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엄경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수선님 2022. 4. 24. 12:05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1권    

  반랄밀제(般剌蜜帝) 한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실라벌성(室羅筏城)의 기원정사(祇桓精舍)에서 1,250명의 뛰어난 비구(比丘)들과 함께 계셨다. 이 비구들은 모두 번뇌가 없는 대아라한(大阿羅漢)이자 불자(佛子)로서, 불법(佛法)을 지키고 살면서 온갖 세계[諸有]의 속박을 벗어나, 태어나는 국토마다 위의(威儀)를 성취할 수 있으니, 부처님을 따라 법륜(法輪)을 굴리면서 유촉(遺囑)을 감당할 만하였다. 또 이 비구들은 계행[毘尼]이 매우 청정[嚴淨]하여 널리 삼계(三界)의 모범이 되고, 한량없는 응신(應身)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며 미래의 중생도 건져내어 온갖 번뇌의 얽힘에서 벗어나게 할 이들이다.  

  이 가운데 지혜가 뛰어난 사리불(舍利弗)과 마하목건련(摩訶目犍連)과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와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와 수보리(須菩提)와 우바니사타(優波尼沙陀) 등은 이들의 상수(上首)들이다.  

  또 한량없는 벽지불(辟支佛)과 무학(無學)과 초심자(初心者)들도 다 함께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왔다.

  마침 비구들이 여름의 안거수행(安居修行)을 마치고 그간의 잘못을 서로 고백하여 참회하는 날[自恣]이므로, 시방의 보살들도 마음속의 의심을 물어서 결단하기 위하여 자혜롭고 엄한 부처님을 공손히 받들어 심오한 뜻을 듣고자 하였다.  

  즉시 여래께서 자리를 펴시고 편히 앉으셔서, 모든 법회 대중을 위하여 심오한 법을 설하시니, 법석(法席)의 청정대중[淸衆]은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을 얻었으며, 가릉빈가(迦陵頻伽)처럼 맑고 고운 음성이 시방세계에 널리 퍼지자,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보살들이 이 도량으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의 상수(上首)는 문수사리(文殊師利)이다.

  이 때 바사닉왕(波斯匿王)은 부왕(父王)의 제삿날에 공양을 차리고, 부처님을 궁궐내정[宮掖]으로 초청해서 몸소 영접하는 한편, 겸하여 맛이 뛰어난 음식[珍羞]을 더 많이 마련하여 여러 훌륭한 보살들도 친히 맞아들였다.  

  동시(同時)에 성안의 장자(長者)와 거사(居士)들도 스님들의 공양을 준비해 놓고 부처님께서 참석해 주시기를 원했다. 부처님께서는 문수(文殊)에게 보살과 아라한들을 나눠 거느리고 가서 시주(施主; 齋主)의 청에 응하도록 분부하셨다.

  오직 아난(阿難)만은 미리 별도의 청을 받고 멀리 가서 미처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의 차례에 참여할 겨를이 없었으며, 이미 동행하는 상좌(上座)와 아사리(阿闍黎)도 없이 혼자 돌아오는 길인데, 그날따라 공양하려는 이도 없었다.  

  아난(阿難)은 지나온 성으로 가서 차례로 공양을 얻기 위해 발우[應器]를 들고 가면서 마음속에 "처음으로 스님들께 공양해 본 적이 없는 단월[最後檀越]을 찾아서 공양주[齋主]를 삼으리라" 생각하고, 깨끗한 귀족 찰제리(刹帝利)나 더러운 전타라(旃陀羅)를 묻지 않고 모범으로 평등한 사랑을 행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미천한 신분을 가리지 않으려는 것은, 일체중생에게 한량없는 공덕을 원만하게 성취시키려는 마음을 내었기 때문이다.  

  또 아난은 여래께서 수보리(須菩提)와 대가섭(大迦葉)에게 '아라한(阿羅漢)이 되고서도 마음이 평등하지 못하다'고 책망한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활짝 열어 가리지 않는 행으로 모든 의심과 비방을 벗어나신 여래를 우러러 존경하며, 저 성 둘레의 못을 거쳐 성문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공양법[齋法]에 걸맞게 매우 엄숙한 위의(威儀)를 갖췄다.  

이 때 아난은 걸식(乞食)하다가 환술(幻術)을 잘 부리는 마등가녀(摩登伽녀)를 만났다. 마등가는 사비가라(娑毗迦羅)의 선범천주(先梵天呪)로 아난을 음실(婬室)로 끌어들여 음탕한 몸으로 만지고 비비면서 아난의 계체(戒體)를 망치려고 하였다.  

  여래께서는 아난이 음욕의 마술[術]에 잡힌 줄 아시고 공양을 마치자마자 바로 기원정사(祇垣精舍)로 돌아오시니, 바사닉왕과 대신과 장자와 거사들도 다 부처님을 따라와서, 법문의 요의[法要]를 듣고자 하였다.

  바로 이 때 세존께서는 정수리로 온갖 보배의 두려움 없는 광명을 놓으셨다. 그 광명에서는 천 잎의 보배 연꽃이 나왔으며, 연꽃 위에 가부좌(跏趺坐)하신 화신 부처님께서 신비한 주문을 외우셨다.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보살에게 그 주문을 가지고 가서 아난을 구해 오도록 분부하셨다. 문수보살은 그 주문으로 나쁜 주문을 소멸시키고, 아난과 마등가(摩登伽)를 데리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돌아왔다.  

  아난(阿難)이 부처님을 뵙고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슬피 울면서, 시작 없는 옛적부터 한결같이 불법을 많이 들어 알기만 하고 도의 힘이 완전하지 못함을 한탄하며, 시방 여래께서 보리(菩提)를 성취하신 묘한 사마타(奢摩他)와 삼마(三摩)와 선나(禪那)의 최초방편(最初方便)을 간절히 청하였다.  

  그러자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보살들과 시방에서 온 여러 훌륭한 아라한(阿羅漢)들과 벽지불(辟支佛)들도 모두 기쁘게 듣기를 원하며, 말없이 물러앉아 거룩한 가르침[聖旨]을 받들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나는 사촌간이지만 정리로는 형제나 다름이 없다. 당초에 발심(發心)했을 때 나의 법 가운데 어떤 훌륭한 모습을 보았기에, 세상의 깊고 소중한 은혜와 애정을 버렸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여래의 더없이 미묘하고 훌륭한 32상(相)의 형체에서 유리(琉璃)처럼 사무치는 영롱한 빛을 보고, 저는 언제나 '이 모양은 애욕의 기운으로 생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애욕의 기운은 추하고 탁하여, 비린내와 누린내가 서로 어울리고 고름과 피가 어지럽게 섞였으니, 이렇게  황금덩어리처럼 훌륭하고 맑고 묘하고 밝은 빛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감동하여 간절히 우러러 존경하면서 부처님을 따라 머리를 깎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잘 들었다. 아난아,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일체중생이 시작 없는 아득한 옛적부터 생사를 계속하는 것은 다 상주신심(常住眞心)의 성품이 맑고 밝은 본체를 알지 못하고, 온갖 허망한 생각을 제 마음으로 잘못 아는 탓이며, 이 생각이 진실하지 못한 까닭에 생사에서 윤회하느니라. 네가 이제 더없이 높은 보리[無上菩提]의 진실하게 열린 밝은 성품을 연마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내가 묻는 말에 곧은 마음으로 대답하여라. 시방 여래께서도 동일한 길을 따라 생사를 벗어나셨는데, 모두 곧은 마음으로 행하셨느니라. 마음과 말씀이 곧으신 까닭에 이와 같이 지위(地位)의 시작에서 최종에 이를 때까지 그 중간에 조금도 구부러진 모양이 없으셨느니라.

  "아난아. 내가 이제 너에게 묻겠노라. 네가 답하기를 여래의 32상을 보고 출가할 마음을 내었다고 하였으니, 무엇으로 보았으며 무엇으로 좋아했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좋아한 것은 저의 마음과 눈입니다. 눈으로 여래의 거룩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저는 발심하여 생사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진실로 좋아한 동기가 마음과 눈에 있다고 말했으니, 만일 마음과 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번뇌[塵勞]를 항복시킬 수 없느니라. 마치 적의 침략을 당한 국왕이 군대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려면 적군의 소재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너를 생사에 흘러 다니게 한 것은 마음과 눈의 잘못이니, 마음과 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 묻겠노라. 마음과 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일체세간의 열 가지 중생[十種異生]은 누구나 똑같이 그 분별하는 마음[識心]은 몸 안에 있고, 눈은 얼굴에 있습니다. 비록 푸른 연꽃과 같은 부처님의 눈을 보아도 부처님의 얼굴에 있으시며, 이제 제 눈[浮根四塵]을 보아도 제 얼굴에 있을 뿐이니, 이렇게 아는 마음[識心]은 몸속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현재 여래의 강당(講堂)에 앉아 있으니, 기타림(祇陀林)을 보라. 지금 기타림은 어디에 있느냐."

  아난이 답했다.

  "세존이시여. 이 큰 중각(重閣)의 청정한 강당은 급고원(給孤園)에 있으며, 기타림(祇陀林)은 강당 밖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지금 강당 안에서 먼저 무엇을 보느냐."

  아난이 답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강당 안에서 먼저 여래를 보고, 그 다음에 대중을 보고, 이와 같이 밖을 보아야만 비로소 기타림(祇陀林)과 급고원(給孤園)을 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기타림과 급고원을 본다고 했으니, 어떻게 보았느냐."

  아난이 답했다.

  "세존이시여, 이 큰 강당의 문과 창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에 저는 강당 안에 있으면서 먼 곳까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 부처님께서 대중(大衆) 가운데 황금색의 팔을 펴시고 아난의 정수리를 만지시면서 아난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여기 삼마제(三摩提)가 있으니 대불정수릉엄왕(大佛頂首楞嚴王)이라고 이름한다. 온갖 행이 원만하게 갖춰져 있어서, 시방 여래께서 한 문으로 뛰어나신 묘하게 장엄된 길이니라.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아난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엎드려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하기를 몸이 강당 안에 있으면서 문과 창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에 멀리 기타림(祇陀林)과 급고원(給孤園)을 본다고 했으니, 어떤 중생이든지 이 강당 안에 있으면서 먼저 여래를 보지 못하고 강당 밖을 보겠느냐."

  아난이 답했다.

  "세존이시여. 강당 안에 있으면서 여래를 보지 못하고 밖의 숲과 냇물을 볼 리가 없습니다."

  "아난아. 너도 마찬가지다. 네 마음은 일체를 밝게 알고 있으니, 만일 너의 현재 밝게 아는 마음이 네 몸 안에 있다면, 먼저 당연히 몸속을 밝게 알아야 한다. 어떤 중생이 먼저 몸속을 보고 나서 바깥 물건을 보겠느냐. 비록 심장, 간장, 비장, 위장은 볼 수 없더라도, 손톱이 나고 털이 자라고 근육이 움직이고 맥이 뛰는 정도는 참으로 당연히 밝게 알아야 하는데, 어째서 모르느냐. 분명 몸속도 모르는데 어떻게 밖을 알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깨닫고 아는 마음이 몸 안에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렇게 부처님의 법문[法音]을 듣고 보니 제 마음이 몸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방안에 등불을 켰을 때 그 불빛은 반드시 먼저 방안을 비추고 나서 그 방문으로부터 뒤에 뜰과 마당까지 비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일체중생이 몸속을 못보고 홀로 몸 밖만을 보는 것은, 방밖에 있는 등불이 방 속을 비추지 못하는 경우와 같겠습니다. 이 뜻은 확실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부처님의 분명한 뜻[了義]과 일치하여 잘못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비구들은 좀 전에 나를 따라 실라벌성(室羅筏城)에서 법식대로 공양을 얻고[循乞] 기타림(祇陀林)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미 공양을 끝냈으나, 공양하고 있는 저 비구들을 보아라. 한 사람의 공양으로 모든 사람이 다 배부를 수 있겠느냐."

  아난이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비구들은 비록 아라한(阿羅漢)일지라도, 몸과 목숨이 똑같지 않은데, 어떻게 한 사람의 공양으로 모든 사람이 다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너의 깨닫고 알고 보는 마음이 참으로 몸밖에 있다면, 몸과 마음은 서로 따로 떨어져서 저절로 상관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마음이 아는 것을 몸은 깨달을 수 없어야 하며, 몸이 아는 것을 마음은 알 수 없어야 한다. 너는 이제 내 도라면(兜羅綿)손을 보아라. 네 눈이 보면서 마음도 함께 분별하느냐."

  아난이 답했다.

  "예, 분별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 눈과 마음이 서로 안다면, 어째서 네 마음이 밖에 있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깨달아 아는 마음이 몸밖에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몸속을 보지 못하므로 몸 안에 있다고 할 수 없고, 몸과 마음이 서로 알면서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몸밖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자금 생각해 보니 그 마음이 있는 한 곳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한 곳이란 어디를 말하느냐."

  아난이 말했다.

  "이 분명하게 아는 마음이 몸속을 알지 못하면서도 밖은 잘 보고 있으니, 제 생각으로는 눈 속[根裏]에 가만히 숨어 있겠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유리조각으로 두 눈을 가렸을 경우, 비록 눈은 물체에 가렸으나 아무런 장애 없이 저 눈이 보는 대로 마음이 따라 곧 분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깨달아 아는 마음이 몸속을 못 보는 것은 눈에 있기 때문이며, 밖을 분명하게 보면서 걸림이 없는 것은 눈 속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눈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유리로 가린 것과 같다면, 유리로 눈을 가린 사람이 산과 강을 볼 때 유리를 보겠느냐."

  아난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유리로 눈을 가렸기 때문에 당연히 유리를 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과 같다면, 산과 강을 볼 때 어째서 눈을 못 보는 것이냐. 만일 눈을 본다면 눈은 곧 경계와 똑같아서 '눈이 보는 대로 마음이 따라 분별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으며, 만일 눈을 볼 수 없다면, 어째서 이 분별하고 아는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처럼 눈 속에 숨어 있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깨달아 아는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처럼 눈 속에 가만히 숨어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어. 저는 이제 또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생의 몸을 보면 5장(藏)·6부(腑)는 속에 들어있고 구멍은 밖에 있으니, 부장(腑藏)에 있으면 어둡고 구멍에 있으면 밝습니다. 지금 제가 부처님을 상대하여 눈뜨고 밝음을 보는 것으로 몸 밖을 본다 하고, 눈감고 어둠을 보는 것으로 몸속을 본다고 한다면, 이 뜻은 어떻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눈을 감고 어둠을 볼 때 이 어두운 경계가 눈과 상대하였느냐, 눈과 상대하지 않았느냐. 만일 눈과 상대했다면 어둠은 눈앞에 있으니, 어떻게 몸속이 성립되겠느냐. 만일 눈앞의 어둠으로 몸속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해와 달과 등불도 없는 암실(暗室)에 있을 때는, 그 방안의 어둠은 온통 너의 내장[焦腑]이겠구나. 만일 어둠이 눈과 상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보는 것이 성립되겠느냐.  

  만일 바깥 보는 것을 떠나서 안의 상대가 성립된다 하여, 눈감고 어둠을 보는 것으로 몸속을 본다고 한다면, 눈뜨고 밝은 것을 볼 때는 어째서 얼굴을 못 보느냐. 만일 얼굴을 못 본다면 안을 상대하여 본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으리라. 얼굴 보는 것이 성립된다면, 이 분별하여 아는 마음은 눈과 함께 허공에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속을 본다는 말이 성립되겠느냐. 만일 허공에 있다면 그 자체로 네 몸이 아니며, 이 여래가 지금 네 얼굴을 보는 것도 마땅히 네 몸이라고 해야 하겠구나. 그렇다면 허공에 있는 네 눈은 이미 안다 해도 당연히 몸은 깨닫지 못해야 한다. 네가 끝까지 고집하여 몸과 눈이 둘 다 안다고 한다면, 당연히 두 아는 작용이 있어야 하고, 너 한 사람이 마땅히 두 부처를 이뤄야 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어둠을 보는 것으로 몸속을 본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말했다.

  "저도 항상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법이 생기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마음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이 말씀을 생각하였으며, 이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제 심성(心性)이니,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이 따라 있을 뿐, 안과 밖과 중간의 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법이 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마음이 생긴다고 하여,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이 따라 있다고 한다면, 이 마음이 자체가 없으면 합할 곳이 없을 것이며, 만일 자체가 없어도 합할 수 있다고 한다면, 19계(界)가 7진(塵)을 따라 합한다는 말이니, 전혀 뜻이 되지 않는다. 만일 자체가 있다면, 너는 손으로 네 몸을 찔러 보아라. 네 아는 마음이 안에서 나오느냐. 밖에서 들어오느냐. 안에서 나온다면 몸속을 보아야 하고, 밖에서 들어온다면 마땅히 얼굴을 보아야 한다."

  아난이 말했다.

  "보는 것은 눈이고 마음으로 아는 것은 눈이 아닌데 마음이 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눈만으로도 볼 수 있다면, 네가 방안에 있을 때, 문만으로 볼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이미 죽은 사람들도 아직 눈을 가지고 있으니, 마땅히 다 물건을 보아야 하리라. 만일 물건을 본다면 어찌 죽었다고 하겠느냐.

  아난아, 또 너의 깨달아 아는 마음이 만일 분명 자체가 있다면, 그 체는 하나이냐, 여럿이냐. 지금 네 몸에 두루 한 체냐, 두루 하지 않는 체냐. 만일 체가 하나라면, 너는 손으로 한 팔[一支]을 찔렀을 때, 4지(支)가 다 느껴야 하고, 만일 다 느낀다면 마땅히 찌른 자리가 따로 없으리라. 만일 찌른 자리가 따로 있다면, 체가 하나란 뜻은 저절로 성립될 수 없다. 만일 체가 여럿이라면 여러 사람이 될 텐데, 어느 체를 너라고 하겠느냐.

  만일 네 몸에 두루 한 체라면, 앞서 한 팔을 찔렀을 때처럼, 몸 전체가 다 느껴야 할 것이며, 만일 네 몸에 두루 하지 않는 체라면, 너는 머리를 만지면서 발도 만져 보아라. 머리가 만지는 줄 안다면 발은 당연히 만지는 줄을 몰라야 하지만, 너는 지금 그렇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이 따라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도 들었습니다만, 부처님께서는 문수 등 모든 법왕자(法王子)와 더불어 실상(實相)을 담론하시면서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따라 생각해보니, 마음이 안에 있다면 몸속을 못 보고, 밖에 있다면 서로 알지 못하며, 몸속을 알지 못하므로 안에 있다고 할 수 없고, 몸과 마음이 서로 알기 때문에 밖에 있다고 해도 옳지 않습니다. 이제 몸과 마음이 서로 알면서도 몸속을 못 보니, 마음은 당연히 중간에 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마음이 중간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 중간이란 애매하지 않아서, 반드시 일정한 곳이 없지 않으리라. 지금 너는 중간을 찾아보아라. 중간이 어디에 있느냐. 딴 곳에 있느냐, 네 몸에 있느냐. 만일 몸에 있다면, 몸 주변이면 중간이 아니며, 몸속이면 내장을 보아야 한다. 만일 딴 곳에 있다면, 표시할 수 있느냐, 표시할 수 없느냐. 표시할 수 없으면 중간이 없는 것이며, 표시한다 해도 일정하지 않으리라.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 푯말을 세워 중간을 표시할 때, 동쪽에서 보면 서쪽이고, 남쪽에서 보면 북쪽이니, 표시 자체가 이미 혼란하여 마음이 뒤섞여 어지럽기 때문이다."

  아난이 말했다.

  "제가 말한 중간은 이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눈과 색(色)이 인연[緣]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눈에는 분별작용이 있고, 색 경계[色塵]는 아는 작용이 없는데서, 식(識)이 그 중간에서 생기므로, 이 중간을 마음이 있는 곳이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만일 눈과 색 경계의 중간에 있다면, 이 마음 자체는 눈과 색의 둘[二; 根塵]을 겸했느냐, 둘을 겸하지 않았느냐.  

  만일 둘을 겸했다면, 색[物; 塵]과 눈[體; 根]이 어지럽게 섞일 뿐 아니라, 색[物; 塵]은 눈[體; 根]의 분별작용[知]이 아니니 색의 무지(無知)와 눈의 분별이 딴 편으로 갈라설 텐데, 어찌 중간이 되겠느냐.  

  둘을 겸하지 않았다면, 눈의 분별[知]도 색의 무지[不知]도 아니어서, 자체의 성품이 없는데, 중간이란 어떤 모양이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마음이 중간에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어. 제가 예전에 들으니, 부처님께서 목건련(目揵連)과 수보리(須菩提)와 부루나(富樓那)와 사리불(舍利弗) 등 네 제자와 함께 법륜(法輪)을 굴리시면서 '깨닫고 알고 분별하는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아서, 어디에도 있는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체 무착(無着)이 마음이라는 뜻이니, 제가 이 무착을 마음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깨닫고 알고 분별하는 마음이 어디에도 있지 않다면, 세상과 허공의 물과 육지에서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는 온갖 물상을 일체(一切)라고 하는데, 네가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가 있는 데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일체가 없는 데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일체가 없는 데서 집착하지 않는다면, 거북이의 털과 토끼의 뿔처럼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겠느냐. 또 일체가 있는 데서 집착하지 않는다면, 집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으리라. 모양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없지 않으면 모양이 있는 것이며, 모양이 있으면 마음이 있으니, 어찌 집착이 없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일체에 집착이 없는 것을 깨닫고 아는 마음이라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그러자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걷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여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부처님의 가장 어린 아우로서 부처님의 자애로운 혜택을 입고 비록 지금 출가했다고 하나, 오히려 귀염만을 믿고 많이 듣고 알기만 하다가, 여태껏 무루법[無漏]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비가라주(娑毗迦羅呪)를 꺾지 못하고, 마등가(摩登伽)의 홀림을 당하여 음실(婬室)에 빠졌으니, 이것은 진실한 경지[眞際]로 가는 길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부디 세존께서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사마타(奢摩他)의 길을 열어 보이시고, 모든 천제(闡提)들도 추악한 성격[彌戾車]을 헐어버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온몸[五體]을 땅에 던져 대중과 함께 정성을 기우려 공손히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이 때 세존께서는 얼굴에서 여러 가지 광명을 놓으셨다. 그 빛이 백 천의 햇살처럼 휘황찬란하게 비치자, 드넓은 부처님의 세계[普佛世界]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면서 시방(十方)의 티끌처럼 많은 세계가 일시에 열려 나타났다. 부처님께서 위신력(威神力)으로 이 모든 세계를 합하여 한 세계를 이루시니, 그 세계의 보살들은 본 국토에 머문 그대로 합장하여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중생이 시작 없는 옛적부터 가지가지로 뒤바뀌어, 업의 종자가 자연히 악차(惡叉)나무의 열매 덩어리와 같으니, 수행자들은 더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無上菩提]을 성취하지 못하고, 따로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 되거나, 온갖 외도(外道)와 모든 하늘과 마왕(魔王)과 그 권속(眷屬)이 되는 것은, 다 두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고 어지럽게 뒤섞여 수습(修習)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행은 마치 모래를 삶아서 좋은 음식을 만들려는 것처럼 아무리 오랜 겁을 지낼지라도 성취할 수 없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 근본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첫째는 끝없는 옛적부터 나고 죽는 근본으로서, 네가 지금 모든 중생과 함께 반연하는 마음[攀緣心]을 제 성품으로 아는 일이며, 둘째는 시작 없는 보리열반의 원래 청정한 본체[菩提涅槃元淸淨體]로서, 네가 지금 식정(識精)의 원래 밝음으로 모든 인연을 내고 그 인연으로 잃어버린 것이니라.  

  모든 중생은 이 원래 밝은 본체(本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록 종일토록 행할지라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어긋나게 여러 갈래[諸趣]로 들어가느니라.

  아난아, 네가 이제 사마타(奢摩他)의 길을 알고 생사(生死)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이제 또 네게 묻겠노라."  

  즉시 여래께서 곧 황금색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보고 있느냐."

  아난이 말했다.

  "예 보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느냐."

  아난이 말했다.

  "저는 여래께서 팔을 들고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만드시고 제 마음과 눈에 비추시는 모습을 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으로 보느냐."

  아난이 말했다.

  "저는 이 대중(大衆)과 함께 똑같이 눈으로 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나에게 답하기를 '여래가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만들어서 너의 마음과 눈에 비춰 주는 것을 본다'고 했는데, 네 눈은 본다고 하겠으나, 무엇을 마음이라 하여 내 주먹의 비치는 모양을 아는 것이냐."

  아난이 말했다.

 "여래께서 방금 마음이 있는 곳을 물으시자, 저는 마음으로 추궁하여 찾아보았으니, 이 추궁하는 자체를 저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돌(咄), 아난아, 그것은 네 마음이 아니니라."

  이 말을 듣자 아난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벌떡 일어나 자리를 피하여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것이 제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앞 경계의 허망한 모양을 인연하는 생각이며, 너의 참 성품을 미혹시킨 번뇌이니라. 너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금생(今生)에 이르도록 도적을 아들로 잘못 알고 너의 본래 영원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사의 윤회를 받고 있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의 귀여운 아우로서, 마음 깊이 부처님을 좋아하여 출가하였으나, 제 마음이 어찌 홀로 여래만 공양하겠습니까. 나아가 항하(恒河)의 모래처럼 많은 국토를 두루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과 선지식(善知識)을 받들어 섬기거나, 큰 용맹을 일으켜서 온갖 행하기 어려운 불법의 일[法事]을 행할지라도, 다 이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며, 또 가령 법을 비방하여 영원히 선근(善根)에서 물러날지라도, 역시 이 마음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마음을 마음이 아니라고 밝히신다면, 저는 바로 마음이 없어서 흙과 나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깨달아 아는 마음을 떠나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데, 여래께서는 어째서 제 마음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저 혼자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여기 이 대중도 의혹이 없지 않습니다. 부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이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소서."

  이 때 세존께서 아난과 대중에게 열어 보이시고 그 마음을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게 하시려고, 사자좌(師子座)에서 아난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이 여래는 항상 '모든 법이 생겨나는 것은 유심(唯心)에서 나타난 경계이며, 일체 인과(因果)와 세계 미진(微塵)은 마음으로 자체를 이룬다'고 설해 왔노라. 아난아, 만일 모든 세계의 온갖 존재에서 조그마한 풀 잎새나 가느다란 실 가닥까지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 자체의 성품이 있고, 허공일지라도 이름과 모습이 있는데, 더욱이 청정하고 미묘하고 맑고 밝은 마음은 일체 마음의 본성(本性)인데 어찌 자체가 없겠느냐. 만일 네가 분별하고 깨닫고 살피고 분명하게 아는 성품을 굳게 집착하여 틀림없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이 마음은 마땅히 모양[色]을 보고 냄새[香]를 맡고 맛[味]을 알고 닿음[觸]을 느끼는 온갖 경계의 일들을 떠나서, 따로 완전한 제 성품이 있어야 하느니라. 네가 지금 내 설법을 받들어 듣고 있을지라도 소리를 따라 분별하고 있으며, 가령 일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이 사라져서 안으로 고요한 경계를 지킬지라도, 오히려 법의 경계[法塵]를 분별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나는 네게 굳이 마음이 아님을 고집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저 마음으로 자세히 헤아려 보아라. 만일 앞 경계를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있다면, 바로 진실한 너의 마음이라고 하겠으나, 분별하는 성품이 경계를 떠나서 자체가 없다면, 이것은 곧 앞 경계를 분별하는 그림자이니라. 경계는 영원히 머무는 진리[常住]가 아니니, 만일 변하여 사라질 때 그 마음도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다면, 너의 법신(法身)도 끊어져 없어지는 것[斷滅]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면 그 무엇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닦아서 증득하겠느냐."

  그러자 아난과 대중은 무엇을 잃어버린 듯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닦고 배우는 행자들이 현재 비록 아홉 단계의 선정[九次第定]을 성취할지라도, 번뇌를 다한 아란한(阿羅漢)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생사(生死)의 허망한 생각을 집착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잘못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이제 비록 많이 들어 아는 지식을 쌓았을지라도, 성인의 과위[聖果]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니라."

  아난이 이 말을 듣고 또 다시 슬피 울면서 온몸[五體]을 땅에 던져 길게 끓어 앉아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부처님을 따라 발심하여 출가하였으나,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믿고 항상 홀로 '내가 수고롭게 닦지 않아도 여래께서 저에게 삼매(三昧)를 내려주시리라'고 생각하며, 본래 몸과 마음이 서로 대신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고 저의 본심(本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마음은 도(道)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거지 아들[窮子]이 아버지를 버리고 달아난 것과 같습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비록 들은 지식이 많을지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듣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음은, 마치 아무리 입으로 음식을 말해도 끝내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지금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에 얽매인 까닭은, 고요하고 영원한 심성[寂常心性]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헐벗고 궁핍한 저를 가엾게 여기시고 밝고 묘한 마음을 밝히셔서 도의 눈[道眼]을 열어주옵소서."

  즉시 여래께서는 가슴의 만자(卍字)에서 보배로운 광명을 놓으셨다. 백천 색으로 어우러진 그 찬란한 광명은 일시에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부처님의 세계에 두루 퍼져서, 시방의 온갖 보배로운 국토[寶刹]에 계신 모든 여래의 정수리를 두루 비춘 뒤에, 다시 돌아와 아난과 모든 대중을 비췄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위대한 법의 깃대를 세우리라. 따라서 시방의 일체중생도 미묘하고 심오한 성품의 맑고 밝은 마음을 얻게 하여 청정한 안목을 밝히도록 하리라."

  아난아, 너는 좀 전에 나에게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본다'고 답했는데, 이 주먹의 광명이 있는 까닭은 무엇이며, 어떻게 주먹이 되었으며, 또 너는 무엇으로 보았느냐."

  아난이 말했다.

  "염부단금(閻浮檀金)과 같은 부처님의 온 몸이 보배 산처럼 붉어서 청정한 빛을 내시기 때문에 광명이 있으시며, 저는 그 모습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쥐시고 사람들에 보여주셨기 때문에 주먹 모양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래는 오늘 실례를 들어 네게 알려주리라.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이 비유로 반드시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아난아, 비유하면 나의 주먹과 같다. 만일 내 손이 없다면 내 주먹을 만들 수 없으며, 네 눈이 없다면 너는 볼 수 없으리라. 이와 같은 이치로 네 눈을 내 주먹에 비교한다면 그 뜻이 같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제 눈이 없다면 저는 볼 수 없으므로, 제 눈을 여래의 주먹에 비교한다면 실제[事]와 뜻이 서로 같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서로 같다고 했으나 이 뜻은 그렇지 않다. 그 까닭은 만일 손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주먹을 만들 수 없으나, 눈이 없는 사람은 전혀 못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말하리라. 네가 시험 삼아 길거리로 가서 맹인(盲人)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맹인들은 너에게 '나는 지금 눈앞에 캄캄함만 볼 뿐, 그 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리라. 이 뜻으로 보면 앞 경계가 스스로 어두울 뿐, 보는 작용이야 무엇이 모자라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맹인들의 눈앞이 캄캄함을 어째서 본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의 기능이 없는 맹인들이 보는 캄캄함과 눈의 기능이 있는 사람이 암실(暗室)에서 보는 캄캄함을 비교하면, 두 캄캄함은 다르겠느냐, 다르지 않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암실에 있는 사람을 저 맹인들과 비교하면 두 캄캄함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눈 먼 사람이 눈앞의 캄캄함만 보다가 홀연히 눈빛을 얻고 다시 앞 경계에서 갖가지 물체를 보았을 때 이를 눈이 본다고 한다면, 저 암실에 있는 사람이 눈앞의 캄캄함만 보다가 홀연히 등빛을 얻고 앞 경계에서 갖가지 물체를 본다면, 당연히 등이 본다고 해야 하리라. 만일 등이 본다면 보는 능력은 등에 있으니, 자연히 등이라고 이름할 수 없으며, 또 등이 보는 것이니 너와 무슨 상관이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등은 빛을 드러낼 수 있으나, 이렇게 보는 작용은 이 눈이요 등이 아니며, 눈은 색을 드러낼 수 있으나, 이렇게 보는 성품은 이 마음이요 눈이 아니니라."

  아난이 또 이 말을 듣자 대중과 함께 비록 입으로는 이미 할 말이 없어졌으나 마음으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오히려 여래께서 자비하신 음성으로 설해주시기를 바라면서, 합장하여 마음을 비우고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기다렸다.

  이 때 세존께서 그물 모양처럼 무늬 져서 도라면(兜羅綿)처럼 부드럽고 광명이 빛나는 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펴시면서, 아난과 대중에게 명하셨다.

  "내가 처음 도를 이루고 녹원(鹿園)에서 아야다(阿若多) 등 다섯 비구와 너희들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말하기를 '일체중생이 보리(菩提)와 아라한(阿羅漢)을 이루지 못함은 다 객진번뇌(客塵煩惱)의 잘못 때문이니라'고 했을 때, 너희들은 당시에 무엇을 근거로 깨달았기에 거룩한 과위[聖果]를 이뤘느냐."

  이 때 교진나(憍陳那)가 일어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지금 장로(長老)로서 대중 가운데 홀로 '잘 아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객진(客塵)의 두 글자를 깨닫고 과위[果]를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비유를 들어 말하면 나그네가 여정(旅亭)에 머물러서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다가 자고 먹는 일이 끝나면, 편안히 머무를 여가도 없이 짐을 싸서 길을 떠나지만, 주인은 멀리 떠나는 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머물지 않는 것은 나그네이고, 머무는 것은 주인이니, 머물지 않는 것을 객(客)의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또 날씨가 맑게 갠 아침에 밝은 태양이 하늘에 떠올랐을 때, 그 빛이 빈틈으로 들어와서 빈틈의 티끌을 밝게 비추면, 티끌의 모양은 흔들리지만, 허공은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맑고 고요한 자체는 허공[空]이고, 흔들리는 것은 티끌이니, 흔들리는 것을 진(塵)의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즉시 여래께서는 곧 대중을 향하여 다섯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고 폈다가  또 구부리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느냐."

  아난이 말했다.

  "저는 여래께서 대중을 향하여 온갖 보배무늬의 손을 펴고 구부리는 모양을 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대중 가운데 손을 펴고 구부리는 모양을 본다고 하였으니, 내 손이 펴고 구부렸느냐, 아니면 네 보는 작용이 펴고 구부렸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존께서 보배의 손을 대중 가운데 펴고 구부리시니, 저는 여래의 손이 스스로 펴고 구부리는 모양을 보았을 뿐, 저의 보는 성품은 펴거나 구부린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움직이고 무엇이 고요하였느냐."

  아난이 말했다.

  "부처님의 손이 움직였을 뿐[不住], 저의 보는 성품은 애초에 고요한 일도 없었는데, 어찌 움직인다[無住]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여래께서는 여기에 손바닥으로 한줄기 보배의 광명을 날려서 아난의 오른쪽에 보내시니, 아난은 머리를 돌려 오른쪽을 보았고. 또 한줄기 보배의 광명을 날려서 아난의 왼쪽에 보내시니, 아난은 머리를 돌려 왼쪽을 보았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네 머리가 어째서 좌우로 흔들렸느냐."

  아난이 말했다.

  "여래께서 미묘한 보배의 광명을 날려서 저의 왼쪽과 오른쪽에 보내시니, 저는 그 광명을 보느라고 저절로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여래의 광명을 보느라고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고 하니, 네 머리가 흔들렸느냐, 아니면 네 보는 성품이 흔들렸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제 머리가 저절로 흔들렸을 뿐, 저의 보는 성품은 애초에 멈춘 일도 없었는데 어찌 흔들린다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부처님께서 널리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중생이 흔들림을 티끌이라 하고, 머물지 않음을 나그네라고 한다면, 너희들은 아난을 보라. 머리가 저절로 흔들렸을 뿐, 보는 성품은 흔들리지 않았느니라.  

  또 너희들은 나를 보라. 손이 스스로 펴고 구부렸을 뿐, 보는 성품은 펴거나 구부리지 않았느니라.  

  그럼에도 어째서 너희들은 지금 움직임을 몸으로 삼고 흔들림을 경계로 삼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마다 생하고 멸하는 가운데 진실한 성품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일을 행하는 것이냐. 이렇게 심성(心性)이 진실을 잃고 물체를 자신으로 알아서 그 속을 윤회하며 스스로 흘러 다니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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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2권

   

이 때 아난과 대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몸과 마음이 태연해진 가운데 생각해 보았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인연 경계를 따라 분별하는 그림자를 잘못 알고 있다가, 이제야 여래를 만나서 깨닫고 보니, 마치 젖 잃은 아기가 다시 자애로운 어머니를 만난 듯 기뻤다. 아난은 대중과 함께 합장하여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몸과 마음에서 진실과 망상의 허와 실과 현재의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의 이치를 드러내시고, 두 가지의 바른 뜻을 분명하게 밝혀주시기를 원했다.

  이 때 바사닉왕(波斯匿王)이 일어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기 전에 가전연(迦旃延)과 비라지자(毗羅胝子)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것[斷滅]을 열반'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부처님을 만났으나 지금도 오히려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이 의심을 해결하여 불생멸의 이치를 확실하게 증명하겠습니까. 지금 이 대중 가운데 번뇌가 있는 이들도 모두 다 듣고 싶어 합니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네 몸이 현존하니 이제 또 네게 물어보리라. 대왕의 그 육신은 금강처럼 견고하여 영원히 머물러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변하여 무너진다고 생각하는가."

왕이 말했다.

  "저는 지금 이 몸이 끝내 변하여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는 이전에 몸이 멸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멸할 줄 아는가."

  왕이 말했다.

  "저의 이 무상(無常)하게 변하여 무너지는 몸이 비록 이전에 멸한 적은 없으나, 생각마다 옮기고 달라져서 계속 새롭게 변하여 멈추지 않고, 불에 타는 땔감이 재가 되듯이 점점 스러져 사라지며 쉬지 않고 스러져 없어지는 것을 보니, 이 몸은 앞으로 결코 멸하여 사라질 줄 압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대왕이여, 그대는 이제 나이가 들어 이미 쇠약한 늙은이가 되었는데, 얼굴 모습은 동자 때와 얼마나 다른가."

  왕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는 피부와 살갗이 부드럽고 윤택하였으며, 더 자랐을 때는 혈기가 왕성하여 힘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너진 나이로 거의 쇠약한 상늙은이[衰耄]가 다 되었으니, 형색은 말라서 초췌하고 정신은 멍하여 혼미하며, 머리는 하얗고 얼굴은 쭈그러져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텐데, 어떻게 혈기 충만한 젊은 시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몸과 얼굴은 한꺼번에 쇠약하지 않았으리라."

  왕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변하여 달라진 모양이 가만히 옮겼으니, 저는 참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세월[寒暑]의 옮겨 흐름과 함께 점점 이렇게 늙어버렸습니다. 그 까닭은 제 나이 스무 살 때는 비록 젊은 나이라고 하나, 얼굴 모습은 이미 이전 열 살 때보다 늙었으며, 서른 살 때는 스무 살보다 늙었으며, 지금의 예순두 해를 보낸 나이로 쉰 살 때를 돌아보면, 쉰 살 때가 훨씬 건장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가만히 옮겨온 일을 대강 보고, 비록 이렇게 폭삭 늙었다고 하였으나, 그 동안 흘러 바뀌어 온 기간을 그저 10년씩 잡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세히 생각해 본다면 그 변함이 어찌 10년 20년뿐이겠습니까, 실은 해마다 변했습니다. 어찌 오직 해마다 변할 뿐이겠습니까, 실은 달과 함께 변해왔습니다. 어찌 단지 달마다 변할 뿐이겠습니까, 실은 날과 함께 변해왔습니다. 좀더 세밀하게 곰곰이 살펴보면, 찰나마다 생각마다 변하여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몸이 마침내 변하여 없어질 줄 압니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는 '변화하고 옮기고 바뀜이 멈추지 않음을 보고 그 몸이 끝내 멸할 줄 안다'고 했는데, 그대는 멸할 때에도 몸 가운데 멸하지 않는 이치가 있는 줄을 아는가."  

  바사닉왕은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참으로 그 이치를 모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불생멸의 성품을 보여주리라. 대왕이여, 그대는 몇 살 때 처음으로 항하의 강물을 보았는가."

  왕이 말했다.

  "제 나이 세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기바천(耆婆天) 사당(祠堂)을 참배[謁]할 때, 이 강물을 건너면서 바로 항하의 강물인 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말하기를 '스무 살 때는 열 살 때보다 늙었고, 내지 예순 살은 쉰 살보다 늙었으며, 또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때마다 찰나마다 생각마다 옮기고 변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대가 처음 세 살 때 본 이 강물을 열세 살이 되어 본 그 강물에 비하면 어떻게 다른가."

  왕이 말했다.

  "세 살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며, 금년 예순 두 살이 되어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하얀 머리와 쭈그러진 얼굴을 서럽게 여기고 있으며,  

 그대의 얼굴도 분명 동자 때보다 훨씬 쭈그러졌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강물을 보는 정기와 예전의 동자 때 강물을 보는 정기에도 따로 동자와 늙은이가 있겠는가."

  왕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의 얼굴은 비록 쭈그러졌을지라도, 이 보는 정기의 성품은 일찍이 쭈그러진 적이 없었느니라. 쭈그러지는 것은 변할지라도 쭈그러지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느니라. 변하는 것은 변하여 없어질지라도 저 변하지 않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데. 어째서 그대는 그 속에 생사를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저 말가리(末伽梨)들의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을 끌어들이는가."

  왕은 이 말씀을 듣고 이 몸이 죽은 뒤에 이 생을 버리고 다음 생에 태어난다는 이치를 확실하게 알고, 대중들과 함께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는 법을 얻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하고 합장한 채 길게 끓어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보고 듣는 마음이 결코 생멸(生滅)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저희들에게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일을 행하느냐'라고 꾸짖으셨습니까. 자비를 내리시어 저의 번뇌를 씻어주옵소서."

  그러자 여래께서 황금색 팔을 내리시고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켜 보이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모다라(母陀羅: 印, 封, 結印, 手印) 손을 보아라. 이 손의 모양을 '바로'라고 하겠느냐, '거꾸로'라고 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모양을 '거꾸로'라고 하겠으나, 저는 '바로'인지 '거꾸로'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세상 사람들이 이 모양을 '거꾸로'라고 한다면, 어떤 모양을 '바로' 라고 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여래께서 팔을 세우셔서 도라면(兜羅綿)손을 위로 올리시고 허공을 가리키신다면 '바로'라고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곧 팔을 세우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러한 뒤바뀜[顚倒]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한 번 더 잘못 보고 있느니라. 분명히 알라. 너의 그 몸을 여래의 청정한 법신(法身)과 비교하여 밝힌다면, 여래의 몸을 바르게 두루 다 아는 지혜의 몸이라 하고, 너희들의 몸을 성품이 뒤바뀐 몸이라고 한다. 네 몸을 따라서 자세히 살펴보아라. 네 몸을 여래의 몸에 비하여 뒤바뀌었다는 말은 어디를 두고 뒤바뀌었다고 하느냐."

  그러자 아난은 대중과 함께 몸과 마음의 뒤바뀐 곳이 어딘지 몰라서 치켜 뜬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멍하게 부처님을 바라보았다.  

  부처님께서 자비한 마음을 내어 아난과 대중을 가엾게 여기시고 조수(潮水)처럼 때에 맞는 음성으로 두루 법회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나는 항상 '물질[色]과 마음[心]과 모든 인연과 마음에 딸린 모든 생각[心所使]과 온갖 인연 경계의 법[所緣法]은 유심(唯心)에서 나타난 모양'이라고 설해왔느니라. 네 몸과 마음은 다 이렇게 묘하고 밝고 진실하고 정밀하고 심오한 마음 가운데 나타난 현상인데, 어째서 너희들은 본래 묘하고 원만하고 밝은 마음의 보배처럼 밝고 묘한 성품을 잃어버리고, 깨달음을 미혹(迷惑)으로 잘못 아는 것이냐.

  미혹한 어둠이 허공으로 변하고, 허공의 미혹한 어둠 가운데서 어둠이 맺혀 색(色)이 되고, 색이 망상과 섞이니, 망상으로 나타난 모양을 몸으로 여겼으며, 인연을 모아 안으로 흔들리고 경계를 좇아 밖으로 달리는 어둡고 흔들리고 시끄러운 모양을 심성(心性)으로 삼았느니라.  

  이렇게 한번 미혹하여 마음으로 여겨서는 헷갈려 몸[色身] 속에 있다고 결정하고, 안으로 색신(色身)과 밖으로 산과 강과 허공과 대지가 온통 다 묘하고 밝은 참 마음 가운데 물체임을 알지 못하니, 비유하면 맑고 깨끗한 백 천의 큰 바다를 버리고, 오직 한 물거품의 체[一浮漚體]만을 인정하여, 바닷물 전체[全潮]로 지목하고, 넓은 바다[瀛渤]를 끝까지 다 물거품으로 보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너희들은 내가 아래로 내린 손과 다름없이 미혹한 가운데 한 번 더 미혹한 사람들이니, 이 여래는 너희들을 가련한 자라고 하느니라."

  아난은 부처님께서 가련하게 여겨 구해주신 깊은 가르침을 받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차수(叉手)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비록 부처님의 이와 같은 묘음(妙音)을 받들어서 묘하고 밝은 마음이 원래 원만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자리[心地]임을 깨달았으나, 제가 지금 부처님의 설법소리를 깨달을지라도, 현재 인연하는 마음의 작용이며, 진실로 우러러 볼지라도 단지 이 마음을 얻을 뿐이니, 아직은 감히 본원(本元)의 심지(心地)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원만한 법음[圓音]을 베푸시어, 이 의혹의 뿌리를 뽑으셔서 더없이 높고 바른 도[無上道]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오히려 인연하는 마음으로 법을 듣고 있으니, 이 법도 인연일 뿐, 법의 본성을 얻은 것이 아니니라. 어떤 사람이 손으로 달을 가리켜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손가락을 따라 달을 보아야 하는데, 여기서 만일 손가락을 보고 달 자체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어찌 달만 잃었겠느냐. 손가락도 잃었느니라. 왜냐하면 가리킨 손가락을 밝은 달로 여겼기 때문이다. 어찌 손가락만 잃었다고 하겠느냐. 밝음과 어둠도 모른다고 하리라. 왜냐하면 손가락 자체를 달의 밝은 성질로 여겨서, 밝고 어두운 두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만일 내 설법소리를 분별하는 작용으로 네 마음을 삼으려면, 그 마음은 마땅히 소리의 분별을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있어야 한다. 비유하면 여정(旅亭)에 기숙(寄宿)한 나그네는 잠시 머물다가 이내 떠나서 끝내 상주(常住)하지 않으나, 여정을 맡은 사람은 전혀 갈 곳이 없으니 여정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진실한 네 마음이라고 한다면, 갈 데가 없어야 하는데, 어째서 소리를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품이 없느냐. 어찌 소리를 분별하는 마음만 그렇겠느냐, 나의 용모를 분별하는 마음도 온갖 색상(色相; 三十二相 八十種好)을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품이 없느니라. 이렇게 나아가 분별이 전혀 없는 곳에 이르면,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므로, 구사리(拘舍離)들은 이 이치를 모르고 명제(冥諦)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법의 인연을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없다면, 너의 마음[心性]은 각각 인연을 따라 돌아갈 자리가 있으니, 어찌 주인이 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만일 제 심성(心性)이 돌아갈 곳이 있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묘하고 밝은 본래의 마음은 어째서 돌아갈 곳이 없는 것입니까.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그 이치를 설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또 네가 나를 볼 때 그 보는 정기[見精]는 밝은 근원이다. 이 보는 정기가 비록 미묘하고 정밀하고 밝은 마음은 아닐지라도, 눈을 눌러 생긴 곁 달과 같으며,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가 아니다. 너는 자세히 들어라. 이제 너에게 돌려보낼 자리가 없는 까닭을 보여주리라.

  아난아, 이 큰 강당이 동쪽으로 활짝 열려 있을 때 하늘에 해가 뜨면 밝은 빛을 보고, 그믐의 한밤중에 구름이 잔뜩 끼면 캄캄한 어둠을 보며, 문과 창틈에서는 통함을 보고, 담과 지붕에서는 막힘을 보며, 분별하는 곳에서는 여러 인연을 보고, 텅 빈 곳에서는 두루 공(空)한 성질을 보며, 안개에 묻혀 내리는 흙비의 모양에서는 어둠에 쌓인 티끌을 보며, 날씨가 맑게 개어 먼지와 안개가 걷히고 나면 다시 맑은 기운을 보리라.

  아난아, 너는 이 변화하는 모양들을 다 보고 있으니, 나는 이제 그 모양들을 본래 원인한 자리로 각각 돌려보내리라.  

  본래 원인한 자리는 어느 곳이겠느냐.  

  아난아, 이 여러 변화하는 모양 가운데, 밝음은 해로 돌려보내리라. 그 까닭은 해가 없으면 밝지 않기 때문이다. 밝은 원인은 해에 속했으니, 해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어둠은 그믐의 한 밤중에 돌려보내고, 통함은 문과 창틈으로 돌려보내며, 막힘은 담과 지붕으로 돌려보내고, 여러 인연은 분별로 돌려보내며, 텅 빈곳은 허공으로 돌려보내고, 안개 쌓인 흙비는 티끌로 돌려보내며, 맑은 기운은 개인 날씨로 돌려보내리라.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이 여덟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너는 이 여덟 가지를 두루 다 본다. 그 두루 다 보는 정기의 밝은 성품은 어디로 돌려보내겠느냐.  

  만일 밝음으로 돌려보낸다면 밝지 않을 때는 어둠을 보지 못해야 하리라. 비록 밝고 어두운 것들은 가지가지 차별이 있으나, 보는 정기는 차별이 없느니라.  

  돌려보낼 수 있는 것들은 자연히 네가 아니지만, 네가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네 마음은 본래 묘하고 밝고 깨끗하나, 너 스스로 미혹하여 본성을 잃고 윤회하면서 언제나 생사 가운데 잠겨 흘러 다니니 여래는 불쌍하다고 하느니라."

  아난이 말했다.

  "제가 비록 이 보는 성품은 돌려보낼 곳이 없다는 것을 알지라도, 어떻게 해야 이 보는 성품이 저의 참 성품이란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에게 물어 보리라. 너는 아직 번뇌 없는 청정한 경지[無漏淸淨]를 얻지 못했으나, 나의 신통력[神力]으로 초선천(初禪天)을 걸림 없이 보았다. 아나률(阿那律)은 염부제(閻浮提)를 손안의 암마라(菴摩羅) 열매처럼 보고, 보살들은 백 천의 세계를 보며, 시방 여래는 티끌처럼 많은 청정국토를 남김없이 다 볼 수 있으나, 중생은 아무리 환하게 볼지라도 한 치[分寸]에 지나지 않는다.

  아난아, 내가 너와 함께 사천왕(四天王)이 머무는 궁전을 보았을 때, 중간에서 물과 육지와 허공에 다니는 온갖 것을 두루 다 보았다. 거기에 비록 어둡고 밝은 가지가지 형상이 있었으나, 어느 것 하나 앞 경계의 구분으로서 걸리고 막히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너는 여기에서 자타(自他)를 분별해 보아라. 내가 이제 너에게 보는 작용 가운데 무엇이 나 자체인지 무엇이 다른 물상인지를 가려내리라.

  아난아, 네가 보는 능력을 다하여 일월궁(日月宮)으로부터 살펴보아라.  

 이것은 물체일 뿐 네가 아니니라. 또 칠금산(七金山)까지 자세히 살펴보아라. 비록 가지가지 빛깔은 다르나, 역시 물체일 뿐 네가 아니니라. 이렇게 점차 다시 뜬구름과 나는 새들과 부는 바람과 날리는 티끌과 숲과 나무와 산과 내와 풀과 지푸라기와 사람과 짐승들을 보아라. 모두 다 물체일 뿐 네가 아니니라.

  아난아, 이 멀고 가까운 온갖 물체의 성질은 비록 다를지라도, 너의 보는 정기는 한결같이[同] 청정하게 보느니라. 온갖 종류의 물체에는 스스로 차별이 있을지언정, 보는 성품은 차별이 없으니, 이 보는 정기의 묘한 밝음이 진실한 너의 보는 성품이니라.

  만일 이 보는 작용이 물체라면, 너는 나의 보는 작용도 보아야 한다.  

  만일 같이 보는 것으로 나의 보는 작용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보지 않을 때는 어째서 너는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못 보는 것이냐.

  만일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본다고 한다면, 자연히 저 보지 않는 모양이 아니니라.

  만일 내가 보지 않는 자리를 못 본다면 자연히 물체가 아니니, 어찌 너 자신이 아니겠느냐.

  또 네가 이제 물체를 볼 때 너는 이미 물체를 보았으니, 물체도 너를 보아야 하리라. 그러면 보는 자체의 성질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너와 나와 온갖 세상은 제자리의 질서[安立]를 이루지 못하리라.

  아난아, 만일 네가 나를 볼 때 바로 너의 보는 작용이요, 나의 보는 작용이 아니라면, 보는 성품이 두루 원만한 자체는 너 자신이 아니고 누구라고 하겠느냐. 어째서 너의 진실한 성품이 너의 성품으로서 진실하지 않다고 의심하여, 나를 상대로 진실을 찾으려는 것이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보는 성품이 틀림없이 저 자신이고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전에 제가 여래와 함께 사천왕의 승장보전(勝藏寶殿)을 보느라고 일월궁(日月宮)에 있었을 때는 이 보는 성품은 두루 사바세계에 원만하다가, 정사(精舍)로 돌아왔을 때는 단지 가람(伽藍)만 보였으며, 마음 닦는 당실[淸心戶堂]에 있을 때는 처마와 행랑만 보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는 성품은 이와 같이 그 자체가 본래 한 세계에 두루 원만하다가 지금 방안에서는 오직 한 방에만 가득 차는 것입니까. 이 보는 성품이 큰 것을 움츠려 작아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담장이나 지붕에 끼어 끊어지는 것입니까. 저는 지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오니 부디 넓은 자비를 내리시어 설하여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세간의 크다거나 작다거나 안이라거나 밖이라고 하는 모든 일의 작용[事業]은 각기 앞 경계에 달려 있을 뿐이니, 보는 성품이 펴진다거나 움츠린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비유하면 모난 그릇에서 모난 허공을 보는 일과 같다. 내가 또 너에게 묻겠노라. 이 모난 그릇에서 보는 모난 허공은 정해진 모남이겠느냐, 정해진 모남이 아니겠느냐. 만일 정해진 모남이라면 달리 둥근 그릇에 담을지라도 그 허공은 반드시 둥글지 않아야 하리라. 만일 정해진 모남이 아니라면 모난 그릇 속에 있을지라도 당연히 모난 허공이 없어야 한다. 네가 말한 '이 뜻이 있는 곳을 모른다'는 뜻의 내용[義性]이 이러하니, 무엇이 있겠느냐.

  아난아, 만일 또 둥글고 모남이 없는 데로 들어가게 하려면, 단지 모난 그릇만 치우면 그만이다. 허공 자체는 모남이 없으니, 더 이상 허공에 있는 모난 모양을 치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네가 질문한 대로 방에 들어갔을 때 보는 성품이 움츠러져 작아졌다면, 고개를 들어 해를 쳐다볼 때는 보는 성품을 늘려서 해에 맞춰야 하겠느냐. 만일 담장이나 지붕에 끼어서 보는 작용이 끊어졌다면, 벽에 작은 구멍을 뚫었을 때는 어째서 이은 흔적이 없느냐. 네가 말한 뜻은 그렇지 않느니라.

  온갖 중생들이 시작 없는 옛적부터 자기를 물체로 미혹하여 본래의 마음을 잃고 물체를 따라 구르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큰 것을 보고 작은 것을 보는 것이니라. 만일 물체를 굴릴 수 있다면, 여래와 같이 몸과 마음이 뚜렷이 밝아서,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한 털 속에 두루 시방국토를 머금어 들일 수 있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보는 정기가 틀림없이 나의 미묘한 성품이라면, 이 미묘한 성품은 지금 바로 제 앞에 있습니다. 이 앞에 있는 보는 정기가 분명 나의 진실한 성품이라면, 지금의 제 몸과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이 몸과 마음은 분별하는 실체가 있으나, 저 보는 정기는 따로 제 몸을 구분하여 가려내지 못합니다.

  만일 참으로 앞에 있는 보는 정기가 제 마음이라면, 저로 하여금 지금 보게 하였으니, 보는 성품이 실제로 나이고, 이 몸은 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래께서 좀 전에 '물체도 나를 볼 수 있으리라'고 힐난하신 말씀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디 큰 사랑으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지금 네가 말한 보는 정기가 네 앞에 있다고 한 뜻은 진실하지 않다. 참으로 네 앞에 있어서 네가 실제로 보고 있다면, 이 보는 정기는 이미 장소가 있을 것이니, 그 장소를 가리켜 보일 수 있으리라. 나는 지금 너와 함께 기타림(祇陀林)에 앉아서 수풀과 냇물과 법당과 위에 있는 해와 달과 앞에 마주한 항하를 두루 다 보고 있으니, 너는 이제 내 사자좌(師子座) 앞에서 손을 들어 이 가지가지 모양에서 가리켜 보아라. 그늘진 것은 숲이고 밝은 것은 해며, 막힌 것은 벽이고 통한 것은 허공이다. 이렇게 풀과 나무와 티끌과 먼지에 이르기까지 비록 크고 작음은 다를지라도, 모양이 될 만한 것은 가리키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 만일 그 보는 정기가 분명 네 앞에 있다면 너는 손으로 확실하게 가리켜 보아라. 어느 것이 이 보는 정기냐.  

  아난아, 마땅히 알라. 만일 허공을 보는 정기라고 한다면 허공은 이미 보는 정기가 되었는데, 어느 것을 허공이라고 하겠느냐. 만일 물상을 보는 정기라고 한다면 물상은 이미 보는 정기가 되었는데, 어느 것을 물상이라고 하겠느냐. 너는 세밀하게 만상(萬象)을 헤치고 벗겨서, 밝고 깨끗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보는 작용의 근원을 쪼개고 골라내어, 저 온갖 물상들을 보듯 분명하여 의혹이 없도록 나에게 가리켜 보여라."

  아난이 말했다.

  "제가 지금 이 겹 층의 전각 강당에서 멀리 항하의 강까지 위로 해와 달을 보면서, 손으로 가리킬 수 있는 것과 눈가는 대로 볼 수 있는 것을 다 가리켜도 모두 이 물체일 뿐, 보는 정기는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처음 배우는 성문이어서 그렇다고 하나, 심지어 보살들의 큰 지혜로도 온갖 물상에서 정견(精見)을 쪼개어 내놓을 수 없습니다. 일체 물상을 떠나서 따로 제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정견(精見)이 없고 일체 물상을 떠나서 따로 제 성품이 있다면, 네가 가리킬 물상 안에는 보는 정기가 없으리라. 한 번 더 네게 부탁한다. 너는 지금 여래와 함께 앉아있는 기타림(祇陀林)에서, 다시 수풀과 동산으로부터 해와 달까지 살펴보아라. 가지가지 다른 모양에서 네가 가리켜 낼 보는 정기가 없다면, 너는 또 이 온갖 물상 가운데서 무엇이 보는 정기가 아닌지 밝혀보아라."  

  아난이 말했다.

  "저는 실재로 이 기타림을 두루 보고 있으나,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보는 정기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나무가 보는 정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나무를 보겠으며, 만일 나무가 보는 정기라면 어찌 나무라고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만일 허공이 보는 정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허공을 보겠으며, 만일 허공이 보는 정기라면 어찌 허공이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또 사유(思惟)해 보니, 이 온갖 물상 가운데서 세밀하게 밝힌다면, 보는 정기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그러자 대중 가운데 무학(無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듣자 아득하여, 이 뜻의 나중과 처음을 몰라 일시에 놀라면서, 어느 뜻을 지켜야 할지를 몰라 당황했다.

  여래께서 그 넋이 변하여 놀란 줄을 아시고 가련하게 여겨 아난과 대중들을 달래면서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무상법왕(無上法王)의 말은 진실한 말이며, 진리그대로 설하는 말이며, 속이지 않는 말이며, 거짓이 없는 말이니, 말가리(末伽黎) 등이 죽지 않는다고 교란하는 네 가지 희론[四種不死矯亂論議]이 아니니라. 너희들은 자세히 사유하여 법을 원하는 간절한 마음[哀慕]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라."

  이 때 대중 가운데 있던 문수사리 법왕자(法王子)가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가련하게 여겨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합장하여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대중이 여래께서 밝히신 정교한 보는 작용이 색과 공인지[是], 아닌지[非是]에 대한 두 가지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앞에 인연하는 색(色)과 공 등의 모양이 만일 정교한 보는 작용이라면 반드시 가리켜 보일 수 있어야 하며, 만일 정교한 보는 작용이 아니라면 볼 수 없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중은 지금 이 뜻이 돌아간 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놀라고 있을 뿐, 옛날부터 바른 근성[善根]이 모자란 탓이 아닙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큰사랑을 베푸셔서, 이 온갖 물상(物象)과 보는 정기는 원래 무엇이 길래, 그 중간에 그렇다고도[是] 할 수 없고 그렇지 않다고도[非是] 할 수 없는지에 대하여 밝혀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문수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시방 여래와 뛰어난 보살들이 스스로 머문 삼마지(三摩地) 가운데는 보는 정기와 보는 정기의 인연 경계와 생각하는 모양들은 허공 꽃과 같이 본래 아무것도 없느니라. 이 보는 정기와 보는 정기의 인연 경계는 원래 보리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데, 어찌 이 가운데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있겠느냐.

  문수여, 너에게 묻겠노라. 너 그대로 문수인데 다시 문수가 있다고 하여 이것은 문수다 문수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느냐."

  문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가 실제 문수인데, 이것은 문수다라고 할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이 문수다라고 한다면, 바로 두 문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는 변함없는 문수이니, 이 가운데 참으로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두 모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는 작용의 미묘한 밝음과 허공과 온갖 경계도 이와 같이 본래 묘하고 밝고 더없이 높은 보리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이니라. 이 참 마음이 허망하게 물체[色]와 허공과 보고 듣는 작용으로 변했으니, 마치 곁 달[第二月]을 보면서 어느 것은 달이고, 또 어느 것은 달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문수여, 단지 참 달 하나뿐이니, 달이다 달이 아니다라고 할 까닭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제 보는 정기와 경계[塵]를 살펴서 가지가지로 밝히는 작용은 허망한 생각이니, 그 가운데서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경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지만, 이것은 진실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이기 때문에 가리켜 밝힐 수 있다 가리켜 밝힐 수 없다는 경계에서 너를 벗어나게 하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인연[覺緣]은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 고요한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서, 그 성품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을 예전의 범지(梵志) 사비가라(娑毗迦羅)가 말하는 '명제(冥諦)'나, 또는 재에 몸을 던지는 외도 및 온갖 외도들이 말하는 '참 나[眞我]가 시방에 두루 원만하다'는 뜻과 어떻게 다릅니까.  

  세존께서는 이전에 능가산(楞伽山)에서 대혜(大慧)보살 등에게 이 뜻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저 외도들은 항상 자연(自然)이라고 설하나, 내가 말한 인연은 저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제 살펴보니, 깨달음의 성품은 자연으로서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멀리 일체 허망한 뒤바뀜을 벗어났으므로, 인연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러니 저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어떻게 가려내야만 온갖 사견(邪見)에 들지 않고 진실한 마음의 묘하게 깨달은 밝은 성품을 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방편으로 설명하여 진실하게 너에게 알려줬는데, 너는 오히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자연과 헷갈리는 것이냐.

  아난아, 만일 틀림없이 자연이라면 '저절로[自]'가 반드시 분명하여 자연의 체[自然體]가 있어야 한다.  

  너는 또 이것을 살펴보아라. 이 묘하고 밝게 보는 작용에서 무엇으로 자체(自體)를 삼겠느냐. 이 보는 작용을 밝음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어둠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빈곳[空]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막힘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아난아, 만일 밝음으로 자체를 삼는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또 만일 빈곳으로 자체를 삼는다면 당연히 막힘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온갖 어둠 등의 모양을 자체로 삼는다면, 밝을 때는 보는 성품이 끊겨 없을 텐데 어떻게 밝음을 보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이 묘하게 보는 성품이 분명 자연이 아니라면, 저는 이제 인연으로 생긴다고 밝히려 하나, 제 마음은 오히려 아직 분명하지 못해서 여래께 묻습니다. 이 뜻은 어떻게 해야 인연의 성품[因緣性]에 부합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인연이라고 했으니 네게 묻겠노라. 너는 지금 보는 작용으로 인(因)하여 보는 성품이 눈앞에 뚜렷하니, 이 보는 성품은 밝음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어둠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빈곳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막힘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아난아, 만일 밝음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만일 어둠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밝음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빈곳과 막힘으로 인한 경우도 밝음과 어둠의 예와 같다.

  아난아, 이 보는 성품은 또 밝음을 연(緣)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어둠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빈곳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막힘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아난아, 만일 빈곳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막힘을 보지 못해야 하며, 만일 막힘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빈곳을 보지 못해야 한다. 이와 같이 밝음과 어둠을 연하는 경우도 빈곳과 막힘의 예와 같다.

  그러니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정밀한 깨달음의 묘한 밝음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며, 자연도 아니고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며, 인연과 자연이 아닌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 것도 없으며[無非不非], 인연과 자연이란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란 것이 아니란 것도 없는 가운데[無是非是], 일체의 모양을 떠나서 일체의 법과 일치하느니라. 너는 어째서 이 가운데 마음을 두고 세상에서 희론(戱論)하는 온갖 명상(名相)으로 분별하려는 것이냐. 이렇게 분별하는 것은 마치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고 하듯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인데, 허공이 어떻게 너의 손에 잡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미묘한 깨달음의 성품이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라면, 세존께서는 어째서 비구들에게 언제나 말씀하시기를 '보는 성품에 네 가지 연(緣)을 갖췄으니, 이른바 빈곳을 인연하고 밝음을 인연하고 마음을 인연하고 눈을 인연한다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이 뜻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나는 세간의 인연상(因緣相)을 설했을 뿐, 가장 뛰어난 뜻[第一義]을 설한 것이 아니다.

  아난아, 또 네게 묻겠노라.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나는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경우를 보는 것이라 하고, 어떤 경우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햇빛과 달빛과 등빛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모양이 보이면 보는 것이라고 하며, 햇빛과 달빛과 등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일 밝음이 없을 때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어둠도 볼 수 없어야 한다. 만일 분명 어둠을 본다면 이것은 단지 밝음이 없을 뿐이지, 어째서 보는 것이 없다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어둠 속에 있을 때 밝음을 못 본다는 이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밝은 데 있으면서 어두운 모양을 볼 수 없는 것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밝고 어두운 두 모양을 함께 다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리라.  

  비록 밝음과 어둠이 서로 번갈아 빼앗아 바뀔지라도, 너의 보는 성품은 밝음과 어둠을 잠시도 떠난 적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분명히 알라. 밝음과 어둠을 둘 다 보는 것인데 어째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밝음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밝은 것이 아니요, 어둠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어두운 것이 아니며, 빈곳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빈곳이 아니요, 막힘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막힌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네가 물은 네 가지 뜻이다. 너는 또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는 정기를 볼 때 보는 정기를 보는 진견(眞見)은 보는 정기가 아니다. 진견(眞見)은 오히려 보는 정기를 떠나 있어서, 보는 정기로도 미칠 수 없는데, 어떻게 인연이니 자연이니 화합상(和合相)이라고 하겠느냐.  

  너희 성문들은 소견이 좁고 낮아 아는 것이 없어서 청정한 실상(實相)을 모르고 있느니라.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리니, 곰곰이 잘 생각하여 묘한 보리의 길[妙菩提路]에 피곤하거나 게으르지 않도록 하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인연과 자연과 모든 화합상과 화합하지 않는 이치를 말씀해주셨으나, 여기에 마음이 채 열리기도 전에, 이제 다시 '보는 정기를 보는 진견(眞見)은 보는 정기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들으니, 지금은 더욱 미혹하여 답답할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넓으신 사랑으로 큰 지혜의 눈을 베푸셔서 저희들에게 깨달음의 마음을 밝혀 맑히는 법을 깨우쳐 주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난은 슬피 울며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거룩한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이 때 세존께서는 아난과 대중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장차 대다라니(大陀羅尼)와 모든 삼마제(三摩提)와 묘한 수행의 길[妙修行路]을 설하시기 위하여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기억력이 좋을지라도 단지 많이 듣고 아는 지식만 채웠을 뿐, 사마타(奢摩他)의 미세하고 심오한 관조의 지혜[微密觀照]는 아직 마음속 깊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나는 너를 위해서 분별하여 열어 보이고, 또 장래의 번뇌에 얽힌 중생들도 깨달음의 과위[菩提果]를 얻게 하리라. 아난아, 일체 중생이 세상에서 윤회하는 것은 두 가지 뒤바뀌어 분별하는 허망한 보는 작용을 따라 바로 그곳에서 발생하여 바로 그 업으로 바퀴 돌 듯 구르기 때문이니라.

  두 가지 보는 작용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개별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別業妄見]이요. 둘째는 공동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同分妄見]이다.  

  개별 업(別業)의 허망한 보는 작용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세상 사람들 가운데 눈에 붉은 삼 병[赤眚]이 있는 사람은 밤에 등불에서 남달리 5색이 둥글게 겹친 등 무리를 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밤 등불에 밝게 나타난 등 무리[圓光]를 등불의 색이라고 생각하느냐. 보는 작용의 색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난아, 만일 이것이 등불의 색이라면 삼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등 무리를 보지 못하는데, 어째서 오직 삼 병에 걸린 사람만이 등 무리를 보는 것이냐. 만일 보는 작용의 빛이라면 보는 작용은 이미 빛이 되었는데, 저 삼 병에 걸린 사람이 보는 등 무리는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또 아난아, 만일 이 등 무리가 등불을 떠나서 따로 있다면, 옆자리의 병풍이나 휘장이나 책상이나 돗자리를 볼 때에도, 당연히 등 무리가 나와야 하며, 보는 작용을 떠나서 따로 있다면, 분명 눈이 보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삼 병에 걸린 사람만은 눈으로 등 무리를 보는 것이냐.

  그러므로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빛은 실제로 등에 있으며, 보는 작용의 병이 등 무리가 되었느니라.  

  등 무리와 보는 작용이 다 삼 병일지라도, 삼 병을 보는 자체는 병이 아니니, 끝내 등 무리를 놓고 등 탓이다 보는 작용 탓이다라고 말하거나, 그 가운데서 등 탓이 아니요 보는 작용 탓이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곁 달[第二月]은 달 자체도 아니고 달그림자도 아닌 것과 같다. 왜냐하면 곁 달은 눈을 눌러 생겼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이 눈을 눌러 생긴 곁 달의 근원을 두고 '달 모양이다 달 모양이 아니다'라고 하거나, '보는 작용과 보는 작용이 아니라는 것을 벗어났다'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 등 무리도 역시 그러하여 삼 눈병으로 생겼는데, 이제 무엇을 이름하여  

등 탓이다 보는 탓이다라고 하겠으며, 어찌 더욱이 '등 탓이 아니다 보는 탓이 아니다'라고 분별하려고 하겠느냐.  

  공동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이 남섬부주(南贍部洲)에는 큰 바다를 제외한 중간의 육지에만 3천 섬[洲]이 있는데, 한 복판의 대륙[大洲]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 한데 묶어 세어 보면 2천 3백 개의 큰 나라가 있느니라. 그 나머지 작은 섬[小州]은 여러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 사이에는 3백 나라 2백 나라가 있기도 하고, 또 한 나라 두 나라로부터 서른 나라 마흔 나라 쉰 나라까지 있기도 하다.

  아난아, 만일 이 중 어느 한 작은 섬에 단 두 나라만 있는 데서, 오직 한 나라 사람들만이 공동으로 나쁜 인연에 물들었다면[感], 그 작은 섬의 해당 국토 중생은 온갖 상서롭지 못한 경계를 보게 된다. 혹은 두 해를 보기도 하고 두 달을 보기도 하며, 내지 햇무리[暈], 월식과 일식[適], 해의 귀걸이[珮玦], 살별[彗星], 사방으로 뿔 돋친 별[孛星], 빗겨 나는 별똥 별[飛星], 아래로 흐르는 별똥 별[流星], 해를 등진 무지개[負耳], 암수의 쌍무지개[虹蜺] 등 가지가지 나쁜 모양을 보느니라. 이 모양은 단지 이 국토 중생들만 볼 뿐이며, 저 국토 중생들은 본래 본 바도 없고 듣지도 못한다.  

  아난아,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이 두 가지 일을 앞뒤로 맞춰서 밝혀보리라. 저 중생이 개별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別業妄見]으로 본 등빛에 나타난 등 무리가 비록 경계와 유사하게 나타났을지라도, 결국 저 보는 사람의 눈병으로 이뤄졌으니, 삼 병은 보는 작용이 피로하여 나타난 모양일 뿐, 빛 자체에서 만들어진 모양이 아니다.  

  그러나 삼 병을 보는 자체는 결국 보는 자체의 허물이 없느니라. 네가 지금 눈으로 산과 강과 국토와 중생들을 보는 작용에 견주어 보면, 모두 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보는 작용의 병으로 이뤄진 모양이니라.

  보는 작용[見]과 보는 작용의 인연[見緣]이 앞에 나타난 경계인 듯하나, 원래 나의 깨달음의 밝음으로 허망하게 인연 대상을 보는 삼 병이니, 깨닫고 보는 것이 곧 삼 병이지만, 본각(本覺)의 밝은 마음으로 인연을 깨치는 것은 삼 병이 아니니라.

그러니 깨달아야 할 삼 병을 깨달으면, 이 깨달음은 삼 병 가운데 있지 않느니라. 이것이 참으로 보는 정기를 보는 진실한 봄[見見]이니, 어찌 깨닫고 듣고 알고 보는 허망한 마음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네가 지금 나를 보고 너 자신을 보고 모든 세간의 온갖 중생을 볼지라도, 다 보는 작용의 삼 병이요, 삼 병을 보는 진실한 자체가 아니다. 저 보는 작용의 정밀하고 진실한 성품은 삼 병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작용'이라고 하지 않는다.  

  저 중생들이 본 공동 몫의 허망한 보는 작용[同分妄見]을, 저 허망하게 본 개별 업의 한 사람에 견주어 보면, 눈에 삼 병 걸린 사람은 저 한 나라와 같다. 또 저 한 사람이 본 등 무리는 삼 병으로 허망하게 생겼으며, 이 공동의 몫으로 본[衆同分] 불길한 모양[不祥]은 공동으로 보는 업[同見業]의 전염병처럼 나쁜 기운[瘴惡]에서 일어났으니, 모두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보는 작용의 허망에서 생겼느니라.

  염부제(閻浮提)의 3천주(洲) 가운데 네 큰 바다를 겸한 사바세계(娑婆世界)와 아울러 시방(十方)의 모든 번뇌가 있는 국토와 중생들을 견주어 보면, 다같이 깨달음이 밝고 번뇌가 없는 묘한 마음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허망한 병의 인연으로, 화합하여 허망하게 나고, 화합하여 허망하게 죽는 것이니라.

  만일 모든 화합하는 인연과 화합하지 않은 것을 멀리 벗어날 수 있다면, 온갖 나고 죽는 원인을 멸하여 없애고, 원만한 보리의 생멸을 떠난 성품이요, 청정한 본래 마음인 본래 깨달음이 영원히 머물게 되리라.

  아난아, 네가 비록 앞서 본각의 묘하고 밝은 성품이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나, 오히려 이러한 깨달음의 근원은 화합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고 화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치를 밝히지 못하였느니라.

  아난아, 내가 이제 또 앞 경계를 들어 너에게 물어보리라. 너는 지금도 오히려 일체 세상의 망상으로 화합한 온갖 인연의 성질을 가지고 스스로 보리를 증득하는 마음도 화합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의혹하고 있느니라.

  지금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정기는 밝음과 어울렸느냐, 어둠과 어울렸느냐. 통함과 어울렸느냐, 막힘과 어울렸느냐.

만일 밝음과 어울렸다면 또 너는 밝은 것을 보아라. 밝은 것이 바로 눈앞에 닿아 있으니 어느 곳에 보는 정기와 섞였느냐. 보는 정기[見]와 밝은 모양[相]은 가려낼 수 있을 테니, 섞인 것은 어떤 형상이냐.

  만일 밝은 것이 보는 정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밝은 모양을 보겠느냐. 만일 밝음이 곧 보는 정기라면 어찌 보는 정기 자체를 보겠느냐.

  만일 분명 보는 정기가 원만하다면 어느 곳에 밝음과 어울리겠으며, 만일 밝음이 원만하다면 당연히 보는 정기와 어울리지 못하리라.

  보는 정기는 분명 밝음과 다르므로, 섞이면 저 성품이 밝다는 명분[名字]을 잃게 되며, 섞여서 밝은 성품을 잃었으니, 밝음과 어울린다는 말은 옳지 않다.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어울린 경우도 밝음과 어울린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아, 또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정기는 밝음과 합하였느냐, 어둠과 합하였느냐. 통함과 합하였느냐, 막힘과 합하였느냐.

  만일 보는 정기가 밝음과 합하였다면, 어두울 때는 밝은 모양은 이미 사라져서, 이 보는 정기는 온갖 어둠과 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어둠을 보겠느냐.

  만일 어둠을 볼 때 어둠과 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한 경우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한다. 이미 밝음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했다 하며, 밝음이 어둠이 아닌 줄을 알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합한 경우도 밝음과 합한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사유(思惟)해보니 이 미묘한 깨달음의 근원은 모든 인연 경계와 마음으로 생각하는 작용[心念慮]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또 깨달음의 근원은 화합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내가 다시 네게 묻겠노라. 이 묘한 보는 정기가 화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어둠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통함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막힘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만일 밝음과 어울리지 않았다면, 보는 정기와 밝음 사이에 반드시 경계선[邊畔]이 있어야 한다.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 어디까지가 밝음의 경계이고 어디까지가 보는 정기의 경계이냐. 또 보는 정기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며 밝음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느냐.

  아난아, 만일 밝은 경계 안에 보는 정기가 없다면, 서로 닿지 않아서 그 밝은 모양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할 텐데, 경계가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어울린 경우도 밝음과 어울리는 예와 마찬가지다.

  또 묘한 보는 정기가 화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하지 않았느냐. 어둠과 합하지 않았느냐. 통함과 합하지 않았느냐. 막힘과 합하지 않았느냐.

  만일 밝음과 합하지 않았다면, 보는 정기와 밝음이 그 성질과 모양이 서로 어긋나서 마치 귀와 밝음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아도 밝은 모양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합하고 합하지 않는 이치를 가려서 밝히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합한 경우도 밝음과 합하는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아, 너는 오히려 아직도 일체 실속 없이 뜬 경계에서 환술(幻術)처럼 변화하는 온갖 모양이, 바로 그 곳에서 생겨났다가 그 곳을 따라 사라져버림을 밝히지 못하여, 허망한 환영(幻影)을 모양이라고 하지만, 그 성품은 진실그대로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본체이니라.  

  이와 같이 내지 5음(陰)과 6입(入)과 12처(處)에서 18계(界)에 이르기까지,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겨난다 하고,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멸한다고 하지만, 단지 이 생기고 멸하고 가고 옴이 본래 여래장(如來藏)으로서, 영원히 머물러 묘하게 밝고 움직이지 않고 두루 원만하고 미묘한 진여(眞如)의 성품임을 잘 알지 못할 뿐이다.

  이 성품의 진실하고 영원불변한 가운데서는 아무리 가고 옴과 미혹하고 깨달음과 나고 죽음을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 없느니라.

  아난아, 어째서 5음(陰)을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청정한 눈으로 맑게 개인 밝은 허공을 볼 때, 오직 저 멀리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맑게 개인 빈곳만을 보다가,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멍하게 바로 뜬눈이 피로해지면, 허공에서 따로 어물거리는 헛꽃을 보기도 하고, 또 일체 어지럽게 날 뛰는 헛된 모양을 보기도 하는 것과 같이, 색음(色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 온갖 어물거리는 헛꽃은 허공에서 온 것도 아니고 눈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허공에서 왔으니 다시 허공으로 들어가야 한다. 만일 드나듦이 있다면 허공이 아니며, 허공이 만일 빈 것이 아니면, 스스로 그 꽃 모양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마치 아난의 몸에 아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눈에서 나왔다면 이미 눈에서 나왔으니 다시 눈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 이 꽃의 성질이 눈에서 나올 수 있다면 당연히 보는 작용이 있어야 하며, 만일 보는 작용이 있다면 나가서는 이미 허공에서 꽃이 되었으니, 돌아와서는 반드시 눈을 보아야 한다. 만일 보는 작용이 없다면 나가서는 이미 허공을 가렸으니, 돌아와서는 당연히 눈을 가려야 하리라. 또 꽃을 볼 때도 눈에는 당연히 가린 것이 없는데, 어째서 맑은 허공을 보아야만 맑고 밝은 눈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색음(色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손과 발이 편안하고 온 뼈마디가 고루 화평하여 살아 있다는 것도 잊고 마음에 어기고 따르는 일도 없는 가운데, 그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허공에서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빈다면, 두 손 사이에 난데없이 껄끄럽거나 매끄럽거나 차갑거나 따뜻한 여러 느낌이 생기는 것과 같이, 수음(受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 모든 허망한 촉감은 허공에서 오지도 않고 손바닥에서 나오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손바닥은 촉감을 잘 아는데 어째서 몸에는 촉감이 없느냐. 허공이 닿을 곳을 가려서 닿게 하지는 않으리라.

  만일 손바닥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두 손바닥이 합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며, 또 손바닥에서 나왔으므로 합쳤을 때 손바닥이 알았다면, 떼었을 때는 촉감이 들어갈 것이니, 손목과 팔목의 골수(骨髓)들도 마땅히 들어갈 때의 종적(蹤迹)을 느껴야 한다. 또 반드시 느끼는 마음이 있어서 나오는 것을 알고 들어가는 것을 안다면, 저절로 한 물체가 몸 속을 오고 가는 것이니, 어째서 마주 합하기를 기다려서 알아야만 촉감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수음(受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신 매실을 말하면 입에서 침이 나오고 높은 벼랑을 밟는다고 생각하면 발바닥이 껄끄럽고 시쿰한 느낌이 생기는 것과 같이, 상음(想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아난아, 시다는 말에서 생긴 침은 매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입으로 들어가지도 않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침이 매실에서 나온다면 당연히 매실 자체가 말해야 하는데 어찌 사람이 말하기를 기다리겠느냐.  

  만일 입으로 들어간다면 당연히 입으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어찌 꼭 귀를 기다려 듣겠느냐. 만일 귀로만 듣는다면 이 침은 어째서 귀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냐.

  높은 벼랑을 밟아 오른다는 생각도 매실 비유와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상음(想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며,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세찬 흐름이 물결을 서로 이어 흐르면서 앞뒤를 서로 뛰어넘지 않는 것과 같이, 행음(行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러한 흐름의 성질은 허공을 근거로 생기지도 않고, 물을 근거로 있지도 않으며, 물의 성질도 아니고, 허공과 물을 떠나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을 근거로 생긴다면 시방의 끝없는 허공은 끝없는 흐름을 이루어 세계는 자연히 온통 물 속에 빠져 잠기리라.  

  만일 물을 근거로 있다면 이 세차게 흐르는 성질은 당연히 물이 아니니, 물의 소유한 모양[所有相]이 있으면 마땅히 지금 눈앞에 뚜렷이 보여야 한다. 만일 그 흐름이 물의 성질이라면 맑고 고요할 때는 분명 물 자체가 아니어야 한다.  

  만일 허공과 물을 떠나서 흐름이 따로 있다면 허공은 바깥이 있지 않으며, 물을 떠나서[水外]는 흐름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행음(行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빈가병(頻伽甁)을 취하여 두 구멍을 막아서 그 속에 공기[空]를 가득 채우고 천리의 먼 길을 행하여 다른 나라로 가서 그 공기를 마시는 것과 같이, 식음(識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러한 허공은 저 곳에서 오지도 않고 이 곳에서 들어가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저 곳에서 왔다면 그 병 속에 이미 허공을 담아서 가지고 갔으니, 그 병이 있었던 자리의 허공은 마땅히 조금 적어져야 한다. 만일 이 곳에서 들어간다면 뚜껑을 열고 병을 기울일 때는 당연히 허공이 나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식음(識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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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3권

   

 또 아난아, 어째서 6입(入)을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곧 저 사람이 눈동자를 멍하게 뜨고 피로한 것은, 눈과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밝음과 어둠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계의 모양[塵象]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보는 성질이라고 하며, 이 보는 성질은 밝음과 어둠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보는 작용은 밝음과 어둠에서 오지도 않고, 눈[根]에서 나오지도 않으며,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밝은 데서 온다면 어두울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고, 어두운 데서 온다면 밝을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밝음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눈에서 나온다면 밝고 어둠과 상관없으니, 이러한 보는 정기는 본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앞에서 경계의 모양을 보았으니, 돌아와서는 당연히 눈을 보아야 한다. 또 허공이 제 스스로 보는 것이니, 네 눈의 보는 기능[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눈의 보는 기능[眼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두 손가락으로 급히 귀를 꽉 막는다면, 귀의 감관[耳根]이 피로하여 머리 속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 것은, 이 귀와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듣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듣는 성질이라고 하며, 이 듣는 성질은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듣는 성질은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한 데서 오지도 않고, 귀[根]에서 나오지도 않으며,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듣는 성품이 조용한 데서 왔다면 움직일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소리의 움직임을 듣지 못해야 하고, 만일 움직이는데서 왔다면 조용할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조용함을 깨닫지 못해야 하며, 만일 귀에서 생긴다면 움직임과 조용함과 상관없으니, 이러한 듣는 자체는 본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나온다면 허공은 듣는 작용으로 성품을 이뤘으니 허공이 아니며, 또 허공이 제 스스로 들으니 너의 듣는 기능[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귀의 듣는 기능[耳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급히 코로 숨을 들이켜서 들이켠 숨을 조금 길게 끌어 피로해지면, 콧속에 서늘한 느낌이 생긴다. 이 느낌으로 인하여 통함과 막힘의 허와 실[虛實]과, 이와 같이 온갖 향기와 추한 기운들을 분별하는 것은, 이 코와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통함과 막힘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냄새 맡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냄새 맡는 성품이라고 하며, 이 냄새 맡는 성질은 저 통함과 막힘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냄새 맡는 작용은 통함과 막힘에서 오지도 않고, 코에서 나오지도 않으며,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통한 데서 온다면 막힐 때는 냄새 맡는 작용이 사라지니 어떻게 막힘을 알겠으며, 만일 막힘 때문에 있다면 통할 때는 냄새 맡는 작용이 없으니, 어떻게 향기와 추한 냄새 등의 느낌을 밝히겠느냐. 만일 코에서 생긴다면 분명 통함과 막힘과 상관없으니, 이러한 냄새 맡는 기능은 본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온다면 이 냄새 맡는 작용은 돌아와서 네 코를 냄새 맡아야 하며, 또 허공 자체가 스스로 냄새를 맡는 것이니 네 코의 맡는 기능[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코의 맡는 기능[鼻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혀로 입술을 조금 오래 핥았을 경우, 병 있는 사람은 쓴맛을 느끼고 병 없는 사람은 조금 단맛을 느낀다. 단맛과 쓴맛으로 혀의 감각이 나타나고 혀를 움직이지 않을 때는 항상 담담한 맛이 있는 것은, 이 혀와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맛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맛보는 성질이라고 하며, 이 맛보는 성질은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은 달고 쓴맛에서 오지도 않고 담담한 맛 때문에 있지도 않으며, 또 혀에서 나오지도 않고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달고 쓴맛에서 온다면 담담할 때는 맛보는 작용이 사라지니 어떻게 담담한 맛을 알겠으며, 만일 담담한 맛에서 왔다면 달고 쓴맛을 느낄 때는 담담한 맛이 없어지니 어떻게 달고 쓴 두 맛을 알겠느냐. 만일 혀에서 생긴다면 분명 달고 담담하고 쓴 경계와 상관없으니 이 맛을 아는 기능[知味根]은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나온다면 허공 스스로 맛보는 것이지, 네 입이 맛보는 것이 아니다. 또 허공 자체가 맛보는 일이니 네 혀의 맛보는 기능[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혀의 맛보는 기능[舌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한쪽의 차가운 손으로 다른 쪽의 더운 손과 맞댈 경우, 차가운 기운이 더운 기운보다 많으면 더운 기운은 차가운 기운을 따라 차가워지고, 더운 기운이 많으면 차가운 기운은 더운 기운을 따라 더워진다. 이와 같이 이 맞대어 깨닫는 촉감이 뗄 때에는 떼는 줄을 아는 작용으로 나타나니, 끼어드는 기운[勢]이 이렇게 성립하는 것은, 피로한 촉감이 그 원인이며, 이 몸과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떼고 합하는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촉감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촉감의 성질[知覺性]이라고 하며, 이 촉감 자체[知覺體]는 서로 떼고 합함의 어기고 따르는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촉감[覺]은 떼고 합함에서 오지도 않고, 어기고 따름에 있지도 않으며, 몸의 감관[根]에서 나오지도 않고, 또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합할 때 온다면 뗄 때는 합함이 이미 사라지니 어떻게 떼는 작용을 알겠느냐. 어기고 따르는 두 모양도 마찬가지다. 만일 몸에서 나온다면 분명 떼고 합하고 어기고 따르는 네 가지 모양이 없으니, 네 몸의 감촉 기능은 원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나온다면 허공 스스로가 촉감이니 네 몸의 감촉 기능[身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몸의 감촉 기능은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피곤하고 나른하여 잠이 들었다가 푹 자고 나서 깨었을 때, 경계를 보면 기억하고 기억을 잃으면 잊어버림이 바로 뒤바뀐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라. 이를 빨아들여 익히고 의식 가운데로 돌아가서 서로 뛰어넘지 않음을 의식의 인식 기능[意知根]이라고 하며, 이것은 의식과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생기고 사라짐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아는 작용을 모으고 그 속에 있으면서 안의 경계[內塵; 곧 法塵]를 빨아들여 보고 들음이 흐름을 거슬러서 기억하거나 흐름이 미치지 못하는 곳의 잊는 작용을 지각하는 성질[知覺性]이라고 하며, 이 지각하는 성질은 자고 깨는 생멸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지각의 기능[覺知之根]은 자고 깸에서 오지도 않고, 생기고 사라지는 데에 있지도 않으며, 의식의 감관에서 나오지도 않고,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잠깬 데서 온다면 잠잘 때는 곧 따라 사라져버리니 무엇으로 잠을 자며, 분명 생길 때 있다면 멸할 때는 같이 없는데 무엇이 멸하겠느냐. 만일 멸하는 데 있다면 생길 때는 곧 멸함이 없는데 무엇이 생기는 것을 알겠느냐. 만일 의식의 감관에서 나온다면 자고 깨는 두 모양은 몸의 열리고 닫힘을 따르는 것이니, 이 열리고 닫히는 두 체를 떠나면 이 지각작용은 허공 꽃과 같이 끝내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허공 제 스스로 아는 일이니, 너의 의식작용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의식 기능[意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또 아난아, 어째서 12처소[處]를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너는 또 이 기타원(祇陀園)의 나무와 숲과 샘과 못들을 보아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색이 눈의 보는 작용을 내겠느냐. 눈이 색의 모양을 내겠느냐.  

  아난아, 만일 또 눈[眼根]이 색의 모양을 낸다면 공(空)을 볼 때는 색이 아니니, 눈이 낸 색의 모양은 마땅히 소멸할 것이며, 소멸하면 드러낼 모양은 아무것도 없다. 색의 모양이 이미 없다면 무엇이 공의 본질을 밝히겠느냐. 눈이 공의 모양을 내는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일 또 색의 경계[色塵]가 눈의 보는 작용을 낸다면 공(空)을 볼 때는 색이 아니니, 보는 작용은 곧 소멸할 것이며, 소멸해버리면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이 공과 색을 밝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보는 작용과 색과 공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색과 보는 작용의 두 처소는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이 기타원(祇陀園)에서 공양이 마련되면 북을 치고, 식단으로 대중을 불러 모을 때는 종을 치니, 너는 그 때마다 앞뒤로 서로 이어지는 북소리와 종소리를 듣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들 소리가 귀가로 오겠느냐. 귀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가겠느냐.  

  아난아, 만일 소리가 귀가로 온다면, 내가 실라벌성(室羅筏城)에서 걸식(乞食)할 때는 기타림(祇陀林)에는 내가 없는 것과 같이, 이 소리가 분명 아난의 귀가로 와버린다면, 목련과 가섭은 함께 듣지 못해야 할 텐데, 어찌 더욱이 1,250 사문(沙門)이 한꺼번에 종소리를 듣고 다같이 공양할 곳으로 오는 것이냐.  

  만일 네 귀가 저 소리 나는 곳으로 간다면, 내가 기타림(祇陀林)에 돌아와 머물 때는 실라벌성(室羅筏城)에는 내가 없는 것과 같이, 네가 북소리를 듣고 그 귀가 이미 북 치는 곳으로 가버린다면, 종소리가 겹쳐 나도 마땅히 함께 들을 수 없어야 하는데, 어찌 더욱이 그 가운데 코끼리와 말과 소와 양들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듣는 것이냐. 만일 오고 감이 없다면 듣는 작용도 없어야 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듣는 작용과 소리는 모두 처소가 없으니 듣는 작용과 소리의 두 처소는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또 이 향로의 전단향기를 맡아보아라. 이 향기는 비록 1수(銖)만 태울지라도 실라벌성의 40리 안에서는 동시에 향내를 맡느니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향기는 전단나무에서 나오겠느냐. 네 코에서 나오겠느냐. 허공에서 나오겠느냐.  

아난아, 만일 이 향기가 네 코에서 나온다면, 코에서 생긴다는 말이니 당연히 코에서 나와야 하며, 코는 전단이 아닌데 어떻게 콧속에 전단 기운이 있겠느냐. 네가 향내를 맡는다는 말은 당연히 코로 들어온다는 뜻이니, 콧속에서 나오는 향기를 맡는다고 말하면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만일 허공에서 난다면, 허공의 성질은 한결같으니 향기도 항상 있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향로에 마른 향나무를 태워야 하겠느냐.  

  만일 전단나무에서 난다면, 이 향의 본질은 타면서 연기가 나기 마련이니, 코가 향내를 맡을 적에 연기와 함께 맡아야 한다면, 그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서 채 멀리 퍼지기도 전에 40리 이내의 사람들은 어째서 이미 향내를 맡는 것이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향기와 코와 맡는 작용은 다 함께 처소가 없으니, 맡는 작용과 향기의 두 처소는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언제나 두 때에 대중과 함께 발우를 가지고 걸식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간혹 소락(酥酪)을 가장 잘 정제(精製)된 제호(醍醐)를 만나면 훌륭한 맛이라고 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맛은 허공에서 생기느냐. 혀에서 나느냐. 음식에서 나느냐.  

  아난아, 만일 이 맛이 네 혀에서 난다면 네 입 속에는 혀가 하나뿐이니, 그 혀가 일단 우유 맛이 되었다면, 검은 꿀[黑石蜜]을 먹어도 맛이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만일 맛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맛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만일 달라진다면 혀는 여럿이 아닌데 어떻게 한 혀로 여러 맛을 다 알겠느냐.  

  만일 음식에서 난다면, 음식은 아는 작용이 없으니 어떻게 제 스스로 알겠으며, 또 음식이 제 스스로 안다면 남의 음식과 같으니, 너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맛을 안다고 하겠느냐.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너는 허공을 씹어 보아라. 어떤 맛이 나느냐. 그 씹은 허공이 분명 짠맛이라면 이미 네 혀를 짜게 하였으니 네 얼굴도 짜야 한다 .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짠맛 속에 사는 바닷고기와 같이 조금도 싱거운 맛을 알지 못하리라. 만일 싱거운 맛을 모른다면 짠맛도 깨닫지 못해야 한다. 또 아무 맛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맛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맛과 혀와 맛보는 작용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맛보는 작용과 맛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새벽마다 언제나 손으로 머리를 만지리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만져서 아는 것은 어느 쪽이 촉감을 아는 주체[能觸]이냐. 그 촉감을 아는 주체는 손에 있겠느냐. 머리에 있겠느냐.

  만일 손에 있다면, 머리는 알지 못할텐데 어떻게 촉감이 성립되겠느냐. 만일 머리에 있다면 손에는 촉감이 없을 텐데, 어찌 촉감이라고 하겠느냐. 만일 각각 따로 있다면 너 아난에게 마땅히 두 몸이 있어야 하리라. 만일 머리와 손에서 똑같이 한 촉감이 생긴다면, 손과 머리는 당연히 같은 일체(一體)가 되어야 한다. 만일 같은 일체라면 촉감은 성립되지 않으리라. 만일 다른 이체(二體)라면 촉감은 어느 쪽에 있겠느냐. 대는 쪽[能]에 있으면 닿는 쪽[所]에 있지 않을 것이며, 닿는 쪽에 있으면 대는 쪽에 있지 않으리라. 당연히 허공이 너에게 촉감을 주었다고도 못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촉감을 아는 작용과 몸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몸과 촉감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언제나 의식(意識) 가운데 인연하는 선과 악과 무기(無記)의 세 성질로 법칙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이 법은 마음과 일치한 상태에서 생기겠느냐. 마음을 벗어나서 따로 장소[方所]가 있겠느냐.  

  아난아, 만일 마음과 일치 하다면, 법칙은 경계[塵]가 아니므로 마음의 인연대상이 아니니, 어떻게 처소가 성립되겠느냐.  

  만일 마음을 벗어나서 따로 장소가 있다면 법의 자성(自性)은 아는 작용이냐, 아는 작용이 아니냐. 아는 작용이라면 마음이라 하겠으나, 너와는 다르면서 경계도 아니니,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같으리라. 너와 일치하면서 마음과도 일치 하다면, 어떻게 네 마음이 다시 너에게 둘이 되겠느냐. 만일 아는 작용이 아니라면 이 법의 경계[塵]는 이미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떼고 합함과 차고 따뜻함과 허공의 모양도 아닌데, 어디에 있다고 하겠느냐. 이제 색과 허공에서 전혀 표시할 수 없고, 인간이 또 허공밖에 있다고 해서도 안 되고, 마음이 인연할 대상도 아니니, 법의 처소는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법칙과 마음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뜻과 법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또 아난아, 어째서 18계(界)를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네가 밝힌 대로 눈[眼]과 색(色)이 연(緣)이 되어 눈의 인식[眼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識]이 눈 때문에 생긴다 하여 눈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색(色) 때문에 생긴다 하여 색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이 인식이 눈 때문에 생긴다면, 눈 자체에는 이미 색(色)과 공(空)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는데, 너의 인식이 있다 한들 무엇을 상대로 작용하겠느냐. 또 너의 보는 작용은 푸르고 노랗고 붉고 흰 것이 아니니 표시할 길이 없는데, 무엇으로 경계를 세우겠느냐.  

  만일 이 인식이 색(色) 때문에 생긴다면, 공하여 색(色)이 없을 때에는 너의 인식도 마땅히 없어질 텐데, 허공의 성질을 어떻게 알겠느냐.  

  만일 색이 변할 때 네가 색의 모양[色相]이 변천하는 상태를 안다면, 너의 인식 자체는 변천한 일이 없는 것이니, 경계를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또 색의 변천을 따라 인식이 변천한다면, 경계의 모양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또 인식이 색을 따라 변천하지 않는다면 인식은 한결같으리라. 그러면 이미 색에서 생겼으니, 마땅히 허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리라.  

  만일 두 가지를 겸하여 눈과 색이 함께 눈의 인식[眼識]을 낸다면, 눈과 색이 합해져 있을 때는 인식이 자리할 중간이 없을 것[離]이며, 눈과 색이 떨어져 있을 때는 눈과 색의 양쪽으로 갈라서 합해야 한다. 그러면 자체의 성품이 어지럽게 뒤섞일 텐데, 어떻게 경계를 이루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눈과 색이 연이 되어 눈의 인식경계[眼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눈과 색과 색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또 네가 밝힌 대로 귀와 소리가 연이 되어 귀의 인식[耳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이 귀 때문에 생긴다하여 귀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소리 때문에 생긴다하여 소리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귀 때문에 생긴다면,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한 두 모양이 이미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귀[根]에는 아는 작용이 성립되지 않는다. 분명 알 대상이 없으면 아는 작용도 오히려 성립될 수 없는데, 인식은 어떤 모양이겠느냐. 만일 귀의 듣는 작용을 취해서 인식이라 한다면,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이 없기 때문에 듣는 작용도 성립될 수 없는데, 어떻게 색(色)과 향(香)과 미(味)와 촉(觸)의 4진(塵)으로 섞여 짜인 귀의 형체를 인식의 경계라고 하겠으며, 귀의 인식영역은 또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만일 소리에서 생긴다면, 인식이 소리 때문에 있으니, 듣는 작용과 관계가 없으며, 듣는 작용이 없으면 소리의 모양도 있는 자리가 없으리라. 인식이 소리에서 난다 하여 소리를 듣는 작용에 따라 소리 모양이 있다고 인정하면, 듣는 작용은 마땅히 인식 자체를 들어야 하리라. 인식 자체를 듣지 못한다면 소리의 경계가 아니며, 인식 자체를 듣는다면 소리와 똑같아서, 인식 자체가 이미 듣는 대상이 되었으니, 무엇이 인식 자체를 듣는 줄 알겠느냐. 만일 아는 작용이 없다면 결국 초목과 같으니, 당연히 소리와 듣는 작용이 섞여서 중간의 경계가 성립되지 않으리라. 경계의 중간자리가 없으면 안팎의 모양은 무엇으로 성립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귀와 소리가 연이 되어 귀의 인식경계[耳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귀와 소리와 소리 경계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코와 냄새[香]가 연이 되어 코의 인식[鼻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은 코 때문에 생긴다 하여 코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냄새[香] 때문에 생긴다 하여 냄새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이 인식이 코 때문에 생긴다면 너는 마음속에 무엇을 코라고 생각하느냐. 쌍 손톱 모양의 살덩어리를 코라고 생각하느냐. 냄새를 맡아서 동요하는 성질을 코라고 생각하느냐.  

  만일 살덩어리를 가지고 코라고 한다면, 살덩어리[肉質]는 몸이고, 몸의 아는 작용은 촉감이니, 몸이라면 코가 아니며, 촉감이라면 경계[塵]이니라. 그러면 코는 오히려 이름이 없을 텐데 어떻게 경계를 세우겠느냐.  

    만일 냄새 맡는 작용을 가지고 코라고 한다면, 너는 마음속으로 무엇이 맡는다고 생각하느냐. 살덩어리가 맡는다고 한다면 살덩어리의 맡는 작용은 원래 촉감이지 코가 아니며, 허공이 맡는다고 한다면 허공이 제 스스로 맡는 것이니, 살덩어리는 마땅히 느끼지 못해야 하며, 허공이 맡는다면[如是] 마땅히 허공이 바로 네가 되고 네 몸은 알지 못해야 하며, 지금의 아난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냄새 자체[香]가 맡는다고 하면 맡는 작용은 저절로 냄새 자체에 속하는데 너와 무슨 상관이냐. 만일 향냄새와 추한 냄새가 분명 네 코에서 난다면, 저 향내와 구린내의 두 가지 흐르는 기운은 이란(伊蘭; 臭木)나무와 전단(栴檀; 香木)나무에서 생기지 않으리라. 이 두 나무[二物]가 없는데서 너는 스스로 코를 맡아보아라. 향내가 나느냐. 구린내가 나느냐. 구린내라면 향내가 아니며, 향내라면 분명 구린내가 아니다. 만일 향내와 구린내를 둘 다 맡는다면, 너 한 사람에게 마땅히 두 코가 있어야 하고, 또 나에게 도를 물을 때도 두 아난이 있어야 하니, 어느 쪽을 네 몸이라고 하겠느냐. 만일 코가 하나라면 향내와 구린내의 둘은 구분되지 않아서, 구린내가 이미 향내가 되고 향내가 또 구린내가 되어, 두 성질이 있지 않을 텐데 경계를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만일 인식이 냄새[香] 때문에 생긴다면, 인식은 냄새 때문에 있으니, 마치 눈에 보는 작용이 있으나 제 눈을 볼 수 없듯이 냄새 때문에 인식이 있으므로 마땅히 냄새를 맡지 못해야 하리라. 인식이 냄새를 안다면 냄새에서 생긴 것이 아니며, 냄새를 알지 못한다면 인식이 아니니라. 냄새가 맡는 작용을 근거로 있지 않다면, 냄새의 경계는 성립되지 않으며, 인식이 냄새를 알지 못한다면 인식의 경계[因界]는 냄새에서 건립되지 않는다. 이미 중간이 없고 안의 감관과 밖의 경계가 성립되지 않으니, 저 온갖 맡는 성질은 마침내 허망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코와 냄새가 연이 되어 코의 인식경계[鼻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코와 냄새와 냄새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혀와 맛이 인연이 되어 혀의 인식[舌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은 혀 때문에 생긴다 하여 혀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맛 때문

에 생긴다하여 맛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혀 때문에 생긴다면, 세상의 감자(甘蔗)와 오매(烏梅)와 황련(黃連)과 석염(石鹽)과 세신(細辛)과 생강[薑]과 계피[桂]들은 모두 맛이 없으리라. 너는 스스로 혀를 맛보아라. 단맛이냐, 쓴맛이냐. 만일 혀의 성질[性]이 쓰다면 무엇이 와서 혀를 맛보겠느냐. 혀는 스스로 맛보지 못하는데 무엇이 지각하겠느냐. 혀의 성질이 쓰지 않다면 맛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데, 어떻게 경계를 세우겠느냐.

  만일 인식이 맛 때문에 생긴다면, 인식[識] 자체가 맛이 되리라. 그러면 혀의 감관[舌根]이 스스로 맛보지 못함과 한가지니, 어찌 인식[識]이 맛인지 맛 아닌지를 알겠느냐. 또 일체 맛은 한 물건에서만 생기지 않으니, 맛이 이미 많이 생김으로 인식도 당연히 여러 체(體)라야 하리라. 인식의 체가 만일 하나이며 체가 분명 맛에서 생긴다면, 짠맛과 담담한 맛과 단맛과 신맛과 화합한 맛과 본래 가진 맛[俱生]과 변하여 달라진 맛[諸變異]들은 똑같이 한 맛이 되어 분별이 없으리라. 이미 분별이 없다면 인식이라고 이름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또 혀와 맛의 인식경계[舌味識界]라고 하겠느냐. 그렇다고 허공이 너의 심식(心識)을 내지는 않았으리라. 혀와 맛의 화합으로 난다면 곧 이 가운데는 원래 제 성품이 없을 텐데 어떻게 경계가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혀와 맛이 연이 되어 혀의 인식경계[舌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혀와 맛과 혀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몸과 닿음이 연이 되어 몸의 인식身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은 몸 때문에 생긴다 하여 몸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닿음 때문에 생긴다하여 닿음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몸 때문에 생긴다면, 분명 합하고 떼는[合離] 둘을 깨달아 아는 인연[二覺觀緣]이 없으니 몸이 무엇을 알겠느냐.  

  만일 인식이 닿음 때문에 생긴다면, 분명 네 몸이 없는데, 몸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어서 대고 뗌을 알겠느냐.  

  아난아, 물체는 닿아도 알지 못하고, 몸이 아는 작용은 닿음에 있으니, 몸을 알리는 작용이 곧 닿음이며, 닿음을 아는 작용이 곧 몸이다. 따라서 인식이 닿음이면 몸이 아니며, 인식이 몸이면 닿음이 아니니, 몸과 닿음의 두 모양은 원래 처소가 없느니라. 또 닿음이 몸과 합하면 곧 몸 자체의 성품이며, 닿음이 몸을 떠나면 바로 허공과 같은 모양이니, 이렇게 안과 밖이 성립되지 않으면, 중간의 인식이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또 중간의 인식이 성립되지 않으면 안과 밖의 성질이 공하여 없으니, 너의 인식이 생긴들 무엇으로 경계를 세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몸과 닿음이 연이 되어 몸의 인식경계[身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몸과 닿음과 몸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뜻[意; 意根]과 법이 연이 되어 뜻의 인식[意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識]은 뜻 때문에 생긴다 하여 뜻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법 때문에 생긴다 하여 법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뜻[意; 意根] 때문에 생긴다면, 네 뜻[意; 意根] 가운데 반드시 생각할 법[所思]이 있어야 너의 뜻을 밝히겠는데, 만일 앞에 법이 없다면 뜻이 생길 곳이 없으며, 인연을 떠나서는 형체가 없으니, 인식[識]이 무엇을 가지고 작용하겠느냐.  

  또 너의 식심(識心)이 온갖 사량[諸思量; 意根]과 요별을 겸한 성품[兼了別性]과 더불어 같겠느냐, 다르겠느냐. 뜻[意]과 같다면 그대로 뜻[意]이니, 무엇이 생기겠으며, 뜻과 다르다면 같지 않으니, 마땅히 인식할 곳이 없어야 하리라. 만일 인식할 곳이 없다면 어떻게 뜻에서 생긴다고 하겠으며, 만일 인식할 곳이 있다면 무엇이 인식을 낸 뜻이겠느냐. 같고 다름의 두 성질이 성립되지 않으면, 경계를 어떻게 세우겠느냐.

  만일 인식이 법 때문에 생긴다면, 세상의 모든 법은 다섯 경계[五塵]를 벗어나지 않으니, 너는 색법(色法)과 성법(聲法)과 향법(香法)과 미법(味法)과 촉법(觸法)을 보아라. 모양이 분명하여 제각기 다섯 감관을 상대할 뿐, 뜻이 거두는 법이 아니다. 너의 인식이 결코 법을 의지하여 생긴다면, 너는 이제 자세히 살펴보아라. 법 경계[法; 法塵]의 법은 어떤 모양이냐. 만일 색과 공[色空; 色法]과 움직이고 고요함[動靜; 聲法]과 통하고 막힘[通塞; 香法]과 합하고 뗌[合離; 觸法]과 생기고 사라짐[生滅; 味法]을 떠난다면 이 온갖 모양을 벗어나서는 끝내 얻을 것이 없느니라. 생긴다면 색과 공의 온갖 법이 생기고, 멸한다면 색과 공의 온갖 법이 멸할 뿐이다. 이미 원인 할 곳이 없는데 원인이 생겨 인식이 있다면, 어떤 형상이 되겠으며, 형상이 없다면 경계가 어떻게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뜻과 법이 연이 되어 뜻의 인식경계[意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뜻과 법과 뜻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항상 화합하는 인연을 말씀하실 때마다 '일체 세상의 가지가지 변화는 다 4대(大)의 화합으로 나타난다[發明]'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래께서는 인연과 자연을 모두 물리치십니까. 저는 지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오니, 부디 가련하게 여기시고 중생들에게 희론법을 떠난 중도의 완전한 뜻[中道了義]을 열어 보여주옵소서."  

  이 때 세존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먼저 성문과 연각의 모든 소승 법을 싫어하여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열심히 구하려고 발심했기 때문에, 나는 방금 너를 위해서 가장 뛰어난 법[第一義諦]을 열어 보여줬는데도, 어째서 또 세상의 희론인 망상의 인연에 스스로 얽매는 것이냐. 네가 비록 들은 지식이 많을지라도, 마치 약을 말하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진실한 약이 있으나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여래는 참으로 가련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나는 마땅히 너에게 분별하여 열어 보일 뿐 아니라, 미래에 대승(大乘)을 닦는 사람들에게도 실상(實相)을 통달케 하리라."

  그러자 아난은 말없이 부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고자 하였다.

  "아난아, 네가 말한 대로 4대(大; 要素)의 화합으로 세상의 가지가지 변화가 나타난다면[發明], 아난아, 만일 저 요소[大]의 성질 자체가 화합이 아니라면, 모든 요소[諸大]와 섞여 어울릴 수 없음은 마치 허공이 모든 물체와 어울리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며, 만일 화합하는 성질이라면 한가지로 변화하여 시작과 끝을 서로 이루면서 생멸이 상속하여, 났다가 죽고 죽었다가 나며 나고 나며 죽고 죽기를 마치 불덩어리가 쉴 새 없이 돌 듯 반복하리라.  

아난아, 또 마치 물이 얼음이 되었다가 얼음이 다시 물이 되듯 반복하느니라.

  너는 흙의 성질을 보아라. 긁어서는 대지(大地)가 되고, 가늘어서는 미진(微塵)이 되었다가 인허진(鄰虛塵; 허공에 가까운 티끌)이 되느니라. 인허진은 저 극미한 물질의 가장자리[極微色邊際相]를 일곱 몫으로 쪼갠 것이며, 다시 인허진(鄰虛塵)을 쪼갠 것이 바로 완전한 허공의 성질이니라.  

  아난아, 만일 이 인허(鄰虛)를 쪼개어 허공이 된다면, 마땅히 허공이 색상(色相)을 출생시킨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너는 지금 '화합한 까닭에 세상의 온갖 변화하는 모양이 출생하는가'를 물었으니, 너는 또 이 점을 생각해보아라. 한 인허진은 얼마의 허공을 들여 화합해야만 생기겠느냐. 당연히 인허진이 합쳐서 인허진이 되지는 않으리라. 또 인허진을 쪼개어 허공이 되려면 얼마의 색상(色相)을 들여 합해야만 허공이 되겠느냐. 만일 색과 합할 때라면 색과 합했으니 허공이 아니며, 만일 허공과 합할 때라면 허공과 합했으니 물질이 아니다. 색은 오히려 쪼갤 수 있겠으나, 허공을 어떻게 합하겠느냐.  

  너는 원래 여래장(如來藏) 안에 성품이 색인 진실한 공[性色眞空]과 성품이 공인 진실한 색[性空眞色]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知量]에 응하는 줄을 모르고 있느니라.  

  업을 좇아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모두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불의 성질은 자체[我]가 없으니 여러 인연에 의지하느라. 너는 성안의 식전(食前)의 집들을 보아라. 밥을 지으려고 불을 지필 때, 손에 불 거울[陽燧; 火鏡]을 들고 햇빛에서 불을 피우고 있느니라. 아난아, 이를 화합이라고 한다면, 너와 나와 1,250비구가 지금 화합하여 한 대중이 된 것과 같다. 대중으로는 비록 하나이지만 그 근본을 따져보면, 각자의 몸이 따로 있으며, 다들 태어난 씨족의 이름이 있으니, 사리불(舍利弗)은 바라문(婆羅門)족이고, 우루빈라(優樓頻羅)는 가섭파(迦葉波)족이며, 그리고 아난은 구담(瞿曇)족이다.  

  아난아, 만일 이 불의 성질이 화합 때문에 생긴다면, 저 사람이 손에 거울을 잡고 해에서 불을 피울 때, 이 불은 거울에서 나오겠느냐. 쑥에서 나오겠느냐. 해에서 오겠느냐.  

  아난아 만일 해에서 온다면, 해가 스스로 네 손안의 쑥을 태웠으니, 해가 온 곳의 수풀들은 마땅히 불에 타야 한다.

  만일 거울에서 나온다면, 스스로 거울에서 나와 쑥을 태웠는데, 어째서 거울은 녹지 않았느냐. 거울을 잡은 네 손도 오히려 뜨거운 기운이 없는데, 어찌 거울이 녹겠느냐.

  만일 쑥에서 생긴다면, 무엇 때문에 해와 거울과 빛을 빌려 서로 접촉해야만 불이 생기겠느냐.

  너는 또 자세히 살펴보아라. 거울은 손에 잡혀 있고, 해는 하늘에서 오며, 쑥은 본래 땅에서 나는데, 불은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여기를 지나가겠느냐. 해와 거울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불빛이 온 곳 없이 저절로 있다고도 하지 못한다.  

  너는 오히려 여래장 안에 성품이 불인 진실한 공과 성품이 공인 진실한 불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에 응하는 줄을 모르고 있느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라. 세상 사람이 한 곳에서 거울을 들고 불을 피우면 한 곳에 불이 생기고, 법계에서 두루 거울을 들고 불을 피우면 세상 가득 불이 일어나서 세상을 가득 채울 텐데, 어찌 따로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다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물의 성질은 일정하지 않아서 흐르고 그침이 한결같지 않느니라. 저 실라벌성(室羅筏城)의 선인(仙人) 가비라(迦毗羅)와 선인 작가라(斫迦羅)와 발두마(鉢頭摩)와 하살다(訶薩多)와 같은 여러 뛰어난 환술사[幻師]들이 달의 정기[太陰精]를 받아서 환술약[幻藥]을 만들 때, 그들은 보름날 밤중[白月晝]에 구슬 소반[方諸]을 손에 들고 달 속의 물을 받는다. 이 물은 구슬 소반에서 나오겠느냐. 허공 가운데 저절로 있겠느냐. 달에서 나오겠느냐.

만일 달에서 나온다면, 오히려 먼 곳인데도 구슬 소반에서 물이 나올 수 있게 하였으니, 거쳐 온 숲과 나무들은 다 당연히 물을 토해서 흘려보내야 한다. 흐른다면 무엇 때문에 구슬 소반에서 물이 나오기를 기다리겠으며, 흐르지 않는다면 물이 달에서 흐르지 않음이 분명하다.

  만일 구슬 소반에서 나온다면, 이 구슬 소반에서는 마땅히 항상 물이 나와야 할 텐데, 무엇 때문에 한밤중의 보름달을 기다려 물을 받겠느냐.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허공의 본질은 끝이 없으니, 물도 마땅히 끝없이 흘러야 한다. 그러면 인간에서 하늘까지 모두 함께 물 속에 잠길 텐데, 어찌 물과 육지와 허공을 따로 행할 수 있겠느냐.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 달은 하늘에서 떠오르고, 구슬 소반은 손에 잡혀 있고, 구슬 안의 물을 받는 소반[盤]은 그 사람이 펴놓은 것인데, 물은 어디로부터 와서 여기까지 흘러들었느냐. 달과 구슬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물의 정기가 온 곳 없이 저절로 있다고도 하지 못한다.

  너는 오히려 여래장 안에 성품이 물인 진실한 공과 성품이 공인 진실한 물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에 응하는 이치를 모르고 있느니라.

  한 곳에서 구슬을 잡으면 한 곳에서 물이 나오고, 법계에서 두루 구슬을 잡으면, 법계에 가득 물이 생길 텐데, 어찌 따로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다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바람의 성질은 자체가 없으니, 흔들리고 고요함이 한결같지 않다. 네가 항상 법의[衣]를 바로 고쳐 입고 대중의 모임에 들어갈 때마다 승가리 자락[僧伽梨角]이 흔들리면 그 흔들림이 옆 사람에게 닿아서 그 사람의 얼굴에 가벼운 바람이 스친다. 이 바람은 가사자락에서 나오겠느냐, 허공에서 일어나겠느냐. 그 사람의 얼굴에서 생기겠느냐.

  이 바람이 만일 가사자락에서 나온다면, 너는 바로 바람을 입었으니, 그 옷은 펄럭이고 날리어 분명 너의 몸에서 떠나리라. 나는 지금 설법하면서 모임 가운데 법의를 드리웠으니, 너는 내 옷을 보아라. 바람이 어디에 있느냐. 당연히 내 옷 속에 바람을 감춰둔 자리가 있다고 하지는 않으리라.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네 옷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어째서 나부낌이 없느냐. 허공은 항상 머무는 성질이니, 바람도 마땅히 항상 생겨야 한다. 만일 바람이 없을 때면 허공도 당연히 없어져야 하는데, 없어진 바람은 볼 수 있겠으나, 없어진 허공은 어떤 모양이겠느냐. 만일 생멸이 있다면 허공이라 할 수 없고, 허공이라고 한다면 어찌 바람이 나오겠느냐.

  만일 바람이 저절로 스친 상대의 얼굴에서 생겼다면, 상대의 얼굴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너를 스쳐야 한다. 너 자신이 옷을 고쳐 입었는데 어째서 거꾸로 상대를 스쳐간 것이냐.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 옷을 고쳐 입은 것은 너이고, 얼굴은 저 사람에게 있으며, 허공은 고요하여 흔들려 흐르는 것과 상관이 없는데, 바람은 어디로부터 불어와서 여기를 흔드는 것이냐.

  바람과 허공은 성질이 달라서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바람의 성질이 온 곳 없이 저절로 있다고도 하지 못한다.  

  너는 전혀 여래장 안에 성품이 바람인 진실한 공과 성품이 공인 진실한 바람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에 응하는 이치를 모르고 있느니라.

  아난아, 너 한 사람이 옷을 가볍게 펄럭이면 가벼운 바람이 일고 법계에서 두루 펄럭이면 국토 가득 생겨서 세간에 두루 가득할 텐데, 어찌 따로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성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모두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허공의 성질은 형상이 없으므로 물체로 인하여 드러나느니라. 실라벌성 안에 강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찰제리[刹利]와 바라문(婆羅門)과 비사(毗舍)와 수타(首陀)와 전타라(旃陀羅)들이 살 집[安居]을 새로 세우려고 우물을 파서 물을 구할 때, 흙이 한 자쯤 나오면 그 자리에 한 자의 허공이 생기고, 이렇게 흙이 한 길 나오면 중간에 다시 한 길의 허공이 생기는데, 허공의 얕고 깊음은 나오는 흙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느니라. 이 허공은 흙 때문에 나오겠느냐, 파냄 때문에 나오겠느냐, 원인 없이 저절로 생기겠느냐.

  아난아, 만일 이 허공이 원인 없이 저절로 생긴다면, 흙을 파기 전에는 어찌하여 막혀서 오직 대지(大地)만 볼 뿐, 멀리 환하게 통하지 않았느냐.

  만일 흙 때문에 나온다면, 흙이 나올 때는 마땅히 들어가는 허공을 보아야 하며, 만일 흙이 먼저 나오는데 들어가는 허공이 없다면, 어찌 허공이 흙 때문에 나온다고 하겠느냐. 만일 나오고 들어가지 않는다면, 마땅히 허공과 흙은 원래 다른 원인이 없어야 한다. 다르지 않다면 같은 것인데, 흙이 나올 때 어째서 허공이 나오지 않느냐.  

  만일 파냄 때문에 나온다면, 파는 자체로 허공만 나오고 당연히 흙은 나오지 않아야 하며, 파냄 때문에 나오지 않는다면, 팔 때마다 저절로 흙만 나와야 하는데, 어째서 허공을 보는 것이냐.

  너는 다시 조심하고 주의해서 자세히 관찰하여라. 파는 기구는 사람의 손에서 방향을 따라 운전(運轉)하고 흙은 땅을 따라 옮기는데, 이러한 허공은 무엇을 근거로 나오겠느냐. 파냄과 허공의 허(虛)와 실(實)은 서로 작용하지 않아서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허공이 온 곳 없이 저절로 나온다고도 하지 못한다.  

  만일 허공의 성질이 두루 원만하여 본래 동요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현재 눈앞의 흙과 물과 불과 바람과 함께 다섯 요소[五大]라고 하며, 성품이 진실하고 원만하고 융통한 여래장(如來藏)으로서 본래 생멸이 없는 자리이니라.

  아난아, 너는 마음이 혼미하여 네 요소[四大]가 원래 여래장(如來藏)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바로 허공을 보아라. 나오겠느냐 들어가겠느냐,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겠느냐.  

  너는 전혀 여래장 안에 성품이 깨달음인 진실한 공과 성품이 공인 진실한 깨달음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에 응하는 이치를 모르고 있느니라.

  아난아, 한 우물이 공하면 허공이 한 우물만큼 생기듯 시방의 허공도 이와 같은데, 시방에 원만한 허공이 어찌 따로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모두 이 인식하는 마음이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눈의 보는 작용[見覺; 眼根을 시작으로 六根을 다 칭함]에는 아는 작용이 없으니, 색(色)과 공(空)을 따라서 아는 작용이 생기느니라. 네가 지금 기타림(祇陀林)에 있어도 아침이면 밝고 저녁이면 어두워지며, 가령 밤중일지라도 보름이면 밝고 그믐이면 캄캄하다. 이러한 밝고 어두운 경계를 따라 보는 작용이 가려내고 있으니, 이 보는 작용은 밝고 어두운 모양과 넓은 허공과 더불어 동일체(一體)이겠느냐. 동일체가 아니겠느냐. 혹은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겠느냐. 혹은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하겠느냐.

  만일 이 보는 작용이 밝음과 어둠과 넓은 허공과 더불어 원래 일체(一體)라면, 밝음과 어둠의 두 체는 서로 없어져서, 어두울 때는 밝음이 없고 밝을 때는 어둠이 없으리라. 만일 어둠과 일체라면 밝을 때는 보는 작용이 없을 것이며, 밝음과 일체라면 어두울 때는 보는 작용이 멸하리라, 이렇게 멸한다면 어떻게 밝음을 보고 어둠을 보겠느냐. 만일 어둠과 밝음은 다르나 보는 작용에 생멸이 없다면, 일체가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만일 이 보는 정기가 어둠과 밝음과 더불어 일체가 아니라면, 너는 밝음과 어둠과 허공을 떠나서 보는 작용의 근원(根元)을 가려내 보아라. 어떤 형상이 되겠느냐. 밝음을 떠나고 어둠을 떠나고 허공을 떠나면, 이 보는 작용의 근원은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처럼 없을 것이며, 밝음과 어둠과 허공의 세 일과 모두 다르다니, 무엇으로 보는 작용을 세우겠느냐.

  밝음과 어둠은 서로 등진 것인데, 어떻게 혹 동일하기도 하다고 하겠느냐. 밝음과 어둠과 허공의 셋을 떠나서는 보는 정기는 원래 없는데, 어떻게 다르기도 하다고 하겠느냐. 허공을 가려 나누고 보는 작용을 가려 나누려면 본래 경계선[邊畔]이 없는데, 어찌 동일하지 않기도 하다고 하겠느냐. 어둠을 보고 밝음을 보아도 성품은 변하여 옮기지 않는데, 어찌 다르지 않기도 하다고 하겠느냐.

  너는 더욱 자세히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펴서 깊이 관찰하여라. 밝음은 태양을 좇고 어둠은 그믐밤을 따르고, 통함은 허공에 속하고 막힘은 대지로 돌아가는데, 보는 정기는 무엇을 근거로 나오겠느냐. 보는 작용은 감각이며 허공은 완고하여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보는 정기가 온 곳 없이 저절로 나온다고도 하지 못한다.  

  만일 보고 듣고 아는 작용의 성품이 두루 원만하여 본래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끝이 없고 움직이지 않는 허공과 흔들리는 흙과 물과 불과 바람과 함께 여섯 요소라고 하며, 성품이 진실하고 원만하고 융통한 여래장(如來藏)으로서 본래 생멸이 없는 자리이니라.  

  아난아, 네 성품이 망상에 깊이 잠겨서 너의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작용이 본래 여래장(如來藏)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느니라. 너는 마땅히 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을 보아라. 생기겠느냐, 멸하겠느냐. 같겠느냐, 다르겠느냐.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겠느냐, 같지도 다르지도 않겠느냐.

  너는 잠시도 여래장 안에 성품이 보는 작용인 깨달음의 밝음과 깨달음의 정기인 밝은 보는 작용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에 응하는 이치를 모르고 있느니라.  

  한 보는 근원[一見根]의 보는 작용이 법계에 두루 원만함과 같이, 듣는 작용[聽]과 맡는 작용[齅]과 맛보는 작용[嘗觸]과 닿는 작용[覺觸]과 인식작용[覺知]의 묘한 덕도 환하여 법계에 주변하고 시방 허공에 원만하니, 어찌 따로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모두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인식 자체[識性]는 근원이 없으니, 여섯 가지 감관[根]과 대상[塵]을 따라서 허망하게 나오느니라. 너는 지금 이 법회의 성중(聖衆)을 두루 눈으로 빙 둘러 보아라. 그 눈이 두루 보는 작용은 단지 거울 속의 모습이 따로 분별하지 않는 것과 같을 뿐이다.  

  너는 그 가운데를 인식해서 차례로 표하여 '이 사람은 문수요, 이 사람은 부루나요, 이 사람은 목건련이요, 이 사람은 수보리요, 이 사람은 사리불이다'라고 가리켜 보아라. 이 인식이 밝게 아는 작용은 보는 작용에서 생기겠느냐. 모양에서 생기겠느냐. 허공에서 생기겠느냐. 까닭 없이 불쑥 나오겠느냐.

  만일 네 인식 자체가 보는 작용 가운데서 생긴다면, 밝음과 어둠과 물체와 허공과 관계가 없으니, 이 네 가지가 분명히 없다면 원래 너의 보는 성품도 없으리라. 보는 성품도 오히려 없는데 어디에서 인식이 일어나겠느냐.

  만일 네 인식 자체[識性]가 모양에서 생긴다면, 보는 작용에서 생기지 않았으니, 이미 밝음을 볼 수 없고 어둠도 볼 수 없느니라. 밝음과 어둠을 볼 수 없다면 곧 물체와 허공도 없으니 저 모양들도 오히려 없을 텐데, 인식은 어디에서 일어나겠느냐.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모양도 아니고 보는 작용도 아니니, 보는 작용이 아니면 분간하지 못해서 스스로 밝음과 어둠과 물체와 허공을 알지 못할 것이며, 모양이 아니면 인연이 사라져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이 설자리가 없으리라. 이 모양도 아니고 보는 작용도 아닌 곳[二非]에 처한다면, 공이라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며, 있어도 물체와 같지 않으니, 너의 인식이 일어난들 무엇을 분별하고자 하겠느냐.

  만일 까닭 없이 불쑥 나온다면, 어째서 대낮[日中]에는 밝은 달을 인식하지 못하느냐.

  너는 더욱 곰곰이 생각하여 세밀하게 살펴보아라. 보는 작용은 너의 눈동자에 맡기고 모양은 앞 경계에 미루고, 모양이 될 만한 것은 있는 것이 되고, 모양이 아닌 것은 없는 것이 되는데, 이러한 인식의 인연은 무엇을 근거로 나오는 것이냐.

  인식은 움직이지만 보는 작용은 고요하여,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도 이와 같으니, 인식의 연이 나온 곳 없이 나온다고도 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이 인식하는 마음이 본래 온 곳이 없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분별[了別]하고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이 원만하고 고요하여 그 성품이 온 곳이 없으니, 저 허공과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을 겸하여 함께 일곱 요소라고 하며, 성품이 진실하고 원만하고 융통한 여래장으로서 생멸이 없는 자리이니라.  

  아난아, 너는 마음이 거칠고 들떠서 보고 듣고 밝히고 아는 작용이 여래장(如來藏)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느니라. 너는 마땅히 이 여섯 곳의 인식하는 마음을 살펴보아라. 같겠느냐, 다르겠느냐. 공하겠느냐, 있겠느냐.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겠느냐, 공하지도 않고 있지도 않겠느냐.

  너는 원래 여래장 가운데 성품이 인식인 밝게 아는 작용과 깨달음의 밝음인 진실한 인식을 모르고 있느니라. 묘한 깨달음이 고요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해서 시방 허공을 머금고 토하는데, 어찌 따로 생기는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모두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이 때 아난과 모든 대중은 여래의 미묘한 가르침을 받고 몸과 마음이 텅 비어 걸림 없는 경지에 들었다. 모든 대중은 각각 스스로 마음이 시방에 두루 원만해져서 시방 허공을 보니, 마치 손바닥 안에 든 잎사귀를 보는 듯하였다. 일체 세상의 온갖 물상들이 모두 다 보리의 묘하게 밝은 원래의 마음과 일치하니, 마음이 정기가 두루 원만하여 시방을 두루 다 싸안았다. 이 경지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되돌아보니, 저 시방 허공 가운데 작은 티끌이 있는 듯 없는 듯 나부끼는 것과 같았으며, 맑고 넓은 바다에 흐르는 한 물거품이 온 곳 없이 일고 꺼지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스스로 분명하게 알고 본래 묘한 마음이 영원히 머물러 멸하지 않는 법을 얻게 되자,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합장하여 처음으로 얻은 법의 고마움을 여래 앞에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묘하고 고요한 총지로 부동하신 세존이시여

  수능엄왕은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법입니다.

  妙湛總持不動尊  首楞嚴王世希有

   

  억겁 동안 뒤바뀐 생각을 말끔히 씻어내시어

  아승기겁 밟지 않고 법신을 얻게 하셨습니다.

  銷我億劫顚倒想  不歷僧祇獲法身

   

  저도 이제 거룩한 과위를 얻고 성불한 뒤에

  다시 돌아와 한량없는 중생을 건지렵니다.

   

  이 깊은 마음으로 많은 부처님들을 받들어서

  그 무거운 부처님의 은혜를 갚으려 하옵니다.

  願今得果成寶王  還度如是恒沙衆

  將此深心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

   

  엎드려 세존께 청하오니 증명하여 주옵소서.

  굳은 서원으로 오탁악세에 먼저 들어가서

  만일 한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못한다면

  열반에 들지 않고 끝까지 교화하렵니다.

  伏請世尊爲證明  五濁惡世誓先入

  如一衆生未成佛  終不於此取泥洹

   

  큰 용맹이시여 큰 힘이시여 큰 자비시여

  더욱 깊이 살피시어 미세번뇌 끊게 하여

  보다 일찍 깨달음의 정상에 오르게 하고

  시방법계의 도량에서 교화토록 하옵소서.

  大雄大力大慈悲  希更審除微細惑

  令我早登無上覺  於十方界坐道場

   

  끝없이 넓은 허공 다하여 없어진다 해도

  금강처럼 견고한 마음 흔들리지 않으리다.

  舜若多性可鎖亡  爍迦囉心無動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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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4권

   

 이 때 대중 속에 있던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옷을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어 합장하고 공손히 부처님께 아뢰었다.

  "위덕(威德)이 뛰어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중생들을 위하여 제일의제(第一義諦)를 훌륭하게 설해 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언제나 저를 설법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추천하셨으나, 이제 여래의 미묘한 설법을 들으니, 마치 귀머거리가 백보(百步) 밖에서 모기소리를 듣는 듯하여 본래 볼 수도 없는데 어찌 더욱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비록 저에게 밝게 설하시어 미혹을 없애주셨으나, 지금도 아직 이 뜻이 완연하여 의혹이 없는 자리[究竟無疑惑地]를 자세히 밝히지 못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과 같은 부류는 비록 깨달았다고 하나, 익혀 쌓인 번뇌[習漏]를 아직 제거하지 못하였으며, 이 법회 가운데 번뇌가 없는 경계에 오른 저희들도 비록 온갖 번뇌를 다 없앴다고 하나, 이제 여래께서 설하신 법을 들으니, 오히려 의심과 후회만 더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상의 일체 6근과 6진과 5음(陰)과 12처(處)와 18계(界) 등이 다 여래장(如來藏)으로서 본래 그대로 청정하다면, 어째서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의 온갖 유위상(有爲相)이 생겨서 차례로 옮기고 흐르며 끝나고 또 시작하는 것입니까.

또 여래께서는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은 본성(本性)이 걸림 없이 융통하여 법계에 두루 가득 차서 고요히 상주(常住)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흙의 성질이 두루 가득 찼다면 어떻게 물을 용납하겠으며, 또 물의 성질이 두루 가득 찼다면 불의 성질은 생기지 않을 텐데, 또 어떻게 물과 불의 두 성질이 허공에 함께 두루 원만하여 서로 빼앗아 쫓아내지 않는 이치를 밝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흙은 막히고 걸리는 성질이고 허공은 비어 통하는 성질인데 어떻게 두 성질이 함께 법계에 두루 가득 찰 수 있습니까. 저는 이 뜻이 돌아간 곳을 알지 못하오니, 부디 여래께서는 큰사랑을 내리시어 저의 구름처럼 덮인 미혹을 거둬주옵소서."

  이 말을 마치자 대중과 함께 5체(體)를 땅에 던져서 존경을 다하여 더 없는 여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이 때 세존께서 부루나(富樓那)와 법회 대중 가운데 번뇌를 다하고 배움을 초월한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래가 오늘 널리 이 회상의 대중을 위하여 승의제(勝義諦) 가운데 진승의(眞勝義)의 본질을 밝혀서, 이제 너희들 모임 중에 정성성문(定性聲聞)과 이공(二空)을 얻지 못한 이들과 보살승[上乘]으로 돌아선 아라한들이 모두 다 일승의 적멸한 도량[一乘寂滅場地]인 진실한 아란야(阿蘭若)의 바른 수행 처를 얻게 하리니,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설하리라."

   부루나 등은 존경을 다하여 말없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富樓那)여, 네가 말한 바와 같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다면 어째서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가 생기겠느냐. 너는 항상 이 여래로부터 '성품의 깨달음은 묘하고 밝으며, 본래의 깨달음은 밝고 묘하다'는 말을 들어오지 않았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언제나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이 뜻을 들어왔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깨달음이다 밝음이다라고 말한 것은 성품 자체의 밝은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하느냐. 깨달음이 밝지 않으니 밝혀야할 깨달음이라고 하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만일 밝지 않음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밝힐 대상이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밝힐 대상[所明]이 없다면 밝힐 깨달음이 없다고 했는데, 밝힐 대상[所]이 있으면 깨달음이 아니며, 밝힐 대상이 없으면 밝음이 아니니, 밝음이 없으면 또 깨달음의 고요하고 밝은 성품도 아니니라.  

  성품 자체의 깨달음은 본래 분명히 밝은 자리다. 그럼에도 너는 여기서 허망하게 밝혀야할 깨달음을 생각한 것이다. 깨달음은 밝힐 대상이 아님에도 밝힘으로 인하여 밝힐 대상[所]을 세우고, 밝힐 대상[所]이 이미 허망하게 세워지니, 너의 허망한 능력[妄能]이 생겨서, 같음도 다름도 없는 가운데 불길처럼 성하게 다른 것이 이뤄졌느니라.  

  저 다른 것을 다르다 하여, 다른 것을 근거로 같은 것을 세워서, 같음과 다름을 환하게 밝히고, 이를 근거로 다시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는 것을 세웠느니라. 이와 같이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서로 대립하여 수고로움이 생기고, 수고로움이 오래되어 티끌[塵]을 발하여 자체 모양이 혼탁해지니, 이로 인하여 진로번뇌(塵勞煩惱)를 이끌어냈느니라.  

  일어나서는 세계가 되고, 고요해서는 허공이 되니, 허공은 같은 것이고, 세계는 다른 것이며, 저 같음과 다름이 없는 것이 실제의 인연으로 변화하는 법[眞有爲法]이니라.

  깨달음의 허망한 밝음과 허공의 캄캄한 어둠이 번갈아 바뀌며 흔들리기 때문에 풍륜(風輪) 있어서 세계를 붙드느니라.  

  허공으로 인하여 흔들림이 생기고 밝힘을 굳혀서 막힘을 이루니, 저 금보(金寶)는 밝힌 깨달음이 굳혀진 것이므로, 금륜(金輪)이 있어서 국토를 보전하느니라.  

  깨달음을 굳혀서 보배가 되고 밝힘이 흔들려 바람이 생기니, 바람과 금이 서로 마찰하므로 불빛[火光]이 있어서 변화하는 성질이 되느니라.  

보배의 밝음이 물기를 내고 불빛이 위에서 쪼여 삶으니 수륜(水輪) 있어서 시방경계를 둘러싸느니라.  

  불의 오름과 물의 내림이 번갈아 발하여 굳히니, 젖은 편은 큰 바다가 되고 마른 편은 육지와 섬이 되느니라. 이치가 그러기 때문에 저 큰 바다에서는 항상 불빛이 일어나고, 저 육지와 섬에서는 항상 강이 흐르느니라.  

  물의 세력이 불보다 약하면 맺혀서 높은 산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산 돌을 치면 불꽃이 일어나고 녹이면 물이 나오는 것이다.  

  흙의 세력이 물보다 약하면 빼어나서 풀과 나무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숲이 불에 타면 흙이 되고 쥐어짜면 물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허망함이 얽히고 발생해서 서로 번갈아 종자가 되니, 이러한 인연으로 세계가 끊임없이 상속(相續)하느니라.

  또 부루나야, 밝힘을 굳힌 허망함[明妄]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허망한 밝힘이 허물이다. 대상의 허망[所妄]이 이미 세워지고 나면 진실한 밝은 이치가 뚫고 지나가지 못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듣는 작용은 소리를 떠나지 못하고 보는 작용은 물체를 벗어나지 못하여, 모양[色]과 냄새[香]와 촉감[觸] 등 여섯 허망한 경계를 이루느니라. 이로 인하여 보고 느끼고 맡고 아는 작용이 따로 열리어 같은 업끼리 서로 얽히기도 하고, 합하여 생기기도 하고, 떠나서 변화를 이루기도 하느니라.

  보는 작용이 밝아서 색(色)이 환하게 나타나면, 밝은 경계를 환히 보면서 생각을 형성하여, 소견이 다르면 미워하고 생각이 같으면 사랑하면서, 애정을 흘려보내 종자를 이루고 생각을 거둬들여 태(胎)에 드느니라.  

  이렇게 서로 어울려 생길 때에 같은 업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인연이 있어서 갈라람(羯囉藍)과 알포담(遏蒱曇) 등이 생기느니라.  

  태로 나고 알로 나고 습기로 나고 변화로 나는 중생[胎卵濕化]은 그 적응할 곳을 따르는데, 알로 나는 중생은 오직 생각[想]만으로 태어나고, 태로 나는 중생은 욕정(欲情)으로 존재하며, 습기로 나는 중생은 합해서 감응하고, 변화로 나는 중생은 떠나서 상응(相應)하느니라.  

  이렇게 번갈아 서로 변하고 바뀌면서, 업으로 받은 과보를 따라 날기도 하고 잠기기도 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중생이 끊임없이 상속하느니라.

부루나야, 생각과 애정이 함께 얽혀서 사랑을 벗어나지 못하면, 세상의 부모와 자손들이 서로 태어남이 끊이지 않는다. 이러 일들은 애정의 탐욕[欲貪]이 근본이니라.  

  애정을 탐내어 함께 몸을 불리면서 탐욕을 그치지 못하면, 온갖 세상의 알로 나고 변화하여 나고 습기로 나고 태로 나는 중생들이 힘의 강하고 약함을 따라서 번갈아 서로 잡아먹게 된다. 이런 일들은 살생의 탐욕이 근본이니라.

  사람이 양을 잡아먹으면 양은 죽어서 사람이 되고 사람은 죽어서 양이 되니, 이렇게 온갖 중생들[十生之類]이 죽고 또 죽고 나고 또 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서로 만나 서로 잡아먹으며 나쁜 업을 짓고 함께 태어나기를 미래가 다하도록 쉬지 않는다. 이러 일들은 투도(偸盜)의 탐욕이 근본이니라.  

  너는 나에게 생명의 빚을 졌고 나는 너에게 진 빚을 갚으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너는 내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모습을 좋아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번뇌에 얽히는 것이니라. 이것은 오직 살생(殺生)과 투도(偸盜)와 음욕(婬欲)의 세 가지가 근본이며, 이러한 인연으로 업과(業果)가 끊임없이 상속하느니라.

  부루나야, 이러한 세 가지 뒤바뀐 상속(相續)은, 다 깨달음의 밝음[覺明; 性覺妙明, 本覺妙明]으로 명료하게 아는 성품[明了知性; 妄明]이 그 아는 작용으로 인하여 모양을 일으키니, 허망한 보는 작용으로 생긴 산과 강과 대지와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諸有爲相]이 차례로 옮기고 흐르면서, 이 허망을 따라 끝나고 또 시작하는 것이니라."

  부루나가 말했다.

  "만일 이 묘각(妙覺)의 본래 묘한 깨달음의 밝음이 여래의 마음과 더불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가운데, 까닭 없이[無狀]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와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이 생겼다면, 여래께서는 이제 묘하고 공하여 밝은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산과 강과 대지와 인연변화[有爲]의 익혀 쌓인 번뇌[習漏]는 언제 또 생기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여 어떤 미혹한 사람[迷人]이 어느 한 마을에서 남쪽을 북쪽으로  

헷갈렸다면, 이 헷갈림은 헷갈림 때문에 있겠느냐. 깨달음으로 인하여 나왔겠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이렇게 미혹한 사람은 헷갈림 때문도 아니고, 깨달음 때문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헷갈림은 본래 근본이 없는데, 어찌 헷갈림 때문에 있겠으며, 깨달음에는 헷갈림이 생기지 않는데, 어찌 깨달음에서 나오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미혹한 사람이 바로 헷갈려 있을 때, 문득 깨달은 사람이 가리켜줘서 깨닫게 한다면, 부루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비록 헷갈렸다고 하나 이 마을에서 다시 헷갈리겠느냐."

  부루나가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여, 시방 여래(十方如來)도 이와 마찬가지다. 미혹은 근본이 없고 성품이 철저히 공하여 옛날부터 본래 미혹한 일이 없느니라. 잠시 본래의 깨달음을 미혹한 듯하나 미혹을 깨달아서 미혹이 없어지면, 깨달음에서는 미혹이 생기지 않느니라.

  또 사람이 눈병에 걸렸으면 허공에서 헛꽃을 보겠으나 눈병이 나으면 꽃이 허공에서 사라진 것과 같으니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저 허공 꽃이 사라진 빈자리에서 꽃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린다면, 너는 이 사람을 생각해보아라. 어리석겠느냐. 슬기롭겠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원래 꽃이 없는 허공에서 허망하게 생기고 사라짐을 보고, 꽃이 허공에서 사라졌다고 본 자체가 이미 뒤바뀐 일인데, 여기에 다시 꽃이 나오도록 억지를 쓴다면, 참으로 어리석고 미친 짓입니다. 어찌 이런 미친 사람을 두고 어리석다거나 슬기롭다라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알고 있다면 어째서 제불여래(諸佛如來)의 묘한 깨달음이 밝고 공한 자리에서 산과 강과 대지가 언제 다시 나오느냐고 물었느냐.

또 마치 금광(金鑛) 안에서 돌과 섞여 있는 정밀한 금이 한 번 순금이 되고 나면 다시 돌과 섞이지 않는 것과 같고, 또 나무가 타서 재가 되면 다시 나무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제불여래(諸佛如來)의 보리열반(菩提涅槃)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부루나여, 너는 '어떻게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본성(本性)이 걸림 없이 융통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가'를 물었고, '물과 불의 성질이 어째서 서로 밀어내어 없애지 않는가'를 의심하였으며, 또 '허공과 모든 대지가 함께 법계에 가득 차려면 마땅히 서로 받아들일 수 없지 않겠느냐'고 따져 물었다.  

  부루나여, 비유하면 허공의 체는 여러 모양이 아니면서 저 온갖 모양의 활동을 막지 않는 것과 같다. 그 까닭을 말하리라. 저 넓은 허공은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둡고, 바람이 흔들면 움직이고, 맑게 개면 깨끗하고, 기가 엉기면 흐리고, 먼지가 쌓이면 흙비가 되고, 물이 맑으면 빛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러한 다른 방면의 온갖 인연작용의 모양[諸有爲相]은 저들 자체에서 생기겠느냐. 아니면 허공 자체에 있겠느냐.

  만일 저들 자체의 원인으로 생긴다면, 부루나여, 해가 비칠 때는 이미 이 해가 밝은 것이니, 시방세계가 한가지로 햇빛이 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허공 가운데 둥근 해를 보는 것이냐. 만일 허공 자체가 밝은 것이라면, 당연히 허공 제 스스로 비춰야 하는데, 어째서 한 밤중에 구름이 끼었을 때는 빛을 내지 못하느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밝음은 해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며, 허공과 해와 다르지도 않느니라.  

  모양으로 관찰해도 원래 허망하여 지적해서 말할 수 없다. 마치 허공 꽃에서 허공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는 격이니, 어찌 그 서로 밀어내 빼앗지 않는 뜻을 따지겠느냐.

  성품으로 관찰해도 원래 진실하여 오직 묘한 깨달음의 밝음뿐이다.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은 처음부터 물도 불도 아닌데, 어찌 또 서로 용납하지 않는 뜻을 묻겠느냐. 진실하고 묘한 깨달음의 밝음도 이와 마찬가지로, 네가 공으로 밝히면 공이 나타나고, 흙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각각 밝히면 각각 그대로 나타나며, 만일 함께 밝히면 그대로 함께 나타나느니라.  

함께 나타남이란 무엇이겠느냐. 부루나여, 마치 어느 한 강물에 해의 그림자가 나타날 경우, 두 사람이 같이 물 속의 해 그림자를 보다가,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면, 강물의 해 그림자도 두 사람을 따라서 하나는 동쪽으로 가고 하나는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이 처음부터 일정한 기준이 없으니, 마땅히 '이 해는 하나인데 어째서 각기 따로 가는가. 각기 따로 간 해가 이미 둘인데 어째서 하나씩 나타나는가'라고 따지지 못하리라. 완연히 허망만 더할 뿐 증명할 근거가 없느니라.  

  부루나여, 너는 색(色)과 공(空)으로 여래장(如來藏)에서 서로 기울기도 하고 서로 빼앗기도 하니, 여래장도 따라서 색과 공이 되어 법계에 두루 가득 하느니라. 그러므로 그 가운데 바람은 흔들리고 허공은 고요하며,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두우니, 중생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깨달음을 등져서 경계[塵]와 합하기 때문에 티끌 번뇌[塵勞]를 일으키니, 세상의 모양이 있는 것이니라.

  나는 묘한 밝음의 멸하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는 법으로 여래장과 합했으니, 여래장의 오직 묘한 깨달음의 밝음으로 원만하게 법계를 비출 뿐이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하나의 경계가 한량없는 경계가 되기도 하고, 한량없는 경계가 하나의 경계가 되기도 하며, 작은데서 큰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큰데서 작은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방법계에 두루 원만하기도 하고, 몸이 시방의 끝없는 허공을 싸안기도 하며, 한 털끝에서 부처님의 세계[寶王刹]를 나타내기도 하고, 티끌 속에 앉아서 큰 법륜(法輪)을 굴리기도 하느니라. 이렇게 티끌번뇌를 멸하여 깨달음과 합했기 때문에, 진여(眞如)의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을 일으키느니라.  

  여래장의 본래 미묘하고 원만한 마음은 마음도 아니고 공도 아니며, 흙도 아니고 물도 아니며, 바람도 아니고 불도 아니며, 눈도 아니고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아니며, 색도 아니고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법도 아니며, 눈의 인식 경계[眼識界]도 아니고 이와 같이 내지 뜻의 인식 경계[意識界]도 아니니라.  

  또 밝음[明]도 무명(無明)도 아니고 밝음과 무명이 다함도 아니며, 이와 같이 내지 늙음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고 늙음과 죽음이 다함도 아니니라.  

  또 고제(苦諦)도 아니고 집제(集諦)도 아니고 멸제(滅諦)도 아니고 도제

 (道諦)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얻음[得]도 아니니라.  

  또 보시[檀那]도 아니고 지계[尸羅]도 아니며, 인욕[毗梨耶]도 아니고 정진[羼提]도 아니며, 선정[禪那]도 아니고 지혜[般剌若]도 아니며, 바라밀다(波羅蜜多)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내지 달달아갈(怛闥阿竭; 如來)도 아니며, 아라하(阿羅訶; 應供)와 삼야삼보(三耶三菩; 正徧知)도 아니고, 대열반(大涅槃)도 아니며, 상덕[常]도 아니고 낙덕[樂]도 아니며, 아덕[我]도 아니고 정덕[淨]도 아니니라.  

  이렇게 세간도 출세간도 모두 아니므로, 여래장의 원래 밝고 묘한 마음은 그대로 마음이고 그대로 공이며, 그대로 흙이고 그대로 물이며, 그대로 바람이고 그대로 불이며, 그대로 눈이고 그대로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이며, 그대로 색이고 그대로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법이며, 그대로 눈의 인식 경계[眼識界]이고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뜻의 인식 경계[意識界]이니라.  

  또 그대로 밝음[明]과 무명(無明)이고 밝음과 무명이 다함이며,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늙음이고 그대로 죽음이며, 그대로 늙음과 죽음이 다함이니라.  

  또 그대로 고제이고 그대로 집제이며, 그대로 멸제이고 그대로 도제이며, 그대로 지혜이고 그대로 얻음이니라.  

  또 그대로 보시이고 그대로 지계이며, 그대로 인욕이고 그대로 정진이며, 그대로 선정이고 그대로 지혜이며, 그대로 바라밀다이고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달달아갈(怛闥訶竭)이며, 그대로 아라하(阿羅訶)와 삼야삼보(三耶三菩)이고 그대로 대열반이며, 그대로 상덕이고 그대로 낙덕이며, 그대로 아덕이고 그대로 정덕이니라.

  이렇게 모두 세간과 출세간과 일치하기 때문에 여래장의 묘하게 밝은 마음의 근원은, 일치함[卽]도 떠나고 일치하지 않음[非]도 떠나서 일치하면서도[是卽] 일치하지 않으니[非卽], 세간의 삼계[三有]중생과 출세간의 성문과 연각이 어떻게 그들의 아는 마음으로 여래의 더없이 높은 보리를 헤아려서, 세간의 언어로써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어가겠느냐.  

  비유하면 거문고[琴]와 공후(箜篌)와 비파(琵琶)에 묘한 소리가 있을지라도, 묘한 손가락이 없으면 소리를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너와 중생도 마찬가지로 보배로운 깨달음의 참마음은 저마다 원만하지만, 나는 잠시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실상해인(實相海印)이 광명을 발하고, 너희들은 잠깐 마음을 들기만 해도 먼저 번뇌가 일어나느니라. 그것은 더없이 높은 깨달음의 도를 열심히 구하지 않고 소승만을 좋아하여 작은 것을 얻고 만족하기 때문이다.

  부루나가 말했다.

  "저도 여래와 더불어 보배로운 깨달음이 뚜렷이 밝아서, 진실하고 미묘하고 청정한 마음이 둘이 없이 원만하지만, 저는 옛적부터 시작 없는 망상을 만나 오래도록 생사에서 윤회하다가, 이제 거룩한 법[聖乘; 阿羅漢果]을 얻었으나, 아직도 구경의 경지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온갖 망상을 다 원만하게 멸하시어, 홀로 미묘하고 영원한 진리에 드셨으니, 감히 여래께 묻겠습니다.

  일체중생은 어떤 원인으로 망상이 있어서, 스스로 미묘한 밝음을 덮고 생사에 빠져 헤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의심을 없앴다고 하나 아직 남은 의혹을 다 없애지 못했으니, 나는 현재의 세상일들을 들어 네게 물으리라. 네가 어찌 듣지 못한 일이겠느냐. 실라벌성(室羅筏城)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홀연히 어느 새벽에 거울로 얼굴을 비추고 거울 속의 머리에서 잘생긴 얼굴[眉目]을 좋아하다가, 자기 머리에서 얼굴과 눈이 보이지 않자, 도깨비라고 성을 내어 꾸짖으며 까닭 없이 미쳐서 달아났다고 한다. 너는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까닭 없이 미쳐서 달아났다고 생각하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이 사람은 그저 마음이 미쳤을 뿐, 더 이상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한 깨달음은 밝고 원만하여 본래 원만하게 밝고 미묘할 뿐인데, 여기에 이미 허망이라고 칭한들, 어찌 원인이 있겠느냐. 만일 원인 할 곳이 있다면, 어찌 허망이라고 하겠느냐. 스스로 온갖 망상이 연달아 서로 원인을 이루고 미혹으로 미혹을 쌓으면서 티끌처럼 많은 겁[塵劫]을 지냈으니, 이 여래가 밝힐지라도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느니라.  

 

이렇게 미혹의 원인은 미혹 자체의 원인으로 있을 뿐이니, 미혹에 원인이 없다는 것을 알면, 허망은 의지할 데가 없을 것이며, 더욱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멸하려고 하겠느냐.  

  보리(菩提)를 깨달은 사람은 꿈에서 깬 사람이 꿈속의 일을 말하는 것과 같다. 마음에 비록 꿈속의 일이 정교하게 밝을지라도, 무슨 인연이 있기에 꿈속의 물건을 취하고자 하겠느냐. 더욱이 또 원인이 없어서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겠느냐. 저 성안의 연야달다인들 무슨 인연이 있기에 스스로 머리를 겁내어 달아났겠느냐. 홀연히 미친 증세만 쉬어버리면 머리를 밖에서 얻지 않으리라. 비록 미친 증세가 없어지지 않은들 어찌 머리를 잃어버렸겠느냐.  

  부루나여, 허망한 성질이 이와 같은데 무엇을 근거로 있겠느냐. 네가 단지 세간(世間)과 업과(業果)와 중생(衆生)의 세 가지 상속(相續)을 따라서 분별하지 않는다면, 세 가지 연(緣)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도 생기지 않으며, 너의 마음속에 자리한 연야달다의 미친 증세도 저절로 쉬리라. 쉬고 나면 곧 보리의 훌륭하고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법계에 두루 원만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닌데, 어찌 수고롭게 갈고 다듬고[肯綮] 닦아 증득하는 방법을 빌리겠느냐.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옷 안에 여의주(如意珠)가 매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헐벗은 채 걸식하면서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비록 실제로는 가난할지라도 구슬을 잃은 적이 없으니, 홀연히 지혜 있는 사람이 그 구슬을 가리켜줘서 마음속의 소원을 성취하여 큰 부자가 된다면, 비로소 신비한 구슬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리라.

  바로 이 때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를 올리고 일어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방금 세존께서 '살생과 투도와 음욕 업의 세 가지 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도 생기지 않으며, 마음속에 연야달다의 미친 증세도 저절로 쉬고, 쉬고 나면 곧 보리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인연의 이치가 명백히 밝혀졌는데, 어째서 여래께서는 인연을 가차 없이 버리시는 것입니까. 저는 인연으로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뜻이 어찌 홀로 나이 어린 저희들 유학성문(有學聲聞)들 뿐이겠

습니까. 이 법회의 대목건련(大目犍連)과 사리불(舍利弗)과 수보리(須菩提)들도 노범지(老梵志)를 따르다가, 부처님의 인연법(因緣法)을 듣고 발심하여 깨달아서 번뇌가 없는 법을 성취한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시기를 '보리는 인연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왕사성(王舍城)의 구사리(拘舍梨)들이 설한 자연(自然)이 가장 뛰어난 뜻[第一義]이겠습니까. 부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저의 답답한 심정을 시원하게 열어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성안의 연야달다가 미친 증세의 인연을 없애버린다면, 미치지 않는 성품은 자연히 나올 것이며, 인연이다 자연이다라는 이치도 여기서 끝나게 되리라.

  아난아, 연야달다의 머리가 본래 자연이라면, 본래 저절로[自] 그런 것[然]이어서, 그런 것이 저절로 아님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머리를 겁내고 미쳐서 달아났겠느냐.

  만일 자연의 머리가 인연 때문에 미쳤다면, 어째서 자연의 머리는 인연 때문에 잃지 않았느냐. 본래의 머리를 잃지 않고 미친 두려움만 허망하게 나왔다면, 잠시도 변하여 바뀐 일이 없는데, 어찌 인연을 빌리겠느냐.

  미친 증세가 본래 자연이라면, 본래부터 미치고 두려운 증세가 있어야 할 텐데, 미치기 전에는 미친 증세가 어디에 숨어 있었겠느냐. 미치지 않은 것이 자연이라면, 머리는 본래 잘못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미쳐서 달아났겠느냐.

  만일 본래의 머리를 깨닫고 미쳐서 달아난 까닭을 안다면, 인연이나 자연이라는 주장은 다 쓸모없는 논리가 되리라. 그러므로 나는 '세 가지 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곧 보리의 마음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 만일 보리의 마음이 생겨서 생멸의 마음이 멸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지 생멸일 뿐이다.

  생멸이 모두 사라져서 공덕작용이 없는 도에 만일 자연이 있다고 하면, 이 경우에도 자연의 마음이 생겨서 생멸의 마음이 멸한다고 밝히는 격이니, 이것 역시 생멸이니라.  

  생멸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고 할지라도, 마치 세상에서 온갖 모양을 뒤섞

어 일체(一體)를 만들어서 화합성질이라고 이름하거나, 화합하지 않는 것을 본연의 성질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으리라.  

  본연이다 본연이 아니다 화합이다 화합이 아니다라고 하는 화합과 본연을 모두 떠나고, 떠났다[離] 떠나지 않았다[合]를 모두 벗어나야만[俱非] 이 구절을 비로소 쓸모없는 논리를 떠난 법이라고 하리라.  

  너는 아직도 보리열반(菩提涅槃)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겁을 지내 부지런히 힘써 닦은 정도로 증득할 단계가 아니다. 비록 또 시방 여래께서 설하신 12부경(部經)의 청정하고 미묘한 이치를 항하강의 모래처럼 많이 기억할지라도, 단지 쓸모없는 논리[戱論]만 더할 뿐이다.  

  네가 비록 인연과 자연을 담론할 때 명료하게 결정함으로써 사람들이 너를 들은 지식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부르고 있으며, 이렇게 겁을 쌓아 듣는 지식을 많이 닦아 익히고도, 마등가(摩登伽)의 난(難)을 면할 능력이 없다가, 너는 어째서 나의 불정신주(佛頂神呪)를 기다려 마등가의 불꽃같은 음욕을 단번에 끄고 아나함과[阿那含]를 성취하여, 나의 법 가운데 정진의 숲(精進林)을 이루고 애욕의 강물을 말려서 너를 해탈케 한 것이냐.  

  그러므로 아난아, 네기 비록 겁을 지내며 여래의 묘하게 장엄한 비밀 법[祕密妙嚴]을 기억할지라도, 하루 동안 무루업(無漏業)을 닦아서 세상의 미움과 사랑의 두 고통을 멀리 벗어남만 못하리라.  

  마등가는 지난 세상에 음녀(婬女)였으나, 신비한 주문의 힘으로 그 애욕을 소멸하여, 지금은 법회 가운데 성비구니(性比丘尼)란 이름으로, 라후라(羅睺羅)의 어머니인 야수다라(耶輸陀羅)와 함께 과거 세상의 원인을 깨달았느니라. 여기에 이들은 지내온 세상을 애정의 탐욕 때문에 괴롭게 살아왔음을 알고, 일념으로 번뇌 없는 선행[無漏善]을 닦았기 때문에, 얽힘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수기를 받기도 했는데,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속아서 아직도 보고 듣는 경계에 멈춰 있는 것이냐.  

  아난은 대중들과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니, 의혹이 사라지고 마음에 실상(實相)을 깨달아서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졌다. 이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얻고 감격하여 다시 슬피 울며, 부처님의 발까지 이마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길게 끓어 앉아서 두 손 모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더없이 대비(大悲)하시고 청정하신 부처님[寶王]께서는 저의 마음을 잘 깨우쳐주셨으며, 이러한 가지가지 인연과 방편으로 어둠에 잠긴 이들을 타이르고 이끄시어 고해를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비록 이러한 설법을 듣고 여래장의 묘하게 깨달은 밝은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 여래의 시방 국토에 청정 보배로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妙覺王刹]를 품어 기르는 줄을 알았으나, 여래께서는 저에게 또 '많이 들어 안 지식은 공덕이 없으니, 실제로 닦는 것보다 못하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저는 지금 마치 집 없는 떠돌이[旅泊之人]가 홀연히 천자로부터 화려한 집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비록 큰집을 얻었을지라도 들어가는 문을 몰라 찾고자 하오니, 부디 여래께서는 대비(大悲)를 버리지 마시고, 이 법회의 어둡고 무지한 저희들이 소승을 버리고, 여래께서 무여열반(無餘涅槃)을 향하여 본래 발심하신 길을 얻게 하시고, 또 배우는 단계의 행자들이 옛날부터 반연(攀緣)해온 경계를 무엇으로 다스리고 굴복시켜야만 다라니(陀羅尼)를 얻고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온 몸[五體]을 땅에 던져 법회 대중과 함께 일심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기다렸다.  

  이 때 세존께서 이 법회 가운데 연각과 성문으로서 보리의 마음이 자재하지 못한 이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미래에 보리의 마음을 낼 말법(末法) 중생들에게도 더없이 높은 법의 묘한 수행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서 여래의 묘한 삼마제(三摩提)에 고달픈 생각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마땅히 먼저 깨달음을 일으키는 첫 마음에 두 결정한 뜻을 밝혀야 한다.

  첫 마음에 두 결정한 뜻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첫째 뜻은 너희들이 만일 성문을 버리고 보살 법[菩薩乘]을 닦아서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수행자리에서 일으킨 마음[因地發心]이 결과자리의 깨달음[果地覺]과 같은지 다른지를 자세히 살피는 일이이니라.  

아난아, 만일 수행자리(因地]에서 생멸심(生滅心)을 가지고 첫 수행의 원인[本修因]을 정하여 생멸을 떠난 불법[佛乘]을 구한다면 옳은 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뜻에서 너는 온갖 물질로 이뤄진 세상을 밝게 비춰보아라. 조작이 가능한 법은 모두 변하여 사라지느니라. 아난아, 너는 세상의 조작이 가능한 법을 보아라, 무엇인들 무너지지 않겠느냐. 그러나 끝내 허공이 썩어 문드러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허공은 조작이 가능한 법이 아니니, 처음부터 끝까지 무너져 없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너의 몸 안에 굳은 형태는 흙의 요소이고 젖는 성질은 물의 요소이며, 따듯한 감촉은 불의 요소이고, 흔들리는 성질은 바람의 요소이니, 이 네 가지 요소가 얽혀 짜임에 따라, 너의 고요하고 원만하고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이 나뉘어 보고 듣고 느끼고 살피는 작용으로 변한 상태의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를 다섯 겹쳐 쌓임의 혼탁이라고 하느니라.

  혼탁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비유하면 맑은 물은 본래 청결하고, 저 먼지와 흙과 회 가루의 종류는 본질이 막히고 걸림으로, 두 체는 본질 그대로[法爾] 서로 따르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흙을 집어서 맑은 물에 던지면, 흙은 막히는 성질을 잃고 물은 청결을 잃어서, 모습이 어지럽게 뒤섞인 상태를 혼탁이라고 하며, 너의 혼탁의 다섯 겹쳐 쌓임도 마찬가지니라.  

  아난아, 너는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한 허공을 보아라. 허공과 보는 작용은 구분되지 않으리라. 허공은 있으나 실체[體]가 없고 보는 작용은 있으나 감각이 없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妄]을 이뤘으니, 이것을 첫 번째 겹쳐 쌓임의 겁혼탁(劫濁)이라고 한다.

  너의 몸은 현재 네 가지 요소를 뭉쳐서 형체[體]가 되었는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을 막아서 걸려 막히게 하며, 물과 불과 바람과 흙을 돌려서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두 번째 겹쳐 쌓임의 견탁(見濁)이라고 한다.

  또 네가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식별하고 외우고 익힐 때, 성품은 알고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모양은 여섯 경계[六塵]를 나타내고 있으나, 경계를 떠나면 모양이 없고, 지각[覺]을 떠나서는 성품이 없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세 번째 겹쳐 쌓임의 번뇌탁(煩惱濁)이라고 한다.

  또 너는 아침저녁으로 생기고 멸함이 멈추지 않아서, 알고 보는 작용은 언제나 세상에 머물고자 하고, 업은 운행하여 항상 국토를 옮기려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네 번째 겹쳐 쌓임의 중생탁(衆生濁)이라고 한다.

  그리고 너희들의 보고 듣는 작용은 원래 다른 성질이 없으나, 여러 경계[衆塵; 六塵]가 따로 떨어져 까닭 없이 다른 것이 생기니, 성품 가운데서는 서로 알고, 작용 가운데서는 서로 등져서, 같고 다름이 기준을 잃은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다섯 번째 겹쳐 쌓임의 명탁(命濁)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네가 이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을 여래의 상락아정(常樂我淨)과 깊이 계합하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먼저 생사의 근본을 가려내고, 생멸을 떠난 원만하고 고요한 성품을 의지해서 성취해야 한다. 고요한 자리로 그 허망한 생멸[滅生]을 돌려서 누르고, 원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서 원래 밝은 깨달음의 생멸이 없는 성품을 얻어 수행자리의 마음[因地心]으로 정한 뒤에, 결과자리의 수증(修證)법을 원만하게 성취해야 하느니라. 이것은 마치 혼탁한 물을 흔들리지 않는 그릇에 담아서 깨끗이 맑히는 것과 같다.  

  오래도록 가만히 두어 움직이지 않고 모래와 흙이 저절로 가라앉아 맑은 물이 뚜렷이 나타난 상태를 객진번뇌(客塵煩惱)를 처음 누른 경계라고 하며, 탁한 찌꺼기마저 제거하여 순수하게 맑은 물만 남은 상태를 영원히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끊은 경계라고 한다.

  이렇게 밝은 모양이 정밀하고 순수하여, 일체의 변화가 나타나서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모두 다 열반의 청정한 묘한 덕과 계합하느니라.

  둘째 뜻은 너희들이 반드시 보리의 마음을 내어 보살법[菩薩乘]에 큰 용맹을 일으켜서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諸有爲相]을 버리기로 결정했다면, 마땅히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살펴서 '이것이 시작 없는 겁에 업을 일으켜서[發業; 發業無明] 태어남을 북돋고 있으니[潤生; 潤生無明] 무엇이 짓고 무엇이 받는가'라고 관찰하는 일이다.  

  아난아, 네가 보리를 닦으면서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관찰하지 못한다면,  

허망한 감관과 경계[根塵]가 어느 곳이 뒤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뒤바뀐 곳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번뇌의 근본을 항복시켜서 여래의 자리를 취하겠느냐.  

  아난아, 너는 세상의 매듭 푸는 사람을 살펴보아라. 맺힌 곳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푸는 방법을 알겠느냐. 허공이 너에게 무너뜨림을 당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허공은 형상이 없어서, 맺히거나 푸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네 앞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음의 여섯이 도적의 앞잡이가 되어 스스로 자기 집안의 보배를 겁탈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 인하여 시작 없는 겁 동안 중생세계에 얽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니라.

  아난아, 어째서 중생세계(世界)라고 하겠느냐. 세(世)는 옮겨 흐른다는 뜻이며, 계(界)는 방위라는 말이다. 너는 이제 마땅히 알라. 동쪽과 서쪽과 남쪽과 북쪽과 동남쪽과 서남쪽과 동북쪽과 서북쪽과 위아래는 계(界)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세(世)이다. 방위는 열이고 흐름은 셋이니, 일체중생이 허망을 짜서 서로 이뤄내고 몸 안에서 바뀌고 옮기면서 세와 계를 서로 밟는 것이니라.  

  이 계(界)의 성질이 비록 열 곳이라 하나, 일정한 방위(方位)가 분명한 것은, 세상에서는 단지 동서남북만 지목할 뿐이다. 위와 아래는 자리가 없고, 사이[中]는 정한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四方)의 수는 분명하여 세(世)와 서로 밟아서, 세 때가 사방으로 사방이 세 때로 완연히 구르니 열 둘이니라. 이렇게 흘러 변함을 세 차례 포개면, 하나가 열이 되고 백이 천으로 불어난다. 처음과 끝을 다 포함하면 여섯 감관 안에는 각각 공덕이 천 이백이 있느니라.  

  아난아, 너는 또 이 가운데 자세히 헤아려 공덕이 많고 적음[優劣]을 정해 보아라.  

  눈이 보는 것은 뒤가 어둡고 앞이 밝은데, 앞쪽은 전체가 밝으나 뒤편은 전체가 어둡다. 왼쪽과 오른쪽의 옆으로 보는 것이 세 몫 중에 두 몫이다. 다 합해서 논한다면 짓는 공덕이 완전하지 못하여, 세 몫의 공덕에서 한 몫의 공덕이 없으니, 마땅히 눈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귀는 두루 다 들어서 시방 어디에나 빠짐이 없다. 소리가 움직일 때는 멀고 가까움이 있는 듯하나, 조용할 때는 한계가 없으니, 마땅히 귀의 감관은 천 이백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는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통해서 작용하는데, 내쉬고 들이쉬는 작용만 있고, 중간의 어울림은 빠져 공덕이 없느니라. 코의 감관을 증명하면 세 몫의 공덕 중에 한 몫이 모자라니, 마땅히 코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혀로는 모든 세간의 지혜와 출세간의 지혜를 다 설하여 밝힐 수 있음으로, 말은 한계[方分]가 있을지라도, 끝없는 이치를 다해내니, 마땅히 혀의 감관은 천이백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

  몸은 닿음[觸]을 느껴서 거슬리거나 따르는 경계[違順]를 아는데, 합할 때는 느낄 수 있으나 떼었을 때는 알지 못하니, 떼었을 때는 하나이고 합했을 때는 한 쌍이다. 몸의 감관을 증명하면 세 몫의 공덕 중에 한 몫이 모자라니, 마땅히 몸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뜻으로는 묵묵히 시방 삼세(十方三世)의 일체세간과 출세간 법을 받아들여서, 성인과 범부를 다 포용하여 끝까지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마땅히 뜻의 감관은 천이백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네가 지금 생사애욕의 흐름[生死欲流]을 거슬러 흐르는 근원을 끝까지 다 돌이켜서, 생멸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이 여섯 가지로 수용(受用)하는 감관에서, 어느 감관과 합해야 하는지 어느 감관을 떠나야 하는지, 어느 감관이 깊은지 어는 감관이 얕은지, 어느 감관이 원통(圓通)한지, 어느 감관이 원통하지 않은지를 체험해야 한다. 만일 여기에서 원통한 감관을 깨닫고 저 시작 없는 옛날부터 망상으로 짜인 업의 흐름을 거슬러서, 원통한 감관을 따를 수 있다면, 원통하지 못한 감관으로 닦은 날과 겁[日劫]보다 그 공덕이 배가되리라.

  내가 지금 여섯 감관의 고요하고 원만하고 밝은 본래공덕의 수량을 이와 같이 자세히 밝혔으니, 너는 잘 생각하여 들어가기에 알맞은 감관을 가려보아라. 나는 마땅히 밝혀서 너를 더욱 잘 닦아 나갈 수 있게 하리라.

  시방 여래께서는 열여덟의 경계[十八界]를 낱낱이 수행하여 다 더없이 높은 보리를 원만하게 성취하셨는데, 그 중간에 전혀 우열(優劣)이 없었느니라. 단지 너는 근기가 낮아서 그 가운데 자재한 지혜가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선양하여 너에게 한 문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니, 한 문으로 들어가서 헛되지 않으면, 저 여섯 감각기관은 일시에 청정하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흐름을 거슬러 깊이 한 문에 들어가야만, 여섯 감관을 일시에 청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이미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으니, 3계(界)의 중생세간이 견도(見道)의 자리에서 끊어야할 번뇌[惑]는 멸했으나, 오히려 아직 여섯 감관 가운데[根中] 쌓아온 시작 없는 겁의 허망한 습기를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저 습기도 반드시 수도(修道)의 자리에서 끊어야 하는데, 더욱이 어찌 이 가운데 생기고 머물고 달라지고 사라지는 여러 미세한 종류의 수량[分齊頭數]이겠느냐.

  이제 너는 또 현재의 여섯 감관이 하나인지 여섯인지를 살펴보아라. 만일 하나라고 한다면, 귀는 어째서 못 보고, 눈은 어째서 듣지 못하며, 머리는 어째서 밟지 못하고, 발은 어째서 말하지 못하느냐.

  "만일 여섯 감관으로 결정되었다면, 내가 지금 이 법회에서 너에게 미묘한 법문을 선양하고 있는데, 너의 여섯 감관 가운데 어느 감관이 와서 받아들이는 것이냐."

  아난이 말했다.

  "저는 귀로 듣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귀가 제 스스로 듣는다면 너의 몸과 입은 무슨 관계가 있어서 입을 열어 뜻을 묻고 몸을 일으켜 공손히 받드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하나가 아니라면 마침내 여섯이라야 하고, 여섯이 아니라면 마침내 하나라야 하니, 결국 너의 감관은 원래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라. 이 감관은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지만, 시작 없는 겁부터 뒤바뀌어 잠기고 무딘 까닭에 원만하게 고요한 자리에서 하나다  

여섯이다라는 뜻이 생겼느니라.

  너는 수다원(須陀洹)이 되어, 여섯 대상[六; 六塵]을 소멸하였으나, 아직은 하나를 없애지 못했으니, 마치 넓은 허공에 여러 가지 그릇을 섞어놓고, 그릇 모양의 다름을 따라 다른 허공이라고 하다가, 그릇을 치우고 허공을 보면서 허공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저 한없는 허공이 어떻게 너를 위해서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겠으며, 더욱이 어찌 또 하나라 하거나 하나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너의 분별하여 아는 여섯 가지 수용감관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밝음과 어둠 등 두 가지가 서로 형성되어 나타남[相形]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보는 정기가 색(色)을 반영하여 색과 맺어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淸淨四大; 勝義根]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눈의 체[眼體]라고 한다. 여기에 포도 알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浮根四塵; 浮塵根 또는 扶塵根]이 제멋대로 흘러서 색을 좇아 달리느니라.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 등 두 가지가 서로 침[相擊]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듣는 작용을 일으키고, 듣는 정기가 소리[聲]를 반영해서 소리를 말아들여[卷]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淸淨四大]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귀의 체[耳體]라고 한다. 여기에 둥글게 말린 새 잎사귀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浮根四塵]이 제멋대로 흘러서 소리를 좇아 달리느니라.

  통함과 막힘 등 두 가지가 서로 열려 드러남[相發]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맡는 작용을 일으키고, 맡는 정기가 냄새[香]를 반영해서 냄새를 받아들여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淸淨四大]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코의 체[鼻體]라고 한다. 여기에 드리운 쌍 손톱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냄새를 좇아 달리느니라.

  담담한 맛[恬]과 여러 가지 맛[變] 등 두 가지가 서로 어울림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맛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맛보는 정기가 맛을 반영해서 맛과 짜여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 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혀의 체[舌體]라고 한다. 여기에 활 모양의 초승달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맛을 좇아 달리느니라.

  뗌과 닿음 등 두 가지가 서로 비빔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촉각[覺]을 일으키고, 촉각의 정기[覺精]가 촉감을 반영하여 촉감을 뭉쳐서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몸의 체[身體]라고 한다. 여기에 허리가 잘록한 북의 이마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촉감을 좇아 달리느니라.

  생겨남과 멸함 등 두 가지가 서로 상속(相續)함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인식작용을 일으키고, 인식의 정기가 법을 반영하여 법을 끌어당겨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뜻의 생각[意思]이라고 한다. 여기에 깊고 어두운 방에서 보는 것과 같은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법을 좇아 달리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여섯 감관이 저 깨달음이 본래 밝은데서 밝은 것으로 밝히려는 깨달음을 두었기 때문에, 저 정밀한 밝음을 잃고 허망한데 엉겨 붙어 빛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그러기 때문에 너는 어둠을 떠나고 밝음을 떠나면 보는 자체가 없고, 움직임을 떠나고 조용함을 떠나면 원래 듣는 성질이 없으며, 통함이 없고 막힘이 없으면 냄새 맡는 성질이 생기지 않고, 여러 가지 맛이 아니고 담담한 맛이 아니면 맛보는 성질이 나오지 않으며, 떼지도 않고 대지도 않으면 촉감이 본래 없으니, 멸함이 없고 생김이 없으면 분별작용이 어디에 의지하겠느냐.

  너는 단지 움직임과 고요함과 닿음과 뗌과 담담한 맛과 여러 다른 맛과 생겨남과 사라짐과 어둠과 밝음 등 이러한 열두 가지 인연변화의 모양[有爲相]에 매어 구르지 않고, 어느 한 감관을 뽑아 엉겨 붙은 자리를 벗겨서 안으로 굴복시키고, 굴복시켜 원래의 진리로 돌아가면, 본래의 밝은 빛을 발하리라. 이렇게 비치는 성품이 환하게 밝아져야만, 나머지 다섯 엉겨 붙은 자리도 뽑힌 한 감관을 따라[應拔] 원만하게 벗겨지느니라. 이것은 앞 경계를 따라 일으킨 지견(知見)이 아니므로, 밝음은 감관을 따르지 않고, 감관에 맡겨 밝음이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여섯 감관이 서로 서로 융통하여 작용하게 되느니라.  

  아난아, 네가 알다시피 이 법회 가운데 아나율타(阿那律陀)는 눈이 없어도 보고, 발난타용(跋難陀龍)은 귀가 없어도 들으며, 긍가신녀(殑伽神女)는 코가 아닌 것으로 냄새를 맡고, 교범발제(驕梵鉢提)는 혀와 다른 것으로 맛을 알며, 또 순야다신(舜若多神)은 몸이 없어도 촉감이 있는데, 여래가 광명 가운데 비춰서 잠깐 나타나게 하였을 뿐, 이미 바람의 성질이니, 그 몸은 원래 없느니라. 그리고 멸진정(滅盡定)으로 고요한 경지를 얻은 성문들 가운데 이 법회의 마하가섭(摩訶迦葉)과 같은 경우는, 뜻 감관[意根]을 멸한 지 오래 되었으나, 마음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도 뚜렷이 밝혀서 분별하느니라.  

  아난아, 지금 네가 모든 감관을 뚜렷이 뽑아버린다면, 안으로 밝게 빛이 일어나서, 이와 같은 뜬 경계[浮塵]와 물질 세간의 온갖 변화의 모양은 끓는 물에 얼음 녹듯이 생각을 따라 더없이 높은 깨달음으로 화하리라.  

  아난아, 세상 사람이 보는 작용을 눈에 집중하고 있다가 갑자기 눈을 감아서 어두운 모양이 앞에 나타나면, 여섯 감관이 캄캄하여 머리와 발도 서로 캄캄하지만[相類], 저 사람이 손으로 몸 둘레를 더듬으면, 비록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머리와 발을 단번에 가려내서 밝을 때와 한가지로 깨달아 아느니라. 인연경계를 보는 것이 밝음 때문이라 하여 어두울 때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밝지 않아도 스스로 밝게 아는 작용이 생긴다면, 온갖 어두운 모양이 그 아는 작용을 영원히 어둡게 할 수 없으리라. 이렇게 감관과 경계가 이미 소멸해버린다면, 어찌 깨달음의 밝음이 원만한 미묘함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행자리의 깨닫는 마음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결과자리의 명목(名目)과 상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과위(果位) 가운데 보리(菩提)와 열반(涅槃)과 진여(眞如)와 불성(佛性)과 암마라식(菴摩羅識)과 공여래장(空如來藏)과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일곱 가지 이름은, 명칭은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청정하고 원만하여 자체의 성품이 견고하니, 금강왕(金剛王)과 같이 영원히 머물러 무너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보고 듣는 작용이 어둠과  

밝음과 움직임과 고요함과 통함과 막힘을 떠나서는 끝내 자체가 없다고 하신다면, '생각하는 마음이 앞 경계를 떠나서는 본래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찌하여 끝내 단절되어 사라질 경계[畢竟斷滅]룰 가지고 수행자리의 원인[修因]을 삼아서 여래의 일곱 가지 영원불변한 결과를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밝음과 어둠을 떠나서는 보는 작용이 끝내 공하다면, 마치 앞 경계가 없을 때는 생각 자체의 성품도 멸한다는 이치와 같으니, 앞뒤로 반복하여 자세히 추궁할지라도 본래 제 마음 자체도 제 마음의 소재도 없을 텐데, 무엇으로 원인을 세워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구하겠습니까. 따라서 여래께서 먼저 설하신 '고요하고 정밀하고 원만하고 영원하다'는 것도 진실한 말과 어긋나서 결국 쓸모없는 논리가 되어버릴 텐데, 어찌 여래를 '진실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라고 하겠습니까. 부디 큰 자비를 내리시어 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많이 듣고 아는 지식만을 배우고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하여 마음속에 한갓 뒤바뀐 원인만 알 뿐, 눈앞의 뒤바뀐 실제를 참답게 알지 못하고 있으니, 네가 오히려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지 못할까 염려되어 나는 이제 세속의 일들을 예로 들어[試將塵俗] 너의 의심을 없애 주리라."

  즉시 여래께서는 라후라(羅睺羅)에게 종을 한번 쳐서 소리를 내게 하시고 아난에 물으셨다.  

  "너희들은 지금 이 소리가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예, 들립니다."

  종소리가 그치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도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들리지 않습니다."

  그 때 라후라는 또 종을 한번 쳐서 소리를 내었다.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이제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예, 들립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상태를 들린다 하고 어떤 상태를 들리지 않는다고 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들린다 하고, 종을 친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다 끊기면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래께서는 다시 라후라에게 종을 치도록 하시고 아난에게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했다.

  "소리가 납니다."

  조금 지나서 소리가 없어지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답했다.  

  "소리가 없습니다."

  잠시 후에 라후라가 다시 와서 종을 쳤다.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했다.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경우에 소리가 난다고 하며, 어떤 경우에 소리가 없다고 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소리가 난다고 하며, 종을 친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다 끊기면 소리가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지금 어째서 스스로 말을 교란(矯亂)하느냐."

  대중과 아난은 함께 부처님께 물었다.

  "저희들이 지금 어째서 교란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에게 들리느냐고 물으면 너희들은 들린다 하고, 또 내가 너희들에게 소리가 나느냐고 물으면 너희들은 소리가 난다고 하면서 '예, 들립니다. 소리가 납니다'라는 대답이 일정하지 않으니, 이러한 것이 교란이 아니고 무엇이냐.

  아난아,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없으면 너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으나, 만일 참으로 영 듣지 못한다면, 듣는 성품이 이미 사라져서 마른 나무와 같을 텐데, 종을 다시 쳤을 때 소리가 나는 줄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나는 줄 알고 없어진 줄 아는 작용은 소리의 경계가 스스로 없기도 하고 나기도 할 뿐인데, 저 듣는 성품이 어떻게 네게 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겠느냐. 또 참으로 듣는 작용이 아주 없다면, 무엇이 없어지는 줄을 알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소리가 듣는 가운데 스스로 생기고 사라질지언정, 네가 소리의 생겨남과 소리의 사라짐을 듣는다고 해서, 너의 듣는 성품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이 아니니라.

  너는 오히려 뒤바뀌었으니 소리를 헷갈려 듣는 작용으로 여기고 영원[常]을 단멸[斷]로 혼미한들 어찌 괴이한 일이겠느냐 만은, 끝내 마땅히 온갖 움직이고 조용함의 닫히고 막힘과 열리고 통함을 떠나서는 듣는 작용은 성품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마치 잠이 무거운 사람이 평상[床枕]에서 깊이 잠들었을 때, 그 집안 사람이 그가 자는 사이에 비단의 다듬이질을 하면서 방아를 찌면, 그 사람은 꿈속에서 절구질과 다듬이질 소리를 다른 물건의 소리로 여기고 북 소리든지 종소리로 들으면서, 꿈꾸는 동안에 스스로 '웬 종이 나무와 돌 소리를 내는 것일까'하고 괴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잠에서 깨었을 때, 절구소리임을 알고 집안 사람에게 '나는 꿈속에서 이 방아 찧는 소리를 북 치는 소리로 잘못 알았구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난아, 이 사람이 꿈속에서 어찌 고요하고 흔들리고 열리고 닫히고 통하고 막히는 경계를 기억하겠느냐. 그 형체는 비록 잠들었을지라도, 듣는 성품은 어둡지 않았느니라.

  비록 네 형체가 스러지고 그 목숨[命光]이 옮겨서 사라진들, 이 성품이 어떻게 네게서 소멸되겠느냐.

  모든 중생이 시작 없는 때부터 온갖 물체[色]와 소리를 따라 생각을 좇아서 흘러 다니는 것은, 일찍이 성품이 맑고 묘하고 영원함을 깨닫지 못하여 영원한 진리를 따르지 않고 생기고 멸하는 작용을 좇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태어날 때마다 번뇌에 물들어 흘러 다니는 것이니라.

  만일 생멸을 버리고 영원한 진리를 지킨다면, 영원한 광명이 앞에 뚜렷이 나타나서 대상[塵]과 감관[根]과 인식하는 마음[識心]은 즉시 사라지리라.

  생각하는 모양은 티끌 번뇌이고, 인식하는 정은 때 번뇌이니라. 티끌 번뇌와 때 번뇌[二]를 함께 멀리 벗어나면 너의 법눈[法眼]은 바로 맑고 밝아질 텐데, 어찌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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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5권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비록 둘째 뜻의 문을 말씀해 주셨으나, 이제 세상의 매듭 푸는 사람을 생각해 보니, 만일 매듭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끝내 풀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와 이 법회의 유학성문(有學聲聞)들도 이와 마찬가지며, 시작 없는 옛날부터 무명과 더불어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해왔으니, 비록 이렇게 많이 듣고 아는 선근(善根)으로 출가했다고 하나, 마치 하루거리 학질병자나 다름이 없습니다.  

  부디 큰사랑으로 생사에 빠져 허덕이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지금의 몸과 마음이 어째서 번뇌에 얽혔는지, 무엇으로 풀어야 하는지를 가리켜주시고, 미래의 괴로운 중생들도 윤회를 벗어나서 삼계[三有]에 떨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대중과 함께 온몸[五體]을 땅에 엎드려 비 오듯 눈물을 흘리면서 정성을 다하여 부처님의 더없이 높은 가르침을 기다렸다.

  이 때 세존께서 아난과 법회의 유학성문들을 가엾게 여기시는 한편, 미래의 중생들을 위하여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으로서 장래의 안목을 삼으시려고, 염부단(閻浮檀)의 자금색(紫金色) 광명이 빛나는 손으로 아난의 이마를 만지셨다.  

  이 때 시방의 드넓은 부처님의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면서, 그 세계에 계시는 티끌처럼 많은 여래께서 각각 이마에서 보배광명을 놓으시자, 그 광명이 동시에 저 세계에서 기타림(祇陀林)으로 와서 여래의 이마를 비추시니, 법회의 대중은 이전에 본적이 없는 광경을 보았다.  

  여기서 아난과 대중은 다 함께 티끌처럼 많은 시방 여래께서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난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을 들었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다. 아난이여, 네가 구생무명(俱生無明)이 어떻게 너를 생사에 윤회하도록 뿌리 맺혔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오직 너의 여섯 감관 외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네가 또 더없이 높은 보리가 어떻게 너에게 빨리 안락한 해탈의 고요하고 미묘하고 영원한 경지를 깨닫게 하는지를 알고자 할지라도, 역시 너의 여섯 감관 외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아난이 이러한 법문을 들었으나 마음은 오히려 분명하지 않아서,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께 아뢰었다.

  "'나를 생사에 윤회케 하거나 안락하고 미묘하고 영원한 경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다 같이 여섯 감관 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감관[根]과 대상[塵]은 근원이 같고, 얽힘과 해탈은 둘이 아니며, 식(識)의 성품은 허망하여 허공 꽃과 같으니라.

  아난아, 경계[塵]로 인하여 아는 작용을 일으키고, 감관을 따라 모양이 있으며, 모양과 보는 작용은 제 성품이 없으니 여러 줄기로 기댄 갈대[交蘆]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지금 지견(知見)으로 지견을 세우면, 바로 무명의 근본이며, 지견에서 지견을 떠나면, 이것이 곧 번뇌 없는 열반의 진실하고 청정한 경지이니라. 그러니 이 가운데 어찌 다른 것을 용납하겠느냐."  

  이 때 세존께서는 거듭 이 뜻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게(偈)를 설하셨다.

   

  참 성품은 유위법이 모두 다 공했으나

  인연 따라 생기기에 환상처럼 변화한다.

  무위법은 생멸인연 일체 다 떠났으니

  실속 없이 허망함은 허공 꽃과 다름없다.

  眞性有爲空 緣生故如幻

 無爲無起滅 不實如空華

   

  허망으로 말하면서 온갖 진실 밝혀봐도

  허망이나 진실이나 모두 다 허망하다.

  참이나 참 아님을 아예 떠난 자리이니

  보거나 보이는 곳이 어디에 있겠느냐.

  言妄顯諸眞  妄眞同二妄

  猶非眞非眞  云何見所見

   

  속속들이 텅텅 비어 실제성품 없음으로

  이를 비겨 줄기 기댄 빈 갈대와 같다한다.

  맺힌 곳과 푸는 일은 그 자리가 똑같으니

  성인이나 범부거나 두 갈래길 따로 없다.

  中間無實性  是故若交蘆

  結解同所因  聖凡無二路

   

  줄기 기댄 갈대 속을 깊이깊이 살펴보라.

  공한 법과 존재 법을 둘 다 함께 떠났으니

  미혹하여 모른다면 그게 바로 무명이요

  밝혀내어 깨달으면 그게 바로 해탈이다.

  汝觀交中性  空有二俱非

  迷晦卽無明  發明便解脫

   

  맺힌 원인 하나 하나 차례대로 풀고 나면

  여섯 자리 다 풀리어 하나까지 없어지니

  여섯 감관 두루 살펴 원통감관 골라내면

  성인반열 들어서서 바른 깨침 이루리라.

  解結因次第  六解一亦亡

  根選擇圓通  入流成正覺

 

미세하기 그지없어 알기 힘든 아타나식  

  쌓인 습기 흘러내려 폭포수를 이뤘으니

  진실인지 참 아닌지 미혹할까 염려하여

  지금까지 조심하여 설명하지 않았노라.

  陀那微細識  習氣成暴流

  眞非眞恐迷  我常不開演

   

  자기 본래 마음에서 그 마음을 취한다면

  환상 아닌 바른 법이 환상 법을 이루지만

  취함 없이 그냥 두면 비환 법도 없어지고

  환상 아닌 바른 법도 생겨나지 않을 텐데

  自心取自心  非幻成幻法

  不取無非幻  非幻尙不生 

   

  실체 없는 환상 법이 어느 곳에 서겠느냐.

  이를 일러 청정하고 미묘한 연꽃이며

  견고한 금강의 보배로운 깨달음이며

  환술처럼 자유로운 삼마제라 이름하니

  幻法云何立  是名妙蓮華  

  金剛王寶覺  如幻三摩提  

   

  손 퉁기는 잠깐 사이 무학자리 넘으리라

  무엇과도 비교 못할 아비달마 바른 법은

  티끌처럼 한량없는 시방세계 여래께서

  한 길 따라 수행하여 열반하신 문이니라.  

  彈指超無學  此阿毘達磨  

  十方薄伽梵  一路涅槃門

   

  이 때 아난과 대중은 여래께서 더 없는 자비로운 가르침을 들으니, 기야(祇夜)와 가타(伽陀)가 잘 어울려 정교하게 빛나는 묘한 이치가 맑게 사무처서, 모두들 마음과 눈이 환하게 열리어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는 법문을 감탄하였다.

  아난은 머리를 조아려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금 부처님께서 차별 없는 대비(無遮大悲)로 설하신 성품이 맑고 묘하고 영원한 진실구절[眞實句]을 들었으나, 제 마음은 아직도 여섯이 풀려서 하나까지 없어지려면 그 매듭을 어떤 순서로 풀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큰사랑을 내리시어 이 법회의 대중과 미래중생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다시 한번 법문[法音]을 베푸셔서 깊게 잠긴 번뇌를 씻어주옵소서."

  그러자 여래께서는 사자좌(師子座)에서 열반승(涅槃僧; 內服)을 바르시고 승가리(僧伽梨)를 거둬 여미시며 손으로 7보(寶)책상을 끌어당기시더니, 겁바라천(劫波羅天)이 바친 꽃수건[華巾]을 잡으시고, 대중 앞에 매듭 하나를 맺고 아난에게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엇이냐."

  아난과 대중은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것은 매듭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래께서 꽃수건[疊華巾]에 또 한 매듭을 맺으시고 거듭 아난에게 물으셨다.

  아난과 대중은 또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것도 매듭이라고 합니다."

  여래께서는 이렇게 꽃 수건에 차례로 맺어 모두 여섯 매듭을 맺으시면서 매듭을 하나하나 맺을 때마다 맺힌 매듭을 손에 들고 아난에게 '이것은 무엇이냐'고 물으셨으며, 아난과 대중도 그 때마다 부처님께 차례로 '그것은 매듭이라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처음 수건을 맺었을 때 너는 매듭이라고 하였다. 이 꽃 수건은 본래 하나뿐인데,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어째서 너희들은 또 매듭이라고 하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보배 꽃 실로 짠 수건[寶疊華]은 비록 본래는 하나이나,  

제 생각으로는 여래께서 한 번 맺으시면 한 매듭이라고 하며, 백 번 맺는다면 백 매듭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수건에는 단지 여섯 매듭뿐이어서, 결국 일곱 매듭은 되지 못했으나, 다섯 매듭은 이미 넘었는데, 여래께서는 어째서 단지 처음 하나[初時]만을 인정하시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매듭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알다시피 이 보배 꽃 수건은 원래 하나 뿐인데, 내가 여섯 번 맺었기 때문에 여섯 매듭이라고 하였다.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 수건 자체는 같지만 맺었기 때문에 달라졌느니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처음 맺은 매듭을 첫 번째라 하고, 이렇게 여섯 번째 매듭까지 생겼는데, 내가 이제 여섯 번째의 매듭을 첫 번째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답했다.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섯 번째 매듭을 그대로 두고는 이 여섯 번째의 이름은 절대로 첫 번째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여러 생을 지내면서 변명한들, 어떻게 이 여섯 번째 매듭의 이름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여섯 매듭이 똑같지는 않으나 근본 원인을 돌아보면, 한 수건에서 만들어졌으나 끝내 어지럽게 뒤섞을 수 없듯이, 너의 여섯 감관도 이와 같이 끝까지[畢竟] 같은 데서 끝까지[畢竟] 다른 것이 생겼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 여섯 매듭이 하나로 되어있지 않음을 싫어하여 반드시 하나 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이 매듭을 그대로 둔다면 시비가 무성하게 일어나서 그 안에 저절로 '이 매듭은 저 매듭이 아니다' '저 매듭은 이 매듭이 아니다'라고 하겠으나, 여래께서 지금 당장 모두 다 풀어버리시고 매듭이 생기지 않게 하신다면, 이 매듭 저 매듭이 다 없어져서, 오히려 하나라고 이름할 것도 없는데, 어찌 여섯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섯이 풀려서 하나까지 없어지는 뜻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네가 시작 없는 옛날부터 심성(心性)이 어지럽게 날뛰기 때문에, 알고 보는 작용이 허망하게 발생하여 쉴 새 없이 허망함이 일어나서, 보는 작용이 피로하여 티끌번뇌[塵]를 일으켰느니라. 마치 피로한 눈에 어지러운 헛꽃[狂華]이 나타나듯, 고요하여 정밀하게 밝은데서 까닭 없이 일체 세간의 산과 강과 넓은 땅과 생사와 열반이 어지럽게 일어났으니, 모두 다 미친 피로에서 나온 뒤바뀐 헛꽃 모양이니라."  

  아난이 말했다.

  "이 피로[勞]가 매듭과 같다면 어떻게 풀어야 하겠습니까."

  여래께서 손에 매듭 맺힌 수건을 들고 왼쪽으로 당기시면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이렇게 하면 풀리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그러면 풀리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곧 다시 손을 돌려 오른쪽으로 당기시면서 또 아난에게 물으셨다.

  "이렇게 하면 풀리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그래도 풀리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손으로 왼쪽과 오른쪽을 각각 당겨 보았으나, 결국 풀 수 없었다. 네가 방법[方便]을 내 보아라. 어떻게 하면 풀리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맺힌 복판에 맞춰 푼다면 풀리겠습니다."

  부처님께 아난에 일러주셨다.

  "그렇다. 그래야 한다. 매듭을 없애려면 맺힌 복판에 맞춰야 하느니라.

  내가 '불법(佛法)이 인연을 따라 생긴다'고 설한 것은, 세간의 화합한 거친 모양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다. 여래는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밝혀서, 그 본래 원인[本因]이 연(緣)할 곳을 따라 나오는 이치를 알고, 이와 같이 내지 항하

(恒河)의 모래처럼 많은 세계 안에 내리는 빗방울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 숫자를 다 알며, 지금 눈앞의 가지가지에서도 어째서 소나무는 곧고 가시나무는 굽고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은지 그 원래의 까닭을 다 분명하게 아느니라.  

  아난아, 네 마음대로 여섯 감관에서 선택하여라. 감관의 맺힌 자리를 풀어버린다면, 경계의 모양[塵相]은 저절로 없어지리라. 온갖 허망함이 소멸하여 없어져버리면 진리 아닌 그 무엇이 너를 기다리겠느냐.

  아난아, 나는 이제 너에게 묻겠노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이 겁바라천(劫波羅天) 수건의 여섯 매듭을 동시에 풀어서 맺힘을 한꺼번에 없앨 수 있겠느냐."

  아난이 답했다.

  "동시에 없앨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매듭들은 본래 차례로 맺혀 생겼으므로, 지금도 마땅히 차례로 풀어야 합니다. 여섯 매듭의 본체는 같으나, 매듭의 맺힘이 동시가 아닌데, 매듭을 풀 때인들 어찌 동시에 없애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섯 감관을 푸는 일도 마찬가지니라. 이 감관이 처음 풀리면 먼저 아공(我空; 人空과 같음)을 얻고, 공의 본질[空性]이 뚜렷이 밝아지면 법에서 해탈하며, 법에서 해탈하고 나서 아공과 법공이 함께 공한 경계[俱空]마저 생기지 않아야 이를 '보살이 삼마지(三摩地)에서 얻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고 하느니라.

  아난과 대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지혜의 깨달음이 뚜렷이 통하여 의혹이 없어지자, 일시에 합장하여 머리를 조아려 두 발에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지금 몸과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서 시원하게 걸림이 없는 경계를 얻었으며, 또 하나와 여섯이 없는 이치를 알았으나, 아직도 오히려 원만하게 통달한 근본 감관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낙엽처럼 구르면서 오랜 겁 동안 헐벗고 외롭게 다니다가,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부처님과 천륜(天倫)을 맺었으니, 마치 젖 잃은 아기가 홀연히 자애로운 어머니를 만난 듯 기쁩니다. 만일 이렇게 부처님을 만난 기회에 도를 이루고 얻은 바 비밀한 말씀으로 본래의 깨달음[本悟; 本覺]을 돌이켜 똑같이 된다면, 듣지 못할지라도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부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저에게 비밀로 장엄한 법[秘嚴]을 베푸시고 여래의 최후 가르침이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물러나서 비밀 법에 대한 심기[密機]를 가다듬고 부처님의 그윽한 가르침[冥授]을 기다렸다.  

  이 때 세존께서 널리 대중 가운데 훌륭한 보살들과 번뇌를 다한 뛰어난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보살과 아라한은 불법[我法] 가운데 나서 무학(無學)을 이뤘으니, 나는 이제 너희들에게 묻겠노라. '최초에 발심하여 18계(界)를 깨달았을 때, 무엇으로 원만한 통달 법[圓通]을 삼았으며, 어떤 방편으로 삼마지(三摩地)에 들었느냐'"

  교진나(驕陳那) 등 다섯 비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녹야원(鹿苑)에 있을 때 계원(雞園)으로 가서, 여래께서 성도(成道)하신 최초에 여래를 뵙고 부처님의 음성을 통해서 4제(諦)를 깨달아 밝혔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물으시자, 제가 처음 '안다'고 답했더니, 여래께서는 저를 인가(印可)하시고 '아야다(阿若多; 안다[解]는 뜻)'란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미묘한 소리가 정밀하고 원만해지니, 거기서 저는 음성으로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경우로는 음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우파니사타(優波尼沙陀)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부처님의 발까지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 역시 여래께서 성도(成道)하신 최초에 여래를 뵙고, 부정한 모양[不淨相]을 관찰하다가 크게 싫어하여 벗어날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갖 색(色)의 성질은 부정(不淨)에 속하여 백골이 티끌 되어 허공으로 돌아가서, 공(空)과 색(色)이 둘이 없음을 알고 무학도(無學道)를 이루자, 여래께서는 저를 인가하시고 니사타(尼沙陀)란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티끌 요소의 색[塵色]이 이미 다 사라져서 묘한 색이 정밀하고 원만해지니, 거기서 저는 색상(色相)으로부터 아라한(阿羅漢)을 이뤘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경우로는 색의 원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향업동자(香嚴童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여래로부터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현상[諸有爲相]을 자세히 관찰하라'는 가르침을 듣고, 부처님 곁을 떠나 맑고 고요한 방에서 사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침수향(沈水香)을 태우는 비구들이 보였으며, 향기가 조용히 콧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그 향기를 관찰해 보니, 나무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며, 연기도 아니고 불도 아니며, 가도 붙을 곳이 없고 와도 온 곳이 없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뜻이 사라져서 샘이 없는 도를 밝히게 되자, 여래께서는 저를 인가하시어 향엄(香嚴)이란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여기에 티끌 요소의 향기[塵氣]가 문득 사라지고 미묘한 향기가 정밀하고 원만해지니, 거기서 저는 향의 장엄 법으로 아라한(阿羅漢)을 이뤘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경우로는 향의 장엄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약왕(藥王), 약상(藥上)의 두 법왕자(法王子)가 법회 가운데 5백 범천(梵天)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한량없는 오랜 겁 동안 세상의 양의(良醫)가 되어, 입으로 이 사바세계의 풀과 나무와 금과 돌들 맛보았습니다. 그 이름의 수가 10만 8천 가지이나 이와 같이 맛을 보고, 그 맛이 신지 짠지 담담한지 단지 매운지, 또 여려 어울린 맛[諸和合]인지 그대로 순수한 맛[俱生]인지 변하여 달라진 맛[變異]인지를 알았으며, 또 찬 성질인지 더운 성질인지 독이 있는지 독이 없는지를 두루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래를 받들어 모신 뒤에는 맛의 성질이 공도 아니고 있지도 않으며, 몸과 마음과 일치하지도 않고 몸과 마음을 떠나지도 않는 이치를 분명히 알고, 맛의 원인을 분별하여 환히 깨닫게 되자, 여래께서는 저희 형제[昆季]를 인가하시어 약왕보살(藥王普薩), 약상보살(藥上菩薩)이란 칭호를 내려주셨습니다. 지금은 이 법회 가운데서 법왕자(法王子)가 되었으며, 맛으로 인한 깨달음이 밝다하여 보살자리에 올랐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경우로는 맛의 원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발타바라(跋陀波羅)가 동반(同伴) 16보살[開士]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이전에 위음왕(威音王)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하여 스님들이 목욕할 때 차례를 따라 욕실에 들어갔다가, 홀연히 물의 원인은 이미 때[塵]를 씻는 것도 아니고, 몸을 씻는 것도 아님을 깨닫고, 중간이 편안하여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들었습니다. 과거에 닦은 습성[宿習]을 잊지 않은 가운데, 금생[今時]에는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이제 무학(無學)을 성취하였으며, 저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발타바라(跋陀波羅)라는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결과 묘한 촉감[妙觸]이 뚜렷이 밝아져서 부처님의 대를 이을 아들이 되어 불법(佛法)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촉감의 원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마하가섭(摩訶迦葉)과 자금광비구니(紫金光比丘尼)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지난 겁에 이 세계에 일원등(日月燈)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을 때, 저는 직접 가까이 모시고 법문을 들으면서 수행하였으며, 그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사리(舍利)를 공양하며 등불로 어둠을 계속 밝히면서 자주 빛 황금으로 부처님의 형상을 도금하였습니다. 이 뒤로부터 세상에 태어날 때마다 몸에는 언제나 자주 색 황금빛이 가득 찼으며, 이 자금광비구니들도 저의 권속으로서 동시에 발심하였습니다. 저는 세상의 여섯 경계[六塵]는 변하여 허물어지는 법임을 관찰하고, 오직 공적(空寂)한 법으로 멸진정[滅盡]만을 닦아서, 몸과 마음이 손가락 퉁기는 잠깐 사이에 백천 겁을 뛰어 넘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공한 법으로 아라한을 성취하자, 세존께서는 저에게 두타행(頭陀行)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시니, 묘한 법이 밝게 열리면서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법의 원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아나율타(阿那律陀)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처음 출가하여 언제나 수면을 즐기니, 여래께서는 저에게 '축생의 종류가 되리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꾸지람을 듣고 자책하여 슬피 울면서 칠일동안 잠자리에 들지 못하다가 두 눈의 기능을 잃었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는 저에게 즐겁게 보는 작용으로 비춰 밝히는 금강삼매[樂見照明金剛三昧]를 가르쳐주셨으며, 저는 이 삼매로 눈을 따르지 않고도 시방(十方)을 살펴보고, 마치 손바닥의 열매를 보듯이 정교한 실물이 환해지니, 여래께서는 저에게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했다고 인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보는 작용을 돌이켜 근원을 따르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주리반특가(周利槃特迦)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외우는 재주도 없고 많이 듣고 아는 능력도 없습니다. 최초에 부처님을 만나 법문을 듣고 출가하여 여래의 한 구의 가타[一句伽陀]를 기억하려고 하였으나, 백일이 다 되어도 앞을 알면 뒤를 잊고 뒤를 알면 앞을 잊었습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저의 어리석음을 딱하게 여기셔서, 저에게 '편안히 머물러서 들숨 날숨을 고르게 다스려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숨 호흡을 관찰하여 생기고 머물고 달라지고 사라지는 온갖 행의 찰나(刹那)를 세밀하게 추궁하여 다하고, 마음이 활짝 열려서 크게 걸림이 없어졌습니다. 마침내 번뇌를 다하여 아라한을 성취하고 부처님의 좌석 아래에 머무니, 부처님께서는 무학도(無學道)를 성취했다고 인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숨을 돌이켜 공(空)을 따르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교범발제(驕梵鉢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말버릇이 나빠서 지난 겁에 사문들을 가볍게 여겨 조롱하다가, 세상에 태어날 때마다 소 새김질병에 걸렸는데, 여래께서 저에게 한 맛의 청정한 심지법문[一味淸淨心地法門]을 가르쳐주시니, 저는 잡념을 없애고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서 맛을 아는 작용은 몸도 아니고 물체도 아님을 관찰하여, 생각을 따라 자유롭게 세간의 온갖 번뇌를 뛰어넘었습니다. 따라서 안으로 몸과 마음을 해탈하고 밖으로 세계를 버려서, 새가 새장을 나오듯 멀리 삼계[三有]를 벗어나, 때 번뇌를 여의어 티끌 번뇌를 소멸하고 법의 눈이 청정하여 아라한을 성취하니, 여래께서는 친히 무학도(無學道)에 올랐다고 인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맛보는 작용을 돌이켜 바른 지견으로 돌리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처음 발심하여 부처님을 따라 도에 들어갔을 때 여래로부터 '세상에는 즐거운 일들이 없다'는 말씀을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성(城)안에 들어가 걸식(乞食)하면서 마음속으로 이 말씀을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길에서 독 가시에 찔려 발을 다치니 온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저는 '아는 작용[知]이 있어서 이 심한 아픔을 지각[知]하는 것이다. 비록 허망한 깨달음[覺]이 아픔[痛]을 지각[覺]할지라도, 본각[覺]의 청정한 마음에는 아픔 자체[痛]도 아픔을 지각하는 작용[痛覺]도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며, 또 '이 한 몸에 어찌 두 깨달음[雙覺]이 있겠는가'라고 사유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거둬 다스린 지 오래지 않아 몸과 마음이 홀연히 공하여 삼칠일 만에 온갖 번뇌를 다 비우고 아라한을 성취하자, 여래께서 친히 인가를 내리셔서 무학(無學)의 지위를 밝혀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순수한 깨달음으로 몸을 버리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수보리(須菩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오랜 옛 겁부터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얻고, 몸을 받아 태어난 생(生)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아도 스스로 다 기억합니다. 처음 모태(母胎)에 있을 때부터 곧바로 공적(空寂)한 경계를 알았고, 이와 같이 시방세계까지도 공하여, 중생들에게 공한 성품을 증득케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여래께서 밝히신 성품이 깨달음인 진실한 공[性覺眞空]을 듣고, 공한 성품을 원만하게 밝혀서 아라한을 성취하고, 단번에 여래의 보배로운 밝은 공의 바다[如來寶明空海]에 들어가 부처님의 지견(知見)과 같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래께서는 무학(無學)을 성취했다고 인가하시면서, 성품이 공한 이치로 해탈[解脫性空]한 경우는 제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온갖 모양이 빈자리[非]에 들어가서 빈 자체[非: 能空]와 비운 곳[所非: 所空]을 다하고, 법을 돌이켜 무(無)로 돌아가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사리불(舍利弗)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오랜 옛 겁부터 마음으로 보는 작용[心見; 眼識]이 청정하였으며, 이러한 상태로 몸을 받아 태어남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았으나, 그 때마다 세간과 출세간의 가지가지 변화를 한 번 보면 통하여 장애가 없었습니다.  

  저는 길을 가다가 가섭파(迦葉波) 형제를 만나 그들이 선양하는 인연 법(因緣法)을 듣고 마음이 끝이 없음을 깨달아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는 작용의 깨달음[見覺; 眼識]이 밝고 원만하여 두려움이 없는 큰 법을 얻고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여 부처님의 장자(長子)가 되었으니, 저는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나 법으로 변화하여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마음으로 보는 작용이 빛을 일으켜 빛이 가득한 지견(知見)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일찍부터 이미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여래의 법왕자(法王子)가 되었습니다. 시방 여래께서 보살의 근기를 갖춘 제자들에게 보현행(普賢行)을 닦도록 가르치심은 저를 따라 이름을 세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마음으로 듣고 중생의 지견(知見)을 분별합니다. 만일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다른 세계에서 한 중생이라도 마음속에 보현행(普賢行)을 밝히는 자가 있으면, 저는 그 때 여섯 어금니의 코끼리를 타고 몸을 백 천으로 나누어 다 그곳으로 갑니다. 비록 그 사람이 업장이 두터워서 저를 못 볼지라도 저는 보이지 않은 가운데[暗中] 그 사람의 이마를 만지며 보호하고 위로하여 원하는 일을 이루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저의 근본 수행[本因]을 말씀드린다면 마음으로 듣는 작용이 밝음을 일으켜서 자재하게 분별하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손타라난타(孫陀羅難陀)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처음에 출가하여 부처님을 따라 도에 들어가서 비록 계율을 갖춰 지녔으나, 삼마지(三摩地)에 들면 마음이 항상 흐트러지고 흔들려서 번뇌 없는 법을 얻지 못하자, 세존께서는 저와 구치라(俱絺羅)에게 '코끝이 희어질 때까지 코끝을 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자세히 관찰하여 삼칠일(三七日)만에 콧속의 기운을 보았더니, 드나드는 숨결이 연기와 같았습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이 안으로 밝아지고 세계도 환하게 열려서 유리처럼 두루 비고 맑아지더니, 연기의 모양이 점점 사라져서 코의 숨결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여기에 마음이 열리어 번뇌를 다하고 드나드는 숨결들이 모두 광명으로 화해서 시방세계를 비치며 아라한을 성취하자, 세존께서는 저에게 '앞으로 반드시 보리를 이루리라'고 수기를 내리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숨결을 오래도록 소멸하여 숨결이 밝음을 일으켜서 밝음이 원만한 가운데 번뇌를 멸하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오랜 옛 겁부터 말재주[辯才]가 걸림이 없어서 괴로움과 공한 법[苦空]을 설하는 가운데 깊이 실상(實相)을 통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여래의 비밀법문(祕密法門)을 대중 가운데서 미묘하게 연설[開示]하여 두려움이 없는 법을 얻었습니다. 여래께서는 저의 뛰어난 말재주를 아시고, 음성 굴리는 법[音聲輪]으로 저를 떨쳐 일으켜주시니, 제가 부처님 앞에서 부처님을 도와 법륜(法輪)을 굴리며 사자후(師子吼)를 떨치고 아라한을 성취하자, 세존께서는 저에게 설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인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설법의 소리[法音]로 마군(魔軍)의 원망을 항복시키고 온갖 번뇌를 소멸하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우바리(優波離)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몸소 부처님을 따라 성을 넘어 출가하여, 직접 여래의 6년 고행을 지켜보았습니다. 또 여래께서 온갖 마군(魔軍)을 항복시키고 모든 외도를 제압하시어 세상 사람들을 탐욕과 온갖 번뇌에서 해탈시키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계율을 받들어 지켰습니다. 이와 같이 삼천의 위의(威儀)와 팔만의 미세한 행과 심성 자체의 업[性業]과 규제를 범한 업[遮業]에 이르기까지 다 청정하여 몸과 마음이 적멸한 경지에 들어서 아라한을 성취하고, 여래의 대중 가운데 기강(紀綱)이 되니, 여래께서는 친히 저의 마음을 인가하시고 대중에게 '계율을 지니고 몸을 닦는 일에서는 가장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고 추천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몸을 단속하여 몸이 자재한 다음, 마음을 단속하여 마음이 막힘없이 환히 열린 뒤에, 몸과 마음이 모두 다 부드럽게 잘 통하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대목건련(大目犍連)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거리에서 걸식을 하다가 우루빈라(優樓頻螺), 가야(伽耶), 나제(那提)의 세 가섭파(迦葉波)를 만나서, 그들이 선양하는 여래 인연법의 깊은 뜻을 듣고 단번에 발심하여 크게 통달하자, 여래께서는 제 몸에 저절로 가사(袈裟)가 입혀지고 수염과 머리털이 저절로 떨어지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 제가 시방을 다니면서 걸림 없는 경지에 들어 신통(神通)을 밝히자, 여래로부터 '더없이 훌륭한 신통'이라는 추천을 받고, 저는 아라한을 성취하였습니다. 어찌 세존뿐이겠습니까. 시방의 여래께서도 저의 신통력을 '원만하게 밝고 청정하고 자재하여 두려움이 없는 경지'라고 찬탄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고요한 자리를 돌이켜서 마음의 빛을 탁한 물을 오래 두어 맑히듯 밝히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오추슬마(烏芻瑟摩)가 여래 앞에 나아가 합장하고 부처님의 두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언제나 먼저 옛 일을 생각해 봅니다. 구원 겁 전에 저의 성품은 몹시  

음욕을 탐냈습니다. 그 때 세상에 나오신 공왕(空王) 부처님께서 '음욕이 많은 사람은 맹렬한 불덩어리'라고 설하시면서, 저에게 '온갖 뼈[百骸]와 사지(四肢)의 차고 더운 기운들을 두루 관찰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침을 따라 행했더니, 신비한 광명이 안으로 엉겨서 음욕을 탐하는 마음이 변하여 지혜의 불이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모든 부처님께서는 저를 불 머리[火頭]라고 부르셨습니다. 저는 화광삼매(火光三昧)의 힘으로 아라한을 성취하고, 마음에 큰 소원을 세워서 모든 부처님이 성도 하실 때마다 역사(力士)로 변하여 직접 마군(魔軍)의 원망을 항복시켰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하게 통달한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몸과 마음의 따듯한 촉감을 자세히 관찰하여, 걸림 없이 유통(流通)시켜 온갖 번뇌를 다 소멸하고, 보배로운 큰 불꽃을 일으켜서 더없이 높은 깨달음에 오르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지지보살(持地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난 먼 옛날의 일을 생각해 보니, 보광여래(普光如來)께서 세상에 나오셨을 때 비구였습니다. 저는 항상 일체 중요한 길과 나루의 입구와 밭과 땅이 좁고 험하여 제대로 되지 않아서 수레와 말들을 방해하고 훼손하는 것을 보고, 그 곳을 골고루 메우기도 하고, 다리를 세우기도 하고, 모래와 흙을 지어 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노력하기를 한량없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실 때까지 계속하였는데, 때로는 어떤 중생이 사람과 수레가 붐비는 곳[闤闠處]에서 짐 나르기를 원하면, 제가 먼저 짊어지고 가서 목적지에 물건을 내려놓고 바로 떠나서 값을 받지 않았습니다. 비사부(毘舍浮)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흉년이 들어 굶주림이 심했는데, 저는 짐꾼이 되어 멀고 가까운 곳을 묻지 않고 오직 한 푼만 받았습니다. 간혹 수레를 끄는 소가 구렁에 빠졌을 때에는 저의 신비한 힘으로 바퀴를 밀어 올려 고통을 없애주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 국왕이 공양을 마련하여 부처님을 청했는데, 저는 부처님께서 잘 지나가실 수 있도록 땅을 평평하게 골라놓고 기다렸습니다. 비사부(毘舍浮) 부처님께서 지나시는 길에 저의 이마를 만지시면서 '마땅히 마음의 땅을 잘 고른다면 세상의 땅은 일체 다 골라지리라'고 말씀하셨으며, 저는 곧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따라서 몸의 미세한 티끌[微塵]과 세계의 미세한 티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미세한 티끌의 자성[微塵自性]은 서로 부딪치지 않으며, 병기[刀兵]까지도 저촉되는 일이 없음을 알고, 저는 법의 성품에서 무생법인[無生忍]을 깨달아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였습니다. 지금은 마음을 돌려 보살자리에 들어가서, 여러 여래께서 설하신 묘한 연화의 부처님 지견의 경지(妙蓮華佛知見地)를 듣고 제가 먼저 증명하여 상수(上首)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몸과 세계의 두 미세한 티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본 여래장(如來藏)이나, 허망하게 티끌이 일어났음을 자세히 관찰하여, 티끌을 소멸하고 지혜를 원만하게 갖춰서 더없이 높은 도를 이루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월광동자(月光童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난 옛 항하사겁(恒河沙劫)의 일을 생각해 보니, 그 때 수천(水天)이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서, 모든 보살들에게 '물의 정기[水精]를 수습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서 몸 가운데 물의 성품이 빼앗기지 않음을 관찰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처음 콧물과 침으로부터 이와 같이 진액(津液)과 정액(精液)과 피와 대변과 소변에 이르기까지, 몸속을 빙빙 도는 물의 성품이 동일한 이치를 끝까지 추궁하여, 물이 몸속과 세계 밖 부당왕찰(浮幢王刹)의 온갖 향수해(香水海)와 함께 평등하여 차별이 없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처음 이 관(觀)을 성취했을 때는 단지 물만 보는 경계일 뿐, 아직 몸이 없는 경지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비구로서 방안에 편안히 앉아 선정[禪]에 들었습니다. 저의 제자가 창문을 통해서 방안을 보다가, 오직 방안에 가득 찬 맑은 물만 보이고, 그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어리고 무지한 동자는 기와조각 하나를 물 속에 던져 철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힐끔 돌아보고 가버렸습니다. 저는 선정에서 나오자마자 갑자기 심장이 몹시 아팠는데, 사리불(舍利弗)이 몰래 해치는 귀신[違害鬼]을 만난 경우와 같았습니다.  

  저는 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나는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얻고 나서 오래 전부터 병과 인연이 없었는데, 오늘은 웬 일로 별안간 심장이 아픈 것일까. 장차 도에서 물러나 잃어버릴 징조가 아닌가."

  그 때 동자가 급히 저에게 달려오더니 앞서 행한 일을 말했습니다.

  저는 동자에게 일러주었습니다.

  "네가 다시 물이 보이면 반드시 문을 열고 물 속에 들어가서 기와조각을 제거해야 한다."

  동자는 가르침을 받들어서 제가 선정에 들자, 다시 또 물을 보고 그 속에 뚜렷이 남은 기와조각을 발견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뒤에 제가 선정에서 나오니 체질[身質]이 아프기 전과 같았습니다.  

  그 뒤로 한량없는 부처님을 만나서 모시다가, 산해자재통왕여래(山海自在通王如來) 때에 비로소 몸이 없는 경지를 얻으니, 시방세계의 온갖 향수해(香水海)와 함께 성품이 진공(眞空)과 합하여 둘도 없고 차별도 없었으며, 지금은 여래께서 내려주신 동진(童眞)이란 이름으로 보살의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하게 통달한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물의 성품이 한 맛으로 흐르고 통하여 무생법인[無生忍]을 얻고 보리를 원만하게 갖추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유리광법왕자(瑠璃光法王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난 옛 항사겁(恒沙劫)의 일을 생각해 보니, 그 때 무량성(無量聲)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서, 보살들에게 본래 깨달음의 미묘한 밝음을 열어 보이시면서 '이 세계와 중생의 몸은 다 허망한 인연의 바람 힘으로 굴리는 경계임을 관찰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때 계(界)의 안전한 건립을 관찰하고, 세[世]의 옮기는 때를 관찰하고, 몸의 움직이고 멈춤을 관찰하고, 마음의 움직이는 생각을 관찰해 보니, 온갖 움직임은 둘도 없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이 온갖 움직이는 성질은 와도 온 곳이 없고 가도 간 곳이 없음을 깨달으니, 티끌처럼 많은 시방의 뒤바뀐 중생들은 하나같이 허망하고, 이와 같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까지도, 한 세계 안에 들어 있는 중생들마다 마치 한 그릇에 담겨 어지럽게 우는 수많은 모기들이 지극히 보잘것없는 곳[分寸]에서 어지럽게 날뛰며 시끄럽게 떠드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생법인[無生忍]을 얻으니, 마음이 활짝 열려서 동방의 부동 부처님의 나라[不動佛國]를 뵙고, 법왕자(法王子)가 되어 시방의 부처님을 섬기는 가운데, 몸과 마음이 빛을 일으켜서 걸림 없이 환하게 사무쳤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의지함이 없는 바람의 힘을 관찰하여 보리의 마음(菩提心)을 깨닫고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서 시방세계의 부처님과 합하여 하나의 묘한 마음을 전하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허공장(虛空藏)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여래와 함께 정광(定光)부처님의 처소에서 끝없는 몸[無邊身]을 얻었습니다. 그 때 손에 네 개의 큰 보배구슬을 들고,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부처님 세계를 비춰 밝히니, 모두 허공으로 변했습니다. 또 제 마음에 크고 둥근 거울이 나타나서 열 가지 미묘한 보배광명을 놓고 시방의 온 허공의 경계를 두루 비추니, 온갖 높이 솟은 세계[諸幢王刹]들이 거울 속에 들어와서 제 몸속으로 스며 들였으나, 몸이 허공과 동일하여 서로 걸리거나 막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걸림 없는 몸으로 티끌처럼 많은 국토에 거침없이 들어가서 널리 불사(佛事)를 행하며 순조롭게 따르는 큰 능력[大隨順]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크고 신비한 힘은 제가 근거 없는 네 가지 요소[四大無依]가 허망한 생각으로 생멸 할 뿐, 허공과 둘이 아니며 불국토와 본래 동일한 이치를 자세히 관찰하여, 동일한 이치를 밝혀서 무생법인[無生忍]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허공의 끝없는 이치를 관찰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서 묘한 힘을 원만하게 밝히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미륵(彌勒)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난 옛 미진겁(微塵劫)의 일을 생각해 보니, 일월등명(日月燈明)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을 때, 저는 그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였으나, 마음에 세상의 명예를 중히 여겨 귀족[族姓]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이 때 그 세존께서는 저에게 '유심식정(唯心識定)을 수행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 겁에 걸쳐 이 삼매(三昧)를 닦으면서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부처님을 모시는 사이에, 세상의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말끔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연등(燃燈)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을 때, 저는 비로소 더없이 미묘하고 원만한 식심삼매[無上妙圓識心三昧]를 성취하여, 온 허공과 여래와 국토의 깨끗함과 더러움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모두 제 마음에서 변화하여 나타난 경계임을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오직 심식(心識)뿐이기 때문에, 식의 성품[識性]이 한량없는 여래를 유출시키는 것을 알았으며, 지금은 '다음 부처님의 자리를 이으리라'는 수기도 받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하게 통달한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시방(十方)이 유식(唯識)임을 자세히 관찰하여 심식(心識)을 원만하게 밝히고, 원성실성[圓成實]에 들어가서 의타기성[依他]과 변계소집[遍計執]을 멀리 여의어 무생법인[無生忍]을 얻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대세지법왕자(大勢至法王子)가 그의 동반 52보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난 옛 항사겁(恒沙劫)의 일을 생각해 보니, 무량광(無量光)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을 때, 열 두 여래께서 1겁(劫)마다 이어 나오셨습니다. 그 마지막 초일월광(超日月光)부처님께서 저에게 염불삼매(念佛三昧)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비유하면 한 사람은 오로지 기억하여 생각하는데 한 사람은 아득히 잊고 있다면, 이러한 두 사람은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이 서로 기억하여 두 기억하는 생각이 깊어야만 태어날 때마다 형체에 그림자가 따르듯 서로 어긋나지 않으리라. 시방 여래께서 중생을 생각하여 가엽게 여김은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 같은데, 만일 자식이 달아나 버린다면,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이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을 때, 어머니와 자식은 여러 생을 지낼지라도 어기거나 멀어지지 않으리라. 만일 중생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여 염불한다면, 현재 또는 미래에 반드시 부처님을 뵙거나, 부처님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며, 방편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마음이 열리느니라. 마치 향을 물들이는 사람이 몸에 향기가 베이는 것과 같으니, 이를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본래 첫 수행자리[本因地]에서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었으며, 지금은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사람을 거두어 정토(淨土)로 돌아가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따로 고를 것 없이 여섯 감관을 모두 거둬들여 청정한 생각을 계속 이어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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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관세음(觀世音)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셀 수 없는 항하사겁(恒河沙劫)전의 일을 생각해 보니, 관세음(觀世音)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을 때, 저는 그 부처님께 보리(菩提)의 마음을 내었습니다. 그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듣고 생각하고 닦는 지혜[聞思修]로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처음에 듣는 성품 가운데[聞中]서 성품의 흐름[流; 法流]을 따라 들어가니, 소리의 대상[所: 聲塵]이 없어지고, 소리의 대상[所]과 들어간 지혜[入]가 이미 고요해지니,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한 두 모양은 전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점차 증진(增進)하여 듣는 지혜[聞; 動靜을 아는 지혜]와 듣는 대상[所聞; 動靜]이 다하고, 들음이 다한 자리[盡聞; 듣는 지혜와 듣는 대상이 사라짐]에도 머물지 않으니, 깨닫는 지혜[覺; 能覺, 들음이 다한 줄 아는 智慧]와 깨닫는 대상[所覺; 들음이 다한 곳]이 공하여, 공(空; 覺과 所覺이 空함)을 깨달은 지혜[覺; 空을 아는 智慧]가 지극히 원만해져서, 공의 지혜[空; 能空, 覺과 所覺이 滅한 줄 아는 智慧]와 공의 대상[所空; 覺과 所覺이 滅한 곳]이 멸하자, 생멸(生滅; 動·靜·根·覺·空)이 이미 멸하여, 적멸(寂滅)한 경지가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홀연히 세간과 출세간을 초월하여 시방이 원만하게 밝아지면서 두 가지 뛰어난 능력을 얻었습니다. 첫째는 위로 모든 시방 부처님의 본래 깨달음의 묘한 마음과 합하여 모든 부처님의 사랑의 힘과 동일한 능력이며, 둘째는 아래로 시방의 일체 육도중생(六道衆生)과 합하여 모든 중생의 간절한 소원[悲仰]과 동일한 능력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관음여래(觀音如來)를 공양하며, 그 여래께서 가르쳐주신 '환술(幻術)처럼 듣는 성품을 훈습하여 듣는 성품을 수행하는 금강삼매[如幻聞薰聞修金剛三昧]'를 받들어 닦아서 여래와 사랑의 힘이 같기 때문에, 제 몸은 서른두 가지의 순응력[三十二應]을 성취하여 모든 국토에 들어갑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들이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서 정진하여 샘이 없는 법을 닦고 뛰어난 견해[勝解]가 원만하게 드러나면, 저는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해탈케 하고, 만일 배우는 단계의 수행자들이 고요한 경지가 묘하게 밝아서 뛰어난 미묘함이 원만하게 드러나면, 저는 그 앞에 독각(獨覺)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해탈케 하며, 만일 배우는 단계의 수행자들이 12인연(因緣)을 끊고, 인연이 끊어진 훌륭한 성품에 뛰어난 미묘함이 원만하게 드러나면, 저는 그 앞에 연각(緣覺)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해탈케 합니다.

  만일 배우는 단계의 수행자들이 4제(諦)의 공한 이치를 얻고 도를 닦아 열반[滅]에 들려고 할 때, 뛰어난 성품이 원만하게 드러나면, 저는 그 앞에 성문(聲聞)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해탈케 하고, 만일 중생들이 음욕에 얽힌 마음[欲心]을 밝게 깨달아서 음욕의 경계[欲塵]를 범하지 않고 몸을 청정하게 지니고자 하면, 나는 그 앞에 범왕(梵王)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해탈케 하며, 만일 중생들이 천주(天主)가 되어 모든 하늘을 거느리고자 한다면, 저는 그 앞에 제석(帝釋)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합니다.

  만일 중생들이 자재한 몸으로 시방세계를 유행(遊行)하고자 한다면, 저는 그 앞에 자재천(自在天)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고, 만일 중생들이 자재한 몸으로 허공을 날아다니고자 한다면, 저는 그 앞에 대자재천 (大自在天)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며, 만일 중생들이 귀신(鬼神)을 통솔하여 국토를 구제하고 보호하기를 좋아하면, 저는 그 앞에 천대장군(天大將軍)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합니다.

  만일 중생들이 세계를 통치하면서 중생을 지키고 보호하기를 좋아하면, 나는 그 앞에 사천왕(四天王)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고, 만일 중생들이 하늘 궁전에 태어나서 귀신 부리기를 좋아하면, 저는 그 앞에 사천왕국(四天王國)의 태자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며, 만일 중생들이 인간의 왕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앞에 왕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합니다.

  만일 중생들이 귀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추앙 받는 일을 좋아한다면, 나는 그 앞에 장자(長者)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고, 만일 중생들이 명언(名言)을 이야기하면서 청정하게 살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앞에 거사(居士)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며, 만일 중생들이 국토를 다스리면서 방읍(邦邑)을 바로잡아 결단하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앞에 황제 신하의 몸[帝官身]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합니다.

  만일 중생들이 온갖 음양 등의 술수[諸數術]로 사람들의 몸과 생명을 조절하여 기르면서 스스로 살아가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앞에 바라문(婆羅門)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고, 만일 어떤 남자가 배우기를 좋아해서 출가하여 모든 계율을 지키려고 한다면, 저는 그 앞에 비구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며, 만일 어떤 여인이 배우기를 좋아해서 출가하여 모든 금계(禁戒)를 지키려고 하면, 저는 그 앞에 비구니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합니다.  

  만일 어떤 남자가 5계(戒)를 받아 지키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앞에 우바새(優婆塞)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고, 만일 또 여자가 스스로 5계를 지키며 살아가고자 한다면, 저는 그 앞에 우바이(優婆夷)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며, 만일 어떤 여인이 집안 살림살이로 출세해서 관저[家]와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저는 그 앞에 황후의 몸[女主身]과 재상 부인[國夫人]과 고위 관직의 부인[命婦]과 정사(政事)에 모범이  

되는 여인[大家]의 모습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합니다.

  만일 어떤 중생이 남근(男根)을 허물지 않고자 한다면, 저는 그 앞에 동남(童男)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고, 만일 처녀(處女)가 그대로 처녀의 몸으로 남아 있기를 좋아하여 사나운 침범을 원하지 않는다면, 저는 그 앞에 동녀(童女)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며, 만일 하늘들이 하늘의 무리에서 나오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하늘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합니다.

  만일 용들이 용의 무리에서 나오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용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고, 만일 야차(夜叉)들이 본 무리[本倫]에서 떠나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앞에 야차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며, 만일 건달바(乾闥婆)들이 그 무리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앞에 건달바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합니다.

  만일 아수라(阿修羅)들이 그 무리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앞에 아수라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고, 만일 긴나라(緊那羅)들이 그 무리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앞에 긴나라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며, 만일 마호라가(摩呼羅伽)들이 그 무리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앞에 마호라가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합니다.

  만일 중생들이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좋아하여 사람으로 태어나는 길을 닦고자 한다면, 저는 사람의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하고, 만일 사람이 아닌 무리로서, 형상이 있는 중생이나 형상이 없는 중생이나 생각이 있는 중생이나 생각이 없는 중생이 그 무리에서 벗어나기를 좋아한다면, 저는 그 앞에 다 그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성취케 합니다.  

  이를 '묘하고 청정한 서른두 가지의 순응력으로 국토에 들어가는 몸'이라고 하오며, 모두 듣는 성품을 훈습(熏習)하여 듣는 성품을 수행하는 삼매에서 나온 무심작용의 묘한 힘[無作妙力]으로 자재하게 성취한 법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또 이 듣는 성품을 훈습하여 듣는 성품을 수행하는 삼매의 무심작용의 묘한 힘[聞熏聞修金剛三昧無作妙力]으로, 시방삼세(十方三世)의 일체 6도(道) 중생과 함께 간절한 소원[悲仰]이 동일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이 저의 몸과 마음에서 열네 가지 무외공덕(無畏功德)을 얻게 합니다.

  첫째는 저는 스스로 소리를 관찰하지 않고 관찰하는 자체를 관찰함에 따라, 저 시방 고뇌중생들이 그 음성을 관찰케 하여 해탈할 수 있게 하고, 둘째는 알고 보는 작용을 돌이켜 회복함에 따라, 중생들이 큰불 속에 들어갈지라도 불이 태울 수 없게 하며, 셋째는 성품으로 관하여 듣고 돌이켜 회복함에 따라, 중생들이 큰물에 떠내려갈지라도 물에 빠지지 않게 합니다.

  넷째는 허망한 생각을 단멸(斷滅)하여 마음에 살해하려는 생각이 없어짐에 따라, 중생들이 귀신 세상에 들어가도 귀신이 해칠 수 없게 하고, 다섯째는 듣는 성품을 훈습해서 듣는 성품을 성취하여 여섯 감관을 소멸하고 근원을 회복하여 소리와 들음이 동일함에 따라, 중생들이 피해를 당할 지경에 놓일지라도, 칼은 조각조각 부서지고, 군사의 무기[兵戈]는 마치 물을 베고 빛을 불어 끄듯이, 성품이 흔들리지 않게 하며, 여섯째는 듣는 작용을 훈습한 지혜[聞熏]가 정교하게 밝고 밝음이 법계에 두루 원만하여 온갖 깊은 어둠[幽暗]이 제 성질을 전혀 지키지 못함에 따라, 그 중생들 곁에 야차(夜叉)·나찰(羅刹)·구반다귀(鳩槃茶鬼)·비사차(毘舍遮)·부단나(富單那) 등이 가깝게 있을지라도 눈으로 볼 수 없게 합니다.  

  일곱째는 소리의 성질이 원만하게 소멸하고 관찰하여 듣는 작용을 돌이켜 들어가서 소리의 온갖 허망한 경계를 벗어남에 따라, 그 중생의 몸에 구금(拘禁)하고 묶는 칼[枷: 칼 또는 項鎖]과 족쇄(足鎖)가 붙을 수 없게 합니다.

  여덟째는 소리를 멸하고 듣는 성품이 원만하여 두루 사랑의 힘이 나옴에 따라, 그 중생들이 험한 길을 갈지라도 도적이 겁탈할 수 없게 하고, 아홉 번째는 듣는 본성을 훈습하여 소리의 경계[塵]를 벗어나서 요망한 색[色]이 겁탈할 수 없음에 따라, 음욕이 많은 중생들을 애정의 탐욕에서 멀리 벗어나게 하며, 열 번째는 소리가 순수하고 소리의 경계가 없어져서 감관[根]과 경계[塵]가 원만하게 융통하여 마주할 자와 마주할 상대가 없어짐에 따라, 노여움과 원한[忿恨]이 많은 일체중생을 온갖 성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열한 번째는 소리의 경계[塵]를 소멸하여 밝음을 돌이켜서 법계(法界)의 몸과 마음이 유리처럼 밝게 사무쳐 장애가 없어짐에 따라, 어둡고 우둔하여  

성품이 막힌 일체 아전가(阿顚迦: 阿顚底迦 Acchatika의 줄임이며, 一闡提라고도 함]들을 어리석은 어둠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하며, 열 두 번째는 형체를 두루 녹여 듣는 본성을 회복하여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세간을 끌어들이지만 세계를 허물지 않으면서, 티끌처럼 많은 여래들을 공양하며 각각 부처님의 곁에서 법왕자(法王子)가 됨에 따라, 자식이 없어서 남자아기를 원하는 법계의 중생들에게 복덕(福德)과 지혜를 갖춘 남자아기를 탄생케 하며, 열세 번째는 여섯 감관을 원만하게 통달하여 차별 없이 밝게 비추고, 시방세계를 머금어 크고 둥근 거울의 공한 여래장[大圓鏡空如來藏]을 세워서,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여래의 비밀법문을 받들어 순종하고 받아들인 법을 잃지 않음에 따라, 자식이 없어서 여자아기를 원하는 법계의 중생들에게 단정하고 복덕을 갖추고 유순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귀하게 여길 잘 생긴 여자아기를 탄생케 합니다.

  열네 번째는 이 삼천대천세계의 백억 일월에서 현재 세간에 살고 있는 62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법왕자들이 법을 닦고 모범을 드리워 중생들을 교화하고 있으나, 중생에 맞춰 따르는 방편과 지혜는 각기 다릅니다. 제가 얻은 원만하게 통달한 근본 감관[本根]의 경우에는, 묘한 귀의 문을 연 뒤에 몸과 마음이 미묘하게 두루 법계를 머금어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의 이름을 부르는 중생의 공덕을 저 62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법왕자들의 이름을 다 부르는 중생의 공덕과 비교해도, 두 사람의 복덕은 동등하여 다르지 않게 합니다. 세존이시여, 나의 한 이름의 공덕이 저 수많은 이름의 공덕과 다르지 않음은 제가 수행하여 진실하고 원만한 통달 법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중생들이 복을 갖추도록 베푸는 열네 가지 두려움이 없는 힘'이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또 이 원만한 통달 법을 얻고 더없이 높은 도를 닦아 증득했기 때문에, 또 네 가지 부사의한 무심 작용의 묘한 공덕[無作妙德]을 잘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제가 처음에 묘하고 또 묘한 듣는 마음을 얻고, 마음이 정밀하여 듣는 작용을 버리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이 따로 가로막히지 않게 되어, 한결같이 원만하고 융통하고 청정하고 보배로운 깨달음을 성취하였습니다. 따라서 저는 뜻대로 여러 가지 묘한 용모를 나타내어, 한없는 비밀신주(祕密神呪)를 마음대로 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머리 세 머리, 다섯 머리 일곱 머리, 아홉 머리 열 한 머리에서, 이렇게 백 팔 머리 천 머리 만 머리, 팔만 사천 금강머리[爍迦羅首]를 나타내기도 하고, 두 팔 네 팔, 여섯 팔 여덟 팔, 열 팔 열두 팔, 열네 팔 열여섯 팔, 열여덟 팔 스무 팔에서, 스물네 팔까지, 이렇게 일백 팔 팔천 팔, 만팔 팔만 사천 수인 팔[母陀羅臂: 結印, 手印]을 나타내기도 하며, 두 눈 세 눈, 네 눈 아홉 눈에서, 이렇게 백팔 눈 천 눈, 만 눈 팔만 사천 청정한 보배의 눈[淸淨寶目]을 나타내기도 하며, 때로는 자비로, 때로는 위엄으로, 때로는 선정으로, 때로는 지혜로, 중생을 구제하여 보호하는데 뛰어나게 자재한 능력을 얻었습니다.

  둘째는 제가 듣고 생각하는 지혜로 여섯 경계를 벗어 나옴이 마치 소리가 담을 넘어도 장애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저는 묘하게 낱낱 형상을 나타내어 낱낱 주문을 설할 수 있으며, 그 형상과 그 주문은 중생들에게 두려움이 없는 법을 잘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국토에서는 저를 '두려움이 없는 법을 베푸는 자'라고 부릅니다.

  세 번째는 제가 본래 묘하고 청정하고 원만하게 통달한 근본 감관[本妙圓通淸淨本根]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유행(遊行)하는 세계마다 중생들이 몸에 지닌 진귀한 보배의 애착을 버리면서 저에게 가엾게 여겨 구제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제가 부처님의 마음을 얻고 구경(究竟)법을 증득했기 때문에, 가지가지 진귀한 보배로 시방 여래(十方如來)께 공양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법계의 육도중생(六道衆生)이 아내를 구하면 아내를 얻게 하고, 자식을 원하면 자식을 얻게 하며, 삼매를 구하면 삼매를 얻게 하고, 긴 수명을 원하면 긴 수명을 얻게 하며, 이와 같이 또 대열반(大涅槃)을 구하면 대열반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한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귀의 문에서 원만하게 비춰 밝히는 삼매로부터 인연하는 마음[緣心]이 자재하고, 그 자재한 마음으로[因] 흐르는 모양[流相]에 들어가서 삼마제(三摩提)를 얻고 보리를 이루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세존이시여, 저 부처님 여래[佛如來; 觀世音]께서는 '원만하게 통달하는 법문을 훌륭하게 얻었다'고 감탄하시며, 큰 법회에서 저를 수기하시어 관세음(觀世音)의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관찰하여 듣는 법이 시방에 원만하게 밝혀졌기 때문에 관음(觀音)이란 이름이 시방세계에 두루 알려진 것입니다.  

  이 때 세존께서 사자좌(師子座)에서 온몸[五體]으로 똑같은 보배의 광명을 놓으셔서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여래와 법왕자보살(法王子菩薩)들의 이마를 비추셨으며, 저 모든 여래께서도 온 몸으로 다 같이 보배의 광명을 놓으시니, 그 광명은 미진 세계를 거쳐 와서 부처님의 이마를 비추고, 아울러 법회의 뛰어난 보살과 아라한들을 비췄다. 그러자 숲과 나무와 못과 시냇물들은 다 법을 연설하였으며, 교차된 광명은 서로 짜여 보배 실 그물처럼 어우러지니, 대중들은 이전에 본적이 없는 광경을 보면서 모두들 널리 금강삼매(金剛三昧)를 얻었다. 즉시 하늘에서 온갖 보배의 연꽃이 비 오듯 내리니, 푸른 색 노란 색 붉은 색 하얀 색이 사이마다 섞이고 현란하게 조화되어 시방허공은 온통 일곱 가지 보배 색으로 변했다. 이 사바세계의 대지와 산과 강은 동시에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으며, 오직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국토가 합쳐서 하나가 된 세계만 보이는 가운데, 자연히 울려 퍼지는 범패(梵唄)와 영가(詠歌)의 소리가 들릴 뿐이다.

  여기에 여래께서 문수사리법왕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이 스물다섯 뛰어난 무학보살(無學菩薩)과 아라한(阿羅漢)들을 보아라. 그들은 각기 최초의 성도방편(成道方便)을 설하면서 다들 진실한 원통 법을 닦았다고 말했다. 저들의 수행은 참으로 우열과 전후의 차별이 없다. 내가 이제 아난을 깨우치려면, 25행(行) 가운데 어떤 법이 그 근기에 가장 알맞겠으며, 또 내가 열반한 뒤에 이 사바세계 중생들이 보살 법[菩薩乘]에 들어가서 더없이 높은 도를 구하려면, 어떤 방편문(方便門)을 닦아야 쉽게 성취할 수 있겠느냐."  

  문수사리법왕자가 부처님의 자비로운 뜻을 받들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받들어서 게송으로 부처님께 답하였다.

   

  깨달음의 본래성품 고요하고 원만하며

  원만하게 고요한 깨달음은 미묘합니다.

  覺海性澄圓  圓澄覺元妙

   

  원래 밝음 비치어 밝힐 대상 생겨나니

  밝힐 곳 서고 나서 밝은 성품 없어졌고  

  미혹 망상 아득하여 허공으로 변했으며

  넓은 허공 의지하여 모든 세계 세워지자

  헛된 생각 가라앉아 온갖 국토 되었으며  

  허망하게 지각하여 중생으로 변합니다. 

  元明照生所  所立照性亡

  迷妄有虛空  依空立世界

  想澄成國土  知覺乃衆生

   

  깨달음의 둥근 데서 불쑥 생긴 저 허공도

  넓은 바다 작디작은 한 방울의 거품인데

  생멸 따라 변화하는 티끌처럼 많은 국토

  하나같이 허공에서 생겨 나온 존재이니

  물거품이 사라지면 저 허공도 본래 없는데

  그 가운데 삼계인들 어느 곳에 기대리까.

  空生大覺中  如海一漚發

  有漏微塵國  皆從空所生

  漚滅空本無  況復諸三有

   

  근원으로 가는 성품 두 갈래 길 없사오나

  방편 따라 가는 길엔 여러 문이 있습니다.  

  歸元性無二  方便有多門

   

 성인 성품 무엇에나 거침없이 통달하여

  알맞음도 거슬림도 한결같이 방편 되나

  초심자가 수행하여 선정삼매 들 때에는

  늦고 빠른 근기 달라 한결같지 않습니다.

  聖性無不通  順逆皆方便

  初心入三昧  遲速不同倫

   

  색상이란 망상으로 얽혀 짜인 경계로서

  정교하게 추궁해도 사무칠 수 없사온데

  명철하게 꿰뚫어서 알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色想結成塵  精了不能徹

  如何不明徹  於是獲圓通

   

  음성이란 온갖 말이 두루 섞인 경계로서

  낱말들과 이름들과 구절들의 내용일 뿐

  한 마디로 일체 뜻을 담아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音聲雜語言  但伊名句味

  一非含一切  云何獲圓通

   

  향냄새란 화합으로 맡아 아는 경계로서

  인연 화합 떠난다면 향냄새가 원래 없어

  항상 느껴 알 수 없는 오락가락 저 냄새로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香以合中知  離則元無有

不恒其所覺  云何獲圓通

   

 

  맛봄이란 그 자체가 본연 아닌 경계로서

  혀를 대어 맛볼 때만 온갖 맛을 알게 되니

  그 느낌이 한결같이 있지 않는 저 맛으로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味性非本然  要以味時有

  其覺不恒一  云何獲圓通

   

  감촉이란 닿음 따라 밝혀 아는 경계로서

  닿는 대상 없어지면 감촉인줄 모르는데

  대고 떼는 그 성질이 정처 없는 감촉으로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觸以所觸明  無所不明觸

  合離性非定  云何獲圓通

   

  법 경계란 뜻을 따라 인연하는 경계로서

  경계 따라 인식할 때 그 대상이 있게 되니

  능과 소를 떠나서는 알지 못할 저 법으로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法稱爲內塵  憑塵必有所

  能所非遍涉  云何獲圓通

   

  보는 성품 환히 밝혀 온갖 것을 본다 해도

  보는 앞은 분명하나 뒤는 밝게 볼 수 없어

  네 구석에 하나 반이 보는 작용 부족한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見性雖洞然  明前不明後

  四維虧一半  云何獲圓通

   

  코로 쉬는 들숨날숨 들이쉬고 내쉬지만

   

 들고나는 그 중간에 어우러진 숨결 없어

  내쉬거나 들이쉴 뿐 두루 밟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 법으로 원통 법을 이루리까.

  鼻息出入通  現前無交氣

  支離匪涉入  云何獲圓通

   

  맛을 보고 아는 데는 그 까닭이 확실해서

  단맛 쓴맛 있어야만 이를 따라 느끼지만

  단맛 등이 없어지면 아는 작용 없어지니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舌非入無端  因味生覺了

  味亡了無有  云何獲圓通

   

  몸의 작용 닿는 경계 합할 때는 동일하나

  각기 따로 지각할 때 원만하지 못하면서

  몸과 촉의 경계선이 어디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이 법으로 원통 법을 이루리까.

  身與所觸同  各非圓覺觀

  涯量不冥會  云何獲圓通

   

  뜻 감관은 생각으로 어지럽게 뒤섞여서

  고요하여 맑은 경지 볼 여가가 아예 없어

  생각하고 기억하며 벗어날 줄 모르는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知根雜亂思  湛了終無見

  想念不可脫  云何獲圓通

   

  세 가지가 섞여 합한 안식으로 보는 작용

  그 근원을 따져보면 제 모양이 있지 않아

   

자체부터 애매하여 결정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識見雜三和  詰本稱非相

  自體先無定  云何獲圓通

   

  시방곳곳 막힘없이 마음으로 듣는 법은

  마음 다한 첫 수행의 큰 힘에서 나왔으니

  초심자가 들기에는 너무 높은 경지인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心聞洞十方  生于大因力

  初心不能入  云何獲圓通

   

  코끝에다 모은 생각 본래부터 방편으로

  그 마음을 잡아들여 머물도록 단속할 뿐

  머물 때는 그 마음이 머무를 곳 머무르니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鼻想本權機  秖令攝心住

  住成心所住  云何獲圓通

   

  설법이란 음성으로 문자들을 농하는 일  

  여러 생을 갈고 닦아 깨친 이는 가능하나

  이름이나 구절들은 무루법이 안 되는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說法弄音文  開悟先成者

  名句非無漏  云何獲圓通

   

  지와 범의 계율 닦아 이 한 몸을 단속하나

  이 한 몸을 떠나서는 단속 대상 전혀 없어

  원래부터 모든 것에 원만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持犯但束身  非身無所束

  元非遍一切  云何獲圓通

   

  신통술은 본래부터 많은 생에 닦은 인연

  법 경계를 분별함과 무슨 상관있으리까.  

  생각하는 인연들은 물체에서 못 떠나니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神通本宿因  何關法分別

  念緣非離物  云何獲圓通

   

  흙의 요소 그 본질을 세밀하게 살핀다면

  단단하고 걸리어서 뚫려 있지 아니하고

  변화하는 생멸 법은 진실성품 아니거니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若以地性觀  堅礙非通達

  有爲非聖性  云何獲圓通

   

  물의 요소 그 본질을 면밀하게 살핀다면

  생각이나 기억들은 진실 법이 아니어서

  부동불변 여여 경지 추궁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若以水性觀  想念非眞實

  如如非覺觀  云何獲圓通

   

  불의 요소 그 본질을 자상하게 살핀다면

  존재현상 싫어함도 해탈이라 할 수 없어

  초심자가 방편 삼아 수행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若以火性觀  厭有非眞離

  非初心方便  云何獲圓通

   

  바람요소 그 본질을 섬세하게 살핀다면

  흔들림과 고요함이 서로기대 마주 서니

  마주서면 무상각을 성취하지 못 하는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若以風性觀  動寂非無對

  對非無上覺  云何獲圓通

   

  공의 본질 그 바탕을 깊이깊이 살핀다면

  둔탁하고 어두움은 깨달음이 원래 없어

  깨달음이 아니라면 보리라고 못하는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若以空性觀  昏鈍先非覺

  無覺異菩提  云何獲圓通

   

  인식 성질 그 근본을 꼼꼼하게 살핀다면

  관찰하는 인식부터 영원히 머물지 않고  

  마음 쓰는 그 자체가 부질없고 허망한데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若以識性觀  觀識非常住

  存心乃虛妄  云何獲圓通

   

  변천하는 온갖 행이 영원하지 아니해서

  염불하는 그 성품도 원래부터 생멸인데

  원인결과 지금 와서 달리 받긴 하였으나

  어떻게 원만한 통달 법을 이루리까.

  諸行是無常 念性元生滅

   因果今殊感 云何獲圓通

   

  저는 이제 제 소견을 부처님께 아룁니다.

  세존께서 중생 위해 사바세계 나오셔서

  이 세상의 중생들을 교화하는 진실 법도

  부처님의 청정하신 음성 따라 듣게 되니

  누구든지 수행하여 삼마제를 취하려면

  듣는 성품 돌이켜야 들어가기 쉽습니다.

  我今白世尊  佛出娑婆界

  此方眞敎體  淸淨在音聞

  欲取三摩提  實以聞中入

   

  온갖 고통 벗어나서 해탈경지 이룬 이여

  훌륭하다 그 이름 관세음보살이여

  항하강의 모래처럼 많은 겁이 지나도록  

  티끌처럼 많고 많은 불국토에 들어가서

  훌륭하고 걸림 없는 자재한 힘 성취하여

  고통 받는 중생에게 무외법을 베풀면서

  묘음으로 설법하고 세상 소리 관찰하여  

  때에 맞는 해조음과 집착 떠난 범음으로

  이 세상을 구제하여 너나 없이 편케 하고

  출세간의 수행자는 상주 진리 얻는구려.

  離苦得解脫  良哉觀世音

  於恒沙劫中  入微塵佛國

  得大自在力  無畏施衆生

  妙音觀世音  梵音海潮音

  救世悉安寧  出世獲常住

   

 

저는 이제 부처님께 제 진심을 아룁니다.

  관세음이 설한 법을 비유하여 말한다면

  사람들이 소리 없이 조용하게 쉬는 곳에

  시방에서 한꺼번에 북을 쳐서 소리 내면

  온갖 곳에 고루 퍼져 한 순간에 다 들리니

  이 경지가 바로 원만[圓]의 진실입니다.

  我今啓如來  如觀音所說

  譬如人靜居  十方俱擊鼓

  十處一時聞  此則圓眞實

   

  눈을 뜨고 본다 해도 막힌 곳을 볼 수 없고

  입과 코의 그 작용도 이 경우와 한가지며

  몸의 촉은 닿아야만 닿는 줄을 알게 되고

  마음으로 생각할 땐 두서없이 섞이지만  

  소리 듣는 그 성품은 담과 벽에 막힘없어

  먼 곳이나 가까운 곳 하나같이 다 들어서

  다섯 감관 이와 달라 듣는 작용 못 따르니

  이 경지가 바로 통달[通]의 진실입니다.

  目非觀障外  口鼻亦復然

  身以合方知  心念紛無緖

  隔垣聽音響  遐邇俱可聞

  五根所不齊  是則通眞實

   

  소리 경계 그 본질은 움직이고 조용하여

  듣는 성품 가운데서 있다 없다 작용하니

  듣는 소리 없을 때는 듣는 성품 없다 하나

  듣는 성품 실제로는 없어지지 아니하여

  소리작용 없다 해도 없어진 일 원래 없고

  소리작용 있다 해도 생겨난 일 본래 없어

   

 

 생과 멸의 두 경계를 뚜렷하게 떠났으니

  이 경지가 바로 영원[常]의 진실입니다.

  音聲性動靜  聞中爲有無

  無聲號無聞  非實聞無性

  聲無旣無滅  聲有亦非生

  生滅二圓離  是則常眞實

   

  깊이 잠든 꿈속에서 소리 듣고 생각하여

  마음 쓰지 아니해도 생각 없지 아니하니

  깨침으로 관찰하여 사유의 길 떠난 자리

  몸과 마음 다하여도 따를 수가 없습니다.

  縱令在夢想  不爲不思無

  覺觀出思惟  身心不能及

   

  넓고 많은 세계 중에 사바국토 중생들은

  음성으로 담론하며 자기 뜻을 밝히지만

  중생들은 우둔하여 듣는 본성 미혹하고

  소리만을 따르면서 윤회하고 있습니다.

  今此娑婆國  聲論得宣明

  衆生迷本聞  循聲故流轉

   

  아난 비록 많이 외워 아는 지식 뛰어나도

  삿된 생각 떨어짐을 면할 길이 없었으니  

  음욕 늪에 빠지는 일 벗어나질 못했으나

  소리 흐름 돌이키면 헛된 생각 없습니다.  

  阿難縱强記  不免落邪思

  豈非隨所淪  旋流獲無妄

   

  아난이여 너는 이제 나의 말을 잘 들어라.

  나는 이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금강처럼 견고하고 환술처럼 부사의한

  부처님의 근본이신 진실한 삼매를  

  너를 위해 설하여 밝혀 주리라.

  阿難汝諦聽  我承佛威力

  宣說金剛王  如幻不思議

  佛母眞三昧

   

  지금 너는 한량없는 부처님을 받들면서

  하고 많은 비밀법문 남김없이 들었으나  

  처음부터 음욕번뇌 제거하지 못하다가

  듣는 지식 쌓아올려 과오를 저질렀다.

  汝聞微塵佛 一切袐密門 

  欲漏不先除  畜聞成過誤

   

  들음으로 부처님의 바른 법을 지니면서  

  어찌하여 듣는 성품 들으려고 안 했느냐. 

  將聞持佛佛  何不自聞聞

   

  들음이란 자연으로 발생하지 아니하고

  소리 따라 이름이나 글자들만 있느니라.  

  聞非自然生  因聲有名字 

   

  듣는 성품 돌이켜서 소리에서 해탈하면

  해탈한 자 네가 아닌 누구라고 하겠느냐.  

  旋聞與聲脫  能脫欲誰名 

   

  한 감관을 돌이켜서 근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가지 감관들도 남김없이 해탈한다.  

   

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

   

  보고 듣는 작용들은 헛것 보는 눈병 같고

  욕계 색계 무색계는 허공 꽃과 다름없다

  듣는 본성 되돌려서 눈병 뿌리 제거하면

  티끌번뇌 스러져서 깨달음이 맑아지리.  

  見聞如幻翳  三界若空花  

  聞復翳根除  塵銷覺圓淨

   

  맑은 경계 끝 간 데서 본래 광명 통달하고

  고요하게 밝게 비쳐 온 허공을 두루 삼켜

  세상으로 돌아와서 온갖 것을 돌아보면

  꿈속 일과 다름없이 허망하게 보이리니  

  꿈속에서 즐겨 노는 그림자 마등가가  

  어떤 수로 네 형체를 붙들 수 있겠느냐.  

  淨極光通達  寂照含虛空  

  卻來觀世間  猶如夢中事 

  摩登伽在夢  誰能留汝形 

   

  세상에서 묘한 술법 자랑하는 환술사가

  교묘하게 환술 부려 남녀들을 부릴 적에

  눈과 입과 손과 발이 움직임을 볼지라도

  한 기틀의 발동으로 흔들리고 움직이니

  한 기틀이 발동 멈춰 고요한 데 돌아가면

  환술 따라 놀던 남녀 어디에서 찾겠느냐.

  如世巧幻師  幻作諸男女  

  雖見諸根動  要以一機抽  

  息機歸寂然  諸幻成無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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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6권

 

 

 여섯 가지 감관으로 흔들리는 그 작용도  

  원래부터 한 정기의 밝은 데를 의지하여

  따로 각기 여섯으로 어우러져 나눴으니

  한 감관만 멈춰 쉬어 밝은 본성 회복하면

  여섯 가지 감관들도 모든 작용 멈춰 쉬고

  티끌 번뇌 때 번뇌를 마음대로 소멸하여

  원만하게 밝고 맑은 묘한 경지 이루리라.

  六根亦如是  元依一精明  

  分成六和合  一處成休復  

  六用皆不成  塵垢應念銷

  成圓明淨妙

   

  티끌번뇌 남은 동안 유학자리 머물다가

  밝은 경지 완연하면 그게 바로 여래니라.

  餘塵尙諸學 明極卽如來

   

  아난이여 대중이여

  너희들은 뒤바뀌어 듣는 틀을 되돌려라.

  듣는 성품 돌이켜서 제 성품을 듣는다면

  제 성품으로 더없이 높은 도를 이루리라.

  원만한 통달법도 진실로 이와 같을 뿐이다.

  衆及阿難  旋汝倒聞機

  聞聞自性  性成無上道

  通實如是

    

  이것이 티끌처럼 많은 부처님께서

  한 길을 따라 행하신 열반의 문이다.

  지난 세상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 열반의 문을 이미 성취하셨고  

   

현재 세상의 여러 보살들도

  지금 원만한 밝음에 들어가고 있으며

  미래에 닦고 배울 사람들도

  마땅히 이러한 법을 의지하리라.

  나 또한 이 방법으로 증득했으니

  어찌 관세음보살만 그렇겠느냐. 

  此是微塵佛  一路涅槃門  

  過去諸如來  斯門已成就  

  現在諸菩薩  今各入圓明  

  未來修學人  當依如是法  

  我亦從中證  非唯觀世音

   

  참으로 부처님 세존께서

  제게 방편의 선택을 명하신 뜻은

  말겁 세상을 구제하시고

  세상 사람들을 구출하시려는 것이오니

  말겁에 열반의 마음을 성취시키려면

  관세음의 방편이 가장 뛰어납니다.  

  그 외 나머지 모든 방편들은

  부처님께서 위신력으로  

  당한 일에 따라 번뇌를 버리게 하신 법이니

  오래 닦고 배우거나 얕고 깊은 근기에게

  한가지로 두루 설할 법이 못 됩니다.

  誠如佛世尊  詢我諸方便  

  以救諸末劫  求出世間人  

  成就涅槃心  觀世音爲最  

  自餘諸方便  皆是佛威神  

  卽事捨塵勞  非是長修學  

  淺深同說法

   

   

 

번뇌 없는 불가사의한  

  여래장에 머리 숙여 예를 올리오니

  부디 미래중생에게 가피를 내리시어  

  이 문에 의혹이 없게 하시고

  방편을 쉽게 성취케 하옵소서.  

  禮如來藏  無漏不思議

  加被未來  於此門無惑

  便易成就

   

  아난과 말겁의 고해 중생들을  

  교화하기에 가장 알맞은 법이오니

  단지 이 감관으로 닦기만 하면

  원만한 통달이 다른 방편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이것이 저의 진실한 마음입니다.

  堪以敎阿難  及末劫沈淪  

  但以此根修  圓通超餘者  

  眞實心如是

   

  여기에 아난과 대중들은 몸과 마음이 시원하게 훌륭한 가르침을 깨닫고, 부처님의 보리와 대열반(大涅槃)을 바라보니, 마치 볼일 때문에 먼 곳에 갔던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는 못했으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확실하게 아는 것과 같았다.  

  법회에 모인 천룡팔부(天龍八部)와 배우는 단계의 이승[有學二乘]과 새로 발심한 보살들은, 그 수가 무려 열 항하의 모래처럼 많았으나, 모두들 본 마음을 깨닫고 번뇌를 멀리 벗어나서 청정한 법의 눈을 얻었다. 성비구니(性比丘尼)는 게송이 끝나자, 아라한을 성취하였으며, 한량없는 중생들은 다 '비할 데 없이 평등하고 더없이 높고 바르고 두루 통달한 깨달음의 마음[無等等阿耨多羅三藐三菩提]'을 내었다.

   

아난은 옷을 바르고 대중 가운데서 합장하고 이마를 조아려 예를 올리면서 마음과 향할 길[迹]이 뚜렷이 밝은 가운데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였다. 미래의 중생들에게 이익을 베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리 숙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대비하신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이미 성불법문(成佛法門)을 깨달았으니, 이 법으로 수행하는 데 아무런 의혹이 없습니다.

  저는 항상 여래로부터 '자신은 아직 해탈하지 못했으나 남을 먼저 해탈시키려는 것은 보살이 발심이며, 자신이 이미 원만하게 깨달아서 남을 깨우치는 것은 여래가 세상에 순응하는 행이니라'는 말씀을 들어왔습니다. 제가 비록 아직 해탈하지 못했으나, 말겁(末劫)의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싶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중생들이 부처님과 점차 더 멀어져서 삿된 스승의 설법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아질 때, 그 마음을 거둬들여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도량을 안전하게 설치해야만 온갖 마군(魔軍)의 장애를 멀리 벗어나서 보리의 마음이 물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세존께서 대중들에게 아난을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다. 네가 물은 바와 같이 도량을 안전하게 설치하여 생사에 잠길 말겁(末劫)의 중생들을 구제하려면,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너를 위해 설하리라."

  아난과 대중은 '예[唯然]'라고 대답하고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항상 들어온 바와 같이 나는 계율[毗奈耶]에서 수행해야할 세 가지 결정된 뜻을 설해왔다. 아른 바 마음을 거둬들이는 계(戒)와 계에서 생기는 정(定)과 정에서 일어나는 혜(慧)이니, 이를 3무루학(無漏學)이라고 한다.

  아난아, 어째서 내가 마음을 거둬들이는 수행을 계라고 했겠느냐.

  만일 모든 세계의 여섯 갈래 중생이 그 마음에 음욕이 없으면, 생사를 따라 상속(相續)하지 않느니라.

  네가 삼매를 닦는 뜻은 본래 번뇌에서 벗어나려는 데 있으나, 음욕 심을 버리지 못하면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록 지혜가 많고 선정(禪定)이 앞에 나타날지라도, 음행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마의 길에 떨어져서, 상품은  

   

마왕(魔王)이 되고 중품은 마의 백성이 되고 하품은 마의 여자가 된다. 저 온갖 마군(魔軍)들도 각기 거느린 무리가 있어서, 스스로 더없이 높은 도를 이뤘다고 하느니라.  

  내가 열반한 뒤 말법(末法)에는 이 마의 백성들이 세상에 치성(熾盛)하여 음욕을 자행하면서 선지식(善知識)이라고 하며, 온갖 중생들을 애욕과 사견[愛見]의 구덩이에 떨어트려 보리의 길을 잃게 하느니라.

  네가 세상 사람들을 교화하여 삼마지(三摩地)를 닦게 하려면 먼저 마음의 음욕을 끊게 해야 한다. 이것이 이 여래와 이전 세존께서 첫째로 결정한 청정하고 밝은 가르침이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만일 음행을 끊지 않고 선정을 닦는다면, 모래와 돌을 삶아서 밥을 지으려는 격이니, 백천 겁을 지낼지라도 뜨거운 모래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밥의 재료가 아닌 돌과 모래이기 때문이다. 네가 음욕을 행하는 몸으로 부처님의 묘한 과위[妙果]를 구한다면, 아무리 묘하게 깨달을지라도 모두 음욕의 뿌리이니라. 뿌리가 음욕으로 얽혀 있으면 세 갈래 세상을 굴러다니면서 벗어날 수 없을 텐데, 여래의 열반을 어느 길에서 닦아 증득하겠느냐.  

  반드시 음욕의 틀[婬機]을 몸과 마음에서 함께 끊어야 하고 끊었다는 생각까지 없어져야만 부처님의 보리를 바랄 수 있느니라.  

  나의 이러한 말이 부처님의 말씀이며, 이와 다른 말은 파순(波旬)의 말이니라.

  아난아, 또 만일 모든 세계의 여섯 갈래 중생이 그 마음에 생명을 죽일 생각이 없으면, 생사를 따라 상속하지 않느니라.

  네가 삼매를 닦는 뜻은 본래 번뇌를 벗어나려는 데 있으나, 죽이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록 지혜가 많고 선정(禪定)이 앞에 나타날지라도, 살생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귀신의 길에 떨어져서, 상품은 큰 힘을 가진 귀신이 되고, 중품은 날아다니는 야차(夜叉)나 귀신의 우두머리가 되고, 하품은 땅에 다니는 나찰(羅刹)이 된다. 저 모든 귀신들도 각기 거느린 무리가 있어서, 스스로 더없이 높은 도를 이뤘다고 하느니라.  

  내가 열반한 뒤 말법(末法)에는 이러한 귀신들이 세상에 성행하여 스스로  

   

 

'고기를 먹어야 보리의 길을 얻는다'고 말하리라. 아난아, 나는 비구들에게 다섯 가지 깨끗한 고기를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였으나, 이 고기들은 모두 다 나의 신력(神力)으로 변화시킨 것으로 본래 생명이 없었느니라. 너희 바라문(婆羅門)들이 살고 있는 곳은, 땅이 찌는 듯이 덥고 습기가 심한 데다 돌과 모래가 많아서, 풀이나 채소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대비신력(大悲神力)으로 가피를 내려 큰 자비의 방편으로 고기라고 하니, 너희들은 그 맛을 보았을 뿐인데, 이 여래가 열반한 뒤에 중생의 고기를 먹는 사람을 어찌 나의 제자[釋子]라고 하겠느냐.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고기를 먹는 사람이 비록 삼마지(三摩地)를 얻은 듯 마음이 환하게 열릴지라도, 이들은 다 대나찰(大羅刹)들로서, 과보(果報)가 끝나면 반드시 생사고해에 빠질 자들이요, 불제자(佛弟子)가 아니니라. 이러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서로 죽이고 서로 삼키고 서로 잡아먹기를 그치지 않으니, 어찌 이런 사람들이 3계(界)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네가 세상 사람들을 교화하여 삼마지(三摩地)를 닦게 하려면, 음욕 다음에 살생을 끊게 해야 한다. 이것이 이 여래와 이전 세존께서 두 번째로 결정한 청정하고 밝은 가르침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만일 살생을 끊지 않고 선정을 닦는다면, 마치 제 귀를 막고 큰 소리 치면서 남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격이니, 이를 '숨기려고 할수록 더욱 드러내는 짓'이라고 한다. 청정비구와 보살들은 좁은 길을 지날 때도 살아있는 풀을 밟지 않는데, 더욱이 손으로 뽑겠느냐. 또 어찌 중생을 가엾게 여기는 보살이 중생들의 피와 고기를 취해서 음식으로 여겨 배를 채우겠느냐. 만일 비구들이 동쪽 나라에서 나는 명주실과 솜과 비단 등으로 짠 옷을 입지 않으며, 이 지방에서 나는 가죽 신발을 신지 않으며,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지 않으며, 짐승의 젖과 젖으로 만든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구들은 세상을 진실하게 해탈하여 지난 세상의 빚을 갚고 3계(界)에서 떠돌지 않으리라. 왜냐 하면 다른 몸의 가죽 등[身分]을 입으면 다 그들과 인연을 맺기 때문이다. 마치 겁 초의 사람들이 그 땅에서 나는 온갖 곡식을 먹다가 발이 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와 같으니라.  

  반드시 몸과 마음으로 모든 중생의 몸이나 몸의 몫을 몸과 마음의 두 길에서 입거나 먹지 않도록 단속한다면 나는 이 사람들을 진정한 해탈자라고 하리라.  

  나의 이러한 말은 부처님의 말씀이며, 이와 다른 말은 파순(波旬)의 말이니라.

  아난아, 만일 모든 세계의 여섯 갈래 중생이 그 마음에 훔칠 뜻이 없으면, 생사를 따라 상속하지 않느니라.

  네가 삼매를 닦는 뜻은 본래 번뇌를 벗어나려는 것이나, 훔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록 지혜가 많고 선정(禪定)이 앞에 나타날지라도, 훔치는 생각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삿된 길에 떨어져서, 상품은 정령(精靈)이 되고 중품은 요망한 도깨비[妖魅]가 되고 하품은 삿된 사람이나 온갖 도깨비에 홀린 자가 된다. 저 여러 삿된 자들도 각기 거느린 무리가 있어서, 스스로 더없이 높은 도를 이뤘다고 하느니라.  

  내가 열반한 뒤 말법(末法)에는 이러한 요망한 삿된 무리들이 세상에 성행하여, 몰래 숨기는 간사한 속임수[內心]로 선지식이라 칭하여, 각기 스스로 훌륭한 사람의 법을 얻었노라 하면서, 무식한 사람을 현혹시켜서 두려움으로 마음을 잃게 하고 지나는 곳마다 그 집안의 재산을 탕진시키느니라. 내가 비구들에게 법에 따라 걸식[循乞]하도록 가르친 까닭은, 탐욕을 버리고 보리의 도를 성취시키려는 뜻이며, 또 비구들이 스스로 음식을 익혀 먹지 않도록 한 것도, 남은 생을 3계(界)에 머물다가, 한 번만 왕래하여 가고 나면 되돌아오지 않음을 보이려는 뜻이다. 그런데 어찌 도적이 나의 의복으로 위장하여 여래를 팔아 여러 가지 나쁜 업을 지으면서 모두 불법(佛法)이라 하고, 출가하여 계를 갖춘 비구들을 소승도(小乘道)라고 비방하다가, 이로 인하여 한량없는 중생을 의혹 시켜 그르쳐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게 하겠느냐.  

  만일 내가 열반한 뒤에 만일 어떤 비구가 발심하여 뜻을 결정하고 삼매를 닦으면서, 여래의 형상 앞에서 한 등불로 몸을 태우거나, 한 손가락을 태우거나, 향 하나로 몸을 태운다면, 나는 이 사람은 한량없는 지난 세상의 빚을 일시에 갚고 길이 세상을 하직하여, 영원히 온갖 번뇌를 해탈하리라고 설할 것이며, 비록 그 자리에서 더없이 높은 깨달음의 길을 밝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그 보리 법에 이미 마음을 결정했다고 하리라. 만일 이렇게 몸을 버리는 작은 인연이라도 맺지 않는다면, 비록 무위법(無爲法)을 성취할지라도, 반드시 인간으로 환생하여 그 묵은 빚을 갚게 되니, 바로 내가 말먹이 보리를 먹은 일과 다르지 않으리라.

  네가 세상 사람들을 교화하여 삼마지(三摩地)를 닦게 하려면 음욕과 살생 다음으로 훔치는 마음을 끊게 해야 한다. 이것이 이 여래와 이전 세존께서 세 번째로 결정한 청정하고 밝은 가르침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만일 훔치는 마음을 끊지 않고 선정을 닦는다면, 마치 어떤 사람이 새는 바가지에 물을 부어 채우려고 하나, 오랜 겁을 지내도 끝내 가득 채울 수 없는 것과 같으리라. 만일 비구들이 가사와 발우 외에 조금도 재물을 쌓아두지 않고, 얻은 밥을 남겨서 주린 중생에게 베풀거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합장하여 대중에게 예배하거나, 다른 사람이 때리고 욕해도 칭찬으로 받아들이면서, 반드시 몸과 마음을 다 버리고 몸과 살과 뼈와 피를 중생과 함께 하고, 여래의 불요의설(不了義說)을 자기 뜻대로 해석하여 초심자[初學]를 잘못 가르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사람을 인가하여 진정한 삼매를 얻었다고 하리라.  

  나의 이러한 말은 부처님의 말씀이며, 이와 다른 말은 파순(波旬)의 말이니라.

  아난아, 이러한 세계의 여섯 갈래 중생이 비록 몸과 마음이 살생과 투도와 음욕에서 벗어 나와 세 가지 행이 이미 원만할지라도, 만일 큰 거짓말[大妄語]을 자행하면, 삼마지(三摩地)가 청정하지 못하여 애욕과 사견의 마[愛見魔]로 변해서 여래의 종자를 잃게 되리라. 큰 거짓말이란 이른바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 하고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했다'고 부풀리는 말이니라.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기 위하여 앞사람에게 '나는 지금 수다원과(須陀洹果)와 사다함과(斯陀含果)와 아나함과(阿那含果)와 아라한도(阿羅漢道)와 벽지불승(辟支佛乘)과 십지지전(十地地前)의 제위보살(諸位菩薩)을 얻었노라'고 하면서, 상대에게 예배와 참회를 바라고 공양을 탐내는 행위이니라. 이 일천제[一顚迦]는 깨달음의 종자를 마치 칼로 다라 나무 베어내듯 소멸시켰으니, 나는 이런 사람을 '영원히 선근(善根)을 죽이고 더 이상 지견(知見)이 없어서, 3도(途)의 고해(苦海)에 잠기기만 할 뿐, 삼매를 이루지 못할 자'라고 단언하리라.  

  나는 보살과 아라한들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내가 열반한 뒤 응신(應身)으로 말법 세상에 태어나서 가지가지 형상을 나타내어 생사의 윤회에서 헤매는 중생을 제도하라. 때에 따라 사문(沙門)과 세속의 거사[白衣居士]와 왕[人王]과 재상[宰官]과 동남(童男)과 동녀(童女)로부터, 음녀(婬女)와 과부(寡婦)와 간사한 도둑[姦偸]과 백정[屠販]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여, 그들과 같은 일을 하고 불승(佛乘)을 찬양하여 그들의 몸과 마음을 삼마지(三摩地)에 들게 하라. 그러나 오직 임종할 무렵, 남몰래 유언할 때를 제외하고는 끝내 스스로 나는 진실한 보살이다. 진실한 아라한이다라고 말하여, 초심자[末學]에게 부처님의 밀인(密因)을 가볍게 누설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당부했으니, 어찌 이런 사람들이 중생을 어지럽게 미혹시키는 대망어(大妄語)를 저지르겠느냐.

  네가 세상 사람들을 교화하여 삼마지(三摩地)를 닦게 하려면 음욕과 살생과 투도 다음으로 또 온갖 대망어(大妄語)를 끊게 해야 한다. 이것이 이 여래와 이전 세존께서 네 번째로 결정한 청정하고 밝은 가르침이라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아난아, 만일 대망어를 끊지 않는다면, 마치 인분(人糞)을 깎아서 전단(栴檀)나무의 모양을 만들어 놓고 향내 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 행이니라. 나는 비구들에게 '곧은 마음이 바로 도량'이라고 가르쳐 왔기 때문에, 비구들은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일체 행에 조금도 허망한 거짓이 없는데, 어찌 위대한 사람의 법[上人法]을 얻었노라고 하겠느냐. 헐벗은 거지가 제왕(帝王)을 사칭하다가 스스로 죽음을 취하는 것과 같은데, 더욱이 어찌 감히 법왕(法王)의 이름을 훔치겠느냐. 수행의 첫 자리[因地]가 진실하지 못하면 과위(果位)도 구부러진 것을 부른다. 진실하지 못한 행으로 부처님의 보리를 구하려고 한다면 배꼽을 씹으려는 사람과 같으니, 무엇이 이뤄지기를 바라겠느냐.  

  만일 비구들의 마음이 활줄처럼 곧다면 일체가 진실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도 영원히 마의 장애가 없으리라. 나는 이 사람에게 '보살의 더없이 높은 깨달음[菩薩無上知覺]을 성취할 자라고 인가하리라.

  나의 이러한 말은 부처님의 말씀이며, 이와 다른 말은 파순(波旬)의 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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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7권

 

아난아, 네가 마음 거둬들이는 법을 물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먼저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서 닦고 배우는 묘한 문을 설했으니, 보살도(菩薩道)를 구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 네 가지 율의(律儀)를 얼음과 서리처럼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일체의 가지와 잎이 생길 수 없으니,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업과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이 생길 까닭이 없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네 가지 계율을 잃지 않고 지킨다면, 마음은 조금도 색(色)과 냄새[香]와 맛[味]과 촉감[觸]에 붙들리지 않을 텐데, 일체 마의 장애[魔事]가 어떻게 발생하겠느냐.  

  만일 묵은 습기를 없애지 못할 경우에는 너는 그 사람에게 일심으로 나의 불정광명(佛頂光明)에서 나온 마하살달다반달라무상신주(摩訶薩怛多般怛羅無上神呪)를 외우게 하라.  

  이는 이 여래의 무견정상무위심불(無見頂相無爲心佛)이 정수리로부터 빛을 놓고 보배 연꽃에 앉아서 설하신 마음의 주문이니라.

  또 너는 지난 세상에 마등가(摩登伽)와 여러 겁을 지내면서 인연을 맺어왔으니, 맺은 은혜와 사랑의 습기는 한 생이나 한 겁이 아니다. 그럼에도 마등가는 내가 한 번 선양한 주문으로 애욕에 얽힌 마음을 영원히 해탈하여 아라한(阿羅漢)이 되었다. 마등가는 오히려 음녀(婬女)로서 수행할 마음이 없었음에도, 은연중 신비한 힘이 안으로 감응하여 빨리 무학(無學)을 증득했으니, 어찌 너희들은 이 모임의 성문으로서 최상의 법을 구하여 성불(成佛)을 결정한 데 비기겠느냐. 비유하면 너희들은 마치 순풍에 티끌을 날리듯 순조로운데 무슨 어려움이 있다고 하겠느냐.

  만일 말세에 태어나서 도량에 앉고자 한다면, 먼저 비구의 청정한 금계(禁戒)를 지키면서 반드시 청정한 계행(戒行)이 가장 뛰어난 사문을 선택하여 스승을 삼아야 한다. 만일 참답게 청정한 스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네 계율의 위의[戒律儀]는 결코 성취하지 못하리라.

  계행(戒行)을 성취한 뒤에는 깨끗한 새 가사를 입고 향을 태우며 조용히 머물러서, 이 마음 부처님(心佛)이 설하신 신비한 주문을 일백팔 편 독송한 뒤에, 일정한 경계를 정하여[結界] 도량을 건립하고, 현재 시방국토에 계시는 더없이 훌륭한 여래들께 대비(大悲)의 광명을 놓아 이마에 비춰주시기를 원하라.

  아난아, 이렇게 말세의 청정비구와 비구니와 세속 신도[白衣檀越]가 마음속에 음행의 탐욕[貪婬]을 멸하여 부처님의 청정한 계율을 지니고, 도량 안에서 보살의 원을 일으켜 출입할 때마다 목욕하고 여섯 때에 도를 행하여 잠을 자지 않고 삼칠일(三七日)을 보낸다면, 나는 스스로 몸을 나타내어 그 사람 앞에 가서 이마를 만지며 위로하고 그를 깨우쳐 주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여래의 더없이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들어 마음은 이미 깨달아서 스스로 무학의 도를 닦고 증득하고 이루는 법을 알았으나, 말법(末法)의 수행자가 도량을 건립하려면 어떻게 수행의 경계를 정해야만 부처님의 청정한 법칙에 알맞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말세의 수행자가 도량을 세우고자 한다면, 먼저 설산(雪山)에서 비니향초(肥膩香草)를 먹고 자란 힘이 센 흰 소를 찾아야 한다. 이 소는 오직 설산(雪山)의 깨끗한 물만 마시기 때문에 그 똥이 미세하다. 그 똥을 취하여 전단(栴檀)과 섞어서 그 땅에 발라야 한다. 만일 설산(雪山)의 흰 소똥이 아니면, 그 소똥은 냄새가 더럽고 추해서 땅에 바를 수 없다. 또 따로 평원에서 땅 겉을 다섯 자쯤 파서 버리고 그 아래 황토를 취하여, 위의 전단(栴檀)과  

침수(沈水), 소합(蘇合), 훈육(薰陸), 울금(鬱金), 백교(白膠), 청목(靑木), 영릉(零陵), 감송(甘松), 계설향(雞舌香)과 섞을 때, 이 열 가지를 미세하게 갈아 가루로 만들고 황토와 합하여 짓이겨서 도량 세울 땅에 발라야 하느니라.  

  여기에 모나고 둥근 열여섯 자의 팔각단(八角壇)을 세워서, 단 복판에 금과 은과 동과 나무로 만든 한 연꽃을 두고, 그 연꽃 안에 발우를 놓고, 발우 속에 먼저 팔월의 이슬 물을 담아서, 이슬 물 속에는 그 시절 따라 있는 꽃과 잎을 두고, 여덟 개의 둥근 거울을 취해서 각각 그 모서리에 두어 꽃과 발우를 에워쌀 것이며, 거울 밖에는 열여섯 연꽃을 세우고, 꽃 사이마다 열여섯 향로를 놓아 향로로 장엄하고, 순전히 침수 향만을 태우되 불이 보이지 않게 하라.  

  또 흰 소의 젖[白牛乳]을 열여섯 그릇에 담아 놓고, 우유로 만든 전병(煎餠)과 온갖 사탕[諸砂糖]과 기름떡[油騈]과 젖 죽[乳糜]과 소합(蘇合)과 꿀 저린 생강[蜜薑]과 순소(純酥)와 순 꿀[純蜜]과 온갖 과자와 음식(飮食)과 포도(葡萄)와 벌꿀[石蜜] 등 여러 가지 맛이 뛰어나고 미묘한 음식을 연꽃 밖에 각각 열여섯 그릇씩 담아 놓고 연꽃 밖을 둘러싸서 모든 부처님과 훌륭한 보살들을 받들어라.

  언제나 식사 때는, 만일 밤이면 식사 때를 중야(中夜)에 맞추고, 꿀 반 되에 수(酥) 세 홉을 취해서 준비한 다음, 단 앞에 따로 작은 화로 하나를 놓고, 도루바향(兜樓婆香)을 달인 향 물[香水]로 그 숯들을 듬뿍 적셔서 불꽃이 맹렬히 타게 하고, 소(酥)와 꿀을 화로 안에 던져 연기가 없어질 때까지 태워서 불보살께 공양하여라.  

  그 사방 둘레에는 두루 기와 꽃을 달고, 단실(壇室) 안의 네 벽에는 시방 여래(十方如來)와 모든 보살들의 장식된 형상[所有形像]을 설치하되, 마땅히 정면[當陽]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과 미륵불(彌勒佛)과 아촉불(阿閦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차례로 모시고, 온갖 뛰어난 변화를 갖춘 관음보살의 형상과 함께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을 그 좌우편에 안치하고, 제석(帝釋)과 범왕(梵王)과 오추슬마(烏芻瑟摩; 火頭金剛)와 람지가(藍地迦: 淸面金剛)와 모든 군다리(軍茶利: 三目金剛)와 비구지(毘俱胝: 持鬘髻金剛)와 사천왕(四天王) 등과 빈나(頻那; 猪頭)와 야가(夜迦; 象鼻)를 문 옆 좌우로 안치하라.

  또 여덟 거울을 가지고 허공에 엎어 매달아 단 마당[壇場]에 둔 거울 면과 서로 마주하여 그 형상과 그림자를 겹겹이 서로 비치게 하라.

  첫 번째 칠일 동안은 지성으로 시방 여래와 훌륭한 보살들과 아라한들에게 정례하면서, 항상 여섯 때에 주문을 외우고 단을 돌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도를 행하되, 한 때에 항상 일백팔 번씩 행하도록 하라.

  두 번째 칠일 동안은 한결같이 온 마음을 기울여 보살 원을 일으켜서, 마음에 잠시도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 그 원(願)에 대한 가르침은 내가 미리 율장(律藏; 毘奈耶)에 설해두었으니 그대로 행하라.

  세 번째 칠일 동안은 십이시(十二時)에 한결같이 부처님의 반달라주(般怛羅呪)를 지송(持誦)하라.

  세 번째 칠일 마지막 날이 되면 시방 여래께서 일시에 출현하시니, 거울이 어울려 비치는 곳에서 부처님께서 이마를 만져주실 것이며, 이를 받들어 바로 도량에서 삼마지(三摩地)를 닦게 되리라. 일체 여래께서는 이와 같이 말세 수행자들의 몸과 마음을 유리처럼 밝고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아난아, 만일 이 비구의 본 수계사(受戒師)나 같은 모임의 열 비구 가운데, 한 비구라도 계행(戒行)이 깨끗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이러한 도량은 흔히 성취되지 않느니라.

  삼칠일(三七日)을 지낸 뒤 단정하게 앉아 편안히 머물러서 백일을 보내면, 뛰어난 근기[利根]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수다원(須陀洹)을 얻을 것이며, 비록 몸과 마음이 아직 거룩한 과위(果位)를 성취하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앞으로 틀림없이 결코 성불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리라. 네가 질문한 도량 건립은 이와 같으니라.  

  아난은 부처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출가한 뒤에도 부처님께서 귀여워 해주시리라 믿고 많이 듣고 아는 지식만을 구했기 때문에, 아직도 무위의 법[無爲]을 증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저 범천(梵天)의 사술(邪術)을 만나서 갇혔을 때도, 마음으로는 분명하게 알았으나 힘은 자유롭지 못했는데, 다행히 문수보살을 만나서 풀려났습니다.  

비록 여래의 불정신주(佛頂神呪)의 혜택을 입고 은연중 그 힘을 얻었다고 하나, 여태껏 직접 이 주문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부디 넓은 사랑으로 거듭 다시 설하셔서, 이 법회의 모든 수행자들을 가엾게 여겨 구제해주시고, 생사에 윤회할 미래 중생들도 부처님의 비밀한 법문[密音]을 받들어서 몸과 마음을 해탈케 하옵소서."

  그러자 일체 법회 대중은 두루 다 예를 올리고 여래께서 설하실 비밀장구(祕密章句)를 듣고자 하였다.  

  이 때 세존께서 정상의 육계(肉髻)에서 온갖 보배의 광명을 놓아 비추시자, 광명 가운데 천 잎의 보배 연꽃이 솟구쳐 나왔으며, 그 보배 연꽃에 앉아 계신 화신여래께서 정수리로 열 줄기의 온갖 보배의 광명을 놓으시니, 낱낱 광명마다 열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금강밀적(金剛密迹)이 두루 시현(示現)하여 산을 받쳐 들고 금강저(金剛杵)를 쥐고 허공계(虛空界)에 가득 찼다.

  대중들은 우러러 보고 두려움과 흐뭇함이 어울린 가운데 부처님께 불쌍히 여겨 도와주시기를 바라면서, 일심으로 부처님의 무견정상(無見頂相)의 광명에서 출현하신 화신 여래께서 설하시는 신비한 주문을 들었다.  

  다시 설하셔서, 이 법회의 모든 수행자들을 가엾게 여겨 구제해주시고, 생사에 윤회할 미래중생들도 부처님의 비밀한 법문[密音]을 받들어서 몸과 마음을 해탈케 하옵소서."

  그러자 일체 법회 대중은 두루 다 예를 올리고 여래께서 설하실 비밀장구(祕密章句)를 듣고자 하였다.  

  이 때 세존께서 정상의 육계(肉髻)에서 온갖 보배의 광명을 놓아 비추시자, 광명 가운데 천 잎의 보배 연꽃이 솟구쳐 나왔으며, 그 보배 연꽃에 앉아 계신 화신여래께서 정수리로 열 줄기의 온갖 보배의 광명을 놓으시니, 낱낱 광명마다 열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금강밀적(金剛密迹)이 두루 시현(示現)하여 산을 받쳐 들고 금강저(金剛杵)를 쥐고 허공계(虛空界)에 가득 찼다.

  대중들은 우러러보고 두려움과 흐뭇함이 어울린 가운데 부처님께 불쌍히 여겨 도와주시기를 바라면서, 일심으로 부처님의 무견정상(無見頂相)의 광명에서 출현하신 화신 여래께서 설하시는 신비한 주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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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디케스바라

 

                                     가나파티 사헤야

 

 

         크르탐비댬 친다야미 키라야미 나그나스라마나

         크르탐비댬 친다야미 키라야미 아르한타

         크르탐비댬 친다야미 키라야미 비타라가

         크르탐비댬 친다야미 키라야미 바즈라파니

         크르탐비댬 친다야미 키라야미 브라흐마크르탐

 

                                     루드라크르탐 나라야나

         크르탐비댬 친다야미 키라야미 바즈라파니 구햐카디파티

         크르탐비댬 친다야미 키라야미 랔사랔사맘 바가밤

 

                                     시타타파트라

 

 

         나모스투테 아시타나라르카

         프라바스푸타 비카시타타파트레

         즈바라즈바라 다카다카 비다카비다카

         다라다라 비다라비다라 친다친다

         빈다빈다 훔훔

         파트 파트

         스바하 헤헤 파트

         아모가야 파트

         아프라티하타야 파트

         바라프라다야 파트

         아수라비드라파카야 파트

         사르바 데베뱧 파트

         사르바 나게뱧 파트

         사르바 얔세뱧 파트

         사르바 랔사세뱧 파트

         사르바 가루데뱧 파트

         사르바 간다르베뱧 파트

         사르바 아수레뱧 파트

         사르바 킨다레뱧 파트

         사르바 마호라게뱧 파트

         사르바 부테뱧 파트

         사르바 피사체뱧 파트

         사르바 쿰반데뱧 파트

         사르바 푸타네뱧 파트

         사르바 카타푸타네뱧 파트

         사르바 두르람기테뱧 파트

         사르바 두스프렠시테뱧 파트

         사르바 즈바레뱧 파트

         사르바 아파스마레뱧 파트

         사르바 스라마네뱧 파트

         사르바 티르티케뱧 파트

         사르바 운맘데뱧 파트

         사르바 비댜차례뱧 파트

 

 

                자야카라 마두카라 사르바르타

 

                사다케뵤 비댜차례뱧 파트

                차투르바기니뱧 파트

 

 

         바즈라코마리 쿠란다리 비댜라제뱧 파트

 

         마하프라튱기레뱧 파트

         바즈라상카라야 프라튱기라라자야 파트

         마하카라야 마트르가나 나마스크르타야 파트

 

         인드라야 파트

         브라흐미니예 파트

         루드라야 파트

         비스나비예 파트

         비스네비예 파트

         브라흐미예 파트

         아그니예 파트

         마하카리예 파트

         로드리예 파트

         카라단디예 파트

         아인드리예 파트

         마트리예 파트

         차문디예 파트

         카라라트리예 파트

         카파리예 파트

         아디뭌토카스마사나 바시니예 파트

 

 

         예케칱타

         사트바 마마 두스타칱타

         파파칱타

         로드라칱타

         비드바이사 칱타

         아마이트라칱타

 

 

         우트파다얀티

         키라얀티

         만트라얀티

         자판티

         조한티

 

 

         우자하라

         가르바하라

         루디라하라

         맘사하라

         메다하라

         마자하라

         바사하라

         자타하라

         지비타하라

         마랴하라

         바랴하라

         간다하라

         푸스파하라

         파라하라

         사샤하라

 

 

         파파 칱타

         두스타 칱타

 

 

         데바그라하

         나가그라하

         얔사그라하

         랔사사그라하

         아수라그라하

         가루나그라하

         킨다라그라하

         마호라가그라하

         프레타그라하

         피사차그라하

         부타그라하

         푸타나그라하

         카타푸타나그라하

         쿰반다그라하

         스칸다그라하

         운마다그라하

         차야그라하

         아파스마라그라하

         다카다키니그라하

         레바티그라하

         자미카그라하

         사쿠니그라하

         난디카그라하

         람비카그라하

         칸타파니그라하

 

 

         즈바라 에카히카 드바이티야카

         트레티야카 차투르타가 니탸즈바라 비사마즈바라

         바티카 파이티카 스레스미카 산디파티카

         사르바즈바라 시로르티 아르다바베다카 아로차카

 

 

         앜시로감

         무카로감

         흐르드로감

         카르나수람

         단다수람

         흐르다야수람

         마르마수람

         파라스바수람

         프르스타수람

         우다라수람

         카티수람

         바스티수람

         우루수람

         잠가수람

         하스타수람

         파다수람

         사르방가프라튱가수람

 

 

         부타베타다 다카다키니

         즈바라다드루칸듀키티 바로타바이 사르파로하링가

         소사트라 사가라 비사요가 아그니 우다카

         마라베라 칸타라 아카라 므르튜

         트라이무카 트라이라타카

         브르스치카 사르파나쿠라 심하

         뱌그라 맄사 타라맄사

         차마라지비베 테삼 사르베삼

         시타타파트라 마하바즈로오스니삼

         마하프라튱기람 야바드바 다사요자나

 

 

         뱐타레나 사마반담 카로미

         디사 반담 카로미

         파라비댜 반담 카로미

         테조 반담 카로미

         하스타 반담 카로미

         파다 반담 카로미

         사르방가프라튱가 반담 카로미

 

 

         타댜타

         옴 아나레 아나레

         비사다 비사다

         반다반다 반다니반다니

         바이라바즈라파니 파트

         훔브룸 파트 스바하

 

 

         나모스타타가타야 수가타야르하테

         사먘삼붇다야 시댬투 반트라파다 스바하

 

 

 

 

1) Namas tath -sugat ya

2) arhate samyaksa buddh sya//

3) Nama sarva buddh ya

4) bodhisattvebhya //

5) Nama sapt n samyaksa buddha-ko n  

6) sa- r vaka-sa ghan //

7) Namo loke arhat n //

8) Nama srota-apann n //

9) Nam sakrid g min //

10) Namo loke samyaggat n //

11) Nama samyakpratipann s //

12) Namo devarishin //

13) Namah siddha vidy -dhar n //

14) Nama siddha vidhy -dhararishin  

15) p -anugrah -sam rth n //

16) Namo brahma e//

17) Namo indr ya//

18) Namo bhagavate

19) rudr ya

20) um pati-sahit ya//

21) Namo bhagavate

22) n r ya ya

23) pa camah sammudr //

24) Namas-krit ya//

25) Namo bhagavate mah -k l ya

26) tri-pura-nagara

27) vidr pa a-kar ya

28) adhimuktaka- ma na-v sine

29) m tri-ga //

30) Namas-krit ya//

31) Namo bhagavate tath gatakul ya//

32) Nama padma-kul ya//

33) Namo vajra-kul ya//

34) Namo ma i-kul ya//

35) Namo gaja-kul ya//

 

36) Namo bhagavate

37) dri ha- yra-sena

38) prahara a-r j ya

39) tath gat ya//

40) Namo bhagavate

41) amit bh ya

42) tath gat ya

43) arhate samyaksa buddh ya//

44) Namo bhagavate

45) akshobhya

46) tath gat ya

47) arhate samyaksa buddh ya//

48) Namo bhagavate

49) bhaishajya-guru-vaid rya

50) prabh -r j ya

51) tath gat ya

52) arhate samyaksa buddh ya//

53) Namo bhagavate

54) sa pushpita-s la-r j ya

55) tath gataya

56) arhate samyaksa buddh ya//

 

57) Namo bhagvate

58) khyamunaye

59) tath gat ya

60) arhate samyaksa buddh ya//

61) Namo bhagavate

62) ratna-kusuma

63) ketu-r j ya

64) tath gat ya//

65) arhate samyaksa buddhebhya //

66) Namaskrita im bhagav s

67) tath gatosh ish  

68) sir' tapatra//

69) Namo'parajit  

70) pratya gir //

71) Sarva bh ta·nigraha·karani

72) para·vidy ·chedani

73) ak la·mrityu

74) paritr ya a·kar  

75) sarva·bandha a·mokshana·kar //

76) sarava dush e

77) du svapna·niv ra i

78) catur·a t n  

79) graha·sahasr n  

80) vidhva sana·kar //

81) ash ·vi atin  

82) nakshatr n  

83) pras shana·kar ·ash n  

84) mah ·grah n  

85) vidha sana·kar .

86) sarva· atru·niv ra i

87) ghora

88) du svapna·n ana· an .

89) visha· astra

90) agni

91) udaka·uttarani//

92) Apar jit ·gura

93) mah ·bala·ca a

94) mah ·d pta

95) mah ·teja

96) mah · veta

97) jvala

98) mah ·bala

99) p ara·v sinl.

100) rya·t r .

101) bhrikut ·caiva·vijaya

102) vajra·m leti·vi ruta

103) paradamaka

104) vajra·jihv ·ca

105) m ra·caiva

106) apar jita

107) vajra·da i

108) vi al ·ca

109) nta·deva·p jita·saumi·r p  

110) mah · ri klala·(caiva).

111) rya·t r  

112) mah ·bala·apar  

113) vajra· ri klala·(caiva).

114) tath ·vajra·kaum r  

115) kulandhar .

116) vajra·hasta·(ca).

117) vidy  

118) k c na·m lika  

119) kusumbha·ratna

120) vairocana·kriya

121) arthosh ish  

122) vijrimbha·m l ·(ca).

123) vajra·kanaka

124) prabh ·locana

125) vajra·tund ·(ca).

126) veta·ca·kamal ksha

127) a i·prabh ·ityeti//

128) mudr ni·gana

129) sarve·raksh  

130) kurvantu·itt mam sya//

131) O rishi·ga a

132) pra astas

133) tath gata

134) ush ish //

135) H tr  

136) jambhana//

137) H tr  

138) stambhana//

139) H tr  

140) para·vidy ·sa bhakshanakara

141) H tr  

142) sarva·bush an  

143) stambhana·kara//

144) H tr  

145) sarva·yaksha

146) har kshasa grah n  

147) vihva sana·kara//

148) H tr  

149) catur·a n  

150) graha·sahasr n  

151) vidva sana·kara//

152) H tr  

153) ashta·vi satin  

154) nakshatr n  

155) pramardama·kara//

156) H tr  

157) raksha raksha//

 

158) bhagav s

159) tath gatosh isha

160) pratya gira//

161) Mah ·s hasra·bhuja

162) sahasra· irshe

163) ko i· ata·s hasra·netre

164) Abhedyajvalita·na ak  

165) mah ·vajrodara

166) tri·bhuvana

167) ma al //

168) O svastir.

169) bhavatu//

170) Itt mam sya//

171) R ja·bhaya

172) cora·bhaya

173) agni·bhaya

174) udaka·bhaya

175) visha·bhaya

176) astra·bhaya

177) para·cakra·bhaya

178) dur·bhiksha·bhaya

179) a ani·bhaya

180) ak la·mrityu·bhaya

181) adh ran ·bh mika ·bhaya

182) k p ta·bhaya

183) ulk ·p ta·bhaya

184) r ja·da a·bhaya

185) n ga·bhaya

186) vidyud·bhaya

187) supar i·bhaya//

188) yaksha·grah  

189) r ksha·grah  

190) preta·grah  

191) pi ca·grah  

192) bh ta·grah  

193) kumbh nda·grah  

194) p tan ·grah  

195) ka ap tan ·grah  

196) skanda·grah  

197) apasm ra·grah  

198) unm da·grah  

199) ch y ·grah  

200) revat ·grah //

201) jat' h ri yo

202) garbh' h ri yo

203) rudhir' h ri yo

204) m s' h ri yo

205) med' h ri yo

206) majj' h ri ya

207) ojoh ri yo

208) jivit' h ri yo

209) v t' h ri yo

210) v t' h ri a ucy· h rinya .

211) citt h ri yas//

212) tesh ·sarvesh  

213) sarva·grah n  

214) vidy  

215) chinday mi

216) Kilay mi//

217) Pariv·r jaka

218) krit vidy  

219) chinday mi

220) Kilay mi//

221) kin  

 

222) krit vidy  

223) chinday mi kilay mi//

224) Mah ·pa upati

225) Rudra

226) krit vidy  

227) chinday mi kilay mi//

228) N r ya a

229) krit vidy  

230) chinday mi kilay mi//

231) Tat v garu a

232) krit vidy  

233) chinday mi kilay mi//

234) Mah ·k la

235) m tri·ga a·krit vidy  

236) chinday mi kilay mi//

237) K p lika

238) krit vidy  

239) chinday mi kilay mi//

240) Jaya·kara

241) madhu·kara

242) sarv rtha s dhana

 

243) krit vidy  

244) chinday mi kilay mi//

245) Catur·bhagin .

246) krit vidya  

247) chinday mi

248) Kilay mi//

249) Bhri giri ika

250) nandik vara

251) ga a·pati

252) sah ya

253) krit vidy  

254) chinday mi

255) Kilay mi//

256) Nagna· r va a

257) krit vidy  

258) chinday mi

259) Kilay mi//

260) rhanta

261) krit vidy  

262) chinday mi

263) Kilay mi//

264) Vita·r ga(or vet la)

 

265) krit vidy  

266) chinday mi

267) Kilay mi//

268) Vajra·p a

269) vajra·p i

270) guhyaka

271) adhipati

272) krit vidy  

273) chinday mi kilay mi//

274) Raksha raksha m  

275) Bhagavan

276) Itta mam sya//

277) Bhagav s tath gatosh isha

278) sit' tapatre

279) mamo'astu·te//

280) Asita·anal ruka

281) prabh svata

282) vika·sit' ta

283) patre//

294) jvala·jvala

285) dara·dara

286) vidara·vidara

 

287) chinda·chinda//

288) H h  

289) pha pha pha

290) pha pha  

291) sv h //

292) He he pha  

293) Amogh ya pha  

294) apratihat ya·pha  

295) vara·prad ya·pha  

296) asura·vidr pa k ya·pha  

297) sarva·devebhya ·pha  

298) sarva·n gebhya ·pha  

299) sarva·yakshebhya ·pha  

300) sarva·gandharvebhya pha  

301) sarva asurebhya pha  

302) sarva garu ebhya pha  

303) sarva kinnarebhya pha  

304) sarva mahoragebhya pha  

305) sarva r kshebhya pha  

306) sarva manushebhya pha  

307) sarva amanushebhya pha  

308) sarva p tanebhya pha  

309) sarva ka a-p tanebhya pha  

310) sarva durla ghinebhya pha  

311) sarva dush a·prekshitebhya pha  

312) sarva jvarebhya pha  

313) sarva apasmarebhya pha  

314) sarva r vanebhya pha  

315) sarva tirthikebhya pha  

316) sarvonmadebhya pha  

317) sarva vidy r jacarebhya pha  

318) jaya-kara madhu-kara

319) sarva artha s dhakebhya pha  

320) vidy ·carebhya pha  

321) catur bh gin bhya pha  

322) vajra kaumar bhya pha  

323) vajra kulandaribhya pha  

324) vidy r jabhya pha  

325) mah ·pratya girebhya pha  

326) vajra· ri khal ya pha  

327) pratya gira r j ya pha  

328) mah ·k l ye pha  

329) mah m tri·ga ya pha  

330) namas krit ya pha  

331) vish aviye pha  

332) brahma iye pha  

333) agnaye pha  

334) mah k liye pha  

335) k la·da iye pha  

336) indr ya pha  

337) c mundiye pha  

338) rudr ya pha  

339) k la·r triye pha  

340) k p liye pha  

341) adhimuktage· ma na·v siniye pha  

342) iye k cit sattvas (mama itt mam sya)//

343) Dush a·citta  

344) raudra·citta  

345) oj' h ra

346) garbh' h ra

347) rudhir' h ra

348) m ms' h ra

349) majj' h ra

350) jat' h ra

351) jivit' h ra

352) baly· h ra

353) gandh' h ra

354) pushp' h ra

355) phal' h ra

356) sasy' h ra//

357) p pa·cita ·dush a·citta  

358) raudra·citta  

359) (rau)dra·citta yaksha·grah  

360) r ksha·grah n  

361) preta·grah pi ca·grah  

362) bh ta·grah  

363) ku bh a·grah  

364) skanda·grah  

365) unm da·grah  

366) ch y ·grah  

367) apasm ra·grah  

368) d ka·d kin ·grah  

369) revat ·grah  

370) jamik ·grah  

371) akuni·grah  

372) mantra·nandik ·grah  

373) la vik ·grah  

374) hanu·ka ha·p i·grah //

375) jvar ·ek hik ·dvait yak  

376) trit yak ·caturthak ·jvar  

377) nitya·jvar  

378) vishama·jvar  

379) v tik ·paittik  

380) le mik  

381) sannip tik  

382) sarva·jvar  

383) iro'rtti

384) ardh vabhedak //

385) akshi·roga  

386) mukha·roga  

387) hrid·roga //

388) gala· la  

389) kar a· la  

390) danta· la  

391) hridaya· la  

392) marma· la  

393) p r va· la  

394) prish ha· la  

395) udara· la  

396) ka i· la  

397) vasti· la  

398) ru· la  

399) ja gh · la  

400) hasta· la  

401) p da· la  

402) a ga·pratya ga· la //

403) bh ta·vet la

404) d kin .

405) jvar ·dadr ·ka u

406) ki bha·l t  

407) visarpa·loha·li ga

408) osha·tr sana·gara·visha·yoga

409) agni·udaka·m ra·v ra·ka aka

 

410) ak la·mrityu

411) try·ambuka·trail aka·bri cika

412) sarpa

413) nakula

414) si ha

415) vy ghra

416) riksha

417) tarakshu·camara·j va·tesh  

418) sarvesh , sarvesh  

419) sit' tapatra

420) mah ·vajra

421) ushnish ·mah ·pratya gir //

422) Y vad·dv da a·yojana

423) abhyantarena·vidy ·bandha ·karomi//

424) Tejo·bandha ·karomi

425) para·vidy ·bandha ·karomi//

426) Tadyath //

427) O  

428) anale·vi ada

429) vira

430) vajra

431) ari·bandha

432) vidhani

433) vajra·p i pha //

434) h  

435) tr  

436) sv h //

437) Au  

438) vir dhaka

439) sv h //

 

   

  위의 주문은 모두 439구(句)이다.

   

  아난아, 이 내 정수리의 광명 덩어리 실달다반달라(悉達多般怛羅) 비밀게송[祕密伽陀]의 미묘한 장구(章句)는 시방의 일체 부처님들을 출생시키느니라.

  시방 여래께서는 이 주문의 비밀심인[呪心]으로 더없이 높고 바르고 두루 아는 깨달음[無上正遍知覺]을 성취하시며, 시방 여래께서는 이 주문의 비밀심인(祕密心印)을 잡고 모든 마군을 항복시켜서 온갖 외도를 제압하시며, 시방 여래께서는 이 주문의 비밀심인을 타고 보배연꽃에 앉으셔서 티끌처럼 많은 국토에 응하시느니라.  

  시방 여래께서는 이 주문의 비밀심인을 머금어 티끌처럼 많은 국토에서 큰 법륜(法輪)을 굴리시며, 시방 여래께서는 이 주문의 비밀심인을 지니시어 능히 시방세계에서 정수리를 만져 수기를 내리시니, 자기 과위(果位)를 아직 성취하지 못한 행자는 시방 어디에서나 부처님의 수기를 받느니라.  

시방 여래께서는 이 주문의 비밀심인을 의지하여 시방(十方)에서 온갖 괴로움을 뽑아 건져주시니, 이른 바 지옥의 괴로움, 아귀의 괴로움, 축생의 괴로움, 눈 먼 괴로움, 귀 먹은 괴로움, 벙어리의 괴로움,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람끼리 서로 만나는 괴로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헤어지는 괴로움, 아무리 원해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 다섯 쌓임이 치성한 괴로움, 크고 작은 횡액의 괴로움들을 동시에 해탈하며, 도적의 난리, 군사의 난리, 왕 법의 난리, 감옥의 난리와, 바람의 재난, 불의 재난, 물의 재난과, 흉년들어 굶주리고 가뭄에 목마른 괴로움과 가난에 시달리는 괴로움들이 생각대로 소멸하느니라.  

  시방 여래께서는 이 주문의 비밀심인을 따라 시방에서 선지식(善知識)을 섬기며,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누울 때도 마음대로 공양하시므로,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여래께서는 모임 가운데서 큰 법왕자로 추천하시며, 시방 여래께서는 이 주문의 비밀심인을 행하시어 친한 이와 인연 있는 이를 거둬들이며, 소승들이 비밀법장[祕密藏]을 듣고도 놀라거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게 하시며, 시방 여래께서는 이 주문의 비밀심인을 외우시어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보리수에 앉으셔서 대열반에 드시느니라.  

  시방 여래께서는 이 주문의 비밀심인을 전하여 열반하신 뒤에 불법 일을 부탁하시어 끝까지 머물러 유지되게 하시고, 계율을 엄하고 깨끗이 하여 다 청정케 하시느니라.  

  만일 내가 이 부처님정수리의 광명덩어리 반달라주(般怛羅呪)의 공덕을 설한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성을 연이어 자구(字句)를 중간에 겹치지 않고,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겁을 지낼지라도 끝내 다 설할 수 없느니라.  

  또 이 주문의 이름을 여래정(如來頂)이라고도 한다. 너희들 유학이 아직 윤회를 다 벗어나지 못하고 발심해서 지성으로 아라한이 되려고 하면서, 이 주문을 외우지 않고 도량에 앉아서 몸과 마음이 온갖 마군의 장애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아, 만일 모든 세계의 여러 국토에 있는 중생들이 그 나라에서 나는 자작나무 껍질[樺皮]이나 패엽(貝葉)이나 종이나 흰 천[白疊]에 이 주문을 쓰고 베껴서 향주머니에 넣어 두거나, 이 사람의 마음이 어두워서 외울 수 없을 경우,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집안에 써둔다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의  

일생 동안에는 온갖 독이 해칠 수 없느니라.  

  아난아, 나는 이제 너를 위해서 다시 또 이 주문으로 세상을 구호하여 두려움이 없는 큰 법을 얻고, 중생에게 출세간의 지혜를 성취시키는 공덕을 말하리라.  

  만일 내가 열반한 뒤에 말세중생이 자신이 외우면서 남에게 외우게 한다면,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외어서 지니는 중생은 불이 태울 수 없고 물이 빠트릴 수 없고 코고 작은 독이 해칠 수 없으며, 이와 같이 용과 하늘과 귀신과 정령의 토지 신[精祇]과 악마의 도깨비[魔魅]들이 가지고 있는 나쁜 주문까지도 다 범접할 수 없느니라.  

  또 이 주문은 마음에 삼매를 얻게 하므로, 일체의 저주[呪詛]와 양밥의 독벌레[厭蠱]와 독약(毒藥)과 금독(金毒)과 은독(銀毒)이며, 풀, 나무, 벌레, 뱀 등 만물의 독기(毒氣)들이 이 사람의 입에 들어가면 감로(甘露)의 맛으로 변하느니라

  일체의 나쁜 별과 온갖 귀신들과 마음속에 독을 품은 사람일지라도, 이와 같이 주문을 지닌 사람에게는 악을 일으킬 수 없으며, 빈나(頻那)와 야가(夜迦)의 온갖 귀신 왕과 그 권속들은 모두 이 주문에 깊은 은혜를 입고 항상 더욱 수호하느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주문에는 항상 팔만사천나유타항하사구지(八萬四千那由他恒河沙俱胝)의 금강장왕보살(金剛藏王菩薩) 종족이 있어서, 그 들 낱낱이 권속으로 거느린 금강신중들이 밤낮으로 따라다니면서 모시느니라.  

  가령 어떤 중생이 마음이 산란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들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여 입으로 외울지라도, 이 금강왕(金剛王)들은 언제나 저 선남자들을 따라다니는데, 더욱이 어찌 보리의 마음을 결정한 사람이겠느냐. 금강보살장왕(金剛菩薩藏王)들이 정교한 마음으로 가만히 빠르게 저 결정한 사람의 신비한 식[神識]을 일깨우면, 이 사람은 즉시 마음에 팔만사천항하사겁(八萬四千恒河沙劫)의 일을 기억하여 두루 분명히 알고 아무 의혹이 없게 되느니라.  

  주문을 시작한 제일 겁으로부터 최후의 몸[後身]을 받을 때까지 태어날 때마다 약차(藥叉)와 나찰(羅刹)과 부단나(富單那)와 가타부단나(迦吒富單那)와 구반다(鳩槃茶)와 비사차(毘舍遮)들과 모든 아귀(餓鬼)와 형상이 있는 것과 형상이 없는 것과 생각이 있는 것과 생각이 없는 것 등 이와 같은 나쁜 곳에 태어나는 일이 없느니라.  

  이 선남자가 읽거나 외우거나 쓰거나 베끼거나 휴대하거나 갈무리하거나 여러 가지 색(色)으로 공양하면, 태어나는 겁(劫)마다 가난하고 헐벗고 낮고 천해서 좋아할 수 없는 곳에 태어나지 않느니라.

  이 모든 중생이 비록 그 자신이 복을 짓지 못했을지라도, 시방 여래께서 지니신 공덕을 다 이 사람에게 주시니, 이 공덕으로 항하사 아승기 불가설 불가설 겁 동안 항상 모든 부처님과 한 곳에 같이 태어나게 되며, 이 한량없는 공덕으로 여럿이 함께 나서 자라는 악차(惡叉)열매 덩어리처럼 같은 곳에서 수행하며 영원히 헤어지는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 주문은 파계(破戒)한 사람에게는 계의 근본을 청정케 하고, 계를 얻지 못한 사람에게는 계를 얻게 하며, 정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정진하게 하고, 지혜 없는 사람에게는 지혜를 얻게 하며, 청정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빨리 청정한 몸을 얻게 하고, 재계(齋戒)를 지니지 못한 사람에게는 스스로 재계를 지니게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이 주문을 지닐 때에는, 가령 주문을 수지하기 전에 금계(禁戒)를 범했을지라도, 주문을 지닌 뒤에는 온갖 파계 죄는 가볍고 무거움을 가리지 않고 일시에 소멸하며, 비록 술을 마시고 오신채(五辛菜) 등 가지가지 부정(不淨)한 음식을 먹고 지냈을지라도, 일체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금강과 하늘과 신선과 귀신(鬼神)들은 그것을 잘못으로 여기지 않는다. 또 가령 터지고 헤진 부정한 옷을 입었을지라도, 한 번 행하고 한 번 머무는 모습이 모두 한결같이 청정하며, 또 비록 단을 만들지 않고 도량에 들어가지 않고 도를 행하지 않을지라도, 이 주문을 지니고 외우면 단에 들어가서 도를 행한 공덕과 전혀 다르지 않느니라.

  가령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5역중죄(逆重罪)를 지었거나 모든 비구 비구니의 4바라이죄[四棄]와 8바라이죄[八棄]를 범했을지라도, 이 주문을 외우고 나면 이러한 무거운 업도 사나운 바람이 모래더미를 불어 흩어버리듯 모두 다 사라져서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느니라.

  아난아, 가령 어떤 중생이 헤아릴 수 없는 오랜 겁의 일체 가볍고 무거운 죄와 업장을 지난 세상에 참회하지 못했을지라도, 만일 이 주문을 읽고 외우고 쓰고 베껴서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혹은 살고 있는 전원주택이나 정원관사에 모신다면, 이와 같이 쌓인 업장은 끓는 물에 눈 녹듯 사라져서 오래지 않아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으리라.  

  또 아난아, 가령 어떤 여인이 아들과 딸을 낳지 못하여 아기 베기를 원하여, 만일 지극한 마음으로 이 주문을 간절히 생각하며 염송(念誦)하거나 혹은 이 실달다반달라(悉怛多般怛羅)를 몸에 지니고 다닌다면, 곧바로 복덕과 지혜를 갖춘 아들과 딸이 태어나느니라. 장수[長命]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빠르게 장수를 얻고, 과보(果報)를 구하여 빨리 원만하게 이뤄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빠르게 원만함을 얻으며, 몸[身]과 생명[命]의 건강[色]과 힘[力]을 원하는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죽은 뒤에 소원을 따라 시방국토에 태어날 때에도, 결코 변두리의 천박한 종족으로 태어나지 않을 텐데, 더욱이 어찌 잡된 형상을 받겠느냐.

  가령 모든 국토의 큰 고을과 작은 고을과 촌락에서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고, 혹은 군사의 난리와 도적난리가 일어나고 투쟁이 벌어지거나, 그 외에 일체 재난이 발생한 곳일지라도, 이 신비한 주문을 베껴서 성의 네 문에 붙이든지, 공양하는 곳[支提]에 모시든지, 혹은 깃대[脫闍]에 달아 올려서, 그 국토 중생들에게 이 주문을 받들어 맞이하게 하고 예배 공경하여 일심으로 공양케 하고, 그 백성들이 각기 몸에 차기도 하고 혹은 각기 살고 있는 집에 모시게 한다면, 일체 재앙[災厄]이 모두 다 소멸하느니라.  

  아난아, 가는 곳곳마다 그 국토 중생들이 이 주문을 따라 행하면, 하늘과 용들이 기뻐하니, 바람과 비가 때에 맞춰 순조로워지고 다섯 가지 곡식이 풍성하게 넘치고, 만 백성은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느니라. 뿐만 아니라 일체 나쁜 별들이 곳을 따라 나타내는 괴변(怪變)을 진압하여, 재앙의 장애가 일어나지 않으니, 사람들은 횡액이나 요절[橫夭]을 당하는 일이 없고, 칼과 고랑으로 그 몸을 묶는 일도 없고, 밤과 낮이 편안하여 잠잘 때도 나쁜 꿈이 없느니라.  

아난아, 이 사바세계에는 재앙의 괴변을 일으키는 8만 4천의 나쁜 별들이 있으니, 그 가운데 스물여덟 개의 나쁜 별들이 우두머리며, 또 그 가운데 여덟 개의 나쁜 별이 최고 으뜸이니라. 이 별들이 가지가지 형상을 지어 세상에 나타날 때는, 중생들에게 가지가지 재앙과 이변을 일으키고 있으나, 이 주문이 있는 땅에서는 모두 다 소멸되며, 12유순(由旬)의 도량 경계가 정해진 땅[結界地]에는 온갖 나쁜 재앙이 영원히 들어갈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래가 이 주문을 선양하여 보이는 까닭은, 미래세상에서 처음 배우는 모든 수행자들을 보호하여, 수행자들이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이 태연하여 크게 안온한 경지를 얻고, 더 이상 일체 온갖 마군과 귀신과 시작 없는 오랜 겁 동안 맺어 온 원한의 횡액과 지난 세상의 재앙과 옛 업의 묵은 빚이 부딪쳐 서로 괴롭히고 해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니라.  

  너와 대중 가운데 유학(有學)들과 미래 세상의 모든 수행자들이 내가 설한 도량설치 법[壇場]에 의지하여, 법대로 계를 지니고 청정한 전계사(傳戒師)를 만나서 이 주문의 비밀심인(祕密心印)을 지닌다면, 의심하고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 그러고도 이 선남자가 부모에게 받은 몸으로 마음을 통달하지 못한다면, 시방 여래의 말씀은 곧바로 허망한 말[妄語]이 되리라."

  부처님께서 이 설법을 끝내시자, 법회의 한량없는 백 천의 금강들이 일시에 부처님 앞에 합장하여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저희들은 당연히 성심으로 이와 같이 보리를 닦는 사람들을 보호하겠습니다."

  이 때 범천왕(梵天王)과 제석천왕(帝釋天王)과 사천왕들도 부처님 앞에 동시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닦고 배우는 좋은 사람들을 잘 살펴서 마땅히 온 마음을 기울여 지성으로 보호하여 일생 동안 닦는 일이 원대로 이뤄지게 하겠습니다."

  또 한량없는 약차대장(藥叉大將)과 나찰왕(羅刹王)과 부단나왕(富單那王)과 구반다왕(鳩槃茶王)과 비사차왕(毘舍遮王)과 빈나(頻那)와 야가(夜迦)와 큰 귀신왕[大鬼神王]들과 귀신 장수들도 부처님 앞에 합장하여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아뢰었다.

  "저희들도 서원을 세워서 이러한 사람들을 보호하여 보리의 마음이 빨리 원만하게 이뤄지도록 하겠습니다."

  또 한량없는 일월천자(日月天子)와 풍사(風師)와 우사(雨師)와 운사(雲師)와 뇌사(雷師)와 아울러 전백(電伯) 등과 연세순관(年歲巡官)을 맡은 모든 별의 권속들도 법회 가운데서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도 이러한 수행자들을 보호하여 도량을 안전하게 세우는데 두려운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또 한량없는 산신(山神)들과 해신(海神)들과 일체 토지신(土地神)들과 물과 육지와 허공에 다니는 만물의 정기(精祇)들과 풍신왕(風神王)과 무색계천(無色界天)들이 여래 앞에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도 이러한 수행자들을 보호하여 보리를 성취할 때까지 영원히 마군의 장애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 때 법회에 있는 8만 4천 나유타항하사구지금강장왕보살(那由他恒河沙俱胝金剛藏王菩薩)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닦은 공덕은 오래 전에 보리를 성취할 수 있었지만 열반에 들지 않고, 항상 이 주문을 따라 다니면서 말세의 삼마제(三摩提)를 닦는 바른 수행자를 구호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마음을 닦아서 삼매[正定]를 얻으려는 사람들이 가령 도량(道場)에 있거나 나다니거나 심지어 마음이 흩어져 촌락에서 놀지라도, 저희들 무리는 항상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을 모시고 지킬 것입니다. 비록 마왕이나 대자재천(大自在天)이 방편을 찾아 해치려고 할지라도 끝내 찾을 수 없도록 할 것이며, 온갖 작은 귀신들 가운데 발심하여 즐겁게 선정을 닦는 자를 제외한 그 나머지는 이 뛰어난 사람들과 10유순(由旬) 밖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악마(惡魔)와 악마의 권속들이 이 훌륭한 사람을 침범하여 흔들려고 한다면, 저희들은 보배의 금강저(金剛杵)로 그 머리를 쳐 부셔서 가루[微塵]처럼 만들고 항상 이 사람이 닦는 일이 원대로 이뤄지게 하겠습니다."  

  아난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이 우둔해서 많이 듣고 아는 지식만을 좋아하여 온갖 번뇌의 마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들어 바르게 닦는 길을 알게 되니, 몸과 마음이 시원하게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부처님의 삼마제(三摩提)를 닦고 증득하여 열반에 이르기 전까지 그 사이 어떤 것을 이름하여 간혜지(乾慧地)와 44심(心)이라고 하며, 어느 정도 차례로 닦아야만 수행자란 명목을 얻겠습니까. 또 어느 곳[方所]까지 나아가야 지(地) 가운데 들어갔다고 하며, 어떤 경지를 등각보살(等覺菩薩)이라고 합니까."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난은 온몸을 땅에 엎드려 대중과 함께 일심으로 부처님의 자비한 말씀을 기다리면서 눈을 바로 뜨고 집중하여 부처님을 우러러 보았다.

  이 때 세존께서 아난을 칭찬하시며 말씀하셨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다. 너희들은 널리 지금의 대중과 말세에 삼마제를 닦아 대승을 구할 일체중생을 위하여, 범부에서 대열반에 이를 때까지 미리 더 없는 바른 수행의 길을 보여 달라고 하니, 너희들은 이제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설하리라."

  아난과 대중은 마음을 비우고 합장하여 묵묵히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묘한 성품은 원만하게 밝아서 온갖 이름과 모양을 떠났음으로 본래 세계와 중생이 없으나, 허망으로 인하여 생겨남[生]이 있고 생겨남으로 인하여 사라짐[滅]이 있으니, 생겨남과 사라짐을 허망이라 하며, 허망이 사라진 것을 진실이라고 한다. 이를 여래의 무상보리(無上菩提)와 대열반의 둘이 서로 의지하여 구르는 법[二轉依號]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네가 이제 진실한 삼마제를 닦아서 바로 여래의 대열반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한다면, 먼저 마땅히 이 중생과 세계의 두 가지 뒤바뀐 원인을 알아야 한다. 뒤바뀜이 생기지 않으면 이것이 여래의 진실한 삼마제니라.

  아난아, 중생의 뒤바뀜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성품이 밝은 마음은 성품의 밝음이 원만하기 때문에 밝음으로 인해서 성품이 일어나고 성품에서 허망한 보는 작용이 생기니, 끝까지 없는데서[畢竟無] 끝까지 존재하는 것[究竟有]이 이뤄졌느니라. 이 존재 자체[有; 能有, 煩惱]와 존재의 대상[所有; 業]은 원인 자체[因; 能因, 業]도 원인의 대상[所因; 煩惱]도 아니며, 머무는 자체[住; 能住, 業]와 머무는 대상[所住; 煩惱]의 모양도 전혀 근본이 없는데, 이 머묾이 없는 모양[無住]을 바탕으로 세계와 온갖 중생이 세워졌느니라.

  본래의 원만한 밝음을 미혹하여 허망이 생겼으니, 허망한 성질은 자체가 없으며 의지할 대상이 있지 않느니라. 오히려 진실을 회복하고자 하여 진실 하려고 해도, 이미 진실한 진여의 성품이 아닌데, 진실이 아닌 것으로 회복하기를 구하면 완전히 잘못된 모양을 이루느니라. 잘못된 생겨남과 잘못된 머무름과 잘못된 마음과 잘못된 법이 연달아 발생하고, 생기는 힘이 환하게 열려서 훈습하여 업을 이루어 같은 업을 서로 받고, 받는 업[感業]이 있음에 따라 서로 멸하고 서로 나니, 이로 인해서 중생의 뒤바뀜이 있느니라.  

  아난아, 세계의 뒤바뀜이란 무엇이겠느냐. 이 존재 자체[有]와 존재의 대상[所有]으로 분단생사[分段; 分段生死]가 허망하게 생기니, 이로 인하여 계(界)가 세워졌느니라. 원인 자체[因]도 원인의 대상[所因]도 아니고, 머무는 자체[住]도 머무는 대상[所住]도 없어서, 옮기고 흘러 머물지 않으니, 이로 인하여 세(世)가 세워졌느니라. 이렇게 3세와 4방이 화합하고 서로 밟아서, 변화하는 중생이 열 두 종류가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세계는 움직임으로 인하여 소리가 있고 소리를 따라 물질[色]이 있으며, 물질을 따라 냄새[香]가 있고 냄새를 따라 감촉[觸]이 있으며, 감촉을 따라 맛[味]이 있고 맛을 따라 법(法)을 알면서 여섯 가지 어지러운 망상(妄想)이 업의 성질을 이루기 때문에 열두 종류로 나눠지니[十二區分], 이로 인하여 굴러다니느니라. 그래서 세간의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 등이 열둘의 변화를 다하면서 한 바탕 휘도느니라.  

  이 윤회하는 뒤바뀐 모양을 타서 구르기 때문에, 세계에는 알로 나는 중생과 태로 나는 중생과 습한데서 나는 중생과 변화하여 나는 중생과 색이 있는 중생과 색이 없는 중생과 생각이 있는 중생과 생각이 없는 중생과 색이 있지도 않는 중생과 색이 없지도 않는 중생과 생각이 있지도 않는 중생과 생각이 없지도 않는 중생이 있느니라.

  아난아, 세계에서 허망한 생각을 따라 윤회[虛妄輪迴]하는 흔들림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기(氣)와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날아다니거나 잠기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알의 갈라람(羯邏藍)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고기와 새와 거북과 뱀의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잡된 오염을 따라 윤회[雜染輪迴]하는 애욕[欲]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불려 기르는 양분[滋]과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기거나[橫] 서기를[竪]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태의 알포담(遏蒲曇)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사람과 축생과 용과 신선의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집착을 따라 윤회[執着輪迴]하는 향하여 나감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따뜻함과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뒤집히고 엎어지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축축한 모양의 폐시(蔽尸)가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우물거리고 쭈물거리고 꿈틀거리고 움직거리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변하여 바뀜을 따라 윤회[變易輪迴]하는 거짓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촉감과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묵은 것을 새 것으로 바꾸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변화하는 모양의 갈남(羯南)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허물을 벗고 날아다니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막힘과 걸림을 따라 윤회[留礙輪迴]하는 장애[障]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밝음[著]과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정밀하게 비추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색이 있는 모양의 갈남(羯南)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길한 별[休]과 흉한 별[咎]과 정기가 밝은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스러져 흩어짐을 따라 윤회[消散輪迴]하는 미혹[惑]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어둠과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어둠 속에 숨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색이 없는 갈남(羯南)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허공에 흩어지고 스러져 잠기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형체 없는 그림자를 따라 윤회[罔象輪迴]하는 그림자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기억[憶]과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속으로 몰래 맺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생각이 있는 모양의 갈남(羯南)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신(神)과 귀(鬼)와 정령(精靈)의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우둔함을 따라 윤회[愚鈍輪迴]하는 어리석음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완고함과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바싹 마르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생각이 없는 갈남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정신(精神)이 화하여 흙과 나무와 쇠와 돌이 되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서로 기댐을 따라 윤회[相待輪迴]하는 허위[僞]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오염[染]과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서로 기대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색의 모양이 있지 않으면서 색을 이룬 갈남(羯南)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온갖 해파리 등이 새우의 눈을 빌리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서로 이끌어 들임을 따라 윤회[相引輪迴]하는 성질[性]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주술(呪術)과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불러들이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색상이 없지 않으면서 색이 없는 갈남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저주(詛呪)와 양밥[厭生]으로 남을 해치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거짓과 어울림을 따라 윤회[合妄輪迴]하는 속임수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다른 성질과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돌려 짜 맞추기를 어지럽게 생각하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생각의 모양이 있지 않으면서 생각을 이룬 갈남(羯南)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저 나나니벌처럼 다른 성질을 서로 이루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세계에서 원한의 해침을 따라 윤회[寃害輪迴]하는 죽임의 뒤바뀜이 있기 때문에, 괴이한 성질과 화합을 이룬 8만 4천의 무리가 부모를 잡아먹는 것으로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생각의 모양이 없지 않으면서 생각이 없는 갈남이 국토에 흐르고 굴러서, 흙덩이를 품고 자식을 만드는 토효(土梟)와 독 나무의 열매를 품고 자식을 만드는 파경조(破鏡鳥)처럼 자식이 자라서 부모를 잡아먹는 종류가 가득 차느니라.  

  이것을 12류 중생이라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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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8권

   

   

아난아, 이러한 중생은 낱낱 종류 가운데 각각 열두 가지 뒤바뀜을 갖췄으니, 마치 눈을 눌렀을 때 어지러운 꽃이 발생하는 것과 같다. 미묘하고 원만하고 진실하고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 뒤바뀌어 이와 같이 허망한 어지러운 생각을 갖춘 것이니라.

  네가 이제 부처님의 삼마제(三摩提)를 닦아서 증득하려면, 이 근본 원인이 되는 원래의 어지러운 생각에, 세 가지 차례로 닦는 방편[三漸次]을 세워야만 비로소 없앨 수 있느니라.

  그릇 속에서 독한 꿀을 제거하려면 끓는 물과 재 섞인 향료로 그릇을 씻어내야만 감로(甘露)를 담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세 가지 점차(漸次)란 무엇이겠느냐. 첫째는 수습(修習)으로서 그 돕는 원인을 제거하는 행이고, 둘째는 진실한 수행으로서 근본 성품[正性]을 뽑아내는 행이며, 셋째는 증진하는 법으로서 현재의 업을 어기는 행이니라.

  무엇을 돕는 원인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이러한 세계의 12류 중생은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고 네 가지 음식으로 살아간다. 이른 바 단식(段食)과 촉식(觸食)과 사식(思食)과 식식(識食)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설하시기를 '일체중생은 다 음식을 의지하여 살아간다'고 하셨다.  

  아난아, 일체중생은 맛난 음식을 먹으면 살고, 독을 먹으면 죽는다. 그러므로 중생이 삼마제를 닦으려면 마땅히 세간의 다섯 가지 매운 채소[五種辛菜]를 끊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매운 채소는 익혀서 먹으면 음욕을 일으키고 생으로 먹으면 노여움을 돋우느니라. 이렇게 매운 채소를 먹는 세상 사람이 비록 12부경(部經)을 잘 설할지라도, 하늘과 신선은 그 더러운 냄새를 싫어하여 다 버리고 멀리 떠나느니라. 또 매운 채소를 먹을 때는 굶주린 귀신[餓鬼]들이 그 입술을 핥음으로, 항상 귀신들과 더불어 사는 격이니, 복덕(福德)이 날로 소멸하여 영원히 이익이 없느니라.  

  또 이 매운 채소를 먹는 사람이 삼마지(三摩地)를 닦을지라도, 보살과 하늘과 신선과 시방의 좋은 신들은 와서 수호하지 않으니, 힘센 마왕(魔王)이 그 방편을 얻고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하면서 금계(禁戒)를 비방하여 헐고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婬怒癡]을 찬양하느니라. 이러한 사람은 죽은 뒤에 스스로 마왕의 귄속(眷屬)이 되었다가, 마의 복을 다 받고 나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느니라.  

  아난아, 보리를 닦는 사람은 영원히 다섯 가지 매운 채소를 끊어야 한다. 이것이 첫째 증진수행의 차례[第一增進修行漸次]이니라.

  무엇을 근본 성품[正性]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중생이 삼마지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먼저 청정한 계율을 엄하게 지키면서, 영원히 음욕심(婬欲心)을 끊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아야 하며, 음식을 불로 잘 익혀 조리해서 먹어야 하고, 날것으로 먹지 않아야 한다.  

  아난아, 수행자가 음욕과 살생을 끊지 않고 삼계(三界)를 뛰어넘으려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니, 마땅히 음욕을 잘 살펴서 독사처럼 여기고 원수처럼 보아야 한다. 먼저 성문(聲聞)의 4기(棄;波羅夷)와 8기(棄)를 잘 지켜서, 몸을 단속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고, 뒤에 보살의 청정한 율의(律儀)를 행하여 마음을 단속해서 일어나지 않게 하여라. 금계(禁戒)를 성취하면, 세상에 서로 태어나고 서로 죽이는 업이 영원히 없어지며, 도둑질과 겁탈을 행하지 않으면, 서로 허물을 짊어질 일이 없고, 세간에서 묵은 빚을 갚을 일도 없느니라.  

  이와 같이 청정한 사람이 삼마지를 닦으면, 부모에게 받은 육신으로 천안통(天眼通)을 구하지 않고도, 자연히 시방세계를 관찰하게 되며,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듣게 되며, 친히 거룩한 뜻을 받들어 큰 신통을 얻고, 시방세계를 마음대로 유행하며 지난 세상의 일[宿命]이 청정하니, 어려운 일이 없느니라. 이를 둘째 증진수행의 차례라고 하느니라.

  무엇을 현재의 업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이렇게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마음에 음욕을 탐내지 않으니, 바깥 여섯 경계[六塵]에 그다지 방탕하게 흐르지 않으며, 방탕하게 흐르지 않기 때문에 근원을 돌이켜 스스로 돌아가느니라. 경계[塵]를 이미 인연하지 않고 감관[根]이 짝할 상대가 없으며, 흐름을 돌이켜 유일한 진실이 완전하여 여섯 작용이 행하지 않으므로, 시방국토가 밝고 맑아서, 유리 안에 밝은 달이 달린 것과 같으리라. 그러면 몸과 마음이 시원하고 미묘하고 원만하고 평등하여 매우 안온한 경지에 들어서, 일체여래의 원만하고 청정하고 미묘하고 비밀한 도리가 다 그 속에 나타나니, 이 사람은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게 되며, 이로부터 차례로 닦는 가운데 곳에 따라 수행을 일으켜서 안전하게 성인의 자리에 들게 되느니라. 이를 셋째 증진수행의 차례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애욕이 말라서 감관과 경계가 짝을 맺지 않음으로 현재의 몸을 다하고 나서 더 이상 계속 태어나는 일이 없으며, 집착한 마음이 비고 밝아서 지혜가 순수하고, 지혜의 성품이 밝고 뚜렷하여 시방세계를 비추는 가운데, 애욕의 습기가 말라서 생긴 지혜를 간혜지(乾慧地)라고 한다. 이 지혜는 애욕의 습기가 처음 말랐을 뿐, 아직은 여래의 법이 흐르는 물과 닿지 않았느니라.  

  곧 이 마음으로 가운데[中; 乾慧觀心中]에서 가운데[中; 中道直觀]로 흘러 들어가면, 원만하고 미묘한 경지가 환하게 열려서, 진실하고 미묘하고 원만한 경계로부터 더욱 진실하고 미묘한 경계가 발생하여 미묘한 믿음이 영원히 머물러서, 일체의 망상이 남김없이 멸하여 다한 가운데, 중도가 순수하고 진실한 자리를 신심주(信心住)라고 한다.

  진실한 믿음이 환하게 밝아서 일체를 원만하게 통달하여, 5음(陰)과 12처(處)와 18계(界)의 장애를 받지 않으며, 이와 같이 나아가 과거와 미래의 한량없는 겁 동안 몸을 버리고 몸을 받은 일체 습기가 다 앞에 나타나서, 이 선남자가 다 잘 기억하여 잃거나 잊지 않는 자리를 염심주(念心住)라고 한다.

미묘하고 원만한 경계가 순수하고 진실하여 진실한 정기가 변화를 일으켜, 시작 없는 겁의 습기가 하나로 통하여 정교하게 밝아서, 오직 정교한 밝음이 진실한 청정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자리를 정진심(精進心)이라고 한다.

  마음의 정진이 앞에 나타나서 순전히 지혜만 작용하는 자리를 혜심주(慧心住)라고 하며, 지혜의 밝음을 그대로 유지해서 두루 고요하고 맑은 가운데 고요하고 미묘함이 항상 엉기는 자리를 정심주(定心住)라고 하며, 선정의 빛이 밝음을 일으키고 밝은 성품이 깊이 들어가서 오직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나지 않는 자리를 불퇴심(不退心)이라고 한다.

  마음의 정진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여 잃지 않고 시방 여래의 기분(氣分)과 어울려 닿는 자리를 호법심(護法心)이라고 한다.

  깨달음의 밝음을 보호하여 유지하고 묘한 힘으로 부처님의 자비한 빛을 돌이켜서, 부처님을 향하여 편안히 머무는 능력이, 마치 두 거울의 광명이 마주하여 그 가운데 묘한 그림자가 겹겹이 서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자리를 회향심(迴向心)이라고 하느니라.

  마음의 빛을 은밀히 회향하여 부처님의 변함없이 엉긴 더없이 묘한 맑음을 얻고 무위(無爲)의 경지에 편안히 머물러 잃지 않는 자리를 계심주(戒心住)라고 한다.

  계(戒)에 자재하게 머물러 시방을 유행하면서 소원 따라 가는 자리를 원심주(願心住)라고 한다.  

  아난아, 이 선남자가 진실한 방편으로 이 열 가지 믿는 마음을 일으켜서 마음의 정기가 빛을 발하여 열 가지 작용을 밟아 들어가서 원만하게 한 마음이 된 자리를 발심주(發心住)라고 한다.

  마음 가운데서 밝음을 일으킴이 마치 깨끗한 유리 안에 정교한 황금이 나타나듯, 앞의 묘한 마음으로 밟아서 경지[地]를 다져 성취한 자리를 치지주(治地住)라고 한다.  

  마음과 경지가 서로 통하여 알고 함께 명료해져서 시방을 자유롭게 다녀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는 자리를 수행주(修行住)라고 한다.  

  수행이 부처님과 동일하여 부처님의 기분(氣分)을 받음이 마치 중음신(中陰身)이 스스로 부모를 찾을 때처럼, 은밀한 신호[陰信]가 가만히 통하여 여래의 종성(種姓)에 들어가는 자리를 생귀주(生貴住)라고 한다.

  이미 도의 태(胎)에 노닐며 직접 깨달음의 후사[覺胤]를 받듦이, 마치 태를 이미 이루고 사람의 모양을 모자람 없이 갖춘 것과 같은 자리를 방편구족주(方便具足住)라고 하며, 용모도 부처님 같고 마음상태도 부처님과 동일한 자리를 정심주(正心住)라고 하며, 몸과 마음을 함께 성취하여 날마다 더욱 자라나는 자리를 불퇴주(不退住)라고 하며, 열 가지 몸[十身]의 영묘한 모양을 일시에 다 갖춘 자리를 동진주(童眞住)라고 한다.

  형상을 이루고 태에서 나와 친히 불자(佛子)가 된 자리를 법왕자주(法王子住)라고 하며, 성인(成人)을 표함이 마치 대왕이 나라의 일들을 태자에게 나눠 맡기려고 장성한 찰리왕세자(刹利王世子)를 위하여 관정식(灌頂式)을 행함과 같은 자리를 관정주(灌頂住)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불자(佛子)가 되고 나서 한량없는 여래의 묘한 덕을 원만하게 갖추고, 시방에 알맞게 순응하는 행을 환희행(歡喜行)이라 하며, 능숙하게 일체중생의 이익을 잘 처리하는 행을 요익행(饒益行)이라 하며,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우치면서 어기거나 거절함이 없는 행을 무진한행(無瞋恨行)이라고 한다.  

  종류마다 불법에 출생케 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3세와 평등하고 시방을 통달한 행을 무진행(無盡行)이라 하며, 일체와 합동(合同)하여 가지가지 법문이 어긋나거나 잘못이 없는 행을 이치란행(離癡亂行)이라 하며, 같은 가운데 여러 다른 모양을 나타내고, 낱낱 다른 모양에서 각각 같은 모양을 보이는 행을 선현행(善現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시방허공에 이르기까지 미진(微塵)을 충분히 갖추고, 낱낱 티끌 가운데 시방세계를 나타내어, 티끌을 나타내고 세계를 나타내어도, 서로 막히거나 걸리지 않는 행을 무착행(無著行)이라 하며, 가지가지 앞에 나타나는 것마다 다 제일바라밀다(第一波羅蜜多)가 되는 행을 존중행(尊重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원만하고 융통하여 시방 모든 부처님의 법칙을 잘 성취하는 행을 선법행(善法行)이라 하며, 낱낱이 다 청정하여 샘의 번뇌가 없고, 한결같이 진실 무위하여 본래 그대로 작용하는 행을 진실행(眞實行)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신통을 원만하게 갖추고 불사(佛事)를 성취하고 나서 순수하고 깨끗하고 정교하고 진실하여, 온갖 장애의 시름을 멀리 벗어나게 되어 당연히 중생을 제도하면서도, 제도하는 모양이 사라져 없는 가운데, 무위(無爲)의 마음을 돌려서 열반의 길로 향하는 자리를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迴向]이라고 하며, 무너뜨릴 것을 무너뜨리고 온갖 벗어나야 할 것을 멀리 벗어난 자리를 불괴회향(不壞迴向)이라고 한다.  

  본래의 깨달음이 고요하여 깨달음이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지런한 자리를 등일체불회향(等一切佛迴向)이라고 하며, 정밀한 진실이 밝음을 일으켜서 지위[地]가 부처님과 같은 자리를 지일체처회향(至一切處迴向)이라 한다.  

  세계와 여래를 통하여 들어가서 걸림이 없는 자리를 무진공덕장회향[無盡功德藏迴向]이라고 하며, 부처님과 동등한 지위에 들어 지위 가운데 각각 청정한 수행원인[淸淨因]을 내고 그 원인[因]을 의지해서 빛을 발하여 열반의 길을 취하는 자리를 수순평등선근회향(隨順平等善根迴向)이라고 하며, 진실한 선근[眞根]을 이미 성취하고 나서 시방중생이 다 나의 본성임을 증득하고, 중생의 성품을 원만하게 성취하여 중생을 잃지 않는 자리를 수순등관일체중생회향[隨順等觀一切衆生迴向]이라고 한다.  

  일체 법과 일치한 가운데 일체 모양을 벗어나서 일치함과 벗어남에도 집착이 없는 자리를 진여상회향(眞如相迴向)이라고 하며, 진실이 본래 여여한 경지에 들어 시방에 걸림이 없는 자리를 무박해탈회향(無縛解脫迴向)이라 하고, 성품의 공덕을 원만하게 성취하여 법계의 한량이 사라진 자리를 법계무량회향(法界無量迴向)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청정한 41심(心)을 다하고 나면, 그 다음에 네 가지 미묘하고 원만한 가행(加行)을 성취하느니라. 곧 부처님의 깨달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았으나, 그 깨달음의 경지가 나올 듯하면서도 아직 나오지 않음이, 마치 나무를 비벼 불을 피울 때 그 나무에 불이 붙으려는 상태를 난지(煖地)라고 한다.

  또 자기의 마음으로 부처님이 밟은 경지를 성취하였으나, 의지한 듯하면서도 의지하지 못함이,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몸은 허공에 들었지만, 아래는 미약한 걸림이 있는 상태를 정지(頂地)라고 한다.

  마음과 부처가 둘이 동등하여 중도(中道)에 잘 들었으나, 마치 일을 참는 사람이 품은 것도 아니고 벗어난 것도 아닌 상태를 인지(忍地)라고 한다.

  수(數)와 양(量)이 소멸하여 미혹과 깨달음이 중도인지 중도가 아닌지 둘 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태를 세제일지(世第一地)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선남자가 대보리(大菩提)를 잘 통달하여 깨달음이 여래와 통해서 부처님의 경계를 다한 경지를 환희지(歡喜地)라고 하며, 다른 성품이 같은 성품에 들어가서 같은 성품도 멸한 경지를 이구지(離垢地)라 하며, 맑음이 끝까지 다하여 광명이 발생하는 경지를 발광지(發光地)라고 한다.

   밝음이 끝까지 다하여 깨달음이 원만한 경지를 염혜지(燄慧地)라고 하며, 일체 같고 다름이 이를 수 없는 경지를 난승지(難勝地)라고 하며, 무위진여(無爲眞如)의 성품이 맑고 밝게 드러난 경지를 현전지(現前地)라고 한다.

   진여의 경계를 끝까지 다한 경지를 원행지(遠行地)라고 하며, 한결같은 진여의 마음을 부동지(不動地)라 하며, 진여의 작용이 일어나는 경지를 선혜지(善慧地)라고 한다.

  아난아, 이 보살들이 여기서부터 이후는 닦는 공덕을 마치고 공덕을 원만하게 성취하므로, 이 지(地)를 수습위(修習位)라고 한다.

  자비의 그늘과 묘한 구름이 열반의 바다를 덮고 있는 경지를 법운지(法雲地)라고 하느니라.

  여래는 생사의 흐름을 거슬러 왔고, 이러한 보살은 열반의 흐름을 따라 행하여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 어울리는 경지를 등각(等覺)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렇게 마른 지혜의 마음으로부터 등각에 이르면, 이 깨달음은 비로소 금강처럼 견고한 마음[金剛心]의 첫 마른 지혜[初乾慧地]를 얻느니라.  

  이와 같이 겹겹이 단(單; 初乾慧, 煖位, 頂位, 忍位, 世第一位, 等覺, 金剛乾慧)으로 복(複; 十信, 十住, 十行, 十廻向, 十地)으로 열 두 자리[十二: 初乾慧地, 十信, 十住, 十行, 十迴向, 煖位, 頂位, 忍位, 世第一位, 十地, 金剛乾慧地, 等覺]를 닦아야만, 비로소 묘한 깨달음[妙覺]을 다하여 더없이 높은 도를 이루느니라.  

  이 가지가지의 지위마다 다 금강(金剛)의 마음으로 환술과 같은 열 가지 깊은 비유를 관찰하고, 사마타(奢摩他) 가운데서 모든 여래의 관찰 법[毗婆舍那: 觀察]으로 청정하게 닦고 증득하여 점차 깊이 들어가야 한다. 아난아 이와 같이 다 세 가지 증진수행 법[增進]을 쓰기 때문에 훌륭하게 55위의 진실한 보리의 길을 잘 성취할 수 있느니라.

  이러한 관찰이 바른 관찰이요, 이와 다른 관찰은 삿된 관찰이니라.

  이 때 문수사리법왕자(文殊師利法王子)가 대중 가운데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경의 이름은 무엇이며, 저희들과 중생들은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대불정실달다반달라무상보인시방 여래청정해안(大佛頂悉怛多般怛囉無上寶印十方如來淸淨海眼)'이며, 또한 구호친인도탈아난급차회중성비구니득보리심입변지해(救護親因度脫阿難及此會中性比丘尼得菩提心入遍知海)이라고도 이름하며, 또한 여래밀인수증요의(如來密因修證了義)라고도 이름하며, 또한 대방광묘연화왕시방불모다라니주(大方廣妙蓮華王十方佛母陀羅尼呪)라고도 이름하며, 또한 관정장구제보살만행수능엄(灌頂章句諸菩薩萬行首楞嚴)이라고도 이름하니, 너희들은 마땅히 잘 받들어 지니도록 하여라."

  이 말씀이 끝나자, 아난과 대중은 여래께서 열어 보이신 밀인반달라(密印般怛囉)의 뜻을 받들고, 겸하여 이 경의 완벽한 뜻을 갖춘 이름을 들으니, 선나(禪那)로 성인의 자리를 닦아 더욱 위로 향하는 묘한 이치를 단번에 깨달아서, 심려(心慮)가 텅 비어 3계(界)에서 마음을 닦는 6품(品)의 미세한 번뇌를 끊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두 손 모아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위대한 위덕(威德)을 갖추신 세존이시여, 자혜로운 음성으로 차별 없이 중생의 깊고 미세한 번뇌를 훌륭하게 깨우쳐주시니, 저는 이제 몸과 마음이 상쾌하며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묘하고 밝고 진실하고 청정하고 묘한 마음이 본래 두루 원만하다면, 이와 같이 넓은 땅과 풀과 나무와 꿈틀거리는 미물까지도 본원(本元)이 진여(眞如)이며, 그대로 여래께서 성불(成佛)하신 진실한 본체입니다. 부처님 자체의 진실[佛體眞實]이라면, 어째서 또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수라와 인간과 천상 등의 길이 있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이 길은 본래 그대로 있는 것입니까, 중생의 망상습기로 생기는 것입니까.

  세존이시여, 보살계(菩薩戒)를 받은 보련향(寶蓮香) 비구니는 남몰래 음욕을 행하면서 '음행은 살생도 아니고 도둑질도 아니니 업보가 없다'고 망언하다가 그 말이 끝나자, 먼저 여근(女根)에서 일어난 맹렬한 불이 온몸의 마디마디를 태우면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졌습니다. 또 유리(瑠璃)대왕과 선성(善星)비구도 마찬가집니다. 유리는 구담족(瞿曇族)을 죽인 죄로, 선성은 '일체 법이 공하다'고 한 거짓말로, 각각 살아 있는 몸으로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빠졌습니다. 이 모든 지옥은 일정한 곳이 있습니까, 아니면 자연히 저들마다 업을 일으켜 각각 홀로 받는 것입니까. 부디 큰 자비를 내리시어 어린 어리석음을 깨워주시고, 계를 지닌 중생들이 결정된 뜻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높이 받들어 조심하여 깨끗이 지켜서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시원하게 잘 물었다. 모든 중생이 삿된 견해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 물었으니, 너는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아난아, 일체중생은 참으로 본래 진실하고 청정하나, 저 허망한 보는 작용에 따라 허망한 습기가 생기니, 이로 인하여 내분(內分)과 외분(外分)으로 나뉘어 열린 것이니라.

  아난아, 내분은 곧 중생의 분내(分內)이니, 온갖 애욕의 집착[愛染]으로 인하여 허망한 정을 일으켜서 정이 쉬지 않고 쌓이면, 애욕의 물이 생기느니라. 그러므로 중생이 마음속으로 맛난 음식[珍羞]을 생각하면 입안에서 침이 나오고, 마음속으로 앞사람을 생각하여 가련하게 여기거나 한탄하면, 눈 속에 눈물이 고이며, 탐욕으로 재물과 보배를 구하여 마음속에 애착의 군침을 흘리면 온몸이 탐욕 빛으로 윤택해지고, 마음속으로 음욕을 행하려고 하면 남근(男根)과 여근(女根)에서 자연히 정액[液]이 흐르느니라.  

아난아, 온갖 애욕이 비록 다를지라도 흘러서 맺힘은 한가지니, 젖어 축축한 것은 오르지 못하여 자연히 아래로 처지기 마련이다. 이를 내분(內分)이라고 한다.

  아난아, 외분(外分)은 곧 중생의 분외(分外)이니, 온갖 간절한 우러름으로 인하여 빈 생각을 밝혀서 생각이 쉬지 않고 쌓이면, 뛰어난 기운이 생기느니라. 그러므로 중생이 마음으로 금계(禁戒)를 지키면 온몸이 가볍고 맑아지며, 마음에 주인(呪印)을 지니면 돌아보는 모습이 웅대하여 씩씩해지고, 마음으로 천상에 나기를 원하면 날아다니는 꿈을 꾸며, 마음을 부처님의 나라에 두면 성스러운 경계가 은연중 나타나고, 선지식을 섬기면 스스로 몸과 목숨을 가볍게 여기느니라.  

  아난아 온갖 빈 생각이 비록 다를지라도 가볍고 들뜸은 한가지니, 날아 움직이는 것은 가라앉지 않고 자연히 뛰어오르기 마련이다. 이를 바깥 몫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일체세간에는 생사가 서로 이어지고 있는데, 생(生)은 순종하는 습기를 좇고, 죽음은 변한 흐름을 좇느니라. 죽음이 닥쳐서 아직 따스한 감촉을 버리기 전에는 일생의 선악(善惡)이 동시에 모두 나타나서, 죽음을 거역하고 생을 순종하는 두 습기가 서로 어울리느니라.  

  순수한 생각[想]뿐이면 곧 날아 올라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만일 날아오르는 마음 가운데 복덕과 지혜와 청정한 원을 겸하고 있다면, 자연히 마음이 열려서 시방 부처님을 뵙게 되고 일체 정토에 소원대로 왕생하느니라.

  정(情)이 적고 생각이 많으면 멀리까지 가볍게 날지는 못하나, 곧 날아다니는 신선[飛仙]이나, 힘센 귀신 왕[大力鬼王]이나, 날아다니는 야차(夜叉)나, 땅에 다니는 나찰(羅刹)이 되어, 네 하늘[四天]에 놀며 다니는 데는 걸림이 없느니라. 그 가운데 만일 좋은 원과 좋은 마음이 있어서 불법[我法]을 보호하여 지키거나, 혹은 금계(禁戒)를 보호하여 계를 지키는 사람을 따르거나, 혹은 신비한 주문[神呪]을 보호하여 주문 가진 사람을 따르거나, 혹은 선정(禪定)을 보호하여 법인(法忍)을 안전하게 지킨다면, 이들은 친히 여래의 자리 아래에서 부처님을 모시게 되느니라.

 정(情)과 생각[想]이 균등하면 날지도 못하고 처지지도 않아서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는데, 생각은 밝아서 총명하고 정은 깊어서 우둔 하느니라.

  정이 많고 생각이 적으면 축생[橫生]으로 흘러 들어가서, 무거운 것은 털 달린 짐승[毛群]이 되고, 가벼운 것은 깃 달린 짐승[羽族]이 되느니라.

  정이 7푼이고 생각이 3푼이면 수륜(水輪)에 잠겨 내려가서 화륜(火輪)의 경계에 태어나는데, 기(氣)가 맹렬한 불을 받아 몸이 아귀(餓鬼)가 되니 항상 불에 타서 물도 몸을 해치므로, 먹지도 목하고 마시지도 못하며 백천 겁을 지내느니라.

  정이 9푼이고 생각이 1푼이면 화륜(火輪)을 뚫고 내려가서 몸이 풍륜(風輪)과 화륜(火輪)이 맞닿아 지나는 곳에 들어가서는, 두 가지 지옥 곧 고통을 쉴 틈이 있는 가벼운 지옥[有間]과 고통을 쉴 틈이 없는 무거운 지옥[無間]에 태어나느니라.

  순수한 정 뿐이면 곧 잠겨서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들어간다. 만일 잠기는 마음 가운데 대승을 비방한 죄와 부처님의 금계를 헌 죄와 거짓말로 속여 설법한 죄와 헛되게 시주의 보시를 탐한 죄와 분에 넘게 공경을 받은 죄와 5역죄(逆罪)와 10중죄(重罪)가 있으면, 다시 시방의 아비지옥(阿鼻地獄)에 태어나느니라.

  나쁜 업을 따라 지은 죄는 비록 자신이 홀로 불러들이나, 여럿이 공동의 몫[衆同分] 가운데서는 원래의 땅[元地; 地獄을 뜻함]을 겸하느니라.

  아난아, 이런 일들은 모든 중생이 자기 업으로 감염된 경계[所感]로서, 열 가지 습인(習因)을 지어 여섯 어울린 과보[六交報]를 받는 것이니라.

  무엇을 열 가지 원인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첫째는 음욕의 습기로 접촉하여 어울리는 행위[交接]이니라. 서로 비비는데서 발생하여 문지르고 비비는 작용을 쉬지 않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맹렬한 큰 불빛이 그 가운데서 발동하는 모양을 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스스로 손을 마주 비비면 따뜻한 기운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두 습기가 서로 타기 때문에 무쇠평상과 구리기둥의 일들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일체 여래께서도 다같이 음행을 지목하여 '애욕의 불꽃'이라고 이름하셨으며, 보살은 애욕의 경계를 보면 불구덩이를 피하듯 멀리하느니라.

  둘째는 탐욕의 습기로 계략을 일삼아 어울리는 행위이니라. 서로 빨아 들이키는데서 발생하여 당기는 작용을 그치지 않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차가움이 쌓인 딱딱한 얼음 가운데서 얼어 터지는 모양을 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입으로 공기[風氣]를 빨아 들이키면, 서늘한 촉감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두 습기가 서로 능멸하기 때문에 죽은 뒤에 '타타(吒吒) 파파(波波) 라라(囉囉)'라는 추위를 참는 소리와 푸르고 붉고 흰 연꽃 빛깔의 차가운 얼음 등의 일들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일체 여래께서도 다같이 탐욕으로 많이 구하는 일을 지목하여 '탐욕의 물[貪水]'이라고 하셨으며, 보살은 탐욕의 경계를 보면 장독(瘴毒)이 흐르는 바다를 피하듯 멀리하느니라.

  셋째는 아만(我慢)의 습기를 따라 능멸로 어울리는 행위니라. 서로 자랑하는데서 발생하여 달려 흐름이 쉬지 않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솟구쳐 달리는 물결이 물결을 쌓아 물이 되는 모양을 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입안을 혀로 핥아서 연이어 맛을 보면 물이 생기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두 습기가 서로 두드리기 때문에 죽은 뒤에 피의 강물, 잿빛 강물, 독한 바닷물, 끓는 구리 물을 붓고 삼키는 일들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여래께서도 다같이 아만(我慢)을 지목하여 '어리석은 물을 마시는 짓'이라고 하셨으며, 보살은 아만(我慢)의 경계를 보면 큰 소용돌이를 피하듯 멀리하느니라.

  넷째는 성냄의 습기를 따라 충돌로 어울리는 행위이니라. 서로 거슬리는데서 발생하여 거슬림이 맺혀 쉬지 않고 마음의 열이 불을 일으켜서 기운을 달구어 쇠가 되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칼산과 쇠몽둥이와 칼 나무와 칼 바퀴와 도끼와 작두와 창과 톱의 모양을 보는 것이니, 마치 원한을 품으면 살기가 펄펄 살아 움직이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두 습기가 서로 치기 때문에 죽은 뒤에 생식기[宮]를 헐고 몸을 잘라내고 목을 베고 몸을 두 쪽 내고 허리를 꺾고 몸에 말뚝을 박고 몽둥이로 때리고 창으로 치는 일들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일체 여래께서도 다같이 성냄[瞋恚]을 지목하여 '날카로운 칼'이라고 하셨으며, 보살은 성냄의 경계를 보면 죽이는 곳을 피하듯 멀리하느니라.

  다섯째는 속임수의 습기를 따라 유혹으로 어울리는 행위이니라. 서로 달래어 꾀는데서 발생하여 이끌어 일으키기를 멈추지 않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밧줄로 묶고 주리를 틀고 몸을 얽어 칼을 씌우는 모양을 보는 것이니, 마치 물이 밭에 스며들어 풀과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두 습기가 서로 연이어 끌어들이기 때문에 죽은 뒤에 칼을 씌우고 족쇄를 채우고 채찍질하고 곤장을 치고 몽둥이로 때리는 일들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일체 여래께서도 다같이 간사한 거짓을 지목하여 '남을 모함하는 도적[讒賊]'이라고 하셨으며, 보살은 속임수의 경계를 보면 승냥이와 이리처럼 두렵게 여기느니라.

  여섯째는 속임의 습기를 따라 기만(欺瞞)으로 어울리는 행위이니라. 서로 업신여겨 속이는데서 발생하여 꾸며 속이기를 그치지 않고 날랜 마음으로 간사한 꾀를 내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티끌과 먼지와 똥과 오줌의 더럽고 부정한 모양을 보는 것이니, 마치 티끌을 바람에 날려 보내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두 습관이 서로 더하기 때문에 죽은 뒤에 빠져 가라앉고 치어 오르고 날리다가 떨어지고 물에 뜨고 잠기는 일들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일체 여래께서도 다같이 속임을 지목하여 '겁살(劫殺)'이라고 하셨으며, 보살은 속임의 경계를 보면 뱀을 밟은 듯 피하느니라.

  일곱째는 원망의 습기를 따라 거리낌으로 어울리는 행위이니라. 한을 품는데서 발생하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돌멩이가 날리고 큰 돌을 던지고 궤짝에 가두고 수레 울에 갇혀 끌려가고 독 안에 담기고 포대에 쌓여 치는 모양을 보는 것이니, 마치 몰래 독을 가진 사람이 가슴속에 악을 쌓아 품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두 습기가 서로 잡아 삼키기 때문에 죽은 뒤에 집어던지고 잡아들이고 치고 쏘고 내동댕이치고 거머쥐는 일들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일체 여래께서도 원망하는 사람을 지목하여 '몰래 해치는 귀신'이라고 하셨으며, 보살들은 원망을 보면 짐독의 술[鴆酒]을 피하듯 멀리하느니라.

  여덟째는 나쁜 소견의 습기를 따라 밝힘[明]으로 어울리는 행위이니라. 살가야(薩迦耶)와 견취(見取)와 계금취(戒禁取)와 같은 온갖 업이 삿되게 깨닫고 거역하는 데서 발생하여 상반된 견해를 내놓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왕사(王使)의 주리(主吏)가 문적(文籍)으로 증명하여 집행하는 모양을 보는 것이니, 마치 길가는 사람이 오고가면서 서로 보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두 습기가 서로 어울리기 때문에 죽은 뒤에 힐문[勘問]하고, 유도하여 사실을 심문[權詐考訊]하고, 고문[推鞫]하고 방문조사로 증거를 대고[察訪], 숨긴 일을 드러내어 규명하고[披究], 업경대(業鏡臺)로 비춰 밝히고[照明], 선악동자(善惡童子)가 문부(文簿)로 변론하는 일들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일체 여래께서도 다같이 나쁜 소견을 지목하여 '나쁜 소견의 구덩이'라고 하셨으며, 보살은 온갖 허망하게 두루 집착한 소견의 경계를 보면 독 구렁[毒壑]에 들어가듯 멀리하느니라.

  아홉째는 덮어씌움의 습기를 따라 가해(加害)로 어울리는 행위이니라. 모함하고 헐뜯는데서 발생하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두 산이 합하는 사이에 끼이기도 하고 두 바위가 마주 부딪치는 사이에 치이기도 하고 방아와 맷돌에 부서지기도 하고 보습에 혀와 몸이 갈리기도 하는 모양을 보는 것이니, 마치 남을 모함하는 도적이 어질고 착한 사람을 핍박하여 죄를 덮어씌우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두 습기가 서로 배척하기 때문에 죽은 뒤에 누르고 비비고 방망이로 때리고 눌러 앉고 짓밟아 문지르고 자루로 걸러내고 몸을 짓눌러 실처럼 뽑아내는 일들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일체 여래께서도 다같이 원망하여 헐뜯음을 지목하여 '간특한 범[讒虎]'이라고 하셨으며, 보살은 덮어씌움의 경계를 보면 벼락을 만나듯 멀리하느니라.

  열 번째는 송사의 습기를 따라 말다툼으로 어울리는 행위이니라. 감춰 덮는 데서 발생하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거울로 비추고 촛불로 밝히는 모양을 보는 것이니, 마치 햇빛에 그림자를 감출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두 습기가 서로 펴서 늘어놓기 때문에 나쁜 벗과 업 거울과 불구슬로 지난 죄업을 들춰내고 증거를 대는 일들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시방의 일체 여래께서도 다같이 덮어 감춤을 지목하여 '숨어 있는 도적'이라고 하셨으며, 보살은 덮어 감추는 경계를 보면 높은 산을 이고 큰 바다를 밟는 것처럼 무겁게 여기느니라.

  무엇을 여섯 과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일체중생이 6식(識)으로 업을 지어 불러들인 나쁜 과보가 여섯 감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나쁜 과보가 여섯 감관에서 나온다고 하겠느냐.

  첫째는 보는 작용의 업보(業報)가 나쁜 과보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 보는 작용의 업이 어울리면, 죽을 무렵에 먼저 시방세계에 가득 찬 맹렬한 불꽃을 보면서, 망(亡)자의 혼령[神識]이 날아 떨어져서 연기를 타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어가느니라.

  망자는 여기서 두 모양을 밝히는데, 하나는 밝음을 보는 작용이니, 가지가지 나쁜 경계를 두루 잘 보면서 한량없는 두려움을 내는 일이며, 하나는 어둠을 보는 작용이니, 적막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한량없는 공포를 일으키는 일이다.  

  이러한 보는 작용의 불[見火]이 듣는 작용[聽]을 태우면 가마솥의 끓는 쇳물과 끓는 구리 물이 되고, 숨[息]을 태우면 검은 연기와 검붉은 불꽃이 되며, 맛[味]을 태우면 불에 탄 알맹이와 쇠죽이 되고, 촉감[觸]을 태우면 뜨거운 재와 화로의 숯이 되며, 의식[心]을 태우면 작은 불꽃들이 생겨서 빠르게 번져 허공계(虛空界)를 세차게 두드리느니라.  

  둘째는 듣는 작용의 업보가, 나쁜 과보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 듣는 작용의 업이 어울리면, 죽을 무렵에 먼저 하늘과 땅이 파도에 빠져 잠기는 모양을 보면서, 망자의 혼령[神識]은 휩쓸려 내려가서 흐름을 타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어가느니라.

  망자는 여기서 두 모양을 밝히는데, 하나는 들음이 열린 작용이니, 가지가지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이 아득하여 어지러워지는 일이며, 하나는 들음이 막힌 작용이니, 적막하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유명(幽冥)의 넋이 침몰하는 일이다.  

  이러한 듣는 작용의 물결[聞波]이 듣는 작용에 흘러들면 책망과 힐난이 되고, 보는 작용에 흘러들면 우레와 우레 소리와 악독한 기운이 되며, 숨에 흘러들면 비와 안개가 되어 온갖 독충(毒蟲)이 흩어져서 신체에 가득 차게 되고, 맛에 흘러들면 고름과 피가 되어 가지가지 잡된 더러움을 이루며, 감촉에 흘러들면 축생과 귀신과 똥과 오줌이 되고, 의식[心]에 흘러들면 번개와 우박이 되어 마음의 넋을 부셔 무너뜨리느니라.  

  셋째는 냄새 맡음의 업보가 나쁜 과보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 냄새 맡는 업이 어울리면, 죽을 무렵에 먼저 독한 기운이 멀고 가까운 곳에 꽉 찬 모양을 보면서, 망자의 혼령이 땅에서 솟아 나와 무간지옥에 들어가느니라.

  망자는 여기서 두 모양을 밝히는데, 하나는 냄새 맡음이 통한 작용이니, 온갖 나쁜 냄새를 심하게 맡는 가운데 마음이 뒤흔들리는 일이며, 둘째는 냄새 맡음이 막힌 작용이니, 기가 가리어 통하지 않는 가운데 땅에 넘어져서 기절하는 일이다.  

  이러한 냄새 맡는 기운[齅氣]이 숨에 부딪치면 막힘과 통함이 되고, 보는 작용에 부딪치면 불과 횃불이 되며, 듣는 작용에 부딪치면 잠김과 빠짐과 녹음과 끓음이 되고, 맛에 부딪치면 썩는 것과 쉬어 변하는 것이 되며, 감촉에 부딪치면 불어터짐과 썩어 문드러짐과 산처럼 큰 살덩어리가 되어 백 천의 구멍에서 한량없는 벌레들이 뜯어먹는 것이 되고, 생각에 부딪치면 재와 장독[瘴毒]과 날리는 모래와 자갈이 되어 몸을 쳐부수느니라.

  넷째는 맛의 업보가 나쁜 과보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 맛의 업이 어울리면, 죽을 무렵에 먼저 쇠 그물에 붙은 맹렬한 불꽃이 치열하게 타올라 세계를 두루 덮는 모양을 보면서, 망자의 혼령[神識]은 아래를 뚫고 내려가다가 그물에 걸려 머리가 거꾸로 매달린 채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어가느니라.

  망자는 여기서 두 모양을 밝히는데, 첫째는 빨아들이는 기의 작용이니, 그 기운이 맺혀 차가운 얼음이 되는 가운데 육신이 얼어 터지는 일이며, 둘째는 내뱉는 기의 작용이니, 그 기운이 날려 맹렬한 불꽃이 되는 가운데 골수(骨髓)가 타서 문드러지는 일이다.

  이러한 맛보는 작용이 맛을 만나면 승복(承服)과 참음이 되고, 보는 작용을 만나면 불에 달군 쇠와 돌이 되며, 듣는 작용을 만나면 군사의 예리한 칼이 되고, 숨결을 만나면 커다란 쇠 울타리가 되어 국토를 가득 덮으며, 감촉을 만나면 활과 화살과 쇠뇌와 쏘는 것이 되고, 생각을 만나면 날아다니는 뜨거운 쇠가 되어 허공에서 비 오듯 내리느니라.  

  다섯째는 감촉의 업보가 나쁜 과보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 감촉의 업이 어울리면, 죽을 무렵에 먼저 큰 산이 사방으로 밀려와 합쳐서 더 이상 나갈 길이 없는 모양을 보는 가운데, 망자의 혼령[神識]은 또 커다란 무쇠 성[大鐵城]의 불 뱀과 불개와 호랑이와 이리와 사자를 거느리고 손에 창검을 든 소머리 옥졸[牛頭獄卒]과 말머리 나찰[馬頭羅刹]이 성문 안으로 몰아넣는 모양을 보면서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향하느니라.

  망자는 여기서 두 모양을 밝히는데, 하나는 합하는 감촉작용이니, 합치는 산이 몸을 핍박하여 뼈와 살과 피가 터져 나오는 일이며, 둘째는 떼는 감촉작용이니, 칼과 검이 몸에 닿아서 심장과 간을 도려내는 일이다.

  이와 같이 합하는 촉감이 촉감을 만나면 감옥 길[道]과 관망대[觀]와 가두는 청사[廳]와 문초하는 책상[案]이 되고, 보는 작용을 만나면 불타고 불사르는 것이 되며, 듣는 작용을 만나면 때리고 치고 찌르고 쏘는 것이 되고, 숨을 만나면 홀쳐 묶고 포대에 담고 고문하고 결박하는 것이 되며, 맛을 만나면 보습으로 갈고 재갈물리고 베어내고 잘라내는 것이 되고, 생각을 만나면 떨어지고 튀어 오르고 삶아내고 구어 내는 것이 되느니라.  

  여섯째는 생각의 업보가 나쁜 결과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 생각의 업이 어울리면, 죽을 무렵에 먼저 사악한 바람이 몰아쳐서 국토가 부서지는 모양을 보면서, 망자의 혼령[神識]은 바람에 날려 공중에 올랐다가 바로 떨어져서 바람을 타고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느니라.

  망자는 여기서 두 모양을 밝히는데, 첫째는 미혹하여 깨지 못한 경계이니, 극도로 미혹하여 황망한 가운데 날뛰기를 쉬지 않는 일이며, 둘째는 미혹하지 않고 깨어 있는 경계이니, 괴로움만 깨달아 아는 가운데 한량없이 삶기고 불에 타는 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는 일이다.

  이러한 삿된 생각이 생각에 맺히면 벌 받는 방향과 장소가 되고, 보는 작용에 맺히면 비춤과 증명이 되며, 듣는 작용에 맺히면 합쳐 부딪는 큰 돌과 얼음과 서리와 티끌과 안개가 되고, 숨에 맺히면 큰 불 수레와 불 배와 불 우리가 되며, 맛에 맺히면 큰 외침과 뉘우침과 눈물 흘림이 되고, 감촉에 맺히면 커졌다가 작아졌다 하면서 하루 동안 만 번 살고 만 번 죽는 것과 엎어지고 자빠지는 것이 되느니라.  

  아난아, 이를 지옥의 열 가지 원인과 여섯 가지 결과라고 하는데, 모두 중생의 미혹한 망상으로 지은 경계이니라.

  만일 중생들이 나쁜 업을 두루 갖춰 짓는다면, 아비지옥[阿鼻獄]에 들어가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으며 한량없는 겁을 지내느니라.

  여섯 감관이 각기 따로 지어서, 저 짓는 업이 경계와 감관을 겸한다면, 이 사람은 8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어가느니라.

  몸과 입과 뜻의 셋으로 살생과 투도와 음욕을 짓는다면, 이 사람은 18지옥에 들어가느니라.

  3업(業)을 겸하지 않고 중간에 한번 살생을 범하거나 한번 투도를 범한다면, 이 사람은 36지옥에 들어가느니라.

  (여섯 감관 가운데) 보는 작용일 경우, 보는 작용의 한 감관만이 단독으로 한 업을 범한다면 이 사람은 108지옥에 들어가느니라.

  이로 인하여 중생이 각기 따로 지을지라도, 세계 가운데서는 같은 몫의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망상으로 발생한 일일 뿐,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니라.

  또 아난아, 이 중생들이 계율[律儀]를 비방하여 파하거나 보살계를 범하거나 부처님의 열반을 훼방하거나 그 외 잡된 업을 지으면, 여러 겁에 걸쳐 불에 타는 고통을 당하다가, 죄 값을 다 치른 뒤에, 온갖 귀(鬼)의 형체를 받느니라.  

  만일 본래 원인이 물건을 탐내어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을 치른 뒤에 물건을 만나서 형체를 이루면, 괴귀(怪鬼)라고 하며, 색욕[色]을 탐내어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을 치른 뒤에 바람을 만나서 형체를 이루면, 발귀(魃鬼)라고 하며, 유혹을 탐내어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을 치른 뒤에 축생을 만나서 형체를 이루면, 매귀(魅鬼)라고 하며, 한풀이를 탐내어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을 치른 뒤에 충(蟲)을 만나서 형상을 이루면, 고독귀(蠱毒鬼)라고 하며, 나쁜 기억을 탐내어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을 치른 뒤에 쇠퇴한 운을 만나서 형체를 이루면, 여귀(癘鬼)라고 하느니라.

  오만(傲慢)을 탐내어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을 치른 뒤에 기(氣)를 만나서 형체를 이루면, 아귀(餓鬼)라고 하며, 거짓 꾸밈을 탐내어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을 치른 뒤에 어둠을 만나서 형체를 이루면 염귀(魘鬼)라고 하며, 밝힘[明]을 탐내어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을 치른 뒤에 정령(精靈)을 만나서 형체를 이루면 망양귀(魍魎鬼)라고 하며, 일의 성취를 탐내어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을 치른 뒤에 밝음을 만나서 형체를 이루면, 역사귀(役使鬼)라고 하며, 무리지음을 탐내어 죄를 지은 사람이 죄 값을 치른 뒤에 사람을 만나서 형체를 이루면 전송귀(傳送鬼)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사람들은 다 순수한 정(情)으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업의 불길이 다 타고 말라서 위로 벗어 나와 귀(鬼)가 되었으나, 이것들은 다 자기 망상의 업으로 불러들인 경계일 뿐이다. 만일 보리를 깨친다면 미묘하고 원만하게 밝아서 본래 아무것도 없느니라.  

  또 아난아, 귀(鬼)의 업이 이미 다 없어져서 정(情)과 생각[想]의 둘이 다 함께 비어야만, 비로소 세상에서 원래 빚진 사람과 더불어 원한의 상대로 서로 만나서, 축생이 되어 그 묵은 빚을 갚게 되느니라.  

  물건에 붙은 괴귀(怪鬼)가 물건이 스러져 과보를 다 받고 나서 세상에 태어나면, 흔히 올빼미 종류가 되고, 바람에 붙은 발귀(魃鬼)가 바람이 스러져 과보를 다 받고 나서 세상에 태어나면, 흔히 흉조(凶兆)를 전하는 일체 이상한 종류[咎徵一切異類]가 되며, 축생에 붙은 매귀(魅鬼)가 축생이 죽고 과보를 다 받고 나서 세상에 태어나면, 흔히 여우 종류가 되고, 충에 붙은 고독귀(蠱毒鬼)가 충이 멸하여 과보를 다 받고 나서 세상에 태어나면, 흔히 독을 품은 종류가 되며, 쇠퇴한 운에 붙은 여귀(癘鬼)가 쇠퇴한 운이 다하여 과보를 다 받고 나서 세상에 태어나면, 흔히 회충의 종류[蛔類]가 되느니라.  

  기를 받은 아귀(餓鬼)가 기가 스러져 과보를 다 받고 나서 세상에 태어나면 먹히는 종류가 되며, 어둠에 붙은 염귀(魘鬼)가 어둠이 스러져 과보를 다 받고 나서 세상에 태어나면, 흔히 복종하는 종류가 되고, 정령(精靈)과 어울린 망양귀(魍魎鬼)가 어울림이 스러져 과보를 다 받고 나서 세상에 태어나면, 흔히 시절을 따르는 종류[應類]가 되며, 밝음에 붙은 신령한 역사귀(役使鬼)가 밝음이 멸하여 과보를 다 받고 나서 세상에 태어나면, 흔히 길조(吉兆)를 전하는 일체 종류가 되고, 사람을 의지한 전송귀(傳送鬼)가 사람이 죽고 과보를 다 받고 나서 세상에 태어나면, 사람을 따르는 종류가 되느니라.

  아난아, 이들은 다 업의 불이 마르고 나서 그 묵은 빚을 갚느라고, 기어 다니는 축생이 된 것이다.

  이 들도 또한 모두 자기의 허망한 업으로 불러들인 경계일 뿐이다. 만일 보리를 깨친다면 이 허망한 인연은 본래 아무것도 없느니라.

  네가 말한 보련향(寶蓮香) 등이나, 유리왕(瑠璃王)이나 선성비구(善星比丘)의 이러한 악업(惡業)은 본래 자신이 밝혀서 일으킨 일이요,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난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준 것도 아니다. 자기 망상으로 불러들인 결과를 도로 자신이 받는 경계이며, 보리의 마음 가운데는 허망하게 떠서 엉겨 맺힌 망상이니라.

  또 아난아, 축생으로 묵은 빚[先債]을 갚을 때, 만일 빚 갚는 중생이 갚을 몫보다 더 많이 갚았다면, 이들 중생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나머지 몫을 되돌려 받는다. 이 때 만일 돌려줄 사람이 힘이 있고 복덕을 겸한다면, 사람의 세상에서 사람의 몸을 버리기 전에 더 받은 노력을 되갚아 주겠지만, 만일 복이 없다면 다시 축생이 되어 나머지 몫을 갚게 되느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가령 돈과 재물을 빌려 쓰거나 그 힘을 부렸을 경우, 빚을 충분히 갚는다면 저절로 끝나겠으나, 만일 중간에 저 중생의 몸과 생명을 죽이거나 혹은 그 고기를 먹는다면, 이러한 상태는 미진겁(微塵劫)이 지나가도 계속되어 서로 잡아먹고 서로 죽이기를 마치 바퀴가 서로 높낮이를 따라 구르듯 쉬지 않을 것이며, 사마타(奢摩他)의 힘이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면 영원히 멈추지 않으리라.  

  너는 이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올빼미 종류가 충분히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완고한 무리와 어울려 섞이느니라.

  저 흉조(凶兆)를 전하는 종류가 충분히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이상한 무리와 어울려 섞이느니라.

  저 여우의 종류가 충분히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용렬한 무리와 섞이느니라.

  저 독을 품은 무리가 충분히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사나운 무리와 어울려 섞이느니라.

  저 회충의 종류가 충분히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미천한 무리와 어울려 섞이느니라.

  저 먹히는 종류가 충분히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유약한 무리와 어울려 섞이느니라.

  저 복종하는 종류가 충분히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노역(勞役)의 무리와 어울려 섞이느니라.

  저 시절을 따르는 종류가 충분히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글을 아는 무리와 섞이느니라.

  저 길조(吉兆)를 전하는 종류가 충분히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총명한 무리와 어울려 섞이느니라.

  저 순종하는 종류가 충분히 갚고 형상을 회복하여 인간 세상에 태어나면 통달한 무리와 섞이느니라.

  아난아, 이들은 다 묵은 빚을 갚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모두 시작 없는 옛적부터 업에 얽혀 뒤바뀐 탓으로, 서로 태어나 서로 죽이면서, 여래도 만나지 못하고 바른 법도 듣지 못하여, 번뇌 가운데서 번뇌 그대로[法爾] 굴러다니니 이런 무리들을 가련하다고 하느니라.

  아난아, 또 사람에 속한 부류로서, 바른 깨달음을 의지하여 삼마지(三摩地)를 닦지 않고, 따로 허망한 생각을 닦아서 생각[想]을 보존하여 형상을 굳히고, 사람이 닿지 않는 산림(山林)의 깊숙한 곳에서 노니는 열 가지 신선이 있느니라.

  아난아, 저 중생들이 약 복용 법을 굳게 지켜서 쉬지 않는 가운데, 복용하는 도법을 원만하게 성취한 신선을 지행선(地行仙)이라고 하며, 풀과 나무의 약물을 굳게 지켜서 쉬지 않는 가운데, 약물의 도법을 원만하게 성취한 신선을 비행선(飛行仙)이라고 하며, 금석(金石)의 약물을 굳게 지켜서 쉬지 않은 가운데, 변화의 도를 원만하게 성취한 신선을 유행선(遊行仙)이라고 하며, 움직이고 멈추는 법을 견고하게 지켜서 기(氣)와 정(精)을 원만하게 성취한  

신선을 공행선(空行仙)이라고 하며, 진액(津液)을 새롭게 하는 법을 굳게 지켜서 쉬지 않는 가운데, 윤택한 덕을 원만하게 성취한 신선을 천행선(天行仙)이라고 하느니라.  

  정색(精色)의 보존법을 굳게 지켜서 쉬지 않는 가운데, 순수한 정기의 흡수 법을 원만하게 성취한 신선을 통행선(通行仙)이라고 하며, 주문 법[呪禁]을 굳게 지켜서 쉬지 않는 가운데, 술법(術法)을 원만하게 성취한 신선을 도행선(道行仙)이라고 하며, 일정한 사념(思念)을 굳게 지켜서 쉬지 않는 가운데, 생각하는 법을 원만하게 성취한 신선을 조행선(照行仙)이라고 하며, 음양의 짝 맞추기를 굳게 지켜서 쉬지 않는 가운데, 감응의 법[感應]을 원만하게 성취한 신선을 정행선(精行仙)이라고 하며, 변화의 이치를 굳게 지켜서 쉬지 않는 가운데, 깨달음을 원만하게 성취한 신선을 절행선(絶行仙)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들은 다 사람들 가운데서 바른 깨달음을 닦지 않고, 별도로 마음을 단련하여 사는 이치를 깨달아서 천만 세의 수명을 누리는 가운데, 인적이 끊어진 깊은 산 속이나 큰 바다의 섬에 머물러 살고 있지만, 이들 역시 윤회하면서 허망한 생각으로 흘러 다닐 뿐이니, 삼매(三昧)를 닦지 않으면, 과보가 다한 뒤에 다시 돌아와서 온갖 세상[諸趣]으로 흩어져 들어가느니라.  

  아난아, 모든 세상 사람이 영원한 진리[常住]를 구하지도 않고, 아직은 처첩의 은혜와 사랑도 버리지 못했으나, 마음이 삿된 음행에 방탕하게 흐르지 않고 몸이 맑고 밝아서 광채가 나면, 죽은 뒤에 일월과 가까운 곳에 태어나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4천왕천(天王天)이라고 한다.

  자신의 처방(妻房)에서 음행을 즐기는 정은 엷고 미약하나, 청정하게 머무를 때 청정한 맛이 완전하지 못한 사람은, 죽은 뒤에 일월(日月)의 밝은 세상을 뛰어넘어 인간 세상의 최정상에 태어나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도리천(忉利天)이라고 한다.  

  음욕의 경계를 만나면 잠시 어울렸다가 돌아서면 아무 생각이 없는 성품으로서, 인간 세상에 흔들림이 적고 고요함이 많은 사람은, 죽은 뒤에 허공세계에 밝게 안주하는데, 해와 달의 광명이 그 위까지 닿지 않으나, 이 사람들의 몸에는 저절로 광명이 비치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수염마천(須燄摩天)이라고 한다.  

  언제나 조용히 지내다가 응해야할 접촉 상대가 왔을 때 어기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뒤에 정밀하고 미묘한 세계에 올라가서 태어나는데, 아래의 인간과 하늘 세계들과 접하지 않고, 겁(劫)의 무너지는 시기에 이르러도 3재(災)가 미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도솔타천(兜率陀天)이라고 한다.

  나는 음행할 욕심이 없으나 너를 따라 관계한다는 심정으로, 뜻과 달리 관계를 맺으면서도 밀을 씹듯 맛을 모르는 사람은, 죽은 뒤에 뛰어넘어 변화의 세계[化地]에 태어나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낙변화천(樂變化天)이라고 한다.

  세상일에 마음이 없으나 세상일을 함께 행하고, 일을 행하며 어울리면서도 뚜렷이 초월한 사람은, 죽은 뒤에 변화의 세계와 변화가 없는 세계를 초월한 경계에 태어나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라고 한다.

  아난아, 이러한 여섯 하늘이 형체로는 비록 흔들림에서 벗어났으나, 마음의 자취는 아직도 어우러져 있으니, 이 하늘까지를 욕계(欲界)라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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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9권

 

   

  아난아, 세상에서 마음을 닦는 사람들 중에 선나(禪那)에 의지하지 않아서 지혜는 없으나, 단지 몸을 잘 단속하여 음욕(婬慾)을 행하지 않고, 다닐 때나 앉을 때나 생각과 기억이 함께 없어져서, 애욕의 집착[愛染]이 생기지 않는 사람은 욕계(欲界)에 머물지 않고 뜻에 따라 몸이 범천의 백성[梵侶]이 되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범중천(梵衆天)이라고 한다.  

  음욕의 습기를 이미 없애고 음욕에서 벗어난 마음이 나타나서 모든 율의(律儀)를 좋아하여 즐겁게 따라 행하는 사람은 즉시 범천의 덕을 행할 수 있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범보천(梵輔天)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이 미묘하고 원만하여 위의(威儀)에 모자람이 없고 계율[禁戒]을 청정하게 지키면서 더욱 밝게 깨달아 나아가는 사람은 즉시 범천(梵天) 대중을 잘 통솔하는 대범왕(大梵王)이 되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대범천(大梵天)이라고 한다.

  아난아, 이 뛰어난 세 부류는 일체 고뇌의 핍박을 받지 않는다. 비록 바르게 진실한 삼마지(三摩地)를 닦지 않았을지라도, 청정한 마음 가운데 온갖 번뇌가 동하지 않기 때문에 초선천[初禪]이라고 한다.

  아난아, 그 다음 범천(梵天)은 범천 사람들을 도맡아 다스리며, 범행(梵行)이 원만하고 맑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서, 고요한 맑음이 광명을 내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소광천(少光天)이라고 한다.

  광명과 광명이 서로 어울려 끝없이 빛나고 시방 경계를 비춰서 온 경계가  두루 수정유리로 변하는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무량광천(無量光天)이라고 한다.

  원만한 광명을 흡수하여 지녀서 교화의 바탕을 성취하고, 교화를 일으킴이 청정하여 적응하는 작용이 끝이 없는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광음천(光音天)이라고 한다.

  아난아, 이 뛰어난 세 부류는 일체 근심과 걱정의 핍박을 받지 않는다. 비록 바르게 진실한 삼마지(三摩地)를 닦지 않았을지라도, 청정한 마음 가운데 거친 번뇌[麤漏]를 이미 눌렀기 때문에 이선천[二禪]이라고 한다.  

  아난아, 이러한 하늘 사람은 원만한 광명으로 소리를 성취하여, 소리를 펴서 묘한 이치를 드러내며 정교한 행을 일으키고 성취하여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통하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소정천(少淨天)이라고 한다.

  깨끗한 공[淨空]이 앞에 나타나 이끌어 냄이 끝이 없어서,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하여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성취한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무량정천(無量淨天)이라고 한다.

  세계와 몸과 마음이 일체 원만하게 깨끗하여 청정한 공덕을 성취하고, 훌륭한 의지처가 앞에 나타나서, 적멸(寂滅)의 즐거움으로 돌아가는 부류가 있는데,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변정천(遍淨天)이라고 한다.

  아난아, 이 뛰어난 세 부류는 뛰어난 수순(隨順)의 능력을 갖추고 몸과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가운데 한량없는 즐거움을 누리느니라. 비록 바르게 진실한 삼마지(三摩地)를 닦지 않았을지라도, 안온한 마음 가운데 선정(禪定)의 환희(歡喜)를 다 갖췄기 때문에 삼선천(三禪天)이라고 한다.

  아난아, 다음 하늘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핍박을 받지 않아서, 괴로움의 원인이 이미 다 사라졌으나, 즐거움이 영원히 머물지 않고 오래되면 반드시 무너지는 일이 있음으로, 괴롭고 즐거운 두 마음을 동시에 함께 버리니[俱時頓捨; 捨는 고락을 떠난 평등], 거칠고 무거운 모양이 사라져서 청정한 복의 성품이 생기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복생천(福生天)이라고 한다.  

  고락을 떠난 평등한 마음[捨心]이 원만 융통하여 뛰어난 견해[勝解]가 청정하고 복이 막히지 않은 가운데, 묘한 수순(隨順)의 능력을 얻어 미래를 다하는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복애천(福愛天)이라고 한다.

  아난아, 이 하늘[是天; 福愛天] 가운데서 두 갈래 길이 있느니라. 한 갈래는 만일 이전 마음에 무량한 청정광명과 뚜렷이 밝은 복덕으로 닦고 증득하여 머물렀다면,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광과천(廣果天)이라고 한다.  

  또 한 갈래는 만일 이전 마음에 고락(苦樂)을 함께 싫어하여 평등한 마음[捨心]을 정밀하게 연마해서 끊임없이 계속하여 평등한 도[捨道]를 원만하게 추궁하고, 몸과 마음이 함께 멸하여 마음의 생각을 재처럼 굳혀서 500겁을 지낸다면, 이 사람은 이미 원인이 생멸(生滅)에 있기 때문에 생멸을 떠난 성품을 밝혀낼 수 없으니, 처음 반 겁(半劫) 동안은 멸(滅)하고 뒤의 반 겁 동안은 생(生)하느니라.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무상천(無想天)이라고 한다.  

  아난아, 이 네 뛰어난 부류는 일체 세간의 온갖 고락의 경계가 흔들 수 없으니, 비록 무위(無爲)의 진실한 부동지(不動地)는 아닐지라도, 닦아서 얻은 마음에 공덕작용이 순수하게 성숙되었기 때문에 사선천(四禪天)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가운데 또 오불환천(五不還天)이 있으니, 아래 세계에서 9품(品)의 습기를 동시에 멸하여 없애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다 없어져서, 아래 세계에는 더 이상 머무를 데가 없으니, 고락을 떠난 마음으로 함께 한 공동체[捨心衆同分] 가운데 안전하게 거처를 마련한 곳이니라.

  아난아, 괴로움과 즐거움이 다 멸하여, 마음이 다투는 일과 어울리지 않는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무번천(無煩天)이라고 한다.

  기(機)1와 괄(括)2이 홀로 행하여 어울려 연마할 곳이 없는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무열천(無熱天)이라고 하느니라.

  시방세계를 보는 묘한 작용이 원만하게 맑아서 더 이상 티끌 경계의 형상[塵像]과 일체 잠긴 때가 없는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선견천(善見天)이라고 한다.

  정교한 보는 작용이 앞에 뚜렷이 나타나서 걸림 없이 도야(陶冶; 陶鑄)하는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선현천(善現天)이라고 한다.

  뭇 미세한 요소[幾]를 끝까지 추궁하여 색성(色性)의 본질을 다하고 경계가 없는데 들어가는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색구경천(色究竟天)이라고 한다.

  아난아, 이 불환천(不還天)은 저 모든 사선천(四禪天)의 네 천왕도 홀로 소문으로 듣기만 하고 부러워 할 뿐, 알지도 못하고 본 일도 없으니, 마치 지금 세상에 넓은 들과 깊은 산의 거룩한 도량에는 다 아라한들이 머물고 있으나, 세상의 거친 번뇌에 얽힌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아난아, 이 열 여덟 하늘은 홀로 행하여 애욕의 어울림은 없으나, 아직 형체의 얽힘을 다 벗지 못했으니, 여기까지를 색계(色界)라고 하느니라.

  또 아난아, 색구경천[有頂色邊際]으로부터 그 사이에 또 두 갈래 길이 갈리느니라. 한 갈래는 만일 평등한 마음[捨心]으로 지혜를 밝혀서 지혜의 광명이 원만하게 통하여 곧바로 번뇌의 세간[塵界]을 벗어나서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고 보살 법[菩薩乘]에 들어갔다면, 이와 같은 한 부류를 마음 돌린 대아라한[迴心大阿羅漢]이라고 하며, 또 한 갈래는 만일 평등한 마음(捨心}에 있으면서 평등한 법도 싫어하여 벗어남[捨厭]을 성취하고 몸이 장애임을 깨달아서 장애를 소멸하여 공에 들어갔다면,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공무변처[空處]라고 한다.

  온갖 장애가 이미 소멸되고 장애가 없는 데서[無礙] 그 없는 것[無]마저 멸(滅)하여, 오직 아뢰야식(阿賴耶識)과 말나(末那)의 미세한 세력 절반[半分微細]만이 남아있는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한 부류의 곳을 식무변처[識處]라고 하느니라.

  공(空)과 색(色)이 이미 없어지고 인식하는 마음[識心]도 모두 멸하여 시방이 고요한 가운데, 아득히 돌아갈 곳이 없는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부류의 곳을 무소유처(無所有處)라고 한다.  

  식의 성품[識性]이 움직이지 않는 데서 멸법[滅]을 추궁하고 연마하여, 다함이 없는 가운데 다했다는 성품을 들춰 일으켜서, 있는 듯 하나 있지 않고 다한 듯 하나 다하지 않는 부류가 있으니, 이와 같은 부류의 곳을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하느니라.  

이들은 공을 추궁하였으나 공의 이치를 다하지 못하고, 불환천(不還天)에서 성인의 도[聖道]만을 다한 부류인데, 이와 같은 한 부류를 마음을 돌이키지 못한 둔한 아라한이라고 하며, 만일 무상(無想)의 모든 외도천(外道天)에서 공을 추궁하여 돌아오지 못하고 번뇌에 미혹[迷漏]되어 들은 법이 없으면, 곧바로 윤회에 들어가느니라.  

  아난아, 이 모든 천상(天上)의 각각 천인(天人)들은 범부의 업보로 받은 결과이니, 그 과보가 끝나면 윤회에 들어가나, 저 하늘의 왕들은 곧 보살로서 삼마제(三摩提)를 닦고, 점차 증진하여 성인들의 수행하는 길로 회향(迴向)하느니라.

  아난아, 이 4공천(空天)은 몸과 마음을 멸하여 다하고 선정의 성품이 뚜렷이 나타나서, 업의 과보로 받는 색[業果色]이 없으니, 이로부터 끝까지를 무색계(無色界)라고 한다.  

  이것은 다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망상을 쌓아 발생하는데서 허망하게 3계(界)가 있으니, 중간에 허망하게 일곱 갈래[七趣]를 따라 빠지고 잠기는 중생들[補特伽羅]이 각기 그 종류를 따르는 것이니라.

  또 아난아, 이 3계(界) 가운데 네 종류의 아수라(阿修羅)가 있느니라.

  만일 귀신의 길에서 법을 지킨 힘으로 신통을 부려서 허공에 들어간다면, 이 아수라는 알로 태어나며 귀신의 갈래에 포함되느니라.

  만일 하늘에서 복덕이 감하여 아래로 떨어져서 그 사는 곳이 일월과 가깝다면, 이 아수라는 태로 태어나며 사람의 갈래에 포함되느니라.

  또 아수라의 왕이 세계를 붙들어 쥐고 힘이 넘쳐서 두려움이 없는 가운데, 범왕(梵王)과 제석천(帝釋天)과 사천왕(四天王)과 패권(覇權)을 다툰다면, 이 아수라는 변화로 태어나며 하늘 갈래에 포함되느니라.

  아난아, 별도로 한 종류의 낮고 열등한 아수라가 있어서, 큰바다 한 복판에 태어나서 물이 빠지는 곳[水穴口]에 잠겨 있는 가운데, 아침에는 허공에서 놀다가 저녁에는 물로 돌아와서 자는 경우가 있으니, 이 아수라는 습기로 태어나며 축생의 갈래에 포함되느니라.

  아난아, 이와 같이 지옥(地獄)과 아귀(餓鬼)와 축생(畜生)과 사람[人]과 신선(神仙)과 하늘[天]에서 아수라[阿修羅]까지 일곱 갈래[七趣]를 자세히 추궁해보면, 모두 다 어둠에 잠겨있는 온갖 인연변화의 모양[有爲相]으로서, 망상으로 태어나고 망상으로 업을 따르고 있으나, 미묘하고 원만하고 밝고 인연작용을 떠난 본 마음[無作本心]에는 허공 꽃과 같이 원래 집착할 경계가 없으며 단지 한결같이 허망할 뿐, 더 이상 아무런 근거가 없느니라.

  아난아, 이들 중생이 본래의 마음을 알지 못한 가운데, 생사에 굴러다니면서 한량없는 겁이 지나도록 청정한 진실[眞淨]을 얻지 못하는 까닭은, 다 살생과 투도(偸盜)와 음욕을 따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살생과 투도와 음욕[三種]을 행하지 않으면, 살생과 훔침과 음욕이 없는 곳에 출생하리라. 살생과 투도와 음욕이 있는 곳[有]은 귀신의 무리라고 하며, 살생과 투도와 음욕이 없는 곳[無]은 하늘의 갈래라고 한다. 이렇게 있는 곳[有]과 없는 곳[無]이 번갈아 기울어져서[相傾] 윤회의 근성이 일어나느니라.  

  만일 묘하게 삼마제(三摩提)를 일으킬 수 있는 행자라면, 미묘하고 영원하고 고요하여, 있고 없는 둘이 없어지고, 둘이 없어진 자체도 사라져서, 오히려 살생하지 않고 훔치지 않고 음행하지 않는 자체도 없을 텐데, 어찌 다시 살생하고 음행하고 훔치는 일을 따르겠느냐.

  아난아, 세 가지 업을 끊지 못하는 것은 각 개인의 행위에 있으나, 각 개인의 행위로 인하여 여러 개인이 공동으로 받는 몫[同分]에는 일정한 곳이 없지 않느니라. 스스로 망상에서 발생하였으며 망상은 생긴 원인이 없으니, 추궁하여 찾을 길이 없느니라.  

  네가 열심히 수행하여 보리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 가지 미혹[三惑; 殺盜婬]을 끊어야 한다. 세 가지 미혹을 다 끊지 않으면 비록 신통을 얻을지라도, 다 이 세간의 인연 따라 변하는 공덕작용[有爲功用]일 뿐이다. 습기를 없애지 못하면 마의 길에 떨어지기 때문에, 망상을 없애려고 할지라도 허위(虛僞)만 배로 더할 뿐이니, 이 여래는 가련한 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네가 허망하게 스스로 짓는 일이요, 보리의 허물이 아니니라.

  이렇게 설해야 올바른 말이며, 이와 다른 설은 마왕의 말이니라."

  즉시 여래께서 법회[法座]를 마치려고 하시다가 사자의 자리(師子床)로부터 7보(寶)의 책상을 끌어당기시고 자금산(紫金山)처럼 빛나는 몸을 돌려 다시 기대시면서 널리 대중과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배우는 단계의 연각과 성문이 지금 마음을 돌이켜 대보리(大菩提)의 더없이 미묘한 깨달음으로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이미 진실한 수행법을 설해 왔다. 그러나 너희들은 오히려 사마타(奢摩他)와 비바사나(毗婆舍那)를 수행할 때 생기는 미세한 마군의 일을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마의 경계가 앞에 나타나도 잘 알지 못한다면, 닦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여 삿된 견해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너희들 자신의 음마(陰魔)든지, 혹은 또 천마(天魔)든지, 혹은 귀신이 붙거나, 혹은 도깨비[魑魅]를 만났을 때, 마음속이 밝지 못하여 도적을 자식으로 알거나, 또는 그 가운데서 작은 것을 얻고 만족하면, 제 사선천(四禪天)에 관하여 들어본 적이 없는 비구[無聞比丘]가 성인의 법을 증득했노라고 망언(妄言)하는 가운데, 하늘의 과보가 이미 끝나서 쇠약한 모양이 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아라한도 다시 다음 세상의 몸을 받는다고 하다가 아비지옥[阿鼻地獄]에 떨어진 경우와 같게 되리라. 너희들은 잘 들어라. 내가 이제 너희들을 위하여 자세히 분별하리라."

  아난은 자리에서 일어나 법회의 유학(有學)들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엎드려 자비로운 가르침을 듣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번뇌세계의 12류 중생도 본각(本覺)이 묘하게 밝고 깨달음이 원만한 마음의 본체는 시방부처님과 둘이 없고 다르지도 않으나, 너희들의 허망한 생각으로 진리를 미혹한 것이 허물이 되어, 어리석은 애욕이 발생하고 발생해서는 두루 미혹했기 때문에 허공의 성질이 있으며, 미혹이 쉬지 않고 변화하여 세계가 생겼느니라. 따라서 이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국토는 번뇌가 아닌 것[非無漏者]이 없으며, 모두 다 완고하게 미혹한 망상으로 세워졌느니라. 그러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허공이 네 마음속에서 생겨난 것도 넓고 맑은 하늘에 조각구름인데, 더욱이 온갖 세계가 허공 안에 있는 것이겠느냐.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진리를 밝혀 근원으로 돌아가면, 시방허공도 사라져 없어지는데, 어찌 허공 속에 있는 세계가 흔들려 부서지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선정을 닦아 삼마지(三摩地)를 장엄하여[飾], 시방보살과 무루대아란(無漏大阿羅漢)과 마음의 정기가 꼭 맞아 통해서 그 자리가 맑고 고요지면, 일체 마왕과 귀신과 온갖 범부천(凡夫天)은 그들의 궁전이 까닭 없이 무너지고 대지가 쪼개져서 물과 뭍의 중생들이 모두 어지럽게 날아오르며 두려워하는 모양을 보느니라. 어둠에 묻힌 범부들은 그런 변화를 느끼지 못하지만, 저들은 누진통(漏盡通)을 제외한 5신통(神通)을 갖추고 이 번뇌의 세상[塵勞]을 사랑하고 있으니, 어찌 너희들이 그 곳을 부수도록 내버려두겠느냐. 그러기 때문에 귀신들과 모든 하늘의 마군들과 도깨비[魑魅]들과 요정(妖精)들은 너희들이 삼매(三昧)에 들었을 때, 몰려와서 너희들을 괴롭히는 것이니라.

  그러나 저 온갖 마들이 비록 크게 성낼지라도, 저들은 번뇌 속에 들어 있고, 너는 묘한 깨달음 가운데 있으니, 바람으로 빛을 불어 끄고 칼로 물을 베는 것과 같이 전혀 서로 닿지 않으며, 또 너는 끓은 물과 같고 저들은 굳은 얼음과 같으니, 따뜻한 기운이 점차 가까워지면 얼마 안 가서 녹아버리느니라.  

  저들은 한갓 신력만을 믿고 있으나 단지 손님일 뿐이며, 성취와 파멸은 너희들 마음속의 5음(陰)주인에 달렸느니라. 주인이 미혹하면 손님은 그 틈을 노리겠으나, 당연히 선정[禪那]에 들어서 깨달음에 헷갈림이 없으면, 저 마의 장난은 너를 어찌할 수 없느니라. 5음(陰)을 소멸하여 밝은데 들어가면, 저 삿된 마들은 다 어두운 기운을 받아 태어났음으로, 어둠을 무너뜨리는 밝음이 가까워지면 저절로 사라져버리는데, 어찌 감히 머물러서 선정을 어지럽게 흔들겠느냐.

  만일 밝게 깨닫지 못하여 음마(陰魔)의 홀림을 당한다면, 너 아난은 반드시 마군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마군이 되고 말리라. 저 마등가(摩登伽)는 힘이 나약하여, 오직 주문으로 네 율의(律儀)의 8만 세행(細行) 가운데 단지 한 계율만을 헐려고 하였으니, 그나마 마음이 청정한 까닭에 오히려 빠지지 않았지만, 이 음마(陰魔)가 바로 너의 보배로운 깨달음의 온몸을 무너뜨림은 마치 재상 가문이 졸지에 적몰(籍沒)을 당하여 완전히 헐벗어도 가엾게 여겨 구할 길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아난아, 잘 알아야 한다. 네가 도량에 앉아서 모든 생각이 스러져 없어지다가 그 생각이 다 사라지면, 생각을 떠난 경계가 일체 정교하게 밝아서, 움직임과 고요함이 옮기지 않고 기억과 잊음이 한결같게 되리라. 바로 그 자리에 머물러서 삼마지(三摩地)에 들면, 마치 눈 밝은 사람이 무척 깊은 어둠에 처한 듯 정밀한 성품이 미묘하고 청정하나, 마음은 아직 빛을 발하지 못한다. 이를 '색음(色陰)에 가린 보금자리[區宇]'라고 한다.  

  만일 여기에 눈이 환하게 열려서 캄캄한 모양이 없어지면, 이를 '색음(色陰)이 다 사라진 경계'라고 하며, 이 경계에 이른 사람은 능히 겁탁(劫濁)을 초월하느니라. 그 색음(色陰)에 가린 까닭을 살펴보면 견고한 망상이 근본이니라.

  아난아, 이러한 가운데 묘한 밝음을 정교하게 추궁하면, 4대(大)의 짜임이 풀려서 잠깐사이에 몸이 장애에서 벗어난다. 이를 '정밀한 밝음이 앞 경계에 흘러넘친 상태'라고 한다. 이것은 단지 공덕의 작용으로 잠깐 이러한 경계를 얻을 뿐,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 진실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뛰어난 경계라고 하겠으나, 만일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장 여러 삿된 마의 유혹을 당하느니라.

  아난아, 또 이러한 마음으로 묘한 밝음을 정교하게 연마하여 그 몸속까지 환하게 사무치면, 이 사람은 갑자기 몸속에서 요충이나 회충을 끄집어내어도 몸의 모습이 완전하여 조금도 상하지 않는다. 이를 '정밀한 밝음이 형체에 흘러넘친 상태'라고 한다. 이것은 단지 정진수행으로 잠시 이러한 경계를 얻을 뿐,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 진실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뛰어난 경계라고 하겠으나, 만일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장 여러 삿된 마의 유혹을 당하느니라.

  또 이러한 마음으로 안과 밖을 정밀하게 연마하면, 이 때 현재의 몸[執受身]을 제외한 혼(魂)과 백(魄)과 의(意)와 지(志)와 정신(精神)이 모두 끼어 들어가서 서로 손님과 주인이 되어, 별안간 공중에서 설법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혹은 시방에서 함께 비밀의 뜻을 연설하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를 '정기와 넋이 번갈아 서로 떠나고 합하는 상태'라고 한다. 단지 뛰어난 종자[善種]를 성취하여 잠시 이러한 경계를 얻을 뿐,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 진실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뛰어난 경계라고 하겠으나,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장 여러 삿된 마의 유혹을 당하느니라.

또 이러한 마음이 맑게 드러나고 밝게 사무쳐서 안으로 빛이 밝게 나타나면, 시방이 온통 염부단(閻浮檀)의 금빛이 되고 일체 종류가 여래로 변화한다. 그 때 천광대(天光臺)에 앉아서 천불(千佛)에 둘러싸인 비로자나(毘盧遮那)의 모습과 백억 국토와 연꽃이 한꺼번에 출현하는 모양을 보게 되느니라. 이를 '마음의 넋이 신령한 깨달음에 집착된 상태'라고 한다. 이것은 마음의 빛을 연마하여 밝혀서 온갖 세계를 비추는 가운데 잠시 이러한 경계를 얻을 뿐,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 진실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뛰어난 경계라 하겠으나, 만일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장 여러 삿된 마의 유혹을 당하느니라.

  또 이러한 마음으로 미묘한 밝음을 정밀하게 연마하고 끊임없이 관찰하여, 누르고 항복시켜서 제지하는 힘이 지나치면, 이 때 갑자기 시방 허공이 일곱 가지 보배의 빛깔이 되거나 백 가지 보배의 빛깔로 변하여, 동시에 두루 가득 차서 서로 막히거나 걸리지 않는 가운데, 청색과 황색과 적색과 백색이 각각 순수하게 나타나느니라. 이를 '누르는 공력(功力)이 과분한 상태'라고 한다. 잠시 이러한 경계를 얻을 뿐,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 진실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뛰어난 경계라고 하겠으나,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장 여러 삿된 마의 유혹을 당하느니라.

  또 이러한 마음으로 연마하고 추구하는 가운데 맑음이 사무쳐서 정교한 빛이 어지럽지 않으면, 별안간 한 밤중에 어두운 방안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보아도 대낮과 다름없고, 암실의 물건도 남김없이 그대로 보느니라. 이를 '마음이 세밀하여 보는 작용이 맑아져서 어둠을 뚫어보는 상태'라고 한다. 잠깐 이러한 경계를 얻을 뿐,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 진실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뛰어난 경계라고 하겠으나, 만일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장 여러 삿된 마의 유혹을 당하느니라.

  또 이러한 마음으로 뚜렷하게 비어 융통한 데 들어가면, 사지(四肢)가 갑자기 풀과 나무와 같이 되어 불로 태우고 칼로 잘라도 조금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또는 불에 타지도 않으며, 비록 그 살점을 베어낼지라도 마치 나무를 깎는 것과 같게 되느니라. 이를 '5진(塵)이 병합하여 4대(大)의 성질을 물리치고 한결같이 순수한 데 들어간 상태'라고 한다. 잠깐 이러한 경계를 얻을뿐,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 진실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뛰어난 경계라고 하겠으나, 만일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장 여러 삿된 마의 유혹을 당하느니라.

  또 이러한 마음으로 청정한 경계를 성취하여 깨끗한 마음의 공덕이 극에 달하면, 홀연히 대지와 시방의 산과 강이 다 부처님의 나라가 되어, 거기서 일곱 가지 보배의 빛깔을 두루 갖춘 원만한 광명을 보기도 하고, 또 항하(恒河)의 모래처럼 많은 부처님이 허공세계에 두루 가득한 가운데 누각과 전당이 화려함을 보기도 하며, 아래로는 지옥을 보고 위로는 하늘 궁전을 보기도 하나, 아무런 장애가 없느니라. 이를 '좋아함과 싫어함이 엉긴 생각이 날로 깊어서 생각이 오래 변화한 상태'라고 할 뿐,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 진실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뛰어난 경계라고 하겠으나, 만일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장 여러 삿된 마의 유혹을 당하느니라.

  또 이러한 마음으로 연마하여 추구한 경계가 깊고 멀리 뻗치면, 먼 곳의 저자와 우물과 바른 길[街]과 굽은 길[巷]과 친족과 권속들을 보기도 하고, 그 말을 듣기도 하느니라. 이를 '마음을 다그쳐서 다그침이 극에 달하여 마음이 빛이 날아 오른 탓에 여러 막힌 곳을 뚫어 보는 상태'라고 할 뿐,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 진실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뛰어난 경계라고 하겠으나, 만일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장 여러 삿된 마의 유혹을 당하느니라.

  또 이러한 마음으로 연마하여 추구하는 행이 정교하여 극에 달하면, 선지식의 형체가 옮기고 변하면서 잠깐 동안 까닭 없이 가지가지로 바뀌고 달라지는 모양을 보느니라. 이를 '삿된 마음으로 도깨비[魑魅]를 머금어 받아드렸거나, 심복(心腹)에 들어온 하늘의 마군에게 까닭 없는 설법을 듣고 묘한 뜻을 통달한 상태'라고 할 뿐,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 진실하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마군의 일이 소멸하여 없어지겠으나, 만일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장 여러 삿된 마의 유혹을 당하느니라.

  아난아, 이와 같은 열 가지 선나(禪那)에서 나타나는 경계는 모두 색음(色陰)에서 작용하는 마음이 서로 엇갈려 다투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나타나면 중생들은 완고하게 미혹하여 스스로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서 이러한 인연을 만나면 혼미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성인의 경지에 올랐노라 하면서 대망어(大妄語)를 지어 무간지옥[無間獄]에 떨어지느니라. 너희들은 반드시 이 말을 의지해서 여래가 열반한 뒤에 말법(末法) 세상에 이 뜻을 널리 선양하여, 하늘의 마군들이 방편을 얻지 못하도록 잘 지녀서 덮고 보호하여 더없이 높은 도를 이루게 하여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제(三摩提)와 사마타(奢摩他)를 닦는 가운데 색음(色陰)이 다 사라진 행자는, 모든 부처님의 마음을 밝은 거울에 비친 모양과 같이 환히 보게 되어, 소득이 있는 듯 하나 아직 응용하지 못한다. 마치 가위눌린 사람이 손발이 완전하고 보고 들음이 분명하나, 마음이 객사(客邪)에 저촉되어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를 수음(受陰)에 가린 보금자리[區宇]라고 하느니라.  

  만일 가위눌림의 증세가 없어지고 그 마음이 몸을 벗어나서, 그 얼굴을 돌이켜 보기도 하고, 가고 머묾이 자유로워서 더 이상 막히거나 걸림이 없으면, 이를 수음이 다 사라진 경계라고 하며, 이 경계에 이른 사람은 견탁(見濁)을 초월하느니라. 그 수음(受陰)에 가린 까닭을 살펴보면 비고 밝은 망상[虛明妄想]이 근본이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이러한 가운데서 큰 광명이 환하게 비추는 경계를 얻고, 그 마음이 환하게 밝아서, 안으로 누르는 공이 분에 넘치면, 갑자기 한없는 슬픔이 생겨서, 심지어 모기나 등에를 보고도 발가벗은 갓난아기처럼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을 내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느니라. 이를 '공덕의 작용이 지나치게 억누른 상태'라고 한다. 깨달아 알면 허물이 없으나,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라. 혼미하지 않고 깨달아서 한참 지나고 나면 저절로 사라지지만, 만일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 슬픈 마가 그 심부(心腑)에 끼어들어, 사람을 볼 때마다 한없이 울면서, 삼매[正受]를 잃고 반드시 떨어지고 마느니라.

  아난아, 또 저 선정에 든 선남자들이 색음(色陰)이 사라지고 수음(受陰)이 분명하여, 뛰어난 모양이 앞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나치게 감격하면, 갑자기 그 가운데 한없는 용기가 생겨서, 그 마음이 용맹하여 예리한 나머지 모든 부처님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3아승기겁[三僧祇]을 한 생각에 뛰어넘을 수 있다고 장담하느니라. 이를 '공덕작용이 지나치게 강하여 능멸하는 상태'라고 한다. 깨달아 알면 허물이 없으나,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라. 깨달아 알고 혼미하지 않고 한참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지만, 만일 진실한 경계로 알면 곧 미친 마가 그 심부(心腑)에 끼어들어 사람을 볼 때마다 자랑하여 아만(我慢)이 비길 데 없이 넘쳐서, 그 마음에 위로는 부처님도 보잘것없이 여기고 아래로는 사람도 보잘것없이 여기다가, 삼매[正受]를 잃고 반드시 떨어지고 마느니라.

  또 저 선정에 든 선남자들이 색음(色陰)이 사라지고 수음이 명백한 경계에서, 앞을 보면 새롭게 증득한 경계가 없고, 뒤를 보면 예전에 머물던 곳을 잃게 되니, 지혜의 힘이 쇠약하여 중간이 무너진 자리에 들어간다. 여기서 아득하여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으면, 마음 가운데 갑자기 바싹 마른 생각이 일어나서, 언제든지 그 생각에 잠겨 벗어나지 못하니, 이 바싹 마른 생각을 부지런히 정진할 모양으로 여기느니라. 이를 '지혜 없이 마음을 닦으면서 스스로 잃는 상태'라고 한다. 깨달아 알면 허물이 없으나,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라. 만일 진실한 경지로 알면, 곧 생각에 잠긴 마가 그 심부(心腑)에 끼어들어, 아침저녁으로 마음을 졸이면서 한 곳에 매달리다가, 삼매[正受]를 잃고 반드시 떨어지고 마느니라.

  또 저 선정에 든 선남자들이 색음(色陰)이 사라지고 수음(受陰)이 명백한 모양을 보면, 지혜의 힘이 선정보다 뛰어나서, 지혜의 예리한 용맹으로 선정을 잃고, 모든 것에 가장 훌륭하다는 성질을 마음속에 품어서, 자기 마음에 이미 노사나(盧舍那)가 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조금 얻고 만족하게 여기느니라. 이를 '마음작용이 한결같은 사유[恒審]를 잃고 지견(知見)에 빠진 상태'라고 한다. 깨달아 알면 허물이 없으나,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라. 만일 진실한 경지로 알면, 곧 쉽게 만족하게 여기는 비열한 마가 그 심부(心腑)에 끼어들어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더없이 가장 뛰어난 진리[無上第一義諦]를 얻었노라'고 하다가, 삼매[正受]를 잃고 반드시 떨어지고 마느니라.

  또 저 선정에 든 선남자들이 색음(色陰)이 사라지고 수음(受陰)이 명백한 가운데, 새롭게 증득한 경계는 아직 얻지 못하였고, 예전의 마음은 이미 없어진 것을 보고, 앞뒤의 두 곳[二際]을 두루 살피다가 스스로 어렵고 험한 생각을 내니, 홀연히 마음에 끝없는 근심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마치 철상(鐵床)에 앉은 듯 독약을 마신 듯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니, 항상 남에게 '이 목숨을 해쳐서 빨리 해탈을 얻게 해 달라'고 부탁하느니라. 이를 '수행에 방편을 잃은 상태'라고 한다. 깨달아 알면 허물이 없으나,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라. 만일 진실한 경지로 알면, 곧 한결같이 항상 근심만 하는 마가 그 심부(心腑)에 끼어들어 손에 칼을 들고 스스로 그 살점을 베어내며 목숨 버리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때로는 항상 근심에 잠겨 산중 숲 속으로 달려가서 사람 보는 일을 견디지 못하기도 하다가, 삼매[正受]를 잃고 반드시 떨어지고 마느니라.

  또 저 선정에 든 선남자들이 색음(色陰)이 사라져서 수음(受陰)이 명백한 경계를 보고, 청정한 경계에 처한 가운데 마음이 조용하고 아늑해지면, 별안간 저절로 한없는 기쁨이 생겨서 마음속의 즐거움을 억제할 수 없게 되느니라. 이를 '가볍고 편안한 마음을 스스로 금할 지혜가 없는 상태'라고 한다. 깨달아 알면 허물이 없으나,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라. 만일 진실한 경지로 알면, 곧 한결같이 항상 좋고 기쁘고 즐기기만 하는 마가 그 심부(心腑)에 끼어들어 사람들을 볼 때마다 웃는 가운데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스스로 이미 걸림 없는 해탈을 얻었노라고 하다가, 삼매[正受]를 잃고 반드시 떨어지고 마느니라.

  또 저 선정에 든 선남자들이 색음(色陰)이 사라지고 수음(受陰)이 명백한 경계를 보고, 스스로 이미 만족하게 여겼다면, 별안간 까닭 없이 큰 아만[大我慢]이 일어난다. 이와 같이 아만[慢]과 지나친 아만[過慢]과 아만이 더욱 지나친 아만[慢過慢]과 혹은 얻지 못하고도 얻었다는 아만[增上慢]과 비열한 아만[卑劣慢]이 일시에 함께 일어나느니라. 이 경계에 잡히면 마음속으로 오히려 시방 여래도 가볍게 여기는데, 더욱이 어찌 하위의 성문과 연각을 가볍게 여기지 않겠느냐. 이를 '견해의 뛰어남을 스스로 구제할 지혜가 없는 상태'라고 한다. 깨달아 알면 허물이 없으나,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라. 만일 진실한 경지로 알면, 곧 한결같이 큰 아만[大我慢]만을 부리는 마가 그 심부(心腑)에 끼어들어, 부처님을 모신 탑묘(塔廟)에 예배하지도 않고 경전과 불상[經像]을 부수고 헐면서, 신도[檀越]들에게 "이 불상은 쇠나 구리 이거나 흙과 나무이며, 또 경은 나뭇잎이거나 천이나 비단일 뿐이다. 이 육신(肉身)은 영원한 진리인데 스스로 공경하지 않으면서, 되려 흙과 나무 따위를 숭배하고 있으니, 참으로 뒤바뀐 짓이다"라고 하면, 그 가운데 믿음이 깊은 자는 그를 따라 헐고 부셔서 땅속에 묻어버린다. 이렇게 중생을 의혹시키고 잘못 인도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어가게 하다가, 삼매를 잃고 반드시 떨어지고 마느니라.

  또 선정에 든 선남자들이 색음(色陰)이 사라지고 수음이 명백한 경계를 보고, 정교한 밝음 가운데 원만하고 정밀한 이치를 깨달아, 뜻대로 수순하는 큰 방편[大隨順]을 얻어서, 그 마음이 별안간 한량없이 가볍고 편안해지면, 미리부터 '나는 성인이 되어 대자재를 얻었노라'고 말하느니라. 이를 '지혜로 인하여 가볍고 편안하고 청정한 경계를 얻은 상태'라고 한다. 깨달아 알면 허물이 없으나,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라. 만일 진실한 경지로 알면, 한결같이 가볍고 편안하고 청정하기만을 좋아하는 마가 그 심부(心腑)에 끼어들어 스스로 말하기를 '이대로 만족하니,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들은 흔히 무문비구(無聞比丘)가 되어 중생을 의혹시키고 그르쳐서 무간지옥[阿鼻獄]에 떨어지게 하다가, 삼매[正受]를 잃고 반드시 추락하고 마느니라.

  또 저 선정에 든 선남자들이 색음(色陰)이 사라지고 수음(受陰)이 명백한 경계를 보고, 밝은 깨달음에서 비고 밝은 성품을 얻으면, 그 가운데 홀연히 영원히 멸한 경계로 돌아가서 인과(因果)가 없다고 주장하여 한결같이 공에 들어간다. 따라서 공한 마음이 앞에 나타나면, 마침내 마음에 오래도록 아무것도 없다는 견해[長斷滅解]를 일으키느니라. 깨달아 알면 허물이 없으나,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니라. 만일 진실한 경지로 알면, 곧 공마(空魔)가 그 심부(心腑)에 끼어들어 지계(持戒)를 소승(小乘)이라 비방하고, 보살은 공(空)을 깨쳤으니 지키고 범할 것이 무엇이냐고 호언한다. 이 사람은 항상 신심(信心) 있는 신도[檀越]를 상대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널리 더러운 음욕을 자행하며, 마력(魔力)으로 앞사람들을 홀려 들이니 그들은 의심하거나 비방할 마음을 내지 못한다. 귀신의 마음이 오래 들린 탓에, 혹은 똥과 오줌을 먹는 것이 술 고기를 먹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한가지로 모두 공하다고 하면서, 부처님의 율의(律儀)를 파하고 사람들을 그르쳐 죄에 빠져들게 하다가, 삼매[正受]를 잃고 반드시 떨어지고 마느니라.

  또 선정에 든 선남자들이 색음(色陰)이 사라지고 수음(受陰)이 명백한 경계를 보고, 그 비고 밝은 경계에 잠긴 맛이 마음과 뼛속 깊이 스며들면, 그 마음에 홀연히 한없는 애욕이 생기고 애욕이 극에 달하여 광증(狂症)을 일으켜서, 문득 음욕을 탐내는 행으로 변하느니라. 이를 '마음속에 파고든 안온하고 포근한 선정의 경계를 스스로 단속할 지혜가 없어서 온갖 애욕에 잘못 들어간 상태'라고 한다. 깨달아 알면 허물이 없으나, 진실하게 증득한 경지가 아니다. 만일 진실한 경지로 알면, 곧 음욕의 마가 그 심부(心腑)에 끼어들어 한결같이 음욕을 보리도(菩提道)라고 설하여, 온갖 세속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음욕을 행하도록 교화하여, 음욕을 행하는 것이 법의 아들[法子]을 지키는 일이라고 한다. 귀신의 힘이기 때문에 말세 가운데 그에게 포섭되는 어리석은 범부는 그 수가 백 명에서 일백 명, 이백 명에 이르며, 혹은 5, 6백 명이 되기도 하고, 많게는 천만(千萬) 명이 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마가 마음에 싫증을 내어 그 몸을 떠나서 위덕(威德)이 없어지면, 왕 법의 환난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중생들을 의혹시키고 잘못 인도하여 무간지옥[無間獄]에 떨어지게 하다가, 삼매[正受]를 잃고 반드시 떨어지고 마느니라.

  아난아, 이와 같은 열 가지 선나(禪那)에서 나타나는 경계는 모두 수음(受陰)에서 작용하는 마음이 서로 엇갈려 다투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나타나면 중생들은 완고하게 미혹하여 스스로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서 이러한 인연을 만나면 혼미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성인의 경지에 올랐노라 하면서 대망어(大妄語)를 지어 무간지옥[無間獄]에 떨어지느니라. 너희들은 마땅히 여래의 말을 간직하여 내가 열반한 뒤에 말법(末法)에 전하여 두루 중생들에게 이 뜻을 깨닫게 하고, 하늘의 마군들이 방편을 얻지 못하도록 잘 지녀서 덮고 보호하여 더없이 높은 도를 이루게 하여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제(三摩提)를 닦아서 수음(受陰)이 다 사라지면, 비록 샘의 번뇌는 다 없어지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이 형체를 떠남은 새가 새장을 벗어나듯 이미 범부의 몸으로부터 위로 보살의 60성위(聖位)를 거치는 과정을 잘 성취하여 뜻대로 태어나는 몸[意生身]을 얻고, 가는 곳마다 장애 가 없느니라. 비유하면 깊이 잠든 사람의 잠꼬대와 같다. 잠꼬대하는 사람은 따로 알지 못하고 있으나, 그 말은 소리의 높고 낮은 차례[音韻倫次]를 이루니, 잠들지 않는 옆 사람은 다 그 말을 알아듣는 경우와 같다. 이를 상음(想陰)에 가린 보금자리[區宇]라고 하느니라.

  만일 흔들리는 생각이 사라지고 들뜬 생각이 소멸되면, 깨달음의 밝은 마음에 티끌과 때를 씻은 듯 하고, 한 무리 생사의 처음과 끝[首尾]이 원만하게 비치니, 이를 상음(想陰)이 다 사라진 경계라고 하며, 이러한 사람은 능히 번뇌탁(煩惱濁)을 초월하느니라. 그 상음(想陰)에 가린 까닭을 살펴보면 융통한 망상[融通妄想]이 근본이니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수음(受陰)이 비고 묘하여 삿된 생각을 만나지 않고, 원만한 선정이 밝게 드러난 삼마제(三摩提) 가운데서, 마음이 원만한 밝음을 좋아하여 그 정교한 생각을 날카롭게 돋우고 뛰어난 방편[善巧]을 탐내어 구하면, 그 때 틈을 노려 기다리던 하늘의 마가 정령(精靈)을 날려 보내서 사람에게 붙게 하여 그 사람의 입으로 경법(經法)을 설하게 한다. 이 사람은 마에 잡힌 줄도 모르고 스스로 '더없이 훌륭한 열반을 얻었노라'고 하며, 뛰어난 방편을 구하는 선남자에게 와서 자리를 펴고 설법한다. 설법하는 동안 그 형상은 잠깐사이에 비구로 변하여 그 사람에게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제석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녀(婦女)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비구니가 되기도 하고, 혹은 어두운 방에 자면서 몸으로 광명을 놓기도 한다. 이 선남자는 어리석고 혼미하여 보살로 착각하고 그 교화를 믿는 가운데, 그 마음이 방탕하게 흔들려서 부처님의 율의(律儀)를 파하며 몰래 탐욕을 행하게 되느니라.  

  또 입으로 재앙과 상서의 이변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여, 여래가 어느 곳에 나왔다거나, 최후 겁에 생기는 불의 재앙(劫火)을 말하거나, 혹은 칼부림의 재앙[刀兵]을 설하기도 하여 사람들을 두렵게 하면서, 까닭 없이 그 집안의 재산을 탕진시키느니라. 이것은 괴이한 귀신[怪鬼]이 늙어서 마로 변한 경우인데, 이 사람을 어지럽게 괴롭히다가 만족한 나머지 싫증을 내어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나버리면, 제자와 스승은 함께 왕 법의 환난에 빠지게 되느니라. 네가 마땅히 미리 깨달아 안다면 윤회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미혹하여 알지 못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아난아, 또 선남자가 수음(受陰)이 비고 묘하여 삿된 생각을 만나지 않고 원만한 선정이 밝게 드러난 삼마제(三摩提) 가운데서, 마음이 방탕한 놀이를 좋아하여 그 정교한 생각을 날려 편력[經歷]을 탐내어 구하면, 이때 틈을 노려 기다리던 하늘의 마가 정령을 날려 보내서 사람에게 붙게 하여 그 사람의 입으로 경법(經法)을 설하게 한다. 그 사람 역시 마에 잡힌 줄도 모르고 스스로 '더없이 훌륭한 열반을 얻었노라'고 하며, 저 편력을 구하는 선남자에게 와서 자리를 펴고 법을 설한다. 설법자의 형체는 변함이 없으나, 법을 듣는 사람은 홀연히 보배 연꽃에 앉아 온몸이 황금빛 덩어리[紫金光聚]로 변한 자신을 보느니라. 청중들은 각각 이와 같은 모양을 보게 되니 이전에 본적이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 선남자는 어리석고 혼미하여 보살로 착각하고, 그 마음에 음욕이 넘쳐흘러서 부처님의 율의(律儀)를 파하며 몰래 탐욕을 행하게 되느니라.  

  또 입으로 부처님의 출현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여, 어느 곳의 그 누구는 당연히 어느 부처님의 화신으로 이 곳에 오셨고, 어느 사람은 어느 보살로서 인간을 교화하기 위하여 왔다고 한다. 그 사람은 직접 보기 때문에 몹시 애타는 마음으로 정성을 기울이는 사이에, 삿된 견해가 몰래 일어나고 지혜의 종자는 소멸하느니라. 이것은 가뭄귀신[魃鬼]이 늙어서 마로 변한 경우인데, 이 사람을 어지럽게 괴롭히다가 만족한 나머지 싫증을 내어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나버리면, 제자와 스승은 함께 왕법의 환난에 빠지게 되느니라. 네가 마땅히 미리 깨달아 안다면 윤회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미혹하여 알지 못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또 선남자가 수음(受陰)이 비고 묘하여 삿된 생각을 만나지 않고, 원만한 선정이 밝게 드러난 삼마제(三摩提) 가운데서, 마음에 면밀한 계합을 좋아하여 그 정교한 생각을 깨끗이 하고 완벽한 계합(契合)을 탐내어 구하면, 그 때 틈을 노려 기다리던 하늘의 마가 정령(精靈)을 날려 보내서 사람에게 붙게 하여 그 사람의 입으로 경법(經法)을 설하게 한다. 이 사람은 마에 잡힌 줄도 모르고 스스로 '더없이 훌륭한 열반을 얻었노라'고 하며, 계합(契合)을 구하는 선남자에게 와서 자리를 펴고 설법한다. 설법자의 형체와 듣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다른 변화가 없으나, 듣는 사람들은 듣기도 전에 마음이 저절로 열리어 깨닫게 되고 생각마다 옮겨 바뀌느니라. 때로는 지난 세상의 일을 통[宿命]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他心]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옥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의 좋고 나쁜 온갖 일을 알기도 하고, 혹은 게송을 설하기도 하고, 혹은 스스로 경을 독송하기도 하니, 각각 기쁨에 들떠서 이전에 본적이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 선남자는 어리석고 혼미하여 보살로 착각하고, 그 마음에 은밀히 애착이 생겨서 부처님의 율의(律儀)를 파하며 몰래 탐욕을 행하게 되느니라.

  또 입으로 부처님의 크고 작음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여, 어느 부처님은 앞 부처님이고 어느 부처님은 뒤 부처님으로서, 그 가운데 진짜 부처님과 가짜 부처님과 남자 부처님과 여자 부처님이 있다고 하며, 보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 사람은 직접 보기 때문에 본심(本心)을 씻어 내버리고 쉽게 삿된 깨달음에 빠져드느니라. 이것은 유혹의 귀신[魅鬼]이 늙어서 마로 변한 경우인데, 이 사람을 어지럽게 괴롭히다가 만족한 나머지 싫증을 내어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나버리면, 제자와 스승은 함께 왕 법의 환난에 빠지게 되느니라. 네가 미리 분명하게 깨달아 안다면 윤회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미혹하여 알지 못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또 선남자가 수음(受陰)이 비고 묘하여 삿된 생각을 만나지 않고, 원만한 선정이 밝게 드러난 삼마제(三摩提) 가운데서, 마음이 근본(根本)을 추궁하여 물질이 변화하는 성질의 끝과 시작에 대해서 살피기를 좋아하고, 그 마음을 정교하게 밝히며 가려 분석하는 일을 탐내어 구하면, 그 때 틈을 노려 기다리던 하늘의 마가 정령(精靈)을 날려 보내서 사람에게 붙게 하여 그 사람의 입으로 경법(經法)을 설하게 한다. 이 사람도 역시 이미 마에 잡힌 줄도 모르고 스스로 '더없이 훌륭한 열반을 얻었노라'고 하며, 근원을 구하는 선남자에게 와서 자리를 펴고 설법한다. 이 정령이 붙은 사람은 위신이 넘쳐흐르는 몸으로 근원을 구하는 사람을 꺾어 눌러서 자리 아래에 앉게 하면, 그는 법을 듣기도 전에 자연히 마음이 굴복되고 만다. 그 틈을 타서 '이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부처님의 열반과 보리의 법신을 지녔으니, 바로 현재 우리들의 육신이다. 아버지와 아버지, 자식과 자식이 대를 바꿔 서로 태어나는 자체가, 법신이 영원히 머물러 끊어지지 않음이요, 현재의 모든 것이 곧 부처님의 국토를 가리키는 것이니, 따로 정토[淨居]와 금빛 몸[金色相]이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믿고 받드는 사이에 이전의 마음을 잃고 몸과 목숨을 다 받쳐 귀의하면서 이전에 들은 적이 없는 법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이들은 어리석고 혼미하여 보살로 착각하고, 그 마음을 추구하는 가운데 부처님의 율의(律儀)를 파하며 몰래 탐욕을 행하게 되느니라.

  또 입으로 즐겨 말하기를 '눈과 귀와 코와 혀가 다 정토요, 남녀의 두 생식기는 즉시 보리열반의 진실한 자리'라고 하면, 저 무지한 사람들은 이 더러운 말을 그대로 믿느니라. 이것은 고독귀(蠱毒鬼)나 가위눌림의 악귀[魘勝惡鬼]가 늙어서 마로 변한 경우인데, 이 사람을 어지럽게 괴롭히다가 만족한 나머지 싫증을 내어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나버리면, 제자와 스승은 함께 왕 법의 환난에 빠지게 되느니라. 네가 미리 분명하게 깨달아 안다면 윤회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미혹하여 알지 못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또 선남자가 수음(受陰)이 비고 묘하여 삿된 생각을 만나지 않고, 원만한 선정이 밝게 드러난 삼마제(三摩提) 가운데서, 마음이 미리 감응[懸應]하기를 좋아하여 여러 방면으로 두루 정밀하게 연마하고 은밀한 감응을 탐내어 구하면, 그 때 틈을 노려 기다리던 하늘의 마가 정령(精靈)을 날려 보내서 사람에게 붙게 하여 그 사람의 입으로 경법(經法)을 설하게 한다. 이 사람도 역시 원래 마에 잡힌 줄도 모르고 스스로 '더없이 훌륭한 열반을 얻었노라'고 하며, 감응을 구하는 선남자에게 와서 자리를 펴고 설법한다. 그는 청중(聽衆)에게 잠깐 백천 세를 살아온 듯한 몸을 보여서, 그들이 애착심을 일으켜 버리고 떠날 수 없도록 하면, 그들은 몸종이 되어 음식과 의복과 의약과 침구[四事]로 공양하면서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 또 자리 아래에 있는 각 사람들의 마음에 이전의 스승이나 본래의 선지식(善知識)으로 알도록 하면, 그들은 특별히 법에 애착심을 내어 아교와 옻칠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이전에 없던 법을 얻었다고 한다. 이 선남자는 어리석고 혼미하여 보살로 착각하고, 그 마음을 더욱 가까이하여 부처님의 율의(律儀)를 파하며 몰래 탐욕을 행하게 되느니라.

  또 입으로 즐겨 말하기를 '내가 지난 세상의 어느 생에서 먼저 누구를 제도하여 당시에는 나의 처와 첩과 형제가 되어 살았는데, 또 지금도 서로 만나 제도하게 되었으니, 나는 너희들과 함께 서로 따라서 어느 세계로 돌아가서 어느 부처님께 공양하게 되리라'고 하기도 하며, 혹은 말하기를 '따로 큰 광명이 비치는 하늘이 있어서 그 가운데 부처님이 계시는데, 그 하늘이 바로 일체 여래께서 쉬는 곳이다'라고 하면, 저 무지한 자들은 허망한 거짓말을 믿고 본심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것은 전염병을 퍼뜨리는 여귀(癘鬼)가 늙어서 마로 변한 경우인데, 이 사람을 어지럽게 괴롭히다가 만족한 나머지 싫증을 내어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나버리면, 제자와 스승은 함께 왕 법의 환난에 빠지게 되느니라. 네가 미리 분명하게 깨달아 안다면 윤회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미혹하여 알지 못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또 선남자가 수음(受陰)이 비고 묘하여 삿된 생각을 만나지 않고, 원만한 선정이 밝게 드러난 삼마제(三摩提) 가운데서, 마음이 깊이 들어가기를 좋아하여 자기극복을 부지런히 행하며, 그늘져 고요한 곳에 처하기를 즐기면서 정밀(靜謐)한 경계를 탐내어 구하면, 그 때 틈을 노려 기다리던 하늘의 마가 정령(精靈)을 날려 보내서 사람에게 붙게 하여 그의 입으로 경법(經法)을 설하게 한다. 이 사람도 역시 본래 마에 잡힌 줄도 모르고 스스로 '더없이 훌륭한 열반을 얻었노라'고 하며, 정밀한 경계를 구하는 선남자에게 와서 자리를 펴고 설법한다. 그는 청중들에게 각기 과거의 업[本業]을 알게 하느니라. 때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어느 한 사람에게 '그대는 지금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벌써 축생이 되었구나'라고 말하며, 다른 한 사람을 시켜 뒤에서 꼬리를 밟도록 명령하고 갑자기 그 사람을 일어날 수 없도록 하면, 이를 본 한 무리는 온 마음을 기울여 존경하며 굴복한다. 또 사람이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미리 그 조짐[肇]을 알아내고, 부처님의 율의(律儀)보다 이 법을 더욱 애써 정밀하게 닦아야 한다고 하면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비구를 비방하고 제자[徒衆]들을 꾸짖으며 남의 일을 들춰내느니라.  

  또 입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재앙과 복덕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데, 말한 일은 때가 되면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는다. 이것은 무척 힘센 귀신[大力鬼]이 늙어서 마로 변한 경우인데, 이 사람을 어지럽게 괴롭히다가 만족한 나머지 싫증을 내어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나버리면, 제자와 스승은 함께 왕 법의 환난에 빠지게 되느니라. 네가 미리 분명하게 깨달아 안다면 윤회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미혹하여 알지 못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또 선남자가 수음(受陰)이 비고 묘하여 삿된 생각을 만나지 않고, 원만한 선정이 밝게 드러난 삼마제(三摩提) 가운데서, 마음에 지견(知見)을 애착하여 부지런히 연마하고 추구하여, 숙명통[宿命]을 탐내어 구하면, 그 때 틈을 노려 기다리던 하늘의 마가 정령(精靈)을 날려 보내서 사람에게 붙게 하여 입으로 경법(經法)을 설하게 한다. 이 사람은 달리 마에 잡힌 줄도 모르고 스스로 '더없이 훌륭한 열반을 얻었노라'고 하며, 지견[知]을 구하는 선남자에게 와서 자리를 펴고 설법한다. 이 때 이 선남자는 설법하는 자리에서 까닭 없이 훌륭한 보배구슬을 얻는다. 그 마는 때에 따라 축생으로 변해서 입으로 구슬과 여러 구슬이 어울린 보배와 서적[簡冊]과 예언서[符牘] 등 여러 기이한 물건들을 물어다가 먼저 그 사람에 준 뒤에 그 몸에 붙기도 한다. 때로는 설법 듣는 사람들을 유인하여 땅속에 묻히게 하면, 명월주(明月珠)가 그 곳을 밝게 비치는 것을 보면서, 이 여러 듣는 사람들은 일찍이 본적이 없는 일이라고 한다. 또 약초를 많이 먹고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어떤 때는 날마다 한 알의 삼씨와 한 알의 보리만을 먹어도 그 형체가 살찌고 충실하니, 마의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조금도 거리낌 없이 비구를 비방하고 제자들을 꾸짖느니라.  

  또 입으로 즐겨 말하기를 '다른 지방에 보배를 갈무린 곳이 바로 시방의 성인과 현인이 숨어있는 곳'이라고 하면, 그 뒤를 따라 가본 사람들은 가끔 기이한 사람을 보기도 한다. 이것은 산신[山], 나무 신[林], 토지 신[土地], 성황신[城隍], 내신[川], 산악 신[嶽]이 늙어서 마로 변한 경우인데, 때로는 음욕을 찬양하고 부처님의 계율을 파하여 받들어 섬기는 자들과 몰래 5욕(欲)을 행하기도 하며, 때로는 정진하며 순전히 풀과 나무를 먹기도 한다. 이렇게 일정하지 않는 일을 행하면서, 이 사람을 어지럽게 괴롭히다가 만족한 나머지 싫증을 내어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나버리면, 제자와 스승은 함께 왕 법의 환난에 빠지게 되느니라. 네가 미리 분명하게 깨달아 안다면 마땅히 윤회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미혹하여 알지 못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또 선남자가 수음(受陰)이 비고 묘하여 삿된 생각을 만나지 않고, 원만한 선정이 밝게 드러난 삼마제(三摩提) 가운데서, 마음에 신통(神通)의 가지가 지 변화를 애착하여, 변화의 근원을 연마하고 추궁해서, 신통의 힘을 탐내어 취하려고 하면, 그 때 틈을 노려 기다리던 하늘의 마가 정령(精靈)을 날려 보내서 사람에게 붙게 하여 그 사람의 입으로 경법(經法)을 설하게 한다. 이 사람은 진실로 마에 잡힌 줄도 모르고 스스로 '더없이 훌륭한 열반을 얻었노라'고 하며, 신통[通]을 구하는 선남자에게 와서 자리를 펴고 설법한다. 때로는 손에 불빛[火光]을 잡고 그 빛을 떼어내어 법문을 듣는 사부대중[四衆]의 머리로 나눠보내면, 그 듣는 사람들의 정수리에 두어 자 길이의 불빛이 닿지만, 뜨거운 기운도 없고 타지도 않으며, 때로는 물위를 평지처럼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허공 가운데 편안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병 속에 들어가기도 하며, 때로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기도 하며, 창을 넘고 담을 뚫어 나가기도 한다. 이럴 때는 조금도 장애가 없으나, 오직 칼과 병기에서는 자재하지 못하느니라. 그런 가운데 스스로 부처님이라 하여 세속 옷을 입은 채 비구의 예배를 받으면서, 거리낌 없이 선(禪)과 율(律)을 비방하고 제자들을 꾸짖으며, 남의 일을 들춰내느니라.  

  또 입으로 항상 신통자재(神通自在)를 설하는 가운데, 때로는 사람들에게 곁으로 부처님의 국토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귀신의 힘으로 사람을 미혹시키는 일일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또 음행을 찬탄하여 추잡한 짓이라고 헐지 않고 오히려 남녀의 문란한 온갖 짓이 법을 전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것은 천지간에 무척 힘이 센 산 정령, 바다정령, 바람정령, 강 정령 땅 정령과 오래 묵은[積劫] 일체 풀과 나무의 정매(精魅)와, 혹은 용매(龍魅)이거나, 혹은 수명이 다하여 죽은 신선이 다시 살아나서 도깨비[魅]가 되었거나, 혹은 기한이 다 차서 죽어야할 신선이 그 형체가 없어지지 않고 다른 괴물에 붙어서 된 것들이 늙어서 마로 변한 경우인데, 이 사람을 어지럽게 괴롭히다가 만족한 나머지 싫증을 내어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나버리면, 제자와 스승은 함께 왕 법의 환난에 빠지게 되느니라. 네가 미리 분명하게 깨달아 안다면 윤회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미혹하여 알지 못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또 선남자가 수음(受陰)이 비고 묘하여 삿된 생각을 만나지 않고, 원만한 선정이 밝게 드러난 삼마제(三摩提) 가운데서, 마음이 멸한 경지에 들기를 좋아하여, 변화의 본질[化性]을 연마하고 추궁해서, 심오한 공[深空]을 탐내어 구하면, 그 때 틈을 노려 기다리던 하늘의 마가 정령(精靈)을 날려 보내서 사람에게 붙게 하여 그 사람의 입으로 경법(經法)을 설하게 한다. 이 사람은 끝내 마에 잡힌 줄도 모르고 스스로 '더없이 훌륭한 열반을 얻었노라'고 하며, 공(空)을 구하는 선남자에게 와서 자리를 펴고 설법한다. 설법하는 가운데 대중 속에서 그 형체가 홀연히 공하여 누구도 볼 수 없게 하다가 다시 허공에서 불쑥 나타난다. 이렇게 나타나고 사라짐을 자재하게 행하여, 때로는 그 몸을 유리처럼 투명하게 나타내기도 하고, 때로는 손발을 내밀어 전단향기를 풍기기도 하고, 때로는 대소변을 두터운 벌꿀[石蜜]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계율을 비방하여 헐고 출가를 가볍고 천하게 여기느니라.  

  또 입으로 항상 설하기를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으니, 한번 죽으면 영원히 사라져서 다음 세상의 몸도 없고 범부도 성인도 없다'고 한다. 비록 공적(空寂)한 경계를 얻었다고 하나, 몰래 탐욕을 행하니, 그 탐욕의 기운을 받은 자들도 공한 마음을 얻고 인과가 없다고 주장하느니라. 이것은 일식과 월식[日月薄蝕]의 정기와 금과 옥과 신령한 풀[芝草]과 기린, 봉황, 거북, 학 등이 천만년이 지나도록 죽지 않고 정령이 되어 국토에 출생했다가 늙어서 마로 변한 경우인데, 이 사람을 어지럽게 괴롭히다가 만족한 나머지 싫증을 내어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나버리면, 제자와 스승은 함께 왕 법의 환난에 빠지게 되느니라. 네가 미리 분명하게 깨달아 안다면 윤회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미혹하여 알지 못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또 선남자가 수음(受陰)이 비고 묘하여 삿된 생각을 만나지 않고, 원만한 선정이 밝게 드러난 삼마제(三摩提) 가운데서, 마음에 장수(長壽)를 애착하여 생명의 미세한 틀[幾]을 수고롭게 연마하고 영원한 수명을 탐내어 구해서, 분단의 생사[分段生]를 버리고 단번에 변역의 세밀한 모양으로 영원히 머무는 몸[變易細相常住]을 원하면, 그 때 틈을 노려 기다리던 하늘의 마가 정령(精靈)을 날려 보내서 사람에게 붙게 하여 그 사람의 입으로 경법(經法)을 설하게 한다. 이 사람은 마침내 마에 잡힌 줄도 모르고 스스로 '더없이 훌륭한 열반을 얻었노라'고 하며, 영원한 생을 구하는 선남자에게 와서 자리를 펴고 설법한다. 설법하는 가운데 다른 곳에 막힘없이 왕래하는 능력을 자랑삼아 말하면서, 때로는 만 리 밖에 갔다가 순식간에 다시 오는데, 그 지방의 물건들을 다 가져오기도 하고, 때로는 어느 한 곳에 두서너 걸음 밖에 안 되는 한 방안에서, 사람을 시켜 동쪽 벽에서 서쪽 벽까지 가라고 하면, 이 사람은 급하게 걸어가지만, 수년이 걸려도 도달할 수 없도록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마음으로 믿으면서 부처님이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느니라.  

  또 입으로 항상 말하기를 '시방중생은 다 나의 아들이며, 나는 모든 부처님을 낳았고 내가 세계를 내었다. 나는 근원 부처로서 자연 그대로 세상에 나온 것이며, 닦아서 얻는 경계가 아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세상에 머무는 자재천마(自在天魔)가 그의 권속인 자문다(遮文茶)나 사천왕의 비사동자(毗舍童子)와 같은 발심하지 않는 자들을 시켜서, 그의 비고 밝은 기를 이롭게 여겨 그 정기를 먹게 한 것이니라. 때로는 스승과 관계없이 그 수행자는 집금강(執金剛)이라고 자칭하는 자가 '너에게 긴 수명을 주리라'고 하며 나타낸 아름다운 여자의 몸을 직접 보고 음욕을 탐하여 왕성하게 행하다가, 해를 채 넘기기도 전에 간과 뇌가 고갈되고 만다. 입에 겸한 혼잣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요망한 도깨비처럼 들려도, 이 수행자[前人]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흔히 왕 법의 난에 빠지지만, 채 형벌을 받기도 전에 이미 먼저 말라죽고 마느니라. 마는 이렇게 저 사람을 어지럽게 괴롭히다가 죽음으로 몰아넣으니, 네가 미리 분명하게 깨달아 안다면, 윤회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미혹하여 알지 못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아난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열 가지 마는 말세 때 불법[我法] 가운데 출가하여 도를 닦으면서, 때로는 사람의 몸에 붙기도 하고, 때로는 스스로 형체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말하기를 '나는 이미 두루 다 아는 바른 깨달음을 이뤘노라'고 하며, 음욕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율의(律儀)를 파하면서, 앞서 악마에 걸린 스승과 마의 제자는 음욕과 음욕을 서로 전하느니라. 이와 같이 삿된 정령이 그 마음을 매혹시키는 일은 짧게는 9생(生)에 이르고 길게는 백세(百世)를 넘기면서, 진실한 수행자들을 모두 마의 권속으로 만들어 버리니, 목숨을 마친 뒤에는 반드시 마의 백성이 되어 두루 다 아는 바른 지혜를 잃고 무간지옥에 떨어지느니라.

  너는 이제 명심해서 미리 열반[寂滅]에 들지 말고, 비록 무학(無學)을 얻을 지라도 원을 세워 저 말법 가운데 들어가서 큰 자비를 일으키고, 바른 마음으로 믿음이 깊은 중생들을 구제[救度]하여 마에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하고 바른 지견(知見)을 얻게 하여라. 나는 이제 너를 제도하여 이미 생사를 벗어나게 하였으니, 네가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지켜야만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다고 하리라.

  아난아, 이러한 열 가지 선나(禪那)에서 나타나는 경계는 모두 상음(想陰)에서 작용하는 마음이 서로 엇갈려 다투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나타나면 중생들은 완고하게 미혹하여 스스로 헤아리지 못한다. 그래서 이러한 인연을 만나면 혼미하여 스스로 알지 못하고 성인의 경지에 올랐노라 하면서 대망어(大妄語)를 지어 무간지옥[無間獄]에 떨어지느니라. 너희들은 마땅히 여래의 말을 간직하여 내가 열반한 뒤에 말법(末法)에 전하여 보여서 두루 중생들이 이 뜻을 깨닫게 하고, 하늘의 마군들이 방편을 얻지 못하도록 잘 지녀서 덮고 보호하여 더없이 높은 도를 이루게 하여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제(三摩提)를 닦아서 상음(想陰)이 다 사라지면, 평소에도 꿈과 생각이 소멸하여 자고 깸이 한결같아서, 깨달음의 밝음이 맑게 개인 하늘처럼 비고 고요하여, 거칠고 무거운 앞 경계의 그림자 모양이 없어지느니라. 세상의 대지와 산과 강들을 보아도 거울이 밝게 비치듯 와도 와서 붙는 일이 없고 가도 간 흔적이 없다. 빈 그대로 받아들여 비춰 응해서 전혀 묵은 습기[陳習]도 없고, 오직 하나의 정교한 진실뿐이니라. 여기에 생멸의 근원이 열려 드러남으로, 시방의 12류 중생들이 종류마다 생기는 곳을 죄다 보게 되느니라. 비록 아직은 각 생명이 유래한 시초[各命由緖; 識陰]를 통하지 못했을지라도, 같이 태어나는 공동의 터[同生基]가 마치 아지랑이가 번들거리듯 맑게 흔들리면서 뜬 감관[浮根塵]이 짜이는 구경의 주요 원천[究竟樞穴]을 보느니라. 이를 행음의 보금자리[行陰區宇]라고 한다.

  만일 이 맑게 흔들려 번들거리는 근원의 성품이 그 성품[性] 그대로 원래 고요한 자리[元澄; 識陰]에 들어가서 단번에 원래의 습기를 가라앉히면, 마치 파도가 사라져서 고요한 물로 화한 것과 같은 상태를 행음(行陰)이 다 사라진 경계라고 하며, 이 경계에 든 사람은 능히 중생탁(衆生濁)을 초월하느니라. 그 행음(行陰)에 가린 까닭을 살펴보면, 깊이 숨은 망상[幽隱妄想]이 근본이니라.

  아난아, 잘 알아야 한다. 바른 지견을 얻고 사마타(奢摩他)에 든 선남자들은 밝음을 굳히고 마음을 바로잡아 열 가지 하늘 마가 그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비로소 정교하게 연마하여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이 때 태어나는 근본 종류 가운데 태어나는 근원이 드러난 행자가 저 깊고 맑고 원만하게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원만한 근원 가운데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두 가지 원인이 없다고 주장하는 논리[二無因論]에 떨어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은 근본[本]을 보고 원인이 없다고 주장하느니라. 왜냐 하면 이 사람은 이미 생겨나는 틀이 완전히 무너진 경계를 얻었으니, 눈 감관의 8백 공덕에 의지하여 8만 겁 안에 있는 중생들이 업의 흐름을 따라 굽이돌며 여기서 죽고 저기서 나는 모양을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지 중생이 그 곳에서 윤회하는 모양만 볼 뿐, 8만 겁을 떠나서는 아득하여 본 일이 없으니 '이 세간의 시방 중생은 8만 겁 동안 원인 없이 저절로 있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렇게 헤아리기 때문에 두루 아는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로 타락해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은 끝[末]을 보고 원인이 없다고 주장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사람은 태어나는 데서 이미 그 근본을 보았으니, 사람은 사람을 낳는 줄 알고, 새는 새를 낳고 까마귀는 본래 검고 고니는 본래 희며, 사람과 하늘[天]은 서서 다니고 축생은 기어 다니며, 흰 것은 씻어서 희어진 것이 아니고, 검은 것은 물들여 검어진 것이 아니라고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만 겁 동안 더 이상 달리 바뀌는 일이 없으니, 이제 이 형상을 다할지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본래 보리를 본 적이 없는데, 어찌 다시 보리를 이루는 일이 있겠는가. 마땅히 현재[今日]의 일체 물상은 다 본래 원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느니라. 이러한 생각 때문에 두루 아는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로 타락해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첫 번째 외도가 내세운 원인이 없다고 주장하는 논리[無因論]'라고 한다.

  아난아, 이 삼마제(三摩提)에 든 선남자들은 밝음을 굳히고 마음을 바로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항상 원만한 가운데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네 가지 두루 영원하다고 주장하는 논리[四徧常論]에 떨어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마음과 경계의 본질에서 두 곳이 원인이 없는 이치를 추궁하여 닦고, 2만 겁 가운데 시방 중생이 소유한 생멸은 모두 다 순환하여 잠깐도 흩어지거나 잃지 않음을 알고는 영원하다고 생각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4대(大)의 근원을 추궁하여 네 성질이 항상 머무는 이치를 닦고, 4만 겁 가운데 시방 중생이 소유한 생멸이 모두 다 자체가 항일(恒一)하여 잠깐도 흩어지거나 잃지 않음을 알고는 영원하다고 생각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 여섯 감관[6根; 6識의 뜻]과 7식과 8식[執受; 8식]을 끝까지 추궁하여, 심의식(心意識) 가운데 본원의 유래한 곳은 성품이 영원히 항일하므로 그대로 닦아서, 8만 겁 가운데 일체중생이 순환하여 잃지 않음을 본래 영원히 머무는 진리로 알고, 잃지 않는 성품을 추궁하며 영원하다고 생각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은 '상음[想]의 근원이 다 없어졌으니, 생(生)의 이치는 더 이상 흐르거나 멈추거나 옮기거나 구르는 일이 없다. 생멸을 생각하는 마음이 이제 이미 영원히 멸했으니, 이치 가운데 자연히 생멸이 아닌 법을 성취한 것이리라'고 헤아리는 마음으로 인하여 영원하다고 생각하느니라.  

  이렇게 영원하다는 생각 때문에 두루 아는 바른 지혜를 잃고 외도로 타락해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두 번째 외도가 내세우는 원만한 영원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마제(三摩提)에 든 선남자들은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고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자타(自他)가운데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네 가지 뒤바뀐 소견의 한 편은 영원하지 않고 한 편은 영원하다는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묘하고 밝은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함을 관찰하고는 고요한 경계[湛然]를 구경의 신비한 나[究竟神我]로 여기고, 여기서 생각하기를 '나는 시방에 두루 밝음을 굳혀서 흔들리지 않으나, 일체중생은 나의 마음 가운데서 저절로 생겼다가 저절로 죽을 뿐이니, 나의 심성(心性)은 영원하고 저 생하고 멸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그 마음은 관찰하지 않고,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시방국토만을 두루 관찰하여, 겁이 무너지는 곳을 보고는 끝까지 영원하지 않는 종류[種性]라 하고, 겁이 무너지지 않는 곳을 보고는 끝까지 영원한 경지라고 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 따로 관찰하기를 '나의 마음은 정밀하고 미세함이 마치 미세한 티끌과 같아서, 시방에 흐르고 굴러도 성품은 옮기거나 바뀌지 않는 가운데 이 몸을 생기게 하고 멸하게 한다'고 하여, 그 무너지지 않는 본질을 나의 성품의 영원이라 하고, 일체 생사는 나에게서 흘러나왔으니 영원하지 않는 성질이라고 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은 상음(想陰)이 다 사라졌음을 알고 행음(行陰)의 흐름을 보면서, 행음이 항상 흐르는 상태를 영원한 본질로 생각하고, 색음(色陰)과 수음(受陰)과 상음(想陰)은 이제 이미 멸하여 없으니 영원하지 않다고 하느니라.  

  이렇게 한 편은 영원하지 않고 한 편은 영원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세 번째 외도가 내세운 한 편이 영원하다는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마제(三摩提)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나뉘어진 자리[分位]에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네 가지 한계가 있다는 논리[有邊論]'에 떨어지느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마음으로 태어나는 근원의 흐르는 작용이 쉬지 않는다고 헤아려서, 과거와 미래를 한계 있는 경계[有邊]로 생각하고, 현재 상속하는 마음을 한계 없는 경계[無邊]로 생각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8만 겁을 보면 중생들이 보이지만, 8만 겁 이전은 적막하여 듣거나 본적이 없으니, 듣거나 본적이 없는 곳을 한계 없는 경계라 하고, 중생이 있는 곳을 한계 있는 경계라고 하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이 생각하기를 '나는 두루 알아서 한계 없는 성품을 얻었으니, 저 모든 사람은 내가 두루 아는 경계에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조금도 저들의 아는 성품을 알지 못하는 것은, 저들은 한계 없는 마음을 얻지 못하고 단지 한계 있는 성질만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이 행음(行陰)의 공한 이치를 추궁한 소견으로 마음의 길을 따라 일체중생의 한 몸을 깊이 따져보고, 모두 다 반은 생하고 반은 멸한다고 생각하여, 그 세계의 일체 소유(所有)도 절반은 한계 있는 경계로, 절반은 한계 없는 경계로 밝히느니라.  

  이렇게 한계 있는 경계와 한계 없는 경계를 헤아리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네 번째 외도가 내세운 네 가지 한계 있는 논리[有邊論]'라고 한다.

  또 삼마제(三摩提)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 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지견(知見) 가운데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네 가지 뒤바뀐 소견으로 죽지 않는 뜻을 교란(矯亂)하여 두루 헤아리는 헛된 논리'에 떨어지니라.

  첫째는 이 사람이 변화의 근원을 관찰하여 옮겨 흐르는 곳을 보고는 변한다고 하며, 상속(相續)하는 곳을 보고는 한결같다고 하며, 보이는 곳을 보고는 생(生)이라 하며, 보는 곳이 보이지 않으면 멸(滅)이라 하며, 상속의 원인에서 그 성질이 끊어지지 않는 곳을 불어난다[增]고 하며, 상속하는 가운데 사이[中]가 여읜 곳을 줄어든다[減]고 하며, 각각 생기는 곳을 있다[有]고 하며, 서로 서로 없어지는 곳을 없다[無]고 한다. 이치로는 전체를 다 관찰하면서 마음을 쓸 때는 별도로 보고, 법을 구하는 사람이 와서 그 뜻을 물으면 '나는 이제 생기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불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고 답하여, 언제든지 모두 그 말을 어지럽히면서 앞사람에게 글귀[章句]를 잃게 하느니라.

  둘째는 이 사람이 그 마음이 서로 서로 없어지는 곳을 자세히 관찰하여 무(無)로 인해서 증득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오직 한 글자로 답하여 무(無)라고 말할 뿐, 무(無)라는 말 외에 어떤 말도 하지 않느니라.  

  셋째는 이 사람은 그 마음이 각각 있는 곳을 자세히 관찰하여 유(有)로 인해서 증득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오직 한 글자로 답하여 이것 [是]이라고 말할 뿐 이것이란 말 외에 어떤 말도 하지 않느니라.

  넷째는 이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함께 보다가 그 경계가 갈라지므로 그 마음도 어지러워져서,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있기도 한 것이 곧 없기도 한 것이며, 없기도 한 가운데 있기도 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여 일체를 교란(矯亂)하여 따질 수 없게 하느니라.  

  이렇게 허무(虛無)한 교란을 헤아리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해서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다섯 번째 네 가지 뒤바뀐 소견으로 죽지 않는 뜻을 교란하여 두루 헤아리는 헛된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마제(三摩提)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끝없이 흐르는 경계에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죽은 뒤에 모양이 있다고 마음을 내는 뒤바뀜'에 떨어지느니라.

  혹은 스스로 몸을 굳게 지켜서 색(色)이 바로 나라 하기도 하며, 혹은 나는 원만하게 국토를 두루 머금었다고 보고 나는 색을 소유[有]했다고 하기도 하며, 혹은 저 앞의 인연이 나를 따라 회복된다고 하여 색은 나에게 속했다고 하기도 하며, 혹은 또 나는 행음(行陰)의 상속을 따른다 하여 나는 색 안에 있다고 하기도 하면서, 모두 헤아려 말하기를 '죽은 뒤에 상이 있다'고 하므로, 이와 같이 순환하여 열여섯 모양이 있게 되느니라.

  이로부터 혹은 번뇌는 끝까지 번뇌이고 보리는 끝까지 보리이니, 두 성품이 나란히 달려도 각기 서로 저촉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이렇게 죽은 뒤에 모양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여섯 번째 외도가 내세운 5음(陰) 가운데서 죽은 뒤에 모양이 있다고 마음이 뒤바뀐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마제(三摩提)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 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먼저 멸한 색음(色陰)과 수음(受陰)과 상음(想陰) 가운데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죽은 뒤에 모양이 없다고 마음을 낸 뒤바뀜'에 떨어지느니라.

그 색음(色陰)이 멸한 자리를 보고 형체는 원인 할 곳이 없다고 하며, 그 상음(想陰)이 멸한 자리를 보고 마음에 얽매인 경계가 없다고 하며, 그 수음(受陰)이 멸한 자리를 알고 몸과 마음이 더 이상 연결될 수 없다고 하면서 '음(陰)의 성질이 소멸하여 흩어져버렸으니, 비록 태어나는 이치가 있더라도 수음[受]과 상음[想]이 없음으로 초목과 다를 바 없다. 현재 앞에 있는 이 몸[質]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죽은 뒤에 어찌 더 이상 온갖 모양이 있으랴'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곰곰이 따져서 죽은 뒤에 모양이 없다고 하므로, 이와 같이 순화하여 여덟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견해가 있게 되느니라. 이로부터 혹은 열반의 원인과 결과도 일체 공하여 이름만 있을 뿐, 구경에는 아무것도 없다[斷滅]고 생각하느니라.  

  이렇게 죽은 뒤에 모양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일곱 번째 외도가 내세운 5음(陰) 가운데서 죽은 뒤에 모양이 없다고 마음을 낸 뒤바뀐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마제(三摩提)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 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행음(行陰)이 있는 가운데서 수음(受陰)과 상음(想陰)의 멸한 경계를 겸하여 쌍으로 있고 없는 모양을 헤아려 자체의 모양을 파하면, 이 사람은 '죽은 뒤에 함께 부정[俱非]하는 뒤바뀜을 일으킨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색음(色陰)과 수음(受陰)과 상음(想陰) 가운데서 있는 것을 보아도 있는 것이 아니며, 행음(行陰)이 흘러 옮기는 속에서 없는 것을 보아도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며, 이와 같이 순환하여 음의 경계[陰界]를 추궁하여 다하고 여덟 가지 함께 부정하는 모양[八俱非相]을 한 연[一緣; 四陰의 한 연씩]마다 따라 얻고는, 다 죽은 뒤에 유상(有相)이며, 무상(無相)이라고 말하느니라.  

  또 온갖 행(行)의 성질이 옮겨 달라진다고 헤아리기 때문에, 마음에 통하여 깨달았다는 생각을 일으켜 유무(有無)를 함께 부정하면서 허와 실을 종잡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죽은 뒤에 함께 부정하는 경계를 헤아림에 따라 뒤의 경계는 어리둥절하여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보리의 성품을 잃어버리느니

라. 이를 '여덟 번째 외도가 세운 5음(陰)가운데서 죽은 뒤에 함께 부정하는 마음이 뒤바뀐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마제(三摩提)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 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뒤로 계속 없는 곳에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7단멸론(斷滅論)'에 떨어지느니라.  

  혹은 몸[身; 欲界의 人天]을 단멸이라 생각하고, 혹은 욕심이 다한 곳[欲盡; 初禪天]을 단멸이라 하며, 혹은 괴로움이 다한 곳[苦盡; 二禪天]을 단멸이라 하고, 혹은 지극히 즐거운 곳[極樂; 三禪天]을 단멸이라 하며, 혹은 지극히 평등한 곳[極捨; 四禪天과 無色界]을 단멸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순환하여 일곱 경계를 끝까지 추궁하여, 현재 눈앞에 소멸하여 멸하고 나면 더 이상 돌아오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斷滅]고 헤아리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보리의 성품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아홉 번째 외도가 세운 5음 가운데서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소견으로 마음이 뒤바뀐 논리'라고 한다.

  또 삼마제(三摩提)에 든 선남자들이 굳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로 잡아 마가 틈을 노릴 수 없는 경계에 들었으니, 태어나는 종류의 근본을 추궁하게 되느니라. 여기서 저 깊고 맑게 항상 요동하는 근원을 관찰하다가, 뒤로 계속 있는 곳에서 생각을 일으켜 헤아리면, 이 사람은 '다섯 열반(涅槃)의 논리'에 떨어지느니라.

  혹은 욕계천[欲界]을 바르게 굴려 의지할 곳[正轉依]으로 삼는 것은 원만한 밝음을 보고 애착하여 사모하기 때문이며, 혹은 초선천[初禪](을 바르게 굴려 의지할 곳으로 삼는 것)은 성품에 근심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이선천(二禪天)(을 바르게 굴려 의지할 곳으로 삼는 것)은 마음에 괴로움이 없기 때문이며, 혹은 삼선천(三禪天)(을 바르게 굴려 의지할 곳으로 삼는 것)은 지극한 기쁨이 따르기 때문이며, 혹은 사선천(四禪天)(을 바르게 굴려 의지할 곳으로 삼는 것)은 괴로움과 즐거움이 다 없어서 생멸의 윤회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뇌가 있는 하늘을 무위(無爲)의 경지로 잘못 알고, 다섯곳의 안온함을 뛰어나게 깨끗한 의지처(勝淨依)로 여기고, 이렇게 순환하여 다섯 곳을 구경(究竟)으로 삼느니라.  

  이렇게 다섯 곳을 현재 그대로 열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도로 타락하여 보리의 성품을 미혹하느니라. 이를 '열 번째 외도가 세운 5음(陰) 가운데서 다섯 곳을 현재 그대로 열반이라는 소견으로 마음이 뒤바뀐 논리'라고 한다.

  아난아, 이러한 열 가지 선나(禪那)의 미친 견해[狂解]는 모두 행음(行陰)에서 작용하는 마음이 서로 엇갈려 다투는 까닭에 이러한 깨달음이 나타나지만, 중생들은 완고하게 미혹하여 스스로 헤아리지 못해서, 이러한 경계가 앞에 나타나면 미혹을 견해[解]로 삼고 스스로 성인의 경지에 올랐노라 하면서 대망어(大妄語)를 지어 무간지옥[無間獄]에 떨어지느니라.  

  너희들은 반드시 여래의 말을 간직해서 내가 열반한 뒤 말법(末法)에 전하여, 중생들이 두루 이 뜻을 깨달아서 마음의 마가 스스로 깊은 재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여 삿된 견해를 소멸케 하여라. 또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진실한 뜻을 열어 깨닫도록 가르쳐서 더없이 높은 도에 헷갈린 길[枝岐]을 만나지 않게 하고, 마음에 조금 얻고 만족하게 여기는 일이 없게 하여, 부처님[大覺王]이 목적한 청정한 뜻을 이루도록 하여라.  

  아난아, 저 선남자가 삼마제(三摩提)를 닦아서 행음(行陰)이 다 사라지면, 모든 세간의 본질[性]인 깊고 맑게 요동하는 공동의 생명 틀[同分生機]에서 문득 미세하게 잠긴 주요매듭[沈細綱紐]이 허물어지고, 또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업을 갚는 깊은 맥에서 감응(感應)이 멀리 끊어지니, 열반의 하늘에 장차 크게 깨달음이 밝으려는 조짐은 마치 나중에 우는 닭소리를 듣고 동쪽을 돌아보면 이미 정교한 빛깔이 있는 것과 같으니라. 이에 여섯 감관이 비고 고요하여 더 이상 치달음이 없고 안과 밖이 고요히 밝아서 들어가도 들어갈 곳이 없는데 이르러, 시방의 12류 중생이 생명을 받는 근원[元]과 유서[由]를 깊이 사무쳐서 유서(由緖)를 보고 근원을 잡으니, 온갖 종류가 생명을 불러들이지[召] 못한 가운데, 시방의 유정 경계[界]에 이미 동화[同]하는 능력을 얻게 되며, 정교한 색(色)이 잠기지 않고 그윽한 생명의 비밀[幽祕]이 열려 나타나느니라. 이를 식음(識陰)의 보금자리라고 한다.

만일 여러 종류들이 생명을 불러들이는 곳에서 이미 동화하는 능력을 얻은 가운데, 여섯 문[六門; 六根]을 소멸하고 합쳐 여는 능력을 성취하면, 보고 듣는 작용이 가깝게 통해서 서로 융통한 작용[互用]이 청정하여, 시방세계와 몸과 마음이 폐유리(吠瑠璃)와 같이 안과 밖이 밝게 사무친 상태를 식음(識陰)이 다 사라진 경계라고 하며, 이 경계에 이른 사람은 능히 명탁(命濁)을 초월하느니라. 그 식음(識陰)에 가린 까닭을 살펴보면, 있는 듯 하나 없는 모양이 허무한 뒤바뀐 망상[罔象虛無顚倒妄想]이 근본이니라.

  아난아, 잘 알아야 한다. 선남자가 모든 행음(行陰)이 공한 이치를 추궁하여 식음[識]에서 근원을 돌이켜 이미 생멸을 멸했으나, 적멸(寂滅)의 정밀하고 미묘한 경지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니 자기 몸에 따로 막혀 작용하는 감관을 합쳐 열고, 시방의 온갖 종류와 통하여 깨달아서 깨달아 아는 작용이 꼭 맞게 뚫려야만, 원만한 근원으로 들어갈 수 있느니라.  

  여기서 만일 돌아갈 곳에 영원한 진리의 원인[眞常因]을 세우고 이를 훌륭한 경지로 알면, 이 사람은 원인을 세운 곳에 원인을 두는 집착에 떨어져서, 사비가라(娑毘迦羅)와 같이 명제(冥諦)로 돌아가 의지하는 무리와 벗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여 지견(知見)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첫 번째 소득(所得)이 있는 마음을 세우고 돌아간 결과[所歸果]를 성취하는 자'라고 하며, 여기에 원만한 통달을 멀리 어기고 열반성(涅槃城)을 등져서 외도의 종류로 태어나느니라.

  아난아,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行陰)이 공한 이치를 추궁하여 이미 생멸을 멸했으나, 적멸(寂滅)의 정밀하고 미묘한 경지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만일 돌아갈 곳[識陰]을 자체(自體)로 보고 '온 허공세계의 12류 중생은 모두 나의 몸속에서 한 종류로 흘러나왔다'고 하며, 이를 훌륭한 경지로 알면, 이 사람은 할 수 없는 데서 할 수 있다는 집착에 떨어져서, 마혜수라(摩醯首羅)와 같이 한없는 몸을 나타내는 무리와 벗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고 지견(知見)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두 번째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세우고 할 수 있는 일의 결과[能事果]를 성취하는 자'라고 하며, 여기에 원만한 통달을 멀리 어기고 열반성(涅槃城)을 등져서 나는 두루 원만하다는 대만천(大慢天)의 종류로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行陰)이 공한 이치를 추궁하여 이미 생멸을 멸했으나, 적멸(寂滅)의 정밀하고 미묘한 경지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만일 돌아갈 곳에 돌아가 의지할 곳이라 하여, 스스로 의심하기를 '몸과 마음은 저기에서 흘러나왔으며, 시방의 허공도 다 저기에서 생겨났다'고 하면, 곧 모두 일으켜 떨쳐 흐르는 자리[都起所宣流地]를 영원히 머무는 진리의 몸[眞常身]으로 여겨 생멸이 없는 법으로 아느니라. 이것은 생멸 가운데 있으면서 미리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常住]라고 생각한 것이니, 이미 생멸을 떠난 진리도 모를 뿐 아니라, 생멸 자체도 미혹한 것이니라. 이렇게 편안히 머물러 미혹에 잠겨 있으면서 이를 훌륭한 경지로 알면, 이 사람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집착하는 경계에 떨어져서 자재천(自在天)과 같이 생각하는 무리와 벗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고 지견(知見)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세 번째 의지하는 마음[因依心]을 세우고 허망한 헤아림의 결과를 성취하는 자'라고 하며, 여기에 원만한 통달을 멀리 어기고 열반성(涅槃城)을 등져서 뒤바뀐 원만의 종류로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行陰)이 공한 이치를 추궁하여 이미 생멸을 멸했으나, 적멸(寂滅)의 정밀하고 미묘한 경지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만일 아는 경계에서 아는 능력이 두루 원만한 까닭에 아는 능력을 따라 견해를 세우면, '시방의 풀과 나무들도 다 유정(有情)으로서 사람과 다름이 없으니, 풀과 나무들은 사람이 되고 사람은 죽어서 다시 시방의 풀과 나무가 되는 일을 가리지 않고 두루 안다'고 하느니라. 이를 훌륭한 경지로 알면, 이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집착하는 경계에 떨어져서 파타(婆吒)나 선니(霰尼)와 같이 일체를 깨달았다는 무리와 벗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고 지견(知見)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네 번째 원만하게 아는 마음을 헤아려 허망하고 그릇된 결과를 성취하는 자'라고 하며, 여기에 원만한 통달을 멀리 어기고 열반성(涅槃城)을 등져서 뒤바뀐 지견의 종류로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行陰)이 공한 이치를 추궁하여 이미 생멸을 멸했으나, 적멸(寂滅)의 정밀하고 미묘한 경지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만일 원만하게 융통한 감관이 서로 작용하는 가운데서 이미 순조롭게 따르는 능력을 얻고는, 곧바로 '원만한 변화에서 일체가 발생한다'고 하여, 불의 요소에서 광명(光明)의 이치를 구하고, 물의 요소에서 맑은 이치를 즐기고, 바람의 요소에서 두루 흐르는 이치를 좋아하고, 흙[塵]의 요소에 성취하는 이치를 관찰하여, 각각 숭배하고 섬기면서, 이 여러 요소[群塵]가 일으켜 짓는 근본원인을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로 여기는 견해를 세우면, 이 사람은 생멸이 없는 법[無生]을 생긴다는 집착에 떨어져서, 모든 가섭파(迦葉波)와 바라문(婆羅門)들과 같이 열심히 마음을 닦고 몸을 부려 불을 숭배하고 물을 섬기며 생사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무리와 벗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고 지견(知見)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다섯 번째 숭배하고 섬기는 일을 생각해서 집착하고 마음을 미혹하여 물체를 따르면서 허망하게 구하는 원인을 세우고 허망하게 바라는 결과를 찾는 자'라고 하며, 여기에 원만한 통달을 멀리 어기고 열반성(涅槃城)을 등져서 뒤바뀐 변화의 종류로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行陰)이 공한 이치를 추궁하여 이미 생멸을 멸했으나, 적멸(寂滅)의 정밀하고 미묘한 경지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만일 뚜렷이 밝은데서 밝음이 텅 비었음을 헤아려 온갖 변화를 완전히 멸[非滅; 絶滅]하여, 영멸의(永滅依; 外道의 涅槃)로써 돌아가 의지할 곳을 삼고, 이를 훌륭한 경지로 알면, 이 사람은 돌아갈 곳이 없는 데를 돌아가려는 집착에 떨어져서, 무상천(無想天)의 순야다(舜若多; 空性에 집착한 部類)들과 벗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고 지견(知見)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여섯 번째 원만하게 비어 없는 마음[圓虛無心]으로 공하여 없는 결과를 성취하는 자'라고 하며, 여기에 원만한 통달을 멀리 어기고 열반성(涅槃城)을 등져서 단멸(斷滅)의 종류로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行陰)이 공한 이치를 추궁하여 이미 생멸을 멸했으나, 적멸(寂滅)의 정밀하고 미묘한 경지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만일 원만하여 영원히 변함이 없는 자리[圓常]에 몸을 굳혀 영원히 머물러서, 정밀한 원만함과 한 가지로 영원히 죽지 않으려고 하며, 이를 훌륭한 경지로 알면, 이 사람은 탐하지 않아야 할 것을 탐내는 집착에 떨어져서, 아사타(阿斯陀)들과 같이 긴 수명을 구하는 무리와 벗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고 지견(知見)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일곱 번째 생명의 근원을 집착하여 견고한 허망의 원인[妄因]을 세우고 긴 수고로움의 결과로 향하는 자'라고 하며, 여기에 원만한 통달을 멀리 어기고 열반의 성[涅槃城]을 등져서 허망하게 수명을 늘리는 종류로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行陰)이 공한 이치를 추궁하여 이미 생멸을 멸했으나, 적멸(寂滅)의 정밀하고 미묘한 경지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생명이 서로 융통함을 관찰하고 문득 번뇌[塵勞]에 머물러서, 그것이 스러져 사라질까 염려하여, 곧 이 기회에 연화궁전에 앉아서 널리 일곱 가지 보배를 변화시키고, 보배로운 아가씨들을 많이 불려서, 마음껏 즐기려고 하며 이를 훌륭한 경지로 알면, 이 사람은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여기는 집착에 떨어져서, 타기(吒枳)와 가라(迦羅)들과 벗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고 지견(知見)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여덟 번째 삿된 사유의 원인[邪思因]을 일으켜 진로번뇌를 치성케 하는 결과[熾塵果]를 세운 자'라고 하며, 여기에 원만한 통달을 멀리 어기고 열반의 성을 등져서 천마(天魔)의 종류로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行陰)이 공한 이치를 추궁하여 이미 생멸을 멸했으나, 적멸(寂滅)의 정밀하고 미묘한 경지는 아직 원만하지 못하느니라. 생명이 밝은 가운데서 정밀과 거칢[麤]을 분별하여 진실과 허위를 결단하고, 인과(因果)를 서로 갚는다 하여, 오직 감응(感應)만을 구하면, 청정한 도를 등지느니라. 이른바 고(苦)를 보고 집(集)을 끊으며, 멸(滅)을 증득하여 도를 닦아서, 멸(滅)에 머물러 이미 쉬어 버리고, 더 이상 닦아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니, 이를 훌륭한 경지로 알면, 이 사람은 정성성문(定性聲聞)에 떨어져서 얻은 법 없이 얻었다고 교만을 부리는[增上慢者] 무식한 비구[無聞僧]들과 벗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고 지견(知見)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아홉 번째 정밀하게 응하는 마음을 원만히 갖춰서 열반[寂]으로 향하는 결과를 성취하려는 자'라고 하며, 여기에 원만한 통달을 멀리 어기고 열반성(涅槃城)을 등져서 공(空)에 얽매인 종류로 태어나느니라.  

또 선남자가 모든 행음(行陰)이 공한 이치를 추궁하여 이미 생멸을 멸했으나, 적멸(寂滅)의 정밀하고 미묘한 경지가 아직 원만하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만일 원만 융통하고 청정한 깨달음이 밝은 데서, 깊고 묘함을 밝히고 연마하여 곧 열반이라 주장하고 더 이상 닦아나가지 않으면서, 훌륭한 경지로 알면, 이 사람은 정성벽지(定性辟支)에 떨어져서 연각(緣覺)과 독각(獨覺)들과 벗이 되어, 부처님의 보리를 미혹하고 지견(知見)을 잃게 되느니라. 이를 '열 번째 깨달음의 융통한 마음을 원만히 갖춰서 고요한 밝은 결과를 성취하려는 자'라고 하며, 여기에 원만한 통달을 멀리 어기고 열반의 성을 등져서 깨달음을 원만하게 밝히려고 하나 원만하게 밝히지 못하는 종류로 태어나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열 가지 선나(禪那)를 닦다가 중도에 미치는 것은 미혹을 의지한 탓이며, 만족하지 못한 가운데 만족하게 증득했다는 생각을 내는 것도 다 이 식음(識陰)에서 작용하는 마음이 서로 엇갈려 다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리에 나지만, 중생들은 완고하게 미혹하여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이런 경계가 앞에 나타나면, 각기 애착해온 이전 습기로 마음이 미혹하여 스스로 멈춰 쉬면서, 장차 최후에 돌아갈 편안한 자리로 여기고 스스로 말하기를 '더없이 높은 보리를 만족하게 성취했노라'고 하며 대망어(大妄語)를 짓느니라. 그러다가 외도(外道)와 사마(邪魔)는 받은 업이 끝나면 무간지옥[無間獄]에 떨어지고,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은 더 이상 향상하지 못하느니라.  

  너희들은 명심해서[存心] 여래의 도를 간직하여 이 법문을 가지고, 내가 열반한 뒤 말법(末法)에 전해서, 널리 중생들에게 이 뜻을 깨달아 알게 하여 견마(見魔)로 하여금 스스로 깊은 재앙을 짓지 않게 할 것이며, 잘 보호하여 가엾게 여겨 구제해서 삿된 인연을 소멸시키고, 그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견에 들게 하고 처음부터 성취해서 갈림길을 만나지 않도록 하여라.  

  지난 세상 항사겁(恒沙劫)의 미진(微塵) 여래께서도 이 법문을 의지하여 마음을 열고 더없이 높은 도를 얻으셨느니라.  

  식음(識陰)이 다 사라지면 현재 너의 모든 감관은 서로 융통하게 작용할 것이며, 서로 융통하게 작용하는 가운데 보살의 금강간혜(金剛乾慧)에 들어가면, 뚜렷이 밝고 정밀한 마음이 그 속에서 일으키는 변화는 마치 깨끗한 유리 안에 보배의 달을 먹음은 듯 하리라. 이와 같이 10신(信)과 10주(住)와 10행(行)과 10회향(迴向)과 4가행심(加行心)과 보살이 행할 금강10지(地)를 뛰어넘어 등각(等覺)이 원만하게 밝은 가운데, 여래의 묘장엄해(妙莊嚴海)로 들어가서 보리를 원만하게 성취하여 얻을 법이 없는 경지로 돌아가느니라.  

  이 법문은 바로 과거 부처님 세존께서 사마타(奢摩他)의 비바사나(毗婆舍那)에서 깨달음의 밝은 지혜로 분석하신 미세한 마의 일이니, 마의 경계가 앞에 나타났을 때 네가 잘 알아서 마음의 때를 씻고 삿된 견해에 떨어지지 않으면, 음마(陰魔)는 소멸하고 천마(天魔)는 꺾여 무너지고, 힘센 귀신은 넋을 잃고 달아나며, 이매망양(魑魅魍魎)은 더 이상 나오지 않으리라. 그러면 바로 보리로 나아가는데 모자란 일들이 없으니, 열등한 자[下劣; 二乘]들도 증진(增進)하여 대열반(大涅槃)에 마음이 미혹하거나 답답하지 않으리라.

  만일 말세에 우둔한 중생들이 선나(禪那)도 모르고 설법할 줄도 모르면서 삼매(三昧)를 즐겨 닦을 때, 네가 그들이 삿된 마[邪]와 함께 어울릴 것을 염려한다면, 나의 불정다라니주(佛頂陀羅尼呪)를 권하여 일심으로 지니게 하여라. 만일 외우지 못할 경우에는 선당(禪堂)에 써 붙이거나 몸에 지니기만 해도, 일체 온갖 마가 흔들 수 없느니라. 너는 마땅히 시방 여래께서 끝까지 닦아 나아가도록 최후에 내리신 모범을 존중해야 하느니라."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머리를 조아려 정중히 받들어 기억하여 잃지 않고, 대중가운데서 다시 또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5음(陰)의 모양 가운데 다섯 가지 허망이 본래 생각하는 마음[本想心]'이라고 하셨으나, 저희들은 평소에 여래로부터 자세한 가르침을 받들지 못했습니다.

  이 5음(陰)을 한꺼번[倂]에 없애야 합니까, 아니면 차례로 없애야 합니까. 또 이러한 다섯 겹은 어디까지를 경계로 정해야 하겠습니까.  

  부디 여래께서는 큰사랑을 베푸셔서 이 대중의 마음과 눈을 깨끗이 밝혀주

 시고, 말세(末世)의 일체중생에게도 장래의 안목이 되게 하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정밀하고 진실하고 미묘하고 밝은 본각(本覺)은 원만하고 청정하여 생사와 온갖 티끌 번뇌와 때 번뇌와 내지 허공까지도 머문 일이 없으니, 모두 허망한 생각으로 발생하여 일어난 경계이니라. 원래 본각(本覺)이 묘하고 밝고 진실하고 정밀한데서, 허망하게 온갖 물질 세간이 발생했으니, 마치 연야다(演若多)가 제 머리를 미혹하고 그림자로 잘못 안 일과 같으니라.  

  망상이 원래 원인이 없는데, 허망한 생각 가운데 인연의 성질을 세우기도 하고, 인연을 미혹한 자는 자연이라고 하나, 저 허공의 본질도 실제는 오히려 환영(幻影)으로 생겼으니, 인연과 자연도 다 중생의 허망한 마음으로 헤아릴 뿐이니라.  

  아난아, 망(妄)이 일어난 곳을 안다면 망의 인연을 설하겠으나, 망이 원래 없다면 망의 인연을 설한다 해도 원래 아무것도 없는데, 더욱이 어찌 알지 못하고 자연으로 미루겠느냐.  

  그러므로 여래는 너에게 5음의 본 모양은 다같이 망상이라고 밝힌 것이니라.

  너의 몸은 당초에 부모의 생각으로 생겨났으나, 네 마음이 생각하지 않았다면, 생각 가운데 와서 생명을 전할 수 없었으리라. 내가 앞서 '마음으로 신맛을 생각하면 입에서 침이 생기고, 높은 벼랑에 오른다고 생각하면 발바닥이 시큼하다'고 말했듯이, 높은 벼랑이 있지도 않고 신 물건이 오지도 않았는데, 네 몸이 분명 허망과 통하는 종류가 아니라면, 어째서 신 이야기를 따라 입에서 침이 나오겠느냐. 그러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현재 너의 색신(色身)을 첫 번째 견고망상(堅固妄想)이라고 하느니라.  

  또 말한 바와 같이 높은데 오른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너의 형체에 실제로 시큼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여기에 수음(受陰)이 생긴 까닭에 몸[色體]을 움직일 수 있게 하였으니, 네가 지금 현재 이익은 따르고 손해는 어기는 두 가지가 뚜렷이 달리는 작용을, 두 번째 허명망상(虛明妄想)이라고 하느니라.

  네 생각으로 네 몸[色身]을 부리고 있는데, 몸은 생각의 종류가 아님에도,  

 너의 몸은 무슨 이유로 생각의 부림을 따라 가지가지로 본뜨고[取像] 마음이 나면 몸[形]이 취해서 생각과 상응하여, 깨어 있는 동안은 생각하고 잠자는 동안은 꿈을 꾸겠느냐. 이렇게 너의 생각이 흔들리는 허망한 정[妄情]을 세 번째 융통망상(融通妄想)이라고 하느니라.

  변화하는 이치가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여 가만히 옮기는 가운데, 손톱이 자라고 털이 나고 기운이 스러지고 용모가 쭈그러지면서 밤낮으로 서로 바뀌고 있으나, 잠깐도 깨닫지 못하느니라. 아난아, 이것이 만일 네가 아니라면 어째서 몸이 변하며, 만일 분명 진정한 너라면 어째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냐. 이렇게 너의 모든 행음(行陰)이 생각마다 멈추지 않는 작용을 네 번째 유은망상(幽隱妄想)이라고 하느니라.

  또 너의 정밀하고 밝고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곳을 영원히 변치 않는 경지[恒常]라고 한다면, 몸에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이 나오지 않아야 하며, 또 만일 참으로 정밀하고 진실한 경지[精眞]라면 망(妄)을 익히는 작용을 용납하지 않아야 하리라. 그런데 무슨 이유로 너희들은 예전에 본 기이한 물건을 여러 해가 지나서 기억하는지 잊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가, 뒤에 홀연히 이전의 기이한 물건을 다시 보면, 분명하게 기억하여 조금도 잃지 않는 것이냐. 이 정교한 앎이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가운데 생각마다 받아 훈습하는 작용을 어떻게 헤아리겠느냐.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고요한 경계도 진실이 아니니라. 마치 급하게 흐르는 물이 겉으로 보기엔 담담하여 조용한 듯 하나, 흐름이 빨라서 보이지 않을 뿐, 흐름이 없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이것이 만일 생각의 근원이 아니라면 어찌 생각의 습기[想習]를 받아들이겠느냐. 네 여섯 감관의 서로 융통한 작용이 합쳐 열리지 않는다면, 이 망상은 사라질 때가 없으리라. 그러므로 네가 지금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이 가운데를 꿰어 익히는 미세한 기미[中串習幾]이니라. 이것이 고요히 아는 속에 있는 듯한 모양이 허무한 상태[罔象虛無]를 다섯째 전도미세정상(顚倒微細精想)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이 5수음(受陰)은 다섯 망상으로 이뤄졌느니라.

  너는 이제 원인의 경계[因界]가 얕은지 깊은지를 알고자 하였으니, 물질[色]과 공(空)은 색음(色陰)의 가장자리[邊際]이고, 닿음[觸]과 뗌[離]은 수음(受陰)의 가장자리이며, 기억[記]과 잊음[忘]은 상음(想陰)의 가장자리이고, 사라짐[滅]과 생김[生]은 행음(行陰)의 가장자리이며, 고요한 데 들어가서 고요함과 합함은 식음(識陰)으로 돌아가는 가장자리니라.

  이 5음(陰)은 원래 겹겹으로 겹쳐 생겼으니, 생기는 법[生]은 식음(識陰)을 근거로 있으나, 멸하는 법[滅]은 색음(色陰)으로부터 제거하느니라. 이치[理]로는 단번에 깨달아서 깨달음을 따라 모두 소멸할 수 있으나, 실제[事]로는 단번에 없애지 못하니 수행절차를 밟아 없애야 하느니라. 나는 이미 너에게 겁바라천(劫波羅天)수건의 매듭으로 밝혔는데, 무엇이 분명하지 않아서 다시 또 묻는 것이냐.

  너는 마땅히 이 망상의 근원으로 마음을 열어 통하고 나서, 장래 말법(末法)의 수행자들에게 전하여 허망함을 알고 깊이 싫어하는 생각이 저절로 우러나게 하며, 열반이 있음을 알고 3계(界)에 연연하지 않게 하여라.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시방에 두루 원만한 허공에 가득 찰만한 7보를 가지고, 티끌처럼 많은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서 잠시도 헛된 마음으로 보내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이렇게 부처님께 보시한 인연으로 얼마나 많은 복을 받겠느냐.

  아난이 답했다.

  "허공도 다함이 없고 보배도 끝이 없다고 하셨으니, 옛날 어떤 중생은 부처님께 7전(錢)만을 보시하고도, 오히려 몸을 버린 뒤에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었는데, 더욱이 이 눈앞의 허공을 이미 다하고 부처님의 국토가 가득 차도록 모두 진보(珍寶)를 보시한 일이겠습니까. 겁이 끝나도록 말하거나 생각해도 오히려 따를 수 없는데, 이 복이 어찌 또 끝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제불여래(諸佛如來)의 말씀에는 허망함이 없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몸에 네 가지 무거운 죄와 열 가지 바라이(波羅夷) 죄를 가득 짊어지고 순식간에 이 곳 저 곳의 아비지옥(阿鼻地獄)을 겪어야 할 지경이거나, 심지어 시방의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끝까지 두루 다 겪어야 할 지경이라도, 일념(一念)으로 이 법문을 가지고 말겁(末劫) 가운데 배우지 못한 이들을 깨우칠 수 있다면, 이 사람의 죄와 업장은 생각 따라 소멸해서, 그 받을 지옥고통의 원인은 변하여 안락한 국토가 되느니라. 따라서 얻는 복도 앞의 칠보로 보시한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 백배 천배 천만억 배이며, 이렇게 계속 계산[算數]하고 비유(譬喩)해도 따를 수 없느니라.

  아난아, 또 만일 어떤 중생이 능히 이 경을 외우고 이 주문을 지닌다면, 내가 아무리 겁이 끝나도록 오래 설할지라도 다 설할 수 없느니라. 내가 가르친 말[敎言]을 의지해서 가르친 대로 도를 행한다면, 바로 보리를 성취하여 더 이상 마의 업이 없어지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설하시자, 비구와 비구니와 우바새(優婆塞)와 우바이(優婆夷)와 모든 세상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와 다른 곳에서 온 보살과 이승(二乘)과 성선동자(聖仙童子)와 처음 발심한 대력귀신(大力鬼神)들은 모두들 무척 기뻐하면서 예를 올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1 화살을 쏘는 용수철, 곧 생각을 놓는다는 뜻이다.

----------------------------------종(終)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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