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150.도명스님

수선님 2022. 10. 9. 12:45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불교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지혜와 자비다. 지혜는 다른 말로 깨달음이고 자비는 베품 나눔 실천이다. 부처님의 기초교리엔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중도 연기법이 있다. 뇌는 접하지 않았던 것을 처음 접하면 어렵다고 인식한다. 부처님은 나의 가르침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말씀하셨다. 삼법인은 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다. 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지금 보면 있는 그대로 객관적 사실이지만 부처님 당시엔 영원한 창조주가 있고 모든 존재엔 변하지 않는 초월적 자아인 永遠한 아트만이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이 보니 이 세상엔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아신 것이다. 

 

우리가 어떤 역사에 대해 알려면 그 역사책을 쓴 사람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다. 부처님도 출가 전 고민이 많았다. 내가 아무리 전륜성왕이 된다 해도 내가 죽고 나면 왕국은 허물어질 것이니 영원한 진리를 찾아 출가를 해야 하겠다고 결심한다. 부처님은 세속적인 욕망을 포기하여 진리를 얻기 때문에 부처님의 출가를 위대한 포기라고 한다. 당시엔 고행주의가 유행했다. 그래서 6년 동안 죽을 만큼 고행을 다하셨으나 깨달음은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수행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반조하게 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일어나고 절대적인 신이나 실체는 없다고 깨달으신다. 사람들의 불행은 존재의 본질을 모르는 무지에서 온다고 생각하신 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참나를 찾고 주인공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자비심을 내어 설법을 시작하신 것이다. 

 

지혜를 깨달음이라 하고 자비를 실천행과 나눔라고 한다. 마음을 잘 쓰는 것이 베품이고 나눔이고 복을 짓는 일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最上說法과 次第說法으로 나눈다. 최상설법은 수행자가 진리가 무엇인지 물으면 연기와 중도 사성제를 설해서 깨닫게 하는 것이고 차제설법은 상대가 이해하기 쉽고 받아들이기 쉬운 作福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나를 바로 알고 나를 지혜롭게 잘 활용하고 잘살아야 한다 생각하신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천인과 세상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고 전도선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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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마음이란 무엇인가?

뭐든 기초가 없으면 반드시 나중에 허물어진다. 그래서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는 기초교리가 최고의 고급교리다.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중도 연기법은 부처님의 최고 높은 가르침이다. 보시 중 가장 큰 보시는 법보시다. 진리를 다른 사람애게 전해주는 것이 가장 큰 이익이고 행복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지혜와 자비다. 지혜는 깨달음이다. 부처님의 출가 목적은 참다운 나의 존재가 무엇인가 알기 위해서였다. 부처님은 12연기를 통찰하시며 무지로 인한 집착과 욕망 때문에 태어남이 있음을 깨달으셨다. 無明이란 나의 근본 존재인 마음을 모른다는 뜻이다.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뀐다. 오만 가지 생각이란 말이 있다. 사람은 실제로 하루에 5만 가지 정도의 생각을 한다고 한다. 

 

불교는 마음의 본질을 本性이라 한다. 성격 기질 특징과는 다른 말이다. 금강경에 보면 不應住色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이란 말은 색성향미촉법에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마음의 본질은 본래 머무름이 없다.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은 과거에 본 것이나 들은 것들로 인해 일어난다. 우리가 지금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은 다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을 알려면 가장 기초적인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지금 이렇게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마음의 본질 중 하나이다. 이렇게 차 한 잔 속에 色聲香味觸法이 다 들어 있다. 

 

응당 머무는 바 없이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 A와 대화하다 B로 대화를 바꾸면 마음은 A에게 더 이상 머물지 않고 B에게로 간다. 이렇게 마음은 인연 따라 머물지 않고 일어난다. 6근이 대상과 연기하면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은 뇌에도 심장에도 있지 않다. 마음은 處所가 없다. 누구나 본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一切衆生皆有佛性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 제자들은 모두 법의 형제들이다. 그래서 사부대중<비구 비구니 우바새/거사 우바이/보살>이다. 스님들은 안거가 끝나면 모여서 안거기간의 허물을 점검하는 의식인 自恣가 있다. 

 

생각은 과거로도 미래로도 가지만 마음은 언제나 현재에서만 일어난다. 우리 본래 마음은 생각이 아니다. 현재 지금 경험하는 이 자리가 바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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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관념

본래 마음이란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다. 본래 마음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변하지도 않고 本無生死 생사를 벗어나 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이 보기엔 분명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삶의 행복도 있다. 본래 마음 자리는 인연만 있으면 현상이 일어난다. 生老病死의 고통은 4등분 해 보니 그런 것이다. 그러나 잘 보면 어린 아이가 자라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늙어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린 아이는 태어난 그때부터 늙고 죽어가는데 그 속에 生老病死가 다 들어 있다. 죽음이 임박해도 피가 돌며 生은 여전히 우리 몸 속에 있다. 轉變 우리의 생명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만 인연에 의해 변화할 뿐이다. 

 

우리 모습으로 세상을 보면 生老病死가 끊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 생명 속 본질로 들어가 보면 우리는 살아 있어도 점점 죽어가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인과에 따라 6도를 끊임없이 윤회한다. 生死는 本性 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구름 얼음 비라고 이름하지만 본질은 다른 게 아니다. 인연에 의해 기체 고체 액체가 되지만 본질은 물이다. 生과 死는 우리 생각으로 일어난다. 생명현상 본질에는 생사라는 것이 없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니 탄생했다 멸했다 하는 것이다. 깨달았던 깨닫지 못했던 생명은 본래 生死 없는 본바탕 위에 있는 것이다. 존재의 본질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 세상에 형성된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숨기는 것이 없다. 연기 삼법인 사성제는 부처님이 있는 그대로 하신 말씀이다. 내 몸이 죽었다고 나의 本性이 죽는 것은 아니다. 우리 본성은 언제나 如如하다. 앞과 뒤가 언제나 같다. 그러므로 본래 生死라는 것은 없다. 찻잔의 형상은 영원하지 않아도 흙의 본성은 그대로 있다. 우리는 늙고 죽어가지만 우리의 본래 생명자리는 생사를 벗어나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이유의 뿌리를 찾아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생존에 대한 집착이 있다. 진정한 자유는 부처님 진리를 통해 참나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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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실천

이 세상엔 기쁜 일이 많다. 돈 버는 일도 기쁘고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기쁜 일이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만큼 이야기하고 법담을 나누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6조 혜능스님이 금강경 구절을 듣고 깨우친 것처럼 법의 인연은 굉장히 소중하다. 잘못된 관념 고정관념 자기생각 자기소견은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거대 관념이 있다. 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이 관념이다. 그러나 관념은 자신의 본질을 깨닫고 그 다음에 써야 하는 것이다. 모든 관념은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얕잡아 보는 관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잘못된 관념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깨달음은 반드시 일상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다. 대만 성운대사는 혼자 있을 때는 좋은 생각을 하고 둘이 있을 때는 좋은 말을 하며 셋이 있을 때는 좋은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엔 身口意 삼업을 청정히 하라는 말이 다 들어 있다. 일상 속에서 바른 생각 바른 말 평등한 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道는 일상 속에서 걸림없고 막힘없이 써야 한다. 道德이란 깨달아서 나누고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어야 덕행이 높은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소중하지만 실천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생긴다. 道는 德과 함께 실천해야 완성이 된다. 

 

見性하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절차탁마 하는 보림수행을 한다. 보림수행 하고 나면 만행을 하면서 업식이 일어나서 업에 휘둘리지 않는지 본다. 예전 스님들은 마음을 알기 전과 후를 오전수행과 오후수행으로 나눴다. 마음을 알고 나서 하는 보림수행이 훨씬 더 힘들다. 내가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악지식이 선지식이 될 수도 있다. 업이 바뀌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상대 행동의 근원을 알면 이해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일과 내 業이 형성된 모든 것이 연기법이다. 부처님은 인연 없는 중생은 여래라도 제도할 수 없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삶이 있고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는 현재지향이다. 바로 이 자리 이 순간이다. 차 마시며 생각이 다른 데 가 있으면 안 된다.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고 절에 와서는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다. 때와 장소에 맞는 말과 생각과 행동을 실천하면 늘 깨어 있는 현재를 사는 사람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모르는 것을 묻지 않으면 허물이 된다. 모를 때는 스스로 찾고 노력해야 한다. 큰 인물은 하늘이 낸다 거나 하늘은 두 가지 복을 주지 않는다는 잘못된 관념이다. 큰 사람은 노력이 만드는 것이지 하늘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으면 복도 지혜도 모두 없는 것이다. 신구의 삼업이 나를 결정 짓는다. 그러니 주인공의 마음으로 당당히 살아야 한다. 

9~12회. 김해 여여정사 도명스님 중에서

 

 

 

 

 

 

 

[출처] 150.도명스님|작성자 Ink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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