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도(尋牛圖) ***
법당의 양측면과 뒷면에는 보통 불교에 관한 벽화들이 장식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심우도’와 ‘팔상도’이다.
심우도는 본성을 찾아 수행하는 단계를 동자(童子)나 스님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서 묘사한 불교 선종화(禪宗畵)이다.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
묘사한 것으로, 심우도(尋牛圖) 또는 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한다.
대개는 소와 소치는 동자가 등장하며 때로는 소와 스님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모두 10개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소는 인간의 본성에, 목동은 불도(佛道)의 수행자에 비유된다.
중국에서는 소 대신에 말로 상징한 시마도(十馬圖)가,
티베트에는 코끼리로 상징한 시상도(十象圖)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 화제는 중국 송나라 때 곽암(廓庵) 선사가 처음으로 시우도를 그리고
시우도송(十牛圖頌)을 지었다고 하며, 또는 청거(淸居) 선사의 작이라고도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마음 닦는 일을 소치는 것에 비유하는 것은 불교 역사에서 유래가
깊은 것으로, 〈아함경 阿含經〉에서는 목우12법(牧牛十二法)을 설했고
〈지도론 智度論〉에서도 11사(十一事)를 설했으며,
중국 선가(禪家)의 여러 조사들도 소를 마음의 다스림에 비유한 예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송대에 이르러서 이것이 체계화되고 정형화된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송나라 때 제작된 곽암본과 보명본(普明本)
두 종류가 전래되어 조선시대까지 그려졌으나 근래에는 곽암본이 더
일반화되었다.
두 본은 용어나 화면형식에서 차이가 있는데 곽암본은 제목을 심우도라 하고,
모든 화면에 원상(圓相)을 만들고 그 안에 그림을 그린 데에 반하여
보명본은 제목을 목우도라 하고 10번째 화면에만 원상을 만든 점 등이 다르다.
[1] 소를 찾아 나서다(尋牛)
심우(尋牛)-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말로 소는 보이지 않고
목동이 망과 고삐를 들고 혼자서 잃어버린 소를 찾아 산 속을
헤매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불도 수행자의 입문단계에 해당된다.
종내불실하용추심(從來不失, 何用追尋)
유배각이성소재향진이수실(由背覺以成疎, 在向塵而遂失)
가산점원기로아차(家山漸遠岐路俄差)
득실치연시비봉기(得失熾然是非鋒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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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잃지 않았는데 어찌 찾을 필요 있겠는가.
깨침을 등진 결과 멀어져서 세간을 향하다가 길을 잃었다.
고향집에서 점차 멀어져 갈림길에서 어긋난다.
얻고 잃음의 불이 타오르니, 옳고 그름의 분별력도 어지럽게 일
어나네.
게 송
망망발초거추심(茫茫撥草去追尋) 수활산요로갱심(水 山遙路更深)
역진신피무처멱(力盡神疲無處覓) 단문풍수만선음(但聞楓樹晩蟬吟)
아득히 펼쳐진 수풀을 헤치고 소 찾아 나서니,
물은 넓고 산은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힘 빠지고 피로해 소 찾을 길은 없는데,
오로지 저녁 나뭇가지 매미 울음만이 들리네.
화답송, 석고희이(石鼓希夷)화상
지관구구향외심(只管區區向外尋) 부지각저이니심(不知脚底已泥深)
기회방초사양리(幾回芳草斜陽裏) 일곡신풍공자음(一曲新豊空自吟)
오로지 급하게 밖을 향해 찾으나,
발 밑 진흙 수렁이 이미 깊은 줄도 모르네.
몇 번인가, 방초 우거진 석양 속에서,
풍년가를 부질없이 불러 봤네.
화답송, 괴납대련(壞衲大璉)화상
본무종적시수심(本無 跡是誰尋) 오입연라심처심(誤入烟蘿深處深)
수파비두동귀객(手把鼻頭同歸客) 수변임하자침음(水 林下自沈吟)
본대 자취도 없는데 누가 찾는고,
우거진 등 넝쿨 깊은 곳에 잘못 들어 왔구나.
손으로 코 잡고 함께 돌아가는 나그네가,
물가 나무 아래서 스스로 침음한다.
[2] 소의 자취를 발견하다(見跡)
견적(見跡)-소발자국을 발견했다는 말로 동자가 땅에 난 소발자국을
더듬어가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수행자가 꾸준히 공부하다 보면 혼돈 중에서도 어렴풋이 본성의
자취를 느끼게 된다는 의미이다.
의경해의(依經解義) 열교지종(閱敎知 )
명중기위일금(明衆器爲一金) 체만물위자기(體萬物爲自己)
경전에 의거해 뜻을 헤아리고
가르침을 배워서 그 자취를 안다.
그릇들이 다 한가지로 금임을 밝혀내고,
우주만물이 곧 자기라는 사실을 체득한다.
정사불변(正邪不辨) 진위계분(眞僞계分)
미입사문(未入斯門) 권위견적(權爲見跡)
바름과 삿됨을 가려내지 못한다면,
어찌 참됨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으리오.
아직 입문하진 않았으나
임시 방편으로 '자취를 본다'고 한다.
게 송
수변림하적편다(水?林下跡偏多) 방초리피견야마(芳草離披見也?)
종시심산갱심처(縱是深山更深處) 요천비공즘장타(遼天鼻孔 藏他)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럽게 많으니,
방초를 헤치고서 그대는 보는가 못보는가?
가령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 해도
하늘 향한 등창코를 어찌 숨기랴!
화답송, 석고희이(石鼓希夷)화상
고목암전차로다(枯木巖前差路多) 초과리곤각비마(草 裏 覺非?)
각근약야수타거(脚 若也隨他去) 미면당두차과타(未免當頭蹉過他)
고목나무 바위 앞에 엇갈린 길도 많다.
풀더미에 발이 걸리니 잘못인 줄 알았느냐?
발자취를 따라서 줄 곧 따라만 간다면,
정작 마주칠 땐 그냥 지나치리라.
화답송, 괴납대련(壞衲大璉)화상
견우인소멱우다(見牛人少覓牛多) 산북산남견야마(山北山南見也?)
명암일조거래로(明暗一條去來路) 개중인취별무타(箇中認取別無他)
소를 보는 사람은 적고 소를 찾는 이는 많다.
산의 북쪽과 남쪽을 보는가 마는가?
밝고 어두운 한 줄기로 오가는 길,
그 속에서 느껴야지 따로 있지 않다네.
[3] 소를 보다(見牛)
견우(見牛)-소를 발견했다는 말로 동자가 멀리서 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이나 달아나는 소를 쫓아 달려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수행자가 사물의 근원을 보기 시작하여 견성(見性)이
가까웠음을 뜻한다.
종성득입(從聲得入) 견처봉원(見處逢源) 육근문(六根門)
착착무차(着着無差) 동용중(動用中) 두두현로(頭頭顯露)
수중염미(水中鹽味)색리교청(色裏膠靑)잡상미모( 上眉毛)
비시타물(非是他物)
소리를 쫓아 들어가니,보는 곳마다 근원과 마주친다.
여섯 기관의 문마다 한치도 어긋남이 없네.
움직이는 작용 속에 낱낱이 바탕을 드러냈다.
물 속의 소금 맛이요, 물감 속의 아교인데,
눈섭을 치켜뜨고 바라봐도,별다른 물건이 아니로다.
게 송
황앵지상일성성(黃 枝上一聲聲) 알난풍화안유청(日暖風和岸柳靑)
지차갱무회피처(只此更無回避處) 삼삼두각화난성(森森頭角畵難成)
노란 꾀꼬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고,
햇볕은 따사하고 바람은 서늘한데 언덕의 버들은 푸르기만 하다
더 이상 빠져나아 갈 곳이 다시 없나니,
위풍당당한 쇠뿔은 그리기가 어려워라.
화답송, 석고희이(石鼓希夷)화상
식득형용인득성(識得形容認得聲) 대숭종차묘단청(戴崇從此妙丹靑)
철두철미혼상사(徹頭徹尾渾相似) 자세간래미십성(子細看來未十成)
소의 모습을 알아 보고 그 소리도 알아듣나니,
화가 대숭이 이로부터 멋진 그 림을 그렸다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온통 비슷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온전치는 못하구나!
화답송, 괴납대련(壞衲大璉)화상
맥면상봉견이정(驀面相逢見而呈) 차우비맥역비청(此牛非白亦非靑)
점두자허미미소(點頭自許微微笑) 일단풍광화불성(一段風光畵不成)
갑자기 마주치면서 얼굴을 드러내니,
이 소가 희지도 않고 푸르지도 않구나!
스스로 머리 끄덕여 긍정하면서 빙그레 웃으니,
한 줄기 풍광은 그려도 그림이 되지 않는다.
[4] 소를 얻다(得牛)
득우(得牛)-소를 찾았다는 말로 동자가 소의 목에 막 고삐를 건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불성(佛性)을 꿰뚫어보는 견성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직 외부세계로부터의 유혹에 동요하기 쉬운 미숙한
단계이므로 이때의 소는 삼독(三毒)에 물든 거친 본성처럼 검은색을
띠고 있다.
구매교외(久埋郊外) 금일봉거(今日逢渠) 유경승이난추(由境勝以難追)
연방총이불기(戀芳叢而不己) 완심상용(頑心尙勇) 야성유존(野性猶存)
욕득순화(欲得純和) 필가편달(必加鞭?)
오랫동안 야외에 숨어 있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그댈 만났네.
뛰어난 경치 때문에 쫓아가기 어려운데,
싱그러운 수풀 속을 끊임없이 그리워 하네.
고집 센 마음은 여전히 날뛰니,야성이 아직도 남아 있구나!
온순하게 하고 싶으면, 반드시 채찍질을 가해야 한다.
게 송
갈진정신획득거(竭盡精神獲得渠) 심강력장졸난제(心强力壯卒難除)
유시재도고원상(有時裳到高原上) 우입연운심처거(又入煙雲深處居)
온 정신을 다하여 이 놈을 잡았으나,
힘 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어느 땐 고원 위에 올랐다가도,
어느 땐 구름 깊은 곳에 들어가 머무누나.
화답송, 석고희이(石鼓希夷)화상
뢰파승두막방거(牢把繩頭莫放渠) 기다모병미증제(幾多毛病未曾除)
서서맥비견장거(徐徐驀鼻牽將去) 차요회두식구거(且要廻頭識舊居)
고삐를 꽉 잡고 그 놈을 놓지 말라.
숱한 나쁜 버릇은 아직 없어지지 않았으니,
천천히 코뚜레를 꿰어 끌고 가더라도,
또 머리를 돌려 예 있던 곳을 알고자 하네.
화답송, 괴납대련(壞衲大璉)화상
방초연천착득거(芳草連天捉得渠) 비두승삭미전제(鼻頭繩索未全除)
분명조견귀가로(分明照見歸家路) 녹수청산잠기거(綠水靑山暫寄居)
방초의 하늘 닿은 데서 이 놈을 붙잡았지만
코 꿴 고삐가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구나!
고향길을 분명히 비추어 보니,
푸른 물 푸른 산에 잠시 머물렀을 따름이네.
[5] 소를 기르다(牧牛)
목우(牧牛)-소를 길들인다는 뜻으로 소의 고삐를 잡은 목동이
한 손에 채찍을 들고 소를 길들이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마음을 완전히 훈복시키는 단계로 삼독의 때가 지워짐에
따라 소의 빛깔도 서서히 흰색으로 변해간다.
전사재기(前思裳起) 후념상수(後念相隨) 유각고이성진(由覺故以成眞)
재미고이위망(在迷故而爲妄) 불유경유(不由境有) 유자심생(唯自心生)
비삭노견(鼻索牢牽) 불용의의(不容擬議)
앞 생각이 조금이라도 일어나면, 뒷 생각도 뒤따르나니,
깨달음을 인해 진실을 이루기도 하며, 미혹으로 인해 거짓이 되기도 한다.
대상 사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마음이 일어났을 뿐이요,
코를 꿴 고삐를 당길 뿐이니, 사량분별은 용납치 않는다.
게 송
편삭시시불리신(鞭索時時不理身) 공이종보입애진(恐伊縱步入埃塵)
상장목득순화야(相將牧得純和也) 기쇄무구자축인( 鎖無拘自逐人)
채찍과 고삐를 늘 몸에서 떼지 말라.
두렵도다, 멋대로 걸어서 티끌 세계에 들어갈까봐.
잘 길들여서 온순하게 되면,
고삐를 잡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을 따를 것이다.
화답송, 석고희이(石鼓希夷)화상
감분산림기차신(甘分山林寄此身) 유시역도마제진(有時亦蹈馬蹄塵)
부증범착인묘가(不曾犯着人苗稼) 래왕공로배상인(來往空勞背上人)
산림이 제 분수라 여겨 즐거이 몸을 맡기고,
어떤 때는 티끌날리는 거리로 들어간다.
일찍이 남의 논밭에 침범한 적은 없나니,
가고 옴에 소 탄 사람은 쓸데없이 수고롭네.
화답송, 괴납대련(壞衲大璉)화상
목래순숙자통신(牧來純熟自通身) 유재진중불염진(雖在塵中不染塵)
롱래각득차타력(弄來却得蹉 力) 림하상봉소살인(林下相逢笑殺人)
완숙하게 길들여져 절로 몸에 밴다면,
티끌 속에 있더라도 물들지 않으리라.
타고 놀다 오히려 좌절을 겪은 덕택에,
숲 아래서 마주치자 자지러지게 웃어대네.
[6] 소 타고 집에 돌아가다(騎牛歸家)
기우귀가(騎牛歸家)-소를 타고 깨달음의 세계인 집으로 돌아온다는
말로 목동이 소 등에 타고 피리를 불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더이상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무애의 단계이기 때문에
더할 나위없이 즐거우며 소는 완전한 흰색으로 변해 있다.
간과이파(刊戈已罷) 득실환공(得失還空) 창추자지촌가(唱椎子之村歌)
취아동지야곡(吹兒童之野曲) 신횡우상(身橫牛上) 목시운소(目視雲 )
호환불회(呼喚不回) 로룡부주(撈寵不住)
투쟁이 끝나서, 얻음도 잃음도 모두 비었구나!
나뭇꾼의 시골노래를 흥얼거리며, 시골 아이들의 풀피리를 불어 보노라.
태평한 모습으로 소 등에 누워, 눈은 아득한 허공을 바라본다.
불러도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끌어당겨도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게 송
기우이리욕환가(騎牛 欲還家) 강적성성송만하( 笛聲聲送晩霞)
일박일가무한의(日拍一歌無限意) 지음하필고순아(知音何必鼓唇牙)
소를 타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가노라니,
오랑캐 피리소리가 저녁 놀에 실려간다.
한 박자 한 곡조가 한량없는 뜻이려니,
곡조 아는 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화답송, 석고희이(石鼓希夷)화상
지점전파즉시가(指點前坡卽是家) 선취동각출연하(旋吹桐角出煙霞)
홀연변작환향곡(忽然變作還鄕曲) 미필지음긍백아(未必知音肯伯牙)
앞 언덕을 가리키니 바로 집이라,
이윽고 오동피리를 불며 석양 속에 나타난다.
홀연히 음악은 환향곡으로 바뀌나니,
곡을 아는 자는 백아 보다 낫다 하리라.
화답송, 괴납대련(壞衲大璉)화상
도기득득자귀가(倒騎得得自歸家) 약립사의대만하(蒻笠 衣帶晩霞)
보보청풍행처은(步步淸風行處穩) 불장촌초괘순아(不將寸草掛脣牙)
거꾸로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니,
삿갓과 도롱이도 저녁 놀에 물들었다.
걸음마다 맑은 바람에 가는 길이 편안하니,
빈약한 촌초로선 입을 열지 못한다네.
[7] 소는 잊고 사람만 있다(忘牛存人)
망우존인(忘牛存人)-소를 잊고 안심한다는 말로 소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동자 혼자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곧 소는 단지 방편이었으므로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잊어야함을 의미한다.
법무이법(法無二法) 우차위종(牛且爲宗) 유제토지이명(喩蹄兎之異名)
현전어지차별(顯筌魚之差別) 여금출광(如金出鑛) 사월이운(似月離雲)
일도한광(一道寒光) 위음겁외(威音劫外)
법엔 두 법이 없나니, 임시 소에 의탁해 종으로 삼았노라.
올가미와 토끼가 명칭이 다른 것 같고,
통발과 고기가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마치 금이 광석에서 나오고, 달이 구름을 벗어난 것 같으니,
한 줄기 차가운 빛은 겁 밖의 위음이로다.
게 송
기우이득도가산(騎牛已得到家山) 우야공혜인야한(牛也空兮人也閑)
홍일삼간유작몽(紅日三竿猶作夢) 편승공돈초당간(鞭繩空頓草堂間)
소를 타고 이미 고향에 도착하였으니,
소도 공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붉은 해는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꾸는 것 같으니,
채찍과 고삐는 띠집 사이에 부질없이 놓여 있네.
화답송, 석고희이(石鼓希夷)화상
란내무우진출산(欄內無牛 出山) 연사우립역공한(烟 雨笠亦空閑)
행가행락무구계(行歌行樂無拘繫) 영득일신천지간( 得一身天地間)
산에서 끌고 온 소, 집안에는 없고,
삿갓과 도롱이도 쓸데 없다.
즐겁게 노래하며 가는 길에 전혀 걸림 없으니,
온 천지 사이에서 한 몸만이 자유롭네.
화답송, 괴납대련(壞衲大璉)화상
귀래하처불가산(歸來何處不家山) 물아상망진일한(物我相忘鎭日閑)
수신통현봉정상(須信通玄峰頂上) 개중혼불류인간(箇中渾不類人間)
돌아오니 어디 하나 고향 아니리,
대상과 나 또한 모두 잊으니 종일 한가롭네.
현지를 통한 봉우리 정상을 반드시 믿을지니,
그 속에선 온갖 것이 인간세 아니더라.
[8] 사람도 소도 다 잊다(人牛俱忘)
인우구망(人牛俱忘)-자신이나 소나 모두 실체가 없는 공(空)임을
깨닫는다는 말로 텅빈 원상(圓相)만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소(객관)와 동자(주관)라는 주객분리 이전의 상태를
상징한다.
범정탈락(凡情脫落) 성의개공(聖意皆空) 유불처불용오유(有佛處不用 遊)
무불처급수주과(無佛處急須走過) 양두불착(兩頭不着)
천안난규(千眼難竅) 백조함화(百鳥啣華) 일장마라(一場 )
범속한 생각을 탈락하고, 거룩한 뜻도 다 비어 있다.
부처가 있는 세계엔 놀 필요가 없고,
부처 없는 세계는 모름지기 급히 지나가야 한다.
범속함과 거룩함 둘 다에 집착하지 않으니,
관음보살의 천안이라도 엿보기 어려워라.
온갖 새들이 꽃을 물고와 공양하는 것은,
오히려 한바탕 부끄러운 장면일 뿐이
게 송
편삭인우진속공(鞭索人牛盡屬空) 벽천요활신난통(壁天遼闊信難通)
홍로염상쟁용설(紅爐焰上爭容雪) 도차방능합조종(到此方能合祖宗)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는 다 비어 있나니,
푸른 허공만이 가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도다.
붉은 화로의 불꽃이 어찌 눈을 용납하리오
이 경지에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라.
화답송, 석고희이(石鼓希夷)화상
참괴중생계이공( 愧衆生界已空) 개중소식약위통(箇中消息若爲通)
후무래자전무거(後無來者前無去) 미심빙수계차종(未審憑誰繼此宗)
부끄럽구나! 중생계도 이미 비었으니,
그 가운데 소식을 어찌 통할 것인가!
뒤에 오는 자도 없고 앞에 가는 이도 없으니,
모르겠다! 누구에게 종지를 계승한다고 하는지를.
화답송, 괴납대련(壞衲大璉)화상
일추격쇄대허공(一鎚擊碎大虛空) 범성무종로불통(凡聖無縱路不通)
명월당전풍삽삽(明月堂前風颯颯) 백천무수부조종(百川無水不朝宗)
한번 크게 내려 큰 허공을 부숴버리다.
범부 성인의 자취는 없고 길도 통하지 않네.
명월당 앞에 부는 바람은 쓸쓸한데,
세상의 모든 강들은 바다로 흘러든다.
[9] 근원으로 돌아가다(近本還源)
반본환원(返本還源)-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깨닫는다는 말로 화면에는
산수풍경이 그려진다.
이것은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우주 본래의 모습을 아무런 번뇌없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참된 지혜의 경지, 즉 열반의 경지를 말한다.
본래청정불수일진(本來淸淨不受一塵) 관유상지영고(觀有相支榮枯)
처무위지응적(處無爲之凝寂) 부동환화(不同幻化)
기가수치(豈假修治) 수록산청(水綠山靑) 좌관성패(坐觀成敗)
본래 청정해서 한 티끌에도 물들지 않으면서,
모습 있는 만유의 영고성쇠를 본다.
함이 없는 고요한 경지에 머물러,
더 이상 환상과 동일시 하지 않으니,
어찌 수행과 계율에 의지하리오!
물은 맑게 흐르고 산은 푸르른데,
홀로 앉아 세상의 흥망 성쇠를 바라보노라.
게 송
반본환원이비공(返本還源已費功) 쟁여직하약맹롱(爭如直下若盲聾)
암중불견암전물(庵中不見庵前物) 수자망망화자홍(水自茫茫花自紅)
근원으로 돌아가 돌이켜 보니 온갖 노력을 기울였구나!
차라리 당장에 귀머거리나 장님 같은 것을,
암자 속에 앉아 암자 밖 사물을 인지하지 않나니,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화답송, 석고희이(石鼓希夷)화상
영기불타유무공(靈機不墮有無功) 견색문성기용롱(見色聞聲豈用聾)
작야금오비입해(昨夜金烏飛入海) 효천의구일륜홍(曉天依舊一輪紅)
신령한 기틀은 유무의 공에 떨어지지 않아서,
빛깔도 보고 소리도 듣는데, 어찌 귀머거리이겠는가!
어젯밤 금가마귀가 날아서 바다로 들어가니,
새벽 하늘에 예와 같이 둥근 해가 떠 있도다.
화답송, 괴납대련(壞衲大璉)화상
용진기관비진공(用盡機關費盡功) 성성저사불여롱(惺惺底事不如聾)
초혜근단래시로(草鞋根斷來時路) 백조부제화란홍(白鳥不啼花亂紅)
기관을 다 써서 모든 노력을 했어도,
또랑또랑한 그 일은 귀머거리만 못하네.
짚신 끈이 다 해진 채 돌아오는 길에는,
새들이 울지 않는데 꽃들만 붉게 피었어라.
[10] 저자에 들아가 손을 드리우다(入廛垂手)
입전수수(入전:가게전 垂手)-육도중생의 골목에 들어가
손을 드리운다는 말로 중생제도를 위해 속세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지팡이에 포대를 맨 행각승(行脚僧)의 모습으로, 또는 목동이
포대화상(布袋和尙)과 마주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입전수수의 단계야말로 이타행(利他行)을 주장하는
대승불교의 깨달음의 극치이다.
시문독엄(柴門獨掩) 천성부지(千聖不知) 매자기지풍광(埋自己之風光)
부전현지도철(負前賢之途轍) 제표입시(提瓢入市) 책장환가(策杖還家)
주사어행(酒肆魚行) 화령성불(化令成佛)
싸리문을 닫고 홀로 고요하니, 천명의 성인이라도 그 속을 알지 못하네.
자기의 풍광은 묻어 버리고, 옛 성현들이 간 길들도 등져버린다.
표주박을 들고 저자에 들어가며, 지팡이 짚고 집으로 돌아간다.
술집도 가고 고깃간도 들어가서, 교화를 펼쳐 부처를 이루게 한다.
게 송
로흉선족입전래(露胸跣足入廛來) 말토도회소만시(抹土途灰笑滿 )
불용신선진비결(不用神仙眞秘訣) 직교고목방화개(直敎枯木放花開)
맨 가슴 맨발로 저자에 들어오니,
재투성이 흙투성이라도 얼굴에 가득한 함박웃음.
신선이 지닌 비법 따위를 쓰지 않아도,
당장에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게 하누나!
화답송, 석고희이(石鼓希夷)화상
자한친종이류래(者漢親從異類來) 분명마면여노시(分明馬面與 )
일휘철봉여풍질(一揮鐵棒如風疾) 만호천문진격개(萬戶千門盡擊開)
이놈은 틀림없이 이류에서 왔구나.
말의 얼굴과 당나귀 뺨이 너무나 분명하다.
질풍처럼 몽둥이를 한번 휘둘러서,
이 세상의 모든 문들을 두들겨 여네.
화답송, 괴납대련(壞衲大璉)화상
수리금추벽면래(袖裏金木追劈面來) 호언한어소영시(胡言漢語笑靈 )
상봉약해불상식(相逢若解不相識) 루각문정팔자개(樓閣門庭八字開)
소매 속의 금방망이가 정면에서 떨어지니,
오랑캐 말, 우리 말로도 웃음은 볼에 가득하네.
서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함을 이해한다면,
미륵의 누각문도 활짝 열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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