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도가
115. 마치면 업장이 본래 공함이요 마치치 못하면 도리어 묵은 빚 갚으리로다.
요즉업장이 본래공이요 미료환수상숙채로다.
了卽業障 本來空 未了還須償宿債
우리가 공부를 다해 마치면 업장이 본래 공하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린다'고 했듯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자성을 깨칠 것 같으면 깨침과 동시에 모든 업이 본래 공해서 모두가 다 무너져 버리고 업이 거기에 설 수 없어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한 부사의 해탈경계만이 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업이니 뭐니 하는 것은 찾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면 자기가 전생에 지어놓은 업에 따라서 자기의 빚을 다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경각을 성취하여 진여본성을 바로 깨칠 것 같으면 자유자재한 해탈경계 속에서 업이든 뭣이든 다 얼음덩이가 부숴져 녹아내리 듯이 되어 버리는데 그러기 전에는 모든 지은 업을 다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조금 문제가 붙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정해진 없은 면하기 어렵다[定業難免]'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 말씀과 영가스님의 말씀과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조(二祖) 혜가(慧可)대사가 달마대사의 정법을 받아서 삼조 승찬 대사에게 전한 뒤에,
'나는 업도(業都)로 가서 묵은 빚을 갚으리라.'
하고는 업도로 훌쩍 떠났습니다. 거기 가서 형편에 따라 설법을 하니, 한 마디를 법문함에 사부대중이 모두 귀의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중생을 교화하기 삼사년을 지내고는 드디어 자취를 감추고 겉모양을 바꾸어 술집도 드나들고 푸줏간에도 찾아가고 거리의 잡담도 익히고 품팔이도 하면서 처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호호탕탕하게 자재한 생활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상히 생각하여 묻기를 '스님은 도인이신데 왜 이런 일을 하십니까?'
하니, 혜가스님이 '내 스스로 마음을 조복시키기 위함이요 다른 뜻은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업도에서 가까운 안현(安縣)의 광구사(匡救寺)에 변화(辯 和)법사라는 이가 있어서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혜가 스님이 그 절 삼문 밖에 와서 무상정법(無上正法)을 설하니, 대중이 [열반경]을 듣다가 혜가스님 법문하는 곳으로 가버리고 변화법사의 강석에는 사람이 없다시피 되었습니다. 자기는 죽자하고 애써서 [열반경]을 설해왔는데 대중들이 이제 자기의 법문을 듣지 않고 혜가스님이 법문하는 곳으로 다 가버리니 속으로 어찌나 화가 났는지 분함을 참지 못하고 현령인 적중간(翟仲侃)에게 가서 무고를 했습니다.
'저 중은 미친 놈이고 삿된 견해를 가진 외도입니다. 앞으로 그냥 놓아두면 불법에만 해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도 큰 해를 끼칠 테니 저런 놈은 살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저 놈은 나의 강석(講席)도 무너뜨렸습니다.'고하니,
이에 적중간은 사실을 자세히 살피지도 아니하고 거짓말에 속아서 혜가대사를 목을 베어 죽여버렸습니다.
그것이 서기 593년이고 혜가스님의 당시 세수는 107세라고 합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혜가스님은 비명에 죽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빚을 갚는다고 했으니 빚을 갚았다고 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말해야 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흔히 전생 빚이 있어서 빚을 갚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뜻이 정반대가 되어 버립니다. 누구든지 구경각을 성취해서 자유자재한 해탈경계에 들어갈 것 같으면 업장이 본래 공해서 업보를 받을래야 받을 수 없으며 거기서는 업장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것인데 만약 빚을 갚았다고 하면 혜가스님이 공부를 다 마쳐서 대법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 빚을 갚지 않았다고 하면 분명히 맞아 죽었으니 그것은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순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혜가스님을 중생들이 볼 때는 분명히 맞아 죽었지만 혜가스님이 구경각을 성취해서 업장이 본래 공하다고 하는데 대해서는 추호도 모순이 없습니다. 만약 모순이 있다고 본다면 원융무애한 중도정견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변견으로써 자기의 사량복탁(思量卜度)으로 오해하는 것이지 실지로 알고 보면 혜가스님에게는 부족함이나 흠이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장사 잠(長沙岑)스님에게 호월공봉(皓月供奉)이라는 분이 물었습니다.
'이조 혜가스님이 빚을 갚았다 하니 혜가스님은 업장이 본래 공함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이야말로 업장이 본래 공함을 모르는구료.'
'어떤 것이 본래 공함입니까?'
'업장이 본래 공함이니라.'
'어떤 것이 업장입니까?'
'본래 공함이 업장이니라.'
이 문답은 완전히 모순입니다. 업장이 본래 공함이고 본래 공한 것이 업장이라는 것이니, 이 말은 변견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업장과 본래 공함이 융통자재한 곳에서 하는 말입니다. 중생이 볼 때는 업장과 본래 공함이 둘입니다. 그래서 '이조 혜가대사가 빚을 갚았다 하면 본래 공함이 아닌 것이고 본래 공했다면 빚을 갚을 수 없다'는 것이니, 이렇게 보게 되면 업장도 모르고 본래 공함도 모르는 순전히 양변에 떨어진 견해입니다.
그런데 실지로 자기가 확철히 깨쳐서 중도를 정등각하게 되면 업장과 본래 공함이 완전히 부정되어서 업장도 놓아버리고 본래 공함도 놓아 버려서 업장과 본래 공함이 융통자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는 업장이 본래 공함이고 본래 공함이 업장이어서 무애자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볼 때는 빚을 갚은 것 같아도 갚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본래 공함이라 하든지 업장이라 하든지 간에 거기에는 추호도 모순이 없습니다. 중생의 변견으로서는 거기에 분명히 모순이 있지만 이것은 중생의 업식망정으로 추측하는 착오된 견해이며 깨친 분상에서는 업장과 본래 공함이 둘이 아닌 것입니다. 중생이 볼 때는 아무리 빚을 갚은 것 같고 정해진 업을 면하지 못하는 것 같아도 이것은 중생을 위한 방편일 뿐 실지로는 본래 공함 그대로이며 무애자재함 그대로라 중생이 업을 받는 것 하고는 근본적으로 틀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은 구경각을 성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정해진 업을 그대로 갚아야 할 때는 업 그대로여서 실지로 자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경각을 성취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빚을 갚는다해도 거기에는 대자유가 있고 갚지 않는다 해도 대자유가 있어서 자유자재한데는 조금도 모순이 없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선가에서는 '생사 없음을 쓴다[用無生死]'고 합니다. 아무리 생사를 받고 업을 그대로 받고 빚을 갚는다 하더라도 실지에 있어서는 하나도 업을 받을 것이 없고 빚을 갚을 것이 없으며 생사를 받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말로만 없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구경각을 성취해서 색즉시공(色卽是 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실천된 데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실천되면 혜가대사나 부처님이나 빚을 갚았으니 정해진 업을 면하지 못하느니 하는 것도 본래 공함과 절대로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장사스님이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假有元非有(가유원비유)요 '거짓 있음이 원래로 있음이 아니요
假滅亦非滅(가멸역비멸)이니 거짓 없어짐도 또한 없어짐이 아니니
涅槃償債義(열반상채의)가 열반과 빚 갚음의 뜻이
一性更無殊(일성경무수)로다]' 한 성품으로 다시 다름이 없도다.
있다 있다 하지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있다는 이대로가 공이며, 없다 없다 하지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있는 것이며, 있다 하여도 있는 것이 아니요, 없다 해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있는 것이 곧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니, 결국 있음과 없음을 떠나서 있음과 없음이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 여기에 생사가 있을 수 있으며 업을 받고 받지 않음이 성립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반이란 모든 것이 다 끊어져서 둥글고 밝아 항상 고요하게 비치는 대자유 경계를 말한 것이며, 상채의(償債義)란 중생이 생사윤회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되면 둘이 모순되는 것 같은데 대자유한 경계에 있어서는 열반이라 해도 괜찮고 상채의라 해도 괜찮으며, 빚을 갚는다 해도 좋고 자유라 해도 좋은 것입니다.
'한 성품으로 다시 다름이 없다'는 것은 모든 내용이 똑같아서 구별이 따로 있거나 서로가 모순 충돌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래야만 비로소 불법을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애자재한 경계를 스스로가 잘 모르고서 일변에 집착하여 혜가스님이나 부처님을 비판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살일 뿐 이니라 여독은 다른 사람까지 다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성철스님 증도가 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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