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부처님의 사리와 팔만사천 탑

수선님 2021. 12. 26. 14:02

부처님 생애를 보면 Asoka 無憂樹가 등장한다. 부처님이 태어날 때 고통을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름은 근심이 없지만 아쇼카 왕은 근심이 많았다. 아쇼카 왕은 불교로 귀의한 후 전폭적으로 후원한다. 당시 불교는 비주류 종교였다. 아쇼카 왕은 8만4천 개의 탑을 만들었다. 부처님 근본8탑 중 라마그라마 탑을 빼고 7개 탑을 해체한 후 사리를 나누었다.

 

사리엔 2종류가 있다. 타다 남은 뼈와 후대에 나온 구슬사리다. 연대가 올라가는 사리는 모두 뼈사리다. 부처님 다비 중 향수를 부어 소화시킨다. 그런 다음 타고 남은 뼈를 회수하는 것이다. 그런 뼈를 쪼개 사리로 만든다. 부처님 시신인 법구도 사리다. 법구와 뼈가 사리의 원형이다. 그 후 구슬로 사리가 변화한다. 구슬 사리 후 신비적인 것들이 강조된다. 이 우주가 다 없어져도 사리는 남고 세상이 새롭게 시작되면 사리가 마니주로 바뀐다고 했다.

 

뉴델리 국립박물관에 있는 피프라와 불탑의 진신사리는 구슬은 없고 뼈뿐이다. 인도가 불교국가가 아니라 가능한 일이다. 통도사 사리는 신라시대 자장스님이 모셔온 부처님 두개골 사리로 추정된다. 중국 법문사 진신보탑은 불지사리로 아쇼카 왕의 탑 중 하나였다는 전설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아쇼카 왕의 탑이 2개나 있다. 만주 쪽 요동성에 아쇼카 왕 탑이 있다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요동성 육왕탑 이야기도 나온다. 전쟁이 계속 발발하는 최전방에 탑을 세운 이유는 부처님이 보호해 준다는 의미 때문이다. 탑은 방어 감시를 위한 망루 역할도 한다. 그리고 전남 장흥 천관산에도 네모난 돌 여러 개를 쌓아 놓은 아육왕 탑이 있지만 진짜가 아니다. 서 있는 돌을 숭배하는 우리 문화에서 나온 전설이다. 우리나라는 요동성 육왕탑 하나밖에 없다.

 

8만4천 탑은 많다는 뜻이다. 아쇼카 왕은 인도 전역에 佛塔을 세웠다. 중국에도 아쇼카 왕의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중국 사람들이 한다. 세상 이야기엔 사실도 있고 상징도 있다. 왜 저런 이야기가 전해지는지 의도를 알아야 한다. 아쇼카 왕은 너무 대단해서 전륜성왕이라 불렀다. 이런 아쇼카 왕을 계승한 사람이 신라의 진흥왕이다. 황룡사에도 장륙존상 이야기에 나온다. 아쇼카 왕의 진료를 옮겨 놓은 곳이 울산의 동축사이다. 이는 진흥왕이 아쇼카 왕보다 더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쇼카 왕은 부처님에 대한 가장 신심 있는 왕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4개의 대륙이 있다. 이 중 하나의 땅을 다스리면 동륜왕 2개를 다스리면 은륜왕 3개의 땅을 다스리면 금륜왕 4개의 땅을 다스리면 전륜성왕이다. 원래 아쇼카 왕은 동륜왕이지만 인도를 다 다스려서 전륜성왕이라 높여 부른 것이다. 불교군주론에 보면 군주란 힘을 쓰는 사람이 아닌 덕이 있고 백성이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민중이 선택한 권력이 군주다. 사람이 늘어나다 보니 훔쳐가는 사람이 발생한다. 조금씩 돈을 걷어 한 명의 현명한 사람을 뽑아 그 사람은 일을 하지 않고 문제만 해결하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 이야기와 비슷하다. 자리를 지키려면 군주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불교군주론은 장아함경의 세기경에 기록되어 있다.

 

8만4천 탑은 많다는 뜻이지 실제 존재하는 개수는 아니다. 탑은 불교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그래서 불교의 핵심 지역도 중국이라고 표현한다. 부처님이 계시던 동방의 근본8탑 중 7개를 허물어 전국으로 퍼트린다. 그리고 통치지배의 이념으로 불교가 그 위치를 차지한다. 문제는 탑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는 7개의 탑을 깨트려야 했다. 탑은 부처님의 몸과 같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과연 불교도가 탑을 깰 수 있을까 의심한다. 황룡사 목탑도 탔을 때 사리기를 지키기 위해 돌을 얹어 놓고 다른 곳으로 간 증거가 최근 발견되었다. 알고 있는데 왜 못 건드렸을까?

부처님 사리가 모셔진 곳은 信心 때문에 함부로 열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주 구룡사 대웅전 화재 때 그 안의 불상을 끄집어 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화재에서 끄집어내어 던진다면 불상은 살아남지만 반대로 부처님을 그렇게 던지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있다.

 

하나의 제국 속에서는 단일한 지배 이념과 사고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통치 정책이다. 그래서 한나라 당시에도 諸子百家들이 유학으로 독존했다. 기존 종교로는 안 되기 때문에 아쇼카 왕이 꺼낸 새로운 카드가 불교였는데 그 불교의 중간 거점이 탑이었다. 신앙심만 있다면 절대 탑을 깨트린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율장의 내용을 보면 탑을 깨트리는 것은 부처님의 몸을 깨트리는 것과 같이 불가한 일이지만 단 다른 탑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능하다고 써져 있다. 누군가 아쇼카 왕을 막아주려고 만든 내용 같다.

 

라마그라마 탑을 깨려고 했더니 용이 지키고 있어서 부수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아마 용을 믿는 주변 사람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도 월정사는 문짝만 태우면 된다고 군인들이 구슬린 뒤 스님들이 다 떠나자 불질러 버린 일이 있다. 반면 상원사 한암스님은 스님은 죽으면 어차피 다비에 붙여질 몸이니 내 걱정을 말고 어서 불을 붙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월정사는 소실되었지만 상원사는 지킬 수 있었다.

 

제국의 통치와 관련된 8만4천 개 탑 이야기다. 부처님 전생담을 보면 아쇼카 왕은 부처님께 모래를 보시한 아이였다. 동아시아 전통의 특징 중 하나는 왕의 계통에서는 종모법을 초월했다. 반면 인도나 유럽에서는 왕도 거부할 수 없는 종모법이 있었다. 임금은 된다는 룰과 임금도 신분제는 초월할 수 없다는 2가지 룰이 세상엔 있다. 아쇼카 왕의 용모가 추하다는 말로 보아 신분이 낮았을 것이다. 반면 동아시아는 피부색이 비슷해 신분을 나눌 수 없었다. 인도처럼 백인과 흑인이 공존하는 곳에선 신분 초월이 절대 불가능하다. 바라문교는 신분제도가 아주 투철하다.       

從母法 – 양인과 천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법

 

그러나 불교는 신분제가 모두 평등하다. 이 세상은 어떻게 태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했느냐가 중요하다. 아쇼카 왕의 신분이 낮았다면 이런 말이 종교적 체험뿐 아니라 위치를 확고히 하기에 더 유리했을 것이다. 불교의 계보는 석가모니 다음 마하가섭 아난 상나화수 그리고 우바국다로 이어진다. 아쇼카 왕의 성지순례를 인솔한 사람이 우바국다였다.

 

영국 식민지 시절 식민지 지배 하에 인도학이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불교 이야기가 서구에 전파된다. 그러나 부처님 같이 위대한 삶은 없다며 신화로 치부한다. 그러다 1896년 알렉산더 커닝햄에 의해 룸비니 아쇼카 석주가 발견된다. 석주엔 여기는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이라 이 동네 세금을 1/8로 감면해 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장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마치 네비게이션처럼 이런 내용을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그래서 부처님의 생애가 역사가 되는 사건이 된다.

 

인도 화폐의 국장으로 쓰고 있는 바라나시 석주와 사자상은 인도인들의 시위로 영국이 석주만 떼어서 가져 갔다. 우리도 일제 강점기 때 국보 86호 경천사 10층 석탑을 가져 갔다 찾아온 경험이 있다. 경천사 탑의 가루를 먹으면 행운이 따르고 질병이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든 탑이라 방치하면 그냥 없어질 수 있었다. 파사석탑은 지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형체가 없다. 당시 경천사 탑도 마찬가지로 사람 손 닺는 곳까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아쇼카 왕의 영향은 인도의 국장인 바라나시 석주와 인도의 국조인 공작새로 남아 있다. 마우리아 왕조의 상징이 공작새였다. 현장스님이 갔을 때 이미 석주는 빤질빤질 닳아 얼굴을 비추면 업이 보인다는 소문이 있다고 기록하셨다. 아쇼카 석주는 예전 알렉산더 동방원정 때 페르세폴리스 유적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중요한 점은 탑을 빼앗겼다는 부분이다. 인도 동방에만 있던 탑이 퍼져 정통성을 잃게 되었다. 여래香室은 부처님이 사시던 곳이고 탑은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곳이다. 香室은 향 연기가 끊이지 않는 집이란 뜻이다. 그리고 탄생 성도 첫 설법 열반 4군데를 중심으로 한 유적지를 개발한다. 성지순례의 초기 양상이다. 탑이 퍼져 정통성을 잃자 인도의 동방사람들은 성지의 개념을 확대해 다름을 강조했다.

불교가 너무 커지면 문제가 생기고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3차결집이다. 목갈리풋다와 팃싸 스님을 중심으로 1,000명의 스님들이 결집한다. 부처님 열반 직후 마하가섭에 의한 1차결집 야사에 의해 촉발되어 근본분열이 된 2차결집이 있었고 3차결집 때 처음으로 論藏이 성립된다. 인도는 땅이 크다 보니 조금씩 이야기가 맞지 않고 서로 통하지 않았다. 지금도 인도의 화폐 안에는 15종류의 문자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연결해 주는 해석서가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論이다.

40회. 부처님의 사리와 8만4천 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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