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법유식(萬法唯識): 청화스님
망담반야妄談般若죄범미천罪犯彌天이라, 반야는 원래 말이 없고 문자가 없습니다. 상相이 없는 그 자리를 횡설수설 말씀을 많이 드렸으니 그 허물이 천지에 가득 찹니다. 오늘 회향廻向때에는 주장자나 텅텅 치고 내려갔으면 좋겠는데 또 사족蛇足으로 몇 말씀 붙이겠습니다.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 모든 존재가 오직 식識곧 마음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도 동물도 유정有情ㆍ무정無情도 모두가 다 오직 식識, 곧 마음입니다. 식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만법유식의 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도 역시 식識덩어리요, 마음 덩어리요. 산도 태양도 별도 모두가 식 덩어리요, 우리 지구도 바로 식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는 바로 그대로 지장보살地藏菩薩입니다. 또는 태양은 바로 그대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요, 달은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요, 이런 것은 제가 마음대로 붙인 것이 아니라 경론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도리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우리는 사뭇 반야에 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도 하고 검토해 왔습니다. 반야는 제법공諸法空도리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 있고 허무하다고만 생각할 때에는 그것은 반야가 미처 못 됩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이 허망한 것이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진여 실상 세계가 평등무차별하게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야가 있으면 비로소 참다운 수행자이고 반야가 없다면 수행자가 못됩니다. 반야는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가 전도몽상顚倒夢想만 떠나 버리면 바로 반야의 생명입니다. 반야와 더불어 있어야 참다운 창조가 있고 또는 참다운 수행이 있습니다. 반야가 없다면 모두가 다 범부의 허물을 벗지 못하는 것이고 또는 어떤 행동이나 이른바 때 묻은 유루행有漏行밖에는 못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것이고 범부인 한, 우리가 보는 것은 다 전도몽상입니다. 전도몽상을 끊어 버리지 않고서 공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끊어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이 우리가 화두話頭, 염불念佛, 또는 주문呪文그런 공부하는 참구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마음이 먼저 반야의 도리를 증명은 못하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라도 바른 이해가 있어야 수행이 되기 때문에 철두철미한 이론적인 자기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相에서부터 체體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대 사조思潮도 다행히 모두가 분업적이고 분열되어 있는 것이 하나의 도리, 하나의 본체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만 보더라도 이른바 구제관救濟觀이 다원주의多元主義, 꼭 기독교 하느님 도리만 구제가 된다 하는 것이 지금은 기독교의 권위 있는 대학大學의 학장 그런 분도 구제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있다고 개방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나 카톨릭이나 모두가 다 이른바 보수와 혁신, 보수주의는 전통적인 오직 자기들이 신봉하는 하느님한테서만 구제가 있다하고, 혁신주의는 다른 종교에도 구제가 있다고 이른바 범신론汎神論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에서나 모두가 다 개방적이고 하나의 진리, 본체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상相에서 체體로 또는 분열分裂에서 화합和合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도 이런 시대에 당해서 내 종파宗派네 종파, 또는 부처님 가르침도 여러 가지 방편이 많이 있는 것인데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조그마한 가르침이면 방편이 하나 둘 밖에 없습니다마는 광대무변한 대도는 문門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주趙州스님한테 가서 ‘여하시조주如何是趙州꼬’ 조주가 무엇입니까 하고 어느 스님이 문법하니까 ‘동문東門서문西門남문南門북문北門이라’ 조주한테 있는 가르침은 어느 한 문門이 아니라 동문이나 서문이나 남문이나 북문이나 상하 다 있다 말입니다. 불법은 이와 같이 대도무문이라 문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음만 사무치면, 상을 여의고서 본체를 지향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물〔水〕보고 깨닫고 불〔火〕보고 깨닫고 달〔月〕보고 깨닫고 별〔星〕보고 깨닫고 돌멩이 부딪치는 소리 듣고서도 깨닫는 것입니다. 오직 문제는 우리가 체體에서 용用을 생각하고 또는 용에서 본체로 돌아가는, 삼천대천세계는 모두가 다 체에서 용으로 왔다가 다시 용으로 가고 합니다. 체와 용이 원래 둘이 아니지만 현상적인 세계는 체에서 용으로 온 세계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우리가 본체로 돌아가는 간절한 뜻이 없으면 우리 수행자의 본분이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눈팔지 않고서 본체로 가고자해서 출가사문이 되었습니다. 본체로 돌아간다고 생각할 때는 봄이 다가면 여름이 오듯이, 여름 오는 것을 우리가 거역할 수 없듯이, 본체라는 것은 일미 평등한 자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아無我·무소유無所有가 됩니다.
따라서 무아ㆍ무소유의 자리는 일체만유가 진여법성의 자리입니다. 어느 것도 진여법성, 부처님 아님이 없는 자리입니다. 한 생각 잘못 비뚤어져서 ‘저것은 못났으니까 부처가 아니다, 이것은 부처다’고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체를 여의고서 상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부처라는, 일체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이라는 그런 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둔다면 우리 행위인 신身ㆍ구口ㆍ의意삼업三業이 청청하여, 이른바 도덕률을 안 따를 수가 없습니다.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또는 예수나 그런 성인들의 행위도 모두가 도덕률에 따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도덕률의 본체는 바로 참다운 철학인, 이것을 불교에서 말하면 진여불성이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고 또는 도교道敎에서는 도道요, 유교懦敎에서는 하늘 천天천이라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도리는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것입니다. 공평무사한 것이 체가 되어있다고 생각할 때에 자기 행동 하나하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조금도 윤리 도덕에 어긋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음행을 한다거나 또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도덕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현대 사회의 가장 선구자, 인간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 철학에서도 인간성을 구하고 어떤 분야에서나 인간성은 다 구합니다. 그러나 그 인간성을 똑바로 가르치는 가르침은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이런 것은 절대로 아전인수我田引水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성을 개발하는 선구자先驅者입니다. 선구자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도덕적으로 우리는 완벽을 기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약해서 마음으로 다짐을 하고 해도 미끄러지고 비틀어지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즉시 일어나서 다시 추슬러야 합니다. 인지도자인지기因地倒者因地起라, 땅에서 넘어졌으니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다시 바로 일어나서 법성法性자리에다 우리 마음을 붙이고 추슬러야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나, 자기 스승을 위해서나 부모를 위해서나 친구를 위해서나 어느 누구를 위해서나 이와 같이 본체로 돌아가는 그 자리가 가장 수승한 효도고 가장 수승한 보답이고 합니다. 반야의 자리 모두가 다 전도몽상을 떠나면 다 비어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우리 중생들은 사실로 보기 때문에 고민도 생기고 또는 거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번뇌가 더욱 더 치성熾盛해지는 것입니다.
화두 한번 바로 참구하고 염불 염念 한번 바로 부르고 이보다 더 높은 보배는 없습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그냥 약을 먹고 여러 가지 영양분을 많이 섭취합니다만 그것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나, 가장 훌륭한 영양분 가장 완벽한 보약은 부처님 법입니다.
부처님 법에다가 마음을 둔다고 생각할 때는 웬만한 문제들은 다 풀리는 것입니다. 완전하다고 할 때는 다 풀리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무슨 병이나 다 무명無明에서 옵니다. 법성 자리에는 본래 죽음도 병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기 안 먹어도, 단백질을 별도로 안 취해도,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오신채五辛菜를 먹어서 그것이 꼭 살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어째서 먹지 말라고 했던가? 율법律法에 있는 것은 우리가 꼭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법의를 입었습니다. 만약 자신이 없으면 안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해서 뒤뚱거리고 넘어지기가 쉽지만 넘어지면 바로 일어서야 합니다. 복잡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간단명료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잘못 본 전도몽상顚倒夢想입니다. 전도몽상을 떠나버리면 훤히 트인, 마음도 몸도 훤히 열려버립니다. 마음도 몸도 열려버리면 웬만한 병은 침범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훤히 트여있고 다만 비어있지 않은 자리, 무량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이 자리를 생각한 것 같이 만병통치약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경에도 아가타阿伽陀(Agada)약이라, 아가타약은 만병통치약입니다. 부처님 명호나 화두나, 또는 주문이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다 아가타약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것저것 안 챙겨먹어도 마음 딱 굳건히 하고서, 그 나쁜 견해만 벗겨내고서 진여불성자리 무한공덕자리를 생각한다고 할 때에 중생염불불환억衆生念佛佛還憶이라,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는 우리 중생을 다시 굽어보는 것입니다. 똑같은 부처거니 부처가 생각해서 굽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서운 시대입니다. 자기 문중門中에 얽히고 자기 종단宗團에 얽히고 자기가 공부하는 법, 내 것만이 옳다는 그런 것에 얽히고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은 옹색해집니다. 이것 자체가 전도몽상입니다. 본래 훤히 틔어서 아집我執도 법집法執도 둘 자리가 없는 것을 구태여 아집을 하고 법집을 한다면 우리 공부에나 다른 사람한테나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모두가 다 개방적인 것은 이 시대가 아무렇게나 한다는 개방적인 시대가 아니라, 법집을 털고 아집을 터는 개방적인 시대입니다. 마땅히 시대적인 조류에 맞춰야 과학자한테도 뒤지지 않고 다른 종교도 우리가 이끌 수 있는 정말로 명소의 선구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 출가사문들, 자랑스러운 우리입니다. 석년누대중근기昔年累代重根基라, 과거 전생에 두고두고 근기를 쌓아서 금생에 영광스러운 법의를 입었습니다. 부디 몇 생을 지낸다 하더라도 금생에 다시 인연이 몇 차례나 만나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생에 가서는 꼭 우리가 동진출가童眞出家해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몇 생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중생 제도를 위해서 꼭 무수 생에 태어나야 합니다. 동진출가童眞出家해서 무량대도를 성취해서 원래 없는 중생, 원래 없는 무명을 다 떼고, 원래 없는 중생衆生을 제도하여 다 같이 성불成佛하여지이다.
나무 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 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 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출처] 만법유식(萬法唯識): 청화스님|작성자 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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