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의 핵심 中道
般若心經과 千手經은 불자들이 처음 절에 와서 가장 먼저 외우게 되는 경이다. 불법의 핵심인 無我 空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바라밀다의 지혜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가기 위해 매번 예불 때마다 외운다. 8만대장경을 요약하면 화엄경이 되고 화엄경을 요약하면 금강경이 되고 금강경을 요약하면 반야심경이 된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大<마하>智<반야>度<바라밀다>心經
오늘 알아볼 것은 無我와 空에 관련된 반야심경의 해석이다. 반야심경은 제목을 제외하고 총 260자의 한자로 요약한 반야부 경전의 핵심 사상이다.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5온이 空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사리자여! 色이 空과 다르지 않고 空이 色과 다르지 않으며 色이 곧 空이요 空이 곧 色이니 受想行識도 그러하니라. 번역 당시 당태종 이세민의 이름을 피해 관세음보살 대신 관자재보살로 표현했다는 설이 있다. 반야바라밀다=空
五蘊=色受想行識
受는 처음 느낌이다. 좋거나 괴롭거나 아니면 不苦不樂의 첫 번째로 받아들이는 Simple한 느낌이다. 想은 첫 느낌 이후의 생각이다. 생각의 작용들이 자꾸 일어나는 것이다. 行은 생각을 지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점점 확장되어 간다. 想이 심리라면 行은 심리현상에 해당된다. 여러 생각들을 덧붙이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認識이 되어 어떻다고 규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문광스님을 보면 처음 좋고 나쁜 느낌이 일어나고 그 다음 그런 감정을 바탕으로 외모에 연상을 더해 어떤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認識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다. 그런데 이 나가 空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空을 설명하는 말이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受想行識 亦不如是 色 자리에 受想行識을 넣어도 된다. 처음엔 다르지 않다고 말하다 色 그대로 空이라 말하고 있다. 卽은 불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단어다.
마조스님의 卽心是佛 마음 그대로 부처다. 마음과 부처가 있는데 그대로 卽해 있다. 마음이 부처와 다르지 않다 와는 언어표현이 좀 다르다. 번뇌卽보리 생사卽열반 나고 죽는 것과 열반은 다른데 이것이 卽해 있다. 卽은 떨어져 있지 않고 딱 붙어있다는 것이다. 곧 卽은 원래 둘인 적이 한번도 없던 딱 붙어있는 상태다. 손바닥과 손등은 같은 놈이다. 다르지 않다. 원래 두 개가 있는데 다르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본래 卽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본의 미술평론가 Yanagi Muineyoshi는 卽에 성불이 있다고 하였다. 탁월한 견해다. 卽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양변의 모든 반대 구조들이 알고 보면 卽해 있다. 善과 惡이 卽해 있다. 色 자리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諸法이 空相이다. 相은 일방적으로 본다 서로 생각 돕다는 여러 뜻이 있다. 相의 木은 자체만 가지고 보면 보고 있는 대상으로의 모양이 된다.
性宗 相宗
언어문자를 붙일 수 없는 자리다. 생각이 끊어진 법신 자리다. 49년을 설하고도 한 마디도 한 바가 없는 자리다.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자리다. 그것이 性 자리다. 性宗은 언어문자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相宗은 모양이 있는 대상이다. 金剛經 般若心經 같은 반야부 경전은 모든 걸 부정하고 본래 없다며 반야를 강조하는 空사상을 주장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4성제 8정도를 놓고 하나하나 낱낱이 분석한다. 그렇게 해서 唯識學까지 온다.
性宗에서는 마음이란 본래 없다고 말한다. 말과 글이 끊어진 言語道斷의 자리로 開口卽錯이기 때문이다. 반면 相宗은 受想行識의 복잡한 마음의 작용은 분명히 있으니 이것을 하나의 대상으로 놓고 한번 분석해 보자는 것이다. 7식 아뢰야식 8식까지 있다고 보고 끝까지 들어가 보자며 분석하는 것이 唯識學이다.
Sigmund Freud는 꿈을 통해 사람의 정신을 분석해 본 사람이다. 꿈 속의 깊은 무의식을 통해 정신과 마음을 분석하였다. 불교는 꿈으로는 夢中意識을 보거나 7식까지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8식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주장한다. 따라서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8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는 꿈을 대상으로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相宗으로 아뢰야식의 微細妄念까지 분석하고 보니 있는 것이 아니더란 것이다.
이것을 轉識得智라 한다. 번뇌에 오염된 8식을 질적으로 변혁하면 인식의 전환이 와서 지혜<空 般若>를 얻는다는 것이다. 有의 세계로 들어가 轉識得智를 해도 般若로 들어가고 생각과 모양이 끊어진 세계를 바로 보고 들어가는 참선도 반야로 들어간다. 반면 교학은 性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그래서 부파불교 아비달마 구사론이나 성유식론 등은 相을 분석해 들어간다. 궁금하니 분석해서 마음의 끝 깊이까지 들어가 보니 본래 있는 것이 아니더란 것이다. 마치 바람없이 파도가 그냥 일어나는 것과 같다. 色인 줄 알고 들어가 보았는데 空이더라. 그래서 無我는 영원한 실체가 없는 空이더란 것이다.
般若心經은 본래 空하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일주문 들어오자 마자 바로 空을 제시한다. 일단 불문에 들면 空부터 알라는 것이다. 본래 色과 空 2개였는데 같은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반야심경은 지혜제일 사리자가 나오고 금강경은 해공제일 수보리가 나온다. 智慧는 空을 말한다.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느니라.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고
용수보살의 八不中道도 이런 어법을 쓰고 있다. 양변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卽해 있다고 쓸 수도 있고 A도 아니요 A가 아닌 것도 아니라고 쓸 수도 있다.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대상으로 놓고 不A不B의 형태로 설정하는 것이다. 여래는 不來不去 온 것도 아니요 간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양변이 끊어진 세상으로 만나는 것이 중도다.
是故 空中無色 이제부터는 空이라 해놓고 없을 無 자로 끝낸다. 5蘊 <6根+6境=12처> 6識 18界가 다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은 바깥의 세상 내 안의 세상 다 포함해서 18계다. 그런데 空 가운데는 재미있게도 18계가 없다는 것이다.
눈도 코도 버젓이 여기 있는데 눈도 없고 코도 없다니 황당하다. 내 안에 눈도 있고 밖에 색도 있고 다 있는데 왜 없다 할까? 눈 앞에 사물이 분명히 있는데 없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된다. 그러면 소리는 어떤가? 누구나 1분 전의 소리는 없다는 것을 금방 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분필은 1분 뒤에도 있으니 분명히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소리의 대상은 금방 없어지지만 눈의 대상은 금방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소리로 많이 깨칠 수 있다 해서 능엄경에 耳根圓通이 나오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은 소리를 관한다. 그래서 귀로 깨치는 것이 굉장히 좋다.
經典을 볼 때 눈으로만 보면 안 된다.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내는 것이 좋다. 염불이나 독경도 계속 소리 내어 하면 空사상이 훨씬 더 잘 이해된다. 소리가 중요하다. 공자 논어에 보면 成於樂이 나온다. Sound는 위대한 깨달음의 형태가 된다. 기독교 요한복음 1장 1절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되어 있다. 소리 즉Logos가 있었다. 태초의 말씀이 하나님이고 생명의 빛이다. 창세기에도 빛이 있으라 하심에 빛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말 다음에 빛이 있었다. 소리가 먼저고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음이다. 이래서 불교를 공부하면 기독교의 교리도 회통될 수 있다.
無明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고 고집멸도도 없으며 지혜도 얻음도 없느니라.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空>를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모든 보살들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구경열반을 얻는다. 세상 모든 것이 空하다면 너무 허망한 것 아닙니까? 空을 알게 되면 마음에 걸림이 없다. 또 걸림이 없으니 공포도 없다는 것이다. 집착하지 않으니 있으나 없으나 상관이 없다.
이 모두 반야바라밀다<空>을 깨닫고 난 뒤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그런데 12緣起도 없다니 쇼크다. 空 가운데는 12緣起도 없다는 것이다. 空을 깨닫게 되면 無明에서 老死까지 단박에 끊어진다. 12緣起는 緣으로 이어진다. 어떻게 끊어낼 것인가? 12군데 이어진 緣을 다 끊어낼 필요가 없다. 한 군데만 끊어도 다 끊어진다. 그런데 하나를 끊어도 완벽하게 끊어야 한다.
我相을 먼저 끊는 것이다. 空이라는 지혜로 12緣起를 끊는다. 取는 귀를 당긴다는 뜻이다. 愛緣取 애착이 가면 그 다음부터 땡겨대기 시작한다. 取緣有 취하면 있음의 세상이 펼쳐진다. 有緣生 있으면 역사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육도를 윤회하고 번뇌망상의 현상들이 나오게 된다. 뭘로 끊는다? 반야바라밀다 空이라는 지혜 즉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無我로 끊으면 된다. 그러면 원래 나고 죽는 것이 없고 영원한 것이 없다는 확실한 깨달음으로 끊어진다.
乃至는 甚至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乃=게다가 至=어디 어디에 이르기까지. 無明도 없고 무명이 다하는 것도 없고 行이라는 것도 없고 행이 다한다는 것도 없고 識도 없고 식이 다하는 것도 없다. 12연기를 다 쓰지 않고 乃至란 말로 다 커버한다.
空 가운데는 苦集滅道도 없다. 모든 고통은 원인이 있다. 다 있다고 본 것이다. 고통이 있고 고통의 원인이 있고 멸하는 방법에 8정도도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空 가운데는 고통의 실체가 없다. 고통도 無我다. 멸할 것도 없다. 멸할 실체도 없다. 깨달음도 실체가 없다.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지혜도 없다. 얻을 바도 없다. 법정스님의 無所有는 바로 소유할 수도 없고 소유할 바도 없다는 뜻이다. 가질 수도 없고 가질 바도 없다. 내가 원한다고 얻을 수도 없고 얻을 바도 없다. 여기까지는 모두 空 이야기다.
보살님들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공포도 없고 전도몽상도 없고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 역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 그런데 얻을 것이 없다고 하더니 여기서는 얻었다고 한다. 無智亦無得 지혜라 할 것도 없고 반야라 할 것도 없다 Vs 故得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어느 것이 맞나? 도대체 얻은 것인가 안 얻은 것인가? 앞의 無智亦無得은 공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공을 완벽하게 이해하니 바로 그 점에서 正覺을 얻었다 말씀하시는 것이다. 부처님은 얻을 바도 없고 얻을 수도 없는 것을 얻었다. 그러니 여기서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중도다.
緣起 無自性 空을 잘 알아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緣起로 이뤄져 空이다. 空은 無自性 영원한 실체가 없는 것으로 無我이며 空이며 반야다. 그래서 空의 세상에 들어가면 공에는 깨달음이니 지혜니 하나도 없다. 그러나 空에 의지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니 空에서 다시 有의 세계가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空卽是色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眞空妙有다. 眞空을 통해 妙有를 얻었다. 眞空은 없다는 세계이고 妙有는 있다는 세계다. 空과 有가 卽해 있는 것이다.
지혜라고 할 것도 없고 얻을 바도 없다는 진리의 한 모퉁이와 空 이전의 有가 아니라 空을 거치고 난 후 있다는 妙有의 세계다. 정각을 얻었다는 妙有는 앞의 空과 卽해 있다. 이것을 中道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眞空妙有는 中道다. 모든 것이 空과 다르지 않고 공과 卽해 있다. 있음의 세계와 없음의 세계가 卽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般若心經의 핵심이다.
有業報而無作者 <잡아함경>
業報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업보는 있는데 지은 사람은 없다. 無我인데 윤회는 한다. 업보가 있다는 有의 세계와 지은 사람이 없다는 無의 세계가 卽해 있는 것이다. 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妙有의 세계가 오기 전에 먼저 空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세계다. 空은 단순히 이론으로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有의 세계는 이해할 수 있지만 空의 세계는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불문에 들어오면 반야심경 금강경을 늘 受持讀誦하는 것이다.
금강경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부정하는 空과 無我라는 말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짧은 般若心經엔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법이 들어 있다. 모든 부처님은 얻은 바 없이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하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이 주문을 오종불번이라 한다. 번역하지 않는다. 가버린 자여 가버린 자여 저 언덕 너머<피안>로 가버린 자여 저 너머로 잘 가버린 자여 보리<깨달음. 반야의 지혜>여 만세!
왜 게제게제를 아제아제로 발음하는가? 18세기 조선 진언집의 반야심경 표기. 중국어 발음 게제<Jiedi> 바라게제 바라승아제 모지 승사하
五種不飜 – 현장스님이 제시한 것으로 산스크리트 원전을 한문으로 옮길 때 낱말을 번역하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적은 5종류.
10회. 문광스님. 반야심경의 핵심 중도 중에서
[출처] 801.반야심경의 핵심 중도|작성자 Ink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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