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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교사상

수선님 2023. 1. 29. 13:28

조선의 유교사상

 

역사

 

동방에 있어서 주요한 사상의 흐름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라 하겠는데, 한국은 이러한 세 가지 사상적 요소를 모두 흡수·구비하여 발전시켜 왔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과는 지역적으로 인접한 까닭에 고대로부터 유교사상이 한국에 들어와 민족정신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전래

 

유교라면 중국을 발상지로 하고 그것이 여러 나라로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삼국시대 이전의 한국사상에 대하여는 문헌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유학사상은 한자(漢字)의 전래와 더불어 들어왔다고 생각된다. 한국 유교에 대한 기사는 고구려의 소수림왕 2(372)에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를 교육한 점에서 최초로 볼 수 있다. 또한 고구려는 지방 곳곳에 경당을 두어 청년들에게 유교 경전(經典)과 궁술(弓術)을 연마시켰다. 이것은 유교의 경전과 6(六藝)로써 국민교육을 실시하였음을 의미한다. 백제도 거의 같은 시기인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박사 왕인(王仁)이 일본으로 논어(論語)와 천자문(千字文)을 전수하였다는 사실로 보아 유교 경전을 연구하는 기관이 설치되고, 유학사상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추찰(推察)할 수 있다.신라의 국학(國學) 설립은 신문왕 2(682)으로서 교과내용이 오경(五經)으로 되어 있으며, 논어·효경(孝經)을 필수로 하였던 것이다. 또한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로써 구경(九經)을 훈해(訓解)하였다. 이미 진흥왕 때 화랑 제도를 창설함에 있어서 "효제충신은 나라 다스림의 대요(敎之以 孝悌忠信 亦理國之大要也)"라 하여 유교 이념을 근본으로 했던 것이며, 화랑들이 연마한 것은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 볼 수 있듯이 유교경전이었던 것이다. 또한 진흥왕 순수비 속에 나오는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修己以安百姓)" 란 논어의 구절이나, '충신정성(忠臣精誠)'·'위국진절(爲國盡節)' 등의 용어가 나오는 것은 치국의 이념으로서 유교사상이 기초가 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교 사상은 이미 삼국시대에 오경사상(五經思想)을 중심으로 하여 정치이념이 되었으며, 국민을 교육하는 원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유교에서는 효()의 관념을 중시하거니와 삼국시대에 있어서 국가의 체제가 정비되어 감에 따라 그 기반을 확고히 할 뿐 아니라, 국력을 신장하고 국가를 수호한다는 필요성에 의하여 효(孝於家)와 더불어 충(忠於國)의 의미가 더욱 강조되었다. 충과 효는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온 한국유교의 보편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

 

신라 말기의 어지러운 난국을 타개하고 통일국가를 형성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 국가의 창업이 불력(佛力)과 삼한산천(三韓山川)의 도움으로 된 것이라 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토속적인 신앙과 도교적인 풍수설을 숭신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통치이념에서는 태조십훈요(太祖十訓要)의 끝부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유교사상에서 구하였던 것이다. 경사(經史)를 널리 보고, 후대의 왕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 것을 유조(遺詔)로 남겼다. 서경(西京)에 학교를 세운 것도 유교를 이념으로 인재를 교육한 것이라 하겠다. 6대 성종 때에 이르러서는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경학박사를 두었으며, 최승로(崔承老)의 진언(時勢二十八條)에 따라 국정을 쇄신하였다. 4대 광종 때부터는 과거(科擧)를 시행함으로써 문풍(文風)이 일어났으나, 사장시부(詞章詩賦)에 관한 제술(製述)을 명경(明經)보다 치중함으로써 경학의 연구는 미약한 상태였다. 그후 11대 문종때에는 최충(崔沖)의 구재(九齋)를 비롯한 사학(私學)이 성행하여 이른바 십이도(十二徒)가 일어나고, 경사(經史)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학풍이 생겼다. 그러나 최충 이후 200여 년간 유교는 부진한 상태였고, 대부분이 시부(詩賦)를 위주로 한 문장학에만 치중하였다. 당시에는 유가(儒家)라 해도 순수하게 유학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 있어서 당()시대의 경향과 같이 유·불도가 혼합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여말(麗末)에 이르러, 건국 이래 겪어온 혼란과 문화적인 침체를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개혁이 요청되었고, 이에 부응하여 일어난 것이 곧 유교의 혁신 운동이다. 25대 충렬왕 때에 송대 성리학(宋代性理學)이 수입되었다.성리학이란 중국에 있어서 한·(漢唐)의 도불시대(道佛時代)를 거쳐 그것에 대항하여 새롭게 조직·편성된 유학의 이론체계였다. 새롭고 합리적이며, 강한 자주정신을 가진 성리학은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안향(安珦)의 문묘개수(文廟改修)와 주자서(朱子書) 도입, 그리고 후진의 교육이 발흥하여 성균관을 중심으로 백이정·우탁(禹倬)과 같은 유학자를 내었고, 이제헌(李齊賢이색(李穡)에 이어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과 같은 사류(士類)를 배출하였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원리를 탐구하는 심오한 학문으로서, 종래의 불교사상이나 도가사상(道家思想)에서 추구하였던 형이상학적 요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주자학(朱子學)은 외적으로 사회적 제도와 규범의 원리가 되는 것으로서 일종의 비판철학이며, 역사철학의 구실을 하였다.

 

조선 시대

 

공민왕 이후로는 신진 사류들에 의하여 원()의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배원친명(排元親明思想)사상이 주창되고, 불교의 세속화·이원화(利源化)에 대한 강력한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인한 경제적 파탄은 사전(私田)의 철폐라는 혁명적 조처를 단행케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친족혼을 폐지하고, 상례와 제례에 있어서 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의식을 따르도록 하는 등 일련의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통치이념을 유교에 두는 신왕조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정도전은 극단적 배불론을 펴서 불교로부터 유교로 사상적 전환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조선 초기에는 조정의 적극적인 장려로 불교에 염증을 느낀 인심(人心)이 공맹사상을 높이는 경향으로 전환되어 갔고, 정치변동에 따라서 절의(節義) 문제가 유교의 중요한 중심문제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관학(官學)으로 입신 출세를 목표삼던 풍은 사화로 인해서 사라져 갔고 반면 유교의 철학인 성리학(性理學)이 대두되어 유교의 이론이 체계화된다. 서경덕(徐敬德花潭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退溪이이(李珥栗谷)는 이때의 학자이다. 47정론(四端七情論)이라든가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이 이 시기의 핵심문제이기도 했다. 이론이 실을 거두지 못하고 부질없는 분석만 일삼는 폐단에서 실행을 중요시하는 예학(禮學) 중심으로 바뀌어 갔고 유명한 예송(禮訟)문제도 이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다. 중국에서는 공허한 이론을 배척하고 양명학(陽明學)이 등장하여 환영받았으나, 한국에서는 전래 초기부터 정주학(程朱學) 중심의 학풍에 그 세를 얻지 못하였다.당쟁이 거듭되면서 민중의 피폐는 심하여 갔고 이 해결을 실현시켜 주는 새로운 이론이 요청되어, 여기에 실학(實學)이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힘쓰면서 공맹의 왕도정신(王道精神)을 본받자는 주장이었다. 유형원(柳馨遠磻溪정약용(丁若鏞多山이익(李瀷星湖)은 이 계열의 학자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서학(西學)의 감염을 혐오하는 정부의 탄압으로 다시 성리학 연구의 방향으로 전환되어 갔다.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중심으로 해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로 나뉘어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학파가 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두 주장을 절충하는 절충학파도 나오기에 이르렀다. 퇴계를 으뜸으로 하는 조목(趙穆月川) 정구(定逑寒岡유성룡(柳成龍西厓김성일(金誠一鶴峯)의 계통과 율곡을 으뜸으로 하는 송시열(宋時烈尤庵한원진(韓元震南塘임성주(任聖周鹿門)의 계통 및 김창협(金昌協오희상(吳熙常老洲)의 계통은 이기설의 세 흐름을 형성하였다.요약해서 조선의 유교는 철학이 중심이었고 그 철학은 하나의 학문으로서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민중을 움직이기도 한 특성을 보이고 있다. 국정의 부패를 규탄하는 유생들의 상소라든가 국권을 침해당했을 때 항거하는 의로운 행동을 보여줌은 한국 유교사(儒敎史)의 면목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한국사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갑시다.

 

()의 사상

 

()은 유교사상의 최고 원리이다. 공자는 "인이라는 것은 사람이다(仁者人也)(禮記中庸表記)"라고 말하였다. 이때 '사람'은 개체실물(個體實物)을 지칭하고 인은 이 개체자가 본구(本具)한 덕성, 즉 인도(人道)를 말한다. 이 인도(人道)는 금수(禽獸)와 구별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큰 길이다. 그래서 주자(朱子)는 인()이란 "사람이 사람되는 까닭의 원리(人之所以爲人之理)(孟子盡心下 朱子註)"라고 말하였다. 유교에서는 인()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사랑을 들고 있다. 그래서 공자는 그의 제자 번지(樊遲)가 인에 관하여 물었을 때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라 답변하였다. 인은 원리이고 사랑은 실천요목으로 이해된다.윤리는 보편성을 띠어야 하므로 모든 인간에게 고루 적용되는 준칙이 요구된다. 이 준칙으로 공자는 서()의 관념을 제기한다. ()는 자기를 미루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으로 적극·소극의 두 면이 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서는 안된다(己所不欲勿施於人)"는 것은 소극적인 준칙이고 "자기가 자립코자 하듯이 다른 이를 일으켜 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듯이 다른 이가 이루게 도우라(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는 것은 적극적인 준칙이다.이러한 서()의 사상은 맹목적이 아니라 자기완성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이 자기완성이 곧 충()이다. 충이란 "자기의 성실성(誠實性)을 완전히 다하는 것(盡己之謂忠)" (論語里仁篇 朱子註)으로 윤리행위의 전제가 된다. <대학(大學)>에서 충의 관념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으로 서()의 관념은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로 구체화되었다. 그래서 자기인격 완성은 다른 이의 인격 완성과 뗄 수 없는 관계로 맺어지고 개별성의 원리가 보편성의 원리로 승화된다.

 

효제사상(孝悌思想)

 

효제관념은 유교의 근본이 되는 덕목(德目)으로서 공자에 의하여 그 내용이 심화(深化)된 이래 동양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주어왔다. 공자는 "효제라는 것은 행인(行人)의 근본이다(孝悌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하였으며 <효경(孝經)> "무릇 효가 덕의 근본이다. 모든 가르침이 여기에서 시작된다(夫孝德之本也, 敎之所由生)"라고 말하였다. 효도의 시작은 부모를 섬기는 데에서 출발하며 조상숭배, 천지(天地)숭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모를 섬기는 까닭은 자신의 신체를 부모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며 이것은 부모의 부모인 먼 조상까지 이어져 마침내 만물을 낳은 천지를 섬기는 이유가 된다. 효도가 경천(敬天)사상과 결합하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먼저 효도의 실천 장소는 혈연공동체인 가정이 중심이 된다. 핏줄이 맺어져 있는 곳에서 자식이 부모를, 아우가 형을 섬김으로써 인()의 내용인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이 경험을 확충하여 사랑으로 충만한 사회를 이룩하려는 것이 유교의 충서(忠恕)사상이다. 효제는 임금이나 사대부·백성의 가정 어디에서나 해당하는 덕목이다. 따라서 임금이 효제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며 백성이 따르고 백성이 효제를 가지고 임금을 섬기면 충성이 된다. 그래서 이 효제관념은 단순한 가정윤리의 의의(意義)를 넘어 사회규범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한국은 삼국시대부터 <논어>·<효경>을 필수교양으로 가장 중요시하였으며 <삼국유사>를 보더라도 불교설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중에서도 효행에 관련된 일화가 점철되어 있음을 볼 때 그것이 얼마나 민간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려말엽 권부(權傅)가 지은 <효행록(孝行錄)>은 효행설화의 최초의 집대성이다.이러한 효의 사상은 조선사회에 들어와 지배층에까지 깊이 파고들어 상부층의 정치적 대립, 당쟁의 불씨로 파급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첫째가 연산군의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냄으로써 폐위, 사사(賜死)된 생모를 연산군이 다시 복위시켜 종묘에 배사(配祀)하고자 하다가 신하들과의 마찰로 무참한 사화로 확대되었던 사실은 개인적인 효성과 대의명분의 대립이 하나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효종의 국상을 당하여 모후(母后) 조대비(趙大妃)의 복제를 문제삼아 서인측은 기년복을 주장하고, 남인측은 3년복의 주장으로 대립하다가, 효종비의 상에 다시 이 문제가 재연(再演)되어 남인측이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효제관념은 이러한 폐해를 낳기도 하였지만 효자 효녀를 배출하고 가정의 화목을 촉진하였으며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이다.

 

()의 사상

 

()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는 실천함이다. ()을 섬기어 복이 이르게 하는 바이다"는 자의(字義)가 있다. 원래 고대 중국인은 하늘을 만물의 창조자이며 우주의 주재자로서 의지를 소유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하늘의 뜻에 따르면 길()하고 이를 어기면 흉()하다고 믿었다. 예로써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명(天命)을 받아 이를 지키고 따르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하늘을 따르기만 하여 복()을 받겠다는 생각은 감퇴되고 사회적인 필요성에 의하여 예법(禮法)을 제정하였다.순자(筍子)()의 기원은 무엇이냐? 사람은 생래(生來)로 요구하는 바가 있으며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경우에도 욕구를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도량분계(度量分界) 없이 무한히 욕구를 쫓으면 서로 쟁탈하지 않을 수 없다. 쟁탈하면 혼란해지고 혼란하면 궁()하게 된다. 선왕은 그렇듯 혼란해지는 것을 꺼리어 예의를 제정하여 질서분계(秩序分界)를 세우고 또한 인간의 욕망을 적절히 살리면서 아울러 인간이 욕구하는 바를 적절히 충족시켜 주려 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예()를 사회질서 유지의 필요성에 의하여 제정한다는 것을 설명하여 준다.이러한 예()는 사회의 변천에 따라 적합하게 개선되어 왔는데 오늘날의 용어로 바꾸면 정치 제도, 사회의 전례(典禮), 윤리적인 예절의 함의(涵義)가 있다. 한국에서는 상고시대부터 8(八敎)로써 예법(禮法)을 삼아 백성을 다스려 왔다고 하지만 확실히 고증할 수 없고, 유교 전례에 따라 예제(禮制)가 확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이래로 원구·방택(方澤)을 설치하여 천지제를 지내고 사직(社稷종묘(宗廟)에서 시조에 대한 제례(祭禮)를 행하여 왔다. 그리고 일반서민 사회에서 널리 행하여진 예()로는 관혼상제 등으로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소 개변은 있었으나 대체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준거(準據)하였다.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

 

사람의 본성(本性)과 금수(禽獸)의 본성, 즉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를 문제로 하는 논쟁. 18세기 초엽 조선 유교계에서 일어난 논쟁으로, 일명 호락분파(胡洛分派)라고도 한다.이간과 한원진 사이에 인물성동이의 문제를 가지고 서로 주장을 달리하여 발달한 논쟁은 점차 전 유교계의 쟁점으로 확대되었다.이간은 말하기를 "금수도 인류(人類)와 마찬가지로 오상(五常仁義禮知信)의 성()을 다 가졌다 하여 인물성(人物性)이 서로 같다."고 주장함에 대하여, 한원진은 말하기를 "대저 성()이라는 것은 다 기질(氣質)에 의하여 이름지은 것이니 성()은 곧 이()가 기() 중에 타재(墮在)한 이후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금수가 어찌 사람과 더불어 그 전부를 동일히 할 수 있느냐?" 하는 등 인물성이 같지 않다고 주장하여 이간의 설에 반대하였다. 이간은 다시 말하기를 "()과 물()이 다 같이 오행(五行)의 이()를 균수(均受)하였는데, 지금 그 기품(氣稟)을 논할 때에 편전분수(偏全分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하나 오상을 일()은 유()하고 일은 무()하다고 말하면 불가(不可)하다. 그러므로 금수가 다 같이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을 품수(稟受)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이간은人物之生 (인물지생)因各得其所賦之理 (인각득기소부지리)以爲健順五常之德 (이위건순오상지덕)所謂性也 (소위성야)

 사람과 물건이 태어남에 각기 부여받은 이()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덕을 삼으니, 그것이 이른바 성()이라는 것이다. ”  주자, <중용(中庸)>의 천명지위성장(天命之謂性章) 라 한 장구를 논거로 하여 '성즉리(性卽理)'라 주장하고, "일체 만물이 천명(天命)을 균수하는 이상 그 본성은 인의예지의 덕을 다 같이 갖추었을 것이며, 다만 인물성(人物性)의 차이는 기질에 의할 뿐"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원진은 성()을 단순히 이()로만 보지 아니하고 일정한 기()에 배합된 생물 각 종류의 서로 다른 특질로 보았다. , 성은 어디까지나 태극과 같은 이()가 기() 속에 섞인 뒤의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인간을 이루는 기()와 금수를 이루는 기에 차이가 있으며, 인간을 이루는 청명한 기에 속한 성()과 금수를 이루는 혼탁한 기에 속한 성이 같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인의예지와 같은 성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성으로서 금수의 성과는 다른 오직 인간만의 '본연의 성'이라 단언하였다. 이와 같이 한원진은 기()의 입장에 치중하여 인물성의 상이를 주장하고 이간은 이()의 입장에 치중하여 인물성의 상동(相同)을 주장하였다.이때에 윤봉구(尹鳳九최징후(崔徵厚) 등은 한원진의 주장을 지지하고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 등은 이간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이재·박필주 등의 집이 낙하(落下)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이론을 낙론(洛論)이라 부르게 되었고, 한원진·윤봉구·최징후 등의 집이 호서(湖西)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이론은 호론(湖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분립된 양론은 사칠이기설을 다투어 논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심성(心性)의 변()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양론 중 한 쪽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양파는 서로 파당을 지어 오래도록 논변을 계속하였다.

 

유교 사상의 공과

 

유교가 우리나라의 국가발전과 문화향상에 이바지한 공헌으로서는 흔히 다음 몇 가지가 지적되고 있다.

 

첫째, 정치 제도면에 있서 삼국시대에는 부족연맹국가를 봉건군주국가로 체제전환을 시키는 데 있어서 이론적 뒷받침을 하였고,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러는 한층 강력한 중앙집권의 군주국가·관료국가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과거제도를 채택하여 인재 등용의 기준을 삼으면서부터 더욱 전형적인 유교국가의 형태를 갖추어 국가와 국민을 유교화시키는 데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둘째, 사상면에 있어서 유교는 국민의 윤리·도덕의식을 함양·계발함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른바 오륜(五倫)은 가정생활·사회생활·국가생활에 있어서 기본 윤리가 되었다. (((()의 사상은 널리 국민 일반에게 보편화되어 가정과 국가를 유지해 가는 정신적 지주(支柱)였으며, 예의·염치를 존중하고 '군자'·'소인'의 구별을 중히 여기어 군자 되기를 힘쓰고 소인됨을 부끄러워하는 윤리의식은 드디어 외국인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란 평을 받게까지 되었다.

 

셋째, 특히 조선에 있어서의 송학(宋學), 그중에서도 정주학(程朱學)들이 정치를 담당하고 부패·부정의 세력들과 싸우다가 도리어 부정세력에 희생되는 이른바 사화(士禍)도 종종 생겼으나, 그들이 남긴 도의정신은 역사상 영원히 빛나고 있다. 비록 정치에는 실패하였지만 그들이 보여준 정의와 진리를 위한 불굴의 정신은 드디어 사림(士林)을 통하여 서원(書院)의 발생을 보게 되었다. 뒷날 서원은 여러 가지 폐단을 내었지만, 서원의 당초 창설은 원래 도의를 위하여 순신(殉身)한 선현(先賢) 또는 그 유공자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넷째, 조선의 사화와 당쟁은 유학자들을 산림(山林) 속으로 몰아넣어 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이론유학(理論儒學)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른바 심성(心性이기(理氣)의 토론,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의 변론 같은 것은 중국의 성리학(性理學)을 능가할 정도였고, 그 영향은 일본에까지 파급되어 일본에 퇴계학파가 생길 정도였다.한편 임진왜란 이후로는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유학이 자기반성을 하기 시작하여 철학, 형이상학적인 이론유학으로부터 현실의 정치·경제·사회문제로 관심을 돌리면서 드디어 새로운 경향의 유학을 발생시켰으니 이른바 실학(實學)이 그것이다. 유학은 원래 내외(內外) 양면이 있다. 수기(修己)와 정덕(正德)은 내적(內的)인 면이요 치인(治人이용후생(利用厚生)은 외적인 면이다. 임진왜란 이전의 성리학은 '수기'·'정덕'면의 이론과 실천에 치중했고 그 후의 실학은 '치인'·'이용후생'면의 이론 (그 경륜과 실행의 구체적 방법의 제시)에 힘썼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와 문물 제도에 관한 검토·비판이 이루어지면서 유학은 한층 더 한국화·토착화된 유학으로 발전하였고, 청국(淸國)을 통한 서구 문물의 수입에 따라 '북학(北學)'·'서학(西學)'에까지 관심을 넓히게 되었다.그러나 이와 동시에 유교는 한국의 역사발전에 많은 폐단도 드러냈다. 그 중요한 것으로는,

 

(1) 너무 예의에 집착된 결과로서 관혼상제의 '번문욕례(繁文縟禮)'가 심하였고 따라서 형식적인 것에 구애되고 체면차리기에 급급하여 내심의 성실성을 잃어버리는 폐단이 생겼다.

 

(2) '···'이라 하여 '()'의 신분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의 구별이 생겨 소위 양반계급은 하나의 특권계급으로서 상민을 천시하며 노력을 착취하여 국민간의 적대의식을 조장하고 노동을 싫어하며 학문을 하나의 행세거리로 삼으면서 유교의 이름을 팔아 국민을 기만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3) 도학이 인간의 덕성 함양에 지나치게 치중한 결과 소위 "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이다(德者本也 財者末也)"라는 관념이 '()' 계급에서 굳어져 물질적인 생산산업, 이익을 도모하는 상공업 같은 것을 천시하고, 그런 기술도 배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업 이외의 생업, 즉 상공업이 발달할 수 없었고 과학기술도 발전시킬 수 없었다.

 

(4) 유교 경전을 존중함에 따라 그것도 습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한문(漢文) 학습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 자기의 문자('한글') 사용을 등한히 하여 민족적 문학·예술의 발전을 지연시켰고, 경전의 교훈을 무조건 맹목적으로 고수하려는 행세 위주의 '양반 유학자'들이 증가되어 감에 따라 시()와 세()를 가리지 못하고 시중(時中)을 맞추지 못하는 보수·완고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이 유교의 특유한 성격처럼 되었다. 유교에는 영원불변의 진리를 내포한 본질면이 있고 그것을 응용함에 있어서 시대와 사회에 따라 생기는 말단적인 폐단도 있다.한국의 유교는 그 본질면의 우수성을 잘 드러내어 한국의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에 진짜 유학자가 아닌 미숙한 유학자, 가짜 유학자, 행세 위주의 유학자로 인한 많은 폐단도 빚어냈다. 이 폐단을 떨어 버리고 유교의 참정신을 다시 부흥시키는 것이 오늘날 공리주의 사상, 물질주의 문화의 폐단을 시정하는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조선의 유교사상

조선의 유교사상 역사동방에 있어서 주요한 사상의 흐름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라 하겠는데, 한국은 이러한 세 가지 사상적 요소를 모두 흡수·구비하여 발전시켜 왔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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