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乘起信論에서의 ‘如來藏’ 개념 연구 / 고승학
서울大學校人文大學院 (석사학위논문)
[고승학] 대승기신론에서의 여래장 개념 연구
<국문초록> Ⅰ. 서론 Ⅱ. 기신론 에 대한 기존의 시각 1. 기신론 에 대한 ‘전통적 견해’와 그에 대한 반론 2.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닌가? ― 비판불교의 경우 3. 기신론 의 성격 규정 Ⅲ. 여래장사상의 개요 1. 여래장사상이란 무엇인가? 1) 여래장사상의 형성 2) ‘불성(여래장)’의 원어와 ‘실유불성’의 의미 3) 법신의 사바라밀다 2. 기신론 에 영향을 끼친 여래장 계열 경전들 1) 아홉 가지 비유로 제시된 여래장 개념: 여래장경 을 중심으로 2) 一法界와 법신의 자기 전개: 부증불감경을 중심.. 3) 여래장의 두 가지 의미: 승만경 을 중심으로 |
Ⅳ. 기신론 의 여래장 개념 1. 기신론 의 알라야식 개념 ― 능가경 과 관련하여 2. 생멸문의 구성 1) 始覺의 四相 2) 本覺의 구조 3) 不覺과 알라야식의 전개(生滅因緣) 3. 4종 熏習과 流轉·還滅연기 1) 기신론 의 熏習개념 2) 染法훈습과 流轉연기 3) 淨法훈습과 還滅연기 4. 同體大悲의 근거로서의 여래장 Ⅴ. 결론 참고 문헌 Abstract ■ 각주 : |
국문초록
본 논문은 대승기신론 (이하 기신론 )에 대한 기존의 해석과 평가 방식을 비판하고, ‘如來藏(tathāgatagarbha)’과 ‘熏習(vāsanā)’ 개념을 중심으로 기신론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 것이다.
기존의 기신론 해석 방식은 ⑴ 본 논서를 중관과 유식사상의 절충·지양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 ⑵ 본 논서를 유식사상 또는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의 결합으로 해석하는 ‘수정된 견해’, ⑶ 본 논서를 비롯한 여래장사상을 비불교적인 것으로 배척하는 비판불교(Critical Buddhism)의 견해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佛典은 고통받고 있는 모든 중생에게 그의 참된 마음은 본래 깨끗하지만, 우연적인 번뇌에 의해 물들어 있음(自性淸淨心客塵煩惱染)을 깨우치려 하고 있다. 기신론은 이러한 본래의 깨끗한 마음을 여래장, 本覺등으로 부르며, 그러한 참된 마음을 현실화할 것을 역설한다.
‘전통적 견해’의 경우 이와 같이 현실화된 깨달음(始覺)은 본질적 깨달음(本覺)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시각과 본각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하는 것은 자의적으로 보인다. 이러한 견해는 시각이 궁극에 이르더라도 거기에는 집착이나 번뇌가 남아있어 본각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기신론 은 양자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기신론 은 시각이 궁극에 이르게 되면(究竟覺) 본각과 동일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필자는 이 두 가지 覺의 관계는 ‘훈습’ 개념의 분석을 통하여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수정된 견해’의 경우 기신론 에 등장하는 ‘染法과 淨法의 상호 훈습’(染淨互熏)과 같은 개념이 여래장사상이라는 맥락에서 보다 잘 해석된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비록 훈습이라는 개념이 유식사상으로부터 도입된 것이긴 하지만, 이와 같이 ‘변형된’ 훈습 개념은 여래장사상에서만 발견된다. 유식사상에 따르면, 淨法곧 현상계의 참모습인 眞如(tathatā)가 染法곧 어리석음인 無明(avidyā)을 물들이거나 그로부터 물들 수 없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은 그러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비판불교 사상가들은 모든 현상적 존재를 산출해내는 불변의 실체로서 여래장을 상정하는 여래장사상은 비불교적인 ‘일원론’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모든 중생에게 여래장이 ‘있다’는 말(“一切衆生悉有佛性”)은 중생에게 깨달음을 얻도록 하는 격려의 말로서 거기에는 존재론적 함의가 없다. 또한 그들은 모든 중생이 본질적인 깨달음을 가지고 있다는 본각 개념에 주목하여 기신론 이 실천 수행을 필요없게 만드는 논서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훈습 개념을 통해 깨달음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이러한 주장이 성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신론 의 훈습설을 통해 깨달음의 구조를 살펴보면, 본각은 중생의 어리석음(無明=不覺)에 작용하여(熏習) 시각(종교적 실천 수행)을 일으키도록 촉발하는 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훈습은 중생에게 여래장이 내적 요인(因)으로서 작용하고 부처와 보살이 외적 환경(緣)으로서 그를 도움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본각은 眞如熏習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의 완성은 진여의 훈습만으로 성취될 수 없다. 궁극적인 깨달음(究竟覺)은 수행자 자신의 실천, 곧 시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시각은 중생의 현실적인 마음, 곧 현재 번뇌로 인해 오염되어 있지만 본래의 깨끗함을 회복할 수 있는 그 마음(妄心)―알라야식(ālayavijñāna, 阿黎耶識)―에 근거하여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시각은 妄心熏習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망심훈습으로서의 시각은 진여훈습으로서의 본각에 의해 촉발된 것이므로 양자는 모두 淨法熏習에 해당된다.
이와는 반대로 중생의 마음이 그 본래의 깨끗함을 잃게 될 경우 이를 不覺이라 하며, 染法熏習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기신론 은 본래 깨끗한 마음을 가진 중생이 어떻게 해서 우연적인 무명에 의해 오염되며 그 본래의 마음의 本源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본래 깨끗한 마음, 마음의 진여 곧 여래장이 외적인, 우연적인 무명에 의해 오염될 수 있는지 합당한 설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달리 말해 어떻게 염법훈습이 가능한지를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신론 은 단지 그것을 佛智의 영역에 남겨둔 채 ‘不思議熏習’이라 부르고 있다. 아울러 기신론 이 본각의 내용으로서 ⑴ 중생의 실천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요인(因)인 여래장과 ⑵ 그들을 이끌어주고 있는 외적 환경(緣)인 부처와 보살이 존재함을 강조한 것 역시 초월적 종교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기신론 은 본각 또는 여래장의 작용(用熏習)이 끊임이 없는 것은 부처와 보살이 모든 중생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同體大悲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비라는 종교적 理想을 사회 속에서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본 논서의 긍정적 요소이다. 그러나 여래장과 무명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회피한 채 그것을 초월적 경지에 남겨두는 것은 기신론 이 지니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본 논서가 지향하는 바 ‘起信’ 그 자체를 방해할 수도 있다.
주요어:
如來藏, 佛性, 熏習, 本覺, 始覺, 不覺, 批判佛敎, dhātu-vāda, 染淨互熏, 不思議熏習, 同體大悲
Ⅰ. 서론
大乘起信論(이하 기신론 )은 그 書名이 암시하는 바 중생의 마음 속에 깨달음의 가능태 또는 번뇌에 물들지 않은, 본래의 깨끗한 마음(自性淸淨心, prabhāsvaracitta)이 있음을 자각케 하여 ‘대승에의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논서이다. 여래장사상은 중생의 마음 속에 ‘如來藏(tathāgatagarbha)’ 또는 ‘佛性(buddhadhātu)’이라 불리는 깨달음의 가능태가 내재되어 있으며, 그것이 온전히 드러날 때 그 중생은 곧바로 ‘法身(dharma-kāya)’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은 기신론 에서 중생의 마음 속에 이미 본질적인 깨달음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에서 ‘本覺’으로 제시되며, 그것은 ‘生滅’과 ‘不生不滅’의 和合識으로 정의된 알라야식(ālayavijñāna, 阿黎耶識)1) 가운데의 ‘불생불멸’에 해당되는 것이다.
기신론 은 그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장으로 인해 그 동안 많은 동아시아 불교인들의 사랑을 받아왔으나, 인도의 馬鳴(Aśvagoṣa, 기원후 1∼2세기경)이 지었다는 梵本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번역자로 알려진 眞諦(Pāramārtha: 499∼569) 또는 그 譯出그룹 가운데에서 저술된 僞經이 아닌지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2) 더욱이 최근에 12연기설을 기반으로 하는 초기의 불교사상을 제외한 화엄과 여래장 내지 기신론 사상, 禪불교 등을 모두 배척하는 비판불교(Critical Buddhism) 운동은, 자성청정심을 기반으로 하는 여래장사상을 비불교적인, 실체론적인 사고방식으로 보고 있다(여래장을 모든 현상적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如來藏緣起說’에 따르면, 여래장은 현상의 배후에 놓여있는 불변의 실체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여래장사상 내지 기신론 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견해들과 기존의 이해 방식을 우선 살펴보고 나서 여래장 개념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Ⅱ장).
한편, 여래장 개념에 이와 같이 실체론적인 사고방식이 비치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초기불교에서 붓다가 말한 바와 같이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나오지 않건 존재하는 하나의 변치 않는 理法”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3) 왜냐하면 깨달음의 가능태가 중생에게 如來藏(‘여래의 胎兒’라는 뜻)이라는 형태로 본래적으로 있음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깨달음, 곧 번뇌로부터의 벗어남(해탈)이라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여래장이 불변의 속성으로서 중생 안에 항상 내재해 있으며, 중생이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함으로써 생사에 流轉한다고 말할 경우 인도 정통파의 브라만-아트만설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실제로 여래장사상의 전개과정에서 번뇌를 벗어난 여래장, 곧 여래 법신을 常·樂·我·淨으로 규정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4), 이 가운데 특히 ‘我’라는 술어는 초기불교 이래의 無我說(anātma-vāda)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我’라든가 ‘常’이라는 용어가 空에 대한 허무론적 집착, 곧 斷見(惡取空見)에 대한 치유책으로써 사용되고 있음을 경전에서는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용어의 사용이 단지 ‘方便(upāya)’에 그치고 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나름의 종교적이면서도 논리적인 근거가 있는데, 필자는 그것을 入楞伽經에 나타난 一闡提(icchantika 또는 ecchantika)5) 개념과 연결시키고 싶다. 본래 성불하지 못하는 중생 혹은 ‘無性有情’6)으로 거론되는 일천제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곧 모든 중생은 成佛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어서는 평등하지만, 현재 그것을 실현하지 못한 채 佛法을 비방하므로 성불하지 못하는 ‘한시적인’ 일천제와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성불을 미룬 채 보살행을 닦는 ‘영원한’ 일천제, 이른바 ‘大悲闡提’의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7) 이 후자의 일천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처의 ‘작용’이 끊임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설정이 비록 종교적인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작용의 양태에는 ‘常’이라는 술어를 적용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아울러 입능가경 은 여래 법신에 적용된 ‘我’라는 술어로 인해 여래장에 대한 교설을 외도의 아트만설과 같은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됨을 지적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8) 이하에서 살펴보겠지만, 법신의 속성인 아-바라밀다는 보살이 無我에 대한 인식을 철저히 하여 도달하게 된 경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Ⅲ장 1절 3)항 참조).
한편, 여래장을 이렇게 긍정적으로 기술하게 되면서 여래장에는 空과 不空의 두 가지 뜻이 있다는 설이 제시되었다. 법신이 번뇌에 뒤덮여 있음으로써 아직 성불하지 못한 중생의 경우 그러한 번뇌가 成佛의 因을 감추고 있다(隱覆)는 점에서 그를 ‘如來藏’이라 부르게 된다. 그런데 勝鬘經에 의하면, 이 번뇌가 여래장으로서의 중생에게 있어서 본래적인 것이 아니므로 空여래장의 뜻이 성립되며, 그런 번뇌가 걷히고 나면 무한한 공덕을 드러낼 수 있다는 취지에서, 곧 중생의 본질은 원래 부처(여래 법신)의 공덕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라는 뜻에서 不空여래장의 뜻이 또한 성립된다.9) 여기에서 중생의 번뇌를 걷어내는 것은 중생 자신에게 있는 여래장의 不空의 공덕에서 비롯하며, 그것은 또한 외재적인 조건(外緣)인 부처와 보살 등의 善知識의 존재에도 의존하고 있다. 기신론 은 이와 관련하여 “染法熏習(無明훈습)은 … 성불한 후에는 끊어지지만 淨法熏習(眞如훈습)은 그치지 않는다”10)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外緣으로서의 선지식들은 중생이 존재하는 한 존재해야 하므로 그러한 진여의 작용(用熏習)은 끝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필자는 여래장을 서술할 때 적용되는 ‘常’ 또는 ‘我’라는 술어의 의미를 중생 구제의 항구성이라는 대승불교의 종교적인 요청과 관련하여 밝혀보고자 한다.
그런데 대승입능가경 에서는 한편으로는 여래장과 알라야식(藏識, 識藏)을 동일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래장에 장식이 없으면 곧 생멸이 없다”11)라고 하는데, 여래장과 알라야식의 이러한 관계 설정은 불생불멸의 여래장과 생멸하는 의식의 화합식으로 알라야식을 정의하는 기신론 의 生滅門정의12)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신론 에서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과정(還滅)은, 그 안에 깨끗한 불성(不生不滅)을 간직하고 있지만 중생에게 있어서는 번뇌의 창고(生滅)로도 기능하고 있는 이 알라야식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眞如, tathatā)이 밝게 드러나는, 깨끗한 여래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여래장사상은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에서 중관이나 유식사상과 비견될 만한 학설로서의 독자성은 인정받았지만, 독립된 종파나 학파(인맥)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13) 如來藏經, 不增不減經, 勝鬘經과 같이 ‘如來藏三部經’으로 알려진 경전들이 있긴 하지만, 이들 경전을 所依로 하는 종파가 형성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은 특정 종파나 학파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게 수용되어 왔으며, 그것은 불교사상이 일반적으로 번뇌를 우연적이며 소멸 가능한 것으로, 그리고 그것이 소멸됨으로써 드러나는 부처의 경지는 절대적이며 불변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기불교 이래의 전제를 체계화한 것이 여래장사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보성론 을 통해 집대성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기신론 의 여래장사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보성론 을 통해 여래장사상의 개요를 살펴보고(Ⅲ장 1절), 이어 여래장 삼부경을 중심으로 기신론 과의 상관 관계를 검토해 보기로 하였다(Ⅲ장 2절).
기신론 에서 진여문에 대한 설명은 생멸문에 비해 매우 소략한데, 그 이유는 萬有의 변치않는 참모습이라 할 수 있는 眞如(tathatā) 그 자체는 언어적 분별을 떠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그러한 형용할 수 없는, 진여라는 본래적인 모습과는 달리 미망을 헤매고 있는 현상적 중생의 모습이 나타난 생멸문의 경우는 비교적 자세한 설명이 가능하다. 생멸문은 중생에게 내재된 본래적 깨달음(本覺=心源)과 중생이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始覺), 그리고 그런 본래적 깨달음을 갖춘 중생심이 번뇌에 물들어 있는 현실의 모습(不覺)이라는 세 가지 측면을 모두 설명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멸문은 우선 중생심으로서의 알라야식을 眞(불생불멸=여래장)·妄(생멸) 화합식으로 정의하는데, 이러한 알라야식은 오로지 생멸하는 의식(一向生滅識)에 지나지 않는 유식사상의 알라야식과는 판이한 것이다. 원효는 기신론 의 알라야식 개념의 연원을 능가경 의 識說로부터 찾고 있으므로, 본 논문에서도 이를 능가경 의 識說과 비교하면서 논의하기로 한다(Ⅳ장 1절). 이어 이러한 알라야식으로부터 깨달음의 세계(覺)와 미혹의 세계(不覺)가 전개되어 나오는 모습을 파악하기로 한다(Ⅳ장 2절). 다음으로 중생의 번뇌와 해탈을 설명하기 위해 기신론 이 도입한 熏習개념을, 깨달음의 구조와 관련하여 정리해 본다(Ⅳ장 3절). 아울러 능가경 에 나온 ‘영원한’ 일천제(大悲闡提)와 비견될 만한 기신론 의 ‘同體大悲’ 의식을 특히 진여의 用훈습과 관련하여 살펴보기로 한다(Ⅳ장 4절).
기신론 은 그 經名이 나타내듯이 대승에의 ‘믿음’을 일으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는 논서이다. 그렇다면 기신론 을 해명함에 있어서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이성에 의해 정당화된 믿음인지 아니면 종교적 정열에 의해 맹목적으로 믿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진여와 무명의 상호 훈습에 대한 기신론 의 설명은 그 자체가 그야말로 종교적인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기신론 은 본래 평등한 진여가 무명에 의해 훈습되어 중생의 인식이 차별화되는 과정과 진여가 다시 무명을 훈습함으로써 이를 타파해 나가는 과정에 대하여 “오로지 여래만이 알 수 있다”거나 “심식의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하는데, 이러한 언급은 여래장에 대한 ―맹목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종교적·초월적인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경향은 대부분의 여래장 계열 경전들이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기신론 에 있어서의 믿음이 결국은 지혜에 바탕을 둔 자비의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종교적 경지에 대한 초이성적인 직관에 근거하는 것이라는 점 또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 기신론 을 이해하는 데 참고한 것은 원효의 疏와 別記이다. 일본학자들은 대개 法藏의 起信論義記를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법장의 의기 는 상당 부분 원효의 소를 그대로 全載한 것이므로 기신론 이해에 있어서 원효의 권위는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4) 물론 원효의 起信論觀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어 왔고, 원효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본 논문의 주제가 아니므로 필자는 기신론 이해를 위한 유용한 ‘방편’으로서 원효의 기신론 해석을 일단 인정하고자 한다. ▲ 위로
[출처: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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