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아쇼카 왕의 불교 귀의

수선님 2021. 12. 26. 14:03

아쇼카 왕이 없었다면 과연 불교는 세계적 종교가 되었을까?

종교가 확대되기 위해서는 제국의 후원이 필요하다. 중국의 진시황은 폭군의 이미지가 강하다. 논어에 군자는 하류에 처하는 말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하의 악이 다 거기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백제의 의자왕도 의롭고 자비롭다는 시호를 가졌지만 망국의 군주로 역사적 오해가 심한 왕이다. 반면 세종대왕은 성군의 이미지다. 아쇼카 왕은 바로 진시황과 세종대왕이 합쳐진 이미지다. 그 폭군에서 성군으로의 전환점에 불교가 있다.

 

아쇼카의 복지에는 동물도 포함되었다. 누군가의 생명을 선택할 권리가 우리 인간에게 있을까? 여기에는 생명 존중과 자비의 정신이 녹아 있다. 중국이 바뀌면 중국 문화권도 바뀐다. 하나의 문화권 속에서 주류 국가가 바뀌면 주변에도 영향을 주는 법이다. 마우리아 왕조가 불교로 변화하니 주변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은 그리스 로마의 신관을 정리하면서 기독교로 대체하는 사건이었다. 왕조는 계속 정복을 통해 땅을 넓혀 가며 새로운 자원을 획득하면서 발전해 나간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관리비용이 생산비용보다 더 들기 때문에 더 이상 정복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처럼 현대는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관리가 가능하다. 단 예외적으로 몽골 제국은 유목 문화였기 때문에 마구잡이로 확장이 가능했다. 조선도 후기에 가면 일자리는 정해져 있고 사람만 늘어나니 누군가는 없어져야 했다. 만약 조선에 불교가 있었다면 出家시키면 됐지만 불교가 없으니 대신 유생들이 죽게 된 것이다. 그것이 당파싸움 당쟁의 결과다. 기독교의 공인은 기존의 신관과 사고방식을 변화해 새롭게 바꾸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있을 때 대부분의 나라들이 금세 멸망한다. 신관의 변화란 하느님 중심에서 조상신 중심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때부터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은나라는 패러다임을 바꾸긴 했지만 얼마 못 갔다. 마우리아 왕조도 그리 번성하지는 못했다. 로마도 당시 가장 큰 명절이었던 동지를 예수 탄생일로 지정한 것인데 그것이 크리스마스다. 사실 동지는 전세계적인 명절이다. 왜냐하면 태양이 새로 시작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신들 모습 중 가장 강력한 모습은 태양과 번개다. 제우스 제석천 모두 벼락신이다. 유목민들도 黃道十二宮처럼 태양의 궤도에 맞춰 생활했다. 그래서 유목민도 양력을 사용한다. 우리 역시 음력을 사용하다 양력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아쇼카 왕의 불교 귀의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다.   

 

아쇼카 왕은 출가한 수시마의 아들을 만나며 귀의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잡아함경에 의하면 아쇼카가 귀의하기 전에 지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왕위 계승자가 아닌 아쇼카가 왕이 되자 반대 세력이 증가하니 아쇼카 왕은 반대 세력을 강하고 잔인하게 죽였다. 어느 날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오는 고문실에 문이 열린 것을 보고 탁발 나온 스님이 들어갔다 잔인한 참상을 보고 놀란다. 죽음이 초읽기에 들어선 짧은 순간에 스님은 아라한과를 증득한다. 신통 때문에 스님을 죽이질 못하자 아쇼카 왕이 듣고 직접 현장을 방문한 뒤 불교에 귀의했다는 설도 있다.   

 

아쇼카 왕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다. 인도 통일 후 거대한 불탑이 발견되었다. 아쇼카 왕은 탑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해체를 명령했다. 파 보니 항아리 안에 금덩어리와 글이 적힌 금판이 발견되었다. 금판에 기록된 내용은 아쇼카 왕 자신의 전생담이었다. 녹원전법상에 보면 5비구 모습과 그 양쪽 밑에 부처님 당시 가장 큰 포교 사건이었던 급고독장자가 기원정사를 지을 때 소등에 황금을 싣고 와 바닥에 금을 덮는 모습과 또 다른 한 쪽엔 모래놀이를 하던 한 꼬마가 모래를 한 움큼 떠서 부처님께 보시하는 아쇼카 왕의 전생담이 그려져 있었다.

 

부처님은 보시를 발우에 잘 담아서 내가 평소 앉고 눕고 경행하는 곳에 골고루 깔아 놓으라고 미소 지으며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난이 물었다. 부처님이시여! 왜 웃으십니까? 저 꼬마 애가 나에게 모래를 보시한 공덕으로 내가 열반한 200년 뒤 인도를 통일하는 대왕이 될 것이다. 단 모래를 보시하고 받은 공덕이기 때문에 인물이 추하고 성격은 안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금판을 보고 아쇼카 왕은 큰 충격을 받았다. 네가 나의 덕으로 이렇게 됐는데 내 탑을 허물면 되겠느냐? 탑을 허물은 값은 줄 테니 다시 덮어놓고 빠지거라 라고 써 있었다는 설이다.

 

禪雲寺엔 원래 3분의 지장보살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과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상 그리고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촤상이 있었다. 이 상들은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그런데 구입한 사람의 꿈에 지장보살이 나를 돌려보내라고 자꾸 나타났다. 그러자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지만 또 두 번째 주인의 꿈에도 계속 나타났다. 당시는 일제 강점기 때라 어떤 유물인지 정확히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장보살상의 출처를 알게 된 세 번째 주인은 선운사에 기증하였다.      

 

정조는 스스로 자신의 호를 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지었다. 만 개의 하천을 비추는 하나의 밝은 달과 같다는 뜻이다. 정조는 계속 아들이 생기지 않자 선암사에 기도를 부탁했다. 그 기도를 통해 순조를 얻었다. 때문에 순조는 선암사에 人天大福田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여기서 기도하면 대박 난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임금이 사찰에 남긴 특별한 표식이다. 아내를 그리워하며 밤을 세우다 하루 만에 머리가 하얗게 센 샤자한 이야기 같다. 이런 충격 때문에 잔인한 아쇼카에서 복지 자비의 아쇼카로 바뀐 것이다.

 

후에 우바국다 스님과 목갈리풋다 팃싸 2스님은 불교에 진력하는 사업을 펼쳤다. 아쇼카 왕은 매일 부처님을 생각하며 보리수 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다. 부인은 그런 모습에 화가 났다. 그런데 출타해서 돌아오자 보리수 나무는 밑동만 남아 있었다. 아쇼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옆에 있던 신하가 밑동이 아직 살아 있으니 잘 손보면 싹이 올라올 거라고 말을 하고 우유를 나무 영양제로 주자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는 그 보리수나무의 일부를 스리랑카로 가져갔다. 그러나 원래의 보리수 나무가 죽자 스리랑카에서 다시 인도로 모셔왔다.   

39회. 자현스님. 아쇼카 왕의 불교 귀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