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배려는 마스크 쓰고 손 씻고 거리 두기”
부처님, 악 행하면 당장은 만족할지 모르나 과보 받을 것 설해
행복 바라고 괴로움 피하길 바라듯 타인도 같은 마음으로 기원
세계인 모두가 개인 위생부터 철저히 지킨다면 모두 상생 가능
지난번에는 세계적 대유행(pandemic)과 같은 세계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적 대안은 ‘보살의 이타행(利他行)’이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그 연장선상에서 보살의 이타행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보살의 이타행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나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점차 확대되어 나보다 먼저 남을 생각하는 이타의 마음으로 성숙된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종교와 윤리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일부 종교계의 형태는 전혀 윤리적이지 않다. 심지어 종교와 사회윤리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통탄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근본적 원인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 즉 이타심(利他心)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궁극의 목표인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덕적 생활을 영위하지 않으면 결코 궁극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다. 자기본위의 이기심을 버려야 비로소 지고선(至高善)으로서의 열반을 체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붓다의 전생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는 ‘본생담(本生譚, Jātaka)’에서는 붓다가 전생에 보살이었을 때, 여러 생을 통해 보살의 이타적·희생적 행위를 닦았기 때문에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다고 설해져 있다. 즉 붓다의 깨달음도 희생적·도덕적 생활을 영위한 결과임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도덕적 생활을 종교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도덕적 행위가 바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 즉 이타심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붓다께서 제정한 바라제목차 가운데 상당수가 다른 동료 비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그러면 왜 붓다는 이타심을 장려하는가? 그 근거는 무엇인가? 붓다는 세 가지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공리적(功利的) 입장에서 이타심을 장려했다. 붓다는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의 법칙에 의한 공리적 입장에서 악을 끊고 선을 닦으라고 권했다. 악을 행하면 당장에는 자기의 만족을 얻을지 모르나, 오랫동안 그 괴로움의 과보를 받기 때문에 결국에는 손해다. 반면 선을 행하면 당장에는 자기희생이 따를지 모르나, 그 보수로서 오랫동안 행복을 얻기 때문에 결국에는 이익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삼세인과(三世因果)의 입장에서 이타심을 장려했다. 삼세인과의 입장에서 보면 일체중생은 과거세의 어느 때에 반드시 나의 부모·형제·처자·친척·스승이나 벗·선지식이었다. 연기법에 따르면 이 세계는 모두 상호의존의 관계로 성립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의 만족을 위해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을 해치는 것은 곧 자기를 해치는 것이 되며, 남을 돕는 것은 곧 나를 돕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동정(同情)의 입장에서 이타심을 장려했다. 이른바 인정(人情)에 기초한 이타심을 장려했던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도 또한 원하지 않으며, 내가 원하는 것은 남도 또한 원한다. ‘잡아함경’ 권37에서 붓다는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살생·투도·사음·망어·악구·기어·양설 등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나는 살기를 바라고, 불사(不死)를 바라고,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 피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타인의 생명을 파괴해서야 되겠는가. 자기의 불애(不愛)·불쾌(不快)의 법은 남에게 있어서도 또한 불애·불쾌의 법이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살생을 떠나고, 남으로 하여금 불살생을 지키게 하며, 항상 불살생계를 찬탄한다. 투도·사음·망어·악구·기어·양설 등도 이와 똑같다. 이 가르침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입장에서 몸과 입으로 짓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남을 해치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 즉 이타심은 사회적으로는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이른바 사섭법(四攝法)이 그것이다. 붓다는 한 가정에서부터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공동체로 단결시키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이 덕목으로서 가장 중시한 것이 바로 사섭법이다. 사섭법이란 보시(布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를 말한다.
첫째, 보시란 부자는 가난한 자에게 재물을 베풀고, 현자는 어리석은 자에게 법을 베푸는 것이다. 둘째, 애어는 따뜻하고 자비스러운 말로써 서로 대화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과 마주쳤을 때 서로 인사하라는 것도 애어에 포함된다. 셋째, 이행은 단체생활의 이익, 즉 공익을 도모하는 것인데, 지금의 사회봉사가 이에 속한다.
넷째, 동사란 스스로를 단체에 동화(同化)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단체생활의 덕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정신이 없다면 사회가 하나의 집단으로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일에까지 자기를 동화시키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단체의 규칙이나 관습 등이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자기를 거기에 동화시키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섭법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전염병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감염되기 때문에 물리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외출 시에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손 씻기를 권장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나를 보호하는 수단이지만,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모든 세계인이 이러한 배려의 마음을 실천한다면 코로나바이러스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바이러스를 피해 호화별장에서 잘 보내고 있다거나 고급음식을 먹었다거나 좋은 차를 마셨다고 자랑하는 것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행동이다.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는 행동도 가능하면 삼가는 것이 좋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바로 진정한 붓다의 제자들이다.
마성 스님 팔리문헌연구소장 ripl@daum.net
[1534호 / 2020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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