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관사상

용수보살(龍樹菩薩, 나가르주나) - 공(空)사상의 확립자

수선님 2022. 1. 9. 12:28

용수보살(龍樹菩薩, 나가르주나)

 

용수(龍樹;Nagarjuna), 그는 대승불교의 모든 학파에서 제2의 부처님으로 추앙될 만큼 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로서 공(空)의 논리를 체계화한 煞幌�(中觀派)의 시조다.


인도의 대승불교를 연구하여 그기초를 확립하여 놓아 대승불교를 크게 선양하였다. 인도 제14조이며 공종(空宗)의 시조이다.  용수보살은 남인도 바라문 종족 출신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깨달음이 기이하여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법이 없었다.
 

갓난아이였을때, 여러 바라문이 각 게송이 32자로 이루어진 4베다 경전 각 4만 게송을 외우는 것을 듣고 그 문장을 모두 읊고 그 뜻을 이해했다. 약관의 나이에 여러 나라에 이름을 떨쳐 독보적이었고 천문. 지리. 도위. 비참 및 여러 도술을 종합하여 알았다.


뜻이 맞는 친구 세 명도 역시 시대의 호걸들이었다.
 

서로 의논하여 말하길 "천하 이치로 신명을 열고 심오한 뜻을  밝히고 아는 일은 우리가 이미 다 마쳤는데 , 다시 무엇으로 스스로를 즐겁게 할 수 있는가?욕망을 펴서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해 보는 것이 일생의 최고 즐거움일 것이다. 그러나 바라문의 힘은 왕의 힘과는 다르니  어떤 방법으로 그 즐거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오직 몸을 숨기는 술법이 있어 그 즐거움을 갖출수 있을 것이다."
 

네 사람은 서로 마음에 거스름이 없었으므로 술사에게 가서 은신법을 구하였다.


술사는 생각하기를
'이 네 명의 바라문은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모든 생명들을 풀뿌리와 같이 여긴다. 지금은 은신술 때문에 굴욕스럽게 나에게 왔지만 , 이 네 바라문은 재주가 비상하여 절세적이고 알지 못하는 것이 이 천한 법뿐이다. 내가 만약 그것을 가르쳐 주면 얻고 나서 반드시 나를 떠나고 다시는 나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그 약을 주어 사용케 하고 약의 제조법은 알지 못하게 하면 그 약이 떨어지면 반드시 다시 와서 영원히 나를 스승으로 섬길 것이다.'


이에 술사는 각자에게 푸른 약을 하나씩 주며 말하였다. "너희들은 조용한 곳에 있으면서 물에 그것을 갈아서 눈거풀에 바르면 너희의 형체는 숨겨져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용수는 이 약을 갈 때에 그 약 기운을 알아채고 약성분의 많고 적음을 나누었는데 조금도 빠진 것이 없었다. 돌아가 약사에게 얻은 약이 70여종으로 나뉘었음을 이야기하니 많고 적음이 모두 그 처방과 같았다.
 

약사가 묻기를 "그대는 무엇으로 그것을 알았는가?"
대답해 말하였다. "약 자체에 기미가 있으니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술사가 탄복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은 소문을 듣기조차 어려운데 하물며 서로 만났으니 어찌 나의 천한 술법이 아깝겠는가?' 즉시 갖추어 가르쳐 주었다.
 

네 사람은 술법을 얻고는 뜻대로 자유롭게 항상 왕궁에 들어갔다. 궁중의 미인은 모두 능욕을 당하였다. 백여일 후에 궁중 사람 가운데 임신한 자가 있어 두려워하며 왕에게 고하곤 죄를 면해 주기를 청하였다.
 

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이 무슨 상서롭지 못한 괴이한 일인가?"

 

모든 지혜로운 신하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나이든 신하가 있어 말하기를 "무릇 이와 같은 일에는 응당히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혹은 귀신, 혹은 방술이니  가히 미세한  흙으로써 모든 문에 뿌려 병사로 하여금 그것을 지키게 하고 다니는 사람을 막아야 합니다 만약  방술이라면 들어와도 발자취가 나타날 것이니 무기로써 제거하고 , 만약 귀신이라면 들어와도 발자취가 없을 것이니 가히 방술로써 제거할 수 있습니다."

즉시 문지기에게 명령하여 시험케 하니 네 사람의 발자취가 보였다. 빨리 달려가 왕에게 고하니 왕이 장수, 역사 수백인과  궁으로 들어가 모든 문을 닫게 하였다. 모든 역사로 하여금 칼을 휘둘러 허공을 베게 하니 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오직 용수만이 왕의 옆에 붙어 의지하였는데, 왕의 머리 7척곁에는 칼이 이르지 못하였다.
 

용수는 이때에 욕망이 괴로움의 근본이며 모든 화의 근본임을 깨달았다.
 

덕을 패하고 몸을 위태롭게 하니 모두 이것에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곧 스스로 맹세 하여 말하기를  "내가 만약  탈출할 수 있다면 마땅히 사문에게 나아가 출가법을 받으리라." 곧 탈출하여 산에 들어가 부처님탑에 나아가 출가하여 계를 받았다.


구십일 동안에 삼장을 다 외우고 다시 다른 경을 구하였으나, 얻을 곳이 없었다. 마침에 설산에 들어갔다. 산중에 탑이 있고 그 탑안에 늙은 비구가 있었는데 대승불교의 경전을 그에게 주었다. 용수는 외우고  받들며 사랑하고 좋아했으며  비록 실제의 뜻을 알았으나 , 날카롭게 통함을 얻지 못했다.


모든 나라를 돌아다니며 다시 남은 경을 구하였으나. 염부제 가운데에서도 얻지 못했다. 외도 논사와 사문의 의종을 모두 다 꺾어 항복케 하였다.


외도의 제자가 말하길
"스승은 일체지인이나, 지금은 불제자이지요. 제자의 도는 묻고 받들기에 부족하니 아직 충분하지 못하오 . 하나의 일이라도 충분하지 않으면 일체의 지혜라 할 수 없소."
 

말이 궁하고 마음이 굴복하여 즉시 삿되고 교만한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였다. "세계의 법 가운데 나루터나 길이 될 만한 것은 많다. 불경이 비록 오묘하나 이치로써 미루어 생각하면 짐짓 극진하지 못함이 있다. 극진하지 못한 속에서 미루어 부연하고 그것으로써 후학을 깨우친다면 이치에 어긋나지않고 일에 잘못이 없으니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이 일을  생각하고 나서 곧 그것을 행하고자 스승의 가르침과 계율을 세우고 다시 의복을 지어 불법을 부촉하여 조금 다름이 있게 하였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음을 보이고 날을 택하고  시기를 가려 가르침을 주었다. 제자에게는 새로운 계를 받고 새로운 의복을 입으라 명하고 자신은 홀로 조용한 곳에 수정으로 지은 방에 있었다.
 

대용보살이 이것을 보고  그를 가련히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즉시 그를 받아들여 바다에 들여보내어 궁전에 있는 칠보화로 꾸며진 함을 열고  모든 방등의 심오한 경전과 한량없는 묘한 법을 그에게 주었다. 무량한 오묘한 법을 주니 용수보살은 받아 읽은지 90일 만에 이해하고 통하여서  마음은 깊이 들어 보배로운 이익에 들어가 체득하였다.
 

용이 그 마음을 알고  물어 말하였다.
"경은 모두 읽어 보았는가?"
 

용수보살이 답해 말하기를
"그대의 모든 함속의 경전은 많기가 한량이 없어 다할 수 없다.

내가 읽은 것이 이미 염부제보다 열배는  된다."
 

용이 말하길
"나의 궁중에 소유한 경전은 다른 곳의 경전과 비교하면 그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용수보살은 이미 모든 경의 한 모양을 얻고 무생법인(無生法印)을 구족하였다.


용이 돌려보내자 남인도에 부처님법을 크게 홍포하고 외도를 꺽어 항복받았으며 대승불교를 널리 밝혔고 우바제사십만 게를 지었다. 또 무외론 십만게를 지었는데 중론(中論)은 그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때에 어떤 바라문 이 주술을 잘 알았는데, 자신의 능력으로 용수보살과 승부를 겨루고자 천축국왕에게 말씀드리기를
"내가 능히 저 비구를 누를 수 있습니다."


왕은 당연히 그것을 시험하였다.
 "그대는 크게 어리석구나. 이 보살은 밝기가 해와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투며, 지혜는 성인의 마음과 더불어 비춘다. 그대는 어찌하여 겸손하지 못하여 받들어 공경하지 않느냐?"
 

바라문이 말하길
"왕은 지혜로운 사람인데 , 어찌 이치로써 시험하지 않고 억눌림을 당하십니까?"
 

왕은 그 말의 극진함을 보고 용수보살에게 다음날 정천전위에 함께 앉기를 청하였다.. 바라문이 나중에 와서 곧 대궐앞에 주술로 큰 연못을 만들었는데 넓고 길며 청정하였다. 가운데 천 개의 연꽃이 있어 스스로 그 위에 앉아 용수보살 에게 과시하였다.
 

"그대는 땅위에 앉아 있으니 축생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도 청정한 꽃위에 앉아있는 대덕지인과 겨루어 논의하려는가?"
 

이에  용수보살이 또한 주술을 사용하여 여섯이빨의 흰 코끼리로 변하고 연못의  물위로 가서 그 꽃을 좌석에 나아가 코로 감아 연꽃 좌석을 비틀어 뽑아 높이 들어 땅에 던져 버렸다.
 

그 바라문은 허리를 다쳐 끝내 힘이 빠져 용수에게 귀명했다.
"제가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대사를 훼방하고 욕되게 하였습니다. 원컨대 가련히 여겨 저를 받아주시어 이 우매함을 열어주소서....."


한편  다른 남천축 국왕이 주변 나라를 다 거느리고 사도를 믿고 사용하여 사문과 부처님 제자들은 한번도 볼 수가 없었는데 나라의 사람들은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그 가르침을 따랐다.
 

용수보살이 생각하기를
"나무는 뿌리를 베지 않으면 가지가 기울지 않고

사람이 주인도 교화되지 않으면 도가 행해지지않는다."
 

그 나라의 정치하는 법에 왕가에서 돈을내어 숙위를 고용하는데 용수보살이 이에 응모하여 그 장수가되었다. 창을 메고 앞을 달리며 행오를 장돈하고 마음을 다스림에 위엄을 안해도, 엄하게 안해도 명령이 시행되었으며 법을 드러내지 않아도 사람이 따랐다.
 

왕이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물었다.
"이는 어떤 사람인가?"


시종이 답하여 말했다.
"이 사람은 모집에 응하였으나 녹은 받지 않고 또 돈도 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에 있어서는 공정하고 삼가하며 한가할때 익힘이 이와 같습니다. 그 뜻이 무엇이고 우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왕이 그를 불러 물었다.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용수보살이 대답해 말했다.
"저는 일체지인입니다."
 

왕이 크게 놀라 물었다.
"일체지인은 세상에 오직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대가 스스로 일체지인이라 말하니 무엇으로 증험하겠느냐?"
 

용수보살이 말하길,
"지혜가 있음을 알고자 원하면 마땅히 알고 있는것을 애기해 보십시요."
 

왕은 즉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지혜로운 임금으로 대논의사인데 물어서 능히 굴복시켜도 오히려 이것이 명예롭지 못한데  일단 굴복시키지 못하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만약 묻지 않는다면 바로 한번에 굴복을 당한 것이 되니." 주저하고 의심하며 한참있다가 마지못해 그에게 물었다. "하늘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용수보살이 대답하기를
"하늘은 지금 아수라와 더불어 싸우고 있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말하자면 사람이 목이 막혀 토하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말을 비판하려고 해도 다시 증거할 수없엇고  그것을 인정하려해도 이를 가히 밝힐 수 없었다..
 

말하지 않는 사이에 용수보살이 다시 말하였다.
"이는 허황된 논의로 승리를 구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왕은 잠시 기다리시오."


잠깐 증험하는 말이 끝나자 공중에서 문득 창과 방패가 얽혀 떨어졌다. 왕이 말했다.

"창과 방패가 비록 전투하는 무기이나 그대는 어찌하여  반드시 이것으로

하늘과 아수라가 싸우는 것인지 알 수 있겠소?"


용수보살이 말하길

"헛된 말을 꾸미는 것보다 실제 한번 보시는 것이 낫습니다."

 

말을 마치자, 아수라의 손과 발가락 및 그 귀와 코가 허공으로부터 내려왔다. 또 왕과 신하, 백성, 바라문의 무리가 허공 가운데 맑게 개어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함을 보게 하였다.
 

왕은  곧 머리를 조아리고 그 법의 교화에 감복하였으며, 대궐의 일만  바라문이 다 묶은 머리를 깎아버리고 성취계를 받았다. 그 당시에  한 소승법사가 있어 항상 분하고 비뚤어진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


용수보살이 장차 세상을 떠나려 하면서 묻기를
"그대는 내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하느냐?"


"진실로 원하지 않소."
 

물러나 한가한 밤에 들어가 여러날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으므로 제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마침내 매미가 껍질을 벗은 듯이 열반에 들었다.
 

 

용수보살이 열반에 드신 이래로 지금에 이르러 백년이 지났는데 남인도의 모든 나라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공경하여 받들기를  부처님같이 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나무아래서 그를 낳았는데 거기에 연유하여 아주타나라 했는데, 아주타나는 나무이름이다. 용(龍)으로 인해 그 도가 완성되었으므로 '용' 을 글자에 배치하여 용수(龍樹)라 한다.  나가르쥬나, 즉 용수보살은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전해받은 제14대 조사이다.
 

처음 대승선을 제창하고 대승불교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대승불교의 소의경전이라 할 수 있는 화엄경, 반야경, 금강경, 금강삼매경 등이 그의 손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용수가 제창한 대승불교는 '대승선'이라고 하는 수행체계를 바탕으로 해서 세워졌다.대승선의 핵심이 바로  '중관(中觀)'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中道에 입각해서 세워진 관법이 '중관법'인데 이는 선정법에 속하는 수행법이다.
 

중(中)이란 , 근본을 여의지 않으면서도 경계와 동떨어지지 않는 자리를 말한다. . 中의 자리는  본래 갖추고 있는 자리가 아니다. 이는 세워서 갖춰야 하는 자리이다. 중관이란 그런 中을 관(觀)하는 것이다.
 

용수는 중의 자리를 세우고, 중의 자리를 활용하고 , 중의 자리를 진보시키는 법을 통틀어서 중도제일의제라 했다.
 

대승의 수행체계는 중관을 통해 본성을 보는 공관법과 중관을 통해 경계를 보는 가관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일러  삼관법이라 하는데 그 개략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관법은 중심을 세워서 그 상태를 관하는 법이다.
공관법은 중심을 통해 근본을 비추는 법이다.
가관법은 중심을 통해 경계를 비추는 법이다.


용수가 확립한 삼관의 법은 중국으로 전해져 천태지관의 모태가 되었고 우리나라로 전해져서는 신라불교의 핵심 수행법이 되었다.
 

원효나 의상 그 밖의 수많은 선지식들이 삼관의 법에 입각해서 수행을 했으며 그에 대한 수 많은 저서를 남겼다. 원효의 그 유명한 금강삼매경소와 대승기신론소 등도 모두 삼관법에 입각해서 경과 논을 해석한 것이다.
 

용수가 제창한 대승의 교육체계는 삼관을 모태로 해서 여덟진로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그를 팔종(八宗)의 종주 부르기도 한다.
 

 

참고로 중론의 삼제계를 소개한다.
 

중도(中道)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인연으로 생긴 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 나는 그것을 공이라 설한다.
역위시가명(亦爲是假名) 그것은 또한 가명이며
역시중도의(亦是中道義) 또한 중도 그 자체이다.


<용수의 중론에서>
 

이 게송은 천태대사가 매우 주목하여 중도를 공(空) 이라 이해하고, 가(假)라고 이해하고 , 공과 가를 동시에 뗄레야 뗄 수 없는 중도(中道)로 파악하라고 가르쳤다 합니다. 공.가.중 삼제의 세 가지로 이해하라며 이 게송에 삼제게라 이름붙였다고 합니다.
 

이 게송은 원효대사도 중요하게 생각하여 자신의 저술인 <보살영락본업경소>에서 강조하였다고 합니다. 

 

[출처 :청산백운 원문보기▶   글쓴이 : 포대화상]

 

 


 

공(空)사상의 확립자, 용수(나가르주나)

 

 

<중론>으로 공사상을 체계화시킨 용수
용수의 출현에 의해 초기 대승경전의 사상이 <중론>에서 공사상으로 확립되었다.


용수의 생애


용수는 2세기경에 남인도에서 출생했으며 범어명으로 나가르주나 이다. 이는 그의 모친이 아르주나 나무 아래에서 출산했기 때문이며, 나가(龍)의 인도를 받아 도를 이루었다는 설화에 근거하여 나가와 아르주나를 합쳐 나가르주나라고 불렀다.


용수와 나가와의 인연은 다음과 같다. 용수는 출가하여 소승불교를 독파하고 대승을 배워 만심(慢心)에 차 있었다. 이를 본 마하나가 보살이 용수를 용궁으로 인도해 보물창고를 열어 대승경전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90일 동안 공부하여 심오한 이치를 깨달았다.


용수의 생애에 관한 여러 가지 후대의 역사적 기록이 있으나 믿을 만한 것은 드물다. 용수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실존한 인물인 라집의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이 가장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용수와 관련된 고고학적 자료로는 남인도 하이데라바드의 동남쪽 크리슈나 강변에 나가르쥬나콘다라는 지명이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기원전후에 샤타바하나 왕조가 남인도를 지배할 때 용수가 한 왕과 친교를 맺은 사실이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용수가 저술한 <권계왕송(權戒王頌)>과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이 왕에게 보낸 교훈적 서한이라는 점에 착안해 보면 왕과 친교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따라서 라집과 동시대인이었던 중국불교학자들 혜원과 승조 등은 용수를 대략 2-3세기의 인물로 보고 있으며 일본 학자들은 150-250년경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용수는 처음에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사상에 정통하였으나, 후에 대승불교에 입문해 공사상을 철학적으로 대성시켰다. 말년에 남인도의 길상산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용수의 저술들


용수의 저술이 많이 있으나 월칭이 인정하는 8종이 가장 신뢰도가 높다. <중론(中論)>은 용수의 대표적 저술로서 이를 통해 중관학이 성립했다.


<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은 범본은 현존하지 않고 한역과 티벳역이 남아 있다. 사상적으로 연기가 유무와 생멸의 양 극단을 넘어선 불이(不二)임을 밝히고 세간의 존재가 무자성이고 공임을 강조하여 유자성론을 설파하는 인도 종교와 부파불교를 비판하고 열반의 경지를 말하고 있다.


<공성칠십론(空性七十論)>은 대론자와 문답을 통해 일체가 공성임을 밝히고 공성을 인식하여 깨달음을 증득할 것을 가르친다. 이외에도 <보행왕정론>, <권계왕송>, <광파론>, <인연심론송. 釋>, <희쟁론>등을 들고 있다.


용수는 <희쟁론>, <광파론>등에서 설일체유부, 상카야 학파, 바이세시카 학파, 니야아 학파 등의 실재론을 비판하였다. 더 나아가 <광파론>에서는 나야아 학파의 체계를 전체적으로 비판하였으며 <중론>이나 <희쟁론>에서는 학파 자체보다는 철학적 오류를 지적하였다.


월칭이 선정한 8종의 용수의 저술을 제외하고 한역에 남아 있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대지도론>과 <십주비바사론>이다. 이 둘은 모두 범본과 티벳역은 없고 한역만이 현존하며 라집이 한역한 것이다.


<대지도론>은 <대품반야경>을 해석한 것이고, <십주비바사론>은 <화엄경> [십지품]을 풀이한 것으로 대승보살의 수행체계를 해석한 것이며, 특히 초지인 환희지(歡喜地)와 제 2지인 이구지(離垢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중론>에 나타나는 용수의 사상


<중론>은 용수의 주요한 저술로서 27품 450여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론>의 중요한 사상은 공이 연기라는 사실과 이제설(二諦說, 두 가지 진리)로서 세속제(世俗諦)에서 승의제(勝義諦)와 열반을 추구하는 것이 골자이다.


용수가 연기설이 공사상임을 이론적으로 이야기한 곳은 <중론> 제24장 18게이다.

“연기하는 것, 그것을 공성이라고 칭한다.

그것은 임의로 시설(施設)되 것(假名)이며 중도(中道)그것이다.”


여기서 용수는 연기하는 것은 공이며 사물이란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무자성이며 고정불변이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연기=공=무자성이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용수는 고정불변의 자성을 부정하는 입장에서 자성의 개념을 우리들의 망상인 희론(戱論)에서 일어난다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중론>의 귀경게(歸敬偈)에서 연기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연기는 불멸(不滅). 불생(不生). 부단(不斷). 불상(不常).

불래(不來). 불거(不去). 불이(不異). 불일(不一)하며

희론의 적멸(寂滅)한 것이며

길상(吉祥)한 것임을 가르쳐 주신 정등각작(正等覺者)에게 귀의한다.”


여기서 용수는 연기란 일체의 대립을 초월한 것임을 이야기 하고 제26장 <관십이인연품>에서 석존이 말한 십이인연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한편 세속제와 승의제의 이제로 구별하는 이제설은 세속이 연기와 공성으로 지탱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승의제이며 열반으로 향하는 길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따라서 제24장에서

 

“세속제에 의하지 않으며 승의제는 성립되지 않고

승의제에 의하지 않으면 열반은 얻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이처럼 <중론>에서 용수는 <반야경>에서 말한 공사상 을 석존이 말한 연기설과 같은 위치에 놓고 이론적으로 해명함으로써 대승사상을 확고히 성립했다.

 


*메모


용수는 젊은 날 은신술을 배워 청약을 바르고 친구들과 함께 왕궁을 침입해 후궁을 범해 임신시켰다. 이에 왕이 노해 모래를 뿌린 방에 수많은 군사들로 하여금 칼을 뽑아 공중으로 찌르게 하자 친구들은 죽고 용수는 왕의 의자 뒤에 숨어 목숨을 부지했다. 이후 용수는 출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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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무아를 근본 입장으로 표방하자 인도의 종교와 사상계에서는 지금까지도 이 무아설을 가장 천박한 수준으로 비난하고 있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모든 것이 생겨났다니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요, 허무주의의 가르침이라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설명하면서 불교를 아무 것도 아닌 가르침으로 비하하려 하고 있다.


후대로 오면서 불교가 인도를 떠나자, 그들은 비슈누 신의 9번째 화신이라고 적당히 받아들여 찬사를 보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말세인 깔리유가를 빨리 망하게 하고 정법시대를 빨리 실현시키기 위한 파멸의 가르침이니 받아들이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고, 지금 대다수 인도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용수 스님은 그 대작인 <희쟁론>에서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연기(緣起, 조건지워져서 생겨남)이기에 무아요, 무아이기에 공(空)이라고. 이것은 용수 스님의 대작인 중론을 비롯한 다른 논서에서도 일관된 입장이요, 뿐만 아니라 불교의 근본입장이기도 하다.


부처님은 무아와 연기만을 강조하셨는데, 용수 스님은 왜 여기다가 공이라는 재음미를 더붙였을까?


그것은 시대적 요청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인도 지성들이 불교가 생긴 후 지금까지도 받아들이기를 강하게 거부할 뿐 아니라 없애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는 게 무아의 가르침이다. 자아(아뜨만=브라흐만)가 있다고 그들 나름의 논리로 주장하고 믿고 헌신함을 모든 생활의 근본으로 여기는 인도인들 입장에서 무아의 가르침은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다.


어떤 우빠니샤드를 읽어보아도 사실 그것은 저 아뜨만과 브라흐만의 예찬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역자가 인도에 있으면서 원문으로 읽어본 몇 번을 읽었다. 그러면서 역자가 신물나도록 느낀 것은 자아에 대한 엄청난 집착을 빼버리고 나면 인도사상에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 무아의 가르침을 그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들이 여러 중요한 논서에서 그렇게 자아를 강조하고 찬양하고 경배해 마지않는 것은 아마 이런 불교의 입장을 너무나 의식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두 귀를 틀어막고 이 무아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증명하여 보이려 하고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고 해 내려온 게 불교와 천 오백여 년을 지속해온 사상 논쟁이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가장 논리적이어야 할 후대 인명(논리)학 논서에서조차도 “불교 논사는 ‘무아다‘라고 외치고 절벽에서 떨어지자 즉사해 버렸고 그들 나야(인명) 논사는 ’자아가 있다‘라고 외치고 절벽에서 뛰어내렸지만 살았다. 그래서 자아는 있고 위대하다.”고 마지막으로 결론을 짓고 있을까!


그러다 보니 용수 스님도(물론 용수는 이보다 휠씬 이전의 사람이지만) 이런 무아의 가르침을 공이라는 술어로 재포장해서 인도 사상계에 제시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이해해보고 싶다.

 

 

[자료출처]

 

소운 스님의 “하룻밤에 읽는 불교”177~179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해” 393~6p

 

 

[출처 : http://blog.naver.com/arama123]

 

 


 

무비스님의 직지심경(直指心經)해설 27 서천의 조사(西天祖師)
제14조 용수 존자(龍樹尊者) <무생의 도리를 알다>

 

 

제14조 용수 존자가 가비마라 존자에게 법을 얻은 뒤에 남인도에 이르니 그 나라의 사람들은 복업(福業)을 많이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용수 존자의 미묘한 이치를 설하는 것을 듣고는 모두들 말하기를,


“사람에게 복업이 있는 것이 세상에서는 제일인데
한갓 불성(佛性)을 말하니 누가 능히 그것을 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용수 존자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불성을 보고자 한다면 먼저 반드시 아만(我慢)을 제거해야 한다.”


그들이 말하기를,
“불성이 큰 것인가. 작은 것인가?”


존자가 말하기를,
“불성은 큰 것도 아니며 작은 것도 아니며
넓은 것도 아니며 좁은 것도 아니며
복도 아니며 과보도 아니며
죽는 것도 아니며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그들이 수승한 이치를 듣고는 모두 처음의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다.


용수 존자가 다시 앉은 자리에서 자유자재한 몸을 나타내는데 마치 둥근 보름달과 같았다. 그들은 오직 법을 설하는 소리만 듣고 용수 존자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는데 그 대중들 가운데서 한 장자의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가나제바였다.


그가 대중들에게 이르기를,

“여기 이 존자가 불성의 체를 나타내어서 우리들에게 보인 것이다. 무엇으로써 아는가 하면 대개 형상이 없는 삼매란 그 형상이 둥근 달과 같고 불성의 뜻은 툭 터져서 비고 밝으니라.” 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니 둥근 모습은 곧 사라지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앉아서
게송을 설해 말씀하였다.


“몸이 달의 둥근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를 표현한 것이요,
설법을 하되 그 형상이 없는 것은
소리도 색깔도 아님을 밝힌 것이니라.” 
 


그 대중들이 게송을 듣고는 생사가 없는 이치를 몰록 깨닫고 모두 출가하여 해탈을 구하기를 원하므로 존자가 곧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주어 삼보에 귀의하게 하였다.


그리고 가나제바에게 말하기를,
“여래의 미묘한 법을 지금 마땅히 그대에게 부촉하노니 나의 게송을 들어라.


“숨고 나타나는 이치를 밝히고자하여
비로소 해탈의 이치를 설하노라.
법에 대하여 마음이 증명하지 아니하면
성냄도 없고 기쁨도 없느니라.”
 


법을 부촉하여 주고 나서 월륜삼매에 들어가 고요히 선정에 들었다.

 


[해설] 용수(龍樹150?-250?)보살은 남인도 출생으로서 북인도로 가서 당시 인도의 모든 사상을 공부하였다. 다시 초기 대승불교사상을 연구하고 그 기초를 확립하여 8종(八宗)의 조사(祖師)로 불리는 위대한 성자다.


일체의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공의 입장에서 보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후세에 중관파(中觀派)라고도 불렸던 분이다. 주요 저서로는<중론(中論)과 회쟁론(廻諍論), 광파론(廣破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공칠십론(空七十論), 대지도론(大智度論)(100권),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이 있다.


용수 존자가 교화를 펴려고 남인도에 갔을 때 그 곳 사람들은 생사를 해탈하는 불생불멸의 깊은 이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복업(福業)에 대한 것만 믿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직 복업에 대한 것뿐이다.


불교의 진리가 아무리 참되고 바르고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눈앞의 이익과 손해에만 뜻이 있고 복이 되고 죄가 되는 일에만 마음이 있다면 생사를 해탈하는 불생불멸의 높은 진리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현금 한국불교의 현상을 살펴보더라도 한편에서는 언필칭 불생불멸의 생사해탈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세속적으로 복이 되고 이익이 되는 길을 찾아 북새통을 이루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세속의 길과 열반의 길이 나눠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용수 존자는 이 두 가지의 길에서 불교가 불교로서의 가치관에 입각한 위대한 길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 세속의 가치관대로 복업의 이치만을 설한다면 그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다. 불교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의미를 잃게 된다.


법문을 듣는 대중들이 불성의 이치를 이해를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생사해탈의 길인 불성의 이치를 설법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직지심경>을 편찬하신 백운화상은 이 사실을 기록하여 우리들에게 들려준 것이다. 불교를 운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대목에서 진정한 불교관을 확립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불교로써 사람들에게 전법하고 교화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 無比]

 

 

 

 

 

 

 

 

 

 

 

 

용수보살(龍樹菩薩, 나가르주나) - 공(空)사상의 확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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