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대승찬 풀이글)

신심명1 / 고정된 생각을 버리면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게 된다

수선님 2022. 9. 25. 12:54

▣ 신심명(信心銘)


중국 선종의 제3대 조사 승찬(?-606) 스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도를 널리 알리기 위해 지은 책으로, 문구가 짧음에도 여래의 일대장경의 요체와 1,700 공안의 요지가 모두 함축되었다고 하여 선종에서는 널리 읽혀지고 있다.

신심명의 한자는 믿을 신, 마음 심, 새길 명인데 믿음을 마음속에 새기는 글이란 뜻이다.

책 구성은 1구 사언, 2구 1게송으로 이루어져 전문은 146구 73게송, 584자이다.

 

 

01. 지도무난 유혐간택 : 지극한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오직 이거다 저거다 하며 나누어 보지만 않으면 가장 지극한 진리로 가는 길이다.

 

지도라 하면 더 이상 높을 수도 없고, 더 깊을 수도 없으며, 더 넓을 수도 없는 가장 지극한 진리로 가는 길로 이것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고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층,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진아로 가는 길이라고 승찬 스님은 얘기한다!

간택이라 함은 가려내는 것이다. 가려내는 것은 몹쓸 것은 버리고, 택하는 것은 쓸모 있는 것은 택하는 행위이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택하고 버리는 작용을 한다.

먹는 음식에서도 그렇고,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도 그렇고, 종교도 그렇고, 모든 것에 작용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적인 마음이다.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간택을 해야만 하는 사회구조에 살고 있다!

지도가 무난하다고 하는데 지도를 방해하는 간택이 극심하다, 이러하므로 도를 이루기가 어찌 쉽겠는가?

 

간택이란 말이 나와 있습니다. 저 위 한문 원문을 보시면 가릴 간자 입니다.

뒤에는 가릴 택자가 됩니다. 나쁜 건 버리고 좋은 것은 택한다는 뜻이지요.

요즘은 다 정미가 잘 되어서 그런데, 옛날에는 쌀을 헤집어보고 뉘나 돌을 가려내야 합니다. 바로 가릴 간자 입니다. 버리고 취하는 것을 간택이라 하는데, 지극한 도라 할 때의 지극한 도는 아까 말씀드린대로 본래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완전의 자리, 우리가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런 자리입니다.

완전의 자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함을 꺼리면 된다.

버리고 취하는 것을 꺼린다 이말입니다.

 

 

 

거기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지극한 도란 무상대도를 말한다. 무상대도는 어렵지 않으나 간택 즉,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으면 무상대도에 계합하지 못한다. 그것은 중도의 바른 견해를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도는 그 밑에 영어를 보시면 'The way' 라고 되어있지요? 진리이지요. 우리가 One way라는 말도 하잖아요? 바로 도인데 우리가 보통 가는 길도 도이요, 추구하는 깨달음도 도입니다. 여기에서 이 무상대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오직 간택함을 꺼린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걸 여러 방향에서 말씀드리면,

첫 번째는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하든지 간에 ‘오직 행위 할 뿐’, 의식을 개입시키면 안됩니다. 오직 행위할 뿐, 좋다 나쁘다는 의식을 절대 개입시키지 말라 이 말입니다.

오직 행위할 뿐이라 했어요.

밥 먹을 때는 오직 밥 먹을 뿐입니다. 사람과 만날 때는 그 사람과 만날 뿐입니다. 길을 걸을 때는 걸을 뿐입니다. 절대 비교하거나 간택하지 말라는 겁니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바른 도에 계합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간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순간순간의 삶에 취하고 버리고 함이 없이 사는 사람은 영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순간 간택함이 없이 사는 그 마음이 바로 영원의 마음과 맞닿아 있다 이 말입니다. 바로 이 순수함의 자리, 완전의 자리, 진리의 자리에 나아가려는 사람은 절대 2차적 복선을 깔지 않습니다. 그 마음 가운데 딴 마음을 깔지 않는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은 늘 덤덤하고 소탈하고 그렇지요? 바로 이러한 사람이 지극한 도에 계합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도, 진리의 세계에 계합해서 참불자로 사는 사람은, ‘저 사람은 뭣 때문에 좋아하고’하는 이런 분별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이 도, 또는 진리의 세계는 취하고 버릴 것이 본래 없잖아요? 진리가 그러하고 도가 그러하기 때문에 모든 불자들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요. 싫다고 버리는 간택의 마음만 버리면 뭐든지 다 좋습니다. 오리 다리는 오리 다리대로 좋고, 긴 학다리는 학다리대로 좋고,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좋은 것이고, 장미는 장미대로 좋고, 대나무는 대나무대로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요. 그게 바로 간택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눈은 눈대로, 코는 코대로, 입은 입대로 다 자기 영역이 있고 자기 할 일이 있잖아요. 모든 것을 다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버리고 취하는 간택을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수행과 많은 염불 기도를 통해야 도에 계합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아주 근본자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네,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그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신심명은 중국에 불법이 전해진 이후, '문자로서는 최고의 문자다' 이렇게 학자들이 극찬합니다. 이러한 문자는 하나이지 절대 둘이 있을 수 없다, 대단한 글이다, 다들 이렇게 말합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이렇게 보면 이 말씀에 적용되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적용이 되어서 참으로 우리들에게는 삶의 밑천이 되고 내 마음을 고정시키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지도무난이요 유혐간택이라,

이 한 마디만 해도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렇지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네,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다.

 

 

옛날에 링컨 대통령이란 사람이 백악관을 왔다 갔다 하는데 그 밑에 비서들이 자기들끼리 싸웠다고 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다리가 긴 것이 좋다, 짧은 것이 좋다 하면서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해요. 그러다 대통령이 지나가니까 ‘각하, 다리가 짧은 게 좋습니까? 긴 게 좋습니까?’가끔 신도님 중에도 그런 질문 하는 사람이 있어요. 키가 큰 것이 좋습니까? 키가 작은 게 좋습니까?

그러자 링컨이 대답합니다. ‘다리란 것은 허리에서 시작해서 땅에 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별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잖아요? 짧은 건 짧은 것대로 좋고 길면 긴대로 좋은 거지 굳이 간택할 게 뭐 있냐는 거지요.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 은

신심명의 첫 네 구절입니다. 이 네 구절이「신심명」전체의 심오한

내용을 푸는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도’라는 말은 쉽습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해탈감에 젖어 사는 삶,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 할수 있습니다.

불교적인 안목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인 삶을 지도 즉 지극한 도라고 했습니다.

지극한 도를 결코 변하지 않는 영원한 행복이라 해도 크게 허물이 안됩니다.

지도무난 은 가장 이상적인 삶, 가장 행복한 삶은 어렵지 않다는 말입니다.

유혐간택이라 했습니다. 유혐은 오직 싫어할 뿐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누구누구는 나가라.”고 하는 것은 간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 안으로 들어와.“하는 것은 택입니다.

내마음에 드는 것은 택이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간입니다.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라는 말은,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는 마음,

그 마음을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하는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마음에 드는 것은 받아들이려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배척합니다.

그것 때문에 괴롭습니다. 마음에 든다 하여 선택해도 잠깐입니다.

영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아니, 단 몇시간도 보장하지 못합니다.

좋아서 선택한 사람과 결혼했다가도 머지않아 이혼을 하느니 마느니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일상은 이렇듯 간택하는 생활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깊어지고 인생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간택하는 마음을 쉬자는 겁니다.

 

들판에 나가면 수많은 풀잎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양과 색갈이 각양각색으로 어우러져 있어 신비롭기 만 합니다.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어 모두가 보석같이 빛나 보입니다.

 

거리에 나가면 천태만상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스치게 됩니다.

하나같이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신비롭다 할 것입니다.

들판의 풀잎이나 꽃들이 각양각색으로 어우러져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어느 한사람 귀하다 하지 않을 수 없어 모두가 별처럼 빛나 보입니다.

 

그러한 모습들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것은 좋음과 나쁨을 가려놓아 그에 생각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고정된 생각을 버리면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게 됩니다.     

 

생각은 어제를 보면서 다가올 내일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가버린 어제는 돌이킬 수가 없고 다가올 내일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시간이지요.

현명한 사람은 현재를 가질 줄 압니다.

가버린 어제를 단절하고 다가올 내일은 그대로 두어두는 것이지요.

자신에게 부여된 현재를 소중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오늘이 사라져간 것이고 내일은 불현듯 오늘로 다가옵니다.

자신에게는 언제나 오늘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것들을 알게 되면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도(진리, 깨달음, 제법의 실상, 우주의 법칙, 인생의 법칙)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직 간택(시비분별)을 하지 않으면 된다.
 
제법이 공한 줄 깨달으면, 그 공의 세계에서는,
반야심경의 표현을 빌리면,
“불생불멸”이요, 즉 사실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불구부정”이요, 즉 깨끗하지도 않고(성스럽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다.
“부증불감”이다, 즉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
 
깨끗한 것을 취하고 부정한 것을 버리려하면 마음에서 시비심이 일어난다.
하지만 본래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다면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그러니 간택할 필요가 없다.
 
“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하리라.
단지 증애만 하지 않으면, 즉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즉 미워하고 사랑하는 분별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즉 옳고 그른 마음을 일으키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하게 되고 가지려하고,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미워하게 되어 버리려 하나니,
 
“애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원증회고”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고통
 
이 세상의 만물은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한다.
제법은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에 따라 일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일어나는 것
그런데 어떤 것들을 좋아하게 되면 헤어질 때 고통스럽게 되고
사랑하는 것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되면 그것을 가지려고 한다. 그런데 누가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때 마침 흩어지는 인연하고 만나게 되면 괴로워지게 된다. 사랑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은 마음일 뿐 사건과 사물 자체는 좋고 나쁨이 없다. 그래서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지만 않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만 내지 않으면 괴로움은 생겨나지 않는다.
 

지극한 도道

 

-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라 다만 간택함을 꺼릴 뿐

 

“지도무난至道無難이요 유혐간택唯嬚揀擇이니, 단막증애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하리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라 다만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신심명> 첫 구절이며, <신심명> 대의가 다 들어있는 구절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런 만큼 지극한 도에 대해서 가능한 할 수 있는 데까지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요.

 

그런데 지극한 도는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말로 표현하려니 부득이 지극한 도라고 했을 뿐, 도에는 지극한 도니 평범한 도니 그런 명칭이 붙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2) 그러나 지극한 도에 대한 정견正見이 없이는 <신심명>을 배워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부질없는 설명을 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글이란 말을 다 표현할 수가 없지만 말은 글이 아니면 뒷사람에게 전할 수가 없고 말로서는 뜻을 다 전할 수가 없지만 뜻은 말이 아니면 드러내지 못한다는 고인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모자란 데로 한번 풀어 나가겠습니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는 물이 지극한 물입니다. 물고기와 물은 분리될 수 없으니까요. 물고기와 물은 한 몸입니다. 그러나 물고기 눈에는 물이 보이지 않는답니다. 허공으로 보인답니다. 우리가 배우려는 지극한 도道 또한 그와 같습니다. 우리도 도道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도에는 안과 밖이 없습니다. 원융무애圓融无涯하기 때문에 안팎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본래의 ‘나’입니다. 그래서 3조 승찬 스님께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하신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도에서는 물과 허공이 다르지 않을뿐더러 일체가 ‘원융무애’합니다. 3조 승찬 스님은 지극한 도가 삶이 되었기에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지극한 도는 사람 사람마다 온전히 갖추어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 밝은 스승들은 사족蛇足을 부치고 설명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설명하는 일이 중생을 위하는 길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아예 수행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허물을 안고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도는 이해의 문제가 아니고 직접 체험해서 자기 삶이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지극한 도는 도에 대해서 체험한 만큼 즉 믿는 만큼 보입니다. 요즈음 말로 아는 만큼 보이는 겁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정견正見 즉, 바른 믿음입니다. 본래 부처임을 바로 믿는 겁니다. 모자라서 보태거나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본래 원만 구족함을 바로 보는 ‘정견正見’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 육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몸을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얼마 전 저는 아주 귀여운 애기 때 ‘돌’사진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추를 다 내어놓은 채로 찍은 애기 사진인데 엄청 귀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이 바로 내 어릴 때 사진이라는 겁니다.

 

저는 13세에 출가했기 때문에 어릴 적 사진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회갑 다 지나서 보는 돌 사진이 누군지 알 수가 없겠지요. 본인이 본인인줄 모르는 겁니다. 여기에 돌 사진과 10대, 20대, 30대, 환갑 지난 사진을 펴놓고 보면 어느 사진이 ‘나’입니까? 다 내 사진이라지만 모두 다 내가 아닙니다.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으니까요. 마치 얼음으로 정성 드려 잘 조각해 놓은 조각상을 햇볕에 내놓으면 살살 녹아가는 모습과 우리가 늙어가는 모습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육신으로서의 나는 변해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변해가는 모습에 무슨 고정된 실체가 있겠습니까? 계속 쉼 없이 변해가는 것은 내 모습만이 아닙니다. 일체 삼라만상 모두가 변해가는 과정으로서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이 사실을 분명히 바로 보는 것, 이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변해 나가는 원인과 결과 즉, 연기법緣起法을 분명히 바로 보고 바로 행하는 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원리를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며 ‘유혐간택唯嬚揀擇’이라고 할 때 간택揀擇(3)할 실체가 없다는 겁니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두고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니 지극한 도는 간택함을 꺼린다는 깊은 뜻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간적으로 살펴봐도 또한 그렇습니다. 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내 입장에서는 남쪽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저 뒤에 계신분이 볼 때는 북쪽에 앉아 있는 게 분명하거든요, 남쪽이니 북쪽이니 하는 것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것 일뿐 내가 없으면 동서남북 또한 없습니다.

 

서울 조계사에서 볼 때는 제가 살고 있는 충주 석종사가 남쪽에 있지만 부산에서 보면 북쪽에 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는 남쪽이 맞고 부산에서는 북쪽이 맞습니다. 양쪽 다 맞다는 것은 양쪽 다 틀렸다는 의미입니다. <신심명>에서는 이와 같은 모순을 뛰어 넘어 맞다, 안 맞다, 너다, 나다 하는 상대성 양변을 모두 초월하여 ‘원융무애’한 이치를 지극한 도라고 이름 하신 겁니다. 중도中道를 말하는 겁니다. 결국 지극한 도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증애심憎愛心인 양변을 초월해야 합니다. 양변을 뛰어넘는다고 해서 뛰어넘은 세계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양변이 없어지면 가운데라는 개념도 저절로 사라집니다.

 

한국에 있는 집이나 북한에 있는 집이나 집을 허물어 버리면 꼭 같은 허공이 됩니다. 남이니 북이니 자체가 없고 한국이니 북한이니 하는 이름도 없어집니다. 문제는 동서남북이니, 너니, 나니 하는 모든 이름을 인간들이 마음대로 부쳐놓은 이름일 뿐이지 저들이 정해달라고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 아닙니다. 그냥 한 허공일 뿐입니다. 그렇게 된 삶을 중도의 삶이라고 하고 지극한 도라고 이름을 붙인 겁니다. 간택할 실체가 없는 것을 본인이 스스로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본인이 착각에서 깨어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비교하고 경쟁하는 인간의 심리는 매우 심각합니다.

 

누구든지 집이 없던 사람이 처음으로 집을 장만하여 30평 아파트로 갈 때는 얼마나 좋아 보이고 행복했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경쟁자인 동창생이 50평 아파트를 사서 이사 갔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자기 30평 아파트는 형편없이 작아보이게 되고 불평이 시작되는 겁니다. 행복해하던 분명 그 아파트이건만 한 생각 일으킴으로 인해 형편없는 아파트가 되어버린 겁니다. 결국 한 생각 일으키는 그 마음 따라 이세상은 창조 되고 멸하고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이 생각이 나오는 자리, 사랑과 미움이 둘이 아닌 그 자리를 바로 보면 바로 ‘통연명백洞然明白’인 것입니다.

 

우리 본질 즉 본마음 연기 공성으로서의 참 나에는 미워하고 사랑하고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신심명>에서는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나니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라고 하셨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증애심만 놓아버리면 통연명백하니라 하셨거든요. 그러나 증애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꿈꾸고 있는 사람은 일단 꿈속의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니까요. 아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해하는 것 가지고는, 생각으로는 되지만 삶으로는 되지는 못합니다. 증애심이 끊긴 원융한 공간, ‘나’라는 벽이 없다는 사실을 실참실구하여 직접 체험해야만 합니다.

 

통연명백이라고 생각으로 아는 것을 지식이라 하고 통연명백이 되는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지식은 기억하는 것이고 수행은 직접 체험하여 자기 삶이 되는 겁니다. 익히고 습득하는 기술을 체험하는 게 아니고 비우고 비워서, 쉬고 또 쉬는 고요의 체험을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요는 성성적적惺惺寂寂을 말합니다. 성성적적은 나의 본래 고향이며 본래 모습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성성적적은 연습해서 새로 만드는 게 아니고 완벽한 본래 자기 모습이니까요.

 

제가 외국스님들하고 송광사에서 같이 참선을 할 때였습니다. 그 당시 7개국 스님들이 같이 모여 살 때인데 어느 나라 스님인가 내가 있는 수선사 선방에 와서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스님은 부처님을 만난 일이 있느냐고요. 그럼요, 매일 만납니다. 그러면 내일도 만날 겁니까? 예, 물론이지요. 그러면 내일 부처님을 만나거든 왜 우리 앞에는 나타나지 않느냐고 물어봐주십시오. 예, 그러지요. 꼭 물어봐 달라고 강조하면서 나가는 그 스님 뒤를 쳐다보면서 사실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늘 같이 살고 있는 건데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뒷날 찾아와서 물어 봤냐기에 물어 봤다고 그랬지요. 그런 뒤 스님들 사이에서 하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자네들 찾아가려고 통화했더니 자네들은 24시간 하루 종일 통화중이라서 통화가 안 되더랍디다. 그랬더니 외국 스님들이 상당부분 정말 그렇다고 긍정하는 거예요.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 꽤 많은 시간을 번뇌와 망상, 온갖 잡생각 하느라고 자신을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고요라는 본모습 자기 자신을 지키는 시간이 많지 못합니다. 이런 하루가 쌓여 일 년이 되고 일생이 되는 겁니다. 내 한평생이라는 삶을 냉철하게 돌아보면 내 감정에 휘둘려 다니느라 보낸 인생이지 내가 누구인지 참나는 오늘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 자신을 잘 지켜 주인으로서 보낸 시간은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잘 지켜서 주인이 주인 노릇한 시간을 고요의 체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지켜야할 내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단막증애하면 바로 그 자리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파도는 그대로 바닷물이니까요.

 

저는 젊은 시절 한창 공부할 때 파도 자체를 없애려고 많은 갈등과 시간 낭비를 했습니다.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인생을 낭비한다는 얘기요, 인생을 낭비한 죄는 죄 중에서도 큰 죄로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픈 일 가운데 하나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너무 늦게 안다는 사실입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내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늙어 버렸다는 현실이 이 얼마나 한스러운 일입니까.

 

이 말은 옛부터 내려오는 고인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증애심이라고 표현한 이 말속에는 이 세상 모든 상대성과 모든 갈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너다, 나다 모든 시비를 다 포함하고 있는 아주 함축된 언어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면 이미 증애심입니다.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낼 때만이 단막증애가 되는 시간입니다. 그 길은 단막 즉 ‘몰록’이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심명이 비록 짧은 글이지만 그 내용은 중도 총론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하는 도리는 알아도 되고 말아도 되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일입니다. ‘지도무난이요 유혐간택이니 단막증애하면 통연명백하리라’하신 이 열여섯 글자에 우주 대진리를 다 보여주신 겁니다. 눈앞에 역력하게요.

 

 

<주2> 지극한 도를 말로 알 수 있다면 말로 하겠지만 이 도道는 글로나 말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뭣고(是甚磨)”나 “무자無字”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합니다. 그런데 아주 극진한 도, 가장 높은 도는 어렵지 않으니 도를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지 한 가지 꼭 가릴 것이 있으니 간택揀擇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3> 간택에서 간揀이란 아닌 것을 가려내서 버리는 것이고, 택擇이란 옳은 것이나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좋다 싫다, 나다 너다, 붉다 희다, 밉다 곱다 하는 분별이 간택인데, 이 분별심만 버리면 바로 지극한 도라는 것입니다. 분별심만 버린다면 그 자리가 바로 본심 자리로, 본심 자리는 원래가 툭 트이고 명백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려울 게 없다고 합니다.

-혜국스님

 

 

“시절 인연따라 번갈아 나타나는 것은?”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것이 아니니

좋은 것은 나쁜 것을 낳게 되고

나쁜 것은 좋은 것을 낳게 되니

다만, 시절 인연에 따라 번갈아 나타난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지극히 도라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간택함을 싫어할 뿐이다. 여기서 도라는 것은 중도를 뜻한다. 중도는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니, 지금까지 누차 설명했듯이 분별하지 않는 마음을 가리킨다. 이것을 선택하면 저것이 생겨남으로, 좋은 것을 선택하면 싫은 것이 나타나고 삶을 선택하면 죽음이 생겨나는 것이니, 오직 간택하고 선택하지만 않으면 바로 도 즉, 성불을 한다는 뜻이다.

 

분별하는 마음이 있으면 중생이고,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대로 부처이다. 그래서 도를 이루어 부처가 되는 것은 분별하는 마음만 없애면 되는 것이니, 이보다 더 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분별의 마음을 없앤다는 것은 이치로는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게 생각되나, 현실적으로 지극히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어서, 부단한 정진을 통해 닦아 나가야 할 숙제라 할 것이다.

 

분별이란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고락의 감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감정은 크게 나누어서 두 가지다. 좋은 감정과 싫은 감정, 즐거운 감정과 괴로운 감정, 기쁜 감정과 슬픈 감정, 행복한 감정과 불행한 감정, 이를 통틀어 고락이라고 한다. 말을 하면서도 고락의 감정이 생기고, 몸을 움직이면서도 고락의 감정이 생기며, 생각을 하면서도 고락의 감정이 묻어 있다.

 

그런데 감정은 공식이 있다. 이를 인과의 법칙이라 한다. 한번 즐거우면 한번 괴롭게 되고, 100그램의 기쁜 감정을 느꼈으면 언젠가는 100그램의 슬픈 감정을 느끼게 되어 있다. 한번 태어나는 기쁨을 가졌으면 한번 죽어야 하는 슬픔의 감정을 느끼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던지 고락의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모든 중생은 즐거운 감정과 기쁜 감정, 행복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움직인다. 또 괴로운 감정과 슬픈 감정, 불행하고 기분 나쁜 감정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움직이더라도 고락의 감정을 얻거나 피하려고 하는 행동이므로, 고락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하던 선택하는 만큼 인과가 생기기 때문에 고락의 과보를 피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이것을 고락의 분별이라 하고 고락의 윤회는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고 나쁜, 옳고 그른 시비 고락의 분별심은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네 싫네, 옳으네 그르네 하는 시비의 마음은 고락의 분별로 이어져서 고통과 괴로운 감정을 계속하게 되므로, 이를 벗어나는 길이 곧 중도의 길이고, 부처 되는 길이다. 따라서 일상의 생활에 있어서 즐거운 감정을 선택하려 행동한다거나, 괴로운 감정을 선택하여 피하려 하는 것은 곧, 인과의 과보로 인해 계속적인 고통과 괴로움을 낳게 될 뿐이니, 절대로 감정을 일으켜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참으로 난망하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고락의 감정에서 벗어나려 수행하는 것이다. 때문에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탐‧진‧치 삼독심은 영원히 괴로움을 낳고 사는 중생의 마음이요,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것을 선택을 하지 않는 이는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수행자일 것이니, 선택은 자기의 몫이다.

 

 

 

 

 

 

 

 

 

 

 

신심명1 / 고정된 생각을 버리면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도 매이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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