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대승찬 풀이글)

[성철 스님] 신심명(信心銘) 강의 ⑥ 이견부주(二見不住) 신막추심(愼莫追尋)

수선님 2021. 11. 28. 14:07



3. 두 가지 견해



二見不住 愼莫追尋
이견부주 신막추심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두 가지 견해는 즉 양변의 변견(邊見)을 말합니다. 이 변견만 버리면 모든 견해도 따라서 쉬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변에 머물러 선악(善惡)·시비(是非)·증애(憎愛) 등 무엇이든지 변견을 따르면 진여자성은 영원히 모르게 됩니다.

 


才有是非 紛然失心
재유시비 분연실심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 마음을 잃으리라.

 


잠깐이라도 시비가 생기면 자기 자성을 근본적으로 잃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앞에서는 자기의 진여자성을 구하려고 하지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쉬면 된다고 했는데, 그 망령된 견해란 곧 양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양변을 대표하는 시비심(是非心), 즉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을 들어 망견이라는 뜻을 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불법(佛法)이 옳고 세법(世法)이 그르다든지, 반대로 세법이 옳고 불법이 그르다든지 하는 시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것이 큰 병입니다. 우리가 실제의 진여자성을 바로 깨쳐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이 시비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견을 쉬고 양변에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비심은 두 가지 견해를 대표하는 예로 들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상대법(相對法)의 전체가 다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二由一有 一亦莫守
이유일유 일역막수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

 


흔히들 둘은 버리고 하나를 취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가지 변견은 하나 때문에 나며 둘은 하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마저도 놓아버려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변을 떠나서 중도를 알았다 해도 중도가 따로 하나로 하나 때문에 둘이 있으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고 버려라, 곧 중도마저도 버려라 하였습니다. 중도는 무슨 물건이 따로 존재하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떠나서 융통자재한 경지를 억지로 표현해서 하는 말입니다.

 


一心不生 萬法無咎
일심불생 만법무구
 

한 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 법이 허물없느니라.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만법이 원융무애하여, 아무 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융통자재를 말한 것으로서 사사무애(事事無碍)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장애가 없는 법계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어디서 성립되느냐 하면 바로 양변을 여읜 중도에서 성립됩니다. 즉 시비심의 두 견해를 버리고, 하나마저도 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일체 만법에 통달하여 무애한 무장애법계가 벌어져 일체에 원융자재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른바 '허물이 없다'고 합니다.

 


無咎無法 不生不心
무구무법 불생불심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며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허물도 없고 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있어서 원융무애한 줄 알면 큰 잘못입니다. 이 경지는 허물도 법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마음이랄 것도 없습니다. 허물도 변(邊)이며, 법도 변이고, 나는 것도 변이며, 마음이라 해도 변입니다. 이 모두가 없으면 중도가 안 되려야 안될 수 없습니다.

 


能隋境滅 境逐能沈
능수경멸 경축능침
 

주관은 객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능(能)은 주관을, 경(境)은 객관을 말합니다. 주관은 객관을 따라 없어져 버리고 객관은 주관을 좇아 흔적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니,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것이 남아 있으면 모두가 병통이라는 말입니다.

 


境由能境 能由境能
경유능경 능유경능
 

객관은 주관으로 말미암아 객관이요
주관은 객관으로 말미암아 주관이니

 


객관은 주관 때문에, 주관은 객관 때문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이 없으면 객관이 성립하지 못하고 객관이 없으면 주관이 성립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병이므로 주관 객관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니 주관은 주관대로 객관은 객관대로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관이 객관을 인식하여 분별하는 순간 이견(二見)의 소용돌이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주관과 객관을 없애라고 억지로 말하는 것입니다.

 


欲知兩段 元是一空
욕지양단 원시일공
 

양단을 알고자 할진댄
원래 하나의 공이니라.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는 두 가지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원래 전체가 한 가지로 공(空)하였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관도 객관도 찾아 불 수 없는 것이 근본 대도인데. 주관과 객관을 따라간다면 모두가 생멸법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두를 버려야만 대도에 들어가게 되는데, 양단(兩段)이 모두 병이고 허물이므로 이것을 바로 알면 전체가 다 공(空)하더라는 것입니다. '공하다'는 것은 양변을 여읜 동시에 진여가 현전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공했다고 한 그 하나의 공은 말뚝처럼 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一空同兩 齊含萬象
일공동양 제함만상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함께 다 포함하여.

 


일공동양 제함만상 앞에서 '공했다'고 하여, 아주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는 줄로 알아서는 크게 어긋나니 이는 단멸의 공(斷空)에 빠져 버립니다.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아서 두 가지가 다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의 공이란 차(遮)로서 부정을 말하고 양단과 같다는 것은 조(照)로서 긍정을 말합니다.


'양단을 버리면 하나의 공이 된다'라는 것은 양단을 부정하는 동시(雙遮)에 양단을 긍정한다(雙照)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둘을 버리고 하나가 되면 그 하나가 바로 둘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공이 둘과 동일하게 원융무애하므로 완전히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체의 삼라만상이 하나의 공 가운데 건립되어 있다고 하는 뜻이 됩니다. 결국 우리가 변견을 떠나 자성을 깨치고 중도를 성취하면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어 삼라만상과 항하사와 같은 미묘한 작용이 여기에 원만구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空)이라 해서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일체가 원만구족한 것을 공이라 하며 공이 또 공이 아니어서(不空), 일체 삼라만상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不見精粗 寧有偏黨
불견정추 영유편당
 

세밀하고 거칠음을 보지 못하거니
어찌 치우침이 있겠는가.

 


앞 구절에서 '하나의 공'이란 공공적적(空空寂寂)하여, 일체의 명상(名相)이 떨어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으므로 일체 삼라만상 그대로가 중도 아님이 하나도 없습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까지도 중도(中道)아님이 없으므로, 사사무애(事事無碍)한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차별이 벌어지게 되어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차별이 벌어진다고 하니 어떤 실제의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차별이 벌어져 드러났다 하여도 거기에 세밀함과 거칠음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이 곧 공이 아니며 공 아님이 곧 공이므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여전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산이라느니 물이라는 생각과, 산은 높고 물은 푸르다는 등 이러한 견해가 있으면, '한 가지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뜻을 확실히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한 무장애법계에 있어서는 세밀함과 거칠음을 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쪽으로 치우치고 편벽된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모든 상이 다 떨어져 원융무애하고 대자재한 것을 말한 것이지, 세밀함과 거칠음이나 편당(偏黨)을 가지고 하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누구든지 세밀함과 거칠음에 기우는 편당(偏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하나의 공이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다'는 도리는 절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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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 신심명(信心銘) 강의 ⑥ 이견부주(二見不住) 신막추심(愼莫追尋)

3. 두 가지 견해 二見不住 愼莫追尋이견부주 신막추심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삼가 좇아가 찾지 말라. 두 가지 견해는 즉 양변의 변견(邊見)을 말합니다. 이 변견만 버리면 모든 견해도 따라서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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