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알기

법화경(法華經)이란 어떤 경전인가

수선님 2022. 10. 23. 13:34

1. 경전의 편집

 

붓다 입멸 이후 100년이 지나서 분열이 시작된 불교는 끝내 20개 부파로 갈라졌다. 하지만 불교는 곧이어 기존 불교의 분파보다 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서력기원 전후가 되자 그때까지의 부파불교에 대한 개혁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개혁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부파불교를 '진리에 이르는 작은 탈것(小乘) 즉 소승불교라 비난하고 자신들이 시작한 불교운동을 '커다란 탈것(大乘)" 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새로운 경전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곧 대승경전이다.

 

대승경전은 각자의 사상적 주장에 따라서 여러가지가 편찬되었다. 그중에서도『법화경』은 기원후 50년경에서 150년 사이에 걸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여러 종류의 법화경(法華經)

 

한역된 법화경

먼저『법화경』의 한역본과 원전에 대하여 알아보자.『법화경』의 한역은 전역(全譯)과 부분역(部分譯)을 합해 여러 종류에 이른다. 전역된 경전만 해도 옛부터 6역(六譯).3존(三存). 3결(三缺)이라 하여 여섯 종류가 번역 되었는데 그중 셋은 남아 있고 셋은 없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현존하는 한역본은 286년에 축법호가 번역한『정법화경(正法華經)』10권 27품, 406년에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권 27품(훗날 권28품으로 됨), 601년에 사나굴다와 달마급다가 번역한『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7권 27품 세가지이다. 이중『첨품묘법연화경』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을 보정한 번역본이다.

 

번역 연대로 보면 축법호가 번역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축법호가 사용한 원전이 제일 오래된 형태의 것이라는 증거는 안된다. 원본이 사라져 버려서 어느 번역본이 가장 오래된 원형인가를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마라집의 번역본이 가장 잘 번역된 명역(名譯)이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법화경』은 이밖에도 481년에 담마가다야샤(曇摩伽陀耶舍_번역본『무량의경(無量義經)』을 개경(開經)으로 해서 담마밀다의『관보현보살행법경』을 결경(結經)으로 하는 이른바 '법화삼부경'을 성립 시켰다.

 

원전사본의 발견

『법화경』의 원전은 그 사본(寫本)이 근년에 와서 네팔 캐시미르 중앙아시아에서 발견 되었다. 그 계기를 만든 것은 영국의 호지손이란 사람이다. 그는 네팔 주재 공사 였을때 불경의 범어본 사본을 수집했는데 그중에『법화경』의 사본도 들어 있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 경의 원본 사본이 발견 되었다.

 

『법화경』사본은 대부분이 네팔 계통의 것과 중앙 아시아 계통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네팔계 사본은 완전한 형태의 것이 많다. 이에 비해 중앙 아시아계 사본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중 어느것이 더 오래된 것인가는 연구에 따르면 대체로 네팔계는 11세기 이후이고 중앙 아시아계는 그 이전으로 생각되고 있다.1931년 캐시미르이 길기트에서『법화경』의 원전사본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5-6세기경의 사본으로 추정되었다.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현존하는 경전 사본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을 번역했던 구마라집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쿠자에서 태어나 뒷날 중국으로 귀화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가 번역에 사용했던 원전사본은 중앙아시아계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중앙아시아계의 것은 인도의 굽타왕조 시대의 문자로 씌여져 있다.

 

3. 법화경의 특색

 

전통적 구분

한역본은 구마라집 번역의『묘법연화경』이 가장 많이 읽혔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초로 해서 살펴보는게 좋다. 구마라집이 이 경을 번역했을 당시는 제바달다품이 없고 7권래품이었다. 그런데 천태지의(天台智. 538-597) 때부터 제바달다품이 제 12장으로 삽입되어 7권28품이 되었고 8세기 중간에는 8권28품으로 정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통적으로『법화경』제14장 안락행품(安樂行品)과 제15장 종지용출품(從地踊出品) 사이에서 구분이 생긴다. 이것을 나눈 최초의 인물이 구마라집의 제자 도생(道生) 이다. 도생은 앞부분을 인문(因門) 뒷부분을 과문(果門)으로 나누었다. 그에 따르면 인문은 일승(一乘)의 진리 (眞實法輪. 진실법륜)을 증명하는 것이며 과문은 상주(常住)의 생명(無餘法輪. 무여법륜)을 증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후 광택사의 법운(法雲)이 도생의 해석을 다시 계승하여 인문을 개삼현일(開三顯一), 과문을 개근현원(開根顯元)이라고 정의했다. 개삼현일이란 삼승(三乘)의 진리를 일승(一乘)에 통일한다는 뜻이며, 개근현원이란 인도에 출현한 석가모니는 실은 영원상주의 부처임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천태종을 창립한 천태지의 역시 인과이문(因果二門) 계승했는데 천태지의는 그것을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다시『법화경』의 구성을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으로 세분하고 조직을 새롭게 했다. 이렇게 <법화경> 전체를 셋으로 나누는 것을 일경삼단(一經三段)이라 한다. 그리고 적문, 본문을 각각 삼분할 경우 적문삼단 본문삼단이라 했다. 그리고 이를 합해서 이경육단(二經六段) 이라 했다.

 

3요소 3특색

제 14장 안락행품(安樂行品)과 제 15장 종지용출품(從地踊出品)을 기점으로『법화경』을 반으로 나눈 이유는 전반에서 제2장 방편품(方便品) 을 중심으로 하여 우주의 통일적 진리(일승묘법.一乘妙法)를 증명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반에서 제16장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을 중심으로 하여 구원의 인격적 생명(구원본불.久遠本佛)을 증명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방편품은 '시방불토(十方佛土) 가운데는 오직 일승의 법만 있고 둘도 없고 셋도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이승(二乘: 성문승. 연각승)내지 삼승(三乘: 聲聞(성문). 緣覺(연각).菩薩(보살))을 포함해 일불승(一佛乘)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에 이르는 커다란 탈것(乘物)은 오직 하나이며 그 진리 역시 우주의 만물을 통일하는 근본의 대법(大法)임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을 다른말로 묘법(妙法)이라고 표현하고 무상도(無常道)라고도 한다. 또한 제일의(第一義)등으로 바꿔 말하기도 한다.

 

이 경의 후반부 중심사상은 구원의 인격적 생명(구원본불.久遠本佛) 이다. 이 사상이 제시된 것은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이처럼 오래 전에 성불한 여래는 수명무량(壽命無量)이며 상주(常住)한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은 실로 오랜 예전에 부처님이 되어 있었으며 아룰러 부처님으로서의 수명은 영원 무한임을 증명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중생은 부처님께 귀의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샘을 발견하는 것이며 이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구원불로 강조했던 의도는 다음 세가지라고 생각 된다.

 

첫째는 제불(諸佛)의 통일이라는 것이다.『법화경』에 이르기까지 대승불교 경전은 여러 종류의 부처님을 내세워 왔다. 그런데 그러한 부처님들은 실은 구원본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분신(分身佛)이며 그 분신은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통일적 진리가 있으며 구원의 인격적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주의 통일적 진리로서의 일승묘법(一乘妙法)은 단순한 자연이법이 아니고 인생생활에 작용하는 영원한 인격적 생명적 약동체이을 밝힌 것이다.

 

셋째는 현실에서의 실천 활동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약동이 직접 체득 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래수량품에서 구원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칠줄 모르는 실천활동(보살행)을 실현해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셋중에서 특히 세번째는 <법화경>의 원전 성립사상으로 생각되어 진다.『법화경』의 원이 편집되고 성립되어 가는 모양을 검토해 보면 앞의 전통적인 두 부분에 대해 또 한 부분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두 부분에 겹쳐지는 것인데 제10장 법사품(法師品)에서 제22장 축루품(囑累品) 까지로서 이것은 '제3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화학자들은 이를 '제3법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은 인생의 고난을 이겨내면서 진리실천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한마디로 현실의 인간적 활동(보살행도)의 주장이다. 수많은 환난을 만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구원을 믿는 한 인생은 최후까지 건투해 나갈 용기를 획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법화경』은 전통적 입장과 성립사적 관점을 합쳐서 살펴보면 진리(法)과 인격(佛)과 인간(菩薩.보살) 또는 진리와 생명과 실천의 삼요소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주의 통일적 진리(一乘妙法.일승묘법), 구원의 인격적 진리(久遠本佛.구원본불), 현실의 인간적 활동(菩薩行道.보살행도)덩의 제1부분. 제2부분. 제3부분의 각각의 주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3요소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법화경』의 제목 즉 '사말다.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 pumdarika sutra. 묘법연화경)이다. 사말다(妙法. 묘법)는 진리에 관해서 정의 내린 것이며 수트라(經)는 부처님의 교훈이라는 뜻으로 부처님과 관계된 것이다. 그리고 푼다리카(蓮華. 연화)는 보살을 비유한 것이다. 보살이란 보디사트바의 음사어로써 깨달음의 진리를 현실의 세계에서 실현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제15장 종지용출품에서는 '연꽃에 물이 묻지 않듯이 지금 여기에 그들은 대지를 뚫고 모였다'라는 표현이 있다. 연꽃이란 흙탕물 속에서 살지만 그러면서도 흙탕물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산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에게 해당시킨 것이다.

 

중생은 우주의 통일적 진리에 오로지 믿음을 바칠 때 구원본불의 생명에 감싸여진다. 이것을 깨달을 때 세상의 사악한 악에 물들지 않고 인생의 고통을 인내하면서 진리 실천에 매진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영원한 생명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법화경』의 제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경의 제목을 입으로 외우는 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된다고 하는 종파까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4. 법화경의 세계

 

법화경의 우주관

『법화경』은 전반에서 일승묘법이란 통일적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이 경은 통일된 전체 우주를 묘사하고 있다. 구마라집은 이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번역 했는데 현대적으로 번역을 해 본다면 '우주실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에는 각자를 받쳐주고 있는 이법(理法)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총칭해서 불교에서는 '일체법' 또는 '제법(諸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독립 무관계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근본에서는 불이(不二) 일체(一體)를 이루고 있다. 그 불이(不二) 일체(一體)를 이루고 있는 곳에 제법통일의 대법 즉 우주의 통일적 진리가 있는 것이다.

 

『법화경』이 설명한 '일승묘법(一乘妙法)'이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정신(心)에는 정신의 법(心法)이 있고 육체(色)에는 육체의 법(色法)이 있다. 그러나 근본에서는 색심불이(色心不二)로 하나의 일체를 이루고 있다. 바꿔 말하면 색법과 심법을 근본에 두고 통일돼 있는 색심불이의 일승묘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육체의 병도 정신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으면 올바른 치료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신의 병도 육체의 건강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정신과 육체만이 불이(不二)일체(一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끝을 더듬어 가다보면 모든(제법)것이 서로 관계되어 있으며 그것은 둘이 아닌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볼 때『법화경』이 설법한 일승묘법은 우주만유(諸法.제법)를 근저에 놓고 통일하는 대법이라는 것이다. 비유하면 이 경은 제법의 그물과 같아서 그물(일승묘법)을 잡아 당기면 모든 그물코가 끌어 당겨진다는 것이다.

 

일승묘법이란 이처럼 우주만유의 밑바탕에 있는 통일의 원리다. 이 원리에 의해 전체 우주의 현상이 전개된다. 구라마집은 이를 '제법실상'이란 번역어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바꿔말하면 '우주실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천태대사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

<법화경>에서 설명된 우주 전체 우주상은 이른바 기본형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조직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것이 천태지의 대사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 이다. 마하지관(摩訶止觀) 제5권에 의하면 <법화경>이나 <화엄경>은 우주의 존재를 (1)지옥 (2)아귀 (3)축생 (4)아수라 (5)사람 (6)천 (7)성문 (8)연각 (9)보살 (10)불 등 십계(十界)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이 십계는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즉상관(相卽相關)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십계 하나하나에 다시 십계가 내포되어 (十界之具. 십계지구)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계(白界)가 된다.

 

그런데『법화경』의 제2장 방편품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각각의 본질로서 10가지가 거론되고 있다. 구마라집 번역본에 의하면 상(相). 성(性). 체(體). 력(力). 작(作). 인(因). 연(緣). 과(果). 보(報). 본말구경(本末究景) 등 열개가 그것인데 그 열 개 항목의 앞에 '이와같이(如是.여시)'라는 말이 붙어 있어서 이를 '십여시(十如是)'라고 부른다.

 

여기서 상(相)이란 외상(外相), 성이란 내성(內性), 체란 외상.내상을 합한 전체, 역(力)이란 잠재적인 능력, 작(作)이란 현재적인 작용, 인(因)이란 사물이 생기는 직접적 원인, 연(緣)이란 인을 도와주는 간접적 원인(조건), 과(果)란 인연으로 인해 생긴 결과, 보(報)란 결과가 사실이 되어 밖으로 나타나는 것, 본말구경이란 상에서 보까지 서로 관계되고 일관왜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들이 십여시라는 형태로 존재하며 활동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의 백계에서 십여시가 서로 곱해져서 다시 천(千)이란 숫자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다시 또 한 가지 존재는 각각 주체(衆生世間.중생세간)와 환경(國土世間.국토세간) 그런 것을 구성하는 물심의 다섯 가지 요소(五陰世間.오음세간) 세가지(三乘世間.삼승세간)가 있는데 이 삼종세간을 위의 천에 곱해 보면 삼천이란 숫자가 된다. 요컨데 삼천이란 극대화의 전체 우주의 상태를 표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일념(一念)이란 물질이든 마음이든 극소 극미한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일념삼천'이란 극소의 세계와(一念) 극대의 세계(三千)와 상극상관하여 혼연일체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서 천태지의는 일념과 삼천에 대해서 전후(前後). 본말(本末). 주종(主從). 동이(同異)등을 논의해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고 있다. 즉 어느 쪽이 전체이고 부분이 되라는 것이 아니고 극미의 일념에 삼천의 우주만상이 포함되고 충만하며 삼천의 우주만유에 극미의 일념이 투철하고 충만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지만물의 힘이 하나가 되어 한 물질 속에 존재하며 또 한 물질의 힘이 퍼져나가 천지만물 속에 존재한다는 논리다. 따라서 아무리 미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 전체 우주의 생명이 가득차 있기 때문에 경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일념의 극소와 삼천의 극대를 상즉 상관 시키고 있는 것이 즉 <법화경>이 설명한 일승묘법이다. 이 일승묘법으로 일관된 전체 우주를 조직화한 것이 즉 천태의 일념삼천설이다.

 

5. 법화경의 정토(淨土)

 

있는 정토(常寂光土.상적광토)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와 세계의 상(常)과 무상(無常) 내지 유한과 무한 육체와 영혼의 상이(同異), 사후의 생존 유무 등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태어남이라든가 죽음, 육체와 영혼, 이것과 저것, 여기와 저기,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하는 구분 또는 분별할 수 있는 사고를 초월하였을 때 진정한 영원한 세계 영원한 생명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부처님은 침묵을 통해서 가르쳐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법화경』 제14장 안락행품에도 보면 '전도(顚倒)된 생각 때문에 법이 유(有)라거나 무(無)라거나,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거나, 이것은 태어남이고 저것은 죽음이라고 분별한다'고 우리의 전도된 사고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또 제16장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은 이러한 사고방식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것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래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본다. 태어나지 않고 죽지 않고, 죽어 없어지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고, 유전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며, 같지 않으며 다르지도 않고, 나도 아니고 나 아닌 것도 아니라고 여래는 범부가 눈앞에 보는 것처럼 세계를 보지 않는다."

 

생사.유무.피차 따위의 분별하는 생각(分別見. 분별견)을 초월한 곳에 영원절대의 생명 또는 영원절대의 세계가 파악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지금 당장 이곳에 영원한 생명이 박동하고 영원한 세계가 현전(現前. 앞에 나타나다)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현실의 모습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순간순간 변화하고 멸망해 간다. 그리고 한정된 것이고 괴로움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 이른바 범부가 사는 사바세계다. 그러나 열렬한 신앙으로서 그런 범부의 사바세계에 영원한 생명 구원의 정토가 감득(感得. 느껴서 알게되다. 영감으로 깨달아 알게되다)되는 것이다.

 

『법화경』은 이런 사실을 석가모니 부처님을 통해서 증명하려 했다. '구원본불로서의 석가모니'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에서 태어나 보드가야 근처에서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후 여러 곳에서 설법하시다가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그런 의미에서 석가모니는 유한의 존재다. 그러나 <법화경>은 그 유한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에서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경의 제16장 여래수량품을 보면 '오랜 옛날에 성불한 여래는 수명무량으로 항상 하노라'는 말이 나온다. 열심으로 신앙하면 이런 불멸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볼 수가 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고 사바세계인 이곳에서 구원의 정토를 감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사와 피차를 초월한 절대정토를 전채지의는 '상적광토(常寂光土)'라고 설명했다.

 

'상적광토'라는 말은『법화경』의 결정인『관보살보현보살행법경(觀普賢菩薩行法經)』에 따온 것이다. 이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정토라는 뜻인데 알게 쉽게 말하면 바로 '여기에 있는' 정토라고 말할 수 있다.

 

이루는 정토(淨佛國土.정불국토)

그런데 정토를 말할 때 또 한가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다. 그것은 정불국토(淨佛國土)라 불리는 것이다. 즉 국토를 정화하는 것이며 정토를 현실사회 안에 실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회의 정토화이고 불국토의 건설이라 할 것이다.『법화경』을 보면 '정토를 맑게 하기 위해서 항상 정진하고 중생을 교화시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상적광토 즉 '있는' 정토에 비교되는 '이루는' 정토라 할 수 있다.『법화경』의 제10장 법사품(法師品)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대원을 성취하고 중생을 연민하는 까닭에 인간으로 태어났도다."

 

『법화경』의 이러한 정신은 그 가르침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과 같은 임무를 부여한다. 그것을 경전에서는 '여래사(如來使)'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절대정토(있는정토)에만 도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그런 정토를 실재로 현실사회에 구현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보살행이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인간계의 현실상은 무상하고 유한한 것이다. 그러한 현실세계에 부처님이 출현한 것은 이곳이야말로 영원하고 무한한 생명내지 정토가 활현(活現)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자연에 있는 소리는 영원하고 무한한 것인데 우리의 귀가 그 소리를 듣기에는 너무도 작은 용기(容器. 그릇)인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와 같은 작은 한정된 그릇에 자연의 영원하고 무한한 소리를 담아냄으로써 오히려 자연의 묘음(妙音)을 우리들에게 살아서 울려 오게 될 것이다. 

 

화가는 영원무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정된 캔버스 위에 한정된 그림 물감으로 그려 내려고 한다. 그것은 소용없는 아무 의미없는 작업이 아니다. 그러한 노력에서 오히려 영원무한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활현되는 것이다. 여기에 인생의 비밀이 있고 그 부분을 파악한 자가 명연주가이고 명예술가이고 인생의 명인(名人)이다.

 

인생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고 현실은 유한한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살아가는 의의가 있고 영원의 생명은 오히려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삶을 얻은 자의 임무이다. 그것을 이룩해 낸 자가 인생의 명인인 것이다.

 

인간의 현실 세계는 유한이고 그 유한의 인생으로 태어난 일도 그곳에 영원무한한 생명이 발현되고 구원의 정토가 현현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토현현의 사명을 갖고 사람들은 이 세간을 살아왔다. 그것이 다름아닌 <법화경>의 정신이다.

 

가는 정토(來世淨土. 내세정토)

마지막으로 내세정토(來世淨土) 즉 죽은 후 돌아가는 정토이다. 간단히 이것을 '가는 정토'라고 한다.인간계에서 삶을 사는 자는 불법을 신봉함으로써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계에 있으면서 무한하고 절대적인 경지에 안주(있는 정토)한다.

 

또 영원한 생명을 느껴서 알게 되는 것이고 그리하여 생이 있는 한 각자 자기으 처지를 통해서 불법을 생활 속에 끌어들여 영원한 생명을 구현한다. 나아가서는 불국토 건설에 노력해 나가려고(이루는 정토)한다. 그리하여 그 사명을 마치고 죽음의 문을 들어설 때에는 본래의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가는 정토). 살아 있는 한 정불국토 즉 불국토 건설에 노력해 나갈 때 죽음은 편안한 고효양으로 돌아가는 문으로서 열려지는 것이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있는 정토(절대정토)''이루는 정토(정불국토)''가는 정토(내세정토)'의 세 가지 정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 하나이다. 다만 정토가 세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은 사람의 근기에 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6. 법화신앙의 역사

 

인도의 법화신앙

인도에서 법화신앙은 대략 서기 50년경에서 150년경에 걸쳐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춘 뒤 발전을 거듭해『법화경』신앙이 일어났다. 인도에서『법화경』은 우주의 통일적 진리로서 일승묘법이 설명된 부분이 특히 주목 되었다.

 

일승묘법이란 구마라집의 번역에 의하면 무상도(無常道) 또는 제일의(第一義) 또는 평등법(平等法)이란 뜻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즉 일승묘법이란 근원이 되는 통일된 최고의 절대진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의 바닥에 공통되는 제일원리(第一原理)이다. 모든 사물은 그것으로 의해 평등하게 유지되고 본래 둘이 아닌 하나의 것이다. 일승묘법 아래서는 모든 한정적인 틀이 제거되고 사물은 불이평등(不二平等), 세계는 허공무한(虛空無限)이 된다. 이것이 진정한 세계이며 모든 만물의 진상(諸法實相.제법실상)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것저것, 자기 또는 타인이라든가,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생과 사 등 여러가지의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테두리를 설정하고 판단하며 행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테두리는 임시로 마련된 것이며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고정시하고 불변(不變) 부동(不動)처럼 생각하는 것에서 미혹이 생긴다. 이를테면 우주에는 본래 동서남북이 없다. 시방공(十方空) 이 며 좌우와 상하가 없는 무변의 허공이다.

 

등산에도 비유할 수 있다. 산에서 내려와 길을 잃었을 때 '초심자'는 초조해하며 계곡이나 늪에 빠져 점점 더 미로에서 진퇴양난이 된다. 그러나 능숙한 '경험자'는 산의 정상으로 되돌아가 널리 사방을 굽어보고 올바른 길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면 곧 이리저리 판단도 해보고 걱정하며 좋았다, 걱정했다 한다. 하지만 그러한 가치판단을 일시 정지시키고 광대무변한 허공에 몸을 맡기고 초조한 마음을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법화경>은 무엇보다도 이것을 강조한다.    

 

인도의 법화신앙자들은 거기에 끌렸다. 그래서 용수는『법화경을 주석한 <대지도론>에서『법화경』이 일승평등의 진리 세계를 설명하는 점이『반야경』보다 뛰어나다고 밝히고 있다. 또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여러가지 논서, 이를테면 견의(堅議)가 쓴 <입대승론(入大乘論)>과 세친(Vasubandhu. 世親)이 쓴 <법화경론>등에서도 마찬가지의 지적을 하고 있다.

 

이 중에서 세친이 쓴 <법화경론>은『법화경』이 진리의 평등, 세계의 평등, 존재의 평등(이를 三平登이라고 함)을 설하고 있다면서 이것은 다른것 보다 뛰어난 점이며 그것을 10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또 4세기경에 편집된 <열반경>은 모든 존재의 평등한 성불과 영원 보편성을 강조한 것으로 규명한다. 그런데 이것은『법화경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이 점은『열반경』에도 잘 나타나 있다.

 

중국의 법화신앙

서력기원을 전후할 무렵 이미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되었다. 중국에서 불교는 처음에는 민간신앙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노자의 사상을 차용해 해석되기도 했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그러나 얼마 뒤부터 경전과 논서가 계속 번역 소개됨에 따라 불교를 불교 그 자체로 이해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아울러 부처님의 최고 가르침은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로 연구와 논의가 왕성해졌다. 특히 구마라집에 의해『반야경』『법화경』과 <중론><대지도론>등 수많은 경전과 논서가 번역 소개되자 이러한 운동과 연구는 한층 더 활발해 졌다. 그리하여 불교의 연구자들은 각자의 생각으로 여러 경전을 정리하고 배열하려고 노력했다. 교상판선(敎相判釋)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교상판석은 5-6세기경 남북조 시대에 가장 활발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강남에 삼사(三事) 강북에 칠사(七事) 합해서 십사(十事)의 교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천태지의가 쓴 <법화현의(法華玄義)> 제10권에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런데 이런 교판논의에서 커다란 문제가 되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반야경』을 근본에 둘 때『법화경』『화엄경』『열반경』을 어떻게 배열하는가 하는 일이다.

 

『반야경』은 불교의 진리를 원리적으로 해명한 것으로 그것을 근본에 둔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경전을 진리의 3대 특성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중『법화경』은 진리의 통일성을 밝힌 것으로 이를 '만선동귀교(萬善同歸敎)'라 했다. 그리고『화엄경』은 진리의 순일성을 밝힌 것으로 이것은 '돈교(頓敎)'로 정의 되었다. 마지막으로『열반경』은 진리의 영원성을 밝힌 것으로 '상주교(常住敎)'라고 정의되었다. 이것은 대체로『화엄경』과『열반경』을 최고시하고『법화경』은 그 중간에 놓는 교판이다.

 

그러나 천태대사는 이 '만선동귀교'로서의『법화경』을 최고의 위치에 놓았다. 천태대사의 이러한 의도는 통일적 진리를 밝힌『법화경』에 의해 지금까지의 불교가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사상을 총합, 통일하고 교판논쟁에 종지부를 찍는데 있었다. 사실 중국에 잡다하게 들어왔던 불교의 여러 사상, 여러 경전은 일단 천태대사의 이러한 교판에으해 총합되고 통일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천태대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때마침 수(隨)나라에 의한 통일국가 실현시기였다. 천태지의에 의한 통일불교의 수립은 이러한 정치정세와 맞아 떨어져 잡다한 교판을 통일적인 것으로 바꾸고 종합적인 세계관 인생관의 확립으로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등에 이 점이 단적으로 표명되어 있다. 뒷날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불교에 이만큼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주장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중국에서 법화신앙의 탄생은 천태지의에 의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태대사의 법화신앙은 유명한 주석서로 결실 되었다. 이른바 '법화삼대부(法華三大部)' 또는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 '라 불리는 것으로 <법화문구(法華文句)><법화현의(法華玄義)><마하지관(摩訶止觀)>등이 그것이다. <법화문구>는『법화경』을 주석한 것이고 <법화현의>는『법화경』에 근거한 철리(哲理)를 설한 것이다. 이에 비해 <마하지관>은『법화경』에 근거한 실천을 설명한 것이다.

 

『법화경』에 대한 주석은 천태대사 이전에 이미 누군가에 의해 행해졌다. '법화삼대부'는 그런 것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대성한 것이다. 천태대사 이후의 법화신앙에서는 이 삼대부가 항상 지침이 되었다.

 

'법화삼대부'를 일관하는 기본사상에 관해 약간 설명을 하면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의 모습은 자타(自他). 남녀(男女). 생사(生死). 신심(身心). 선악(善惡). 고락(苦樂). 미추(美醜)등과 같이 A.B 두개의 틀로 정리된다. 그러나 이 A.B. 란 고정적 개별적인 실체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무상(無常) 변멸(變滅)하는 것이고 서로가 상의상관(相依相關)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무상(無常)과 상의(相依)를 합쳐서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하거니와 이것을 바꿔 말하면 A.B 둘은 현실계의 가정된 모습이고 그 근저는 무아(無我)와 공(空)이 근본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과 근본은 또한 둘이 아니며 일체를 이루고 있다.『법화경』의 입장에서 말하면 A.B. 둘은 근본에서 일승묘법에 의해 통일되고 있다. 즉 A.B 둘은 가정(假定)의 현실상으로 A.B 가 둘이 아니고 (不二) 공(空)한 것이 진실상이며 영원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A.B 둘로 나누어진 현실상에 입각해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종종 A.B 는 둘이라고 고집하고(아견.我見) 이렇다 저렇다 갈라진 생각(分別見.분별견)을 일으키기 쉽다. 이것이 미혹의 근본이고 불이(不二). 공(空)의 진상을 분명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 이름한다. 그래서 무명을 떨쳐 버리고 집착을 버리며 둘이 아니고 공이라는 것을 깨달으라고 계속 강조하는 것이다. 천태대사는 이것을 '종가입공관(從假入空觀)'이라 이름하였다. A.B 둘로 나뉜 현상을 거짓으로 보고 거기에서 둘이 아닌 공(空)의 진실상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히는 공관(空觀)이라 부르는 것으로 이른바 제일수행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짓에서 공으로 들어 간다고 해서 들어간 채로 공에 머물러 버린다면 또한 잘못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승불교에서 '소승(小乘)'이라고 평가되었던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이승(二乘)은 공에 머물러 그곳에서 현실로 돌아와 현실을 살리는 일을 잊어 버리고 있다. 나아가서는 공을 허무로 오해하고(虛無空見.허무공견) 인생이 무(無)로 돌아가는 이상(理想)이라 생각한다. 또 보살들이 불국토 건설(淨佛國土.정불국토)에 매진하는 것을 보아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다만 방관할 뿐이다. 그래서『법화경』제4장 신해품(信解品) 은 '오직 공(空).무상(無常)이 무작(無作)만을 생각하고 보살로서 유희신통하며 불국토를 정화시키고 중생을 교화하는 일에 마음으로부터 희락(喜樂)하지 못한다'고 이 점을 비판하고 있다. 

 

천태대사는 다음으로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을 설한다. 공(空)에서 가(假)로 들어간다는 것으로 가관(假觀)이라고 약칭한다. 즉 현실(假.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공에 들어 간다는 것은 거기에서 실은 올바른 현실을 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그러므로 공의 체계화에 주력했던 용수는 그의 저서 <중론>에서 '공성(空性)이 성립하는 곳에 일체가 성립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개공(一切皆空) 일체개성(一切皆性)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의 부정이 아니고 거꾸로 사물의 성립근거이며 공에 의해 일체의 사물이 성립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까닭으로 천태대사는 공에서 거짓의 현실로 돌아와 현실을 활용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종공입가관(從空入假觀)이고 가관(假觀)이다. 앞에서 말한 종가입공관 또는 공관을 제일수행이라 하면 이 종공입가관 또는 가관은 제2수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화경>이 강조하는 보살행이다. 

 

또한『법화경』의 제10장 법사품(法師品)에서는 이와같은 보살행에 매진하는 사람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보낸 사도(如來使)라고 칭송한다. 그리고 이런 자각 아래 고난을 인내하면서(인욕) 세상 사람들을 위해 일(자비) 할 것을 설하고 있다. 다만 현실에 지나치게 흥분되어 빠져버린다면 다시 출발저믕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지않기 위해서는 공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거짓에 있어도 공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사품에서는 또 보살의 현실활동의 마음가짐으로서 여래의 방, 여래의 옷, 여래의 자리를 제시하면서 그것은 자비.인욕.공성의 삼궤법(三軌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태대사는 거짓에 있으면서 공을 잊지 않는 것을 마지막으로 중도제1의관(약해서 중관)에 두고 끝맺고 있다. 그것은 종가입공관(공관)과 종공가입관(가관)을 통일한 것이다. 묶어서 말하면 공(空).가(假).중(中) 삼관이라 한다. A.B 둘에 관해서 말하면 A.B 둘에서 A.B 불이(不二) 즉 공관(空觀) A.B 불이(不二)에서 A.B 둘로(假觀.가관) 다시 양자의 통일(中觀.중관)이 된다. 천태는 그것이 '이이불이(二而不二) 불이이이(不二二而)' 즉 둘이면서도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니면서 둘이라고 정의 내렸다. 이것이 천태대사 법화삼대부의 골격이며 법화철학 내지 실천론의 골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