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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각(茶角)---절에서 간식과 차를 맡은 소임. 절에서 안거를 위한 결제가 시작되면 그 전날 스님들이 모두 선방에 모여서 용상방(龍象榜-소임)을 짠다. 여기서 승납(僧臘-승려가 된 햇수)이 가장 짧은 스님이 다각 소임을 맡는다.---→용상방(龍象榜) 참조.
*다라니(陀羅尼, 산스크리트어 dharani)---신도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외우는 주문(呪文, 비밀스러운 문구)으로서, 암송하면 커다란 효험이 있다는 신성한 글귀. 부처님 말씀을 주문형식으로 만든 것으로, 내용은 긴 경전에 실려 있는 근본적인 원리를 짧게 요약한 것이다. 원래 경전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고, 다라니를 암송하면 경전 전체를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다라니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글귀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독송한다. 한자로 번역하지 않는 것은 번역으로 말미암아 그 의미가 변질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고, 신비성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다라니를 한문으로 총지(總持) 혹은 능지(能持) ‧ 능차(能遮)라 번역하기도 한다.
원래는 주문과 구별됐으나 후에 주문과 같은 것이 됐다. 주문의 길이가 짧은 것은 진언(眞言, mantra) 또는 주(呪)라 하고, 긴 것을 다라니 또는 대주(大呪)라 한다. 다라니의 공덕에 대해서는 <능엄경(楞嚴經)>에 구체적으로 잘 설명돼 있다.
진언은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육자진언으로 실담문자((悉曇文字, 산스크리트문자)로 된 「옴 마니 반메 훔」이나, 개법장 진언인 「옴 아라남 아라다」처럼 짧으면 한 자, 길어야 두 세 줄 정도에 불과하지만 다라니는 훨씬 길다. 예컨대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나 <능엄경>의 능엄신주(楞嚴神呪), 불정심 관세음보살 모다라니 등은 상당히 길다. 이러한 다라니를 송지(誦持)하면 그것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구경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식으로 강조함으로써 순박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아닌지 주의할 일이다. 예컨대, 「옴 마니 반메 훔」 육자진언을 암송하기만 하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고 강조하는 것 따위로 말이다.
다라니를 총지(總持)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외어서 모든 법(法)을 가진다는 뜻,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는 뜻이다. 총지(總持)에서 ‘총(總)’이란 모든 공덕이 다 포함돼 있다는 말이고, ‘지(持)’는 마음에 새겨서 지닌다 혹은 잊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사전에 미리 막아낸다는 뜻에서 능차(能遮)라고도 한다.
다라니는 선(善)을 유지해 잃지 않고, 악(惡)을 멈추어 일으키지 않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착한 일을 할 마음이 생기면, 그 마음을 오래오래 유지해 나가고, 악한 마음이 일어날 듯하면 억제해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다라니이다. 다라니는 나 혼자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다라니 정신을 나누어 주는데 그 생명이 있으므로 ‘다라니주를 준다’고 한다. 이는 계속 노력해가는 데 힘이 될 말을 준다는 그런 뜻이다.
주(呪)라는 것은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는 말이다. 입으로 무슨 말을 부르면, 그 말이 자기의 입에서 나가서 자기의 귀에 울리고, 자기의 귀에 울리면 그것이 자기의 마음에 들어간다. 즉, 항상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실행하는 노력 가운데서, 몸(身)ㆍ입(口)ㆍ마음(意)의 삼업(三業)이 갖추어져서 서로 영향을 주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심신(心身)의 덕목을 체득(體得)하고 항상 좋게 해주는 그런 종교생활이 다라니주의 힘이다. 그러니까 기분이라고 하는 느낌이라든가, 마음이라고 하는 정적작용(情的作用)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주문을 부르면 산란하던 마음이 한 곳으로 모아지면서 큰 힘이 솟는다.
이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다라니(陀羅尼, dharani)란
① 주문(呪文)이라고도 하며, 주술적인 힘을 가진 말이다.
② 소리를 글자나 그림으로 표현하면 부작(符作=符籍)이 된다.
③ 이는 생명의 세계에서 쓰는 암호와 같은 언어이다.
④ 다라니는 어떤 내용을 알게 하는 능력과 지키는 능력이 있다.
⑤ 어떤 위급한 상황이나 어려움에서 구원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⑥ 다라니는 밀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⑦ 이러한 다라니는 불보살의 호념을 받으며, 제천선신(諸天善神)과 호법신장(護法神將)의 보호를 받는다.
⑧ 불보살은 법을 알게 하는 호념을 하지만 천신과 신장은 물리적 위험이나 법의 손상을 막는다.---→총지(總持, 산스크리트어 dharani) 참조.
※참고
• 총지(總持) - 진언을 외워서 모든 법을 가진다는 뜻.
• 능지(能持) - 진언을 외우면 능히 모든 법을 가질 수 있다는 뜻.
• 능차(能遮) - 진언을 외우면 능히 번뇌를 차단할 수 있다는 뜻.
*다라수(多羅樹, 산스크리트어 tāla)---종려나무과(야자수)에 속한 나무 이름. 인도남부와 스리랑카 등지에서 자라는 열대식물임. 가지가 없으며 높이는 30m에 달한다. 자라는 꽃 이삭을 자르면 즙액이 나오는데, 이 즙액은 설탕 원료로 쓰고 발효시키면 럼(rum)이라는 술이 된다. 또 이것을 증류한 것이 아라크(arrack)라는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술이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라, 다라수잎이 고대 스리랑카에서 불경을 새기는 종이 역할을 했다. 다라수잎은 종이보다 습기에 강해 보존성이 뛰어나는데, 그 다라수잎을 패다라(貝葉, 貝多羅葉, pattra)라 했다. 다라수잎을 채취해 삶아서 말려 너비 6.6cm, 길이 66cm 정도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잘라, 잎 면에 송곳(철펜)으로 글자를 새기고 그을음을 올린 후 닦아내면 움푹 팬 곳에 먹이 들어가 글자가 선명히 나타난다. 이렇게 불경을 새긴 잎 끝에 구멍을 뚫어 꿰매면 패엽경(貝葉經)이 된다. ※고대인도 북부지방은 자작나무 껍질을 종이 대신 썼다.---→패엽경(貝葉經) 참조.
*다르마(法, 달마/達磨, 산스크리트어 dharma, 빠알리어 dhamma)---인도 고전인 <베다>에서 사용된 법(法)이라는 말. 자연계 법칙, 인간계 질서를 나타내고, 후에는 정도(正道) ‧ 정의(正義)로 변했으며,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진리, 불법, 법칙, 또는 제법(諸法) 등 의미로 쓰였다. 다르마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지닌 말이어서 해석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의논을 거듭했으며, 그것을 종합하면,
1)법칙, 법, 기준, 2)도덕, 종교, 3)속성, 성격, 4)가르침, 5)진리, 최고의 실재, 6)경험적 사물, 7)존재의 형태, 8)존재의 요소 등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한역 불전에서는 이 모든 의미가 법이라는 하나의 역어 속에 포함돼 있다. 아비달마 논서에는 다르마라는 어휘를 대개 위의 6),7),8) 중 어느 하나로 사용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진리, 사물 등으로 많이 쓰인다.---→담마(曇摩, 빠알리어 dhamma) 참조.
*다르마키르티(Dharmakīrti, 600∼660)---→법칭(法稱, 다르마키르티/Dharmakīrti, 600∼660) 참조.
*다르마팔라(Dharmapala)---불교의 수호신, 전승에 따르면 불교의 훌륭한 스승들은 각 지역의 토속신들과 정령들을 교화해 불교의 수호신으로 만들어왔으니 이들이 ‘다르마팔라(Dharmapala)’라고 불리는 호법신들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분노에 찬 ‘야마(Yama, 염라)’가 티베트 지방을 휩쓸며 약탈하자 사람들은 지혜의 보살인 만주슈리(Manjushri, 문수보살)에게 도움을 간절히 요청했다. 사람들의 고통스런 그 기도에 응답한 ‘만주슈리’는 매우 강력하고 용맹스러운 ‘야만타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야마는 그 힘에 굴복해 다르마팔라 중의 하나로 편입됐고, 이후 지옥을 관장하는 염라대왕이 됐다는 것이다.---→염라, 염라대왕 참조.
*다르마팔라(Anagārika Dharmapāla, 1864-1933)---→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ārika Dharmapāla, 1864-1933) 참조.
*다메크 스투파(Dhamekh Stupa)---→대법안탑(大法眼塔) 참조.
*다문(多聞)---다문(多聞)은 많이 듣는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시자 노릇을 한 아난존자(阿難尊者)가 부처님 말씀을 제일 많이 들었기에 다문제일(多聞第一)라고 한다. 경전 시작 첫 대목이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데, 여기서 ‘아(我)’가 바로 아난존자이다.
그리고 <대집경(大集經)>에서는 ‘다문(多聞)’을 강조한다. 만약 보살이 많이 듣기를 바다와 같이 하면 지혜를 성취해 항상 부지런히 법을 구하리라고 했다. 이럴 때 다문 역시 많이 듣는다는 의미이지만 거기엔 지혜라는 말이 포용된 말이다. 그냥 되는대로 많이 듣는 것이 아니라 법다운 말씀만 골라서 듣기 때문이다.
*다문뇌고(多聞牢固)---불멸 후 세 번째 500년을 말한다.---→‘후오백세, 오오백년(後五百歲 五五百年)’ 참조.
*다보불(多寶佛, 산스크리트어 프라부타라트나/Prabhutaratna)---다보여래(多寶如來)는 동방 보정세계(寶正世界) 교주를 일컫는다. 대보불(大寶佛)이라고도 하며, 일정한 모습은 없다. <법화경> ‘견보탑품(見寶塔品)’에 나온다. 이 다보불이 과거에 보살로 있었을 때 서원을 세우기를, ‘내가 장차 입멸하면 온몸 그대로 사리가 돼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는 장소에는 반드시 출현해 그 설법의 위력을 증명하리라’고 했다.
그리하여 다보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는 자리마다 보탑 모습으로 솟아 그것이 진실임을 증명했다고 한다. 따라서 다보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다보탑은 언제나 석가탑 옆에 쌍으로 안치할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불국사 다보탑이 석가탑 옆에 쌍으로 있다.
그리고 다보불은 <법화경>이 정법(正法)임을 증명하는 증명불이다. <법화경> ‘견보탑품’에서, 「그 때 보탑 가운데서 커다란 음성을 내어 찬탄해 말씀하시되, 착하고 착하도다, 석가모니 세존이시여, 능히 평등(平等) 대혜(大慧)이며,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의 호념하시는 <묘법화경>으로써 대중을 위해 설하심이라. 이와 같고 이와 같음이라. 석가모니 세존이 설하시는 바는 다 진실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으로 다보불이 증명불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고 허공에 머물러 계신 다보여래 보탑 안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들어가셔서 다보여래와 자리를 나누어 앉으시고 법화경을 설하셨다. 이것이 <법화경>을 허공에서 설하셨다고 하는 “이처삼회(二處三會) <법화경> 회상(會上)”을 의미한다.
※이처삼회(二處三會)---2처는 영산(靈山)과 허공을 말한다. 이 2처 중에서 영산에서는 초회(初會)와 종회(終會)를 설하고, 중간의 1회는 허공의 보탑(寶搭) 중에서 설한다. 경 처음부터 보탑품 전반까지는 영산인 기사굴산에서 설하고, 보탑품 후반으로부터 신력품 끝까지는 허공의 다보탑 중에서 설하고, 촉루품 이하는 다보탑에서 나와서 영산의 본좌(本座)에 돌아가 설한다.
*다불사상(多佛思想)---불교는 본래 일불사상이다. 누구나 수행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법화경>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오직 붓다 한 분만 있고, 붓다 이외 부처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힌두교 다신사상이 유입돼 들어와서 다불사상이 정착된 것이다. 대승시대에 수많은 부처가 만들어지는데, 본래 불교가 일불사상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승경전에서 이들을 다른 세계 부처라고 했다. 이 사바세계 부처님이 아니라 서방세계 부처님, 동방세계 부처님, 이렇게 이야기 했다. 아미타불은 서방세계 부처, 약사여래는 동방세계 부처님이다.
그렇지만 본래 불교는 일불사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고타마 싯다르타, 그리고 대승에서 미래에 오실 부처님으로 마이트레야(Maitreya, 미륵), 그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근본불교 정신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다불신앙은 언제 어디에나 부처님이 존재한다는 대승신앙의 한 형태로 성립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53불과 천불신앙이 유행했다. 그리하여 천불을 모시기 위한 천불전(千佛殿)을 따로 짓기도 했다. 천불에는 과거 장엄겁(莊嚴劫)에 출세한 천불, 현겁(現劫)에 출세하는 천불, 미래의 성수겁(星宿劫)에 출세할 미래천불이 있어서 이를 합친 것이 삼천불이다.
*다비(茶毘, 산스크리트어 자비타/Jha-pita)---불에 태운다는 뜻으로, 시체를 화장(火葬)하는 일을 이르는 말이다.
*다비문(茶毘文)---불교의 장례의식인 다비에 대한 절차를 분명히 하기 위해 편찬한 책. 1882년(고종 19) 승려 정행(井幸)이 편집한 다비문을 해인사에서 간행했다. 이 책은 <석문의범(釋門儀範)> 등의 현행 불교의식집에 전재돼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비식 때 상용되고 있다. 불교의 장례절차와 내용을 알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귀중한 의식집이다.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선정은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를 끊어야 도달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가 소멸되면서 다섯 가지의 선정의 구성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 해태와 혼침(昏沈睡眠, thinamiddha) ===> 사유(尋, vitakka)
2) 의심(疑, vicikiccha) ===> 숙고(伺, vicara)
3) 분노(瞋에, byapada) ===> 희열(喜, piti)
4) 흥분과 회한(悼擧惡作, uddhaccakukucca) ===> 행복(樂. sukha)
5) 감각적 쾌락의 욕망(愛貪, kamacchanda) ===> 심일경성(心一境性, ekaggta)
*다섯 가지 정견(正見)---<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에 대한 지혜 – 이를 일러 바른 견해 정견(正見)이라 한다.”
요약하면, 사성제(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정견의 도이다. 이는 바른 알아차림(正念)과 바른 집중(正定)을 계발하는 방법으로 계발해야 한다. <마찌마 니까야>의 주석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정견이 있다고 한다.
① 업이 자신의 것이라는 바른 견해(kammassakata-sammādiṭṭhi)
②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jhãna-sammādiṭṭhi)
③ 위빠사나에 대한 바른 견해(vipassanā-sammādiṭṭhi)
④ 도에 대한 바른 견해(magga-sammādiṭṭhi)
⑤ 과에 대한 바른 견해(phala-sammādiṭṭhi)---→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 참조.
*다섯 비구(五比丘)---붓다가 대각을 이룬 후 녹야원에서 초전법륜(初轉法輪)을 할 당시 설법대상이 됐던 최초의 다섯 비구를 말한다.
그리하여 다섯 도반은 최초의 다섯 비구가 됐다. 즉, 아래 다섯이다.
①꼰단냐(Kondanna:倧蓮如) - 카운딘야(Kauṇḍīnya), 콘다냐, 교진여(橋陣如), 아야교진여(阿若橋陳如)라고도 한다.
②와빠(Vappa:婆頗) - 바슈파(Bāṣpa), 바파(婆頗, Vappa), 바수라, 뱌시파, 다사발라 카샤파(Dasabala Kasyapa, 십력가섭/十力迦葉)이라고도 한다.
③밧디야(Bhaddhiya:婆提) - 바드리카(Bhadrika, 발제(跋提), 바제(婆提)라고도 한다.
④마하나마(Mahanama:摩訶男) - 마하나만(Mahānāman) -마하마남, 마하남이라고도 한다. 석가족으로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다. 구리태자(俱利太子)라고도 한다.
⑤아싸지(Assaji:阿說示) - 아슈와지트(Aśvajit), 아슈바짓(Asvajit), 알비(頞鞞), 아설시, 마승(馬勝)이라고도 한다.
이들 다섯이 바로 붓다의 첫 제자들이다. 다섯 비구들 중에서도 위에서 열거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진리의 눈, 즉 법안(法眼)을 얻었다. 콘단냐가 맨 먼저 붓다 가르침에 눈을 떠 붓다의 첫 제자이자 붓다 다음으로 첫 아르하트(arhat, 아라한(阿羅漢): 진리를 깨달은 자)가 됐다. 깨달음은 얻은 콘단냐는 곧장 계(戒)를 받고자 붓다에게 청했고, 붓다는 그에게 구족계(具足戒)를 줬다. 그로써 콘단냐는 구족계를 받은 첫 비구가 됐고, 다른 네 비구도 그를 이어 깨달음을 얻고 구족계를 받았다. 특히 아사지는 나중에 붓다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지혜 제일 사리풋타(사리자)를 교단에 입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원래 이 다섯 사람은 정반왕의 명으로 고타마가 출가 후 사문으로 고행을 할 때 경호의 임무를 띠고 따라 다녔던 수행원이었다. 그러나 고타마가 고행을 그만두자 그 곁을 일단 떠났었다가 다시 만난 것이다.---→초전법륜(初轉法輪) 참조.
*다자탑(多子塔, Pahuputraka)---베살리 서쪽에 있던 탑 이름. 옛날에 어떤 장자가 있었다. 그에게는 재산이 한량없고, 아들 딸이 각 30인이 있었다. 그 장자는 수행이 뛰어난 분으로 나중에 벽지불(辟支佛)을 증득했다. 그리고 입적한 후 그 자손들이 아버지를 위해 탑을 세웠다. 따라서 여러 자손들이 함께 세운 탑이므로 다자탑이라 했다. 그 외에 이 탑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한다.
① 옛적에 어떤 나라 임금의 부인이 육태(肉胎-미숙아)를 낳자, 상서롭지 못하다고 해서 항하에 던져버렸다. 그 육태는 하류의 어떤 국왕이 주어서, 마침내 아들을 삼았다. 아들이 자라서 왕이 돼 상류로 쳐들어가다가 이 탑에서 그 어머니를 만나, 그 땅이 부모의 나라임을 알고, 싸움을 중지했다고 한다.
② 부처님이 일찍이 이 탑 앞에서 가섭을 만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그를 앉게 했다고 한다(多子塔前分半座).
③ 부처님이 석달 뒤에 입멸한다는 예언을 이 탑 근처에서 했다는 말이 전한다.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다자탑(多子塔)은 중인도 바이살리(Vaishali, 毘舍離) 서북쪽에 있던 탑 이름이다. 바이살리는 빠알리어로 베살리(Vesali)라는 곳으로 뒷날 제2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세 곳에서 가섭 존자에게 마음을 전했다는 소위 삼처전심(三處傳心)의 이야기 가운데 첫 번째의 것이다.
왕사성(라자그리하)에 한 장자가 살고 있었는데 재산이 한량없이 많고 아들과 딸이 각각 30명이 있었다. 장자가 멀리 나갔다가 어느 숲에 이르러 때마침 누군가가 큰 나무를 베는 것을 봤다. 그 나무는 가지가 너무도 무성해 여러 사람이 끌어도 잘 끌어내지 못했다. 그 다음에 작은 나무를 베는 것을 봤다. 작은 나무는 가지가 없어서 한 사람이 끌어도 걸림이 없었다. 이일을 보고 장자는 깨달은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내가 큰 나무를 베는 것을 보니 가지와 잎이 매우 무성해
빽빽한 숲이 서로 얽혀 있어 벗어날 수가 없네.
세상일도 그러하여 남녀와 모든 권속들이
미움과 사랑으로 얽혀 있으면 생사의 숲에서 벗어나지 못하네.
작은 나무는 가지가 없어서 빽빽한 숲에 걸리지 않나니
저 일을 보고 이 몸을 살피건대
미움과 사랑의 속박을 끊으면 생사의 숲에서 저절로 해탈하리라.
그리하여 장자는 이 일로 벽지불의 과위(果位)를 얻었다. 그가 열반에 들자 여러 아들들이 그를 위해 탑묘(塔廟)를 세웠다. 여러 아들들이 탑을 세웠다 해서 그 탑을 다자탑(多子塔)이라 부르게 됐다. 뒷날 부처님께서 이 다자탑 앞에서 인간과 하늘의 무리들에게 설법을 하시는데 가섭(迦葉) 존자가 누더기를 걸치고 뒤늦게 도착했다. 이에 부처님이 앉아있던 자리를 나누어 가섭을 앉게 하시니 대중들이 모두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이것이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이다.---→삼처전심(三處傳心) 참조.
*단(檀, 산스크리트어 dana/檀那)---단나(dana)는 베푼다는 말로서 한역한 것이 보시(布施)이다. 만약 안으로 믿는 마음이 있고, 밖으로 복밭(福田)이 있고, 재물이 있어서, 이 셋이 화합할 때 마음에 사법(捨法)이 생해 능히 아끼고 탐냄을 깨뜨린다. 이것을 단이라 한다. 즉, 단(檀)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이고, 단바라밀은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을 의미한다. 우리말 돈(화폐)이 단나(dana)에서 온 것이라 한다. 베푼다는 뜻의 ‘단나‘가 중국에서는 단(檀)이 되고, 우리말로는 ‘돈’이 됐다고 한다.---→단나(檀那, 旦那), 단월(檀越, 산스크리트어 다나파티(danapati) 참조.
※사법(捨法)---일체를 놓아버리는 것, 보시하고 복을 짓는 법.
*단견(斷見, 산스크리트어 uccheda-drsti)과 상견(常見, sasvata-drsti)---사람들 생각 속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뿌리박고 있다. 그것이 단견과 상견이다.
• 단견(斷見)---단견은 나와 세상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사라질 뿐이라는 허무론에 빠지는 극단적인 견해이다. 즉, 모든 존재가 무상(無常)해 허무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죽으면 심신이 모두 없어져서 공무(空無)에 돌아간다는, 존재자체를 아주 없는 것으로 끊어 없애버린다고 생각하는 견해이다. 즉,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생각이다. 물질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먹고 잘살자. 쾌락주의가 된다. 사람이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없고 영혼도 없다는 주장인데 이는 비유(非有, 無有)에 빠진 것이다. 무신론도 여기에 해당한다.
• 상견(常見)---단견에 반대되는 상견은 나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여기는 견해이다. 고정불변의 그 무엇, 즉 항상(恒常) 하는 것이 있다는 견해가 상견이고, 없다고 하면 단견이다. 초기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르침이 단견과 상견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연기법은 단견에도 상견에도 떨어지지 않는 중도이다.
상견은 죽은 다음에도 영혼(오온)이 있기에 끝없이 지속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내생을 위해 오늘의 삶을 희생하자. 영혼, 윤회설 등의 기반이 상견이다. 육체는 사멸하나 영혼은 불멸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유(有)에 빠진 것이다. 기독교의 영혼에 대한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단견을 잘못 이해하는 폐해를 막기 위해 부득이 윤회사상을 끌어들여서 방편으로 쓴 것이다. 그리하여 깨달으면 윤회로부터 해탈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윤회한다... 라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편이 결국에는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는 것이 됐다. 단견도 생각이요, 상견도 생각이다. 똑 같은 생각이다. 단견은 없다는 생각이고, 상견은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상견과 단견으로부터 시작된다. 상견과 단견은 서로 대립되는 견해이다. 세상은 본래 조용하나 상견과 단견으로 인해 늘 다투고 시끄러워진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모두 그릇된 견해라고 본다. 특히 불교에서 무아를 잘못 이해하면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주장을 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상견은 단견을 받아들이고 단견은 상견을 받아들이면서 보다 더 발전적인 것을 재창출해 내라는 것이 ‘단상중도(斷常中道)’이다. 그리고 내 생각(고정관념, 我相, 無明, 알음알이)을 버리면 그 자리에 ‘참 나(진리)’가 드러난다고 한다.---→상견(常見), 단멸공(斷滅空), 단상갱(斷常坑) 참조.
*단경(壇經)---→육조단경(六祖壇經) 참조.
*단공(但空)---공에 치우쳐서 불공(不空)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묘유(妙有)의 일면을 인정하지 않고, 허무에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만유의 모든 법이 공하다는 한편만 알고 불공(不空)의 이치는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단공의 반대말이 부단공(不但空)이다.
※불공(不空, 산스크리트어 asunnata)---불공이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많이 등장하는 말인데, ‘공이 아니다, 공이 없다’는 그런 뜻도 되고, ‘비어 있지 않다’라는 말로도 쓰인다. 예 ; 해탈 열반에 이른 여래와 아라한은 육입(六入)을 지닌 몸이 남는다. 이것은 불공(不空)이다. - 이 경우엔 공이 아님을 말한다.
※부단공(不但空)---공도 역시 공(空)하다는 절대 부정(否定)의 공을 부단공이라 한다.
*단나(檀那, 旦那)---‘단나’는 산스크리트어 다나파티(danapati)를 음사한 말로서, 절이나 승려에게 시주(施主)하는 일, 공양과 보시를 말한다. 그래서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바라밀을 단나바라밀 혹은 ‘단나’를 줄여 단바라밀(檀波羅蜜)이라고도 한다.---→단(檀, 산스크리트어 dana/檀那), 단월(檀越, 산스크리트어 다나파티(danapati) 참조.
*단말마(斷末魔)---단말마란 ‘말마(末魔)’를 끊는다는 말이다. ‘말마’는 산스크리트어 ‘marman’로서 육체의 관절이나 육체의 치명적 부분, 즉 급소를 의미한다. 이것을 건드리거나 부딪치면 심하게 아프거나 죽기도 한다. 단말마는 그 급소를 끊는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수(水) ‧ 풍(風) ‧ 화(火) 삼대(三大) 중에서 한 종류가 유달리 많아지고, 그것이 말마와 부딪쳐 목숨이 끊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죽기 바로 직전 빈사상태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단말마의 고통’이라고 한다.
*단멸견(斷滅見)---→단견(斷見)과 같은 말. 단견(斷見) 참조.
*단멸공(斷滅空)---단멸공이란 이 세상은 단 한번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견해를 말한다. 단견(斷見)으로 말미암아 공(空)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을 단멸공 또는 악취공(惡取空)이라 한다. 그리고 더러 단멸공을 무기공(無記空)과 비슷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생이 한번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한번 깨달으면 됐지 더 이상 깨달을 것도 닦을 것도 없어서 이대로가 영원한 낙이 될 것이라 굳게 믿는 경지의 사람들을 말한다. 요즘 견성하면 성불자라고 떠들면서 보림하지 않는 수행의 무리들이 바로 단멸 공견에 떨어진 사람들이다.
무기공이란 공에만 집착한 나머지 무념(無念)의 지혜가 아닌 아무 것도 없는 깜깜한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즉, 공사상(空思想)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빈 마음으로 앉아 있음을 무기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할 것은 공에 집착하면 단멸공이라는 삿된 소견에 떨어져서 어둡고 명료하지 못한 무기에 빠져 미혹한 어둠[無明]에 싸이게 된다.---→단견(斷見), 무기공(無記空) 참조.
*단멸론(斷滅論, 산스크리트어 uccheda-vāda)---붓다시대에 육사외도(六師外道) 중 아지타(Ajita) 등 유물론자들의 주장이다. 단멸론이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반드시 소멸해 없어진다는 주장이다. 정통 바라문적인 아(我, atman)의 상주(常住)를 인정하는 설과는 반대로 아(我) ‧ 영혼은 신체 파괴와 함께 완전히 단멸, 소실해 사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이다. 이들은 사회현상에 대해 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을 주장하면서 인과응보를 부정하고 우연론을 지지했다.
이러한 이론은 불교 무아(無我)이론과 혼동을 일으켜 불교적 가르침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붓다는 사후 세계(내세)를 부정하지 않았고, 특히 업(業)의 과보를 강조함으로써 단멸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지타(Ajita)---본명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 고대인도 반(反)브라만적 자유사상가인 육사외도(六師外道) 중 한 명으로 유물론자였다. 그는 인간은 지(땅)ㆍ수(물)ㆍ화(불)ㆍ풍(바람) 등 네 가지 원소로 구성돼 있고, 그것들은 인간이 죽은 후, 각각의 집합체로 돌아가며, 시체가 화장된 후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영혼이나 내세를 부정하고, 또 선악업(善惡業)에 의한 과보도 부정했다.---→무인무연론(無因無緣論) 참조.
*단바라밀(檀波羅蜜, 산스크리트어 Danapara)---단(檀)은 단나(檀那)의 약칭이다. 단나란 보시(布施) 혹은 시주(施主)를 말한다. 따라서 단바라밀이란 보시바라밀을 말한다. 6바라밀(六波羅蜜) 또는 십바라밀(十波羅蜜) 의 하나이다. 다음은 당나라 선승 대주 혜해(大珠慧海, 8~9세기) 스님의 어록집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에 나오는 말이다.
"이 돈오(頓悟)의 문은 어디로부터 들어갑니까?"
"단바라밀(檀波羅蜜)로부터 들어가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육바라밀이 보살의 행(行)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무슨 까닭으로 단바라밀 하나만을 말씀하시며, 어떻게 구족해야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미혹한 사람은 다섯 바라밀이 모두 단바라밀로 말미암아 나는 것인 줄 알지 못한 것이니, 오직 단바라밀만을 수행하면 곧 육바라밀을 모두 구족하는 것이니라."
"어떤 인연으로 단바라밀이라고 합니까?"
"단(檀)이란 보시(布施)를 말하느니라."
"어떤 물건을 보시하는 것입니까?"
"두 가지 성품을 보시해버리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 성품입니까?"
"선과 악의 성품을 보시해버리는 것이며, 있음과 없음의 성품, 사랑함과 미워함의 성품, 공과 공 아님의 성품, 정과 정 아님의 성품과 깨끗함과 깨끗하지 아니함의 성품을 보시해버려서 일체 모든 것을 전부 보시해버리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느니라.
만약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을 때에 또한 두 가지 성품이 공하다는 생각을 짓지 아니하며 또 보시한다는 생각을 짓지 아니함이 곧 진실로 보시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니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다고 하느니라.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진다 함은 곧 일체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이니, 법의 성품이 공하다 함은 곧 일체처에 무심함이니라.
만약 일체처에 무심함을 얻었을 때에는 한 모양(一相)도 얻을 수 없으니, 왜냐하면 자성이 공한 까닭에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느니라. 한 모양도 얻을 수 없다 함은 곧 실상이니 실상이란 여래의 묘한 색신의 모양이니라.
*단상갱(斷常坑)---단견과 상견의 구덩이라는 뜻이다. 단견(斷見)이란 모든 존재는 항상 변해가는 것이어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서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를 말한다. 상견(常見)은 이와 반대로 사람이 죽으면 몸은 없어지지만 자아는 없어지지 않으며 과거나 미래에도 끊어지는 법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있다ㆍ없다’와 같은 상대적인 개념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이러한 견해에 빠지는 것을 수행의 장애물로 여긴다. 곧 단견과 상견의 구덩이에 빠지면 헤어나기가 어렵다고 본다.
*단상 이견(斷常二見)---일체만유(一切萬有)가 덧없어서 항상 하지 못해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에 정식(情識)이 있는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버린다는 소견을 단견(斷見)이라 하며, 일체만유인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으로 소견을 지어 이 몸도 죽어서 다시 태어나 항상 지금과 같이 계속된다는 상견(常見)을 짓는 이 두 가지의 치우친 변견(邊見)을 단(斷)ㆍ상(常) 이견(二見)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두가 사견(邪見)인 잘못된 것이다.
*단상중도(斷常中道)---중도(中道)는 불교의 핵심사상이다. 중도에 대한 이해 없이 불교 교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단상중도(斷常中道)는 사람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일까 죽으면 그만일까 하는 질문에 대해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배쳑함을 말한다.
불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고 지은 업에 따라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불자가 아니면서 과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영혼불멸을 주장하는 종교도 있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불교에서는 단견(斷見)이라 해 배척하고, 이와 반대되는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생각도 상견(常見)이라 해서 배척한다. 이렇게 단견, 상견을 모두 물리친 것이 단상중도이다.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의심은 사견(邪見)에서 비롯된 허망한 생각이다. 연기법은 붓다가 깨달은 인간과 세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진리이다, 연기법을 깨달으면 생사윤회의 실상을 깨달아 그 같은 허망한 의심이 사라진다. 육체는 죽으면 우리 생이 끝이라는 단견과 영혼은 죽지 않고, 내세에 가서 태어난다는 상견은 모두 외도들의 사상이고 주장이다.
외도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아(自我)을 주장한다, 바라문교에서는 아트만을 자아라고 주장하고,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인 지바(jīva)가 자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붓다는 무아(無我)를 주장했다, 시간적으로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자아는 우리의 생각 속에만 있을 뿐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기법은 무아(無我)의 도리를 깨달게 하는 진리이다, 단상중도는 12여기를 깨달아 단견과 상견에 빠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상윳따 니까야 <사후의경(Parammarana-sutta)에 보면 사리불과 깟싸빠 존자가 사후의 여래에 대해 대화를 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에 부처님이 답을 하지 않으신 이유가 잘 표현돼 있다.
여기서 존자 깟싸빠는 사리불이 “여래가 사후에도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고 답을 한다. 그 이유로 깟싸빠는,
“그것은 바른 이치에 맞지 않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지 않고, 싫어해 떠남에 도움이 되지 않고, 사라짐에 도움이 되지 않고, 소멸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적멸에 도움이 되지 않고, 곧바른 앎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올바른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여기서도 부처님이 중도라 해서 다른 길이 있기에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답을 하는 것이 오히려 실상을 아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단신불무언(但信佛無言) 연화종구발(蓮花從口發)---<육조단경> ‘기연품(機緣品)’에 나오는 말이다. 「다만 부처님이 말씀이 없으시다는 그 도리를 믿을 것 같으면, 연꽃이 입으로부터 피리라.」 그런 말이다.
그런데 왜 육조 대사는 부처님이 말이 없다고 했느냐?
부처님은 49년간 그렇게 많은 말씀. 많은 설법을 해서 팔만대장경이라는 것이 있다하더라도, 부처님의 그 본마음에 비춰보면, 부처님의 그 정말 오롯한 정신에 입각해서 보면, 한 마디의 말씀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금강경>에도 “나는 한 마디도 설한바가 없다.” 그런 말이 나온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어도 말한바 없이 말씀했다. 부처님의 본심에서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관음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도 유명한 관음찬(觀音讚)에서 「관음보살무설설(觀音菩薩無說說) 남순동자불문문(南巡童子不聞聞)」이라 했다.
관음보살의 시봉이자 뒤따르는 남순동자는 불문문(不聞聞)이라. 설함이 없이 설하니까 또 듣지 않고 듣는다. 듣는 흔적 없이 듣고, 설하는 흔적 없이 설하고,… 진리는 원래 말을 떠난 것이니까 그렇다. 진리는 이언(離言)이라, 진리는 말을 떠난 것이고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도 부처님도 설하는바 없이 설하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님은 무언이라. 부처님은 본래 말씀이 없다는 것을 믿을 것 같으면(但信佛無言), 연화(蓮花)가 종구발(從口發)이라, 연꽃이 입에서부터 피리라는 말은, 묘법연화경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묘법연화경의 도리가 바로 그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다는 말이다.
다음은 전 파계사 조실 고송(古松, 1906~2003) 스님의 법문이다.
『껍데기만 찾아다니지 말고 실제를 알아야 돼. 단신불무언(但信佛無言)이라, 다만 말없는 부처를 믿으란 말이야. 그러면 연화종구발(蓮花從口發)이라고 입에서 연꽃이 따라 나와. 종일 지껄여도 실행하지 못하면 다 거짓말이야. 말없는 부처에게서 참말이 나와. 말하는 부처를 믿다간 장애가 생겨 큰 일 날거야,
마음은 물과 같지(심여수/心如水). 물은 얼음이 되고 수증기가 돼도 젖은 본성을 잃지 않듯이 마음에도 변하지 않는 한결 같은 자리가 있어. 그 자리를 찾기 위한 방편이 참선 수행이여. 수행을 하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벌써 방해가 되는 거라. 자성 지혜의 횃불을 밝혀 자기의 본래 면목을 찾는 것이 참선이야. 화두를 들고 끊임없이 의심해 들어가면 얻는 게 있지. 그러나 이걸 해서 뭘 얻겠다고 생각하면 장애가 생겨 깨달음은 그만큼 멀어져. 참선은 아는 것을 다 버리고 모르는 데로 들어가는 공부야. 사람들은 다 알려고, 다 안다고 목에 힘을 주지만 참으로 모를 때 알아지는 거야.
사람들 중에는 껍데기만 보고 사는 경우가 많아. 너와 나의 구별을 버리고 참 나를 돈증(頓證)하려면 인과를 알고 사리를 밝히는(지인과/智因果 명사리/明事理) 공부를 지속해야 해. 단욕무구(斷慾無求)라 욕심을 끊고 구하는 것이 없으면 숙명통(宿命通)이 멀지 않고, 해탈이 멀지 않아, 그런데도 자신이 부처인줄 모르고 다른데서 부처를 찾으려고 야단들이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면 잘 살아.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내 마음이 알거든. 죄도 알고 짓지, 모르고 짓는다는 건 거짓말이야. 도둑놈이 왜 밤에 몰래 다니겠어.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러니 바르게 익히고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돼.
장수하는 비결이 따로 없어. 인욕하면 장수 해. 인욕(忍辱)을 못하고 진심(嗔心.성냄)을 내면 좋은 게 다 없어져버리거든. 진심은 불이라 다 태워버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것도 진심을 한번 내면 다 끝이야. 그러니 참고 견뎌야지.
사람 욕심은 한이 없어서 만년도 부족하지만 인생은 잠깐이야. 눈 깜박하면 지나가는 찰나간(刹那間)이요 호흡지간(呼吸之間)이지. 이 몸은 촛불 같은 거라, 대궁이 타면 불이 꺼져. 그러니 세월 가면 늙고 버려야 할 몸뚱이보다는 늙지 않고 죽지도 않는 마음을 궁구해야지.
말 없는 부처를 믿어야 해. 입 한번 잘 못 놀리면 고(苦)가 생겨. 천언만당불여일묵(千言萬當不如一默)이라, 천 번 말해서 만 번 옳더라도 한 마디도 안한 것만 못하다는 뜻이야. 누가 뭐라 하든 묵빈대처(默賓對處)가 상책이야.』
*단월(檀越, 산스크리트어 다나파티(danapati)---단월(檀越)은 dāna-pati의 음역이다.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시주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단순히 시주(施主)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사찰이나 승려에게 물건 따위를 공양하는 일을 말하며, 시주(施主, dāna-pati)란 글자 그대로는 ‘보시하는 주인’이라는 뜻이며, 음역하여 단월(檀越) 또는 단나(檀那), 단주(檀主)라고도 한다. 그리고 재가불자를 백의단월(白衣檀越)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단월을 불제자, 재가신자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단(檀, 산스크리트어 dana/檀那), 단나(檀那, 旦那) 참조.
*단전(單傳)---단전은 불교 문자로서,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이심전심(以心傳心)한다는 말이다. 즉, 선종(禪宗)에서 깨달음을 한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으로 쓰며, 문자 · 언어를 가지고 여러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과 다름을 강조한 말이다. 곧 「심인(心印)을 단전(單傳)한다」고 말한다.
*단제 선사(斷際禪師)---당나라시대 황벽 희운(黃壁希運, ?~850) 선사를 말함.---→황벽 희운(黃壁希運, ?~850) 참조.
*단주(短珠)---54개 이하의 구슬을 꿰어 만든 짧은 염주.
*단지불회(但知不會)---보조국사의 <수심결(修心訣)>에 나오는 말이다.
「약욕구회 변회부득 단지불회 시즉견성(若欲求會 便會不得 但知不會 是卽見性)
만약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고, 다만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임을 알면, 깨달음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알려고 하면 알지 못할 것이며, 다만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견성하리라」
대체로 이런 뜻이다. 여기서 ‘회(會)’는 앎, 깨달음, ‘모르는 것을 새롭게 아는 것’이란 뜻이다. 이 세상에는 정치인, 학자, 기자, 작가, 예술인, 종교인, 사상가 등 온갖 부류의 인간들이 득실거린다. 이들은 모두가 자기 나름대로 ‘알고 있음-앎’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이념, 사실 등이 모두 진실이라고 확고히 믿고 집착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고 사회를 시끄럽게 한다. 그러다가 끝내 자신조차도 고통 속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단지불회(但知不會), 단지 알지 못함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가 알면 얼마를 알며, 조금 아는 것 같아도 내가 나를 믿지 못할 정도로 자신이 없다. 나는 별로 아는 게 없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다. 자꾸 더 어려워지기만 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때 ‘참으로 앎’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수행에 임하는 수행승이 조금 아는 걸 가지고 아는 체하거나, 조금 깨친 걸 가지고 대오한 것처럼 떠들어대면서 견성하겠다고 욕심을 내면 더욱 견성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제대로 된 수행승이라면 공부는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 이래서는 도저히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더욱 용맹정진하는 이에게 견성이 가까이 다가오는 법이다.
*단하소목불(丹霞燒木佛)---중국 당나라시대 단하 천연(丹霞天然, 739~824) 선사가 길을 가다가 해가 저물어 혜림사(慧林寺)란 절에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몹시 추웠다. 불을 좀 피웠으면 싶은데 나무가 없었다.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佛像)을 보니 마침 목불(木佛)이었다. 도끼로 그 목불을 쪼개어 불을 피웠다.
그 절 원주가 뒤늦게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노발대발했다. 단하는 막대기로 재를 뒤적이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석가여래의 몸은 화장해 많은 사리가 나왔다기에, 나도 이 부처님한테서 사리를 좀 받을 까 해서......”
“여보,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
“사리가 안 나올 바에야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님이요.”라고 했다.
이것은 참 부처를 드러내기 위해 거짓 부처를 부순 비상한 방편이다.
수많은 사찰과 거기에 모셔진 불상(佛像)들은 형상을 보고 부처를 보라는 얘기가 아니다.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일종의 아이콘이다. 불교가 일반인들이 짐작할 수 없는 영역의 특별한 비의(秘意)나 주문을 감추어 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평범함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像)을 만들고 절을 한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부처의 모습을 보고 부처를 봤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됐다고, 부처의 형상을 보고 여래(如來)를 봤다고 생각 한다면 차라리 전륜성왕을 여래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금강경>에서 단호히 말씀하셨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 만약 형상으로 부처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나 음성으로 부처님를 구하는(알아보려는)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라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찰에 모셔진 부처님 형상을 통해 진리(여래)를 깨치려하면 깨칠 수 없다는 말이다.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말이다.」
수많은 사찰과 거기에 모셔진 불상(佛像)들은 형상을 보고 붓다를 보라는 얘기가 아니다.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워놓은 것이다. 단하(丹霞)의 이야기는 조금 과장이 있는 것 같지만 그 시사하는 바는 부처님은 형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부처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기에 부처인 것이다.
*달라이라마(Dalai-Lama)---15세기 초에 티베트에서 총카파(Tsong–kha–pa, 宗喀巴)가 종교개혁을 단행해서 탄생하게 된 티베트불교(라마교)의 가장 대표적 종파인 겔룩파(거루파/格魯派/황교) 수장인 법왕(法王)의 호칭이다.
‘달라이’는 바다를, ‘라마’는 스승을 뜻한다. 달라이라마는 영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위까지 가진다. 현재의 달라이라마는 제14세로서 중국군 티베트 진주로 1959년 측근과 함께 인도로 탈출,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망명정권을 수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달리트(dalit)---인도 신분제도에서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을 가리킨다. 카스트(caste)제도에 따른 인도신분제도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왕이나 귀족), 바이샤(상인), 수드라(피정복민 및 노예, 천민) 등 4계급으로 구분돼 사성제도(四姓制度)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성제 최하위인 수드라에도 속하지 못하는 수드라보다도 더 낮은 최하층민인 불가촉천민을 달리트라 한다. 인도 13억 인구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는데, ‘이들과 접촉만 해도 부정해진다’는 생각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카스트에도 들지 못하는 최하층 계급인 불가촉천민을 부처님 당시의 고대엔 산스크리트어로 짠달라(candala)라 했으며, 이를 중국에서 음역해 전타라(旃陀羅)라고 했고, 여자는 전타리(旃陀利)라 했다.
그런데 마하트마 간디가 이들에게 '신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하리잔(Harijan)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름에 숨어 있는 동정적 의미에 반발해 스스로를 핍박받는 자라는 뜻의 달리트(dalit)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달리트는 불가촉천민의 대표적 명칭이 됐다. 그러나 인도정부의 공식호칭은 ‘예정 카스트(scheduled caste)’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들에게도 자각이 일어나서 카스트제도를 부정하는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으며, 인권 차원에서의 사회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나 워낙 오래된 체질화된 제도여서 개혁하기가 무척 어렵다.---→신불교운동(Neo-Buddhism Movment), 암베드카르(Dr. Bhimrao Ramji Ambedkar), 람 라즈(Ram Raj), 나렌드라 자다브(Narendra Jadhav, 1953년~) 참조.
*달마(達磨, 산스크리트어 dharma)---→다르마(法, 달마/達磨) 및 담마(曇摩, dhamma) 참조.
*달마(보리달마/菩提達磨, 산스크리트어 Bodhi Dharma, ?~528)---달마 대사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 셋째 왕자로 태어나 출가해서 붓다 제27대 직계 제자인 반야다라(般若多羅, ?~457) 존자에게 가르침을 받고 제28대 조사(祖師)가 됐다. 당시 인도 불교는 밀교 일색이었으나 그마저도 힌두교화 해서 더 이상 불교의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달마의 스승 반야다라의 혜안이 있었기에 그의 권유로 달마는 AD 6세기 초 해로로(육로로 왔다는 설이 지배적임) 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조 양(梁)나로 건너와서 선불교(禪佛敎)를 전함으로써 중국선종 시조가 됐다. 이리하여 6세기 이후 불교는 그 발생지인 인도에서보다 중국을 중심으로 선(禪)불교로 찬란하게 번성하게 됐고, 밀교는 티베트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됐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선(禪)은 중국화 된 선불교전통을 따르고 있다.
헌데 같은 인도출신으로 북위(北魏)에서 활약한 보리유지(菩提流支)는 달마 대사를 시기한 나머지 광통 율사(光統律師)와 더불어 AD 528년 달마를 독살했다는 말이 전한다. 이에 하남성 웅이산(熊耳山, 해발 912m)에 장사를 지냈는데, 독살 당한 달마 대사는 관속에 신발 한 짝만 남기고 서천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다음은 달마 대사가 무제를 만나는 장면이다. 달마가 만난 양 무제는 비록 절실한 불교신자라고 하지만 황제의 권위는 두려움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제와 달마 간에 묻고 답하는 내용을 보면 달마 대사의 생사를 초월한 의연한 모습이 생생히 부각된다.
황제가 말했다.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 많은 절을 짓고, 경을 소개하고, 스님들에게 도첩을 내린 것이 셀 수 없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소?”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달마의 조금도 거리낌 없는 답이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소” 황제는 불쾌했다.
“그러한 공덕들은 윤회 속에 흩어지고 말 그림자같이 형태가 없는 공덕이기 때문입니다” 달마나는 신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유위의 공덕은 소용없음을 말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이요”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온전해서 그 자체는 공적 합니다. 이 같은 공덕은 세간에서 구해도 구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 근본이 되는 진리라는 것이요?”
“텅 비어 있으니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짐을 대하고 있는 이는 누구요?”
“모릅니다.”
이렇게 황제를 자극한 달마는 비밀리에 북위(北魏)의 숭산(嵩山) 소림사(小林寺)로 숨어들어 9년간 면벽수행을 한다.
달마가 중국으로 와서 선(禪)을 전하고자 했지만, 교학이 성한 터라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였다. 양 무제를 통해 선을 이해시키려고 했지만 양 무제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달마는 ‘아직 때가 아니구나,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아니구나!’ 해서, 소림굴로 들어가서 9년 동안 면벽을 하며 기다리게 된다. 이러한 대사도 수행하다 졸리면 눈썹을 뽑아 던졌고 눈썹이 던져진 자리에는 차나무가 자라났단다. 추후 중국 선종의 상징이 되는 차(茶)와 선(禪)이 인연을 맺는 사연이다. 달마상의 특징은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모습이다. 소림굴 면벽 9년 수행을 하면서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기 위해 결국 눈꺼풀을 잘라냈다고 한다. 그래서 달마는 눈꺼풀이 없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6세기부터 7세기에 걸친 당시 중국은 급격한 사회변혁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 불교의 이상을 달마에게 구했다. 벽관(壁觀)으로 일컬어지는 독자적인 선법과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4구절에 그의 교의가 집약돼 있다. 9년간 면벽좌선을 하고 나서,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는 이(理)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 선법을 안심법문을 통해 제2조가 되는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수함으로써 중국 선종이 시작됐다.
달마 선의 특색은 대화의 어기(語氣)에 있으며, 마침내 사람들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게 됐다. 이 문답이 선종의 모든 것이다. 최근 둔황에서 출토된 자료에 따르면, 그의 근본사상으로?이입사행(二入四行)’을 설교한 사실이 밝혀졌으며, 달마는 <능가경>을 중시하고 이입과 사행의 가르침을 설파해 당시의 가람불교나 강설불교(講說佛敎)와는 정반대인 좌선을 통해 그 사상을 실천하는 새로운 불교 조사선을 강조했다.
저서로 <달마어록>이 전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중국의 돈황 지방에서 새롭게 발굴된 자료이다. 소위 돈황의 선 문헌 가운데 하나로, 달마의 말씀을 전해주는 최고의 문헌이다.
후에 공과 무아를 일러준 달마 대사의 법을 깨달은 무제는 달마 대사를 다시 만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추모하는 심정을 달랜다.
「봐도 보지 못하고, 만나도 만나지 못하니(見之不見 逢之不逢)
옛날이나 지금이나, 후회스럽고 한스럽구나(古之今之 悔之根之)」
※그 무렵 서역에 사신으로 갔던 송운(宋雲)이 돌아오는 길에 파미르고원에서 달마 대사를 만났다고 한다. 대사는 주장자에 신발 한 짝을 꿰어 들고 유유히 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송운이 “대사는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자, “서천으로 가노라. 너의 임금은 이미 돌아가셨느니라.”라고 했단다. 송운이 달마 대사와 이야기를 나눈 후 작별하고 귀국해보니 과연 임금이 승하하고 다음 임금이 즉위해 있었다. 그리하여 송운이 돌아오다가 겪은 일을 임금에게 보고하니 무덤을 파보도록 지시했다. 그랬더니 관속에는 신발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
※송운(宋雲)---중국, 남북조시대 승려. 돈황 사람. 생몰연대 미상. 북위(北魏) 말, 효명제 사절로 중앙아시아제국을 순방했다. 낙양을 출발, 서역남도를 거쳐서 간다라 각국을 역방, 각각 국서를 봉정했으며, 대승불전 170부를 얻어 가지고 522년 귀국했다. 그의 여행기는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수록돼 있는데, 당시 여러 나라 사정 및, 불교신앙 상태와 불적(佛跡) 등에 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서역사정을 아는데 귀중한 자료이지만, 문헌학적으로는 다소 문제가 있다.
※달마 대사의 사구게(四句偈)---“외식제연(外息諸緣) 내심무천(內心無喘) 심여장벽(心如墻壁) 가이입도(可以入道)-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마음에 헐떡거림이 없으며,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도에 들어갈 수 있다.” ---선도론(禪道論) 참조.
*달마급다(達磨汲多, 笈多, Dharmagupta)①---BC 3세기경 인도승려, 담무덕(曇無德)이라 불리며, 법장(法藏) ․ 법호(法護)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부파불교 화지부(化地部)에 속했었으나, 법장부(法藏部)를 만들어 독립했다. 이 법장부를 담무덕부(曇無德部)라고도 한다. 담무덕은 출가한 승려가 불법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계율을 자세히 기록한 불교 율전인 <사분율(四分律)>을 작성했다.
※사분율(四分律)---담무덕이 상좌부(上座部)의 근본율 중에서 자기 견해에 맞는 것만을 네 번에 걸쳐 뽑아 엮은 율서. 4대 계율서(戒律書)의 하나이다.
*달마급다(達磨汲多, 笈多, Dharmagupta, ?~619)②---중국 수나라시대 활약한 인도 출신 승려로서 616년 <약사여래본원경(藥師如來本願經)>을 한역했다. 이에 따라 이후 약사여래에 대한 신앙이 구체화됐다.
*달마 서래의(達摩西來意)---달마 대사가 서쪽 땅 인도에서 동쪽 땅 중국으로 건너 온 까닭이 무엇인가라는 말. 불교 근본이 무엇이냐, 불법의 참 뜻이 무엇이냐 라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즉,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가져온 진리의 근본은 무엇인가 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조주(趙州從諗, 778~897) 선사 대답은 뜻밖에도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였다. 이 말은 화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잣나무는 감정이 없는, 무심한 나무이다. 무심이란 공(空)을 뜻한다. 즉, 무심한 공의 상태가 바로 달마 대사가 서쪽(인도)으로부터 가지고 온 선(禪)의 진리요, 그대가 찾는 깨달음의 세계라는 말이다.
또 비슷한 이야기가 전한다. 중국 당나라시대 우두종(牛頭宗)의 숭혜(崇慧, ?~779) 선사에게 어떤 수좌가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기 전에도 (중국에) 불법이 있었습니까?(如何是 祖師西來意?)” 이에 대한 물음의 답이,
“만고에 변함없는 허공에 하루아침의 바람과 달(萬古長空 一朝風月)”이었다.
태고부터 있어온 영겁의 하늘(공간)에 어느 날 문득 바람 한번 스쳐 지나가고 달빛 비친 격이랄까. 달마(達摩)가 서쪽에서 오기 전에도, 석가가 입을 열어 설법하기 전에도, 불법은 있었다는 얘기이다. 달마의 전법이나 석가의 설법은 모두 만고장공의 일조풍월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모든 것이 공(空) 그 속에 있음이라는 말이다.---→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참조.
*달마선(達磨禪)---조사선(祖師禪)을 말한다. 달마선은 달마대사에 의해 전개된 선법이다. 달마 이후 2조 혜가(慧可, 478~593), 3조 승찬(僧瓚), 이어서 4조 도신(道信, 580~651), 도신의 뒤를 이은 제5조 홍인(弘忍, 602~675), 홍인 선사 아래에 신수(神秀, 602~706)와 혜능(慧能, 683~713)이 배출됐다.
달마 이전의 중국 불교는 경전 위주의 이론이었다. 주로 교학 위주의 불교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달마가 그의 스승으로부터 깨달음을 선(禪)을 통해 얻었다. 그런데 이러한 선법이 먹혀들 것 같지 않았다. 인도에는 이미 밀교가 성행해서 불교가 쇠퇴 일로에 있던 때였기에 그의 스승 반야다라(般若多羅, ?~457) 존자의 지시에 따라 중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 와 보니 선 위주가 아니고 교리 위주인데, 이것마저도 부처님 법을 정확히 이해 못한 상태였다. 불교가 중국인들 사이에 토착화가 제대로 안 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달마로부터 조사선이 전개돼 나갔다. 따라서 달마 이전의 중국 불교는 교리 위주, 달마 이후의 불교는 선 불교라 하겠다. 6조 혜능은 이 두 가지 불교를 원흉회통 시켰으니, 돈오는 교리로, 수행은 선으로 지속하는 중국식 불교를 완성했다.
신수는 북쪽지방을 중심으로 선법을 폈기 때문에 신수선을 북종선이라 하고, 혜능은 남쪽을 중심으로 선법을 폈기 때문에 혜능선을 남종선(南宗禪)이라 한다. 이리하여 남북 선종이 양립해 당나라 시대 달마선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결국 남종선이 주류를 이루었고, 남종선은 특히 황벽(黃檗, ~856)과 임제(臨濟, ~867)에 의해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때에 임제종풍이 일어나고 위양종(僞仰宗), 조동종(曹洞宗), 법안종(法眼宗), 운문종(雲門宗)이 출현했는데, 이 5종이 모두 달마선 계통, 특히 혜능 계통에서 나온 선종이다. 이러한 선불교를 우리나라에 전래한 것은 신라말 신행(神行, ~779)이었다. 그 후 많은 명승이 나서 9산이 성립됐고, 고려에 들어와서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이를 통합해 임제 계통의 맥을 이은 조계종을 창시했다. 이 후 조계종은 한국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돼 오늘에 이러고 있다.
이러한 달마선의 종지(宗旨)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다.---→조사선(祖師禪) 참조.
*달마 선도론(禪道論)---→선도론(禪道論) 참조.
*달마야중(達磨耶衆)---여기서 ‘달마’는 중국에 선을 최초로 전한 달마 대사가 아니라, 진리라는 의미의 ‘달마(다르마, dharma)’를 말한다. ‘야(aya=耶)’는 접미사로 ~에게, 영어로는 ‘to’의 뜻이고, ‘중(衆)’은 무리란 말이다. 따라서 달마야중은 달마야(dharmāya=達磨耶)라는 산스크리트어에 ‘모음’이란 뜻의 ‘중(衆)’이라는 한자를 합친 글이므로 달마야중은 ‘진리를 추구하는 무리에게’라는 뜻이 된다.
*달마어록(達磨語錄)---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중국의 간쑤성(甘肅省) 돈황석굴(敦煌石窟, 둔황석굴)에서 새롭게 많은 불교 자료들이 발굴됐다. 그 돈황의 문헌 가운데 달마어록이 있었다. 달마의 말씀을 전해주는 최고(最古)의 문헌이다.
달마(Dharma)란 만물의 순수한 본성을 일컫는다. 달마의 눈으로 보면 모든 현상은 공(空)하게 보인다. 거기에는 집착도 없으며 주도 객도 없다. 달마(Dharma)란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쉽게 다른 말로 설명한다면 사물의 본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불의 성질은 뜨겁다. 얼음의 달마는 차가운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달마는 무엇인가? 그것은 무아(無我)이며, 침묵이며, 자비심이 용솟음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구하는 행위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그대를 본질에서 벗어나게 한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달마[菩提達摩]가 가르친 진리의 핵심이다. 즉,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 달마어록의 요체이다.
도(道)에 이르는 길은 많다. 하지만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두 가지란 원리적인 방법과 실천적인 방법이다.
원리적인 방법이란 가르침에 의해서 본질을 알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똑 같은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믿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감각[見聞覺知]과 망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망상을 등지고 실체로 돌아와 벽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은 나도 없고 남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중생과 부처가 하나이다. 그런 사람들은 경전을 대하고도 흔들림이 없으며, 무언중에 원리와 완전한 하나를 이룬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러한 상태를 우리는 이입(理入), 즉 원리로 도에 들어갔다고 부른다. 실천적인 방법[行入]에는 네 가지가 있다. 그것을 사행(四行)이라고 부르는데 다음과 같다.
①. 억울함을 참는 것이다. ― 보원행(報怨行)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불행不幸을 만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셀 수 없는 세월 동안 나는 본질적인 것에서 등을 돌리고 하찮은 것을 위해 살았으며, 여러 가지로 존재의 겉모습을 바꾸어 가며 방황해 왔다. 그러면서 까닭 없이 자주 화를 내고, 수없이 계율을 위반하는 죄를 범했다. 지금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과거의 잘못으로 벌을 받고 있다. 어떤 신(神)이나 인간도 잘못된 행위가 언제 그 열매를 맺는지 미리 예견할 수 없다. 나는 열린 가슴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며, 억울하다고 불평하지 않으리라. 경에 이르기를 “그대가 불행을 만나더라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사리(事理)에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그대는 원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억울함을 참으로써 그대는 도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②. 인연(因緣)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 수연행(隨緣行)
모든 사람은 본래의 자아(自我)란 것이 없으며 단지 인연에 따라 움직인다. 만일 우리가 어떤 큰 보상, 즉 부와 명성을 얻는 일을 만나더라도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뿌린 씨앗을 거두는 것일 뿐이다. 인연이 다하면 그것은 또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그러니 기뻐할 것이 없다. 성공과 실패가 모두 인연을 따라오는 것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마음이 들뜨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다. 세속의 즐거움 따위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도를 따른다.
③.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 것이다. ― 무소구행(無所求行)
이 세상 사람들은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항상 어떤 것을 갈망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항상 무엇인가를 구하는 중에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깨어 있다. 그들의 이성은 세상의 길과 차원을 달리한다. 그들은 마음을 성스러운 곳에 고정시키고 몸마저 계절의 흐름에 따라 변화시킨다. 모든 현상계는 공(空)하다. 그것들은 추구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이며 복과 화는 영원히 함께 한다. 삼계에 머무는 것은 불타는 집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육체가 있는 한 그 사람은 고통스럽다. 어떤 사람이 그 속에서 평화롭게 안주할 수 있겠는가?
④. 다르마(Dharma)를 따라 사는 것이다. ― 칭법행(稱法行)
다르마란 만물이 본질적으로 순수하다는 진리[本性]를 일컫는다. 이 진리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텅 빈 공(空)이다. 거기에는 더러움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경에 이르기를 "다르마는 어떤 존재도 포함하지 않는다. 존재의 오염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르마에는 자아가 없다. 자아의 미추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진리를 체득하고 확신해서 다르마에 따라 실천한다. 그대가 아무 것도 구하지 않을 때 그대는 이미 도 안에 있다.
이상을 살펴 볼 때, 보원행(報怨行)은 자기의 기존관념을 버림이요. 수연행(隨緣行)은 모든 것이 상호작용함이요. 무소구행(無所求行)은 만물에 집착함이 없이 행하는 자비심이요. 칭법행(稱法行)은 다양한 변화에 대처하는 응용력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입사행(理入四行)을 명심해서 어떤 경우에 어떤 고생을 하고 어떻게 불행한 시련을 겪는다 하더라도 부처와 나는 둘이 아니라고 달관해야 한다. 살다보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싫든 좋든 나의 언행이 누군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에 대한 반응 또한 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럴 때 보원행과 수연행을 통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힘든 일을 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또 무소구행을 통해 필요에 따라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칭법행을 통해 자신과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황이 어떤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면 근본적으로 괴롭지 않은 마음을 얻게 된다. 다친 마음의 치유는 결국 지혜로운 수행의 실천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외에 <달마어록>엔 본성론(本性論), 진신론(眞身論), 선도론(禪道論), 관심론(觀心論), 안심론(安心論) 등이 있다.---→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참조.
*달마 혈맥론(達磨血脈論)---→혈맥론 참조.
*달무상법(達無相法)---형상이 없는 법을 통달했다는 말이다. 중생은 상을 따라 움직인다. 유형의 존재가 있다고 보는 것이 상법(相法)이다. 물론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등도 상법에 속한다.
반면 무상법(無相法)은 어떠한 형상도 없다는 법이다. 상(相)을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형상이 없으므로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앞에 있는 그 무엇을 보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욕을 들어도 칭찬을 들어도 똑같다는 말이다. 무상법(無相法)에 달통하셨다는 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標月之指)---불교에서는 표현된 언어ㆍ문자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한다. 달은 진리, 깨침을 나타내고 손가락은 언어ㆍ문자 등 상징세계를 가리킨다. 그런데 손가락[교법(敎法) 혹은 경전]에 집착하면 달을 볼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교법도 버리라고 한다. 깨달으려 하지 않고 알음알이 이론공부에만 치중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선가에서 참선 등 용맹정진을 해 돈오(頓悟) 할 것을 주문하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담당국사(湛堂國師, 13세기)---금나라 왕자로 알려진 인물로서 고려에서 활동한 승려. 순천 송광사가 배출한 16국사의 한 사람으로 제9세 국사였으며, 송광사 천자암(天子庵)의 주인공이다. 천자암엔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을 비롯해서 나한전ㆍ산신각ㆍ법왕루ㆍ요사 등이 있다. 암자 뒤쪽에는 천연기념물 제88호 쌍향수(雙香樹)가 서있다.
이 두 그루 곱향 나무에는 창건자인 담당국사와 연관된 전설이 전한다.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가 금나라 장종(章宗) 왕비의 불치병을 치료해준 것이 인연이 돼 그 왕자 담당을 제자로 삼아 데리고 귀국한 뒤, 두 사람이 짚고 온 지팡이들을 암자 뒤뜰에 꽂아둔 것이 자란 것이라고 전한다. 이 나무는 수령 800년에 높이 12.5m에 이른다. 그러나 보조국사와 담당국사 당시와는 다소 연대적 차이가 있다.
*담란(曇鸞, 476~542)---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에서 활약한 중국 정토종 개조. 아미타불 본원(本願)에 착안해 타력본원설(他力本願說)을 가장 먼저 주장했다. 담란은 세친의 <정토론(淨土論)>에서 힌트를 얻어 <무량수경>을 중심으로 한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으로 정토사상을 확립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고유 민간신앙도 원용해 정토사상을 중국에 정착시키는 기초를 마련했다. 그리하여 후세에 그를 중국정토종 제1조라 불렀다.
담란은 모든 중생은 부처님 가피를 입는 타력으로 ‘왕생(往生), 불퇴전의 경지, 보살도(菩薩道)’ 세 가지를 완성한다는 타력본원설을 주장했다. 모두 아미타불 대원(大願)의 작용으로 부처님 가피를 입지 않는 자가 없다고 했다. 이는 타력본원을 단적으로 잘 말해 주며, 불 ․ 보살의 이타적 구제 원력에 의지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처 본원설의 사상적 기반이 된 불경이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이다. 그리고 자력구원(自力救援)의 대표적인 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면 타력본원(他力本願)의 대표적인 부처님은 아미타불이다.
한편 <무량수경론> 주석서인 <왕생론주(往生論注)>를 저술해, 아미타불 본원과 그 성격을 올바르게 포착해서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로 분별해 타력본원설(他力本源說)을 주장하면서 난행도를 버리고 보살의 본원력(本願力)에 편승하는 이행도를 따를 것을 선포했다.---→타력본원설(他力本源說) 참조.
※타력본원설(他力本源說)---부처와 보살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타력구원 사상임.
*담림(曇林)---선종 초조(禪宗初祖) 보리달마(菩提達摩) 대사 제자로서 주로 6세기, 5호16국시대에서 수나라시대까지 활약한 인물이다.
담림은 처음 북위(北魏)에서 불전번역가 보리유지(菩提流支)를 도와 필수자(筆受者)로 많은 공헌을 했다. 필수자란 서방에서 온 승려가 불전의 대의를 구두로 번역해 들려주면, 그것을 한문으로 정리해 필사하는 사람으로서, 번역가인 동시에 편집자라고 할 수 있다. 어학에 남다른 재주가 있어야 하며,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재질이 있어야 필수자가 될 수 있었다. 담림은 매우 우수한 필수자였을 뿐만 아니라 <승만경(勝鬘經)>의 연구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대표적인 간경인(刊經人)이었다.
그런 그가 어떤 경로로 교학을 등지고 보리유지를 떠나, 진검(眞劍)으로 도를 구하는 달마 교단에 참여하게 됐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문헌이 없다. 다만 경전연구와 보급만으로는 불법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해, ‘경론에서 선으로’ 진로를 바꾸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달마의 제자가 된 담림은 스승의 어록을 정리해 역사에 남겼다. 담림이 남긴 <달마어록(達摩語錄)>은 극히 간결하며, 교설 역시 단순명료한 것이 특색이다.
이런 배경이 있어서 보류유지가 광통 율사(光統律師)와 더불어 달마 대사를 독살했다는 말이 전하는 것 같다.
*담마(曇摩, 빠알리어 dhamma)---산스크리트어 달마(dharma)에 해당하는 ‘불법’을 일컫는 팔리어이다. 즉, 부처님 말씀을 팔리어 경전에서는 ‘담마(dhamma)’라 한다. 한자로는 법, 불법, 진리, 부처님 가르침 등으로 나타낸다.---→다르마(法, 달마/達磨) 참조.
*담마딘나(Dhammadinnā, 法施)---부처님 당시 위사카(Visākha) 장자와 부부였던 비구니로서, 불교사에서 최고의 부부라 할 수 있는 분들이었다.
부처님께서 죽림원(竹林園)에 계실 때 백만장자인 부호였던 남편 위사카는 신심 있는 재가 신자로서 부처님의 설법을 경청하고 보리심을 발해 예류자가 됐다. 그 후 위사카 장자는 다시 일래과(사다함)를 얻으면서 “감각적 욕망과 악의”라는 두 가지 장애가 현저하게 약화됐다.
그리고 다시 5년 뒤 위사카는 마가다국의 빈비사라(頻毘娑羅, Bimbisara)왕, 그리고 많은 이와 더불어 아나함(불환과)의 단계에 들어섰다. 불환자(아나함)에게 감각적 욕망와 악의는 완전히 제거된다. 두 가지 장애가 완전히 제거됐기 때문에 위사카 장자는 즐거운 느낌, 격분, 분노, 실망, 불쾌감, 불행, 역겨움, 근심, 애정 등으로부터 벗어났고, 세속적인 욕망마저 모두 소멸하게 됐다. 재산에 대한 탐욕도 아내에 대한 애정도 사라지고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열반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황홀한 기쁨과 환희의 느낌 안에 있었다. 위사카 장자가 사원으로부터 집으로 귀가할 때 그는 마치 출가한 승려처럼 고요해 보였고, 주위환경에 의해 산란해짐 없이 평온했다. 마치 부지런히 마음챙김을 실천하는 수행자 같았다.
이러한 위사카의 전과 같지 않은 행동을 눈치 챈 담마딘나는 남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남편 위사카는 자신은 이미 옛날의 위사카가 아니며 열반을 얻고자 하는 수행자로서 자신의 재산을 모두 아내인 담마딘나에게 주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에 담마딘나는 남편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자신 역시 출가수행의 길에 나아가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리하여 남편이 준다고 한 재산에 대해 “당신이 뱉어버린 침(재산)을 나 또한 받아 지니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그리고 그 길로 부처님 교단에 출가해 담마딘나 비구니가 됐다. 남편의 재산까지도 물리쳐버리고 철저한 무소유로 수행에 임했던 담마딘나 비구니를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으로 칭찬하셨다.
「탐욕에 눈멀면 분명한 대상도 거꾸로 보인다.
앞에도 뒤에도 중간에도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빈손으로 집착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수행자라 부른다.」 - <법구경>
위의 게송은 부처님께서 담마딘나 비구니를 칭찬하신 말씀이다. 담마딘나는 <아라한구덕경>에서는 ‘시법(施法) 비구니’로 번역돼 있다. 담마딘나 비구니의 이야기는 <증일아함경>과 <아라한구덕경> 등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다.
담마딘나 비구니는 다른 비구니들과 함께 여러 해 동안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수행에 전념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아라한과를 성취하는 성자 비구니가 됐다. 자신의 깨달음을 완성한 담마딘나 비구니는 옛날에 인연 있던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 라자그리하(왕사성)로 돌아왔다.
위사카는 옛 아내 담마딘나 비구니가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찾아갔다. 위사카는 아내가 아닌 비구니로 담마딘나를 공경 예배했다. 그리고 그녀의 깨달음을 검증하기 위해 문답을 나누었다. 그 때 담마딘나의 해답은 너무도 분명했다. 그 내용이 <교리문답의 짧은 경(有明小經)-M44)>에 남아있다.
그래서 경전에는 ‘진리의 뜻을 잘 분별하고 모든 법의 부분을 널리 설하는 것이 제일인 비구니(分別義趣 廣說分部)’, 또는 ‘능히 묘법을 방편으로 잘 알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能於妙法 善巧敷宣)이 있는 제일의 비구니’라고 찬탄해 기록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교리에 밝은 비구니였다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 大愛道)의 출가 이후 여성들도 거침없이 출가수행자의 길에 나아갔을 뿐만 아니라, 각 분야의 ‘제일의 비구니’로서 이름을 드날리는 이들이 있었다.
담마딘나 비구니의 경우는 무소유(無所有)의 수행과 자신이 모든 교리와 이치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남에게도 잘 이해시켰던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소유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린 맑은 모습이다. 세상에 욕심이 없으면 눈에 가렸던 혼탁함이 걷히기 때문에 자연히 세상의 이치를 밝게 비추어 볼 수가 있다. 탐욕에 눈이 어두우면 눈앞에 분명한 것도 거꾸로 보기 쉽기 때문이다. 담마딘나 비구니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일지감치 물질의 소유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세상의 이치를 밝게 비추어 보는 진리의 소유자가 됐던 것이다.
*담마라차(Dharmaraja)---→법왕 참조.
*담마류지(曇摩流支, Dharmaruci)---5세기에 중국 5호 16국시대 후진(後秦)에서 활약한 서역출신승려. 법락(法樂)이라고도 한다. 405년에 중국으로 왔으며, 그는 계율을 잘 알았으므로 구마라습 등과 <십송률(十誦律)> 번역에 참여했다.---→십송률(十誦律) 참조.
*담마야사(曇摩耶舍)---서역 계빈국출신 승려, 중국이름은 법명(法明)이다. 5세기 초 진(晋)나라 때 중국에 와서 역경사업을 펼치다가 5세기 중엽 송(남북조시대의 송)나라 때 서역으로 돌아갔다. 담마야사 제자에는 인도인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난 축법도(竺法度)가 있었다. 그도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를 잘해 스승을 도와 역경사업에 종사했다.---→축법도 참조.
※계빈국(罽賓國)---펀자브(Punjab) 북쪽, 카불(Kabul) 동쪽에 있던 고대 국가.
*담마팔라(Dhammapāla)---5세기 후반에 나타난 남방(스리랑카) 상좌부 마하비하라파(大寺派)의 주석가로, 확실한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붓다고사(Buddhagosa, 불음/佛音)와 더불어 남방 상좌부 최대 주석가로 꼽히는 중요한 인물이다. <장로게>, <장로니게> 등 초기불교경전의 주석을 쓰고, 나아가서 붓다고사(불음)의 저서 <청정도론(淸淨道論)> 주석서를 남겼다. 그러나 남방 상좌부에서 <체요략론(諦要略論)>을 쓴 담마팔라, 그리고 대승유식학파의 호법(다르마팔라)과는 다른 사람이다.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화엄경(華嚴經)>에 따르면 금강산에 머물고 있다는 보살이다. 담무갈보살은 금강산이라는 이상향에서 12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금강경>을 설하고 있다고 하며, 금강산 12000봉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
담무(曇無)란 빠알리어 dhamma(法)를 소리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담무갈보살이란 법을 일으키는 보살이란 뜻이므로 법기보살(法起菩薩)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80권 화엄경> 제보살주처품에 보살들이 머무는 곳 23곳을 소개하고 있는데, 금강산은 그 중 여섯 번 째로 등장한다. 여기에는 동해의 금강산으로 표현해 경전 속의 금강산이 곧 우리나라 금강산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화엄경소>에 구체적으로 설명돼 있다. 이 보살이 머무는 곳은 중향성(衆香城)인데, 실제 비로봉을 내금강 쪽에서 바라보면 병풍처럼 감는 봉우리들이 보여, 이를 중향성이라 한다. 그리고 비로봉은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에서 따온 것이고, 만폭동 계곡 아래에는 법기봉이 위치해 있다.
*담무덕(曇無德)---달마급다(達磨笈多)와 동일 인물.---→달마급다(達磨笈多) 참조.
*담무참(曇無讖, 산스크리트어 Dharma-rakṣa, 385~433년)---중인도 출신으로 10세에 출가한 후, 처음에는 소승불교와 인도 일반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그 후 대승불교를 연찬한 후, 수많은 대승경전을 가지고 서역 구자국(龜玆國)과 노선국(露善國)을 거쳐 둔황에서 수년간 머무르며 북량(北涼) 왕 저거몽손(沮渠蒙遜, 재위:401년~433년)의 비호 하에 <대집경(大集經)>, <대운경(大雲經)>, <불소행찬(佛所行讚)>, <열반경(涅槃經)> 등을 한역함으로써 그가 번역한 경 ‧ 율들은 중국불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저거몽손의 오해를 받아 피살됐다.
*담선 법회(談禪法會)---선(禪)의 수행을 위한 법회의 하나. 선에 대한 이치를 공부하고, 선 수행을 위한, 선의 학습과 선풍(禪風)의 선양을 목적으로 한 법회였다.
고려 초기부터 국가가 주재해 보제사(普濟寺)에서 3년 단위로 개최했으며, 국가에서 주재한 것 외에 각 사원의 주재 아래 열린 것도 있었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신봉한 <육조단경(六祖壇經)>과 <대혜서(大慧書)>를 중심으로 법회가 개최됐다. 이 법회는 선의 수행을 목적으로 한 것 이외에도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많이 개최됐다. 고종과 원종 때에 특히 성행했다.
*담연(曇延, 516∼588)---중국 남북조 시대 때 포주(浦州) 상천(桑泉) 출신으로 수(隋)나라 시대까지 활약한 승려로 가장 오래된 <대승기신론> 주석으로 알려져 있는 <대승기신론의소(大乘起信論義疏)>의 저자로서, 일부 인사는 그가 <대승기신론>의 저자일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열반의소(涅槃義疏) 등도 저술했다.
*담연(湛然, 711~782)①---중국 당나라 천태종을 중흥시킨 제6조이다. 형계 존자(荊溪尊者)ㆍ묘락 대사(妙樂大師)ㆍ원통 존자(圓通尊者)라 불리기도 한다. 유학을 했으나, 17살 때 방암(金華方巖)에게 천태지관(天台止觀)을 전수받고, 뒤에 현랑(玄朗)을 스승으로 천태교의를 익혔다. 율 ‧ 선 ‧ 화엄 ‧ 유식사상 등을 깊이 공부하고 강남에서 천태교학의 저술을 연구, 무정물에도 불성이 있다고 주장해 천태교의를 발전시켰다. 저서에 <법화현의석첨(法華玄義釋籤)>,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 <마하지관보행전홍결(摩訶止觀輔行傳弘訣)>, <지관의례(止觀義例)>, <지관대의(止觀大意)> 등이 있다.
*담연(湛然)②---맑다, 투명하다는 뜻인데, 잔잔한 호수나 가을 하늘같이 마음이 맑고 깨끗해 욕심이 없는 것을 말한다. 소지장(所知障) 또는 이장(理障)의 가림이 없이 대보리(大菩提)의 지혜로 온갖 법을 이(理)와 사(事)의 모든 측면에서 밝게 아는 것을 말한다.
원효(元曉) 대사는 자신의 저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대의를 기술하는 문단에서 “본성, 즉 마음의 근원은 있음과 없음을 떠나 있어 홀로 청정[淨]하며, 마음의 근원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원융하고 있어서 담연하다(湛然: 편안히 다 비추다, 적정한 가운데 대지혜가 있다)”라고 말했다.
*담징(曇徵, 579~631)---고구려 승려. 영양왕 때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불교학은 물론 오경에도 능통했고, 채색, 지묵, 공예에도 능해 일본 불교미술사 발전의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그가 그린 법륭사(法隆寺) 금당벽화는 불후의 명작으로 전해 온다. 이 밖에 맷돌 제조법도 가르쳐 일본 문물 개화에 크게 기여했다.
*담판한(擔板漢)---인간은 원래 150도를 돌아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널빤지를 등에 짊어지면, 옆과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고 오로지 앞만 보고 가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두고 일컫는 불교용어이다. 선종에서는 소승 나한을 좁은 소견이라 해서 담판한이라 한다.
*담허(倓虛, 1875~1963)---근현대 중국 스님으로, 휘(諱)는 융함(隆銜)이고, 자는 담허(倓虛)이며, 하북성 출신으로 속가 이름은 복정(福庭)이다. 모친의 꿈에 승려가 나타나 하룻밤 묵고 가게 해달라는 청을 받고 다음날 스님을 낳았다. 12살 때 외갓집에 갔었는데 외할머니가 보니 엄연한 스님의 모습이었다. 17살에 결혼을 했고, 저승을 다녀오는 꿈을 꾸고는 출가의 뜻이 굳어졌다. 그리하여 틈틈이 경전을 탐독했으며, 특히 <능엄경>을 읽고 깊이 깨달은 바 가 있었다.
늦은 43세(1917년)에 출가했다. 절강성의 관종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제한 스님으로부터 천태교법을 전수받았다. 스님은 마음을 기울여 가르침을 청했고 남달리 진전이 빨랐다. 제한 스님께서는 스님으로 하여금 북방불교를 부흥하게 하기 위해 각별히 정성을 다해 가르쳐주셨다. 아들 4명 중에 두 분이 출가를 했다.
스님은 평생 강경과 설법, 사찰건립과 도제 양성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스님은 체구가 크고 위엄이 있었으며 목소리가 우렁찼다. 매번 법상에 오를 때마다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스님은 수많은 곳에서 사찰을 중건, 중수했으며, 가능한 각 사찰에 불학원을 설치해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 중에서 청도의 담산사(湛山寺)가 성황을 이루었다.
스님은 평생 교(敎)로는 천태학을 가르치고 수행(行)은 정토를 근본으로 삼았다. 평소 후학들에게 지관(止觀)과 염불을 닦을 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염불할 것을 간곡히 권했다. 문하에 염불공부가 깊어 미리 갈 시간을 알고 해탈을 얻은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스님은 30여 년간 <반야심경>, <금강경>, <아미타경>, <능엄경>을 수없이 설했고, 시방총림을 9곳, 불학원(佛學院) 13곳, 굉법지원(宏法支院) 17곳을 건립했으며, 해문(解門)은 천태, 행문(行門)은 정토로 대중들을 이끌었다. 각 사찰마다 오후 불식과 하안거에 계율을 엄격히 지키셨는데 북방불교에서 보기 드물었다.
항일전쟁 승리 후 담산사(湛山寺)로 돌아오신 스님은 상좌들의 요청으로 평생의 사적을 구술(口述)하고 제자 대광(大光)이 <영진회억록(影塵回憶錄)>을 편성했다.
스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일 대중들을 맞이해 강의를 하셨으며, 하루 종일 쉴 틈이 없었다. 항상 대중들에게 이르기를 불법의 요지는 간파(看破), 방하(放下), 자재(自在)에 있다고 하셨다. 1963년 열반 하셨는데 세수89세, 법랍 38년이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당간(幢竿)이란 사찰에서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부처님 공덕을 기리는 당(幢;깃발)을 다는 깃대를 말한다. 이 깃대(장대)를 양쪽에서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돌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나 철제 혹은 목제인 경우도 드물게 있다.
석재 당간지주로는 안양시 석수동에 있는 중초사지당간지주(中初寺址幢竿支柱, 보물 제4호)가 유명한데, 이 당간지주 서주(西柱-서쪽 지주) 서면(西面)에 826년(신라 흥덕왕 1)에 채석해 이듬해 2월에 완성했다는 주기(柱記)가 각자(刻字)돼 있어서 당간지주양식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리고 당간은 나무장대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철제 당간으로는 충북 청주 용두사 터 철 당간에 그 조성연대와 철통 척 수가 새겨진 명문이 있어서 국보 제41호로 지정돼 있고, 계룡산 갑사의 것도 철제 당간이다. 그리고 통도사 석당간처럼 석제 당간도 있었다.
당간지주는 사찰에서 삼문(三門) 형식이 정착되기 이전에 사찰의 존재를 표시한 것으로 경내 바깥쪽에 위치해 지금의 안내간판과 같은 역할을 하던 유물이다. 당간(幢竿)이라는 깃대 위쪽에 도르래 장치를 해서 당(幢)을 부착할 수 있도록 제작했다. 당간에 부착하는 당이란 깃발과 같은 장엄물로서 천으로 만들어 길게 늘어뜨리는 번(幡)과 같은 표찰을 의미했다. 옛날에는 수 십 미터 높이의 당간에 그 절의 소속 종파나 특정행사와 관련된 깃발을 내걸어 장엄했다고 한다.
당간의 유래는 인도 기원설과 중앙아시아 기원설 두 가지가 있다. 인도 기원설에는 불탑을 장엄하는 일산(日傘)과 깃발 등 장엄물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즉, 불탑을 장엄하던 깃발 중에서 일부가 당간으로 변했다는 주장이나 설득력이 약하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당간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기원설은 솟대에서 비롯된다. 중앙아시아 샤먼들은 신성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해 신장대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솟대’이다. 솟대란 ‘소도(蘇塗)’라는 신성한 지역을 나타내기 위해 세운 기념물로 그 위에 새를 조각해서 얹어 놓았다. 여기서 새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 역할을 하는 동물로 침엽수ㆍ사슴과 더불어 중앙아시아 샤먼들의 중요한 상징물이었다. 이것이 불교에 편입돼 당간으로 발전한 것으로 본다.
우리나라 당간은 절 입구에 하나를 세운 반면에 중국 당간은 경내에 쌍으로 세운 것이 다르다. 중국불교는 북로라고 불렀던 중앙아시아 신장대 문화보다는 인도 영향을 더 많이 받았던 까닭에 금당 좌우에 당간을 세웠는데, 여기에서 파생된 말이 좌우당간(左右幢竿)이다.
*당기일구(當機一句)---‘당기(當機)’란 어떤 질문에 대해 능히 대답할만하고, 상대방을 이끌어 가는 자재 무애한 능력, 교법에 상응하는 근기, 어떤 일을 능히 감당할만한 근기, 능히 견성할 수 있는 근기를 말한다. 또는 그런 근기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당기일구’란 깨달음을 이룬 한 마디, 깨달음에서 나오는 절실한 한 마디, 견성(見性)하는 순간 나오는 오도의 한마디를 이르는 말로서, 오도송(悟道頌)을 일컫기도 한다. 즉, 깨달은 순간 척 나오는 일구(一句), 이것이 가장 소중하다. 당기일구(當機一句)가 석화전광(石火電光)처럼 나오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선지식은 말했다.
“수많은 공안에 대해 확연명백하지 못할 것 같으면, 크게 쉬는 땅을 얻었다고 할 수가 없고, 고인들과 같은 경지를 수용할 수도 없다. 그러니 모든 참학인(參學人)은 고인의 경지에 근간을 두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베풀어져 있는 공안(公案)의 그물을 다 뚫어 지나가야 한다. 이처럼 당기일구(當機一句)의 기틀을 갖추지 못했다면, 접인(接人)할 능력도 없을뿐더러 알았다고 하는 것도 모두 망령된 사견(邪見)에 지나지 않는다. 고인들의 전지(田地)에는 꿈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다.”
*당기중(當機衆)과 결연중(結緣衆)---<법화경>에 나오는 말로서, 교(敎)를 듣는 사람의 근기나 수준에 따라 넷으로 나누어서 사중(四衆)이라고 하는데, 발기중(發起衆), 영향중(影響衆), 당기중(當機衆), 결연중(結緣衆)의 넷이다.
여기서 당기중(當機衆)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곧 이를 신해(信解)하는 근기가 높은 사람들을 말하고, 결연중(結緣衆)은 근기가 낮아 당장 신해하지는 못하나 부처님 가르침에 열심히 인연을 맺는 사람들을 말한다.---→사중(四衆) 참조.
*당래불(當來佛)---당래불은 미래에 오는 부처를 말한다. 부처의 출현을 시간에 따라 과거불(過去佛) ․ 현재불(現在佛)) ․ 당래불(當來佛)로 나누기도 하는데. 과거세에 나타난 부처를 과거불 또는 고불(古佛)이라 하고, 미래에 나타나는 부처를 당래불 또는 후불(後佛)이라고 한다. 과거불에는 석가모니의 전생에 그가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는 연등불(燃燈佛)을 비롯한 과거7불(석가모니도 포함됨) 등이 있고, 미래불(당래불)에는 현재 도솔천(兜率天)에 있다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한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서 성불한다는 미륵불이 있다. 소승은 부처를 향해 공부하는 당래불 사상이요, 대승은 부처임을 자각하는 본래불 사상이다.
*당번(幢幡)---당번이란 당(幢)과 번(幡)을 말한다. 당(幢)은 절에서 의식이 있을 때, 절 앞에 세우는 깃발이다. 깃발에는 불화(佛畵)를 그려 부처님이나 보살의 위엄을 나타낸다. 승번(勝幡)이란 불ㆍ보살(佛菩薩), 곧 모든 부처님이나 보살의 성덕을 나타내는 깃발이다. 불교가 일어나기 전, 고대 인도에는 100 여개의 바라문 교파가 항상 바라문 교법에 대해 토론을 하고 승패를 겨루었다. 그 때 토론에서 지는 편은 항복을 하고, 이긴 편은 그 표적으로 자기 집 대문 앞에 깃대, 곧 승번(勝幡)을 세웠다. 고대 인도의 이러한 바라문교 신앙문화가 불교에 유입된 것이다.
*당체즉공(當體卽空)---모든 존재가 존재 그대로 공하다는 말이다. 불교를 이해할 때 분석할 석(析)과 빌 공(空)자를 합한 석공(析空)이 있고, 곧 즉(卽)과 빌 공(空)자를 합한 즉공(卽空)이 있다.
석공(析空)은 현대 물리학적으로 분석해 들어가서 쪼개고 쪼개서 그야말로 아주 궁극적인데 이르러서 모두가 다 소립자(素粒子)가 되고 종당에는 에너지 파동으로 비어버리는 것을 석공이라 한다.
즉공(卽空)은 현대인들이 잘 이해를 못하는 것인데, 바로 있는 것 그대로 공이란 말이다. 사람을 보면 사람 그대로 공이고, 금은 금 그대로 공이어서 바로 당체(當體) 그대로 비어있음을 말한다. <반야심경>의 색즉공(色卽空)과 같은 말이다. 바람에 의해 일어난 파도가 그대로 물이고, 물 그대로 파도인 것을 직관해서 그대로 보라는 것이 당체즉공이다. 불교에서는 사람들 안목에 따라 보고 듣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몇 가지로 분류해서 이야기한다.
첫째, 보통 사람들, 즉 범부의 안목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집착한다고 본다.
둘째, 성문(聲聞)들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존해, 보이고 들리는 모든 존재들이 공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안다.
셋째, 연각(緣覺)들은 스스로 체험을 통해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결합된 가유(假有)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을 안다. 교리적 용어로는 필경공(畢竟空), 또는 분석공(分析空) 견해이다.
넷째, 보살들은 모든 존재가 존재 그대로 공하다는 것, 곧 당체즉공(當體卽空)의 이치를 안다.
보고 듣는 일은 모두가 환영이며 삼계는 실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공화(空華)]과 같으니, 번뇌가 소멸된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그 모든 것이 꿈속의 일과 같다고 하는 <능엄경> 가르침은, 보살의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존재가 그대로 공하다는 당체즉공(當體卽空)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중생 모두가 거품을 가지고 산다. 아무리 금붙이를 많이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에 그림자를 붙인 것이다. 마음 찾기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일체물질이 사실은 텅텅 빈 것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했다. 물질 그대로가 공(空)이기 때문이다. 과학자같이 물질을 분석해서 아는 석공(析空)이 아니라, 당체즉공(當體卽空)이고,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 중생이 생사 윤회하는 모든 세계인 삼계에 오직 마음뿐이란 말이다. 색즉공(色卽空)은 그렇게 분석한 뒤에 공(空)이라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바로 공, 당체즉공(當體卽空)이란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당체가 바로 공인가. 모든 것이 인연법을 따르기에, 연기법은 우주대법(宇宙大法)이다. 우리가 불교를 생각할 때는 언제나 연기법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중생은 연기법을 모르고 성자는 연기법을 안다는 차이이다. 진여불성이 연(緣) 따라서 잠깐 나타난 것이 세상현상이다. 당체즉공(當體卽空)이란 말이다.” - 청화(淸華) 스님
<반야심경>은 일관되게 공(空)사상, 무(無)의 사상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살아가고 있고, 모든 것이 있음을 근거로 해서 삶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한결같이 없다, 공이다, 공으로 봐야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공으로 봤을 때 인간이 가진 무한한 능력을 한끝 펼쳐 보일 수가 있으며. 본래 갖춘 부처로서의 어떤 삶을 누릴 수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일관 되게 하고 있다.
대게 공(空)을 이야기를 할 때 연기(緣起)를 이야기한다, 모든 존제는 인연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과 저것이 모여서 비로소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그렇고, 우리 육신, 집, 자동차, 전부가 다… 이것과 저것이 어우러져서, 그 어우러진 인연의 힘으로 있는 동안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인연의 힘이 다하면 낱낱이 흩어지기 때문에 연기의 입장에서 볼 때 공이라 보는 것이다. 그것을 분석공(分析空)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 우리 육신 역시 잘 살아야 백년이면 다 죽게 돼 있다, 어떤 견고한 자리도, 부귀영화도, 세월이 오래 가면 끝내 무상해서 흩어지고 망가져서 성주괴공(成住壞空) 하듯이 끝내 공(空)으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경공(畢竟空)이다. 그런데 <반야심경> 입장은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하는 분석공(分析空)도 아니고 무상하니까 공이라고 하는 필경공(畢竟空)도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즉 색 그대로 공이라고 한다,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공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니 그것을 당체즉공(當體卽空)이라고 한다. 연기는 연기 그대로, 물거품은 물거품 그대로, 돌은 돌 그대로, 사람은 사람 몸 그대로 공이다. 분석공(分析空)이니, 필경공(畢竟空)이니 하는 것은 공을 이해해 보려고 억지를 쓴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
*당취(黨聚)---당취(黨聚)란 승려들의 비밀결사 조직을 말한다. 구도(求道)가 승려의 본래목적이긴 하지만 지배세력에 핍박받는 백성들을 묵과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 중생을 먼저 구하는 것이 대승불교정신이라 주장하고, 그 무엇보다도 보민(保民) 보국(保國)사상이 우선시 돼야 한다는 것이 당취들의 신념이듯이 상당히 진보적인 승려들이었다. 임진왜란 때 승군을 조직해 국난극복 선두에 섰던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사명당 유정(惟政) 같은 이들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을 신불승(神佛僧)이라고도 했다.
한편 불교가 탄압받았던 조선시대 중기 이후 억불숭유정책으로 일부 유생들이 승려를 잡아다가 노비로 삼거나 여승들을 습격해 겁탈하는 등 훼불행위가 심각해지자 승려들 간에 자위수단으로 결성한 반체제 승려들 비밀결사 조직도 당취라 했다. 이런 당취(黨聚) 본거지는 전국적으로 여러 군데가 있었는데, 조선조 당시에 대표적인 곳으로는 3개파를 꼽는데, 지리산파, 금강산파, 그리고 변산반도파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선의의 당취 외에, 학문이나 수행이 없는 승려들이 모여서 조직한 비밀결사를 말하기도 했다. 이런 자들 모임을 폄하해서 땡추(당취)ㆍ땡땡이중이라는 말이 생겼다. 특히 조선조에 승려지위가 땅에 떨어진데다가 조선 중기 이후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수행이 없는 불량배에 가까운 당취들이 생겨 사회를 어지럽히기도 했다.
*당하지심(當下之心)---의식작용, 당장의 마음작용, 찰나의 마음을 말한다.
혜능선(惠能禪)의 특징인 자성불도(自成佛道), 자오자수(自悟自修), 돈오견성(頓悟見性)은 평민문화의 자립, 자력 정신과 쾌속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고행에 찌든 기존의 불교수행을 직관적 감오(感悟)에 바탕 한 즉심즉불(卽心卽佛)의 돈오성불로 대체시켰다. 성불의 씨앗인 추상적이고 본체론적인 불성을 인간의 천부적인 당하지심(當下之心)으로 현실화시켜 당하즉오(當下卽悟-당장의 즉각적인 깨달음)의 쉽고 빠른 다리를 놓은 것이다.
*대경(大經)---무량수경 2권을 가리킨다. ‘정토 3부경’ 중에서 가장 방대한 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경관심(對境觀心)---눈에 보이는 경치를 보면서 내 마음을 보라는 말이다. 보이는 것을 볼 때 보이지 않는 것도 보라는 뜻이다. 선은 대경관심(對境觀心)을 강조한다. 대경관심은 밖의 사물을 대할 때 그 사물과 연계되는 자신의 마음을 통찰함으로써 순간(生)이 곧 영원(死)임을 깨닫는 것이다. 감성적 초월을 통해 순간을 영원으로 인식함으로써, 움직이는 현상세계 가운데서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본체를 인식하려 한다. 선 수행자의 눈에는 세간의 만물은 움직이면서도 고요한 것이고, 일시적이면서도 영원한 것이다.
만물의 움직임과 고요함, 시간의 길고 짧음은 본질적으로 구별이 있을 수 없다. 이른바 동정일여(動靜一如)의 불이법문(不二法門)이고, 만물일여(萬物一如)의 도리이다.
*대공법경(大空法經)----잡아함 297경이 <대공법경(大空法經)>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이 연기법과 중도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류수(拘留搜)의 조우(調牛)라는 마을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땅히 너희들을 위해 설법하리라.
처음ㆍ중간ㆍ마지막이 다 좋고, 좋은 뜻과 좋은 맛이며, 순일(純一)하고 청정(淸淨)하며, 범행이 맑고 깨끗하나니 이른바 <대공법경(大空法經)>이라는 것이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어떤 것을 <대공법경>이라고 하는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
즉, 무명을 인연해 행이 있고, 행을 인연해 식이 있으며,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느니라.
태어남을 인연해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하면, 혹 어떤 사람은 '그 누가 늙고 죽으며, 늙고 죽음은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하고 따져 묻는다.
그러면 저들은 곧 '내가 곧 늙고 죽는다. 지금의 늙고 죽음은 내게 속한 것이고, 늙고 죽음은 바로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들은 '명(命)이 곧 몸[身]이다'라고 말하고, 혹은 '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곧 마찬가지 뜻인데,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일 뿐이다.
만일 '명이 곧 몸이다'라고 알아 말한다면, 그것은 범행자(梵行者)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또 '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고 보아 말한다면, 그것도 범행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두 극단에 대해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것이 바르게 중도(中道)로 향하는 것이다.
현인(賢人)과 성인(聖人)은 세상에 나와 사실 그대로 뒤바뀌지 않고 바르게 보나니, 이른바 '태어남을 인연해 늙음과 죽음이 있고, 이와 같아서 태어남[生]ㆍ존재[有]ㆍ취함[取]ㆍ애욕[愛]ㆍ느낌[受]ㆍ접촉[觸]ㆍ6입처(入處)ㆍ명색(名色)ㆍ식(識)ㆍ행(行)도 마찬가지이며, 무명을 인연해 행이 있다'고 보느니라.
만일 누가 '무엇이 곧 행이며, 행은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하고 물으면 저들은 곧 '행이 곧 나요, 행은 곧 내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저들은 이와 같이 '명이 곧 몸이다'라고 말하고, 혹은 '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든지 '몸이 곧 몸이다'라고 보는 자라면, 그런 범행자는 있을 수 없다. 혹은 '명이 다르고 몸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런 범행자도 또한 있을 수 없다.
이 두 극단을 여의는 것이 바르게 중도로 향하는 것이다. 현인과 성인은 세상에 나와 사실 그대로 뒤바뀌지 않고 바르게 보나니, 이른바 '무명을 인연해 행이 있고 ……(내지)……'라고 보느니라.
모든 비구들아, 만일 무명에서 탐욕을 여의어서 밝음[明]이 생긴다면, 그 누가 늙고 죽을 것이며, 늙고 죽음이 누구에게 속하겠느냐?
늙고 죽음이 곧 끊어지면, 마치 다라 나무 밑동을 자르듯 그 근본을 끊을 줄을 알아 미래 세상에 있어서 나지 않는 법이 될 것이다.
비구들아, 만일 무명에서 탐욕을 여의어서 밝음이 생긴다면, 그 누가 태어날 것이며 태어남이 누구에게 속하겠느냐? ……(내지)…… 누가 행할 것이며 행이 누구에게 속하겠느냐? 행이 곧 끊어지면, 마치 다라 나무 밑동을 자르듯 그 근본을 끊을 줄을 알아 미래 세상에 있어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법이 될 것이다.
비구들아, 만일 무명에서 탐욕을 여의어서 밝음이 생긴다면, 그 무명이 소멸하면 곧 행이 소멸하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나니, 이것을 <대공법경(大空法經)>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했다.
여기서 ‘대공(大空)’이란 크게 공한 것, 즉 중도공(中道空)을 말하는 것이지 변공(偏空)이 아니다. 일신(一身)의 진실한 생명체를 뜻하는 명(命)과 육신의 관계를 설명해, 현자와 성인은 명과 몸이 같다거나 다르다고 잘못 보지 않으며, 중도(中道)에 입각해 바르게 본다. 그리고 그 중도는 바로 연기설에서 유래하니, 다시 말하면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의해 비로소 해명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설은 결과적으로 중도를 지향하게 하며, 그것이 또한 대공의 뜻이기도 하다.
*대광명(大光明)---태양광명이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는 것처럼, 지혜광명은 시방삼세를 두루 비추기 때문에, 태양광명에 비유해서 지혜광명을 대광명이라 한다. 태양광명은 구름이 끼면 밝지 못하지만, 지혜광명은 어떠한 것도 다 비추기 때문에 태양광명보다 더 밝은 것이다. 그리고 대광명은 아미타불을 뜻한다.
*대구치라경(大拘絺羅經, 摩詞拘絺羅)---한자로 대구치라경(大拘緻羅經)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대구치라는 사리불의 외삼촌으로, 마하구치라(摩詞拘絺羅)라고도 한다. 대슬(大膝)이라 번역하기도 하는데, 나면서부터 손톱이 길었으므로 장조범지(長爪梵志)라고도 한다. 뒤에 불문에 귀의, 말재주가 뛰어나 문답 제일이라 불린다.
<대구치라경>은 <중아함경(中阿含經)>에 실려 있는 경으로, 사성제, 5근, 오취온, 무상정, 멸진정 등에 대한 내용이 설해져 있다. 다음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의 차이에 대한 내용이다.
사리불 존자가 구치라 존자에게 물었다.
“현자! 구치라여!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간 것과 무상정(無想定)에 들어간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존자 구치라가 대답했다.
“멸진정에 들어간 비구는 상(想)과 지(知)가 즉 사유(思惟)가 멸했지만, 무상정에 들어간 비구는 상(想)과 지(知)가 멸하지 않았다,”
사리불이 또 물었다.
“현자! 구치라여!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와 무상정에서 일어날 때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존자 구치라가 대답했다.
“비구가 멸진정에서 일어날 때는 내가 멸진정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비구가 무상정에서 일어날 때는 나는 상(想)이 있는가? 없는가? 라고 생각한다.”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면 상(想)과 사유(思惟)가 멸한 경지다, 멸진정은 육입처(六入處)가 멸한 것이다, 육입처에서 비롯된 것이 허망한 사유와 지각이다, 허망한 지각과 사유가 멸한 경지가 멸진정이다. 멸진정에 들어가면 죽은 사람과 똑 같다고 한다. 숨도 멈추어져 있고 곁으로 보기에는 죽은 사람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사리불 존자가 구치라 존자에게 물었던 것이다.
구치라 존자는 멸진정에 들어간 비구와 죽은 사람과 차이는 수명이 멸하지 않았고, 따뜻한 체온이 있고, 식(識)이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육근(六根)은 생명 현상이고, 육입(六入)은 의식(意識) 현상이다. 멸진정은 육입처를 멸하므로 육입처에서 비롯된 허망한 사유와 지각을 멸한 경지이다,---→‘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의 차이’ 참조.
*대기(大機)---뛰어난 근기. 기(機)는 소질ㆍ능력이라는 뜻이다. ‘목전(目前)의 문제(事)’란 눈앞에 직면한 지금 여기 자기 일(事)을 말하며, ‘목전(目前)의 마음 작용(機)’이란 눈앞에 직면한 자기 일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선어록에 자주 언급하는 선기(禪機)나 대기(大機)는 마음의 지혜작용을 표현하는 말이다.
불교교학에서 작용(機)이란 주관(能觀)적인 마음이고, 문제(事)는 객관(所觀)적인 경계로서 인간의 인식은 이 주관과 객관에 의해 이루어진다.
*대기대용(大機大用)---대기대용(大機大用)이란 대승적 근기를 갖춘 사람이 흔들림 없는 신념으로 대승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보살승에 이르는 것, 즉 깨달음이 원숙한 경지에서 나오는 자유자재(自由自在)한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허공과 같이 가지고 마음 씀은 바늘 끝과 같이 세세밀밀해 부처님의 마음 씀과 같은 경지가 되는 것을 말한다. 세속적 의미에서 대기대용(大機大用)이란 뛰어난 임기응변의 기량을 완벽하게 활용함을 뜻한다.
대기대용이란 상대(相對)가 끊어진 절대(絶對)의 경지에서 나오므로 걸림이 없고 자유롭다. 그것은 결국 몸과 마음의 실다운 주인으로서 몸과 마음을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쓰는 경지이다. 대소유무(大小有無)를 초월한 자리에서 순간순간 선악(善惡) 시비(是非)를 가리는 자유자재한 솜씨이다. 다시 말하면 시공(時空)을 초월한 자리에서 시공 가운데로 출입을 자유자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절대와 상대가 혼연일체가 된 부사의한 경지다.
대기(大機)란 죽음이 없고 실패가 없고 손해가 없는 경지이므로 언제든지 죽을 수 있고 질 수 있고 손해 볼 수 있는 대용(大用)을 구사할 수 있다. 상대가 시비를 걸어오면 경우에 따라서는 대갈일성(大喝一聲)해 살인검(殺人劍)을 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삼십육계(三十六計) 줄행랑을 치기도 하며, 묵묵부답으로 양구(良久)하기도 하고, 흔적도 없이 숨어버리기도 하며, 또는 즉시 져주기도 하면서, 상대에 떨어지지 않고 자유자재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자기가 살고 남도 살리며, 자기도 이기고 남도 이기게 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남에게도 이익이 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진 언행인 것이다.
따라서 대기대용(大機大用)이란 커다란 엔진과 같은 기관(大機)이 있어 우주를 작동하게 만드는데(大用), 그 기관은 모습이 없어 보려 해도 볼 수가 없고 만지려 해도 만질 수가 없다. 허공과 같이 텅 비어 공(空)하다. 하지만 큰 쓰임새(大用)가 있으므로 없는 것도 아니다.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용례 ―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무위(無爲)의 일상을 살아가지만, 필요할 때는 또 전광석화처럼 대기대용(大機大用)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
전북 고창군 선운사(禪雲寺) 입구의 부도 밭에는 <백파대사비白坡大師碑)>가 있다.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비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근세에 율사(律師)의 종파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白坡)만이 이에 해당할 만하며,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은 백파가 팔십 년 동안 착수하고 힘을 쏟은 분야이기 때문에 비문 제목을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 했다고 적혀있다.
*대기설법(對機說法, 산스크리트어 pariyaya-desana)---듣는 이, 혹은 질문하는 이의 이해수준(근기)에 따라 그에 맞추어 적절한 언어와 방편으로 설법하는 것을 말한다. 병에 따라 약을 주듯[응병여약(應病與藥)], 가르침을 받는 자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그에 알맞은 가르침을 설함이 대기설법이다. 수의설법(隨宜說法), 수기설법(隨機說法)과 같은 말. 수기산설(隨機散說), 근기설법(根機說法), 응기접물(應機接物), 방편설법(方便說法)이라고도 한다. 차제설법(次第說法)과 비슷하다.
우리가 경전을 보면 당혹스러울 때가 더러 있다. 불경에 상호 모순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영혼과 윤회의 질문에 대해서 침묵할 경우라든지, 혹은 여기에선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기에선 다르게 이야기 한다든지. 그 사람에게 그 답이 적합 하느냐 않느냐에 따라서 답하고, 답하지 않고 그런다. 이와 같은 현상은 부처님 가르침이 대기설법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물었을 때, 그 사람 물음에 대해 답을 주는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일률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의사가 감기환자가 오면 감기약을 주고, 독감환자가 오면 독감약을 주는 것과 같다. 말룬카 뿌따(Malunkyaputta) 비구가 와서 14가지를 질문했을 때, 붓다가 답하지 않고 독화살을 이야기한 것은 그 비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생사 해탈이지, 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방 상좌부불교의 <니까야>를 해설한 <정정도론>에서는 인간의 기질을, ① 탐하는 기질, ② 성내는 기질, ③ 어리석은 기질, ④ 믿는 기질, ⑤ 지적인 기질, ⑥ 사색하는 기질이다. 이렇게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다양한 기질에 따라 또는 축적된 성향에 따라 근기에 맞게 부처님이 설하셨는데 이를 방편설, 또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한다.---→차제설법(次第說法) 참조.
*대념처경(大念處經, 빠알리어 Maha Satipathana Sutta)---초기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이 <대념처경>이다.
‘대념처경’에서 마하(Maha)는 아주 중요하다는 말이고, ‘념(念)’은 사띠(sati)를 말한다. 그리고 ‘처(處, paṭṭhāna/빠따나)’는 마음집중의 대상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 마음을 집중해서 알아차림을 하는데 아주 중요한 경전이란 의미이다. 팔정도의 정념(正念) 즉 삼마사띠(samma sati)를 설하는 염처계 경전들 중 중요한 경전 3가지가 있다.
• 맛지마니까야 118. 들숨날숨에 마음챙김경(anapanasati, 아나빠나사띠, 안반수의경)
• 맛지마니까야 119. 몸에 대한 마음챙김경(kayagatasati, 까야가타사띠, 염신경)
• 디가니까야 22. 대념처경(maha sati patthana, 마하 사띠 빠따나)
위 세 가지 중 세 번째, 즉 빠알리어 삼장 중 디가니까야(Digha-nikaya, 長部)에 실려 있는 것을 4세기말에 계빈국(罽賓國) 출신 학승 구담 승가제바(瞿曇僧伽提婆, Gautama Saṃghadeva)가 한역했다.
그리하여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satipṭṭhāna-sutta)> 혹은 <사념처경>이라고도 하는데,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anapanassati)>과 더불어 수식관(數息觀-호흡법) 수행의 중요한 경전이다. 그리고 이 <대념처경>에 위빠사나(vipasyna) 수행법과 사마타(śamatha) 수행법이 잘 설명돼 있어서 남방불교에서는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경이다.
<대념처경>을 사념처경이라고도 하는 것은 이 경전이 몸의 관찰[身念處], 느낌의 관찰[受念處], 마음의 관찰[心念處], 법의 관찰[法念處] 등 사념처(四念處)에 대한 내용이 설해져 있기 때문이다.
<대념처경>에서 부처님께서 말했다.
“비구들이여! 중생의 정화(淨化)를 위한, 슬픔을 건너기 위한, 진리의 길을 걷기 위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 있다. 이것은 네 곳에 마음을 집중하는 사념처 위빠시나이다. 무엇이 넷인가? 몸에서는 몸을, 감각에서는 감각을, 마음에서는 마음을, 법에서는 법을 전심전력으로 마음을 챙겨 분명한 앎으로 계속 관찰해서 세상의 욕망과 고뇌에서 벗어나 살아가고 있느니라.”라고 했다. 즉, 사념처 수행이란 몸, 느낌, 마음, 현상, 이 네 가지를 마음챙김 하는 것이다.
다음은 네 가지 마음챙김에 대한 법문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대중들이여,
• 여기 대중은 몸에서 몸을 관찰[身隨觀]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는 자가 된다.
•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受隨觀]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는 자가 된다.
•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心隨觀]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는 자가 된다.
• 법에서 법을 관찰[法隨觀]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는 자가 된다.”---→안반수의경(大安般守意經), 사념처관(四念處觀), 승가제바(僧伽提婆), 염처경(念處經, Satipṭṭhāna-sutta), 아나빠나사띠(빠알리어 anapana sati), '들숨날숨에 마음챙기는 공부' 참조.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당나라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이 17년간(629년~645년) 인도로 구법여행을 한 구법행적을 정리한 것이다. 현장이 장안을 떠나 불교학 중심지인 나란타(Nalanda:那爛陀)대학에 들어가 수학한 후 인도와 서역을 두루 살피고 돌아오기까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여행기로서, 당시 불교정세나 그 지방형편을 아는데 요긴한 자료이다.
*대도무문(大道無門)---문 없는 큰 도라는 말이다. 문이 없는데(無門) 들어가고 길이 없는데 가는 고로 대도(大道)라는 것이다. 문이 없는데 들어간다 함은 동쪽도 서쪽도 없으며, 남과 북이 없고, 안과 밖도 없고, 앞도 뒤도 없고, 높은 것도 낮은 것도, 둥긂도 모남도 없고, 길고 짧음이나, 크고 작음과 같은 분별이 없음을 말함이다.
길이 없는데 간다 함은 막힘도 통함도 없고, 밝음도 어둠도 없으며, 거룩함도 평범함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으며 늙고 젊음의 구별 또한 없다. 너와 나의 경계가 없을뿐더러 선과 악의 나눔이나 진짜다 가짜다, 옮다 그르다 하는 시비도 있을 수 없음이니 이를 일러 길 없는 길을 간다 함이다.
문 없는 문을 들어서고, 길 없는 길을 감은 걸림이 없는 마음이다. 걸림이 없는 마음이란 물질에도 구애받지 않고, 정신에도 구애받지 않으니, 두 마음의 경계가 무너진 상태를 뜻함이다. 물질의 본질을 알고 보면 물질이 아니요(色則是空), 정신도 그 본질을 캐보면 형체가 없는 것이 아닐진대(空則是色), 공연히 인간들이 천만 가지 경계를 짓고 부질없는 이름을 붙여 이것이 옳다 저것이 그르다 시비를 하지만, 티끌만큼도 치우침이 없는 것이 걸림 없는 마음이라. 그건 마치 산 그림자가 물에 비치되 산이 물에 젖지 않고, 구름이 산허리를 어루만지며 지나되 높은 산허리에 걸리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를 말함이다.
이와 같이 큰 도는 본래 일정한 고유한 문이 없고, 천지에 조금도 장애가 없이 천지만물이 모든 것에 조금도 막힘이 없이 무장무애(無障無礙)한 그러한 경계가 이른바 대도무문이다. 그래서 그런 대도라는 것은 끝도 갓도 없이 광대무변한 것이고, 또는 무량(無量)의 공덕(功德)을 갖춘 자리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모든 법(法)을 총망라해서 조금도 흠절이 없는 원만 무결(無缺)한 그런 뜻을 가리켜서 대도무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도무문에 따르는 말씀은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선(禪)의 참선(參禪)에 관한 논장(論藏)에 있듯이, 대도무문(大道無門) 천차유로(千差有路)라, 대도라 하는 큰 진리는 본래 문이 없지만은 또 인연이 따르면 그때는 천차유로라, 천 가지 만 가지의 길이 있다는 말이다.
*대도상재목전(大道常在目前)---중국 남북조시대 양(梁)나라 황제 무제(武帝)에게 지공화상(誌公和尙. 418~514) 지어 바친 선시집(禪詩集) <대승찬(大乘讚)>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대도상재목전(大道常在目前) ― 대도는 항상 눈앞에 있어,
수재목전난도(雖在目前難覩) ― 비록 눈앞에 있지만 보긴 어렵다.
대도(大道)란 마음을 말한다. 마음은 눈앞에 있다. 눈앞[目前]이라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눈앞이 아니다. 마음이 곧 눈앞이란 말이다.
또 눈앞[目前]이란 말은, ‘일이 목전(目前)에 닥쳤다’는 표현이 있듯이 시간적으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란 뜻이고, 공간적으로는 내가 직접 보고 있는 ‘바로 여기’란 뜻이다. 따라서 대도(大道)란 것은 ― 마음이란 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 바로 여기, 내가 지금 깨어있는, ‘나’란 존재가 있는 이 자리란 말이다. 그러니까 도(道)가 곧 내 존재이다. 내가 있는 자리에 도가 있다 이런 말이다.
그래서 원효 대사도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것들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것들이 사라진다고 한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법도 따라 일어나고 ― 심즉생종종법생(心卽生種種法生)
마음이 사라지면 법도 따라 사라진다. ― 심즉멸종종법멸(心卽滅種種法滅)“
또 <화엄경>에는
“심생즉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이라고 해서 같은 내용의 글귀가 나온다.
그래서 입처개신(立處皆眞),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진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국 “대도가 항상 눈앞에 있다”는 말은 대도(大道)란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인 바로 이것이라는 말이다. 대도는 언제나 이것인데, 우리의 정신이 흐트러져 있는 것이 문제이다. 흐트러진다는 것은 무언가에 꺼들리고, 구속되고,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모습[相]을 따라간다’, 혹은 ‘경계에 머문다’고 말한다. 경계를 안 따라가고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확인된다.
도(道)는, 마음은 둘이 아니다, 온 우주가, 온 세상이 한 결 같이 이것(손가락 하나를 눈앞에 들어 보임)처럼 둘이 아닌 한결같이 이것이다. 도는 눈앞에 있어서 이 순간 직접적이고 끊어짐이 없다. 그러나 모습은 지속적일 수 없다. 한 순간도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하기 때문이다. 비유를 들면, 기차를 타고 가는데 차창 밖을 보면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계속 바뀐다. 그래서 모습을 인연이라고 한다. 그런데 자기 발밑을 보면 항상 자기 자리에 그대로 있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이 아무리 변화무쌍함이 있다 하더라도, 이 마음은 자기 자리에 항상 있어서 전혀 변화가 없다. 모습은 무상하게 변하지만 도는 전혀 변화가 없다.
그런데 도가 눈앞에 있으나 보기가 어렵다. 이것이 문제인데, 왜 보기 어려우냐 하면 모습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모습을 따라가기 때문에 변함없는 도를 놓치게 된다. 이것이 우리의 약점이다. 변화하는 모습이란, 눈에 보이는 모습이 다 변하는 것이고, 귀에 들리는 소리가 변하는 것이고, 코의 냄새, 입의 맛, 몸의 촉감, 이런 것들이 다 변화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느낌, 생각, 욕망 같은 것들도 자꾸 변해가는 것들이다. 이런 스쳐 지나가는 모습[相]들을 따라가면 이 변하지 않는 도(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임)를 놓치게 된다.
우리는 앞서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비유에서처럼, 변화하지 않는 이 자리(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임)에 서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한결같은 이 자리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우리는 변하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서 한결같은 이 자리를 놓치고 있다. 변화하는 모습에 정신이 팔리더라도, 한결같이 변화하지 않는 자리, 여기에서 변화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는 것이 우리 마음의 진실이다.
모습에 꺼들리는 습관 때문에 도를 보기는 어렵지만, 도는 반드시 볼 수 있다. 늘 한결같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지금 한 순간에도 생각은 바뀌고 모습도 바뀌고 시간도 바뀌고 있지만, 그 바뀌는 순간은 항상 이 순간이다.
*대림정사(大林精舍, Mahavana)---바이샬리왕이 지어서 부처님에게 기증한 정사이다. <잡아함경>에 의하면, 대림정사 내에는 원숭이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대림정사의 아소카왕 석주 남쪽 약 20m 떨어진 곳에는 원숭이 연못이 있고, 그 옆으로는 중각강당(重閣講堂) 터가 있어 부처님이 많은 설법을 하셨던 곳으로 기록돼 있다. 중각강당(重閣講堂)은 <화엄경> ‘입법계품’을 설법한 장소이기도 하고 이곳에서 여러 번 설법을 하셨다고 전한다.
원숭이 연못은 원숭이 떼가 부처님께서 목욕하시도록 판 연못이라고 전해지는데, 옛날에 부처님이 이곳에서 목욕을 했다고 한다. 현장(玄奘) 법사가 이곳을 찾았을 당시의 기록에도 “아소카 석주 남쪽에 연못이 있다.”고 돼 있다.
특히 바이샬리는 교통, 문화, 경제에 있어서 북인도의 중심지였고, 대승불교의 발생지이며, 유마거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따라서 <유마경>의 배경이고, 최초의 비구니교단이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성도 후 6년, 부왕의 장례식을 마친 후 이곳 대림정사에 머물고 계실 때, 양모 파사파제(波斯派提 - 파자파티, 大愛道)와 500명의 샤카족 귀부인이 부처님께 귀의함으로써 최초의 비구니 승단이 형성된 곳으로 부처님과 인연이 깊다.
부처님 당시 바이샬리는 상업이 발달해 살기가 넉넉했으므로 부처님과 스님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탁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발우를 어느 지역에 한 줄로 놓아두면 신도들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담아 주었는데, 어느 날 부처님이 자신의 발우를 제자들 발우에 섞어 놓았는데, 원숭이가 그 많은 발우들 중에서 부처님 발우를 골라내어 근처 나무에 올라가서 꿀을 따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아소카 왕의 석주는 1969년 발굴 당시에는 석주의 중간 부분까지 땅속에 묻혀있었지만 발굴을 통해 드러난 석주의 높이는 13m이다. 바이샬리의 석주는 BC 250년 경 아소카 왕이 세운 석주로 현재 남아 있는 석주 가운데 원형 그대로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부처님이 처음 당신의 열반을 예견하신 곳도 바로 여기 바이샬리였다. 80세가 되면서 라즈기르에 머물던 부처님은 그 곳을 떠나 스스로 열반의 행보에 나셔서 나란다와 파트나를 거쳐 이곳 바이샬리에 들렀다. 그리하여 대림정사는 부처님이 열반을 처음으로 말하신 곳으로, “아난다야 이것이 내가 이 성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현생의 육신으로는 이 성에 다시 올 수 없음을 일러주셨다. 그리고 부처님은 마치 코끼리처럼 천천히 몸을 돌려 바이샬리를 응시하시고는 노쇠한 몸으로 이곳을 떠나 파바 마을을 거쳐 쿠시나가르로 갔다고 전해진다.
또한 부처님 입멸 후 100년경 이곳에서는 계율에 관한 새로운 수정주의자들이 생겨나 10사(事)의 합법성을 주장하자 보수적인 장로들은 그것을 위법이라 비난하여 이곳에서 700명의 비구들이 집회를 가지면서 10사를 비법(非法)이라고 배척하기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이곳 바이샬리에서 불전 제2차 불전결집이 이뤄졌고, 이렇게 해서 불교교단은 보수성향의 상좌부와 진보성향의 대중부로 갈라지게 됐다.
*대매 법상(大梅法常, 752~835)---9세기 당나라 때 스님이다. 10대에 출가해 온갖 경과 논에 통달해 강의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많이 아는 것은 말재주에 보탬이 될지는 모르지만 마음을 깨닫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내 자신의 경전을 읽어야 된다싶어 스승을 찾아 나섰다가 마조 도일(馬祖道一) 스님을 찾아뵈었다.
그리하여 “부처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간절한 물음이었다. 이에 대한 마조 선사 답이 돌아왔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라[즉심시불(卽心卽佛)].”
여기서 법상 스님은 크게 깨달았다. 의문이 콱 풀렸다.
“어떻게 지녀야 합니까?”
“네 스스로 잘 보호해 가져라.”
이 법문을 듣고 법상 스님은 얼마 곡식과 종자를 구해 산중으로 들어갔다. 그 산이 대매산(大梅山)이었다. 매화가 많아서 대매산이다. 그 이후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이 마음이 부처인 줄 알았으니, 그는 이 마음을 살피고 쓸 줄을 알면 됐지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하고….
스승의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법문 위력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하여 법상 스님은 조그마한 초막을 짓고 살면서 수행을 했다. 깨달은 사람이 더 닦을 것이 있나 하겠지만 바로 알았기에 때문에 참으로 닦을 수가 있었다. 깨닫기 전에 닦은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깨달은 사람이 계속 정진하는 것이 보임(保任)이다.
“수행! 닦는 행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지속적인 것이다. 보임수행(保任修行)해야 한다는 말이다. 깨달음은 한순간이지만 닦음은 늘 지속해야 할 과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잡 미묘한 관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울이 밝은 바탕을 지니고 있지만 가만히 두면 더렵혀지듯이 우리 마음도 그런 것이다.” - 법정 스님
*대면관찰(對面觀察)---자신의 마음, 생각, 몸을 객관화시켜 거울 보듯 영화 보듯 집중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내 생각, 내 마음, 내몸을 객관화시켜 거울 보듯 영화 보듯, 그 어떤 다른 사람의 생각, 마음, 몸인 것처럼 대면해서 관찰하면, 온갖 시비 분별심과 번뇌 망상이 남의 것이 되고, 정작 자신은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된다. 이렇게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한없이 크고 밝고 충만해진다. 그리하여 탐ㆍ진ㆍ치를 비롯한 온갖 번뇌 망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지 않는가.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자기 마음을 객관화시켜 관찰하면 스스로의 마음을 통제할 수가 있다.
결국 수행은 연습이요, 생활이 실전이다. 일상생활을 떠난 곳에서 하는 수행은 다만 연습일 뿐, 생활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자기를 개관화시켜 관찰자를 관찰해야 한다.
*대면념(對面念)---구마라습 번역본 <금강경> 제1분의 마지막 구절은 「세족이(洗足已) 부좌이좌(敷座而坐)-(부처님께서)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로 끝나는데, 현장(玄奘) 역본에는 「부여상좌 결가부좌 단시니정원주대면념(敷如常座 結跏趺坐 端身正願住對面念)」이라는 구절이 있다. 해석하건대, (부처님께서)결가부좌하시고 바른 원에 머무시면서 시선을 코 끝에 두시고 선정에 드셨다, 이렇게 되겠는데, 여기에 「대면념(對面念)-대상에 집중해 선정에 드셨다. 즉 위빠사나에 드셨다.」라는 구절이 있다.
‘대면념(對面念)’에서 ‘면(面)’은 자신의 얼굴이자 선정의 대상이고, 대(對)란 대하여 보는 것, 염(念)은 마음으로 다른 대상을 관(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빠사나를 하셨다는 말이다.
*대면불상식(對面不相識)---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대면(對面)의 단계까지 이르러,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상대방의 마음과 상태를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를 대면불식(對面不識)이라 한다.
그러나 대면불상식(對面不相識), 눈앞에 마주 보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매일같이 얼굴을 대하고 한솥밥을 먹고 한 지붕 아래 같이 살면서도, 서로 상대방 마음을 잘 모르면 모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를 대면천리(對面千里)라고도 한다. 얼굴과 얼굴을 서로 마주 보고 있더라도 마음이 서로 통하지 않으면 천리를 떨어져 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참된 도리는 눈앞에 드러나 있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에 비유된다.
도반(道伴)은 서로 천리를 떨어져 살아도 마음은 항상 같이 있고, 중생들은 비록 같이 살아도 마음은 서로 천리 밖에 있다. 따라서 혈연보다 법연(法緣)이 더 중요하고, 법연 중에서도 진정한 도반이 돼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대명삼장법수(大明三藏法數)---법수란 대장경 가운데 중요한 부분과 수행에 요긴한 부분을 숫자로 분류 정리한 불교교리를 뜻한다. 즉, 숫자를 통해서 불교교리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일승(一乘), 이제(二諦), 삼법인(三法印), 사성제(四聖諦), 오온(五蘊), 육바라밀(六波羅蜜),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구품왕생(九品往生), 십선(十善)…37조도품, 52위… 삼천대천세계 등 숫자로 된 법(진리)을 말한다.
<대명삼장법수(大明三藏法數)>가 법수에 관한 대표적인 서적이다. 줄여서 <삼장법수>ㆍ<대명법수>라고 한다. 명(明)나라 일여(一如) 등이 1419년 왕명을 받아 50권으로 엮은 것으로, 대장경에 있는 법수(法數)를 모아 숫자 순서대로 배열하고 각 항목을 간략히 해설한 책이다. 일심(一心)에서 시작해 마지막 8만4천 법문까지 1600여 명목(名目)이 실려 있다. 오늘날로는 일종의 사전과 같은 책이므로 강원에서 공부하는 승려들에게 있어서 참고서 역할을 했다.---→법수(法數) 참조.
*대명주(大明呪)---진언(眞言) 중에도 짤막한 것은 종자라 하고, 조금 긴 것은 그냥 진언이라고 하며, 더 긴 것은 다라니(陀羅尼, dharani)라고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입으로 나오는 것은 진언이다. 명주(明呪)는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몸 전체가 명(明)이 되는 것이다.
대명주(大明呪)란 큰 지혜 광명으로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주문이라는 말인데, '마하반야바라밀' 7자를 대명주라고 한다. 반야지혜는 무시무종하고 불생불멸하며, 시방 삼세를 두루 밝게 비춰주는 광명을 가졌고, 육바라밀과 팔정도를 능히 행하며, 정사(正邪)를 능히 구별하고, 무명 번뇌를 능히 끊어버리며, 참 지혜광명을 나타내게 하는 크게 밝은 주문이란 뜻이다. ‘옴마니반메훔’을 육자(六字) 대명주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해서 우리 스스로가 마하반야바라밀이 되자는 것이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진언이고, 몸으로 마하반야바라밀이 되는 것이 명주이다. 경에 보면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이 대명주(大明呪)를 외우면 스스로 몸에 괴로움이 없고 또한 남도 괴로움이 없고 둘이 다 편안하느니라. 왜냐하면 대명주(大明呪)며 무상주(無上呪)이기 때문이니라.”라고 했다.
따라서 대명주는 입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몸이 외워야 한다. 몸이 외울 정도니까 많이 외워야 하며 일심으로 외워야 한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은 대명주, 내 몸 자체가 반야바라밀이 되는 것이다.---→반야바라밀 참조.
*대모니(大牟尼)---대일여래(大日如來])의 별칭이다. 모니(牟尼, muni)는 적묵(寂黙)이라 번역하며, 번뇌 망상의 시끄러움이 없다는 뜻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할 때의 ‘모니’도 이에 해당한다.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5세기 초 중국의 학승 법현(法顯)이 인도에서 가져와서 한역했다. 총 6권 18품으로 구성된 이 경은 부처님과 열반 및 불성에 대한 교리를 설법하고 있다. 여기서 니원(泥洹)은 열반(涅槃)을 음역한 말이다. 따라서 경명은 “부처님께서 니원(열반)에 대해서 설한 경”이란 뜻이다.
418년에 법현이 <대반열반경> 제9권을 번역했는데, 이것을 이름 해 <대반니원경>이라 한다. 그 후 421년에 북량(北涼)의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대반열반경(40권)>의 제1권~제10권까지의 내용에 해당한다. 이 경이 중국철학 심성론(心性論)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리고 이 경전은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 階有佛性)”는 명제를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열반학에서는 이를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경에서는 개유불성에서 일천제인(一闡提人)은 제외된다. 즉, 일체의 중생은 모두 자기 자신 안에 불성을 가지고 있다. 한량없는 번뇌를 남김없이 제거하면 불(佛)이 곧 밝게 나타나는데, 일천제는 제외된다고 했다. 일천제 경우는 성불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일천제(一闡提, 산스크리트어 잇찬티카/Icchantica)---불교의 정법을 훼방하고 구원될 가망이 전혀 없는 구제불능의 인간을 말한다. 결국 선근(善根)을 모두 잘라 버린 자[단선근(斷善根)]를 말한다.---→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참조.
*대반야경(大般若經)---원명은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으로서 중요한 대승경전이다. 전체 600권으로 반야부 계통 경전의 약 4분의 3을 차지하는 방대한 경으로 대승경전 성립 중기에 집대성된 것으로 보이며, AD 7세기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玄奘)이 한역했다. 보통 <600권 대반야경>이라 한다.
내용은 전체적으로 공(空)사상을 천명하고 있으며, 육바라밀 중 특히 반야바라밀을 강조하고 있다. 반야는 부처님 모체요 육바라밀의 원천으로서 일체불법이 반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성취함으로써 육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고, 육바라밀을 성취함으로써 일체지혜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공사상을 설하고 있다. 분량으로도 가장 방대한 경전으로 그 사상적 내용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 첫머리에 이 경을 배열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반야부 계통의 경전은 현존하는 대승경전 3분의 1을 차지할 만큼 분량이 많고 경명도 아주 다양하다. 이 가운데 중요한 열 가지를 ‘십본반야(十本般若)’라고 한다.
①소품반야경 ②대품반야경 ③인왕반야경 ④금강반야경 ⑤반야심경 ⑥유수반야경 ⑦문수반야경 ⑧승천왕반야경 ⑨이취반야경 ⑩대반야경의 열 가지이다. 이 가운데 ③번과 ⑤번 이외에는 모두 ⑩번의 600권 <대반야경>에 포함돼 있다.---→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참조.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parinibbana Sutta)---<대반열반경>은 석존께서 돌아가심(열반하심)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한 경전이다. 대반(大般)이라는 말은 조금도 흠절이 없는 모든 것을 다 포섭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석존이 돌아가실 무렵에 행한 모든 법문을 다 포괄(包括)한 경전이란 말이다.
<대반열반경>은 보통 줄여서 <열반경>이라고 하는데, 소승과 대승 두 종류가 있다. 소승열반경과 대승열반경은 모두 <대반열반경>이라 이름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다. 부피도 대승 열반경은 한글로 번역해서 1000페이지 분량이지만 소승 열반경은 불과 150페이지로 분량이 적다.
소승 <대반열반경> 중 빠알리어 남방 디가니까야에 실려 있는 것으로,
• 빠알리어 본 <마하빠리닛바나 수탄타(Mahāparinibbāna Suttanta)>가 있다.
그리고 한역된 소승 <대반열반경>으로는 <장아함경(長阿含經)> 속에 실려 있는 것으로 <유행경(遊行經)>이 있다. 그리고 이에는 몇 가지 이역본이 있다.
• 법현(法顯)이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 서진(西晋)의 학승 백법조(白法祖)가 번역한 <불반니원경(佛般泥洹經)>,
• 구마라습 번역의 <불유교경(佛遺敎經)> 등이 있다.
소승 <열반경>은 석존이 열반할 때를 전후한 사정을 전하고 있는데, 비교적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해 기록돼 있다. 여기서는 석존 입멸 후 교단의 의지처가 ‘법(法, dharma)’과 ‘자신’에 있음을 밝혀 - 법귀의 자귀의(法歸依 自歸依)라고 해서 법과 율을 중심으로 교단을 운영할 것을 말하고 있다.
대승의 <대반열반경>은 후대에 대승보살 스님들이 만든 경전인데, 석존의 말보다는 대승보살스님들이 석존의 열반에 대해 생각하는 사상을 석존의 입을 빌어 많이 이야기 하고 있다. 즉, 석존 입멸 사실을 계기로 석존의 본질이 법신(法身)에 있음을 말하고, 불신상주(佛身常主),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중도(中道)사상, 일천제성불(一闡提成佛)을 주된 가르침으로 하고 있다. 대승 <대반열반경>의 산스크리트 원전은 현존하지 않는다.
대승 <대반열반경>의 중요 한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동진(東晋)의 법현(法顯)이 418년에 번역한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
• 북량(北凉)의 담무참(曇無讖)이 421년에 번역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0권[北本],
• 유송(劉宋) 때 혜관(慧觀), 혜엄(慧嚴) 등이 담무참과 법현이 번역한 것을 대조해 수정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6권[南本]이 있다.
• 이외 몇 종류의 부분 역이 있으며, 티베트어 역본도 현존한다.
원효 대사가 <열반종요>를 저술할 때 근거로 사용한 것은 혜관, 혜엄 등이 번역한 <대반열반경> 36권본이고,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본도 참조했다.
원효 대사는 <대반열반경>을 “지금 이 경은 불법의 큰 바다이고, 방등(方等)의 비밀 창고로 그 가르침은 측량하기 어렵다. 진실로 넓고 넓어서 끝이 없고, 깊고 깊어서 바닥에 이를 수 없다. 바닥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다하지 않음이 없고, 끝이 없기 때문에 해당하지 않음이 없다. 여러 경전의 부분을 통합해 온갖 흐름[萬流]을 일미(一味)에로 돌아가게 하고, 부처님 뜻이 지극히 공정한 것임을 열어 보여 백가(百家)의 서로 다른 논쟁[異諍]을 화해시켰다”라고 평해, 이 경이 대승의 큰 가르침으로서, 경전의 서로 다른 모든 논의를 하나로 통합하는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원효는 <대반열반경>을 부처님의 일생 동안의 법문을 총 정리한 것으로 가장 심오한 이론을 담고 있다고 본 것이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께서 열반(涅槃)에 드실 무렵에 대한 경전이니까 마지막으로 모든 법문(法門)을 담은 것이고, 부처님의 반열반에 대한 논사들의 해석-철학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불제자들은 부처님의 반열반에 대해 바르게 알려면 반드시 <아함경-장부>과 <니까야-디가 니까야>에 전해지는 소승 <대반열반경>과 북전 대승 <대반열반경>을 바르게 읽고, 부처님의 행로를 바르게 따라가 부처님 반열반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열반경(涅槃經) 참조.
*대방광(大方廣)---대방광’이라 함은 붓다의 깨달은 진리를 이르는 말이다. 붓다의 진리는 온갖 것을 다 포함하고 있어 한량없이 큰 것이므로 대(大), 만법의 모범이 돼 변치 않는 체성(體性)이므로 방(方), 그 덕이 널리 우주에 관통하므로 광(廣)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 마하(Maha, 摩訶)라 할 때 그 의역이 ‘대(大)’라 하겠는데, 여기 서 ‘대(大)’란 단순힌 크다는 뜻만이 아니라 ‘완전한’ ‘크고 위해한’ 그런 뜻으로서 대방광이란 뜻이기도 하다.
*대방광여래장경(大方廣如來藏經)---→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 참조.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산스크리트어 Maha-samni-pata-sutra)---줄여서 <대집경(大集經)>이라고도 한다. 전체 60권으로 구성돼 있다.---→대집경(大集經) 참조.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여래장을 설명한 최초의 경전이다. 줄여서 여래장경(如來藏經)이라고도 한다. 서진(西晋)의 법거(法炬, 290∼312)가 한역했다고 하며, 5세기 초 인도 출신의 학승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359∼429)가 다시 번역했다. 이역본으로는 불공(不空:705∼774)의 <대방광여래장경(大方廣如來藏經)>이 있다.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 심식설(心識說)의 5위 75법 법체계에서, 심소법(心所法: 46가지)에 나오는 말인데, 대번뇌지법이란 염오(染汚)된 마음과 두루 함께 일어나는 의식작용으로, 여기에는 여섯 가지 옳지 못한 마음작용이 있다.
즉, 치(癡-어리석음, 無明 혹은 無智), 방일(放逸-선법을 닦지 않게 하는 의식작용), 해태(懈怠-열심히 노력하지 않게 하려는 의식작용), 불신(不信-믿지 않게 하는 마음작용), 혼침(惛沈-마음을 무기력하게 하는 의식작용), 도거(掉擧-마음을 안정되지 않게 하는 의식작용)의 여섯 가지가 있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부처님 당시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王舍城) 동북쪽에 영축산(靈鷲山-영취산)이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산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법문을 하셔서 이러한 법회를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설법하시는데, 갑자기 대범천왕(大梵天王)이 허공중에서 꽃을 보냈는데, 부처님이 허공에 떨어지는 한 송이 꽃을 집어 설법을 들으려고 모인 대중에게 쳐들어 보이며, “이 도리를 아느냐? 허공에서 이 꽃을 보내온 도리를 아느냐?” 하시는 듯, 묵언으로 미소를 지으셨기 때문에 이것을 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 한다.
이때 모인 청법대중(請法大衆)은 왜 부처님께서 귀중하신 법문을 하시다말고 꽃 한 송이 붙잡으시고 묵언하시며 빙긋이 웃고 계시는가? 하고,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때 오직 상수제자 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로써 화답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한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하셨다. “여래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이 순간부터 선(禪)의 역사가 시작됐으며, 최초로 화두가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이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佛決疑經)>에 실려 있다. 그리하여 염화미소(拈花微笑) 혹은 염화시중(拈花示衆)이라는 말이 이 경에 처음 나와서 이 경을 <염화시중경>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 涅槃妙心) 외에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란 말도 이 경에 처음 나온다.
헌데 이 경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僞經)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대장경에 끼이지도 못하고 있다. 대개 대승경전은 각기 어떤 목적이 있어 이를 위해 만들어졌다. <대범천왕문불결의경>도 목적이 있었다. 당시 중국에는 이미 교상판석(敎相判釋)을 통해 <화엄경>이 최고다, <법화경>이 최고다, 하는 입장이 강해져 있었을 때, 조사선(祖師禪)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높이기 위한 근거로 이 경을 제작했다고 한다.
*대법(對法)---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대법(對法)을 아비달마의 번역어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도 있어 여기서 몇 가지 의미를 검토해 본다.
① 첫째 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아비달마[論]란 말을 대법(對法)으로 해석했다. 아비달마(산스크리트어 Abhidharma)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abhi + dharma = 對 + 法)」이어서 대법(對法)이라 한 것이다.
여기서 대법(對法)이란 ‘부처님 법(dharma)을 본의에 맞게 밝히는 것’이라는 뜻으로, 곧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주석 ㆍ 연구 ㆍ 정리 ㆍ 요약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대법은 아비달마의 다른 이름으로서, 법(法), 즉 부처님 교법에 대한 연구와 해석을 말한다. 이와 같이 아비달마는 부파불교시대에 생산된 여러 논(論, sastra)과 논서(論書)들을 뜻하며, 오랫동안 많은 논(論)들이 만들어지고 후일에 이 논들이 쌓이고 정비돼 논장(論藏)이 됐다. 따라서 이럴 경우, 아비달마논을 대법논(對法論)이라 하고, 아비달마 논서를 대법논서(對法論書)라 표기한다.
② 둘째 승의법(勝義法)과 세속법(世俗法)을 비대함을 대법이라 한다. 즉, 대법(對法)을 승의대법과 세속대법으로 나누며, 여기서 법(法)은 열반 및 4제(四諦)를 가리킨다.
• 승의대법(勝義對法)은 무루(無漏)의 지혜와 이에 따라 일어나는 심왕(心王)ㆍ심소(心所)를 말하는데, 이는 무루법으로 4제의 이치를 대관해 열반에 대향하는 것이므로 승의대법이라 한다.
• 세속대법(世俗對法)은 세속의 지혜와 모든 논(論)들을 말한다. 이들은 승의대법의 방편이 된다는 뜻으로 세속대법이라 한다.
<구사론(俱舍論)>에 따르면, 대법은 승의의 아비달마와 세속의 아비달마의 두 가지로 나뉘며, 이 두 가지 뜻을 합해 대법이라 했다. 말하자면 진제와 속제 2제를 합쳐 대법이라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승의의 아비달마는 무루혜(無漏慧)이고, 세속의 아비달마는 유루혜(有漏慧)이다. 그런데 궁극에 가서 깨치기 위해서는 세속의 아비달마[유루혜]는 모두 승의의 법(勝義法, 무루혜)인 열반을 대향해야 한다. 즉, 진리를 대관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깨칠 수 있다.
➂ 셋째 상대 되는 법, 상대적인 법의 논리로 구성돼 있음을 대법(對法)이라 한다. 이에 대해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선사께서 열 명의 큰 제자들을 불러 앉혀놓고 말씀하신 데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들은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너희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니,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너희들은 각각 한곳의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들에게 법을 설하는 것을 가르쳐서 근본 종취를 잃지 않게 하리라.…
모든 법을 설하되 성품과 모양을 떠나지 말라. 만약 사람들이 법을 묻거든 말을 다 쌍(雙)으로 해서 모두 대법(對法)을 취해라. 가고 오는 것이 서로 인연해 구경에는 두 가지 법을 다 없애고 다시 가는 곳마저 없게 하라.…
밝음이 원인이며 어둠은 연분이다. 밝음이 침몰하면 어둠이 된다. 이와 같이 밝음으로써 어둠을 나타내고, 어둠으로써 밝음을 나타내며, 들어내는 것(來)과 제거해버리는 것(去)이 서로 조건이 돼 중도란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 밖의 질문에서도 죄다 이와 같이 해야 한다.”라고 했다. 즉, ‘본체와 작용’, ‘번뇌와 보리’, ‘실과 허’ 이런 식으로 상대적으로[대법의 논리]로 구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논란하는 말(語)과 직언하는 말(言)의 대법과, 법과 형상의 대법에 열두 가지가 있다. 유위와 무위. 유색과 무색이 상대이며, 유상과 무상이 상대이며, 유루와 무루가 상대이며, 현상(色)과 공이 상대이며, 움직임과 고요함이 상대이며, 맑음과 흐림이 상대이며, 범(凡)과 성(聖)이 상대이며, 승(僧)과 속(俗)이 상대이며, 늙음과 젊음이 상대이며, 큼과 작용이 상대이며, 김(長)과 짧음(短)이 상대이며, 높음과 낮음이 상대이다.
자성(自性)이 일으켜 작용하는 대법에 열아홉 가지가 있다. 삿됨과 바름이 상대요, 어리석음과 지혜가 상대이며, 미련함과 슬기로움이 상대요, 어지러움과 선정이 상대이며, 계율과 잘못됨이 상대이며, 곧음과 굽음이 상대이며, 실(實)과 허(虛)가 상대이며, 험함과 평탄함이 상대이며, 번뇌와 보리가 상대이며, 사랑과 해침이 상대이며, 기쁨과 성냄이 상대이며, 버림과 아낌이 상대이며, 나아감과 물러남이 상대이며, 남(生)과 없어짐(滅)이 상대이며, 항상 함과 덧없음이 상대이며, 법신과 색신이 상대이며, 화신과 보신이 상대이며, 본체와 작용이 상대이며, 성품과 모양이 상대이다. 유정 무정의 대법인 어(語) 언(言)과 법(法) 상(相)에 열두 가지 대법이 있고, 바깥 경계인 무정에 다섯 가지 대법이 있으며, 자성이 일으켜 작용하는데 열아홉 가지의 대법이 있어서 모두 서른여섯 가지 대법을 이룬다.
이 삼십육대법(三十六對法)을 잘 알아 쓰면 곧 도(道)가 모든 경전의 법을 꿰뚫어 나가고 들어옴에 곧 양변을 여의어 자성을 움직여 쓰며, 사람과 함께 이야기 할 때에도 밖으로는 모습에서 모습을 떠나고, 안으로는 공에서 공을 떠나게 된다고 했다.---→아비달마(阿毘達磨, 빠알리어 abhidhamma, 산스크리트어 Abhidharma), 삼십육 대법(36對法) 참조.
*대법고경(大法鼓經)---5세기 중엽 남송(南宋=劉宋)에서 활약한 인도 출신 학승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산스크리트어 Gunabhadra, 394~468)가 번역했다. 이 경은 부처님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부처님 교리대로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리면 그것이 곧 이른바 불교의 이상인 열반이라는 것을 설법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경에서 부처님이 가섭 존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열반에 들어 40년이 지난 후, 지금 전하는 법을 잘 간직했다가 큰 법고(大法鼓)를 만들어 치고, 법회를 열어 불법의 진수를 전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적혀 있다.
*대법안탑(大法眼塔-다메크 스투파/Dhamekh Stupa)---사르나트(Sarnath)의 녹야원(鹿野苑) 앞에 있는 대탑이다.
사르나트(Sarnath)의 녹야원은 현재의 바라나시 북쪽 약 8km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바라나시역에서 버스로 약 1시간 거리에 있다. 깨달음을 얻은 지 칠칠일(49일)만에 부처님께서 녹야원을 찾아가서 최초의 설법인 사성제(四聖諦) 및 팔정도(八正道)와 중도(中道)의 법을 설해 교진여(橋陳如, Ajnata Kaundinya) 등 다섯 비구(五比丘)를 제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래서 이곳 사르나트는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법의 수례바퀴를 굴린 장소로서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라 명명돼 있는 불교역사에 있어 아주 소중한 곳이다.
부처님 최초의 설법과 설법지를 기념하기 위해 아소카왕은 처음 이곳에 다르마챠크라(Dharmachakra:法輪) 스투파라 불리기도 하는 탑을 건립했다. 현재의 이름 다메크(Dhamekh)는 산스크리트어Dharmaiksark가 와전된 것으로 원래는 법안(法眼), 즉 ‘진리를 본다’를 의미해, 이곳은 곧 ‘진리를 보는 탑’ 또는 ‘진리를 관하는 곳’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이 탑은 기단부의 직경 28.5m, 높이 33.53m(기반까지 포함 42.06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높이 11.2m에 이르기까지는 통상적인 기단부 대신 큰 돌을 쌓았고, 그 위는 벽돌로 쌓았다.
처음 아소카왕에 의해 이 탑이 건립될 당시는 벽돌로 조성된 작은 규모의 탑이었지만, 이후 굽타 왕조 시대인 AD 320~550년에 이르러 현재의 규모로 증축됐고, 탑 외벽에 8개의 감실이 연잎 형상 위에 조성돼 4방위불을 포함한 8방위불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35년 사르나트 전역에 걸친 발굴 작업을 주도했던 영국인 알렉산더 컨닝햄(Alexander Cunningham)이 이 탑의 중심부 수직갱도를 파내려 가던 중 정상에서 91.4cm 정도의 아래 부분에서 “제법(諸法)은 인(因)에서 생긴다. … ”라고 기록된 6~7세기경의 ‘법신게(法身偈)’를 발견했다.---→법신게(法身偈) 참조.
*대보적경(大寶積經)---<대보적경>은 총 120권으로 중국 당(唐)나라 시대에 보리류지(菩提流志)가 번역했다. 산스크리트어로 Maha-ratnakuta-sutra이고 약해서 <보적경(寶積經)>이라고 한다.
본 경은 대승불교의 심오하고 오묘한 부처님의 보배로운 가르침을 담고 있는 여러 경들을 한데 결집한 경이다. 전체 49회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회마다 별도의 경들로서 각각 독립적인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즉, 대승의 보배로운 가르침을 담고 있는 여러 경들을 한데 모아서 편찬했기 때문에 각각에 담긴 사상적 배경도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제5회의 경우에는 정토사상(淨土思想)을, 제46회의 경우에는 반야사상(般若思想)을, 제2, 3, 7, 11, 24회의 경우에는 밀교사상(密敎思想)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각각의 회마다 별도의 이역본들이 다양하게 성립돼어 있다.
보리류지가 편찬할 때 이미 축법호(竺法護)를 비롯한 여러 고승들이 번역해 놓은 23종의 경은 그대로 포함시켰으며, 번역본이 있었으나 다시 번역한 경이 15종이며, 처음 번역한 것이 11종이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대보적경>을 집대성한 보리유지(菩提流支)는 북위(北魏)에서 활약하다가 달마(達磨) 대사를 독살했다는 보리유지와는 다른 인물이다.---→방등부 경전(方等部經典) 참조.
*대본경(大本經, 빠알리어 Maha Padhana Sutta)---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제일 첫 경이 <장아함경>이고, 그 제1경인 <대본경(大本經)>에서 제30 <세기경(世記經)>에 이르기까지 짤막한 이야기로 돼 있거나 상당히 긴 이야기로 돼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두루 설해져 있다. 남방 상좌부 경장인 장부(長部, 디가니까야) 속 제1경이 <범망경(梵網經, Brahmajalasutta)>인데 비해 <팔만대장경>의 제일 첫 번째 경은 <대본경>이다. <팔만대장경>에서 가장 첫 번째 경전의 이름이 ‘대본(大本)’인 것은 불교의 큰 근본이 된다는 뜻이다.
<대본경>의 내용은 고타마 붓다와 여섯 전임자의 장엄한 설화이다. 과거칠불이 태어나고 출가하고 수도하고 성도하고 설법하는 일 등, 이들 부처님들 공덕과 생애에 대한 내용으로 불타관(佛陀觀)을 말하고 있다. 불교 교주는 역사적으로 볼 때 석가모니 부처님이지만 이론적으로는 깨달은 사람이면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으므로 단 한 사람만의 절대적인 교주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여러 부처님 즉 무수한 부처님이 있을 수 있다.
불교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 설법을 함으로써 종교적 역사가 시작됐다. 만약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혼자 가슴에 품고 열반에 들었다면, 불교라는 종교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처님 설법은 불교가 종교적 출발하는 시발점이라 하겠다. 이 경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이 어떤 방법으로 깨닫고, 왜 설법했는가를 설명함으로써 석가모니불의 깨달음과 설법의 이유를 말해준다.
부처님은 설법을 결심하기 전에 중생들이 배신할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중생의 욕망과 반대되는 가르침이다. 그것을 과감하게 버리라면 과연 몇이나 따를지 모를 일이었다. 부처님은 그래도 설법을 결심했다. 경전은 이때 ‘범천 권청(梵天勸請)’이라는 형식을 빌어 문학적 묘사를 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의 자비심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말해주는 장치다.
그리고 <대본경>엔 부처님의 탄생게가 설해져 있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 오직 내가 존귀하다. 중생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제도하리라[天上天下 唯我爲尊 要度衆生 生老病死]”라고 돼 있다.
이 같은 초기경전의 탄생게는 부처님이야말로 가장 존귀(최존)하고 최상이고 최고로 나타난다. 그리고 위의 내용과 달리 현재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또 다른 부처님의 탄생게는 다음과 같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모든 세상의 고통을 내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문맥이 똑 같지는 않으나 의미는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이 경의 이역본(異譯本)으로는 송(宋)나라 때 법천(法天)이 한역한 <불설칠불경(佛說七佛經)>과 <비바시불경(毗婆尸佛經)> 등이 있다.
*대분심(大憤心)---선종에서 화두참구(話頭參究)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일어나는 분발심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즉, 화두에 정신을 집중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 마음 상태란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대의심(大疑心)이니, 이 삼요는 솥의 세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궐(厥)하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져 바로 서지 못함이라.
① 대신심(大信心)---큰 믿음이란 일체중생이 제불보살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으며 자신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것이다. 형상에 차별이 있고, 나타난 능력에 차이가 있고, 그가 쓰는 덕행에 차이가 있고, 수명에 차이가 있더라도, 본성은 그러한 차이에 상관없이 지혜와 온갖 공덕이 똑같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이 이와 같으며 이것은 영겁으로 변치 않고 어떠한 동요에도 상관이 없는 불멸의 법으로서 어떠한 강한 압력에도 흔들리거나 빼앗기거나 때 묻을 수 없는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본성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에서 참선자의 기본자세가 이루어진다.
자신이 진리의 주체일진대 그에게는 끝없는 지혜와 용기와 덕성이 원래로 충만하다. 어떠한 역경도 극복하고 뜻하는 바를 구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원래로 풍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일상생활이 그 본분에 어긋남이 없는 행이 될 수밖에 없다. 밝음과 긍정과 너그러움과 용기는 선자(善者)의 기본 표정이다. 어떠한 고난에도 좌절을 모르고 어떠한 상황에도 희망을 불태우는 불굴의 용진(勇進)이 거기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이 제불보살과 일체중생과 함께 함을 믿는 것이므로 언제나 중생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한다. 원래로 자신과 더불어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애를 걸고 다시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던져서라도 이룩하고자 하는 큰 서원과 정진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돌리고 불국토 실현에 두는 것이다. 수행자가 만약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큰 원(願)이 없게 되고 큰 원이 없으면 정진력이 약해진다.
② 대분심(大憤心)---큰 분심이란 제불보살과 다를 바 없이 불성을 가진 내 자신이 원래 부처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부족해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범부중생의 삶에 빠져 있는가를 생각할 때,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내는 것이 대분심이다. 큰 믿음에서 큰 분심이 일어난다. 이러한 분심이 분명해야 공부 중에 잡념이나 번뇌 망상이 올라오더라도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리고 화두와 겨룰 수 있게 된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보살은 모든 악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것이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켜 발심(發心)해 바로 끊으며, 모든 악이 이미 생겼을 경우에는 그것을 끊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켜 발심해 바로 끊는다.
또 모든 선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것이 생겨나게 하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켜 발심해 바로 수행하며, 모든 선이 이미 생겨났을 경우에는 그것에 머물러 잃지 않고 다시 왕성하게 하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켜 발심해 바로 수행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큰 강물에 자기 몸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는 필시 강물을 건너가기 위해 큰 노력과 정진(精進)을 할 것이요, 이런 큰 노력과 큰 정진 때문에 꿈에서 깨어날 것인데, 일단 깨고 나면 지금까지의 행위는 그치게 될 것이다.
보살도 마찬가지여서, 본래 부처여야 할 중생의 몸이 네 개의 큰 강물[사폭류(四瀑流)-번뇌의 폭류] 속에 있음을 보고, 이를 건너게 해주기 위해 큰 노력과 정진을 일으킨 탓으로 부동지(不動地;노력 없이도 저절로 보살행이 이루어지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바, 일단 이 경지에 이르고 나면, 모든 몸과 말과 마음의 작용이 다 그쳐서, 이행[二行 ;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 상행(相行;모습이 현재에 나타나는 것)이 온통 나타나지 않게 된다.) 이 온통 나타나지 않게 된다.“고 했다. 이 분심에서 억겁의 무명을 뚫고 온갖 분별의 함정에서 단번에 벗어나 대자유의 평원으로 뛰쳐나가게 되는 것이다. 큰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이 분심이야 말로 수행자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③ 대의심(大疑心)---큰 의심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을 의심하거나 참선법을 의심하라는 말이 아라 철두철미하게 화두를 참구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화두는 법성(法性)의 제시이므로 망상망념과 무명에 갇혀 살고 있는 범부로서는 알 수 없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나, 왜? 라는 의심이 가슴을 저미고 답답한 것이 우주를 뒤덮으며,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화두는 여기 이르러서 전심전력을 기울여 맞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런 때의 마음 상태를 의정(疑情)한다. 의정하는 것이 크면 클수록 큰 깨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화두로서 명백하게 법 자체를 우리 눈앞에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찌해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무엇이냐. 분명히 내게 있는 이 도리, 명백히 화두에서 밝혀 주었거늘 어찌해 이것을 모른단 말인가. 온몸, 온 생각이 오직 화두 덩어리가 돼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된다. 필경 이것이 무슨 도리이냐 하는 일념이 끊이지 않는다. 요컨대 의정 없는 화두공부란 있을 수 없다. 생생하고 명료한 의정이 필경 본분을 밝혀낸다.
나옹(懶翁) 스님도 이렇게 가르치고 계신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부딪치고 또 부딪쳐 몸과 마음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그것을 똑똑히 참구하라. 화두 위에서 그 뜻을 헤아리거나 어록이나 경전에서 그것을 찾으려 하지 말고 단박 깨뜨려야 비로소 집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만약 화두가 들어도 들리지 않고 냉담하고 아주 재미가 없으면 낮은 소리로 서너 번 연거푸 외워 보라. 문득 화두에 힘이 생기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이르면 더욱 힘을 내어 놓치지 않도록 하라. 저마다 뜻을 세웠거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비면서 용맹정진하는 가운데에서도 더욱더 용맹정진하면 갑자기 탁 터져 백 천 가지 일을 다 알게 될 것이다.”
화두를 통한 선 수행은 날카로운 비판정신과 폭발적인 의문을 가져야 하며 추진력을 갖지 않으면 현실에 안주할 뿐 새로운 귀착지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승은 화두를 천편일률적으로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근기에 따라 의심을 돈발(頓發)시켜 주는 화두를 찾아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혹 스승에게 받은 화두라도 잘 잡히지 않을 때에는 자주 찾아가서 원인을 제거하는 방편을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해 의정이 생기면 활구(活句)요, 그렇지 않으면 사구(死句)이다. 사구이니 활구이니 하는 것은 사람에게만 있을 뿐 화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디 자기 마음에서 솟구치는 의정(疑精)에 따라 활구를 참구해야 할 것이다.---→‘화두(話頭) 참구(參究)’ 참조.
*대비바사론(大毘婆娑論, 산스크리트어 Abhidharma-mahā-vibhāṣā-śāstra)---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 논서로서 원명은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인데, BC 3세기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Katyayaniputra)가 저술했다는 <발지론(發智論)>에 대한 주석서이다. 이 논서의 분량이 200권이나 돼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핵심이 되는 주제나 개념들을 종합해 간결하게 재구성한 <아비담심론>이 저작됐다. 이 논서는 분량은 적지만 유부의 사상을 종합적이고 창조적으로 조직했으며 후에 세친의 저술인 <구사론>의 모델이 됐다. 그래서 여러 논사들의 형식적 모델, 즉 먼저 운문으로 핵심적인 교설을 기술하고 산문으로 부연 설명한 형식을 취한 것이다. 이후 저술된 모든 논서들은 모두 이 형식을 따르고 사상적인 영향도 이 텍스트에 바탕을 두고 있다.
AD 2세기 중엽 인도를 통일한 쿠샨왕조(대월지국/大月氏國) 카니시카(Kaniska)왕 보호 아래 협(脇, Pārśva/파르스바) 존자를 중심으로 해서 법구(法救), 묘음(妙音), 세우(世友), 각천(覺天) 등 논사와 500여명 아라한들이 카스미라(迦濕彌羅, Kasmira)국에 모여 결집한 책으로 전체 분량이 200권이다. <대비바사론>은 <발지론>의 주석서인 만큼 그 구성과 내용은 모두 <발지론>과 비슷하다.
부파불교시대에 불경 주석과 연구에 종사한 주석가들을 비바사사(Vibhasika, 毘婆沙師)라고 불렀으며, 이들에 의해 편찬된 것이어서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라 했다. 이 논서가 나타남으로써 교리에 대한 연구 주석의 세분화는 한층 더 촉진됐고, 고찰 역시 더욱 더 정밀해졌다. 실제로 이것은 단순히 <발지론>의 주석일 뿐만 아니라, 만약 어떤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면 <발지론>에서 언급되지 않는 문제까지도 새롭게 채택해 논의했다. 또한 이를 통해 유부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자신들 부파 내의 여러 가지 이론(異論)이나 다른 학파의 학설을 수없이 인용하고 있어서 실로 설일체유부 학설을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북량(北涼) 부타발마(浮陀跋摩), 도태(道泰) 등이 번역한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娑論)>이 있으며, 당나라 현장(玄奘) 번역본도 있다. 전자를 구역이라 하고, 현장 번역을 신역이라 한다.
<발지론>이 저술된 이래 아비달마 문헌의 전개는 그에 대한 주석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대비바사론>이다. <대비바사론>이 편집된 이후에는 아비달마의 이론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주류를 이루게 됐는데, 그 대표적인 논서는 다음의 것들이다. 법승(法勝)의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법구(法救)의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세친(世親)의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등이다.
*대비심(大悲心)---중생을 불쌍히 여겨서 고통으로부터 구제해주고자 하는 마음.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의 줄인 말.
*대비주(大悲主)---대비심(大悲心)이 무한하다고 하는 관세음보살을 지칭한다.
*대사(大師)---일반적으로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 임금이 덕이 높은 승려에게 호를 내릴 때 붙이던 칭호로 당(唐)에서 처음 시작됐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 이래로 사용됐다. 예로부터 공법(空法)의 세계를 공부하는 선승들은 선사(禪師)라고 했고, 공법을 공부한 다음 색법(色法)의 세계에 내려와 공부한 원효 스님 같은 분은 대사라고 칭했다. 대사는 출 ‧ 세간에 모두 능한 도인을 말함이다.
*대사(大士)---이는 보살마하살을 일컫는 별칭이다. 보살마하살은 큰 보살로서, 이미 불과(佛果)를 성취하고도 불지(佛地)에 들어가지 않고 사바세계에 머물며 중생과 함께 하는 보살을 말한다.
*대선지법(大善地法, 산스크리트어 kuśala-mahā-bhūmikā dharmā)---부파불교시대 설일체유부의 심식설(心識說)의 5위 75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心所法: 46가지)에 나오는 말인데, 선한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의식작용이다. 즉, 여러 가지 선심(善心)에 따라 일어나는 심소로서,
①신(信) ―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의식작용.
②불방일(不放逸) ―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제함과 집중을 지속하는 마음.
③경안(輕安) ―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
④사(捨) ―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고 모두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상태.
⑤참(慚) ― 스스로 죄를 뉘우치는 것.
⑥괴(愧) ― 죄과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는 것.
⑦무탐(無貪) ― 대상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 것.
⑧무진(無瞋) ― 미워하지 않는 의식작용.
⑨불해(不害) ― 해치지 않는 어질고 착한 성질의 의식작용.
⑩근(勤) ― 열심히 노력하게 하는 의식작용.
이상과 같은 10가지 마음작용이 대선지법을 구성한다. 대선지법(大善地法)이라는 말에서 '대(大)'는 커다란 선(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해당 마음작용이 선심과 ‘두루 함께[大]’ 일어나며 선심에서 ‘항상[大]’ 발견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지(地, bhumi)’는 의식작용의 근거가 되는 마음을 말한다. 따라서 대지법이란 선, 불선, 무기 등 일체의 마음과 두루 함께 일어나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아미타불의 오른쪽에 협시하는 보살로 마하살타마바라발다(摩訶薩馱摩婆羅鉢多), 마하나발(摩訶那鉢), 바라발다(婆羅鉢多), 혹은 발다바라(跋陀婆羅) 등으로 음사한. 대세지 보살은 줄여서 세지보살이라고도 하며, 득대세지(得大勢至), 대정진(大精進)이라고 번역된다.
대세지란 말은 지혜광명이 모든 중생에게 비치어 3도(三途;지옥,아귀,축생)를 여의고 위없는 힘을 얻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한 대세지보살이 발을 디디면 삼천 대천 세계와 마군(魔群)의 궁전이 진동하므로 대세지라 한다. 가난과 고통에 좌절해 쓰러지는 중생들에게 힘을 북돋워주며 부단히 독려해 마침내 정토세계에 당도하게 하는 보살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근본 대의를 자비와 지혜로써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불교를 간략하면서도 단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아미타불의 바른편 보처(補處) 보살로 이마 위에 보배병을 얹고, 손에는 연꽃을 들거나 합장을 하기도 한다. 연꽃의 의미는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佛性)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이미 성불한 것을 뜻하며, 그리고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는 차이가 있다. 또 합장의 수인(手印)은 염불하는 수행자를 맞아 가는 것을 뜻한다. 그 밖에 신체의 모습은 관세음보살과 동일하다”라고 돼 있다.
아미타불에게는 자비문(慈悲門)과 지혜문(智慧門)이 있는데, 이 가운데 관음은 자비문을 대세지는 지혜문을 각각 표시함으로써 이 양대 보살이 불교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보살이라 하겠다. 관음이 자비의 문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면 대세지는 지혜의 문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 즉, 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비치어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를 여의게 하고 무한한 힘을 줌으로 대세지라고 한다는 것이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범어로는 마하스타마프라프타(Mahasthamaprapta)이며, 이 보살의 크기는 관세음보살과 같고 그 온몸에서 나투는 광명은 자마금색으로 시방세계의 모든 나라를 다 비추는데 인연이 있는 모든 중생은 다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보살의 한 모공(毛孔)에서 나오는 광명만 보아도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들의 청정하고 미묘한 광명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보살의 이름을 끝없는 광명 즉 무변광(無邊光)이라 한다.
*대ㆍ소승의 관계 ― 소승은 대승을 무시했다----소승(Hinayana)이라는 말은 부파(아비달마)불교에 반동으로 생겨난 이른바 대승(Mahayana)에 의해 폄하돼 붙여진 이름이다. Hinayana의 역어는 ‘작다’이지만 그 원어 hina는 ‘마땅히 버려야 할’, ‘저열한’, ‘천한’의 뜻을 지닌 말이다. 그래서 소승 대신 하승(下乘), 하열승(下劣乘)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제불(諸佛) 보살의 어머니라는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통해 불과(佛果)를 추구하며 6바라밀을 실천하던 일단의 보살승들이 <소품(小品)> 계통의 반야경전을 작성하면서 스스로의 도를 ‘대승(大乘)’이라 칭하고, 기성의 불교 특히 설일체유부 비바사(毘婆沙)를 중심으로 하는 아비달마불교를 멸시해서 소승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왜 소승인가? 초기대승 교학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따르면 그 이유는 다만 두 가지로서,
첫째는 자신의 이익(열반)만을 설할 뿐 중생을 위한 자비심을 설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개아(個我;중생)의 공(空)만을 설하고 일체법의 공을 설하지 않기 때문으로, 그 협소함이 소 발자국에 괴인 물과 같기 때문에 소승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학에서 우리의 도식적 이해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대승과 소승의 구분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대개 이러하다.
① 부파불교는 아라한을 이상으로 삼는 성문승(聲聞乘)이며, 대승은 부처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보살승(菩薩乘)이다.
② 부파불교는 삼계육도를 윤회하는 괴로움을 여의고자 하는 업보사상(業報思想)이며, 대승불교는 원행사상(願行思想)이다.
③ 부파불교는 자리(自利)의 가르침이며, 대승불교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가르침이다.
④ 부파불교는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의 유(有)의 입장이며, 대승불교는 반야지혜에 의한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입장이다.
⑤ 부파불교는 지극히 형식적이며 번쇄한 철학과 이론을 위한 이론이 많지만, 초기대승에서는 신앙과 실천을 중시한다.
⑥ 소승불교는 학문과 이론에 중점을 두었으나 그 경지는 저속한 것이었고 출가자중심의 불교였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고차원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입장에 서며, 나아가 재가자불교를 표방하고 평이한 교설을 설하는 가운데 불교의 근본을 잃지 않음을 추구한다.
이는 대개의 불교학개론서 내지 대승불교개론서에서 한결같이 진술되고 있는 바이며, 우리가 상투적으로 되뇌고 있는 대ㆍ소승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같은 도식적 논의의 이면에는 이미 좋고 나쁘다는 판단이 개입돼 있으며, 따라서 이는 적어도 어떤 한 종파적 이념가의 발언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학문적 발언은 될 수 없다.
원래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말을 하게 된 것은 대승에서 사회적 실천구도자인 보살의 이타행과 아(我)ㆍ법(法)의 일체개공(一切皆空)이 전제가 됐던 것이다. 이와 같이 소승을 폄하하지만 그 이면에 나타나는 대ㆍ소승의 비정상적인 관계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
자리이타(自利利他)를 표방하며 나타난 보살의 불교는 분명 새로운 불교였지만, 그것은 기존의 상식과 가치에서 벗어난 불교였다. 처음부터 그들은 기존의 불교와는 논의의 출발점을 달리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불타가 남긴 교법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불타를 해석했으며, 그렇게 해석되어진 불타 즉 ‘반야바라밀다’를 통해 지금 여기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성취하려는 이상을 능동적으로 표방했다.
그리하여 세존 고타마가 남긴 교법, 이를테면 5온ㆍ12처ㆍ18계의 제법분별, 12연기의 유전과 환멸, 나아가 세속의 고(苦)와 열반의 고멸(苦滅)을 설한 4성제(四聖諦), 그에 관한 지혜[智]와 지혜의 획득 등이 모두 ‘허망한 것’일 따름으로 몰아갔다. 이는 바로 우리가 주문과도 같이 외우는 270자 <반야심경>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같은 반야바라밀다에 대해 당시 성문승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대승공관의 일차적 타겟은 기존 성문승, 특히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였으나 그들에게 있어 대승은 애당초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를테면 대승 흥기 이전의 논서인 <육족론(六足論)>이나 <발지론(發智論)>은 시기적으로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대승이 흥기해 왕성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시기에 작성된 세친(世親)이나 중현(衆賢)의 저술 어디에도 그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철저하게 침묵하고 있다.
어떤 논에 의하면 소승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승을 배운 이와는 물조차 다른 강에서 길러다 마셨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의 히라까와(平川彰)는 그 이유를 부파불교의 교리적 결백성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요시모또(吉元信行)는 교학의 전제가 달랐기 때문에 대승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지만, 신흥(新興)의 대승은 다만 소수 신출내기의 아마추어였을 뿐이었다.
현장(玄奘)이 인도에 체재할 무렵(AD. 630~644), 이 시기는 이미 대승이 흥기한 지 70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도 땅에는 이른바 소승이 압도적이었다. 그가 방문한 불교사원의 수는 총1,196곳으로, 그 중 대승은 사원 116개소에 승려 수 19,400명, 소승은 사원 638개소에 승려 수 130,130명으로 소승이 대승보다 월등히 많았으며, 대ㆍ소승을 겸한 사원은 139개소, 승려 수 22,900명이어서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했기에 그들(소승)은 아비달마논서 그 어디에서도 대승을 불설(佛說)이 아니라고 비판한 적이 없었음에도 대승은 자신의 학설이 불설임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기성의 성문승을 비판이 아닌 부정의 대상(魔)으로 취급했으며, 이에 따라 생겨난 명칭이 바로 ‘소승’이었다.
나아가 대승의 논사들은 그들의 대승경론을 용궁이나 도솔천에서 배워온 것이라고 과장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게도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을 주장해 성문(聲聞) 독각(獨覺)은 끝내 불과(佛果)를 이룰 수 없는 종성(種姓)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승의 보살이 성문이 지향하는 열반에 들지 않으려 했듯이, 성문은 애당초 불과를 엿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이론상 불과의 증득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대승은 분명 새로운 불교였다. 그것도 기존의 불교와는 타협점을 갖지 않는, 진보도 발전도 아닌 새로운 혁신이었다. 그들은 불타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불타의 말씀(경전)을 결집했다. 기성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불교라고 할 수도 없는, 그리고 그 결함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어서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반야바라밀다의 공관(空觀)은 주석가들의 피나는 헌신에 의해 역사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것은 동점(東漸)하면서 보다 강화됐으며, 마침내 우리나라에 이르러 성문의 아비달마불교는 불교학에서 아예 배제되고 말았다. 나아가 오늘날에서조차 그 전통이 지속돼 내려오고 있는 스리랑카 등 남방의 제 불교를 ‘소승불교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소승이라 일컬어진, 지금도 그렇게 일컬어지고 있는 아비달마불교는 불교철학의 최초의 전개로서, 불교학 상의 거의 모든 문제를 노정시키고 있다. 그것은 대승공관에서 항상 말하듯이 그 자체로서는 열등하지도 않으며, 방편설도 아니다. 그것은 대승과는 또 다른 형태의 진리설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불타 자내증(自內證)을 엿보기에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소승불교일고(권오민)>를 간추린 것임.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 참조.
*대승(大乘, Mahayana)---‘대승’의 어원은 큰(maha) 수레(yana), 즉 많은 사람을 구제해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제도(濟度)를 그 목표로 한다. 소승(小乘)이 자기완성[自利]을 목표로 한 ‘탈 것’임에 비해 대승은 많은 사람들의 구제[利他]를 목적으로 하는 ‘큰 탈 것’이라는 말이다. 곧, 대승이란 모든 중생이 다 타고 생사를 넘어 피안의 열반에 도달할 수 있는 큰 수레를 의미한다. 이 수레는 바로 불법을 비유해 말한 것으로, 불법 중 가장 구경적(究竟的)인 것이 바로 대승법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승의 목적은 성불이요, 보살행이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보살이다.
‘대승(大乘)’이란 말이 처음 사용된 곳은 〈소품반야경〉이다. 이 경의 편찬자들은 자신들을 법사(法師)라고 호칭하며, 반야바라밀의 완성을 통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 불퇴전의 보살(菩薩)이라고 했다. 이들 법사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대승, 즉 큰 수레라고 부르는 반면, 기존의 불교교단의 가르침을 소승(小乘), 즉 작은 수레라고 칭하고, 불탑공양보다 대승의 가르침인 반야를 설한 경전에 대한 공양이 수승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법사와 경전에 대한 공양이 강조되는 〈대품반야경〉과 <화엄경>, <법화경> 등과 같은 초기 대승경전이 계속적으로 편찬되면서 대승불교가 그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AD 2세기 초엽이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대승법이란 발보리심(發菩提心)을 해 보살행을 닦고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으로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것이 구경의 목적으로 했다. 그러므로 대승은 성불을 목적으로 발심수행을 한다. 중생이 불법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선 자신을 닦기 위해 신심(信心)을 내어야 하고, 그 신심을 바탕으로 해야 증득할 수 있다. 따라서 대승은 자신의 마음을 중요시하므로, ‘대승기신(大乘起信)’이란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중생심을 근본으로 하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대승기신론>은 자심(自心)의 수행을 중요시해 “대승법이란 이른바 중생심이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렇듯 일체 모든 것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시작하고 마음으로 귀결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중생심이 바로 수행의 주체이므로, 이 중생심을 통해 생멸심을 멸하고 진여심을 발현할 때 비로소 이상적인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인격을 완성하고 성불의 경지를 증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대승은 중생을 제도해 성불할 수 있게 함을 이상으로 하며, 대승의 법문은 세간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함께 성불할 수 있는 법이다.
헌데 대승불교는 너무 다양하다. 그러다가 보니, 중국에서는 위험하게 부분적으로 외도의 발상까지도 대승불교라는 이름으로 수용했다. 그리하여 불교에 혼선이 야기됐으므로 이제 진정 대승불교가 해야 할 일은 대승 교학 안에서 잘못 주장되고 있는 외도의 가르침을 걸러내야 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비약한 중국 일부 스님들의 언표를 가지고 그것이 대승불교라고 해서는 혼선을 막지 못한다. 진정한 대승은 반야ㆍ중관, 즉 용수(龍樹)의 중론과 회쟁론을 토대하고, 대승의 아비달마라 일컫는 세친(世親)의 <유식 30송>을 토대로 해야 한다. 반야ㆍ중관이나 유식계열에서는 아트만 류의 ‘참나‘를 설하지 않는다.
중국의 여래장(如來藏)계열에서는 심식설(心識說)에 그들의 노장(老莊)사상을 가미해 불성(佛性), 진아(眞我-참나), 심지어 자성(自性)까지 주장을 하고 있는데, 한국불교에서 무비판적으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문제가 있다. 학자들은 대승불교 흥기에 대해,
①부파불교의 교리 해석에 반발해서 대승불교가 흥기했다.
②부파불교의 불전문학과 찬불승에 의해서 발전했다.
③불탑신앙에서 대승불교가 발전하게 됐다.
이러한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에 대한 신앙을 강조하는 찬불승이나 불탑신앙에서 발전된 대승의 입장은 법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중심하고 부처님에 대한 믿음의 문제를 극대화한 가르침이다. 따라서 신화적이고 신비적인 요소가 너무 강조되고 있고, 따라서 부처님을 너무 신격화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초기불교나 아비담마불교 입장과는 거리가 멀고, 대승불교 주류와도 다른 측면이다.
다시 말하면, 법을 중심에 두고 있는 초기불교 - 아비담마 - 반야ㆍ중관 - 유식의 불교사의 전개는 주류 입장이고, 찬불과 믿음을 중심에 두고 있는 일부 대승의 흐름은 신앙이 중심이기에 법을 중시한 주류 입장과는 다른 측면에서 불교를 전개하고 있다. 이처럼 같은 대승이라는 이름 안에도 전혀 다른 이질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이런 이질적인 측면이 통합되고 있는 부분도 있어서 더욱 유의해야 할 일이다.
다만 대승불교 교학에서도 반야ㆍ중관과 유식유가행의 기본교학은 초기불교나 아비담마 불교의 법해석을 토대로 하고 있으므로 대승에서도 너무 빗나간 부분을 교정하는 일이다. 불교는 그 시대상황과 지역상황에 따라 각자 독특한 불교문화를 형성해왔다. 인도에서는 인도불교의 문화가 있고, 중앙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와 스리랑카, 미얀마 등 남방에서는 그들대로의 전통문화와 습합된 독특한 문화가 있다. 그러한 문화는 문화대로 존중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을 존중해 나가야 하리라고 본다. 그런 입장에서 빗나간 대승의 반성이 필요하다.---→대승불교(大乘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 참조.
*대승경전(大乘經典)의 편찬---고대 인도문화를 주도해 온 인도 아리안족은 남달리 종교적 성향이 강한 종족이었다. 종교적 감정이 풍부한 이 종족은 기억력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갖추고 있었다. 종교적 영감이 산스크리트어라는 뛰어난 언어를 낳았고, 이 언어 덕분에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나 기억할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게 된 것 같다.
인도에서 불교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방대한 성전들이 모두 암송에 의해 전해져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인도의 과거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데에 커다란 난관에 봉착한다. 고도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인도는 거의 기록문화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사실은 후대로 전승돼온 현상들을 여러 가지로 연관 지음으로써 유추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 있어서는 불교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나마 다행히도 불타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는 보통 불교경전이라 하면 일반 사람은 판독할 수 없는 어려운 한자대장경을 먼저 연상한다. 그래서 불타는 처음부터 어렵고 복잡한 방식으로 가르침을 펴신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착각은 중국으로의 불교도입에 따른 한역(漢譯)과정에서 비롯된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원래 처음부터 경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불타 스스로도 그 자신이 가르친 내용을 저서나 기록 또는 어떤 방법으로도 보관하거나 전승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을 들은 제자나 신도들이 머릿속에 기억해, 정리하고, 보존, 전달해 왔을 따름이다. 수백 년 동안은 글자로 베껴 쓰는 일도 없었다. 이는 당시의 일반적인 전통이기도 했다.
그러나 특히 불교의 입장에 있어서는 그에 대한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제자들로서는 불타의 성스런 말씀을 문자로 옮기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다. 이는 마치 불타 입멸 후 얼마 동안은 그의 거룩한 모습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묘사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불타의 설법내용에 대해서는 제자나 신도가 실제로 들은 바에 따라 기억 속에서 파악하고, 구술에 의해 전달하는 것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그 내용을 한 마디도 어긋나지 않게 기억 속에 간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설법에 대해 어느 정도의 줄거리만 대강 기억했을 것으로 본다. 더구나 그 대요의 파악에 있어서 여러 사람이 똑같을 수가 없었을 것이며, 같은 설법을 듣고도 듣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조금씩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불타가 입멸하고 난 후, 사소했던 이러한 견해의 차이가 보다 심각한 상황을 야기할 우려가 있었다. 그 내용이 달라지거나 자신의 견해를 불타의 것인 양 강변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따라서 불타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그분의 실제 가르침을 확인하고 정리해 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불타의 가르침을 직접 청취한 제자들이 전체회의라 할 수 있는 모임을 갖게 됐다.
이상과 같은 목적에서 가진 불제자들의 회합을 결집(結集)이라 한다. 비록 이 모임의 결과가 문자화되지는 않았지만, 이 모임에서 결정된 내용들이 후대에 경전(經과 律)으로 결실을 맺게 됐으므로, 이 모임의 성격을 경전편찬회의(經典編纂會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집은 역사의 시차를 두고 여러 차례 있었다.
제1결집은 불타 입멸 직후에,
제2결집은 불타 입멸 후 100년에,
제3차는 불타 입멸 후 200여 년이 지난 아소카왕 시대에,
제4차는 불타 입멸 후 400년 혹은 600년경에 있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두 차례 더 있었다고 하나, 제4차 이후의 결집에 대해서는 사실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제4차에서는 논장(論藏)이, 제5차에는 대승경전이, 제6차에는 밀교의 진언(眞言)이 각각 결집됐다고 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신빙성이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남방불교국가인 스리랑카에서는 12세기에 제4결집을 독자적으로 집행했고, 미얀마에서는 19세기 후반과 1954년에 각각 제5차와 제6차의 결집을 집행한 바가 있다.
물론 경전의 편찬에서 중요했던 것은 제1차 결집이다. 여기서 이후의 모든 경전의 골격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때는 왕사성(王舍城)에 500명의 제자들이 모여, 불타의 설법을 결집했다고 한다. 이때 확정된 내용들은 암송에 의해 전해오다가 적어도 기원전 1세기 이후에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한 언어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도의 방언인 빠알리어이고, 다른 하나는 표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였다. 전자에 의한 경전은 남방으로 전해져 남방불교의 성전이 됐고, 후자에 의한 경전은 북방으로 전해져 한자로 번역됨으로써 북방불교의 성전이 됐다.
<대승경전(大乘經典) 성립의 배경>
당시에는 이미 불타가 직접 설하신 경전인 <아함경>이 있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그와 달리 불타의 참뜻을 나타낼 새로운 표현이 필요하게 됐을까. 이것은 대승불교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설하려 했던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맥을 같이한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는 어떻게 흥기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대승불교는 원래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서 불탑공양을 통해 불타를 찬미하고 숭배한 재가신자들을 주로 하는 집단에 의해 일어난 새로운 신앙운동이었다.
<초기 대승불교의 연구(1968)>라는 논문은 일본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1915~2002)에 의해 발표된 논문으로, 이 논문은 대승불교 기원에 대한 것이다. 그 때까지 대승불교의 기원은 주로 부파불교(部派佛敎) 가운데 대중부(大衆部)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히라카와는 그 기원을 재가신자(在家信者)를 중심으로 하는 불탑교단(佛塔敎團)이라고 지적해 경제적 기반을 불탑에 주어지는 보시(布施)라고 추정했다. 불탑교단 기원설은 세계 불교 연구의 역사 중에서도 독특한 것이며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학설은 현재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비판,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연구사적인 의의는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신앙운동은 재래의 여러 부파들의 불교가 승원중심의 불교로서 아비달마교학을 지향해 너무 전문적인 법(法) 중심의 불교를 전개시키고 있었음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출발했다.
그리고 <아함경> 등 초기불교 경전은 전문적인 승려를 대상으로 편찬한 경전이다. 그래서 경전 내용은 모두 “비구여~”로 서술돼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 경전은 모두 대중을 상대로 해서 편찬됐다. 그래서 경전 내용이 모두 “선남자ㆍ선여인이여~”이라든가 “불자야~”로 서술돼 있다.
또한 대승경전을 편찬한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불타의 절대성과 자비성이 무한하다는 것으로서, 이는 불멸 후 나타난 불타 신격화의 일환이었다. 즉, 불전(佛傳)과 본생담(本生譚) 등을 통해 점차 심화돼가던 불타에 대한 고찰의 결과, 불타는 과거에 무한의 수행을 한 과보로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고 했으며, 인행(因行)으로서 이타행을 주로 하는 육바라밀행을 설하게 됐는데, 그러한 불타의 체험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결의했던 곳에 새로운 운동의 출발점이 있었다.
그리고 되도록 많은 중생이 성불하는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새로운 운동을 대승이라 불렀다. 대승경전(大乘經典)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자연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전생, 그 전생에 이미 성불 하셔서 불타가 되셨는데, ― 이것을 본생성불(本生成佛)이라고 함 ― 이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오셨다고 보는 입장에서 편찬한 경전이다.
소승경전은 현생성불(現生成佛)의 입장의 경전이다. 현생이라고 하면 금생에 성불하신 것으로 보는 금생성불(今生成佛)을 말한다.
대승경전은 본생성불(本生成佛)의 입장이다. 본생이라고 하는 이 ‘본(本) 자’는 과거의 과거, 전생이라는 의미와 같다. 전생, 그 전생에 성불하셨는데,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여러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고자, 또 즐거움이 있는 세계를 보이고자 오셨다. 그래서 일부러 불타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고, 출가하는 모습, 고행하는 모습, 성불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비방편(慈悲方便)이라고 하는데, 자비방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입장이다.
소승경전에서는 금생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금생에서 성불했다, 이렇게 보는 것으로 불타를 인간으로 보는 것이고, 역사적인 인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경전에서는 전생, 즉 본생에 성불했다고 해서 불타를 역사를 초월한 초역사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민도 하시고, 출가도 하시고, 도를 닦으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자비와 그 자비를 성취시키는 방편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렇게 불타를 보는 입장에서 편찬한 것이 대승경전이다. 즉, 대승경전은 불법의 멋진 확장이다.
이러다가 보니, 대승경전은 모두가 픽션(fiction)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대승경전이 이야기책 식으로 내용의 줄거리가 전개된다.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이라 할 <화엄경>과 <법화경>이 그렇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열반에 드신 지 4~500년 후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대승경전을 부처님 이름으로, 그것도 비로자나불이나 아미타불과 같은 새로운 부처를 창작해 기술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파불교 출가수행자들은 불타와 자신들과의 거리감 때문에 스스로가 아라한임에 머무르고자 했음에 대해, 대승불교에선 중생의 성불이야말로 불타의 본원(本願)이라고 주장해 불타와 똑같은 깨달음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을 불타의 전신(前身)과 마찬가지인 ‘보살(보리살타)’이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사상을 표명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경전 ― 대승경전과 논서들을 편찬해갔다. 따라서 대승경전은 지금까지의 경전 ― 즉, <아함경>과는 전혀 다른 형태,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법, 새로운 문학형식으로 생산하는 것이었다. 초기불교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전이 여기저기서 꼬리를 물고 나타나게 됐다.
<대승경전의 성립>
불교의 경전으로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것은 매우 많다. 일체경(一切經)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 가운데, 한역 장경은 중국 후한(後漢) 이래 원대(元代)에 이르는, 무릇 1천여 년 간에 걸쳐 중국에서 한역된 경전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 수는 무려 1천 6백여 부, 6천 권 가량의 수량이 된다. 이들은 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된 것이지만, 더러 빠알리어 등에서 번역된 것도 있다. 한역 경전을 중심으로만 놓고 볼 때도 불교의 경전은 실로 방대하다. 현장(玄奘) 스님이 번역 출판한 <600권 대반야경> 하나만 해도 기독교 성경의 24~25배 분량이고,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생각할 때 실로 경전의 분량이 얼마나 방대한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데 이 많은 경전들이 다 불타가 직접 설하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경전이 불멸 후 제자들의 결집에 의해 후대에 전해진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탁월한 불타라 하더라도 그 방대한 양을 다 설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경ㆍ율 중에는 후세의 사상 학설, 또는 그 때 일어났던 일들을 기재하는 것도 많다. 따라서 교의가 다양하고 서로 모순되는 것도 적지 않으므로 불타 한 분에 의해 연출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경전에 대해 일찍부터 대ㆍ소승의 구별을 세워 온 것도 사실이지만, 이른바 소승경전이라고 칭해지는 여러 부의 아함과 대승경전인 반야ㆍ법화 등을 비교해 보면 체재 자체가 다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아함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타의 실록이라 단언할 수 없듯이, 대승경전이 아함의 뒤에 일어난 것이라 해도 모두 불설에 기초한 것으로서, 불설의 법의(法義)를 깊이 해석하고, 깊이 관해, 종래의 소극적 소승불교를 혁신하도록 했기 때문에 오히려 대승이 참다운 불교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대승경전의 편찬은 불멸 후 4~500년, 즉 서력기원전후에 생산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대승경전도 한결같이, 「여시아문(如是我聞) -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밀로 시작한다. 그것이 전승돼온 불타의 말씀임을 표명하는 말이다. 그런데 초기졍전에서 이 말은 문자 그대로의 뜻이 있었다. 그러나 대승경전에서 이 말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일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해 <대지도론>의 저자 나가르주나(龍樹)는 이 문구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고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말하고 있다.
“부처님 경의 도입부분에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라는 말을 쓰는가. 그것은 불법의 대해(大海)는 신(信)을 능입(能入)으로 하고, 지(智)를 능도(能度)로 삼는바, ‘이와 같이’라 함은 곧 신(信)이다.”라고 했다. 즉, 용수의 이 말은 이미 글자 그대로 들은 바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경전을 읽는 사람은 불타의 말씀을 믿고 읽으러 들어가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초기경전 결집 당시 불타의 제자들이 불타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불타를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불타의 생존 시도 아니고 불타에게 직접 교육을 받은 불타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불타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식어갈 때에, 대중들이 불법(佛法)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방편의 차원에서, 그리고 불법에 대해 불타나 그 제자들과 다름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위와 같은 확고한 믿음이 있어서 대승경전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승경전이 출현해 육바라밀을 시설한 불교혁신운동에 대해 보수파가 반발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대승교도와 보수파와의 알력은 용수의 이런 말로 해결되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의 알력은 <도행반야경> 등의 초기 대승경전 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하여 용수(龍樹)를 지나 무착(無着) 시대에 이르러 대승경전이 불설이라는 논증이 공공연하게 나타난다. 무착은 <대승장엄론>에서 8인(八因 - 不記, 同行, 不行, 成就, 體, 非體, 能治, 文異)을 열거해 대승이 참다운 불설임을 논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무착은 <현양성교론>에서는 10인(十因)을 나열하고, <성유식론>에서는 7인(七因)을 설하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것들은 모두 추상적인 논의에 그치고 있어 사실적인 언급은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모두 불타 친설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종교 역시 인간문화사의 한 단면으로, 세태와 함께 변하고 발달해야하는 것이라면 불교도 예외일 수는 없다. 소승에서 대승으로, 또 공교(空敎)에서 중도교(中道敎)로 발전했듯이 경전도 이에 맞추어 편찬돼 오늘에 이르렀을 것임은 사실이다.
“오늘 날 대승불교 흥기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학자들은 대개 그 기원을 전통 부파교단의 연장선상에서 찾고 있다. 대승경전 역시 이전의 경전을 수용해 해석하고 새롭게 읽는 과정을 통해 종류와 분량이 확대돼 간 것이지 결코 ‘역사적 붓다’의 권위를 빌려 날조된 것이 아니며, 경전의 증광 또한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경전해석의 패턴을 의식해 이루어진 것이지 결코 자유로이 무제한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 권오민
그런데 이와 같이 대승경전이 불타 친설(親說)이 아니고, 시대를 따라 점차 편찬된 것이라 하더라도, 누구에 의해, 언제 어디서, 편찬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남아 있다. 당연히 이런 정도의 문제제기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무리 그렇게 문제 제기를 하더라도 끝내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큰 난관이 가로막고 있다.
그 첫째 난관이란, 대승경전 편찬자들은 하나 같이 그 배후에 숨어있기 마련이어서, 즉 전면에 나서지 않으므로 편찬자를 알아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불타의 이름을 빌릴지언정 스스로 나서서 감히 불타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러 경로로 봤을 때, 대승경전 편찬에 깊이 관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용수보살(龍樹菩薩) 역시 숨어서 주도하거나 도울 뿐이지 외람되게 전면에 나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난관은, 산스크리트어 원본으로 남아 있는 대승경전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원본이 많이 남아 있어야 그들의 상호비교를 통해, 혹은 문맥의 어느 부분에서 유추해 조금의 실마리라도 찾겠는데, 그것조차도 불가능하다.
셋째 난관은, 중국인들의 그릇된 선입견이 한 몫을 한 것이다. 과거에는 정보통신의 한계 때문에 중국인들은 대승경전 모두가 불타의 친설이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난관은 기록문화의 전통이 없는 인도에서 문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는 ‘누구’의 문제는 거의 포기 상태이고, 연구의 초점이 ‘언제 어디서’로 옮아가 있다. 헌데 이것마저도 인도에서 그 실마리를 찾기는 어렵다. 이 역시 역사적 흔적이나 문헌기록에 근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에서 발간됐던 대승경전의 번역 연대로부터 추정해 그 대강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남북조 시대에 소위 교상판석(敎相判釋)이 성행해 이에 근거했으나 이는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허황된 이론이어서 믿을 것이 못된다. 그리고 중국에서 번역된 대승경전의 목록과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산스크리트어본 경전 등에 의해 대승경전의 편찬 지역을 개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시기적으로는 기원전후에서 6~7세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계속 제작됐고, 지역적으로는 한곳에 편중되지 않고 남인도, 중인도, 북인도, 중앙아시아, 심지어 중국 등 각지에서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서역을 거쳐 들어온 대승경전의 각 이본을 비교해 보면, 경전이 남인도에서 편찬됐다고 하기도 하고, 북인도에서 편찬됐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서역지방에서 대승경전이 원활하게 유통되려면 아무래도 북인도에서도 적지 않게 편찬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불교경전이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後漢) 무렵이고, 일찍 안식국(安息國), 대월지국(大月支國), 강거국(康居國) 등 소위 서역이라 일컫는 중앙아시아의 사문이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왔다. 따라서 이들이 가지고 온 삼장이 통과했던 지역에도 불교가 전파됐고, 그 지역에 포교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개발된 실크로드를 따라 2세기 이후 후한시대에 중국으로 불경이 전해지게 되는데, 이때 산스크리트의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이들은 주로 실크로드 주변에 위치한 국가 출신의 불교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아직 중국어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중국인의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쳤으므로, 한자로 된 북방경전은 인도로부터 직접 전수된 경전에 비해 그 본래의 의미가 다소 변질되거나 이질적인 요소를 담고 있을 소지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경전을 번역할 때 원본을 첨삭 개조하기도 하고, 그 뜻을 이어 새로운 경전을 편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 찬술의 위경이 다수 있다고 하는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서역에서 편찬된 위경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 대승경전인 <도행반야경> 등에 의하면, 최초의 대승경전이라 할 반야경은 남인도에서 처음으로 편찬된 것 같다. 남인도에 연고가 있는 문수보살이 <도행반야경>의 처음에 미륵과 함께 등장하고, 또 <아사세왕경>, <수능엄삼매경> 등의 초기 대승경전에서도 문수의 활약을 서술하고 있어, 이들이 활약한 남인도에서 일부 대승경전이 편찬됐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후대에 가서 밀교가 전파되면서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71~741)의 제자이고 중국에 많은 전적을 소개한 불공(不空, 705~774)은 실론 태생이며, 밀교경전이 모두 남인도 보타낙가산(補陀落伽山)을 설법 장소로 하고 있음으로 봐서 이 지방에서 밀교와 관음 계통의 경전이 편찬됐을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도행반야경>에도 반야바라밀은 남인도에서 차례로 전파돼 북인도로 전파됐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북인도란 설일체유부의 중심지인 카슈미르 지방과 간다라 지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보수적이고 매우 교권을 중시한 상좌부의 일파인 유부의 근거지인 북인도 카슈미르 지방에서 먼저 대승이 발생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물론 후에는 이 지역을 포함해서 중앙아시아 일대에 걸치는 북방지역이 오히려 대승불교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도행반야경>의 최초 부분이 반야경전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반야경전 대부분은 스스로 그것이 남방(南方)에서 기원한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대승불교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야경은 부처 중심의 대승불교를 법(法) 중심의 종교로 전환하는 역할을 했다. 즉,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도(道)를 고양하고 재가로부터 출가(出家)로 전환시켜 대승불교의 전문화로 발전했다.
그런데 대승불교 경전도 대부분 석가모니 부처가 직접 말한 것처럼 돼 있으나, 고증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가 직접 말한 것은 아님이 밝혀져 위경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석가모니의 직설(直說)은 아니지만 진설(眞說)이라는 입장이다. 즉,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글과 말이라면 석가모니의 직설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모든 경전은 불타의 사상과 실천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편협한 사고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승경전들은 결코 불타의 사상과 실천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대승경전 편찬자들은 그들 나름의 확고한 신념과 목표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불타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고지식하게 불타의 말씀을 그대로 듣고 전하는 초기 성문들과 다르게 대승경전 편찬자들은 불타의 진의를 꿰뚫는, 시대에 맞는 이치를 대승경전에 나타내는 것에 그들은 주저하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불타의 정신을 살리는 길임을 확신했다. 그러한 정신이 있었기에 대승불교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문수(文殊), 용수(龍樹), 마명(馬鳴), 무착(無着), 세친(世親) 등과 같은 뛰어난 선지식들의 생각도 한결 같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BC 1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초기 대승경전으로 중요한 것은 반야경ㆍ법화경ㆍ십지경ㆍ무량수경ㆍ아미타경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독창적으로 편찬된 경전도 있지만 단편적으로 형성된 것을 하나로 모은 것도 있으며, 원래 있는 구본(舊本)에 증광한 것도 있고, 혹은 다소 수정을 간한 경전도 있었을 것이다. 한역된 경전 중에는 중역(重譯) 된 것이 상당수 있는데, 그들을 비교해보면 그 역본들이 완전하게 동일하지 않고, 후역일수록 항상 증광되고 있다. 그것은 중요한 경전이 일단 제작되면, 그것에 대해 증광과 수정이 가해져서 첨삭 개찬됐음을 말하고 있다. 반야경, 화엄경 등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것의 이본을 놓고 비교해 보면 더욱 확실해 진다.
“요컨대 대승경전이 날조된 후대 창작이라는 것은 「불법=불설」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생각이며, ‘아비달마불교는 초기불교의 왜곡’이라거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라는 말 또한 불교의 전통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불교의 시대적 구분을 도식적으로 이해한데서 비롯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함과 중아함은 유부의 전승이고, 5니까야는 상좌부의 전승으로, 초기경전 자체가 이미 아비달마화 한, 출가 승려를 위해 편찬된 교과서(E. 라모트; 櫻部建)였기 때문이며, 각각의 부파가 불타의 취지(dharma)를 밝히려고 했듯이 대승불교 역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의 모본ur-text이 된 원초적 형태가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의 확인은 사실상 불가능할뿐더러 비바사사(毘婆沙師)를 비롯한 다수의 대ㆍ소승의 논사들은 제1결집은 멸실됐으며, 그 후로도 무량의 경전이 은몰했다고 전한다.)” - 권오민
<대승경전의 삼대 원류>
① 공관적(空觀的) 경전 ― 반야부 경전 ― 반야사상, 공(空)사상, 무아사상, 중관사상의 논서.
② 유심론적(唯心論的) 경전 ― 해심밀경, 무량수경, 아미타경, 법화경, 유식(唯識) 계통 논서.
③ 공과 유심을 모두 섭수한 경전 ― 화엄경, 원각경, 능엄경, 천수경.
<시기별로 편찬된 대승경전>
① 초기 대승경전 -- 반야부경전(般若部經典), 육바라밀경(六波羅蜜), 보살장경(菩薩藏經), 삼품경(三品經), 도지대경(道智大經), 반야삼매경(般若三昧經),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 아미타경(阿彌陀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
② 중기 대승경전 --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 해심밀경(解深密經), 유마경(維摩經), 승만경(勝鬘經),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능가경(楞伽經), 앙굴마라경(鴦掘魔羅經), 금강명경(金剛明經) 등.
③ 후기 대승경전 --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 등.---→대승불교(大乘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 참조.
*대승계(大乘戒)의 특징---대승계란 대승불교권에서 제정한 계율을 의미한다. 원래 초기대승불교는 별도의 율장을 갖고 있지 않았다. 초기대승불교는 소승불교(부파불교)가 지나치게 출가자 위주였음에 반발해서 출발했으므로 출가수행의 우위를 부정해서 경 및 논만 있을 뿐 율장이 없었다. 그러다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때는 소승ㆍ대승의 불전이 섞여서 한꺼번에 들어왔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대승불교는 원칙적으로 소승의 구족계(具足戒-250계)를 그대로 채용했다.
그러다가 후대에 오면서 <범망경>, <보살선계경>에 기초를 둔 계율이 제정되면서 그 틀을 갖추게 됐다. 대승계가 계율에 대한 엄격함보다는 ‘선한 마음’이 강조되면서 자칫 파계에 대한 명분이 될 수 있는 반면, 소승계는 계율조목에 대한 엄격한 실천이 강조되므로 교단의 청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이 돋보인다.
결국 대승계가 계율조목 하나하나에 대한 실천을 강조하기보다는 보살행을 강조한 것이라면 소승계는 조목 하나하나에 대한 실천을 강조함으로써 출가자의 청정성을 유지하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지향한다는 점이 대 · 소승계의 차이이다.---삼취정계(三聚淨戒) 참조.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줄여서 <기신론(起信論)>이라고도 하는데, 큰 믿음을 일으키는 글이라는 뜻이다. 기신(起信)이란 이 논의 글에 의해 중생의 믿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기신이라고 말한 것이니, 신(信)은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여기는 믿음을 말한다.
<신기론>은 화엄종, 천태종뿐만 아니라 정토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파에 영향을 준 그런 문헌이었다. 이문헌의 핵심 사상은 “모든 번뇌의 근원은 무한한 과거로부터 의 습관에서 오는 것으로, 모든 법은 오직 자기 마음의 비춤에 있다.”고 해서 이것이 선법수행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대승기신론>는 산스크리트 원본이나 티베트역은 없고 한역본만 있는 탓에 인도에서 찬술된 것인지 중국에서 찬술된 것인지조차 확실치 않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논서이거나, 적어도 중국에 들어온 인도나 중앙아시아 역경사들의 가르침을 듣고 역경에 참여한 중국인 역경사들이 정리한 것으로 여기는 논서이다.
지은이로 알려진 마명(馬鳴, 아슈바고샤/Asva ghosa, 100∼160?)은 인도 브라만 출신의 대학자였다. 당시 인도의 학문중심지, 마가다 지방 여러 도시에서 불교학자들과 논쟁에서 패한 후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가 <대승기신론>을 저술한 것은 불교사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며, 이로 인해 대승사상이 크게 떨쳤다. 그러나 그의 생존연대가 불확실해 그의 저술 여부를 확실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중국에서 만들어진 위경이라는 설도 있다.
중국 양(梁)나라 때 진제(眞諦, Pramārtha, 499∼569)와 당나라 때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의 한역본이 각기 전하며, 한국에는 실차난타 한역본이 전해지고 있다.
원효 대사는 <대승기신론>이란 제목에서 “‘대(大)’란 진리의 당체(當體), 이 논의 근본 본체(宗體)를 말함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탐(貪)ㆍ진(嗔)ㆍ치(痴) 등 번뇌에 가려져서 나타나지 못하니 이것을 미(迷)라 하고, 그 미(迷)에서 오(悟)로 나아가는 힘을 승(乘)이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마음에 대승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다. 이 자성청정심을 반조(反照)해 찾는 것을 기신(起信)이라 한다. 기신이란 이 논의 뛰어난 기능(勝能)이니 본체(體)와 작용(用)을 합해 제목으로 삼아 대승기신론으로 한 것이다. 대승이란 받아들이는 그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고, 그 위에서 믿음을 발하는 행위는 대승의 작용이다. 이와 같이 대승과 기신은 체와 용의 관계에 놓여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대승기신론’이란 “이 논문에 의지해서 중생들의 믿음을 일으킨다(依此論文 起衆生信)”는 뜻이라고 정리했다.
그리고 당나라의 현수 법장(賢首法藏)은 “대승은 일으킬 수 있는 것(能起)이고, 믿는 마음은 일으켜진 것(所起)이니, 대승이 믿음을 일으킨다.”는 뜻이라고 했다. 즉, 대승기신이란 말을 풀면 '대승이 믿음을 일으킨다'는 뜻으로서, 중생이 일으키는 믿음이란 대승에서 비롯된 것이며, 대승이란 본체론적인 진리가 있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작용적인 진리가 일으켜진다는 말이다.
믿음을 일으키는 것(起信)이 중요하다. 제 아무리 놀라운 구원의 진리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그것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선포 역시 한낱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관과 관계를 맺지 않는 순수객관이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그것은 단순한 관념 내지는 표상일뿐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바로 대승 자체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야말로 궁극적인 진리를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해주는 최고의 실천행인 것이다.
불교 전적(典籍)들은 대부분 분량이 많고 번거로운 문체, 지루한 설명이 많아 핵심 대의를 파악하기에 어려운 경향이 많다. 하지만 <대승기신론>은 치밀한 내용구성, 간결한 문체, 독창적인 철학체계 등 모든 면에서 대승불교 후기에 나타난 불교사상서 중 가장 뛰어난 논서이자, 불교문학사상 최대 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당시 인도에서 대립되고 있던 양대 불교사상, 즉 중관파(中觀派)와 유가유식파(瑜伽唯識派)의 사상을 지양ㆍ화합시켜 진(眞)과 속(俗)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미오(迷汚) 한 현실 생활(俗) 가운데에서 깨달음의 단계(眞)에 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俗)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진속일여(眞俗一如)ㆍ염정불이(染淨不二)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론과 실천 양면에 있어서 여러 교리사상을 받아들여 작은 책 속에 대승경전에 설해져 있는 모든 사상의 진수를 요약해 종합적으로 회통(會通)했으며, 논리를 체계적으로 세워 대승불교 본질을 밝혀놓고, 인간생명의 위대함을 설한 논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읽으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이치의 심오함이 마음 깊이 새겨지게 한다.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철학 내지 심리학 저서와 같이 ‘마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처럼 자세히 설명해 놓은 논서는 찾아볼 수 없다. ‘마음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경전구절.., 마음을 지니고 인생을 살고,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을 모르는 것이 중생이라 한다.
AD 1세기를 전후해 지어진 저서에서 마음에 대한 논리 정연한 분석을 해놓은 <기신론>의 내용을 보고 감탄한 서양학자도 많을 뿐만 아니라 수행의 요지를 간명하고 구체적으로 설해서 수행의 지침을 명쾌하게 밝혀놓았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얼마만큼 위대하고, 그 위대한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마음을 깨우쳐 가면 그것이 바로 불타라는 사실을 밝혀놓았다. 또한 그러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논서이다.
그리하여 불교의 중요사상인 공사상, 진여사상, 유식과 유심사상, 그리고 실천사상으로서의 육바라밀, 지관, 아미타불 신앙에 이르기까지 총망라돼 있으며, 그것을 여래장(如來藏)사상의 입장에서 체계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일컫는 대승(大乘)은 소승(小乘)과 대립되는 대승이 아니라, 인간생명의 위대함[大]과 그 위대한 생명이 피안의 세계를 향해 몰입해 가는 무한한 능력이 있음[乘]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다루는 생명문제를 통합해 체계화한 대승불교 개론서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하여 이 논서는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불교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강원에서 필수과목인 4교과에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과 함께 포함될 정도로 존중되고 있다.
그런데 「<대승기신론>이 비록 여래장 계열의 논서이나 여래장연기(緣起)를 설하고 있는 점이 여타 여래장에 관한 설과 다른 점이다. 즉, 번뇌에 덮여있는 여래장에서 자성청정의 여래장으로 현현시키는 본래 부처의 회복과정을 <대승기신론>에서는 생멸심(生滅心)과 불생멸심(不生滅心)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래장설(如來藏說)은 여래장[佛性]의 자성이 본디 청정함에도 어떻게 번뇌에 얽혀 있게 됐는지에 대해서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대승기신론>에서는 여래장을 연기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중생이 중생이 되는 연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즉, <대승기신론>에서는 불생멸심의 여래장이 자성을 지키지 않고 어떻게 무명(無明)의 영향을 받아 진망화합식(眞妄和合識)인 아뢰야식으로 바뀌어 연기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진리의 세계가 하나인 줄 모르는 근본무명(根本無明)이 작용해 한 생각이 움직이면[業相], 대상을 보는 주관이 생기고[轉識], 이렇게 보는 주관으로 해서 객관이 나타난다[現識]. 그래서 주관을 자아로 삼고 객관을 아소(我所, 내 것)로 삼아, 사랑과 미움을 일으키는 자아의식인 말나식이 생긴다. 그 마음을 의지하므로 고락(苦樂)이 생기고 이에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 계속 이어지면서[相續識] 대상에 대해 집착하게 되고[執取相], 집착에 의해 대상을 헤아리면서 그에 대해 갖가지 업을 일으킨다[起業相]. 그리고 그 업에 매어 고통 받으니 자유롭지 못한 중생이다. 이것이 무명으로 인해 본디 청정했던 여래장이 연기하는 과정이다. 이것을 아리야식연기(阿梨耶識緣起), 혹은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라고 한다. 이는 이전의 여래장설에서는 설명해 주지 못했던, 중생이 중생이 되는 연유이다. <대승기신론>은 이처럼 여래장이 무명번뇌의 영향을 받는 과정을 연기적으로 전개해 보여주고 있다. - 지운 스님
그런데 문제는, <대승기신론>이 여래장 계열의 경론이라서 불교의 주류 흐름인 「초기불교-아비담마-반야ㆍ중관-유식」의 관점과는 다른, ― 불교의 주류에 들지 못하는 여래장 계열의 이론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기시론>에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만들어낸 이론이지 초기불교의 이론은 아니라고 한다. 초기경들에 공(空)이라는 술어가 드물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아공이니 법공이니 구공이니 하는 용어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법을 중심으로 한 체계가 아니라 믿음(信)을 중심으로 삼는 체계인데, 이러한 여래장 계열의 대표 논서가 바로 <대승기신론>이라는 것이며, 이는 믿음의 문제를 핵심에 두고 있는 논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은 믿음의 대상으로서 불성(佛性)이나 여래장(如來藏)이나 일심(一心) 등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힌두교의 자아(自我-atman)이론과 같아서 불교에서 강조하는 무아(無我)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승기신로소(大乘起信論疏)>를 저술한 원효 대사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원효 대사가 부처님 가르침에 위배되는 논서를 저술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래장 계열의 사상에 대한 보다 심도 있는 검증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원효(元曉, 617∼686) 대사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주석한 저작으로, 주석서 중 최고로 평가되는 명저이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국가나 종파를 초월해 널리 유포돼, 이에 관한 주석서가 수백여 종이 되지만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기신론삼대소(起信論三大疏)」이다. 즉, 신라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수나라 혜원(慧遠, 513~592)의 <대승의장(大乘義章)>, 당나라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의 <기신론의기(起信論義記)>이다.
그런데 기신론 3대소 중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그 내용에 있어서 단연 혜원의 <대승의장>를 능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수 법장의 <기신론의기>도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은 대목이 허다하며, 원효의 견해를 표현만 바꿔 재정리한 곳도 적지 않다. 따라서 원효 대사의 <대승기신론소>가 으뜸가는 기신로소로서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기신론연구에 기본문헌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일명 <해동소(海東疏)>라 하고, 혜원의 <대승의장>을 <정영소(淨影疏)>, 현수가 지은 <기신론의기>를 <현수소(賢首疏)>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대승불교에는 두 가지 사상계통이 있는데 하나는 중관사상(中觀思想)이고 다른 하나는 유식사상(唯識思想)이다. 그런데 중관과 유식의 두 철학체계는 그 본질적인 차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교리 상에 여러 가지 대립적 차별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기신론은 이 두 철학체계를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으로 각각 부르고 있는데, 이 2문이 갖는 교리 상의 대립적 차별현상 속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을 원효 대사는 <대승기신론소>에서 잘 밝혀놓았다.
최근(2015년) 독일에서 발견된 <대승기신론소>는 돈황본이 아니라 중국 투르판 본으로 <대승기신론소>의 여러 이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은 현존 최고본인 돈황본보다 200여년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번 투르판본 <대승기신론소>의 발견으로 원효 대사의 명성과 사상적 영향이 중앙아시아 돈황과 투르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당나라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이 편찬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주석서이다. 원효(元曉, 617-686) 대사의 주석서인 <대승기신론소>, 혜원(慧遠)의 주석서인 <대승의장(大乘儀章)>과 더불어 <대승기신론>의 3대 소로 일컬어진다.
<대승기신론의기>는 원효 대사의 <대승기신론소>를 거의 답습했다고 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원효 대사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과 현장(玄奘, 602-664)의 유식학(唯識學)을 융화시켜 주석한 반면, 법장은 현장의 유식교학을 배제하고 여래장사상만으로 <대승기신론>을 해석했다는 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전하고 있는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 상·하 2권으로 된 고본이 보물 제1663호로 지정돼 있다.
*대승동성경(大乘同性經)---6세기 중엽에 인도 출신의 학승 사나야사가 한역했다. 2권으로 된 이 경은 사람을 잡아먹던 악마의 왕이 부처님을 섬기고 불도를 닦아서 부처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모든 것의 본성이 같다고 설법하고 있다. 이역본으로는 지바하라가 번역한 <증계대승경(證契大乘經)>이 있다.---→증계대승경(證契大乘經) 참조.
*대승무계(大乘無戒)---대승무계라는 것은 계(戒)를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스스로 계에 맞도록 행동하게 된다는 뜻이다. 대승교에서는 계(戒)를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코 계(戒)가 필요치 않다는 것이 아니다. 계가 필요 없을 만큼 행동이 반듯하다는 말이다.
*대승불교 기원설---대승불교의 원류 혹은 기원에 관한 탐구의 역사는 오래됐다. 그러나 아직 이렇다 할 확정적인 결론은 나지 않는 상태이다. 대체로 지금까지 대승불교 성립에 관한 연구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됐다.
첫째는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외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노력이고,
둘째는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불교의 내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노력이다.
셋째는 부파불교의 연장선상에서 대승불교의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첫째, 대승불교 성립의 조건을 외부적 요인에서 찾고자 시도한 경우, 대승불교가 힌두교와 이란 종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사회적 혼란이 대승불교 발전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흥기를 헬레니즘과의 교섭에 의한 영향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고대인도 북부에는 그리스 식민지 국가인 박트리아(Bactria, BC 255-139)가 있었고, 이 국가는 한 때 불교가 국교였다. 박트리아는 현재의 아프카니스탄 북부 발흐(Balkh) 지역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계 왕국이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쿠샨제국(Kushan Empire)은 그리스계라기 보다는 페르시아 계에 가깝지만, 박트리아를 점령하고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리스-인도 왕국을 계승함으로써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인도의 불교를 동시에 받아들인 타림분지의 초원 출신의 월지 민족이다. 쿠샨왕조는 양 문화를 융합해 그리스계 불교문화인 그레코 불교(Greco-Buddhism)문화를 재창조함으로써 불교사(佛敎史)에 회기적인 분수령을 만든다. 쿠샨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장악하면서 동시에 불교문화를 실크로드를 통해서 동아시아로 소통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대승불교를 탄생시켜 동아시아로 전해준다는 사실이다. 중국 한국 일본 월남 대만 등의 대승불교는 바로 이 쿠샨왕조의 그레코-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힌두교의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 기타(Bhāgavad Gīt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바가바드 기타>와 <법화경>은 유사한 점이 많고, <바가바드 기타>의 박띠(Bhakti) 신앙이 대승경전 불타신앙 성립에 영향을 미쳤고, 대승불교의 범신론적 불타관(佛陀觀)은 힌두교의 신관(神觀)과 <우파니샤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아미타불(amitābha)과 보살 등의 사상은 이란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하다고 했다. 특히 대승불교의 특징인 보살사상의 형성에 있어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하여 보살사상이 이란 종교와의 접촉을 통해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기원전 180년 마우리아왕조의 멸망으로 인도는 다시 분열시대를 겪었고, 200여년의 혼란기를 거친 후 아프가니스탄 북쪽, 아무르강 남쪽의 중앙아시아를 기반으로 한 이란계의 쿠샨왕조(Kusan/貴霜, 대월지국/大月氏國)가 일어나 인도 북부로 진출해서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통일제국을 수립했다.
이 과정에 북인도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에 빠졌고 전통적인 사회제도와 관습 등은 거의 해체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가 새로운 종교운동, 즉 불탑 숭배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이 대승불교 발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AD 2세기경의 쿠샨왕조의 카니시카왕(Kaniska, 迦貳志加王)은 호불 군주로서 불교를 적극 후원함으로써 대 ․ 소승의 불교가 동시에 꽃피게 됐다는 주장이다.
둘째, 대승불교의 기원을 불교 내부에서 찾고자 시도한 경우이다. 대승불교의 기원을 불교 내부에서 찾고자 함에는 대표적인 두개의 가설이 있다. 하나는 대중부 기원설과 재가의 불탑 기원설이다.
먼저 대중부 기원설부터 검토해 보자. 많은 학자들은 대승불교의 기원을 대중부(大衆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불신론(佛身論), 아라한(阿羅漢)을 인간적으로 보는 점, 공사상(空思想), 법무아(法無我) 등을 설한 점 등을 들어 대중부가 대승의 기원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 기원의 문제에 대해 외부적인 요인과 더불어 내부적으로는 대중부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음을 많은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교리적인 공통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교단사적으로 보면 ‘비구승가(Bhikkhu- saṅgha)’와는 별도로 ‘보살가나(Bodhisattva-gaṇa)’가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에 출가자 집단에서 대승불교를 전적으로 주도했다고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 만일 대중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대승불교 교단이었다면 굳이 별도의 대승계경(大乘戒經)을 찬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부는 이미 <마하승기률(摩訶僧祇律)>이라는 율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는 재가불자들에 의한 불탑 기원설이다. 본래 성전 암송가로서 원시경전의 내용을 해박하게 꿰고 있었던 법사(法師, 다르마바나카)들은 불탑을 중심으로 한 찬불승[讚佛乘: 佛傳文學]을 발전시켜오기도 한 이들이기에 자신들의 종교적 체험에 근거해, 내용적으로는 원시경전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구성과 형식, 문체와 체제를 달리하는 새로운 대승경전을 편찬함으로써 대승불교 성립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특히 재가신자(在家信者)를 중심으로 하는 불탑교단(佛塔敎團)이 그들의 경제적 기반으로 보시(布施)를 함으로써 찬불승들과 더불어 불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탑교단 기원설은 불교연구의 역사 중에서도 독특한 것이며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들은 부파들의 아미달마불교가 승원중심의 불교로서 아비달마교학을 지향해 너무 전문적인 법(法) 중심의 불교를 전개시키고 있었음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출발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불타의 절대성과 자비성이 무한하다는 것으로서, 이는 불멸 후 나타난 불타 신격화의 일환이었다.
셋째, 최근에는 대중부 외에도 대승과 공통된 주장을 하는 부파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하여 대승의 기원을 부파불교의 연장선상에서 찾고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대승불교와 부파불교의 교리적 유사점은 단지 대중부뿐만 아니라 다른 부파와의 관련성 또한 있다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 경량부(經量部)에 속했던 비유자(譬喩者, Darṣṭāntika)들의 설에는 대승불교와 공통되는 교리가 보이고 있음을 밝혔다. 특히 경량부에 속한 하리발마(訶梨跋摩, Harivarman, 250~350년경)가 지은 <성실론(成實論)>은 대승 논서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다. 또 화지부(化地部)와 법정부(法藏部) 등이 대승경전과 관계가 있음을 명확히 밝혔는가 하면, 심지어 상좌부계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조차도 대승불교의 발전에 일정 부분 공헌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승불교 발생의 원인을 외부적 요인과 내부적 요인으로 정리할 수 있고, 대승불교 성립의 직접적인 사회적 배경은 사회적 혼란으로 나타난 불탑숭배이고, 그 중심은 재가신자의 활동이 있었으며, 보살이 출현함으로써 대승불교가 성립됐기 때문에 불전문학(佛傳文學)과 불탑신앙(佛塔信仰)이 대승불교의 원류라는 주장도 있고, 부파들 내부에 대승불교와 공통된 부분이 있었다는 가설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운동의 주체가 부파교단의 출가자 집단이었다는 주장과 기존의 부파교단과는 전혀 다른 그룹, 즉 불전문학과 불탑신앙을 주도했던 재가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집단이 대승불교의 성립을 주도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역사의 퍼즐 맞추기를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아무튼 대승불교는 다양한 외적인 요인과 불교 내적인 복합적 요소가 얽혀 전개된 새로운 불교운동이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원인에 의해 발전된 사상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다양한 원인에 의해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다른 이질적 요소를 통합하면서 발전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 확실히 해 둘 것은, 대승불교가 불법의 멋진 확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교는 궁극의 문제에서부터 인간의 현실문제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으로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종교라도 그 종교가 속한 사회의 전통과 문화를 철저하게 배제할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일반대중들에게는 현실이익적인 의례나 기원 등의 소박한 종교적인 행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이러한 것이 절실히 요구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불교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초기불교의 고집을 꺾고, 인도사회의 문화를 불교적인 원리로 재구성하는 내면화의 과정을 통해 이들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된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기존의 불교 전통 위에 불교의 사회화를 위한 사상적인 변화와 함께 인도의 사회문화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경향이 현저해지면서 불교는 더욱 화려해지고 풍부해졌다. 일부에서 불교를 왜곡시켰다고 편협한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대승불교의 깊은 함의를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특징을 좀 더 명확하게 하는 말은, 대승불교는 소승불교 혹은 남방불교에 비해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교의라는 것이다. 소승불교 혹은 남방 상좌부불교는 좁은 틀에 꽉 맞게, 정확하게 맞게, 그리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규정된 교의인데 비해 대승불교는 끝간데를 알 수 없을 만큼 확 열린 모호한 확장성을 지닌 교의이다. 마치 현대 철학의 한 영역인 카오스의 이론을 연상케 하는 것이 대승불교 교의이다. 따라서 대승 교의는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며,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대승불교 본거지의 이동---어떤 학문이나 종교의 전통은 반드시 그 발상지에서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유학의 발상지가 중국이지만 청나라시대인 조선 중기 이후엔 유학의 전통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자부하기도 한 때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불교 발상지가 인도이지만 오늘날 불교전통은 스리랑카에서 지켜지고 있다. 기독교도 예루살렘에서 생겨났지만 오늘날 로마를 비롯한 서양에서 그 전통을 더 잘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적절한 다음과 같은 예화가 있다.
기원전 3세기 인도 마가다국에 12년째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던 가운데 자이나교단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가뭄을 피해 교단을 잠시 옮길 것인지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에 남을 것인지…. 상당수 원로와 수행자들이 끝까지 남자고 했지만, 교단의 수장은 그보다 많은 대중들의 뜻에 따라 남쪽으로 옮겨갔다. 하지만 고집을 꺾지 않은 사람들은 어렵더라도 그곳을 지키며 살기로 했다. 그렇게 12년이 흘러 남쪽으로 갔던 교도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깜짝 놀랐다. 교조 마하비라 때부터 이어져오던 전통을 깨고 수행자들이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그들에게 옷을 입는다는 건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살겠다는 수행자의 다짐을 깬 것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다. 자이나교가 옷을 입지 않는 공의파(空衣派)와 흰 옷을 입는 백의파(白衣派)로 나뉜 것도 이 때부터이다. 이와 같이 때때로 전통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는 곳은 그 전통의 발상지가 아닐 수 있다. 자이나교처럼 전통 문화권에서 벗어난 이들이 오히려 전통의 계승에 더 적극적임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중국에서 선불교(禪佛敎)가 발달한 것도 인도에서 더 이상 불교(대승불교)가 발 불일 수 없게 되자, 그 중심부가 달마(達磨)에 의해 중국으로 옮아온 것이다.
*대승불교(大乘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대승(大乘)은 산스크리트어 마하야나/Mahayana(buddhism)의 번역으로 마하연나(摩訶衍那). 마하연(摩訶衍)이라 음역하고, 상승(上乘)이라 의역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소승(小乘)은 산스크리트어 히나야나/Hinayana(buddhism)의 번역어로서 작은 수레라는 뜻이다. 이 소승(Hinayana)이라는 말은 아비달마불교에 반동으로 생겨난 이른바 대승(Mahayana)에 의해 폄하돼 불린 명칭이다. 역어로서는 ‘작다’이지만 그 원어 hina는 ‘마땅히 버려야 할’ ‘저열한’ ‘천한’의 뜻을 지닌 말이다. 그래서 하승(下乘), 하열승(下劣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특히 설일체유부의 비바사(毘婆沙)를 중심으로 하는 아비달마불교를 멸시해 소승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승(乘, yāna)은 수레를 의미하며, 중생을 태워서 미혹의 차안(此岸)에서 생사고해를 건너 열반의 세계인 깨달음의 피안(彼岸)에 이르게 하는 교법을 가리킨다. 그리고 승(乘)은 궁극적으로 가치 있고 파괴되지 않는 것에 대한 정신적인 추구를 뜻한다.
BC 6세기에 성립한 불교가 인도 전국으로 발전하고, 종교로서 확립된 것은 불멸 200여년 후인 BC 3세기 무렵의 마우리아 왕조(Maurya dynasty) 아소카왕(Ashoka, 阿育王) 때였다. 아소카왕은 불교를 국교로 정해 전국적으로 보급하고, 제3차 불전결집을 주도해 논장(論藏)을 정비하기도 했으며, 초기 근본불교를 계승한 상좌부계의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adin) 교의를 스리랑카에 전했다.
그런데 당시의 불교(부파불교)는 교리연구(아비달마교학)에만 치우쳐 세상과 동떨어져 있었으며, 상좌부를 제외한 일반 부파불교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님 근본정신마저 멀리하고 있었다. 즉,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난 후 기원 전 3세기 무렵에 교단 내에 교리해석문제에 이견이 생기고, 주도권 다툼으로 교파가 20여개 부파로 분열됐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교단분열시대의 불교를 부파불교(部派佛敎)라 하며, 이 부파불교를 대승불교 측에서는 소승불교라 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소승불교는 상좌부를 제외한 여타 부파불교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부파불교시대의 특징은 각부파가 자기네 이론을 정당화하려다가보니 지나치게 교리중심으로 발전해 불교교리가 너무 번쇄해졌고, 승려집단은 자기수행과 교리연구에만 몰두하고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까닭에 일반대중들과 거리가 멀어졌으며, 부처님 본래 뜻도 많이 퇴색했었다. 따라서 부처님의 중도사상을 멀리하고, 부처님 말씀을 해석할 때, 자기들 주장대로 논서(아비달마)를 편집했다.
이러한 현상에 반발해서 BC 1세기(불멸 후 500년)경부터 원래의 부처님 사상, 부처님 원음으로 돌아가서 대중을 구제하자는 기치를 내세운 불교개혁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대승불교였다. 이 운동은 원래 승려만의 종교였던 불교(부파불교)를 널리 민중에게까지 보급하기 위해 재가자를 포함하고자 하는 불교계의 진보적인 사람들로부터 시작됐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을 시도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당시의 불교(부파불교)와는 다르다는 의미로 기존의 불교계를 작게 본다는 의미에서 소승이라고 하고, 자기네는 대승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불교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갈라졌다.
소승은 주로 승단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형성됐고 이론과 실천에 엄격했으며 초인적 수행을 권장했고 부처님 말씀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담마(법)의 해석에 배타적이었으며, 가능한 절대성을 부여하려고 했다. 이러함이 당연히 계율과 수행의 지침에서 교조적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대승은 주로 재가불자를 중심으로 형성됐고 엄격한 초인적 수행과 너무 많은 계율(하면 안 된다)에 반발했다. 부처님 말씀을 형식보다는 의미론적으로, 즉 진보적이고 개방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대승은 특히 대중에 포커스를 두고 그들의 소망을 대변하는 입장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중의 욕망과 인기에 영합하는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부처님을 오히려 절대적 신(神)처럼 형상화 해서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대승불교 초기부터 불상과 석탑이 대거 이루어지게 됐다.
소승은 대승이 부처님과 불교의 경전을 왜곡하고 오염시키며 순수성보다는 자의적 해석을 내세워 자신들의 목적과 수단을 위해 이용한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대승은 이를 맞받아쳐서 소승의 승려들이 자기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이기적 작태를 멈추지 않고 배타적 권위와 권력을 굳건히 한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그리하여 소승을 주장하는 이들은 대승을 배운 이와는 물조차 다른 강에서 길러다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대승불교가 나타난 것은 시대적 요구라는 설이 있다. 상당히 타당한 주장이다.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반야, 유식, 밀교 사상이 나타났듯이 이를 뒤집어 보면,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창작 불ㆍ보살도 등장했다는 말이다.
이 운동의 주안점은 다 함께 같이 간다는 뜻으로서, 계율이나 교법에 얽매이고 전통을 고집하면서도 부처님 원음을 어기면서 형식화돼가는 부파불교(소승불교)의 벽을 깨뜨리고, 출가 수행승만이 중심이 되는 좁은 생각을 물리치자는 것이었다. 중생은 본래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보살의 길인 반야지(般若智)와 공(空)사상, 대자대비사상 등을 바탕으로 해 육바라밀의 완성을 위해 정진한다면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중생구제에 목표를 두는 것이 부처님 참뜻이고, 부처님이 현세에 출현했던 근본목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또 다른 사상적 특징은 붓다관을 새롭게 해 무수한 붓다와 보살을 창조해냈다는 점이다. 무신론적인 소승에 대해 대승은 유신론적이며, 1불 사상에서 다불(多佛)사상으로 전개해나갔다.
쉽게 말해서, 대승불교는 불타가 행한 길이나 아라한의 길은 너무 힘이 들기 때문에, 부처가 되려 하는 대신 부처를 구원자로 숭배하며 그에게서 자비와 긍휼을 바라게 됐고, 점차 무수한 부처와 보살들이 숭배 대상으로 등장하게 됐다.
이렇게 등장한 새로운 대승불교운동은 민중을 대변하는 민중불교라 하겠는데, 그 배경에는 당시 힌두교에서 유행하고 있던 박티(Bhakti)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님을 믿기만 하면 법을 몰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아미타불신앙이 보편화돼 나타난 정토교(淨土敎)가 있었다.
※박티(Bhakti) 신앙---힌두교에서 인격적인 신에 대한 강한 애착심과 사랑을 강조하는 신앙운동. 신애(信愛)라고 번역된다. 박티는 신도와 신 사이의 이원적 관계를 상징한다. 원래 박티란 신에 대한 헌신을 통해 신과 인간의 신비적 합일을 추구하는 일종의 대중적 신앙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에게만 한정하던 보살(菩薩)의 개념을 넓혀서 많은 보살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모든 중생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자기만의 해탈보다는 중생을 보살피고,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의 역할을 이상으로 삼고, 광범위한 포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즉, 대승불교는 보살불교이다.
이에 비해 소승불교에서의 신행은 아라한(阿羅漢)이라고 하는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소승불교는 중생구제보다 자기수행에 역점을 두는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이기적 모습이라 규정하고 보살이 되는 것이 이상적 삶이라고 했다. 즉, 대승불교는 중생을 제도해 불타의 경지에 이르게 함을 이상으로 하며, 그 교리와 이상과 목적이 모두 크고 깊다고 해서 대승이라 했다.
그리하여 BC 1세기 무렵에 시작된 이 운동은 AD 2~3세기에 이르러 용수(龍樹, 나가르주나)를 비롯한 뛰어난 사상가들의 출현으로 중관사상(中觀思想)과 공사상(空思想)을 기초로 한 대승불교의 사상적 체계가 확립됐다.
대승불교의 발상지는 대월지국(大月氏國)을 중심으로 한 인도북부와 중앙아시아지방으로 추측된다. 마우리아왕조의 아소카왕이 죽은 후 인도는 다시 분열시대를 겪었으나, 200여년이 지난 후 아프가니스탄 북쪽, 아무르강 남쪽의 중앙아시아를 기반으로 한 이란계의 쿠샨왕조(Kusan/貴霜, 대월지국/大月氏國)가 일어나 인도 북부로 진출해서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통일제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AD 2세기경의 카니시카왕(Kaniska, 迦貳志加王)은 호불 군주로서 불교를 적극 후원함으로써 대 ․ 소승의 불교가 동시에 꽃피었다.
대승불교는 이후 중국, 티베트, 한국, 일본 등 주로 북방으로 전파됐으므로 북전불교라고 하고,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 등 남방으로 전파된 상좌부계 불교를 남방불교 혹은 남전불교(혹은 소승불교)라 한다. 특히 근본불교를 계승한 상좌부계 불교가 전파된 남방불교는 부처님 당시의 불교를 계승해 근본불교 내지는 초기불교와 흡사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현재 남방불교가 보유한 경전은 소승경전(부파불교경전)이 아니라 초기경전이다. 그러므로 남방불교의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빠알리어 삼장)>을 소승경전이라 칭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되면 부처님 직설을 소승이라 깎아내리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대승경전 편찬은 AD 1세기경부터 형성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대승경전 편찬은 대개 3기로 나누어 조성됐다고 보는데,
• 초기는 기원 전후로부터 3세기 전반까지로서, 북인도에서 쿠샨왕조가 번창하고, 남인도에서는 인드라 왕조가 지배하던 시기에 해당하는데, 대체로 대승불교가 시작되면서부터 용수(龍樹)의 시대까지이다. 이때 조성된 대승경전으로는 AD 1세기경에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나고, AD 1~2세기경에 <화엄경>과 <법화경>이 나타났는데, 이들 경전에는 박티신앙의 영향으로 초기경전에 없던 여러 가지 형태의 불 ․ 보살이 나타나게 됐다. 그 외에 <정토3부경-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 <유마경> 등이 이때 조성됐다.
• 중기는 용수 이후에서 무착(無着)과 세친(世親) 시대까지로서 굽타 왕조가 흥성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조성된 대승경전으로는 여래장계 경전인 <승만경>, <대반열반경>과 유식계 경전인 <능가경>, <해심밀경> 등이 있다.
• 후기 - 대승경전의 제작은 후대에까지 계속됐지만 그 수는 갑자기 줄어들게 된다. 대신 밀교계 경전이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은 650년을 전후로 <대일경>의 성립을 통해 밀교(密敎)가 현교(顯敎)인 대승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하고, 또한 7세기말 <금강정경>에 의해 그 교리가 확립된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운동을 촉발시킨 부파불교는 갈수록 미세한 교리해석에만 매몰돼 점차 교의가 더 번쇄해져서 대중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이러한 부파불교에 반항해 대승불교가 나타났고, 대승불교 중관학파(中觀學派)의 등장으로 부파불교의 번쇄한 아비달마 교학이 비판을 받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비달마 교학이 소멸돼서 부파불교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대승불교시대로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승불교운동은 부파불교와의 공방 속에서 자라나고, 부파불교도 대승운동으로 인해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와 더불어 발전해나갔다. 그리하여 부파불교가 완성되는 시기는 바로 보살중심의 대승불교운동이 드러나는 시기와 겹치게 된다. 따라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는 시기적으로 엄밀하게 나눌 수가 없다.
참고로, 현장(玄奘) 스님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당시 현장 스님이 방문한 불교사원 가운데 60여 곳은 소승사찰이었고, 24여 곳은 대승사찰이었으며, 15곳 정도는 대ㆍ소승을 겸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대소승을 겸하는 곳을 제외하면 당시 인도불교는 소승사원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소수인 대승에서는 저돌적으로 초기불교나 아비담마(아비달마)를 중시하는 소승을 심하게 공격했을 것으로 본다. 물론 부처님 당시에는 대승이라는 용어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대념처경(D22)>에는 마음챙기는 공부를 일승도(一乘道, 유일한 길, ekaayana-magga)라고 표현하고 있다. 대승은 불멸 500년 후에 생긴 것이기에 당연히 초기경에는 나타 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소승불교(초기불교)가 남방권에서 2500년 이상을 전승돼 오늘날에도 훌륭하게 살아 있으니 대승불교를 버리고 초기불교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상당하다. 일견 타당한 것 같지만, 이러한 배경엔 대승불교를 왜곡되고, 타락해서 변질된 불교로 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왜곡되고, 타락한 것이 아니다.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에 머물지 않고, 보다 확장되고, 현지에 맞게 적응한, 보다 개방적인 불교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대승불교는 한국화한 불교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남방 소승불교는 확장성에 한계가 있다. 그들은 그것을 붓다 가르침의 순수성, 명확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고 적응하지 못하며, 고집만 부리고 유연성이 부족하다. 그러다가 보니 대부분 후진국가의 불교로 정체돼 있다. 대승불교는 광대하다. <화엄경>이나 <법화경>의 세계는 무한계의 확장성을 지닌다. 앞으로도 계속 확장할 것이다. 이것은 불교 발전에 중대한 문제이다.--→소승불교(小乘佛敎), 부파불교(部派佛敎), 대승심(大乘心) 참조.
*대승불교(大乘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차이---대승불교는 BC 1세기경 소승불교에 반대해서 일어난 개혁세력에 의해 성립되기 시작했으며, 많은 사람이 함께 하는 불교란 말이고, 승(乘)은 싣고 운반한다는 뜻이다. 소승이란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기에는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수레라는 뜻으로 부파불교(아비달마 불교)를 지칭한 말이다. 당시 소승불교는 승려들만의 종교였음에 비해 불교를 널리 민중에까지 보급하기 위해 비교적 진보적 인사라고 할 사람들이 많은 사람이 탈 수 있는 큰 수레, 대승불교라는 기치를 내걸고 재가자를 포함시켜나갔다.
초기 대승불교 운동가들이 불교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이 한 둘이 아니다. 그 모든 문제점을 통합해 소승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개인적 성취 득도가 부처님이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개인이 성불하기는 쉽다. 고행하면 바로 도통한다. 그러나 이래서는 인류가 개선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도 당신의 여러 진리 안목 중에서 연기법을 열심히 설법하셨다. 연기법을 깊이 공부하면 개인적 해탈보다 인류전체의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소승과 대승의 분열은 불교의 분열로서 이를 이해하는 것은 대승과 소승에 대해 이해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소승은 주로 승단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형성됐고 이론과 실천에 엄격했으며 초인적 수행을 권장했고 부처님 말씀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담마(Dhamma, 법)의 해석에 배타적이었으며 가능한 절대성을 부여하려고 했다. 이러함이 당연히 계율과 수행의 지침에서 교조적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대승은 주로 재가불자를 중심으로 형성됐고 엄격한 초인적 수행과 너무 많은 계율, 그것도 주로 “…하면 안 된다”는 내용에 반발했다. 부처님 말씀을 형식보다는 의미론적으로, 즉 진보적이고 개방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대승은 특히 대중에 포커스를 두고 그들의 소망을 대변하는 입장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중의 욕망과 인기에 영합하는 구석이 많았다. 그래서 부처님을 오히려 절대적 신(神)처럼 형상화 해서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리하여 대승불교 초기부터 불상과 석탑이 대거 이루어지게 됐다.
소승은 대승이 부처님과 불교의 경전을 왜곡하고 오염시키며 순수성보다는 자의적 해석을 내세워 자신들의 목적과 수단을 위해 이용한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대승은 이를 맞받아쳐서 소승의 승려들이 자기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이기적 작태를 멈추지 않고 배타적 권위와 권력을 굳건히 한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소승불교에서는 부처를 인간으로 보고, 고타마 한 사람의 탄생으로 성불은 마지막이라고 봤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부처는 절대자로 존중되며, 신(神)의 화신이고, 그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데, 이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열반에 이르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설정된 이념이었다. 따라서 중생도 수행만 열심히 하면 성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소승은 자신의 구원을 최고의 이상으로 봤으나, 대승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최고의 이상으로 봤다.
또한 대승에서는 보살(菩薩)의 개념을 확장해 모든 중생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출가자들만의 해탈보다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의 역할을 그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대승은 열반의 경지에 안주하는 소승 성자의 이상(아라한)을 비난하고 ‘보살’이라는 새로운 이상상(理想像)을 내세운 점에 특징적인 차이가 있다.
소승불교에서는 수행자는 각자의 정신세계에만 몰입해 사회와는 분리된 채 엄격한 수행을 강조하며,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인 해탈을 강조했다. 이렇게 해탈의 수행과정을 통해 얻어진 이상적 존재를 아라한(阿羅漢) 또는 나한(羅漢)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소승불교는 자신의 구원을 최고의 이상으로 봤으나, 대승불교에서는 교조를 신화적 존재 내지는 절대자로 신격화하고, 구제대상을 모든 인류로 확장해 중생구제를 최고이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소승으로 해탈을 이룬 성문(聲聞), 연각승(緣覺乘=獨覺乘)은 법신(法身)이라 하지 않고 해탈신(解脫身)이라 한다. 해탈신은 개인 아(我)의 해탈을 이루었기에 중생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며, 방편반야(方便般若)가 없어 영적권능에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대승의 여러 법신은 보살수행의 공덕으로 무수한 방편반야가 있어 무량한 지혜와 방편을 행할 수가 있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그리고 소승에서 깨침은 석가모니불만 가능하다고 봤기에 소승 출가자는 적멸을 성취해 아라한(阿羅漢)이 돼서 영적능력을 키우는 불경연구에 심취했다. 스스로 성불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이것을 비불교적 사유라고 했다. 대승에서는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고 봤다. 따라서 깨달은 자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에 골몰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수보리가 계속 말한다. “발보리심한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라고.
그래서 소승이 엘리트 집단의 불교라면 대승은 민중불교라 할 수 있다. 소승은 선택받은 이, 승려로서 삶을 유지할만한 지식과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충족되는 이들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데, 이에 비해 대승은 범부중생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법화경>의 약초유품을 통해 나타나듯이 모든 이에게는 각자에 맞는 깨달음의 길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대승불교는 후대에 발생한 불교라서 거품이 전혀 없을 수 없고, 따라서 오늘날에 와서는 점차 초기불교가 더 의미 있게 부각되는 점 또한 사실이다. 위로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제한다는[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대승불교의 근본이념인 보살행도 깨달음이 없이는 실천하기 어렵다.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점이 대승불교에 부과된 무거운 과제이다.
중생구제란 노숙자를 먹여주고 재워주며 치료해 주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깨달음으로 이끄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스스로 깨닫지 못한 사람이 타인을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 깨달음 없이는 마치 맹인이 맹인을 이끌고 길을 가는 것과도 같다. 불교는 스스로 수행하고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종교이다. 누가 대신할 수 없으며 전해 줄 수도 없다. 따라서 중생구제란 깨닫도록 가르치고 이끄는 행위가 우선이다.
그리고 소승에서는 마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삼매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높다. 생각을 일으키면 곧 집착이 생기고, 그로 인해 고통이 생기기 때문이다. 생각을 일으켰다 하면 자기 생각에 치우치는데, 존재의 본능이 있어서 그렇다. 따라서 수행은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없애는 쪽으로 치우친다. 그러나 대승에서는 마음을 오히려 이용한다. 자기만을 위해 생각을 일으킨다면 고통이지만 남을 위해, 중생을 위해 생각을 일으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자비심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대승과 소승의 차이다. 생각이란 게 방향이 어느 쪽을 향하는가에 따라 고통과 행복으로 나뉜다. 자기를 생각하면 고통이고, 남을 위한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자비이다. 자비심이나 보리심도 결국 생각이다. 자신에 대한 생각은 자기 하나에 국한되므로, 점점 더 마음이 좁아지지만, 남을 위한 생각은 무궁구진해서 마음이 무한대로 넓어진다.
그리고 부처님 입멸 후 500여년이 지난 AD 1세기경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대승경전은 부처님의 육성이 담긴 경전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 - 초기경전의 가르침을 재해석하고, 시대상황에 부응해 사상을 확장한 해설서이다. 따라서 소승불교(초기불교)가 뿌리요 줄기라면 대승불교는 꽃이요 열매라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대승비불설은 지나친 비약이다. 이러하므로 대 ․ 소승 불교의 실질적인 구분 점은 각 불교가 지니고 있는 경전과 수행방법의 차이점에 있을 따름 근본적으로 다르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인도에서 부파불교가 사라짐으로써 소승불교도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따라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비교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 하겠으나 대승불교의 의미를 확실히 하기 위해 소승불교와 대비할 수밖에 없는데, 남방불교(상좌부불교)가 소승불교(부파불교)와 유사한 점이 많아 이에 기준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분류해 본다.
① 소승불교는 아라한을 이상으로 삼는 성문승이며, 대승은 부처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보살승이다. 즉, 대승불교는 보살불교이다. 보살행을 추구하는 것이 대승불교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대승불교에선 불보다 보살을 더 위에 둔다.
② 소승불교는 3계 6도를 윤회하는 괴로움을 여의고자 하는 업보사상이며, 대승불교는 이타주의의 원행사상(願行思想)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목적은 성불이라기보다는 보살행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은 보살이다.
③ 소승불교는 삼세실유 법체항유의 유(有)의 입장이며, 대승불교는 반야지혜에 의한 일체개공의 입장이다.
④ 소승불교는 지극히 형식적이며 번쇄한 철학과 이론을 위한 이론이 많지만, 초기대승에서는 신앙과 실천을 중시했다.
⑤ 소승불교는 학문과 이론에 중점을 두었으나 그 경지는 저속한 것이었고 출가중심의 불교였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고차원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입장에 서며, 나아가 재가불교를 표방하고 평이한 교설을 설하는 가운데 불교의 근본을 잃지 않음을 추구한다.
⑥ 소승은 자리(自利)의 가르침이며, 대승불교는 자리이타의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는 기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리고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를 들어낸다. 좀 더 살펴보자.
① 대승불교는 모든 중생의 구원을 추구하지만 소승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중시한다. 소승불교는 교리해석에만 치중하고 사회와 분리된 출가 수행주의를 강조한다. 대승불교는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는데 교종은 소승불교처럼 경전해석을 통한 교리해석을 중시하고 선종(禪宗)은 그것을 비판한다.
그리고 <아함경> 등 초기불교 경전은 전문적인 승려를 대상으로 편찬한 경전이다. 그래서 경전 내용은 모두 “비구여~”로 서술돼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 경전은 모두 대중을 상대로 해서 편찬됐다. 그래서 경전 내용이 모두 “선남자ㆍ선여인이여~”이라든가 “불자야~”로 서술돼 있다.
② 소승불교(남방불교)는 <빠알리어 삼장>이라 해서 경(經)ㆍ율(律)ㆍ논(論) 3장을 갖추고 있지만 대승불교는 출가수행의 우위를 부정했기 때문에 경 및 논만 있을 뿐 율장은 없었다. 그러다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때는 소승ㆍ대승의 불전이 섞여서 한꺼번에 들어왔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대승불교는 원칙적으로 소승의 구족계(具足戒-250계)를 채용하게 됐다.
③ 소승불교의 <빠알리어 삼장>은 빠알리어로 씌어졌는데, 대승경전은 주로 산스크리트로 씌어졌고, 대개 원본은 소실되고 한문이나 티베트어로 번역된 경전으로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④ 소승경전과 대승경전을 중국의 승려들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이 설법한 것[불설(佛說)]이라고 믿었으며, 그 내용의 차이는 설법 시기의 차이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태종(天台宗) 개조인 지의(智顗, 538∼597) 대사가 오시교판(五時敎判)이라 해서 경전의 설법순서를 시간적으로 분류해 ‘5시(五時)’로 나누었다.
⑤ 무신론적인 소승에 대해 대승은 절대자를 신봉해 유신론적이며, 일불사상(一佛思想)에서 다불사상(多佛思想)으로 발전했다. 즉, 과거불사상(過去佛思想)을 발단으로 해서 미래에 미륵불이 출현하리라는 미래불사상이 일어났으며, 아울러 서방정토의 아미타불 또는 동방 묘희국(妙喜國)의 아촉불로 상징되는 내세불사상과 시방변만불사상(十方遍萬佛思想)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내재불사상(內在佛思想)으로까지 발전했다.
대승불교가 부처님을 신격화한 것이라든지, 관세음보살ㆍ문수보살ㆍ미륵보살 등을 등장시킨 것은 힌두교의 절대신 개념을 첨가한 것이다.
※시방변만불사상(十方遍萬佛思想)---이 세상의 사방 어느 곳에나 붓다가 가득 차 있다는 사상, 그 대표적인 것이 비로자나불이다.
※내재불사상(內在佛思想)---붓다는 현재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불성사상(佛性思想)을 말한다.
⑥ 소승은 분석적 방법인데 비해 대승에서는 직관적 방법을 중시한다. 불교식 표현으로는 분별(分別)적 방법에서 무분별(無分別)적 방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분별지(分別智)에 대한 무분별지(無分別智 - 般若라고도 함)라는 술어가 생기게 됐다.
부처님이 연기설을 설한 것도 그 방법은 분석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분별의 가르침, 즉 지혜의 도(道)는 범속한 대중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부처님 생존 당시의 제자들이 대부분 교육 받은 귀족 출신의 우수한 지성들이었음을 감안할 때 부처님의 이런 분석적인 방법에 수긍이 간다. 이런 분별적인 엘리트주의의 불교를 직관적 방법에 의해 대중 쪽으로 돌리려고 한 것이 대승이다.
⑦ 대승불교는 붓다를 초세간적(超世間的) 존재로 보며, 역사적 인물로 나타난 붓다는 그 화신(化身)으로 규정한다. 불교도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가 소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이라고 하는 깨달은 성인이 되는 것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편협한 이기적 추구라고 보고 깨달음에 이르렀으나 다른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成佛)을 늦추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는 새로운 이상상(理想像)을 만들었다.
⑧ 보살이라는 말은 원시경전에도 나오는데, 원시경전에서는 부처가 되기 전의 석존을 말했다. 이 보살을 대승불교에서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정립했다. 소승에서는 아라한은 될 수 있어도 붓다가 될 수는 없다고 한데 대해 대승에서는 모든 중생은 보살도인 육바라밀을 완전히 닦으면 해탈한다고 했고, 동시에 붓다가 될 수 있다고 했다.
⑨ 보살의 가장 큰 공덕인 자비(慈悲)가 초기불교에서 강조했던 지혜(智慧, 반야)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보살을 통해 생기는 공덕은 중생들에게 옮겨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러한 관념이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의 정토교(淨土敎) 같은 타력적(他力的) 신앙 활동을 이끌었다.
⑩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와 다르게 공사상, 중도사상, 보살의 바라밀 실천사상 등이 존재한다. 소승불교에는 공성(空性, Sunyata)의 개념이 없는데, 대승은 이 세상의 궁극이 공성이라고 한다.
⑪ “초기 불교가 뿌리라면 대승불교는 가지나 꽃인데 근본적인 가르침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부처님을 신격화해서 신격화에 의존하는 가르침이다. 소승불교의 가르침은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이다. 그래서 소승불교를 배운 사람은 철학박사학위를 주지만 대승불교를 한 사람은 문학박사학위를 준다.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들이 변질해서 권력과 결탁을 하니까 그걸 바로잡기 위해서 지배계층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게 <금강경>이다.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아니다. 그런데 당시 그걸 쓴 사람을 밝히면 목숨이 위태로우니까 그걸 부처님 말씀이라고 한 것이다.” - 전재성
⑫ 소승불교에서는 개인적인 해탈 혹은 열반이라는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를 추구하는데 비해, 대승불교에서 보리(菩提, Bodhi)를 획득하고, 중생구제를 추구한다. 즉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대중을 교화한다(下化衆生)는 출가주의에서 재가주의로 중점이 바뀐다. 이는 소승은 자리(自利)의 가르침이며, 대승불교는 자리이타의 가르침임을 말한다.
⑬ 소승불교에서 출가자들을 성문(聲聞, Sravaka)이라 부르고,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아라한과를 얻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열반(涅槃)을 추구하는 것인데 비해, 대승불교 수행자들은 궁극적으로 붓다가 되기 위해 바라밀(도피안)로 알려진 완벽을 추구하고자 시도하기 위해 보리를 구하는 것을 서약한 보살(菩薩)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
⑭ 소승불교에서 열반이란 무명(無明)으로 인한 세속적인 부정한 것들을 없앰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면, 대승불교에서는 부정한 것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절대불변의 고요함[적정(寂靜)]을 얻어, 조작이 없고 변함이 없는 본성에 도달하고[무위(無爲)], 육바라밀(六波羅密) 등의 수행을 통해 진여(眞如), 불성(佛性)의 경지에 도달함[멸도(滅度)]이다.
⑮ 소승불교신자들은 붓다가 한 겁에 단 한번 나타났다고 믿는 반면, 대승불교는 모든 중생들 안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한다.
⑯ 대승불교는 <금강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을 공부하고 간화선(看話禪)을 하며, 소승계통인 남방불교는 초기경전과 위빠사나(vipasannā) 명상법을 하고 있다는 차이 정도가 있으나 지금은 남방 수행방법을 대승에서도 받아들이는 추세다. 따라서 소승불교가 뿌리요 줄기라면 대승불교는 꽃이요 열매라 하겠다.
⑰ 소승경전(남방상좌부경전)은 석가모니불이 설한 경전으로 함에 비해 대승경전은 법신불이 설한 것으로 돼 있다. 대승경전을 편찬할 때는 이미 석가모니불이 안 계셨기 때문에 법신불이 설한 것으로 한 것이다.
⑱ 초기경전은 이성적인데 비해 대승경전에는 신화적ㆍ설화적 가공(架空)의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의 특징을 좀 더 명확하게 하는 말은, 대승불교는 소승불교 혹은 남방불교에 비해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교의라는 것이다. 소승불교 혹은 남방 상좌부불교는 좁은 틀에 꽉 맞게, 정확하게 맞게, 그리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규정된 교의인데 비해 대승불교는 끝간데를 알 수 없을 만큼 확 열린 모호한 확장성을 지닌 교의이다. 마치 현대 철학의 한 영역인 카오스의 이론을 연상케 하는 것이 대승불교 교의이다. 따라서 대승 교의는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며,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점에 대한 숭산(崇山行願, 1927~2004) 스님의 법문이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전통은 모두 우리가 여행하려는 곳의 지도와 차량을 제공하지만 그 방법은 각각 다르다. 소승불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혼자 가는 것과 같다.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
이에 비해 대승불교 수행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가 아닌 일체중생들과 같이 가는 것이다. 소승불교가 먼저 삶의 고통에 대해 가르치는 것에 비해 대승불교는 본래 아무것도 없음을 가르친다. 본래 고통도 없고 열반도 없다. 우리가 고통을 만들면 고통이 생긴다. 대승불교적 입장(관점)에서 보면 고통조차 본래 헛되고 공허한 것이다. 육체는 공해 실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도 없다. 이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달음으로써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만질 때, 생각할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완벽하다. 괴로움도 없으며, 괴로움의 원인도 없으며, 괴로움에서 빠져 나오려고 할 필요도 없고, 얻어야할 열반도 없다. 모든 것이 이미 진리다. 벽은 하얗다. 그것이 진리다. 하늘은 푸르다 그것 또한 진리다. 바로 지금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이것 역시 진리다. 모든 것이 순간순간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다른 존재들을 위해 맑게 살아 갈 수가 있다. 우리와 다른 존재들은 분리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생들과 함께 행동한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모든 중생들과 함께한다. 자유의 길로 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마치 버스나 기차와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
이처럼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차이는 아주 명확하다. 우리는 이 길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의 본성은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당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 무엇이 열반이냐?“ 하고 묻는다면, 당신이 아무리 그것을 깨닫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치 황홀한 꿈을 꾸어 입조차 열 수 없는 벙어리처럼 된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아주 깊고 명확한 것을 이해했지만 말로 표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 이전이기 때문에 입을 열수가 없는 것이다. 말과 언어 이상의 것을 어떻게 설명 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다. 깨닫고 느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가르치는 일이 필요하다. ‘탕’ 하고 책상을 치며, 이것은 깨달음과는 또 다른 범주이기 때문이다. 탕!』
이상과 같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간에는 차이점이 있으나 근본적으로 같은 불교이므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간에 어느 정도의 합의점은 있다.
① 두 종파 모두 집착, 증오, 망상을 버려야 한다고 한다.
② 두 종파 모두 사성제와 8정도를 인정한다.
③ 두 종파 모두 이 현세는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니라고 믿는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초기불교에서는 우선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며 선업을 행하는 것을 중요시하고,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를 통찰하는 수행을 강조했으며, 그 결과로 해탈 열반(아라한)을 성취한다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의 입멸 후 개인의 해탈 열반보다는 보살행을 주장하는 대승불교운동이 일어났고, 다시 대승불교 입장에 반기를 들고 선불교가 일어나면서 보살행보다 우선 자신의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를 보아 집착이 사라지면 저절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이 된다. 그리고 이 경우 ‘나’라는 아상과 집착이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已生其心)이 된다. 또한 선불교 수행을 통해 마음의 고정관념, 번뇌를 깨치는 견성(見性)을 이루면 그 또한 집착이 소멸돼 자연스런 자리이타의 보살행이 나온다. 그러므로 초기불교를 계승한 남방 상좌부불교나 대승불교, 혹은 우리나라 선불교 모두가 해탈 열반을 추구하고 있는 점은 같다.
그러나 대개 우리나라에서는 대승의 입장에서 대승과 소승의 차이점을 논해왔다. 그러다가보니 은근히 소승(부파불교)을 폄하하는 듯한 내용이 지배적이었다. 그러한 폐단에 대해 권오민 교수가 대ㆍ소승의 차이에 관해 정리한 글이다.
①부파불교는 아라한을 이상으로 삼는 성문승이며, 대승은 부처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보살승이다.
②부파불교는 3계 6도를 윤회하는 괴로움을 여의고자 하는 업보사상(업보사상)이며, 대승불교는 원행사상(願行思想)이다.
③부파불교는 자리(自利)의 가르침이며, 대승불교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가르침이다.
④부파불교는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의 유(有)의 입장이며, 대승불교는 반야지혜에 의한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입장이다.
⑤부파불교는 지극히 형식적이며 번쇄한 철학과 이론을 위한 이론이 많지만, 초기대승에서는 신앙과 실천을 중시했다.
⑥소승불교는 학문과 이론에 중점을 두었으나 그 경지는 저속한 것이었고 출가중심의 불교였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고차원의 제일의적(第一義的)인 입장에 서며, 나아가 재가불교를 표방하고 평이한 교설을 설하는 가운데 불교의 근본을 잃지 않음을 추구했다.
이는 대개의 불교학개론서 내지 대승불교개론서에서 한결같이 진술되고 있는 바이며, 우리가 상투적으로 되뇌고 있는 대ㆍ소승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같은 도식적 논의의 이면에는 이미 좋고 나쁘다는 판단이 개입돼 있으며, 따라서 이는 적어도 어떤 한 종파적 이념가의 발언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학자적 발언은 될 수 없다.
그리고 특히 남방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에는 확장성에 차이가 있다. 소승불교는 확장성의 한계를 붓다 가르침의 순수성, 명확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고 적응하지 못하며, 고집만 부리고 유연성이 부족하다. 그러다가 보니 대부분 후진국가의 불교로 정체돼 있다. 대승불교는 광대하다. <화엄경>이나 <법화경>의 세계는 무한계의 확장성을 지닌다. 앞으로도 계속 확장할 것이다. 이것은 불교 발전에 중대한 문제이다.
*대승불교의 불타관(佛陀觀)---무신론적인 소승에 대해 대승은 절대자를 신봉하므로 유신론적이며, 일불사상(一佛思想)에서 다불사상(多佛思想)으로 발전했다. 즉, 과거불사상(過去佛思想)을 발단으로 해서 미래에 미륵불이 출현하리라는 미래불사상이 일어났으며, 아울러 서방정토의 아미타불 또는 동방 묘희국(妙喜國)의 아촉불로 상징되는 내세불사상과 시방변만불사상(十方遍萬佛思想)으로 발전하고, 나중에는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녔다는 내재불사상(內在佛思想)으로 발전해 무수제불(無數諸佛) 사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그리하여 인즉시불(人卽是佛),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해서 불성을 지닌 모든 중생 역시 부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방변만불사상(十方遍萬佛思想)이 등장해 이 세상의 사방 어느 곳에나 붓다가 가득 차 있다는 사상, 그 대표적인 것이 비로자나불이다.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불교는 결코 단일한 체계가 아니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전개된 온갖 상이한 학적체계가 모여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이고도 유기적인 체계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타의 말씀(교법)이 그의 자내증(自內證)을 근거로 한 가설적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권오민
따라서 온갖 해석과 주의주장이 있을 수 있다. 부파의 성립과 대ㆍ소승의 구별, 특히 대승비불설도 그런 맥락의 한 가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오래전, 부파불교 당시에도 대승경전을 붓다 교설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8세기 이후, 그리고 근래에 들어 본격적으로 대승비불설을 제기한 일부학자들은 역사적으로 대승경전은 붓다 가르침이 아니라는 주장을 폈다. 즉, 초기경전인 <아함부 경전>은 불설이 맞으나 대승불교는 붓다 입멸 후 약 500년 이후에 성립한 새로운 교설로서 붓다가 직접 설한 교설이 아니므로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일본인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 1715~1746)이고, 그의 저술 <출정후어(出定後語)>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부파불교 당시에는 지나치게 교리를 미세하게 다루어 너무 불교교의가 번쇄해졌고, 그러다가 보니 일부부파에서는 붓다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예컨대, 붓다 교설인 무아론에 배치되는 주장, 즉 유부에서는 법체(法體), 독자부(犢子部)와 정량부(正量部)에서는 개아(個我, pudgala) 등을 제시해 윤회의 주체가 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보니 부파불교에서는 붓다의 중도사상(中道思想)을 잊어버리고, 순전히 유(有)와 무(無), 곧 양변의 유 ‧ 무사상을 가지고 싸움을 일삼았다. 어떤 부파는 유(有)를 가지고 붓다 근본사상이라고 하고, 어떤 부파는 무(無)를 가지고 붓다 근본사상이라고 주장하니 붓다의 근본사상이 무너지는가 하면, 부파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편집할 때, 자기들 주장대로 경전을 편집함으로써 붓다의 중도사상이 왜곡되기도 했다.
이러함에 반발해서 대두된 대승불교가 ‘근본불교 복구운동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런 주장에 앞장섰던 선구자가 용수(龍樹, 나가르주나)였다. 용수는 <중론(中論)>과 <대지도론(大智度論)> 등 많은 저술을 통해 부파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를 확립했다.
용수는 붓다 중도사상을 바로 세우고 널리 펼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대승불교에서 붓다 근본사상을 복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립한 사상이 지금까지 동아시아 북전불교(北傳佛敎)를 지배해오고 있다. 이러함으로 인해 오늘날에 있어서 대승불교가 근본불교인 붓다 사상을 복구 확장한 것이지 결코 변질시킨 것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즉, 대승불교는 공(空)사상을 바탕으로 붓다 당시 근본불교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고, 대승경전은 그 근간이 근본교설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므로 붓다 교설이 아니라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북방불교권에서는 대승경전을 붓다 가르침, 내지 그 근본취지를 더욱 선양해 발전시킨 것으로 파악하고 있어 이를 높이 숭앙하고 있다. 즉, 붓다 교설인 초기경전 내용을 확장한 것이 대승불교인데, 오히려 이를 공격하는 이론이 대승비불설이다.
전통적인 불교교육을 받아 대승경전을 체계적으로 공부해온 사람이라면 아함부의 초기경전을 읽으면서 새삼 대승경전이 연기설의 새로운 전개요 재해석이라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다. 반야부의 공사상(空思想)은 일차적인 연기설의 변신에 해당한다. 이어서 전개되는 대승경전들 역시 연기설의 전개에 다름 아니다. 실로 대승불교는 논(論) 불교였다. 그리하여 발전된 중도(中道) ‧ 진여(眞如) ‧ 연기(緣起) ‧ 법계(法界), 등 그 화려하고 정묘한 교의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공사상만 해도 얼마나 정묘한가. 붓다 교설인 연기설이 이렇게도 확장될 수 있음이 놀랍다.
헌데 붓다께서 저 ‘독화살의 비유’를 통해 형이상학적 모색을 금지하고, 간단명료하게 깨달음을 직시하게끔 가르치셨다. 붓다께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제기와 답변을 무시하거나 금기시했고, 언제나 깨달음을 향해 직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대승경전은 퍽 상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내용이 많다. 대승불교의 두 축인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학(唯識學)이야말로 언어문자에 의하지 않고는 논의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형이상학 영역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현상이 생겼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붓다 당시는 일체의 형이상학을 거부하고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왜? 붓다가 생존해 계셨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붓다 입적 후 불교는 여타 종교사상과 교류를 하게 되고, 이에 따라 온갖 교리 상 질문이나 비판에 직면해야 했으며, 이에 대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대승경전이나 논서들이 점점 어려워지고 형이상학적인 상징들이 서로 교류 상승함으로써 더욱 형이상적으로 발전해 초기불교의 모습들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그래서 비불설 운운 하지만 이는 불교가 발전하기 위한 하나의 진통에 불과했다.
“붓다께서 일체지자로서 3세의 모든 실상을 밝혔다고 하지만 그래도 시대상황이 달라 이후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에 해당하는 미처 다하지 못한 말씀이 있었다. 그래서 부파불교시대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그런 시대에 맞게 붓다 말씀을 확장할 필요가 있어서 대승경전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성철(性徹) 큰스님 같은 분도 “대승은 역사적으로는 비불설이지만, 사상적으로 진정한 불설”이라고 했다.
세월이 흘러 붓다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져갈 무렵, 대중들이 불법(佛法)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불법에 대해 붓다와 그 제자들과 다름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굳은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 대승경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걸 두고 비불설이라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기준으로 2000년 이전의 일들을 재단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누구나 불교에 관심을 가진다면 한번은 거처가야 할 혼란스러운 과정이 대승비불설이다. 이로 인한 충격도 있지만 이로 말미암아 한발 나아가게 됨도 사실이다. 그것은 개인에게나 불교 전반에 대해서나 마찬가지이다. 진통 없는 성장이 없는 법, 이러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개인적인 신앙과 정신적 성숙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고, 대승불교를 보는 시각도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대승비불설에 대한 미온적인 대처나 고의적인 회피는 신행이나 교의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편협한 일방적 주장이나 악의적인 비판들로 인해 본질이 왜곡될까 염려스러운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되겠다.
오늘 날 대승불교흥기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학자들은 대개 대승불교의 기원을 부파불교의 연장선상에서 대승경전도 편찬됐을 것이라 보고 있다. 즉, 이전의 경전을 수용해 해석하고 새롭게 읽는 과정을 통해 종류와 분량이 확대돼 간 것이지 결코 ‘역사적 붓다’의 권위를 빌려 날조된 것이 아니며, 경전의 증광(增廣) 또한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경전해석의 패턴을 의식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결코 자유로이 무제한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불법(佛法) 혹은 불교사상의 다양성은 근본적으로 불교의 개방성에 기인한다. 불교는 결코 교조주의가 아니다.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으며 진실은 누구에 의해서도 토론될 수 있다. 불교의 다양성은 처음부터 용인됐다. 「불법(불교사상)=불설=친설」이라는 도식은 부처님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후세인들의 강고한 편견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요컨대 대승경전이 날조된 창작이라는 것은 「불법=불설=친설」이라는 도그마(Dogma)를 전제함에서 비롯된 편견이며,… ‘대승불교는 불설이 아니다’라는 말은 불교의 전통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불교의 발전과정을 도식적으로 이해한데서 비롯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권오민
불교는 스스로 진리를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불교는 붓다나 경전 자체에 대해 올바른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지 맹신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다. 열린 종교인 불교는 맹신적인 자세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지혜(般若)를 닦으라고 한다.
진리는 붓다가 설하든 설하지 않았든, 또 누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관계없이, 우리 앞에 언제나 그 자체로서 떳떳하게 진리여야 한다. 따라서 만일 무엇이 진정한 깨달음이고, 또 이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스스로의 지혜로써 판별하는 자세로 임한다면, 대하는 경전이 비록 위경(僞經)임이 분명하더라도, 그것은 최종적인 불교의 목적과 실천에 모두 큰 장애를 일으킬 수는 없다.
대승경전들이 근본교설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분명하고, 또 그 참뜻을 새롭게 전하고자 한 것임이 분명한 이상, 그것들을 붓다의 교설이 아니라고 봐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초기불교와 소승불교가 뿌리요 줄기라면 대승불교는 꽃이요 열매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참뜻은 붓다의 깨달은 진리에 있고, 그 진리를 열어 보이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
그리고 유념해야 할 것은 비록 초기경전이 대승불교 흥기 4~5백년 전에 성립한 것이라 해도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이 실제로 경전으로서 문자화돼 편찬되기 시작한 것은 「BC 1세기~AD 1세기」 시기로서 거의 동일하다. 때문에 대승경전(특히 초기 대승경전)의 교의적 궤의 뿌리가 초기불교의 경전 그것과 그 궤를 같이 했으면 했지 크게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편찬한 법사(法師, 다르마바나카)들은 본래 성전 암송가로서 원시경전의 내용을 해박하게 꿰고 있었고, 찬불승[讚佛乘: 佛傳文學]을 발전시켜 오기도 한 이들이기에 자신들의 종교적 체험에 근거해, 내용적으로는 원시경전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구성과 형식, 문체와 체제를 달리하는 새로운 대승경전을 편찬했으므로” - 박경준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은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비록 부처님에 가탁(假託)해서라도 부처님 법을 확장 발전시켜야겠다는 의무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작업을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경 ․ 율 ․ 논 삼장에서, 논(論)은 경전의 해석 또는 주석이라고 하지만 사실인즉 형이상학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견해표명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 저술한 문헌들을 ‘경전’이라 하지 않고 모두 ‘논’이라는 제목을 달았다면 오늘날 대승불교가 당면하고 있는 대승비불설 등 많은 문제점들이 저절로 해결됐을 것이다. 알고 보면 대승불교는 부파불교 못지않게 논(論)위주의 불교였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편찬함에 있어서 부처님 이름에 가탁(假託)한 것을 지금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부처님 이름에 가탁(假託)하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을 수도 있고, 외람돼 자기이름으로 못하고 부처님께 의지한 것이 가탁일 수 있다.
“불교는 붓다보다도 진리 그 자체를 지향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의 근본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경전의 권위는 ‘붓다의 직설(直說)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내용이 진리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원칙이다.” - 이홍구
그리하여 “대승 불설 부정은 ‘무지’ 탓”이란 주장이 제기됐다.
초기불전으로 간주되고 있는 5니까야와 4아함경은 부처님의 직설과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의 직설 그대로 간주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어느 시기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특정 부파에서 편집된 불전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최근 아함경이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경전으로 간주하거나 이들 경전을 근거로 초기불교로 돌아가자는 얘기들이 공공연히 나오는 가운데 아함경과 니까야도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대승경전을 불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사상사에 대한 무지와 폐쇄적인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 교학적ㆍ역사적 ‘진실’이 아니라는 지적도 함께 제기됐다.
부파불교 전공자인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ㆍ사학ㆍ철학(제17호)>에 게재된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이란 논문에서 ‘비불설 논쟁’이 대승과 소승 사이에서만 일어난 특수한 논쟁이 결코 아니라 각 부파 간에 빈번하게 다뤄졌던 일반적인 논쟁이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규명했다. 특히 오늘날 붓다의 친설로 여겨지는 한역 아함경과 남방불교의 니까야도 당시 설일체유부 상좌부 등 각 부파의 교학적 견해에 따라 취사선택되고 때론 불설의 내용까지 바꾸면서까지 새롭게 편찬한 경전들로 대승경전의 편찬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조목조목 밝혔다.
이 논문에 따르면 부파불교 시대에도 불설의 진위 논쟁은 끊이질 않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경에 포함되고 율에 나타나면 불설이다”라는 <대반열반경>의 정의에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이라는 이론이 등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불타가 설한 것이든 제자가 설한 것이든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로 수지할 수 있다. - 대비바사론“ “불법은 오로지 불타의 입으로 설해진 것만이 아니라 일체 세간의 진실하고 좋은 말은 다 불법이다. - 대지도론, 성실론”라는 견해가 불설을 판정하는 교파 간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정착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각 부파의 불설론이 경전 편찬의 이론적 근거가 됐던 까닭에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아함경과 니까야를 곧이곧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대승경전이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과 니까야 또한 비불설이며 대승경전이 대승론자에 의해 찬술 결집된 것이라면 아함경과 니까야 역시 부파의 논사들에 의해 취사선택되고 찬술 결집된 경전들로 그 당시조차 비불설로 비판 받았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구의 복색을 한 마구니 설’이라고까지 아비달마불교를 비난했던 대승의 찬술자들도 아비달마의 불설론 전통을 ‘계승’해 경전을 편찬하고 당위성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권 교수는 소승이나 대승 등 종파적 입장에 근거한 오늘날의 비불설 논쟁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논쟁은 구호나 선전에 근거한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것일뿐더러 폐쇄적 신념에 기초한 것으로 ‘맹목의 논쟁’일 따름이다. 불설과 비불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불교의 개방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깨달음은 누구에게도 열려 있었으며 진실(법성)은 누구에 의해서도 토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전통이라는 권위에 의지하지 말고 진실에 의지하라는 것이 대소승의 공통된 불설관이었다.”며 “요즘 일각에서 아함경이나 니까야만을 올바른 붓다의 가르침으로 주장하거나 거꾸로 아함경이나 니까야를 초심자를 위한 경전쯤으로 얕잡아 보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특히 권 교수는 “오늘 우리가 시비 결택해야 할 것은 종파에 따른 혹은 역사와 전통에 따른 불설ㆍ비불설이 아니라 ‘진실’ 바로 그것”이라며 “대승이 그러했듯 이제 바야흐로 오늘의 진실을 오늘의 언어형식으로 결집하고 그것의 불설과 비불설을 시비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보신문
이러한 문제를 천착함이 중요한 것이지 한 뿌리에서 돋아난 줄기요 꽃인 것을, 잘못 핀 꽃이라고 탓하면 뿌리 채 흔들려 자칫 나무마저 죽어버릴 것이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지금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소승이고 대승이고, 초기불교고 힌두불교고 결국 이천오백년 동안 그 속에 내재된 사회역사적 현실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경전에 대한 붓다의 궁극적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단지 경전의 단어 숲 속에 우리 불자들이 서로 파묻히고 헤매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경전에 들어있는 거의 모든 천신(天神)들은 인도 전통의 민간신앙이나 풍습에서 가져온 것이며, 그리고 오계(五戒)의 덕목들도 모두다 당시 인도의 전통적인 도덕관이었다. 힌두교이든 누구이든 불살생을 부르짖고, 특히 자이나교도들은 불교도들보다 더 불살생에 철저했다. 해탈도 인도의 전통적인 수행법에서 이미 알려졌던 내용을 불교가 차용한 것이다. 사선정(四禪定) 사무색정(四無色定) 등도 모두 요가수행법에서 체계화 됐던 것을 불교가 차용한 것이다. 윤회(輪迴)사상도 인도의 전통적인 사상이다.
이러한 많은 인도의 사상들을 불교가 차용하고 도입해서 붓다는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불교적으로 재정립했다. 그리고 연기ㆍ무상ㆍ무아ㆍ고 등의 불교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확립했기에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세력을 넓혀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불교에 대한 실망감을 깊이 위로해 준 것이 바로 초기불교이지만, 그 급속한 전파와 성급한 이해로 지금 같은 건설적이지 못한 소모적 논쟁들과 보살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라는 의미의 지적에 깊이 공감한다. 그러하기에 참된 진리는 누가 얘기하든 진리로 바로 볼 수 있는 깊은 불교적 연륜과 이해를 가지신 분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실론섬, 길을걸으며.
전세계의 어느 종교이든지 종교를 창시한 교주는 글을 남기지 않는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 결집해 이를 구전했고, 후에 문자로서 기록을 남긴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부처님의 ‘친설(親說)’이라 하는데, 이와 비교해 부처님 사후 5~600백년이 지난 시점에 성립된 대승불교는 처음부터 ‘글’로써 전승했고, 이를 ‘불설(佛說)’이라 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한 사람은 누구나 ‘불법(佛法)’을 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글로써 표현한 것도 불설로 보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이름을 사칭한 속임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는 인물에 대한 찬사와 영광을 담아내는 형식으로서 부처님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정(獻呈)’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수많은 경전이 찬술됐고, 이런 전통은 중국에서도 양산됐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금강삼매경>도 있다. - 진흙속의 연꽃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서 새로운 대승경전을 만들어내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도 대승경전은 찬술될 수 있다. 하지만 천 년 전 만들어진 대장경의 목록에 등재된 경 이외의 경은 아직까지 출현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점 때문일까 미국 UCLA 로버트 버스웰(Robert Buswell) 교수는 강의에서,
“대승경전을 2000년 동안 만들지 못한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오늘날의 대승불교가 시대와 문화, 역사의 변천에 따라 가고 있지 못함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대승경전은 계속 만들어져야 한다는 뜻과 같다. 그런 대승경전은 보통 ‘불설(佛說)’로 불린다. 위경은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찬술된 경전이다. 그래서 경의 이름 앞에 불설이 붙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렇다 대ㆍ소승불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의 특징을 좀 더 명확하게 하는 말은, 대승불교는 소승불교 혹은 남방불교에 비해 무한한 확장성을 지닌 교의라는 것이다. 소승불교 혹은 남방 상좌부불교는 좁은 틀에 꽉 맞게, 정확하게 맞게, 그리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규정된 교의인데 비해 대승불교는 끝간데를 알 수 없을 만큼 확 열린 모호한 확장성을 지닌 교의이다. 마치 현대 철학의 한 영역인 카오스의 이론을 연상케 하는 것이 대승불교 교의이다. 따라서 대승 교의는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이며,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이 가지는 특징이고,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대승불교(大乘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 혹은 ‘대승불교(大乘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차이’ 참조.
*대승사론현의기(大乘四論玄義記)---<대승사론현의기>는 백제 승려 혜균(慧均)이 쓴 삼론학의 강요서이다. 인도 대승불교의 뿌리인 중관사상의 동아시아적 버전이 삼론사상이다. 용수(龍樹, 나가르주나)가 ‘반야ㆍ공’사상에 입각한 중도사상을 천명한 것이 중관사상이고, 중국의 남북조시대 인도 중관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 삼론사상(삼론학)이다.
<대승사론현의기>는 삼론사상의 주요 이론들을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길장(吉藏)과는 구별되는 방식으로 삼론학의 이론들을 서술하고 있어 삼론학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이 매우 돋보인다.
이 문헌의 필사본이 일본 교토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734쪽짜리 불교 문헌으로서, 이 문헌의 필사본이 서기 658년에 일본 왕에게 건네진 점으로 미뤄, 그 쓰인 연대가 원효(元曉)의 <대승기신론소>보다 60여 년 앞선 한국 최고(最古)의 문헌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 책 덕분에 한국 고대 삼론학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백제불교를 위시한 삼국시대 불교의 실체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 당시의 불교 풍토, 사상적 깊이를 알 수 있으며, 백제 불교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문헌에 나오는 절 이름 '보희사(寶憙寺)'가 2000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목간(木簡)에 새겨진 보희사와 일치한다.
*대승선(大乘禪)---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이치[아공(我空)과 법공(法空)]를 알고 닦는 수행으로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수행 할 수 있는 방법의 선(禪)을 말한다. 용수(龍樹)와 달마(達磨) 대사가 주장한 대승수행의 입장에서 닦는 선인데, 세상 경계를 피해 조용한 곳을 찾아서 닦는 선이 아니라 치열한 현실경계 속에서 닦아가는 선을 말한다.
대승불교는 용수(龍樹)의 공사상(空思想)에 근거해서 성립했다. 그리고 용수가 제창한 대승불교는 ‘대승선(大乘禪)’이라고 하는 수행체계를 바탕으로 해서 세워졌다. 대승선의 핵심이 바로 ‘중관(中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中道)’에 입각해서 세워진 관법이다. 중(中)이란 근본을 여의지 않으면서도 경계와 동떨어지지 않은 자리를 말한다. 중의 자리는 본래 갖추고 있는 자리가 아니라, 이는 세워서 갖추어야 하는 자리이다. 중관이란 그렇게 갖추어진 중의 자리를 관하는 것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 하자면,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세 가지 방법이 공(空) ‧ 가(假) ‧ 중(中) 삼관법이다.---→천태삼관 참조.
그리고 달마(達磨) 대사는 그의 스승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불법을 배워 크게 대승선(大乘禪)을 제창하고, 양(梁)의 무제(武帝) 때에 중국으로 건너와 왕을 뵈었으나 뜻이 맞지 않아 숭산(嵩山)의 소림사에 들어가서 9년간 면벽(面壁) 참선해 득도했다.
이런 달마 대사가 외친 대승선은 대승수행의 입장에서 닦는 선, 곧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을 말한다. ‘나’뿐만 아니라 일체법의 공성(空性)을 깨닫고 해탈을 추구하기 위해 닦는 선이다. 즉, 자아(自我)와 대상이 모두 공함을 알고, 그런 다음에 드러난 진리에 의거해 수행하는 것인데, ‘나’도 비어있고, 일체만법도 다 비어있다는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믿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무슨 이데올로기나 무슨 주의, 또는 어떤 학설, 주장, 이런 것은 모두 인연 따라서 나온 것이지 본래 이것이 이른바 무가정(無假定)의 원리가 못되는 것이다. 이런 법공 자리를 미처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라 하면 사회주의사상을 원리적으로 믿고서 모두를 거기에 끼워 맞추려고 생각한다. 이른바 경직된 교조주의(敎條主義 dogmatism)이다. 불교를 공부하더라도 법공을 철저히 못 증(證)한 사람들은 꼭 자기 식으로, 같은 법문도 자기 견해만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별로 신통치 않게 생각한다. 자기주장, 자기가 느끼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법공을 미처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믿고서 해탈을 위해 닦는 것이 대승선이다.
내 몸이 내 마음을 구성하는 것도 공(空)이지만, 일체만법(一切萬法), 즉 산이나 들이나 또는 태양이나 별이나 천체나, 남이나 나나 일체 법이 다 비었다는 법공(法空)을 믿는 것이다. 소승들은 내가 비어 있는 것을 느낀다 하더라도 일체만법이 비어있는 줄은 모른다. 그러나 대승은 일체만법이 비었음을 아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아(我)도 공(空)이요, 일체만법도 공(空)이란 것을 말한 법문이고, <금강경(金剛經)> 또한 나도 공이요, 일체만법이 공인 것을 해설한 경전이다. 불교 공부는 내가 원래 비어 있고 우주 전부가 비었다는 것을 모르면 잘 안 되는 것이다. 참선도 역시 화두를 드나 염불을 하나 이와 같이 아공, 법공을 느껴야 한다. 그래야 망상이 잘 끊어진다.
*대승시교(大乘始敎)---당 대에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이 주도한 화엄종 교판(敎判)에서 불교 가르침을 소승교(小乘敎) ․ 대승시교(大乘始敎) ․ 대승종교(大乘終敎) ․ 돈교(頓敎) ․ 원교(圓敎) 등의 5교(五敎)로 분류했다. 그 중 대승시교란 소승으로서 처음 대승에 들어온 대승초문에게 가르치는 얕은 교법, 초보단계란 의미에서 시교라 했다. 여기에 상시교(相始敎)와 공시교(空始敎)의 둘이 있다.
상시교는 유식학과 이에 관련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 <해심밀경> ․ <유식론> 등을 말하고, 공시교는 공(空)사상을 설한 <반야경> ․ <중론> ․ <백론> ․ <십이문론> 등 일체의 모든 것은 공(空)이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즉, 모든 존재현상과 본성을 설한 유식학 계통을 상시교라 하고, 모든 존재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공이라고 하는 진리를 단적으로 표현한 중관사상을 공시교라 했다.---→상시교(相始敎), 공시교(空始敎), 법장(賢首法藏) 참조.
*대승심(大乘心)---불교에서는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자기구제만 추구하는 사람을 작은 수레에 비유해 ‘소승(小乘)’이라 하고,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다 함께하면서’ 그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보살심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큰 수레에 비유해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이를 줄여서 말하면, ‘위로는 성불하기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널리 제도하려는 마음[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다.
다음은 육조(六祖) 혜능(慧能) 선사의 삼승(三乘)에 대한 말씀이다. 어떤 학인이 육조에게 물었다.
“부처님이 삼승법을 설하고, 또 최상승(最上乘)을 말씀하셨는데, 잘 모르겠으니 스님께서 일러주십시오.”라고 했다. 삼승(三乘)은 소승(小乘), 중승(中乘), 대승(大乘)이다. 이에 대해 육조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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