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2. 동산혜일 - 위로는 은혜 보답하고 아래로는 중생 제도하라

수선님 2022. 2. 6. 12:25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2. 동산혜일

위로는 은혜 보답하고 아래로는 중생 제도하라

 

 

부산 범어사는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으로 한국불교의 종가(宗家)나 마찬가지. 수많은 선지식이 범어사에서 수행정진하며 깨달음의 향기를 세상에 드러냈다. 이 가운데 동산혜일(東山慧日, 1890~1965) 스님은 퇴락한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교단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동산스님의 삶과 수행을 비문과 법어집 등 각종 문헌과 후학들의 증언으로 다시 구성했다.
           

               

“위로는 은혜 보답하고 아래로는 중생 제도하라”
   퇴락한 한국불교 중흥 원력 앞장서 실천
   예불 도량청소 울력 지키면 ‘불화 없어’

<사진> 한국불교의 새로운 역사를 쓴 동산스님. 불교신문 자료사진

○…지금도 범어사는 새벽 예불이 끝나면 대중들이 비를 들고 도량을 청소한다. 어둠이 채 가시기 전에 일주문부터 마당까지 비질을 하면 어느새 땀이 흐르고, 번뇌마저 어둠과 함께 사라진다. 범어사의 이같은 전통은 동산스님 때부터 비롯됐다고 한다. 어른스님이 앞장서 비를 드니 다른 대중들도 자연스럽게 동참했다.


동산스님은 조계사에 머물때도 매일 새벽 마당을 쓸었다. 동산스님은 “예불, 도량 소제및 울력, 공양시간 등 세가지만 잘 지키면 대중들 사이에 불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대중들의 화합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대중이 화합하여 함께 수행하는 일보다 즐거운 것은 세상에 없다”며 화합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스님은 대웅전은 물론 모든 전각을 참배했다.


 매일 저녁 12시부터 새벽 1시까지는 남북통일과 인류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스님에게 수행과 정진 그리고 울력은 생활 자체였으니, 후학들에게 모범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전국 각지의 스님들이 부산으로 피난왔다. 이때 범어사는 곳곳에서 온 스님들로 가득 찼다. 동산스님은 스님들을 흔쾌히 받아 들이고, 어려움을 보살펴 주었다. 운허스님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바 있다. “6.25 동란으로 각지의 法侶(법려)가 범어사로 모이는데 다년간 그들을 金魚禪院(금어선원)에 수용하고 護提(호제)하였다. 나는 그때 師(사)의 會上(회상)에서 一夏(일하)를 지내는데 師(사)는 顔貌(안모)가 동탕하고 語音(어음)이 낭랑하여 일견에 夙善(숙선)의 顯現(현현)임을 감탄케 하며, 사람을 접함에는 款誠(관성)이 극진하고, 法(법)을 의논함에는 鉗(겸추)가 冷嚴(냉엄)하여, 正令(정령)을 호제하는 이의 恩威(은위)를 엿볼 수 있었다.”


○…동산스님은 엄할 때는 추상(秋霜)과 같았다. 누구도 감히 그 앞에서 말을 꺼내기 어려울 정도였다. 물론 잘못을 저질렀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자상할때는 한이 없을 만큼 자애로웠다고 한다. 어느날 범어사 마당에 나이 많은 여신도가 미륵암을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냥 어디로 가라고 해도 될 터인데, 동산스님은 보제루 앞까지 안내하고, 자세하게 알려 주었다. 또 한번은 재가제자에게 “절대로 불교를 떠나지 말고,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간곡하게 당부한 적도 있다.


○…1950~60년대 교단을 가난했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았으며, 사회 전체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불교계는 정화불사로 인해 살림이 더욱 궁핍했다. 적지 않은 정재(淨財)가 재판 비용 등으로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당시 종정으로 교단을 이끌며 한국불교 중흥을 도모했던 동산스님은 궁색한 종단 살림을 외면할 수 없었다. 스님이 조계사에 계시면 조계사 살림이 걱정 없었고, 범어사에 계시면 범어사 살림이 염려 없었다고 한다. 동산스님이 부산에서 서울로 출발한지 두시간 정도 되면 쌀을 실은 트럭이 조계사에 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스님은 복혜(福慧)를 구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말 경주 불국사 다보탑 앞에 외국스님과 한국스님들이 서 있었다. 한국을 방문한 태국스님들이 불국사를 참배한 후 경내를 살펴보는 중 이었다. 동산스님은 다보탑 앞에 있는 석사자(石獅子)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태국스님들에게 말을 건냈다. “지난번 스님들 나라에 가서 후대를 받았으니, 고마운 일입니다.” 동산스님은 효봉.청담스님 등과 함께 태국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한 일을 회고했다. 이어 스님은 “저 석사자를 보십시오”라고 했다. 석사자를 바라본 태국스님들은 동산스님의 뜻을 궁금해 하며 답했다. “네 보입니다.” 동산스님이 말을 이었다. “그 소리가 들립니까?” 태국스님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영문을 몰라하는 태국스님들에게 동산스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태국스님들에게 선물 할 것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사진>   동산스님의 입적을 애도하는 청담스님의 친필 조사. 1965년 5월 2일자 대한불교(불교신문)에 실려있다. “큰법당이 무너지고,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구나”라는 구절은 동산스님이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청담스님은 ‘동산대종사호법봉찬회장’을 맡는 등 동산스님의 정신 계승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1954년 12월10일 전국비구비구니대회를 맞아 당시 종정 동산스님은 ‘종정훈화(宗正訓化)’를 발표했다. 이 글에는 수행자들의 자세와 한국불교의 중흥에 대한 스님의 원력과 당부가 담겨있다. 일부 내용을 원문 그대로 옮겼다.


“우리가 士農工商(사농공상)에 不參(불참)하고 離父母(이부모) 棄親戚(기친척)함은 出家學道(출가학도)하야 佛祖(불조)의 慧命(혜명)을 이어 自己旣(자기기) 充足(충족)하고 推己之餘(추기지여)하야 上報四重恩(상보사중은)하고 下濟三途苦(하제삼도고)할 志願(지원)이 名利(명리)를 爲(위)하거나 住持(주지)를 願(원)하거나 寺刹財産(사찰재산)을 구하지 않임은 여지금 발바오난 歷史(역사)가 證明(증명)하는 바입니다. 道在一箇則(도일개즉) 一箇重(일개중)하고 道在天下則(도재천하즉) 天下重(천하중)이라 하난 純一(순일)한 정신하에 수행정진할 따름인데 우리나라 불교교단이 왜적의 蹂躪(유린)을 받아 40여년간 顚倒混亂(전도혼란) 상태에 빠져 徒弟養成(도제양성)도 못하고 도제양성을 못함에 따라 大衆佛敎(대중불교)를 시현치 못하야 佛種子(불종자)가 거의 떨어지게 되어 항상 염려하든 中(중) … ”


○…동산스님은 은사 용성스님의 수행가풍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용성선사 어록> 발간에 참여했으며, 발문을 직접 썼다. 이 발문은 은사에 대한 고마움과 불법을 받아들여 정진에 몰두해야 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당부하고 있다. “슬픈 일이다. 때는 바야흐로 성인께서 가신 지가 오래다. 魔(마)는 강하고 法(법)은 약하다. 如來(여래)의 正法(정법)이 波旬(파순)의 魔說(마설)로 변질되어 가고 臨濟(임제)의 宗風(종풍)이 야간의 긴 울음소리에 떨어져 가고 있다. 만일 禪師(선사)와 같이 行(행)이 높고 知慧(지혜)가 원대한 자가 아니라면 아무리 說(설)한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동산스님이 손수 지은 ‘노사자찬(老師自贊)’이란 글이 있다. 이 글에서 스님은 윤회하는 삶을 살지 말고, 치열하게 정진하여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당부를 하고 있다. 원문과 한글풀이는 다음과 같다.

 

“元來未曾轉豈有等二身(원래미증전기유등이신)

三萬六千朝反覆只這漢(삼만육천조반복지저한)”

 

“원래 일찍이 전한 바 없으니, 다시 어찌 第二身(제이신)이 있으랴.

100년이라 3만6천날이, 다못 이놈의 반복이라”

 

이성수 기자

 

■ 행장 ■

 

내ㆍ외전 두루 섭렵
불교정화 불사 추진


스님은 1890년 2월25일 충북 단양군 단양읍 상방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하성창(河聖昌)선생이고 모친은 정경운(鄭敬雲)여사. 본명는 동규(東奎)였다. 일곱 살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고향의 익명학교(益明學校, 지금의 단양초등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이어 경성으로 올라와 중동학교(中東學校)와 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하다 출세간의 원력을 내었다. 이때가 24세로 부산 범어사에서 용성(龍城)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한암(漢岩)스님에게 사교(四敎)를 배우고, 영명(永明)스님에게 대교(大敎)를 수료했다.


1934년 8월. 범어사 금어선원의 동쪽 대나무숲을 지나던 스님은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대나무들이 어지럽게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이같은 경지를 은사스님에게 말씀드리자, 용성스님은 법인(法印)을 전수했다.


이후 스님은 보림(保林, 깨달음의 경지를 더욱 굳건히 하는 수행)하면서 후학 양성과 쇠퇴한 불교를 일으켜 세우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정화불사의 선두에 나선 것은 물론, 네팔과 태국에서 열린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등 부처님 가르침을 펴는데 노력했다. 스님은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며 중생을 제도했다.


스님은 1965년 3월23일(음력) 미질(微疾)을 보인지 하루만에 홀연 원적에 들었다. 세수는 66세이고, 법랍은 53세였다.


입적에 들기전 마지막으로 남긴 휘호가 있었다.

 

“佛說一切法(불설일체법) 爲度一切心(위도일체심)

若無一切心(약무일체심) 何用一切法(하용일체법)”

 

“부처님이 일체법을 설하신 것은, 일체심을 건지려고 한 것이니,

네가 만약에 일체심이 없다면, 일체법을 갖고 무엇에 쓰겠는가”

 

[출처 : 불교신문 2441호/ 2008년 7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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