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돈오점수)
와 몰록(돈오돈수)에
관한 이야기
글 | 법현스님
무상법현(無相法顯);스님
-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한국불교에 현실적으로 가까이 다가와 힘들게 하는 주제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다. 수행자 또는 학자들 사이에 오래된 토론 주제가 있다. ‘ 점점 시나브로(漸) 깨달음을 얻는가, 한 번에 몰록(頓) 깨닫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깨달음 자체가 문제로 떠오르기도 한다. 깨달음이 있기는 한가? 누구나에게 가능한가? 어떤 상태를 깨달음 또는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가? 이런 소재들을 가지고 토론을 진행하지만 토론은 어디까지나 토론일 따름이다. 그래도 토론은 매우 쓸모 있는 규명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토론은 또 다른 법거량(法擧量)이기 때문이다.
한 번에 몰록 깨닫는다는 말은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해왔다. 점점 시나브로 깨닫는다는 말은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해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많이 그리고 오랫동안 이야기해왔으나 아직 해결이 나지 않았다. 뜻밖에도 이 문제는 매우 쉬운 문제인데 어렵게 생각해왔다. 원인과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 닦음과 깨달음 곧 수행과 오도의 관계는 어떤가? 마찬가지다. 닦음의 결과 깨달음이 온다. 어떻게 닦아야 깨달음이 오는가의 문제로 다퉜다기보다는 깨달음이 어떻게 오는가를 두고 가름이 있어왔다. 한 번에 다 오는가, 점점 시나브로 오는가를 두고 다퉜다. 오는가와 왔다는 데는 다툼이 없었다. 온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이는 싯다르타 곧 샤카무니붓다이다.
어떻게 또는 언제 오는가에 관한 가름이나 다툼이 있었다. ‘점점 시나브로 온다와 한 번에 몰록 온다’의 다툼이라고 이해해왔다. 그것을 이름 해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라고 한다. ‘돈수해서 돈오한다’는 말과 ‘점수해서 돈오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점수를 하던 돈수를 하던 돈오한다는 데는 말이 없다. ‘점수를 하던 돈수를 하던 깨달음 자체는 돈오’라고 해온 것이다. 이른바 난독의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 바른 이해의 금을 떠야 한다. 뜬금없는 질문과 대답 사이에서 뜬금 있는 질문과 대답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생각해보자. 아니 깊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먼저 대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로 나눠 얘길 하는데 앞에 돈오를 붙여놓고 돈수나 점수로 나눌 필요가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필요 없다. 살펴보자면 이렇다. 점수를 통해 점오를 한다는 말을 긍정적으로 볼 때 99.99%는 안 오, 덜 오다. 0.01%가 더해질 때가 순간이다. 그렇게 본다면 깨달음은 몰록 온다는 돈오밖에 없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점오의 마지막 사람이 아난다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결집하려는 모임에 참여하려는데 마하가섭이 아난다에게 ‘넌 아라한 되지 않았으니 오지마라.’ 고 했다 한다. 아난다가 대분심을 일으켜 수행해도 깨달아 아라한이 되지 않아서 그날은 더 정진하기를 포기하고 잠들 무렵에 깨달았다고 한다. 이 말은 테라와다에서도 마하야나에서도 같이 쓴다. 그날 밤 아난다가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아라한이 됐다는 거다. 이거나 저거나 관계없이 어떻게 해도 깨닫는 건 순간이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어서는 안 되는 거다. 마지막 걸음을 걸어야 깨달은 거니까. 점, 돈을 나눌 필요가 없다, 그런 생각이다. 재미있게 볼 것은 깨달으려는 의지나 의욕을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욕구 또는 번뇌라고 볼 것이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번뇌인가? 욕망인가? 원력이기에 욕망이나 번뇌라고 하면 안 되는가? 결론은 깨달으려는 의지,욕구,원력도 깨닫기 전에는 방해 되는 번뇌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또 알아야 할 것은 번뇌인 깨달으려는 의지,욕구,원력이 없으면 시작되 되지 않고 이어지지도 않으며 열매를 맺어 깨닫게 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마지막 시간에 깨달으려는 의지,욕구,원력이 스러질 때 깨달음이 온다는 점이다.
생활불교라는 말 속에 동네사람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약간 낮은 이미지가 있다. 그 표현을 살리고 싶다면 생활참선, 생활포교라고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 생활 속에서 참선이 가능하다. 생활하는 것이 참선이다. 염불하면서도, 자기 혼자 정진을 위한 염불을 해야 한다. 염불하는 이가 누구인가를 마음에 새기면서 하는 염불을 해야 한다. 바로 염불선이다. 염불선을 낮춰보는 경향이 있는데 잘못된 생각이다. 염불선(念佛禪)은 초기불교의 불수념(佛隨念,buddhānussati) 곧 부처님의 덕성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하는 염불이다. 수행승과 교화승으로 나누지 않았는가? 실제로 수행 후 교화를 해야 하는데 수행승이 더 멋져보였다. 교화승은 수행 이후에 하는 건데 교화승이 더 낮아져보였단 말이다. 그래서 교화승이라는 말을 지금은 거의 쓰지 않고 있다. 그런 것처럼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어가 있다. 그걸 버릴 수는 없다. 부처가 가장 비판한 게 바라문인데 경전을 보면 '진짜 바라문은 우리다.' 라는 말을 쓴다. 그 말은 결국 프레임 론에 걸렸다는 것이다. 바라문이란 말을 쓰고 싶지 않으면 안 써야 불교가 분명한 건데 사람들이 바라문이라는 말을 좋아하니까 내가 진짜바라문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 이미지가 있다.
종정, 방장 뿐만 아니고 현재의 거의 모든 선사들이 흔히 말하는 지게미를 먹고 산다. 실제로 처음 나온 말들은 그 당시 그 동네, 여항에서 쓰던 말을 말 주제(話頭)로 삼아서 했던 것이다. 중국 당나라, 송나라시대 천오백년 전 이야기다. 그것도 이웃나라 이야기를 자꾸 써 먹으려고 한다. 그건 인용만 해먹을 뿐 정확하게 쓰여서는 안 될 옛 이야기다. 오늘의 언어로 오늘의 상황에 맞게 해야 의미가 있다. 쓰임새가 있다. 흔히 말하는 활구(活句)다. 예를 들어 보자, 미얀마 데모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윤석열은 어떻게 봐야하는가. LH건설에 돈 먹는 사람들 어떻게 봐야하느냐, 이런 얘기를 그 언어로 쓸 수 있어야 활구참선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다. 옛날같이 아란야에서 살 수 있는 스님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많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그런 경우 이 안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제안하고 이끌어가고 해야 하는 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고요한 사찰 선방에서 수행을 하드라도 개념파악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정견을 확립하지 못해 현장에서 헤매기 일쑤이다. 생활참선과 함께 일반 간화선 부분을 잘 살펴야 한다. 지금 것을 제대로 살리려면 앞 것도 참고할 필요는 있다. 중국이 50여개의 이민족이 있어서 그런지 200년 이상 간 정권이 거의 없다. 우리는 오백년, 천 년이 몇 개나 되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게 힘든 구성원들 속에 누군가의 하는 말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이 잘 되는 데 도움이 된다. 아니 아는 것이 삶, 생존, 존재 자체에 도움이 된다. 도움이 아니라 필수다. 아래에서 윗사람의 말을 알아야 하고 아래서 하는 말 위에서 알아야 한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다. 무리, 진영의 논리와 이해득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일반화 하면 남의 말, 내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 뜻, 본 뜻, 행간에 숨은 뜻, 진정성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필요하듯이 산속에서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방법은 산속에서 제시하여 세속에까지 쓰임새가 크게 된 것이다. 그것이 간화선이 강호(江湖)를 풍미하게 되고 속인들이 불교와 참선을 이해하고 생활 속에 적용하는 큰 흐름이 일었던 것이다.
말씀을 주제로 하는 참선이 자기 개인의 도를 깨치는데도 도움이 크기도 한다, 세상 속에서 전법교화하거나 중생으로 살아가는데도 아주 많이 중요하다. 그래서 말씀을 주제로 한 참선이 간화선인 것인지를 모르다 보니 엉뚱해졌다. 모르는 말 이상한 말을 하는 것으로 참선한다는 빗나간 느낌을 가져서 지게미나 먹고 있는 것이다. 당송시대의 출가,,재가선사들이 어려운 말을 주제로 참선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부분들을 명확하게 알아야만 지금 시대에 맞는 화두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 하는 바람에 다들 공식이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절대로 일반화된 공식은 아니다. 상황과 사람 그리고 사회와 자연이 어우러진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한 생각들을 깊이 해야 한다. 하지만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다 하지 않는다. 지식이 없어도 참선하여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나아가 지식이 없어야 참선을 잘 할 수 있고 깨달음이 오기 쉽다는 이야기도 돌아다닌다. 어느 한 부분에만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없어도 할 수 있지만 없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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