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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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님 2022. 2. 6. 12:11

아버지는 선암사 스님…네 살까지 절에서
‘출가하라’ 부친 뜻따라 머리 깎았다면…

[3000호 특집] 한국문학의 거장, 조정래

데스크승인 2014.04.14  08:47:53 성남=하정은 기자 | tomato77@ibulgyo.com  

아버지는 순천 선암사 스님이셨다. 시조시인 조종현(1906~1989) 선생이다. 열여섯에 선암사에서 머리를 깎은 부친은 ‘신식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출가했다고 한다. 선암사에 인물 하나 났다는 소문 속에 아버지의 불경공부는 최고수준에 이르렀고, 스물넷에 어렵다는 법사시험을 통과했다. 일제강점기 스님들의 비밀결사조직 ‘만당’(卍黨)에 들어가 총재 만해스님과 함께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아버지다.

“아버지는 선암사에서 결혼을 한 최초의 승려가 되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총독부는 그 당시 최대의 교세를 확보하고 있던 불교를 장악해야만 식민통치가 용이해진다는 판단아래 종교 황국화 정책을 추진한 것입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젊은 승려들을 결혼시켜 일본식의 ‘대처승’을 만드는 것이죠. 그러니까 저는 일제의 은혜로 풍경소리와 목탁소리를 태교삼아 태어난 목숨입니다.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을 해야 도리지요. 그래서 저는 <아리랑>을 쓴 것입니다.”

조정래 작가의 인터뷰는 지난 3월25일 분당에 있는 조 작가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사전에 팩스로 보낸 19문항의 인터뷰 질의서에 대해서는 원고지 30매 육필로 답을 적어 우편등기로 보내왔다. 이 날 인터뷰는 이 원고 외에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차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진행됐다.

기라성같은 대하소설을 낳아 ‘국민작가’로 대우받는 한국문학계 거장 조정래 작가에게도 엄마는 애틋한 그리움의 대상. 어머니가 평생 지녔다 남겨준 108염주를 들여다보는 모습. 김형주 기자

-최근 한 매체에서 건강진단 결과 신체나이 40대 후반으로 나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비결은 소식과 규칙적인 식사, 국민보건체조라고 밝혔는데,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떤지.

“평생 습관대로 아침 6시에 기상하고 나이가 들면서 15년 전쯤부터 앞당긴 밤 11시에 잠자리에 듭니다. 그동안에, 내년 6월쯤 독자들을 만나게 될 새 작품 취재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취재는 작품의 성패와 직결되는 중대사이기 때문에 작품을 쓸 때와 똑같은 열도(熱度)로 집중해야 합니다.”

조 작가가 낳은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 등의 대하소설은 전32권에 이른다. 하루에 써내는 분량도 어마어마하다. 그의 어깨가 살짝 굽은 이유도 소설쓰기에 집중한 결과다. <태백산맥> 집필 당시 온몸이 저리고 등이 조각조각 깨지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당시 동네에 있는 학교 운동장을 빠르게 걷고 손체조를 했더니 말끔하게 나았다고 했다. 작가는 이후로 지금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국민보건체조를 한다. 여행지에서도 빠짐없이 한다. “게을러서 못하는 것이지, 건강유지에 정말 특효”라고 강조했다.

 

-얼마 전 100쇄를 돌파한 소설 <정글만리>는 집필 전 자료를 섭렵하고 심층취재를 해서 5~6년 전부터 노트 90권에 빼곡하게 담았고, 500~600페이지에 이르는 중국 관련 책을 80권 독파했다고 들었습니다. 소설작업이 너무 고단하고 가혹한 것 아닌가요.

“사자나 호랑이처럼 가장 기운 세고 날샌 동물들도 사냥을 할 때는 그 사냥감이 어떤 동물이든 간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고 합니다. 작가에게 글쓰는 일이란 바로 그 ‘영혼의 사냥’ 아니겠습니까. 독자들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그 영혼들이 감동에 사로잡히게 하려면 어떠해야 할까요.

거기엔 어떤 별난 요령도 특별한 방법도 없습니다. 가장 진지한 태도로 최선을 다하는 준비가 있을 뿐입니다. 미련하도록 많이 연습한 선수가 결국은 승리를 쟁취하듯 열심히 취재하고 많이 고민한 작가만이 남다른 작품을 써내게 됩니다. 그건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앞서간 수많은 예술가들이 감동적인 작품으로 그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조정래의 문학에는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중추를 이룹니다. 사

회ㆍ역사의식과 문학성을 조화롭게 잘 승화시키는 작품을 지향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모든 예술은 인간들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발명품들입니다. 모든 발명품들의 절대요건은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어야 합니다. 문학도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인간적인 문제와 갈등들을 인간적으로 바꾸려는 모색과 노력, 그 과정에서 생성하는 것이 사회의식이고 역사의식입니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참구입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문학성을 강조한 나머지 사회의식이 빈약해지고 역사의식이 증발해버리는 작품들이 꽤나 나타나고는 합니다. 그건 영혼과 육체의 균형이 잘 맞지 않는 경우처럼 불구의 문학입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납니다. 문학에서 사회ㆍ역사의식과 문학성을 조화롭게 승화시키는 것은 꼭 필요한 문학적 요건입니다.”

 

-역사는 무엇이며, 어떤 가치를 통해 유의미한 것입니까.

“역사는 우리 인간의 삶 자체이며 생존의 의미입니다. 특히 우리처럼 작은 반도국가일수록 역사에 대한 인식은 중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지난 5천년 역사 속에서 크고 작은 외침을 931번이나 당했습니다.

그럼 앞으로의 5천년은 어떨까요? 단단히 정신차리지 않으면 또 931번의 외침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또 이런 말도 있지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우리가 역사를 꼭 인식해야 할 이유입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아리랑>에서 해방전후 나라의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놓고 좌우로 갈라졌던 한국의 현실을 그린 <태백산맥>, 그리고 근대화와 민주화로 대변되는 <한강>까지, 한국 근현대사 100년을 32권의 대하소설로 형상화한 셈입니다. 세계문학사상 전무후무한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가 자신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슬프고 처절한 역사의 땅에 태어나서 하필 문학을 하려 한다면, ‘무엇을 쓸 것인가’ 이것이 저의 평생 화두였습니다. 우리의 뼈저린 아픔과 고통의 역사에 대해서 쓰자. 그걸 제대로 써내지 않는다면 이 땅의 작가라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이 세월이 많이 흘러도 문학작품을 통해서 슬프고 쓰라린 지난 역사를 추체험해서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씌어진 작품이 그것들입니다.”

 

-조정래 작가의 대표작은 뭐니뭐니해도 <태백산맥>입니다. 1986년 출간이후 지금까지 800만부 이상 판매된 소설이지요. 전10권 원고지 1만6500매 분량에 등장인물만도 480명에 달합니다. 분단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태백산맥>은 선생님에게 어떤 작품인지요. 집필당시 일화도 궁금합니다.

“<태백산맥>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분단의식을 극복하고 뛰어넘어 진정한 민족통일의 길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이 과제는 분단시대를 사는 모든 작가들에게 짐지워진 숙제이고, 운명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어떻게든 그 숙제를 풀어서 그나마 홀가분하게 이 세상을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독자들은 잘 모를 수 있으나 작가들은 모두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일화라…, 수없이 많지만 아무래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로 고발당하고, 만 11년 동안 고생하다가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을 꼽아야 되겠지요. 필사본…. 그것 참 묘한 일입니다. 아들이나 며느리가 베껴쓰는 건 자식들이니까 그렇다치더라도, 일반 독자들이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벌써 여섯이나 완성을 시켰고, 또 쓰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권도 아닌 10권짜리 소설을…. 이건 세계 최초의 일이고, 기네스북에 올라갈 사건입니다. 그 이유를 꼭 찾아내자면 한가지 답밖에 없습니다. 소설을 얼마나 잘 썼으면….(웃음)”

불교신문 지령 3000호 특집 인터뷰 질의서에 대해 일일이 육필로 답한 30여장의 원고지.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에는 각각 법일스님, 공허스님 등 스님이 등장합니다. 스님을 중요한 인물로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인지요.

“그것 때문에 특정 종교편향이라는 트집 아닌 트집도 잡혔습니다. 그러나 그건 편향이 아니라 그 시대와 승려들의 활동이 일치했던 필연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독자들도 오해 없기를 바라고, 그런 인물 배치를 따라 시대상을 이해해 나가는 것도 확실한 역사ㆍ사회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입니다. 선생님의 삶 속 책은 무엇이었습니까.

“책…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책처럼 중요한 것이 또 있겠습니까.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있습니까? 사람답게 살려면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책은 ‘영혼의 밥’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 그걸 단적으로 표현하면 ‘사람이길 포기한 시대’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지만, 특히 작가에게 책은 작품을 쓰게 하는 안내자이며, 길잡이이고, 스승이며, 길벗이고, 등불이고, 등대이며, 끝없이 솟는 샘이고, 파고 파도 고갈되지 않는 황금 광맥입니다. 스마트폰에 빠져 아까운 인생들 낭비 탕진하지 마시고 책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스마트폰 중독은 마약중독보다 그리고 도박중독보다 더 나쁘다고 합니다.”

 

-TV습관에 젖은 독자의 관심을 붙들기 위해 작가는 자신에 대한 철두철미한 통제와 치열한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작가에겐 시대의 변화에 맞춰 자신의 작품을 전달해야 하는 소명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 문자란 애초에 말의 한계인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멀리 그리고 오래오래 ‘전달’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문자 표현물 중에서 감동을 유발시키는 예술품이 문학입니다. 그러니까 시와 소설을 쓴다는 일은 독자들을 감동시키면서 그 작품들이 오래오래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쟁 치열한 현대생활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너나없이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문학작품에 눈길을 돌리고, 그리고 읽어서 감동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건 어쩌면 소나 말에게 억지로 물을 먹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학작품들을 읽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습니다. 영화, TV에서 인터넷 그리고 휴대전화의 진화에 따른 그 막강한 흡입력까지….

그런 장애물들에 맞서서 독자들이 소설을 읽게 하려면, 일반인들이 하루 8시간 노동을 하는데 작가는 그 2배, 16시간의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실천하려고 노력해온 것이 저의 지난 세월입니다. 그런 노력없이 독자들이 책을 안읽는다고 불평스런 타령을 하는 것은 작가들의 무책임한 직무유기라고 생각합니다.”

 

-현 정부에 대해 평가한다면, 이 시대의 최대 과제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이제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직 평가내릴 시기가 아니고, 조급하고 성급한 것은 늘 일을 그르칠 뿐입니다. 평가는 이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해야지요. 이 시대 최대 과제…, 그건 어느 시대나 동일하겠지요. ‘국민들이 편하고 행복감을 느끼며 살게 하는 것’. 이것이 정치가 달성해야 하는 최대 과제이고, 최고 목표입니다.

사회의식이 별로 없는 것으로 평가되는 시인 릴케마저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밥을 굶으면 그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마지막 집세 70만원을 남겨놓고 세 모녀가 자살을 했습니다. 이런 삭막한 세상을 향하여 이 나라 정치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못내 궁금합니다. 그들이 거침없이 행사하는 권력은 국민들이 국민을 편안히 살게 만들라고 준 것인데 말입니다.

모든 정치인들은 정신차려야 합니다. 국민은 어리숙하고, 민심은 정처 없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국민은 냉정하고, 민심은 혹독한 것이 그 본질입니다. 6ㆍ25 이후의 최대 국난인 ‘IMF 사태’를 불러온 김영삼과, 그 아까운 국민의 혈세를 20조가 넘게 퍼부어 ‘4대강 죽이기’에 성공한 이명박을 국민들이 어떻게 취급하는지, 그게 좋은 실례입니다.”

 

-현재 한국불교에 대해서도 평가한다면…. 이 시대 불교는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우리 불교는 상대적으로 사회봉사가 계속 허약하고 미약합니다. 큰 불사를 일으키는 대신 적극적 사회봉사를 실천해야 합니다. 절의 외형이 크다고 불교의 사회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사회 봉사를 통해 종교적 신뢰를 확보하고 영혼의 감동을 유발시킬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불교의 힘이 될 것입니다.

스님들에 관해서…, 글쎄요…, 잊을만 하면 벌어지곤 하는 낯뜨거운 사건들 때문에 불교도라고 말하기가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왜 살찐 스님들이 그리도 많습니까. 살이 찐 만큼 불신이 깊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비만은 만병의 근원입니다.”

 

 

조 작가는 또 “종교의 논리화가 필요한 시대에 불교는 특히 그 역할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설법을 잘하고 불교사상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대중으로부터 동의를 구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하는데 스님들이 그러한 역할을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도 했다.

조 작가는 한국불교 스님들에 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전했다. 일부 스님들의 부적절한 ‘탐욕’이 드러나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다. 반면 성철스님과 법정스님, 도법스님과 수경스님에 대한 존경심은 감추지 않았다. 지난 2001년 고(故) 정채봉 작가의 영결식장에서 먼발치에 있던 법정스님이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 너무 민망했던 일화를 들려주면서, ‘마음의 빚’이라고 표현했다.

특히 “만해 한용운스님과 같은 위대한 선지식을 ‘활용’해서 포교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감흥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실제 조 작가의 서재에서 부처님상 외에 타인의 얼굴은 유일하게 만해스님이다. 작가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불교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불교는 가장 넓고 깊은 철학의 바다이고, 가장 심오한 지혜의 샘입니다. 그 가르침만 올곧게 따르면 마음의 평정과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지고의 신앙입니다.”

조 작가의 서고 책상 위에는 <반야심경>을 사경한 원고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8년 전 ‘반야심경 3000번 사경’이라는 원력을 세우고 시작했는데, 소설 쓰느라 회향하지 못하고 도중하차했다고 한다. 사경한 원고뭉치들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언젠가는 쓸거야.”

 

-부친께서 생전에 출가를 권했다고 하셨는데, 왜 출가를 하라고 하셨는지, 불교에 대해 어떤 말씀을 들려주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식구 여덟, 너희들 여섯 형제가 전쟁중에 하나도 상하지 않고 무사했던 것은 다 부처님의 가피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은혜에 보답키 위해 자식 중 하나는 출가를 해야 하는데, 장남은 좀 곤란하고, 차남인 네가 출가하는게 좋겠다,’

그런데 저는 문학을 할 욕심으로 거기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민주적으로 제 의사를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과욕을 부리지 마라. 남을 속이려 하지 마라. 늘 겸허해라. 선택한 일에 성심을 다해 노력해라. 이런 말씀으로 불교를 생활화하게 했습니다.”

조정래 작가의 서재와 서고에는 ‘책 반 불상 반’이다. 세계 각국에서 ‘이운’해온 크고작은 불상은 저마다 사연과 추억을 갖고 노작가의 서가를 장식하고 있다. 김형주 기자

조 작가는 “글을 써오는 40년 동안 승려나 신부의 수도생활이라는 것이 뭐 별것이겠는가…”라고 생각했다며, “글감옥에 갇혀 절연상태로 10년 20년 세월을 보내는 것, 그것은 또다른 수도가 아닌가”라고 했다.

고3 어느날 아버지가 불러내서 느닷없이 ‘너 부처님 앞으로 가라’고 했다. 이 때 아버지가 내민 종이 한 장에 조 작가는 기절할 뻔 했다. 몇 달 전 아버지가 직접 지어준 호 인천(人天)이란 법명이 적힌 승적이었다. ‘조계사 승적 168호’. 조 작가는 그 번호를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에 “나는 문학을 하겠다”고 반기를 들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만해스님을 거론하면서 출가해서도 마음만 있으면 뭐든 크게 이룰 수 있다며 설득에 들어갔다. 하지만 “만해선생은 백년에 한번 태어날까 말까 한 분”이라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뜻을 접었다.

조정래 작가는 만약 그 때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조계사로 출가한 저는 어디로 갔겠습니까. 조계사 장학금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로 직행했지요, 그럼 바로 김초혜(72, 부인, 동국대 국문과 출신)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곧 내밀한 연애가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바 부부의 인연은 전생 천년, 현생 천년, 후생 천년의 고리로 엮어지기 때문에 김초혜와 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미 맺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두 사람은 감추어진 사랑을 10년이고 20년이고 이어갑니다. 아, 그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여…. 그 다음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글을 쓰고 싶은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끝내 파계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또 “출가하여 인천스님으로 살았다면 아마도 불교개혁운동을 펼치지 않았을까”라고 하면서 “내가 조계종에 들어갔으면 아마 고약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큰소리로 웃었다.

 

-칠순을 넘겨보니 인생이 무엇인지,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어떤 경지가 보입니까. 특히 작가의 삶이라는 것에 관해 생각해 본다면.

“칠순을 넘기면서부터 이런 저런 물건들을 자꾸 상자에 넣어 묶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떠날 준비를 하는 거지요. 저는 옛날 소년 시절에 옻칠을 한 관을 대청 천장에 매달아놓은 노인네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느덧 그 노인네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다가온 죽음을 몇 번이고 꼴똘히 생각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몇 년 전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죽음과의 화해, 죽음의 수용이 이루어졌다고 할까요. 작가의 삶, 죽을 때까지 써야 하는 것이고, 글을 쓰다가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떠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천복을 꿈꾸는 것도 부처님께서 경계하신 탐욕 부리기겠지요.”

 

-미술대를 가려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 지금도 그 꿈은 아련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그림을 그려보고는 합니다. 쥘부채에도 직접 산을 그려서 여름이면 들고 다닙니다. 더 소설을 쓰기 어려워질 10년 후쯤부터 붓글씨와 그림그리기를 하며 인생 황혼을 마감할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물감 대줄 돈 없다’는 아버지의 단호한 한마디에 화가의 꿈을 접었던 조 작가는 요즘도 손자들에게 줄 50가지 색 크레용이나 24가지 색연필 같은 걸 살 때 자신의 것도 함께 구입한다. 그는 “상실한 꿈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여러가지 물감을 사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늙어 그 복잡한 구성을 해야 하는 소설을 쓰기 어려워질 때 새 인생을 시작하듯 차분하게 그림을 그릴 예정”이라고 했다. 조 작가의 그림은 전북 김제의 ‘아리랑 문학관’과 전남 벌교의 ‘태백산맥 문학관’에 전시돼 있다.

 

-부인 김초혜 시인을 ‘날로 새롭게 피어나는 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 평생 같이 산 부인을 꽃으로 비유했네요.

“육체의 꽃만 꽃입니까? 영혼의 꽃은 나이 들수록 더욱 찬란하게 피어납니다. 저의 그런 말에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적 과장’이라고 비난인지 야유인지 모를 말들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상대방의 ‘영혼의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가엾고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부부란 늙어갈수록 더욱 간절히 필요한 삶의 지팡이입니다.”

-안철수 의원 정책네트워크 ‘내일’의 이사직을 맡고 있는데 정치에 관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에 곱지 않은 시선도 있습니다.

“그건 직접적인 정치 관여가 아니라 간접적인 자문역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신당이 창당되지 않고 민주당과 연합하게 되면서 그 조직은 자연소멸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의 그 간접역할마저 없어진 것이지요.

안철수 의원과 그런 관계나마 맺어진 이유는 그의 ‘새정치’에 많은 국민들이 지지 의사를 표명했던 것처럼 저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관심을 썼던 것입니다. 저는 권력을 갖기를 원하지 않되 정치를 감시ㆍ감독하기 위해서 줄기차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소임이고 의무이기도 합니다.”

정치계에서 조 작가에게 보낸 러브콜은 숱하게 많았다. 그는 “권력을 탐하진 않는다”며 “정치욕심 가졌다면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때 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5년 계약직일 뿐”이라며 “작가는 영원히 작가인데, 내가 왜 이 자리를 떠나느냐”고도 했다.

 

-갈등과 대립, 반목과 오해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자비와 지혜로서 이를 조정하고 해소해야 할 불교계 역시 때로는 대립하는 형국입니다. 이 시대 종교내 갈등, 종교간 갈등을 어떻게 바라봐야 합니까.

“그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나 갈등과 오해 그리고 대립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나쁜 것만은 아니고 지혜롭게 풀고 조화를 꾀해 가면 사회의 발전적 동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바로 그런 건설적인 길을 모색하는 정치제도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종교 내부의 갈등도 당연히 있을 수 있는 것이되 그것을 세상이 다 알도록 노출시키지 말고 조심조심 내부에서 해결해 나가는 슬기와 요령을 발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간의 갈등도 당연히 있게 마련입니다.

그 해결방법은 일찍이 부처님께서 설파하셨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경배하라.’ 모든 종교가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 서로서로 존중하면 그들은 모두 이 땅을 화평하고 복되게 만드는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영혼 내세 다루는 불교소설, 금생 마지막 불사”

조 작가는 이번 생애 마지막 작품에 관해 귀띔했다. “내 인생 마지막 작품은 인간의 영혼과 내세문제를 다루는 불교소설이 될 것 같아. 10년 후 쯤? 내 나이 여든 한둘 되겠지. 그걸 쓰면서 소설은 이제 손 놓으려고. 내 삶을 통해 내 마음에 쌓인게 있고, 삶에 해답도 있을 것이고…. 불교는 물론이고 예수교 이슬람교의 사상도 담고, 어쩌면 더럽고 추한 종교인의 모습도 소설 속에서 형상화할 수 있겠지.”

 

-마지막으로 지령 3000호를 맞은 불교신문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불교는 놀랄만큼 경전의 한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교의 성경처럼 요약된 한글 휴대경전이 있고, 그 경전으로 설법과 예불이 이루어진다면 불교의 교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늘 아쉽고 안타까워하는 부분입니다. 불교신문은 50년이 넘도록 불경 한글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요. 잡다한 기사 축소하고, 한 면씩 불경 한글화에 지면을 지속적으로 할애하여 앞으로 또 50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젊은 세대들은 점점 더 한문과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신도들은 물론이고 불교를 알고자 하는 일반 대중들을 상대로 한 가교역할을 더욱 충실하게 해나가기 바랍니다. ‘신문’이란 늘 깨어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조정래 작가는 …

1943년 전남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197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등단으로 치면 올해로 문학인생 44년에 접어들지만, 작가가 처음 문학을 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으로 우여곡절 끝에 절에서 나온 아버지가 벌교의 한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에 심취했다. 장편소설 <대장경>과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정글만리>, 청소년위인전 <한용운> <김구> 등 다수의 책을 출간했다.

 

[불교신문3000호/2014년4월9일자] 

 

 

 

 

 

 

 

 

 

 

 

 

아미타파 (광명의 물결)

일심정토 염불수행 일체경계 본래일심 일체가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모든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은합니다. 오념문 일심의 법과 부처님의 지혜에 귀명합니다. 자연과 생명의 청정한 광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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