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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논단] 4차 산업혁명, 무엇이 걱정인가

수선님 2022. 7. 3. 15:01

[열린논단] 4차 산업혁명, 무엇이 걱정인가

 

[0호] 2017년 09월 21일 (목) 이혜숙  금강대 초빙교수

 

시작하는 말

이혜숙 금강대 응용불교학과 초빙교수

이 글은 특별히 학술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고, 우리의 평범한 생활경험과 그로부터 갖게 되는 전망들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필자는 산업사회나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는 것도 아니고, 기술개발로 만들어진 생활기기조차도 충분히 잘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방면의 전문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를 고민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 모두가 이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기계화와 대량생산에 의한 산업혁명이 한꺼번에 전개될 무렵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고, 오래지 않아 우리 세대는 전기와 정보기술에 바탕을 둔 3차 산업혁명 즉, PC와 인터넷의 디지털 문화를 얼떨결에 받아들이며 살아오던 참에 또 다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다.

‘혁명’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tdweb2.korean.go.kr/search
이라고 한다.

과연 지금 무엇이 그토록 ‘새롭고 급격하게’ 깨지고 세워진다는 것인가. 우리는 삶의 그 같은 변화를 알아차리고 있었는가. 돌아보면, 필자의 유년시절은 가구별로 사용하는 전기에 ‘일반선’과 ‘특선’이 있었고, 혹시 공부하느라 전등불을 늦도록 키게 되면 어른들이 걱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너지가 부족했던 그 시절이 어느새 도시마다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는 시절로 바뀌었고, 급기야 각종 전열기로 취사를 하고 전기로 가는 자동차도 생겨났다.

또 90년대 중반, 필자가 미국 어느 대학에 방문연구원으로 있던 당시 누군가 가져온 휴대폰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던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에 돌아오니, 벌써 수많은 사람이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미국에 가기 전 필자는 아파트에서 생활 쓰레기와 재활용품의 분리수거를 실천하고 있었는데 그 미국에서는 분리수거는커녕 캠퍼스 내에 담배꽁초가 사방에 떨어져 있는 걸 보기도 했다.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이 앞선 우리나라라는 점에서 자부심도 살짝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까 한국사회는 때때로 새로운 이슈를 재빠르게 수용하거나 반응하는 민감성이 있기는 한 것 같다. 그래서 요즘 사태에도 혹자는 ‘디지털 산업이 진화하고 있을 뿐, 4차 산업혁명은 없다. 유독 한국에서만 4차 산업혁명이 만병통치약인 듯 온 나라가 올인하고 있다.’ (이인식, 《4차 산업혁명은 없다》, 출판사 살림, 2017, p.79. ) 고 지적한다. 어찌 되었건,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 들어가서 “4차 산업혁명”을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불과 2년 이내(2016~2017년 현재)임에도 800여 편의 학술지 논문과 350여 편의 단행본· 30여 편의 공개강의 자료 및 연구보고서 등이 나타난다. 여러 방송매체들도 행여 질세라 이에 관한 특강을 대중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 어떤 이슈보다도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4차 산업혁명’이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최근 불교학· 종교교육학 분야에서도 이 주제를 담은 학술활동이 있었다. 주로 인공지능· IOT(사물 인터넷)· 로봇· 스마트시티·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등의 기술적 정보와 현황을 공유하고, 그 불교적· 종교적 대응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상황이 이러한 가운데서 다시 우리 각자의 경험으로 돌아와 생각해보자. 특히 불교계 구성원들은 예컨대 IT(Information Technology) 기술을 담은 시스템들을 얼마나 잘 이용하고 있을까. 솔직히 나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사용은 하지만 아주 초보적인 수준에 있고, 카카오톡 하나도 마지못해 매우 소극적으로 참여하는데 독자 여러분의 경험은 어떠신지, 궁금하다.

일반 불자대중의 취향이 궁금한 것 못지않게, 사찰이나 종단 입장에서는 정보통신기술의 메가트렌드(megatrend)를 어느 정도로 이해하며 활용하고 있는지도 중요하게 생각된다.

과학기술 발전과 그런 신제품의 출시에 민감한 early taster · early adopter ( early adopter: 신제품의 정보와 사용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빠른 사람들을 칭하는 용어. 미국의 사회학자 에버릿 로저스가 1957년 저서 Diffusion of Innovation에서 처음 사용, 1995년경 신조어로 부상. 그에 반대되는 개념어로 slow adopter가 생겨남 ) 가 아니라 혹시 slow adopter 인 불자라면, 4차 산업혁명과 같은 주제에 과연 관심이 있을까, 없을까.

그러나 얼핏 보더라도 디지털 기술혁명은 단지 포교매체로서의 IT나 인터넷 활용이라는 문제를 넘어서 복잡하고 다양한 이슈를 종교계에 던지는 것 같다. 사이버 공간에 점점 더 집중되는 우리 삶의 구조로 말미암아, 본래 종교가 가졌던 의미인 시간과 공간의 초월성에 대한 추구가 새로운 풍토와 경험을 낳고 있다 (김남희,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종교교육 방향과 필요성〉《2017년도 춘계학술대회 자료집》, 한국종교교육학회, 2017, pp.59-61. )는 판단에 공감한다.

불교계 역시 차수(次數)를 달리하는 산업혁명의 흐름과 더불어 불자들의 신행(信行)에서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 왔는지, 그 변천사를 소급 추적해볼 수 있을 것이나 다른 기회로 미룬다. 본고는 우선 4차 산업혁명의 내용과 그 영향력에 대한 전망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그것이 불교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으며 불자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를 추론해보고자 한다.

4차 산업혁명, 무엇이 새로운가

잘 알다시피, 4차 산업혁명이란 2016년 초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이끄는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에서 국제적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슈밥에 의하면, 세상이 다면적이고 서로 깊게 연관되어 있는 가운데 과학기술이 더 새롭고 뛰어난 역량을 갖춘 기술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4차 산업혁명은 기하급수적인 속도로 전개 중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혁명은 개인과 사회· 기업· 경제 등에 전례 없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유도하고, 사회전체 시스템의 변화를 수반한다 (클라우스 슈밥 저, 송경진 역, 《제4차 산업혁명》 출판사 새로운 현재, 2017, pp.12-13. ) 고 본다.

혁명적으로 개발되고 있는 기술의 영역은 인공지능 로봇 공학· 생명공학· 사물 인터넷·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등으로 크게 나눠볼 수 있다.

첫째, 로봇 공학은 2차 산업혁명의 생산라인 자동화를 거쳐 축적되어온 자율적 기계장치의 총화라고 볼 수 있다. 생산 공정에서 노동의 일부를 단순 반복하는 산업용 로봇의 역할은 이미 오래된 것이고, 매년 열리는 로봇 월드컵[로보컵]이나 군사 로봇· 의료 로봇 등의 더욱 정교해진 기능과 무인운송용 드론과 차량의 자율주행기술 등이 여기에 속한다. 가까운 미래의 로봇은 전방위로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게 되고, 로봇의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능가할 것으로 전망되며, 로봇 다리를 장착한 인간과 같이, 인간과 기계장치의 합성이 인간을 대체하는 트랜스 휴머니즘(transhumanism) (클라우스 슈밥 외 26인 공저, 김진희 외 2인 공역 《4차 산업혁명의 충격》 흐름출판, 2016, p.196. )의 단계가 올 것이라고도 한다.

발달된 로봇이 인간세계의 방대한 자료를 수집· 분석함으로써 우리 삶의 질을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되는 측면이 있지만, 반(反)유토피아적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이미 산업현장의 로봇이 생산 업무를 지휘하고 노동력을 대체함으로써 노동자의 역할 기회와 소득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 (장성우· 박경준, 〈4차 산업혁명과 불교의 경제윤리〉 《종교교육학연구》 제54권, 한국종교교육학회, 2017, pp.26-27. )할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사람보다는 로봇과의 상호작용이 더 빈번하게 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도 있다.

더욱이 로봇의 사용에서 윤리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명확하게 규정하기도 전에, 다양한 역할들을 맡기게 되는 점에서 복잡하고 비관적인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차량의 기계 기능적 오류로 혹시 접촉사고가 생긴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차의 소유자? 인공지능 기계? 기계나 차량의 제작자?

둘째, 생명공학은 인간과 동식물의 유전자를 편집(CRISPR/Cas9)하거나 활성화하여 건강하고 우량한 개체를 만들고, 유전자 맞춤치료로 난치병을 치료해서 장수(長壽)를 도모하는 기술 등에 관한 영역이다. 이런 기술을 이용하여 이미 피부와 뼈· 심장과 혈관조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또한, 이중용도 연구(dual-use research)로서 전염병에 관계되는 바이러스와 같은 신생물질을 연구하는 합성생물학도 여기에 관련된다. ‘이중용도’란 연구 결과가 인간에게 혜택이 되기를 바라는 목적이지만 한편으로 위험성도 있는 과업이라는 점에서 우려를 안고 있다. 연구 결과를 통해서 병원성 바이러스와 같은 생물을 무기로 쓸 가능성에 대비하여 ‘생물무기 금지협약’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 (클라우스 슈밥 외 26인 공저, 김진희 외 2인 공역,《4차 산업혁명의 충격》 흐름출판, 2016, pp.110-117. )도 거론된다.

앞서의 로봇 분야가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자율성 수준이 높아져 왔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은 스스로 도덕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윤리적 로봇이나 기계 윤리(machine ethics)의 문제를 더욱 주목하게 되듯이,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개발 자체가 아니라 법· 규제· 윤리의 문제이다. 생물학이란 기계적 개발과는 다른 차원의 파급성과 책임성을 갖는 영역이므로, 특정연구의 책임자나 담당기관의 양심적 결정으로 간단히 보호될 수 있는 성질의 윤리가 아니다. 연구와 개발 과정의 투명한 설명과 그 안전한 관리를 위해서 국가 간의 더욱 긴밀한 협력과 감시 체제를 필요로 한다.

셋째,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은 인터넷과 웹의 확장으로서 사람과 사물· 프로세스와 데이터의 지능형 연결이다. 예컨대, 가정과 직장의 기기들이 정보통신기술로써 서로 기능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며, 이러한 종류의 개발상품들이 이미 우리 TV에서도 일상적으로 광고되고 있다. 또, 더 나아가서 도시의 건물과 도로 등 전통적인 인프라에 정보통신기술을 통합함으로써 주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스마트 시티[smart+connected community]가 탄생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송도가 그 사례로 소개된 바 있다. (위의 책, pp.185-186. )

이와 같이 대단위로 통합되는 네트워킹 기술은 주민의 생활상 편의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소셜 미디어의 기반이 됨으로써 시민대중의 정치사회적 역량을 결집시키는 촉매작용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여러 차례의 촛불집회를 전개하면서 활용한 인터넷과 스마트폰 교신이 그 일례라고 본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개개인의 정보가 수집되고 정치권력이 시민들의 활동을 추적· 감시하는 부작용이 일어난 경우도 있다.

수퍼 네트워킹 사회의 여러 가지 장점에 반(反)하여, 가장 심각한 위협 중 한 가지는 사이버 전쟁의 가능성일 것이다. 사이버 공간이 과거의 육해공(陸海空)과 같은 전쟁터가 될 수 있고, 전쟁 시와 평화 시의 구분이 모호해지게 될 것이다. 언제라도 군사 시스템· 에너지원· 상수도· 교통관리시설 등 국가 기반시설에 해당하는 네트워크와 거기에 연결된 기기들이 해킹을 당하거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의 적(敵)과 같이 그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가운데, 일반 범죄자· 해커· 테러리스트 등 다양한 상대들을 향하여 항시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 (클라우스 슈밥, 앞의 책, p.134. )

넷째, 증강현실(增强現實)이란, 사용자가 보고 있는 현실세계에 부가정보를 갖는 가상세계를 겹쳐 하나의 영상으로 보여주는 기술이다. 영상을 겹침으로써 현실과 가상화면과의 구분이 모호해지도록 한 것이지만, 가상현실과는 달리 사용자가 실제 환경을 볼 수 있으므로 보다 나은 현실감과 동시에 부가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 카메라로 주변을 비추면 인근에 있는 상점의 위치나 전화번호 등의 정보가 입체영상으로 표기된다. 이 기술은 또 병원의 원격 의료진단· 방송· 건축 설계· 제조공정 관리 등에 활용되고 있다. 증강현실을 실외에서 실현하는 것이 착용식 컴퓨터(wearable computer)이다. 특히 머리에 쓰는 형태의 컴퓨터 화면장치는 사용자가 보는 실제 환경에 컴퓨터 그래픽· 문자 등을 겹쳐 실시간으로 보여줌으로써 증강현실을 가능하게 한다.

아울러 4차 산업혁명의 성공을 위한 조건으로서 클라우스 슈밥이 제시한 네 가지에 공감되는 바가 있어, 여기에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중 이해관계자(multi stakeholder)들이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물고 더 밀접하게 연계된 포용적 관계를 구축하는 상황맥락적(contextual) 지능이 필요하다.

둘째, 끊임없이 강력한 변화 즉 파괴적 혁신의 시대에 창의적이고도 민첩하게 대응하는 회복력은 정서(intelligence) 지능에 달려있다. 정서는 두뇌와 마음이 만나는 교차지점으로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과학기술이 개인 중심 사회를 조장하기 쉬운 만큼, 동시에 공동체적 가치와 목적에 균형을 이루는 영감(inspired) 지능이 필요하며, 그것은 공유(sharing)와 신뢰가 핵심이다. 넷째, 앞서 세 가지 지능에 토대가 되는 것으로서 신체(physical) 지능 즉 건강한 몸과 생활의 관리가 필요하다. 클라우스 슈밥, 앞의 책, pp.251-257.

4차 산업혁명, 불교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앞서, 혁명적인 기술개발의 속도와 범위의 산업적 변화를 전망하는 가운데서, 혹은 낙관을 하고 혹은 비관을 하는 논리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배운 불교적 관점에서는 장차 4차 산업혁명이 어떤 의미를 가지겠는지, 생각해볼 차례이다.

첫째, 불교의 기초는 무상(無常)하고 무아[본질적 경계 없음]이며 오직 연기(緣起)한다는 세계관에 있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전해지는 산업사회 변천의 속도감이 빠르거나 늦거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며, 세상사가 인연법에 따라 그처럼 변화한다는 것은 불교에서 매우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과연 실제로 한국의 불자들이 체감하는 기술발달의 속도나 심도가, 저 학자들의 말처럼 ‘혁명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느껴지는 것인가? 또, 그런 변화의 흐름에 대해서 특별히 더 긴장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런 질문의 답은 각자의 몫이다. 다만, 우리가 평소 이유를 알 수 없는 조급함이나 불안감에 습관적으로 등을 떠밀리지 않고, 찬찬히 자기 경험을 주체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과학기술산업은 끊임없이 변천해왔고 그에 맞물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제반 현상들도 변화하고 유동적이기 마련이었다. 그와 같이 중생계 현실은 본래 무상[變化/壞滅]하므로 괴로움이라고, 불교는 가르친다. 변화무쌍으로 인한 괴로움은, 본래 무상한 이치를 통찰하고 확연히 알아차림으로써 줄어들 것이다. 예컨대, 로봇과 디지털 기술이 점점 더 발달되고 성장함으로써 인간의 입장과 역할이 위축된다고 설명하는 것은, 일견 맞고 일견 틀린다고 말할 수 있다.

인공지능 로봇이 기계여서 문제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낯선 것· 적응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디지털 기계든지 기술이든지, 우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서 함께 지어온 공업(共業)의 산물임을 이해한다면, 그래서 그간의 상황적 맥락을 잘 통찰하는 지혜가 있다면, 무릇 혁신으로 인한 긴장이나 갈등을 우리 스스로 줄여볼 수 있고, 인간과 기계가 협력적인 상호작용을 할 방도가 좀 더 쉽게 찾아질 것 같다.

둘째로, 제법(諸法)이 변화무상하고 무아(無我)라는 것은 만사· 만물이 상호작용하는 연기적 조건 아래에서만 존재한다는 이치다. 그러니까 불교적으로 보면, 무릇 생명 있는 것들은 서로 연계하고 상생하는 법을 거스르지 않도록 해야 하고, 물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듯이, 시시각각 변화의 흐름을 잘 수용하며 개발된 삶의 기술[事]과 기계[物]가 서로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공존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가 된다. 그것은 4차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파괴적 혁신(disruption)을 거쳐 가치를 생산하고, 사물 간 기존의 경계를 허물어 더욱 깊이 포용하고 공유하는 것이 추구되는 입장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향후 4차 산업혁명의 과정이 앞서의 말과 같이 전개된다면, 결과적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불교적인 세상을 구현하게 되지 않을까?

예를 들어 21세기 후반쯤이면 사람보다 영리한 로보 사피엔스(Robo sapiens)가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 있는데, 불교는 몸[신체]의 고정된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므로 로봇인들 사이보그인들 별문제는 아닐 것 같다.

셋째,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통합한 증강현실은 매우 독특한 아이디어와 기술의 결합이지만, 불교적으로는 그다지 새로운 개념이 아닐 수 있다. 현실과 가상이 겹치는 세계관은 종교일반이 갖는 영적인 구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특히 불교 경전에는 여러 등장인물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본질적으로 모호하다고 보는 가르침이 불교적 세계관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삼계[欲界· 色界· 無色界]의 분류에서와 같이 욕망과 형상이 갖춰진 세계가 있는가 하면, 욕망에서는 자유롭게 벗어나고 형상만 남은 세계 그리고 욕망도 형상도 모두 벗어난 세계를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수행자가 선정(禪定) 삼매에 들었을 때 그 경지는 실제와 가상이 통합된 증강현실의 대표적 체험이 아닐까 한다.

4차 산업혁명, 불교계에 무엇을 바라는가

잘 알다시피 다보스 포럼 보고서는, 4차 산업혁명으로 노동시장이 파괴되어 대량실업이 불가피하고 경제적 불평등도 심화될 수밖에 없으므로 정부와 기업이 서둘러 교육과 고용정책을 혁신할 것을 주문했다. 즉각적으로 시행해야 할 방안으로는, 인적 자원관리 기능을 혁신하고, 빅 데이터를 분석하며 직무 능력을 다양화하고, 유연한 조직체계를 구축하는 것 등이다. 거기다가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할 대책으로는 인문사회와 과학기술의 융합교육이 제도화되도록 교육체계를 혁신하고, 새로운 기술을 지속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평생교육을 장려한다. 기업은 경쟁보다 공생하는 전략이 생존에 필요불가결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기업 사이의 협조체제를 구축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원론적인 불교교리가 아니라 현실의 불교인으로서 돌아보면, 과학자도 아니고 과학기술자도 아닌 우리가 일상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기술의 편리성을 경험하는 순간 또 새로운 기기의 출현과 그 변이(變異)의 속도에 압도되어 버린다. 과학기술 개발의 속도나 양(量)에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 정향에 있어서, 윤리적인 기술과 발전의 지속가능성이 모두에게 염려되어야 할 사안일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이 시대가 인류사에 가히 혁명적인 변곡점이라고 인정하게 된다면, 불교인으로서, 불교계의 일원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결론적인 그 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 중단 없는 기술개발과 확장의 시대에 불자로서 무엇을 욕망하는가. 4차 산업혁명의 여러 분야 가운데서도 최우선적으로 관심이 가는 개발영역은 무엇일까. 어쩌면, 인간의 다양한 욕망 가운데서도 몸과 건강에 대한 염원이 가장 지속적으로 생명공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힘이 될 것 같다. 최근의 유전자 편집이나 조작에 대한 불자들의 인식이 어떠한지가 궁금하였으나, 관련 연구의 자료를 얻지 못하고 다만,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을 물은 결과만 확인할 수 있었다.

2014년 조사에서는 장기기증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응답자의 비율이 천주교 82.6%- 개신교 80.0%- 불교 76.9%이고, 기증의사를 가진 응답자는 천주교 62.8%- 개신교 59.6%- 불교 59.4%로 조사되었다. 장기기증의 필요성이나 기증의사를 막론하고 종교 간 응답 비율의 순위는 천주교-개신교-불교로 나타나서 불교가 가장 낮은 비율을 보였고, 동 연구소의 2011년 조사결과에서도 동일한 경향으로 나타났다.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 《한국의 사회 정치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 2014, p.13; 同, 《한국의 사회문화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 2011, p.30.

이 응답 결과에 대해서 더 자세한 조사절차가 없이 섣불리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일단 불자들은 장기기증을 주고받으면서 생명을 연장할 의사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고 추정해본다. 장기기증과 이식 그리고 생명연장 등에 대한 인식이 자신의 불교적 신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도 달리 확인해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기회로 미뤄야겠다. 불자들은 생명공학 외에 로봇이나 자율주행차량 등을 이용할 의사가 있는지, 온라인 소셜 미디어의 사용 정도나 수준이 어떠한지 직접 확인해보기로 한다.

둘째, 불자들은 혁신적 기술들이 어떤 범위까지 개발되기를 바라는가. 이것은 주로 인공지능과 디지털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이 생명공학〮· 로봇 공학〮· 사물 인터넷 등 기존 분야 외에도 또 어디에서 쓸모가 있을지에 대한 지식기반이 있어야 응답을 할 것이다. 불교인 각자가 IT나 디지털 기술에 대한 이해와 실용적 학습을 보완해가는 것이 좋겠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또, 개발의 범위란, 기술 사용상의 비밀보장과 사생활 보호에 침해가 되는 윤리적· 법적 책임 문제를 염두한 질문이기도 하다. 최근처럼 북한 핵미사일의 위협을 느낄 때라면, 군사 로봇 중에서도 킬러 로봇이나 드론의 개발을 강력히 요구할지도 모른다. 혹은 현재의 사찰경영을 염두하고 거기에 필요한 불교문화 콘텐츠의 온라인 네트워킹을 생각할 수도 있겠으며, 뇌과학자들에 의해서 명상 수행의 성취도나 심도(深度)를 측정하는 도구와 기술을 개발하도록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사찰 단위로 구성원들의 연령별· 성별· 직업별· 계층별 등에 따라서 디지털 기술의 필요성과 가치 공유에 대한 기대 정도를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기술 개발과 그 사용에 관한 기대는 각자 욕망의 크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셋째, 불자들은 향후 4차 산업혁명의 성과를 어떻게 나누고자 하는가. 이 질문은 디지털 혁명이 심화되어갈수록, 로봇 기술력에 의해서 사람의 노동력이 일할 기회를 잃게 되거나, 근로소득이 감소되고 불평등해질 가능성이 농후해지기 때문에, 미리미리 그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 경우, 개인적인 대책의 실효성은 의심스럽고 집합적인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예로서, 기본소득과 공유경제 등을 포함하여 안정된 사회보장 시스템의 필요성을 여론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합의점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시민운동가와 같은 불자들의 헌신적인 공동체 조직화를 위한 활동이 필요하다. 그 활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의견을 수렴하고 아울러 지역 내 오프라인 미팅을 가지며 다수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전략과 방법론이 필요하다.

마무리하는 말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상당히 현실적인 성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다. 불교의 원론을 그대로 옮겨서 일방적이고 선언적인 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불자들의 실제적인 생활경험을 알고자 하며 생활경험으로부터 반성적인 이슈들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글을 통해서보다는 강의 중에 좀 더 직접적으로 상호 간 소통하는 방식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열린논단] 4차 산업혁명, 무엇이 걱정인가

[열린논단] 4차 산업혁명, 무엇이 걱정인가 [0호] 2017년 09월 21일 (목) 이혜숙 금강대 초빙교수시작하는 말 이혜숙 금강대 응용불교학과 초빙교수이 글은 특별히 학술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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