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이것이 유교 경전이다.

수선님 2023. 1. 22. 14:29

이 책을 내면서

李完栽(영남대학교 명예교수)

 

벌써 10여 년 전으로 기억된다. 어떤 유림 단체의 모임에서 유교 경전에 관하여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한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유교 경전 13경이 모두 무엇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물었더니 백 명이 넘는 청중 가운데서 이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13경이라는 말 자체를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날 모인 사람들이 다름 아닌 유교와 긴밀하게 관련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점에 있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것이었다. 그 동안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이 늘어나고 그에 대한 지식도 널리 보급되어 지금은 상당히 많이 달라졌겠지만, 이것이 그다지 오래전의 일이 아닌 우리의 실정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교 경전이 무엇이냐 물으면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하나의 상식이다. 이것은 주자학을 일변도로 숭상했던 조선조 유학의 산물이다. 주자가 송대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유학의 보급을 위하여 새로이 사서(四書)를 정하고 오경 가운데 특히 시⋅서⋅역 삼경(三經)을 필독의 경전으로 정함으로써 사서⋅삼경 즉 칠서(七書)가 유교 경전의 전부로 오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총 경전은 13경(十三經)이다.

19세기 이래 서양 문화가 무력을 동반하여 동방을 엄습한 이래, 동양인들은 서양 문화에 매혹되어 스스로 동양의 전통 문화를 거부하고 서양을 배우려고 애써 왔다. 그리하여 동양의 전통 학문은 일시적 단절을 겪었다. 그렇지만 역사의 유전(流傳)은 최근 수십년 이래로 서서히 동양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동양의 전통 학문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종래 현대산업 발달의 저해 요인으로 지목되었던 유학이 도리어 경제부흥의 잠재적 요인으로 지적되기까지 하였다. 아시아의 4용(四龍)이라는 한국⋅대만⋅홍콩⋅싱가폴이 모두 유교적 전통이 강한 국가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 유교 자본주의, 유교적 르네상스라는 말까지 생기게 되었다.

유교 문화권의 아시아 여러 나라 가운데 오늘날 유교적 문화 의식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나라로서는 한국이 제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다가오는 21세기에 있어서 유학적 전통이 과연 어떤 역사적 사명을 수행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다만 강한 유교적 전통을 가진 국민으로서 그 전통에 대한 바른 이해 위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자세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한 작업의 첫 단계로서 적어도 유교의 기본 경전에 대한 올바른 상식은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겐 오랫동안 관심밖에 팽개쳐져 있던 학문이라 쉽사리 접근하기가 어려울 듯하여 될 수 있으면 쉽게 해설해 보려고 노력은 했으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내용면에 있어서도 다소 소홀한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 시정을 거듭해 갈 예정이다. 이 책이 유교 경전의 이해에 다소나마 보탬이 된다면 천만다행이겠다.

1996년 6월

저자 씀

 

제1장 유교(儒敎) 경전(經典)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

 

1. 경전(經典)의 의미

경전(經典)이란 낱말의 뜻은 무엇인가? 경전은 경(經)과 전(典)의 두 글자가 어울려 된 낱말이다. 따라서 경과 전을 따로따로 그 의미를 살펴보자.

경(經)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나라에서 앤 책(官書)' 이라는 뜻이고, 둘째는 '성인 지은 불변의 진리'라는 뜻이다. 나라에서 낸 책이란 나라에서 만들어 낸 특별한 크기의 책으로서 일반인들이 저술한 책과는 다른 책을 의미한다. ≪논어집해서(論語集解序)≫에 '육경(六經)의 책(策) 길이는 이척사촌(二尺四寸)이고 효경(孝經)은 그 반이고, 논어는 팔촌(八寸)이었다.'고 하였다. 책(策)이란 옛날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대[竹]쪽에 글씨를 써서 이를 엮어 책으로 만들었던 것을 말한다. 그런데 육경(六經)은 그 길이가 특히 길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조에 있어서 정부에서 간행한 규장각본(奎章閣本)이 특히 큰 책이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다음으로 성인 지은 책이란 뜻은 그 책의 내용이 영원히 불변하는 가치를 가졌다는 뜻이다. ≪석명(釋名)≫ 석전예(釋典藝)에 '경(經)은 길(徑)이요, 떳떳한 법이다. 길이 어디에든 통하지 않는 법이 없는 것과 같이 언제나 쓸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문심조룡(文心雕龍)≫ 종경편(宗經篇)에 '경(經)이란 영원한 도이며, 불멸의 위대한 가르침이다.'라 하고, ≪효경(孝經)≫ 주에서는 '경(經)은 변치 않음을 말함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경(經)이란 한자 자체를 풀이해 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질 수 있다. 경(經)이란 한문 글자는 '날줄 경' 자이다. 날줄은 베를 짜는데 있어서 옆으로 왔다 갔다 하는 씨줄[緯]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러 계속되는 실이다. 즉 씨줄[緯]이 공간을 메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날줄[經]은 시간적으로 계속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아니하고 계속되는 뜻을 따서 성인의 말씀을 담은 책을 경(經)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典)이란 한자는 '법 전' 자인데 이 글자는 책(冊)과 책상[丌] 자의 두 글자가 합쳐서 된 글자이다. 전(典) 자의 윗부분은 책(冊) 자의 변한 모습이고, 아랫부분은 책상 기(丌) 자이다. 그러한 책은 곧 법이 되는 중요한 책이라는 뜻이다. 이상과 같은 경(經)과 전(典)의 뜻을 합쳐서 영원히 불변하는 가치를 담은 책을 경전이라고 해왔던 것이다.

 

2. 오경(五經) 또는 육경(六經)

유교의 경전을 옛날에는 오경(五經)이라고 했다. 오경이란 시(詩), 서(書), 역(易), 예(禮), 춘추(春秋)를 말한다. 한(漢)나라 때 이 다섯 가지 경을 전공하는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를 두었고, 당(唐)나라 때에는 태종(太宗, 李世民. 재위 626~649)이 공영달(孔穎達. 574~648)에게 명하여 '오경(五經)의 바른 뜻(正義)'이란 ≪오경정의(五經正義)≫를 내게 하였다. 이로써 유교의 경전은 오경으로 확정된 것이다.

그러나 옛날의 기록에는 유교의 경전을 육경(六經)이라고 기록한 곳도 있다. ≪장자(莊子)≫의 천운(天運)편에 공자(孔子, 孔丘. BC551~BC479)가 노자(老子, 李耳. ?~?)에게 대답하기를 "구(丘)는 시(詩),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를 공부하여 글을 익혔습니다."고 한 구절이 있다. 오경에 악(樂)이 더 첨가된 것이다. 또 ≪장자≫ 천하(天下)편에는 이들 육경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詩)는 뜻[志]을 말하고, 서(書)는 일[事]을 말하고, 예(禮)는 행(行)을 말하고, 악(樂)은 화(和)를 말하고, 역(易)은 음양(陰陽)을 말하고, 춘추(春秋)는 의(義)를 말함이다.'고 하였다. ≪장자≫ 뿐만 아니라 유가의 경전인 ≪예기(禮記)≫에서도 육경을 말한 바가 있다. 경해(經解)편에서 육경의 쓰임새를 설명하기를 '사람의 부드럽고 독실함[溫柔敦厚]은 시(詩)를 익힌 탓이고, 탁 트여서 앞을 내다볼 줄 아는 것[疏通知達]은 서(書)를 익힌 탓이고, 공손하고 의젓함[恭儉莊敬]은 예(禮)를 익힌 탓이고, 너그럽고 어진 것[廣博易良]은 악(樂)을 익힌 탓이고, 조용하고 자세한 것[潔靜精微]은 역(易)을 익힌 탓이고, 말을 분명히 하고 일을 잘 처리함[屬辭比事]은 춘추(春秋)를 익힌 탓이다.'고 하였다.

유교의 경전을 육경으로 표현한 것 외에 또 육예(六藝)라고 표현한 바도 없지 않다. ≪사기(史記)≫ 골계열전(滑稽列傳)에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육예(六藝)가 정치에 있어서 한가지로 통하나니, 예는 사람을 절제하게 하고, 악은 융화하게 하고, 서는 일을 펴 나아가게 하고, 시는 뜻을 통달하게 하고, 역은 변화를 이룩하게 하고, 춘추는 의리를 펴게 하는 것이다.'고 하여 위에서 말한 ≪장자≫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교의 경전을 육경 혹은 육예로 표시한 기록이 있으나 이것은 대체로 선진(先秦)시대의 기록이니 선진시대에는 악(樂)을 한 경전으로서 중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漢) 이후에는 악(樂)에 대한 서적은 따로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악기(樂記)라는 글이 ≪예기≫의 한 편으로 전할 따름이다. 그러면 육경이던 유교 경전이 어떻게 오경으로 줄어들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정하지 아니한다. 어떤 사람은 본래 악경(樂經)이 따로 있었는데 이것이 진시황(秦始皇, 嬴政. 재위 BC246~BC210)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때 없어져 버렸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악은 본래 따로 경전이 없었다고도 한다. 악은 악보(樂譜)일 뿐 악을 연주하는 내용은 시(詩)일 따름이니, 악경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주장이 있으나 어쨌든 한(漢) 이후로 유교의 경전은 오경(五經)으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3. 십삼경(十三經)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漢) 이후 당(唐)을 거쳐 송(宋)에 이르기까지 유교의 경전을 오경이라 일러왔으나 송(宋)에 이르러 유교의 경전을 모두 십삼경(十三經)으로 확정하였다. 그러면 십삼경이란 모두 어떠한 책들을 말하는가? 그 이름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시(詩), 서(書), 역(易),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논어(論語), 맹자(孟子), 효경(孝經), 이아(爾雅)의 열세 가지이다.

유교의 경전이 본래 오경이었는데 그 중 시, 서, 역은 전해오는 그대로이고 예와 춘추는 각기 세 가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즉 예는 주례, 의례, 예기의 셋으로 나누어지고 춘추는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의 셋으로 나누어졌다. 여기서 예의 본래의 뜻과 그것이 셋으로 발전된 과정을 일본의 학자 가등상현(加藤常賢)씨의 설을 따라 간략히 설명해 보자.

예(禮)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대체로 사람들 상호간에 지켜야할 바람직한 태도라는 정도로 간단히 생각하는데, 예의 본래의 뜻은 훨씬 더 넓은 것이었고 또 그 발생도 유교의 발생과 시원을 같이하는 원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禮)라는 한문 글자가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예(禮) 자는 보일 시(示) 변에 풍성할 풍(豊) 자로 된 글자이다. 한문으로 보일 시(示)는 신(神)과 관계되는 글자이다. 그리고 풍성할 풍(豊) 자는 그 본래의 글자는 풍(豐)으로 쓰여졌는데 이 글자는 반[豆] 위에 재물을 올려둔 모습을 나타낸 글자이다. 즉 원시시대에 신 앞에 제물을 바쳐놓고 제사를 지내는 뜻을 나타낸 글자인 것이다. 원시시대에는 제사와 정치가 따로 분리되지 아니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시대이었음으로 한 종족의 모든 생존 활동이 이 예(禮)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예는 말하자면 원시사회에 있어서의 정치, 경제, 예술, 국방 등 종합 문화였다. 그러다가 인지(人智)가 발달되면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됨으로써 이 예도 분리되게 되었다. 즉 정치적인 면을 규정하는 예는 국가의 제도를 규정하는 문헌으로 남게 되고, 종교를 규정하는 예는 제사 의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의식(儀式)을 규정하는 문헌으로 정리되게 되었던 것이다. 앞의 정치적인 면을 정리한 문헌으로서 남은 것이 오늘날의 주례(周禮)이고, 뒤의 의식적인 면을 정리한 문헌으로서 남은 것이 오늘날의 의례(儀禮)이다. 그리고 이들 예에 대한 철학적인 설명을 가한 것이 오늘날의 예기(禮記)이다. 이 세 가지를 일러 삼례(三禮)라고 한다. 물론 이 삼례가 오늘날의 형태로 갖추어지게 된 과정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 변천이 있었으나, 삼례가 오늘날 형태로 나누어진 대체적인 과정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춘추가 세 춘추로 나누어진 데에는 까닭이 있다. 좌씨전(左氏傳),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은 그 이름이 나타내듯이 그것은 본래 경(經)이 아니고, 전(傳)이다. 전(傳)은 해설서라는 뜻이다. 춘추는 본래 노(魯)나라의 역사인데, 역사 기록은 본래 그 문장이 간략하고 또한 그 뜻이 은밀한 것이었다. 그러한 기록이 더구나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면 그 기록의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뒷사람들이 알기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이 춘추에 대하여 후인들이 그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한 것이 곧 춘추전(春秋傳)인 것이다. ≪한지(漢志)≫의 기록에 의하면 춘추전에는 본래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 추씨전(鄒氏傳), 협씨전(夾氏傳)의 다섯 가지 전(傳)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에 전하는 것은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의 세 가지뿐이다. 그리하여 춘추는 3춘추로 분리되게 된 것이다.

이 밖에 ≪논어(論語)≫는 공자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공자를 중심으로 한 공자학단(孔子學團)의 제자들, 그리고 공자와 공자 제자들과 관계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의 말들을 기록한 것이다. ≪효경(孝經)≫은 공자의 후학들, 특히 증자(曾子, 曾參, 魯. BC506~BC436)를 중심으로 유교의 근본 윤리인 효(孝)에 관하여 설명한 책이다. 그리고 ≪이아(爾雅)≫는 한대(漢代)의 학자들이 경전에 나오는 말들을 풀이한 것을 모아 편집한 책으로서 오늘날의 사전에 해당하는 책이다. ≪맹자(孟子)≫는 맹자(孟子, 孟軻. BC372?~BC289?)의 사상을 정리한 책이다. 이상 13가지 책이 곧 유가의 13경이다.

이 13가지 책은 모두 경(經)이거나 경을 해설한 것임으로 ≪한지≫에 모두 경류(經類)에 분류되었다. 그러나 ≪맹자≫만은 ≪한지≫에 제자류(諸子類)에 분류되었다. ≪맹자≫는 전한(前漢) 문제(文帝, 劉恒. BC180~BC157) 때 학관(學官)에 맹자 박사를 두었으나 무제(武帝)가 유교를 숭상하여 육예(六藝)의 과목을 두면서 맹자 박사를 없애고 말았다. 그 후 유향(劉向, 前漢. BC77~BC6)이 별록(別錄)을 만들고 유흠(劉歆, 前漢. BC53?~BC23)이 칠략(七略)을 만들어 모든 서적을 분류하면서 ≪맹자≫는 제자류에 넣고 말았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도 유향과 유흠의 예를 따라서 제자(諸子)로 분류했다. 그러나 오대(五代) 때 촉(蜀)나라의 군주 맹창(孟昶. 919~965)이 돌에 유교의 경전 11경을 새겼는데[石經], 그때 그는 ≪효경≫과 ≪이아≫를 빼고 ≪맹자≫를 넣었다. ≪맹자≫가 경으로 인정받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할 것이다. 그 후 북송(北宋)의 신종(神宗, 趙頊. 재위 1067~1085)이 과거의 시험과목으로서 시⋅서⋅역⋅주례⋅예기를 대경(大經)으로 하고 논어⋅맹자를 겸경(兼經)으로 하였다. 그리고 원풍(元豐) 6년에 맹자를 추국공(鄒國公)에 봉하고 그 이듬해 공자의 사당에 배향함으로써 ≪맹자≫는 확실하게 경의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이다.

 

4. 경금문⋅고문(經今文⋅古文)의 문제

유교 경전의 연구에 있어서 진작부터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의 문제가 크게 문제되어 왔다. 이 문제는 경전의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응당 먼저 언급해야 할 문제이다. 경의 금문과 고문이란 무슨 뜻인가? 법을 숭상하고 유학을 말살하려던 진(秦)이 망하고 한(漢) 왕조가 들어서서 유학을 다시 중시하게 되자 우선 유교 경전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전하는 바로는 복생(伏生, 伏勝. BC260~BC161)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유교의 경전을 외우게 하고 이를 그 당시에 사용하던 문자였던 예서(隸書), 즉 금문(今文)으로 정리하였다고 한다. 과연 유교의 경전을 모두 복생이 외어서 정리했던 가의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어쨌든 한(漢) 초에 유교의 경전을 금문으로 정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이 금문경전에 밝은 사람으로 하여금 박사관(博士官)을 삼아 유학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노(魯)나라 공왕(恭王) 때 궁전을 넓히려고 공자의 옛 집터를 헐었을 때 그 벽 속에서 유교의 경전이 나왔는데 그 경전은 진(秦)나라 이전에 쓰여졌던 전서(篆書)로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금문과 대조해 보았던 바, 금문에 없는 내용이 여러 편 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漢)나라에서 유교를 숭상하니 공자의 벽 속에서뿐만 아니라 그 후 민가에 감추어져 있던 많은 고문 경전이 나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옛날 글자[篆書]로 쓰여진 고문경전을 금문으로 된 금문경전과 구별하여 고문경전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고문경전에 있는 내용이 어째서 금문경전에는 없는가 하는데 있었다. 이 점에 대하여 고문경전을 신용하는 사람들은 고문경전이 본래의 모습인데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해서 경전이 유실된 것을 한대(漢代)에 금문으로 정리할 때 빠뜨려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고 고문경전이 완벽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금문경전을 신봉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인정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금문경전은 이미 국가에서 인정한 경서로써 오랜 세월에 걸쳐 박사관을 통해 대대로 전수된 경전이었음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은 반면에 고문경전은 학문을 좋아하는 일부 학자들이 개인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고 받드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금문경전과 고문경전의 문제가 전한(前漢) 말기에 이르러 한 학문적인 쟁점으로 부각된 것이다. 즉 전한 말기의 애제(哀帝, 劉欣. 재위 BC7∼BC1) 떼의 교서관(校書官)이었던 유흠(劉歆)이 고문경전을 금문경전과 마찬가지로 국가에서 인정하고 여기에도 박사관을 두게 하고자 건의했던 것이다. 이에 금문경전을 전공하는 박사들이 반기를 들게 됨으로써, 금문경전을 전공하는 학자들과 고문경전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두 파로 갈리어 다투게 되었다. 그들은 각기 주장하기를 고문학파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금문경전은 분서갱유로 인하여 경전 중의 많은 부분이 빠져 버린 것이고 고문경전은 완전한 상태의 것이라 하고, 금문학파들은 유흠이 교서관을 하면서 금문경전의 많은 부분을 거짓으로 지어 넣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고문위작설(古文僞作說)이다. 유흠의 고문경전 위작설(僞作說)은 그 후에도 끈질기게 계속 되었다. 즉 유흠이 한(漢)을 거부하고 신(新)을 세웠던 왕망(王莽. BC45~23)을 받들었음으로 금문학자들은 유흠이 고문경전을 위작함으로써 왕망의 신(新) 건국을 합리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금⋅고문학파의 논쟁은 단순한 경전 자체의 편수의 다소와 문구의 차이나 그 정통성에 관한 견해의 차이에 그치지 아니하고, 경전을 보는 시각과 경전의 사상 내용에 이르기까지 서로 입장을 달리했던 것이다. 우선 두 학파는 경전을 배열하는 순서부터 달리했다. 금문학파는 육경(六經)은 공자가 만세에 가르침을 내리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그 경전의 깊고 얕은 의미를 따라 순서를 배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시(詩)와 서(書)는 문자적인 교육임으로 제일 앞에 내세워야 하고, 예(禮)와 악(樂)은 실천을 위하고 심신의 단련을 위한 것임으로 그 다음에 와야 하고, 역(易)은 철학적인 의미를 담았고 춘추(春秋)는 은밀한 뜻[微言大義]을 지닌 것임으로 마지막에 배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장자≫, ≪순자(筍子)≫, ≪춘추번로(春秋繁露)≫, ≪사기≫ 등에서의 배열 순서가 모두 그러한 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문학파에서는 육경은 주공(周公, 姬旦. ?~?)이 지은 책이고 공자는 다만 이를 해설하고 보존한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배열에 있어서도 시대의 선후로 순서를 정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역(易)의 팔괘는 복희씨(伏羲氏)가 만들었으므로 제일 먼저 배열해야 하고, 서(書)는 요순(堯舜)의 이야기로 시작되므로 그 다음이 되고, 시(詩)는 상송(商頌)이 있으므로 또 그 다음이 되고, 공자가 주공의 법에 따라 춘추(春秋)를 지었으므로 춘추를 제일 마지막에 배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예로는 ≪한서≫ 예문지, 유림전 등이 모두 그렇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역사의 전개를 보는 시각도 같지 않았다. 고문학파에서는 선양(禪讓)이 이루어진 요⋅순시대가 중국 역사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시대였고, 요⋅순시대 이래 중국 역사는 점차 퇴폐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즉 요⋅순시대 이후 하⋅은⋅주의 삼대(三代)는 제(帝)에서 왕(王)으로 강쇠하고, 춘추시대는 왕에서 패(覇)로 강쇠하고, 전국시대는 패에서 웅(雄)으로 강쇠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금문가들은 요⋅순의 선양 제도는 공자가 옛날에 의탁하여 당시의 제도를 고치고자 한 것[託古改制]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치 노장(老莊)이 황제(黃帝)에 의탁하고, 묵자(墨子, 墨翟. BC479?~BC381?)가 우(禹)에 의탁한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요⋅순의 제도는 꼭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요⋅순⋅우⋅탕 시대는 시대가 너무 아득하여 그때의 사실을 그대로 믿기가 어렵고 문화의 발달도 완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춘추시대에 이르러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일어나 각기 훌륭한 사상들을 내놓음으로써 중국의 문화와 역사는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고 그것이 전제군주 제도로 전개되어 비록 인권을 속박하게 되었으나 그것은 마땅히 후인들이 고쳐야 할 책임인 것이고 역사는 대체로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도 금문가들이 공자는 전래의 중국 문화를 집대성하여 만세에 표준이 되는 원리를 제시한 창조적인 대학자요, 사상가라고 보는데 반하여 고문가에서는 주공을 창조적인 성자로 보고, 공자는 '옛것을 충실하게 서술하고 새롭게 창조하지는 아니한{述而不作]' 충실한 역사가라고 본다.

위에 열거한 점 외에도 문학을 보는 입장, 제자학(諸子學)을 보는 입장 등에 있어서도 견해의 차이를 보였으나 그 중요한 점은 역시 위에 나열한 점들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경금문⋅고문의 논쟁은 유흠이 고문 경전을 학관(學官)에 세우려던 전한(前漢) 말기에 시작하여 후한(後漢)에 걸쳐 줄곧 계속되었다. 처음 유흠이 고문경전을 학관에 세우려던 계획은 금문가들의 세력에 몰려 한때 좌절되었으나 그 후 고문가들이 세를 회복하여 결국 학관에도 세우게 되고 후한 일대에는 오히려 고문가들이 더욱 득세하는 형편이었다. 이들 경금⋅고문가들은 모두 각자의 사문(師門)을 존중하여 경전을 연구함에 있어서 사승계통만을 고수할 뿐 결코 상대의 이론을 용납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후한 때의 대주석가인 정현(鄭玄. 127~200)이 금문⋅고문의 계통을 가리지 않고 주석을 가하게 되고, 그 주석을 많은 학자들이 그대로 따름으로써 금문⋅고문의 대립은 크게 해소하게 되었다.

그런데 청대(淸代)에 이르러 한학(漢學)에로의 복귀가 주장됨에 따라 자연 이 금⋅고문의 문제가 다시 대두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청대의 고증학에서는 대체로 금문학의 입장을 취하게 되고 고문경전은 유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위작에 의한 것이 많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 이론의 자세한 점에 이르러서는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고, 다만 앞으로 13경을 논하는데 있어서 그 이해를 돕기 위하여 금⋅고문의 대체적인 설명에 그쳐 두고자 한다.

 

5. 사서삼경(四書三經)

사서⋅삼경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히 잘 알려진 유교의 경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사서⋅삼경이 유교 경전의 전부인줄 안다.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첫머리에서 이미 밝혔듯이 우리는 조선조 5백년 동안 주자학을 철저하게 받들었는데 그 주자(朱子, 朱熹, 北宋. 1130~1200)가 새로운 유교의 경전으로서 사서(四書)를 확정하고 아울러 삼경(三經)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서⋅삼경은 어떠한 책인가?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大學)≫, ≪중용(中庸)≫이고 삼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이다. 그런데 주자는 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십삼경을 그대로 유교 경전으로 받들지 아니하고 새로이 유교의 경전으로서 사서⋅삼경을 제정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역사적⋅사상적 배경이 있다. 즉 송대(宋代)라는 시대가 유교를 재평가하고 이를 시대적인 사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였고 또 그것을 좀 더 손쉽게 이해시켜야만 할 시대적인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요구에 대하여 좀 자세하게 살펴보자.

한대(漢代) 이후 유학이 시대에 따라 그 성하고 쇠한 차이는 있었으나 일괄되게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즉 한무제(漢武帝, 劉徹, 前漢. 재위 BC141~BC87)가 유학을 관학(官學)으로 확정한 후 유학은 일관되게 그 관학의 지위를 유지하였고 유학의 전적은 경전(經典)으로서 숭상되었다. 따라서 유학의 경전은 국가의 인재등용의 교과목으로서 이용되었으므로 유학 경전의 권위는 대단한 것이었다. 선진(先秦)시대에 제자(諸子)들이 시대의 구제를 자임(自任)하고 각기 창의적인 주장을 내세울 때에 있어서는 유학도 다른 제자(諸子)들과 다름없이 창의성이 풍부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한대 이후 일단 관학으로 확정되고 국가고시의 과목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되자 더 이상 새로운 창의성은 추구하지 아니하고 어떻게 하면 그 경전의 뜻을 철저하게 이해하여 관리가 되는 관문인 과거에 합격할 것인가에 관심을 쏟았다. 그리하여 한대 이후 유학에는 새로운 발전은 없이 오직 경전의 뜻을 해석하는 훈고학(訓詁學)만이 발달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유학이 본래 현실 구제의 학으로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학문 성격 자체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성향을 벗어날 수 없었다. 따라서 한대 이후 유학은 한결같이 정치응용학으로서 그리고 윤리 교과서로서의 역할을 일관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유교적 학문 풍토에 새로운 사상 성격을 가진 불교가 전래했던 것이다.

불교는 본래 유교와는 달리 그 학문 성격이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것이었다. 인간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히 안락한 세계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인가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따라서 불교는 현실적인 세간(世間)에 관심하기보다는 세간을 벗어난 영원한 세계를 추구하는 출세간(出世間)적인 것이었다. 학문적 성격을 달리하는 이 두 학문은 처음에는 별 걸림이 없이 서로 잘 조화할 수가 있었다. 즉 불교는 종교적 정신적 세계를 문제로 삼고 유교는 정치적⋅윤리적인 현실 문제를 문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교는 마음 닦는 근본[釋者修心之本]'이고, '유교는 나라 다스리는 근원[儒者理國之源]'이라는 표현이 생겨나듯이 두 학문은 서로 도우며 조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隋)⋅당(唐)대에 이르러 불교는 화엄종(華嚴宗), 천태종(天台宗) 등의 거대한 중국 불교로서의 불교 체계를 이루게 되고 또 불교가 중국의 전통적인 사상과 결합하여 선종(禪宗)이란 특수한 종파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사상적⋅정신적 세계는 온통 불교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 반면 중국 전통 사상인 유교는 다만 정치적 제도로서 작용하는데 그칠 만큼 위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화엄종, 천태종과 같은 원융한 불교 철학의 세계나 깊이 자기 정신세계에 침잠하는 선종이 모두 통일적인 안정된 세계의 정신 원리로서는 훌륭한 것이나 국가의 존망이 문제되는 위급한 시기에 있어서는 실용성이 적은 사상이었다. 송(宋)이 천하를 통일하자 북방의 이민족이 세운 요(遼)나라와 금(金)나라가 끊임없이 북방을 침범했다. 이 북방 이민족의 침범을 배격하는데 있어서 출세간(出世間)적인 불교가 구국의 이데올로기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이때 구국의 이데올로기로서 절실하게 그 가치가 인정된 것이 유교였다. 유교는 현실적인 의리(義理)를 존중한다. 국가의 위급을 위해 감연히 일어나야 할 의(義)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유구에 의하여 강조된 것이 춘추의 의리 정신이었다. 그리하여 송대에 있어서 처음 일어난 것이 춘추학(春秋學)이었다. 이 춘추학을 시발로 하여 유학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거창한 철학세계를 이룩하는 동안 중국인들은 철학적 사고의 훈련을 받았던 것이다. 이제 유학으로서 구국의 시대적 정신으로 대체하려면 유학도 불교처럼 철학화하고 체계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는 불교를 극복하고 불교를 능가하여 일반인들에게 영합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것이 송대이학(宋代理學)이라는 것이다.

송대이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유학의 철학화라고 할 수 있다. 송대이학은 주렴계(周濂溪, 周敦頤, 北宋. 1017~1073)를 시발로 하여 정명도(程明道, 程顥, 北宋. 1032~1085), 정이천(程伊川, 程頤, 北宋. 1033~1107), 장횡거(張橫渠, 張載, 北宋. 1020~1077), 소강절(邵康節, 邵雍, 北宋. 1011~1077) 등에 의하여 크게 개발되고 주자(朱子)가 이를 집대성하여 송대이학을 완성하였다.

주자는 송대이학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유교 문화를 일단 재정리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학자는 한 시대의 문화를 정리하는 법이다. 공자가 춘추시대에 있어서 시, 서, 예, 악을 정리하였듯이 주자도 송대에 있어서 한대 이래의 유교 경전에 대한 훈고를 정리하고, 경전 자체를 재정리했다고 할 수 있다. 사서⋅삼경도 그러한 경전 정리의 한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가 발생하여 송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을 거점으로 해서 비록 경전이라 할지라도 시대적인 차이로 인하여 후대인으로서는 자연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있고 또 경전의 내용이 시대에 맞지 아니하는 점도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주자는 어떻게 하면 유교의 근본정신을 사람들이 손쉽게 알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교 정신을 손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방편으로 고안된 것이 새로운 경전의 제정이고 그것이 곧 사서⋅삼경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사서는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다. ≪논어≫는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공자학단의 생활 기록이다. 공자는 유교를 창립한 분이니 공자의 사상과 생활 기록을 담은 ≪논어≫가 유교의 근본정신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책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맹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대에 있어서는 제자류(諸子類)에 속하던 책으로서 ≪순자≫와 동격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특히 그 사상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고, 공자의 사상을 정통으로 계승하는 도통의 계승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유교를 이해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책이 되었다. 다음으로 ≪대학≫과 ≪중용≫은 본래 단행본이 아니라, ≪예기≫ 49편 가운데 들어있던 한 편의 글들이었다. 주자 이전에 이미 이 ≪대학≫, ≪중용≫편은 특히 중요한 편으로서 유교의 경전을 집약적으로 잘 나타내었다고 하여 많은 학자들이 주목하고 이에 주를 달기도 했다. 그런데 주자에 이르러 이 두 편을 ≪예기≫에서 발췌하여 ≪논어≫, ≪맹자≫와 아울러 ≪사서(四書)≫라고 이름하고 유학을 공부하는데 필독의 책으로서 확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주자는 이 사서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주석(註釋)을 달고 장구(章句)를 나누었던 것이다. 즉 ≪논어≫, ≪맹자≫에 있어서는 옛 사람들이 행한 주석을 취사선택하여 이를 수용하고 그 철학적인 의미는 송대이학가들의 설을 따라 이를 해석하고 거기에 덧붙여 자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논맹집주(論孟集註)≫를 내어 ≪논어≫, ≪맹자≫의 뜻을 새롭고 깊게 해석했던 것이다. 특히 ≪논어≫에 대해서는 여러 번 그 주석을 고침으로써 평생토록 정력을 거기에 쏟았다. 그리고 ≪중용≫과 ≪대학≫에 대해서는 주자가 새로이 장구를 정했다. 특히 ≪대학≫은 그 장절을 재편성함으로써 새로운 책으로 재구성했던 것이다. 주자는 ≪대학≫편을 옛날 ≪예기≫에 수록할 때 착간(錯簡)된 채 잘못 수록했다는 것이다. 착간이란 글의 내용을 담은 대쪽[竹簡]이 헝클어졌다는 뜻이다. 옛날 종이가 발생되기 이전에는 대쪽에 글씨를 써서 이를 가죽끈으로 엮어 책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죽끈이 닳아 끊어짐으로써 대쪽이 순서대로 되지 못하고 앞뒤가 헝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대학≫편이 그렇게 된 채 수록되었다고 주자는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예기≫에 실린 내용을 정리하여 경(經) 1장, 전(傳) 10장으로 나누었다. 경은 공자의 말씀이고 전은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 曾參. BC506~BC436)가 서술한 것을 그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라고 주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경(經)의 내용은 3강령(三綱領), 본말(本末), 8조목(八條目)으로 되었다고 주자는 보았다.

3강령은 대학의 목적으로서 첫째 사람이 타고난 밝은 덕을 밝히고[明明德], 둘째 백성들을 새롭게 하고[親(新)民], 셋째 지극히 훌륭한 경지에 가서 그친다[止於至善]는 것이다. 그리고 8조목은 이 3강령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서 ①사물의 이치를 궁리하여[格物], ②지식을 완성하고[致知], ③생각을 내기를 올바르게[誠意] 함으로써, ④마음을 바르게[正心] 하고, ⑤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몸을 닦고[修身], ⑥몸을 닦음으로써 집을 가지런히 하고[齊家], ⑦집을 가지런히 한 후에 나라를 다스리고[治國], ⑧나라를 다스리고 난 후에 천하를 평화롭게 한다[平天下]는 것이다. 이 3강령 8조목은 곧 유학의 이념(理念)이요, 동시에 그에 도달하는 방법인 것이다.

≪중용≫은 간략히 말하면 하늘의 원리[誠]와 사람의 원리[誠之]를 밝히고 어떻게 하면 하늘과 사람이 합치할 수 있는가, 즉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원리를 밝힌 철학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주자는 사서를 정한 후에 그것을 배우는 순서에 있어서는 먼저 ≪대학≫을 배워서 유학의 목적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익히고, 다음에 ≪논어≫를 배워서 그러한 학문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 기록을 통하여 그 원리를 체득하고, 다음으로 ≪맹자≫를 배워서 그러한 학문 이념을 체득한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는 실제를 익히고, 마지막으로 ≪중용≫을 배워서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인 원리를 익히는 것이 좋다고 밝혔다.

그리고 오경 가운데 특히 삼경을 정한 것은 시(詩)는 사람의 심성(心性)을 노래한 것으로 인간 생활에 있어서 없을 수 없는 것이고, 서(書)는 정치의 대도(大道)를 밝힌 것으로 이것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것이고, 역(易)은 우주의 원리와 인간의 원리를 밝힌 것이니 이것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禮)는 시간의 변천에 따라 그 형식이 많이 변해 버렸고, 또 춘추(春秋)는 과거 역사의 기록으로 너무 복잡하므로 학문적인 여력이 있는 사람은 상관이 없으니 일반인으로서는 꼭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자는 오경 가운데 시, 서, 역의 3경을 특히 내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사서⋅삼경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유교 경전이다.

이 책을 내면서 李完栽(영남대학교 명예교수)벌써 10여 년 전으로 기억된다. 어떤 유림 단체의 모임에서 유교 경전에 관하여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 때 한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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