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훈민정음 곳곳에 녹아 든 부처의 자비

수선님 2022. 4. 10. 12:43
박해진 작가

참불선원 강좌… 혜각존자 신미와 훈민정음의 비밀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학창시절 국어시간, 저녁 늦게까지 놀고 피곤한 학생도 한번쯤은 읊고 외웠을 훈민정음. 한자를 사용하고 문맹률 높던 조선에 고작 28자로 수천 개의 음절을 표현할 수 있는 독자적인 문자가 탄생했다. 한국인이 세종대왕을 가장 높게 기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훈민정음 창제에는 ‘신미’라는 스님의 공이 컸다. 실록에는 신미를 ‘간승’ ‘요승’ 등으로 폄하했지만 어디까지나 유학자들의 입장일 뿐 세종을 비롯한 많은 왕족이 불교를 숭상했다. 신미 스님은 훈민정음 창제에 어떤 역할을 했을까? 12년간 신미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훈민정음의 길을 걸은 박해진 작가는 9월 19일 서울 참불선원 인문학 대강좌서 “세종 어제(御製) <훈민정음>의 서문은 한자 원문은 54자, 언해문은 108자로 훈민정음을 통해 백성의 번뇌와 고통이 사라지고, 부처의 자비가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불심을 축자역으로 반영한 것”이라며 “세종은 신미와 함께 훈민정음에 불교적 가치를 잘 녹여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정리=윤호섭 기자

▲ 박해진 작가는… 강원도 태백서 태어나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1984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후 1987~1997년 종근당 홍보실과 동방기획 PR부장을 거쳤다. 1998년부터 고건축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숭례문·창덕궁·인정전·경복궁 근정전 등 국보·보물 해체 보수, 조사 기록을 전담했다. 2002년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해체 인연으로 혜각존자 신미를 만나 그 발자취를 찾고, 훈민정음 연구에 몰입했다.

성균관서 정진하던 어린 신미
집안 몰락에 함허당 제자 돼
효령대군 소개로 세종과 만나
유일무이한 독자적 문자 개발

훈민정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바로 세종대왕을 떠올리겠죠. 세종이 훈민정음을 왜 만들었을까요?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혁명’입니다. 당시 제국이 아닌 나라에서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훈민정음은 산업혁명보다도 더한 문자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꽤 오랜 시간을 훈민정음에 쏟았습니다. 얼떨결에 시작한 게 아니라 무엇에 이끌린 듯 말이죠. 훈민정음의 길을 걷게 된 데는 한 스님이 계셨습니다. 바로 혜각존자 신미 스님입니다. 그렇게 12년간 작업해 <훈민정음의 길: 혜각존자 신미 평전>을 출간했습니다. 오늘은 신미 스님이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어떻게 기여하고,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냈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훈민정음은 세종과 신미 스님, 당대 학자들이 피워 올린 우주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이 속에는 불교가 깊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먼저 신미 스님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요?

세종과 신미의 비밀프로젝트
신미는 1403년(태종 3) 태어났습니다. 속명은 김수성으로 아버지는 떠오르는 신진사대부 김훈(金訓, 1381~1437), 어머니는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이행의 딸인 정경부인 여흥 이씨였습니다. 1416년 옥구진병마사(沃溝鎭兵馬使)로 내려가 있던 김훈은 조모상을 치르지도 않은 채 임지를 떠나 상경,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정종에게 줄을 섭니다. 정종과 태종 틈에 끼어 눈치를 보던 신료들은 불충불효를 내세워 김훈을 몰아붙입니다. 그렇게 김훈은 장 100대를 맞고 전라도 내상으로 유배됩니다.

집안이 어려워지자 성균관에서 학문에 정진하던 김수성은 1417년 외할아버지인 이행의 안내에 따라 양주 회암사에 주석하고 있던 함허당(涵虛堂, 1376~1433)의 제자가 됩니다. 함허당은 태조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묘엄존자 무학 자초의 제자로, 조선 초기 배불(排佛)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바른 길을 걸은 고승대덕이고 선지식이었습니다. 신미는 함허당의 활인검 같은 강의를 듣고 저서를 읽으며 교종과 선종의 가르침을 쭉쭉 빨아들였습니다. 이것은 훗날 간경도감을 통해 실천에 옮겨진 훈민정음 불전언해의 불씨였고, 수행과 깨달음의 길을 안내하는 나침반이 됐습니다.

세종은 1434년 간명하게 읽고 쓸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이 근본에 힘쓰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이는 곧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였습니다. 이후 1443년 정초부터 세종은 하루, 늦어도 열흘 정도에 배울 수 있는 쉬운 문자를 만들기 위해 거듭 고민했습니다. 그리곤 인재를 찾아다녔죠. 이때 효령대군이 신미를 추천했습니다. 당시 신미는 구결과 범어, <주역>과 삼재(三才)에 정통해 있었습니다. 세종은 세자인 문종과 효령대군, 수양·안평대군 외에는 비밀에 붙이고 신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1443년 12월 30일, 세종은 훈민정음의 존재를 알렸습니다. 간단명료하고, 전환이 무궁한 글자가 캄캄한 그믐에 별똥이 떨어지듯 세종이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집현전 학자의 이름은 이날 기사에는 한 명도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훈민정음 창제와 연관된 이야기는 물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는 조정을 뒤흔들어놓을 만한 사건이었고,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던 정인지, 부제학 최만리도 세종의 발표를 듣고서야 알았습니다. 3년이 지나 정인지는 훈민정음해례 서문에서 세종의 창작이라고 밝혔지만, 이를 세종이 하루아침에 만들 수는 없는 일입니다.

1446년 세종은 3년간의 보완 끝에 훈민정음 창제를 마무리 짓고 목판본으로 찍어 백성에게 반포했습니다. 이와 함께 불교와 유학을 동시에 보급하고자 했는데요. 신미는 세종의 명에 따라 훈민정음 속에 불교의 핵심을 녹였습니다.

세종의 불교 심취
세종 어제(御製) <훈민정음>의 서문은 한자 원문은 54자, 언해문은 108자입니다. 훈민정음을 통해 백성의 번뇌와 고통이 사라지고, 부처의 자비가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바라는 불심을 축자역으로 반영한 겁니다.

해례편은 제자해·초성해·중성해·종성해·합자해·용자례로 나뉘어져 있는데, 중세어의 음운 체계에 대한 종합설명이 담긴 중요한 부분입니다. 신미는 훈민정음 창제에 관련된 산문 형식의 해설 뒤에 칠언고시(七言古詩) 형태의 운문인 ‘결(訣)’로 압축했습니다. 즉 전형적인 불교경전에서 취하고 있는 게송 방식을 가져온 것입니다. 결은 선시(禪詩)이고, 기리는 노래였습니다.

세종은 소헌왕후 심씨가 세상을 떠난 뒤 훈민정음으로 만든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용비어천가> 세 권의 편찬 작업을 동시에 주도했습니다. 특히 훈민정음 보급을 위한 불경 간행은 관료와 일체 상의하지 않고 수양대군을 앞세워 밀고 나갔죠.

세종은 신미의 동생인 김수온에게 <석가보> 증보를 명했습니다. 김수온은 초고가 마무리 될 때마다 수양대군을 통해 세종의 재가를 받고 신미에게 역해를 부탁했습니다. 1447년 7월 중순, <석보상절> 집필이 마무리되고 신미와 수양대군, 김수온은 7개월 동안 밤낮을 잊고 언해에 매달렸습니다. 그해 11월 전24권을 완간하고 권1에 훈민정음의 교과서인 <훈민정음언해>를 실었습니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과 신미, 김수온이 합작한 580여 편의 웅건한 시편입니다. 불법승과 천지인을 집약한 노래로, 1448년 정초 완간됐습니다. <월인천강지곡>은 함허당의 <금강경오가해설의>의 ‘실체를 붙여보면 오셔도 오신 바 없음은 달이 즈믄 가람에 비취옴이오[月印千江]’라는 문구에서 따왔습니다. 즉, 부처의 본체는 하나. 백억 세계에 화신으로 나타나 중생을 교화하는 모습이 달이 오직 하나지만 시공을 초월해 수많은 강을 비춤과 같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지도를 표현한 겁니다.

세종은 태종의 불교 혁파 정책을 말없이 수용했지만 말년에 이르러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1448년 7월 17일 세종은 승정원에 일러 경복궁 문소전 서북쪽 빈터에 본당 1칸, 동서 회랑 각 3칸, 부엌 3칸 규모의 내불당을 짓겠다고 밝힙니다. 반대 상소, 연명 상소는 끝없이 올라오고 있었지만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대간이 두세 번 불당의 역사를 파하라고 청했으나 회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1월 20일 불당 1칸, 보첨 8칸, 승당 3칸, 선당 3칸, 정문 3칸, 부엌과 곳간 3칸, 욕실 2칸 등 총 26칸의 내불당이 세워집니다. 이후 세종은 신미와 김수온을 불러 찬불가와 9악장의 가사를 지어 불보살을 찬탄했습니다. 그리곤 12월 6일 내불당에서 법연을 베풀고 낙성식을 거행했습니다.

지공·나옹·무학과 비견될 신미
세월이 흘러 세종이 영릉(英陵)에 들고 1450년(문종 즉위년) 7월 6일, 문종은 세종의 유훈을 받들어 신미를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 혜각존자(慧覺尊者)’로 삼는다는 존호를 발표했습니다. ‘훈민정음으로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로써 신미의 위상은 존호를 통해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추앙받았던 삼화상인 지공, 나옹, 무학과 비교될 정도였습니다. 태종 이후로 왕사·국사의 칭호를 쓰지 않았으나 이에 버금가는 존호이기에 유자들은 위협을 느꼈습니다.

집현전 직제학 박팽년은 7월 15일 “신미는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친 큰 간인”이라는 상소를 올려 법호를 거둘 것을 청합니다. 하지만 이 상소를 통해 혜각존자가 어릴 때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했고, 이후 훈민정음 창제에 공헌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종은 박팽년을 파직하면서까지 신미의 법호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수많은 반대에 부딪혀 결국 혜각존자를 ‘혜각종사’로, 우국이세를 ‘도생이물(度生利物)’로 바꿨습니다. 그렇지만 문종과 수양대군, 신미 또한 ‘혜각종사’라는 법호는 단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세종이 내린 혜각존자의 법호는 훗날 간행된 각종 불경언해 첫 머리에 그대로 쓰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인 실록에는 신미를 한없이 물어 뜯어놨습니다. 유자들로서는 당연한 일이겠죠. 하지만 신미는 이런 유자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기록에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세종과 함께 백성을 위한 문자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세종 역시 ‘우국이세’라는 법호를 내리고자 한 것입니다.

“반야의 나라로 갈 수 있도록 횃불을 들어라.”

불제자였던 수양대군의 명이기도 합니다. 불경이 왜 우리말로 보급됐을까요? 지배층부터 여기에 담긴 심오한 뜻을 받아들인 겁니다. 신미 스님은 훈민정음을 비롯해 불경 보급 등 모든 걸 기획했습니다. 이는 곧 독자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살찌우는 거름이었습니다. 흔히 훈민정음에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강희안·이개·이선로 등 8명의 학자가 참여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신미 스님을 필두로 한 불교계 인사들 또한 훈민정음 확산과 보급에 나선 1등 공신입니다.


 

 

 

 

 

 

 

 

훈민정음 곳곳에 녹아 든 부처의 자비 - 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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