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대승찬 풀이글)

[신심명 강설] 17. 번뇌망상 - “진흙 있어야 연꽃도 피어나듯 번뇌망상 있기에 수행도 가능”

수선님 2022. 7. 31. 12:08

[혜국 스님의 신.심.명. 강설] 17. 번뇌망상

“진흙 있어야 연꽃도 피어나듯 번뇌망상 있기에 수행도 가능”

▲ 중국 최초의 절 백마사 전경.

“지동무동(止動無動)이요 동지무지(動止無止)니,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결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침과 움직임, 밝음과 어두움, 옳고 그름,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상대성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심명’에서 말하는 이러한 세계는 양변(兩邊)을 부정하면서 긍정하여 원융무애(圓融無)하게 보고 있습니다. 바로 중도(中道)를 말하는 것이지요. 성철 큰스님께서 ‘신심명’을 강의하실 때 많이 강조하신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치면서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면서 그침은 쌍조(雙照)를 보이는 것이고 움직임이 없고 그침이 없다고 하는 것은 쌍차(雙遮)로 막아 ‘없애버림’이라고 하셨습니다. 비추면서 고요하고 고요하면서 항상 비추는 것이 중도법계의 이치이니 우주의 대진리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쌍차쌍조(雙遮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를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번뇌 망상은 결국은
내가 책임져야 할 일


번뇌망상 사랑해보는
법도 한 가지 방법


‘사랑한다’는 의미는
둘이 아님을 아는 것


‘번뇌=보리’확신해야
번뇌 망상은 투쟁하면
할수록 강해지기 마련


번뇌 망상과 싸우지 말고
그냥 화두만 참구하면 돼


그 뿐만이 아니라 정(定)과 혜(慧)도 그렇습니다. 정혜동시(定慧同時)거든요.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미 본래 의미를 그르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캄캄한 방에 전등불을 켜면 등불을 켜는 동작과 밝음은 동시(同時)입니다. 등불을 켜는 행위가 있고난 뒤에 밝음이 오는 게 아니고 등을 켜는 행위자체가 밝음과 하나이기 때문에 등불을 켜는 행위와 밝음은 둘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종소리 또한 그렇습니다. 종을 치는 행위와 소리는 동시입니다. 종을 치고 나서 한참 있다가 소리가 나는 게 아니고 종치는 행위 자체가 소리와 둘이 아닌 이치와 같습니다.


정(定)과 동(動), 움직임과 그 모두가 그렇습니다. 움직인다는 말은 그침이 있었기에 움직임이니 그침에 즉한 움직임입니다. 고로 냉철하게 보면 움직임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침이란 움직임이 없다면 그침이 홀로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그침이 없기에 움직임과 그침이 서로 원융자재(圓融自在)합니다. 고로 서로 상대가 아니기에 상대법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세계를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신 겁니다.

 

 

“양기불성(兩旣不成)이라 일하유이(一何有爾)아,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하거니 하나인들 어찌 있을 쏘냐”


상대법이란 둘 가운데 하나가 없으면 상대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어느 왕이 벽에다가 기다란 선을 그어놓고 누구든지 이선에 손을 대지 말고 짧게 해놓으라고 명령을 내렸답니다. 어느 누구도 표시된 선에 손을 대지 않고 짧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절절매는데 그때 지나가던 한 현자가 아무 말 없이 그어놓은 선 밑에 훨씬 더 기다란 선을 하나 그려놓고 가버렸다고 합니다. 당연히 본래 있던 선은 짧아졌겠지요.


모든 게 이와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없는데 네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크다 작다 역시 또한 그렇습니다. 비교할 수 있는 작은 게 있어야 큰 게 있을 수 있듯이 상대가 끊어지면 둘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이 모두 우리들의 망념에서 나온 생각이지 결코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꿈꾸는 사람이 잠꼬대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알음알이’에 속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 말하는 둘이니 하나니 하는 말은 이름뿐입니다. 하나라고 하는 것도 우리들 생각이요, 둘이라고 하는 것도 생각에서 붙여놓은 이름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신심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은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門)입니다. 둘이 이미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가르침 즉, 상대가 끊어진 도리는 생각이 끊어진 세계, 모양이 사라진 도리라는 것이지요. 하나니 둘이니 하는 모양 즉 크다, 작다하는 세계가 본래 없는 평등의 세계를 보여주신 겁니다.


우리는 큰 아파트, 작은 아파트, 큰 자동차, 작은 자동차라고 분별하지만 큰 자동차 안에 허공이나 작은 자동차 안에 허공이나 그냥 한 허공(虛空)일 뿐입니다. 크다, 작다 나눌 수 있는 그런 허공이 아니겠지요. 말길이 끊어진 고요의 세계를 말로 표현하려니 자칫 오해를 하기가 쉽습니다. 그 오해를 선문(禪門)에서는 ‘알음알이’라고 합니다.


스승들은 ‘알음알이’를 일으키는 것을 가장 경계하셨습니다. 설명해주기 위해 진실 아닌 세계를 거짓으로 보여주신 일은 없습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오직 진리를 깨닫게 하고자 ‘올인’할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다, 나다 하는 일체 개념들은 우리들 생각이 만들어낸 세계입니다. 그 생각이라는 것이 꿈꾸는 사람의 꿈과 같다면 꿈꿀 때만 있는 것이지 을 깨고 나면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우리 스승들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둘이라고 하면 이미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이니 꿈만 깨고 나면 둘이라는 세계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까 둘이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허공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허공을 하나, 둘 셀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고 이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신 겁니다.


 

“구경궁극(究竟窮極)하야 부존궤칙(不存軌則)이니”
“구경(究竟)의 궁극(窮極)은 정해진 법칙이 있지 않음이요”


내내 같은 내용인데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중도(中道)를 깨달으면 중도라고 할 그것마저도 초월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깨달은 분상에는 중도라고 할 그 무엇도 없다는 말입니다. 구경이요 궁극이라, 일체 로 표현할 길이 없는 마음 길이 한 자리라서 어떤 이름이나 모양이 붙을 수 없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달마대사의 ‘모를 뿐’이라는 대답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양무제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하다가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하고 물으니 달마대사는 “모릅니다(不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릅니다”하는 대답은 안다, 모른다의 모른다는 대답이 아닙니다. 참으로 진리를 그대로 보여준 너무나도 당연한 도(道)의 세계를 보여준 것입니다.


안다는 것도 내 생각에 속는 것이요, 모른다는 것도 내 생각에 속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달마대사의 모른다는 대답은 안다느니 모른다느니 하는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난 대자유를 보여준 큰 사건입니다. 다만 생각 속에 갇혀 사는 이들에게는 모른다는 말이 정말 모른다는 답으로 잘못 듣게 됩니다. “달마대사가 모르고 있구나”하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살아 움직이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떠한 일정한 법칙도 없는 것이 바로 궁극입니다. 그러니 대자유가 되는 것이지요. 참새 다리는 짧으면 짧은 대로 그냥 좋고 학의 다리는 길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모양을 떠나서 보면 그대로 완전한 평등이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학의 다리와 참새 다리는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는 데는 그냥 에너지 작용일 뿐 크다 작다 하는 분별이 전혀 없습니다. 큰 것은 큰대로 좋고 작은 것은 작은 대로 좋다는 말이 아니거든요. 그냥 평등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얼마나 생각의 놀음에 빠져서 차별상에 속고 비교하는데 속고 살아가고 있는지, 평생 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남에게 속거나 사기를 당하면 소송을 해서라도 기필코 바로잡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내 스스로에게 속는 일, 평생 속는 일인지 그 자체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우리에게 강조하신 말씀 중 하나가 “바로 보라. 나는 누구인가?”, 연기공성을 바로 보라고 한평생 팔만사천법문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많은 법문 가운데 중심축이 바로 보는 법(法), 법문(中道法門)입니다. 그 중도(中道)의 내용을 가장 잘 함축시켜서 표현하고 보여준 내용이 바로 이 ‘신심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도에 대한 바른 안목이 없으면 ‘신심명’은 바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그런 바른 안목이란 어떤 것인가, 부지런히 수행하여 직접 고요의 체험을 해보셔야만 합니다. 죽 끓듯이 일어나던 번뇌, 망상이 그대로 고요가 되어버린 텅빈 고요의 체험을 해보시면 번뇌, 망상 자체가 공(空)한 자리라는 걸 바로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번뇌, 망상과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번뇌, 망상은 투쟁할수록 힘이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번뇌, 망상은 번뇌, 망상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가고 성내는 기운은 성내려는 기운을 양식으로 살아가고 잠은 잠을 자려는 기운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뇌, 망상과 싸울게 아니라 그냥 화두만 참구하십시오. 번뇌, 망상이란 남이 나에게 떠맡긴 것도 아니고 아니면 밖에 있다가 들어오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걸어온 내 발자국이며 내가 좋아서 내 잠재의식에 녹음해 놓은 나의 소중한 내 인생입니다. 번뇌 망상은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번뇌 망상을 사랑해보는 법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둘이 아님을 아는 일입니다. 번뇌가 보리임을 믿고 번뇌 망상이 있기에 수행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진흙이 없으면 연꽃은 피어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본분사(本分事)에서 보면 부질없는 소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하기에 구경의 궁극은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이러한 가르침이 참으로 귀한 가르침이요, 진리라는 사실을 깊이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허공성인 까닭이며 항시 부동(不動)인 까닭이며 여래장 가운데는 생멸이 없는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 혜국 스님은

 

1948년 제주 출생으로, 1962년 해인사로 출가해 일타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70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고 1970년 22세에 ‘성불’(成佛)을 발원하며 오른손 손가락 3개를 연비했다. 이후 태백산 도솔암에서 2년 7개월 동안 생식 및 장좌불와를 하며 매서운 정진에 몰입했다. 경봉, 성철, 구산 스님 회상에서 수행정진하면서 해인사, 송광사, 봉암사 등 제방 선원에서 수십 안거를 성만했다. 1994년 제주 남국선원 무문관을 개원하고 2004년 빈터만 남은 충주 폐사지에 석종사를 창건했다. 현재 석종사 금봉선원장으로 주석하면서 수행납자와 재가수행자들을 정진의 길로 이끌고 있다.

 

[출처: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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