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삶과 죽음(1)

수선님 2022. 10. 9. 13:05

<경주시 노인대학 강의>

                  삶과 죽음(1)

※이 글은 지난 11월18일 경주시 노인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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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순서

 

1. 시작하며/ 1

2. 무엇이 참 나인가?/ 2

3.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8

- 장조류 이야기

- 세명의 사자

4. 죽은 뒤 저 세상은 있는 것인가?/ 12

- 윤회전생에 얽힌 이야기 한 편

4. 어떻게 살아야 하는?/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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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하며

  반갑습니다. 방금 학장님으로부터 소개받은 정석준입니다. 어르신들 모두 건강한 모습을 뵈오니 무엇보다도 반갑습니다. 더구나 뭐라고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저의 강의를 들으시려고 찾아주신데 대하여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갑, 진갑이 넘으면 스스로가 늙었다고 생각하고, 경로당에 가서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기가 일수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올 해 100세가 되신 연세 대 명예교수인 김형석 교수가 TV에 출연하여 말씀하기를“60세 이후는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동시에 열매를 맺는 시기다. 60살쯤 되면 철이 들고 내가 나를 믿게 된다. 75살 까지는 점점 성장하는 것도 가능하고, 이후로도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본인의 성취를 유지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여기 오신 분들은 자기 개발을 위해서 무언가 하나라도 더 배워보겠다고 오신 분들이므로 저절로 고개가 숙여 집니다.

  요즈음 지자체 등에서는 유명 강사를 초빙하여 강의를 많이 하고 있는데, 강의 내용이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사는가?,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기며 사는가?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돈, 출세, 건강, 성공 등 이런 세속적인 것들에 관심을 많이 갖기 때문에 그런 강의가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한 3주 전 쯤 인가요? 윤정수 학장님과는 고등학교 동기인데, 학장님께서 시간이 나면 강의를 좀 부탁한다기에 두말 않고 얼른 승낙을 했습니다. 강의 주제를 무엇으로 하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특강이기 때문에 친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된다기에 오늘 제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특히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한 번 쯤은 반듯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 즉,‘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강의 순서는 먼저 나는 누구인지 알아보고,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죽은 뒤의 저 세상은 과연 있는 것이지, 끝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전문 강사도 아니고 남들 앞에서 강의를 많이 한 편도 아닙니다만, 강의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것은 오래 전에, 경주불교 청년회 주체로 법장사에서 어린이 여름불교학교를 개최했는데, 어린이들 앞에게 강의를 할 때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린 아이들 수준에 맞게 강의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참 어려웠다는 생각이 들고, 그 다음이 오늘 이 강의인 것 같습니다. 어르신들은 나이를 그냥 잡수신게 아니라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시면서 본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고 직접 경험한 것도 많으시기 때문에, 척하면 삼척이란 말이 있듯이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채시기 때문에 혹시 실수나 하지 않을까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오늘 될 수 있는 한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려고 합니다. 저도 그동안 강의를 많이 들어보았지만,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듣고 나면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더라고요. 그런데 옛날 이야기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제가하는 이야기 속에 제가 하고자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참 나(眞我)인가?

  옛날 어떤 장군이 산적을 물리치고 승전고를 울리며 산을 내려오는데, 산 기슭에 절이 있었습니다. 장군은 병사들을 대동하고 절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주지 스님 계십니까?”하고 주지 스님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요사체에서 열 서너살 쯤 되어 보이는 동자승이 방문을 열고 나와서“주지 스님은 출타중이라 절에 아니 계십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군이“주지 스님이 계시면 뭘 하나 물어 보고 싶었는데, 그 참 안됐다.”고 말하자, 동자승이“주지스님 한테 물으나 저한테 물어나 매 한가지 입니다. 물을게 있으면 저한테 물어 보시지요?”라고 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꼬마 스님에게 묻겠는데,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가 지은 업보에 따라 극락에도 가고 지옥에도 떨어진다고 하는데, 대체 지옥과 극락이 어디 있단 말이오?”하고 물었습니다. 장군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자승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그의 왼쪽 뺨을 후려쳤습니다. 엉겁결에 뺨을 맞은 장군은 순식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수많은 산적을 물리치고 기세당당한 장군이 부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뺨을 맞았으니 화가 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장군은 얼굴을 붉히며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단숨에 스님의 목을 베려 들었습니다. 이 때 동자승은 맑고 평화로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님, 장군님은 저에게 극락과 지옥을 묻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먼저 지옥을 알려 드렸습니다. 제가 장군님의 뺨을 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저를 죽이려고 칼을 빼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살해하려고 칼을 뽑아든 장군님의 분노한 마음, 그 자리가 곧 지옥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장군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뽑았던 칼을 다시 칼집에 넣으며“하하하”하고 파안대소(破顔大笑)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시 동자승이 말했습니다.

“장군님의 지금 마음 상태가 곧 극락입니다.”

   극락과 지옥은 사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극락과 지옥을 왕래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세상 누구도 지옥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극락)을 바라고 불행(지옥)을 싫어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마음을 바로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잘 쓸 수 있는가? 마음을 잘 쓰려면 먼저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육신이 나 인줄 알고, 이름이 나 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육신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정철이 지은 옛시조에‘아버님 날 낳으시고 어머님 날 기르시니…’라는 시조가 있습니다. 분명 어머님이 날 낳으셨는데, 왜 아버님이 날 낳으셨다고 했을까요? 혹시 아시는 분, 계시면 말씀해 보시죠? 제가 어느 모임에 가서 이 문제를 꺼냈더니, 어떤 친구는 시의 내용이 말이 안되는 엉터리라고 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어떤 친구는 어머니가 나를 낳고 나를 길렀다고 하면 아버지의 역할이 없기 때문에 반반씩 나누어서 그렇게 표현했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내가 부모에 의해서 탄생한 것은 틀림없는데, 유교적 관점에서 딱히 아버지가 어떤 기여를 해서 낳았다고 표현하기가 마땅치 않아 음양오행설을 끌어들여 아버지의 기여도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음양 관계에서 양은 하늘이요 음은 땅을 의미하고, 양은 아버지요 음은 어머니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만물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했고, 땅은 만물을 기른다고 보았기 때문에 여기에 빗대어 하늘에 속하는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땅에 속한 어머니가 날 길렀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 몸뚱이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 속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 육신이 나라면, 눈 내, 귀 내, 코 내, 입 내, 몸 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 내, 귀 내, 코 내, 입 내, 몸 내라고 말하지 않고, 내 눈, 내 귀, 내 코, 내 입, 내 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이 참 나(眞我)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름이 또한 나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름 또한 부모님이 지어 주신 것입니다. 만약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는 의적 홍길동을 그 아버지가 홍갑동이라고 지었으면 홍길동이가 홍갑동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애들 이름은 할아버지 아니면 아버지가 주로 지었는데, 요즈음에는 이름을 잘 지어야 복도 많이 받고 출세도 한다고 하여 돈 주고 철학관에 가서 지어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나 보니 각 문중마다 내려오던 항렬이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름을 잘 지어야 복을 많이 받는다? 글쎄요?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 자식들 하는 일이 하도 안풀려 철학관에 같더니“이름이 나빠 일이 잘 안풀리니 개명을 하라."고 하드랍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20여년 전에 자기가 지어준 이름이라는 걸 잊어 먹었던 모양입니다.

  그럼 어떤 이름이 좋은 이름일까요? 요즈음은 자기 PR시대이니까 이름이란 우선 부르기가 쉬워야 하고, 한번 들으면 기억하기 좋은 이름이 좋은 이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국회의원, 시장, 군수, 경찰서장 등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 중에는 지위가 자기인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퇴직 후에도 자기를 의원님, 시장님, 군수님, 서장님이라고 안 불러 주면 인상을 찌그립니다. 간혹 동네 이장한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직위란 잠시 내가 그 직을 맡아 있을 뿐 영원히 그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이름도 내가 아니고, 이 몸뚱이도 내가 아니고, 직위도 내가 아니라면 무엇이 참 나일까요?

   중국 당나라 때 회양선사(南嶽懷讓)란 분이 계셨습니다. 일찍이 출가하여 참선수행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 넘고 물 건너 수 백리를 걸어 그 당시 선지식으로 유명한 육조(六祖) 혜능대사를 찾아갔습니다. 혜능대사에게 정중히 큰 절을 올리자 대사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는고?”

“숭산(崇山)에서 왔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그 한마디에 스님은 그만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떤 물건이 분명 왔기는 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 대사의 문하에서 8년을 보내며‘어떤 물건’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그 어떤 물건’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대사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설사‘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說似一物卽不中).”

   제자의 말을 들은 대사는 회양이 한 소식(깨달음을 얻은 것)한 것을 알고, 인가(認可 :공부가 다 되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증언)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한 한 물건을 서산대사는 선가귀감(禪家龜鑑, 참선하는 스님들이 귀감으로 삼는 책이란 뜻)에서“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한없이 신령스러워서,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무엇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없도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는 이것을 통상,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마음이 어떤 것인지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마음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코로 냄새 맡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고, 빛깔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존재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이 몸뚱이가 자동차라면 마음은 운전사와도 같습니다. 마음이 가자하면 가고, 서라하면 서야 하듯이, 나의 주인공은 이 육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달마대사가 소림사 소림굴에서 면벽참선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신광이라는 젊은 스님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스님, 저의 마음이 불안합니다. 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너의 불안한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내가 편안하게 해주리라.”

달마대사의 말을 들은 신광이 마음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달마는 한참을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이제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이 말을 듣는 순간 신광은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불안한 마음, 괴로운 마음, 좋아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공연히 불안한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괴로운 마음을 일으키기기도 하며,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며,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둘째, 빛보다 빠른 것이 마음입니다.

  빛은 1초 동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돈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빠른 것이 마음입니다. 빛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마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를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중국 만리장성을 구경하고 온 사람이, 만리장성을 생각하면 즉시 만리장성이 떠오르고, 초등학교 때 친구와 코피나게 싸웠던 생각을 하면 즉시 그 기억이 떠오르며, 1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하면, 즉시 10년 후의 내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과거를 회상하거나 추억할 수 있고, 미래를 꿈꿀 수도 있습니다. 정말 요술 방망이가 마음입니다.

   셋째, 마음은 위대한 창조자입니다.

  여기에 있는 이 책상, 마이크, 이 건물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마음이 설계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 손바닥보다 작은 스마트폰에는 오늘의 국내외 뉴스, 일기예보, 교통정보, 카메라 기능, 백과사전도 다 들어 있고, 저의 카페 삼천대천세계 사이트에 들어가면, 제가 쓴「비교종교론」등 5권의 책과, 신문 ․ 잡지 등에 기고한 200여 편의 수필 ․ 칼럼·논단 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저의 글만 들어 있는 것이 아나라, 이 지구상의 수만, 수억 명의 글도 개인 카페나 불러그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 스마트폰 속에 들어있는 것을 책으로 엮어낸다면 아마 경주 시내에 있는 모든 아파트를 합친 것보다 그 분량이 많을 것입니다. 한 줌도 안되는 스마트폰 속에 그렇게 엄청난 분량이 다 들어간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스마트 폰을 누가 만들었지요?. 물론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창안하여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마음은 아파트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들고, 인공위성도 만들어 우주에 쏘아 보내기도 합니다. 마음은 좋은 사람도 만들고 미운 사람도 만들며, 행복도 만들고 불행도 만듭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에서“일체유심조-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넷째, 마음은 마치 원숭이와 같아서 잠시도 그냥 머물러 있지 않고, 마음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온갖 색깔의 그림을 그리며, 마음은 대상에 따라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일으킵니다. 마음을 크게 쓰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덮고도 남고, 작게 쓰면 겨자씨보다도 작은 것이 또한 마음입니다.

   다섯째, 마음은 눈 ․ 귀 ․ 코 ․ 혀 ․ 입 ․ 몸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하여,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고 맛을 보기도 하고 감촉하기도 하지만, 이 자리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을 수가 없는 것은 삼세(三世: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해 있습니다. 삼세를 초월한 것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은 생기는 일이 없습니다. 생기는 일이 없는 것에는 사라지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으며, 죽는 일도 없고, 태어나는 일도 없습니다.

  이해하기가 좀 어렵지요?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 분명 생사(나고 죽음)가 있는데, 왜 생사가 없다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 왕궁을 버리고 출가하신 이유는 나고 죽는 문제(생사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나라의 태자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장차 훌륭한 제왕이 되기 위하여 학문과 무예를 열심히 익히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대문을 나섰다가 늙은 사람을 보고, 남대문을 나서서는 병든 사람, 북대문을 나서서는 죽은 사람을 보고 '나고 늙고 병들어 마침내 죽는 것이 인간이 처한 한계상황이라면 여기에 무슨 궁극적이 행복이 있을 것인가? 내가 이 문제(生死一大事問題)를 해결하여야 겠다'라고 생각하시고 부왕 몰래 왕궁을 나와, 6년 이란 긴 세월 동안 각고의 수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시고 이 문제(생사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면, 부처님은 늙지 않아야 할 것이고 병들지 않아야 할 것이며 죽지 않아야 할 것인데, 부처님도 우리들과 다름없이 역시 늙으셨고 병고도 있었고 열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생사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은 본무생사(本無生死)의 도리 즉 이 육신에는 생사가 있으나 마음에는 생사가 없다는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데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보면 태양은 동산에서 떠서 서산으로 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지구 바깥에서 보면 태양은 뜨는 것도 아니고 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밝게 비추고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육신에는 분명 생사가 있으나 마음에는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결국 마음이 무엇인가를 깨쳤다는 말입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어떻게 해서 깨달음을 얻었는가 하면 의상대사와 함께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가다가 남양만 부근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얼마나 좋은지 마치 감로수와 같았습니다. 이튿날 잠이 깨어보니 안방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토굴이었고 마셨던 물은 해골바가지에 든 물이었습니다. 해골에 든 물을 마셨다는 생각을 하자 원효는, 온 속이 뒤틀리면서 그만 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원효는

  시생즉 종종법생(是生卽種種法生)이요-한 생각 일어나니 모든 것이 일어나고,

  시멸즉 종종법멸(是滅卽種種法滅)이니-한생각 사라지니 모든 것이 사라지니,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삼계(온 세상)가 마음가운데 있고, 모든 법은 알음알이에 있다라는, 화엄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해골바가지의 물이나 유리 컵 속의 물이나 다 같은 물입니다. 물 자체에는 깨끗함이나 더러움이 없습니다. 해골바가지에 든 물은 더럽고, 유리컵에 든 물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 마음입니다. 원효는 모든 것은 내 마음 가운데 있다는 것을 토하는 순간 깨달았던 것입니다.

   검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검게 보이고, 푸른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푸르게 보이듯이, 어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은 살 맛 나는 세상이 되기도 하고 괴로움과 슬픔의 세상이 되기도 합니다. “아직 반시간이 남았다.”는 것과“반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부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낙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비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은 극락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하며, 행복한 인생이 되기도 하고 불행한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마음의 산물이요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면 그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제 그 해답은 스스로가 내려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람은 태어나자 말자 달려가고 있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어디인가요? 기실(其實)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곧 늙어가고 죽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이미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종착역이 저만큼 보이는 곳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종착역이 어디인가요? 그것은 제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말이기에 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가을 친구 몇 명과 함께 남산 등산을 갔다가 팔각정에서 10년 만에 한 동기생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생이 대뜸 한다는 말이“야, 니 와 이리 늙었노?'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나는 어디가면 내 나이로 안 보는데…내가 보니 니가 더 늙었구만?"하는 생각이 번쩍 뇌리를 스쳐지나 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늙어가는 것은 잘 모릅니다. 남은 늙어도 자기는 안 늙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보아야 하는데, 친구는 늙어도 자기는 안 늙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른바‘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요즈음 100세 시대, 100세 시대 하니까 모두들 100세까지 사는 줄 알고 있는데, 80세까 지 사는 것도 대단한 행운이요 축복인 것 같습니다. 2018년 6월 말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총인구는 5180만 1449명이고, 그 중 남자가 2586만 1116명이고, 여자가 2594만 333명으로 남자보다 7만 9317명이 더 많으며, 70세까지 생존할 확률은 86%, 75세까지 생존할 확률은 54%, 80세까지 생존할 확률은 생존할 확률은 30%, 85세까지 생존할 확률은 15%, 90세까지 생존할 확률은 생존할 확률은 5%라고 합니다. 즉, 90세가 되면 100명 중 95명은 다 저 세상으로 가고, 5명만 살아남는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99세까지 생존한 사람은 648명뿐이라고 하는데, 너나없이 100세까지 산다는 착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남자의 평균 수명은 79세, 여자의 평균 수명은 84세라고 합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6년이나 오래 사는 것은 전문가들은 남자가 여자보다 사회생활이 길고 경쟁이 심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또한 여자가 남자보다 스트레스 대처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경우 괴로우면 울기도 하고 맘껏 표현해 스트레스를 풀지만 남자의 경우는 괴로워도 참는 경우가 많아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고, 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흡연이나 과음을 하기 때문에 여자가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세월이 더디게만 가더니 60고개를 넘으니 세월이 왜 그리 빨리도 가는지요? 눈 뜨면 아침이고, 돌아서면 저녁이고, 월요일인가 하면 벌써 주말이고, 월초인가 하면 월말이 되어 있고, 새해를 맞이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금년 한 해도 이제 달 포 가량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빠른 건지 내 마음이 급한 건지…거울 속을 들여다보면 내가 아닌 왠 늙은이가 들어 앉아 있어 거울조차 보기가 싫어졌습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미리 해놓은 것은 별로 없는 것이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발명왕 에디슨이“시간은 돈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시간은 곧 생명입니다. 하루가 지났다는 것은 내 생명이 하루 단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는 것은 내 생명이 일 년 단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흐르는 시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잠시 잠깐이 하루가 되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됩니다. 그러는 사이 해가 거듭되면 병들어 결국은 길기만 한 것 같은 인생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날 서산대사의「선가귀감」에 나오는“꿈만 꿈이 아니라 인생이 한바탕 꿈이다.”라는 구절을 읽고, 꿈은 꿈이고, 인생은 인생이지 왜 인생을 꿈과 같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니, 인생 70고개를 넘고 보니 이제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이 세상에 확실한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현재 살아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도 부인할 수없는 사실입니다. 그러함에도 사람들은 나와 내 가족의 죽음은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회자정리(會者定離)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옛 말이 있듯이, 사람은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고, 나면 반드시 죽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이며,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몇 년 전에‘구구팔팔 이삼사'란 건배사가 크게 유행을 했는데, 이 말 속에는 구십 구세까지 병치레 안하고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아픈 뒤에 죽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이 건배사대로 되었으면 오직 좋겠습니까만 인생사가 어디 뜻대로 되는 것입니까?.

  노인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한결같이 "잠자듯이 죽는 것"이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잠자듯이 편안하게 죽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늘그막에 암이나 노출혈로 쓸어 진다면 본인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간병하는 가족들이 겪는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제가 간병하는 가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하니, 요즘 아들 며느리가 부모 간병하는 것 봤냐? 늙고 병들면 요양원에 보내 버리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텐데…그렇습니다)

  50대 중반 이후 종교를 찾는 경향이 부쩍 늘어난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심리학자들은 '마음의 평안' 또는 '사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인간은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고 말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죽음이 불안으로 다가오는 것은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장조류 이야기>

  옛날에 장조류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장조류의 소꼽친구 중에 도인 스님이 있었는데, 그 스님이 선정 삼매에 들어보니 장조류의 명(命)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조류를 찾아가서 권했습니다.

  "여보게 친구, 자네도 이제 염불도 좀 하고 참선공부도 좀 하게."

  "나도 그럴 생각이라네, 그런데 다음의 세 가지를 다 이루고 난 뒤 그렇게 하겠네."

  "그 세 가지가 뭔가?"

  "첫째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좀 더하여 돈을 벌이는 것이고, 둘째는 아들, 딸 시집 장가보내는 일이고, 셋째는 아들딸들이 잘 사는 것을 보는 일이라네."

   오늘 여기 계시는 분들에게 누가 이런 권유를 해 온다면(인생 공부 좀 하라고 한다면), 아마 장조류와 별반 다름없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장조류의 첫 번째 대답은 아직은 돈을 좀 더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글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장조류가 농사꾼인지, 장사꾼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그 아직-돈을 더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죽을 때까지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장조류나 우리들이나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대게 입을 것 안 입고, 먹을 것 안 먹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이러한 부모님들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요? 그리고 그렇게 알뜰살뜰 모아서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한들 그 재산이 얼마나 오래 갈지도 의문입니다.“머니(돈), 머니해도 머니가 제일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돈이라고 하는데, 왜 돈을 돈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돌고 도는 것이 돈이라고 해서 돈이라고 한답니다.

  저승에서 현대 정주영회장이 삼성의 이병철 회장을 만났는데, 정주영 회장이 이병철 회장에게“형님 버스비가 없어서 그러니 1,300원만 빌려 주세요?”하더랍니다. (경주 버스비 13000원 맞아요) 그러니까 이병철 회장이 무엇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자네도 이승 올 때(죽은 뒤에는 저승이 이승이 되고 이승이 저승이 됩니다), 돈 한 푼 못 가지고 왔나? 나도 한 푼도 못 가지고 와서 무일푼이라네.”라고 하더랍니다.

  옛말에 3대가는 부자가 없다는 말이 있는데, 재물이란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을 뿐 영원히 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승 갈 때 한 푼도 가져 갈수 없는 것이 또한 재물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은 돈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올바른 생각,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심어주는 일일 것입니다. 즉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게 지내고, 웃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씨를 심어주는 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 줄 참된 유산이 아닐까요?.

  장조류의 두 번째 대답은, 아들 딸 시집 장가는 보내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부모로써 당연한 의무이자 책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도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우리 때에는 결혼이란 무조건 해야 되는 것인 줄 알았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은 결혼이란 필수조건이 아니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며, 좋은 사람(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혼자 살지 억지로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할 것입니까? 자식도 품안에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다 큰 자식을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도 안 됩니다.

  장조류의 세 번째 대답은 아들 딸 들이 결혼하여 잘 사는 것 보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도 모든 부모님들의 공통된 바램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결혼을 시켜놓아도 걱정이 태산입니다. 왜냐고요?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 1위라고 합니다. 즉 3쌍 중 한 쌍이 이혼한다고 하니, 결혼을 시켜 놓아도 의좋게 잘 살지 첫 손자 볼 때까지는 항상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래저래 부모들은 자식들 일로 한시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무자식 상팔자’란 옛말이 허튼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도인 스님은 친구인 장조류에게 아무리 권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고 그냥 절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장조류가 사망했다는 부고장이 날아왔습니다. 스님은 문상을 가서 조문하기를, 

  나의 친구 장조류여! 내가 참선, 염불을 하라고 했지

  그러니까 친구는 세가지를 다 이룬 뒤에 한다고 했지

  염라대왕 그 양반 분수가 어지간히 없네.

  세가지 일을 마치기도 전에 갈고리로 끌고 가다니. 

  스님의 조문은 염라대왕을 나무라는 듯이 지었지만, 세상일에 매달리다 보면, 인생 공부를 할 시간이 없고,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불시에 저승사자가 밀어 닥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후다닥 정신을 차려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입니까?

 

    <세 명의 사자>

  옛날 어떤 사람이 악한 짓만 하다가 명이 다하여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저승사자는 그 사람을 염라대왕 앞으로 끌고 가서 "대왕이시여 이자는 세상에 살아있을 때 부모에게는 불효했고, 스승과 어른을 공경치 않았으며 갖은 악행만 일삼았습니다. 이 사람에게 적당한 벌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저승사자의 말을 들은 그는 염라대왕에게 "대왕님 저는 살아생전에 염라국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다음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더라면 제 인생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대왕님 정말 너무 하셨습니다.󰡓하고 억울함을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너는 내가 보낸 세 명의 사자(使者)를 못 보았단 말인가?”

 “못 보았습니다.”

“그럼 너는 늙은 사람을 못 보았느냐?

“그런 사람은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럼 너는 병든 사람을 못 보았느냐?”

“그런 사람은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럼 너는 죽은 사람을 못 보았느냐?”

“그런 사람은 수없이 보았습니다.”

“늙은 사람, 병든 사람, 죽은 사람이 내가 보낸 사자니라. 너는 그런 사람을 수 없이 보고도 어찌하여 깨닫지 못했느냐. 너는 이제 죄에 대한 업보로 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너의 부모나 형제, 자매, 친구나 친척이 한 일이 아니고 네 가 스스로 지은 것이니 죄에 대한 벌도 스스로가 받아야 한다.”

염라대왕이 말을 마치자 저승사자는 그를 끌어다가 활활 타는 불구덩이 속에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노인과 병자와 사자(使者), 우리는 누구나 이 세 명의 사자를 수없이 보고 듣고 만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건성으로 지나치기만 할 뿐 정작 저 세 명의 사자가 나에게 보내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저 세 명의 사자가 나를 직접 찾아왔다는 엄연한 사실을 느닷없이 통고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지나온 자신의 인생이 너무 잘못 투성이였고, 나쁜 일 투성이였고, 후회 투성이였음을 알고 다시는 나쁜 일 않겠다고 애걸복걸 해 보아도 세 명의 사자가 직접 나에게 다가온 후에야 무슨 소용이 있을 것입니까?

 

   죽은 뒤의 저 세상은 있는 것인가?

  육신의 죽음은 생(生)의 끝인가. 또 다른 생의 연속인가? 저 세상-천당과 지옥은 정말 있는 것인가? 윤회한다는 것이 사실인가?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이 문제는 정말 난제(어려운 문제)요 수수께끼요 아포리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형이상학적인 문제로써, 과거에는 철학과 종교에서 다루었으나 18세기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라는 사람이 사후의 문제는 논증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철학에서 제외시켜 버림으로서 오늘날에는 종교의 영역에서만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내세가 있기는 뭐가 있어? 나쁜 일 하지 말고 착한 일 하라고 공연히 지어낸 이야기이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하루살이가 어떻게 내일이 있음을 알겠으며, 가을 한철 사는 메뚜기가 어떻게 이듬해 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까? 인간은 그 알량한 지식으로 죽으면 그만 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계 4대 성인 가운데 공자님을 제외한 석가 ․ 예수 ․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도교의 장자 같은 성인들은 한결같이 내세를 말하고 있는데, 문제는 내세에 대한 견해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살아 계실 때, 십대제자의 한 사람인 자로가 하루는 공자에게“우리가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물으니, 공자께서 대답하기를“금생의 일도 다 모르는 데, 내생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공자는 죽음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공자는 중병을 앓았을 때 기도해 보자는 자로의 청을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공자에게는 이 현실 사회에 도(道)를 실현하면 될 뿐, 죽음이나 죽은 다음의 존속 여부같은 것은 처음부터 문제 밖이었습니다. 공자가 보인 관심은 예에 맞게 죽고 묻히는 일이지 영혼의 문제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볼 때 유교는 매우 현실적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유교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교에는 내세관이 없기 때문에 유교를 종교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지금까지 늘 논란이 되어 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섬기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 시켰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을 보면, 그의 친구 클라톤이 소크라테스를 찾아가 해외 망명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쳐놓았으니 탈옥할 것을 권유하자“부정의(不正義)를 부정의로 갚아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자신이 이승에서 아테네 국법을 죽이려고 하였다는 것을 하데스 국법, 저승국법이 알게 된다면 저승에서도 저승국법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기꺼이 독배를 마셨다고 하며, 죽기 직전 제자들에게“슬퍼하지 마말라. 나는 이제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히 자유로워 질 것이다.”라고 말하며 운명 하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볼 때 소크라테스는 저승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보았습니다.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하느님 만들었다고 보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때에도 남자는 남자의 육체, 여자는 여자의 육체, 그리고 유아로서 죽은 사람은 성인의 육체를 가지고 승천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당에 가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지만, 이때에 그렇게 가는 것은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따라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당에 갈 수 있는가? 그 선결조건은 철저한 믿음, 무조건적인 믿음입니다.

  그럼 기독교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예배 때 마다 독송하고 있는 주기도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이 구세주(救世主)임을 믿어야 하고, 성령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여 태어난 것을 믿어야 하고,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것과 하늘로 승천하신 것, 그리고 이 세상에 다시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으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고, 이걸 믿지 못하면 기독교인이 못되는 것입니다.

   부활, 전쟁과 평화, 안나 까레리나 등 걸작을 많이 남긴 세계적 대문호 톨스토이는 한 때 기독교에 심취하여「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악마는 유혹하지만 신은 참고 견딘다」등, 복음적인 내용의 문학작품을 많이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만년에는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진리의 길을 찾아 집을 나섰다가 어느 시골 조그만 역사에서 객사하고 말았는데,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남긴 말은‘나는 진리를 사랑한다…많이…’였다고 한다. 이 말 속에 그가 얼마나 참된 진리를 갈구했는지 알 수 있지. 그가 남긴 명언 중에‘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신을 믿는 사람이다. 그 다음 행복한 사람은 신이 있는 지 없는 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신이 있는 지 없는 지 따지는 사람이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신을 믿으라’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톨스토이 자신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은‘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들 말하지만, 구원의 문제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다르고, 개신교 내에서도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토릭(천주교)에서는 전통적으로“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루터는“인간은 선행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신앙)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였고, 칼뱅은“인간의 구제 여부는 전지전능한 신의 자의에 의하여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豫定說)을 내세웠습니다. 16세기 초 교황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발을 계기로 벌어진 이 논쟁은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서며 종교 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칼뱅이 예정설을 내세운 이유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무조건 천당에 간다면,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기독교의 교리와 모순되기 때문이었습니 다. 예컨대 수능 350점을 받으면 서울대학교에서는 그 학생을 불합격시키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도 어쩔 도리가 없이 그 사람을 천당에 보내 주어야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캘빙은 천당에 가고 못 가고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으며,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예정설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80% 이상이 칼뱅신학 계통의 장로교파이며,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칼뱅은 예정설을 주장하였는데, 구원의 문제 만큼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천당간다는 루터교파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 것 같아(?)  이해가 잘 안됩니다.

   도교는 노장사상(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근간이 되고 있는데, 장자는 그의 처가 죽자 토기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문상을 간 혜자가 이를 보고“한 평생 동고동락(同苦同樂)한 처가 죽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자, 장자는“그렇지 않다. 내 처가 죽은 것이 이것이 처음이라면 어찌 처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본디 근본을 생각하면 본래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하니 내 어찌 소동을 피우며 통곡하고 슬퍼하겠는가? 그런 짓은 사리를 분별치 못한 행위이니, 이 때문에 곡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장자의 사후관은 불교의 생사관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삶과 죽음을 불일불이(不一不異), 같은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것도 아니며, 생사일여(生死一如),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과 육신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또한 다른 것도 아니며, 마음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육신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육신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기 때문에, 그 육신으로써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경우에 마음은 그 육신을 떠나는데, 이것이 죽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집을 짓고 살다가 그 집이 허물어져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새 집을 지어 이사를 가는 것처럼 마음이 육신이라는 집에 살다가 그 육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되었을 때 그 육신을 떠나는 것이 죽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떠나가는 마음은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자유를 되찾아 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육신이 생전에 지은 업(業)의 전부를 고스란히 지닌 채 자신의 업에 맞는 새로운 몸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불교의 윤회설입니다.

  부처님께서는『법화경(法華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 금생에 받은 것이 그것이다.

  욕지래생사(欲知來生事)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 금생에 짓는 그대로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지, 콩 심은데 팥 나고 팥 심은데 콩 날리 없는 것처럼, 인과(因果)란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것입니다. 전생에 지은대로 금생에 그 과보를 받고, 금생에 지은대로 그 과보를 다음 생에 받고…이와 같이 전생을 거슬러 보아도 전생이 끝이 없고, 내생 또한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른 바 무시무종(無始無終)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탓할 것인가? 모두가 내 업보요 내 책임입니다.

 

 

    <윤회전생에 얽힌 이야기 한 편>

  강원도 설악산에는 신흥사, 백담사, 오세암 등, 절이 많이 있는데, 오세암 대웅전에 조그만 현판이 하나 걸려 있다고 합니다. 혹시 오세암에 갔다 오신 분 있으세요? 저는 신흥사와 백담사는 갔다 왔는데, 오세암에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현판에 세긴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한문으로 쓰여진 것을 우리말로 풀이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발로 한번 걷어찬 것이 볼 귀 세대로 돌아왔고

  떡한 개 준 것이 3년 양식으로 돌아왔네

  이와같은 사실이 명백할진데

  불자여 모름지기 인과를 한치도 의심하지 말게나.

  이 시가 쓰여진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시대 강원도 설악산은 인제군수의 관할이었습니다. 지금부터 한 400여 년 전, 인제군수가 새로 부임하여 초도순시 차 오세암을 찾았습니다. 마침 점심때가 되었는지라 주지 스님이 점심상을 차려왔는데, 워낙 가난한 절이라 달리 대접 할 것도 없고하여 보리밥 한 그릇에 된장과 꼬치 몇 개를 내어 왔더니, 인제 군수가 벌컥 화를 내고 점심상을 뒤엎으며“이걸 나더러 먹으란 말이냐?"하면서 볼기를 3대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엉겁결에 볼기를 맞은 노승이 저만큼 나가 덜어지자 무슨 마음이 들었던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며, 수행하고 있던 아전에게“앞으로 이 절(오세암)에 3년 먹을 양식을 대 주라."고 분부하고는 훵하니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볼기를 맞은 노승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볼기를 때릴 때는 언제이거, 3년 먹을 양식을 주라는 것은 또 무슨 연유인가?

‘볼기3대 3년 양식, 볼기3대 3년 양식’노승은 이것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몇날 며칠을 씨름 하던 어느 날, 노승의 눈앞에 전생이 훤히 보였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백석이나 하는 시골부자 살았습니다. 섣달 그믐날 점심 때 쯤, 새해 차례에 올릴 떡을 빚어서, 하녀가 쟁반에 담아 주인마님에게 드리려고 가지고 오는데, 집에 기르던 개가 그 떡을 낚아채려고 뛰어오르니, 마루에 앉자있던 주인이 벌떡 일어나서 개의 목을 걷어찼습니다. 그러자 개가‘깨갱갱’하며 저만큼 나가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무슨 맘이 들었던지 떡 한 조각을 떼어서 개에게 던져주니 개는 덥석 그 떡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생의 부자는 죽어서 노승이 되었고, 개는 죽어서 인제 군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과가 한 치도 어김없이 명명백백한 것을 깨달은 노승은 후세 사람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글을 지어(발로 한번 걷어찬 것이 볼 귀 세대로 돌아왔고 떡한 개 준 것이 3년 양식으로 돌아왔네. 이와 같은 사실이 명백할진데, 불자여 모름지기 인과를 한치도 의심하지 말게나) 법당에 달아 두었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교와 기독교 ․ 도교 ․ 불교 ․ 소크라테스의 내세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 중에는 종교를 믿고 있는 분도 계시고, 무종교인도 있을 줄 압니다. 나는 종교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종교를 믿는다면 어떤 종교를 믿을 것인가? 그것은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으므로 각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다만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종교를 가지면 정신건강에도 좋고, 또 죽을 때도 종교가 없는 사람보다 편안히 죽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끝으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대답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잘 살아야 할 것입니다. 잘살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이면 누구나 갖는 공통 목포일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잘 살려면 사람들은 우선 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권세나 지위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돈이 많아야 한다면 돈을 얼마나 가지면 만족할까요? 저 같으면 한 20억이면 만족할 것 같은데(10년 전에는 10억 이었는데, 지금은 욕심을 부려 20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를 가지면 만족하겠습니까?

  옛말에 아흔 아홉 섬 가진 부자가 머슴 새금한 섬 뺏어서 100석을 채운다는 말이 있듯이, 100석 하는 사람은 천석꾼이 되고 싶고, 천석꾼은 만석꾼이 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부처님은 법구경에서“설사 히말리야 산(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황금으로 덮는다 하더라도 결코 한 사람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인간의 욕망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정말 끝이 없는가 봅니다.

  또 권세나 벼슬(지위)은 얼마나 높아야 만족하겠습니까? 시의원한 사람은 도의원이 되고 싶고, 도의원한 사람은 국회의원이 되고 싶고, 국회의원 몇 선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싶어 합니다. 최고 정상의 자리는 한 자리뿐인데, 대선(대통령 선거) 때가 되면, 여 ․ 야할 것 없이 너도나도 대통령하겠다고 야단들입니다. 그들은 말은 하나같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대부분 권력의 화신들입니다.

  우리나라는 60대 이후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악착같이 일을 하여 이제 세계 12대 경제부국으로 등장하였고, 지난 6월23일부로 세계 일곱 번째로 국민소득 3만달러, 국민 5000만 명의 삼공오공(30-50)클럽의 회원국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지금 행복합니까? 현재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에서 국민이 느끼는 행복지수가 맨 꼴찌이고, 자살률은 세계 1위이며, 3쌍에 한 쌍이 이혼하는 이혼율 세계 1위인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잘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빔비사라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인도에서 가장 큰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왕은 우리 인간들이 목숨을 바쳐서까지 추구하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곧 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언제든지 취할 수 있었고, 맛있는 음식은 항상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모든 것은 왕의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항상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외국 군대가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불안했고, 어느 신하가 모반을 꾀할지도 몰라 불안했습니다. 왕자들이 호시탐탐 왕위를 넘보지는 않는지 불안했고(당시 인도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음식에 독약을 넣지는 않았는지 불안했습니다. 그는 하루도 마음이 편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틈나는 대로 수레를 몰고 부처님을 찾아와서 마음의 위로를 받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가진 것이라고는 분소의 한 벌과 바릿대(밥그릇)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나무 밑에서 잠을 잤고, 맨발로 걸어 다녔으며 남의 집에서 밥을 빌어먹었습니다.

“부처님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그래 잘 잤다. 너도 잘 잤느냐?”

  이른 아침 새소리에 잠을 깬 부처님과 아난(부처님을 시중들고 있는 부처님의 제자)이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부처님의 일상은 이렇게 늘 행복과 평화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잘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구할 것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원망 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성냄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미움과 질투가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공 포와 불안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강제와 속박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해탈과 자유가 있는 것이 잘 사는 것 이다.”(숫타니파타)

   바다에 빠진 사람은 바닷물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순간의 갈증을 이기지 못해 바닷물을 마시게 되면 이내 더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고, 그러다가는 마침내 바다에 빠져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 속에 살면서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 다시 말해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옛말에“오만가지 생각이 다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조사를 해보니 사람들은 하루 평균 5만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 5만 가지 생각 중 95% 이상은 걱정거리이고, 또 그런 걱정거리 중 90%이상은 현재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가상의 걱정이라고 합니다.‘걱정도 팔자'라는 옛말이 하나도 허튼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스님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스님 도가 무엇입니까?”그러니까 그 스님이“배고프면 밥 먹고 졸음이 오면 잠잔다. 이것이 나의 도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이 세상에 있는 사람이 다 그렇게 하는데, 그러면 모두 도가 높고 참선을 많이 한 스님과 같은 것입니까?”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다른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도 백가지 생각을 하고 있으며, 잠 잘 때에도 천가지를 걱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와는 전혀 다르다.”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기에 도인의 삶과 우리 중생들의 삶이 차이가 납니다. 도인의 삶이란 밥을 먹을 때는 밥 먹고, 잠을 잘 때는 잠자고, 갈 때는 가고, 올 때는 오는 것으로 족해서 매사가 자연스럽고 걸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갈 적에는 오는 걸 생각하고, 오면서도 가는 걸 생각하고, 밥 먹으면서도 온갖 걱정에 사로잡혀 있고, 잠을 자면서도 공연한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서 걱정 근심에서 떠날 수 없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삶입니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직 않았습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오지 않는 미래에 연연하지도 말고, 오직 현재에 충실한 사람 많이 값진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해마다 피는 꽃은 같거니와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모하는 것은 어찌 인간사(人間事) 뿐이겠습니까? 올 해 핀 꽃도 엄밀히 따지면 지난해 피었던 꽃은 아닙니다. 만물은 끊임없이 유전(流轉)하고 모든 것은 물처럼 흐릅니다. 똑같은 시냇물에 두 번 다시 발을 씻을 수 없습니다. 흐르는 물이 다르듯이 발을 씻는 나 자신도 늘 변모합니다. 오늘은 오늘로서 영원한 것입니다. 똑같은 하루는 영영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루하루를 천금(千金)보다 귀하게 여기고, 알뜰살뜰 살아야 합니다. 만약 하루를 헛되이 보낸다면 그것은 영원히 헛된 자국을 남기고 말게 될 것입니다. 

   이상으로 저의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데 건강에 유의하시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영광스러운 노인대학 수료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삶과 죽음(1)

경주시 노인대학 강의                   삶과 죽음(1)※이 글은 지난 11월18일 경주시 노인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    강의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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