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

불교용어 10 ㄴ

수선님 2021. 10. 3. 13:49

<ㄴ>---------------------------------------------

*나가(산스크리트어 Naga)---나가(Naga)란 산스크리트어로 뱀(특히 코브라)이라는 의미인데,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의 하나이다. ‘나가’는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평범한 뱀이 아니라 정령의 하나인 ‘뱀 신’을 일컫는다. 지금도 네팔에는 곳곳에 ‘나가 신’이 장식돼 있다. 이것이 불경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갈 때 '용(龍)'이라는 한자로 번역됐다.

    나가의 모습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데, 변형된 것으로는 많은 목(대개는 일곱 개나 아홉 개)을 가진 큰 뱀으로 표현되는 일도 있고, 사람 모습을 취할 수도 있다. 불교에서 ‘나가’는 불교신도를 괴롭히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경전을 지키는 물의 신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한편 나가는 용수(나가르주나)를 자기네 왕국에 데리고 갔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반야바라밀다경>이 재발견됐다는 신화가 전하기도 한다.

     

*나가대정(那伽大定)---불교에서 말하는 위대한 고요, 대적광(大寂光)을 말한다. 산스크리트어 나가는 큰 뱀, 용을 가리키는 말로 용수(龍樹)의 이름이 나가르주나(Nagarjuna)이다.

    그리고 대정(大定)은 큰 삼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가와 대정을 합쳐 용정(龍定)이라고도 한다. 즉, 나가대정(那伽大定)은 대용왕의 대정(大定)이라는 뜻으로 대용왕이 깊은 못에서 미륵불이 출세함을 만날 원력으로 정(定)에 들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대적(大寂)이나 대정(大定)이 없으면 큰 지혜가 나오지 않으므로 나가대정은 큰 지혜가 나오는 원천을 뜻한다. 또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관계없이 깊은 정에 들어있는 것을 나가대정이라 한다. 그래서 <휴휴암좌선문(休休庵坐禪文)>을 보면 고승들 삼매의 극치를 나가대정(那伽大定)에 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편 부처님과 아라한을 나가(那伽)라 한다. 그래서 무궁무진한 조화력을 가진 부처님의 큰 정력(定力)을 뜻하기도 한다. 용은 항상 고요한 가운데에서 사심 잡념 없애기를 계속해 능히 큰 신통 변화를 나타내기 때문에 부처님의 큰 정력에 비유한 것이다. 부처님은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큰 정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가대정이라 한다.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 150?-250?)---<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저자로 알려진 마명(馬鳴, 아슈바고샤, Asvaghosa, 100~160?)의 제자 가비마라(迦毘摩羅)의 제가라고 한다. 그러니 마명의 손제자인 셈이다.

    나가르주나는 석가모니 입멸 후 600여년이 흐른 뒤 나타나서 불교사상을 재조립해 대승불교를 확립시킴으로써 ‘제2의 붓다’ 혹은 ‘팔종(8宗)의 조사’로 숭앙 받아, 용수보살로 칭송되고 있다. 실존인물로 보살 칭호로 불리는 사람은 용수를 비롯해 마명(馬鳴), 세친(世親) 정도이다. 그리하여 선종에서는 그를 서천 28조 가운데 한 분으로 모신다.

    나가르주나는 남인도 바라문계급 출신으로서, 어려서부터 총명해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으며, 천문, 지리, 예언 등 여러 가지 비술을 체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불교에 귀의해 <반야경> 계통 공(空)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켜 중관(中觀, Madhyamaka)사상을 정립해,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했다. 즉, 마명(馬鳴, AD80?~150?)보살의 뒤를 이어 대승법문을 선양하니, 대승불교가 이로부터 발흥했다. 그리하여 <화엄경>을 그가 집성했다는 설이 전한다.

    그리고 중관사상을 논술한 <중론(中論, Madhyamaka-Sastra)>을 비롯해 <대지도론(大智度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을 지었다. 이 세 문헌을 함께 불러 “삼론(三論)”이라 부르고, 중국에서 4~5세기경에 유행했던 삼론종이라는 종파의 이름이 여기에 기인하며, 그의 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을 중관학파라 했다.

    그는 부파불교 대중부의 이론을 종합해 초기 상좌부의 실상법(實相法)과 인과법(因果法)이 무상(無常)ㆍ무아(無我)라고 하는 부처님 기본가르침에 어긋나며 연기(緣起)하는 것은 서로 의지해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모든 일체 법(현상)은 실체가 없는 공(空)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모든 대승경전이 공(空)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는 <중론(中論)>에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空)을 연기설로 해명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철학적 이론을 확립했지만 생생한 깨달음의 실체인 해탈지경을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공으로 바꿔버림으로써 불교를 사실에 관한 법에서 관념이 지배하는 추상적인 법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는 비판도 받는다.

   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진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상대적이고 방편적인 진리와 절대적 진리. 상대적이고 방편적인 진리에서 보면, 현상세계는 존재론적으로 비실재라 할지라도 보통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는 완전한 설득력을 가지고 실재한다. 반면 절대적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체의 것들이 실은 비실재라는 것을 정신이 깨닫게 되지만 그러나 이런 진실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중관사상(中觀思想) 참조.

     

*나가세나(Nāgasena, 那先)---→메난드로스(Menandros)왕, 밀린다왕문경 참조.

 

 

*나계(螺髻)---정수리의 머리카락이 소라 같이 되었으므로 나계(螺髻)라 한다. 불상의 곱슬머리모양(실은 소라모양)을 나발(螺髮) 또는 나계(螺髻)라고 한다. 소라고둥 모양의 상투로 우뚝한 산을 형용하는 말로 쓰인다. 불상(佛像)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如來像)의 머리카락이 나계이다. 소라 껍데기 혹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빙빙 틀어서 돌아간 형상을 한 부처의 머리털을 가리킨다.

   

 

*나냐(빠알리어 nana)---지혜, 혹은 통찰지혜라는 뜻이다. 이에 관한 글을 보자.수행자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괴로움을 아는 지혜(dukkhanupassana-nana)이다. 이와 함께 수행자는 피로함, 뜨거움, 고통, 아픔과 같은 것들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육체에 깃든 고통스러운 감각을 경험하게 되고, 육체는 고통의 덩어리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것도 또한 괴로움을 통찰해 아는 것이다.

   그 뒤에는, 모든 물질과 마음은 스스로의 속성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며, 수행자의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으로써 수행자는 사물은 요소일 뿐이고, 스스로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살아있는 실체이거나 생물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자아가 없다는, 무아(無我)를 아는 지혜(anattanupassana-nana)이다.

    이와 같이 무상(anicca), 고통(dukkha), 무아(anatta)를 알게 되면, 도의 지혜(막가-나냐, magga-nana)와 과의 지혜(팔라-나냐, phala nana)가 성숙해서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열반의 첫 번째 단계에 도달하면 불행하고 저급한 존재로 윤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는 이 첫 번째 단계에라도 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라연(那羅延)---천상계에 거주하는 역사(力士)로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 금강역사라고도 한다. 제석천(帝釋天) 권속으로, 집금강(執金剛)의 하나이며,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 백만 배나 된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위대한 신(神)인 비시누를 가리키는 말이다.---→집금강신중신(執金剛身衆神) 참조.

       

*나락(奈落, 산스크리트어 naraka)---지옥을 가리키는 말이다.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나란타(Nālandā, 那爛陀)대학---나란타(Nālandā)는 마하비하라(Mahāvihāra/大寺-나란타사)가 있던 지명이다.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 파트나에서 남동쪽 55마일 거리에 위치한 바르가온 지역이다. 거기에 큰 절이란 의미의 마하비하라(Mahāvihāra-大寺) 내에 부설돼 있던 대학이 나란타대학이다. 즉, 인도 고대 마가다국(Magadha國) 수도 왕사성(王舍城-라자그리하) 북쪽에 인접해 있던 나란타사원 부설대학이었다. 날란다대학이라 음역하기도 한다. 아소카왕이 건립한 나란타사원에 굽타왕조 때 나란타대학이 부설돼, 대승불교 학습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했으며, 역사상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이다.

   사원교육기관인 나란타대학의 전성기는 5세기부터 12세기까지로서, 굽타왕조에 이어 하르샤 왕조(Harsa Empire, 590~647)와 팔라 왕조(Pala Empire, 8~12세기)시대이다. 기원전부터 사원학교로 존재해 왔었지만, 종합대학 성격의 대규모 사원대학이 된 것은 굽타왕조시대부터이다. 이후 팔라 왕조시대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티베트, 중국, 한국,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유학승이 와서 공부했었다. 631년에 현장(玄奘)이 이곳에 왔을 때, 학생이 1만 명, 교수가 2천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이전, 4세기 말 5세기 초, 중국 동진(東晉)의 구법승 법현(法顯)이 왔을 때에도 사원대학으로서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강의는 주로 대승불교가 중심이었지만 소승불교에 대한 강의도 있었고, 불교뿐만 아니라 베다(Veda)와 우파니샤드(Upanisad)와 같은 힌두 바라문의 학문은 물론, 논리학(因明), 의학, 음악과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양수업도 실시했다고 한다. 대학 안에서는 매일 백여 곳에서 강의가 열렸고, 뛰어난 학승들을 많이 배출했다.

   대승불교 중관파(中觀派)의 창시자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 150~250)가 학장을 지냈고, 그의 제자 제바(提婆, 아리야데바/Āryadeva, 170~270)가 나가르주나의 학통을 이어서 발전시켰다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AD. 5세기 인물인 무착(無着, Asanga, 아상가)과 세친(世親, Vasubandhu, 바수반두) 형제도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하며, 세친의 제자인 호법(護法)과 덕혜(德慧)를 비롯해, 중국의 의정(義淨)과 현장(玄奘)은 물론 신라의 혜초(慧超)를 비롯한 많은 구법승들도 주로 이 나란타대학에서 공부했다. 신라에서는 혜초 외에 현태(玄泰), 혜륜(慧輪, 반야발마), 혜업(慧業) 스님 등이 날란다사원대학에서 공부했다. 현태는 티베트를 경유해 인도에 들어갔다가 중국으로 돌아왔고, 혜륜은 제자 현유와 함께 사자국(스리랑카)에 가서 종신(終身)했다. 의정(義淨) 법사에 의하면 혜업의 산스크리트어(梵本) 저서를 직접 봤을 정도로 산스크리트어에 능통했는데, 그는 나란타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현장이 다녀간 7세기 초까지만 해도 대승불교 교학의 중심이었던 나란타 사원은 8세기 초 불교를 보호하던 굽타 왕조가 몰락하고 바라문의 힌두교가 번창하면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결정적으로 13세기 초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프가니스탄의 고르(Ghor)왕조가 북인도를 침공하면서 나란타사원과 함께 나란타대학도 완전히 파괴됐다. 이슬람의 침략자들은 많은 스님들을 죽이고, 사원과 대학을 불태웠는데 그 불길이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될 정도로 많은 장서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나란타사(Nālandā, 那爛陀寺-마하비하라/Mahāvihāra/大寺)---나란타는 지명이다. 고대 마가다국 수도 왕사성(王舍城-라자그리하) 북쪽, 지금의 인도 비하르 주 파트나에서 남동쪽 55마일 거리의 바르가온 지역(나란타)으로, 그곳에 위치했었던 사찰이어서 나란타사라 한다. 원래 명칭은 큰 절이란 의미의 마하비하라(Mahāvihāra-大寺)이다. 그 나란타사에 불교사원대학(나란타대학)이 부속돼 있어 유명했다.

   나란타사원이 세워지기 전에, 이곳은 암몰라(菴沒羅)라고 하는 망고 숲이었는데, 오백 명의 상인들이 거금을 주고 그 숲을 매입해 부처님께 봉헌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상인들에게 3개월 동안 법을 설하셨고, 부처님의 법문을 들은 상인들은 아라한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 후로도 부처님께서는 이곳 망고 숲에서 가끔 유숙한 바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나란타 마하비하라(大寺)는 기원전 3세기 아소카 대왕에 의해서 사리불 존자의 사당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사원인데, 큰 규모로 확장해서 발전시킨 것은 굽타왕조 쿠마라굽타(kumāragupta) 1세(414~455) 때이다. 이후 역대 왕들이 증축해 명실공히 인도 불교 중심지가 됐다.

   나란타사에 부속된 나란타 사원대학은 티베트ㆍ중국ㆍ한국과 중앙아시아에서 유학승이 올 정도로 유명했으며, 현장(玄奘)이 다녀간 7세기 초까지만 해도 학생이 1만 명, 교수가 2천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란타 사원은 7세기 중엽 벵갈 지방의 팔라(Pala) 왕조의 비호를 받으면서 밀교 4대 사찰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8세기 초 불교를 보호하던 굽타 왕조가 몰락하고 바라문의 힌두교가 번창하면서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결정적으로 13세기 초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프가니스탄의 고르(Ghor)왕조가 북인도를 침공하면서 나란타 사원은 완전히 파괴됐다. 이슬람의 침략자들은 많은 스님들을 죽이고, 사원을 불태웠는데 그 불길이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됐다고 한다.

 

 

    

*나렌드라 자다브(Narendra Jadhav, 1953년~)---인도에서 심각한 하층계급인 불가촉천민(dalit) 출신 지도자. 인도 푸네대학교 총장, 국제통화기금 자문관, 인도 중앙은행 수석 경제보좌관을 역임했다. 인도의 절대적 신분제도를 극복해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도의 살아 있는 영웅’이다. 인도 불가촉천민(달리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명성을 지닌 경제학자로 자리 잡은 그는 현재 세계가 주목하는 인물이다. 외국 언론들은 그를 향후 인도중앙은행 총재, 재무장관, 나아가서는 인도의 미래를 이끌어갈 차기대통령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저서 <신도 버린 사람들(Untouchables)>은 1993년에 출간돼 12년 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켰다.---→달리트(dalit) 참조. 

   

*나로파(Naropa, 1016~1100)---바라문 가문 출신으로 인도 벵갈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당시 불교학의 중심지인 카슈미르에 유학했다. 그는 귀향해 3년을 보낸 뒤 1032년 결혼했다가 결혼생활 8년 후 이혼하고 다시 카슈미르로 가 3년 동안 머물렀고, 1049년 나란타사(Nalanda寺)로 가서 여러 스승으로부터 대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나란타대학에서 철학 종교 논쟁에서 탁월한 학식을 인정받아 학장으로 추대됐으며, 8년간 학장으로 가르침을 펴는 동안 많은 학자가 배출됐는데, 티베트에서 온 마르파(Marpa, 1012∼1109)에게 요가를 포함한 여러 심오한 교리를 전수했다. 그 마르파가 훗날 티베트에 돌아가서 티베트불교의 유력 종파인 카규파(Kyagupa, 喝擧派)를 일으켰다.

   나로파는 나란타대학에서 가르침을 펴면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던 중 어느 날 금강승(金剛乘)의 가르침을 탐구하는데, 책 위에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이다. 놀라서 위를 쳐다보니 추악한 악마의 얼굴을 한 천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천녀는 그가 그 경전의 뜻을 알고 읽는가를 묻고 그에게 틸로파를 소개했다.

   이에 그는 학장 직위를 사임하고 이름을 숨긴 채 유랑하다가 틸로파(Tilopa, 988∼1069)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됐다. 그로부터 법을 전수받기 위해 사원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끓는 물속에 들어가는 등 열두 가지 혹독한 시련을 견디면서 틸로파가 입적할 때까지 12년 동안 그에게 헌신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극한의 시련을 통해 틸로파로부터 법을 전수받아 최상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제자 마르파에 의해 틸로파가 카규파의 창시자로 추대되고, 나로파가 2대조로 추대됐으며, 마르파 자신은 3대조, 그의 제자 밀라레빠(Milarepa)가 4대조가 되는 것이다.---→마르파(Marpa), 밀라레빠(Milarepa) 참조.

 

              

 

*나마(빠알리어 nāma)---빠알리어 나마(nāma)는 정신, 마음, 비물질을 말한다. 그리고 물질, 몸을 루빠(rupa)라 한다. 그래서 12연기에서 명색(名色)을 빠알리어로 나마 루빠(nāmarūpa)라고 한다. 나마(nāma)는 정신이고 루빠(rūpa)는 물질이다. 이때 정신은 오온 중에서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그리고 식온(識薀)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질은 몸(身)을 뜻하는 색온(色蘊)이다.

    미얀마의 장로 마하시 사야도는 “나마는 문자적으로 ‘이름’을 뜻하는 말이지만 오온에서 물질(色)을 제외한 느낌(受), 표상(想), 행(行), 식(識)의 4가지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정신을 지칭한다. 한역은 명(名)이라 하고, 영역은 mind, mentality라고 한다.”라고 했다. 그 외에 명(이름, nāma)에 관해서 아래와 같은 해설이 있다.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그러나 관악산을 모르는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산일뿐이다. 사람들이 관악산이라고 이름 붙여서 관악산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 멀리 있는 관악산은 결코 관악산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적이 없다. 사람들이 이름을 지어 부르고 있기 때문에 관악산이 된 것이다.

    누구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성과 이름을 가져야만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과 단절돼 산다면 이름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이름이나 명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름이나 명칭이 필요하다. 무언가 구분하고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이나 명칭은 한두 개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이름 외에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집에 가면 아버지나 어머니로 불리고, 회사에 가면 과장이나 사장 등으로 불린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인터넷접속을 하면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아이디가 있고 필명이 있기 때문이다.

    명칭과 관련된 게송이 있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무엇이 모든 것을 이기고 무엇이 그보다 나은 것이 없는가? 어떠한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했다.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기고 명칭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명칭이란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네.” - 명칭경(Namasutta-, 상윳따니까야 S1.61, 전재성 역)

     “명칭이 모든 것을 짓누르고 무엇보다 더 나은 것이 없노라.

     명칭이라는 하나의 법이 모든 것을 지배 하노라 - 각묵 스님 역 

    경의 제목이 Namasutta이다. 이에 대해 번역자들은 ‘명칭 또는 이름“ 등으로 번역했다.

나마경(S1.61)은 ‘명칭’이 키워드이다. ‘이름 지어짐’으로 인해 그 이름에 지배당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전재성 님은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긴다”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각묵 스님은 “명칭이 모든 것을 짓누른다”고 번역했다.

    필명 하나만 봐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게송에서는 “명칭이 모든 것을 이기고 명칭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S1.61)”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부처님은 “명칭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네(S1.61)”라 하신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나무(南無, 산스크리트어 Namo)---산스크리트어 Namo(Namas)를 번역한 말이 ‘귀의(歸依)’이다. ‘귀의’란 믿음을 받들고 몸을 바쳐서 구원을 청하는 생각이며, 마음의 깨달음에 의지해 일체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해 마음속에 무한한 안위(安慰)를 얻으려는 것이다. 그곳은 우리가 머무를 섬으로서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준다. 염불(念佛) 가운데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나무(南無)’를 말하며, 이에는 일곱 가지 뜻으로 한역된다.

    ① 귀의(歸依) ―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으로 만법의 근원이고, 상주불변하는 영원한 실상(實相)이며,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원인이신 법신불(法身佛)에게 돌아가 의지함이란 뜻이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말은 품에 안긴다는 말과 같다.

    ② 귀명(歸命) ― 목숨을 들어(擧命)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으로 영원한 실상이신 법신불께 목숨 바쳐 돌아간다, 의지한다는 말이다.

    ③ 귀경(歸敬) ― 돌아가 공경하고 경배한다는 뜻으로 만법의 근원이신 법신불에 돌아가 공경하고 경배한다는 뜻이다.

    ④ 경례(敬禮) ― 공경하고 예배한다는 뜻으로 인연소기의 원인이시며 공(空)이시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이신 분을 공경하고 예배한다는 말이다.

    ⑤ 구아(救我) ― 나를 구원해 준다는 뜻으로 상주불변하는 구세대비자(救世大悲者)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뜻이다.

    ⑥ 도아(度我) ― 나를 제도(濟渡)해 준다는 뜻으로 상주불변하는 법신불께서 나를 열반의 진리 세계로 인도애 건네주신다는 뜻이다. ※도(度)는 도(渡)와 통용어(通用語)

    ⑦ 신종(信從) ― 믿고 좇는다는 뜻으로 인연소기의 허상(虛像), 생멸(生滅)의 세계에서 영원한 실상이신 존재를 믿고 따른다는 말이다.

이상의 말을 종합해볼 때, ‘나무(南無)’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신불(神佛)께 자신의 명(命)을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이다.

    헌데 이러한 사상은 명백히 초기불교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신 합리성과 신비를 배제한 정신에 맞지 않는다. 부처님은 창조주 따위는 시설하신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창조주를 들먹인다는 것은 불경하기 짝이 없다. 이는 다분히 힌두교화한 밀교의 영향이기 때문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산스크리트어 Namo-Amitabha)---아미타불(阿彌陀佛)에 귀의한다는 불교용어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여섯 글자로 돼 있기 때문에 육자명호(六字名號)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의 이름이자 일종의 진언(眞言)으로서, 절이나 불자들에게서 흔히 듣는 기도문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Namo-Amitabha인데, Namo는 예배한다, 귀의한다는 말이며, mita는 헤아린다는 말이고, abha는 광명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 광명에 귀의합니다.’는 뜻인데, 결국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말이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無量壽佛) 혹은 무량광불(無量光佛)로서 서방정토에 살며 인간구제에 진력하는 부처로 묘사된다. 그래서 정토종(淨土宗)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정성으로 염(念)하면 극락왕생한다고 가르친다.

    헌데 나무아미타불을 찾으면 반드시 관세음보살이 뒤 따른다. 그 이유는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과 같이 끝없이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소원을 성취하게 해 주고자 하며, 아미타불을 스승으로 삼고 그 모습을 자신이 쓰고 있는 관(이마)에 모시고 있다. 그래서 대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 읊는다.

    

*나반존자(那畔尊者)---오직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신앙대상이다. 유독 우리나라에선 나반존자가 ‘홀로 깨친 이’라는 뜻에서 독성 또는 독성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보통 사찰의 독성각에 모셔지고 있다. 독성(獨聖)이란 스승 없이 스스로 깨침을 열어 성자가 된 자를 말하며, 독수성(獨修聖), 독각(獨覺), 연각(緣覺), 벽지불(壁支佛)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만 숭상하는 신앙대상이라서 나반존자라는 명칭은 석가모니의 10대 제자나 5백 나한의 이름 속에 보이지 않고, 불경 속에서도 나반존자의 명칭이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중국의 불교에서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은 없다. 사찰에서 산신, 칠성, 용왕들과 나란히 신봉되는 것으로 봐서 우리 토속신앙이 불교적인 색깔을 띤 불 ‧ 보살로 변형돼 절에서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 최남선(崔南善)은 “절의 삼성각(三聖閣)이나 독성각(獨聖閣)에 모신 나반존자는 원래 불교의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 신앙의 것이었다. 옛적에 단군을 국조로 모셨으며, 단군이 뒤에 산으로 들어가서 산신이 됐다고도 하고 신선이 됐다고도 해서 단군을 산신으로 모시거나 선황(仙皇)으로 받들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찰 뒤 언덕 조용한 곳에 전각을 세우고 산신과 선황을 같이 모셨으며, 또 중국에서 들어온 칠성도 함께 모셨다.”라고 해서 나반존자상을 단군의 상으로 파악했다.

   그런데 불교계 일부에서는 독성각 건립이 조선후기에 나타는 것으로 미루어 봐서, 나반존자를 단군으로 보지 않고, 나반존자를 말세의 복밭으로 보고, 복을 줄 수 있는 아라한의 한 사람으로 신앙하며, 18나한의 하나인 빈두로존자(賓頭盧尊者)를 이름만 바꾸어 신앙대상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나반존자의 형상은 하얀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으며, 눈썹은 매우 길게 묘사돼 있고 미소를 띤 경우가 많은데, 이 또한 중국에서 신앙대상이 된 ‘빈두로존자’ 모습을 차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독성(獨聖) 참조.

 

 

*나발(螺髮)---불상(佛像)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如來像)의 머리카락. 나계(螺髻)라고도 한다.---→나계(螺髻) 참조.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노턴 로렌즈(Edward N. Lorenz, 1917~2008)가 처음으로 발표한 이론이지만 나중에 카오스(chaos) 이론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일반적으로는 작고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중에 커다란 효과를 가지고 온다는 의미로 쓰인다. 로렌츠는 컴퓨터를 사용해 기상현상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초기 조건(초기값)의 미세한 차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커져서 결국 그 결과에 엄청나게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또는 “북경에 있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다음날 뉴욕에 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초기 값의 미세한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나비효과’는 이렇듯 처음에는 과학이론에서 발전했으나 점차 경제학과 일반 사회학 등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이게 됐다. 가령 1930년대의 대공황이 미국의 어느 시골 은행의 부도로부터 시작됐다고 본다면, 이것은 ‘나비효과’의 한 예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작게는 이웃이나, 크게는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하는데 그것은 짧은 생각이다. 일파만파(一波萬波)라고 했다. 강물이나 연못에 돌을 던지면, 수면의 물결이 둥그렇게 일면서 끝없이 퍼져나간다.

   그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이미 삼천여년 전에 한 사람의 불행이 전 인류의 불행이라고 말씀하셨다. 바꾸어 말하면, 한 사람의 구제가 전 인류의 구제로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교에서 인류 구제를 전제한 동업중생(同業衆生)의 개념이다. 우리는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며 호흡을 같이 하는 공업소감(共業所感-공동책임)이다. 곧 동업중생이다.---→‘카오스(chaos)의 이론과 불교’, ‘가이아(Gaia)의 이론’ 참조.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밀린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 참조.    

      

*나습(羅什)---구마라습(鳩摩羅什, Kumārajīva, 344~413)을 줄여서 나습(羅什)이라고도 한다.---→구마라습(鳩摩羅什) 참조.

     

*나옹(懶翁, 1320년∼1376년)---고려 말 고승. 법명은 혜근(彗勤), 호가 나옹(懶翁)이다. 경상도 영덕 출신이고, 21세 때 친구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문경 공덕산(孔德山) 대승사(大勝寺) 묘적암(妙寂庵) 요연(了然) 선사를 찾아가 출가했다. 그 뒤 전국의 이름 있는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했다.---→양주 회암사지(楊州檜巖寺址) 참조. 

    1347년(충목왕 3년)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燕京)을 거쳐 명주(溟州)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여러 사찰에 주석한 후 귀국해 회암사 주지로서 절을 중수했다. 그는 전통적인 간화선(看話禪) 입장을 취했고, 임제(臨濟) 선사 선풍을 도입해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부도는 양주 회암사 터와 여주 신륵사(神勒寺), 그리고 대승사 묘적암에 남아 있다. 아래는 유명한 나옹 선사의 선시(禪詩)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蒼空兮要我以無垢)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聊無愛而無憎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如水如風而終我)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蒼空兮要我以無垢)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聊無怒而無惜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如水如風而終我)」

 

     

*나옹화상(懶翁和尙) 발원문(發願文)---나옹화상(懶翁和尙)은 고려 말의 변혁기를 살다간 선승이다. 공민왕의 왕사로도 활약하다가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셨다. 그는 수행방법에 있어서는 염불은 매우 중요시했다. 염불을 청정한 마음으로 계속해나간다면 모든 중생들은 삼악도를 벗어나 정각의 지름길로 갈 수 있다고 보셨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나옹화상께서 쓰신 발원문은 우리나라 불교의례에서 자주 염송되는 서원문 중 하나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아세세생생처(願我世世生生處) - 원하옵건대 세세생생 나는 곳 어디에서나

     상어반야불퇴전(常於般若不退轉) - 언제든지 불법에서 퇴전치 아니하고

     여피본사용맹지(如彼本師勇猛智) - 부처님의 복과 지혜 두루 함께 갖추옵고

     여피사나대각과(如彼舍那大覺果) - 보신이신 노사나불 대각의 울안에서

     여피문수대지혜(如彼文殊大智慧) - 칠불님의 스승이신 문수보살 큰 지혜와

     여피보현광대행(如彼普賢廣大行) - 보현보살 육도만행 모두 함께 실천하며

     여피지장무변신(如彼地藏無邊身) - 지장보살 서원행을 남김없이 본을 받고

     여피관음삼이응(如彼觀音三二應) - 관음보살 분신으로 무량중생 제도코자

     시방세계무불현(十方世界無不現) - 시방세계 곳곳마다 남김없이 몸을 나퉈

     보령중생입무위(普令衆生入無爲) - 모든 중생 교화하여 열반경지 얻게 하며

     문아명자면삼도(聞我名者免三途) - 나의 이름 듣는 이는 삼악도를 벗어나고

     견아형자득해탈(見我形者得解脫) - 나의 모양 보는 이는 해탈도를 얻어지이다.

     여시교화항사겁(如是敎化恒沙劫) - 이와 같이 교화하기를 영원토록 계속해

     필경무불급중생(畢竟無佛及衆生) - 부처니 중생이니 이름조차 없사이다.

     원제천용팔부중(願諸天龍八部衆) - 바라옵건데 천용팔부 금강신장이시여

     위아옹호불리신(爲我擁護不離身) - 도량을 수호하고 나의 몸을 보호해

     어제난처무제난(於諸難處無諸難) - 모든 재난 소멸하고 하는 일에 장애 없길

     여시대원능성취(如是大願能成就) - 지심으로 합장하고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나유타(那由陀, 산스크리트어 nayuta)---아승기(阿僧祇)와 더불어 인도에서 아주 많은 수를 표시하는 수량의 단위임. 아유타(阿由陀;많은 수라는 뜻)의 백배라고 한다. 수천만ㆍ수천억ㆍ수만억이라고 하나 일정하지 않다. <법화경>에 대통지승불(大通知勝佛)의 수명이 오백사십만억(五百四十萬億) 나유타 겁(那由他劫)이라 했다. 천태 대사께서는 한량없고 가이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겁이라는 수치를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고 표현했다.

 

 

*나일할(那一喝)---나일((那一)은 ‘그 하나’란 의미이다. 따라서 ‘나일할’은 그 하나의 할, 즉 ‘오직 그 하나의 할’, 그런 말이다.

 

 

   

*나찰(羅刹)---나찰은 악한 귀신이다. 원래 고대 인도의 신으로, 불교에서 악귀(惡鬼)의 총칭이다. 사람을 먹는 두려운 귀신이었으나 부처님께 귀의해 불교 수호신이 됐다.

      

*나투시다---우리말 ‘나타나다’의 고어. 굳이 ‘부처님께서 나투시다’로 번역한 까닭은 단순히 중생의 오관에 비치어 인식돼진 대상이 아니고, 부처님 스스로 의지로써 나타나셨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른바 화신불(化身佛)로서 진여(眞如) 그 자체인 법신불(法身佛)이 아니고, 인간의 몸을 빌려 오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한(羅漢)---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줄인 말이다. 아라한은 본래 부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는데, 후에 불제자들이 도달하는 최고의 위치로 바뀌었다. 부처님 생존 시의 초기불교에서는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수행자들 가운데 수행의 최고 단계에 이른 이상상(理想像)을 말했다. 수행 결과에 따라서 범부(凡夫) · 현인(賢人) · 성인(聖人)의 순서로 구별이 있고, 성인 중의 최고를 아라한이라 했다. 그러나 대승불교가 성립되면서 ‘보살’이 생겨 아라한을 나한(羅漢)이라 고쳐 부르고, 그 격이 보살 아래로 떨어졌다.

    세상의 존경을 받아 공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자(尊者)라는 의미에서 응공(應供)이라 하기도 한다. 또한 번뇌를 끊고 생사윤회를 거듭하지 않는 성자로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이므로, 진리에 상응한다는 의미의 응진(應眞)이라고도 한다. 나한은 6가지 신통력과 8가지 해탈 법을 모두 갖추어 번뇌에서 벗어난 부처에 버금가는 성자로서 신앙의 대상이 됐다. 나한들은 석가 열반 후 정법(正法)을 수호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따라서 열반에 들지 않고 수명을 연장해 계속 속세에 머물러 장차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을 교화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8세기 후반에 말세신앙과 함께 16나한에 대한 신앙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주로 16나한과 오백나한이 신앙됐는데,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영산전(靈山殿)의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16대 제자 또는 16나한, 혹은 18나한, 오백나한을 봉안했다. 나한전이나 응진전을 따로 건립한 사찰도 있다. 나한을 살적(殺賊)이라고도 하는데, 살적이란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항복 받았다는 말이다.---→아라한(阿羅漢, Arhan) 참조.    

    

*나한전(羅漢殿)---나한을 모신 전각(16 혹은 500나한).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16나한은 석존께서 열반하신 후 미륵불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위임 받은 분들이라고 한다. 나한전에는 석가모니불이 주불이고, 대개 가섭과 아난이 협시하고 있다.

       

*낙덕(樂德)---‘낙(樂)’은 안락이란 뜻으로 생멸변화가 없는 세계에는 생사의 고통을 벗어난 적정무위(寂靜無爲) 안락한 덕을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 즉 무위안락 한 것이다. 안락이란 보통 그냥 재미있고 어떠한 유한적인 안락이 아니라, 조금도 변치 않는 영생의 안락을 말한다. 열반사덕(涅槃四德)인 상 ․ 락 ․ 아 ․ 정(常樂我淨)에서 ‘낙’이 이에 해당한다.

     

 

*낙처(落處)---공안의 요긴한 도리인 핵심이 되는 구경(究竟)을 이르는 말이다. 시쳇말로서 초점, 포인트 등으로 불린다. 참학인(參學人)에게는 핵심이 되는 자성을 여의지 않는 가운데 깨달아 알아야 할 요긴한 법리(法理)가 되는 의심처를 이르는 용어이다.

    경전을 보더라도 그 경전의 이치만 알면 알음알이 수준에 그치고 만다. 경전을 보되, 그 경전이 마음의 이치를 깨우치는 곳(낙처)을 파악해야 한다. 부처님에게 법인(法印)이 있으나 부처님을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바로 심인(心印)의 낙처를 꿰뚫어야 할 것이다.

    선어(禪語)들은 때로는 펑범하게, 때로는 이상하게 들려서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선사(禪師)들이 제시하는 말의 요체,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 핵심의 말(낙처)이 무엇인지를 순간적으로 알아채야지 분별 사량으로 꿰맞춰서는 비록 그것이 같은 것을 가리킨다 하더라도 일시적인 알음알이일 뿐이다.

    그래서 선사들이 학인을 제접할 때 이것저것 공안을 던져 물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공안의 낙처를 제대로 파악하는지 살핀다. 그런데 여기서 선어가 가리키는 뜻이나 ‘함축된 의미’란 말을 쓰지 않고 ‘낙처’라고 한 그 뜻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낙처란 공간의 의미, 즉 장소(곳)를 함축하고 있다. 그곳이 바로 자기 성품이다. 낙처는 그만큼 깊은 곳에 있다.

 

 

*난승(難勝, 7세기)---신라의 선인(仙人)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에는 신라 진평왕 치세 시대인 611년 당시 17세의 김유신이 삼국 통일 대업의 큰 뜻을 품고 중악(팔공산) 석굴에 들어가 목욕 재계하고 하늘에 빌며 4일간의 맹세를 하니, 어느 한 늙은 선인이 나타나서 이야기하기를 “내 이름은 난승(難勝)인데, 그대가 아직 어린 나이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하니 참으로 장한 일일지어다.”고 하고, 자신의 비법을 김유신에게 전하며 “이를 삼가 망녕되이 전하지 말라. 만약에 이 비법을 부당하게 사용한다면 도리어 재앙이 도래할 것이니라.”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한다.

 

*난승지(難勝地)---보살 10지 가운데 제5지를 난승지라 한다.

     

*난식(亂識)---망식(妄識), 염식(染識)과 비슷한 말로서, 어지러운 생각, 온갖 망상을 일컫는 말이다. 분별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망식이고, 오염된 의식이 염식이다. 그리고 난식의 반대말은 정식(淨識)이다. 정식이란 더러움과 번뇌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의식이다.

         

*난타(難陀, Nanda, 손타라난타/孫陀羅難陀, ?~?)①---석가모니 이복동생. 정반왕(淨飯王) 아들이며, 모친은 석가모니 어머니 마야 부인의 동생이기도 하고, 부처님 계모이기도 한 마하파사파제(摩訶波娑波提)이다. 난타는 부처님의 32상(相) 중에서 2종을 제외하고 모두 갖추었을 만큼 뛰어난 외모를 지녔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아내 손타리(孫陀利) 역시 빼어난 미인이었다. 그는 그 아내를 못 잊어 출가하는 것을 꺼려했으나, 부처님이 방편으로 천상의 즐거움과 지옥의 괴로운 모양을 보여, 그를 불도에 귀의케 해 마침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아내 이름을 따 손타리난타(孫陀羅難陀)라고 하는데, 이는 목우난타(牧牛難陀)와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목우난타(牧牛難陀)---본래 소를 먹이던 사람이었으므로 이런 이름으로 부른다. 그는 일찍이 소를 먹이는 목동이면서 출가해 아라한의 과위를 이루었다.

       

*난타(難陀, Nanda, 빈녀/貧女)②---붓다 당시, 고대인도 코살라(Kosala)국 수도 사위성(舍衛城)에 살던 가난한 여인[빈녀(貧女)]의 이름. 그녀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부자였고, 언제나 착한 누나처럼 우아한 뒷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우경(賢愚經)>이라는 불경은 그녀의 아름다운 행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난타는 어느 날 길거리에 나갔다가 부자들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모습을 봤다. 그녀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었다. 난타는 궁리 끝에 구걸해서 은전 한 닢을 얻어 그것으로 기름을 샀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등불을 만들어서 기원정사로 찾아갔다. 먼발치에서 부처님을 뵌 그녀는 구석진 곳에 초라한 등불을 밝히고 설법을 들었다. 밤이 깊어 사람들이 흩어지자 등불도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벽이 돼도 꺼지지 않고 점점 더 밝은 빛을 내는 등불 하나가 있었다. 난타가 깨끗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밝힌 그 등불이었다. 당번을 맡은 목련 존자는 날이 밝아오자 기름을 아끼려고 등불을 끄려 했으나 꺼지지 않았다. 부처님은 꺼지지 않는 난타의 등불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난타가 밝힌 등불이 어떤 큰 등불보다 더 오래 어둠을 밝히는구나. 이 등불은 태풍으로도 끌 수 없고, 바닷물을 다 부어도 끌 수 없다. 누구보다 깨끗한 마음으로 등불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공덕으로 ‘등광불(燈光佛)’이라는 부처님이 될 것이다.” 라고 수기했다. 이러한 수기를 받은 난타는 기뻐하며 출가를 발원하니 부처님이 허락을 해 비구니가 되도록 해주었다.

    가난한 여인의 깨끗한 정성을 뜻하는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고사성어는 이 설화에서 유래한 말이다.

    

*난타(難陀, Nanda, 5세기경)③---유식(唯識) 10대 논사(論師)의 한 사람. 마음작용에 대해 견분(見分)ㆍ상분(相分) 2분설(分說)을 제창했다. 미륵(彌勒, 마이트레야/Maitreya)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등의 주석에 참여했다.

      

*난타(難陀, Nanda)와 발난타(跋難陀, Upananda)④---8대 용왕 중에서 난타와 발난타 두 형제용왕을 말한다. 두 용왕은 불법의 수호자로서 난타를 환희(歡喜)라 번역하고, 발난타를 선환희(善歡喜)라 번역한다.

       

*난행도(難行道)---용수(龍樹)와 세친(世親) 등이 불법(佛法)을 일반 세상의 도(道)에 준해 난(難) ․ 이(易) 둘로 나눈 바 있어, 이에 힌트를 얻어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에서 활약한 담란(曇鸞, 476~542)은 세친의 <정토론(淨土論)>에 주석을 달아 <정토론주(淨土論注)>를 써서, 수행을 난행도와 이행도(易行道) 2도설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범부가 외부 힘에 의해 왕생할 수 있는 이행도를 역설함으로써 타력본원(他力本願)의 정토교 교의를 처음으로 천명했다.

    수행을 함에 있어서 자력에 의해 성불을 추구하는 것을 난행도, 불ㆍ보살의 원력에 의지해 수행해가는 것을 이행도라 하는데, 난행도는 근기가 수승한 사람이 선택하는 방법이고, 이행도는 근기가 약간 미천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불교는 일반적으로 자력에 의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난행도의 종교로 알려져 있으나, 불ㆍ보살의 원력에 의한 이행도가 시설된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다.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세속 중생은 근기가 다양하고 저열해서 누구나 높고 수승한 난행도를 성취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이행도(易行道), 성도문(聖道門)과 정토문(淨土門), 타력본원설(他力本願說) 참조.

 

 

 

*날란타대학---→나란타(Nālandā, 那爛陀)대학 참조.

 

   

*날마다 좋은 날---→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참조.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증도가(證道歌) 참조.

     

*남무(南無)---→나무(南無, 산스크리트어 Namo) 참조.

           

*남방불교(南方佛敎, 테라와다 불교, 상좌부불교)---남방불교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의 불교를 지칭한다. 인도에서 서역지방(중앙아시아)을 거쳐서 중국, 몽고, 우리나라, 티베트, 일본 등 동아시아에 전해진 불교를 북방불교 또는 북전불교(北傳佛敎)라고 하는데 대응해 남방불교 혹은 남전불교(南傳佛敎)라 한다.

    남방불교권을 흔히들 테라와다 불교(상좌부불교)라고 한다. 따라서 좁고 엄격하게 말하자면 상좌부 불교는 20여개 부파불교 중의 일개 종파에 불과하다. 즉, 불멸 후 100여년이 지나자 계율과 교리 해석문제로 불교계에 분열이 일어났다. 최초의 분열[근본분열]은 당시 계율과 교리의 해석에서 시대 흐름에 맞춰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던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와 전통을 고수하려던 장로들 모임인 테라와다[상좌부(上座部)]로 갈라졌다. 이 두 계열이 소승불교의 2대 부문이 됐는데, 대중부는 시대적 변화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테라와다(상좌부)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원형 그대로 유지ㆍ보존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대중부와 상좌부는 지속적인 지말분열의 과정을 걸치면서 소위 부파불교라는 독특한 시대상을 연출하게 된다. 이것을 아비달마(abhidharma) 시대라고도 하는데, 이때 갈라져 나간 부파의 숫자는 도합 20여개 부파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편 최초의 두 부파 가운데 대중부는 결국 와해돼 사라졌고, 다른 대부분의 지말 부파들 또한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스리랑카라는 고립된 지역에 정착한 상좌부 불교는 여러 차례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도 원래의 모습을 흩뜨리지 않고 오늘에까지 계속된다. 바로 이 부파를 테라와다 불교로 일컫는 것이다. 현재에도 테라와다 불교는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테라와다 불교 종단는 2300년이라는 긴 역사를 자랑한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 권위와 전통성을 부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붓다의 육성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빠알리어 경전을 전승하고 보유하고 있는 2500년 불교의 종갓집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경전결집의 역사와 경전의 전승과정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붓다의 육성이 담겨 있는 경전이라고 소중하게 소지하고 공부하는 빠알리어 경전내용은 아소카왕 시절에 있었던 제3차 경전결집의 산물이다. 인도 대륙에서 있었던 제3차 경전결집은 당시 20여개 부파 중에서 그나마 붓다의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공인된 상좌부가 전승 및 보유하고 있던 경전(율장 및 경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결집의 내용이 고스란히 당시 실론(스리랑카)이라는 남쪽 섬나라로 전승됐던 것이다.

    이렇게 남방에 부파불교시대 근본불교를 계승한 상좌부(上座部)의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adin)의 불교가 전해졌기 때문에 테라와다(Theravāda) 또는 남방상좌부불교라고도 하는 남방불교는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남방 일대에 전파됐다.

    스리랑카에 처음으로 전래된 시기는 BC 3세기 아소카왕(Ashok, B.C. 273~232년경) 때이다. BC 3세기 제3차 불전결집을 끝낸 마우리아왕조 아소카왕은 그의 아들 마힌다(Mahinda:摩呬陀) 장로와 딸 상가미타(Sanghamitta) 비구니 등 일행을 스리랑카에 파견했다.

    이에 스리랑카 국왕 데바낭삐아-티사(Devanampiya-Tissa, 재위 BC 250~207)는 이들을 맞이해 수도인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마하 위하라(大寺, Mahavihara) 사원을 세워 그들에게 기증함으로써 남방불교 거점이 되게 했다. 이것이 스리랑카 상좌부불교의 기원이다.

    그런데 AD 1세기경 왓따가마니 아바야(Vattagamani Abhaya)왕이 아바야기리 위하라(Abhayagiri Vihara, 무외산사/無畏山寺)를 건립해 마하팃사(Mahatissa) 장로에게 헌납함으로써 스리랑카불교는 대사파와 무외산사파 둘로 나뉘어 서로 경쟁을 하게 됐다.

    그 후 대사파는 상좌부계통 불교를 고수했는데 비해, 무외산파는 AD 1세기에 대중부, 그리고 AD 3세기에는 대승불교를 각각 받아들여 대사파와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AD 4세기경 마하세나(Mahasena, 334-362년 재위)왕 집권 시에는 대사파를 탄압했기 때문에 무외산사파의 대승불교 황금시대가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사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청정한 상좌부(분별설부)의 교학과 계율을 잘 유지했고, 결국은 상좌부불교를 고수한 대사파(大寺派)가 압도하게 됨으로써 대승불교는 사라지고 스리랑카엔 초기 근본불교(상좌부불교)가 고스란히 살아서 전승하게 됐다.

    그리고 대사파에서는 BC 1세기 중반에 제4차 불전결집을 단행했다. 즉, 알루위하라(Alu Vihara) 석굴사원에서 경전 편찬회의를 개최했는데, 이 편찬회의는 마하테라 라키타가 주재 하고, 상좌부계통 분별설부교의를 고수하는 500명의 학승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이들은 7년에 걸쳐 네 차례의 결집을 통해 그때까지 스리랑카에 전해오던 상좌부계통 불교의 모든 교의를 총망라한 경(經) ‧ 율(律) ‧ 론(論) <빠알리어 삼장(三藏), Tipiṭaka>을 완성하고,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빠알리어 삼장 일체를 종려나무 잎을 말려 거기에 문자로 기록했다. 이로써 불교사상 처음으로 완성된 <빠알어 대장경>이 조성된 것이다. 종려나무 잎에 적은 대장경이어서 패엽경(貝葉經)이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초기경전인 <경ㆍ율ㆍ론 빠알리어 삼장=니까야(Nikaya)>이 훼손됨이 없이 패엽경(貝葉經)이라는 형식으로 고스란히 스리랑카에 전승되게 됐다.

    그리고 스리랑카로 전래된 경전(빠알리어 삼장)은 AD 5세기에 미얀마로 전래 됐고, 미얀마의 통일왕조인 페간(Pagan)왕조에 의해 13세기에 태국으로, 14세기에는 캄보디아, 라오스 등지로 전파됐다. 이렇게 해서 남방 상좌부불교가 오늘날까지 번성하게 됐다.

    남방불교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신들이 정통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붓다 당시의 초기교단적 전통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것이 남방불교이다. 그러므로 북방불교가 초기불교 교의를 확대해석한 대승불교 중심인데 비해 남방불교에서는 초기 근본불교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엄격한 계율과 수행을 중시하고 있다.

    그런데 대승불교권에서 남방불교를 폄하해서 소승불교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남방불교는 소승불교가 아니라 남방 상좌부불교이다. 소승불교란 부파불교시대 근본상좌부와 대중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파불교를 총칭하는 말이다. 현재의 남방불교에는 부파불교가 전해진 것이 아니라 근본상좌부 계통의 분별설부불교가 전해졌으므로 소승불교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최근 남방불교(상좌부불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짐으로 인해, 마치 막혔던 미지의 세계가 갑자기 열린 듯한, 그래서 호기심, 신비로움, 새로운 발견과 같은 심리상태가 팽배해져서, 무비판적으로 남방의 여러 불교이론들이 도입되고 있다. 그리고 남방불교이론을 소개하는 일부 인사의 경우, 마치 개선장군 모양으로 설치면서 대승불교를 깔아뭉개듯이 하는데, 그것도 꼴불견이다.

    적어도 북전불교(대승불교)의 이론들은 수세기에 걸친 검토와 검증을 거쳐서 정착되는 과정을 거쳤지만 오늘날 마구잡이로 도입되는 남방불교(상좌부불교) 이론의 경우는 아직 북방 불교권에서 검증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생소한 이론들이 나타나서, 이에 맹목적으로 열광하는 일이 진정되고 차분한 검증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구나 남방불교이론의 용어의 경우, 거의 일본에서 번역된 것을 그대로 도입하고 있어서, 이점도 검토돼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빠알리어 니까야>와 <청정도론>은 근본불교가 아닌 아비달마 불교이며, 아비달마 불교이면서도 부처님의 정수를 놓치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아비달마 불교는 크게 20여개의 부파로 나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나뉘는 가운데 어느 부파는 교학의 정수를, 어느 부파는 수행의 정수를, 어느 부파는 불제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우선하는 부파 등으로 나뉘었다면, 남방 상좌부는 이해하기 쉬운 불교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 대승불자들이 당시 상좌부불교에 대해 법실유(法實有)라 해서 비판했을 때, 그것에서 상좌부불교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해서 인도 문화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던 상좌부는 반성과 변화가 나타나는데, 스리랑카라는 변방에 있던 남방 상좌부는 마치 다른 세계인 것처럼, 비판을 벗어난 채 ‘법실유’ 전통을 이어오게 됐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지금 초기불교 운운하면서 한국에 남방불교를 전하는 이들은 ‘실유법’을 주장하는 상좌부 불교 전통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유법’으로 해석하고 있는 남방 상좌부는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남방 상좌부불교는 ‘실유법’을 주장하는 불교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쌍윳다니까야>에는 실유법에 거슬리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hyojin---→불전 결집(佛典結集) 참조.

 

           ※남방불교와 대승불교의 관계---불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 이미 여러 부파의 발생과 성쇠를 거쳤고, 인도반도 밖으로 퍼져나가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처음부터 불교는 중도임을 표방하고 나섰지만 늘 중심을 곧게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긴 불교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의 핵으로 기억하는 용수, 무착, 세친, 보리달마, 혜능 등 옛 스승들의 업적은 다름 아닌 고타마 붓다의 연기, 중도의 정신, 현실 세계로의 복귀였다.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쳤을 때, 대사회적 유연성을 잃고 굳어 갈 때, 혹은 전통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흐르지 못하고 정체돼 있을 때, 둑을 뚫고 새물을 끌어들인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분들이 끌어들인 새물은 이미 거기 있었던 우물, 고타마 붓다의 연기, 중도에서 퍼 올린 것이다. 가장 오래된 샘에서 새물을 길어 냈다는 것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파야 할 우물도 바로 그 자리다.

그러나 특정 전적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나머지를 폄하하는 흐름은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세속적 편 가르기로 보이기도 한다. 한역경전과 빠알리어, 범어(梵語, Sanskrit) 경전을 비교하면서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역과 인도 원전의 상호 보완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역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인도어 원전을 통해 쉽게 풀리기도 하고, 역으로 인도 원전의 모호한 부분이 한역을 통해서 분명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역 전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연구와 인도 전적 중심의 연구 성과 역시 배척과 질시가 아닌 상호 존중과 보완의 자세가 필요하다.

한 예로 초기경전의 눈으로 후기 경전을 점검하고, 대승경전의 입장에서 초기경전을 재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각 개인, 지역사회, 한 나라, 나아가 전 세계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연기의 세계관이다. 몸소 앞서서 그것을 보이고 퍼뜨려야 할 사회적 의무를 자진해서 짊어진 승가는 연기의 바른 이해와 실천, 곧 지혜와 자비의 두 날개로 날아가는 나비다. 그것이 바로 승가의 굳건한 뼈대요 따뜻한 피인 것이다. - 재연 스님

 

    

*남방 상좌부(南方上座部)의 논서(論書)---북방불교에는 부파불교의 대표적인 논서로 7론이 있는데, 남방 상좌부에도 7론이 조성돼 전하고 있다. 즉, ①법집론(法集論), ②분별론(分別論), ③논사(論事), ④인시설론(人施設論), ⑤계론(界論), ⑥쌍론(雙論), ⑦발취론(發趣論)이다.

   이들 7론은 BC 250년 무렵부터 BC 50년 사이 200여년에 걸쳐 성립됐는데, 북방과 달리 남방 상좌부에서는 7론을 단순한 논서가 아니라 성전으로 꼽는다. 그리고 7론을 거쳐 붓다고사의 <청정도론(淸淨道論)>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된 사상체계를 실현했다. 이 이후 나타난 논서는 대개 난해하고 복잡한 <청정도론>에 대한 해석서들이다. 그런데 사실은, 빠알리어 칠론(七論)의 성립연대가 확실치 않으며, 그 성립순서조차 분명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칠론 외에 <지도론(指道論)>, <장석론(藏釋論)>, <밀린다팡하(Milindapanha)> 등 세 가지 논서가 더 있다. 이것들은 아비달마 논서라고 할 수 없지만 내용상 아비달마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로서 특히 중요시 되고 있다.

     ① 법집론(法集論, Dhammasangani)---초기 팔리어 논서이고, 내용은 불교의 여러 주제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으므로 초기불교의 복잡한 사상을 공부하는데 꼭 필요한 설계도 역할을 제공해준다.

   제1장에서는 마음과 마음작용(心. 心所)을 다양하게 분석적으로 고찰했다. 이른바 89심(八十九心)이 여기서 설명되며, 마음작용으로서 40가지 정도가 언급되고 있다.

   제2장에서는 물질적 존재(色)를 한 가지 종류에서 11가지 종류로 분류해, 그것 역시 각각 다양하게 분석했다.

   제3장에서는 일체존재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22가지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방법 100가지, 나아가 두 가지 종류로 분류하는 또 다른 방법 42가지, 도합 164문(門)으로 나누어 설했다.

   제4장에서는 앞장의 그것과 약간 다른 관점에서 다시 아비달마 논모 122문(門)으로 나누기를 시도하고 있다. 경의 논모(論母)라고 하는 이유는 <니까야>인 <장부경전>의 <상기티숫탄타, Sangitisuttanta>에서 언급되고 있는 술어 가운데 일부분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점에서 볼 때 북전 논서의 <족이문족론(集異門足論)>과 비슷한 관계이다.

        ※논모(論母, 마띠까/mātṛkā)---불타법문의 취지나 요의를 추구하면서 다양한 경설을 널리 분별 해석(廣釋)하기도 하고 종합 정리하기도 했는데, 이를 논모(論母, mātṛka) 혹은 논의(論議, upadeśa)라고 한다. 또한 논점이나 주제를 기억하기 쉬운 방식으로 정리해 둔 목록과 열거되는 연구제목을 논모라 하기도 하며, 더러 논장(論藏)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② 분별론(分別論, 비방가/Vibhanga)---<법집론>을 보충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논서이다. 북전 <법온족론(法蘊足論)>과 비슷한데, 아함 가운데 주요한 교설을 뽑아 그것을 종횡으로 분석 고찰했다.

    ③ 논사(論事, Kathavatthu)---아소카왕 치하에서 단행된 제3차 불전결집에서 장로 목라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가 논사를 설했다고 한다. 전체는 시종 문답형식으로 일관되며 주석서를 보지 않고서는 문답의 주객이 누구며, 이론(異論)을 주장하는 자가 어떤 부파 소속인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상좌부의 정통설을 세워 다른 부파의 이설(異說)을 깨뜨린다고 하는 독특한 내용을 갖고 있다.

    ④ 인시설론(人施設論, Puggala pannatti)---이 논서는 불교경전 가운데 '사람'에 관해 언급된 부분을 추리고 정리해서 열 개 항목으로 분류해 설명하고 있다. '인시설(人施設)'이라는 뜻은 편의상 사람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이다. 불교교리는 무아설(無我說)을 표방하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무아이고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의 존재이지만 우선 사람이라고 명칭하고 편의상 독립자존의 존재로 가정한다는 뜻에서 '시설(施設)'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 중에 언급되는 인(人)에 관한 용례의 집성을 '인시설(人施設)이라고 부르고 있다.

    ⑤ 계론(界論, 界說論, 다뚜까타/Dhatukatha)---‘요소(dhātu)들에 관한 가르침(kathā)’으로 번역되는 <계론>은 <법집론>을 보충한 논서이다. 여러 가지 법들이 무더기(蘊), 장소(處), 요소(界)의 세 가지 범주에 포함 되는가 되지 않는가, 관련이 있는가 없는가를 교리문답 형식을 빌려서 설명하고 있다.

     ⑥ 쌍론(雙論, 야마까/Yamaka)---논장의 모호한 심리현상에 관한 전문술어 중에 애매하고 잘못된 사용을 해결하기 위해서 결집된 논서이며, 문제 제기를 항상 쌍(yamaka)으로 하기 때문에 쌍론이라 했다. 즉, 전물술어나 문제, 개념들을 상반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대비해 논의함으로써 주요한 교설 가운데 나타난 용어의 의미.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대비하고 검토했다.

    ⑦ 발취론(發趣論, Patthana)---칠론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의 논서이다. 그 내용은 연기법의 가르침을 자세히 치밀하게 정리해 놓았다. 즉, 24연(二十四緣)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다. 여러 가지 연(緣)은 아함경전 이래 여러 곳에서 설명되고 있지만 그것을 24연으로 정리해 설한 것은 이 논서가 처음이다. 현재 미얀마에선 가장 중요한 논서로 취급되고 있다.

이 외에 특수한 세 가지 논전(論典)이 있다. 연대적으로는 대개 칠론 다음의 것(혹은 칠론 중 그 성립 연대가 늦은 것보다는 조금 앞선 것인지도 모른다)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 지도론(指導論, 넷티파카라나/Nettippakarana)---AD 1세기 전후 인물이라고 하는 캇차야나(Kaccayana)의 저서로, 경전 이해에 대한 입문서라고 할 만한 것이다.

     • 장석론(藏釋論, 페타코파데사/Petakopadesa)---이것은 지도론의 보유(補遺)라고 볼 수 있다.

     • 미란다왕문경(彌蘭陀王問經, 밀린다팡하/Milindapanha)---BC 150년경 서인도를 지배하던 그리이스인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인도 이름은 밀린다/Milinda)와 불교의 나가세나(Nagasena) 장로 사이에 이루어진 불교교의에 관한 대론(對論) 기록으로, 다른 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한역 대장경 안에도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이란 이름으로 전하고 있으며, 팔리어 논전보다 오히려 더 오래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그 원형은 기원전후 무렵에 성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경(經)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닌 일종의 교의학습서이지만 칠론처럼 번쇄하거나 형식적인 논의가 많지 않으며 실제적인 문제에 따른 풍부한 문답으로 매우 흥미 있는 문헌이다.

위의 세 가지 논서는 경장이나 논장에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위치에 있지만 전통적으로 남방 상좌부에서 상당히 중요시하는 것이다. 미얀마의 상좌부 교단에서는 이 세 가지 논서를 모두 경장 중의 '소부(小部)'에 포함시키고 있다.

     • 청정도론(淸淨道論, 비숫디맛가/Visuddhimagga)---붓다고사(Buddhagosa, 불음/佛音)가 AD 440년 경 저술한 <청정도론>은 칠론 이래 전개돼 온 남방 상좌부의 모든 교리를 하나로 정리해 조직적으로 설한, 바로 이 부파를 대표하는 가장 체계적인 논서이다. 붓다고사보다 200~300년 앞선 인물인 우파팃사(Upatissa)는 <해탈도론(解脫道論, Vimuttimagga)>이라는 저술을 남겼는데, 붓다고사는 그것을 기초로 증보해 이 논을 지었다. <해탈도론>의 원문은 알려지지 않지만, 다만 다소 변화를 받은 텍스트의 역본이 한역 대장경 가운데 전하고 있다.

    <청정도론>은 모두 23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계(戒), 정(定), 혜(慧) 삼학의 순서에 따라 붓다 교법을 실천의 도(道)로서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즉 먼저 스스로 경계해 출가자로서의 생활을 올바르게 가다듬고(戒의 淸淨), 나아가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고요히 한곳에 집중하는 삼매 수련을 거듭함(定의 淸淨)에 따라 깨달음으로 향하는 깨끗하고 밝은 지혜를 획득한다(慧의 淸淨)고 하는 도(道)를 설하는 것이 이 논서의 요강이다. 그러면서 남방 상좌부 특유의 존재론이나 심리론, 인식론을 내포해 다채로운 아비달마적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또한 경 ‧ 율 ‧ 논 삼장에서 많이 인용한 것도 이 논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런데 <청정도론>이 대저이기도 하거니와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그 후 남방 상좌부에서는 이를 간명하게 정리한 강요서(綱要書)들이 나타났다.

     • 입아비달마론(入阿毘達磨論)---이는 89심(八十九心), 52심소(五十二心所), 물질적 존재 4대종(四大種) 및 24소조색(二十四所造色)에 대해 운문으로 해설한 것이다.

     • 색비색별론(色非色別論)---이는 초보적인 입문서로서 산문으로 써진 소론이고, 이의 작자는 붓다닷타(Buddhadatta)라고 한다.

     • 체요략론(諦要略論)---이는 운문만으로 이루어진 <입아비달마론>과 마찬가지로 색(色), 심(心), 심소(心所), 열반(涅槃)에 대해 개설했고, 담마팔라(Dhammapala)의 저작이다. 이 작자는 주석가로서 초기경전에 대한 주석서 등을 지은 유명한 담마팔라와는 동명이인으로 그보다는 후대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 섭아비달마의론(攝阿毘達磨義論)---이의 저자 아누룻다(Anuruddha)는 9세기 이후 인물로 추측된다. 이는 후세까지 오랫동안 이 부파의 아비달마 학습 교과서가 됐던 것으로 그 명성이 대단히 높다. 산문으로 서술하고 운문으로 정리하는 방법에 따라 89심(八十九心), 52심소(五十二心所), 마음이 작용하는 14과정, 28색(二十八色), 여러 가지 실천항목, 12연기(十二緣起), 24연(二十四緣) 등 남방 상좌부 아비달마의 주요학설 전반에 걸쳐 간결하고도 정연하게 해설하고 있다.  

      

      

*남방불교의 특징---북방불교가 대승불교인데 비해 남방불교는 테라와다, 즉 상좌부(上座部)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상좌부란 부처님이 입멸하신지 100년쯤 지나서부터 시작된 교단분열 당시, 개혁을 반대하고 부처님 법을 그대로 계승하기를 주장했던 장로들 부파를 말한다. 따라서 교학사상이나 수행전통 및 계율준수 등에 있어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부처님 원음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고집하며, 초기경전인 <빠알리어 삼장>을 근거로 하고 있다.

    따라서 남방불교는 초기불교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하겠다. 남방불교에서는 아직도 엄격한 계율과 수행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① 빠알리어 경ㆍ율ㆍ론 삼장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어서, <반야경>, <화엄경>, <법화경> 등 대승경전은 남방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아서 없다.

     ② 남발불교 대장경을 <경ㆍ율ㆍ론 삼장> 혹은 <빠알리어 삼장>이라 하고, 그 중 경전부분을 <니까야(Nikaya)>라 한다.

     ③ 신앙대상은 고타마 붓다(석가모니)만이다. 따라서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불과 같은 석가모니 외 부처는 남방불교에는 없다.

     ④ 남방불교에는 보살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관새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 등이 없다. 따라서 중생이 수행정진해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위가 보살이 아니라 아라한(阿羅漢)이다.

     ⑤ 계율을 엄수하는 초기불교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출가자 중심의 교단조직을 형성하고 있다. 지계가 엄격한 비구는 사회적으로 큰 존경을 받고 있으며, 특히 태국에서는 남자는 일생에 한 번은 출가수행승이 돼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⑥ 위빠사나(vipassanā, 觀), 사마타(Samatha, 止), 사마디(Samadhi, 定) 등 부처님 당시 수행체계가 발달돼 있다.

     ⑦ 비구니 교단은 11세기경에 그 맥이 끊긴 채로 단절됐으므로 여승은 없다.

     ⑧ 북방 대승불교에서는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라 칭하며 폄하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초기불교 형태를 계승하고 있으며, 세계불교 본부도 스리랑카에 있다.---→패엽경(貝葉經), 제4차 불전결집 참조.

     

*남비니원(藍毘尼園)---룸비니동산을 말함.---→룸비니(Lumbini, 藍毘尼/람비니) 동산 참조.

       

*남산종(南山宗)---중국 당나라시대에 번성한 불교 율종(律宗)의 한파. 율종은 불교에

서 율장(律藏)을 근본 종지(宗旨)로 하고 있는 종파를 말한다. 중국에서 시작됐고, <사

분율(四分律)>에 의거하기 때문에 사분율종이라고도 한다.

    계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상부율종(相部律宗)ㆍ동탑종(東塔宗)ㆍ남산종(南山宗)으로

분립했다. 상부율종은 <사분율소>의 저자 법려(法礪)가 개조이고, 동탑종은 <사분율개

종기>의 저자 회소(懷素)가 시조이다. 이 양파는 서로 상쟁하는 일이 많았고 모두 오래

가지 못하고 쇠태했다. 남산종은 도선(道宣)이 개조인데 오랫동안 교세가 번성했다. 사

분율은 불멸 후 100년에 담무덕(曇無德)이 중국에 전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백제시대의 겸익(謙益)이 인도에 가서 율을 연구하고 돌아왔으나 개

종한 일은 없었고, 신라의 자장율사(慈裝律師)가 당나라에 가서 남산종을 배우고 돌아와

서 통도사에서 금강계단을 세우고 계를 설해 개조가 됐다.

       

*남섬부주(南贍浮洲)---구역(舊譯-당나라 현장법사 이전에 행해진 번역을 뜻함)으로는 남염부주(南閻浮洲) 혹은 남염부제(南閻浮提)라 했다. 불교 우주관 내지 세계관에서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땅을 말한다. 불교 세계관에 따르면 수미산 주변 바다 네 곳에 큰 섬이 있는데, 그 가운데 남쪽에 있는 섬을 남섬부주라 하고, 이곳에 우리 인간이 산다고 알려져 있다. 염부(閻浮)라는 수목이 많이 자라는 곳이라서 염부주라고도 한다. 염부는 산스크리트어 jambu의 음사. 인도에 널리 분포돼 있는 낙엽 교목을 말한다. 4~5월경에 옅은 노란색의 작은 꽃이 피고, 짙은 자줏빛의 열매를 맺는다. 염부는 인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이므로 남섬부주는 불교 발상지인 인도를 상징하는 말로 추정된다.---→염부제(閻浮提), 사대주(四大洲) 참조.

    

*남순동자(南巡童子)---<화엄경> 입법계품(立法界品)에 나오는 말이다. 선재동자(善財童子)는 진리를 찾아 남쪽으로 여행했으므로 남순동자(南巡童子)라고도 한다.

    또한 남순동자는 불도를 이룰만한 근기를 지닌 어린 보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불가에서는 해탈을 궁극적인 완성으로 보지만, 그 깨달음을 향하는 과정 또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께서 아직 출가해 정각을 이루기 전, 인생의 근원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반가사유상을 또 하나의 보살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흔히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전각을 원통전, 관음전이라 하는데, 남순동자는 여기서 관세음보살을 왼쪽에서 모시는 보처존(補處尊)으로서 용왕과 함께 관음보살을 협시한다.--→선재동자(善財童子) 참조.

 

 

*남악 형산(南岳衡山, 1300.2m)---양자강 이남의 최고 명산인 호남성 남악 형산은 드넓은 호남평야 한 가운데 있다. 중국 5대 명산(五嶽)의 하나로 예부터 종교의 성지로 이름이 높다. 남악 형산은 조사선의 우뚝한 봉우리인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 선사와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1) 선사가 법을 펴신 곳이고 마조(馬祖道一, 709∼788) 스님께서 깨치신 곳이다. 그리하여 회양 스님께서 마조와 석두 두 스님과 법거량을 나누셨던 곳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은 6조 혜능(慧能) 대사가 주석했던 광동성 조계와 함께 중국 선불교 남종(南宗)의 양대 성지로 불린다.

   강서(江西)의 으뜸은 마조, 호남(湖南)의 으뜸은 석두라는 말에서 강호(江湖)라는 말의 유래가 됐다고 하듯이 선종사(禪宗史)의 흐름으로는 남악에서 발원한 가느다란 물줄기가 둘로 나뉘어 산을 내려와 드디어 도도한 대하가 돼 중원을 흠뻑 적셨고 급기야 한국, 일본까지 덮게 됐던 것이다.

   회양 스님께서 계셨던 남죽조 시대에 창건된 복엄사(구 반야사)와 묘탑(墓塔), 그리고 마조 스님께서 오도하셨던 마경대(磨鏡台)는 척발봉(擲鉢峰: 복엄사 창건주인 천태종의 남악 혜사 선사가 황제의 부름을 받고 떠날 때 이 봉우리에 올라 자신이 쓰던 발우를 내던진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는 산봉우리 아래 산록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진 남종선의 돈오 선사상이 마조 문하에 백장 회해(百丈悔海), 남전 보원(南泉普願), 대주 혜해(大珠慧海) 들이 연이어 배출되면서 오늘날 우리나라 법맥에 생생히 흐르고 있다.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당나라시대 선승이며, 남종선(南宗禪)의 거봉으로서 선종 제7조로 일컬어지고 있다. 육조 혜능 대사의 사법(嗣法) 제자 10인 가운데 가장 먼저 거론되는 중요한 인물이며, 그의 제자에 유명한 마조 도일(馬祖道一) 선사가 나왔다.

   남악회양 선사는 일평생을 거의 이름 없는 수행자로 살았으나 선종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최대 업적은 선불교의 심요(心要)인 ‘돈오(頓悟:本自成佛)와 평상심(平常心)’을 마조에게 전한 것이라 하겠다. 돈오를 가능케 하는 원천은 일상생활 속의 늘 변함없는 평상심이란 것이다.

   남악회양 스님은 열다섯의 나이로 율종(律宗) 사찰에서 출가해 약관 스무 살에 계를 받았다. 한동안 계율 수행에 몰두했으나 늘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던 스님은 숭산에 계시던 혜안(慧安) 선사의 권유로 광동성 조계 남화사의 육조 스님을 찾아뵙는다.

      육조: 어디서 왔는가?

      회양: 숭산에서 왔습니다.

      육조: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습마물 임마래/什磨物恁磨來)요?

   여기서 ‘습마물(什磨物)’은 ‘무엇’이란 뜻이고, ‘임마(恁磨)’는 ‘어떻게, 어찌해서’란 뜻이다. 그래서 ‘습마물 임마래’란 ‘뭣 하러, 어떻게 이렇게 왔는가?’라는 말이다. 이는 “너는 대체 무엇인가? 또는 나는 대체 무엇인가?”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선불교에 있어서 ‘이 무엇’이란 문제는 오늘날 화두로 유명한 ‘이 뭣고’와 같은 말로서, 따지고 보면 우리 불교 전부를 들어서 얘기하는 말이나 같다. 불교란 대체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네가 찾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물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회양 스님은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게 된다. 도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이것이 도대체 어떤 물건인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다면 무엇이고, 없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웃고 슬프고 눈물 나는 이것은 도대체 뭔가? 있다고 하자니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하자니 분명하고 또랑또랑하게 보고 듣고 느끼는 이것은 또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다가 8년만에야 홀연히 깨치게 된다. 그렇게 본다면 회양 스님은 다년간 계율을 연구할 정도로 무척 성실한 성품이셨으나 빼어난 천재가 아닌 평범한 범부(凡夫)였던 같다.

   역대 조사와 하물며 육조 스님의 의발을 뺏으러 쫓아왔던 혜명 스님까지도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않을 때 어떤 것이 수좌의 본래면목인가?’ 라는 육조 스님의 한 말씀 아래 바로 근본을 깨칠 정도로 대개 언하대오(言下大悟) 하셨건만 스님께서는 어리석은 범부처럼 오랫동안 참구한 끝에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리고 ‘무엇이 어떻게 왔는고?’ 하는 말이 곧 선(禪)의 화두(話頭)에서 ‘이 뭣고’ 하는 말의 연원이기도 하다. ‘그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하는 말에는 나(我) 자체가 천지우주와 같이 연기법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무엇인가?’ 하는 말 가운데 일체존재가 다 들어가 있다.

   이런 선문답 끝에 남악 선사는 6조 혜능 선사를 시봉하면서 부단히 수령을 거친 뒤 혜능 선사의 법맥을 이었다.---→마전성경(磨磚成鏡) 참조.  

       

*남양 혜충(南陽 慧忠, ?~775)---당나라 때 선승으로 속성은 염(冉)씨이다. 어려서 육조 혜능(惠能) 선사를 따라 배우고 그의 법을 이었다. 육조가 입멸한 후에 여러 산에 두루 머물렀는데, 남양(南陽)의 백애산(白崖山)에 들어가 40년을 산문 밖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761년 숙종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칙을 내려 서울로 불러 스승의 예로 맞이했다. 황제 숙종, 대종(代宗) 등의 두터운 귀의를 받았으나 항상 담박한 본성 그대로 천진 자연을 즐겼다.

    혜충은 행사(行思), 회양(懷讓), 신회(神會), 현각(玄覺) 등과 함께 혜능 문하의 5대 종장(宗匠)으로서 선풍을 날렸다. 그의 선풍은 심신일여(身心一如), 즉심즉불(卽心卽佛)을 종지로 하고 또 무정설법(無情說法)을 처음으로 주창했다. 더욱이 남방의 선객들이 경전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배척했는데, 삼장(三藏)을 연구하고 교학을 중시하며, 항상 스승의 설법에 의거해 말했다. 775에 입적하자 조정에서 대증국사(大證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무정설법(無情說法), 즉심시불(卽心是佛), 국사삼환(國師三喚) 참조.

     

*남염부주(南閻浮州)---구역(舊譯-당나라 현장법사 이전에 행해진 번역을 뜻함)에서는 남염부주(南閻浮州) 혹은 남염부제(南閻浮提)라 했다.---→남섬부주(南贍浮洲) 참조.

      

*남전대장경(南傳大藏經)---스리랑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전해진 불교를 남전불교라 하며, 스리랑카의 마하 위하라(大寺派, Mahavihara)에서는 BC 1세기 중반에 제4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졌다. 즉, 알루위하라(Alu Vihara) 석굴사원에서 500명의 학승들이 참여해 7년에 걸쳐 네 차례의 결집을 단행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 스리랑카에 전해오던 상좌부계통의 모든 교의를 총망라한 경(經) ‧ 율(律) ‧ 론(論) <빠알리어 삼장(三藏), Tipiṭaka>을 완성했다.

    그리고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빠알리어 삼장> 일체를 종려나무 잎을 말려 거기에 문자로 기록했다. 이로써 불교사상 처음으로 <대장경>이 조성됐다. 종려나무 잎에 적은 빠알리어 대장경을 패엽경(貝葉經)이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초기경전인 <경ㆍ율ㆍ론 빠알리어 삼장(빠알리어 대장경)>이 훼손 없이 패엽경(貝葉經)이라는 형식으로 고스란히 스리랑카에 전승되고 있다. 이것이 남전대장경이다. 그 남전대장경 속의 경장을 빠알리어로 <니까야(Nikaya)>라 한다.

    이 남전대장경이 남방불교의 소의경전이며, 19세기 초 서양인들에 의해 연구가 시작됐다. 그리하여 1882년에는 영국에서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가 중심이 돼 런던에 설립된 <Pali Text Society>에서 영역본을 출판했다.---→남방불교(南方佛敎), 니까야(Nikaya)와 북방아함경(阿含經)의 관계, 팔리어삼장, 패엽경(貝葉經) 참조.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당나라시대의 선승.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 130여 명 중 백장(白丈), 서당(西堂)과 함께 유명한 삼대사(三大士)의 한 사람으로 무심선(無心禪)의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30여 년 간 지주(池州) 남전산에서 내려오지 않고 밭을 갈며 은둔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자연 속에서 세상시비와 사상추구마저 잊어버리는 무심선(無心禪)을 터득해 훗날 선승들에게 고존숙(古尊宿)이라 불리며 존경받았다. 그가 남긴 화두 중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 ; 남전이 고양이의 목을 베다)가 유명하다. 835년 87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제자로 무자(無字)화두로 유명한 조주 종심(趙州從諗)을 두었다.

         ※무심선(無心禪)---무심선은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과 달리 일체의 망념을 여읜 진심(眞心)인 무심무념(無心無念)을 궁극의 경계로 삼는 선법임.

         ※고존숙(古尊宿)---선문(禪門)의 위대한 선승에 대한 존칭.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중국 당나라시대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절에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으로 나누어진 선방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고양이 한 마리가 절에 와서 동당에 가서 슬그머니 앉기도 하고, 서당에 가서 슬그머니 앉기도 했다.

    이때 각 당의 수행승들은 그 고양이가 서로 자기네 당(堂)의 고양이라고 우기다가 마침내 선방이 시끄러워졌다. 이때 남전 스님이 나타나서 고양이를 집어 들고 말했다.

    “너희들이 뭔가 눈 밝은 말 한마디를 하면 죽이지 않겠지만 눈 밝은 말을 못한다면 이 고양이를 베어버리겠다.”라고 했다.

    좌중은 이에 이말 저말 한 마디씩 했지만 모두 남전의 기대에 어긋났다. 그래서 남전은 그 자리에서 고양이를 베어 죽였다. 헌데 저녁에 조주(趙州從諗, 778~897)스님이 외출에서 돌아와서 스승인 남전 스님에게 귀가인사를 드리자, 남전이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조주에게 물었다.

    “자, 그대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그러자 조주는 아무 말 않고 짚신 한 짝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가버렸다. 이를 본 남전은, “그대가 있었더라면 그 고양이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했다.

    참선하다 말고 고양이 한 마리를 가지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싸우는 한심한 대중을 보고 남전은 고양이를 집어 들고 한마디 밝은 말을 이르라 했다. 이르면 살려주지만 그렇지 못하면 베어버리겠다고 했다. 고양이를 살려야하는 위급한 순간이 닥친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 이르라는 말은 동과 서로 갈라져, 혹은 좌와 우로 갈라져 다투는 너희들 한계를 넘어선 말 한마디, 아니면 우주의 본질에 대해, 진실에 대해, 마음에 대해, 도(道)에 대해, 또는 내가 고양이를 들고 있는 뜻에 대해, 어떤 것도 좋으니 밝은 말 한마디 이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도 흡족한 말을 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다들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동과 서, 좌와 우로 갈라진 이념의 울타리에 갇혀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꿎게 고양이만 두 동강나고 말았다.

    “이 고양이 하나도 구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찌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고 - 좌우로 갈라져 - 싸운단 말인가, 한심한 놈들아!”라는 엄중한 꾸지람이었다.

    큰 도에 발심한 사람들은 시비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한 시비의 근본을 없앨 줄 알아야 한다. 별스럽지도 않은 고양이 한 마리에 온 절 스님들이 법석을 떨다가 애꿎은 고양이만 목이 달아났다.

    그래서 훗날 설두(雪竇) 선사가 송(頌)을 했다.「양쪽 승당의 납자들은 모두 엉터리 중/ 먼지만 일으킬 뿐 어쩔 줄 모르는구나/ 다행히도 남전 화상이 법으로 심판해/ 단칼에 두 동강이를 내 시비를 가렸네(兩堂俱是杜禪和 撥動煙塵不奈何. 賴得南泉能擧令 一刀兩段任偏頗)」

    그러나 외출에서 돌아온 조주는 짚신 한 짝을 머리에 이고 돌아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조주두재초혜((趙州頭戴草鞋)’라는 또 하나의 화두이다. 이것을 보고 남전은 네가 있었다면 고양이를 죽이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조주의 선기(禪氣)를 인정했다.

    고양이를 집어든 뜻을 짚신 한 짝을 머리에 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으니 이 뜻이 대체 무엇일까? 이 ‘남전참묘아(南泉斬猫兒)’라는 화두는 조금의 티끌도 묻어있지 않는 맑은 것이라, 공연히 여기에다 이러니저러니 답을 하거나 사족을 달면 점점 더 진흙탕으로 빠져 들어갈 뿐이고, 정답과는 거리가 멀어 진다. 화두는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비유로도 대신 설명할 수 없다. 특히 이 화두는 직접 화두를 들고 체험해야 알 수 있다. - 그래도 종잡을 수 없다면, 알음알이로는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이 게 선문답의 진수이니까. 더 알려면 수행을 거쳐 깨치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굳이 사족을 단다면, 조주 스님이 짚신을 머리에 인 것은, 아래에 있어야 할 짚신이 위로 올라갔으니 아래위를 나누는 기준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것은 좌와 우로 나누는 기준도 무너뜨린 것을 말한다. 어쭙잖은 것으로 동서로 나뉘어 다툰 것을 힐책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좌우 이념의 벽을 허물 줄 몰라 끊임없이 일으키는 갈등의 원인도 여기에 있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설두 중현(雪竇 重顯 : 980~1052) 선사---송 대의 선승으로 금나라의 외침을 받아 북송과 남송으로 갈라지던 격동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23세에 출가한 후, 운문종(雲門宗)의 3대조(三代祖)인 지문 광조(智門 光祚) 문하서 수행했으며, 아름답고 간결한 시어를 많이 남겼다.

           

*남종선(南宗禪)---중국 당나라시대 선종 제5조 홍인(弘忍, 601~674)에게는 걸출한 두 제자가 있었다. 신수(神秀)와 혜능(慧能)이다. 그리고 신수 계통을 북종선(北宗禪), 혜능 계통을 남종선이라 한다. 북종선이 양자강 북방에서 <능가경(楞伽經)>을 근거로 단계적 깨달음[점오(漸悟)]을 주장한 데 비해, 남종선은 주로 남쪽 지방에서 <금강경(金剛經)>을 근거로 행동적이고 즉각적인 깨달음[돈오(頓悟)]을 주장했다. 이를 가리켜 ‘남돈북점(南頓北漸)’이라고 하나, 후대에는 남종선이 특히 발전해 선종이라 하면 으레 남종선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선종의 기본 종지(宗旨)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할 수 있는데, 혜능에게 있어 견성성불은 인간의 본성을 대상화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부터 깨달음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며, 이것을 알고 난 다음 불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을 아는 것이 그대로 불타라는 것이다. 즉, 성불은 불타가 되는 것보다 불타로 이루어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성불은 점오가 아니라 자성(自性)이 곧 진불(眞佛)임을 깨우치는 돈오이다. 이러한 사상의 줄기는 후에 임제종(臨濟宗) ․ 위앙종(仰宗) ․ 조동종(曹洞宗) ․ 운문종(雲門宗) ․ 법안종(法眼宗) 등의 5가(五家)를 형성했으며, 한국에서는 신라 때에 임제종 계통이 유입돼 9산선문(九山禪門)을 이루었고, 그 후 한국불교의 중요한 줄기가 됐다.

    

*남진제 북송담(南眞際 北松潭)---우리나라 선가에서 대표적 선승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 당나라 때 “남설봉 북조주(南雪峰北趙州)”에 빗대어, “남진제 북송담(南眞際 北松潭)”이라고 하는데, 송담은 현재 인천 용화선원 선원장이다. 그리고 남 ‘진제’는 대구 동화사의 조계종 기본선원의 조실(祖室)을 맡아 끊임없이 수행자들을 지도해. 영남지역 법맥(法脈)을 잇는 대표적인 선승으로 꼽히다가 2012년 조계종 종정에 취임한 분이다.

       

*남화사(南華寺)---육조 혜능(慧能) 선가 주지로 있었고, 가장 오래 머문 절이다. 현재 중국 광조우(廣州)에 있는 남화사(혹은 남화선사)는 원래 보림사(寶林寺)였고, 당대에는 흥천사(興泉寺)라고도 했다가 송나라 때부터 남화사라 불리고 있다.

    혜능 선사는 당나라시대인 677년에 이 절 주지가 돼 이후 30여 년간 이곳에서 법을 펴 남화선사는 실질적인 육조 도량인 셈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명의 황금기인 당ㆍ송 시대의 사상적 지주였던 선불교의 사실상 진원지였고, 동아시아 선불교 중심지였다.

선종조정(禪宗祖庭)으로 제일 유명해 ‘영남제일 선사(禪寺)’라는 칭호가 붙은 남화선사는 한 ‧ 중 ‧ 일의 선승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이곳에 혜능 선사의 진신불(육신상)이 모셔져 있다.

         

*남화진경(南華眞經)---<남화경〉이라고도 하며, 중국의 장주(莊周, BC 365~290)가 지은 <장자(莊子)>의 다른 이름이다. 당나라 현종(玄宗)은 장주에게 남화진인(南華眞人)이라는 호를 추증했으므로 그의 저서 <장자>를 높이어 부른 이름이다. 내편(內篇, 7편), 외편(外篇, 15), 잡편(雜篇, 11편)으로 이루어졌으나, 이 중에서 내편 7편만이 장주의 저서가 확실하고, 나머지는 의문시 되고 있다.

    장자는 노자(老子)의 사상을 계승해 노자와 함께 도교의 대표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강조했고, 인간 지식의 판단력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는 또 죽음을 찬미했고, 무사태평ㆍ무용의용(無用之用)ㆍ무위(無爲)ㆍ무욕(無慾) 등을 주장했으며, 인간 현실의 허구성을 신랄히 풍자했다. 이러한 도교사상이 중국불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납의(納衣, 衲衣)---승복을 일컫는 말. 세속 사람들이 버린 옷을 기운 옷, 혹은 못 쓰는 헝겊이나 버려진 헝겊으로 누더기처럼 기워서 만들어진 옷이라는 뜻이다. 스님이 자신을 '납자(納子)'라고 낮춰 부르는 것도 납의에서 나왔다. 그런데 똥을 닦는 헝겊과 같으므로 분소의(糞掃衣)라고도 했다.

    헝겊조각을 기워 가사를 만드는 것은 버려진 유정물의 재활용을 통해 생명을 보호하는 대자대비의 극치에서 나온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옷을 깁는 일은 만유의 연기론적인 연관을 실제 관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같은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음식물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발우공양은 생명공동체인 신성한 대지를 자연 그대로 보호하는 깊은 통찰 위에서 나온 환경 윤리적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납자(衲子)---납승(衲僧)이라고도 함. 납의(衲衣)를 입은 승려라는 뜻이다.「납(衲)」은 누더기 옷이란 말인데, 도를 닦는 이는 어디까지나 검박하게 입어야 한다. 본래 가사(袈裟)는 쓰레기에서 주어서 깨끗이 빨아 가지고 누덕누덕 기워서 만드는 것이므로, 분소의(糞掃衣) 또는 백납(百衲)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이를 납자라고 하는 것이다.

 

 

*내사대(內四大)와 외사대(外四大)---물질은 사대(四大) 즉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 져 있으며,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을 말한다. 우리 몸으로서의 색은 내사대(內四大), 외부 대상의 색은 외사대(外四大)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지ㆍ수ㆍ화ㆍ풍 사대는 땅, 물, 불, 바람의 요소로서 이를 외사대라 말한다. 그리고 내사대는 우리 몸에 해당하는 것으로 아래와 같다.

    우리 몸에서는 ‘지(地)’에 해당하는 것은 피부, 뼈, 머리카락, 손발톱 등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딱딱한 구성요소들을 말한다.

    ‘수(水)’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 몸의 피, 오줌, 침 등을 말한다.

    ‘화(火)’의 요소에 해당하는 화대(火大)는 뜨거운 열의 기운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몸의 체온을 말한다.

    ‘풍(風)’의 요소인 풍대(風大)는 움직이는 성질의 것으로 우리 몸에서는 호흡, 혈액의 움직임, 가스 등을 말하며, 우리 몸이 움직이는 것은 모두 바람의 요소가 작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지ㆍ수ㆍ화ㆍ풍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우리의 육신을 색온(色蘊)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 몸[색온]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 네 가지를 내사대(內四大)라 한다. 즉, 우리 육신을 구성하는 사대는 내사대(內四大)이다.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이라고 하는 외사대(外四大)와의 인연을 빌려서, 업과 인연을 빌려서, 하나의 생명력으로 결합이 돼서 몸을 형성하고 있는 이 사대(四大)를 내사대(內四大)라고 한다.

 

 

*내상(內相)---불교에서 말하는 내상(內相)은, 일반에서 말하는 ‘내무부장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 내상은 바람직하지 않은 안의 모습이란 말이다.

    “탐애가 많은 이는 쾌락에 집착해 대개 밖에 있는 결사(結使)의 행에 속박되고, 소견이 많은 이는 대개 신견(身見) 등의 행(行)에 집착해 안으로 결사에 속박을 당한다.”

    여기서 결사(結使)란 몸과 마음이 번뇌에 결박당해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된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신견(身見)이란 오견(五見)의 하나로 나와 나의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를 말한다. 따라서 내상(內相)은 안으로 결사에 속박된 상태를 말한다.---→팔배사(八背捨) 참조.

 

 

             

*내세관(佛敎의 來世觀)---불교에서 내세(來世)는 삼세(三世)의 하나로서 윤회설(輪回說)과 더불어 불교의 내세관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윤회(輪廻)는 불교의 생사관이면서 내세관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내세 혹은 윤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피하셨다.

    부처님이 코살라국(Kosala, 사위국)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적에 마라구마라(Māluṅkyaputta, 摩羅鳩摩羅) 존자는 홀로 번뇌에 빠졌다. 이 세계는 영원한지, 영혼은 몸과 같은지,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이러한 의문을 부처님에게 묻자, 부처님께서는 유명한 ‘독화살에 박힌 사람’ 비유로 답하셨다.

    “마라구마라여, 나는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네가 제기한 문제는 인간의 의식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방식으로도 논증할 수 없으므로 참된 의미를 갖지 못한 것이며, 또 수행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내세관이나 윤회설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피하셨다. 그리하여 부처님 자신은 최후까지 법신앙(法信仰)으로 일관해 입멸 때에도 「내가 설한 법과 율(律, vinaya)이야말로 내가 없는 후세의 스승이다.」라고 유언하셨다. 신행의 방향을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는 나름의 내세관과 윤회설이 생겨났다. 그것은 불멸 이후 100여 년경부터 시작된 부파불교시대 소위 아비달마불교에서 싹텄고, 특히 불교가 중국을 거치면서 더욱 확장되고 첨가돼 화려한 내세관과 윤회설이 정립됐다.

    그리고 불교에서 영혼을 내세로 옮겨가는 주체로서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중유(中有=中陰)라 하고, 유식론(唯識論)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했다. 여기에서의 중유(중음)란 이승과 저승의 중간 위치에 있는 존재란 뜻이다. 인간 일회의 삶은 생유 ‧ 본유 ‧ 사유 ‧ 중유라는 4유로 이루어져 있다고 봤다.

    곧 모태에 의탁해 태어나는 순간을 생유(生有)라 하고, 출생 후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생전의 존재를 본유(本有)라 하며, 죽는 순간을 사유(死有),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존재를 중유(中有)라는 것이다. 따라서 죽은 즉시 다음 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에서 얼마 동안[49일간] 중유의 존재로 머문 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고 봤다.

    그런데 중유(中有)기간에 대해서는 다소 이설이 있었다. 칠칠일(七七日)이라는 설과 칠일(七日)이라는 설이 있었으며, 특별히 정해지지 않았다고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사십구일을 기해 49재[천도재(薦度齋)]를 행하는 칠칠일설이 일반화돼 있다.

    대부분 사람은 중유기(中有期)에 다음 생의 모습이 결정된다고 본다. 따라서 중유단계는 생전의 업을 심판받는 기간인 동시에 타력으로 망자의 구제를 도모할 수 있는 기간으로 수용됐다. 이에 따라 유족이 망자를 위해 행하는 지극한 공덕으로 부처님 가피를 받아 망자의 내세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49일간의 중유기간 동안 망자를 보다 좋은 곳으로 보낼 수 있도록 기원하는 사십구재[천도재]가 불교 상례(喪禮)의 의미로 자리한 것은 이러한 관념에 기반을 둔 것이다.

    신라 경덕왕 때 승려 월명사(月明師)는 향가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어 죽은 누이의 명복을 빌었다. 불교에서는 생시에 불도를 열심히 닦고 선업을 많이 쌓은 이는 죽어서 서방정토 즉 극락(極樂)세계에 가고, 불도를 수행하지도 않고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은 짐승으로 윤회전생(輪廻轉生)하거나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그러한 염원 때문에 신라 문무왕 때 <원왕생가(願往生歌)>라는 왕생설화(往生說話)에는 광덕(廣德)이라는 이의 높은 덕과 신앙심을 통해 친구인 엄장(嚴莊)까지 감화시켜 서방정토인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불교 내세관은 업(業)사상과 윤회설(輪廻說)에 기초해 성립했다. 윤회의 주체는 업(業) 또는 아뢰야식(阿賴耶識) 안에 함장 돼 있는 선악의 종자이지만, 그 윤회하는 객관적인 세계는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 삼계(三界)이다. 그리고 그 주관적인 세계는 천상(天上),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 등 육도(六道)인데, 이를 일컬어 삼계육도의 윤회전생이라고 한다. 그리고 천상으로 가느냐 지옥으로 가느냐 하는 것은 중생들이 지은 업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본다. 그러니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라는 말이나,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다는 자작자수(自作自受)란 말을 되새겨서 신(身) ‧ 구(口) ‧ 의(意) 삼업(三業) 등 각종 죄업을 짓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이 내재돼 있다.

    그리고 현세의 삶은 모두 전생에서 지은 업보 때문에 생긴 것이고, 현세의 삶은 또한 다음에 다시 태어날 생의 모습을 결정한다. 현세의 업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6가지 윤회의 삶이 되풀이된다. 인간은 현세에서 계속적으로 업을 짓는 한 고통스런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며, 오직 해탈(解脫)을 통해서만이 이러한 고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불교 내세관이나 삼계(三界) 속에 나오는 천상(天上)과 같은 환상적 세계나 극락과 같은 초월적 세계를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의견을 가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초기경전에 나오는 초월적인 현상이나 윤회,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같은 의견을 가진 저명한 일본인 불교학자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의 <삼계(三界)와 출세간(出世間)>이라는 글을 소개하고 있다.

   “불교의 통속설에 의하면, 세계에 관한 설명으로 삼계(三界)와 출세간(出世間) 이야기가 있다. 삼계는 선악업에 의한 생사윤회 세계이고, 출세간은 윤회를 초탈한 열반계라고 돼 있다.…

   그리고 이 삼계와 출세간에 관한 설명은 일단 붓다 자신에 의해 말해진 것이라 하더라도, 부파불교에서와 같이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 삼계를 생물이 생존하는 구체적 세계로 상세하게 서술한 것은 붓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초기불교를 공부한다는 사람 중에는, 아직도 불교세계관이 이 우주를 설명하는 유일한 잣대인 것으로 잘못 알거나, 그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는 이 우주에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요컨대, 이것은 초기불교에서 관념적으로, 기껏해야 비유적 혹은 신화적으로 선정(禪定)에 의해 도달되는 세계를 설명한 것을 부파불교가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에 불합리하기 그지없게 된 것이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고, 오늘날 내세(來世)란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허황된 이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은 넌센스다. 불교의 가장 강한 특징이 부처님이 “와서 보라!”고 하신 말씀처럼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교의인데, 부파불교시대에 비과학적인 허황된 이론들이 너무 많이 편입돼 불교철학을 우습게 만들어 놓았다. 다만 불교 우주관이라는 측면에서 종합적인 얼개를 구성함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부분으로 상정됐을 뿐이다. 따라서 교훈적으로 이해하는 범위에 한정해야지 이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용해서 천도재 같은 상업적인 것으로 흐르면 곤란하다.

        

 

*내신(內身), 외신(外身), 내외신(內外身)---내신(內身)은 육근(六根)을 말하고, 외신(外身)은 육근의 대상인 육경(六境)을 말하며, 내외신(內外身)은 육근과 육경에 의해 드러나는 육식(六識)을 말한다.

    수행자는 뒤바뀐 것을 타파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땅히 4념처관(念處觀/4념지관)을 익혀서 몸에는 갖가지 모든 괴로움과 근심이 많다는 것을 관해야만 한다.

    인연 따라 생기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갖가지로 괴롭기 때문에 고(苦)이며, 몸에는 36가지 물건이 있기 때문에 부정(不淨)하며,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니, 이와 같이 관함을 익혀서 내신(內身)을 관하고 외신(外身)을 관하며, 나아가 내외신(內外身)을 관한다. 이와 같은 관법을 익히면, 이것을 일러 신념지(身念止)라고 한다.

     몸의 실상(實相)이 이와 같은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 뒤바뀐 견해를 일으켜 이 몸을 애착하는가? 몸 주변의 즐거움과 고통을 자세히 사유하고 생각하라. 즐거움과 고통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 몸에 집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즐거움과 고통은 진실로 얻을 수 없는 것임을 관해야만 한다.

 

    

*내원궁(內院宮)---불교 설화에 의하면, 수미산 꼭대기 하늘 위에 도솔천이라는 천상세계가 있고, 여기에 내원궁ㆍ외원궁이 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내원궁에 있으면서 석가모니불의 교화를 받지 못한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있으며, 장차 인간 세상에 출세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내인외연(內因外緣)의 법칙---인연과(因緣果)의 법칙을 설명하는 말에 내인외연(內因外緣)의 법칙이 있다.

    <능가경>에서 밝히기를 일체법은 인연소생이라 했으니, 우주 안의 일체 만물은 인(因)과 연(緣)이 화합한 후 비로소 그 과(果)가 나타나는 것인데, 다만 연(緣)은 어디까지나 간접적 중간 역할만 한다.

    다시 말하면, 한 인(因)이 과(果)를 이루려 할 때 그에 해당한 연력(緣力)이 아니면 절대로 과(果)는 이루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연력(緣力)이 들어서 그 인(因)을 변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함을, 종자와 토지와 결실과의 관계를 가지고 비유한다면, 종자는 결실의 인(因)이요, 결실은 종자의 과(果)이니 토지는 종자로 하여금 결실케 하는 중개(緣) 밖에 못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결실(果)의 입장에서 본다면 연(緣)은 결실 외에 있고, 인(因)은 결실 내에 있으니 이를 일러 내인외연(內因外緣)의 법칙이라 한다.

    가령, 이곳에 감[柿] 종자를 심는다면 토지 ․ 햇볕 ․ 수분 ․ 공기 등의 연(緣)이 그 감나무 종자의 성숙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부연할 필요도 없지만, 연력(緣力)이 감 종자를 배나 능금으로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인과 연의 한계가 분명한 것인데, 만일 인과 연의 소재 및 역할을 혼동 ․ 착각한다면, 언제나 진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는 동시에 폐해 또한 심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화(禍;不幸)와 복(福;幸福)을 중시해서 누구나 행복을 희구하고 불행은 염오하지만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은, 화복의 연유, 곧 내인외연(內因外緣)의 법칙을 알지 못하는 소치라 하겠다.

    우리 일체의 화복이 각자 내부에서 기인함을 망각하고, 자기 이외의 부처라든가, 신이라든가, 조상이라든가, 관상 내지는 풍수라고 하는 외부에서 내려주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자인(自因)을 닦고 키우는 사람을 보기 드문 것이다.

    도대체 세상만사가 못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사람 마음이 못마땅하게 생겨먹어서 그런 것이지 세상만사가 못마땅한 것이 아니다. 그 중에는 못마땅한 것도 더러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게 더 많다. 흔히 불평분자란 말이 있듯이 유별나게 불평이 많은 사람이 있다. 그럴 경우 인식주(認識主-자기)의 주관(內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21세기, 문명의 혜택을 받은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사주(四柱)나 관상(觀相)이나 수상(手相) 등을 보고서 좋다고 하면 기뻐하고, 나쁘다고 하면 실망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 혹은 하려는 사람들이 선조의 백골을 파서 짊어지고 명당을 찾아다니는 이도 없지 않으니, 이런 사람들일수록 먼저 내인외연(內因外緣)의 법칙을 각득(覺得)해야 할 것이다.

 

      

*내재불사상(內在佛思想)---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말로서, 본래불(本來佛)사상, 불성(佛性)사상, 여래장(如來藏)사상,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등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 즉 진여연기(眞如緣起)의 교의를 근간으로 하는 대승불교 중기 이후(AD 3세기 이후)에 나타난 사상이다. 여래장사상에서는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여래(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했으며, 이 가능성을 여래장이라고 했다. 여래장은 본질적으로 불성(佛性) 또는 진여(眞如)와 동일한 개념이다. 이 여래장(如來藏)사상과 불성(佛性)사상이 유식학에 채택함으로써 힘을 얻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끝까지 법신앙(法信仰)으로 일관하셨다. 따라서 입멸하실 때에도 “내가 설한 법과 율(律, vinaya)이야말로 내가 없는 후세의 스승이다.”라고 유언하셨다. 그러나 신도들은 항상 석가모니라는 인격(佛)을 통해 법을 듣고 수용했었는데, 그 인격체가 사라지자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미래불사상이다. 미륵(彌勒)보살이 먼 미래에 화생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뒤를 보충해 부처님이 돼 사람들을 구제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미륵(Maitreya)보살로 대표되는 미래불사상이 다시 내세불사상으로 발전했다. 현대에도 내세의 다른 국토에 가면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신앙으로서, 대표적인 내세불로는 동방묘희국(東方妙喜國)의 아촉불과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내새타토불사상(來世他土佛思想)이 시방변만불사상(十方遍滿佛思想)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현재 이 세계에도 불(佛)이 시방 어디에나 가득 존재한다는 신앙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화엄경>의 교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Virocana)이다. 시방변만불사상이 철저하게 되면 내재불사상(內在佛思想)이 된다. 즉 불이 바로 지금 우리들 가운데 존재한다는 신앙이다. 이것은 <열반경> 등 제2기(AD 4세기) 대승경전에서 볼 수 있는 사상으로서, 여래장'(如來藏)이라던가 불성'(佛性)이란 말이 그것을 나타낸다.』- 田村 芳朗. ---→여래장(如來藏) 참조.

       

*내전(內典)---경(經) ‧ 율(律) ‧ 논(論)과 어록(語錄) 등 불교경전을 말한다. 이에 비해, 불교 밖의 다른 전적을 외전(外典)이라 한다. 출가인은 내전을 익히고 나서 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외전을 공부한다. 출가인이 외전을 먼저 익히면, 그것은 마치 칼로 흙을 베는 것과 같다. 칼로 진흙을 베면 칼만 상한다. 출가한 사람은 일단 내전을 익히는 데에 열중하고, 내전이 어느 정도 익어서 자기 것이 됐을 때, 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외전을 공부하는 것, 이게 제대로 된 순서다.

        

*냉난자지(冷暖自知)---물이 그릇에 가득 담겨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직접 만져 봐야 알 수 있다. 즉 깨달음의 세계는 자신이 직접 체험해 봐야 안다는 뜻이다. 불법(佛法)은 남에게 배워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해야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네 가지 무량한 마음가짐(四無量心 appamaññā)을 말한다.---→자비희사(慈悲喜捨) 참조.

   

     

*네 가지 대답---불교에서는 제자들의 물음과 그 대답도 설법 방식의 하나이다. 부처님께서는 물음에 대해 네 가지 형식의 대답으로 답변하셨다.

     ①정답(定答) ― 보통의 대답이다. 상대가 ‘이런가?’ 하고 묻는 말에 대해 ‘그렇다’ 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형식을 일향기(一向記)라고도 하는 것으로 단정적 대답이다. 예를 들면, ‘태어난 것은 모두 죽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반드시 죽는다.’라고 단정해서 대답하는 것이다.

     ②분별답(分別答) ― 구분해서 좀 더 자세하게 대답하는 것이다. 상대자가 한 말에 대해 ‘이 부분은 좋지만 이 부분은 나쁘다.’ 또는 ‘여기는 옳지만 저기는 틀린다.’고 좋고 나쁨을 나누어 말해주는 것이다. 이를 분별기(分別記)라고도 한다. 즉, 조건에 따른 대답이다. 예를 들면, ‘죽은 자는 모두 윤회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번뇌 있는 자는 윤회하고, 없는 자는 재생하지 않는다.’ 라고 조건에 따라 구분해서 답하는 것이다.

     ③반문답(反問答) ― 일단 되물어보는 것이다. 힌트를 주어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형식이다. 반문기(反問記)로서 되물어서 대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월등한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무엇과 비교해서인가?’라고 다시 묻고, ‘하늘과 비교해서’라고 질문자가 말한다면 ‘열등하다’ 하고, ‘짐승보다’라고 한다면 ‘월등하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④치답(置答) ― 전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다. 대답을 않으면 상대가 반성을 하게 된다. 어디가 잘못됐을까 하고 생각을 고치게 된다. 그러니까 상대에게 자극을 주는 것이다. 사치기(捨置記)라고도 한다. 논의 자체가 무익한 경우, 대답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만동자(蔓童子-말룽까뿌따)가 부처님께 질문한 허황된 형이상학의 질문 14가지에 대해 부처님이 무기(無記)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가지 답변 형식을 가르침에 규칙으로 삼으셨다. 덮어 놓고 자상하게 하는 것만이 자비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꾸짖는 것도 자비이다. 경우에 따라 물리치는 것도 자비이다.

             

*네 가지 마음---아비달마에서는 우리의 마음상태를 크게 네 가지 마음으로 분류한다.

     ① 욕계의 마음(kāmāvacara-citta) - 선정 즉 근본 집중(appanā-samādhi)의 경지에 들지 않은 나머지 모든 심리상태를 뜻한다.

     ② 색계의 마음(rūpāvacara-citta) - 초선부터 제4선까지의 근본 집중에 든 심리상태를 뜻한다.

     ③ 무색계의 마음(arūpāvacara-citta) - 네 가지의 무색계 선에 든 심리상태를 뜻한다. 네 가지의 무색계 선은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④ 출세간의 마음(lokuttara-citta) - 세상을 넘어서는 과정으로 구성된 마음이다. 즉, 열반에 든 심리상태를 뜻한다. 출세간의 마음에는 네 단계의 깨달음인 수다원,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있는데 이 각각의 단계는 다시 도의 마음(magga-citta)과 과의 마음(phala-citta)이라는 두 가지 유형의 마음으로 나누어져서 모두 8가지가 있게 된다.

    욕계에 있는 사람이 집중을 계발해서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의 색계 선에 들면, 그것이 색계 선의 마음(rūpavacara-jhāna-citta)이고, 같은 방법으로 집중을 계발해서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무색계 선의 마음이 됨을 뜻한다.- 실론섬 주해모음

    

*네 가지 집착(取, upādāna)---갈애를 조건으로 집착[取]이 일어난다. 팔리어 ‘우파다나(upādana)’는 ‘강렬한, 극심한’이란 뜻의 ‘upa’와 ‘움켜쥐다, 잡다’라는 뜻을 가진 ‘ādāna’의 합성어이므로, ‘꽉 움켜쥠’ 즉 극심한, 지나친 갈애를 뜻한다. 네 가지 집착은 다음과 같다.

     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慾取, kāmā-upādāna) -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kāma-taṇhā)에서 비롯된 집착을 말한다. 감각대상들은 감각적 쾌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든 중생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이러한 감각대상들은 색(色, 형상), 성(聲, 소리), 향(香, 냄새), 미(味, 맛), 촉(觸, 감촉)의 다섯 가지이다.

    예컨대, 형상[色]은 눈에 즐겁고 매력적인 대상이다. 그것은 원래 아름다움을 지닌 것 일 수도 있고 보는 사람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실재하거나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건 간에 즐거운 형상은 남자, 여자, 소비상품 등에서 쉽게 발견된다. 남자를 매혹시키는 것은 여자의 모습이고, 여자를 매혹시키시는 것은 남자의 모습이다. 남자와 여자 모두 원하는 것은 옷, 보석, 자동차 등이다.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단지 형상이나 색깔만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외모만이 아니라 몸 전체로 서로를 끌어당기며, 사람을 탐욕스럽게 하는 소비상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감각적 쾌락의 또 다른 원천은 몸의 감촉이다. 부드럽고 푹신한 침대, 편안한 옷, 겨울에 따뜻한 것과 여름에 시원한 것, 이성(異性)의 몸, 이 모든 들이 감촉에 대한 갈애만이 아니라 생명체나 무생명체의 몸 전체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는 감촉 대상이다. 감촉은 몸 전체에 대한 집착에 이르게 한다.

     ② 사견에 대한 집착(見取, diṭṭhi-upādāna) - 업과 그 과보는 없으며 내생, 정등각자, 아라한이 없다는 견해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예컨대, 사견은 보시란 좋은 업을 짓는 행위가 아니고 단지 돈만 날리는 것이라는 견해 같은 것이다. 이 견해는 선행의 가치와 과보를 부정한다.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보시행은 보시자를 기쁘게 하고 보시 받는 자를 물질과 정신으로 이롭게 하고 심지어는 굶주린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보시자는 평판이 좋고 큰 존경을 받는다. 그리고 죽어서는 천신계에 태어난다. 이러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견은 대체로 갈애에 뿌리를 두고 있고 물질에 대한 인류의 증대하는 갈망과 함께, 업에 대한 회의주의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이들 사견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불교인의 사명이다.

     ③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upādāna) – 팔정도(八正道)와 아무 상관없는 의식과 의례를 행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예컨대, 종교적인 의례 의식, 천도재(薦度齋)와 같은 의식을 행하거나 고행과 같은 수행으로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④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我語取, atta-vāda-upādāna) – 영혼, 자아, 살아있는 실체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집착을 말한다. 이는 유신견(有身見)과 같은 것을 말한다. 유신견은 중생들이 몸과 마음이 자아(自我)이며, 혹은 자아의 소속이라고 잘못 아는 견해를 말한다. 몸과 마음은 모두 인연 소생법으로 갖가지 조건들이 모여서 나타나는 일시적 현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중생의 무지로 인해 ‘나’ 혹은 ‘나의 것’이라 오인하는 것이다. 해탈과 깨달음은 이 같은 견해가 잘못됐음을 알고 벗어나는 것이다. - 실론섬 주해모음

    

*네 가지 통찰(빠알리어 paṭivedha)---네 가지 통찰은 다음과 같다.

     ① 두루 아는 지혜에 의한 통찰(pariññā-paṭivedha) ― 고제(苦諦)에 대한 완전하고, 바른 이해를 뜻한다.

     ② 버림에 의한 통찰(pahāna-paṭivedha) ― 집제(集諦)는 버려야 한다는 통찰을 뜻한다.

     ③ 체험에 의한 통찰(sacchikiriya-paṭivedha) ― 멸제(滅諦)를 실현함을 뜻한다.

     ④ 수행에 의한 통찰(bhāvanā-paṭivedha) ― 도제(道諦)를 수행을 통해 계발함을 뜻한다. 

     

 

*네란자라강(Nerañjarā, 尼連禪河)---갠지스강의 지류(支流), 벵갈 지방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흘러 부다가야(buddhagayā) 지방을 지나간다.

    싯다르타가 초인적인 고행을 털고, 몸을 씻기 위해 네란자라강에 들어갔을 때 물에 비친 그의 모습을 경전은 이렇게 전했다. 가비라성을 떠난 지 6~7년이 흘렀다. 처음엔 당시 유행하던 수정주의(修定主義)에 의탁했다. 선인으로 알려진 알라라 칼리마와 우다카 라마푸틴한테 가르침을 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교설에 그쳤다.

    그리하여 네란자라 강변의 우루베라 숲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통 고행주의자들의 수행터였다. 6년간 그가 행한 고행의 치열함은 악마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수행이었지만 그와 같은 극단의 수행으로는 궁극의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고행을 버리고 선정에 들기로 했다.

    오랜 고행으로 몸은 뼈 가죽만 남을 정도로 쇠약해진 싯다르타는 네란자라강에서 몸을 씻고 얼마 동안 마을 처녀 수자타로부터 우유와 꿀에 쌀을 넣고 끓인 유미죽을 받아먹었다. 오랜 고행과 금식을 해온 싯다르타가 갑자기 일반 음식을 드셨다면 반드시 탈이 나셨을 터, 수자타의 유미죽을 드시고 기운을 차린 싯다르타는 네란자라강변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 금강좌(金剛座) 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했다.

    이후 싯다르타는 평온한 가운데 선정에 들어가, 비로소 존재의 실상이자 어둠을 밝히는 진리로서 중도연기(中道緣起)를 깨닫는다. 즉, 선정에 드신 지 7일째 되는 새벽에 동쪽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는 순간, 석가세존께서는 심안이 확연히 열리면서 무상정등각, 즉 아라한과를 얻으셨다.

 

 

       

*념(念)---→염(念, 빠알리어 sati, 산스크리트어 smṛti) 참조.

    

*념념(念念)---→염념(念念) 참조.

    

*념념상속법(念念相續法)---염념상속법(念念相續法) 참조.

    

*념념심부절 념불불리심(念念心不絶 念佛不離心)---육도중생(六道衆生)이 겪는 삼재(三災) 팔난(八難)의 환난, 곧 근심ㆍ 두려움ㆍ모든 괴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항상 염(念)하고 실행하면 다 구제받는다고 하셨다. 생각과 생각마다 부처님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에서 어긋나지 않고 부처님을 본받겠다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마음이 떠나지 않도록 찰나찰나 마음을 일으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면,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의 땅, 곧 정토라는 것이다.

       

*노모불견불(老母不見佛)---<오등회원(五燈會元)>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이 사위성(舍衛城)을 방문하셨을 때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나왔으나 성 동쪽에 살고 있던 한 노파는 부처님을 보지 않으려고 문을 닫고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나 노파의 열 손가락 끝에서 부처님이 뚜렷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이 문을 닫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는 ‘노모불견불(老母不見佛)’ 이야기이다. 노파의 손가락 끝에 나타난 부처님은 누구라도 저마다 성품에 다 갖추어져 있는 자성불(自性佛)로서 참 부처님이다. 손가락 끝에서 부처님이 나타나는 까닭은 노파가 모든 집착을 벗어나 노파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경계가 참 부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참 부처가 아닌 형상으로 나타난 석가모니 몸에 집착하고 그가 한 말에 집착해 참 부처를 보고 찾으려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것을 알고 있으므로 노파는 석가모니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성품에 본디 갖추어져 있는 부처님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만 부처를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한 자비심의 표출이다. 중생들의 잘못된 소견들을 깨뜨리고 올바른 앎을 드러내려는 방편이다.

        ※오등회원(五燈會元)---남송시대에 대천 보제(大川普濟) 스님이 편찬한 선서이다.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등 송대에 발간된 다섯 가지 선종사서(禪宗史書)를 압축한 선종의 통사(通史)이다. 책명은 다섯 가지의 등사(燈史)를 회통(會通)해서 하나로 엮었다는 뜻이다.

  

*노사나불(盧舍那佛)---보신(報身)을 인격화해서 부를 때 노사나불이라 한다. 법신(法身)을 인으로 삼아 그 과보를 나타난 몸이므로 보신이라 하는 것이다. 이 보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여당체인 법신이 형태를 취해 나타난 몸이다.

    천태종에서는 삼신불(三身佛)로 법신불(法身佛) ‧ 보신불(報身佛) ‧ 화신불(응신불)을 말한다. 그리고 유식학파(唯識學派)에서는 자성신(自性身)ㆍ수용신(受用身)ㆍ변화신(變化身)의 3신을 말하는데, 이는 각각 법신ㆍ보신ㆍ화신(응신)에 대응되며 그 개념도 비슷하다. 그리고 법신불은 비로자나불, 보신불은 노사나불, 화신불은 석가모니불을 말한다.

    보신불(報身佛)은 인(因)에 따라 나타타는 불신(佛身), 과보와 수행의 결과로 나타나는 불신을 말하는데, 이를 수용신(受用身)이라 하며, 선근공덕의 과보를 수용하는 붓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수용신을 자수용신(自受用身)과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 분류한다.

    자수용신은 수행을 통해 얻어진 불과(佛果)와 내적 체험에 의해 스스로 증득한 자내증(自內證)의 법문을 스스로 수용하고 즐기는 불신이다.

    타수용신은 이 깨침의 보과(報果)와 뛰어난 법문을 다른 사람에게 수용시키기 위해 지도하고 교화하는 불신이다. 즉, 깨달음의 경지와 기쁨을 중생(衆生)들에게 설해 나누어주고, 그들에게 깨달음의 기쁨을 수용하게 하기 위해 나타내는 불신(佛身)을 말한다.

    타수용 불신으로 실제로 존중되고 신앙의 대상이 되는 부처님은 아미타불과 약사여래가 있으며, 이들 부처님은 특별한 권능과 함께 극락전, 약사전 등 독립전각에 봉안된다.

    이에 비해 자수용 보신불로 대표적인 부처가 노사나불인데, 자수용 보신불인 노사나불은 독립된 전각에 모시지 않고, 대적광전(大寂光殿)에서 비로자나불 왼편 협시불로 봉안된다.

    결국, 노사나불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수행하신 공덕으로 나타나신 보신 부처님으로 복(福)과 덕(德)이 가득하게 이 세상의 불쌍한 모든 사람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다. 그리고 천태종에서 말하는 보신불인 노사나불의 ‘노사나(盧舍那)’는 정만(淨滿), 즉 법성ㆍ불성이 충만해 있다는 말이다. 법신이 그냥 그대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법신의 체에 불성이 충만해 있는 것이다. 다만 화엄종에서는 노사나불을 본존불인 비로자나불과 같은 말로도 쓴다.---→자수용신(自受用身)과 타수용신(他受用身), 삼신불(三身佛) 참조.

 

 

*노사미거 마사도래(䮽事未去 馬事到來)---나귀의 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온다는 말이다. 조금 다르게 설명하면 거창하고 화려한 삶을 꿈꾸었지만 막상은 보잘 것 없는 하찮은 삶으로 인생을 다 허비하고 후회하게 된다는 말이다.

    다짐하면서 일을 시작했으나 초심과는 달리 잡다한 일들에 끌려 다니다가 시간을 다 허비해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경구이다.

    그런데 "노사미거 마사도래"라는 화두를 움켜잡고 용맹정진했던 사람이 구한말의 경허(鏡虛, 1849~1912) 선사였다. 9살에 출가해 23세의 젊은 나이에 동학사 학원의 강사로 경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그때 그의 강의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하니 그는 젊은 나이에 불교 이론가로 성장했던 것이다.

    그가 31살 때에 특별한 계기가 찾아온다. 문득 은사의 은혜를 생각하고 동학사에서 서울 청계사로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 날이 저물어 근처의 마을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고 가려고 동네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자신이 찾은 마을은 무섭도록 적막했고 대문을 두드려도 받아주는 집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 동네는 역병이 퍼져서 사람들이 죽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마을을 나와 동네 밖의 나무 아래서 밤을 지새우게 됐는데, 그날은 밤이 새도록 잠 못 들고 인간의 생과 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자신의 불교 이론이라는 것이 너무 미력했다. 생과 사의 문제로 거듭 고민하다가 서울행이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발길을 돌렸다.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해산시키고 강원을 철폐했으며, 그때부터 "노사미거 마사도래"라는 화두를 움켜잡고 용맹정진에 들어갔던 것이다.

    한국불교에 그로 인해 선풍이 새롭게 일어났으며, 많은 선사들과 선원들이 생겨났다. 오늘날 불교계의 선승(禪僧)들 중 대부분은 경허 선사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았다고 한다. 일반적인 삶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삶에서도 인내와 고통은 반드시 요구된다. 초심을 잃고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아야 하겠다.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중국 서진(西晋)시대 도사(道士) 왕부(王浮)가 지었다고 하는 위경(僞經)이다. 왕부가 일찍이 승려 백원(帛遠)과 불도(佛道)에 대해 논쟁을 벌여 여러 차례 굴복 당했는데 이에 원한을 품고 거짓으로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만들었다고 한다. 내용은 노자가 일찍이 인도에 들어가 석가불(釋迦佛)이 돼 호인(胡人)을 교화했다면서 불법(佛法)을 비방하고, 도교의 교조(敎祖)가 불교의 교조인 석가보다 앞섰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중국에서 인도로 건너가서 인도인이 된 바로 노자(老子)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의 실마리가 이미 <후한서(後漢書)>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후한 무렵부터 이런 이야기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도불(道佛)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도교를 우위에 놓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노자화호경>은 시대가 지나면서 내용이 불어나 2권, 10권, 11권 본 등이 나오기도 했다.

 

 

 

*노지백우(露地白牛)---너른 땅의 흰 소란 말이다. 노지는 일체의 번뇌가 단절된 곳이고 백우는 한 점의 염오(染汚)도 없고 오로지 청정한 소로서 법신(法身)의 무구(無垢-때 묻지 않은 깨끗함)에 비유한 것이다.

     십우도(十牛圖-尋牛圖)에서 점점 검은 상태를 벗어난, 즉 중생심이 없어지고 깨끗한 부처의 마음만 드러나 방황과 갈등이 없어져 따로 매어놓을 줄도 필요 없고 내버려 두어도 주인공 옆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잘 길들여진 소를 말한다. 검은 소는 물든 중생심을 말하고, 흰 소는 본래 모습을 찾은 깨끗한 마음을 상징한다.

 

 

 

*노파심절(老婆心切)---노파처럼 마음 사용하는 것이 매우 자세하다는 말이다. 남을 위하여 걱정을 함이 절실하다는 말이다. 절실한 심정으로 제자를 지도하는 것을 말한다. 늙은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처럼 스승이 제자를 매우 아끼고 사랑한다는 말이다.

    

*노행자(盧行者)---중국 선종(禪宗)의 6조 혜능(慧能) 대사를 일컫는 말임. 그의 속성이 노(盧)씨라서 이런 말이 생겼다.그는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조경부(肇慶府) 신흥현(新興縣)에서 태어났으나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이 가난해 공부를 하지 못하고 날마다 나무를 해다 팔아서 어머니를 봉양했다. 24살 때에 장터에서 가서 나무를 팔고 돌아오다가 어떤 분이 <금강경(金剛經)>을 읽는 소리를 담 밖에서 듣고 마음에 깨친 바가 있어 황매산(黃梅山)으로 가서 오조(五組) 홍인(弘忍) 선사를 찾아뵙고 그가 시키는 대로 디딜방아 찧는 일에 종사했었다.

   그런 어느 날 오조 스님이 법을 전하려고 제자들의 공부를 시험함에, 당시 교수사(敎授師)였던 신수(神秀)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신시보제수 심여명경대 시시동불식 물사야진애(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動拂拭 勿使惹塵埃) - 몸은 보리의 나무, 마음은 밝은 거울, 부지런히 닦아서, 티끌이 묻지 않도록 하리라.」벽에 걸린 이 글을 보고 노행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그 옆에 붙였다.

  「보제본무수 명경역비대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요 거울 또한 대(臺)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티끌이 묻으랴.」

   오조 홍인 선사는 노행자의 글을 높이 평가해 그를 후계자로 인가하고 조사의 법통을 전하는 징표로 의발(衣鉢)을 전해 주었다. 그리하여 시기하는 사람들을 피해 남방으로 돌아가 18년 동안 숨어 지내다가 나타나 비로소 조계산(曹溪山)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일으켰다.---→혜능(慧能, 638~713) 참조.

             

*녹야원(鹿野苑, 미가다야, Migadāya)---바라나국(婆羅捺國)에 있었던 부처님이 첫 설법[초전법륜(初傳法輪)]을 행한 사승 동산. 불교의 4대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인도 바라나시(Varanasi-베나레스) 북방 약 7㎞에 위치한 사르나트(Sarnath) 유적이 곧 녹야원 터이다. 붓다가 보드가야(Bodhgaya)에서 정각을 이루신 삼칠일(三七日) 후에 이곳에 와서 5명의 수행자[五比丘]에게 사성제(四聖諦) 법을 비롯한 진리를 설해 이들의 귀의를 받았다. 사르나트는 과거 사슴이 많이 살고 있어서 사슴동산-녹야원(鹿野園)이라 불렀다고 한다. 아소카왕이 불교성지를 순례할 당시 이곳에 탑과 석주(石柱)를 세운 뒤, 뭇 신도의 숭앙을 받아왔으며, 8세기 초 현장(玄奘)이 순례할 당시만 해도 이곳엔 정사(精舍)가 있었다고 한다.

   

*녹자모(鹿子母, 위사카 미가라마따/Visākhā Migāramātā)---미가라마따(녹자모)는 미가라(Migāra)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위사카는 결혼 전에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이미 예류과를 얻은 여신도로서 세존께서 보시자 가운데서 으뜸이라고 칭송을 받은 여인이다. 바로 사왓티(사위성) 동쪽 원림[東園林]에 있는 미가라마따강당(녹자모강당/鹿子母講堂)은 위사카 미가라마따가 지어 부처님께 바친 것이다. 위사카는 각층에 500개의 방이 있는 중각(重閣)의 미가라마따강당(녹자모강당)을 지어 승가에 시주했는데, 부처님은 생애의 후반부에 20년간 사왓티 시에 머물 때에 하루를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보내면, 다음날은 이곳에서 보낼 정도로 많은 경들이 이곳을 무대로 하고 있다.

    위사카는 결혼 후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왓티(사위성)에서 시집살이를 하면서 종교문제로 시집과 갈등이 생겨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쫓아내려고 하자, 시아버지와 재판까지 하면서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내려면 지참금의 2배를 주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아내 시집식구를 꼼짝 못하게 한 여인이다.

    그러함에도 위사카는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부처님과 스님들을 초청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면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조건을 내걸고 시아버지를 설득하고 집안에 법석을 열어 부처님을 초청해서 법문을 듣게 됐다. 그때 휘장 뒤에서 이를 엿들은 남편(미가라)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재가불자로 귀의하도록 했다. 그래서 고마워하는 남편으로부터 미가라의 어머니(鹿子母)라는 칭호를 듣게 됐다고 한다.

    위사카는 현모양처였다. 시아버지나 남편이 사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경우에는 비록 목숨을 버릴지언정 절대로 굴하지 않고 여법(如法)하게 행동을 했다. 그리하여 가산을 잘 수호하고 안방마님으로서 제 몫을 다했다. 그녀는 베푸는 여자여서 인색함의 때가 없는 마음으로 살고, 아낌없이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반드시 부응하고, 나누어 가지는 것을 좋아했다.

   녹자모강당은 기원정사 옆에 있다고 해서 동원정사(東園精舍)로도 불린 절이다. 공사감독은 목갈라나가 했으며 부처님은 이곳에서 6차례나 여름안거를 보냈다.---→위사카(Visākha) 참조.

               

 

*논(論, 산스크리트어 abhidharma)---대법(對法)을 말하며, dharma는 법, abhi는 -에 대해라는 뜻. 곧, 불타가 말한 교법에 대한 연구와 해석이 논이다. 오랫동안에 걸쳐 많은 논(論)이 만들어지고 후일 이를 정비한 것이 논장(論藏)이 됐다. 경(經)ㆍ율(律)은 붓다 재세 중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나 논은 붓다 입멸 후 제자들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논의 작제(作製)는 부파불교시대의 특징으로서 각 부파는 불교 교법에 대한 주석은 물론이고, 거기에서 도출된 설법의 해석에 의거해 자파(自派)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수립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때문에 그 내용이 각 부파에 따라서 상이한 특징을 나타냈다.

    아소카왕 이후 불교 사원이 많이 지어지기 전에는 승려들이 정주하지 않고 주로 유행을 했으므로 게송은 쓸 수 있었지만 논문을 쓸 수 있는 조건은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파불교시대에 접어들어 한 곳에 정주하게 되고, 절이 많이 세워지고, 자기 방이 생겨 머무르게 되면서부터 승려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조건이 이루어져 게송이 아닌 논문 같은 긴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논서로 대표적인 것은 남전불교와 북전불교 공히 칠론(七論)이 있다. 그 외에 유명한 논서로는, 소승 논서로 분류되는 대표적인 저술로는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 <발지론(發智論)>, <대비바사론(對毘婆沙論)>, <구사론(俱舍論)>, <청정도론(淸淨道論)> 등이 있으며, 대승 논서로는 <중론(中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ㆍ<섭대승론(攝大乘論)>ㆍ<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ㆍ<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이 유명하다.

   

*논모(論母, 마띠까/mātikā, 마트리카/mātṛkā)---이는 논모(論母), 지모(智母), 본모(本母), 행모(行母)라고 번역된다. 논의 처음에 두는 목차와 같은 것으로 법의 요목이나 법수적인 것을 함께 모은 것이다. 논장의 법과 의미를 형성하고 증장하는 토대가 된다. 아비담마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용어 중에 하나가 바로 율모와 논모이다.

   율모(律母)는 율의 계조문이나 조목을 위한 요목(배경, 사람, 사건, 제정 방법, 명령 부분, 죄, 무죄, 파계, 죄의 생성 이유 등), 세부 요목의 논구를 말한다.

   논모(論母)는 경의 논모와 아비달마의 논모가 있다. 논모는 사람, 경전, 수, 의미상, 문장 형식상으로 구분한다. 빠알리 7론의 논모로서 법(dhamma)은 주로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성제, 22근으로 구성된다. - 각묵 스님

   즉, 논문 처음에 두는 목차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책 목차처럼 단순히 제목만 쓴 것이 아니라, 논모를 ‘개요’라고 번역하듯이 경과 율의 주요주제(내용)를 표제어만 뽑아서 외우기 쉽고, 전체를 파악하기 쉽게 간략히 축약한 것이다. 즉, 불설에 의해 제시된 어떤 논제에 대해 그 논점이나 주제를 기억하기 쉬운 방식으로 정리해 둔 것을 모은 목록이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5~6줄 전후 정도로 축약해 놓아서 논모만 봐도 그 경(經)ㆍ율(律)이나 논(論)의 내용을 대충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아비달마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용어 중에 하나로서, 논모 혹은 논의(論議, upadeśa)라 하기도 하며, 더러 논장(論藏)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논사(論事, Kathāvatthu)---현재 남방 상좌부에 전하는 빠알리어 논장(論藏; Abhidhamma-piṭaka)에는 7론(七論)이 유명한데, 그 가운데 하나가 <논사(論事)>이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논장으로,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 치하에서 단행된 제3차 불전결집에서 목갈리풋타 티사(Moggaliputta-tissa) 장로가 천여 명의 학승들 도움을 받아 조성했다고 한다. 아비담마 칠론 중에서 부처님이 설하지 않으신 것으로 전승되어온 책이다.

    당시 외도(外道)들이 승가의 물질적 풍요를 탐해 승가에 들어와 자신들의 교설을 퍼뜨리는가 하면, 여러 부파의 이설이 난무해 승가의 계율과 수행이 문란해 있었다. 이에 목갈리풋타 티사 장로가 다른 부파의 견해를 논파하고 상좌부의 교설을 명확히 하기 위해 아소카왕의 지원을 받아 쓴 책으로 부파불교를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단정하지 않는” ‘분별설(分別說, vibhajja-vāda)’을 지지하는 사람은 불교도이며, 이에 반하는 비구는 불교도가 아니라고 판단해 승단에서 추방했다고 한다. 분별설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논사(論事)>이다. 원래 붓다의 교단은 일찍이 분별설(分別說)의 교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분별설이란 아주 상세히 분석해 가르치는 방법을 의미한다.

    이 <논사(Kathāvatthu)>는 상좌부의 정통설을 세워 다른 부파의 이설(異說)을 깨뜨린다고 하는 목적을 가진 내용으로 시종 문답형식으로 일관되며 주석서를 보지 않고서는 문답의 주객이 누구며, 이론(異論)을 주장하는 자가 어떤 부파 소속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논(論)ㆍ소(疏)---경(經)이란 부처님 가르침을 정리한 것이고, ‘논(論)’이란 부처님이 설하신바 경전을 해석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알기 쉽게 묻는 자(問者)와 답하는 자(答者)를 세워 묻고 답해 정리(正理)를 밝힌 것이 논이다. 그러니 ‘논(論)’이란 경을 풀이한 것으로 부처님 제자나 보살, 혹은 높은 경지의 학승, 선지식이 지은 것이다. 예컨대, 마명(馬鳴)ㆍ용수(龍樹)ㆍ무착(無着)ㆍ세친(世親) 같은 대학승이 쓴 경전 해설서에 붙이는 이름으로서 거의 경전에 버금가는 무게를 지녔다. 그리고 논을 모은 것을 논장(論藏)이라 한다.

    소(疏)는 논에 대한 주석서이다. 소(疏)는 경이나 논을 더 자세히 풀이한 것으로서, 경전 분량이 적을 때는 낱말 하나하나를 풀어 설명해 놓기도 했다. 소(疏)는 보통 사람이 쓴 것을 말하지만, 이도 역시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야 쓸 수 있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와 같은 제목을 지니며, 중국의 학승이나 원효 대사 같은 분이 쓴 것을 소(疏)라고 했다.

         ※종요(宗要) : 경전의 내용을 간추려서 알기 쉽게 설명한 글. 

        

 

*논장(論藏, 빠알리어 Abhidhamma-piṭaka, 산스크리트어 Abhidharma Piaka)---아비달마(阿毘達磨)라 음역한다. 3장(藏)인 경(經) ․ 율(律) ․ 논(論) 중 ‘논’을 모은 것으로 부처님 가르침인 경(經)과 율(律)에 관해 주석 ․ 연구한 문헌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즉, 시대와 지역에 따라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고 쉽게 전하기 위해 부처님 말씀을 요약하거나 주석을 단 것 중에서 특히 선지식의 글을 논장이라 하고, 부처님 법과 같이 높이 취급했다. 논장은 <구사론>, <발지론>, <대비바사론>, <청정도론>, <성유식론>, <대승기신론>과 같이 제목만 봐도 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논장에는 설일체유부 7론과 남방상좌부 7론이 유명하다. 

      

 

*뇌고(牢固)---뇌고란 아주 튼튼하고 굳다, 단단하고 견고하다, 깰 수 없이 튼튼하다는 말이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 설명된 오뇌고설(五牢固說)에 의하면,

      ① 해탈뇌고(解脫牢固) ―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이후의 오백년 동안을 해탈뇌고라 한다. 이 시기에는 지혜를 얻어서 깨달음을 열고 해탈하는 이가 많은 시대라 했다.

      ② 선정뇌고(禪定牢固) ― 해탈뇌고 다음 오백년을 말하는데, 수행해 도를 이루는 이가 적어도 선정(禪定)을 이루는 이가 많은 시대라 했다.

      ③ 다문뇌고(多聞牢固) ― 세 번째 오백년을 말하는데, 이 시기에는 지식이 많아 이론이 발달하고, 불법을 열심히 청문(聽聞)하는 이가 많으나 실제 수행이 쇠퇴한 시대라 했다.

      ④ 탑사뇌고(塔寺牢固) ― 네 번째 오백년을 말하는데, 이때는 절을 짓고 탑을 세우는 일이 성행하는 시대라고 했다.

      ⑤ 투쟁뇌고(鬪爭牢固) ― 다섯 번째 오백년으로서, 이때는 서로 자설(自說)만이 훌륭하고 타설(他說)은 못하다고 다툼이 일어나는 시대로, 이 시대를 후오백세라 한다. 그러나 이 후오백세의 말법시대(末法時代)에도 계를 지니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 부처님의 설법에 진실한 믿음을 낸다고 했다. 이런 상태로 불교가 전승돼가는 시기이다.---→말법시대(末法時代) 참조. 

 

 

 

*누란(樓蘭, Loulan)---누란은 현재 중국 령인 신장ㆍ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고대의 작은 도시국가였다. 중국 쪽 실크로드 시발지점인 둔황에서 서쪽으로 16일 정도를 더 걸어가면 천산북로와 천산남로가 나누어지는 타글라마칸 사막 초입에 있던 누란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누란은 공작하 하류의 로프노르(Lop Nor) 호수를 끼고 있어 대상들이 물과 식량, 필수품들을 보충할 수 있는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이로 인해 한나라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막대한 부와 문명을 축적하고 있었으며, 당나라 시대부터 수많은 문학작품들의 배경이 돼왔다.

    여기서 실크로드 남ㆍ북로와 이어져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역으로 가게 된다. 약 2천여 년 전에 형성된 도시국가로 BC 77년에 한나라의 영향 아래에서 선선국(鄯善國)으로 개칭했지만 그 후에도 누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현재 누란국은 사라지고 옛 성터의 유적만 남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그저 [신비의 왕국]정도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주로 서양의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됐으며, 막대한 양의 불상과 불화, 사원유적, 직물, 문서들이 발견됨으로써 누란은 전설속의 신비의 왕국에서 화려한 문명을 자랑하는 역사도시로 거듭났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굴들로 누란이 약 2~3만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풍족한 도시였고, 중앙의 불탑을 중심으로 한쪽면의 높이가 300미터가 넘는 누란성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또 도시 가운데는 로프노르 호수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까지 있었던 고대의 문명도시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우루무치 박물관에 잠들어 있는 유명한 [누란의 미녀]도 누란인들의 정체를 짐작하게 해 준다. 1979년에 발견된 이 4000년 전의 미이라는 금발머리와 붉은 피부, 큰 눈을 가진 아리안계 여인이었다.

그렇게 사막 한복판에서도 수세기의 번영을 누려왔던 누란국은 왜 멸망했을까, 이에 대한 연구의 결론은 대개 이렇다.

    오아시스의 부를 탐내는 한(漢)과 흉노의 끊임없는 공략과 북위(北魏)의 침공으로 멸망했다는 설도 있고, 타림분지의 모래 퇴적에 따른 로마노프 호수의 이동과 함께 운명을 달리 했다는 설도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쳤든지 후일(5세기 초) 법현(法顯)이 선선을 지날 때쯤 누란은 이미 황폐한 [죽음의 땅]이었고, 그 후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다.

    2003년 초, 중국 고고학계는 누란 근처에서 도굴범의 차량 바퀴 자국을 추적하다가 하나의 [능]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능의 고분 벽화에서는 군신(君臣)들이 앉아 있는 그림과 당시 제왕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금·은색 낙타 그림이 발견됐고, 고위층을 상징하는 화려한 채색 목관이 출토됐다. 즉 전세계 고고학자들이 100여 년 동안 찾아 헤매던 고대 누란(樓蘭)왕국 왕릉이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2개의 고분으로 이루어진 왕릉은 이미 도굴돼 벽화 등이 크게 훼손된 상태였으며, 파괴된 목관과 유골들, 찢겨진 비단 조각들이 바닥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누진통(漏盡通)---육신통(六神通)의 하나. 지극한 수행정진을 한 결과 얻게 되는 여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자재한 능력을 육신통이라 한다. 그 중 누진통은 다른 다섯에 비해 가장 얻기 힘든 신통이다. 누진통은 세계와 인생에 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로서, 다른 종교로서는 얻어질 수 없는 불교 특유의 초능력이다. 누진통은 번뇌를 모두 끊어, 모든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사람이 이에 통하면 극락에 이른 것과 같다고 한다. 바로 멸진정(滅盡定)을 말한다.

    다른 5신통은 외도(外道)나 특수한 경험을 한 사람들도 얻을 수 있지만, 누진통만은 부처 또는 아라한(阿羅漢) 이상의 경지에 오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붓다는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이 누진통을 얻어 부처가 되셨으며, 깨달음을 얻은 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누진통을 포함한 여섯 가지 신통력을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제자들이 이러한 신통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셨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불제자들이 이와 같은 신통을 함부로 나타내는 것을 계율로 정해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불교는 어디까지나 지혜의 종교이지 다른 종교처럼 기적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육신통 참조.

     

 

 

*‘눈 있는 자는 와서 보라’---부처님 가르침은,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자는 와서 보라’고 하는 가르침이고, - 현실적으로 증험(證驗)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넘기지 않고 과보(果報)가 있는 성질의 것이며, 열반(涅槃)에 잘 인도하는 성질의 것이다. 또한 지혜 있는 사람은 스스로 알 수 있는 성질을 가진 진리이다. 떳떳하고 당당한 가르침이다. 이와 같음이 정법이다.

 

 

*늑나마제(勒那摩提, Ratnamati)---보의(寶意)라고도 한다. 중인도 출신 승려로, 508년에 북위(北魏) 뤄양(洛陽)에 와서 세친(世親)의 <십지경론(十地經論)>과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등 총 6종 24권을 한역했다. 승랑(僧郞) 등과 함께 일명 <법화경론(法華經論)>이라고 하는 주석서인 묘법연화경론우파제사(妙法蓮華經論優波提舍)도 한역했다.

     그의 제자 혜광(慧光)은 상주의 남도에 머물면서 지론종(地論宗)을 선양함으로써 상주남도파(相州南道派)가 형성돼, 보리류지(菩提流支, Bodhiruci)를 따르던 도총(道寵)의 계보인 상주북도파(相州北道派)와 서로 대립했다.

 

 

*능가경(楞伽經, 산스크리트어 랑카바타라 수트라/Lankavatara-Sutra)---<능가경>은 능가성에 들어가 설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능가라는 말은 도달하기 어렵고(不可到), 들어가기 어렵다(難入)는 뜻이다. 이는 여래의 심오한 경지는 도달하기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말해 놓은 것이다.

    원제는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이고, <입능가경(入楞伽經)>이라고도 한다. 유식유가행파에 영향을 주었으며, 선(禪)의 철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그래서 참선하는 경이라 해서 <능가경>을 선경(禪經)이라고도 한다.

    <능가경>의 핵심 사상은 "잠재의식"과 "종자식"이다. 사람이 어떤 사상(事象)을 만났을 때, 언제 한번 본 것 같다고 느껴지는 것은, 과거세에 그러한 인연이 있었는데, 비록 자신의 영혼이 과거에 죽었어도, 마치 식물의 씨앗인 종자가 남아 이것이 자라듯이 모든 사람들에겐 과거세의 종자가 남아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을 종자식(種子識-아뢰야식)이라 한다. 이렇게 자신의 잠재의식과 종자식을 관(觀)해 유식 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 그리고 이것을 "선관법(禪觀法)"으로 수행해 체득하겠다는 것이 바로 "선종"의 좌선이다. 이 방법은 그야말로 오랜 세월을 거쳐 고도의 수행단계가 설정돼야 한다는 것이 능가경의 요지이다. 그리고 이것을 일러 점차 수행을 통해 깨닫는다고 해서 "점오"라 한다.

    이 〈능가경〉에 대해서 중요한 인식을 하게 된 것은 달마 대사가 처음 중국에 건너왔을 때 이 경을 ‘여래심지(如來心地)의 요문(要門)’이라 해서 이를 의지해 수행의 지침을 삼도록 했기 때문이다. 달마가 혜가에게 심인을 전해 줄 적에 이 4권 〈능가경〉을 전했다 하고, 중국에 오직 이 한 권의 경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한다. 또한 달마 대사가 중국에 와서 세운 초기 선종을 ‘능가종’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이 〈능가경〉이 선종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반증하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5조 홍인 대사에 이르러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능가경〉대신에 간명한 내용으로 돼있는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도록 권해 다시 〈금강경〉이 선수행의 큰 역할을 하게 됐다

    <능가경>의 중요한 교의의 하나는 장식(藏識-아뢰야식)의 설명이다. 4권 경의 첫 품인 ‘일체불어심품’에는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결국 마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서 일체 현상을 낳는 신비로운 마음을 장식이라 말하고 있다. 모든 사물과 현상의 근원이 되는 마음은 일체 정신작용을 저장하고 있는 창고와 같은 것으로 이것이 바로 장식이라 했다. 실제로 이 세상에는 오직 장식 밖에 없으며 나머지 모든 것은 장식이 나타내 놓은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 했다.

    장식이 모든 것을 낳는 것은 마치 큰 바다가 끊임없이 파도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고 하고, 사람들이 장식을 모르는 것은 파도만 보고 바다 전체를 알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 장식의 신비로운 이치를 깨닫기 위해 선을 닦아야 한다 하며, 선을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 관찰의선(觀察義禪), 반연진여선(攀緣眞如禪),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의 넷으로 구분 설명하고 선을 닦아야 여래의 심지를 얻는다고 했다.

    <능가경>은 <십지경(十地經)>, <해심밀경(解深密經)>과 더불어 대승불교 유심사상을 표방하

 

 

는 대표적인 경전이며,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과 함께 선종에서 매우 존중되고 있다. 4세

 

 

 

기경에 형성된 듯한데, 일부는 그 이전에 형성된 듯하다. 구성은 붓다가 나바나왕(羅婆那王)의 권

 

 

 

청(勸請)에 의해 랑카(楞伽:현재의 스리랑카)에 건너가 스리랑카 능가산(楞伽山)을 배경으로 불

 

 

 

제자 중 대표적인 질문자인 대혜(大慧, Mahāmati)의 물음에 대해 대승불교의 여러 교설을 설명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경전은 대승불교 중에서도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서 여래장사상(如

 

 

 

來藏思想)에 입각해 그 이전의 여러 학파의 설을 풍부하게 채택하고, 이들 학설이 종교경험과 어

 

 

 

떻게 맺어져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주요 내용으로는 오법(五法), 삼성(三性), 팔식(八識), 이무

 

 

 

아(二無我) 등 대승경전에 나오는 여러 사상들을 종합 융화하고 있다. 그리고 여래장과 아뢰야식

 

 

 

의 사상적 결합을 하고 있다. 여래장과 아뢰야식이 하나라는 말이다.

 

    “요컨대 미혹의 세계가 벌어지는 이유와 과정을 설명한 것이 유식사상이라면 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가능성과 그 근거를 설명한 것이 여래장사상이고, 바로 그것을 설한 경전이 <능가경>이다.”-계환 스님

    한역본으로는 유송(劉宋)시대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번역한 <능가아발타라보경(楞伽阿跋陀羅寶經)>과 북위(北魏) 보리유지(菩提流支)가 번역한 <입능가경(入楞伽經)>, 당나라시대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등 세 가지가 있고, 그 외에 티베트역이 현존하는데 그 중에서도 유송시대 구나발타라역본이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형태를 전하고 있다.---→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참조.

        

*<능가경> 사종선(四種禪)---<능가경>에 제시한 4종선을 말한다.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 관찰의선(觀察義禪), 반연여선(攀緣如禪), 여래선(如來禪) 등 네 가지이다.

     ①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 - 성문, 연각, 외도 등의 수행자들이 인무아(人無我)를 관찰함에 있어서 무상과 고의 부정에만 집착하는 것인데, 이는 관(觀)과 다르지 않으니 상(想)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범부(소승불교도 및 외도)들이 행하는 선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② 관찰의선(觀察義禪) - 의미를 관찰하는 선정으로서 공관의 선정, 법무아(法無我)를 관찰해 점차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③ 반연여선(攀緣如禪) - 진리에 안주해 망상을 낳지 않는 선정, 망상이 생하지 않는 진여에 입각한 선을 말한다.

     ④ 여래선(如來禪) -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서 자각성지상(自覺聖智相)의 3종 낙주(樂住)를 얻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삼매를 포괄하는 최고의 선정.

※자각성지상(自覺聖智相)이란 보살 마하살이 홀로 고요한 곳에서 스스로 깨닫고 관찰하며 다른 것으로 말미암지 않나니 망상을 떠나서 더더욱 위로 승진(昇進)해 여래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초기 선종 역사를 기록한 서적. 사자(師資)란 스승과 제자란 말이다.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초조 달마(達摩), 2조 혜가(慧可),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신수(神秀), 제8조 보적(普寂)에 이르는 선사 8대에 관한 전기이자, 이런 순서로 사자상승(師資相承) 된 것을 기록했다.

    1907년 돈황석굴(敦煌石窟)에서 돈황문서(敦煌文書)가 많이 나왔는데, <능가사자기>도 그 가운데서 나왔다. 달마 대사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 안심법문(安心法門), 또는 일행삼매(一行三昧) 등이 여기에 설해 있다.

    특히 4조 도신스님의 기록이 많다. 내용도 아주 소상하고 충실하다. 그리고 4조 도신 스님 때 비로소 500 대중, 600 대중을 한 군데 모아놓고서 집단적으로 공부를 했다. 3조 때까지는 이리 숨고 저리 숨고 그래서 참 소소한 분들이 같이 인연 따라서 모여서 공부했지만 4조 도신 스님 때부터서 비로소 대중적인 선원(禪院)이 됐다는 말이다. 그런 내용도 충실하고 또는 비로소 체계가 있게 다루어졌다.

    708년 당나라시대 신수(神秀)의 선법을 배운 정각(淨覺, 683~750) 스님이 기록한 것으로, 단순한 인물평전이 아니라 다양한 선사상을 담고 있어서 초기 선종사 연구에 긴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다만 6조 혜능(慧能) 대신 북종선의 신수(神秀)를 올린 점으로 봐서 북종선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이 발견됨으로써 이후 초기선종사(初期禪宗史) 뿐만 아니라 북종선에 대한 연구가 급속히 진전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이 책에서 선종이 본래 <능가경>의 심요를 바탕으로 수선하는 ‘능가종’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능가경>의 선지(禪旨)에 의지해 심인상전(心印相傳)한 초기 선종의 사자(師資) 전승의 계보를 밝히고, 그 분들의 전기와 함께 어록을 수록했다. 이와 같이 이들은 주로 <능가경>으로 해서 공부를 하다가, 5조 홍인 선사로부터 비로소 <금강경(金剛經)>이 들어왔음을 말해준다.

    달마가 2조 혜가에게 법을 전할 때 <능가경>을 함께 전했다. 따라서 <능가경>을 중시한 전통 탓에 달마 선학 계통을 능가사(楞伽師)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능가사자기>에서는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를 능가사의 시조로 존중했다.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유송(劉宋)시대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번역한 <능가경(楞伽經)>의 원명이다.---→능가경(楞伽經) 참조.

    

*능가종(楞伽宗)---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산스크리트어 Gunabhadra, 394~468)가 번역한 4권본 <능가경(楞伽經)>에 의거해 선법(禪法)을 펼친 달마(達摩) 대사와 2조 혜가(慧可) 계통을 총칭하는 말인데, 능가종(楞伽宗)이란 명칭은 그들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훗날 이 분야를 처음 연구한 호적(胡適, 1891~1962)이 붙인 것이다.

    

*능견(能見)과 소견(所見)---보는 작용을 능견, 보이는 것을 소견이라 한다. 따라서 눈을 능견(能見-보는 측)이라고 부르고 눈에 보인 것을 소견(所見-보이는 측)이라고 부른다. 능견과 소견은 연기 관계에 있다. 따라서 능견이 없으면 소견이 있을 수 없다. 능견인 눈이 없으면 지금 내 앞에 있는 책과 컵 등을 눈에 보인 것[所見]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말이다. 또 이렇게 눈도 없고, 눈에 보인 것도 없다면, 양자 관계인 ‘보는 작용’ 역시 존재할 수 없다.

      

*능견상(能見相)---능견이란 인식주체를 가리킨다. 능견상은 전상(轉相)에 상응한다. 상응하다는 말은 어울리다, 비슷하다는 말이니 능견상이 곧 전상이란 말인데, 무명(無明)에 의해 마음이 움직임으로써 일어나는 인식 주관이 능견상이다. 진여의 지혜는 본래 주객의 구분이 없지만, 무명에 미혹돼 진여의 지혜가 허망 분별이 돼 차별 경계를 보는 것이 전상이다. 무명업상에 의해 마음이 움직여 능견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능사(能捨)ㆍ능시(能施)---능사(能捨)란 무엇이든지 버릴 수 있는 마음이다. 돈이 있는 것이 좋지마는 없어도 낙심하지 않고 가난해지면 그때는 또 그 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거나 또는 지위가 높은 것이 좋지마는 낮아져도 낙심하지 않고 버릴 때가 되면 버려도 그만이라고 생각을 한다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좋지마는 맛없는 것을 먹어야 할 때에는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이른 바 능사이다.

    능시(能施)란 굳이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내 것으로 삼으려 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남에게 나누어 주자, 혼자만 행복하게 되면 미안하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능시이다.

    부언하면 처음에는 ①집착(執着)으로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②능사(能捨)로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③능시(能施)로 자기는 다소 불편하더라도 남은 행복하게 해주자고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이 과정은 불교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사의 모든 일도 마찬가지이다. 처음부터 대뜸 되는 것은 아니다. 집착ㆍ능사ㆍ능시의 순서로 차차 나아가는 것이 불교수행 곧 바른 삶이다. 

   

*능소(能所)---능소란 주관과 객관을 말한다. 동작의 주체가 되는 것을 능(能), 동작의 객체ㆍ목적ㆍ대상을 소(所)라 한다. 수행자는 능행(能行), 수행해야할 내용은 소행(所行). 사물을 능히 볼 수 있는 눈은 능견(能見)이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만물(대상)은 소견(所見)이다. 능소는 상대적인 것이므로, 이 같은 대립의 상태에서는 상대가 끊어진 절대의 경지인 열반을 체험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능소란 동작하는 주체와 객체(대상)을 말하는 것인데 공부에 있어서 이와 같은 대대(待對)가 있게 되면 절대인 참 도리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능소를 뛰어넘는 것이 공부의 중요한 마루턱이다.---→능견(能見)과 소견(所見), 능연(能緣)과 소연(所緣), 능전(能詮)과 소전(所詮) 참조.

 

 

*능소심(能所心)---주관과 객관을 분별하는 마음. 즉, 상대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육조 혜능(慧能) 대사가 말했다. “가르침에 의해 수행해서 마음에 능소(能所)가 없는 것이 곧 선법(善法)인 것이라. 수행인이 마음에 능소가 있으면 선법이라 할 수 없고, 능소심(能所心)이 멸하지 않으면 마침내 해탈치 못하니, 순간순간 항상 반야지혜를 행해야 그 복이 무량무변한 것이니라.”

 

   

*능엄경(楞嚴經)---원제는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印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이라는 긴 이름이지만, 줄여서 <수능엄경> 혹은 <능엄경>이라 약칭하고 있다. 경전의 긴 이름을 해석하면, “부처님의 이마처럼 높은 비밀의 가르침을 닦아 증득하기 위해 모든 보살들이 만행을 닦으면 마침내 다 이루어지는 으뜸가는 경”이라는 뜻이다. ‘능엄(楞嚴)’이라고 하는 말은 용맹스러운 행위, 또는 아주 건전한 행위, 건사한 분별, 건전한 분별력 이런 뜻이다. 이와 같이 아주 건전한 사상을 가진 사람의 분별력을 능엄(楞嚴)이라고 한다. 이 경은 밀교계통 경전이며, 부처님 말씀을 머릿속으로만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경험해 얻는 것을 주요사상으로 하고 있다.

    아난(阿難陀) 존자가 점심 공양을 받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등가(摩登伽)’라는 처녀에게 물 한잔을 얻어 마시게 되는데, 그녀는 아난 존자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마등가는 집에 돌아와 주술을 잘하는 어머니를 졸라서 결국 아난 존자로 하여금 집으로 오게 만들어버린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천안통(天眼通)으로 아난 존자가 마도(魔道)에 걸려서 위기에 처한 것을 아시고 ‘능엄주(楞嚴呪)’를 외워서 구출해 내었다. 그 후 아난은 마등가의 유혹에 홀린 것이 자신의 수행부족임을 알고, 부처님께 도를 닦는 방법을 여쭙게 됐는데, 그때 부처님과 아난 존자와의 문답이 <능엄경>의 주요내용이다.

    선정의 힘과 백산개다라니(白傘蓋陀羅尼)의 공덕력을 찬양하고, 이 다라니에 의해 모든 마귀장을 물리치고 선정에 전념해 여래의 진실한 경지를 얻어 생사고뇌에서 벗어나는 것이 최후 목적임을 밝혔다.

    이 경은 밀교사상이 가미돼 밀교적인 색채가 짙지만 선정(禪定)이 역설돼 있기 때문에 밀교 쪽보다는 선가에서 환영을 받아 중국에서 이 경의 주석은 모두 선문에 의해 이루어졌다.

<능엄경>은 인도의 나란다사(那爛陀寺)에 비장된 이후로 인도 안에서만 유통시키고 타국에는 유출하지 못하도록 왕명으로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 이전까지는 중국에 전래되지 못하다가 당(唐) 중종(中宗) 때인 705년 인도 스님 반랄밀제(般剌蜜帝)에 의해 전래되고 방융(房融)과 함께 한역됐다고 한다.

    <능엄경>은 천태, 화엄, 유식, 밀교, 선종, 정토 등 여러 불교사상을 수행의 입장에서 회통시킨 경전이지마는, 그 내용으로 봐서 중국에서 많이 가필돼 오히려 중국에서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AD 720년경 중국 선종에서 찬술한 위경(僞經)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내용이 붓다가 여러 경전에서 설한 것을 총정리한 것이기에 다른 경전에서보다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며 총체적인 수행서라 할 수 있다. 전체 10권으로 이루어졌는데, 제7권에서 능엄신주(楞嚴神呪)를 설명하고 있으며, 제8권에서는 보살의 수행단계로 57위(位)를 설하고, 제10권에서는 오음(五陰)의 근원을 설하고, 경을 마친 뒤 이 경의 공덕에 관해 부언하고 있다.

    이 경이 우리나라에 언제 전래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려대장경에 수록돼 있는 것으로 봐 이미 그 이전에 유입됐음이 분명하며, 우리나라 불교 신행(信行)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전문 강원에서는 <금강경>, <원각경>, <대승기신론>과 함께 4교과(四敎科) 과목으로 채택돼 있다.---→위경(僞經) 참조.

        ※ 백산개다라니(白傘蓋陀羅尼) - 백산개는 흰 비단으로 덮개를 만든 양산으로서 왕위를 상징하는데, 불지공덕(佛智功德)이 수승함을 전륜성왕에 비유한 것이다.

        ※ 마등가(摩登伽. Matanga)---바라문 여인.

        ※ 능엄경엔 밀교계통의 불공삼장(不空三藏, 불공금강, 705~774)이 도입해 한역하고, 조선 후기에 개운당조사(開雲堂祖師)가 주석을 단 <유가심인능엄경(瑜伽心印楞嚴經)>이라고 하는 책이 있다. 헌데 이 능엄경은 변질된 외도 경전이라는 비판이 있다.---→개운 조사(開雲祖師) 참조.

 

 

*능엄선(楞嚴禪)---능엄선은 <능엄경(楞嚴經)>을 바탕으로 공부하는 참선수행법이다. <능엄경>에서 설하는 25가지 수행방법인 이십오원통(二十五圓通) 중, 25번째 관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이 그 핵심 내용이다. ‘이근원통’이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6근 가운데 이근(耳根, 귀, 청각), 즉 귀로 듣는 소리를 자각하는 수행법이다. 소리를 들을 때 듣는 자 즉 무엇이 듣는지 그 자성(본성)을 깨닫는 이치로, 이것을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 또는 ‘반문문성(反聞聞性)’이라고 한다. 들은 것을 되돌려서(反聞) 자신의 자성, 자신의 본성이 듣게 해(聞自性) 자각함으로써 번뇌를 잊고 불성을 발현시키는 것이다.

    <능엄경>에서는 이근(耳根) 하나가 원통해지면 나머지 5근도 모두 원통해져서 해탈을 이루게 된다고 하는데, 이것이 원통(圓通)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안근(眼根)이나 비근(鼻根)이 아닌 이근이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눈은 담장 밖의 것을 보지 못하고, 입과 코도 마찬가지며, 몸은 접촉하는 대상과 합해야 앎이 생기고, 마음과 생각은 분잡해서 단서가 없지만, 이근은 담장에 막히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오직 이근만이 전체를 통하는 진실한 것이다. 이근이 탁 트여서 원통해지면 나머지 5근도 모두 원통해져서 각각 자성을 반조해 불성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근원통 수행은 바깥에서 나는 소리(外耳聲)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소리(內耳聲)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바깥의 소리란 바람소리, 물소리, 또는 타인이 염불, 독경하는 소리 등에 집중하는 것이다. 또 자신의 소리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즉 다라니나 나무아미타불 등 염불소리, 독경소리를 자신의 본성이 듣는 것이다. 즉, 자기 목소리를 자기가 들음으로써 ‘누가 이 소리를 내고 누가 이 소리를 듣는가?’, ‘듣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자각을 통해 번뇌를 단절하고 자성이 곧 불성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능엄선 수행법은 처음에는 소리에 집중(觀)하고, 그 다음에는 ‘돌이켜서 듣는 그 놈을 자성이 듣는(反聞聞性)’ 것인데, 중국 명ㆍ청(明淸) 대에 형성된 염불시수(念佛是誰-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화두도 ‘반문문자성(反聞聞自性)’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인가라는 반문을 통해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다.

   <능엄경>에서는 이근원통(耳根圓通) 반문문성(反聞聞性)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난아! 소리도 사라지고 메아리도 없어지게 되면 너는 들은 것이 없다고 말하는데, 만약 참으로 들은 것이 없다면 듣는 성품(자성)이 이미 없어져서 고목과 같을 것이니, 종(鐘)을 다시 친들 네가 어떻게 들을 수 있겠느냐? 있음과 없음을 아는 것도 그 소리가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이지, 어찌 너에게서 그 듣는 성품 자체가 ‘있었다 없었다’ 하겠느냐? 듣는 것이 참으로 없다고 한다면 무엇이 있어 그 없다는 것을 알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듣는 가운데 저절로 소리가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지, 소리가 생겼다가 없어짐이 너의 성품으로 하여금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은 아니니라.”

   선불교에서 <능엄경>을 중시한 것은 중국 송 대부터로 특히 선원에서 선승들이 능엄주를 외우기 시작한 것은 중국 남송 때인데, 능엄주를 외우면 보다 쉽고 빠르게 능엄삼매를 얻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불교에서 <능엄경>을 강조한 이는 고려중기 청평거사 이자현(李資玄)이 있으며, 근현대에는 용성(龍城) 스님과 성철(性徹) 스님께서도 <능엄경>을 중시해 제자들에게 능엄주를 외우라고 강조하셨다. 능엄주에 마음을 집중시켜 능엄삼매를 얻어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이다.- 윤창화 ---→이근원통(耳根圓通) 참조.

 

 

       

*능엄신주(楞嚴神呪)---원명은 대여래불정능엄신주(大如來佛頂楞嚴神呪)인데, 줄여서 대불정능엄신주(大佛頂楞嚴神呪), 더 줄여서 능엄신주 혹은 능엄주라 한다. <능엄경(楞嚴經)> 10권 중 제7권에 능엄신주가 실려 있다. 능엄경과 능엄신주 관계는 천수경과 신묘장구대다라니 관계와 비슷하다.

    성철 스님이 선방에서 참선하는 수좌들과 신도들에게 능엄신주 기도를 시켜서 유명해졌고, 지금도 성철 스님이 주석했던 해인사 백련암에서는 새벽기도 때 능엄신주를 독송하고 있다. 능엄주(楞嚴呪)에서 능엄이란 말이 ‘용맹’이라는 의미여서 능엄주가 좋지 않은 것, 내가 살아가는데, 또 공부하는데 장애가 되는 그런 마(魔)의 요소들을 쳐부순다든지, 항복을 받는다든지 하는 그런 의미가 이 ‘용맹’이라고 하는 뜻 속에 포함이 돼 있다.---→수능엄(首楞嚴) 참조.

   

*능연(能緣)과 소연(所緣)---능연과 소연이라는 단어는 유식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인데, ‘연(緣)’은 서로 인연을 맺는다는 말이고, 인연을 맺어야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유식에서는 우리 마음은 능동적이고 주관적으로 사물의 가치를 좌지우지하며 판단한다고 보고 있으며, 외부대상은 수동적이며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된다고 본다. 그래서 인식대상[대경(對境)]을 소연(所緣)이라하고 대상을 보고 아는 것을 능연(能緣)이라고 한다.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의 관계와 같다.

    유식불교에서는 주관과 객관을 능연과 소연으로 말하는데, 이 둘은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파악된다. 인식이 성립되는 조건으로 인식대상은 인정하나 주관과 객관이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인식대상은 ‘의존되는 것’이며,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은 그 대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니 소연(객관)이 없으면 능연(주관)도 없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대상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공(空)], 동시에 주관도 실체가 아니다.

    한편 불교에서는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반연(攀緣)이라고 한다. 그리고 반연하는 인식작용을 능연이라 하고, 반연된 인식대상을 소연이라 한다. 그래서 근본지(根本智)를 진리에 계합해 능연과 소연의 차별이 없는 절대의 참 지혜라고 했다.

       

*능인(能仁)---능히 인(仁)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능인적묵(能仁寂默)---부처님의 이름 산스크리트어 Sakyamuni의 한자식 표기음을 석가모니(釋迦牟尼)라 한다. 석가는 종족의 이름이고, 무니는 성자라는 존칭이다. 그러므로 석가종족에서 태어난 거룩한 성자란 뜻이다.

    그리고 부처님 이름을 뜻으로 옮겨 능인적묵(能仁寂默) 또는 능적(能寂)이라 한다. 즉, 일체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인 능인(能仁)과 부처님의 절대의 진리를 깨달은 경지인 적묵(寂默),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능인적묵(能仁寂默)이라 한 것이다.

    천태 대사는 ‘적묵(寂默)’으로 해서 생사(生死)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능인(能仁)’으로 해서 열반(涅槃)에 머무르지 아니 한다고 했다. 즉, 적묵, 곧 진실로 절대의 진리를 깨달았으므로 깨달은 몸으로써 열반 속에 가만히 있지를 않고, 능인, 곧 세상의 미혹한 인간 가운데 들어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구원하는 인간불사에 애쓴다는 뜻이다.  

   

*능입(能入), 능도(能度)---용수(龍樹, 나가르주나)는 <대지도론>에서 말하기를, “불법대해 신위능입 지위능도(佛法大海 信爲能入 智爲能度) - 불법(佛法)의 대해(大海)는 믿음(信)을 능입(能入)으로 하고 지혜(智)를 능도(能度)로 한다. 즉, 불법이라는 큰 바다에는 믿음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고, 지혜가 있어야 건너갈 수 있다.”고 했다.

     • 능입(能入)이란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 능도(能度)란 능숙하게 건너간다는 말인데, 능숙하게 제도한다는 말로도 쓰인다. 즉, 제도를 하는 자와 제도를 받는 자 모두 일승(一乘) 안에 있으므로 능히 제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능은 보살, 도는 중생에 해당한다고 했다.

            

*능작인(能作因, karana-hetu)---<구사론(俱舍論)에서는 인과 연을 다시 자세히 분류해 육인사연(六因四緣)의 이론을 전개했다. 육인은 능작인(能作因) ․ 구유인(俱有因) ․ 상응인(相應因) ․ 동류인(同類因) ․ 편행인(遍行因) ․ 이숙인(異熟因)을 말한다.

    능작인이란 어떤 결과를 성립시키기 위해 자체를 제외한 적극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조력하는 모든 조건의 총칭이다. 이를테면 A라는 법이 생겨날 때 A를 제외한 다른 모든 법은 직 ․ 간접으로 A법의 생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즉, 다른 법의 생기를 장애하지 않는 원인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유위법은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유위 ․ 무위법을 능작인으로 삼는다. 결국 능작인이란 직접적인 원인과 보조적이며 간접적인 원인을 총칭한다. 예를 들어, 씨앗은 식물의 직접적 원인인 반면 햇빛과 물, 흙은 식물의 보조적 원인이다.

    능작인에는 직접적인 원인과 결과를 낳는 힘을 가진 유력능작인(有力能作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무력능작인(無力能作因)이 있다. 유력능작인은 적극적으로 작용해 결과를 낳게 하는 인(因)을 말하고, 무력능작인은 소극적으로 결과의 발생을 방해하지 않는 인이다. 그러니 직 ․ 간접의 원인 모두를 통틀어 능작인이라 한다. 예를 들면, 축구시합에서 이겼다면, 선수들 실력은 직접적인 원인, 즉 유력능작인이고, 선수들의 체력관리를 위한 써비스, 혹은 상대방의 실력, 그날의 컨디션 등은 간접적인 원인, 즉 무력능작인이 된다.

    일체 유위법은 오로지 그 자신을 제외한 그 밖의 일체법에 대해 능작인이 된다고 하는 말은 직접으로 결과를 낳게 하는 유력능작인과 결과를 낳는데 장애하지 않는 무력능작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설명이라는 뜻이고, 이는 증상연(增上緣)과 동일한 개념이다.---→육인(六因), 증상연(增上緣) 참조.

    

*능전(能詮)과 소전(所詮)---여기서 ‘전(詮)’이란 경전의 문구를 설명하고 해석한다는 뜻이니, 경전의 뜻과 이치를 능히 풀이해 드러낼 수 있다고 해서 능전(能詮)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서 해석돼 드러내어지는 뜻과 이치를 소전(所詮)이라고 부른다.

    즉, 문자가 뜻을 발생하는 것을 능전(能詮)이라 하고, 문자에 의해 나타나는 뜻을 소전(所詮)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주관 ․ 객관’이라 하지 않고, 능(能-주된 것)과 소(所-객인 것)라는 말을 많이 쓴다. 모든 경전에서는 법(法)과 의(義)를 통해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는데, 법은 언설로 표현되는 것이라면 의는 언설의 표현을 통해 전달하는 근본 뜻이다. 따라서 법이 없이는 뜻이 드러나지 않고, 뜻이 없는 법은 단순한 음향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법(法)은 가르침 내지 진리를 설명하는 주체이므로 능전(能詮)이라 하고, 의(義)는 법을 통해서 드러나는 객체라서 소전(所詮)이라 한다.

    <화엄경>을 예로 든다면, <화엄경> 원 제목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인데, 경 자체는 능전(能詮)이고, 경에 담긴 내용인 대방광불화엄을 소전(所詮)이라 한다. 즉, <화엄경>에서 능은 <화엄경>이고, 소는 법계이며 진리다.

    그러니 소전(所詮)은 설명된 것. 경문(經文)을 통해 나타내는 문구 속의 뜻을 이른다. 가르칠 전(詮)자를 써서 능전은 능히 가르친다, 능히 말한다, 능히 표현한다는 뜻이다. 능전의 상대는 소전(所詮)인데 이것은 가르쳐질 것, 설명되어질 것이고, 법계 즉 진리를 말한다.

    교리(敎理)상으로는 능전(能詮)은 교화(敎化)의 주체이고, 소전(所詮)은 교화의 대상이다. 그리고 문법적으로는 명사 그 자체를 능전의 명(名)이라 하며, 명사가 가리키는 존재(법)을 소전의 법(法)이라 한다. 중(中)은 소전(所詮)의 이(理), 즉 불교의 근본원리를 표방한 것이고, 논(論)은 능전(能詮)의 교(敎), 즉 그 근본원리를 부연 설명하는 것이다.

       ※능전(能詮)---이치나 의미를 나타낸 글귀 혹은 문장을 말한다.

       ※소전(所詮)---글귀나 문장으로 나타낸 이치 혹은 의미. 경문(經文)을 통해 나타내는 문구 속의 뜻을 이른다. 따져서 알아낸 바, 설명되는 쪽, 문(文)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 의미를 말한다.

   

 

 

*능지(能持)ㆍ능차(能遮)---총지(總持, 산스크리트어 dharani)와 같은 말이다. 짧은 말 속에 모든 의미가 다 담겨있다는 다라니(陀羅尼)를 의역해서 총지 혹은 능지(能持)ㆍ능차(能遮)라고도 한다. 다라니는 신비한 힘을 가진 주문이라는 뜻인데, 한역해서 능지ㆍ능차ㆍ총지라고 한 것은, 다라니가 곧 마음인데, 이 마음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뜻이다. 지옥이나 극락도 마음에 들어있고, 불성, 여래장도 마음에 들어있으며, 그 외에 온갖 선악도 다 마음에 깃들어있어서 능지ㆍ능차ㆍ총지라고 고 하는 것이다.---→총지(總持, 산스크리트어 dharani) 참조.

 

 

*능행자(能行者)---6조 혜능(慧能) 선사의 다른 이름. 5조 홍인(弘忍, 601~675)의 문하에서 행자로 수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다.

         

*니간타 나따뿟따(Nigantha Nataputta)---불교도들이 부르는 자이나교의 개조 이름이다. 니간타(Nigantha)는 속박을 벗어난 자라는 뜻이고, 나따뿟따(Nataputta)는 나따(Nata)족 출신 사람이라는 뜻이다.

   본명은 왓타마나(Vatthamana, Vardhamina, 增長, 번영하는 자)이지만 자이나교도들은 그가 크게 깨쳤다 해서 마하위라(Mahavira, 大雄, 위대한 영웅) 혹은 지나(Jina, 勝者, 수행을 완성한 자)로 존칭했다. 그의 가르침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자이나(Jaina)라고 부르므로 자이나교라 한다. 그는 붓다와 같은 시대 왓지(Vajji)의 베살리(Vesali) 부근에서 왕족 아들로 태어났다. 32세에 출가해 사문이 돼 12년간 고행한 끝에 마침내 완전지(完全智)를 얻었다고 하며, 그 후 30여 년간 교화활동을 하다가 72세에 입멸했다.

   자이나교는 불교와 거의 같은 시대에 개창돼 니간타는 부처님에 대해 항상 열등의식을 가지고 경쟁적인 입장을 취했던 인물이다. 니간타는 산자야(Sanjaya)의 회의론을 극복하기 위해 상대주의(相對主義)적 인식론(認識論)을 수립하고 여기에 입각해서 이원적(二元的) 우주론을 제시했다. 즉, 자이나교의 중심사상은 이원론적 체계로서, 고대 애니미즘을 계승한 이 사상은 세계를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두 범주로 이루어진 것으로 봤다. 불교에서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보는 업(業, karma)을 자이나교에서는 물질적인 실체로 간주해 이것이 생명체에 개입해 윤회에 얽매이게 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업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 참회와 고행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즉, 자이나교에서는 영혼(Jiva, 命)은 물질(Pudgala)의 업(業)에 속박돼서 현실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졌다고 파악했다. 그러므로 순결한 영혼인 지바를 끈적끈적한 물질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는데 그 방법을 고행이라고 봤다. 그래서 자이나교에서는 극심한 고행이 행해졌다. 심지어 고행을 하다가 죽게 되면 성자로까지 추앙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종교생활은 불살생(不殺生), 불도(不盜), 불음(不淫)과 같은 철저한 계율을 지키는 한편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실천했다. 그들은 살생을 엄격히 금했기 때문에 농사마저 짓지 않았다. 농사를 짓다보면 작은 곤충들을 죽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했다. 실제로 이들로 인해서 인도의 상업이 발달했다는 학설도 있다. 이들은 무소유를 철저히 실천하다 보니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으로 고행을 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이들을 나형외도(裸形外道)라고 불렀다. 후대에 와서는 흰옷을 입어도 된다는 백의파가 나타나기도 했다.

         

*니까야(Nikaya, 尼柯耶)와 북방 아가마(Agama=아함경/阿含經)와의 관계---최초의 공식적인 성문불전은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왕 때 이루어진 제3차 불전결집에서의 일이다. 따라서 그때까지 약 200여년은 구전기간이었다.

    이 구전기간동안 부처님 가르침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교리 상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남아있는 자료가 없으므로 알 수가 없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의 생생한 모습과 가르침은 기억의 한계와 논사들 개인적 관심과 기호에 따라 많은 변질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아소카왕 때 성문화가 이루어지고, 각부파마다 경전의 기초적인 성문화가 진행됐으나 20여개 부파가 치열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거기서도 많은 변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각 부파들은 자신들이 전승해온 교법을 기초로 경전을 만들어 나갔다. 그래서 각 부파마다 경전이 있었으며 부파별, 특징에 따라 경전내용에 차이가 있었다.

    세친(世親)과 논쟁을 벌인 중현(衆賢, 상가바드라/Samghabhadra)은 “각 부파에서 전승한 교법에 따라 서로 다른 경을 부정하게 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각 부파, 특히 상좌부와 대중부의 대립은 부처님 법에 대한 입장 역시 크게 달랐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각 부파별로 경전이 있어 그 종류가 많았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상좌부계통 남전 <니까야>와 설일체유부의 북전 <아가마>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현존하는 초기경전(4아함과 5니카야)과 율장(여섯 부파의 廣律)은 각각의 부파에 의해 찬집(纂集, 편찬 결집) 전승된 것으로, ‘아함(āgama)’과 ‘니카야(nīkāya)’라는 말 자체가 ‘전승돼 온 것’, ‘부파 혹은 부파에 의해 결집된 성전’이라는 뜻이다. 즉, 부파불교시대 조성된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성전 결집의 기준은, <대반열반경>에서 설한 이른바, ‘4대교법(mahā apadesa)’이었다. 즉, “어떤 비구가 어떤 법문(경․율․교법)을,

    ① 불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② 대다수 박식한 장로들로 구성된 승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③ 경과 율과 논모(論母, 주석)를 지닌 다수의 비구로부터,

    ④ 혹은 그러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그의 말을 잘 듣고 단어와 문장을 잘 파악한 다음 경에 포함되어 있는지 율(vinaya, 調伏)을 드러내는지를 검토하여,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불설로 판단하여 버려야 하고, 그러하다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

   그런데 <니까야>의 경우, 인도 대륙에서 떨어진 섬나라 스리랑카에 전해져, 인도의 정치적 변화에 의한 영향을 비교적 받지 않아 고스란히 전승될 수 있었고, <아가마>는 북인도에서 번성한 쿠샨왕조에서 편찬 보존되다가 북방 및 중국으로 전래돼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아함경>으로 자리 잡아 온전히 전승되고 있다. 그 외 나머지 경전들은 인도의 정치적 격변기에 이슬람세력의 침입과 힌두교에 흡수돼 불교가 소멸함으로써 사라졌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경은 BC 3세기 아소카왕의 제3차 불전결집 때 상좌부가 주도해 공식적으로 만들어 남방에 전한 <니까야>와 AD 2세기 카니시카왕의 제4차 불전결집 때 설일체유부 중심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아가마(아함경)> 뿐이다.

    상좌부계통 분별설부(分別說部)가 스리랑카에 전한 <니까야>는 오늘날 남방경전으로서 근본경전인 <빠알리어 삼장(빠알리어 대장경)> 안의 경(經) 부분을 뜻한다. 빠알리어로 적힌 <니까야(Nikaya)>는 ‘5 니까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북방경전이라 할 산스크리트어 경전인 <아가마(agama)>는 중국에 전해져서 <아함경(阿含經)>이라 하며, ‘4 아함(阿含)’으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엄격히 구분하자면, 아가마(Agama, 阿含)와 니까야(Nikaya, 部)는 차이가 있다. 니까야는 상좌부에서 전승한 것이고, 아가마는 유부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 전승한 것이다. 당시 부파 간에 불설ㆍ비불설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가마와 니까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방경전 속의 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는 북방경전인 <아함경>에는 빠져있다. 그리고 <니까야>와 <아함경> 모두 그 하나하나가 하나의 경(1經)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많은 경(經)으로 집성돼 있다. <니까야>나 <아함경) 각 경전 하나에 다시 많은 경이 실려 있다는 말이다.

    — 빠알리어 <5부 니까야>와 북방 한역 <4 아함(阿含)>의 비교 —

      ① 디가 니까야(Digha Nikaya - 장아함(長部阿含) - 길이가 긴 경을 모은 것.

      ②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aya - 중부아함(中部阿含) - 중간 정도 길이의 경을 모은 것.

      ③ 상윳따 니까야((Samyutta Nikaya - 상응부아함(相應部阿含) - 주제가 분명한 경들을 주제별로 모은 것. 잡아함(雜阿含)이라고도 한다.

      ④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aya - 증지부아함(增支部阿含) -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이 남기신 가르침 중 주제의 법수가 분명한 말씀을 숫자별로 모아 결집한 경으로 하나부터 열하나까지 모두 11가지 모음으로 분류했다.

      ⑤ 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aya, 小部) - 위 분류에 들어가지 않는 나머지 짧은 경들을 모은 것으로, <쿳다까 니까야> 안에는 법구경, 자설경, 본생경, 수타니파타(경집/經集), 장로게(長老偈) 등 15개의 중요한 소경이 들어있다. 이 쿳다까 니까야(소부)가 한역 <아함경>에는 없다. 그리고 상윳따 니까야(상응부)와 북방경전의 잡아함(雜阿含) 사이에도 다소 차이가 있어서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빠알리어 경전이라는 것은 결국 18-20여개의 부파불교 중의 하나였던 상좌부의 전승에 불과한 것이다. <청정도론>도 상좌부라는 부파의 논서일 뿐이다. 각 부파는 각자의 전승경전이 별도로 있었고 그리고 논서도 방대한 량이 각 부파가 개발해 있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는 부파불교가 모두다 소멸을 했으나 스리랑카 섬으로 전래된 상좌부의 전통이 그나마 오늘날까지 살아있어서 현재 니까야 경전을 붓다의 원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청정도론>도 일개 상좌부라는 부파불교의 논서에 불과할 뿐이다. 오히려 철학적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인도에 있던 부파들이 남겨놓은 방대한 논서가 월등하다고 볼 수 있다.

   니까야든 아함경이든 경전이란 것도 결국 기록물인데, 후대의 우리들은 경전의 글자에 국한해서 맹목적으로 그것만 신봉할 것이 아니라 경전의 숨은 내용이나 행간을 잘 파악하고 공부해야 일개 부파의 불교를 넘어선 불교 전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아함경(阿含經), 잡아함(雜阿含) 참조.

 

     

  

*니까야(Pāli Nikāya)의 절대성---오늘날 남방불교를 공부하는 일부 인사들은 남방불교만이 정통이고, 그 외의 것은 모두 잘못 변질된 불교로 매도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불교를 마치 사교(邪敎) 집단의 하나로 몰아가는 극단적인 모습조차 보이고 있다. 물론 한국불교에 많은 문제점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1500년 한국불교역사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심지어 원효 대사까지도 길을 잘못 든 인사로 폄하하고 있으니, 이런 편협한 시각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다른 시각도 있음을 인지해야 하겠다.

   「남방의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도들이 사용하고 있는 빠알리 니까야(Pāli Nikāya)가 불설(佛說)을 비교적 잘 보전하고 있다는 것은 공히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빠알리어가 바로 고타마 붓다께서 사용했던 언어고, 그러니 오직 빠알리 니까야만이 정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점은 율장 <소품(Cullavagga)>에 전하는 기사를 보면 자명해질 것이다.

    바라문 출신 형제 비구들(Yamelu & Tekula)이 붓다께 다가가 예를 올리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출신 지역, 가문, 카스트가 다른 사람들이 출가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각각 자기네 방언을 씀으로써 붓다의 가르침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말씀을 베다 언어(chando)로 바꿔 놓으면 어떻겠습니까?”

   이에 붓다께서 심히 꾸짖어 나무라셨다.

   “이 어리석은 자들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나 아직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내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조차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이렇게 꾸짖고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붓다의 가르침을 베다 언어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 누구라도 그리하면 ‘dukkaṭa(突吉羅, 惡作)’를 범한 것이다. 각기 자신의 방언으로(sakāya niruttiyā) 붓다의 가르침을 익힐 것을 허락하노라!” [Cullavagga II-33.]

   이 기사를 단순히 고타마 붓다의 베다 언어(산스크리트)에 대한 반감으로 해석하거나, 빠알리 니까야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앞뒤 정황과 문맥을 살펴보면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을 어떤 특정 언어로 고착시켜 정전(正典)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신 것이라고 봐야 한다.

    오늘에 전하는 불전은 여러 방언으로 암송되던 가르침이 몇 차례의 결집을 통해 승가의 대다수가 사용하던 언어로 정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챙겨야 할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 배우는 사람의 언어’를 사용하게 한다는 고타마 붓다의 열린 사고와 실천이다. 나아가 번역의 당위를 주장할 수 있는 전거(典據)가 된다.

    세상만사 변하게 마련이다(aniccā sabbe saṅkhārā). 불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무상과 연기의 원리야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 해도 우리가 수용하고 실천하는 불교가 고타마 붓다의 본래 메시지의 깊이와 무게에서 동일한 것이라고 장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빠알리 경전 역시 이 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고, 전혀 다른 문화 배경과 고유의 문자와 언어 전통을 가진 옛 중국인들이 받아들인 불교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외래 사상을 수용하는 고대 중국인들이 상당부분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사정과 함께 문화민족으로서의 자존감도 함께 작용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한역 경전이나 중국인들의 수행이 불교의 정체성을 훼손했다고는 할 수 없다.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다수의 교종(敎宗)과 율종(律宗)의 부단한 활동은 그 내용에 있어 무상, 무아, 공, 연기의 바른 이해와 거기에 따르는 개인적 사회적 적용과 실천에 관한 집단 지성의 고뇌이자 결실인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변화한 것이 선종(禪宗)이다. 이것이 오직 불교 내부의 일로 그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가와 도가, 유가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키우고 때로는 깎아 다듬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 선종은 정교하고 치밀한 교학과 도덕적 바탕에서 제 고유의 모습과 색깔을 가지고 부화한 자유분방한 나비요, 중국 불교의 꽃인 셈이다.

   불교는 발상지인 인도에서 이미 여러 부파의 발생과 성쇠를 거쳤고, 인도 밖으로 퍼져나가면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처음부터 불교는 중도임을 표방하고 나섰지만 늘 중심을 곧게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긴 불교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의 핵으로 기억하는 용수, 무착, 세친, 보리달마, 혜능 등 옛 스승들의 업적은 다름 아닌 고타마 붓다의 연기, 중도의 정신, 현실 세계로의 복귀였다.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쳤을 때, 대사회적 유연성을 잃고 굳어 갈 때, 혹은 전통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흐르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을 때, 둑을 뚫고 새물을 끌어들인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분들이 끌어들인 새물은 이미 거기 있었던 우물, 고타마 붓다의 연기, 중도에서 퍼 올린 것이다. 가장 오래된 샘에서 새물을 길어 냈다는 것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파야 할 우물도 바로 그 자리다.

   그러므로 특정 전적(典籍)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나머지를 폄하하는 흐름은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세속적 편 가르기로 보이기도 한다. 한역경전과 빠알리어, 범어(梵語, Sanskrit) 경전을 비교하면서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역과 인도 원전의 상호 보완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역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인도어 원전을 통해 쉽게 풀리기도 하고, 역으로 인도 원전의 모호한 부분이 한역을 통해서 분명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역 전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연구와 인도 전적 중심의 연구 성과 역시 배척과 질시가 아닌 상호 존중과 보완의 자세가 필요하다. 한 예로 초기경전의 눈으로 후기 경전을 점검하고, 대승경전의 입장에서 초기경전을 재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각 개인, 지역사회, 한 나라, 나아가 전 세계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연기(緣起)의 세계관이다. 몸소 앞서서 그것을 보이고 퍼뜨려야 할 사회적 의무를 자진해서 짊어진 승가는 연기의 바른 이해와 실천, 곧 지혜와 자비의 두 날개로 날아가는 나비다. 그것이 바로 승가의 굳건한 뼈대요 따뜻한 피인 것이다.」 - 재연 스님

   

     

*니다나카타(Nidanakatha, 인연담/因緣談)---빠알리어로 된 초기 붓다 전기인데, 5세기경 붓다고사(Buddhagosa)가 정리했다고 하며, 빠알리어 문헌 중에서 가장 체계적인 붓다 전기라 평가된다.

니다나카타(인연담)는 <자타카(Jataka, 본생경)>의 주석서인 <자타카 앗타카타(Jataka-attakatha)>의 일부인데, 초기경전 여기저기에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단편적인 붓다에 관한 전기를 시기별로 붓다 일생을 일관되게 정리했다고 하는 점에서 최초의 불타전(佛陀傳)이라 할 수 있다. ‘먼 인연담’, ‘멀지 않은 인연담’, ‘가까운 인연담’의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는 연등불로서 천상계에서 수행하고 있던 시대, 제2부는 도솔천에서 하생해서 탄생과 성도까지, 제3부는 기원정사(祇園精舍)의 건립까지의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니뎃사---→닛데사(Niddesa, 義釋) 참조.

 

*나렌드라 자다브(Narendra Jadhav, 1953년~)---인도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1953년에 태어난 나렌드라 자다브는 인도 뭄바이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미국 인디애나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여러 국제무대에서 인도를 대표하는 그는 인도중앙은행 수석 경제보좌관으로 근무했고 국제통화기금과 에티오피아, 아프가니스탄의 중앙은행 자문관 등 국제기구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또 대중 연설가 및 사회 활동가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인도 최상위 랭킹 대학인 푸네 대학의 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에 <인도의 금융 경제학>, <암베드카르 박사> 등이 있으며, 특히 <신도 버린 사람들(Untouchables)>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 소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금도 그는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 신불교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 다무는 달리트 운동을 일으킨 빔라오 람지 암베르카르 박사에게 영향을 받아 자식 교육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자신이 받은 천대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암베르카르 박사가 달리트들에게 ‘교육하고, 단합하고, 궐기하라’고 한 가르침을 따랐다. 그리고 힌두교도로 죽지 않겠다는 암베르카르 박사를 따라 자신도 가족도 모두 불교로 개종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평등사상이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렌드라 자다브는 이러한 신분적인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이다. 태어난 신분을 절대 바꿀 수 없는 인도의 절대적 신분제도를 무너뜨리면서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인도의 살아 있는 영웅이다.

 

   

*니련선하(尼連禪河)---니련하(尼連河)라고도 한다. 나이란자나(Nairañjanā)강을 음역해 니련선하라 한다.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 동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강 이름으로, 항하(恒河, 간지스강)의 한 지류이다. 석가모니가 출가 후 6년 동안 고행한 뒤, 니련선하 강물에서 목욕을 하시고 우루벨라 촌장 딸 수자타(Sujata)가 바친 영양이 풍부한 우유죽(유미죽/乳米粥) 한 그릇을 공양 받고 기운을 차려서 니련하강가 보리수 아래 앉아서 정각을 얻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마지막에도 니련하 부근 사라(Salā, 沙羅) 쌍수(雙樹)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현재 파트나(Patna) 지역의 팔구(Phalgu)강을 말한다.

        

 

*니밋따( 빠알리어 nimita)---니밋따란 어떤 물체나 호흡현상을 지속적으로 응시한 결과 마음에 나타나는 그 물체나 현상의 모양을 말한다. 예를 들면, 적색이나 청색의 원반을 계속 응시하고 있은 후, 그 물체를 더 이상 보고 있지 않아도 그것의 모양과 색이 마음속에 선명하게 나타나는데 이것을 심상(心象), 즉 니밋따라고 한다.

    호흡관 수행에서 호흡 자체는 기체라서 그 색과 모양을 육안으로 불 수 없다. 그러나 호흡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어느 한 지점을 정하고 호흡을 계속 관찰하고 있으면 호흡이 미세하고 깊어지면서 그 곳에서 호흡의 상(象)이 나타난다고 했다.

   <청정도론>의 호흡관 수행에서는 니밋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별빛처럼, 마니주처럼, 진주처럼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거친 촉감을 가진 목화씨처럼, 거친 촉감을 가진 자료로 만든 못처럼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긴 허리끈처럼, 화환처럼, 한 모금의 연기처럼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퍼진 거미줄처럼, 구름의 장막처럼, 연꽃처럼, 수레바퀴처럼, 일륜처럼, 월륜처럼 나타난다.

   이처럼 니밋따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호흡에 대한) 인식(想, sanna)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니밋따는 이 인식에서 생겼고, 인식이 그 근원이고 원천이라고 했다.

   그러면 니밋따는 어디서 오고, 무엇이 니밋따를 나타나게 하는가?

   미얀마의 사야도 책에서 말하기를, 니밋따는 집중하는 마음에서 나온다. 심장토대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마음상태는 호흡을 불러일으키며, 이 호흡으로부터 실제의 아나빠나 니밋따(anapana-nimitta)가 나온다. 모든 마음상태가 다 니밋따를 생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집중된 마음만이 니밋따를 나타나게 한다고 했다.

   상(相, sañña)의 여러 개념들 중에 하나가 니밋따이다. 형상, 겉모습이란 뜻이다. 어떤 대상을 만났을 때, 자기가 겪은 과거로부터의 많은 경험, 기억의 총합에 의해 그 대상으로부터 생겨난 ― 얻은 인상(표상, 영상, 전체적인 첫 인상)을 말한다. 중생의 경험이란 오염된 경험들이기에 오염된 눈에 나타난 인상이라는 말이다. 즉, 니밋따(相)는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감각할 때, “탐ㆍ진ㆍ치에 오염된 마음에 비친 ―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금강경>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상(相)이 니밋따에 해당한다.

    그리고 무상삼매(無相三昧) 할 때의 무상(無相)은 'animitta'이다. ‘nimitta'에 부정접두어 ’a'를 붙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상(無相)을 ‘니밋따가 없다’ ― ‘어떤 대상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무상삼매에서의 무상(無相)은 ‘탐ㆍ진ㆍ치가 없는 마음 ―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마음에 나타난 대상을 말한다.---→상(相, 빠알리어 산냐/sañña, 산스크리트어 samjna) 참조.

     

 

*니야야(산스크리트어 Nyaya)학파---니야야(尼夜耶)로 소리 번역한다. 고대 인도 육파철학의 하나로서, 논리학(因明, Hetu-vidyā)을 연구한 정리파(正理派)를 말한다. 산스크리트어 Nyaya는 원래 이론(理論)ㆍ정리(正理)를 뜻하는 말인데, 후대에 내려와서 논리학적 연구 일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됐다. 그리하여 인도논리학은 니아야학파와 불교에 의해 체계화됐다고 볼 수 있다. 이 학파를 창시한 사람은 공교롭게도 부처님과 성이 같은 가우타마(고타마/Gautama)로서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아서 BC 1~2세기, 혹은 AD 1~2세경 사람이라 한다. 이 학파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괴로움의 원인은 그릇된 인식에 있으므로 그릇된 인식을 제거하고 계율을 지키고 요가수행을 하면 해탈에 이른다고 했다.

    그리고 올바른 인식에 이르는 추론의 방법으로 오지작법(五支作法) ― 오분작법(五分作法)라고도 함 ― 을 내세웠다. 이들의 주된 목적은 합리적인 이론과 현상의 분석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인식방법으로 직접지각, 추론, 유비(類比, 비슷한 사물과 비교해 판단하는 것), 성언(聖言, 베다에 쓰여 있는 성스러운 말이 진리의 기준이라는 것)의 네 가지를 내세웠으며, 추론(추리 판단)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과 비슷한 오지작법(五支作法)을 만들어 낸 것인데, 종(宗)ㆍ인(因)ㆍ유(喩)ㆍ합(合)ㆍ결(結)의 다섯 부분으로 된 논식의 예는 다음과 같다.

---------------------------

종(宗) - 주장 - 말은 무상하다.

인(因) - 이유 - 지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유(喩) - 비유 - 예를 들면, 병(甁)과 같다.

합(합) - 적용 - 병과 같이, 말도 지어낸 것이다.

결(結) - 결론 - 그러므로 말은 무상하다.

----------------------------

종(宗) - 주장 - 나는 학생이다.

인(因) - 이유 -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유(喩) - 비유 - 공부하는 사람은 학생이다. 예컨대, 수능을 대비하는 수험생과 같이.

합(合) - 적용 - 나는 공부한다.

결(結) - 결론 - 그러므로 학생이다.

------------------------

종(종) - 주장 - 산에 불이 났다.

인(因) - 이유 - 왜냐하면 연기가 나기 때문이다.

유(喩) - 실례 - 마치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연기가 나듯이.

합(合) - 적용 - 이처럼 산에서 연기가 난다.

결(結) - 결론 - 그러므로 산에 불이 난 것이다.

-----------------------------------

    이 논식에서 종(宗)은 주장ㆍ명제ㆍ판단 등을 말하고, 인(因)은 이유, 유(喩)는 구체적인 예(例), 합(合)은 유(喩)를 기반으로 해서 종(宗)과 인(因)을 결합한 것, 결(結)은 종(宗)을 되풀이한 결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3단 논법은 대 전제를 먼저 제시하지만 니야야학파는 결론을 먼저 제시하는 연역추론을 했다. 그런데 5지작법은 연역추리와 귀납추리를 둘 다 포함하고 있다. 종(宗)ㆍ인(因)은 귀납이고, 유(喩)ㆍ합(合)ㆍ결(結)은 연역추리인 셈이다.

    인도인들도 참다운 삶에 대해 논리적으로 의미를 파악하고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바로 Nyaya 철학이다. AD 2∼3세기에 니야야학파의 기초가 마련되고, 논리학에 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집대성시켜나갔으며, 특히 진보적인 지식과 논리를 구사하는 불교도들과 많은 논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채용한 불교논리학과 니야야학파의 끊임없는 논쟁 결과 인도 논리학이 발달했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의 미륵(彌勒)ㆍ무착(無着)ㆍ세친(世親) 등도 이 논리학을 사용했는데, 이때의 논리학을 인명(因明, Hetu-vidyā)이라 했다. 여기서 인(因, hetu)이란 논증의 형식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원인을 뜻하며, 명(明)은 학문이란 뜻으로서, 인명이란 이유나 근거[因]를 해명한다, 인(因)을 밝힌다[明]는 뜻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논리학을 인(因)을 밝히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인명이라 했으며, 인명을 불교에사 받아들여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데 활용했다.

    인도철학의 각 학파들은 자신들 교리를 널리 인식시키기 위해 자신들의 인식론을 발전시켰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대인도 논리학은 형식 논리학인 서양 논리학에 비해서 실질적인 내용을 가지며, 실생활에서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특히 그 추론식에서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이 고대인도 논리학은 추리논리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5세기에 등장한 진나(陳那, Dignaga)는 종(宗)ㆍ인(因)ㆍ유(喩)의 세부분으로 된 삼지작법(三支作法)을 완성했다. 그리하여 진나(陳那)가 등장하기 이전 논리학을 고인명(古因明), 진나 이후에 완성된 논리학을 신인명(新因明)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종(宗)과 결(結)은 똑같은 명제이고, 서양 논리학의 결론에 해당한다. 그리고 인(因)은 소 전제, 유(喩)는 대 전제에 해당한다.---→인명(因明, 산스크리트어 hetu-vidya), 진나(陳那, 디그나가/Dignāga) 오지작법(五支作法), 삼지비량(三支比量), 불교와 정반합(正反合), 삼량(三量), 정리철학(正理哲學, 니야야/Nyaya 철학) 참조.

 

      

*니치렌(日蓮)---일본 카마쿠라시대(12C말~14C초)의 고승으로 불교개혁의 지도자, 일련종(日蓮宗)의 시조이다. 12세에 천태종을 배우고 16세에 출가했다. 일본 천태종의 성산 교토의 히에이산(比叡山, 848.3m), 나라, 와가야마의 고야산(高野山) 등에서 11년간 수행하고 나서 <법화경>이야말로 최고의 경전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1253년 ‘나무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외치고 <법화경> 신앙인 일련종을 창시했다. 1260년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몽골의 침입을 예언했으며, <법화경>만이 말세의 국가에 평안을 가져올 수 있다고 했으며, 정토교 등 다른 종교를 강하게 비난했기 때문에 두 번이나 유배를 당했다. 한번은 막부에서 다른 종교를 비판한 죄로 니치렌을 잡아들여 참수하려고 했으나, 강한 광선이 나타나서 사형 집행인의 눈에 반사돼 쓰러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처형은 중단되고 니치렌은 ‘사도’라는 섬으로 유배당했다.

    그는 범부가 <법화경>의 제목인 ‘나무묘호렌게쿄’를 제창하면 나무묘호렌게쿄의 일곱 자에 포함돼 있는 석존의 공덕을 자연히 물려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근대에 들어서 니치렌의 종교가 다시 주목받게 되고, 일본에서 국가주의 부흥의 기운 속에서 정치적 역할을 했다. 또한 근대에 있어서 니치렌의 사상이 많은 신흥종교에게 사상적 소재를 제공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창가학회(創価學會) 등의 여러 교단에서 니치렌을 조사(祖師)로 받들고 있다. 일본 정계에서도 창가학회는 자신들을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종교정당인 공명당을 창당하는 등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으며, 외국에의 전교 사업이 활발한 편이다.

    한 가지 염려스러운 것은 창가학회(創価學會) 계통의 일련종(日蓮宗)은 벨기에, 프랑스, 독일 등에서는 정부에서 '사이비종교'로 지정하고 있는데, 오히려 한국에서는 일본 천리교(天理敎)와 함께 이 땅에 뿌리내리며 점점 퍼져가고 있다. 2013년 100만 명이 넘는 신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를 기반으로 한 신흥종교다가 보니 기존의 불교교세가 강한 영남권에서 교세가 강한 것으로 추측된다. 매주 한 번씩 화광신문(和光新聞)이란 기관지와 월마다 법련이란 책을 발행하고 있다. 원만치 못한 한일관계를 고려할 때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닛데사(Niddesa, 의석/義釋)---쿳다까니까야/Khuddaka Nikāya, 소부/小部)에는 법구경(法句經), 본생경(本生經), 여시어경(如是於經), 숫타니파타(경집/經集), 닛데사(Niddesa;義釋) 등 15개의 경문이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닛데사이다.

    닛데사는 수타니파타(Sutta Nipata) 제1장의 ‘외뿔소의 뿔’과 마지막 두 편인 제4장 ‘여덟 장’과 제5장 ‘피안으로 가는 길의 장’에 대한 완벽한 주석서이다. 사리풋타(sāriputta)의 작품으로 생각되는 이 경은 빠알리어 삼장의 니까야(經) 가운데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초기, 부처님 당시의 주석서인 논장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경은 대의석(Mahaniddesa)과 소의석(Culaniddesa)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닛데사는 우빠세나(Upasena)의 Saddharmmapajjotika라는 자체의 주석서가 있는데, 거기에 사리풋타의 작품이라 돼있다. ※의석(義釋, niddesa)---옳은 해석이라는 뜻임.

     • 대의석(大義釋) - 마하 닛데싸(Maha Nidessa) - 수타니파타(經集)의 의품(義品)에 관한 주석서.

     • 소의석(小義釋) - 쭐라 닛데싸(Cula Nidessa) - 수타니파타(경집)의 피안도품(彼岸道品)과 서각경(犀角經)에 관한 주석서.

    다음은 대의석(大義釋)의 내용에 관한 해설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렵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하니까 현재의 바깥 경계[外境]에 집착하라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현재의 외경을 인식 경험하고 있는 경우에도,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경전에서는 경고하고 있다. 특히 <대의석(大義釋)>에서는 이에 대해 명쾌하게 해석하고 있다.

    “눈으로 색을 보아도 탐할 것을 탐하지 않으며, 성낼 것을 성내지 않으며, 혼미한 데에 속지 않으며, 노여워할 것에 노여워하지 않으며, 더럽힐 것을 더럽히지 않으며, 교만히 할 것에 교만하지 않는다. 귀로 소리를 들어도, 코로 냄새를 맡아도, 혀로 맛을 느껴도, 몸으로 부딪치는 것에 닿아도, 의식으로 법을 인식해도 탐할 것을 탐하지 않으며, 성낼 것에 성내지 않으며, 혼미한 데에 속지 않으며, 노여워할 것에 노여워하지 않으며, 더럽힐 것을 더럽히지 않으며, 교만히 할 것에 교만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대로 하고, 들리는 것은 들리는 대로 하고, 깨달아지는 것은 깨달아지는 대로 하며, 인식되는 것은 인식되는 대로 해,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들리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깨달아지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인식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보이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 무애자재(無碍自在)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 들리는 것, 깨달아지는 것, 인식되는 것에 얽매이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속박되지 않고, 그것에서부터 벗어나고 풀려나 무애자재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

    이러한 경지가 곧 깨달음을 이룬 선사(禪師)들의 삶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불교도들의 이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불교의 초심자는 우선 과거와 미래의 일로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권하는 바이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열심히 생활하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모든 집착과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대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불교도들이 바라는 이상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 그러면 생사에도 걸림이 없을 것이다. - 마성스님 해설

 

 

 

 

 

 

 

 

 

불교용어 10 ㄴ

ㄴ---------------------------------------------*나가(산스크리트어 Naga)---나가(Naga)란 산스크리트어로 뱀(특히 코브라)이라는 의미인데,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의 하나이다. ‘나가’는 일반

cafe.daum.net

 

'불교용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교용어 12 ㄹ  (0) 2021.10.31
불교용어 11 ㄷ  (0) 2021.10.17
불교용어해설(구마라습(鳩摩羅什)-구원실성(久遠實成))  (0) 2021.10.03
불교용어해설 (공(空)-공(空)과 제로(0))  (0) 2021.10.03
불교용어 9  (0) 2021.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