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사상

중론(中論) - 원문 및 해설

수선님 2022. 6. 5. 12:20

중론(中論)

 

 

중론은 모두 27장 448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관인연품 : 연의 고찰(16게)   
 2. 관거래품 : 가는 것과 오는 것의 고찰(25게)
 3. 관육정품 : 눈등의 지각 기관의 고찰(8게)
 4. 관오음품 : 집합체의 고찰(9게)
 5. 관육종품 : 과의 고찰(8게)
 6. 관염염자품 : 탐욕과 탐내는 자의 고찰(10게)
 7. 관삼상품 : 지어진 것의 고찰(34게)
 8. 관작작자품 : 행위와 행위자의 고찰(13게)
 9. 관본주품 : 선행자의 고찰(12게)
 10. 관연가연품 : 불과 연료의 고찰(16게)
 11. 관본제품 : 전후의 궁극의 고찰(8게)
 12. 관고품 : 고의 고찰(10게)
 13. 관행품 : 형성작용의 고찰(8게)
 14. 관합품 : 연합의 고찰(8게)
 15. 관유무품 : 자성의 고찰(11게)
 16. 관박해품 : 속박과 해탈의 고찰(10게)
 17. 관업품 : 업과 과보의 고찰(33게)
 18. 관법품 : 아뜨만의 고찰(12게)
 19. 관시품 : 시간의 고찰(6게)
 20. 관인과품 : 집합의 고찰(24게)
 21. 관성괴품 : 생성과 괴멸의 고찰(21게)
 22. 관여래품 : 여래의 고찰(16게)
 23. 관전도품 : 뒤바뀜에 대한 고찰(25게)
 24. 관사제품 : 성스러운 진리의 고찰(40게)
 25. 관열반품 : 열반에 대한 고찰(24게)
 26. 관십이인연품 : 십이지의 고찰(12게)
 27. 관사견품 : (잘못된)견해의 고찰(30게)


4권. K-577(16-350). T-1564(30-1). 요진(姚秦) 시대(A.D. 409) 번역. [역] 구마라집(鳩摩羅什). [저] 용수(龍樹). [범] Praj n mam ladhyamakak rik . [장] Dbu-ma rtsa-ba i tshig-le ur-byas-pa es-rab ces-bya-ba. [별] 정관론(正觀論), 중관론(中觀論).


부처의 근본 교설인 연기설을 반야경의 사상에 입각해서 무자성 공 등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귀류법(歸謬法) 등의 논법을 예리하게 구사하여 외도와 소승의 사견과 편견을 논파하는 용수(龍樹)의 중송(中頌)에 대한 주석서이다.


청목(靑目)이 본 불전의 제1품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부처는 각종 사견(邪見)을 끊고 불법(佛法)을 널리 알리고자 먼저 성문(聲聞)을 위한 가르침으로 12인연을 설하고, 나중에 대승을 위한 가르침으로 다시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일(不一), 불이(不異) 등의 인연상(因緣相)을 설했는데, 불멸(佛滅) 후 500년이 되자 사람들이 대승에서 말하는 필경공(畢竟空)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과오를 일으키게 되었으므로, 용수가 그 과오를 바로 잡기 위해서 때문에 중송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본 불전은 27품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에는 모두 445개의 게송과 장행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게송은 용수의 저술이고 장행은 청목의 저술이다. 청목은 중송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반론자와의 문답 형식으로 중송에 주석을 가하고 있다. 편의를 위해 품명 뒤에 각 품에 들어 있는 게송의 수를 적었다.


◈ 제1 관인연품(觀因緣品) : 16송. 인연을 논파하여 법의 생성에 대한 여러 희론을 제거한다. 첫머리에 다음의 귀경게, 즉 8불(不) 게(偈)가 있는데 이는 중송(中頌)의 핵심 사상을 드러낸다.


"불생(不生)과 불멸(不滅), 불상(不常)과 부단(不斷), 불일(不一)과 불이(不異), 불래(不來)와 불출(不出)의 인연을 능히 설하여 여러 희론(戱論)을 제거했으니, 여러 가르침 가운데 가장 뛰어난 가르침을 설하신 부처님께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이어서 여러 게송을 주석하면서, 결국 여러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비연(非緣)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라고 설하고, 공(空), 즉 8불(不)의 새로운 인연설을 주장한다.


◈ 제2 관거래품(觀去來品) : 25송. 운동과 운동의 주체가 무자성(無自性) 공(空)임을 논한다. 여기서 '간다'는 말은 '없어진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므로, 가는 것을 부정함은 결국 8불(不) 중에서 불멸에 대해서 논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거자(去者) 거법(去法) 소거처(所去處)의 3법은 유(有)와 무(無) 가운데 어느 하나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허망(虛妄) 공 무소유(無所有)로서 다만 가명(假名)일 뿐이라고 설한다.


◈ 제3 관육정품(觀六情品) : 8송.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6정(情) 즉 근(根)이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여러 게송을 주석하면서, 견(見) 즉 보는 작용과 견자(見者) 즉 보는 주체와 가견(可見) 즉 보여지는 대상이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는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하고, 이어서 견과 가견이 없기 때문에 식(識) 촉(觸) 수(受) 애(愛) 등의 4법(法)이 없고, 애(愛)가 없기 때문에 4취(取) 등의 12인연분(因緣分)도 없다고 설한다. 이어서 이(耳) 등의 5정(情) 즉 근(根)과 성(聲) 등의 5진(塵) 즉 경(境)도 역시 이와 같다고 논한다.


◈ 제4 관오음품(觀五陰品) : 9송. 색, 수, 상, 행, 식의 5음(陰)이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예를 들어 색(色)은 지 수 화 풍 등의 색인(色因)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색인을 떠나서 있을 수 없으며, 색인도 색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색과 색인의 관계는 옷감과 실의 관계처럼 독자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자성을 가지고 있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서 수 상 행 식의 4음과 그 밖의 모든 법도 색과 동일하다고 설하여 5음이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 제5 관육종품(觀六種品) : 8송. 6종(種)은 각기 특정한 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여기서 6종이란 지 수 화 풍 공(空) 식(識)이라는 여섯 가지의 근본 요소를 말한다.


먼저 허공을 예로 들어 논한다. 색(色)이 없는 것을 허공상(虛空相)이라고 하는데, 색은 만들어진 법으로서 무상(無常)하다. 따라서 색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색의 소멸도 없을 것이고, 그때는 허공상도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허공에 특정한 상이 있다고 하는 주장은 논파된다. 이어서 나머지의 다섯도 허공과 같다고 설하여 6종이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 제6 관염염자품(觀染染者品) : 10송. 탐욕 진에(瞋喪) 우치(愚痴) 등의 염법(染法), 즉 번뇌와 그 번뇌에 물드는 중생인 염자(染者)가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즉 염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염과 염자의 결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염과 염자가 자성적 실재라면 합(合)도 불합(不合)도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에(喪) 치(痴)도 또한 그와 같고, 일체의 번뇌도 역시 그와 같다고 논하고 있다.


◈ 제7 관삼상품(觀三相品) : 35송. 유위법의 3상(相)인 생(生) 주(住) 멸(滅)이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생(生)이 유위라면 3상(相)을 가질 것이며, 생이 무위라면 유위의 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3상은 한 곳에서 동시에 있을 수 없다. 또 만약 생 주 멸에 다시 유위의 상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따라서 3상은 자성적 실재라고 할 수 없으며, 환영이나 꿈과 같이 불가득(不可得)이라고 설한다.


◈ 제8 관작작자품(觀作作者品) : 12송. 작업(作業)과 작자(作者)가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즉 작자는 작업으로 말미암아 있게 되고 작업은 작자로 말미암아 있게 되는 것이므로, 만약 자성적인 작자와 작업이 있다면, 그 작자와 작업은 곧 무인(無因)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수(受)와 수자(受者)도 그와 같다고 설한다.


◈ 제9 관본주품(觀本住品) : 12송. 본주(本住), 즉 자아가 자성적 실재라는 주장을 논파한다. 자아는 모든 감각 기관과 정신 작용의 소유자 통일자 유지자가 되므로 감각 기관 등에 우선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주장에 따르면 본주뿐 아니라 안(眼) 등도 모두 자성적 실재가 된다. 그것들이 모두 자성적 실재라면 그들 사이에는 인과가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자성적 실재로서의 본주는 성립할 수 없다고 설한다.


◈ 제10 관연가연품(觀燃可燃品) : 16송. 불과 땔감의 공 무자성을 논하고 있는데, 이는 불과 땔감의 비유를 통해 앞에서 논의한 작업(作業)과 작자(作者), 근(根)과 본주(本住) 등의 공 무자성을 재차 설하는 것이다.


◈ 제11 관본제품(觀本際品) : 8송. 흔히 모든 사물이나 현상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중에서 최초의 시작이 되는 시점을 전제(前際)라 하고, 최후의 끝이 되는 시점을 후제(後際)라 한다.


본 품에서 설하는 본제란 곧 전제의 다른 말이다. 여기서는 생(生) 사(死), 즉 윤회에는 시작과 끝이 있을 수 없음을 논하고 있다. 즉 생이 먼저 있고 노(老) 사(死)가 뒤에 있다면, 노 사 없이도 생이 있고, 생 없이도 노 사가 있게 될 것이다. 또 노 사가 먼저 있고 생이 뒤에 있다면, 그 노 사는 원인이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또 생과 노 사는 동시에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생 사에는 전(前) 후(後) 동시(同時)가 모두 성립하지 않으므로 생 사에는 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법에는 본제가 없다고 설한다.


◈ 제12 관고품(觀苦品) : 10송. 고(苦)가 불가득임을 밝힌다. 일반적으로 고를 짓는 자와 고를 받는 자는 5음(陰)이라고 생각되는데, 만약 고나 5음이 모두 자성적 실재라면 본래 고를 가지고 있지 않던 5음이 고를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고가 자성적 실재라면 자작(自作)과 타작(他作) 공작(共作)과 무인작(無因作)의 4구(句)가 모두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는 무자성 공이며 결국은 불가득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모든 사물이 그와 같다고 설한다.


◈ 제13 관행품(觀行品) : 9송. 행(行)이란 사물이나 현상을 작용과 변화의 측면에서 포착한 것이다. 5음(陰) 12처 18계의 모든 존재는 이 행의 힘 때문에 성립하며, 때로는 그 법들 자체를 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 행이 무자성 불가득임을 설한다. 여러 행을 5음이라고 부른다. 이 5음은 모두 허망하여 정해진 상(相)이 없다. 또 여러 법은 다름이 있으므로 모두 무자성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법은 공이기 때문에, 무자성의 법 역시 없다. 세존이 공법(空法)을 설한 것은 여러 견해를 떠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공이 있다고 한다면 여러 부처도 교화할 수 없을 것이라고 설한다.


◈ 제14 관합품(觀合品) : 8송. 일반적으로 인식은 근(根) 경(境) 식(識) 등이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3법이 자성적 존재라면 결국은 결합이 있을 수 없음을 논한다. 즉 근(根)이란 견(見)이고 경(境)이란 가견(加見)이며 식(識)이란 견자(見者)인데, 이것들은 무자성 공으로서 다른 상이 없으며, 다른 상이 없으므로 결합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염(染), 가염(可染), 염자(染者)와 그 밖의 입(入) 즉 처(處)와 그 밖의 번뇌도 역시 이와 같다고 설한다.


◈ 제15 관유무품(觀有無品) : 11송. 여러 법이 무자성이라는 주장으로부터 시작하여, 존재에 대한 유(有) 무(無)의 2견(見)을 논파한다. 먼저 병(甁)에 병의 자성이 있고 옷감에 옷감의 자성이 있는 것처럼, 여러 법에는 각기 자성이 있고 작용이 있으므로 실재함을 알 수 있으며, 이 자성은 중연(衆緣)의 화합에서 나온다는 주장을 소개한다. 이에 대해서 중연으로부터 나온 것은 작법(作法)이고 작법에는 정성(定性)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법에 자성이 있다면 중연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고 논파한다.


이어서 여러 법에 자성이 없으므로 타성(他性) 역시 있을 수 없고,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는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으므로 존재가 성립되지 않으며, 존재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비존재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고 논한다. 또 유와 무를 보고 자성과 타성을 본다면, 이는 곧 불법(佛法)의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


◈ 제16 관박해품(觀縛解品) : 10송. 계박(繫縛)과 해탈이 필경공(畢竟空)으로서 불가득임을 설한다. 계박이란 윤회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왕래(往來)라고 표현되었다. 여러 행(行)이 왕래한다고 하지만, 행이 상(常)이라면 왕래할 수 없고, 무상이라고 해도 왕래할 수 없다. 또 생멸의 상을 가지고 있는 여러 행은 계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으며, 중생도 이와 같이 계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고 설한다.


이어서 경전에서 열반이 곧 생사요, 생사가 곧 열반이라고 설한 것과 같이, 제법(諸法) 실상(實相),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생사와 열반이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설한다.


◈ 제17 관업품(觀業品) : 33송. 업이 마침내 공임을 밝힌다. 업은 공이라고 하나 단절이 없고, 유(有)라고 하나 영원한 것이 아니다. 부처는 업과 과보의 부실(不失)을 말했다. 여러 업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본래 불생(不生)이고, 불생이기 때문에 불멸(不滅)이다. 업은 연(緣)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고, 비연(非緣)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니, 업을 일으키는 자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한다.


◈ 제18 관법품(觀法品) : 12송. 자아와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을 없앰으로써, 모든 법이 공이고 무아(無我)라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음을 설한다. 즉 만약 자아가 곧 5음(陰)이라면 그 자아는 곧 생멸할 것이며, 자아가 5음과 다르다면 그 자아는 5음의 상(相)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아가 없다면 아소 역시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자아와 아소에 대한 집착을 없애서 무아의 지혜를 얻는다는 것이다. 또 여러 부처는 자아를 설하기도 하고 무아를 설하기도 하지만, 여러 법의 실상 속에는 자아도 없고 비아(非我)도 없으며, 법의 실상은 무생(無生) 무멸(無滅)로서 열반과 같이 적멸이라고 논한다. 이어서 여러 법의 불일(不一)과 불이(不異), 불상(不常)과 부단(不斷) 등이 여러 세존이 가르친 법의 감로미(甘露味)라고 설한다.


◈ 제19 관시품(觀時品) : 6송. 자성설은 시간이 자성을 가지는 찰나적 단위라고 생각하여 과거를 원인으로 해서 현재와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시간이 자성적 실재라는 그와 같은 주장을 논파한다. 즉 만약 과거로 인해서 미래와 현재가 있다면, 미래와 현재는 마땅히 과거 속에 있어야 하지만, 자성적 실재인 과거 속에 자성적 실재인 현재와 미래가 함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 만약 사물로 인해서 시간이 있다고 한다면, 사물을 떠나서는 시간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사물은 실재하지 않으므로 시간 역시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제20 관인과품(觀因果品) : 24송. 자성설에서는 여러 인연이 화합해서 과가 생겨난다고 하지만, 인 과가 자성적 실재라면 결국 인 과가 성립할 수 없음을 밝힌다. 즉 과에 자성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부터 그런 것이므로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또 그때 원인에는 원인으로서의 자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과(果)는 연(緣)의 합(合)이나 불합(不合)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으며, 과가 없으므로 합법(合法)도 있을 수 없다고 설한다.


◈ 제21 관성괴품(觀成壞品) : 20송. 성괴를 밝힌다. 성괴란 생겨나고 무너지는 것, 즉 형성과 파괴를 뜻한다. 또 형성은 생성을, 파괴는 소멸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형성과 파괴에 대해서 고찰함으로써 자성설에서는 인과의 상속(相續)이나 인과의 생멸이 성립할 수 없음을 논한다. 즉 자성적 실재는 형성될 수도 없고 파괴될 수도 없으며, 원인이 될 수도 없고 결과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또 자성설에 있어서는 인과의 상속이나 윤회도 인정될 수 없다고 설한다.


◈ 제22 관여래품(觀如來品) : 16송. 여래는 모든 세간 중에서 가장 존귀하므로 마땅히 실재한다고 해야 한다는 주장을 논파한다. 5음(陰)은 여래가 아니고, 5음을 떠나서 여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여래 속에 5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5음 속에 여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또 여래가 5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로 구해도 불가득이므로 여래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서 여래에 자성이 없는 것은 세간에 자성이 없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


◈ 제23 관전도품(觀顚倒品) : 24송. 전도(顚倒)란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모든 것이 무아 부정(不淨) 무상 고인데, 그것을 아 정 상 낙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전도 때문에 탐 진 치 등의 여러 가지 번뇌가 생긴다고 생각되었다.


여기서는 정과 부정의 전도를 예로 하여 이 전도와 번뇌 등이 모두 무자성 공이며, 따라서 생겨난 바도 없고 끊을 바도 없음을 설한다. 정(淨)과 부정(不淨)의 전도에 의해서 3독(毒)이 생긴다면 3독은 곧 무자성이며, 번뇌는 실체가 아닐 것이다.


또 정 부정의 전도에 자성이 없다면, 번뇌는 그 둘로 인해서 생길 수 없다. 만약 번뇌에 자성이 있고 누구에게 속해 있다면, 그것은 끊을 수 없을 것이며, 또 만약 번뇌가 허망하여 자성이 없고 속하는 바 없다고 해도, 그것은 능히 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도와 번뇌는 무자성 공으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한다.


◈ 제24 관사제품(觀四諦品) : 40송. 4제(諦)와 관련해서 2제의 본성을 밝히고, 공에 집착함을 경계하여 이로써 법의 실상을 드러낸다. 먼저 공관(空觀)에 대한 반론을 소개한다. 즉 만약 일체가 모두 공이라면, 곧 4성제와 4도과(道果)와 불 법 승의 3보(寶)도 있을 수 없으니, 공법(空法)은 인과를 무너뜨리고 죄와 복을 무너뜨리며, 나아가 세속의 모든 법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한다. "너는 무엇이 공상(空相)이고, 어떤 인연으로 공을 설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또 공의 뜻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의혹이 생긴다.


여러 부처님은 2제(諦)를 가지고 중생을 위해서 법을 설한다. 첫째는 세속제(世俗諦)이고 둘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만약 2제를 분별해서 알지 못하면 곧 깊고 깊은 불법의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 속제에 의하지 않고는 제일의를 얻지 못하며, 제일의를 얻지 못하고는 열반을 얻을 수 없다. 또 공의 뜻이 있으므로 모든 법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공의 뜻이 없다면 일체는 성립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공이라고 설한다. 왜냐하면 중연(衆緣)이 화합해서 사물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사물은 여러 인연에 속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다. 그러나 공도 또한 공이다. 그것은 다만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가명(假名)으로 설한 것이다. 또 그것은 유(有)와 무(無)의 2변(邊)을 떠났으므로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오히려 만약 일체가 공이 아니라면 곧 생멸이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곧 4성제의 법 등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공이 없다면 얻지 못한 것은 영원히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번뇌를 끊을 수 없고, 고통이 다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어서 만약 공의 뜻이 무너진다면 인연성이 무너지고, 인연성이 부서지면 3보가 무너지며, 3보가 무너지는 것은 곧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설한다.


◈ 제25 관열반품(觀涅槃品) : 24송. 해탈과 열반이 마침내 공으로서 불가득임을 설한다. 즉 "만약 여러 법이 공으로서 생도 없고 멸도 없다면, 따로 끊고 멸해서 열반이라 할 것이 없으며, 만약 여러 법이 불공(不空)이라고 해도 생이 없고 멸이 없어서 따로 끊고 멸해서 열반이라 할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유 무의 2변(邊)으로는 열반에 도달하지 못하나니, 소위 열반이란 얻을 것도 없고 도달할 것도 없으며, 단멸(斷滅)도 아니고 상주(常住)도 아니다. 불생(不生)인 동시에 불멸(不滅)이니 이를 이름하여 열반이라고 한다.


또 열반이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유와 무의 합(合)도 아니며, 비유(非有)인 동시에 비무(非無)도 아니다. 모든 시간과 모든 곳에서 열반의 상을 구하나 불가득이다."라고 논하고, 이어서 열반과 세간은 아무런 차별이 없으며, 세간과 열반 역시 아무런 차별이 없다고 설하고 있다.


◈ 제26 관십이인연품(觀十二因緣品) : 12송. 12지 인연의 발생과 소멸을 설한다. 여기서는 단지 12지를 설명하고 있을 뿐 자성설에 대한 논란이 없다. 따라서 이 부분은 본 불전이 12연기를 과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설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본문을 보면 12지 인연의 발생을 순서에 따라 설하고, 이어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일은 모두 생(生)으로부터 있고, 또 이 인연으로 대고음(大苦陰)을 모은다. 이는 생사와 여러 행(行)의 근본으로서 어리석은 자가 짓는 바이며 지혜로운 자가 짓는 바가 아니다. 이를 여실하게 봄으로써 무명이 멸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여러 행도 멸한다. 인(因)이 멸했으므로 과(果)도 역시 멸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 제27 관사견품(觀邪見品) : 31송. 여러 가지 사견을 논파함으로써 정견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보인다. 여기서는 주로 3세를 통하여 자아가 실재한다는 사견을 논파하고 있다. 즉 "나는 과거세(過去世)에 있었는가 없었는가, 세간은 영원한가 하는 등의 견해는 모두 과거세에 의한 것이고, 나는 미래세(未來世)에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세간은 유한한가 등의 견해는 모두 미래세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과거세에 내가 있었다고 하는 등의 일은 있을 수 없다. 과거세 중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견해들은 모두 사견이다. 또 과거세의 내가 있지 않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과거세 중의 내가 지금의 나와 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공이니 세간이 영원하다는 등의 견해가 어디서, 어느 때, 누구에게서 일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논하고, 다음의 게송으로 논을 끝맺는다.


"모든 견해를 끊기 위해서, 자비심을 가지고 이 법을 설하신 위대한 고타마에게, 나 지금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


중송은 반야경에서 설해진 바와 같은 공관(空觀)이야말로 불법(佛法)의 진정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상사적 의의를 가진다. 또 중송은 대승 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부여한 최초의 논서로서 대승 불교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끼쳤는데, 중관 학파는 용수의 중송을 중심으로 하여 발생하여 유식 학파와 함께 인도 대승 불교의 양대 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중국에서는 백론(百論) 십이문론(十二門論)과 함께 삼론종의 발생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중송의 주석서로 용수의 근본중론무외소(根本中論無畏疏)와 십이문론, 청목의 중론, 무착(無着)의 순중론의입대반야바라밀경초품법문(順中論義入大般若波羅密經初品法門), 안혜(安慧)의 대승중관석론(大乘中觀釋論), 불호(佛護)의 근본중소(根本中疏), 청변(淸辯)의 반야등론석(般若燈論釋), 길장(吉藏)의 중관론소(中觀論疏), 담영(曇影)의 중론의소(中論義疏) 등이 있다.


 



龍樹의 中頌
N g rjuna의 Madhyamaka K rik 

 


歸敬偈(2偈) 禮敬의 詩


0-1)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0-2) 能說是因緣 善滅諸戱論 我稽首禮佛 諸說中第一


(새롭게) 생겨나지도 않고 (완전히) 소멸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어디선가) 오는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나가는 것도 아니다. 능히 이런 인연법을 말씀하시어 온갖 희론을 잘 진멸시키시도다. 내가 (이제) 머리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하오니 모든 설법가운데 제일이로다.


0-1) anirodham anutp dam anucchedam a   vatam
     anek rtham an n rtham an gamam anirgamam//
0-2) ya  prat tyasamutp da  prapa copa amam  ivam/
     de ay m sa sa buddhasta  vande vadat   varam//


소멸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된 것도 아니며 동일한 의미도 아니고 다른 의미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緣起), 희론을 寂滅하며 吉祥인 緣起를 가르쳐 주신 正覺者, 제일의 설법자이신 그 분께 예배합니다.

 


第1 觀因緣品(14偈) 因緣에 대한 관찰 
 pratyayapar k   n ma prathama  prakara am 緣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장(14게)
 

1-1) 諸法不自生 亦不從他生 不共不無因 是故知無生
모든 法은 스스로 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으로부터 생하는 것도 아니며 그 양자에서 함께 생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원인없이 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無生임을 알아라.


1-1) na svato n pi parato na dv bhy   n pyahetuta /
     utpann  j tu vidyante bh v   kvacana ke cana//


그 어떤 것이건 어느 곳에 있건간에, 自體로부터건 남(他)에서건 그 兩者에서건 無因으로건 사물(존재)들의 발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1-2) 如諸法自性 不在於緣中 以無自性故 他性亦復無
諸法의 自性이 緣 가운데 있지 않듯이 자성이 없기에 他性도 없다.


1-3) na hi svabh vo bh v n   pratyay di u vidyate/
     avidyam ne svabh ve parabh vo na vidyate//


실로 사물들의 자성은 緣 따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自性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他性은 존재하지 않는다.


1-3) 因緣次第緣 緣緣增上緣 四緣生諸法 更無第五緣
인연과 연연 차제연과 증상연의 사연이 諸法을 생하며 第五의 緣은 없다.


1-2) catv ra  pratyay  hetu c lambanamanantaram/
     tathaiv dhipateya  ca pratyayo n sti pa cama //


緣은 네 가지이다.
인연과 연연과 차제연 그리고 또 증상연이다.
第五의 緣은 존재하지 않는다.


1-4) 果爲從緣生 爲從非緣生 是緣爲有果 是緣爲無果
결과는 緣에서 생하는가? 연이 아닌 것에서 생하는가?
이 연은 결과를 갖는가? 이 緣은 결과를 갖지 않는가?


1-4) kriy  na pratyayavat  n pratyayavat  kriy /
     pratyay  n kriy vanta  kriy vanta ca santyuta//


作用(單數)은 緣(단수)을 가진 것이 아니다.
작용(단수)은 緣(단수)을 안 가진 것이 아니다.
작용(復數)을 갖지 않은 것은 연(복수)이 아니다. 작
용(복수)을 가진 것도 역시 그러하다.


1-5) 因是法生果 是法名爲緣 若是果未生 何不名非緣
이것으로 인하여 결과가 생할 때 이것을 연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 결과가 아직 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非緣이라고 하지 않겠느냐?


1-5) utpadyate prat tyem nit me pratyay   kila/
     y vannotpadyata ime t vann pratyay   katham//


이것들을 연하여 발생하기에 실로 이것들은 연들이다.
이것들이 생하지 않는 그런 경우에 어떻게 非緣이 아니겠느냐?


1-6) 果先於緣中 有無俱不可 先無爲誰緣 先有何用緣
緣 속에 미리 결과가 있다거나 또는 없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불가능하다.
미리 없었다면 무엇을 위해 연이 되며 미리 있었다면 연은 어디에 쓸 것인가?


1-6) naiv sato naiva sata  pratyayo 'rthasya yujyate/
     asata  pratyaya  kasya sata ca pratyayena kim//


(결과로서의) 사물이 존재했거나 존재하지 않은 緣이 있다는 것은 모두 타당하지 않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緣이 무엇을 위해 있겠으며 존재한다면 연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1-7) 若果非有生 亦復非無生 亦非有無生 何得言有緣
만일 결과가 有가 생한 것도 아니고 無가 생한 것도 아니고
有無가 생한 것도 아니라면 연이 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1-7) na sann sanna sadasandharmo nirvartate yad /
     katha  nirvartako hetureva  sati hi yujyate//


어떤 존재(法)가 있을 때 그것은 있던 것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처럼 나타난 것에 <因緣>이 있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떻게 타당하겠느가?


1-8) 果若未生時 則不應有滅 滅法何能緣 故無次第緣
존재(法)가 아직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그것이 소멸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소멸한 존재가 어떻게 연이 되겠느냐? 그러므로 차제연은 없다.


1-9) anutpanne u dharme u nirodho nopapadyate/
    n nantaramato yukta  niruddhe pratyaya  ka //


사물들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소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속된다는 것(次第性)은 타당하지 않다.
또 소멸했다면 무슨 緣이 있겠느냐?


1-9) 如諸佛所說 眞實微妙法 於此無緣法 云何有緣緣
諸佛께서 說하신 眞實하고 微妙한 法과 같이
無緣인 이 법에 어떻게 연연이 있겠느냐?


1-8) an lambana ev ya  san dharma upadi yate/
    ath n lambane dharme kuta  lambana  puna //


실로 존재하는 이런 법은 攀緣되는 것이 아니라고 교시되었다.
그래서 攀緣되지 않는 法이라면 다시 어떻게 攀緣이 있겠는가?


1-10) 諸法無自性 故無有有相 說有是事故 是事有不然
諸法은 無自性하므로 '있다'는 相이 없다.
<이것이 있음에 이것이 있다>고 說함은 옳지 않다.


1-10) bh v n   ni svabh v n   na satt  vidyate yata /
     sat damasmin bhavat tyetannaivopapadyate//


무자성한 존재물들에는 존재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있음에 이것이 있다>고 하는 이 사실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1-11) 略廣因緣中 求果不可得 因緣中若無 云何從緣出
요약해서 보건 넓혀서 보건 인연 중에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인연 중에 없다면 어떻게 연에서 나올 것인가?


1-11) na ca vyastasamaste u pratyaye vasti tatphalam/
      pratyayebhya  katha  tacca bhavenna pratyaye u yat//


따로 따로건 모두 합해서건 연에 그 결과는 없다. 연들에 없는 것,
그것이 어떻게 연들로부터 (生한다는 것이) 있겠는가?


1-12) 若謂緣無果 而從緣中出 是果何不從 非緣中而出
연에 결과가 없어도 연에서 (결과가) 나온다면
이 결과는 어째서 연이 아닌 것으로부터 나오지 못하는가?


1-12) ath sadapi tattebhya  pratyayebhya  pravartate/
      apratyayebhyo 'pi kasm nn bhipravartate phalam//


그런데 그것이 없어도 (=만일 결과가 연에 없어도)
그 연으로부터 (결과가) 나타난다면 연이 아닌 것에서는
무엇 때문에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1-13) 若果從緣生 是緣無自性 從無自性生 何得從緣生
만일 결과가 연으로부터 생한다면 이 연은 무자성하다.
무자성한 것에서 생하는데 어떻게 연에서 생할 수 있겠는가?


1-13) phala  ca pratyayamaya  pratyay  c svaya may  /
      phalamasvamayebhyo yattatpratyayamaya  katham//


결과란 연으로부터 형성된다(고 하고),
연은 非自發的으로 형성된다.(고 한다. 그러나)
비자발적인 것으로부터 이루어진 결과, 그
것을 어떻게 연으로부터 형성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1-14) 果不從緣生 不從非緣生 以果無有故 緣非緣亦無
그러므로 결과는 연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연이 아닌 것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결과는 없다.)
결과가 없기 때문에 연이나 연이 아닌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1-14) tasm nna pratyayamaya  n pratyayamaya  phalam/
      sa vidyate phal bh v tpratyay pratyay   kuta //


그러므로 緣으로부터 형성되거나, 非緣으로부터 형성되는 결과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연이라거나 비연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

 


第2 觀去來品(25偈) 去來에 대한 관찰


gat gatapar k   n ma dvit ya  prakara am
가는 것과 오는 것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장(25게)


2-1) 已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
이미 가버린 것에는 가는 것이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역시 가는 것이 없다.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 가는 것은 없다.


2-1) gata  na gamyate t vadagata  naiva gamyate/
     gat gatavinirmukta  gamyam na  na gamyate//


'간 것'은 가지 않는다. '가지 않는 것'도 역시 가지 않는다. '간 것'과 '가지 않는 것'을 여읜 '가는 중인 것'은 가지 않는다.


2-2) 動處則有去 此中有去時 非已去未去 是故去時去
움직임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있다. (또)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움직임이 있는) 그 가운데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 있다. 그러므로 가고 있는 중인 것은 간다.


2-2) ce    yatra gatistatra gamyam ne ca s  yata /
     na gate n gate ce    gamyam ne gatistata //


움직임이 있는 곳, 그곳에 '가는 것'이 있고, 또 그 움직임은 '가는 중인 것'에 있기 때문에 '간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 '가는 중인 것'에 있는 움직임이 '가는 것'이다.


2-3) 云何於去時 而當有去法 若離於去法 去時不可得
어떻게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 가는 작용이 있겠는가? 가는 작용을 떠난다면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을 얻을 수 없다.


2-3) gamyam nasya gamana  katha  n mopapatsyate/
     gamyam ne dvigamana  yad  naivopapadyate//


'가는 중인 것'에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가는 중인 것'에 두개의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2-4) 若言去時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時 去時獨去故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 간다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은 허물이 있다. 가는 것 없이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 있어서 가고 있는 중인 것이 홀로 가기 때문이다.


2-4) gamyam nasya gamana  yasya tasya prasajyate/
      te gatergamyam na  gamyam na  hi gamyate//


'가는 중인 것'이 '가는 작용'이라고 하는 자, 그 자는 '가는 것' 없이 '가는 중인 것'이 있다고 하는 오류에 빠진다. 왜냐하면 '가는 중인 것'이 가기 때문이다.


2-5) 若去時有去 則有二種去 一謂爲去時 二謂去時去
만일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 가는 것이 있다고 하면 두 종류의 가는 것이 있게 된다. 첫째는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고 둘째는 그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의 가는 것이다.


2-5) gamyam nasya gamane prasakta  gamanadvayam/
     yena tadgamyam na  ca yacc tra gamana  puna //


'가는 중인 것'에 '가는 작용'이 있다고 하면 '가는 작용'이 둘로 되는 오류에 빠진다. '가는 중인 것'인 그것과, 다시 거기(=가는 중인 것)에 있는 '가는 작용'에 의해서 (둘로 되는 오류에 빠진다).


2-6) 若有二去法 則有二去者 以離於去者 去法不可得
두 개의 가는 것이 있다면 가는 놈이 둘이 있게 된다. 가는 놈을 떠나서는 가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2-6) dvau gant rau prasajyete prasakte gamanadvaye/
     gant ra  hi tirask tya gamana  nopapadyate//


'가는 작용'이 두 개라는 오류에는 '가는 놈'이 둘이라는 오류가 수반된다. 왜냐하면 '가는 놈'을 떠나서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2-7) 若離於去者 去法不可得 以無去法故 何得有去者
가는 놈을 떠나서는 가는 작용은 얻을 수 없다. 가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가는 놈이 있을 수 있겠는가?


2-7) gant ra  cettirask tya gamana  nopapadyate/
     gamane 'sati gant tha kuta eva bhavi yati//


만일 '가는 놈'을 떠난다면 '가는 작용'은 성립되지 않는다. '가는 작용'이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가는 놈'이 성립하겠는가?


2-8) 去者則不去 不去者不去 離去不去者 無第三去者
가는 놈은 가지 않으며 가지않는 놈도 가지 않는다. 가는 놈과 가지 않는 놈을 떠나서 第三의 가는 놈은 없다.


2-8) gant  na gacchati t vadagant  naiva gacchati/
     anyo ganturagantu ca kast t yo hi gacchati//


'가는 놈'은 가지 않는다. '가지 않는 놈'도 역시 결코 가지 않는다. '가는 놈'이나 '가지 않는 놈'과 다른 第三의 어떤 놈이 도대체 가겠는가?


2-9) 若言去者去 云何有此義 若離於去法 去者不可得
만일 가는 놈이 간다고 말한다면 그런 일이 어떻게 있겠느냐 ? 가는 작용이 없다면 가는 놈은 얻을 수 없다.


2-9) gant  t vadgacchat ti kathamevopaoatsyate/
     gamanena vin  gant  yad  naivopapadyate//


'가는 작용'이 없는 '가는 놈'이 실로 성립하지 않는다면 '가는 놈'이 간다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2-10) 若去者有去 則有二種去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
만일 가는 놈이 가는 것을 갖는다고 하면 가는 것이 두개가 있게 된다. 첫째는 가는 놈의 가는 것이고 둘째는 가는 작용의 가는 것이다.


2-11) gamane dve prasajyete gant  yadyuta gacchati/
      ganteti cocyate yena gant  sanyacca gacchati//


만일 '가는 놈'이 간다면 '가는 작용'이 둘이라는 오류에 빠진다. '가는 놈'이라고 말하는 것과, 존재하는 '가는 놈', 그 놈이 또 간다는 사실에 의해서.


2-11)若謂去者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者 說去者有去
만일 가는 놈이 간다고 말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허물이 있다. 가는 것 없이 가는 놈이 있고 가는 놈에 가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2-10) pak o gant  gacchat ti yasya tasya prasajyate/
      gamanena vin  gant  ganturgamanamicchata //


가는 놈이 간다고 하는 주장, 그런 주장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 오류에 빠진다. 가는 작용 없이 가는 놈이 있고 (또 그) 가는 놈의 가는 작용을 추구하(게 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2-12) 已去中無發 未去中無發 去時中無發 何處當有發
이미 가버린 것에는 출발이 없다. 아직 가지 않는 것에서도 출발은 없다.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도 출발은 없다. 어느 곳에 출발이 있을 것인가?


2-12) gate n rabhyate gantu  gantu  n rabhyate 'gate/
      n rabhyate gamyam ne gantum rabhyate kuha//


이미 가버린 것에서 간다는 사실이 시작(출발)되지 않고 아직 가지 않은 것에서도 간다는 사실이 시작(출발)되지 않으며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도 간다는 사실이 시작(출발)되지 않는다면 간다는 사실은 어느 곳에서 시작(출발)될까?


2-13) 未發無去時 亦無有已去 是二應有發 未去何有發
아직 출발하지 않았으면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도 없고 이미 가버린 것도 없다. 이 두가지 경우에 응당 출발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어떻게 출발이 있겠는가 ?


2-13) na p rva  gaman rambh dgamyam na  na v  gatam/
      yatr rabhyeta gamanamagate gamana  kuta //


가는 작용이 출발하기 이전에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은 없고 (이미) 가버린 것도 없다. 가는 작용은 거기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아직) 가지 않은 것에 가는 작용이 어떻게 있겠는가?


2-14) 無去無未去 亦復無去時 一切無有發 何故而分別
이미 가버린 것도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고 없고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도 없다. 어디서건 출발이 없는데 어떻게 분별하겠느냐?


2-14) gata  ki  gamyam na  kimagata  ki  vikalpyate/
      ad  yam na  rambhe gamanasyaiva sarvath //


실로 어디에서건 가는 작용의 출발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가버린 것이건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이건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2-15) 去者則不住 不去者不住 離去不去者 何有第三住
가는 놈은 멈추지 않는다. 가지 않은 놈은 멈추지 않는다. 가는 놈과 가지 않은 놈을 떠나 어떤 第三의 것이 있어서 멈추겠는가?


2-15) gant  na ti  hati t vadagant  naiva ti  hati/
      anyo ganturagantu ca kast t yo 'tha ti  hati//


이미 가버린 놈은 멈추지 않는다. 그처럼 아직 가지 않는 놈도 역시 멈출 수 없다. 이미 가버린 놈과 아직 가지 않은 놈이 아닌 제삼의 어떤 놈이 멈추겠는가?


2-16) 去者若當住 云何有此義 若當離於去 去者不可得
가는 놈이 혹시 멈추리라는 말, 이런 이치가 어떻게 있겠느냐? 가는 작용을 떠나게 되면 가는 놈을 얻을 수 없는데  


2-16) gant  t vatti  at ti kathamevopapatsyate/
      gamanena vin  gant  yad  naivopapadyate//


가는 작용 없이 가는 놈(이 있다는 것)이 실로 성립하지 않을 때 (=않는다면) 가는 놈이 멈춘다고 하는 것이 실로 어떻게 성립하겠느냐?


2-17) 去未去無住 去時亦無住 所有行止法 皆同於去義
이미 가버린 것이나 아직 가지 않은 것은 멈추지 않는다.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도 역시 멈추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이 流轉되거나 還滅되는 법칙도 모두 가는 것과 같다(가는 작용의 경우에서와 똑같이 논파된다).


2-17) na ti  hati gamyam n nna gat nn gat dapi/
      gamana  sa prav tti ca niv tti ca gate  sam //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가버린 것이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서도 역시 그러하다(=멈추는 것이 아니다). 流轉되거나 還滅되어 가는 과정도 가는 작용의 경우와 동일하다.


2-18) 去法卽去者 是事則不然 去法異去者 是事亦不然
가는 작용이 바로 가는 놈이라는 사실은 옳지 않다. 가는 작용이 가는 놈과 다르다는 사실 역시 옳지 않다.


2-18) yadeva gamana  gant  sa eveti na yujyate/
      anya eva punargant  gateriti na yujyate//


실로 가는 작용 그것이 바로 가는 놈이라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가는 놈이 가는 것과 다르다는 것도 결코 옳지 않다.


2-19) 若謂於去法 卽爲是去者 作者及作業 是事卽爲一
만일 가는 작용이 그대로 가는 놈이 된다고 한다면 作者와 作業이 하나인 꼴이 된다.


2-19) yadeva gamana  gant  sa eva hi bhavedyadi/
      ek bh va  prasajyeta kartu  karma a eva ca//


만일 가는 작용이 가는 놈이라는 사실, 그런 사실이 도대체 있을 수 있다면 행위자와 행위가 하나의 존재라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2-20) 若謂於去法 有異於去者 離去者有去 離去有去者
만일 가는 작용이 가는 놈과 다르다고 한다면 가는 놈 없이 가는 작용이 있고 가는 작용 없이 가는 놈이 있게 된다.


2-20) anya eva punargant  gateryadi vikalpyate/
      gamana  sy d te ganturgant  sy dgaman d te//


그렇다고 해서 가는 놈이 가는 것과 다르다고 분별된다면 가는 놈 없이 가는 작용이 있을 터이고 가는 작용 없이 가는 놈이 있으리라.


2-21) 去去者是二 若一異法成 二門俱不成 云何當有成
가는 작용과 가는 놈의 두가지가 서로 같은 법으로 이루어졌다거나 다른 법으로 이루어졌다는 두가지 경우가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 (그 두가지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는가?


2-21) ek bh vena v  siddhirn n bh vena v  yayo /
      na vidyate tayo  siddhi  katha  nu khalu vidyate//
(가는 작용과 가는 놈이) 동일한 존재라는 것에 의해서건 서로 다른 존재라고 하는 것에 의해서건 성립되는 것을 볼 수 없다. 그 양자간에 도대체 어떻게 성립이 있을 수 있을까?


2-22) 因去知去者 不能用是去 先無有去法 故無去者去
가는 작용으로 인하여 가는 놈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가는 놈이) 그 가는 작용을 사용할 수는 없다. 미리 가는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가는 놈이 간다는 사실은 없다.


2-22) gaty  yayocyate gant  gati  t   sa na gacchati/
      yasm nna gatip rvo 'sti ka cit ki  ciddhi gacchati//


가는 것 그것에 의해서 가는 놈이 간다고 말하지만 그것(=가는 놈)이 그것(=가는 것)을 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는 것이 있기 이전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로 누가 무엇을 가겠는가?


2-23) 因去知去者 不能用異去 於一去者中 不得異去故
가는 작용으로 인하여 가는 놈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가는 놈이 그것이 속하지 않은) 다른 가는 작용을 가는 것은 아니다. 가는 놈 하나가 (그것이 속하지 않은) 다른 가는 작용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2-23) gaty  yayocyate gant  tato 'ny   sa na gacchati/
      gat  dve nopapadyete yasm deke pragacchati//


가는 것, 그것에 의해서 가는 놈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 (=가는 놈)이 다른것 (가는 놈이 속해 있지 않은 가는 것)을 가는 것은 아니다. (그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 둘이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2-24) 決定有去者 不能用三去 不決定去者 亦不用三去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가는 놈은 가는 작용 세가지를 행할 수 없다. 결정되어 있지 않은 가는 놈도 역시 가는 작용 세가지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2-24) sadbh to gamana  gant  triprak ra  na gacchati/
      n sadbh to 'pi gamana  triprak ra  gacchati//
實在하는 가늠 놈은 가는 작용 세가지를 가지 않는다. 실재하지 않는 가는 놈도 역시 가는 작용 세가지를 가지 않는다.


2-25) 去法定否定 去者不用三 是故去去者 所去處皆無
가는 작용이 결정적으로 존재하건 안하건 가는 놈은 세가지를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는 작용이나 가는 놈, 또 가야 할 곳 모두 없다.


2-25) gamana  sadasadbh ta  triprak ra  na gacchati/
      tasm dgati ca gant  ca gantavya  ca na vidyate//


실재하며 실재하지 않는 것은 가는 작용 세가지를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는 것이나 가는 놈이나 가야 할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第3 觀六情品(8偈) 六根에 대한 관찰


cak ur d ndriyapar k   n ma t t ya  prakara am
눈(眼)등의 지각 기관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3장(8게)


3-1) 眼耳及鼻舌 身意等六情 此眼等六情 行色等六塵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은 육정인데 눈 등의 六情은 色 (聲, 香, 味, 觸, 法) 등의 六塵에서 작용한다.


3-1) dar ana   rava a  ghr  a  rasana  spar ana  mana /
     indriy  i  a ete    dra  avy d ni gocara //


보는 작용(시각), 듣는 작용(청각), 냄새 맡는 작용(후각), 맛보는 작용(미각), 촉감을 느끼는 작용(촉각), 생각을 떠올리는 작용(사고), 등은 여섯 가지 인식능력이다. 보여져야 할 대상 등(의 여섯 가지)은 이것들의 (=여섯 가지 인식능력의) 활동영역이다.


3-2) 是眼則不能 自見其己體 若不能自見 云何見餘物
이 눈이란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 (=눈)을 볼 수 없다. 스스로를 보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3-2) svam tm na  dar ana  hi tattameva na pa yati/
     na pa yati yad tm na  katha  drak yati tatpar n//


실로 보는 작용은 그 스스로에 있어서 그것 (=눈 자신)이 그것 (=눈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3-3) 火喩則不能 成於眼見法 去未去去時 已總答是事
불의 비유는 눈으로 본다는 법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이미 가버린 것 아직 가지 않은 것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에서 이미 이에 대해 충분히 답변했다.


3-3) na pary pto 'gnid    nto dar anasya prasiddhaye/
     sadar ana  sa pratyukto gamyam nagat gatai //


불의 비유는 보는 작용의 증명을 위해 적절치 않다. 그것(=불의 비유)은 앞에서 설명했던, '가는 중인 것, 간 것, 가지 않은 것'에 의해 보는 작용과 함께한다.


3-4) 見若未見時 則不名爲見 而言見能見 是事則不然
보는 작용이 보고 있지 않을 때는 본다고 말할 수 없는데 보는 작용이 능히 본다고 말한다. 이런 일은 옳지 않다.


3-4) n pa yam na  bhavati yad  ki  cana dar anam/
     dar ana  pa yat tyeva  kathametattu yujyate//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다면 보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보는 작용(見)이 본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타당할 수 있겠는가?


3-5) 見不能有見 非見亦不見 若已破於見 則爲破見者
보는 작용에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보는 작용이 아닌 것에도 보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미 보는 작용을 논파했다면 결국 보는 놈도 논파된다.


3-5) pa yati dar ana  naiva naiva pa yatyadar anam/
    vy khy to dar anenaiva dra    c pyupagamyat m//


보는 작용이 보는 것도 결코 아니고 보는 작용이 없는 것이 보는 것도 결코 아니다. 보는 작용에 대해 (이처럼) 설명한 것을 가지고 보는 놈도 이해해야 한다.


3-6) 離見不離見 見者不可得 以無見者故 何有見可見
보는 작용을 떠나서건 떠나지 않건 보는 놈은 얻을 수 없다. 보는 놈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보는 작용이나 보이는 것이 있겠느냐?


3-6) tirask tya dra    n styatirask tya ca dar anam/
     dra  avya  dar ana  caiva dra  aryasati te kuta //


보는 작용을 배제하건 배제하지 않건 보는 놈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놈이 없다면 보이는 것(=대상)이나 보는 작용, 그것들이 어떻게 있겠느냐?


3-7) 見可見無故 識等四法無 四取等諸緣 云何當得有
보는 작용과 보이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識등의 四法은 없다. 四取 등의 緣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3-7) dra  avyadar an bh v dvij  n dicatu  ayam/
    n st ty up d n d ni bhavi yanti puna  katham//


보여지는 것과 보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識등의 네 가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取 따위의 것이 존재하겠는가?


3-8) 耳鼻舌身意 聲及聞者等 當知如是義 皆同於上說
귀, 코, 혀, 몸, 생각과 소리나 듣는 놈 등의 이치도 모두 앞에서 설한 것과 똑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8) vy khy ta   rava a  ghr  a  rasana  spar ana  mana /
    dar anenaiva j n y cchrot  rotavyak di ca//


앞에서 설명했던 듣는 작용, 냄새 맡는 작용, 맛 보는 작용, 촉감을 느끼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등은 보는 작용(에 대한 논파)에 의해 알 수 있으리라. 또 듣는 놈과 들리는 것(=소리) 따위도…



第4 觀五陰品 (9偈)五蘊에 대한 관찰


skandhapar k   n ma caturtha  prakara am
집합체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4장(9게)


4-1) 若離於色因 色則不可得 若當離於色 色因不可得
만일 <色의 因>을 떠난다면 色은 얻을 수 없다. 만일 色을 떠난다면 <色의 因>은 얻을 수 없다.


4-1) r pak ra anirmukta  na r pamupalabhyate/
     r pe  pi na nirmukta  d  yate r pak ra am//


<色의 因>이 없으면 色은 포착되지 않는다. 色이 없어도 <色의 因>은 보이지 않는다.


4-2) 離色因有色 是色則無因 無因而有法 是事則不然
<色의 因>을 떠나서 色이 있다면 이 色은 因이 없(이 존재하는 꼴이 된)다.  因이 없이 법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4-2) r pak ra anirmukte r pe r pa  prasajyate/
      hetuka  na c styartha  ka cid hetuka  kva cit//


<色의 因>이 없이 色이 있다(고 한다)면 無因의 色이 있다(고 집착하)는 오류에 빠진다. 無因인 사물은 어떤 것이건 어디에건 존재하지 않는다.


4-3) 若而色有因 則是無果因 若言無果因 則無有因處
色을 떠나서 그 因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 없는 因이다. (그러나) 결과 없는 因이 있다고 말하면 전혀 옳지 않다.


4-3) r pe a tu vinirmukta  yadi sy dr pak ra am/
     ak ryaka  k ra a  sy d n styak rya  ca k ra am//


그와 달리 만일 色과는 별도로 <色의 因>이 있다고 한다면 결과 없는 因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결과 없는 因은 없다.


4-4) 若而有色者 則不用色因 若無有色者 亦不用色因
만일 이미 色이 있는 것이라면 <色의 因>은 소용없다.  만일 色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色의 因>은 소용없다.


4-4) r pe satyeva r pasya k ra a  nopapadyate/
     r pe 'satyeva r pasya k ra a  nopapadyate//


色이 존재한다면 <色의 因>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色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色의 因>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4-5) 無因而有色 是事終不然 是故有智者 不應分別色
因이 없이 色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혜를 가진 사람은 色을 분별해서는 안된다.


4-5) ni k ra a  pun  r pa  naiva naivapapadyate/
     tasm d r pagat n k   cinna vikalp n vikalpayet//


또한 無因의 色이 있다는 것은 결코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色에 관해서는 어떠한 분별도 분별해서는 안된다.


4-6) 若果似於因 是事則不然 果若不似因 時事亦不然
만일 결과가 因과 같다고 하면 이런일은 옳지 못하다.  만일 결과가 因과 같지 않다고 하면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


4-6) na k ra asya sad  a  k ryamityupapadyate/
     na k ra asy sad  a  k ryamityupapadyate//


因과 같은 결과라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因과 같지 않은 결과라고 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4-7) 受陰及想陰 行陰識陰等 其餘一切法 皆同於色陰
受陰과 想陰, 行陰과 識陰등 그 이외의 모든 法은 모두 色陰의 경우와 같다.


4-7) vedan cittasa j  n   sa sk r     ca sarva a /
     sarve  meva bh v n   r pe aiva sama  krama //


受와 心과 想과 갖가지 行에 있어서, 또 모든 존재들에 있어서 철저하게 色과 같은 경로를 밟는다.


4-8) 若人有問者 離空而欲答 是則不成答 俱同於彼疑
만일 누군가가 물어보는데 空을 떠나서 답변을 하려고 한다면 답변이 성립할 수가 없고 함께 (애초의) 그 의문과 똑같게 된다.


4-8) vigrahe ya  par h ra  k te   nyatay  vadet/
     sarva  tasy parih ta  sama  s dhyena j yate//


空性에 의해 지어진 논파에서 누군가가 (어떤 이유에 토대를 두고) 반박을 말한다면, 그것(=논파)의 모든 것은 반박되지 않으며 (그 이유에서도) 소증과(s dhyena) 동일한 것(sama )이 생한다.


4-9) 若人有難問 離空說其過 是不成難問 俱同於彼疑
만일 누군가가 난문이 있는데 空을 떠나서 그 잘못을 설명한다면 난문이 성립되지 못하여 함께 (애초의) 그 의문과 똑같게 된다.


4-9) vy khy ne ya up lambha  k te   nyatay  vadet/
     sarva  tasy nup labdha  sama  s dhyena j yate//


空性에 의해 지어진 해설에서 누군가가 (어떤 이유에 토대를 두고) 비난을 말한다면, 그것(=해설)의 모든 것은 비난되지 않으며 (그 이유에서도) 소증과 동일한 것이 생한다.



第5 觀六種品(8偈) 六界에 대한 관찰


dh tupar k   n ma pa cama  prakara am
界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5장(8게)


5-1) 空相未有時 則無虛空法 若先有虛空 卽爲是無相
허공의 相이 아직 존재하지 않을 때는 虛空法은 있을 수 없다.  만일 (相이 있기 이전에) 미리 虛空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相이 없이 존재하는 꼴이 된다.


5-1) n k  a  vidyate ki  citp rvam k  alak a  t/
     alak a a  prasajyeta sy tp rva  yadi lak a  t//


虛空의 相이 있기 이전에는 그 어떤 虛空도 존재하지 못한다.  만일 相이 있기 이전에 (虛空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相이 없이 존재한다는 오류에 떨어진다.


5-2) 是無相之法 一切處無有 於無相法中 相則無所相
이런 無相의 法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無相의 法 중에서 相은 相을 띠지 못한다.


5-2) alak a o na ka cicca bh va  sa vidyate kva cit/
     asatyalak a e bh ve kramat   kuha lak a am//


어떤 無相의 존재도 어디에건 존재하지 않는다.  無相인 존재가 없다면(=일체가 相을 갖고 있다면) 相은 어디서 (없다가 생기는 식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


5-3) 有相無相中 相則無所住 離有相無相 餘處亦不住
相이 있는 곳이건 없는 곳이건 相이 머무르는 바는 없다.  相이 있는 것과 相이 없는 것을 떠난 다른 곳에서도 역시 머무르고 있지 않다.


5-3) n lak a e lak a asya prav ttirna salak a e/
     salak a  lak a  bhy   n pyanyatra pravartate//


특징(=相)이 없는 것에서건 특징(=相)이 있는 것에서건 특징(=相)의 출현은 없다. 특징(=相)이 있는 것이나 특징(=相)이 없는 것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역시 출현하지 않는다.


5-4) 相法無有故 可相法亦無 可相法無故 相法亦復無
相(을 띠게 하는) 法이 없기에 띠는 相도 없다. 띠는 相도 없기에 (相을 띠게 하는) 法도 없다.


5-4) lak a  sa prav ttau ca na lak yamupapadyate/
     lak yasy nupapattau ca lak a asy pyasa bhava //


能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所相은 성립하지 않는다. 所相이 발생하지 않을 때에는 能相도 生하지 않는다.


5-5) 是故今無相 亦無有可相 離相可相已 更亦無有物
그러므로 이제 能相도 없고 所相도 없다.  能相과 所相을 떠나서는 다시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5-5) tasm nna vidyate lak ya  lak a a  naiva vidyate/
     lak yalak a anirmukto naiva bh vo 'pi vidyate//


그러므로 所相은 존재하지 않고 能相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所相과 能相을 떠난 사물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5-6) 若使無有有 云可當有無 有無旣已無 知有無者誰
有가 없어졌는데 어떻게 無가 있을 수 있겠는가?  有와 無가 이미 없는데 有와 無를 아는 놈은 누구인가?


5-6) avidyam ne bh ve ca ksy bh vo bhavi yati/
     bh v bh vavidharm  ca bh v bh vamavaiti ka //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비존재가 존재하겠느냐? 존재나 비존재가 부정됐는데 누가 존재나 비존재를 認知하겠는가?


5-7) 是故知虛空 非有亦非無 非相非可相 餘五同虛空
그러므로 虛空은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며 能相도 아니고 所相도 아니다. 나머지 다섯가지(地, 水, 火, 風, 識)도 虛空과 마찬가지다.


5-7) tasm nna bh vo n bh vo na lak ya  n pi lak a am/
      k  am  k  asam  dh taya  pa ca ye pare//


그러므로 虛空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能相도 없고 所相도 없다.  다른 다섯가지(地, 水, 火, 風, 識) 요소도 虛空과 마찬가지다.


5-8) 淺智見諸法 若有若無相 是則不能見 滅見安隱法
지혜가 얕은 사람들은 諸法에서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相을 본다. 이런 경우는 所見이 사라진 安隱法을 보지 못한다.


5-8) astitva  ye tu pa yanti n stitva  c lpabuddhaya /
     bh v n   te na pa yanti dra  avyopa ama   ivam//


그러나 실재한다거나 실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지혜가 얕은 사람들은,  그들은 사물들에 있어서 보여져야 할 것인 寂滅의 吉祥을 보지 못한다.

 


第6 觀染染者品 (10偈) 汚染과 汚染된 者에 대한 관찰


r garaktapar k   n ma  a tha  prakara a 
탐욕과 탐내는 자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6장(10게)


6-1) 若離於染法 先自有染者 因是染欲者 應生於染法
만일 <물들이는 法>을 떠나서 미리 <물든 놈>이 있다면 이 <물든 놈>으로 인하여 <물들이는 法>도 生해야 한다.


6-1) r g dyadi bhavetp rva  rakto r gatirask ta /
     ta  prat tya bhavedr go rakte r go bhavetsati//


만일 貪慾이 있기 이전에 貪慾과 관계없는 <탐내는 놈>이 있다고 한다면 (원래는) 그놈을 緣하여 탐욕이 있으리라. (즉) <탐내는 놈>이 존재할 때에 貪慾이 있으리라.


6-2) 若無有染者 云何當有染 若有若無染 染者亦如是
<물든 놈>이 없다면 <물들이는 法>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물들이는 法>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물든 놈>도 역시 그와 같다.


6-2) rakte 'sati pun  r ga  kuta eva bhavi yati/
     sati v sati v  r ge rakte 'pye a sama  krama //


그와 달리 <탐내는 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貪慾이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이상 1偈와 2偈의 전반부에서 밝힌 대로) 貪慾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그러하듯이 <탐내는 놈>에서도 그것은 절차가 똑같다.


6-3) 染者及染法 俱成則不然 染者染法俱 則無有相待
<물든 놈>과 <물들이는 法>이 함께 성립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물든 놈>과 <물들이는 法>이 함께하고 있으면 서로 상대하지 못한다.


6-3) sahaiva punarudbh tirna yukt  r garaktayo /
     bhavet   r garaktau hi nirapek au parasparam//


그와 달리 <탐욕>과 <탐내는 놈>의 양자가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도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탐욕>과 <탐내는 놈>의 양자는 서로가 서로에 의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6-4) 染者染法一 一法云何合 染者染法異 異法云何合
<물든 놈>과 <물들이는 法>이 하나라면 하나의 法이 어떻게 合하겠는가? <물든 놈>과 <물들이는 法>이 다르다면 다른 法이 어떻게 合하겠는가?


6-4) naikatve sahabh vo 'sti na tenaiva hi tatsaha/
     p thaktve sahabh vo 'tha kuta eva bhavi yati//


만일 하나라면 結合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자체와 結合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다르다면 도대체 어떻게 結合할 수 있겠느냐?


6-5) 若一有合者 離伴應有合 若異有合者 離伴亦應合
만일 하나인데 合하는 것이라면 짝 없이도 合함이 있어야 하고 만일 다르면서 合하는 것이라면 이 역시 짝 없이도 합해야 하리라.


6-5) ekatve sahabh va cet sy tsah ya  vin pi sa /
     p thaktve sahabh va cet sy tsah ya  vin pi sa //


만일 하나인 중에 합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合할) 짝이 없이도 그렇게 되는 꼴이 되고 만일 다른 것에 합하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合할) 짝이 없이도 그렇게 되는 꼴이 된다.


6-6) 若異而有合 染染者何事 是二相先異 然後說合相
만일 다르면서 합한다고 하면 <물들이는 법>과 <물든 놈>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兩者의 相이 미리 차이지고 난 다음에 結合하는 相을 설하는 것이다.


6-6) p thaktve sahabh va ca yadi ki  r garaktayo /
     siddha  p thakp thagbh va  sahabh vo yatastayo //


만일 서로 다른 것이면서 結合한다고 하면 貪慾과 <탐내는 놈>의 兩者가 어떻게 서로 각각인 존재로 성립되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성립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 兩者가 結合하고 있기 때문이다.


6-7) 若染及染者 先各成異相 旣已成異相 云何而言合
만일 <물들이는 法>과 <물든 놈>이 미리 서로 다른 相을 이루고 있다면 이미 다른 相을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合한다고 말하느냐?


6-7) siddha  p thakp thagbh vo yadi v  r garaktayo /
     sahabh va  kimartha  tu parikalpayase tayo //


또는 만일 <貪慾>과 <탐내는 놈> 양자가 서로 다른 각각의 존재로 성립해 있다면 그대는 무슨 目的으로 그 둘이 결합된 존재라고 상정하는가?


6-8) 異相無有成 是故汝欲答 合相竟無成 而復說異相
서로 다른 相이라는 것은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합한 相이라고 대답하려 하지만 합한 相이 성립하지 못하니 (그대는) 다시 서로 다른 相이라고 說하는구나.


6-8) p thagna sidhyat tyeva  sahabh va  vik  k asi/
     sahabh vaprasiddhyartha  p thaktva  bh ya icchasi//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그처럼 結合을 추구한다. 그러면서 다시 결합된 존재임을 논증하기 위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희구한다.


6-9) 異相不成故 合相則不成 於何異相中 而欲說合相
서로 다른 相이 성립하지 않기에 結合된 相도 성립하지 않는데 어떤 다른 相 중에서 합한 相을 說하려 하느냐?


6-9) p thagbh v prasiddhe ca sahabh vo na sidhyati/
     katamasmin p thagbh ve sahabh va  sat cchasi//


서로 다르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결합됐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서로 다르다는 이런 것에서 어떻게 당신은 결합된 존재를 희구하느냐?


6-10) 如是染染者 非合不合成 諸法亦如是 非合不合成
이와 같이 染法과 染者는 結合하거나 結合하지 않은 채로 成立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도 역시 이와 같아서 결합하거나 결합하지 않은 채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6-10) eva  raktena r gasya siddhirna saha n saha/
      r gavatsarvadharm     siddhirna saha n saha//


이와 같이 <탐욕>의 성립은 <탐내는 놈>과 결합된 것도 아니고 결합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탐욕>과 같이 모든 법의 성립은 결합된 것도 아니고 결합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第7 觀三相品(35偈) 三相에 대한 관찰


sa sk tapar k   n ma saptama  prakara am
지어진 것(諸現象, 有爲)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7장(34게)


7-1) 若生是有爲 則應有三相 若生是無爲 何名有爲相
만일 生이 有爲라면 응당 三相을 가지리라. 만일 생이 無爲라면 어떻게 유위의 相이라고 부르겠느냐?


7-1) yadi sa sk ta utp dastatra yukt  trilak a  /
     ath sa sk ta utp da  katha  sa sk talak a am//


만일 生이 有爲法이라면 거기에서 三相은 타당하다. 그런데 생이 無爲法이라면 어떻게 有爲의 相이 타당하겠는가?


7-2) 三相若聚散 不能有所相 云何於一處 一時有三相
(生住滅의) 三相이 모여 있건 흩어져 있건 相을 가질 수 없다. 어떻게 一處 一時에 三相이 있겠는가?


7-2) utp d dy strayo vyast  n la  lak a akarma i/
     sa sk tasya samast   syurekatra kathamekad //


生等(生住滅)의 세가지가 각각의 것들이라고 하면 有爲相의 작용으로는 적합치 않다. (이와 반대로 그 세가지가) 결합되어 있다고 하면 어떻게 一處, 一時일 수있겠는가?


7-3) 若謂生住滅 更有有爲相 是卽爲無窮 無卽非有爲
만일 生,住,滅에 다시 有爲의 相이 있다면 그것은 無窮하게 (계속)되고, 없다면 (생,주,멸은) 유위법이 아니다.


7-3) utp dasthitibha g n manyatsa sk talak a am/
     asti cedanavasthaiva  n sti cette na sa sk t  //


生,住,滅에 있어서 또다른 유위법의 相이 있다면 그야말로 무한하게 된다. (반대로) 만일 없다면 그것들(=생,주,멸)은 유위법이 아니다.


7-4) 生生之所生 生於彼本生 本生之所生 還生於生生
生生의 生한 바는 저 本生을 생하고 본생의 생한 바는 다시 생생을 생한다.


7-4) utp dotp da utp do m lotp dasya keval‎!!!am/
     utp dotp damutp do maulo janayate puna //


生生은 오직 根本的인 生의 生일 뿐이며 근본적인 생이 다시 생생을 생한다.


7-5) 若謂是生生 能生於本生 生生從本生 何能生本生
만일 이 生生이 능히 本生을 생한다면 생생은 본생에서 생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능히 본생을 생하겠는가?


7-5) utp dotp da utp do m lotp dasya te yadi/
     maulen janitasta  te sa katha  janayi yati//


그대에게 있어서 만일 生生이 本生을 생한다면 그대에게 있어서 본생에 의해 생해지지않은 그것(生生)이 그것(本生)을 어떻게 생하겠는가?


7-6) 若謂是本生 能生於生生 本生從彼生 何能生生生
만일 이 본생이 능히 생생을 생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본생은 그것에서 생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생생을 생하겠는가?


7-6) sa te maulena janito maula  janayate yadi/
     maula  sa ten janitastamutp dayate katham//


그대의 의견대로 만일 본생에 의해 생해진 것 그것이 본생을 생하게 한다면 어떻게 그것(생생)에 의해 생하지 않은 본생 그것이 그것(생생)을 생하게 할 것인가?


7-7) 若生生生時 能生於本生 生生尙未有 何能生本生
만일 생생이 생할 때 능히 본생을 생하는 것이라면 생생이 오히려 없는데 어떻게 본생을 생하겠는가?


7-7) ayamutpadayam naste k mamutp dayedimam/
     yad mamutp dayitumaj ta   aknuy dayam//


만일 (생생의) 非生이 이 (본생의) 생함을 있게 하는 것,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대의 의견대로 이 (생생의) 生時가 이것을 발생하게 하리라.


7-8) 若本生生時 能生於生生 本生尙未有 何能生生生
만일 본생이 생할 때 능히 생생을 생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본생이 오히려 없는데 어떻게 생생을 생하겠는가?


7-7) ayamutpadayam naste k mamutp dayedimam/
     yad mamutp dayitumaj ta   aknuy dayam//


만일 (본생의) 非生이 이 (생생의) 생함을 있게 하는 것,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대의 의견대로 이 (본생의) 生時가 이것을 발생하게 하리라.


7-9) 如燈能自照 亦能照於彼 生法亦如是 自生亦生彼
마치 등불이 능히 자신도 비추고 또 다른 것도 비추는 것처럼 生法도 역시 이와 같아서 스스로도 생하고 또 다른 것도 생하게 한다.


7-8) prad pa  svapar tm nau sa prak  yit  yath /
  utp da  svapar tm n vutp dayettath //


등불이 自와 他 兩者를 함께 비추는 것처럼, 그것처럼 生은 自와 他 양자를 生하는 것이리라.


7-10) 燈中自無暗 住處亦無暗 破暗乃名照 無暗則無照
등불 그 자체에는 어둠이 없다.(등불이) 머무는 곳에도 역시 어둠은 없다.어둠을 파괴하기에 등불이라 이름하는데 어둠이란 것이 없는 것이라면 비춘다는 것도 없는 것이다.


7-9) prad pe n ndhak ro 'sti yatra c sau prati  hita /
     ki  prak  ayati d pa  prak  o hi tamovadha //


등불 (그 자체)에는 어둠이 없다.또 그것이 머무르고 있는 장소에도 (어둠은 없다). (그렇게 어둠이 존재하지 않으니) 등불이 무엇을 비칠 것인가? 언필칭 비춤은 어둠의 파괴자인데…


7-11) 云何燈生時 而能破於暗 此燈初生時 不能及於暗
어떻게 등불이 생하는 바로 그 순간에 능히 어둠을 쫓을 수 있겠는가? 이 등불이 처음 (켜져) 생하는 그 순간에는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는데…


7-10) kathamutpadym nena prad pena tamo hatam/
      notpadyam no hi tama  prad pa  pr pnute yad //


어떻게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등불에 의해 어둠이 물리쳐짐을…(말할 수 있을까?) 실로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등불이 어둠에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7-12) 燈若未及暗 而能破暗者 燈在於此間 則破一切暗
만일 등불이 어둠에 미치지 아니하고서도 능히 어둠을 타파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속에 있는 등불이 곧 일체의 어둠을 타파하리라.


7-11) apr pyaiva prad pena yadi v  nihata  tama /
       ihastha  sarvalokastha  sa tamo nihani yati//


혹은 만일 (불빛이) 도달하지 아니하고서도 등불에 의해 어둠이 타파된다면 여기에 존재하는 그것(=등불)이 모든 장소에 존재하는 어둠을 타파하게 되리라.


7-13) 若燈能自照 亦能照於彼 暗亦應自暗 亦能暗於彼
만일 등불이 능히 스스로도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추는 것이라면 어둠도 역시 자기 스스로를 어둡게 하고 또 능히 다른 것도 어둡게 할 수 있으리라.


7-12) prad pa  svapar tm nau sa prak  ayate yadi/
      tamo 'pi svapar tm nau ch dayi yatyasa  ayam//


만일 등불이 自와 他 양자를 (비춰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라면 어둠도 역시 의심의 여지 없이 自와 他 양자를 덮으리라.


7-14) 此生若未生 云何能自生 若生已自生 生已何用生
이 生이 만일 아직 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능히 스스로 생하겠는가? 만일 생하고 나서 스스로 생하는 것이라면 (이미) 생하고 났는데 (다시) 생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7-13) anutpanno 'yamutp da  sv tm na  janayetkatham/
      athotpanno janayate j te ki  janyate puna //


生하지 않은 이 생이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생할 것인가? 더우기 이미 생한 것이 (다시) 생하게 한다면 이미 생한 것인데 (거기서) 또다시 무엇이 생해질 것인가?


7-15) 生非生已生 亦非未生生 生時亦不生 去來中已答
생은 생하고 나서 생하는 것도 아니고 생하지 않은 것이 생하는 것도 아니다. 생하고 있는 중인 것 역시 생하지 않는다. (이는) 去來品에서 이미 답했다.


7-14) notpadyam na  notpanna  n nutpanna  katha  cana/
      utpadyate tath khy ta  gamyam nagat gatai //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 (이미) 생한 것, (아직) 생하지 않은 것은 결코 생하지 않는다. 去時,已去,未去에 의해 파악되어진 것처럼….


7-16) 若謂生時生 是事已不成 云何衆緣合 爾時而得生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生時)이 생한다고 하는 것, 이런 일이 이미 성립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러 가지 인연이 모인 그때에 생할 수 있겠는가?


7-15) utpadyam namutpatt vida  na kramate yad /
      kathamutpadyam na  tu prat tyotpattimucyate//


발생의 현장에서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이 작용하고 있지 않을 때에 어떻게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이 발생을 緣한다고 말해질 것인가?


7-17) 若法衆緣生 卽是寂滅性 是故生生時 是二俱寂滅
만일 법이 여러가지 인연에서 생한다면 이것은 곧 적멸한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生과 生時 이 두가지는 모두 적멸이다.


7-16) prat tya yadyadbhavati tattacch nta  svabh vata /
      tasm dutpadyam na  ca   ntamutpattireva ca//


緣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그것은 自性으로서는 적멸이다. 그러므로 生時도 적멸이고 또 생도 마찬가지다.


7-18) 若有未生法 說言有生者 此法先已有 更復何用生
만일 未生인 법이 있어서 생함이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면 그런 법은 이미 미리 존재했는데 또다시 생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


7-17) yadi ka cidanutpanno bh va  sa vidyate kva cit/
      utpadyeta sa ki  tasminbh va utpadyate 'sati//


만일 무언가 未生인 존재가 어디엔가 존재한다면 그것이 생하리라. (그러나) 그것이 없는데 어떤 존재가 생하겠느냐?


7-19) 若言生時生 是能有所生 何得更有生 而能生是生
만일 지금 生하고 있는 중인 (生時의) 生이 능히 그 生한 바를 갖는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또 다른 生이 있어서 그 生을 능히 生할 수 있겠느냐?


7-18) utpadyam namutp do yadi cotp dayatyayam/
      utp dayettamutp damutp da  katama  puna //


만일 이 生이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生時)을 생하게 하는 것이라면 또 다른 어떤 生이 그 生을 生하게 할 것인가?


7-20) 若謂更有生 生生則無窮 離生生有生 法皆能自生
만일 다시 생이 존재한다면 생의 생은 무한하게 된다. (그와 달리) 생의 생을 떠나서 생이 있다면 모든 법은 능히 스스로 생하게 된다.


7-19) anya utp daytyena  yadyutp do 'navasthiti /
      ath nutp da utpanna  sarvamutpadyate tath //


다른 것(생)이 그것(생)을 생하게 한다면 생은 무한소급이 된다. 그런데 만일 無生으로 생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그와 같이 생해지리라.


7-21) 有法不應生 無亦不應生 有無亦不生 此義先已說
존재하고 있는 법은 생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법도 역시 생하지 않는다.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 법도 또한 생하지 않는다. 이런 이치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7-20) sata ca t vadutpattirasata ca na yujyate/
      na sata c sata ceti p rvamevopap ditam//


존재하는 것에 있어서건 또 존재하지 않는 것에 있어서건 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에 있어서건 生(이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앞에서 그렇게 설명하였다.


7-22) 若諸法滅時 是時不應生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만일 제법이 滅하는 중일 때라면 이때는 生할 수 없다. 법이 멸하지 않는다는 것, 끝내 그런 것은 없다.


7-21) nirudhyam nasyotpattirna bh vasyopapadyate/
      ya c nirudhyam nastu sa bh vo nopapadyate//


지금 滅하고 있는 중인 존재에 있어서 生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멸하고 있는 중이 아닌 존재, 그런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7-23) 不住法不住 住法亦不住 住時亦不住 無生云何住
머물러 있지 않은 法은 머물지 않는다. 머물러 있는 법 역시 머물지 않는다. 머무르고 있는 중인 법 역시 머무르지 않는다. 생함이 없는데 어떻게 머물겠느냐?


7-22) na sthitabh vasti  hatyasthitabh vo na ti  hati/
      na ti  hati ti  am na  ko 'nutpanna ca ti  hati//


(이미) 머물러 있던 존재는 머물지 않는다. (아직) 머물러 있지 않은 존재는 머물지 않는다. (지금) 머무르는 중인 존재는 머물지 않는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어떤 것이 머물겠느냐?


7-24) 若諸法滅時 是則不應住 法若不滅者 終無有是事
만일 諸法이 멸하고 있는 중이라면 이것들은 머무를 수 없다. (그렇다고) 법이 만일 멸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코 옳지 못하다.


7-23) sthitirnirudhyam nasya na bh vasyopapadyate/
      ya c nirudhyam nastu sa bh vo nopapadyate//


지금 滅하고 있는 중인 존재에 있어서 머무름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滅하고 있는 중이 아닌 그런 존재는 성립하지 않는다.


7-25) 所有一切法 皆是老死相 終不見有法 離老死有住
존재하는 일체의 법은 모두 늙고 죽는 모습을 띄고 있다. 어떤 법이 있는데 그것이 늙고 죽음을 떠나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결코 볼 수가 없다.


7-24) jar mara adharme u sarvabh ve u sarvad /
      ti  hanti katame bh v  ye jar mara a  vin //


언제나 일체의 존재가 늙고 죽는 법인데 늙고 죽음이 없는 존재들이 어떤 것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7-26) 住不自相住 亦不異相住 如生不自生 亦不異相生
머무름은 스스로의 모습을 띄고 머무르는 것도 아니며 다른 모습을 띄고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生이 스스로 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모습을 띄고 생하는 것이 아님과 같다.


7-25) sthity nyay  sthite  sth na  tayaiva ca na yujyate/
      utp dasya yathotp do n tman  na par tman //


머무름에 있어서 머무름은 다른 머무름에 의해서건 그것(자신)에 의해서건 타당하지 않다. 이는 마치 생이 자기 자신에 의해서도 다른 것에 의해서도 생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7-27) 法已滅不滅 未滅亦不滅 滅時亦不滅 無生何有滅
(어떤) 法이 이미 멸했다면 (그것이 다시) 멸하지 않는다.아직 멸하지 않았어도 멸하지 않는다. 지금 멸하고 있는 중인 것도 멸하지 않는다. 生이 없는데 어떻게 滅이 있겠느냐?


7-26) nirudhyate n niruddha  na niruddha  nirudhyate/
      tath pi nirudhyam na  kimaj ta  nirudhyate//


(아직) 멸하지 않은 것은 멸하지 않는다. (이미) 멸한 것은 멸하지 않는다.(지금) 멸하고 있는 중인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어떤 無生의 것이 멸하겠느냐?


7-28) 法若有住者 是則不應滅 法若不住者 是亦不應滅
법이 만일 머무르는 것이라면 이것은 멸할 수없다. 법이 만일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도 역시 멸하지 못하리라.


7-27) sthitasya t vadbh vasya nirodho nopapadyate/
      n sthitasy pi bh vasya nirodha upapadyate//


머무르고 있는 그런 존재에 있어서 滅함은 성립하지 않는다. 머무르고 있지 않은 존재에 있어서도 역시 멸함은 성립하지 않는다.


7-29) 是法於是時 不於是時滅 是法於異時 不於異時滅
이 상황의 이 법은 이 상황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상황의 이 법은 그 다른 상황에서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7-28) tayaiv vasthay vasth  na hi saiva nirudhyate/
      anyay vasthay vasth  na c nyaiva nirudhyate//


실로 그 어떤 상태는 결코 그 상태로 절멸되지 않는다. 또 어떤 다른 상태는 결코 다른 상태로 절멸되지 않는다.


7-30) 如一切諸法 生相不可得 以無生相故 卽亦無滅相
일체의 모든 법의 生하는 모습을 얻을 수 없듯이 生하는 모습이 없기에 滅하는 모습 역시 없다.


7-29) yadaiva sarvadharm   mutp do nopapadyate/
      tadaiva  sarvadharm     nirodho nopapadyate//


실로 일체법에 있어서 生이 성립하지 않을 때 그 때에는 그와 마찬가지로 일체법에 있어서 滅이 성립하지 않는다.


7-31) 若法是有者 是卽無有滅 不應於一法 而有有無相
만일 (어떤)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멸하지 않는다. 하나의 존재에 있음과 없음의 모습이 (함께) 있을 수는 없다.


7-30) sata ca t vadbh vasya nirodho nopapadyate/
      ekatve na hi bh va ca n bh va copapadyate//


존재가 존재하는 한 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一性인 것에 존재와 비존재(라는 대립적인 두가지가 있음은)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7-32) 若法是無者 是卽無有滅 譬如第二頭 無故不可斷
만일 어떤 존재(法)가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滅하지도 않는다. 비유하자면 마치 第二의 머리는 (아예) 없기에 자를 수 없는 것과 같다.


7-31) asato 'pi na bh vasya nirodha upapadyate/
      na dvit yasya  irasa  chedana  vidyate yath //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멸은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第二의 머리가 잘라지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7-33) 法不自相滅 他相亦不滅 如自相不生 他相亦不生
존재는 자기 스스로의 모습이 멸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모습이 멸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스스로의 모습도 생하지 않고 다른 모습도 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7-32) na sv tman  nirodho 'sti nirodho par tman /
      utp dasya yathotp da n tman  na par tman //


멸은 그 자체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다.멸은 다른 실체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생에 있어서 생이 그 자체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실체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닌 것처럼.


7-34) 生住滅不成 故無有有爲 有爲法無故 何得有無爲
生住滅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有爲는 있지 않다. 유위법이 없으므로 어떻게 無爲가 있을 수 있겠느냐?


7-33) utp dasthitibha g n masiddhern sti sa sk tam/
      sa sk tasy prasiddhau ca katha  setsyatyasa sk tam//


生住滅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有爲法은 없다.유위법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無爲法이 성립하겠느냐?


7-35) 如幻亦如夢 如乾달婆城 所說生住滅 其相亦如是
幻과 같고 꿈과 같고 신기루 같다. 앞서 말한 生住滅은 그 모습이 역시 이와 같다.


7-34) yath  m y  yath  svapno gandharvanagara  yath /
      tathotp dastath  sth na  tath  bha ga ud h tam//


마치 환상같고 꿈같고 신기루같다고 생함과 머무름과 멸함이 각각 그와 같이 설명되었다.

 


第8 觀作作者品(12偈) 행위와 행위자에 대한 관찰


karamak rakapar k   n m   ama  prakara am
행위와 행위자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8장(13게)


8-1) 決定有作者 不作決定業 決定無作者 不作無定業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자라면 결정적인 행위를 짓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도 결정적이지 않은 행위를 짓지 못한다.


8-1) sadbh ta  k raka  karma sadbh ta  na karotyayam/
     k rako n pyasadbh ta  karm sadbh tam hate//


실재하는 행위자 그것은 실재하는 행위를 행하지 못한다.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도 역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시도하지 못한다.


8-2) 決定業無作 是業無作者 定作者無作 作者亦無業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에는 작용도 없고 행위자도 없다.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행위자에게는 작용도 없고 행위도 없다.


8-2) sadbh tasya kriy  n sti karma ca sy dakart kam/
     sadbh tasya kriy  n sti kart  ca sy dakarmaka //


실재로 존재하는 것(행위)에 있어서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 행위는 행위자가 없는 존재이리라. 실재로 존재하는 것(행위자)에 있어서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 행위자는 행위 없는 존재이리라.


8-3) 若定有作者 亦定有作業 作者及作業 卽墮於無因
만일 행위자도 결정적으로 존재하고 행위도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면 행위자와 행위는 無因論에 떨어진다.


8-3) karoti yadyasadbh to 'sadbh ta  karma k raka /
     ahetuka  bhavetkarma kart  c hetuko bhavet//


만일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한다면 행위는 無因의 것이 되리라.또 행위자도 無因의 것이 되리라.


8-4) 若墮於無因 則無因無果 無作無作者 無所用作法
만일 無因論에 떨어진다면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으며 작용도 없고 행위자도 없고 행위도 없게 된다.


8-4) het vasati k rya  ca k ra a  ca na vidyate/
     tadabh ve kriy  kart  kara a  ca na vidyate//


원인이 없다면 행위의 결과도 행위의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없다면 작용도 행위자도 수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8-5) 若無作等法 則無有罪福 罪福等無故 罪福報亦無
만일 작용등의 법이 없다면 죄나 복(등의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죄나 복(등의 법)이 없기에 죄나 복의 과보도 없다.


8-5) dharm dharmau na vidyete kriy d n masa bhave/
     dharme c satyadharme ca phala  tajja  na vidyate//


작용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法과 非法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법과 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生한 과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8-6) 若無罪福報 亦無有涅槃 諸可有所作 皆空無有果
만일 죄와 복의 과보가 없다면 열반도 역시 없다. 또 있을 수 있는 모든 작용도 모두 空하여 그 결과가 없다.


8-6) phale 'sati na mok  ya na svarg yopapadyate/
     m rga  sarvakriy     ca nairarthakya  prasajyate//


과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해탈을 위한, 昇天을 위한 道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 일체의 작용들이 무의미하다는 오류에 빠진다.


8-7) 作者定不定 不能作二業 有無相違故 一處則無二
결정적으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행위자는 두가지 행위를 할 수 없다. 有와 無가 서로 위배되므로 한 곳에 (그 有와 無의)두가지는 없다.


8-7) k raka  sadasadbh ta  sadasatkurute na tat/
     parasparaviruddha  hi sacc saccaikata  kuta //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을 행한다는 것, 그것은 옳지 않다. 서로 상반되는 <존재>와 <비존재>가 실로 어떻게 한 곳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일까?


8-8) 有不能作無 無不能作有 若有作作者 其過如先說
有가 無를 지을 수 없고 무가 유를 지을 수 없다. 만일 행위와 행위자가 있다면 그 과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8-8) sat  ca kriyate n sann sat  kriyate ca sat/
     kartr  sarve prasajyante do  statra ta eva hi//


행위자의 有에 의해 無가 지어지지 않고 또 행위자의 無에 의해 有가 지어지지 않는다.왜냐하면 그 모든 곳에서 틀림없이 그런 과실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8-9) 作者不作定 亦不作不定 及定不定業 其過如先說
행위자는 결정적이거나 결정적이지 않거나 결정적이면서 결정적이지 않은 행위를 짓지 못한다. 그 과실은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다.


8-9) n sadbh ta  na sadbh ta  sadasadbh tameva v /
     karoti k raka  karma p rvoktaireva hetubhi //


실재하는 행위자가 실재하지 않는 행위 또는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실로 행하지 못한다. 이는 실로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이다.


8-10) n sadbh to 'pi sadbh ta  sadasadbh tameva v /
      karoti k raka  karma p rvoktaireva hetubhi //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도 실재하는 행위 또는 실재하며 실재하지 않는 행위를 행하지 못한다. 이는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이다.


8-10) 作者定不定 亦定亦不定 不能作於業 其過如先說
행위자가 실재하건 실재하지 않건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건 행위를 행할 수 없다. 그 과오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8-11) karoti sadasadbh to na sann sacca k raka /
      karma tattu vij n y tp rvoktaireva hetubhi //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행위자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행위를 행하지 않는다.그런데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이유에 의해 이해하리라.


8-11) 因業有作者 因作者有業 成業義如是 更無有餘事
행위로 인하여 행위자가 존재하고 행위자로 인하여 행위가 존재한다. 행위가 이룩되는 이치는 이와 같아서 다시 어떤 다른 일은 없다.


8-12) prat tya k raka  karma ta  prat tya ca k rakam/
      karma pravartate n nyatpa y ma  siddhik ra am//


행위자는 행위에 緣하며 행위는 그 행위자에 緣하여 일어난다. 우리들은 그것 이외의 다른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원인의 성립을 보지 못한다.


8-12) 如破作作者 受受者亦爾 及一切諸法 亦應如是破
행위와 행위자를 논파하듯이 取와 取者도 마찬가지다. 또 일체의 존재도 역시 응당 이와 같이 논파해야 하리라.


8-13) eva  vidy dup d na  vyutsarg diti karma a /
      kartu ca karmakart bhy    e  n bh v n vibh vayet//


이와 마찬가지로 取에 있어서도 행위와 행위자가 타파된다고 알지어다. 행위와 행위자에 의해서 나머지 존재들을 고찰하거라.

 


第9  觀本住品(12偈) 근본주체에 대한 관찰


p rvapar k   n ma navama  prakara am
先行者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9장(12게)


9-1) 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誰有如是事 是則名本住
눈과 귀 따위의 모든 감각기관과 苦,樂 따위의 모든 존재는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는 바 그것을 바로 本住(근본주체)라고 부른다.


9-1) dar ana rava  d ni vedan d ni c pyatha/
     bhavanti yasya pr gebhya  so 'st tyeke vadantyuta//


무릇 보는 작용, 듣는 작용 등과 감수 작용등이 속하여 존재하는 것, 그것은 先行하여 존재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說한다.


9-2) 若無有本住 誰有眼等法 以是故當知 先已有本住
만일 本住(근본주체)가 없다면 눈 따위의 法을 소유한 놈은 누구이겠는가? 그러므로 미리 本住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9-2) katha  hyavidyam nasya dar an di bhavi yati/
     bh vasya tasm tpr gebhya  so 'sti bh vo vyavasthita //


왜냐하면 지금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 있어서 <보는 작용>등이 도대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확립되어 있는 그 존재가 그것들에 先行하여 존재한다.


9-3) 若離眼等法 及苦樂等法 先有本住者 以何而可知
만일 눈 따위의 존재와 苦,樂 따위의 존재를 떠나서 미리 本住(근본주체)가 존재한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겠느냐?


9-3) dar ana rava  dibhyo vedan dibhya eva ca/
     ya  pr gvyavasthito bh va  kena praj apyate 'tha sa //


보는 작용 듣는 작용 등,또 感受 작용 등에 先行하여 확립되어 있는 존재, 그것은 그러면 어떻게 認知되겠는가?


9-4) 若離眼耳等 而有本住者 亦應離本住 而有眼耳等
만일 눈이나 귀 등을 떠나서 本住가 존재한다면 응당 本住를 떠나서 눈이나 귀 등도 존재하리라.


9-4) vin pi dar an d ni yadi c sau vyavasthita /
     am nyapi bhavi yanti vin  tena na sa  aya //


만일 보는 작용 따위 없이도 그것(=本住)이 확립되어 있다면 그것들(=보는 작용 따위) 역시 그것(=本住) 없이 존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다.


9-5) 以法知有人 以人知有法 離法何有人 離人何有法
法(=사람의 구성요소)이 있음으로 인하여 사람이 있음을 안다. 사람이 있음으로 인하여 법이 있음을 안다. 법을 떠나서 어찌 사람이 있겠으며 사람을 떠나서 어찌 법이 있겠는가?


9-5) ajyate kena cit ka cit ki  citkena cidajyate/
     kuta  ki  cidvin  ka citki  citka  cidvin  kuta //


무엇인가에 의해 누구인가가 표시되며 누구인가에 의해 무엇인가가 표시된다. 어떻게 무엇인가가 없이 누구인가가 있겠으며 어떻게 누구인가가 없이 무엇인가가 있겠는가?


9-6) 一切眼等根 實無有本住 眼耳等諸根 異相而分別
눈 따위의 모든 감각기관에 실로 그 本住는 없다. 눈이나 귀 따위의 모든 감각기관은 그 모습을 달리하여 분별된다.


9-6) sarvebhyo dar an dibhya  ka citp rvo na vidyate/
     ajyate dar an d n manyena punaranyad //


보는 작용등 일체의 것 배후에 그 누군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더우기 보는 작용 등은 (그 각각이) 다르다는 점에 의해, (그 작용하는 시기가) 다른 때라는 점에 의해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9-7) 若眼等諸根 無有本住者 眼等一一根 云何能知塵
만일 눈 따위의 감각기관 모두가 本住를 갖지 않는다면 눈 따위의 감각기관 각각이 어떻게 능히 대상을 지각하겠는가?


9-7) sarvebhyo dar an dibhyo yadi p rvo na vidyate/
    ekaikasm tkatha  p rvo dar an de  sa vidyate//


만일 보는 작용 따위 모두에 선행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는 작용 따위의 각각에 선행하는 것, 그것이 존재하겠는가?


9-8) 見者卽聞者 聞者卽受者 如是等諸根 則應有本住
보는 자가 듣는 자이고 듣는 자가 감수하는 자라면 이런 여러 감각기관은 응당 本住를 가지리라.


9-8) dra    sa eva sa  rot  sa eva yadi vedaka /
    ekaikasm dbhavetp rvam eva  caitanna yujyate//


만일 그가 바로 보는 자이고 그가 바로 듣는 자이고 그가 바로 감수하는 자이라면 각각의 것보다 이전의 그 무엇이 존재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그런 식으로 타당하지 않다.


9-9) 若見聞各異 受者亦各異 見時亦應聞 如是則神多
만일 보는 것과 듣는 것이 서로 다르고 감수자도 역시 다르다면 볼 때도 응당 들어야 하리라. 이렇다면 神我는 여러개가 된다.


9-9) dra   nya eva  rot nyo vedako 'nya  punaryadi/
    sati sy ddra  ari  rot  bahutva  c tman   bhavet//


그런데 만일 보는 자도 따로 있고 듣는 자도 따로 있고 감수하는 자도 따로 있다면 보는 자가 있을 때 듣는 자가 있겠는가? 또 아뜨만이 여러 개가 되리라.


9-10) 眼耳等諸根 苦樂等諸法 所從生諸大 彼大亦無神
눈과 귀 따위의 모든 지각기관과 苦,樂 등, 그것들이 비롯하는 여러 大들(=四大) 그 大에도 역시 神我는 없다.


9-10) dar ana rava  d ni vedan d ni c pyatha/
      bhavanti yebhyaste ve a bh te vapi na vidyate//


그런데 보는 작용, 듣는 작용과 感受 작용 등이 비롯되어 존재하는 그 大種 (=四大)들에도 역시 이것(=아뜨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9-11) 若眼耳等根 苦樂等諸法 無有本住者 眼等亦應無
만일 눈이나 귀 등의 감각기관과 苦, 樂 등의 모든 법이 本住를 갖지 않는다면 눈等도 역시 응당 없으리라.


9-11) dar ana rava  d ni vedan d ni c pyatha/
      na vidyate cedyasya sa na vidyanta im nyapi//


그런데 보는 작용이나 듣는 작용 따위 그리고 감수 작용 등이 속해 있는 그것(=본주)이 만일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들(=보는 작용等) 역시 존재하지 않으리라.


9-12) 眼等無本住 今後亦復無 以三世無故 無有無分別
눈 따위에는 本住는 없다. 지금이나 나중에도 역시 다시 없다. 三世에 없으므로 있다거나 없다는 분별도 없다.


9-12) pr k ca yo dar an dibhya  s  prata  cordhvameva ca/
      na vidyate 'sti n st ti niv tt statra kalpan  //


보는 작용 따위 以前도 동시도 나중도 존재하지 않는 그것(=本住)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분별들은 여기서 사라진다.

 


第10 觀燃可燃品(16게) 불과 연료에 대한 관찰


agn ndhanapar k   n ma da ama  prakara am
불과 연료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0장(16게)


10-1) 若燃是可燃 作作者則一 若燃異可燃 離可燃有燃
만일 불이 그대로 연료라면 행위와 행위자는 동일하리라. 만일 불이 연료와 다르다면 연료 없이도 불이 있으리라.


10-1) yadindhana  sa cedagnirekatva  kart karma o /
     anya cedindhan dagnirindhan dapy te bhavet//


만일 연료인 것, 그것이 불이라면 행위자와 행위가 동일성의 것으로 된다. (반대로) 만일 불이 연료와 다르다면 (불은) 연료 없이도 존재하리라.


10-2) 如是常應燃 不因可燃生 則無燃火功 亦名無作火
이와 같다면 항상 타올라야 하리니 연료로 인해 생하는 것이 아니어서 불타게 하는 공능도 없는 꼴이 되며 짓지도 않은 불이라고 이름하게도 된다.


10-2) nityaprad pta eva sy daprad panahetuka /
     punar rambhavaiyartyameva  c karmaka  sati//


실로 영원히 타오르게 되며 타오름의 원인이 되는 것도 없게 되리라. 더우기 (점화의) 시작이 헛수고가 될 테니 이와 같다면 행위도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


10-3) 燃不待可燃 則不從緣生 火若常燃者 人功則應空
불이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인연에서 생하지도 않는다. 불이 만일 항상 타고 있는 것이라면 사람의 (불 지피는) 행위도 응당 공허하게 되리라.


10-3) paratra nirapek atv daprad panahetuka /
     punar rambhavaiyarthya  nityad pta  prasajyate//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타오름은 원인 없는 것이 된다. 더우기 항상 탄다면 (점화의) 시작이 헛수고가 되는 과실에 빠진다.


10-4) 若汝謂燃時 名爲可燃者 爾時但有薪 何物燃可燃
만일 그대가 지금 타오르고 있는 중인 것을 연료라고 부른다면 그런 때는 다만 장작만 존재하는데 무엇이 연료를 태우겠느냐?


10-4) tatraitasm didhyam namindhana  bhavat ti cet/
     kenedhyat mindhana  tatt vanm tramida  yad //


10-5) 若異則不至 不至則不燒 不燒則不滅 不滅則常住
만일 다르다면 도달하지 못한다.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태우지도 못한다. 태우지 않으면 소멸하지도 않는다. 소멸하지 않는다면 常住하리라.


10-5) anyo na pr psyate 'pr pto na dhak yatyadahan puna /
     na nirv syatyanirv  a  sth syate v  svali gav n//


(서로) 다르다면 도달하지 못한다. 도달하지 앟는 것은 타버리지 못하리라. 더우기 타지 않은 것은 소멸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소멸하지 않은 것은 自相을 갖고 머물러 있으리라.


10-6) 燃如可燃異 而能至可燃 如此至彼人 彼人至此人
불이 연료와 다르면서도 능히 연료에 도달하는 것은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도달하고 저 사람이 이 사람에게 도달하는 것과 같다.


10-6) anya evendhan dagnirindhana  pr pnuy dyadi/
     str  sa pr pnoti puru a  puru a ca striya  yath //


만일 연료와 다른 불이 (있어서 그것이) 연료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여자가 남자에게 도달하고 또 남자가 여자에게 도달하는 것과 같다.


10-7) 若謂燃可燃 二俱相離者 如是燃則能 至於彼可燃
만일 불과 연료 이 두가지가 모두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이러한 불은 그 연료에 능히 도달할 수 있으리라.


10-7) anya evendhan dagnirindhana  k mam pnuy t/
     agn ndhane yadi sy t manyonyena tirask te//


실로 연료와 다른 불이 연료에 기꺼이 도달하리라. 만일 불과 연료가 서로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라면….


10-8) 若因可燃燃 因燃有可燃 先定有何法 而有燃可燃
만일 연료로 인해 불이 있고 불로 인해 연료가 있는 것이라면 먼저 어떤 것이 정해져 있어서 불과 연료를 존재하게 하겠느냐?


10-8) yad ndhanamapek y gnirapek y gni  yad ndhanam/
     kataratp rvani panna  yadapek y gnirindhanam//


만일 불이 연료에 의존해 있고 연료가 불에 의존해 있다면 그 둘 중의 어느 쪽이 미리 성취되어 있어서 불이나 연료가 의존하게 되겠느냐?


10-9) 若因可燃燃 則燃成復成 是謂可燃中 則謂無有燃
만일 연료로 인해 불이 존재한다면 불이 성립되고 나서 다시 성립되는 꼴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연료중에 불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10-9) yad ndhanamapek y gniragne  siddhasya s dhanam/
     eva  sat ndhana  c pi bhavi yati niragnikam//


만일 불이 연료에 의존한다면 성립된 불이 (또다시) 성립(되는 꼴이)된다. 이와 같은 존재라면 불없는 연료 역시 존재하리라.


10-10) 若法因待成 是法還成待 今則無因待 亦無所成法
만일 어떤 존재가 의존적으로 성립한다면 이 존재가 거꾸로 의존 받음이 성립되리니 지금은 의존함도 없고 성립될 존재도 없다.


10-10) yo 'pek ya sidhyate bh vastamev pek ya sidhyati/
      yadi yo 'pek itavya  sa sidhyat   kamapek ya ka //


만일 의존되어질 것, 그것이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성립되는 그런 존재, 실로 그런 것(=존재)에 의존하여 성립한다면 무엇이 무엇에 의존하여 성립할 것인가?


10-11) 若法有待成 未成云何待 若成已有待 成已何用待
만일 어떤 존재가 의존하여 성립되는 것이라면 아직 성립되지 않은 것에는 어떻게 의존할 수 있겠는가? 만일 성립되고 나서 의존하는 것이라면 이미 성립이 끝났는데 의존할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


10-11) yo 'pek ya sidhyate bh va  so 'siddho 'pek ate katham/
      ath pyapek ate siddhastvapek  sya na yujyate//


(무엇인가에) 의존하여 성립된 그런 존재 그것이 아직 성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의존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미 성립된 것이 (다시) 의존한다는 것도 의존에 있어서는 타당치 않다.


10-12) 因可燃無燃 不因亦無燃 因燃無可燃 不因無可燃
연료에 의존한 불은 없다. (연료에) 의존하지 않아도 불이 없다. 불에 의존한 연료는 없다. (불에) 의존하지 않아도 연료는 없다.


10-12) apek yendhanamagnirna n napek y gnirindhanam/
      apek yendhanamagni  na n napek y gnimindhanam//


불은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다.불은 연료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연료는 불에 의존하지 않는다. 연료는 불에 의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10-13) 燃不餘處來 燃處亦無燃 可燃亦如是 餘如去來說
불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불타는 곳에도 불은 없다. 연료도 역시 이와 같으니 나머지는 去,來에 대한 설명과 같다.


10-13)  gacchatyanyato n gnirindhane 'gnirna vidyate/
      atrendhane  e amukta  gamyam nagat gatai //


불은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불은 연료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연료에 있어서 다른 것들은 去時,已去,未去에 의해 설명되었다.


10-14) 可燃卽非燃 離可燃無燃 燃無有可燃 燃中無可燃 可燃中無燃
연료는 불이 아니다. 연료를 떠나서 불은 없다. 불은 연료를 갖지 않는다. 불 속에 연료는 없다. 연료 속에도 불은 없다.


10-14) indhana  punaragnirna n gniranyatra cendhan t/
      n gnirindhanav nn gn vindhan ni na te u sa //


더우기 불은 연료가 아니다. 또 불은 연료와 다른 곳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불은 연료를 가진 것이 아니다. 불에 연료들이 있지도 않고 그것(=연료)에 그것(=불)이 있지도 않다.


10-15) 以燃可燃法 說受受者法 及以說甁衣 一切等諸法
불과 연료라는 존재에 의해 감수 작용과 감수하는 주체를 설명하였다. 또 병이나 옷감 및 일체 모든 존재를 설명함으로써…


10-15) agn ndhan bhy   vy khy ta  tmop d nayo  krama /
      sarvo nirva e e a s rdha  gha apa  dibhi //


불과 연료의 양자에 의해 아뜨만과 취착의 모든 절차가 남김없이 설명되었다. 병과 옷감 따위들과 더불어…


10-16) 若人說有我 諸法各異相 當知如是人 不得佛法味
만일 어떤 사람이 자아가 있고 모든 존재는 서로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의 묘미를 포착하지 못한 것임을 마땅히 알지어다.


10-16)  tmana ca satattva  ye bh v n   ca p thak p thak/
      nirdi anti na t nmanye   sanasy rthakovid n//


어떤 사람들은 아뜨만의 참된 성질과 사물들의 개별성을 말하는데 나는 그들이 교법의 의미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第11 觀本際品(8偈) 根本 限界에 대한 관찰


p rv parako ipar ik   n maik da ama  prakara am
前後의 窮極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4장(8게)


11-1) 大聖之所說 本際不可得 生死無有始 亦復無有終
大聖께서는 한계(=本際)는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 바 生死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11-1) p rv  praj  yate ko irnetyuv ca mah muni /
     sa s ro 'navar gro hi n sy dirn pi pa cimam//


이전의 끝(=시작점)은 인식되지 않는다고 大聖者께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윤회는 始終이 없으니 그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이다.


11-2) 若無有始終 中當云何有 是故於此中 先後共亦無
만일 시직과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중간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여기서 先도 後도 同時도 역시 없다.


11-2) naiv gra  n vara  yasya tasya madhya  kuto bhavet/
     tasm nn tropapadyante p rv parasahakram  //


실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에 있어서 그것의 중간은 어디에 존재하리요. 그러므로 여기서 前과 나중과 同時라는 여러가지 체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11-3) 若使先有生 後有老死者 不老死有生 不生有老死
만일 생이 먼저 존재하고 老死가 나중에 존재한다면 老死 없이도 生이 있는 꼴이 되고, 生 없이도 老死가 있는 꼴이 된다.


11-3) p rva  j tiryadi bhavejjar mara amuttaram/
     nirjar mara   j tirbhavejj yeta c m ta //


만일 生이 앞선 것이고 老死가 나중의 것이라면 老死 없는 生이 되리라. 또 죽지도 않은 것이 生하리라.


11-4) 若先有老死 而後有生者 是則爲無因 不生有老死
만일 老死가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生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無因인 꼴이 되고 生하지 않고 老死가 존재하는 꼴이 된다.


11-4) pa c jj tiryadi bhavejjar mara am dita /
     ahetukamaj tasya sy jjar mara a  katham//


만일 生이 나중이고 老死가 먼저라면 無因이며 生이 없는 老死가 어떻게 존재하리요?


11-5) 生及於老死 不得一時共 生時則有死 是二俱無因
生과 老死는 동시에 함께 존재할 수 없다. (함께 존재한다면) 生하는 순간에 사망하게 되고 이 (生과 死) 兩者 모두 無因인 꼴이 된다.


11-5) na jar mara enaiva j ti ca saha yujyate/
     mriyeta j yam na ca sy cc hetukatobhayo //


실로 老死와 生이 동시적이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생하고 있는 중인 것이 죽어버리게 될 것이며 또 그 兩者가 無因의 존재가 될 것이다.


11-6) 若使初後共 是皆不然者 何故而戱論 謂有生老死
만일 먼저 있다거나 나중에 있다거나 함께한다는 것이 전혀 옳지 않다면 어째서 生이나 老死가 존재한다고 지껄이며 戱論하는 것이냐?


11-6) yatra na prabhavantyete p rv parasahakram  /
     prapa cayanti t   j ti  tajjar mara a  ca kim//


前이라거나 後라거나 同時라는 여러 가지 체계들이 성립되지 않는 상황인데 그런 生과 그런 老死에 대해 戱論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11-7) 諸所有因果 相及可相法 受及受者等 所有一切法
11-8) 非但於生死 本際不可得 如是一切法 本際皆亦無
존재하는 모든 因과 果, 相과 相을 띈 존재, 感受작용과 感受者 등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은
단지 生死뿐만이 아니라, 그 本際를 얻을 수 없다. 이처럼 일체의 것 역시 모두 그 本際가 없다.


11-7) k rya  ca k ra a  caiva lak ya  lak a ameva ca/
     vedan  vedaka caiva santyarth  ye ca ke cana//
11-8) p rv  na vidyate ko i  sa s rasya na keval‎!!!am/
     sarve  mapi bh v n   p rv  ko   na vidyate//


결과와 원인, 특징을 띈 것과 특징, 感受작용과 感受者같은 事體들은 그 어떤 것이건,
단지 윤회에 있어서만 그 궁극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있어서도 그 궁극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第12 觀苦品(10偈) 苦에 대한 관찰


du khapar ik   n ma dv da ama  prakara am
苦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2장(10게)


12-1) 自作及他作 共作無因作 如是說諸苦 於果則不然
스스로 짓거나 남이 짓거나 함께 짓거나 無因으로 짓는다는 등과 같이 갖가지 苦를 說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에 있어서는 옳지 못하다.


12-1) svaya  k ta  parak ta  dv bhy   k tamahetukam/
     du khamityeka icchanti tacca k rya  na yujyate//


어떤 사람들은 苦를 스스로 짓는다, 남이 짓는다, (스스로와 남의) 兩者가 짓는다, 無因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것(苦)이 지어지리라는 것은 불합리하다.


12-2) 苦若自作者 則不從緣生 因有此陰故 而有彼陰生
苦가 만일 스스로 지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緣으로부터 발생하지 말아야 하리라. (緣인) 이 陰(=蘊)이 있음으로 인하여 (苦果인) 저 陰(=蘊)이 발생하는 것이다.


12-2) svaya  k ta  yadi bhavetprat tya na tato bhavet/
     skandh nim nam  skandh   sa bhavanti prat tya hi//


만일 스스로 짓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무엇인가를 緣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로 이 여러 蘊들(五蘊)을 緣하여 저 여러 蘊들(五蘊)이 발생하는 것인데…


12-3) 若謂此五陰 異彼五陰者 如是則應言 從他而作苦
만일 (因인) 이 五陰이 (果인) 저 五陰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렇다면 다른 것으로부터 (果로서의 오음인) 苦가 지어진다고 말해야 하리라.


12-3) yadyam bhya ime 'nye syurebhyo v m  pare yadi/
     bhavetparak ta  du kha  parairebhiram  k t  //


만일 이것들이 저것들과 다르다면 또는 저것들이 이것들과 별개의 것이라면 苦는 어떤 다른 것이 짓는 꼴이 될 것이며 별개의 것인 이것에 의해 저것이 지어지리라.


12-4) 若人自作苦 離苦何有人 而謂於彼人 而能自作苦
만일 사람이 스스로 苦를 짓는 것이라면 苦와 관계없는 어떻게 사람이 있겠으며 그 사람이 능히 스스로 苦를 짓는다고 말하겠느냐?


12-4) svapudgalak ta  du kha  yadi du kha  punarvin /
     svapudgala  sa katamo yena du kha  svaya  k tam//


만일 苦가 個體 스스로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면, 그렇다면 苦를 스스로 짓는 어떤 個體가 苦를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겠는가?


12-5) 若苦他人作 而與此人者 若當離於苦 何有此人受
만일 苦가 다른 사람이 지어서 이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苦를 떠난 이 사람이 어떻게 존재해서 그것을 받겠는가?


12-5) parapudgalaja  du kha  yadi yasmai prad yate/
     pare a k tv  taddu kha  sa du khena vin  kuta //


만일 다른 個體가 生한 苦라면 다른 놈에 의해 지어지고서 그 苦가 <그>에게 주어진다고 하는 <그>는 苦가 없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12-6) 苦若彼人作 持與此人者 離苦何有人 而能授於此
苦가 만일 저 사람이 지어 그것을 갖고 이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면 苦를 떠나서 어떻게 (짓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 능히 이 사람에게 주는 것이겠느냐?


12-6) parapudgalaja  du kha  yadi ka  parapudgala /
     vin  du khena ya  k tv  parasmai prahi oti tat//


만일 다른 個體가 생한 苦라면 苦없는 상태에서 (苦를 生하는) 작업을 해서 다른 個體에게 그것(=苦)을 떠넘기는 다른 個體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


12-7) 自作若不成 云何彼作苦 若彼人作苦 卽亦名自作
스스로 짓는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놈이 짓겠느냐? 만일 저 사람이 苦를 짓는다면 (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곧 스스로 짓는다고 부른다.


12-7) svaya  k tasy prasiddherdu kha  parak ta  kuta /
     paro hi du kha  yatkury ttattasya sy tsvaya  k tam//


스스로 짓는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다른 놈이 짓는 苦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느냐? 왜냐하면 다른 놈이 짓는 苦, 그것은 그 (다른) 놈에 있어서는 스스로 짓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2-8) 苦不名自作 法不自作法 彼無有自體 何有彼作苦
苦를 (苦가) 스스로 짓는다고 말하지 못한다. 사물은 스스로 사물을 짓지 않는다. (다른 것인) 저 놈이 그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저 놈이 苦를 짓겠는가?


12-8) na t vatsvak ta  du kha  na hi tenaiva tatk tam/
     paro n tmak ta cetsy ddu kha  parak ta  katham//


우선, 苦는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자신)에 의해 그것(자신)이 지어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다른 놈이 그 스스로 짓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苦가 다른 것에 의해 지어지겠는가?


12-9) 若此彼苦成 應有共作苦 此彼尙無作 何況無因作
만일 이 놈과 저놈이 苦를 성립시킨다면 응당 함께 짓는 苦가 존재해야 하리라. 이 놈과 저 놈도 오히려 짓는 것이 아니었는데 하물며 無因으로 짓는 것이겠느냐?


12-9) sy dubh bhy   k ta  du kha  sy dekaikak ta  yadi/
     par k r svaya k ra  du khamahetuka  kuta //


만일 (自와 他) 각각이 짓는 苦라면 兩者가 함께 짓는 것이 되리라.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또) 다른 것이 짓지 않고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닌 苦인데 어떻게 無因의 것이겠느냐?


12-10) 非但說於苦 四種義不成 一切外萬物 四義亦不成
단지 苦에 있어서만 네가지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바깥의 일체 만물도 네가지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


12-10) na keval‎!!!a  hi du khasya c turvidhya  na vidyate/
      b hy n mapi bh v n   c turvidhya  na vidyate//


단지 苦에 있어서만 四種의 知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외계에 있는 존재들에 있어서도 역시 四種의 知가 존재하지 않는다.

 


第13 觀行品(9偈) 行에 대한 관찰


samskarapar ik   n ma trayoda ama  prakara am
형성작용(行)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3장(8게)


13-1) 如佛經所說 虛광妄取相 諸行妄取故 是名爲虛광
佛經에서 말한 바와 같이 虛광한 것은 허망하게 取한 相이다. 모든 行은 허망하게 취해진 것들이라서 虛광이라고 부른다.


13-1) tanm    mo adharma yadbhagav nityabh  ata/
     sarve ca mo adharm  a  sa sk r stena te m   //


거짓된 사물, 그것은 헛된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어디서건 <형성 작용(行)>들은 기만적인 성질을 갖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것들(行)은 헛되다.


13-2) 虛광妄取者 是中何所取 佛說如是事 欲以示空義
  虛광하여 허망하게 취하는 것, 이 중에서 취할 것은 무엇이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런 것을 설해 주심으로써 空의 이치를 보이고자 하셨다.


13-2) tanm    mo adharma yadyadi ki  tatra mu yate/
     etatt kta  bhagavat    nyat parid pakam//


거짓된 존재들, 그것들이 헛된 것이라면 거기서 무엇이 홀리겠느냐? 그런데 세존에 의해 이것이 설해져서 空性이 훤히 드러났다.


13-3) 諸法有異故 知皆是無性 無性法亦無 一切法空故
모든 존재는 달라지기 때문에 그 모두가 無自性임을 알아라. 無自性인 존재도 역시 없다. 일체의 존재가 空하기 때문이다.


13-3) bh v n   ni svabh vatvamanyath bh vadar an t/
     asvabh vo bh vo n sti bh v n     nyat  yata //


모든 존재는 無自性性이다. 존재가 변모함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無自性인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존재가 空하기 때문이다.


13-4) 諸法若無性 云何說영兒 乃至於老年 而有種種異
만일 모든 존재가 그 自性이 없다면 어떻게 갓난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모해 간다고 說하겠느냐?


13-5) 若諸法有性 云何而得異 若諸法無性 云何而有異
만일 모든 존재가 그 自性이 있다면 어떻게 변화할 수 있겠느냐? 만일 모든 존재가 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화가 있겠느냐?


13-4) kasya sy danyath bh va  svabh va cenna vidyate/
     kasya sy danyath bh va  svabh vo yadi vidyate//


만일 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물이 변모되겠느냐? 만일 自性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사물이 변모되겠느냐?


13-6) 是法則無異 異法亦無異 如壯不作老 老亦不作壯
같은 존재는 변화하지 않는다. 다른 존재도 역시 변화하지 않는다. 젊은이가 늙은이로 되지 못하고 늙은이가 늙은이로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13-5) tasyaiva n nyath bh vo n pyanyasyaiva yujyate/
      yuv  na j ryate yasm dyasm jj r o na j ryate//


존재는 바로 그것(=동일한 것)이 변화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것(이 변화 한다는 것)도 역시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젊은이가 늙어지지 못하고 늙은이도 늙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13-7) 若是法卽異 乳應卽是酪 離乳有何法 而能作於酪
만일 같은 존재가 변하는 것이라면 우유는 응당 야구르트이어야 하리라. 또 우유를 떠나서 그 어떤 존재가 있어서 능히 야구르트로 되겠느냐?


13-6) tasya cedanyath bh va  k  rameva bhaveddadhi/
     k  r danyasya kasya ciddadhibh vo bhavi yati//


만일 존재가 바로 그것(=같은 것)에서 변한다면 우유가 그대로 야구르트로 되리라. 또 (이와 반대로) 우유와 다른 그 어떤 것이 있어서 야구르트라는 존재로 될 것인가?


13-8) 若有不空法 則應有空法 實無不空法 何得有空法
만일 空하지 아니한 존재가 있다면 응당 空한 존재가 있어야 한다. 실제 空하지 아니한 존재가 없는데 어떻게 空한 존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13-7) yadya  nya  bhavetki  citsy cch nyamiti ki  cana/
     na ki  cidastya  nya  ca kuta    nya  bhavi yati//


만일 空하지 아니한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空한 그 무엇이 존재하리라. 그런데 空하지 아니한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空이 존재하겠는가?


13-9) 大聖說空法 爲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위대한 성인께서는 갖가지 견해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空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空이 있다는 견해를 다시 갖는다면 (그런 자는) 어떤 부처님도 교화하지 못하신다.


13-8)   nyat  sarvad    n   prokt  ni sara a  jinai /
     ye    tu   nyat d   ist nas dhy n babh  ire//


空性이란 일체의 見解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러 勝者들에 의해 교시되었다. 그러나 空性의 見解를 가진 사람들은 구제불능이라고 말씀하셨다.

 


第14 觀合品(8偈) 결합에 대한 관찰


sa saragapar ik   n ma caturda ama  prakara am
結合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4장(8게)


14-1) 見可見見者 是三各異方 如是三法異 終無有合時
<보는 작용>, <보이는 대상>, <보는 자> 이 셋은 서로 다른 데 있다. 이처럼 셋이 다르니 끝내 합하는 때가 없다.


14-1) dra  avya  dar ana  dra    tr  yet ni dvi o dvi a /
     sarva a ca na sa sargamanyonyena vrajantyuta//


<보이는 대상>, <보는 작용>, <보는 자> 이 三者는 두 개씩 두 개씩이건 한꺼번에건 서로 결합한 상태로 되지 않는다.


14-2) 染與於可染 染者亦復然 餘入餘煩惱 皆亦復如是
<탐욕>과 <탐욕의 대상>과 <탐욕을 내는 자>도 역시 그러하며 나머지 知覺領域(入處)과 나머지 번뇌도 모두 역시 그와 같다.


14-2) eva  r ga ca rakta ca ra jan ya  ca d  yat m/
     traidhena  e    kle   ca  e   y yatan ni ca//


이와 마찬가지로 <탐욕>과 <탐욕을 내는 자>와 <탐욕의 대상>이 관찰되어져야 하며 餘他의 번뇌와 餘他의 入處들도 세 가지로… (관찰되어져야 한다).


14-3) 異法當有合 見等無有異 異相不成故 見等云何合
서로 다른 존재라면 마땅히 합하겠지만 <보는 작용>등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相이 성립하지 않는데 <보는 작용>등(의 세 가지 것)이 어떻게 합하겠느냐?


14-3) anyen nyasya sa sargastacc nyatva  na vidyate/
     dra  avyaprabh t n   yanna sa sarga  vrajantyata //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다른 것과 결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이는 대상>등(의 세 가지) 는 서로 다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합에 이르지 못한다.


14-4) 非但見等法 異相不可得 所有一切法 皆亦無異相
단지 <보는 작용>등의 존재만 서로 다른 相이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 역시 다른 相이 없다.


14-4) na ca keval‎!!!amanyatva  dra  avy derna vidyate/
     kasya citkena cits rdha  n nyatvamupapadyate//


비단 <보이는 대상> 따위에 있어서 서로 다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에 있어서건 그 어떤 것과건 共히 서로 다름이 성립하지 않는다.


14-5) 異因異有異 異離異無異 若法從因出 是法不異因
다른 것은 다른 것으로 인해 다르다. 다른 것이 다른 것을 떠나면 다름이 없다. 만일 어떤 존재가 어떤 원인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이 존재는 그 원인과 다르지 않다.


14-5) anyadanyatprat ty nyann nyadanyad te 'nyata /
     yatprat tya ca yattasm ttadanyannopapadyate//


다른 것은 다른 것을 緣하여 다른 것이다. 다른 것이 다른 것을 떠나서 다른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이 또 어떤 것을 緣할 때 그것과 그것이 다름은 성립하지 않는다.


14-6) 若離從異異 應餘異有異 離從異無異 是故無有異
만일 (이쪽이 저쪽의) 다른 것을 떠나서 다르다면 응당 (저쪽의) 상대되는 다른 것은 (이쪽과 상관 없이) 다름이 있으리라. 그러나 다른 것을 떠나서는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다름은 없다.


14-6) yadyanyadanyadanyasm danyasm dapy te bhavet/
     tadanyadanyadanyasm d te n sti ca n styata //


만일 어느 한 쪽과 다른 한 쪽이 서로 다르다면 상대방 없이도 그러하리라. 그 어느 한 쪽과 다른 한 쪽은 서로 상대방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14-7) 異中無異相 不異中亦無 無有異相故 則無此彼異
다른 것에는 다른 相은 없으며 다르지 않은 것에도 역시 없다. 다른 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것과 저것의 다름도 없다.


14-7) n nyasmin vidyate 'nyatvamananyasmin na vidyate/
     avidyam ne c nyatve n styanyadv  tadeva v //


다르다는 성품은 다른 것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르지 않은 것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르다는 성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이건 같은 것이건 존재하지 않는다.


14-8) 是法不自合 異法亦不合 合者及合時 合法亦皆無
동일한 존재는 스스로 합하지 않는다. 다른 존재도 역시 합하지 않는다. 합하는 놈과 합하는 순간과 합하는 존재도 역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14-8) na tena tasya sa sargo n nyen nyasya yujyate/
     sa s jyam na  sa s   a  sa sra    ca na vidyate//


동일한 것이 동일한 것과 결합하는 것도, 또 다른 것이 다른 것과 결합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또 지금 결합되고 있는 중인 것, 이미 결합된 것, 결합하는 놈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第15 觀有無品(11게) 有와 無에 대한 관찰


svabh vapar ik   n ma pa cada ama  prakara am
自性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5장(11게)


15-1) 衆緣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衆緣出 卽名爲作法
여러 인연 가운데 그 自性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못하다. 自性이 여러 인연에서 나온다면 지어진 존재라고 말해야 한다.


15-1) na sa bhava  svabh vasya yukta  pratyayahetubhi /
     hetupratyayasa bh ta  svabh va  k tako bhavet//


自性이 여러 因과 緣에 의해 生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因과 緣이 모여 생기는 自性은 作爲된 것이 되리라.


15-2) 性若是作者 云何有此義 性名爲無作 不待異法成
自性이 만일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떻게 말이 되겠느냐? 自性이란 지어지지 않고 다른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된 것을 일컫는다.


15-2) svabh va  k tako n ma bhavi yati puna  katham/
     ak trima  svabh vo hi nirapek a  paratra ca//


더우기 어째서 그야말로 自性이 만들어진 것이겠느냐? 왜냐하면 自性이란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또 다른 것에 의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5-3) 法若無自性 云何有他性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
존재가 그 自性이 없다면 어떻게 他性이 있겠는가? 他性에 있어서 自性은 역시 他性이라고 부른다.


15-3) kuta  svabh vasy bh ve parabh vo bhavi yati/
     svabh va  parabh vasya parabh vo hi kathyate//


自性이 없다면 어떻게 他性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다른 존재에 있어서의 自性은 他性이라고 불려지기 때문이다.


15-4) 離自性他性 何得更有法 若有自他性 諸法則得性
自性과 他性을 떠나서 어떻게 다시 사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自性과 他性이 존재한다면 모든 사물은 그 自性이 있을 수 있다.


15-4) svabh vaparabh v bhy m te bh va  kuta  puna /
     svabh ve prabh ve v  sati bh vo hi sidhyati//


더우기 自性과 他性 兩者를 떠나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왜냐하면 自性이나 他性이 존재할 때에 (비로서) 사물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15-5) 有若不成者 無云何有成 因有有法故 有壞名爲無
有가 만일 성립하지 않는다면 無가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有라는 法이 있기 때문에 有가 파괴될 수 있고 그것을 無라고 부른다.


15-5) bh vasya cedaprasiddhirabh vo naiva sidhyati/
     bh vasya hyanyath bh vamabh va  bruvate jan  //


만일 존재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비존재도 실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가 변화함을 사람들은 비존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15-6) 若人見有無 見自性他性 如是則不見 佛法眞實義
만일 有나 無를 보거나 自性이나 他性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佛法의 참된 意義를 보지 못한다.


15-6) svabh va  parabh va  ca bh va  c bh vameva ca/
     ye pa yanti na pa yanti te tattva  buddha  sane//


自性이나 他性, 존재나 비존재를 (있다고) 보는 사람들, 그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15-7) 佛能滅有無 如化迦전延 經中之所說 離有亦離無
가전연을 교화하던 경전에서 설하신 바 有도 떠나있고 無도 역시 떠나있다고 하신 것과 같이 부처님은 능히 有와 無를 壞滅시키신다.


15-7) k ty yan vav de c st ti n st ti cobhayam/
     prati iddha  bhagavat  bh v bh vavibh vin //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兩者는 까뜨야야나에게 내리신 설법에서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해 보여줌으로써 세존에 의해 부정되었다.


15-8) 若法實有性 後則不應異 性若有異相 是事則不然
만일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다시 변하지는 않아야 하리라. 만일 自性이 달라지는 모습을 띈다면 이것은 옳지 못하다.


15-8) yadyastitva  prak ty  sy nna bhavedasya n stit /
     prak teranyath bh vo na hi j t papadyate//


만일 有가 근본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有)의 無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왜냐하면 근본이 변화한다는 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15-9) 若法實有性 云何而可異 若法實無性 云何而可異
만일 사물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만일 사물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15-9) prak tau kasya c saty manyath tva  bhavi yati/
     prak tau kasya ca saty manyath tva  bhavi yati//


本性이 존재한다면 무엇에 있어서 變異가 존재하겠는가? 本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있어서 變異가 존재하겠는가?


15-10) 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
결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됨에 집착하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斷滅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있다거나 없다는데 집착해서는 안된다.


15-10) ast ti    vatagr ho n st tyucchedadar anam/
      tasm dastitvan stitve n  r yeta vicak a a //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常住에 대한 집착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斷滅的 견해이다. 그러므로 明晳한 者는 존재성이나 비존재성에 依據해서는 안된다.


15-11) 若法有定性 非無則是常 先有而今無 是則爲斷滅
만일 사물이 결정적인 자성을 가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恒常(되다는 말)이(되)고, 미리 존재하다가 지금은 없어졌다면 斷滅(했다는 말)이 된다.


15-11) asti yaddhi svabh vena na tann st ti    vatam/
      n st d n mabh tp rvamityuccheda  prasajyate//


실로 自性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그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는다면 <常住함>(이라는 過失에 떨어지고),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은 <斷滅함>이라는 過失에 떨어진다.

 


第16 觀縛解品(10偈) 속박과 해탈에 대한 관찰


bandhanamok apar k   n ma  o a ama  prakara am
속박과 해탈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6장(10게)


16-1) 諸行往來者 常不應往來 無常亦不應 衆生亦復然
諸行이 往來한다면 恒常되어도 往來할 수 없고 無常하여도 왕래할 수 없다. 중생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16-1) sa sk r   sa saranti cenna nity   sa saranti te/
     sa saranti ca n nity   sattve 'pye a sama  krama //


만일 형성작용들(諸行)이 윤회한다면 그 (諸行)들은 항상된 것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며 無常한 것들이 윤회하는 것도 아니다. 중생에 있어서도 이것은 같은 절차를 밟는다.


16-2) 若衆生往來 陰界諸入中 五種求盡無 誰有往來者
만일 衆生이 往來한다면 五陰, 十二入, 十八界 중에서 다섯 가지로 추구해 보아도 (그런 個我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데 누가 往來하는 者이겠느냐?


16-2) pudgala  sa sarati cetskandh yatanadh tu u/
     pa cadh  m gyam  o 'sau n sti ka  sa sari yati//


만일 個我가 윤회한다면 蘊, 處, 界 들에서 다섯 가지로 조사해 보아도 그것(=個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누가 윤회하겠는가?


16-3) 若從身至身 往來卽無身 若其無有身 則無有往來
만일 몸에서 몸으로 왕래한다면 몸이 없는 꼴이 된다. 그렇게 몸이 없다면 왕래도 없다.


16-3) up d n dup d na  sa saran vibhavo bhavet/
     vibhava c nup d na  ka  sa ki  sa sari yati//


(하나의) 집착(取)으로부터 (다른) 집착(取)으로 윤회하는 자는 신체가 없는 자가 되리라. 신체가 없고 또 집착(取)이 없는 者는 어떤 者이겠는가? 또 그것이 어떻게 윤회하겠는가?


16-4) 諸行若滅者 是事終不然 衆生若滅者 是事亦不然
諸行이 만일 소멸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중생이 만일 소멸하는 것이라면 이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16-4) sa sk r     na nirv  a  katha  cidupapadyate/
     sattvasy pi na nirv  a  katha  cidupapadyate//


형성작용들(諸行)의 경우에 있어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중생에 있어서도 또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16-5) 諸行生滅相 不縛亦不解 衆生如先說 不縛亦不解
諸行의 生滅하는 모습은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 중생도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


16-5) na badhyante na mucyanta udayavyayadharmi a /
     sa sk r   p rvavatsattvo badhyate na na mucyate//


生과 滅의 성질을 갖추고 있는 것인 형성작용들(諸行)은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하지도 않는다. 앞에서와 같이 중생도 속박되지도 않고 해탈되지도 않는다.


16-6) 若身名爲縛 有身則不縛 無身亦不縛 於何而有縛
만일 몸을 속박이라 부른다면 몸이 있는 경우는 (그것이 다시) 속박되지 않고 몸이 없는 경우도 (아예) 속박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떠한 상태에 속박이 존재하겠는가?


16-6) bandhana  cedup d na  sop d no na badhyate/
     badhyate n nup d na  kimavastho 'tha badhyate//


만일 집착(取)이 속박이라면 집착(取)을 (이미) 갖고 있는 자는 속박되지 않고 (지금) 집착(取)이 없는 자는 속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태로 되는 것이 속박되는 것이겠는가?


16-7) 若可縛先縛 則應縛可縛 而先實無縛 餘如去來答
만일 속박되는 者가 먼저 속박되어 있다면 응당 속박된 者를 (다시) 속박해야 하리라. 그러나 실제 속박이 먼저 있을 수는 없다. 나머지는 去來品의 대답과 같다.


16-7) badhn y dbhandhana  k ma  bandhy tp rva  bhavedyadi/
     na c sti tac che amukta  gamyam nagat gatai //


만일 속박되는 者에 앞서서 속박이 존재한다면 (그 자는) 기꺼이 속박되리라. 그런데 그것(속박)은 (속박되는 자에 앞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외의 것은 去時, 未去, 已去(觀去來品)에 의해 이미 설명하였다.


16-8) 縛者無有解 無縛亦無解 縛時有解者 縛解則一時
속박되어 있는 자는 해탈하지 못한다. 속박되어 있지 않은 자도 해탈하지 않는다. (또) 속박되어 있는 중인 자가 해탈하는 것이라면 속박과 해탈이 동시인 꼴이 된다.


16-8) baddho na mucyate t vadabaddho naiva mucyate/
     sy t   baddhe mucyam ne yugapadbandhamok a e//


우선, 이미 속박된 者는 해탈되지 않는다. 또 속박되지 않은 者는 결코 해탈되지 않는다. 이미 속박된 者가 지금 해탈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면 속박과 해탈이 동시에 있는 것이 되리라.


16-9) 若不受諸法 我當得涅槃 若人如是者 還爲受所縛
만일 모든 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열반을 획득하리라. 만일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라면 도리어 받아들임에 속박된 꼴이 된다.


16-9) nirv sy myanup d no nirv  a  me bhavi yati/
     iti ye    grahaste  mup d namah graha //


<취하는 요소가 없는 나는 열반할 것이다. 나에게 열반이 존재할 것이다>라고 집착하는 자들은, 그들은 취하는 요소에 대한 커다란 집착이 있다.


16-10) 不離於生死 而別有涅槃 實相義如是 云何有分別
生死를 떠나서 따로 열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實相의 뜻이 이러하니 어떻게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겠는가?


16-10) na nirv  asam ropo na sa s r pakar a am/
      yatra kastatra sa s ro nirv  a  ki  vikalpyate//


무릇 열반을 꾸며내지 않고 윤회를 무시하는 일도 없는 경우에는 어떠한 윤회와 어떠한 열반이 분별되겠는가?

 


第17 觀業品(33偈) 業에 대한 관찰


karamaphalapar k   n ma saptada ama  prakara am(33게)
業과 果報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7장


17-1) 人能降伏心 利益於衆生 是名爲慈善 二世果報種
사람은 능히 그 마음을 억누르고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이것을 慈善이라고 부르며 (이것은 현세와 내세의) 二世의 과보를 초래하는 씨앗이다.


17-1)  tmasa yamaka  ceta  par nugr haka  ca yat/
     maitra  sa dharmastadb ja  phalasya pretya ceha ca//


자신을 억제하고 타인을 이익되게 하는 자애로운 마음은 (사람이 행해야 할) 法道이다. 그것은 今世에도 後世에도 果報의 씨앗이다.


17-2) 大聖說二業 思與從思生 是業別相中 種種分別說
위대한 성인께서는 두가지 업을 설하셨는데 <생각의 업>과 <생각이 끝난 후의 업>이다. 이 業 개개의 모습 속에서 갖가지로 구분하여 설하셨다.


17-2) cetan  cetayitv  ca karmokta  paramar i  /
     tasy nekavidho bheda  karma a  parik rtita //


최고의 聖人은 <생각하는 業>과 <생각한 후의 業>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 業에는 갖가지 구별이 있다고 宣言되었다.


17-3) 佛所說思者 所謂意業是 所從思生者 卽是身口業
부처님께서 설하신 <생각>이란 것은 이른바 意業이고 <생각으로부터 生한 것>은 바로 身業과 口業이다.


17-3) tatra yaccetanetyukta  karma tanm nasa  sm tam/
     cetayitv  ca yatt kta  tattu k yikav cikam//


그 중에서 <생각>이라고 설한 業, 그것은 意(業)에 속한다고 전해진다. 또 <생각한 후>라고 설한 것은 身(業)과 口(業)에 속한다.


17-4) 身業及口業 作與無作業 如是四事中 亦善亦不善
17-5) 從用生福德 罪生亦如是 及思爲七法 能了諸業相
①身業과 ②口業과 ③作業과 ④無作業의 네가지 중에는 善한 것도 있고 善하지 못한 것도 있다.  ⑤그 작용에서 생한 복덕과 ⑥죄가 생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며 ⑦또 생각까지 일곱가지 法이 되는데 (이것들이) 능히 모든 業의 모습을 망라한다.


17-4) v gvi pando 'viratayo y  c vij aptisa j it  /
     avij aptaya ev ny   sm t  viratayastath //
17-5) paribhog nvaya  pu yamapu ya  ca tath vidham/
     cetan  ceti saptaite dharm   karm  jan   sm t  //


①말과 ②(신체의) 동작과 ③(번뇌에서) 아직 떠나지 않은 無表라고 불리는 것과 또, ④같은 종류로 (번뇌에서) 떠나 있는 다른 갖가지 無表라고 전해진다. 또 ⑤受用과 결합된 福, ⑥同種의 非福, ⑦생각, 이런 일곱가지가 업을 나타낸다고 전해진다.


17-6) 業住至受報 是業卽爲常 若滅卽無業 云何生果報
業이 (그대로) 머물러서 果報를 받는 것이라면 이 업은 常住하는 것이 된다. (반대로) 소멸한다면 業이 없어진 것이니 어떻게 果報를 생하겠는가?


17-6) ti  aty p kak l ccetkarma tannityat miy t/
     niruddha  cenniruddha  satki  phala  janayi yati//


(만일) 業이 익을 때까지 존속한다면 그것은 常住하는 것이 되리라. (반대로 업이) 소멸해 버린다면 소멸한 존재가 어떻게 과보를 생하겠는가?


17-7) 如芽等相續 皆從種子生 從是而生果 離種無相續
싹 따위가 상속하는 것이 모두 씨앗에서 생기는 것 같이 그것(싹)으로부터 결실이 생기고 씨앗 없이는 상속도 없다.


17-7) yo ' kuraprabh tirb j tsa t no 'bhipravartate/
     tata  phalam te b j tsa ca n bhipravartate//


싹에서 시작하는 연속(상속)은 씨앗으로부터 출현한다. 그것(=싹)으로부터 열매가 (출현한다). 씨앗이 없다면 그것(=연속체)은 출현하지 않는다.


17-8) 種有相續 從相續有果 先種後有果 不斷亦不常
종자(씨앗)로부터 상속이 있고 상속으로부터 果實이 있다. 종자가 먼저 있고 다음에 과실이 있으므로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


17-8) b j cca yasm tsa t na  sa t n cca phalodbhava /
     b jap rva  phala  tasm nnocchinna  n pi    vatam//


종자로부터 연속이, 또 그 연속으로부터 果實이 生起한다. 종자는 果實에 先行하기 때문에 (종자와 과실의 관계가)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


17-9) 如是從初心 心法相續生 從是而生果 離心無相續
이처럼 初心으로부터 心法이 상속하여 생한다. 그것으로부터 결과가 생하고 마음을 떠나서는 상속도 없다.


17-9) yastasm ccittasa t na cetaso 'bhipravartate/
     tata  phalam te citt tsa ca n bhipravartate//


무릇 마음의 연속(상속)은 그 마음에서 나타난다. 거기서 結實이 (나타난다). 그것(=마음의 연속)은 마음을 떠나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17-10) 從心有相續 從相續有果 先業後有果 不斷亦不常
마음으로부터 상속이 존재하고 상속으로부터 결과가 존재한다. 업이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그 과보가 있는 것이기에 (업과 과보의 관계가)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


17-10) citt cca yasm tsa t na  sa t n cca phalodbhaba /
      karmap rva  phala  tasm nnocchinna  n pi    vatm//


그래서 마음으로부터 연속(상속)이 또 연속으로부터 결과가 生起한다. 업이 선행하고 결과(과보)가 있는 것이므로, 그러므로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


17-11) 能成福德者 是十白業道 二世五欲樂 卽是白業報
능히 복덕을 성취시키는 것은 十白業道이다. 二世의 五欲樂이 바로 白業의 果報이다.


17-11) dharmasya s dhanop y    ukl   karmapath  da a/
      phala  k magu    pa ca dharmasya pretya ceha ca//


十種의 희고 꺠끗한 業의 길(十白業道)은 理法을 달성하는 수단이다. 다섯개의 欲樂은 금세와 후세에 있어서 理法의 과보이다.


17-12) 若如汝分別 其過則甚多 是故汝所說 於義則不然
만일 그대의 분별과 같다면 그 잘못은 매우 크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한 바는 그 뜻에 있어서 옳지 못하다.


17-12) bahava ca mah nta ca do    syurapi kalpan /
      yadye   tena naivai   kalpan tropapadyate//


만일 이와 같은 분별이 존재한다면 엄청난 잘못이 있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런 분별은 여기서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17-13) 今當復更說 順業果報義 諸佛 支佛 賢聖所稱歎
이제 또 다시 업에 순응하는 과보의 의미를 설명하리라. (그것은) 모든 부처님들과 벽지불들, 또 賢聖들께서 칭찬하시고 찬탄하신 것이다.


17-13) im   puna  pravak y mi kalpan   y tra yojyate/
      buddhai  pratyekabuddhai ca  r vakai c nuvar it m//


다시 모든 부처님들과 벽지불들과 성문들에 의해 칭송되었고 이 경우에 적합한 사고방식을 나는 (이제) 설명하리라.


17-14) 不失法如券 業如負財物 此性則無記 分別有四種
<없어지지 않는 法>은 채권과 같고 業은 빚진 財物과 같다. 그것의 성품은 無記性이고 분별하자면 네 종류다.


17-14) pattra  yath  'vipra   astath   amiva karma ca/
      caturvidho dh tuta  sa prak ty  'vy k ta ca sa //


예를 들어 <없어지지 않는 것>은 債券과 같고 행위는 負債와 같은 것이다. 그것 (=없어지지 않는 것)은 界로 말하면 네 종류이며 본성으로 보면 無記性이다.


17-15) 見諦所不斷 但思惟所斷 以是不失法 諸業有果報
四諦의 관찰(見道)에 의해 끊는 바가 아니고 오직 思惟修(修道)로 끊어진다. 이런 不失法으로 모든 業이 그 과보를 갖게 된다.


17-15) prah  ato na praheyo bh van heya eva v /
      tasm davipra   ena j yate karma    phalam//


(見道의 四諦 관찰을 통한 끊음인) 斷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실로 修道에 의해서 끊어진다. 그러므로 없어지지 않는 것(=不失法)에 의해 갖가지 업의 과보가 生하는 것이다.


17-16) 若見諦所斷 而業至相似 則得破業等 如是之過咎
만일 四諦의 관찰(見道)에 의해 끊어져도 업이 비슷하게 이르른다면 업을 破하는 따위의 그런 허물이 있게 된다.


17-16) prah  ata  praheya  sy tkarma a  sa krame a v /
      yadi do    prasajyera statra karmavadh daya //


만일 (그 不失法이 見道의) 斷에 의해 혹은 業의 移轉에 의해 끊어진다면 거기서는 業의 파괴라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17-17) 一切諸行業 相似不相似 一界初受身 爾時報獨生
일체의 모든 행업은 비슷하건 비슷하지 않건 하나의 계에서 처음 몸을 받는 그 때에 그 과보가 홀로 생한다.


17-17) sarve    visabh g n   sabh g n   ca karma  m/
      pratisa dhau sadh t n meka utpadyate tu sa //


同類 또는 同類가 아닌 같은 계의 모든 業들이 결합할 때에는 그것(不失法) 하나만이 발생한다.


17-18) 如是二種業 現世受果報 或言受報已 而業猶故在
이처럼 두가지의 業은 현세에 그 果報를 받는다. 혹은 과보를 받고 나서도 그 업은 아직 존속한다고도 말한다.


17-18) karma a  karma o d   e dharma utpadyate tu sa /
      dviprak rasya sarvasya vipakve 'pi ca ti  hati//


두가지 종류의 모든 業 하나 하나의 경우 현재 눈 앞에서 그 법이 生하기도 하지만 또는 (과보가) 익을 때(까지) 존속하기도 한다.


17-19) 若度果已滅 若死已而滅 於是中分別 有漏及無漏
혹은 과보를 건너고 나서 소멸하거나 혹은 죽고 나서 소멸한다. 거기서 有漏와 無漏를 분별한다.


17-19) phalavyatikram dv  sa mara  dv  nirudhyate/
      an srava  s srava  vibh ga  tatra lak ayet//


그것(불실법)은 과보를 초월하고 나서 혹은 죽고 나서 소멸된다. 거기서 有漏, 無漏의 구별이 認知될 것이다.


17-20) 雖空亦不斷 雖有亦不常 業果報不失 是名佛所說
비록 공하지만 단멸이 아니고 비록 존재하지만 상주는 아니다. 업과 그 과보가 잃어지지 않음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17-20)   nyat  ca na coccheda  sa s ra ca na    vatam/
      karma o 'vipra   a ca dharmo buddhena de ita //


부처에 의해 교시된 業의 不失이라는 法은 空性이나 斷滅이 아니며 윤회하나 常住가 아니다.


17-21) 諸業本不生 以無定性故 諸業亦不滅 以其不生故
모든 業은 그 결정된 성품이 없기 때문에 본래 生하지 않는다. 모든 업은 생하는 것이 아니기에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17-21) karma notpadyate kasm n ni svabh va  yatastata /
      yasm cca tadanutpanna  na tasm dvipra a yati//


무엇 때문에 업은 生하지 않는 것일까? 왜냐하면 自性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발생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소멸하지도 않는다.


17-22) 若業有性者 是則名爲常 不作亦名業 常則不可作
만일 業이 그 성품이 있다면 그것은 常住한다는 말이 되고 짓지 않은 것도 역시 업이라고 부르게 된다. 상주하는 것이라면 지어질 수 없다.


17-22) karma svabh vata cetsy cch  vata  sy dasa  ayam/
      ak ta  ca bhavetkarma kriyate na hi  a vatam//


만일 業이 自性(실체)을 갖는 존재라고 한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것은) 常住하리라. 또 業은 지어지지 않는 것이 되리라. 왜냐하면 常住하는 것은 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17-23) 若有不作業 不作而有罪 不斷於梵行 而有不淨過
만일 짓지도 않은 業이 존재한다면 짓지도 않고 罪가 있게 되고 梵行을 끊지 않았는데도 不淨하게 되는 오류에 빠진다.


17-23) ak t bhy gamabhaya  sy tkarm k taka  yadi/
      abrahmacaryav sa ca do astatra prasajyate//


만일 지어지지도 않은 業이 존재한다면 짓지도 않았는데 (과보를) 받는다는 두려움이 있게 되리라. 그리고 그 경우에는 梵行에 머물지 않는다는 오류에 떨어지게 된다.


17-24) 是則破一切 世間語言法 作罪及作福 亦無有差別
그것은 세간의 모든 언어법칙을 파괴하게 된다. 죄를 짓거나 복을 짓는 것도 역시 차별이 없어진다.


17-24) vyavah r  virudhyante sarva eva na sa  ayah/
      pu yap pak tornaiva pravibh ga ca yujyate//


(그렇다면) 일체의 언어관습과 모순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복덕을 행하는 자와 죄악을 행하는 자를 구별하는 것도 실로 불합리하게 된다.


17-25) 若言業決定 而自有性者 受於果報已 而應更復受
만일 업이 결정적이어서 그 자성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과보를 받고 나서 다시 또 받아야 하리라.


17-25) tadvipakvavip ka  ca punareva vipak yati/
      karma vyavasthita  yasm ttasm tsv bh vika  yadi//


만일 業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그 때문에 自性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 익은 과보(異熟)가 그야말로 다시 익게 될 것이라는 꼴이 된다.


17-26) 若諸世間業 從於煩惱生 是煩惱非實 業當何有實
만일 세간의 갖가지 業들이 번뇌로부터 생기는 것이라면 이 번뇌는 참된 것이 아닌데 업이 어떻게 참될 수 있겠느냐?


17-26) karma kle  tmaka  ceda  te ca kle   na tattvata /
      na cette tattvata  kle    karma sy ttattvata  katham//


또 이 業은 번뇌를 본질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갖가지 번뇌들은 진실된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런 갖가지 번뇌들이 진실되게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업이 진실되게 존재하겠느냐?


17-27) 諸煩惱及業 是說身因緣 煩惱諸業空 何況於諸身
모든 번뇌와 업은 몸뚱이의 인연이다. 번뇌와 모든 業이 空한데 하물며 모든 몸뚱이는 어떠하겠느냐?


17-27) karma kle a ca deh n   pratyay   samud h t  /
      karma kle a ca te   ny  yadi dehe u k  kath //


業과 번뇌들은 身體들의 緣들이라고 설해지고 있다. 만일 그 업과 번뇌들이 空하다면 신체들에 있어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17-28) 無明之所蔽 愛結之所縛 而於本作者 不卽亦不異
무명에 덮이고 渴愛에 묶여 있고 본래의 짓던 놈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17-28) avidy niv to jantust    sa yojana ca sa /
      sa bhokt  sa ca na karturanyo na ca sa eva sa //


살아 있는 놈은 無明에 덮이고 渴愛에 매여 있다. 그는 (업의 과보를) 받는 者이다. 또 (업을) 지었던 者와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그것(=같은 것)도 아니다.


17-29) 業不從緣生 不從非緣生 是故則無有 能起於業者
業은 緣에서 生하는 것도 아니고 緣 아닌 것에서 생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능히 업을 일으키는 者는 없다.


17-29) na pratyayasamutpanna  n pratyayasamutthitam/
      asti yasm dida  karma tasm tkart pi n styata //


이 業은 緣에서 生起(緣起)하는 것도 아니고 非緣에서 생기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때문에 업을 짓는 주체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17-30) 無業無作者 何有業生果 若其無有果 何有受果者
業도 없고 짓는 자도 없는데 어떻게 업이 (그) 과보를 生하겠는가? 만일 그렇게 과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과보를 받는 자가 존재하겠는가?


17-30) karma cenn sti kart  ca kuta  sy tkarmaja  phalam/
      asatyatha phale bhokt  kuta eva bhavi yati//


만일 업도 업을 짓는 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業에서 生한 과보는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더우기 과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보를) 받는 者는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17-31) 如世尊神通 所作變化人 如是變化人 復變作化人
17-32) 如初變化人 是名爲作者 變化人所作 是則名爲業
마치 세존의 신통력으로 지어진 변화인, 그런 변화인이 다시 변화인을 지어내는 것과 같다.
마치 처음의 변화인은 짓는 者라고 부르고 그 변화인이 지은 것은 바로 業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17-31) yath  nirmitaka    st  nirmim ta  ddhisa pad /
      nirmito nirmim t nya  sa ca nirmitaka  puna //
17-32) tath  nirmitak k ra  kart  yatkarma tatk tam/
      tadyath  nirmiten nyo nirmito nirmitastath //


마치 신통력을 갖추고 있는 敎主(부처)께서 變化人(=신통에 의해 나타난 허깨비)을 幻出해 내고 그 변화인이 다시 다른 변화인을 환출해 내는 것처럼,
그것처럼 업의 주체는 변화인의 姿態를 하고 있다. (그의) 행위는 지어진 것이다. 마치 다른 변화인이 변화인에 의해 幻出되는 것처럼.


17-33) 諸煩惱及業 作者及果報 皆如幻與夢 如炎亦如嚮
모든 煩惱와 業, 짓는 者와 果報는 모두 幻想과 같고 꿈과 같으며 아지랑이와 같고 메아리와 같다.


17-33) kle    karm  i deh  ca kart ra ca phal ni ca/
      gandharvanagar k r  mar cisvapnasa nibh  //


煩惱들과 業들과 身體들 또 業의 主體들과 果報들도 신기루의 姿態를 띄고 있으며 아지랑이나 꿈과 같다.

 


第18 觀法品(12偈) 法에 대한 관찰


 tmapar k   n m   ada ama  prakara am
(12게) 아뜨만(自我)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8장


18-1) 若我是五陰 我卽爲生滅 若我異五陰 則非五陰相
만일 自我가 五陰이라면 자아는 生滅하게 되리라. 만일 자아가 오음과 다르다면 (자아는) 오음의 相(을 띄는 것)이 아닐 것이다.


18-1)  tm  skandh  yadi bhavedudayavyayabh gbhavet/
     skandhebhyo 'nyo yadi bhavedbhavedaskandhalak a a //


만일 自我(아뜨만)가 五蘊이라면 (자아는) 生滅을 가진 것으로 되리라. 만일 (자아가) 오온과 다르다면 (자아는) 오온의 모습(相)이 아닐 것이다.


18-2) 若無有我者 何得有我所 滅我我所故 名得無我智
만일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나의 것>이 존재하겠는가? <나>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지므로 無我의 지혜를 얻었다고 말한다.


18-2)  tmanyasati c tm ya  kuta eva bhavi yati/
     nirmamo niraha k ra   am d tm tman nayo //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아에 속한 것>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자아와 이기심이 소멸함으로 인해 <나의 것>이라는 관념도, <自意識>도 사라진다.


18-3) 得無我智者 是則名實觀 得無我智者 是人爲希有
無我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은 바로 진실을 보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無我의 지혜를 터득한 者, 그런 사람은 드믈다.


18-3) nirmamo niraha k ro ya ca so 'pi na vidyate/
     nirmama  niraha k ra  ya  pa yati na pa yati//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떠나고 <自意識>이 사라진 그런 者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것>이라는 관념을 떠나고 <나>라는 관념을 떠난 것을 보는 자는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18-4) 內外我我所 盡滅無有故 諸受卽爲滅 受滅則身滅
안이건 바깥이건 <나>와 <나의 것>이 모두 사라져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取가 사라지게 되고 取가 사라지면 몸도 사라진다.


18-4) mametyahamiti k   e bahirdh dhy tmameva ca/
     nirudhyata up d na  tatk ay jjanmana  k aya //


바깥에 관해서도 자신에 관해서도 <나의 것>이라든가 <나>라는 관념이 소멸할 때에 집착(取)이 억제된다. 그런 소멸로 인해 (다시) 태어남이 소멸한다.


18-5) 業煩惱滅故 名之爲解脫 業煩惱非實 入空戱論滅
업과 번뇌가 소멸하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부른다. 업과 번뇌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며 空에 들어가면 戱論이 소멸한다.


18-5) karmakle ak ay nmok a  karmakle   vikalpata /
     te prapa c tprapa castu   nyat y   nirudhyate//


업과 번뇌가 사라지기 때문에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에서…(일어나고), 그것(=분별)은 희론에서…(일어난다), 그러나 희론은 空性에서 사라진다.


18-6) 諸佛或說我 或說於無我 諸法實相中 無我無非我
모든 부처님께서는 때로는 <自我>를 설하셨고 때로는 <無我>를 설하셨다. 諸法의 實相에서 보면 <自我>도 없고 <無我>도 아니다.


18-6)  tmetyapi praj apitaman tmetyapi de itam/
     buddhairn tm  na c n tm  ka cidityapi de itam//


모든 부처님들에 의해 <自我(가 있다)>라고도 假說되었고 <無我>라고도 敎示되었으며 <自我이거나 無我인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도 敎示되었다.


18-7) 諸法實相者 心行言語斷 無生亦無滅 寂滅如涅槃
諸法의 實相은 마음의 작용이나 언어가 끊어져 있다.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寂滅하여 열반과 같다.


18-7) niv ttamabhidh tavya  niv tte cittagocare/
     anutpann niruddh  hi nirv  amiva dharmat //


마음이 작용하는 영역이 사라지면 언어의 대상이 사라진다. 실로 발생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法性은 열반과 마찬가지다.


18-8) 一切實非實 亦實亦非實 非實非非實 是名諸佛法
일체는 진실이다,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 진실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것을 모든 부처님의 法이라고 부른다.


18-8) sarva  tathya  na v  tathya  tathya  c tathyameva ca/
     naiv tathya  naiva tathyametadbuddh nu  sanam//


<일체는 진실이다.> 혹은 <(일체는) 진실이 아니다.>, <(일체는) 진실이며 진실이 아니다.> 또 <(일체는) 진실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교설이다.


18-9) 自知不隨他 寂滅無戱論 無異無分別 是則名實相
스스로 알며 다른 것에 끄달리지 않는다. 寂滅하고 희론이 없으며 다르지 않고 분별도 없다. 이것을 實相이라고 부른다.


18-9) aparapratyaya    nta  prapa cairaprapa citam/
     nirvikalpaman n rthametattattvasya lak a am//


다른 緣에 의해서가 아니며, 고요하고, 희론들에 의해 희론되지 않고, 무분별이며, 다양하지도 않은 것이 진리의 相이다.


18-10) 若法從緣生 不卽不異因 是故名實相 不斷亦不常
만일 사물(法)이 (因)緣에서 生한다면 (그것은) 因(緣)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實相은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18-10) prat tya yadyadbhavati na hi t vattadeva tat/
      na c nyadapi tasm nnocchinna  n pi    vatam//


어떤 것이 어떤 것에 緣하여 존재하는 그 때에는 그것이 그대로 그것인 것은 아니며 또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양자는) 단절된 것도 아니고 항상된 것도 아니다.


18-11) 不一亦不異 不常亦不斷 是名諸世尊 敎化甘露味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항상되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않다. 이것이 모든 세존들께서 교화하신 감로의 맛이다.


18-11) anek rthaman n rthamanucchedama   vatam/
      etattallokan th n   buddh n      an m tam//


동일한 의미도 아니고 다른 의미도 아니며 단절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다. 이것은 세간의 救護者이신 부처님(깨달은 분)들의 甘露의 가르침이다.


18-12) 若佛不出世 佛法已滅盡 諸 支佛智 從於遠離生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 佛法이 이미 소멸해서 없어졌을 때 모든 벽지불들의 지혜가 遠離行으로부터 生한다.


18-12) sa buddh n manutp de  r vak     puna  k aye/
      j  na  pratyekabuddh n masa sarg tpravartate//


부처님(완전히 깨달은 분)들께서 태어나지 않을 때에, 또 聲聞들이 사라져 버렸을 때에 獨覺들의 지혜가 遠離行으로부터 나타난다.

 


第19 觀時品(6偈) 時間에 대한 관찰


k lapar k   n maikonavi  atitama  prakara am(6게)
시간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19장


19-1) 若因過去時 有未來現在 未來及現在 應在過去時
만일 과거의 시간을 因하여 미래와 현재가 존재한다면 미래와 현재는 응당 과거의 시간에 존재해야 하리라.


19-1) pratyutpanno 'n gata ca yadyat tamapek ya hi/
     pratyutpanno 'n gata ca k le 't te bhavi yata //


만일 현재와 미래가 과거에 의존하고 있다면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 되리라.


19-2) 若過去時中 無未來現在 未來現在時 云何因過去
만일 과거의 시간 속에 미래와 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래와 현재의 시간이 어떻게 과거의 因이 되겠는가?


19-2) praryutpanno 'n gata ca na stastatra punaryadi/
     pratyutpanno 'n gata ca sy t   kathamapek ya tam//


만일 또 현재와 미래가 그 (과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그 (과거)에 의존하여 존재하겠는가?


19-3) 不因過去時 則無未來時 亦無現在時 是故無二時
과거의 시간을 因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현재의 시간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兩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19-3) anapek ya puna  siddnirn t ta  vidyate tayo /
     pratyutpanno 'n gata ca tasm tk lo na vidyate//


게다가 과거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그 양자(현재와 미래)의 성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재와 미래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19-4) 以如是義故 則知餘二時 上中下一異 是等法皆無
그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나머지 두가지 시간대도 안다. 上中下나 一異 등의 法도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19-4) etenaiv va i tau dvau krame a parivartakau/
     uttam dhamamadhy d nekatv d   ca lak ayet//


이런 절차에 의해 남은 두가지 (시간대)가 展開가 있다. 또 上과 下와 中 따위와 同一性 따위(一異)를 관찰할 것이다.


19-5) 時住不可得 時去亦파得 時若不可得 云何說時相
시간이 머무르는 것은 얻을 수 없고 시간이 흘러 가는 것도 역시 얻을 수 없다. 시간이 만일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시간의 相을 說하겠는가?


19-5) n sthito g hyate k la  sthita  k lo na vidyate/
     yo g hyet grh ta ca k la  praj apyate katham//


머물러 있지 않은 시간은 포착되지 않는다. 또 이미 머물러 있는 시간이 포착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포착되지 않는 시간이 어떻게 파악되겠는가?


19-6) 因物故有時 離物何有時 物尙無所有 何況當於時
사물을 因하여 시간이 존재하니 사물을 떠나서 어떻게 시간이 존재하겠는가? 사물도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시간에 있어서야 어떠하겠느냐?


19-6) bh va  prat tya k la cetk lo bh v d te kuta /
     na ca ka cana bh vo 'sti kuta  k lo bhavi yati//


시간이 사물을 緣하여 존재한다면 사물을 떠나서 시간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그리고 어떠한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시간이 존재하겠는가?

 


第20 觀因果品(24偈) 因果關係에 대한 관찰


s magr par k   n ma vi  atitama  prakara am
(24게) 集合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0장


20-1) 若衆緣和合 而有果生者 和合中已有 何須和合生
만일 여러가지 인연이 화합하여 결과가 발생한다면 화합중에 이미 존재하는데 어떻게 화합힐 필요가 있겠느냐?


20-1) heto ca pratyay n   ca s magry  j yate yadi/
     phalamasti ca s magry   s magry  j yate katham//


만일 원인과 緣들의 결합에 의해 (결과가) 생하고 또 그 결과는 (이미) 결합에 존재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결합에 의해 生하겠는가?


20-2) 若衆緣和合 是中無果者 云何從衆緣 和合而果生
만일 여러가지 인연의 화합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러가지 인연들로부터 화합하여 발생하겠는가?


20-2) heto ca pratyay n   ca s magry  j yate yadi/
     phala  n sti ca s magry   s magry  j yate katham//


만일 원인과 緣들의 결합에 의해 (결과가) 발생하고 그 결합에는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어떻게 결합에 의해 발생하겠는가?


20-3) 若衆緣和合 是中有果者 和合中應有 而實不可得
만일 여러가지 인연의 화합 가운데 결과가 존재한다면 화합 가운데 존재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거기서) 얻을 수 없다.


20-3) heto ca pratyay n   ca s magry masti cetphalam/
     g hyeta nanu s magry   s magry   ca na g hyate//


만일 원인과 緣들의 결합에 의해 결과가 존재하는 것이라면 (결과는) 결합에서 파악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결합에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20-4) 若衆緣和合 是中無果者 是則衆因緣 與非因緣同
만일 여러가지 인연이 화합한 가운데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이나 緣들은 인연이 아닌 것들과 마찬가지가 된다.


20-4) heto ca pratyay n   ca s magry   n sti cetphalam/
     hetava  pratyay  ca syurahetupratyayai  sam  //


만일 원인과 緣들의 결합에 의해서 결과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원인들과 緣들은 원인이나 緣이 아닌 것들과 마찬가지인 꼴이 되리라.


20-5) 若因與果因 作因已而滅 是因有二體 一與一則滅
만일 원인 결과에 주는 원인이고 (그렇게) 원인을 짓고 나서 소멸하는 것이라면 그런 원인은 그 실체가 둘이 되니 하나는 주는 것이고 하나는 소멸하는 것이다.


20-5) hetuka  phalasya dattv  yadi heturnirudhyate/
     yaddatta  yanniruddha  ca hetor tmadvaya  bhavet//


만일 원인이 <원인이 되는 것>을 결과에 주고서 소멸하는 것이라면 <준 것>과 <소멸한 것>이라고 하는, 그 실체가 두개인 원인이 존재하게 되리라.


20-6) 若因不與果 作因已而滅 因滅而果生 是果則無因
만일 원인이 (원인을) 결과에 주지 않고 원인 노릇을 하고 소멸하는 것이라면 원인이 소멸하고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니 이런 결과는 원인 없는 것이다.


20-6) hetu  phalasy dattv  ca yadi heturnirudhyate/
     hetau niruddhe j ta  tatphalam hetuka  bhavet//


만일 원인이 원인을 결과에 주지 않고서 소멸된다면 원인이 이미 소멸한 때에 생한 그 결과는 원인 없는(無因의) 것이 될 것이다.


20-7) 若衆緣合時 而有果生者 生者及可生 則爲一時共
만일 여러가지 인연이 화합할 때에 결과의 발생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발생케 한 놈이나 발생한 놈이 한 순간에 함께 한다는 꼴이 된다.


20-7) phala  sahaiva s magry  yadi pr durbhavetpuna /
     ekak lau prasajyete janako ya ca janyate//


더우기 만일 결과가 결합과 동시에 출현하는 것이라면 발생케 하는 것과 발생된 것이 같은 시간에 존재한다는 꼴이 된다.


20-8) 若先有果生 而後衆緣合 此卽離因緣 名爲無因果
만일 먼저 결과의 발생이 존재하고 나중에 여러가지 인연이 결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연을 떠난 것으로 無因의 결과라고 부른다.


20-8) p rvameva ca s magry   phala  pr durbhavetyadi/
     hetupratyayanirmukta  phala ahetuka  bhavet//


또 만일 결과가 결합에 선행하여 출현하는 것이라면 그 결과는 원인과 緣을 벗어나서 원인 없는 것이 될 것이다.


20-9) 若因變爲果 因卽至於果 是則前生因 生已而復生
만일 원인이 변하여 결과가 된다면 원인은 결과에 도달한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앞에서 발생한 원인이 발생하고 나서 다시 발생한다는 말이 된다.


20-9) niruddhe cetphala  hetau heto  sa krama a  bhavet/
     p rvaj tasya heto ca punarjanma prasajyate//


만일 원인이 소멸할 때 결과가 있다면 원인은 移行하는 것이 되리라. 또 먼저 발생했던 원인이 다시 출현하는 꼴이 된다.


20-10) 云何因滅失 而能生於果 又若因在果 云何因生果
어떻게 원인이 소멸하여 소실되었는데 능히 결과를 生하겠는가? 또 만일 원인이  결과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원인이 결과를 生하겠는가?


20-10) janayetphalamutpanna  niruddho 'sta gata  katham/
      ti  hannapi katha  hetu  phalena janayedv ta //


이미 滅하여 상실된 것이 어떻게 이미 발생해 있는 결과를 발생시키겠는가? 결과에 가려진 상태로 머물러 있는 원인도 역시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키겠는가?


20-11) 若因遍有果 更生何等果 因見不見果 是二俱不生
만일 원인이 결과에 편재해 있다면 다시 어떤 결과들을 生하겠는가? 원인은 결과를 만나건(見) 안 만나건(不見) 두 경우 모두 (결과를) 발생시키지 못한다.


20-11) ath v ta  phalen sau katamajjanayetphalam/
      na hyad   v  v  d   v  v  heturjanayate phalam//


그런데 결과에 덮이지 않은 그것(원인)이 어떻게 결과를 發生시키겠는가? 왜냐하면 원인은 (결과를) 보건 보지 않건 결과를 발생시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20-12) 若言過去因 而於過去果 未來現在果 是則終不合
或 과거의 因을 말하지만 과거의 결과와 미래 및 현재의 결과에 대해 결코 결합하지 않는다.


20-12) n t tasya hyat tena phalasya saha hetun /
      n j tena na j tena sa gatirj tu vidyate//


과거의 결과가 과거의 원인과 함께하지 않는다. (과거의 결과가) 아직 생하지 않은 것(미래)과 이미 생한 것(현재)과 결합함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0-13) 若言未來因 而於未來果 現在過去果 是則終不合
或 미래의 因을 말하지만 미래의 결과와 현재 및 과거의 결과에 대해 결코 결합하지 않는다.


20-14) n j tasya hi j tena phalasya saha hetun /
      n j tena na na tena sa gatirj tu vidyate//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가 이미 생한 원인과 함께하지 않는다. (아직 생하지 않은 결과가) 아직 생하지 않은 것과 이미 멸한 것과 결합함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0-14) 若言現在因 而於現在果 未來過去果 是則終不合
或 현재의 因을 말하지만 현재의 결과와 미래 및 과거의 결과에 대해 결코 결합하지 않는다.


20-13) na j tasya hyaj tena phalasya saha hetun /
      n t tena na j tena sa gatirj tu vidyate//


이미 생한 결과는 아직 생하지 않은 원인과 함께하지 않는다. (이미 生한 결과가) 과거의 것과 또 이미 생한 것과 결합함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0-15) 若不和合者 因何能生果 若有和合者 因何能生果
만일 화합하지 않는다면 因이 어떻게 결과를 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화합한 것이라면 因이 어떻게 결과를 生할 수 있겠는가?


20-15) asaty   sa gatau hetu  katha  janayate phalam/
      saty   v  sa gatau hetu  katha  janayate phalam//


서로 결합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어떻게 원인이 결과를 생하겠는가? 또 서로 결합한 것이 존재하는 경우에 어떻게 원인이 결과를 생하게는가?


20-16) 若因空無果 因何能生果 若因不空果 因何能生果
만일 因이 空하여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因이 어떻게 결과를 생할 수 있겠는가? 만일 因이 空하지 않은 결과(가 존재한다)라면 因이 어떻게 결과를 生할 수 있겠는가?


20-16) hetu  phalena   nya cetkatha  janayate phalam/
      hetu  phalen   nya cetkatha  janayate phalam//


만일 원인이 결과에 대해서 空(虛)하다면 어떻게 결과를 생하겠는가? 만일 원인이 결과에 대해 空하지 않다면 어떻게 결과를 생하겠는가?


20-17) 果不空不生 果不空不滅 以果不空故 不生亦不滅
결과가 空하지 않다면 不生이다. 결과가 空하지 않다면 不滅이다. 결과가 空하지 않으므로 不生이기도 하고 不滅이기도 하다.


20-17) phala  notpatsyate '  nyama  nya  na nirotsyate/
      aniruddhamanutpannama  nya  tadbhavi yati//


空하지 않은 결과는 발생하지 않으리라. 空하지 않은 것은 소멸하지 않으리라. 空하지 않은 그것은 不滅이며 不生으로 되리라.


20-18) 果空故不生 果空故不滅 以果是空故 不生亦不滅
결과는 空하기 때문에 不生이고 결과는 空하기 때문에 不滅이다. 결과가 空하기 때문에 不生이기도 하고 不滅이기도 하다.


20-18) kathamutpatsyate   nya  katha    nya  nirotsyate/
        nyamapyaniruddha  tadanutpanna  prasajyate//


空한 것이 어떻게 생하겠는가? 空한 것이 어떻게 멸하겠는가? 空한 그것은 不滅이기도 하고 不生이라는 오류에 빠진다.


20-19) 因果是一者 是事從不然 因果若異者 是事亦不然
원인과 결과가 하나라는 것 그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것 그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20-19) heto  phalasya caikatva  na hi j t papadyate//
      heto  phalasya c nyatva  na hi j t papadyate//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는 것도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것도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0-20) 若因果是一 生及所生一 若因果是異 因則同非因
만일 원인과 결과가 하나라면 발생케 하는 것과 발생된 것이 하나가 된다. 만일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원인은 원인 아닌 것과 같은 꼴이 된다.


20-20) ekatve phalahetvo  sy daikya  janakajanyayo /
      p thaktve phalahetvo  sy ttulyo heturahetun //


원인과 결과가 하나라면 발생하는 것과 발생될 것이 일치하리라. 원인과 결과가 별개라면 원인은 원인 아닌 것과 동등한 것이 된다.


20-21) 若果定有性 因爲何所生 若果定無性 因爲何所生
만일 결과가 결정적으로 그 성품이 있다면 (결과는) 원인이 무엇을 위해 생한 것이겠는가? 만일 결과가 결정적으로 그 성품이 없다면 (결과는) 원인이 무엇을 위해 생한 것이겠는가?


20-21) phala  svabh vasadbh ta  ki  heturjanayi yati/
      phala  svavbh v sadbh ta  ki  heturjanayi yati//


결과가 실체로서 실재한다면 원인은 무엇을 생하게 하겠는가? 결과가 실체로서 실재하지 않는다면 원인은 무엇을 生하게 하겠는가?


20-22) 因不生果者 則無有因相 若無有因相 誰能有是果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 원인이라면 원인의 相을 갖지 않는다. 만일 원인의 相을 갖지 않는다면 능히 누가 그 결과를 갖겠는가?


20-22) na c janayam nasya hetutvamupapadyate/
      hetutv nupapattau ca phala  kasya bhavi yati//


또 지금 발생하고 있는 중이 아닌 것에서 원인인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또 원인이 되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결과가 존재하겠는가?


20-23) 若從衆因緣 而有和合生 和合者不生 云何能生果
만일 여러가지 인연으로부터 화합이 존재하여 발생한다면 화합한 것은 발생하지 않는데 어떻게 능히 결과를 생하겠는가?


20-23) na ca pratyayahet n miyam tm nam tman /
      y  s magr  janayate s  katha  janayetphalam//


緣과 因들의 총체인 이것은 스스로緣과 因들의 결합이 스스로 자신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키겠는가?


20-24) 是故果不從 緣合不合生 若無有果者 何處有合法
그러므로 결과는 緣과 결합하거나 결합하지 않고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결합이라는 法이 있겠느냐?


20-24) na s magr k ta  phala  n s magr k ta  phalam/
      asti pratyayas magr  kuta eva phala  vin //


(인연들의) 총체(=결합)에 의해 지어진 결과는 없다. (인연들의) 총체가 아닌 것에 의해 지어진 결과는 없다. 결과가 전혀 없는데 연의 총체란 것은 어디에 존재하겠는가?

 


第21 觀成壞品(20偈) 생성과 괴멸에 대한 관찰


sa bhavavibhavapar k   n maikavi  atitama  prakara am
생성과 괴멸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1장(21게)

 

21-1) 離成及共成 是中無有壞 離壞及共壞 是中亦無成
生成을 떠나건 생성과 함께하건 그 중에 壞滅은 없다. 괴멸을 떠나건 괴멸과 함께하건 그 중에도 역시 생성은 없다.


21-1) vin  v  saha v  n sti vibhava  sa bhavena vai/
     vin  v  saha v  n sti sa bhavo vibhavena vai//


괴멸은 생성을 떠나서건 함께하건 결코 存在하지 않는다. 생성은 괴멸을 떠나서건 함께하건 결코 存在하지 않는다.


21-2) 若離於成者 云何而有壞 如離生有死 是事則不然
만일 생성을 떠난다면 어떻게 괴멸이 存在하겠는가? 탄생을 떠나 죽음이 存在한다는 것처럼 이것은 옳지 못하다.


21-2) bhavi yati katha  n ma vibhava  sa bhava  vin /
     vinaiva janma mara a  vibhavo nodbhava  vin //


생성 없는 괴멸이 도대체 어떻게 存在하겠는가? (存在한다면 그것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죽는 것이다. 출생하지도 않은 것은 괴멸하지 않는다.


21-3) 成壞共有者 云何有成壞 如世間生死 一時俱不然
생성과 괴멸이 함께 存在한다면 어떻게 생성과 괴멸이 存在하겠는가? 마치 세간에서 生과 死가 동시에 함께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경우에서 보듯이.


21-3) sa bhavenaiva vibhava  katha  saha bhavi yati/
     na janmamara a  caiva  tulyak la  hi vidyate//


어떻게 괴멸이 생성과 함께 存在하겠는가? 왜냐하면 태어나는 것과 죽는 것은 그와 같이 동시에 存在하지 않기 때문이다.


21-4) 若離於壞者 云何當有成 無常未曾有 不在諸法時
만일 괴멸을 떠난다면 어떻게 생성이 성립하겠는가? 無常은 모든 法에 있지 않을 때가 없다.


21-4) bhavi yati katha  n ma sa bhavo vibhava  vin /
     anityat  hi bh ve u na kad cinna vidyate//


도대체 어떻게 생성이 괴멸을 떠나서 存在하겠는가? 왜냐하면 사물들에 無常함이 없는 것은 그 언제건 存在하지 않기 때문이다.


21-5) 成壞共無成 離亦無有成 是二俱不可 云何當有成
생성과 괴멸이 함께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고 떠나 있다는 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이 두 경우가 모두 불가능하니 어떻게 (생성과 소멸이) 성립하겠는가?


21-5) sa bhavo vibhavenaiva katha  saha bhavi yati/
     na janmamara a  caiva tulyak la  hi vidyate//


어떻게 도대체 생성이 괴멸과 함께 存在하겠는가? 왜냐하면 태어남과 죽음은 결코 동시에 存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21-6) sah nyonyena v  siddirvin nyonyena v  yayo /
     na vidyate tayo  siddhi  katha  nu khalu vidyate//


서로 함께한다고 해도 또 서로 떠나 있다고 해도 양자의 성립은 存在하지 않는, 그러한 兩者의 성립이 실로 어떻게 存在할까?


21-6) 盡則無有成 不盡亦無成 盡則無有壞 不盡亦不壞
사라진다면 생성은 存在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아도 생성은 存在하지 않는다. 사라진다면 괴멸은 存在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아도 역시 괴멸하지 않는다.


21-7) k ayasya sa bhavo n sti n k ayasy sti sa bhava /
     k ayasya vibhavo n sti vibhavo n k ayasya ca//


사라진 것에 생성은 存在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은 것에는 생성은 存在하지 않는다. 사라진 것에는 괴멸은 存在하지 않는다. 또 사라지지 않은 것에도 괴멸은 存在하지 않는다.


21-7) 若離於成壞 是亦無有法 若當離於法 亦無有成壞
만일 생성이나 괴멸을 떠난다면 이때도 역시 사물(法)은 存在하지 않는다. 만일 사물을 떠난다면 역시 생성이나 괴멸은 存在하지 않는다.


21-8) sa bhavo vibhava caiva vin  bh va  na vidyate/
     sa bhava  vibhava  caiva vin  bh vo na vidyate//


사물을 떠나서 생성이나 괴멸은 결코 存在하지 않는다. 또 생성과 괴멸을 떠나서 사물은 결코 存在하지 않는다.


21-8) 若法性空者 誰當有成壞 若性不空者 亦無有成壞
만일 사물이 空한 것이라면 무엇이 생성이나 괴멸을 갖겠느냐? 만일 自性이 空하지 않은 것이라면 역시 생성이나 괴멸은 存在하지 않는다.


21-9) sa bhavo vibhava caiva na   nyasyopapadyate/
     sa bhavo vibhava caiva n   nyasyopapadyate//


空한 것에 있어서는 생성과 괴멸이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또 空하지 않은 것에 있어서는 생성과 괴멸이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1-9) 成壞若一者 是事則不然 成壞若異者 是事亦不然
생성과 괴멸이 만일 동일하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생성과 괴멸이 만일 다르다면 그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21-10) sa bhavo vibhava caiva naika ityupapadyate/
      sa bhavo vibhava caiva na n netyupapadyate//


생성과 괴멸이 동일하다는 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또 생성과 괴멸이 다르다는 것도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1-10) 若謂以眼見 而有生滅者 則爲是癡妄 而見有生滅
만일 눈에 (역력히) 생성과 괴멸이 보이니 생성과 괴멸이 存在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어리석어서 생성과 괴멸이 存在한다고 보는 것이다.


21-11) d  yate sa bhava caiva vibhava caiva te bhavet/
      d  yate sa bhava caiva moh dvibhava eva ca//
생성과 괴멸이 보인다고 그대에게 떠오른다면 생성과 괴멸은 실로 어리석음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21-11) 從法不生法 亦不生非法 從非法不生 法及於非法
法(=存在)에서 法을 生하지 않고 法 아닌 것을 생하지도 않는다. 법 아닌 것에서 법이나 법 아닌 것이 生하지 않는다.


21-12) na bh v jj yate bh vo bh vo 'bh v nna j yate/
      n bh v jj yate 'bh vo 'bh vo bh v nna j yate//


存在는 存在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存在는 非存在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非存在는 非存在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非存在는 存在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21-12) 法不從自生 亦不從他生 不從自他生 云何而有生
존재는 스스로 생기지 않으며 他者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나 他者에서 생기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생함이 있겠느냐?


21-13) na svato j yate bh va  parato naiva j yate/
      na svata  parata caiva j yate j yate kuta //


존재는 스스로 생기지 못한다. 또 他者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거나 他者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생기겠는가?


21-13) 若有所受法 卽墮於斷常 當知所受法 爲常爲無常
만일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다면 斷滅論이나 常住論에 떨어진다. 받아들이는 존재는 常住하거나 無常한 것이 됨을 알아야 한다.


21-14) bh vamabhyupapannasya    vatocchedadar anam/
      prasajyate sa bh vo hi nityo 'nityo 'tha v  bhavet//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常見과 斷見의 오류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常住한 것이거나 無常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14) 所有受法者 不墮於斷常 因果相續故 不斷亦不常
받아들이는 존재가 있는 者는 斷見이나 常見에 떨어지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가 상속되므로 단절도 아니고 상속도 아니다.


21-15) bh vamabhyupapannasya naivocchedo na    vatam/
      udayavyayasa t na  phalahetvorbhava  sa hi//


존재를 인정하는 者에게는 斷絶도 없고 常住도 없다. 왜냐하면 이 생존은 결과와 원인 兩者의 발생과 소멸이 계속(相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21-15) 若因果生滅 相續而不斷 滅更不生故 因卽爲斷滅
만일 원인과 결과의 生滅이 상속되어 끊어지지 않는다면 소멸한 것은 다시 生하지 않으므로 원인은 斷滅되고 만다.


21-16) udayavyayasa t na  phalahetvorbhava  sa cet/
      vyayasy punarutpatterhet cceheda  prasajyate//


만일 이 생존이 결과와 원인의 生滅의 연속이라고 한다면 소멸한 것이 다시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이 (결과와) 斷絶된다는 오류에 빠진다.


21-16) 法住於自性 不應有有無 涅槃滅相續 則墮於斷滅
존재가 그 自性에 머물러 있다면 有가 無로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열반에서는 상속이 소멸하니 斷滅에 떨어진다.


21-17) sadbh vasya svabh vena n sadbh va ca yujyate/
      nirv  ak le coccheda  pra am dbhavasa tate //


그 본성(自性)상 실재하는 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또 열반에 들 때에는 생존의 연속이 멈추므로 斷滅이다.


21-17) 若初有滅者 則無有後有 初有若不滅 亦無有後有
만일 최초의 生存이 소멸한다면 나중의 생존은 존재하지 못한다. 처음의 생존이 만일 소멸하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나중의 생존은 존재하지 않는다.


21-18) carame na niruddhe ca prathamo yujyate bhava /
      carame n niruddhe ca prathamo yujyate bhava //


최후의 것이 소멸한다면 최초의 생존(이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최후의 것이 소멸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초의 생존(이 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21-18)若初有滅時 而後有生者 滅時是一有 生時是一有
만일 처음의 생존이 소멸하는 순간에 나중의 생존이 발생하는 것이라면 소멸하는 순간이 하나의 생존이고 발생하는 순간이 (다른)하나의 생존이(라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21-19) nirudhyam ne carame prathamo yadi j yate/
      nirudhyam na eka  sy jj yam no 'paro bhavet//


만일 (현생의) 최후의 것이 소멸하고 있는 중인 때에 (내생의) 최초의 것이 발생한다면 前者는 소멸하는 중인 것이고 後者는 발생하고 있는 중인 것이 되리라.


21-19) 若言於生滅 而謂一時者 則於此陰死 卽於此陰生
만일 발생과 소멸이 동시에 있다고 한다면 이 五陰에서 죽어 (같은) 이 五陰에서 生하는 꼴이 된다.


21-20) na cennirudhyam na ca j yam na ca yujyate/
      s rdha  ca mriyate ye u tesu skandhe u j yate//


만일 지금 소멸하는 중인 것과 지금 발생하는 중인 것이 함께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죽은 바로 그 五蘊에서 生하지 않겠는가?


21-20) 三世中求有 相續不可得 若三世中無 何有有相續
삼세 중에 생존이 상속하는 것은 포착되지 않는다. 만일 삼세 중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존의 상속이 존재하겠는가?


21-21) eva  tri vapi k le u na yukt  bhavasa tati /
      tri u k le u y  n sti s  katha  bhavasa tati //


이와 같이 세가지 시간(三世)에서도 生存이 연속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三世에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생존의 연속이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第22 觀如來品(16偈) 如來에 대한 관찰


tath gatapar k   n ma dv vi  atitama  prakara am
如來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2장(16게)


22-1) 非陰不離陰 此彼不相在 如來不有陰 何處有如來
五陰도 아니고 오음을 떠난 것도 아니며 이것(여래)과 저것(오온)이 서로 內在하는 것도 아니다. 여래는 오음을 소유하지도 않으니 어디에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22-1) skandh  na n nya  skandhebhyo n smin skandh  na te u sa /
     tath gata  skandhav nna katamo 'tra tath gata //


(如來는) 五蘊이 아니고 오온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 분(여래) 속에 오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들(오온) 속에 그분이 있는 것도 아니며 여래가 오온을 갖는 것도 아닌데 이런 가운데 어느 것이 여래이겠느냐?


22-2) 陰合有如來 則無有自性 若無有自性 云何因他有
오음이 화합하여 여래가 존재한다면 그 自性은 없다. 만일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다른 것으로 因해 존재하겠는가?


22-2) buddha  skandh nup d ya yadi n sti svabh vata /
     svabh vata ca yo n sti kuta  sa parabh vata //


佛陀(여래)가 五蘊에 의존(取)한다면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어떻게 他性으로서 (존재하겠는가)?


22-3) 法若因他生 是卽爲非我 若法非我者 云何是如來
존재가 만일 다른 것을 인연으로 하여 발생한다면 그것은 自我가 아니다. 만일 존재가 自我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여래이겠느냐?


22-3) prat tya parabh va  ya  so 'n tmetyupapadyate/
     ya c n tm  sa ca katha  bhavi yati tath gata //


他性(다른 실체)을 緣하여 있는 것, 그것은 無我임이 성립된다. 그런데 無我인 것,  그것이 어떻게 如來가 되겠느냐?


22-4) 若無有自性 云何有他性 離自性他性 何名爲如來
만일 自性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떻게 他性이 존재하겠는가?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을 如來라고 부르겠는가?


22-4) yadi n sti svabh va ca parabh va  katha  bhavet/
     svabh vaparabh v bhy m te ka  sa tath gata //


만일 自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他性이 존재하겠는가?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이 그 如來이겠는가?


22-5) 若不因五陰 先有如來者 以今受陰故 則說爲如來
혹 五陰을 因하지 않고 먼저 여래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지금 오음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여래라고 말한다.


22-5) skandh nyadyanup d ya bhavetka cittath gata /
     sa id n mup dady dup d ya tato bhavet//


만일 五蘊을 의존(取)하지 않고 그 어떤 如來가 존재한다면 그는 지금 의존(取)하리라. 그래서 의존(取)하여 존재하리라.


22-6) 今實不受陰 更無如來法 若以不受陰 今當云何受
이제 실제로 오음을 取하지 않는다면 여래라는 존재는 결코 없다. 만일 오음을 취하지 않는다면 이제 어떻게 取하겠는가?


22-6) skandh n c pyanup d ya n sti ka cittath gata /
     ya ca n styanup d ya sa up d syate katham//


또 오온에 의존(取)하지 않아도 역시 그 어떤 여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오음을) 의존(取)하지 않고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어떻게 의존(取)하겠는가?


22-7) 若其未有受 所受不名受 無有無受法 而名爲如來
만일 취함이 아직 없다면 취한 것은 取라고 부르지 못한다. 취함이 없는 존재가 없기에 여래라고 부른다.


22-7) na bhavatyanup dattamup d na  ca ki  cana/
     na c sti nirup d na  katha  cana tath gata //


의존(取)하지 않는 그 어떤 의존(取)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존(取함)이 없는 여래는 도저히 존재하지 않는다.


22-8) 若於一異中 如來不可得 五種求亦無 云何受中有
만일 同一이나 別異 중에 여래가 있을 수 없다면 다섯가지로 추구해도 역시 없는데 어떻게 取함에 존재하겠는가?


22-8) tattv nyatvena yo n sti m gyam  a ca pa cadh /
     up d nena sa katha  praj apyate tath gata //


同一性과 別異性에 의해서 다섯가지로 추구하여 존재하지 않는 여래가 어떻게 의존(取)에 의해 파악되겠는가?


22-9) 又所受五陰 不從自性有 若無自性者 云何有他性
또 취해진 五陰은 自性으로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他性이 존재하겠느냐?


22-9) yadap damup d na  tatsvabh v nna vidyate/
     svabh vata ca yann sti kutastatparabh vata //


이런 의존(取)도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또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他性으로서 (존재하겠느냐?)


22-10) 以如是義故 受空受者空 云何當以空 而說空如來
이런 의미에서 취하는 작용도 空하고 취하는 者도 空하다. 어떻게 空으로 空한 여래를 說하겠는가?


22-10) eva    nyamup d namup dat  ca sarva ah/
      praj apyate ca   nyena katha    nyastath gata //


이와 같이 의존(取)하는 작용도 의존(取)하는 주체도 모든 점에서 空하다. 空한 것에 의해 空한 여래가 어떻게 파악되겠는가?


22-11) 空則不可說 非空不可說 共不共 說 但以假名說
空은 말할 수 없고 非空도 말할 수 없다. (空과 非空이) 함께건 함께가 아니건 말할 수 없다. 단지 假名으로 說한다.


22-11)   nyamiti na vaktavyama  nyamiti v  bhavet/
      ubhaya  nobhaya  ceti praj aptyartha  tu kathyate//


空이라고 혹은 不空이라고 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리라. 또 양자나 양자가 아닌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교훈을 위해 說해진다.


22-12) 寂滅相中無 常無常等四 寂滅相中無 邊無邊等四
寂滅한 相 중에는 恒常하다든지 無常하다는 등의 네가지가 없다. 적멸한 相중에는 끝이 있다든지 끝이 없다든지 하는 등의 네가지가 없다.


22-12)    vat    vat dyatra kuta    nte catu  ayam/
      ant nant di c pyatra kuta    nte catu  ayam//


寂靜의 경지, 거기에 어떻게 常住나 無常 따위의 네가지가 (있겠는가)? 또 寂靜의 경지, 거기에 어떻게 有邊이나 無邊 따위의 네가지가 (있겠는가)?


22-13) 邪見深厚者 則說無如來 如來寂滅相 分別有亦非
사견이 깊고 두터운 사람은 여래가 없다고 설하고 여래의 적멸한 모습에 대해서도 있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분별한다.


22-13) yena gr ho grh tastu ghano 'st ti tath gata /
      n st ti sa vikalpayan nirv tasy pi kalpayet//


그러나 깊은 집착에 붙들려 "여래는 존재한다."라든가  "여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분별하는 그런 者는 열반에 든 자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게) 상상하리라.


22-14) 如是性空中 思惟亦不可 如來滅度後 分別於有無
이처럼 그 自性이 空한 가운데 여래가 열반에 든 다음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별하는 思惟는 불가능하다.


22-14) svabh vata ca   nye 'smi  cint  naivopapadyate/
      para  nirodh dbhavati buddho na bhavat ti v //


自性으로서 이것(여래)이 空하다면 열반 이후 붓다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2-15) 如來過戱論 而人生戱論 戱論破慧眼 是皆不見佛
여래는 희론을 넘어서 있는데 사람들이 희론을 낸다. 희론은 慧眼을 파괴하니 그들 모두 부처를 보지 못하다.


22-15) prapa cayanti ye buddha  prapa c t tamavyayam/
      te prapa cahat   sarve na pa yanti tath gatam//


戱論을 초월해 있어서 不滅인 붓다를, 희론者들이 모두 희론하여 해쳐서 (그들은) 여래를 보지 못한다.


22-16) 如來所有性 卽是世間性 如來無有性 世間亦無性
여래가 갖는 자성은 바로이 세간의 자성이다. 여래는 그 성품이 없으니 세간도 역시 그 자성이 없다.


22-16) tath gato yatsvabh vastatsvabh vamida  jagat/
      tath gato ni svabh vo ni svabh vamida  jagat//


여래의 自性 그것은 이 活動界(世界)의 자성인데 여래는 無自性하니 이 活動界는 無自性하다.

 


第23 觀顚倒品(24偈) 顚倒에 대한 관찰


vipary sapar k   n ma trayovi  atitama  prakara am
뒤바뀜에 대한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3장(25게)


23-1) 從憶想分別 生於貪에癡 淨不淨顚倒 皆從衆緣生
망상분별로부터 貪慾과 瞋에와 愚癡가 生한다. 淨과 不淨이라는 顚倒는 모두 여러 가지 인연에서 生한다.


23-1) sa kalpaprabhavo r go dve o moha ca kathyate/
      ubh  ubhavipary s n sa bhavanti prat tya hi//


貪慾과 瞋에와 愚癡는 사고작용에서 生한다고 설해진다. 왜냐하면 淨과 不淨의 뒤바뀜(顚倒)을 緣하여 (貪瞋癡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23-2) 若因淨不淨 顚倒生三毒 三毒卽無性 故煩惱無實
만일 淨과 不淨의 顚倒를 因하여 三毒心이 발생한다면 삼독심은 그 自性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는 그 실체가 없다.


23-2)  ubh  ubhavipary s n sa bhavanti prat tya ye/
     te svabh v nna vidyante tasm tkle   na tattvata //


淨과 不淨의 뒤바뀐 오해를 緣하여 발생하는 것들, 그것들은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번뇌는 진실로는 없다.


23-3) 我法有以無 是事終不成 無我諸煩惱 有無亦不成
자아라는 法의 有와 無, 이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자아가 없으니 모든 번뇌의 有無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23-3)  tmano 'stitvan stitve na katha  cicca sidhyata /
     ta  vin stitvan stitve kle  n   sidhyata  katham//


自我의 存在性과 非存在性은 도저히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자아) 없이 번뇌들의 존재성과 비존재성이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23-4) 誰有此煩惱 是卽爲不成 若離是而有 煩惱則無屬
누가 이런 번뇌를 소유하는가? 이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일 이것을 떠나서 존재한다면 번뇌는 그 소속이 없는 꼴이 된다.


23-4) kasya ciddhi bhavant me kle    sa ca na sidhyati/
     ka cid ho vin  ka  citsanti kle   na kasya cit//


실로 이런 번뇌들은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라고 부르는 그것도 성립하지 않는다. 누군가 어떤 사람이 없기 때문에 번뇌들은 어떠한 사람에게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3-5) 如身見五種 求之不可得 煩惱於垢心 五求亦不得
몸이 있다는 견해 그것을 다섯가지로 추구해 봐도 얻을 수 없듯이 번뇌는 (번뇌로) 더러워진 마음에서 다섯 가지로 추구해도 얻을 수 없다.


23-5) svak yad   ivatkle    kli  e santi na pa cadh /
     svak yad   ivatkli  a  kle e vapi na pa cadh //


자신의 신체가 있다고 보는 견해와 마찬가지로 번뇌들은 번뇌하는 者에 다섯 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체가 있다고 보는 견해와 마찬가지로 번뇌하는 者는 번뇌에 다섯 가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23-6) 淨不淨顚倒 是則無自性 云何因此二 而生諸煩惱
淨과 不淨의 顚倒, 그것은 自性이 없다. 어떻게 그 양자로 因하여 모든 번뇌가 발생하겠는가?


23-6) svabh vato na vidyante  ubh  ubhaviparyay  /
     prat tya katam n kle     ubh  ubhaviparyay n//


淨과 不淨의 뒤바뀜은 自性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떠한 淨과 不淨의 뒤바뀜을 緣하여 번뇌들이 있겠는가?


23-7) 色聲香味觸 及法爲六種 如是之六種 是三毒根本
色과 聲과 香과 味와 觸, 그리고 法은 여섯 가지인데 이런 여섯 가지는 三毒心의 뿌리이다.


23-7) r pa abdarasaspar   gandh  dharm  ca  a vidham/
     vastu r gasya dve asya mohasya ca vikalpyate//


형상과 소리와 맛들, 냄새들과 감촉들, 그리고 생각의 내용(法)들은 탐욕과 瞋에(화)와 愚癡의 여섯 가지 대상이라고 분별된다.


23-8) 色聲香味觸 及法體六種 皆空如炎夢 如乾달婆城
色과 聲과 香과 味와 觸, 그리고 法 그 自體의 여섯가지는 모두 空하여 아지랑이나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다.


23-8) r pa abdarasaspar   gandh  dharm  ca keval‎!!!  /
     gandharvanagar k r  maricisvapnasa nibh  //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 그리고 생각의 내용은 오직 신기루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아지랑이나 꿈과 같다.


23-9) 如是六種中 何有淨不淨 猶如幻化人 亦如鏡中像
이처럼 여섯가지 중에는 어떻게 淨이나 不淨이 존재하겠느냐? 마치 환상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같고 역시 거울 속의 모습과도 같은데.


23-9) a ubha  v   ubha  v pi kutaste u bhavi yati/
     m y puru akalpe u pratibimbasame u ca//


(六入이) 허깨비와 같고 비친 모습과 같다면 거기에(=六入에) 淨이나 不淨이 역시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23-10) 不因於淨相 則無有不淨 因淨有不淨 是故無不淨
淨의 相을 因하지 않는다면 不淨은 없다. 淨을 因해 不淨이 있으니 不淨은 존재하지 않는다.


23-10) anapek ya  ubham n stya ubha  praj apayemahi/
      yatprat tya  ubha  tasm cchubha  naivopapadyate//


淨에 의존하지 않는 不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에 緣하여 淨이 있다고 우리들은 이해하리라. 그러므로 淨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3-11) 不因於不淨 則亦無有淨 因不淨有淨 是故無有淨
不淨을 因하지 않으면 淨도 역시 없다. 不淨을 因하여 淨이 있으니 淨은 존재하지 않는다.


23-11) anapek y  ubha  n sti  ubha  praj apayemahi/
      yatprat ty  ubha  tasm da ubha  naiva vidyate//


不淨에 의존하지 않는 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에 緣하여 不淨이 있다고 우리들은 이해하리라. 그러므로 不淨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23-12) 若無有淨者 何由而有貪 若無有不淨 何由以有에
만일 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말미암아 탐욕이 존재하겠는가? 만일 不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말미암아 瞋에가 존재하겠는가?


23-12) avidyam ne ca  ubhe kuto r go bhavi yati/
      a ubhe 'vidyam ne ca kuto dve o bhavi yati//


淨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탐욕이 존재하겠는가. 不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瞋 가 존재하겠는가?


23-13) 於無常著常 是則名顚倒 空中無有常 何處有常倒
無常을 常이라고 집착하는 것 이것을 전도라고 부르지만 空에는 常이 없는데 어디에 常이라는 전도가 존재하겠는가?


23-13) anitye nityamityeva  yadi gr ho viparyaya /
      n nitya  vidyate   nye kuto gr ho viparyaya //


或, 無常인 것을 常住한다고 하는 이와 같은 집착이 顚倒라지만 空(의 입장)에서 (보면) 무상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집착이 전도이겠는가?


23-14) 若於無常中 著無常非倒 空中無無常 何有非顚倒
無常을 무상이라고 집착하는 것이 顚倒가 아니라지만 空 가운데는 무상도 없는데 어떻게 전도 아님이 존재하겠는가?


23-14) anitye nityamityeva  yadi gr ho viparyaya /
      anityamityapi gr ha    nye ki  na viparyaya //


만일 無常한 것에 대해 (거꾸로) 恒常되다고 하는 집착이 顚倒라면 無常하다고 하는 집착도 空(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전도가 아니겠는가?


23-15) 可著著者著 及所用著法 是皆寂滅相 云何而有著
집착될 것, 집착하는 자, 집착, 또 집착에 쓰이는 것은 모두 그 相이 寂滅한데 어떻게 집착이 존재하겠는가?


23-15) yena g h  ti yo gr ho grah t  yacca g hyate/
      upa  nt ni sarv  i tasm dgr ho na vidyate//


집착하는 수단과 집착과 집착하는 자 그리고 집착되는 것은 모두 寂滅되어 있다. 그러므로 집착은 존재하지 않는다.


23-16) 若無有著法 言邪是顚倒 言正不顚倒 誰有如是事
전도는 나쁘다고 말하고 비전도는 옳다고 말하지만 만일 집착이라는 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을 소유하는 주체는 누구이겠는가?


23-16) avidyam ne gr he ca mithy  v  samyageva v /
      bhavedviparyaya  kasya bhavetkasy viparyaya //
집착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옳건 그르건 누구에게 전도가 존재하고 누구에게 비전도가 존재하겠는가?


23-17) 有倒不生倒 無倒不生倒 倒者不生倒 不倒亦不生
전도가 존재해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고 전도가 존재하지 않아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전도된 자는 전도되지 않고 전도되지 않은 자도 역시 전도되지 않는다.


23-17) na c pi vipar tasya sa bhavanti viparyay  /
      na c pyavipar tasya sa bhavanti viparyay  //


이미 전도된 자에게는 전도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에게도 역시 전도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23-18) 若於顚倒時 亦不生顚倒 汝可自觀察 誰生於顚倒
만일 전도되는 중일 때도 역시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누가 전도를 생하는지 스스로 관찰할 수 있으리라.


23-18) na viparyasyam nasya sa bhavanti viparyay  /
      vim  asva svaya  kasya sa bhavanti viparyay  //


지금 전도되고 있는 중인 것에는 전도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누구에게 전도들이 발생하는지 그대 스스로 고찰하거라.


23-19) 諸顚倒不生 云何有此義 無有顚倒故 何有顚倒者
모든 전도가 불생이라는 것,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느냐? 전도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전도된 者가 존재하겠는가?


23-19) anutpann   katha  n ma bhavi yanti viparyay  /
      viparyaye vaj te u viparyayagata  kuta //


불생이 도대체 어떻게 전도이겠는가? 전도가 生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전도에 빠진 자가 있겠는가?


23-20) na svato j yate bh va  parato naiva j yate/
      na svata  parata ceti viparyayagata  kuta //


존재는 그 자신에서 발생하지 않고 결코 他者에서 발생하지도 않으며 자신과 他者에서도 아닌데 전도에 빠진 자가 어떻게 있겠는가?


23-20) 若常我樂淨 而是實有者 是常我樂淨 則非是顚倒
만일 常과 自我와 樂과 淨, 이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常과 自我와 樂과 淨은 전도가 아니다.


23-21)  tm  ca  uci nitya  ca sukha  ca yadi vidyate/
       tm  ca  uci nitya  ca sukha  ca na viparyaya //


만일 自我와 淨과 常과 樂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自我와 淨과 常과 樂은 전도가 아니다.


23-21) 若常我樂淨 而實無有者 無常苦不淨 是則亦應無
만일 常과 我와 樂과 淨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無常과 苦와 不淨, 이것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3-22) n tm  ca  uci nitya  ca sukha  ca yadi vidyate/
      an tm  ' ucyanitya  ca naiva du kha  ca vidyate//


만일 自我와 淨과 常과 樂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無我와 不淨과 無常과 苦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3-22) 如是顚倒滅 無明則亦滅 以無明滅故 諸行等亦滅
이와 같이 顚倒가 멸하면 無明도 역시 소멸한다.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諸行 따위도 역시 소멸한다.


23-23) eva  nirudhyate 'vidy  viparyayanirodhan t/
      avidy y   niruddh y   sa sk r dya  nirudhyate//


이처럼 顚倒가 소멸되기 때문에 無明이 소멸된다. 무명이 소멸할 때에 行등이 소멸된다.


23-23) 若煩惱性實 而有所屬者 云何當可斷 誰能斷其性
만일 번뇌의 자성은 실재하고 그것(=번뇌)이 속한 자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 번뇌를) 끊을 수 있겠으며 또 누가 능히 그 (번뇌의) 자성을 끊을 수 있겠는가?


23-24) yadi bh t   svabh vena kle    ke ciddhi kasya cit/
      katha  n ma prah yeran ka  svabh va  prah syati//


만일 자성으로서 존재하는 그 어떤 번뇌가 그 누군가에게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 번뇌를) 제거하겠는가? 누가 자성을 제거하겠는가?


23-24) 若煩惱虛妄 無性無屬者 云何當可斷 誰能斷無性
만일 번뇌가 허망한 것이라 자성도 없고 소속된 자도 없다면 어떻게 끊을 수 있겠으며 또 누가 능히 자성도 없는 것을 끊을 수 있겠는가?


23-25) yadyabh t   svabh vena kle    ke ciddhi kasya cit/
      katha  n ma prah yeran ko 'sadbh va  prah syati//


만일 자성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번뇌가 그 누군가에게 있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 번뇌를) 제거하겠는가? 누가 실재하지도 않는 존재를 제거하겠는가?

 


第24 觀四諦品(40偈) 四聖諦에 대한 관찰


 ryasatyapar k   n ma caturvi  atitama  prakara am
성스러운 진리(聖諦)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4장(40게)


24-1) 若一切皆空 無生亦無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만일 일체가 모두 空하다면 生도 없고 滅도 없다. 그렇다면 四聖諦의 法도 존재하지 않는다.


24-1) yadi   nyamida  sarvamudayo n sti na vyaya /
     catur  m ryasaty n mabh vaste prasajyate//


만일 이 모든 것이 空하다면 일어남(起)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 (그래서) 그대는 四聖諦도 존재하지 않다는 오류에 빠진다.


24-2) 以無四諦故 見苦與斷集 證滅及修道 如是事皆無
四聖諦가 존재하지 않기에 苦의 見과 集의 斷과 滅의 證과 道의 修, 이런 것들이 모두 없다.


24-2) parij   ca prah  am ca bh van  s k ikarma ca/
     catur  m ryasaty n mabh v nnopapadyate//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완전하게 아는 知>와 <(번뇌의) 끊음>과 <실천하는 수행>과 <깨달음의 증득>도 성립하지 않는다.


24-3) 以是事無故 則無四道果 無有四果故  得向者亦無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네가지 道果는 존재하지 않는다. 四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向을 얻은 자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4-3) tadabh v nna vidyante catv ry ryaphal ni ca/
     phal bh ve phalasth  no na santi pratipannak  //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四果도 존재하지 않는다. 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果에 오른 자도 없고 (그 果로) 向하여 나아가는 자(四向)도 존재하지 않는다.


24-4) 若無八賢聖 則無有僧寶 以無四諦故 亦無有法寶
만일 여덟가지 賢聖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僧寶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法寶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4-4) sa gho n sti na cetsanti te '  au puru apudgal  /
     abh v cc ryasaty n   saddharmo 'pi na vidyate//


만일 그런 여덟가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僧伽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正法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24-5) 以無法僧寶 亦無有佛寶 如是說空者 是則破三寶
법보와 승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보도 역시 없다. 이처럼 공을 설하는 자는 삼보를 파괴한다.


24-5) dharme c sati sa ghe ca katha  buddho bhavi yati/
     eva  tr  yapi ratn ni bruv  ah pratib dhase//


法과 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佛이 존재하겠는가?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대는 三寶를 파괴하는 것이 되리라.


24-6) 空法壞因果 亦壞於罪福 亦復悉毁壞 一切世俗法
空이란 법은 인과도 파괴하고 죄와 복도 파괴하고 일체의 세속적인 존재를 모두 훼손하고 파괴한다.


24-6)   nyat   phalasadbh vamadharma  dharmameva ca/
     sarvasa vyavah r   ca laukik n pratib dhase//


空性을 주장한다면 그대는 果報의 실재와 非法과 法과 세간에서의 일체의 언어 관습을 파괴하게 된다.


24-7) 汝今實不能 知空空因緣 及知於空義 是故自生惱
그대는 지금 空과 空인 까닭과 空의 意義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고뇌를 생한다.


24-7) atra br ma    nyat y   na tva  vetsi prayojanam/
       nyat     nyat rtha  ca tata eva  vihanyase//


여기서 우리들은 말한다. "그대는 空性에서 (그) 효용과 空性과 또 空性의 意義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처럼 저항한다."라고.


24-8) 諸佛衣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二諦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첫째는 世俗諦로써, 둘째는 第一義諦로써.


24-8) dve satye samup  ritya buddh n   dharmade an /
     lokasa v tisatya  ca satya  ca param rthata //


부처님들의 敎法은 二諦에 의거한다. (그것은) 세간에서 행해지는 진리와 勝義로서의 진리이다.


24-9) 若人不能知 分別於二諦 則於深佛法 不知眞實義
만일 사람이 二諦를 분별함을 알 수 없다면 심오한 佛法에서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한다.


24-9) ye 'nayorna vij nanti vibh ga  satyayordvayo /
     te tattva  na vij nanti gambh ra  buddha  sane//


이 두가지 진리의 구별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深遠한 진실을 알지 못한다.


24-10) 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
만일 俗諦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第一義諦를 얻을 수 없다.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다.


24-10) vyavah raman  ritya param rtho na de yate/
      param rthaman gamya nirv na  n dhigamyate//


(세간의) 언어 관습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최고의 意義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최고의 의의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열반은 증득되지 않는다.


24-11) 不能正觀空 鈍根則自害 如不善呪術 不善捉毒蛇
空을 올바로 觀할 수 없어서 둔근기는 스스로를 해친다. 잘못된 呪術이나 잘못 잡은 毒蛇와 같이.


24-11) vin  ayati durd       nyat  mandamedhasam/
      sarpo yath  durg h to vidy  v  du pras dhit //


잘못 파악된 空性은 지혜가 열등한 자를 파괴한다. 마치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 닦은 呪術과 같이.


24-12) 世尊知是法 甚深微妙相 非鈍根所及 是故不欲說
세존께서는 이 법이 아주 깊고 미묘한 相이어서 둔근기가 미칠 바 아니라고 아셨다. 그래서 설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24-12) ata ca pratyud v tta  citta  de ayitu  mune /
      dharma  matv sya dharmasya mandairduravag hat m//


그래서 이 법이 미천한 사람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하셔서 (釋迦)牟尼(=聖者)의 설법하려는 마음은 후퇴하였다.


24-13) 汝謂我著空 而爲我生過 汝今所說過 於空則無有
그대는 내가 空에 집착하여 내가 허물을 내었다고 말하지만 그대가 지금 말하는 (그런) 허물은 空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24-13)   nyat y madhilaya  ya  puna  kurute bhav n/
      do aprasa go n sm ka  sa   nye nopapadyate//


그대는 다시 空性인 것에 집착을 짓는다. 오류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다. 그것(집착)은 공성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24-14) 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 若無空義者 一切則不成
空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 만일 공의 이치가 없다면 어떤 존재도 성립하지 않는다.


24-14) sarva  ca yujyate tasya   nyat  yasya yujyate
      sarva  na yujyate tasya   nya   yasya na yujyate//


空性이 타당한 것, 그것에서는 모든 것이 타당하다. 공성이 타당하지 않은 것, 그것에서는 모든 것이 타당하지 않다.


24-15) 汝今自有過 而以廻向我 如人乘馬者 自忘於所乘
그대는 지금 스스로 과오가 있는데 (그것을) 나에게 돌린다. 마치 말을 탄 사람이 스스로 탄 것을 잊고 있는 것처럼.


24-15) sa tva  do  n tman y nasm su parip tayan/
      a vamev bhir  ha  sanna vamev si vism ta //


그러한 그대는 자신에 속한 과오들을 우리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마치 그대가 말을 타고 있으면서 그 말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이.


24-16) 若汝見諸法 決定有性者 卽爲見諸法 無因亦無緣
만일 그대가 모든 존재들이 분명히 自性이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들이 因도 없고 緣도 없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24-16) svabh v dyadi bh v n   sadbh vamanupa yasi/
      ahetupratyay n bh v  stvameva  sati pa yasi//


만일 그대가 존재들이 자성으로서 실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와 같다면  그대는 존재들을 因과 緣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24-17) 卽爲破因果 作作者作法 亦復壞一切 萬物之生滅
그것은 곧 인과와 행위와 행위자와 행위되는 것을 파괴하는 것이며 일체 만물의 生滅을 다시 파괴하는 것이기도 하다.


24-17) k rya  ca k rana  caiva kart ra  kara a  kriy m/
      utp da  ca nirodha  ca phala  ca pratib dhase//


그대는 결과와 원인과 행위의 주체와 수단과 작용과 발생과 소멸과 과보를 파괴한다.


24-18)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여러가지 인연으로 生한 존재를 나는 無라고 말한다. 또 假名이라고도 하고 또 中道의 이치라고도 한다.


24-18) ya  prat tyasamutp da    nyat   t   pracak mahe/
      s  praj aptirup d ya pratipatsaiva madhyam //


연기인 것 그것을 우리들은 空性이라고 말한다. 그것(=공성)은 의존된 假名이며 그것(=공성)은 실로 中道이다.


24-19) 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인연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공 아닌 것이 없다.


24-19) aprat tya samutpanno dharma  ka cinna vidyate/
      yasm ttasm da  nyo hi dharma  ka cinna vidyate//


緣하여 生起(연기)하지 않은 존재(=法)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空하지 않은 존재는 그 무엇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24-20) 若一切不空 則無有生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만일 일체의 것이 공하지 않다면 生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四聖諦의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24-20) yadya  nyamida  sarvamudayo n sti na vyaya /
      catur  m ryasaty n mabh vaste prasajyate//


만일 이 모든 것이 공하지 않다면 생기는 존재하지 않고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진다.


24-21) 若不從緣生 云何當有苦 無常是苦義 定性無無常
만일 緣으로부터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苦가 존재하겠는가? 無常은 苦의 이치이지만 결정된 自性으로는 無常도 없다.


24-21) aprat tya samutpanna  kuto du kha  bhavi yati/
      anityamukta  duhkha  hi tatsv bh vye na vidyate//


緣하지 않고 生起(緣起)한 苦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왜냐하면 "無常한 것은 苦이다"라고 말해졌는데 그것(無常한 것)은 自性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4-22) 若苦有定性 何故從集生 是故無有集 以破空義故
만일 苦가 확고한 자성을 갖는다면 어떻게 集에서 생하겠는가? 그러므로 공의 이치를 파했기에 集은 존재하지 않는다.


24-22) svabh vato vidyam na  ki  puna  samude yate/
      tasm tsamudayo n sti   nyat   pratib dhata //


자성으로서 지금 존재하고 있는 그 무엇이 다시 生起하겠는가? 그러므로 空性을 파괴한다면 集起는 존재하지 않는다.


24-23) 苦若有定性 則不應有滅 汝著定性故 卽破於滅諦
苦가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소멸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대는 확고한 자성에 집착하므로 滅諦를 파괴하게 된다.


24-23) na nirodha  svabh vena sato du khasya vidyate/
      svabh vaparyavasth n nnirodha  pratib dhase//


自性으로서 존재하는 苦에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자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소멸을 파괴하게 된다.


24-24)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卽無有定性
苦가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修道는 존재하지 못한다. (반대로) 만일 道가 修習할 수 있다면 확고한 자성은 존재하지 못한다.


24-24) sv bh vye sati m rgasya bh van  nopapadyate/
      ath sau bh vyate m rga  sv bh vya  te na vidyate//


道가 자성으로서 존재한다면 (道의) 修習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道가 수습된다면 그대가 말한 자성으로서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24-25) 若無有苦諦 及無集滅諦 所可滅苦道 竟爲何所至
만일 苦諦 존재하지 않고 集諦나 滅諦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苦를 滅할 수 있는 것인 道는 마침내 어떻게 도달되겠는가?


24-25) yad  du kha  samudayo nirodha ca na vidyate/
      m rgo du khanirodhatv tkatama  pr payi yati//


苦와 集과 滅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 苦의 滅로부터 있게 되는 道가 어떻게 도달되겠는가?


24-26) 若苦定有性 先來所不見 於今云何見 其性不異故
만일 苦가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앞서서 보지 못한 것인데 지금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 자성은 變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4-26) svabh ven parij  na  yadi tasya puna  katham/
      parij  na  nanu kila svabh va  samavasthita //


만일 자성으로서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의 완전한 파악이 다시 있겠는가? 실로 확립되어 있는 것이 自性 아닌가?


24-27) 如見苦不然 斷集及證滅 修道及四果 是亦皆不然
苦를 파악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처럼 集을 斷하고 滅을 證하며 道를 修하는 것 및 四果도 역시 모두 옳지 않다.


24-27) prah  as k  tkara e bh van  caivameva te/
      parij  vanna yujyante catv ryapi phal ni ca//


<(苦諦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斷滅>도 <깨달음의 획득>도 <修習>도 또 四果도 그대에게 있어서 타당하지 않다.


24-28) 是四道果性 先來不可得 諸法性若定 今云何可得
이 네가지 도의 과보의 자성은 원래 포착되지 않는 것인데 모든 존재의 자성이 확립되어 있다면 지금 어떻게 그것을 포착하겠는가?


24-28) svabh ven nadhigata  yatphala  tatpuna  katham/
       akya  samadhigantu  sy tsvabh va  parig h ata //


자성이 보전되어 있다면 자성으로서 증득되지 않는 (四)果, 그것을 다시 증득함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24-29) 若無有四果 則無得向者 以無八聖故 則無有僧寶
만일 四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四向을 획득한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八聖이 존재하지 않기에 승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24-29) phal bh ve phalasth  no na santi pratipannak  /
      sa gho n sti na cetsanti te '  au puru apudgal  //


(四)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果에 도달하는 자도 없고 그 과로 향해 나아가는 자도 없다. 만일 이들 八賢聖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僧伽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24-30) 無四聖諦故 亦無有法寶 無法寶僧寶 云何有佛寶
사성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법보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법보와 승보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불보가 존재하겠는가?


24-30) abh v cc ryasaty n   saddharmo 'pi na vidyate/
      dharme c sati sa ghe ca katha  buddho bhavi yati//


(四)聖諦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正法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法과 僧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佛이 존재하겠는가?


24-31) 汝說則不因 菩提而有佛 亦復不因佛 而有於菩提
그대는 菩提를 因하지 않고서 佛이 있고 또 佛을 因하지 않고서 보리가 있다고 말하는 꼴이 된다.


24-31) aprat ty pi bodhi  ca tava buddha  prasajyate/
      aprat ty pi buddha  ca tava bodhi  prasajyate//


깨달음을 緣하지 않고도 佛이 있다는 오류가 그대에게 있어서 발생한다. 또佛을 緣하지 않고도 깨달음이 있다는 오류가 그대에게 있어서 발생한다.


24-32) 雖復勤精進 修行菩提道 若先非佛性 不應得成佛
비록 다시 부지런히 정진하여 보리도를 수행하여도 원래 佛性이 없으면 성불할 수 없으리라.


24-32) ya c buddha  svabh vena sa bodh ya gha annapi/
      na bodhisattvacary y   bodhi  te 'dhigami yati//


그대의 말대로라면(te) 자성으로서 부처가 아닌 자, 그자가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여도 보살행에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리라.


24-33) 若諸法不空 無作罪福者 不空何所作 以其性定故
만일 모든 존재가 空하지 않다면 죄나 복을 짓는 자도 없다. 空하지 않은 것은 그 자성이 확고히 있는데 어떻게 지어지겠는가?


24-33) na ca dharmamadharma  v  ka cijj tu kari yati/
      kima  nyasya kartavya  svabh va  kriyate na hi//


또 어느 누구도 法(=善)과 非法(=惡)을 作爲하지 못하리라. 空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이 作爲되겠는가? 왜냐하면 자성은 작위되지 않기 때문이다.


24-34) 汝於罪福中 不生果報者 是則離罪福 而有諸果報
그대는 (空하다면) 죄나 복을 지어도 과보가 생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不空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죄나 복을 떠나서 모든 과보가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24-34) vin  dharmamadharma  ca phala  hi tava vidyate/
      dharm dharmanimitta  ca phala  tava na vidyate//


그대(의 주장)에서는 法과 非法(을 행함)이 없이도 과보가 존재하는 꼴이 된다. 그대(의 주장)에서는 법과 비법으로 인한 과보는 존재하지 않는 꼴이 된다.


24-35) 若謂從罪福 而生果報者 果從罪福生 云何言不空
만일 죄나 복에서 과보가 생기는 것이라면 과보는 (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나 복에( 의존해)서 생기(기에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不空이라고 말하느냐?


24-35) dharm dharmanimitta  v  yadi te vidyate phalam/
      dharm dharmasamutpannama  nya  te katha  phalam//


혹은 만일 그대에게 있어서 法과 非法으로 인한 과보가 존재한다면 법과 비법에서 生起한 과보가 그대에게 있어서 어떻게 不空이겠느냐?


24-36) 汝破一切法 諸因緣空義 則破於世俗 諸餘所有法
그대가 일체법의 모든 인연과 空한 이치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곧 세속에 있는 다른 모든 존재를 파괴하는 꼴이다.


24-36) sarvasa vyavah r   ca laukik n pratib dhase/
      yatprat tyasmutp da  nyat   pratib dhase//


그대가 緣起이고 空性인 것을 파괴한다면 그대는 또 세간에서의 모든 언어 관습을 파괴하는 꼴이 된다.


24-37) 若破於空義 卽應無所作 無作而有作 不作名作者
만일 空의 이치를 파괴하면 지을 것도 없다. 지은 것도 없는데 지었다고 하고 짓지도 않았는데 지은 놈이라 부르게 된다.


24-37) na kartavya  bhavetki  cidan rabdh  bhavetkriy /
      k raka  sy dakurv  a    nyat   pratib dhata //


空性을 파괴하는 자에게는 작위할 그 어떤 대상도 없으며 작용이 시작함도 없으며 행위자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게 되리라.


24-38) 若有決定性 世間種種相 則不生不滅 常住而不壞
만일 확고한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다양한 모습들은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常住하여 壞滅되지 않는 것이리라.


24-38) aj tamaniruddha  ca k  astha  ca bhavi yati/
      vicitr bhiravasth bhi  svabh ve rahita  jagat//


자성이 있다면 세계(활동계)는 갖가지 상태를 떠나서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아 常住不動인 것으로 되리라.


24-39) 若無有空者 未得不應得 亦無斷煩惱 亦無苦盡事
만일 空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직 획득되지 않은 것은 획득할 수 없고 번뇌도 끊을 수 없으며 苦가 모두 사라지는 일도 있을 수 없다.


24-39) asa pr ptasya ca pr ptirdu khaparyantakarma ca/
      sarvakle aprah na  ca yadya  nya  na vidyate//


만일 空하지 않다면 아직 획득되지 않은 것이 획득하는 것도 苦를 종식시키는 행위도 또 모든 번뇌를 제거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꼴이 된다.


24-40) 是故經中說 若見因緣法 則爲能見佛 見苦集滅道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연기의 법칙을 본다면 능히 佛을 볼 수 있고 苦, 集, 滅, 道를 본다."고 설한다.


24-40) ya  prat tyasamutp da  pa yat da  sa pa yati/
      du kha  samudaya  caiva nirodha  m rgameva ca//


이런 緣起를 보는 자, 그는 이것을 본다. 즉 苦와 集 그리고 滅과 道.

 


第25 觀涅槃品(24偈) 열반에 대한 관찰


nirv  apar k   n ma pa cavi  atitama  prakara am
열반에 대한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5장(24게)


25-1) 若一切法空 無生無滅者 何斷何所滅 而稱爲涅槃
만일 모든 존재가 空하여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다면 무엇이 끊어지고 무엇이 소멸되기에 열반이라 稱하겠는가?


25-1) yadi   nyamida  sarvamudayo n sti na vyaya /
     prah   dv  nirodh dv  kasya nirv  ami yate//


만일 이 모든 것이 空하다면 生은 존재하지 않고 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제거나 소멸로부터 열반이 추구되겠는가?


25-2) 若諸法不空 則無生無滅 何斷何所滅 而稱爲涅槃
(그대의 말대로) 만일 모든 존재가 空하지 않다면 (오히려)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으니 무엇이 끊어지고 무엇이 소멸되기에 열반이라 稱하겠는가?


25-2) yadya  nyamida  sarvamudayo n sti na vyaya /
     prah   dv  nirodh dv  kasya nirv  ami yate//


만일 이 모든 것이 空하지 않다면 生은 존재하지 않고 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제거나 소멸로부터 열반이 추구되겠는가?


25-3) 無得亦無至 不斷亦不常 不生亦不滅 是說名涅槃
획득되는 것도 아니고 도달되는 것도 아니며 단멸된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며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닌 것 이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


25-3) aprah  amasa pr ptamanucchinnama   vatam/
     aniruddhamanutpannametannirv  amucyate//


제거되지도 않고 도달되지도 않으며 斷滅의 상태도 아니고 常住하는 것도 아니며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 발생하는 것도 아닌 이것이 열반이라고 說해진다.


25-4) 涅槃不名有 有則老死相 終無有有法 離於老死相
열반은 존재라고 할 수 없다. 존재라면 老死의 모습을 띈다. 老死의 모습을 떠난 존재는 전혀 없다.


25-4) bh vast vanna nirv  am jar mara alak a am/
     prasajyet sti bh vo hi na jar mara a  vin //


우선 열반은 존재가 아니다. (열반이 어떤 존재라면) 老死의 모습을 갖는다는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老死를 떠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25-5) 若涅槃是有 涅槃卽有爲 終無有一法 而是無爲者
만일 열반이 존재라면 열반은 有爲法이리라. 無爲法인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25-5) bh va ca yadi nirv  a  nirv  a  sa sk ta  bhavet/
     n sa sk to hi vidyate bh va  kva cana ka cana//


열반이 만일 존재라면 열반은 作爲된 것(=有爲法)이리라. 왜냐하면 그 어디서건 그 무엇이건 작위되지 않은 것(=無爲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5-6) 若涅槃是有 云何名無受 無有不從受 而名爲有法
만일 열반이 존재라면 어떻게 (五陰인) 取가 없다고 부르겠느냐? (五陰인) 取에 기인하지 않는데 존재(=有)라고 부르는 法은 없다.


25-6) bh va ca yadi nirv  amanup d ya tatkatham/
     nirv  a  n nup d ya ka cidbh vo hi vidyate//


또 만일 열반이 존재라면 그런 열반이 어떻게 (五陰에) 의존(=取)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왜냐하면 그 어떤 존재도 (五陰에) 의존(=取)하지 않고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5-7) 有尙非涅槃 何況於無耶 涅槃無有有 何處當有無
존재가 오히려 열반이 아닌데 하물며 비존재는 어떠하겠느냐? 열반에는 존재가 없는데 어디에 비존재가 있겠느냐?


25-7) yadi bh vo na nirv  amabh va  ki  bhavi yati/
     nirv  a  yatra bh vo na n bh vastatra vidyate//


만일 존재가 열반이 아니라면 어떠한 비존재가 열반이겠느냐?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곳, 그런 곳에는 비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25-8) 若無是涅槃 云何名不受 未曾有不受 而名爲無法
만일 비존재가 열반이라면 어떻게 취하지 않음이라고 부르겠느냐? 취하지도 않고 비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없다.


25-8) yadyabh va ca nirv  amanup d ya tatkatham/
     nirv  a  na hyabh vo 'sti yo 'nup d ya vidyate//


만일 비존재가 열반이라면 그 열반이 어떻게 의존(=取) 없이 존재하겠느냐? 왜냐하면 의존(=取)함이 없는 비존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5-9) 受諸因緣故 輪轉生死中 不受諸因緣 是名爲涅槃
여러 인연을 취해 生死를 윤회하는 중에 그 모든 인연을 취하지 않는 것, 그것을 열반이라고 부른다.


25-9) ya  java jav bh va up d ya prat tya v /
     so 'prat ty nup d ya nirv  amupadi yate//


(五蘊에) 의존(取)하거나 緣하여 생사를 왕래하는 존재, 그것(존재)이 의존(取)하지 않고 緣하지 않기에 열반이라고 敎示되었다.


25-10) 如佛經中說 斷有斷非有 是故知涅槃 非有亦非無
불경에서 설했듯이 생존도 끊고 비생존도 끊는다. 그러므로 열반은 존재도아니고 비존재도 아님을 알지어다.


25-10) prah  a  c brav cch st  bhavasya vibhavasya ca/
      tasm nna bh vo n bh vo nirv  amiti yujyate//


또 스승께서는 생존과 비생존의 제거를 설하셨다. 그러므로 열반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다.>라는 것이 타당하다.


25-11) 若謂於有無 合爲涅槃者 有無卽解脫 是事則不然
만일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이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존재와 비존재가 바로 해탈이리니 이것은 옳지 못하다.


25-11) bhavedabh vo bh va ca nirv  amubhaya  yadi/
      bhavedabh vo bh va ca mok astacca na yujyate//


만일 비존재와 존재의 兩者가 열반이라면 해탈은 비존재와 존재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25-12) 若謂於有無 合爲涅槃者 涅槃非無受 是二從受生
만일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이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열반은 取함이 없는 것이 아니리라. 그 양자는 取함에서 생한다.


25-12) bhavedabh vo bh va ca nirv  amubhaya  yadi/
      n nup d ya nirv  amup d yobhaya  hi tat//


만일 열반이 비존재와 존재의 양자라면 열반은 의존(取)함이 없는 것이 아닌 꼴이 되리라. 왜냐하면 그 양자 모두 의존(取)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5-13) 有無共合成 云何名涅槃 涅槃名無爲 有無是有爲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하여 이루어진 것을 어떻게 열반이라 부르겠는가? 열반은 無爲이고 존재와 비존재는 有爲인데.


25-13) bhavedabh vo bh va ca nirv  amubhaya  katham/
      asa sk ta  ca nirv  am bh v bh vau ca sa sk tau//


어떻게 열반이 비존재와 존재의 양자가 되겠느냐? 열반은 作爲되지 않은 것(無爲法)이며 존재와 비존재는 작위된 것(有爲法)인데.


25-14) 有無二事共 云何是涅槃 是二不同處 如明暗不俱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하는 것이 어떻게 열반이겠는가? 그 양자는 밝음과 어둠이 같이 있지 못하듯이 한 곳에 있지 못한다.


25-14) bhavedabh vo bh va ca nirv  a ubhaya  katham/
      na tayorekatr stitvam lokatamasoryath //


어떻게 열반에 비존재와 존재의 양자가 되겠는가? 이 양자는 같은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밝음과 어둠과 같다.


25-15) 若非有非無 名之爲涅槃 此非有非無 以何而分別
만일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열반이라면 이런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무엇으로 분별하겠느냐?


25-16) naiv bh vo naiva bh vo nirv  a  yadi vidyate/
      naiv bh vo naiva bh va iti kena tadajyate//


만일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열반이 존재한다면 비존재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라는 그것이 무엇에 의해 표시되겠느냐?


25-16) 分別非有無 如是名涅槃 若有無成者 非有非無成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고 분별하여 그것을 열반이라고 하는데 만일 존재와 비존재가 성립한다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성립한다.


25-15) naiv bh vo naiva bh vo nirv  amiti y  ' jan /
      abh ve caiva bh ve ca s  siddhe sati sidhyati//


열반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고 상정하는 것, 그것은 존재와 비존재의 성립이 존재할 때에 성립한다.


25-17) 如來滅度後 不言有與無 亦不言有無 非有及非無
如來가 滅度한 후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말라.


25-17) para  nirodh dbhagav n bhavat tyeva nohyate/
      na bhavatyubhaya  ceti nobhaya  ceti nohyate//


世尊이 入滅한 후에도 존재한다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兩者라고도, 兩者가 아니라고도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


25-18) 如來現在時 不言有與無 亦不言有無 非有及非無
여래가 지금 존재할 때 있다거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또 있으면서 없다거나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지 말라.


25-18) ti  ham no 'pi bhagav n bhavat tyeva nohyate/
      na bhavatyubhaya   ceti nobhaya  ceti nohyate//


지금 머물러 있는 중인 世尊도 역시 결코 존재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兩者라고도, 兩者가 아니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25-19) 涅槃與世間 無有少分別 世間與涅槃 亦無少分別
열반은 세간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세간도 열반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25-19) na sa s rasya nirv   tki  cidasti vi e a am/
      na nirv  asya sa s r tki  cidasti vi e a am//


윤회가 열반과 구별되는 점은 그 어떤 것도 없다. 열반이 윤회와 구별되는 점은 그 어떤 것도 없다.


25-20) 涅槃之實際 及與世間際 如是二際者 無毫釐差別
열반의 참된 限界와 세간의 한계, 이 양자의 한계는 털끝 만큼의 차이도 없다.


25-20) nirv  asya ca y  ko i  sa sara asya ca/
      na tayorantara  ki  citsus k mamapi vidyate//


열반에 있어서 限界인 것은 윤회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 양자의 사이에는 그 어떤 미세한 틈도 존재하지 않는다.


25-21) 滅後有無等 有邊等常等 諸見依涅槃 未來過去世
入滅 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有邊등, 常住등의 견해들은 열반과 未來世와 過去世에 의존해 있다.


25-21) para  nirodh dant dy      vat dy  ca d   aya /
      nirv  amapar nta  ca p rv nta  ca sam  rit  //


(여래) 入滅 후, 有限등, 常住등의 견해들은 열반과 後의 한계와 前의 한계에 의거한 것들이다.


25-22) 一切法空故 何有邊無邊 亦邊亦無邊 非有非無邊
모든 존재가 空하므로 무엇이 有邊이고 無邊이며 유변이면서 무변이기도 하고 유변도 아니고 무변도 아니겠느냐?


25-22)   nye u sarvadharme u kimananta  kimantavat/
      kimanantamantavacca n nanta  n natavacca kim//


모든 존재가 空하다면 무엇이 無限하고 무엇이 有限하며 무엇이 무한하면서 유한하고 무엇이 무한하지도 않고 유한하지도 않는 것이겠느냐?


25-23) 何者爲一異 何有常無常 亦常亦無常 非常非無常
무엇이 같거나 다른 것이겠으며 무엇이 상주하거나, 무상하거나, 상주하면서 무상하거나, 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 것이겠느냐?


25-23) ki  tadeva kimanyatki     vata  kima   vatam/
      a   vata     vata  ca ki  v  nobhayamapyata //


무엇이 바로 그것(=같은 것)이고 무엇이 다른 것이며 무엇이 영원한 것이고 무엇이 영원하지 않은 것이며 무엇이 영원하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이고 거기서 또 무엇이 그 兩者도 아닌 것이겠느냐?


25-24) 諸法不可得 滅一切戱論 無人亦無處 佛亦無所說
모든 法은 잡을 수 없다. 모든 희론이 사라졌으며 사람도 없고 장소도 없으며 부처님께서도 역시 말씀하신 것이 없다.


25-24) sarvopalambhopa ama  prapa copa ama   iva /
      na kva citkasya citka ciddharmo buddhena de ita //


모든 知覺이 寂滅하고 희론이 적멸한 吉祥이다. 어디서건 누구에게건 그 어떤 法도 부처님에 의해 敎示되지 않았다.

 


第26 觀十二因緣品(9偈) 十二緣起에 대한 관찰


dv da   gapar k   n ma  a vi  atitama  prakara am
十二支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6장(12게)


26-1) 衆生癡所覆 爲後起三行 以起是行故 隨行墮六趣
중생들은 어리석음에 덮여 나중을 위해 세가지 行을 지어낸다. 그런 行을 짓기에 그 行에 따라 六趣에 떨어진다.


26-1) punarbhav ya sa sk r navidy niv tastridh /
     abhisa skurute y  stairgati  gacchati karmabhi //


無明에 덮인 자는 나중의 生存을 위해 세가지 형성작용(行)을 지어낸다. 그런 행위(業)에 의해 趣로 간다.


26-2) 以諸行因緣 識受六道身 以有識著故 增長於名色
諸行을 인연으로 識이 六道의 몸을 받는다. 識의 집착이 있기에 名色을 키운다.


26-2) vij  na  sa nivi ate sa sk rapratyaya  gatau/
     sa nivi  e 'tha vij  ne n mar pa  ni icyate//


형성작용들을 緣으로 하는 識이 趣에 들어간다. 그래서 들어간 識에서 名色이 나타난다.


26-3) 名色增長故 因而生六入 情塵識和合 而生於六觸
名色이 자라나기에 그것을 因하여 六入이 생긴다. 六情(=六根)과 六塵(六境)과 六識이 화합하여 六觸을 生한다.


26-3) ni ikte n mar pe tu  a  yatanasa bhava /
      a  yatanam gamya sa spar a  sa pravartate//


名色이 나타날 때에 여섯 가지 감각영역이 발생한다.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 의존하여 접촉이 출현한다.


26-4) cak u  prat tya r pa  ca samanv h rameva ca/
     n mar pa  prat tyaiva  vij  na  sa pravartate//


눈이 형상(色)들과 注意力을 緣하여, 그렇게 名色을 緣하여 認識이 출현한다.


26-4) 因於六觸故 卽生於三受 以因三受故 而生於渴愛
六觸을 因하기 때문에 세가지 受가 발생한다. 세가지 受를 因하기 때문에 渴愛가 발생한다.


26-5) sa nip tastray     yo r pavij  nacak u  m/
     spar a  sa tasm tspar  cca vedan  sa pravartate//


형상(色)과 인식과 눈의 세가지가 화합하는 것, 그것이 접촉이다. 그 접촉으로부터 感受작용이 출현한다.


26-5) 因愛有四取 因取故有有 若取者不取 卽解脫無有
愛로 因하여 네가지 取가 존재한다. 取를 因하여 有가 존재한다. 만일 取하는 者가 取하지 않으면 바로 해탈하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26-6) vedan pratyay  t     vedan rtha  hi t  yate/
     t  yam  a up d namup datte caturvidham//


感受 작용에 緣하여 慾望(=渴愛)이 있다. 왜냐하면 감수된 대상을 慾求하기 때문이다. 慾求하는 중인 것이 네가지 종류의 取함을 취득한다.


26-7) up d ne sati bhava up d tu  pravartate/
     sy ddhi yadyanup d no mucyeta na bhavedbhava //


取함이 존재할 때에 取하는 자에게서 생존(有)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만일 취함이 없다면 해탈할 것이며 생존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6-6) 從有而有生 從生有老死 從老死故有 憂悲諸苦惱
有로부터 生이 존재한다. 生으로부터 老死가 존재한다. 老死로부터 憂와 悲 및 모든 苦惱가 존재한다.


26-8) pa ca skandh   sa ca bhavo bhav jj ti  pravartate/
     jar mara aduhkh di  ok   saparidevan  //


그리고 그 생존(有)은 五蘊이다. 생존에서 生(태어남)이 발생한다. 老死와 苦 등, 悲哀와 悲嘆을 가진 것들이 (발생한다).


26-7) 如是等諸事 皆從生而有 但以是因緣 而集大苦陰
이런 모든 일들은 다 生으로부터 존재한다. 단지 이런 까닭으로 막대한 苦의 蘊이 모인다.


26-9) daurmanasyamup y s  j teretatpravartate/
     keval‎!!!asyaivametasya du khaskandhasya sa bhava //


낙담(落膽)과 초조, 이것들은 生(태어남)에서 나타난다. 이처럼 오직 苦뿐인 집합체(蘊)가 발생한다.


26-8) 是謂爲生死 諸行之根本 無明者所造 智者所不爲
이것을 生死하는 諸行의 근본이라고 한다. 無明한 者가 짓는 것이지만 지혜로운 者가 하는 것은 아니다.


26-10) sa s ram l n sa sk r navidv n sa skarotyata /
      avidv n k rakastasm nna vidv  stattvadar an t//


그래서 無知한 자는 윤회의 뿌리인 형성작용들(諸行)을 짓는다. 그러므로 無知한 者는 (그런 것들을) 짓는 者이다. 知者는 진실을 觀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


26-11) avidy y   niruddh y   sa sk r   masa bhava /
      avidy y  nirodhastu j  nen syaiva bh van t//


無明이 사라질 때에 형성작용들(諸行)은 발생하지 않는다. 무명의 소멸은 이 (十二緣起의) 지혜를 修習(念想)함에 의한다.


26-9) 以是事滅故 是事則不生 但是苦陰聚 如是而正滅
이것이 사라지므로 이것이 생하지 않는다. 오직 苦뿐인 이 陰의 덩어리가 그렇게 하여 제대로 사라진다.


26-12) tasya tasya nirodhena tattann bhipravartate/
      du khaskandha  keval‎!!!a 'yameva  samyagnirudhyate//


이것 저것(=十二支의 前支)이 소멸함에 의해 이것 저것이(=後支)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 오직 苦뿐인 이 집합체(蘊)가 올바르게 사라진다.

 


第27 觀邪見品(30偈) 邪見에 대한 관찰


d   ipar k   n ma saptavi  atitama  prakara a 
(잘못된) 견해의 고찰이라고 이름하는 제27장(30게)


27-1) 我於過去世 爲有爲是無 世間常等見 皆依過去世
내가 過去世에 존재했나 존재하지 않았나, 世間은 常住하는가 등의 견해는 모두 과거세에 의존한 것이다.


27-1) d   ayo 'bh va  n bh va  ki  nv at te 'dhvan ti ca/
     y st      vatalok dy   p rv nta  samup  rit  //


도대체 내가 과거세(前生)에 존재했었나 존재하지 않았었나, 세간은 常住했는가 등의 見解들은 <以前의 限界>에 의거해 있다.


27-2) 我於未來世 爲作爲不作 有邊等諸見 皆依未來世
내가 미래세를 짓겠는가 짓지 않겠는가, 有邊인가 등의 여러 견해는 다 미래세에 의존한 것이다.


27-2) d   ayo na bhavi y mi kimanyo 'n gate 'dhvani/
     bhavi y m ti c nt dy  apar nta  sam  rit  //


내가 미래세에 존재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존재하겠는가, 또 限界등의 견해는 <나중의 限界>에 의거해 있다.


27-3) 過去世有我 是事不可得 過去世中我 不作今世我
과거세에 내가 있었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과거세에서의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않는다.


27-3) abh mat tamadhv namityetannopapadyate/
     yo hi janmasu p rve u sa eva na bhavatyayam//


과거세에 나는 존재했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전의(전생의) 생애들에서의 것, 그것은 결코 이것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27-4) 若謂我卽是 而身有異相 若當離於身 何處別有我
내가 바로 그것이지만 몸은 다른 모습을 띈다고 하겠지만 만일 몸을 떠난다면 어디에 따로 <나>가 존재하겠는가?


27-4) sa ev tmeti tu bhavedup d na  vi i yate/
     up d navinirmukta  tm  te katama  puna //


그것(=전생의 나)이 바로 나(=自我)라고 하겠지만 取가 구별된다. 취를 떠난 그대의 <나>는 다시 무엇이 있겠느냐?


27-5) 離身無有我 是事爲已成 若謂身卽我 若都無有我
몸을 떠나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은 이미 성립했었다. 만일 몸이 그대로 자아라면 그대에게는 자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27-5) up d navinirmukto n sty tmeti k te sati/
     sy dup d namev tm  n sti c tmeti va  puna //


取를 떠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 取가 바로 자아가 될 것이며 그대의 견해대로라면(va ) 다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꼴이 된다.


27-6) 但身不爲我 身相生滅故 云何當以受 而作於受者
몸은 결코 자아가 아니다. 몸의 相은 生滅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取로써 取하는 者를 짓겠느냐?


27-6) na cop d namev tm  vyeti tatsamudeti ca/
     katha  hi n mop d namup d t  bhavi yati//


또 取가 바로 자아(나)는 아니다. 그것(取)은 滅하고 또 生한다. 도대체 取가 어떻게 取하는 主體가 되겠느냐?


27-7) 若離身有我 是事則不然 無受而有我 而實不可得
만일 몸을 떠나서 자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 取 없이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런 것은 포착될 수 없다.


27-7) anya  punarup d n d tm  naivopapadyate/
     g hyeta hyanup d no yadyanyo no ca g hyate//


더우기 取와 다른 자아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다르다면 취가 아닌 것이 포착될 터이지만 (그런 것은)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27-8) 今我不離受 亦不卽是我 非無受非無 此卽決定義
지금의 자아는 取를 떠난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자아인 것도 아니다. 取가 없는 것도,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이치이다.


27-8) eva  n nya up d n nna cop d nameva sa /
      tm n styanup d no n pi n stye a ni caya //


이처럼 (자아는) 取와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取 그것도 아니며, 취가 없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이것이 정확한 지식이다.


27-9) 過去我不作 是事則不然 過去世中我 異今亦不然
과거의 나는 있지 않았다는 이런 일은 옳지 못하다. 過去世에서의 내가 지금과 다르다는 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27-9) n bh mat tamadhv namityetannopapadyate/
     yo hi janmasu p rve u tato 'nyo na bhavatyayam//


<過去世에 나(自我)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것, 그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전의 생애들(=前生들)과 다른 이것(今生)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7-10) 若謂有異者 離彼應有今 我住過去世 而今我自生
만일 다르다면 그것 없이도 응당 지금이 존재해야 한다. 내가 과거세에 머물러 있지만 지금의 나는 스스로 생한 꼴이 된다.


27-10) yadi hyaya  bhavedanya  praty khy y pi ta  bhavet/
      tathaiva ca sa sa ti  hettatra j yeta v m ta //


만일 이것(금생의 나)이 (前世의 나)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전생의 나)을 배제하여도 (이것, 즉 금생의 나는) 존재하게 되리라. 바로 그와 같이 그것(전생의 나)이 같은 상태로 존속하거나 혹은 거기서 죽지도 않은 것이 태어나게 되리라.


27-11) 如是則斷滅 失於業果報 彼作而此受 有如是等過
그렇다면 단멸되어 업과 그 과보가 소실된다. 저 놈이 짓고 이 놈이 받는, 그런 따위의 허물이 있다.


27-11) uccheda  karma    n  as tath nyena k takarma  m/
      anyena paribhoga  sy d evam di prasajyate//


斷滅이고, 業들의 소멸이다. 그래서 다른 이에 의해 지어진 業들이 다른 이에게 수용되는, 그런 따위의 오류에 빠지리라.


27-12) 先無而今有 此中亦有過 我則是作法 亦爲是無因
먼저는 없었는데 지금은 존재한다는 이 말에도 과실이 있다. 자아가 지어진 존재가 되기도 하고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27-12) n pyabh tv  samudbh to do o hyatra prasajyate/
      k tako v  bhaved tm  sa bh to v pyahetuka //


존재하지 않았는데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過失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자아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되든가 혹은 원인 없이 발생하는 것이 되리라.


27-13) 如過去世中 有我無我見 若共若不共 是事皆不然
그처럼 과거세에 내가 있었다, 없었다, 있으면서 없었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았다는 견해, 이것은 모두 옳지 못하다.


27-13) evam d   irat te y  n bh mahamabh maham/
      ubhaya  nobhaya  ceti nai   samupapadyate//


이와 같이 과거세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존재했다>, <그 兩者다>, <兩者가 아니다>라는 견해, 이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27-14) 我於未來世 爲作爲不作 如是之見者 皆同過去世
내가 미래세에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이처럼 보는 것은 모두 過去世의 경우와 동일하다.


27-14) adhvanyan gate ki  nu bhavi y m ti dar anam/
      na bhavi y mi cetyetadat ten dhvan  samam//


<未來世에 도대체 나는 존재할 것인가?>라든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이런 견해는 過去世(에 관한 견해)와 동일하다.


27-15) 若天卽是人 則墮於常邊 天則爲無生 常法不生故
만일 (전생에 천신이었다가 죽어서 현생에 인간으로 태어난 경우) 天神이 바로 지금의 인간이라면 常見이라는 극단론에 빠진다. 천신은 生함이 없(이도 존재하)는 꼴이 된다. 常住하는 존재는 生하지 않(고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27-15) sa deva  sa manu ya cedeva  bhavati    vatam/
      anutpanna ca deva  sy jj yate na hi    vatam//


그 天神 그대로가 인간이 된다면 그와 같은 것은 常住하는 것이 된다. 또 천신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리라. 왜냐하면 常住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27-16) 若天異於人 是卽爲無常 若天異人者 是則無相續
만일 天神이 인간과 다르다면 그것은 常住함이 없다는 말이다. 만일 천신이 인간과 다르다면 상속도 존재하지 않는다.


27-16) dev danyo manu ya ceda   vatamato bhavet/
      dev danyo manu ya cetsa tatirnopapadyate//


만일 인간이 天神과 다르다면, 그렇다면 常住하지 않는 것이 되리라. 만일 인간이 천신과 다르다면 相續이 성립되지 않는다.


27-17) 若半天半人 則墮御二邊 常及於無常 是事則不然
만일 半은 天神이고 반은 인간이라면 두가지 극단(二邊)에 빠진다. 즉 常住와 無常이다. 이것은 옳지 못하다.


27-17) divyo yadyekade a  sy dekade a ca m nu a /
      a   vata     vata  ca bhavettacca na yujyate//


만일 일부분은 天神에 속하고 일부분은 인간에 속한다면 非常住와 常住가 (동시에) 존재하는 꼴이 되리라. 그러나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27-18) 若常及無常 是二俱成者 如是則應成 非常非無常
만일 常住와 無常의 양자가 함께 성립한다면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 것 역시 성립해야 한다.


27-18) a   vata     vata  ca prasiddhamubhaya  yadi/
      siddhe na    vata  k ma  naiv    vatamityapi//


만일 非常住와 常住의 兩者가 함께 성립한다면 상주도 아니고 비상주도 아닌 것도 멋대로 성립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27-19) 法若定有來 及定有去者 先死則無始 而實無此事
어떤 존재가 만일 오는 것이 확실히 있고 가는 것이 확실히 있다면 生死는 시작이 없는 꼴이 되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없다.


27-19) kuta cid gata  ka citki  cidgacchetpuna  kva cit/
      yadi tasm dan distu sa s ra  sy nna c sti sa //


만일 그 무엇인가가 그 어디에서 와서 다시 그 어딘가에서 어디엔가로 가는 것이라면, 그렇기 때문에 윤회는 시작이 없는 꼴이 되리라. 그러나 그런 일은 없다.


27-20) 今若無有常 云何有無常 亦常亦無常 非常非無常
이제 만일 상주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무상한 것과 상주하면서 무상한 것과 상주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은 것이 존재하겟느냐?


27-20) n sti cecch  vata  ka citko bhavi yatya   vata /
         vato '   vata c pi dv bhy m bhy   tirask ta //


만일 그 무엇이건 常住하는 것은 없다면 상주하지 않는 그 무엇과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것>도, 또 <兩者를 떠난 이런 것>이 있겠느냐?


27-21) 若世間有邊 云何有後世 若世間無邊 云何有後世
만일 세간이 끝이 있다면 어떻게 後世(來生)가 있겠는가? 만일 세간이 끝이 없다면 어떻게 후세가 있겠는가?


27-21) antav n yadi loka  sy tparaloka  katha  bhavet/
      ath pyanantav  l loka  paraloka  katha  bhavet//


만일 世間에 한계가 있다면 어떻게 後世(來生)가 존재하겠는가? 그렇다고 세간이 無限하다고 하면 어떻게 後世가 존재하겠는가?


27-22) 五陰常相續 猶如燈火炎 以是故世間 不應邊無邊
五陰은 늘 상속하여 마치 등불의 불꽃과 같다. 그러므로 세간은 한계가 있거나 한계가 없어서는 안된다.


27-22) skandh n me a sa t no yasm dd p rci  miva/
      pravartate tasm nn nt nantavattva  ca yujyate//


蘊들(=五蘊)의 이런 연속(=相續)은 바로 등불의 불꽃과 같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無限하다거나 有限하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27-23) 若先五陰壞 不因是五陰 更生後五陰 世間則有邊
만일 선행하는 五陰이 파괴되고 그 오음을 因하지 않고서 다시 나중의 오음이 생기는 것이라면 세간은 한계가 있으리라.


27-23) p rve yadi ca bhajyerannutpadyeranna c pyam /
      skandh   skandh n prat tyem natha loko 'ntav n bhavet//


만일 선행하는 것들(五蘊)이 파괴되고 이 蘊들(오온)에 緣하여 (나중의) 저 蘊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경우 세간은 有限하리라.


27-24) 若先陰不壞 亦不因是陰 而生後五陰 世間則無邊
만일 선행하는 오음이 파괴되지도 않고 또 그 오음을 因하지도 않고서 나중의 오음이 생기는 것이라면 세간은 한계가 없으리라.


27-24) p rve yadi na bhajyerannutpadyeranna c pyam /
      skandh   skandh n prat tyem n loko 'nanto bhavedatha//


만일 선행하는 것들(五蘊)이 파괴되지 않고 그 蘊들(오온)에 緣하여 (나중의) 이 蘊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경우 세간은 無限하리라.


27-25) 若世半有邊 世間半無邊 是則亦有邊 亦無邊不然
만일 세계가 반은 유한하고 반은 무한하다면 이것은 유한하기도 하면서 무한하다는 것인데 그럴 수 없다.


27-25) antav nekade a cedekade astvanantav n/
      sy dantav nananta ca lokastacca na yujyate//


만일 (세계가 시간적으로) 일부분은 有限하지만 일부분은 無限하다면 세계는 유한하면서 또 무한하기도 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27-26) 彼受五陰者 云何一分破 一分而不破 是事則不然
그렇게 오음을 취한 者가 어떻게 일부분은 파괴되고 일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느냐? 이것은 옳지 못하다.


27-26) katha  t vadup d turekade o vina k yate/
      na na k yate caikade a eva  caitanna yujyate//


무엇보다도 우선 어떻게 取하는 主體의 일부분은 소멸되는데 일부분은 소멸되지 않는가? 그렇게 이것은 타당하지 않다.


27-27) 受亦復如是 云何一分破 一分而不破 是事亦不然
取도 역시 마찬가지여서 어떻게 일부분은 파괴되고
일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이것도 역시 옳지 못하다.


27-27) up d naikade a ca katha  n ma vina k yate/
      na na k yate caikade o naitadapyupapadyate//


도대체 어떻게 取의 일부분은 소멸되고 일부분은 소멸되지 않겠는가?
이것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27-28) 若亦有無邊 是二得成者 非有非無邊 是則亦應成
만일 한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것,
이 양자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라면 한계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는 것,
이것도 역시 성립할 수 있으리라.


27-28) antavacc pyananta  ca prasiddhamubhaya  yadi/
      siddhe naiv ntavatk ma  naiv nantavadityapi//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양자가 만일 성립한다면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는다는 것도 기꺼이 성립할 것이다.


27-30) 一切法空故 世間常等見 何處於何時 誰起是諸見
일체의 존재가 空하기 때문에 세간은 상주한다는 등의 견해,
이 모든 견해를 어디서, 어느 때, 누가 일으키겠는가?


27-29) atha v  sarvabh v n     nyatv cch  vat daya /
      kva kasya katam   kasm tsa bhavi yanti d   aya //


그러면 일체의 존재가 空性이기 때문에 常住등의 견해들이 어디에, 무엇에 대해, 누구에게,
어째서 발생할 수 있겠는가?


27-30) 瞿曇大聖王 憐愍說是法 悉斷一切見 我今稽首禮
大聖王 瞿曇께서 연민의 마음에서 이 法을 설하셔서
모든 견해를 다 끊어 주셨기에
저는 이제 머리 조아려 예배드립니다.


27-30) sarvad   iprah   ya ya  saddharmamade ayat/
      anukamp mup d ya ta  namasy mi gautamam//


(잘못된) 모든 견해를 제거하기 위해 연민을 갖고 正法을 설해 주셨던 가우따마 그분께 귀의합니다.

 

 

 

 

 

 

 

 

[출처 : http://blog.daum.net/comprehensive]

 

◈ 중론(中論) - 원문 및 해설 ◈

중론(中論) 중론은 모두 27장 448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관인연품 : 연의 고찰(16게) 2. 관거래품 : 가는 것과 오는 것의 고찰(25게)3. 관육정품 : 눈등의 지각 기관의 고찰(8게)4. 관오음품 : 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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