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1. 진응혜찬
덕의 기운 순수하게 넘치는 해동 제일 강사
한국불교의 근.현대 강맥(講脈)은 한영정호(漢永鼎鎬. 1870∼1948)스님과 진응혜찬(震應慧燦, 1873∼1941)스님에게서 시작됐다. ‘남진응 북한영’으로 불릴 만큼 영향력이 컸던 두 스님은 경운스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한영스님 행장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진응스님 행장은 구체적으로 전하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문헌과 본지가 입수한 자료를 중심으로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보았다.
“덕의 기운 순수하게 넘치는 해동 제일 강사”
왜색불교 침탈 맞서 임제종 설립 추진
화엄사 신명학교 개교 인재양성 앞장
○…출가 전에 한학을 배우고, 출가 후에는 10년간 내전을 두루 익혔지만 스님은 시대 변화에 발맞춘 교육불사와 인재양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행동으로 옮겼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08년. 당시 조선은 외세의 침략에 무기력한 상태였다.
진응스님은 사중스님들과 합심하여 화엄사 경내에 신학문 교육기관인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설립했다. 이때가 1908년 8월20일이다.
1909년 4월 신명학교 교원으로 취임한 스님은 같은 해 11월15일부터 1910년 6월까지 신명학교 교장을 맡아 ‘새로운 빛’을 비춰 조선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3년간 혼신을 다했던 것이다. 이때 진응스님은 30대 중후반으로 의욕적으로 교육 불사에 매진했던 것이다.
○…1910년 조선은 경술국치라 불리는 치욕을 겪었다. 일제와 그들의 앞잡이가 된 매국노들에 의해 일본에 강제 합병되었던 것이다. 불교계 또한 이회광 일파를 비롯한 몇몇 승려들이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병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에 분노한 박한영.진진응.김종래.한용운스님 등이 1910년 10월5일(음) 광주 증심사에서 승려대회를 열고, 이듬해 1월 순천 송광사에서 임제종을 세우기로 결의했다.
조선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병합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심에 진응스님이 있었다. 박한영 스님과 의기투합한 진응스님은 당대의 대강백인 경운스님을 임제종 관장(대표)으로 모시고, 친일파 승려들의 매종역조(賣宗易祖)를 규탄하는 등 조선불교 수호에 적극 나섰다.
○…스님은 1896년 응암스님의 법을 이은 후 조선의 여러 사찰에서 강사(講師, 지금의 강주에 해당)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했다. 구례 천은사 수도암(2차례), 화엄사 보적암, 산청 대원사 강사를 지낸데 이어, 화엄사 불교전수부(佛敎專修部).천은사 불교전문강당.범어사 불교전문강당 강사는 물론 1926년에는 묘향산 보현사 불교전문강당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 같은 행적은 스님의 활동이 호남에 국한되지 않고, 영남과 북한지역에서도 제자를 양성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진응스님 행장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또한 당시 수행일화를 기억하는 후학들도 모두 입적한 상태이다. 일제강점기 문헌을 통해 스님의 행장을 일부 복원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진응스님 회갑(回甲)을 축하하며 보낸 경운스님의 송(頌)이다. 이글에서 경운스님은 “해동의 강사엔 다시 짝하리 없네”라고 했다. 병인년(丙寅年,1926년)에 작성된 이 글은 <근대고승명인서한집>에 실려 있다.
“당년에 로지(露地) 백우거를 탔으니, 해동의 강사엔 짝하리 없네. 팔만용장이 몸 속에 무르녹아, 5천 국승이 혀끝을 내두르네. 법인은 일찍이 분좌탑을 이어받고, 세령은 지금 환갑, 찻잔에 가득하네. 나를 쫓아 경 말씀하던 일 돌이켜 생각하니, 춘풍추우(春風秋雨) 지금이 몇 해인가.”
○…경운스님이 경오년(庚午年,1930년) 음력 8월에 보낸 편지도 진응스님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 편지는 <삼소굴 소식>에 실려 있다.
“화상의 모습을 대해 보니 덕의 기운이 순수하게 넘치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고 복종하게 함이 20년 전보다 몰라보게 틀리는 것은 서로 이야기하는 말소리가 큰 종이 울리는 것 같고 이야기들이 모두 법을 섭렵함이라. 내가 마음으로 꺾이고 탄식하기를 예전 금강연화 회상의 부처님이 대승비구로 응신하심이 아닌가 하였는데 왜냐하면 박식하고 널리 읽었음이 이와 같이 격식에 뛰어날 수 있겠습니까. 나와 같은 노승의 유(類)들로서는 스승으로나 모실까 벗으로 사귀기는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운스님은 이 편지에서 진응스님에게 “박한영 스님과 더불어 폐와 간을 서로 비추며 한 마음으로 죽을 힘을 다하여 이 종교를 잡아서 마군에게 포섭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 18호에 ‘與震應講伯書(여진응강백서)’라는 편지가 있다. 필명은 구산산민(龜山山民)으로 되어 있는데 스님으로 추정된다. 산민은 ‘산에 사는 사람’으로 스님을 나타낸 것이며, 구산은 어느 곳을 상징하는지 정확하지 않다. 순창 구암사로 추정될 뿐이다.
○…진응스님의 강의에 대해 한 후학은 이렇게 평했다. <한국불교최근백년사연표>에 실린 내용으로 구술자는 김영해(金影海)로 되어 있다. “師(사)는 교리의 강설에 있어서 인도의 天親(천친).無着(무착)과 중국의 淸凉(청량).圭峰(규봉)도 양보하리만큼 능통하였으며 外典(외전)에 있어서도 世人(세인)이 경악할 정도로 해박하였다.”
이성수 기자
■ 수행이력 ■
응암스님 법맥 잇고
경운스님 지도 받아
‘南진응 北한영’ 명성
1873년 12월24일 전남 구례군 대전리에서 진원복(陳元福) 선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친은 전주이씨 이노인(李老仁) 여사. 스님의 세속 이름은 동해(東海)로 알려졌다. 호적에는 진진응(陳震應)으로 나온다.
어려서 구례군 광의면 인파리 서당에 입학해 3년간 <지나사략(支那史略)>과 <통감(通鑑)>등을 익혔다. 1887년 9월22일 구례 화엄사 봉천암(鳳泉庵)에서 오응암(吳應庵)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때 스님의 세수는 15세였다. 이듬해(1888년) 7월3일 구례 화엄사에서 박하월(朴霞月)스님에게 사미계를 수지했다. 구족계(具足戒)와 대승계(大乘戒)는 1913년 2월23일 하동 쌍계사 금강계단에서 박호은(朴虎隱)스님에게 받았다. 1888년 10월15일 구례 화엄사 봉천암에서 안거 이후 선교(禪敎)를 겸비했다.
스님은 10년간 교학 공부에 매진했다. 출가하던 해(1887년) 10월부터 1888년 10월까지 1년간 구례 화엄사 봉천암에서 박하월스님에게 사미과와 사집과를 수학했다. 이어 1890년까지 하월스님에게 사교과와 <능엄경>, <기신론>은 물론 외전에 해당하는 <고문진보(古文眞寶)>를 배웠다. 또한 1890년 2월25일부터 1893년 1월까지는 구례 천은사 수도암에서 정원화(鄭圓華)스님에게 <반야경>과 <법화경>을 배웠다. 이어 1893년 2월부터 1895년 1월까지 순천 선암사 대승암 강당에서 경운(擎雲)스님에게 대교과를 마쳤으며, <화엄경 현담 삼현십지> <불조통재(佛祖通載)> 등을 배웠고, 1895년 2월부터 1년간 전북 순창 구암사 강당에서 배설유(裵雪乳)스님에게 <선문염송>과 <전등록> 등을 익혔다.
1896년 3월19일 천은사 수도암 선사(先師) 영당(影堂)에서 전등식을 갖고 응암스님의 법을 이었다. 1897년 2월 화엄사에서 대교사(大敎師) 법계를 받았다. 또한 1926년 10월15일에는 평북 영변 묘향산 보현사에서 대선사(大禪師) 법계를 품수했다.
스님은 내외전을 익힌 후 강사(講師)를 맡아 후학양성에 전념했다. 천은사 수도암(1897년 2월~1899년 8월, 1900년 8월~1906년12월), 화엄사 보적암(1899년 8월~1900년 8월), 산청 대원사(1907년2월~11월) 강사를 지냈다. 1919년 4월에는 화엄사 불교전수부(佛敎專修部) 강사, 1920년 9월에는 천은사 불교전문강당 강사, 1923년에는 동래 범어사 불교전문강당 강사, 1926년에는 묘향산 보현사 불교전문강당 강사를 지냈다.
또한 신학문을 통한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08년 8월20일 화엄사내에 사립(私立) 신명학교(新明學校)를 설립해 인재를 길렀다. 이밖에도 스님은 1917년 화엄사 염송대회(拈頌大會) 종주(宗主)를 맡은데 이어 임제정종(臨濟正宗)의 조사선(祖師禪) 가풍을 선양하기도 했다. 스님은 해방을 불과 몇 해 남기지 않은 1941년 구례 화엄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69세, 법랍 54세였다.
진응스님의 법맥은 서응동호(瑞應東豪)스님을 통해 문성(汶星)스님을 거쳐 수진(守眞).유광(有光).현응(玄應).일우(一宇)스님에게 전해졌다. 또 만우(曼宇)을 통해 인철태경(印哲泰境)스님에게 이어졌다.
[출처 : 불교신문 2439호/ 2008년 7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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