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할 일을 살펴라”
남이 한 일은 곧 남의 허물이니
남의 허물 보지 말라는 가르침
혜능은 남 허물 시비로 평정 잃어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이유 설명
부조리 개선도 분노 없어야 정당
한 여인이 사왓티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나체 고행자인 빠티까(Pāṭhika)를 아들처럼 여기고 그의 수행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살고 있던 여인의 친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매우 감탄해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도 한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싶다는 뜻을 빠티까에게 말했지만 그는 완강히 반대했다.
여인은 부처님을 자기의 집으로 초대하여 공양을 베풀고 법문을 듣기 위해 아들을 부처님이 계시는 제따와나로 보냈다. 그런데 아들은 먼저 빠티까를 만났다. 빠티까는 그녀의 아들에게 공양을 초대하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들은 빠티까가 시키는 대로 했다. 한편 여인은 부처님이 오실 것을 대비하여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꽃으로 장엄한 다음 부처님께서 앉으실 자리도 훌륭하게 준비해 놓았다.
다음날 아침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받을 그녀의 집으로 곧장 오셨다. 여인은 너무나 기뻐서 집 밖으로 나가 부처님을 맞아들여 준비된 자리에 모시고 오체투지로 예를 올렸다. 그런 다음 맛있는 음식을 부처님께 공양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마치고 그녀의 공양 공덕을 칭찬하셨다. 그녀가 너무 기뻐했으므로 부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더 ‘사두, 사두’ 하고 칭찬해 주었다. 그래서 그녀의 기쁨은 한층 고양되었다.
이런 광경을 뒷방에 숨어서 지켜보던 빠티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뒷방에서 뛰어나오면서 여인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더 이상 나와는 관계가 없소! 당신은 나를 공양하면서 어떻게 이런 사람의 설법에 환희심을 낸단 말이오?” 빠티까는 흥분한 나머지 여인과 부처님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다. 그러자 여인은 마음이 흐트러져 부처님의 설법에 마음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으신 채 말씀하셨다.
“여인이여, 정법을 배우는 자는 그런 외도의 말 따위에 신경을 쓰거나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정법을 배우는 자는 단지 자기 자신의 착한 업과 착하지 않은 업에만 마음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설법한 후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남의 잘못이나 남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살피지 말고, 다만 자신이 한 일들과 하지 않은 일들을 살펴야 한다.”(Dhp. 50) 이 게송에서 ‘남이 한 일’이란 하지 말아야 하는 일, 즉 남의 허물을 뜻하고, ‘남이 하지 않은 일’이란 마땅히 해야 할 일, 즉 계행을 지키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한역 ‘법구경’에서는 “남의 허물(過失)을 보지 말라. 타인의 행위나 혹은 옳지 못한 일을 보지 말라. 다만 자기의 한 일과 할 일을 보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의 선문헌에도 이와 똑같은 법문이 설해져 있다. 이를테면 돈황본 ‘육조단경’ 제20단에 “만약 움직임 없는 마음을 닦고자 하면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허물을 보지 않아야 자성이 동요되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몸은 동요되지 않도록 하면서, 입만 열면 다른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말하고 있으니 불도에 위배된다.(若修不動者, 不見一切人過患, 是性不動. 迷人自身不動, 開口卽說人是非, 與道違背)”고 했다. 이 대목은 꼭 나를 두고 한 법문처럼 느껴졌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하지만 왜 남의 허물을 보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육조혜능은 남의 허물을 보고 옳고 그름을 따지면 자신의 마음이 동요하여 평정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수행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고 경책했던 것이다.
혜능은 ‘단경’ 제38단에서도 “항상 자기에게 허물이 있음을 보고, 불도에 계합하여 하나가 되도록 하라. 만약 참된 수도인이라면 세간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 세간의 허물을 본다면 자기의 허물은 도리어 늘어난다. 타인의 잘못은 나의 죄가 아니지만, 나의 잘못은 자신의 죄가 된다”고 했다. 특히 ‘참된 수도인이라면 세간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若眞修道人, 不見世間愚)’는 구절은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에 나오는 말씀이다.
또 ‘단경’ 제46단에서 혜능이 제자 신회에게 “내가 보기도 한다는 것은 항상 자기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 또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는 것은 천지인(天地人)의 잘못(罪過)을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고 했다.
혜능이 지은 ‘금강경해의’에 “사람의 나쁜 것을 보더라도 그 허물을 보지 말라(見人作惡, 不見其過)” 또 ‘역대법보기’에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한 수행을 하며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보지 않으며, 입과 마음으로 타인의 허물을 사량하지 않으면 삼업은 자연히 청정하게 된다.” ‘임제록’에서도 “만약 진정한 학도인(學道人)이라면 세간의 허물을 보지 않으며, 정법을 볼 수 있는 진정한 견해를 갖추는 일이 시급한 일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과 역대 조사들은 한결같이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수행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의 청정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선불교에서는 이 대목을 선수행자의 윤리로서 자신을 경책하는 자경문(自警文)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나 단체의 비리나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체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법과 제도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고(社會苦)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저항이 필수적이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마하트마 간디가 실행했던 비폭력을 전제로 ‘분노 없는 저항’이어야 한다. 분노심은 자신을 망가뜨리는 근본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당한 주장일지라도 분노에 의한 폭력 시위는 그 정당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축제와 같은 시위여야 한다는 뜻이다.
남의 허물을 보고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은 나의 가장 큰 단점이다. 이 때문에 많은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으며, 또 필요 이상으로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다. 너무나 잘못된 행위였음을 절실히 느낀다. 이 글은 나 자신을 경책하기 위한 것임은 말할 나위없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16호 / 2019년 1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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