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와 액을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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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온(五蘊)과 공(空)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고(苦)에 대해서 먼저 설명하고,
공(空)과 오온(五蘊)을 이야기하자.
고(苦)는 범어로, Duhkhata(두카타)라고 한다.(원래 범어는 로마자에다가 위아래에다 줄도 긋고, 점도 찍어서 쓰는데, 나의 자판의 형편상 점과 줄을 치지 못했음.)
Duhkhata는 우리말로, '어긋난다, 맞지 않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럼 범어의 '어긋난다, 맞지 않는다'라는 말을 고(苦)라고 번역을 했을까?
불교의 핵심은 깨달음과 해탈이라고 한다.
그 깨달음과 해탈을 하기 위해선,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것은,
우리의 삶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보면,
잠시도 머무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삶이,(삼라만상) 잠시도 머무르지 않으므로,
머무르지 않음을 알아서 머무르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내어야만, 깨달음에 합치하고, 해탈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머무르지 않는 바에 마음을 내어라.' 라고 하고 있다.
삶은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데,
마음은 늘 자신의 맘에 맞는 곳에 머물려고 한다.
즉, 거룩하고, 선하고, 옳고, 편하고, 아름다운 어떤 곳에...
그래서 늘 마음은 삶과 어긋난다. 맞지 않는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지금의 삶인데,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그것을 바라고 있으니,
삶과 마음이 맞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늘 마음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고라고 번역한 것이다.
금강경에서 "머물지 않는 바에 마음을 내라."고 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고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만 고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고가 바깥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인줄 알면 평생가도 고를 벗어날 수가 없다.
고는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임을 알아야 하며,
또, 그 만들어내게 된 원인을 알아야만,
고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그 고라는 것이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내가 변해야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고에서 벗어나는 최상의 방법이자 시작이니까.....
원래의 우리의 삶은 언제나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또 주위의 환경 역시 그러하여서 늘 물과 같이 흐른다.
그리고 한번도 같은 적이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맞든 맞지 않든 상관없이 다가왔다 사라진다.
그러나 마음은 늘 과거에 머물러서,
과거의 기억 속에 있는 마음에 맞는 것의 잣대를 들고
분별 판단하니,
즉,
좋은 것과 나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이쁜 것과 못난 것을 가리어서,
심지어 부처님의 말씀조차도 자신의 마음대로 해석하여서,
그것에 머물려고 하니까,
(호오[好惡], 선악[善惡], 미추(美醜)의 잣대를 세워서 가지고 있다는 말,)
잠시도 머물지 않는 삶과
머물려고 하는 마음은 언제나 어긋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삶이라는 현장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어서,
자신이 원한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과 여건들에 의해서
자신이 바라는 대로 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물아일체나, 주객미분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라는 마음과 현실은 언제나 어긋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원하는 현실이 늘 오지 않으니까,
삶이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삶은 고해라고 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삶이 고해가 아니라,
삶을 자신의 마음대로 하려는 그 마음이 바로 고해인 것이다.
즉,
삶은 잠시도 머물지 않는데,
마음 저 혼자 삶에다가,
거룩하고, 선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해놓고는,
삶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투덜대고 있는 것이다.
거룩하느니 선하느니 아름다우니 하는 잣대를,
마음 저 혼자 만들고,
거룩하지 않고 선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 역시
마음 저 혼자 지어 내어놓고는...
그리고 세상은 많은 사람과 만물이 다 저대로 주인공인데,
이 마음은 저 혼자만 주인공인줄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것만 일어나길 바란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과 만물이 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니,
한 사람의 마음에 그것이 맞아떨어지겠는가?
그런데도 이 마음이란 놈은 욕심이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고해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끝내 자신이 문제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괴롭지 아니하리요?
그래서 고의 원인은,
내가 있다는 그 한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이 잠시도 머물지 않는 삶을 자신이 정해놓은 어떤 가치에 머물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제,
공에 대해서 알아보자,
공을 알아서 일체의 고를 뛰어 넘었다. 라고 하였다.
그럼 공은 고를 만들어내는 원인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야 하겠다.
고를 만들어내는 원인은, 삶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잣대이다.
그리고 그곳에 머무르려고 하는 그 마음이다.
그럼 공은 바로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 우리의 진정한 삶인 것이다.
한번도 머무르지 않는 삶,
머무르지 않기에, 이것이다 하면 이미 흘러가 버리고,
그래서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우리의 삶,
그래서 선현들이,
'송곳조차 꽂을 수 없는 곳'이라고 하였고,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다.'고 했고,
'티끌조차 않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러하다.
잠시도 머무르지 않으므로,
이것이다 할 수도 없는 것, 그래서 한 물건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것, 그래서 송곳조차 꽂을 수 없는 곳,
늘 흘러서 머물지 않으므로, 티끌이 붙을 수 없는 것,
이 것이 진정한 우리의 삶이다.
있느냐 하면 없다. 그래서 공이다.
없느냐 하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색이다.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고 흘러가지만,
순간순간 존재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말처럼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음은 삶을 늘 머물게 하려고 하고, 그러니 그것을 분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삶은 잠시도 머무르지 않으므로 분별의 대상이 아니다.
분별할라치면 이미 사라져 버리므로....
그래서 분별할 수가 없으므로 또한 공이다.
그러나, 없느냐 하면, 우리는 너무나 엄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색이다.
순간순간 존재하지만, 잡으려하면 이미 지나가 버려 존재하지 않는(색즉시공)
그러면서도
언제나 모습을 보이는 모든 것(공즉시색)
이래서 반야심경의 뒷 글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한다.
없느냐 하면 있고, 있느냐 하면 이미 사라져 버리므로 없는 그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진정한 삶인 것이다.
그리고 물아일체이고 주객미분이니 너와 내가 없다.
모두가 하나이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하나라는 말도 붙을 곳이 없다.
모두가 빨갛다면 빨갛다는 말이 필요할까?
그래서 또 공한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만물은 또 모두 다른 모습으로 순간순간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색이다.
모든 것이 있지만, 너와 나라는 분별이 없다.
그래서 주객미분이요 물아일체이다.
그러니 색이 바로 공이요 공이 바로 색이다.
색이 공이요 공이 색임을 알면
마음에 드는 것과 들지 않는 것을 분별치 아니하고,
받아들이게 되고
아니 마음에 들고 들지 않음이 애초에 없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니, 그 얼마나 큰 허공인가?
그래서 또한 공이다.
이는 허공이 크고 넓어서, 중생과 부처나, 선인이나 마귀나 두두 만물을 다 품어 안는 것처럼...
오온에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데,
오온인들, 어찌 그곳에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느냐..
안팎의 모든 만물이 흐르는데 우리의 오온인들 흐르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리고 오온이라는 말 자체가 밑에 설명을 다시 하겠지만,
오온은 물질을 가르키는 색(色)과,
정신작용을 가르키는 수(受), 상(相), 행(行), 식(識)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사물 하나하나가 오온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물아일체, 물심일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온이 모두 공할 수밖에....
보이는 모든 것이 공임을....
다시 요약을 하면,
'조견오온개공'이라는 말은,
우리의 삶이 잠시도 머물지 않으므로(다가오는 삶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내는 우리의 모든 감정과 생각과 마음까지도 잠시도 머물지 않으므로)
분별하여 이것이냐 하면, 이미 사라져 버리니,
이것을 진정으로 알아,
머물지 않음이 우리의 진정한 삶인 줄 알고, 분별치 아니하고,
또, 너와 내가 없으니 물아일체라,
물아일체이니 분별 자체가 불가능함을 알게 된다.
이것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을
오온이 공함을 밝혀 안다고 하는 것이다.
오온이 이미 공함을 알았으니,
머물지 않는 바에 마음을 내게 될 것이요,
또 너와 내가 없어져서 시비가 없어지니
어찌 마음에 들고 들지 않음이 있을까?
우리의 삶은 우리의 마음에 들고 들지 않음에 있지 않는 것이다.
그냥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다.
그 인연사(因緣事)를
올 때에는 분별하지 말고 소중하게 받아들여서 모시고,
갈 때에는 집착하지 말고 미련없이 보내드리는 것이 바로,
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올 인연은 오지마라고 막아도 반드시 오고,
갈 인연은 가지마라고 잡아도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잠시도 쉬지않고,
인연은 이어지고 이어진다.
그래서 올 때에는 잡지 않을래야 아니 잡을 수 없고,
갈 때에는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모든 인연이 이것이다 하고 잡으려고 하면,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색이 바로 공이요, 공이 바로 색임을 아는 것이요.
고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 일체의 고액을 넘어가다)인 것이다.
불교의 진리는 이렇게 단순하다.
아니, 불교의 진리뿐 아니라,
모든 진리는 이와 같아서 너무나 단순하다.
과거에 머물지 말고, 순간순간 인연된 머물지 않는 삶 위에 마음을 내면 된다.
순간 순간 머물지 않는 삶에 마음을 내면,
매 순간 그것을 알아차리는 나라는 것이 없게 되고,
나라는 것이 없게 되니, 분별하는 놈이 사라지게 되고
분별하는 놈이 사라지니 분별이 떨어지고,
분별이 떨어지니, 좋고 나쁨이 떨어지고,
좋고 나쁨이 떨어지니 미움과 원망이 떨어지고,
미움과 원망이 떨어지니 집착이 떨어지고,
집착이 떨어지니 악업이 사라지게 되고,
악업이 사라지게 되니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다.
고통이 사라지니, 늘 여여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고 한다.
머물지 않는 것에 티끌조차 붙을 수가 없어서,
송곳하나 꽂을 곳이 없는 데,
무슨 세울 것이 있어서,
거룩한 진리가 있고, 찾아갈 진리가 있고,
또 그를 위해서 나아감이 있겠는가?
지금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데,
그것이 우리의 진실한 삶이고,
우리 또한 그렇게 살고 있는데...
반야바라밀을 설명하는 글에서도 말했듯이,
우리가 행할 때에는 늘 분별하는 놈이 없어서
아상(我相)이 없는 삶인데,
다만 그 마음이란 놈이 자꾸만 머물려고 하니,
분별함이 생기고,
분별함이 생기니,
거룩함이 생기고, 찾아갈 진리가 생기고,
또 그를 위해 나아감이 생기는 것이다.
다만,
그 마음만 내 버려 두면 된다.
헌데
사람들은 생각이 들어오면 마음이 그것을 판단하여서
마음에 들면 따라가든지, 들지 않으면 쫓아내든지 해야 한다.
어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안해서 못산다.
왜냐하면, 마음은 늘 어떤 의미 있는 것에 머물러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니까.
그러면서도
자신이 잘못되어 있음을 조금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하는 짓이다.
우리의 진정한 존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마음에 속아 살아서
마음이 자신인줄 알고 살아왔기에,
마음이 하는 짓에 속아서 그것이 진짜인양,
마음이 괴로워하면, 자신도 괴로워하고,
마음이 즐거워하면 또한 자신도 즐거워하는,
한번도 주인된 삶(머무르지 않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이다.
이제 마음을 그냥 내 버려 두라.
마음 역시 내가 만든 것,
내버려두면, 스스로 성품이 없기에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우리가 마음을 건드리지 않으면,
마음 역시 우리를 간섭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 고액(度一切苦厄)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머무르지 않는 삶을 그냥 살아왔듯이,
그 마음이란 놈만 내버려두면
또한 그렇게 아무 문제없이 그냥 살아갈 것이다.
미움도 원망도 집착도 없고, 악업도 짓지 않고,
항상 생각이 끊이지 않으나,
일어나는 마음에 매이거나 끄달리지 아니하여서,
늘 마음이 고요한 상태로 살아가게 는 것이다.
이미 부처이듯이......
관자재보살은 우리의 삶이 바로 공 그 자체이므로,
오온 역시 공함을 알고,
머물지 않는 바에 마음을 내어서 일체의 고액을 넘어가신 것이다.
* 오온
색온(色蘊) : 눈에 보이는 것, 변해 없어지는 것, 이 색은 모양을 나타내는 형색(形色)과 빛 을 나타내는 현색(顯色)의 두가지로 크게 나누어진다.
수온(受蘊) : 밖으로 버투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작용. 인상작용(印象作用)
상온(相蘊) : 받아들인 인상을 머리에 떠올리는 작용. 표상작용(表象作用)
행온(行蘊) : 의지(意志)와 행동의 작용
식온(識 ) : 의식작용(意識作用)
색온은, 둥글고 네모난 것과 같은 형태가 있는 물질을 가리켜 형색이라고 하고, 붉다든가 푸르다든가 하는 색깔을 빛에 의한 것이므로 현색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상행식은 색에 대한 마음을 말하는 것인데 감정과 지각과 의지와 의식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형태가 없는 정신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그 중에 식(識)은 마음의 중심이 되므로 이를 심왕(心王)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受),상(相),행(行)은 의식위에 나타나는 기능이기 때문에 이를 심소(心所)라고 한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오온(五蘊)이란 결국 형태가 있는 것과 형태가 없는 것의 집합을 뜻하는 것으로,
주관(정신작용)도, 객관(물질상태)도 일체의 사물 하나하나가 다 오온의 집합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본다.
즉, 물심일여(物心一如), 또는 색심불이(色心不二)로 보는 것이 불교의 근본태도인 것이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이 끊임없이 흘러서 잠시도 머물지 아니하므로
잡을래야 잡을 수가 없으니,
그것을 옳다 그르다고 하여서 규정하려고 하면,
그 순간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되어서,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물아일체이니,
객체와 주체가 없다.
그러니 잡는 자가 애초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얻을 수가 없으니 공하다는 것이다.
이 오온을 다시 두가지로 분류하여서
분별하지 않는 오온을 오온이라고 하고,
분별하는 오온을 오취온(五趣蘊)이라고 나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이라는 것은 오취온을 말하고 있다.
[출처] (반야심경 공부 3)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작성자 둘이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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