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여운 김광하씨가 쓴 글입니다.
백봉 김기추 선생님(1908~1985)은 재가의 거사(居士)로서 보림선원을 세우시고 불법을 널리 전하였다. 재가자가 선원을 운영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재가자를 공부 길로 이끌어 주신 선생님의 은혜가 깊고 깊다.
다음 글은 10여 년 전에 쓴 글이다. 한때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한 사람으로서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보림선원의 수행의 가풍(家風)을 글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해서 쓴 것이다. 백봉 선생님이 입적하신지 벌써 34년이 흘렀지만, 선생님의 가르침은 오늘 불자나 특히 수행 단체에 여전히 살아있는 경책이다. 이 글은 내가 20대 시절(1977~1978) 부산 남천동 보림선원에서 백봉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내 스스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차제에 글을 조금 다듬었다. (如雲)
보림선원(寶林禪院)의 수행가풍
1) 백봉 김기추 선생님은 거사로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교조 석가모니 부처님은 누구나 수행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재가자도 하늘의 별처럼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재가자들이 이 사실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출가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 금생에는 복이나 짓자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출가자도 도에 대한 신심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재가자가 공부를 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선생님은 ‘살아도 내가 살고, 죽어도 내가 죽는다’라고 제자들을 경책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는 유마거사, 중국에는 이통현, 배휴, 방거사, 우리나라에는 윤필과 부설거사를 들며 제자들을 격려했습니다. 제 주위의 한 지인은 백봉 선생님이 50대 중반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용기를 얻었습니다.
백봉 김기추(白峰 金基秋, 1908~1985) 거사는 20세기 ‘한국의 유마 거사’로 추앙받는 재가불교의 선지식이다.
1908년 부산에서 태어난 백봉 거사는 젊은 시절 항일 민족운동을 벌이다 부산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고, 이후 만주 땅에서 ‘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으로 감시를 받다가 해방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교육 사업을 하다 50이 넘은 나이에 불교를 만났다.
1963년 어느 날, 백봉 거사는 친구들과 함께 충청도 심우사(尋牛寺)를 찾았다. 여기서 스님과 대화를 나누다 발심한 백봉 거사는 무(無)자 화두를 붙들고 정진했다. 1964년 정월에 심우사에서 선정에 들었던 백봉 거사는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에 나오는 ‘비심비불(非心非佛)’ 네 글자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백봉 거사는 오도송을 읊었다.
홀연히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忽聞鍾聲何處來, 홀문종성하처래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하이, 寥寥長天是吾家; 요요장천시오가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一口呑盡三千界, 일구탄진삼천계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水水山山各自明. 수수산산각자명
이후 백봉 거사는 전국에 보림선원을 세워 거사풍(居士風) 불교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禪) 법문을 설했다. 1985년 7월 27일 지리산 산청 보림선원에서 마지막 하계수련대회를 주재할 때 ‘여하시최초구(如何是最初句: 무엇이 최초의 구절인가?)’란 글을 걸게 하고는 8월 2일 마지막 설법을 한 후 향년 78세로 입적했다. 저서로는 『금강경 강송』, 『유마경 대강론』, 『선문염송 요론』, 『절대성과 상대성』, 『백봉 선시집』 등이 있다.
2) 보림선원의 소의 경전은 금강경과 유마경입니다.
선생님은 금강경과 유마경을 가르침의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재가불자의 모범은 무엇보다 유마거사입니다. 유마거사의 실존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부처님 당시 그만큼 뛰어난 재가불자가 없었으면 이런 경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20대 시절 보림선원에서 공부할 때, 백봉 선생님은 토요일 저녁 법회에는 금강경을, 일요일 오전 법회에는 유마경을 설법했습니다. 선생님이 손수 지은 보림선원 예불송에는 유마경과 금강경에서 인용한 바가 많습니다.
3) 백봉 선생님의 가르침은 선과 교를 회통(會通)합니다.
선생님은 무자 화두로 깨달음을 얻으신 후, <금강경강송>과 <유마경강송>을 지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만년에 <선문염송>을 설법하셨고 <선문염송요론>을 지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선문염송에 나오는 달마와 육조대사, 조주 운문 임제 설두 등 역대 여러 선지식을 높이 평가하고 그분들의 깨달음에 공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대승불교의 가르침과 선불교의 깨달음을 모두 하나로 회통하신 분입니다.
4) 보림선원은 새말귀를 수행합니다.
선생님은 무자 화두를 들고 깨달음을 얻었지만, 이 방식이 현대의 재가자에게는 실천하기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출가자는 하루 24시간 동안 화두를 들고 성성적적하게 지낼 수 있지만, 재가자는 가정을 꾸미고 회사를 다니며 살림을 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남송(南宋) 시대 대혜 선사가 창안한 간화선 대신,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화두(新-話頭) 즉 <새-말귀>를 창안했습니다.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새말귀는 재가자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삼계의 주인공인 내(無相身)가 색상신을 굴린다’는 도리를 확인하는 화두입니다. 새말귀는 금강경이나 유마경의 수행을 종합하면서도 행주좌와에 걸림 없이 실천할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다음은 새말귀에 대한 선생님의 글입니다.
대치법(代治法)이란 이렇다. ‘인연에 따르는 바깥 경계를 굴리고 또한 경계에 굴리이는 것은, 실로 나의 무상신(無相身)이 그 심기(心機)의 느낌대로 무정물인 색상신(色相身)을 걷어잡고 행동으로 나툰다’는 도리를 깊이 인식하고, “모습을 잘 굴리자”는 말귀를 세워서 나아가자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만약 핸들을 돌리고 키를 트는 데도 잘 돌리고 잘 틀어야 할 것이니, “모습을 잘 굴리자.”는 말귀와는 통하여서 그 실을 거둘 수가 있다. 그러나 화두가 순일하여서는 또한 핸들을 돌리거나 키를 트는 것이 잘 안될 것이다.
사리가 이러하니, 학인들은 거사풍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아침에는 “모습을 잘 굴리자”라 뜻으로 세간에 뛰어들고, 낮에는 “모습을 잘 굴린다”는 뜻으로 책임을 다하고, 저녁에는 “모습을 잘 굴렸나?”라는 뜻으로 희열을 느끼고, 시간을 얻어서 앉을 때는 나는 “밝음도 아니요 어둠도 아닌 바탕을 나투자.”라는 여김으로 삼매에 잠길 줄을 알면, 이에 따라 깨친 뒤의 수행도 또한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 백봉 선생님의 <새말귀> (요약)
5) 보림선원의 수행은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화두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선생님은 평소 설법하실 때면 실감(實感)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경전에 대한 지식으로는 실감을 얻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학인들에게 ‘알몸뚱이로서 달려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보림선원은 알음알이를 모두 버리고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이 자리를 몸으로 직접 체득하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가르침이 담긴 테이프나 책도 여기에 이르면 모두 알음알이입니다. 마지막에는 허공이니 성품이니 하는 선생님의 법문도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6) 보림선원의 대중은 재가자이며, 거사풍을 지향합니다.
보림선원의 대중은 재가자입니다. 선생님은 오로지 도를 구하겠다는 마음씨 하나만 가지고 오면 다 받아주었습니다. 몇몇 스님들이 찾아와 출가를 권유하였지만, 선생님은 방거사와 같이 끝내 재가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당신과 같은 재가자를 제도하는데 원력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1964년 1월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 이듬 해인 1965년에 <금강경강송>을 출판하셨습니다. 다음은 이 책에 나오는 선생님의 생생한 목소리입니다.
말과 행동이 동일한 참된 불자를 가려낸다고 가정하면 승려계보다 속인계에 참된 불자의 수를 더 많이 가려낼 수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 내력으로서는 이러하다. 나는 부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중생 속에서 참된 불자를 왕왕이 보았기 때문이다. (중략) 무심에 가까운 천진 성품을 그대로 간직하고 일생을 살아가는 순직한 선남선녀들을, 혹은 벽지의 농민층에서, 혹은 도시의 영세민층에서 더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 금강경강송 (백봉 김기추 동국대출판사 1965. 3 초판 82-84쪽 인용)
세상에는 재가자가 운영하는 선원이 여럿 있지만, 보림선원은 거사풍을 지향합니다. 그리고 새말귀를 수행하고 동업보살의 서원과 십물계를 지니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선생님이 지으신 <동업보살의 서원>과 <십물계>는 유마거사를 따르는 거사풍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동업보살의 서원>
우리는 옛적부터 비로자나 법신이나
변하는 모습따라 뒤바뀌는 여김으로
갈팡질팡 생사해에 뜨잠기는 중생이니
좋은 인연 그늘밑에 동업보살 되고지고.
괴로운 첫울음은 인생살이 시작이요
서글픈 끝놀람은 이 세상을 등짐이니
들뜬 마음 가라앉혀 보리도를 밝혀내고
부처땅에 들어가는 동업보살 되고지고.
<십물계(十勿戒)>
비록 마음과 몸을 빌었어도 본래의 드높은 자리임을 잊지 말라.
비록 처자를 두었으나 쏠려봄에 떨어지지 말라.
비록 가업을 이으나 삿된 이익을 탐하지 말라.
비록 세상법으로 더불어도 큰 도를 잊어버리지 말라.
비록 천하에 노니나 법성품을 뭉개지 말라.
비록 인연 일어남을 짝하나 악한 뿌리를 용납지 말라.
비록 모습없음을 마루하나 덕심기를 게을리 말라.
비록 삼매에 있으나 선의 새김을 세우지 말라.
비록 지관을 즐기나 길이 사그라짐에 들지 말라.
비록 낳고 죽음을 쓰나 더러운 거님을 하지 말라.
7) 선생님은 스승으로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스승은 많지만, 백봉 선생님 만큼 권위를 내세우지 않은 분도 드뭅니다. 학인들은 선생님에게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었고, 묻는 즉시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학인들은 법을 묻는데 조금도 문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선원을 찾아도 선생님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활발하고 거침없이 탁마를 하는 것은 보림선원의 가풍입니다. 선생님은 "앉은뱅이 부처도 없고, 벙어리 부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8) 먼저 바른 지견을 갖도록 하고, 남녀노소와 유·무식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백봉 선생님은 학인들이 먼저 바른 지견을 얻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바른 지견을 가져야 그 후에 흔들림 없이 올바로 수행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수행에 남녀노소와 유·무식(有·無識)을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평일에는 하루 두 번, 주말에는 서너 차례 설법을 하셔서 비록 불교에 문외한도 법문을 듣다 보면 자연히 귀가 열렸습니다.
선생님은 그래서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쉬운 우리말을 사용하여 법문을 하였습니다. 한문 경전에 나오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던 당시의 법회의 관행에서 비추어 보면, 독창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법문이 ‘허공이 하나니 지도리가 하나요, 지도리가 하나니 목숨(생명)도 하나’라는 법문입니다. 또한 '보는 것으로 눈을 삼고, 듣는 것으로 귀를 삼으라'고 하신 법문도 있습니다. 선생님의 법문은 누구나 들으면 금방 그 뜻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늘 육조 혜능대사가 일자무식의 나무꾼이었으나 견성을 하여 오조 홍인 대사의 법을 이었음을 강조했습니다. 경전에서 내려오는 이야기가 신화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당장 실현될 수 있는 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선원 이름을 보림선원이라고 지은 것도 육조 대사가 주석한 절 이름 보림사(寶林寺)에서 얻은 것입니다.
9) 독창적인 예불송이 있습니다.
승가에서의 예불문은 전문가나 한학에 대한 소양이 없으면 그 뜻을 알기 어렵습니다. 절에 오래 다녀도 예불문의 뜻을 제대로 아는 불자가 많지 않은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선생님은 이런 폐단을 보고 누구나 알 수 있는 우리말로 예불송을 지었습니다.
우리말 예불문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을 바꾸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예불문을 지은 것은 ‘일체법은 모두 정해진 법이 없다(無有定法 무유정법)’라고 설한 금강경 법문의 정신을 살린 것입니다. 전통적인 예불문과 비교하면 백봉 선생님의 예불송은 그야말로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예불송을 외우면 누구나 그 뜻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자성을 보는 길에 들어섭니다.
10)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승불교를 지향합니다.
선생님은 어떤 기복불교도 거부했습니다. 사실 기복불교가 정통이 아닌 것은 양식 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사찰의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는 타협하기 일쑤입니다. 기복불교를 ‘모습 놀이’라고 거부했던 보림선원은 늘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선생님은 그러나 학인들에게 ‘내가 동냥을 해서라도 밥을 먹일 터이니 공부에만 열중하라’고 격려하였습니다. 보림삼강에는 선생님의 이런 뜻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보림삼강>
우리는 불도를 바탕으로 인생의 존엄성을 선양한다.
우리는 삼계의 주인공임을 자부하고 만법을 굴린다.
우리는 대승의 범부는 될지언정 소승의 성과는 탐하지 않는다.
*원담은 휴학하고 1980년 12월부터 81년 3월까지 부산 남천동 보림선원에서 백봉거사를 모시고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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