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괴로움과 괴로움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
세존은 형이상학적 질문 답 없이
괴로움 소멸 실천하는 길만 설해
여래에 대한 설명도 인습적인 것
초기·대승 모두 ‘인간붓다’로 해석
‘상윳따 니까야’의 장로품에 붓다께서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오온(五蘊)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에 대해 설한 법문이 수록되어 있다. 아홉 명의 제자는 아난다, 띳사, 야마까, 아누라다, 왁깔리, 앗사지, 케마까, 찬나, 라훌라 존자 등이다. 특히 그 가운데 아누라다 존자에게 설한 붓다의 가르침(Anurādha-sutta)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한때 아누라다 존자는 웨살리의 중각강당에서 멀지 않은 숲속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많은 외도 유행자들이 아누라다 존자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아누라다여, 그분 여래는 최상의 사람이며, 최고의 사람이며, 최고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여래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러한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십니다.”
이렇게 말하자 아누라다 존자는 외도 유행자들에게 “이렇게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네 가지 경우로 천명한다’고 말하면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자 외도 유행자들은 “이 비구는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인 모양이다. 만일 장로라면 어리석고 우둔한 자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여기서 외도 유행자들이 붓다를 최상의 사람, 최고의 사람, 최고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네 가지 경우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해당된다. 즉 붓다가 답변하지 않은 무기(無記) 질문이기 때문에 붓다께서도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답변했던 것이다. 그러나 외도 유행자들은 오히려 아누라다 존자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신참이라고 힐난했던 것이다.
아누라다 존자는 외도 유행자들이 떠난 후, ‘만약 그 외도 유행자들이 더 질문을 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누라다 존자는 붓다를 찾아뵙고 외도 유행자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붓다께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붓다는 먼저 분석적 방법으로 오온을 해체하여 오온 각각이 무상이고 괴로움이고 무아임을 천명한다. 그리고 오온에 대한 염오・이욕・해탈・해탈지견을 성취하여 아라한이 되는 것에 대해 자세히 설한다. 그런 다음 다섯 가지 방법으로 지금・여기(현재)에서 전개되고 있는 오온을 여래라고 볼 수 없다고 단정한다. 이것을 근거로 내생에 여래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언급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고 아누라다 존자에게 일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누라다 존자를 칭찬하고 이렇게 말한다. “아누라다여, 나는 예전에도 지금에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SN.Ⅲ.119) 이 부분을 각묵 스님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첫째는 세존께서 사후의 문제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의 소멸에 도달하는 실천적인 길을 설할 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는 여래란 무상한 여러 현상들이 합성된 것이요 그래서 괴로움이요 그래서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그래서 이것은 단지 인습적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에 대한 모든 사유나 설명은 단지 인습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습적인 것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인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만을 천명한다는 것이다. 각묵 스님은 첫 번째 이해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 번째 해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자는 붓다께서 “나는 예전에도 지금에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천명할 뿐이다”라고 선언한 이 대목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오직 붓다의 관심은 중생들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붓다께서 일생동안 설한 가르침은 오직 중생들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설법이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한편 이 경에서 외도 유행자들이 붓다를 “최상의 사람(uttama-purisa), 최고의 사람(parama-purisa), 최고에 도달한 사람(parama-pattipatta)”으로 평가했다. 이것은 여래십호 가운데 무상사(無上士)에 해당된다. 무상사(anuttara)란 ‘위없이 높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즉 두 발 가진 사람 가운데 제일 높은 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삼귀의문에 나오는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의 원래 뜻은 ‘두 발 가진 이 가운데 가장 높으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육조단경’에서부터 양족(兩足)을 복덕과 지혜를 구족한 부처님으로 번역함으로써 원래의 뜻이 훼손되었다. 그래서 다른 한역 삼귀의문에서는 그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귀의불무상존(歸依佛無上尊)’으로 번역했다. 즉 가장 높으신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뜻이다.
또 대승경전에 속하는 ‘발보리심경(發菩提心經)’에서는 붓다를 이족존(二足尊)으로 번역했다. 즉 “사람이 능히 보리심을 일으키면 이족존(二足尊)이 될 수 있는 바, 이것을 큰 이익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족(二足)이란 두 다리로 걷는 자, 즉 사람을 가리킨다. 사람 중에서 가장 존귀한 분을 일컫는 말이다. 또 다른 한역 경전인 ‘최무비경(最無比經)’에 “이제 저는 사람 중에서 가장 존귀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歸依佛兩足中尊)”로 나타난다.
또 ‘법화경’ 제1권(T9, p.6b)에서도 ‘첨앙양족존(瞻仰兩足尊)’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인간 붓다이며 불교의 교주이신 석가세존께 경의를 표명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경전은 물론 대승경전에서도 삼귀의문에 나오는 불(佛)을 인간 붓다로 해석했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12호 / 2019년 1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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