경문은 ‘관세음보살보문품’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문장이다.
『선남자여 만약 한량없는 백천만억의 중생이 있어 온갖 고뇌를 받는다 해도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듣고 그 이름을 일심으로 부르면 보살이 즉시 그 음성을 듣고 해탈케 하며,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니는 이는 설사 불 속에 들어가더라도 보살의 위신력으로 불이 그 사람을 태우지 못하게 하며, 만약 큰물에 떠내려가더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곧 얕은 곳에 닿게 하느니라.
그리고 보배를 구하려고 큰 바다에 들어갔다가 태풍에 밀려 나찰(那刹)에게 잡혀갔을 때도 그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보살의 이름을 염하는 이가 있으면 모두가 난을 벗어나며, 어떤 사람이 피해를 당할 때에 보살을 부르면 그들이 가진 칼과 몽둥이가 부서지고 죄가 있거나 없거나 고랑을 채우거나 쇠줄로 결박했을 때는 그것이 모두 부서지며, 상인들이 원적을 만났을 때도 보살을 염하면 원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중생들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그 소리를 듣고 찾아가서 구제한다는 것이다. 이는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관음칭명(觀音稱名)만으로 일곱 가지 난(七難)을 면할 수 있다는 것으로 칠난(七難)이란 화난(火難)ㆍ수난(水難)ㆍ풍난(風難)ㆍ왕난(王難)ㆍ귀난(鬼難)ㆍ가쇄난(枷鎖難)ㆍ원적난(怨賊難) 등의 일곱 가지를 말한다.
여기서 화난과 수난, 풍난은 불과 물 또는 바람 등에 의해서 일어나는 외부적인 난 외에 자신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와 악업(惡業)을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왕난(王難)은 권력에 의해 당하는 난을 말하고, 귀난(鬼難)은 각종 병에 걸리는 것을 말하며, 가쇄난(枷鎖難)은 목에 형틀을 두르고 사슬을 차는 등으로 구속되고 감옥에 갇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원적난(怨賊難)은 원수와 도둑으로부터 당하는 수난을 말하는 것으로 어떠한 외부적인 어려움이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막론하고 관세음보살의 힘에 의지하면 모든 재난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요지이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자는 다시 한 걸음 더 들어가 아집과 분별망집(分別妄執)을 부정하는 철저한 수행(修行)에 힘써야 할 것이다. 분별망집이 공(空)한 본래 청정한 마음에는 나와 남, 안과 밖, 부처와 중생 등 일체의 차별이 없다. 내 마음이 곧 관세음이고, 관세음이 곧 내 마음이다. 따라서 밖에서 비치던 관세음보살이 내 마음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해입상응(解入相應)이라 한다. 밖에서 들어온 관세음보살(入)과 중생 본래의 마음(解)이 서로 하나가 된다(相應)는 뜻이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자는 마침내는 바로 그 관세음보살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본래 청정한 마음의 관세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부름에 능히 응하는 응신(應身)으로서의 관세음보살이 돼야 한다. 이와 같이 관음신앙의 특징은 현실적으로 우리 중생을 고통에서 구하고 어려움에서 구해주는 구고구난(救苦救難)의 영험기록과 신앙체험의 사실에 있다.
관세음보살의 불가사의한 위신력은 실로 깊고 오묘하므로 절대적인 관음신앙 속에서는 기적과 같은 영험이 곧장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불교에 수많은 영험담이 전해지지만 관음신앙에 결부 된 것이 아주 다양하고 풍부하다. 그리고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이지만 <법화경>에서는 석가모니불의 중생구제를 돕기 위해 이 사바세계의 보타낙가산(普陀洛迦山)을 주처로 정하고 이 사바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관음선종(觀音禪宗)---미국에 전한 한국불교의 일종이다. 숭산(崇山, 1927~2004) 선사는 미국에 불교를 선교함에 있어서, 한국불교 전통을 살리면서 서양인들에게 맞는 한국불교를 새로이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조계종 소속이면서 미국에 선교했던 숭산 선사가 설립한 관음선종이다. 관음선종의 특징은 미국적 환경에 맞추어 재가불자도 승복을 입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조계종 계율이 금욕을 요하지만 관음선종에서는 기혼, 미혼의 재가자에게 다 스님의 계를 내려주고 선사가 될 수 있도록 했다.---→숭산(崇山) 참조.
*관음스쿨(Kwan Um School of Zen)---통칭 ‘숭산스쿨’이라고도 한다. 해외 전법에 진력한 숭산 행원(崇山行願, 1927~2004) 스님에 의해 보급된 해외 선 수행 도량을 말한다.
숭산 스님은 미국에서 아이비리그의 젊은 대학생들에게 공동체생활을 하게 했다고 한다. 집을 하나 얻어서 공동으로 생활하게 한 것이다. 함께 자고 먹고 함께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공동체수행방식이 ‘숭산스쿨’이라는 이름으로 퍼져서 전세계에 수도 없이 많이 세워졌다. 정식명칭은 ‘관음스쿨(Kwan Um School of Zen)’이다.
숭산 스님이 입적했지만 상좌, 또는 손상좌들에 의한 관음스쿨을 통해 외국인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 수행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는데 마치 자가분열을 하는 것처럼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관음스쿨 홈페이지를 보면 수도 없이 많음을 알 수 있다.---→숭산(崇山) 참조.
*관음성지(觀音聖地)---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고 하는 근본도량을 일컫는 말로서,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주로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해수관음성지(海水觀音聖地)라고도 하는데, 인도에서는 남쪽 해안의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 관세음보살의 상주처로서 이에 관음성지란 말이 생겼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도 대표적인 관음도량은 대부분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고 기도도량에 얽힌 설화와 영험 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여러 설이 있기는 하나 대체로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를 아래와 같이 꼽는다.
①낙산사 홍련암(紅蓮庵)---낙산사와 홍련암이 창건된 때는 신라 문무왕 11년(671)으로 창건주는 신라 화엄종의 초조인 의상(義湘) 대사이다. 낙산사(洛山寺) 관음보살이 바다에서 붉은 연꽃을 타고 솟아오른 자리 옆에 절을 지어 홍련암(紅蓮庵)이라 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대표적인 관음성지로서 이에 얽힌 갖가지 설화가 전하고 있다.
②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4년(635) 화정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보문사의 절 이름은 ‘차별 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덕화가 미치는 문(普門)’이란 뜻으로 불보살이 갖가지 인연으로 여러 모습으로 나투어 중생을 구제한다(普門示現)는 절 이름을 갖고 있다. 보문사 뒤편 낙가산 자락에 똑 바로 튀어나온 암벽은 눈썹처럼 튀어나와 일명 ‘눈썹바위’라고 부른다. 바위 밑 수직암벽에 마애불좌상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모습이 뛰어나다.
③남해 금산(金山) 보리암(普提庵)---보리암이 창건된 것은 신라 문무왕 3년(683)이다. 온 산이 마치 방광(放光)하듯 빛나는 모습에 이끌려 이곳을 찾아온 원효(元曉) 대사가 절을 지었다고 한다. 보리암의 해수관음상 앞으로 상주면과 남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광경이 일품이다.
④여수 돌산도 금오산(金鰲山) 향일암(向日庵)---향일암은 신라 선덕여왕 13년 (644) 원효(元曉) 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향일암은 마치 거북이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으로 들어가는 형상의 금오산(金鰲山)이 바다와 맞닿은 가파른 언덕에 호젓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향일암의 아침 해돋이가 장관이다.
이러한 관음신앙(觀音信仰)은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신앙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하는 타력(他力)적인 불교신앙의 한 형태이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관음신앙은 고구려와 백제 및 신라에서 각각 신앙됐던 흔적이 있고, 관음신앙의 영험 설화가 <삼국유사>에 담겨 전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신앙이 매우 성했던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배불숭유(排佛崇儒)의 사상이 강했던 조선시대에도 여전히 관음신앙은 이어왔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관음신앙은 불교계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관음현의(觀音玄義)---천태 지의(天台智顗, 538~597) 대사가 지은 저서 명. 천태 지의 대사가 <법화경>을 해석한 <관음현의(觀音玄義)>를 보면, 지옥이 부처님의 십법계를 갖추고 있는 경전 근거와 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면, <열반경>의 "무릇 마음이 있다면 응당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을 수 있다"는 경문을 가지고 지옥에도 부처님의 성품이 있음을 설명하고, <유마경>의 "일체의 모든 중생에게는 보리(菩提)의 모습이 있다`는 경문으로 지옥에 부처님의 모습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에는 신(神)에 의한 최후의 심판에 즈음해 지옥에 갈 자로 판정된 자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진다는 ‘영구책임론’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러한 이론은 없다. 바로 악인에게도 부처님이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극악자도 본성에는 선을 함유하며 그것에 의해 언젠가는 부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법화경> 제바달다품 제12에서는 부처님을 살해하려고 했고, 부처님의 법을 비방한 제바달다에게 천왕여래의 수기를 줌으로써 악인성불을 보증하셨다.
한편 부처는 선한 성질(性善)을 가지며 선한 행위(修善)를 이룩한 자로서 악한 행위(修惡)는 없다. 그러나 악한 성질(性惡)까지도 버렸던 것은 아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처에게도 성(性)으로서 악이 있다. 부처에게 성악(性惡)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극악한 사람이 악을 행해 죄를 범하게 된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고, 마침내는 구제능력도 나온다. 선(善)만으로는 악을 알 수가 없다.
요컨대 지옥부터 보살까지의 모든 중생은 성선이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성불할 가능성이 있고, 부처는 성악이 있으나 거기에 자유자재 하므로 모든 중생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에 대해 <관음현의>는 다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부처는 성악을 끊지 못한다 할지라도 능히 악에 도달한다. 악에 도달하기 때문에 악에 있어서 자재하다. 그러므로 악에 물든 바가 되지 않고, 수악(修惡-후천적 악행)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부처에게는 영원히 악행이 없다. 자재하기 때문에 널리 모든 악의 법문을 방편으로 사용해 중생을 교화제도 한다. 하루 종일 이것을 사용하지만 종일 물들지 않는다.”
부처에게 성(性)으로서 악(性惡)이 있다는 것은 부처가 악에 속박 당한 것이 아니고, 악에 매우 통달해 주체적 자유를 가지고 자유자재하게 악을 제어하고, 그것에 의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부처는 악을 사용할지라도 그것에 물드는 적이 없다. 결국 행위로서의 악(修惡)은 불(佛)에게 없다는 말이다.- 지광
*관자재(觀自在)---관세음(觀世音)과 같은 말. 관자재는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데스바라(Avalokitesvara)를 번역한 말이다. 이 말은 아바로키타(Avalokita)의 관(觀)과 이스바라(isvara)의 자재(自在)를 합한 것이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보는 것에 있어서 자유자재한 분이란 뜻이다. 그리하여 관자재보살은 지혜에 의한 바라밀행을 실천하는 주체가 되는 분이고, 중생의 괴로운 마음을 직관지(直觀智)로 투시하는 보살이다.---→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참조.
*관정(灌頂, 561-632)---→장안 관정(章安灌頂) 참조.
*관정(灌頂)---밀교에서 행하는 일종의 물에 의한 세례의식이다. 밀교에서 여러 수행을 마친 승려가 아사리 지위에 오를 때 행하는 의식이다. 또 아사리가 제자 승려에게 법을 전할 때 행하는 의식을 말하기도 한다. 고대 인도에서 국왕이 즉위할 때 바닷물을 머리에 부어서 축하하는 의식을 관정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불교에서 받아들인 것이다.
관정을 할 때의 물은 대개 동서남북의 물을 섞어서 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시방세계를 잘 다스려라 하는 뜻이 담겨있다.
*관정위(灌頂位, 산스크리트어 Abhi Scana, Abhi Seke)---물을 머리에 붓는다는 뜻인데, 고대 인도에서 임금이 왕위에 오르거나 태자를 세우는 의식을 할 때 머리(정수리)에 바닷물을 붓는 의식을 말한다. 기독교에서 세례를 할 때 이마에 물을 붓는 의식도 일종의 관정위이다. 보살의 십지(十地) 수행 중 제9지에서 제10법운지(法雲地)에 들 때에도 지혜의 물(智水)을 그 정수리에 붓는 의식을 행했다. 이런 때 법왕의 직을 받는다고 해서 수직관정(受職灌頂)이라고 했다. 그래서 수직관정을 받은 보살 10지를 관정지(灌頂地)라고 한다. 관정위는 이 관정지를 말하며, 또한 등각(等覺)을 말하기도 하는, 수행보살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높은 수행위이다
*관조(觀照)---가장 불교적인 용어 중 하나이다. 관조(觀照)는 나를 보다, 찬찬히 들여다 보다, 주관을 섞지 않고 조용한 마음으로 대상의 본질을 바라본다, 본래 마음의 본바탕을 살펴보다 등의 말로서 청정심(淸淨心)이요 평상심(平常心)이요 일심의 부동심(不動心)을 말한다. 본래 뜻은 고요한 마음과 지혜로써 사리(事理)를 관찰하는 것을 말하는데, 대상을 사량분별심(思量分別心)이나 논리적 사변(論理的思辨)에 의하지 않고, 반야지혜로써 사리를 바르게 비추어 보아 밝고 확실하게 깨닫는 것이다. 결국 관조는 정적 ‧ 지적 ‧ 객관적인 직관(直觀)을 뜻한다.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봄을 말한다. 종범 스님은, 작관(作觀) +조견(照見) ⇒ 관조(觀照)라고 하셨다.
*관조반야(觀照般若)---→‘반야(般若)의 종류’ 참조.
*관찰법인(觀察法忍)---관찰법인은 자기에게 부당한 짓을 해 오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하거나 난폭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할 때는, “지금은 그가 그릇된 짓을 하고 있지마는 그도 역시 부처님이 될 본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회가 돌아오면 반드시 지금의 잘못을 고쳐 착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행동만 보고 그를 악한 사람으로 단정해 버려서는 안 된다.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이다. 어떤 악인(惡人)이라도 악(惡)으로만 뭉쳐진 사람은 없다. 지금은 악(惡)한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마음 밑바닥에는 역시 거룩한 불성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이 절대의 큰 힘을 가지고 있다면, 언젠가는 악인(惡人)이라도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해서 그 가르침을 실행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용서해주고 오히려 그를 가르쳐 인도해서 하루속히 부처님 가르침에 눈뜨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을 관찰법인(觀察法忍)이라고 한다. 법(法)이란 자기 이외의 모든 사물 또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자기를 비롯한 모든 사물의 본성을 잘 관찰해 보고 경솔하게 성낸다든가 배척한다든가 하지 않는 것이 관찰법인이다. 안수고인(安授苦忍)은 자기를 생각하는 데서 생기고, 관찰법인은 남을 생각하는 데서 일어나는 마음작용이다. 이 두 가지가 완전히 갖추어지면 그것이 진정한 인(忍)이다. ---→안수고인(安授苦忍) 참조.
*관찰의선(觀察義禪)---<능가경>에 나오는 사종선(四種禪)의 하나. 대승불교의 후기에 등장한 <능가경(楞伽經)>은 선과 교에 다 같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능가경에서는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인 이승(二乘)과 외도들이 행하는 선을 어리석은 범부가 행하는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이라 했다. 그리고 인ㆍ법무아(人ㆍ法無我)를 관하는 선을 관찰의선(觀察義禪)이라 했고,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진여의 경지에 입각한 선을 반연여선(攀緣如禪)이라 했다. 그리고 여래의 지혜에 들어간 선을 여래선(如來禪)이라 했다. 이는 달마 스님이 처음 중국에 왔을 때 2조 혜가(慧可)에게 <능가경>을 전했다는 근본 뜻을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관찰의선은 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이치를 알고, 그 이치에 따라 대상를 자세히 주시하는 수행이다. 여기서 ‘의(義)’란 법(法 - 사물, 존재)이라는 의미로서, 자기의 몸[人]과 일체의 객관적 존재[法]도 공ㆍ무아라고 관해 인ㆍ법 이무아(人ㆍ法二無我)를 깨닫는 선을 말한다.---→사종선(四種禪) 참조.
*관행(觀行)①---관(觀)은 마음의 눈으로 관찰해 본다는 뜻이므로 이치를 생각하고 안으로 비추어 보는 것이고, 행(行)은 실지로 행동한다는 뜻이다. 마음으로 진리를 비추어 보고 그 진리에 따라 실천함을 말한다.
교학을 공부하는 이는 눈과 입으로만 건성으로 경전을 읽지 말고 마음으로 돌이켜 비추어 보는[회광반조(回光反照)]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에 돌이켜 살피지 않으면 경 보는 일이 아무런 이익도 없다(心不反照 看經無益)”고 한다.
*관행(觀行)②---주객의 모든 것을 법에 따라 관찰해 실상에 이르는 수행법을 말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신ㆍ수ㆍ심ㆍ법(身受心法)의 네 가지를 관찰하는 4념처관(四念處觀)을 비롯해 모든 대상을 무상으로 관하는 무상관(無常觀) 등 다양한 관행이 있다.
*광대심(廣大心)---대승보살의 사종심(四種心)의 하나이다. <금강경>에는 구류중생(九類衆生)을 (섭수해) 제도하겠다고 하는 마음이라 했다. 광대심은 이 모든 중생들을 나와 똑 같다고 생각해서 보호하겠다는 넓은 광대무변한 마음, 곧 모든 중생을 차별 없이 이롭게 하겠다는 무연대비심(無緣大悲心)을 말한다. 광(廣)은 일체 모든 대상 곧 경문에서 말하는 구류중생(九類衆生)에 대한 넓은 섭수심이고, 대(大)는 모든 중생에 대해 차별 없이 대하는 보살심이다. 경문에서 “모든 보살은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 있는 바 일체중생과 중생에 섭수되는 것 내지 있는 바 중생계와 중생계에 섭수되는 바를 낸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사종심(四種心)---<금강경>에 나오는 말인데, 첫째가 광대심(廣大心)으로 모든 중생을 (섭수해) 제도하겠다고 마음이요, 둘째가 제일심(第一心)으로 부처의 세계에 들어 열반락을 즐기겠다는 원력을 내는 마음이다. 세 번째가 상심(常心)으로 고통을 여의고 열반에 이르겠다는 ‘항상한 마음’이고 네 번째가 부전도심(不顚倒心)으로 중생이라는 분별심을 내지 않는 마음이다. ---→사종심(四種心) 참조.
*광도중생(廣度衆生)---중생에게 널리 법을 펼치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이다. <화엄경>에 “광도중생(廣度衆生) 유여교량(猶如橋梁)”이라 했다.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는 것이 마치 강을 건너는 다리와 같다는 말이다. 즉, 중생들을 널리 제도한다는 것은 고통스런 이 세속적인 삶이 전개되는 차안(此岸)에서 모든 고통이 해결된 피안(彼岸)인 저 언덕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다리와 같다는 말이다. 요즘은 비에 떠내려가는 다리가 흔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큰 비가 오면 떠내려가는 다리가 흔했다. 다리가 없으면 건너갈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광도중생이 곧 다리 역할 해서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광등록(廣燈錄)---본명은 <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이다.---→천성광등록(天聖廣燈錄) 참조.
*광명(光明)---광명은 불교를 상징하는 말인데, 불교에서 광명(光明)이란 대체로 네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태양, 달, 별, 등불, 횃불 등과 같이 밖에서 빛나는 물리적 광명인 색광(色光)이다.
둘째는 마광(魔光)이다. 마음을 어지럽히고 불안하게 하는 빛이다. 비록 눈에 보이는 빛은 아니지만 겉으로 풍기는 기운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요염한 여인이 풍기는 기운, 사람을 황홀하게 유인하는 것들 - 돈, 재물, 직위, 권력, 마약, 술, 담배, … 이런 것들이 풍기는 기운이 마광이다. 이런 것과 마주하면 수행에 장애가 되고, 마음에서 일어나면 고통을 낳는다.
셋째는 부처님, 보살, 성문, 연각, 천인 등의 몸에서 비추는 광명인 신광(身光)이다. 부처님 상에 나타나는 후광(後光)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는 지혜의 빛인 법광(法光=心光)인데, 바로 부처님이 지혜로 비추는 법광이다. 법광은 부처님이 본각묘명(本覺妙明)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지혜광명이라 하고, 그 지혜의 작용을 자비광명이라 한다. 부처님의 지혜(智慧)와 자비(慈悲)를 광명(光明)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명(無明)을 밝히고, 불안과 고통을 해소해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청화(淸華) 스님은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바로 광명(光明)이라고 하셨다.
또한 아미타불의 정토는 아미타불이 원행(願行)으로 성취한 것으로, 자비와 은혜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광명의 물결(阿彌陀波)이 일렁이는 곳, 아미타불의 지혜로 비추는 무량광(無量光)의 경계이다. 즉, 아미타불은 광명으로 시방세계를 비추고 있는 것이다.
*광명변조(光明遍照)---변조(遍照)란 부처의 빛이 시방(十方)세계와 사람의 마음을 두루 비춘다는 뜻이다. 따라서 광명변조란 해와 달과 별의 광명이 온 세상을 두루 밝게 비추듯, 무량수불의 자비가 넓고 커서 그 공덕과 광명이 시방세계 중생을 널리 밝게 비춰 제도해 준다는 뜻이다. 즉, 진리의 지혜광명이 시방 삼세 일체중생의 무명 번뇌를 밝게 비춰 준다는 뜻이다.
*광명진언(光明眞言)---원래 진언은 뜻을 풀이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진언을 매우 중요시 했던 밀종(密宗)에서는 진언의 각 글자를 풀이했다. 뜻을 잘 알아야 관(觀)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관(觀)이 잘 돼야 보다 빨리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명진언은 모두 아홉 단어로 구성돼 있다.
광명진언은 바이로차나(Vairocana, 비로자나불)법신 진언으로서, 모든 불보살의 총주(總呪)이며, 그 의미도 부처님의 한량없는 자비와 지혜의 대광명을 기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와 죽은 이 모두에게 새로운 태어남을 얻게 하는 신령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며, 어두운 카르마(業)를 몰아내고, 악귀나 잡귀도 광명진언 속에서는 빛이 어두움을 소멸시키듯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당(唐)나라시대 불공(不空, Amoghavajra)이 번역한 경전인, <불공견색비로자나불대관정광명진언경(不空羂索毘盧遮那佛大灌頂光明眞言經)>에 광명진언(光明眞言)이 소개돼 있다. 주문은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이고, 그 뜻은 “비로자나 법신의 광명으로 무명과 업장을 걷어내고 자성의 밝은 본성이 드러나게 한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수행 중에 장애가 생길 때, 과거 습관이나 업장을 조복받기 위해, 과거 잘못을 참회할 때 이 진언을 외운다.
• 옴(OM) - 모든 진언의 근본 음이며,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임. ‘옴’ 자에 귀명의 뜻이 있다. 시방삼세에 항상 계신 부처님께 귀의해 부처님의 광명과 하나가 되는 마음으로 외운다.
• 아모카(amogha) -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이시여! 성취하지 못하는 바 없는 부처님이시여! 라는 뜻. 내 마음의 북방에 항상 계신 불공성취불의 명호이다. 불공성취불은 성소작지(成所作智)의 덕에 머무르며 일체중생을 위해 가깝게 사바세계에 모습을 나타내어 교화하시는 역사상의 부처님 곧 석가모니불을 가리킨다.
• 바이로차나(vairocana) - 비로자나 부처님(大日如來). 내 마음의 중앙에 항상 계신 비로자나불 곧 법신불의 명호이며, 대일여래라고도 한다. 법신불은 부처님의 진리의 몸으로서, 마치 태양이 세간의 어둠을 없애고 일체의 만물을 성장시키는 것처럼, 시방삼세의 온 우주법계에 두루 충만해, 무한한 빛을 비추는 우주적 통일체의 상징으로서 ‘광명의 부처님’을 가리킨다. 법신불은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의 덕에 머무르며 일체 천지만물 속에 내재하는 불신으로 사람을 포함한 온갖 삼라만상의 근원이다.
• 마하무드라(mahmudra) - 마하는 큰(大), 무드라는 도장 인(印)이므로 대인(大印)으로 번역된다. 큰 도장(대수인/大手印)을 지니신 분이여! 내 마음의 동방에 항상 계신 아촉불의 명호이다. 아촉불은 대원경지(大圓鏡智)의 덕에 머무르며 우주법계의 만상을 명료하게 조견하고, 중생의 번뇌를 퇴치해 모든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보리심을 개발해, 해탈케 하시는 부처님이다. 대원경지란 우주법계의 법계 만상을 여실하게 현현하는 지혜로 일체를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지혜를 청정한 거울에 비유해 말한 것이다.
• 마니(mani)- 마니보주(摩尼寶珠=如意寶珠)를 지니신 분이여! 보생여래(寶生如來)를 뜻함. 내 마음의 남방에 항상 계신 보생불의 명호이다. 대원력성취인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은 묘관찰지(妙觀察智)의 덕에 머무르며 중생을 위해 설법해서 의심을 끊게 하고, 대자비로 일체 중생을 섭수해 극락정토로 이끄는 부처이다.
• 파드마(padma) - 연꽃을 지닌 아미타여래를 뜻하며, 연꽃을 상징한다.
• 즈바라(suvara) - 생사윤회의 원인인 미혹의 어둠을 한 순간에 없애주는 광명을 뜻함.
• 프라바릍타야(pravarttaya)- 전변(轉變)한다는 뜻. 나의 본심, 보리심, 진심, 일심을 개발해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얻게 된다는 뜻. 이상에서 말한 “부처님의 광명이여! 그 빛을 발하소서” 라는 뜻으로, 이 부분을 염송할 때는 자신의 안으로부터 부처님의 광명이 솟아나와 자신이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충만 돼 있는 모습을 마음에 뚜렷하게 그리고 그 빛이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가 이웃과 우리나라 전 세계 우주법계로 두루 퍼져 모든 중생들이 그 빛 속에서 행복하고 평안한 모습을 심상화(心象化) 한다.
• 훔(hum) - 완성, 성취의 의미를 지닌다. 진언을 마무리하는 근본 음이다. 부처님께 감사와 귀의를 다짐하는 소리이고. 모든 진언을 마무리 짓는 근본 음이다. ‘훔’ 자를 외울 때는 이상에서 말한 오불(五佛)의 지혜 광명이 자신 안에서 종합 완성된 모습을 마음에 그리면서 모든 부처님들께 지극한 감사와 귀의를 다짐한다.
※총주(總呪)---모든 진언(주문)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다.
*광박신여래(廣博身如來)---대일여래의 딴 이름. 그 몸이 광대해서 법계의 사물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광연의식(廣緣意識)---의근(意根)에 의지하는 의식(意識-제6식)은 안식과 이식 등 전오식(前五識)의 성질과는 매우 다르다. 의식은 말나식(末那識, 산스크리트어: manas, 의/意)에 의지해 내면의 의식활동을 전담하는 것이며, 매우 광범위하게 활동을 전개한다. 이에 따라 의식(제6식)을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제6 의식은 눈, 귀, 코, 혀, 몸 등 5근을 통해 외부의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을 인식할 때 선ㆍ악, 호(好)ㆍ오(惡) 등 모든 생각을 결정하는 정신작용을 나타내고, 몸의 행동도 결정한다. 따라서 이 의식은 생각이 깊고 넓으며 모든 것을 반연해 생각한다는 뜻에서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은 전5식보다 포괄적인 사고 작용을 하므로 판단이나 추리, 상상 및 기억 등 넓은 의미의 의식이며, 나아가 이에 바탕 한 경험을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통각작용(統覺作用)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제6 의식은 전5식과 동시에 생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전5식과 공동으로 작용하는 오구의식(五俱意識)과 단독으로 작용하는 독두의식(獨頭意識)이 있다.
오구의식(五俱意識)은 우리 주위의 모든 대상을 관찰할 때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과 함께 작용해 그 대상을 분별하고 의식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에 비해 독두의식은 혼자 작용하는 의식이다.
*광율(廣律)---불교 율장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이 광율(廣律)이다. 광율은 부파불교시대 조성된 것으로 출가자(비구ㆍ비구니)의 생활규범인 계율을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광율 가운데 계율의 조문만 추출한 것을 계본(戒本)이라 하고, 승단회의ㆍ종교의식ㆍ승단 내의 규율과 예의 등을 편집한 것을 갈마본(羯磨本)이라 한다.
*광음천(光音天)---빛을 말(목소리)로 삼은 하늘이라는 뜻이다. 광음천(光音天)은 불교의 세계관인 삼계 중 색계의 제이선천(第二禪天)에 속하며, 색계 십팔천(色界十八天)의 여섯째 하늘이다.
이 하늘의 중생은 음성이 없고, 말을 할 때 입에서 맑은 빛을 내는데, 그 빛이 말이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말할 때 입으로 광명을 내어 말의 작용을 하므로 광음천이라 한다. 광음천은 이와 같이 빛(光)을 음성(音)으로 사용하는 천인(天人)을 말한다. 색계(色界)에 속하는 세계에 사는 천상에 실재하는 생명체라는 것이다. 그들은 남녀의 구분이 없고 몸을 갖고 있긴 하지만 굉장히 부드러운(soft)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쁨을 음식으로 삼는다. 지구가 형성될 무렵에 지구에 태어난 최초의 생명체가 바로 이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요즘 말로 순간이동에 의해 광음천에서 지구로 왔다. 이들이 지구에 살면서 퇴화해 남녀로 분화되고 인류가 됐다는 것이다.
과학적 근거는 없으나 불교 우주관이라는 넓은 얼개를 형성함에 있어서 한 부분으로 창작된 것이다. 불교 교의 전체를 우주의 모습에 비대해 얼개를 구성할 때 하나의 완성된 모습을 갖추기 위해 부분적으로 창작신화는 불가피한 것이므로 과학성 여부에 너무 비중을 둬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광장설(廣長舌)---광장설이란 부처님께서 몸에 갖추신 삼십이상(三十二相) 가운데 하나이다. 혀가 넓고, 길고, 얇고, 보드라운 것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혀를 길 게 내어 보이신 일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은 일체가 진실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신체언어(身體言語)이다. 장광설(長廣舌)이라고도 한다.
*광찬경(光讚經)---원명은 광찬반야바라밀경(光讚般若波羅蜜經)으로서, 서진(西晋)시대인 AD 286년 축법호(竺法護)가 한역했다.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의 다른 번역임.
*광통율사(光統律師, 468-537)---법명은 혜광(慧光). <화엄경>의 대가로 중국 북위(北魏)의 국통(國統)이었으나 당시 북위에 머물던 달마 대사(達磨大師)을 질투해 인도출신 승려 보리류지(菩提流支)와 더불어 달마 대사를 독살했다고 한다. 그 후 달마 대사는 관 속에 두 개의 신발짝만 남기고 서천(西天)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괴겁(壞劫)---불교 우주관에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무너져가는 시기를 말한다. 삼천대천세계는 항상 성겁(成劫) ․ 주겁(住劫) ․ 괴겁(壞劫) ․ 공겁(空劫) 네 시기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한다. 이 우주가 성립했다가 무(無)로 돌아가는 기간을 넷으로 나누는데, 우주가 성립되는 지극히 긴 기간인 성겁(成劫), 머무르는 기간인 주겁(住劫), 파괴돼가는 기간인 괴겁(壞劫), 파괴돼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지속되는 기간인 공겁(空劫), 이를 사겁(四劫)이라 하며, 각 겁(各劫)은 제가끔 20소겁(小劫)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기세간인 우주는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80겁을 주기로 성 ․ 주 ․ 괴 ․ 공(成․住․壞․空)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생멸변화를 하고 있다.---→겁(劫), 성주괴공(成住壞空) 참조.
*괴고(壞苦)---삼고(三苦)의 하나. 애착을 느끼던 것들, 소중이 이룩해 놓은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없어지는 데에서 오는 고통. 예컨대, 평생을 이룩해놓은 재산을 못난 자식 놈이 하루아침에 말아먹었을 때 오는 고통, 평생을 쌓아놓은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고통, 그렇게도 정성 드려 가꾸고 다듬은 얼굴이 흐르는 세월을 못 이겨 주름살이 늘어나는 고통, 그렇게 다정했던 사이인데 어쭙잖은 일로 오해가 생겨 사이가 나빠지는 고통, 이런 것들이 모두 괴고이다.---→삼고(三苦) 참조.
*괴로움(苦, 빠알리어 dukkha)의 극복---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비구들이여, 누가 말하기를 ‘나는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지 않고,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지 않고,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지 않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지 않고, 바르게 괴로움의 소멸을 이루리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뽀족지붕 경(S56:44)
그러므로 괴로움의 실체를 바로 알고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괴로움에 관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사성제(四聖諦)이다.
불교는 윤회와 괴로움을 벗어나는 해탈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사성제를 알지 못하면 윤회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괴로움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괴로움을 알기 위해 제대로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냥 괴로움을 알려고 하기보다 싫어하고, 불편하게 느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괴로움을 싫어하고 외면만 해서는 영원토록 괴로움을 극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괴로움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의하면, “괴로움(dukkha)은 괴롭게 하기 때문에, 혹은 행복을 막기 때문에 괴로움이라 한다. “dukkha는 더럽고 미운 아이를 dupputta라고 하듯 du는 더럽고 밉다는 뜻이다. 텅 빈 허공을 kha라고 하듯 kha라는 말은 ‘비었다.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이다. 괴로움의 진리(dukkha)는 많은 위험들이 도사리는 장소이기 때문에 혐오스럽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영원함, 아름다움, 행복, 자아’가 없기 때문에 비었다. 그러므로 더럽고 텅 비었기 때문에 괴로움(dukkha)이라 한다. -청정도론(Vis16.16)“라고 했다.
부처님이 최초로 행한 설법은 당신이 깨달으신 내용으로서 사성제(四聖諦)이다. 그리하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천명하셨다.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ㆍ탄식ㆍ육체적 고통ㆍ정신적 고통ㆍ절망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오취온(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요컨대 다섯 가지 취착하는 무더기[五取蘊]들 자체가 괴로움인가? 그것은 취착하는(집착과 함께 하는) 물질의 무더기[色取蘊], 취착하는 느낌의 무더기[受取蘊], 취착하는 인식의 무더기[想取蘊], 취착하는 상카라들의 무더기[行取蘊], 취착하는 알음알이의 무더기[識取蘊]로서, 요컨대 취착하는 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를 일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라고 하셨다. 또한 <초전법륜경>에서는,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라고 하면서, 애별리고(愛別離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의 괴로움을 설하시기도 하셨다. 그리하여 <기반경>에서는 전통적인 12연기로서 고의 발생과정을 설명하시고, 이어서 괴로움을 극복하는 <기반경> 나름의 12연기를 펼쳤다. 즉, 괴로움을 기반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을 시작으로 괴로움(번뇌)이 멸진되는 과정을 설하셨다.
전통적인 12연기는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노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괴로움)로서, <기반경> 연기는 괴로움 → 믿음(공덕의 어머니) → 환희(기쁨) → 희열 → 경안(편안하고 유연함) → 행복 → 삼매(고요함. 맑음. 밝음) → 여실지견(무상ㆍ고ㆍ무아=공=통찰지)→ 염오(자각) → 이욕(내려놓음) → 해탈(벗어남) → 열반(번뇌의 멸진)으로 괴로움을 극복한다고 했다. – 기반경(S12:23).
이와 같은 내용을 <기반경>에서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괴로움이 일어나는 과정과 괴로움이 사라지는 과정(해탈 열반의 과정)을 함께 설명하고 있으며, 수행체계와 관련된 설명을 하고 있다.
무명에서 괴로움까지는 일반 중생들이 윤회의 괴로움을 겪는 과정을 나타낸다. 이 윤회의 괴로움을 알고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일어나면, 믿음을 기반으로 환희하게 되고, 환희를 기반으로 희열을 경험하며, 희열을 기반으로 고요함에 이르고, 고요함을 기반으로 행복을 경험하고, 행복을 기반으로 바른 삼매에 들게 되고, 바른 삼매를 기반으로 여실지견(如實知見)하게 된다. 이 과정이 사념처 수행(四念處修行) 또는 팔정도 수행(八正道修行)의 과정이다.
이어서, 여실지견을 하게 되면, 여실지견을 기반으로 세상(윤회)을 염오(厭惡)하게 되고, 염오를 기반으로 이탐(離貪)하게 되며, 이탐을 기반으로 일시적 심해탈(心解脫)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이 사마타(Samatha, 止) 수행의 과정이다.
이어서, 일시적 심해탈을 하게 되면, 오온(五蘊)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명확하게 알고 보게 돼 번뇌가 멸진하게 되고 부동의 심해탈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이 바로 위빠사나(Vipassana, 觀) 수행의 과정으로서, 번뇌가 멸진되는 과정이다. 부동의 심해탈에 이르게 되면 삼매에서 나오게 되더라도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유여열반 상태가 된다.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것으로 번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르게 배워서 안 다음에는 바르게 보기 위한(경험하기 위한) 수행이 반드시 필요하다. 무엇을 바르게 보기 위한 수행일까? 바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실상을 바르게 보는 수행이다. 무상-고-무아를 배워 아는 것은 기본적으로 중요하지만, 배워 아는 것은 번뇌의 멸진을 위한 절반의 과정일 뿐이다. 배워 아는 것도 우리가 현상을 보는 수준에서 배워 아는 것이므로 완전히 바르게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완전히 바르게 아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현상을 보는 수준에서 배워 아는 것은 번뇌의 멸진을 위한 첫째 단계이다.
위 <기반경>의 전 과정을 완전히 경험하며 보게 될 때 번뇌가 멸진된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범부 중생들은 믿음부터 번뇌의 멸진까지의 과정(수행의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므로 해탈 열반할 수 없다. 그럼, 수행을 통해 현상을 바르게 보는(경험하는) 과정으로 <기반경>을 알아보자.
수행은 <기반경>의 중간부분에 있는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현재 삶의 고(dukkha)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 고(둑카)는 윤회의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윤회의 괴로움을 경험하지 못하면 아무리 수행한다고 해도 번뇌가 멸진될 수 없다. 현재 삶의 기본적 실상인 고(둑카)를 경험하지 못하므로 수행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수행을 한다고 해도 괴로움의 실상을 바르게 경험하지 못하고 하는 수행이므로 번뇌가 멸진될 수 없으며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단지 즐거움에 반대되는 의미의 괴로움에서만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회의 괴로움을 전혀 모르거나 알아도 경험한 상태가 아니므로 수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윤회의 괴로움을 경험한 상태로 부처님 가르침을 듣게 되고,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게 되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게 된다. 부처님 가르침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의 목적을 바르게 알게 되고 가르침을 바르게 믿게 된다. 즉, 윤회의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만이 수행의 목적을 바르게 정립하게 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괴로움을 경험해 부처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은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믿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그 목적에 따라 수행하게 되므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단계에까지 갈 수가 없다. 어떻게 하든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목적이 세워져야 번뇌가 멸진돼 해탈에 이르게 된다.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믿음에서 사념처 수행(팔정도 수행)을 바르게 하게 될 때, 환희, 희열, 고요함, 행복을 거쳐 바른 삼매에 들게 되고, 이에 따라 현상을 여실지견 하게 된다. 그런데 무엇을 여실지견 하게 되는 것일까?
이 여실지견이란 현상이 전체적으로 무아임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유신견(有身見)이라는 번뇌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단계를 깨달음의 첫 단계라고 한다. 더 이상 중생들 삶의 길로 퇴보하지 않게 되므로 해탈 열반의 흐름에 들었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 수행을 계속하게 됨에 따라, 염오하고, 이탐하는 과정을 거쳐 찌따(citta, 마음을 정의하는 하나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해탈하는 ‘일시적 해탈’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수행을 앞에서 말한 사마타(Samatha, 止) 수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사념처 수행이 바른 삼매의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을 말할 뿐이다. 즉, 바른 삼매에서 일시적 해탈에 이르기까지 사념처 수행이 진행되는 과정을 사마타 수행이라고 한다. 이 사마타 수행은 찌따를 일시적으로 해탈시켜 고요하게 하는 수행이므로 사마타 수행이라고 이름 한다.
사마타 수행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고요하게 있는 과정이 아니다. 다섯 가지 기능(믿음, 노력, 사띠, 사마디, 빤냐)이 함께 활발하게 작용하는 수행이다. 앞의 사념처 수행은 바른 삼매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띠(念, sati)가 주가 되는 수행이라면, 사마타 수행은 바른 삼매가 일어난 상태에서 사마디(Samadhi, 定)가 주가 되는 수행이다.
앞에서 말한 위빠사나(Vipassana, 觀) 수행은 바른 삼매가 일어난 상태에서 빤냐(panna, 般若)가 주가 되는 수행이다. 사념처 수행이나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수행하는 노력은 기본이다. 그리고 모든 수행(사념처 수행, 사마타 수행, 위빠사나 수행)은 다섯 가지 기능이 활발하게 작용하는 상태임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찌따가 일시적 심해탈에 이르게 된 상태에서 수행을 계속하는 것을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한다. 이 위빠사나 수행으로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명확하게 보고 경험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경험은 현상이 무상임을 철저히 알고 보는 과정이다. 이로써 사성제를 통찰하게 되고 수행이 완성하게 되며, <기반경>의 전 과정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된다. 즉, 수행이 완성되기 전에는 무명부터 괴로움까지의 단계를 배워서 알기만 했지만, 이제 명확히 볼 수 있게 돼 괴로움의 과정이 반복하지 않게 된다. 이로써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단계를 깨달음의 두 번째 단계라고 하며, 번뇌가 뿌리 뽑혀 삼매에 들지 않은 상태에서도 더 이상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부동의 심해탈’ 단계라고 한다. 이 단계를 거친 자를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한다.- 호잔 ---→고(苦, 빠알리어 duhkha), 고제(苦諦, 빠알리어 Dukkha-saccā) 참조.
*괴색(壞色, 산스크리트어 kasaya)---‘괴색(壞色)’을 부정색(不正色), 탁색(濁色), 탁염색(濁染色)이라고도 하는데, 범어 카사야(kasaya)를 번역한 것이다.
괴색(壞色)은 글자가 말해주듯이, 화려한 원색을 무너뜨린 탁하고 우중충한 색으로 만든 가사의 색을 말한다. 이런 색의 가사를 입음으로써 사치를 금하고 검소함을 보이고자 함이었다. 조선 후기 학자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갈색의 한 종류로서 석가모니와 제자들이 입고 있는 가사의 색으로 표현돼 있다.
*괴일체세간포외(壞一切世間怖畏)---<법화경>에 나오는 말로서, 부처님의 교(敎)에 의지하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타파하는 힘, 곧 어떠한 환경에서도 두렵거나 무섭지가 않다는 뜻이다.
*굉지 정각(宏智正覺, 1091~1157)---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와 더불어 송시대 선종을 대표하는 대선사였다. 천동 정각(天童正覺)이라고도 한다. 굉지 정각 선사는 조동종(曹洞宗) 제10대 조사로서 당대 말기에 형성된 조동의 가풍에다 묵조선(默照禪)이라는 새로운 수행법을 가미해 조동종의 묵조선을 대성시켰다. 이것은 임제종(臨濟宗) 양기파의 대혜 종고(大慧宗杲) 선사에 의해 형성된 간화선(看話禪)과 거의 때를 같이 한 것으로 이후 선종 역사에 큰 기여를 했다. 저서에〈묵조명(默照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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