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처님에 대한 왜곡된 상을 가지고 있다. 깨달은 사람은 미래를 내다보고 상대의 마음을 읽고 화를 내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법에 대한 착각이다. 불교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깨달음은 어마어마한 거야! 내가 알고 있는 깨달음은 저런 것이 아니야! 라는 상이 있다. 그러면 결코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없다. 먼저 모르겠다 하고 모두 내려 놓아 보라.
本有今有 본래 있던 것이 지금도 있을 뿐이란 말이 있다. 사람들은 견성을 한다 열반.해탈을 한다 삼매를 증득한다 그런 것을 깨달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삼매가 깨달음은 아니다. 삼매란 분별을 멈추고 쉬는 것이다. 삼매도 종류가 있다. 일행삼매 나가대정 해인삼매는 들어갔다 나오는 삼매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삼매도 집착하지 말고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비상비비상처라는 최고의 삼매를 체험하셨지만 이것이 깨달음일 수는 없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본래 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늘 있는 것이 아니면 깨달음이 아니다. 체험은 깨달음이 아니다. 체험은 왔다 가기 때문이다. 모두 나와 다르지 않고 모두 부처님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늘 생각에 빠져 살기 때문에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 알고 보니 내가 부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마음공부다. 중국 우두선의 증조로 20년간의 묵좌로 깨우침을 얻은 중국 당나라 법융<594~657>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本夾不存 本夾郎今 본래가 따로 없으니 본래가 지금이다.
깨달음은 원래부터 있는 것이니 일부러 지킬 필요가 없다. 성지순례 가서 찾는 것이 아니다. 원래가 지금이다. 깨달음은 단 한번도 놓친 적이 없다. 심지어 죽었다 깨어나도 놓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 그러는 것이다. 보리본유 불수용수 깨달음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결코 우리에게서 도망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모양도 없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선이란 선에 참여한다는 말이다. 직지인심 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거창한 말이 아니다. 깨달으면 보리도 없고 열반도 없다.
靈通應物 常在目前 영활하게 통하여 사물과 호응하여 항상 눈앞에 작용하고 있다. 숨어 있던 적이 없다.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소리내기도 한다. 본래부존 본래즉금 부처 열반 본래 따로 없다. 따로 있으면 찾아야 하지만 따로 없으면 찾을 필요 없다. 찾을 필요가 없다면 법이 아니다. 법은 둘이 아닌 불이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물의 모양을 보고 분별해서 인식한다. 그러니 좋으면 집착하고 싫으면 멀리하는 취사간택심이 일어난다. 대상을 보지만 유리알 눈을 먼저 보지 않고 본 적이 있나? 그런데 유리알이 분별이 있나?
분별을 멈추고 진짜 무엇인지 보라!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
대상을 보고 있는 그 놈을 보라는 것이다. 내가 저것을 본다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나도 없고 보이는 것도 알아차림의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눈으로 본다 귀로 들어본다. 본다=알아차린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말문이 막힐 때 물아일체를 경험한다. 내가 저것을 보는 건지 저것이 나를 보는 건지 하나 되는 것 같은 경험을 한다. 마라톤 선수도 내가 뛴다는 생각이 없이 물아일체 무아지경이 되어 뛴다.
위빠사나는 어느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한 상태를 얻은 후에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수행이다. 분별은 보고 난 다음 일어난다. 갓난 아기도 소리를 들으면 대상이 뭔지 몰라도 먼저 알아차린다. 분별은 알아차림이란 바탕 위에 일어난다. 아는 마음이 모양도 없고 공적해서 공적영지라 하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나라는 것이 확인된다. 앉아 있으나 서 있으나 몸은 움직이지만 나라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30년 전 알아차리는 나나 지금 알아차리는 나는 같은 나다.
30년 전 몸이나 지금 이 몸도 나라고 알아차리는 놈이 먼저 있어야 그 다음 몸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몸이 나가 아니라 몸이 나라고 알아차리는 그 놈이 나인 것이다. 느낌이 나인가? 기쁨도 슬픔도 왔다 떠나간다. 그런데 기쁘면 기쁜 줄 알고 슬프면 슬픈 줄 아는 그 놈은 떠나가지 않는다. 느낌은 왔다 가도 알아차림은 왔다 가지 않는다. 그러니 알아차림은 느낌도 생각도 아니다. 아는 놈이 있어야 그 바탕 위에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의식도왔다 가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바다에 비유할 수 있다. 알아차림이 바다라면 색수상행식은 파도와 같다. 그래서 색수상행식 5온을 오온개공 오온무아 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거울 같이 투명하여 오염되지 않는다.
이 4대로 된 육신은 법을 말하거나 들을 줄도 모르고 비장 위 간 쓸개도 법을 말하거나 들을 줄 모르며 허공 또한 법을 말하거나 들을 줄 모른다. 그러면 무엇이 법을 말하거나 들을 줄 아는가? 바로 그대들 눈 앞에서 또렷하고 역력한 것이 하나 홀로 고고하게 밝으니 이것이 법을 들을 줄도 말할 줄도 아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면 곧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이것이다. 무엇이 견성입니까? 본성이 곧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이 곧 본성이다.
31회. 법상스님. 깨달음의 본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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