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존재의 실상 - 청화스님

수선님 2023. 8. 27. 13:05

존재의 실상 - 청화스님

우리 불자님들이 여름에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를 하고 또 겨울에 이와 같이 동안거冬安居 결제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출가사문出家沙門의 스님네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재가불자 在家佛子님들도 이 결제를 하게 되면 꼭 전쟁에 나가서 자기조국이나 자기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자기신명을 바치고 자기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전투에 임하는 그런 기분을 우리가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 그 번뇌, 다생겁래 多生劫來 로 내려온그런 번뇌의 원수라 하는 것이 이것이 보통 질긴 것이 아닌 것입니다.우리가 생각할 때는 내 번뇌는 내 개인의 것이고 이것은 별로 신통한 것이 아니다.이렇게 우리가 아주 간단히 생각할 수가 있지만 사실은 번뇌라는 것은 우리 중생계(衆生界) 에 있어서우리 중생이 그 무량세월동안 내려온 하나의 업業의 그런 습기習氣 때문에 떼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냥 또 내버려 두고서 번뇌煩惱를 방치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생활은 인생고人生苦라하는그 굴레에 항시 얽매어가지고서 욕계欲界의 불행한 그러한 생로병사 生老病死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우리가 절에 가면 이와 같이 후불탱화가 있고 또는 여러 가지 만다라曼陀羅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후불탱화라는 것은 아무렇게 보기 좋게만 그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처님 세계의 그 실상세계實相世界,참말로 있는 세계를 상징적으로 그린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실상세계를 지금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우리중생들은 가상세계假相世界만 지금 느끼고 분별시비分別是非를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실존實存의 세계라는 것은 이것은 우리 중생衆生이 볼 수 없고,깨달은 성자聖者만이 볼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실상세계[實相世界]실존의 세계입니다.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는 이른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물질이 아닌 세계입니다.

그런데 우리 이 세계는 우리 중생衆生들이 물질에 구속된 세계인데,우리중생들은 이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중생이 보는,우리 중생의 감각感覺으로 지각知覺하는 세계 이것은 실제로 있는 세계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업장業障으로 해서 우리가 보는 이대로의 세계가 그대로 존재한다,산은 산 그대로 존재하고 또는 물은 물 그대로 존재한다. 이렇게 우리가 느끼고 있단 말입니다.그러나 사실은 산山 이것은 우리중생의 감각을 통한 하나의 지각의 속임수인 것이지 실지로 있는 실상의 세계가 못된단 말입니다.

가령 서양철학의 그야말로 위대한 선지식인 플라톤[Platon]도 이데아[idea]의 세계라,이데아의 세계 이것이 참말로 존재하는 세계이고 우리 현상계라는 이것은 사실은 허망한 것이다. 이 비유를 그 태양과 동굴에 비유譬喩를 했어요. 가끔 제가 말씀을 합니다만 그 모든 만법萬法이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이런 소식을 옛날에는 아주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다행히 물리학의 도움 때문에 저절로 모두가 다 비어 있단 소식을 알게 된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참말로 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가 다 각 원소元素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공기나 또는 물이나 모두가 산소酸素나 수소水素나 그런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현대인들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면 그 원소元素는 무엇인가? 원소는 그 원자原子로 또 구성되었다 말입니다.

원자라는 것은 또 대체로 어떤 존재인가? 원자는 원자핵原子核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電子가 그 밖을 뱅뱅 돌고 있습니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 하나가 돌면 그때는 수소 아닙니까. 8개가 돌면 그때는 산소입니다.

그런데 그 원자핵을 도는 그것이 아주 기묘하게, 우리 태양계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지구地球라던가 또는 달이나 별들이 도는 이치나 똑 같다고 그래요.

이데아의 세계라 하는 것은 깨달은 그러한 경계의 세계이기 때문에 참말로 존재하고,

또는 우리 감각의 세계 이것은 참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세계기 때문에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이래저래 헤매고 거기에서 분별시비分別是非 하는 그런 세계라고 비유했단 말입니다.

위대한 분들은, 불교에서 말한 그러한 가르침이나

또는 다른 서구철학이라도 위대한 분들이 말한 그런 내용은 다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헌데 우리 중생들이 그러한 그 허망한 것을 사실로 있다고 하는 한은 우리 인생고人生苦를 도저히 떠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선參禪을 하든 또는 무슨 경經을 외우든 간에 우리 목적은 모두가 다 허망세계를 떠나는데 있단 말입니다.

 

가령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놓고 본다하더라도 그 반야의 공사상空思想, 이른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반야바라밀은 반야불모[般若佛母]라 부처님의 어버이나 같단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반야바라밀이라 하는 그런 실상지혜實相智慧, 참다운 지혜가 없이는 부처가 못됩니다.

 

따라서 부처나 어느 도인道人이나 모두가 다 반야바라밀, 참다운 지혜의 힘으로 해서

반야를 깨달아서 이른바 선지식善知識이 되고 성불成佛하고 다 그런단 말입니다.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참다운 지혜라는 것은 반야심경에 있는 바와 같이 공空의 지혜智慧입니다. 공의 지혜,

 

제법공諸法空의 지혜입니다. 모두가 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존재성存在性이 없는 텅 빈 지혜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면 불교佛敎는 너무나 관념적觀念的이고,

실질적實質的인 지혜는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런지 모르지만

우리 중생이 실재實在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왜 있지가 않는 것인가?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이른바 유위법有爲法이라고 불교에서 하지 않습니까.

 

유위법이라 하는 것은 중생의 조작으로 있다고 우리가 착각錯覺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유위법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지구도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공전公轉함과 동시에 자전自轉이라

하루에 한 바퀴 돔과 동시에 365일 동안 태양 주의를 돌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그 원자도 역시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전자가 돌고 있는 것도 이치가 똑같다고 그래요.

 

그렇게 미세한 것도 천지우주천지우주의 모든 질서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무질서無秩序하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은 원자의 핵核은 또 무엇인가? 그 원자의 중심축인 핵은 무엇인가?

핵은 이것은 양성자陽性子나 중성자中性子나 중간자中間子나

그런 또 소립자素粒子라 하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아주 미세한 알갱이로 해서 구성되어 있다고 그래요.

 

아, 그럼 소립자는 어떠한 것인가?

 

소립자란 이것은 모든 물질을 더 쪼갤 수 없는 그런 조그만 알갱이이기 때문에 알래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어요.

어째서 알 수가 없는 것인가? 소립자素粒子란 알갱이는 금방 생겨나고 금방 없어지고 또 서로 바꾸어지고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장황하게 드리면 소중한 시간이 가버리니까 인제 간단히 줄겠습니다만,

아무든 그 물질도 그전에는 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모다 그런 것이다,

내 몸뚱이도 물질이고 다 모다 이른바 물질만능物質萬能 아닙니까.

더구나 현대에 있어서 산업사회 후에는 그 물질이 풍요하니까 물질만능이란 사상이 더욱더 사회에 꽉 차 버렸습니다.

 

실지로 있는 것은 물질 뿐이고 다른 것이 지금 뭣이 있는 것인가?

이렇게 이른바 물질만능시대 또는 정보홍수시대 아닙니까.

 

그 물질만능시대 정보호수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우리 마음이 그 불안不安스러운 것은 사실은 물질만능, 무슨 컴퓨터고 무엇이고,

그런 것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불안스럽고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부처님 가르침 같이 물질은 무엇이고 모든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서 말씀하신 그런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사실은 우리가 불교인이니까 아전인수我田引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인간의 불안不安을 해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그 물질이란 것이 대체 어떤 것인가?

 

그런 것을 아주 극명하게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물질이란 것은 사실은

불교佛敎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간단히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空]이란 말입니다.

 

내 몸뚱이도 물질이고 한데 물질이 공[空]이라 하면 이렇게 그 소중한 금쪽같은 몸뚱이를 공[空]이라 하니까

인제 굉장히 허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만 공이 아니라, 공空의

실상實相은 그야말로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자성自性이라 불성佛性이라,

불성이란 뜻이나 자성이란 뜻이나 똑같습니다. 다만 공[空]이 아니라 천지우주는 불성[佛性]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자리가 모든 존재의 바로 성품자리입니다. 그 성품자리는 섭섭하게도 우리 중생들은 볼 수가 없어요.

어째서 볼 수가 없는 것인가? 번뇌煩惱에 가리어서 보지를 못합니다.

 

번뇌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내야 탐심[貪心]이나 또는 진심[嗔心]이나 치심[癡心]이나 그런 것이 우리 번뇌 아닙니까.

 

내 자기를 한번 반조返照해봅시다. 나한테는 과연 탐심[貪心]이 지금 없는 것인가?

또는 기분 사나울 때 불룩거리는 진심[嗔心]을 내가 안내고 베길 수가 있는 것인가?

또는 내가 과연 모든 존재의 성상性相, 존재의 성품이라든가 존재의 현상을 다 알 수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는 중생은 번뇌에 지금 칭칭 얽매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최상의 길이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번뇌를 지금 벗어나는 길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우리가 업業을 짓고 또 사람으로 태어나고 아직도 업業을

또 더 많이 지어서 다른 동물로 태어나고 더 많이 지으면 또 지옥도 갈수가 있겠지요.

 

또 십선업十善業을 닦아서 참선參禪도 좀하고 기도祈禱도 모시고 그러면 천상天上도 분명이 갑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삼계三界 가운데 들어갑니다.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삼계 가운데 들어갑니다.

삼계는 자기가 지금 업 따라서 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런 데가 삼계 아닙니까.

욕계 색계 무색계[欲界 色界 無色界] 말입니다.

 

나는 지금 인간으로 태어나서 재주도 꽤 있고 재산도 꽤 있고 명예도 무던히 내가

높은데 이런 인간이 다시 또 왔으면 되겠구나,

내 아내나 내 남편이나 참 무던한 사람인데 아, 그 사람하고 같이 사는 행복스러운

생활을 영원히 누렸으면 되겠구나. 이런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될 수도 없는 문제 아닙니까.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내 심장 고동이 한번 멈춰버리면 그때는 죽음 아닙니까. 인간이 별로 좋은데도 아닌,

인간도 역시 생로병사라 그 늙고 죽고 인제 다 허망부실虛妄不實하단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아, 부처님이나 또는 모든 분들의 그런 은덕恩德으로 해서 이렇게 80이나 먹었어도

이런 법문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진작 죽었어도 무방하지요.

 

70에 죽는 사람 50에 죽는 사람, 제 은사恩師스님도 그렇게 위대한 분이지만 갓 50에 갔습니다.

 

제 부모님도 가까스로 70에 갔습니다. 그런다고 생각할 때에 저는 인제 80까지 사니까

굉장히 장수한 셈 아닙니까. 어떻든 간에 그렇게 오래 살고 늦게 살고 한든 간에 결국은 다 가고 만단 말입니다.

 

남는 것은 무엇이 있는 것인가? 우리 몸뚱이를 구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는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화장火葬하면 재만 남을 것이고 또 매장埋葬하면 땅속에 썩을 것이고 그러한

그 물질이라 하는 것은 종당終當에는 아무것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정신[精神]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 정신은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더 많이 배운 사람 또 총명하고 미련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정신精神자체는 이것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그 자기가 하마 죽을까봐 여러 가지로 불안스럽고 또 조심하고 영양을

또 섭취할 라고 애쓰지 않습니까. 영양 많이 섭취한다고 장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가만 그대로 두어도 우리 생명은 죽지가 않아요. 죽을 라고 해도 죽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뚱이만 그때그때 인연 다해서 사라졌다 또 업따라서 다시 생기고 하는 것이지 우리 생명자체生命自體,

우리 정신자체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아닙니까.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영원히 우리 정신은 존재합니다.

 

비단, 그 개별적인 정신뿐만 아니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깨달은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때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그런 생명체로 해서 충만充滿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사람 눈에 보이는 어떠한 물질적 존재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존재 그것은 그때 그때 모양이 허망해놔서 사라졌다 없어졌다

모두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그렇게 변화가 됩니다만 실질적인 생명자체는 영원히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 우주宇宙가 모두가 다 생명인 그 불성佛性으로 자성自性으로 충만해 있다는

그런 소식이 즉 말하자면 이것이 참다운 반야의 그런 소식이란 말입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란 것은, 반야가 있어야 인제 도피안到彼岸이라,

이 중생계의 그런 고해苦海를 건너서 즉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경계로 갈 수가 있다고 허지 않습니까.

 

아까도 말씀마따나 어떠한 성인이나 어떠한 부처님이나 모두가 다 반야를 의지해서 깨닫는단 말입니다.

반야般若는 어떠한 것인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이다. 이런 도리가 반야의 도리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모두가 이렇게 개별적인 존재뿐인데 어떻게 해서 우주가 생명生命으로 가득 차있는가?

이렇게 또 의심을 품을 수가 있지가 않습니까? 현재 우리가 느끼는 대로

공기空氣가 없는 데가 있습니까? 모두가 지금 공기로 충만 돼있단 말입니다.

 

공기는 내내야 산소 수소 탄소 질소 모다 그런 것이 공기 속에가 다 그대로 있어가지고,

그래가지고서 이 공기가 구성되지 않습니까. 물론 희박하고 더 농후하고

그런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대기권大氣圈라는 것은 이것은 공기로 해서 지금 충만해 있단 말입니다.

 

 

공기는 또 각 원자로 해서 그대로 거기 가득 차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와 같이 이 공기로 해서 충만해 있듯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런 모든 존재의 참다운 생명인 참다운 성품인 그 불성, 불성 그 자성도 역시,

자성은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까 제가 그 플라톤[Platon]의 말을 인용을 했습니다만 이데아[idea]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우주에 언제나 충만해 있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생로병사를 초월해서 영원히 있는 하나의 생명자체生命自體란 말입니다.

 

플라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위대한 철인哲人들은 다 그런 소식이어요. 모두가 다.

플라톤 보다 훨썩 먼저 나오신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그분도 역시 일자一者만 존재存在한다.

하나만 존재한다. 오직 하나만 존재하고 다른 것은 허망한 것이다.

 

하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하나는 존재자체存在自體 존재실상存在實相자체란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실상을 모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같이 우리 중생은 기껏해야 가상假相만 안단 말입니다.

허망상虛妄相만 안단 말입니다.

그 부처님께서는 여실如實하게 그런 말씀을, 꼭 진리眞理 그대로 합리적으로 말씀 했단 말입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모든 그런, 우리 중생이 있다고 보는 것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나 같단 말입니다.

 

물거품 같고 또는 풀 끝에 이슬 같고 또는 거울에 비친 허상같고,

거울에 비친 모양이 사실로 있지 않지마는 우리 중생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꼭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우리 중생이 나요 너요 또는 좋다 굳다 하는 모두는 다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을 허상으로 알면 좋은데 허상을 허상으로 모르는 이것이 중생의 아견我見이어요,

나 아我자 볼 견見자, 우리 불자님들 오늘 아견[我見]을 꼭 깊이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나라는 관념[觀念]을 갖고서 나라는 관념에 집착하는 다른 말로하면 아집[我執]이라,

나 아我자 집착할 집執자, 이것이 바로 나 아我자 볼 견見자,

자기라는 개아個我에 대해서 집착執着을 못 떠난단 말입니다.

 

 

중생衆生과 성자聖者의 구분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우리 중생은 자기라는 아집을 미처 떠나지 못하고 또는 법집[法執]이라, 대상적對相的으로 보이어지는

모든 것도 똑 같이 허망한 것인데 이런 것도 사실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이 법집法執입니다.

 

이른바 주관主觀 객관客觀이 우리 중생의 견해에서는 구분區分하게 돼가지고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이런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참선參禪하기

위해서 겨울에 결제結制 하고 여름도 결제하고 또 그때그때 조석으로 좌선坐禪도 하지 않습니까.

 

 

이 참선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그 흐린 탁수濁水를 가만히 두면은 앙금이 차차 까라 앉고서

나중에는 맑아져서 바닥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도 지금 이것 배우고 저것 배우고 과거

전생前生에 또 업이 있고 금생에 나와서도 또 업을 많이 짓고 그런 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지금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단 말입니다.

 

아주 혼탁混濁해 있습니다. 혼탁해 있는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혼탁이 무엇인고 하면 이 나라는 생각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그 나라는 생각을 금방 깰 수가 있습니까.

상당히 인격자 같이 보여도 어느 고비에 이르면 욕심을 부리고 자기중심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아我라는 나라는 것이 본래 있는 것 같으면 좋은데 죽지 않고 영원히 있으면 그렇게 소중히 아낄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것이 허망한 것이란 말입니다. 죽을 때만 당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분명히 나가 없습니다.

사대四大 오온五蘊이라,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라 하는 각 원소로 해서 우리 몸이 구성되고,

우리 마음도 역시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느끼고 분별하고 감상하고 그런 부스러기가 모여서 우리 마음이 되었단 말입니다.

 

사대 오온을 떠나면 나라는 존재가 없습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와 같이 돼가지고서

그대로 가만있으면 좋은데 고대고대 순간순간 변화變化해서 마지않습니다. 그러기에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제행무상이라. 모든 것은 결국은 항상恒常이 없단 말입니다.

 

 

1초의 몇 천분지일 동안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그런 미세한 변화를 보지를 못하니까 어제 나

또는 오늘 나 또는 몇십년 뒤의 나가 똑 같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그 무상無常한 것은 시간적으로 그때그때 같은 것이 없는 무상한 것은 또 공간적으로 볼 때는 공空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고 변화무쌍變化無雙한데,

그리스 철인 가운데 그 유명한 헤라크레이토스[Heraclitus]도 만법유전萬法流轉이라,

그 모든 것은 변화해서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하루나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모르지만 1초의 몇 천분지일 동안도 그대로 머무름이 없이 변화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서 그걸 가리켜서 존재한다고 하겠습니까.

시간적으로 봐서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봐서 그때는 공空이란 말입니다.

 

그 부처님 가르침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2500년 전에 정밀하게 우주의 실상實相을 말했을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사실은 존재론存在論입니다. 존재存在의 실상實相을 말씀한 것입니다.

 

현대 실존주의철학實存主義哲學이나 생철학 같은 것도 존재의 실상을 어떻게 말하려고

그 어려운 논리論理를 구사構思하지만은 그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간단명료簡單明瞭한 그런 자리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마음을 깨달아서 성자聖者가 못되니까 못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참선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 그 사변적思辨的인 이론적理論的인 것에서 그치지 않고서

우리가 실상자체實相自體가 되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 같이 불성佛性하고 자기가 하나가

돼버리는 그런 데에 우리가 이르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 데에 이르지 못하면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우리가 깊은 삼매三昧에 들어서 깊은 선정禪定에 들어서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드나

또는 화두공안話頭公安 삼매에 드나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이 상相을 떠나서 허상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에 가기 위해서

우리 마음을 오로지 실상경계[實相境界]에다 멈춰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업장業障이 가벼우면 하루 이틀 앉아도 퍼떡 다 깨달아 버리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업業을 지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능엄경[楞嚴經]에나

대혜종고大慧宗고선사 어록語錄에도 이런 법문法門이 있어요.

 

 

이즉돈오[理則頓悟]라, 그 원리原理라 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원리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총명하기 때문에 이[理]는 그냥 모두가 분석해 놓고 보면 다 하나가 되고

일체존재는 근원적인 실상으로 가야 되겠구나, 이런 것은 느낄 수가 있지요.

 

따라서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부처다. 또는 자성自性이다.

이렇게 우리가 쉽게 비약적飛躍的으로 느낄 수는 있지요.

비약적으로 느끼는 것을 가리켜서 일단 돈오頓悟라고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리는 그러나 사비돈제[事非頓除]라,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 같이

그때그때 지어내려온 업장業障은 빨리 다 녹아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사 모양이 없는 것이니까 마음으로는 그렇구나 해도

그 우리 몸으로 그 찐득하니 붙어있는 업장은 좀처럼 안 녹아집니다.

우리가 불경佛經을 보고서 아, 그렇구나 그렇구나 마음으로 느낀다

하더라도 우리 행동으로 옮길 때는 또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비돈제[事非頓除]라, 이 현상적인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문득 끊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차제이진[因次第而盡]이라, 점차로 계행戒行도 지키고 염불도 하고 참선도 하고

그래저래 하여튼 이렇게 우리가 닦음으로 해서 차근차근 차제에 따라서 없어진단 말입니다.

 

업장이 가벼우면 빨리 없어지겠지요. 단박에도 되겠지요. 그러나 보통 차원에서는 단박에 될 수가 없으니까

아, 이 삼동三冬 내내 참선도 하고, 지금 결제에 들어가는 장한 스님들도 계시고

여러 재가불자在家佛子님들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 같이 그 우리 업장이 그냥 단박에 다 깰 수는 없는 것이고,

 

단박에 다 깨면 좋고, 또 자기 선근善根 따라서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그 비장한,

적과 싸워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기

위해서 비장한 각오를 가져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한 분들은 다 성자가 됩니다.

 

 

그러나 그렁저렁 먹을 것에 관심이 있다든가 또는 텔레비전이나 그런 것에 관심을 둔다든가,

저 같은 사람은 저 미국에 있을 때 텔레비전을 누가 설치를 해주어도 제 스스로는 안 보았습니다. 그 볼 필요가 없어요.

 

그것이, 자기 본래면목을 찾는데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신문도 안 보고 잡지도 안 보고 합니다.

그 보통 번뇌망상煩惱妄想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별것이 아니어요. 대통령이 누가 되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려고 애를 쓰고 본래면목을 다 깨달은 분들이 정치도 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앞서 플라톤 말마따나 철인이 정치가가 되고 정치가가 철학을 해야 됩니다.

그 자기 본래 생명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이끌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남을 지도하겠다는 사람들은 가령 학교선생님들도 그래요,

 

그 바람직한 사람들을 만들어야 하는데 참다운 바람직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결국은 성인이 아닙니까. 성인이 참다운 바람직한 사람입니다.

그 자기 스스로도 바람직한 사람이 되어야 바람직한 사람을 또 만들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어떤 분야로 보나 참다운 아버지가 되고 참다운 어머니가 되고 어떤 면으로

보나 정당한 사람이 먼저 되는 것이 가장 급선무고 최선의 일입니다.

 

좋은 아내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고, 그 음식을 잘 만들어 가지고 맛있게 해드리고 그런 것도 하나의 좋은 것은 되겠지만

 

그런 것은 새 발의 피에 불과한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은 인간다운

인간 자기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급선무急先務란 말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80이나 사니까. 아, 그때그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어요.

 

그 몇 일이나 혼수상태가 되어가지고 의식도 회복도 못한 그런 때도 있었고,

그럴 때 죽었더라도 한탄할 것이 없지요. 다행히도 공부를 좀 더하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인연들이 찾아주고 해서 인연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럽니다만,

 

사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가장 급선무가 자기 존재를 아는 거란 말입니다.

존재 실상實相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가상假相밖에 모르니까 말입니다.

 

존재의 실상을 가장 정확하게 깨닫게 하는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요단강 하반에서 요한한테 세례를 받은 뒤에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기도禁食祈禱를 모시면서 시련試鍊을 극복했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련을 극복할 때 자기라는 아견我見의 아집我執을 다 떠나버렸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자가 되었지요.

 

 

마호메트[Muhammad]도 히라산 동굴에서 3년동안 명상瞑想을 했습니다. 3년동안 명상할 때 번뇌가 녹아져서

그래서 알라의 계시를 받고 위대한 성자가 되었지요. 다만 그 시대 상황 따라서

그때그때 적당히 방편을 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후래인後來人들이 잘못전해서

 

조금 이상한 대문大文들이 있으나 적어도 세계적인 성자[聖者]들은 모두가 다 기본적인 것은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소크라테스[Socrates]나 아까 말씀드린 바 같이 우리 본래면목자리 생명의

그 근본자리 모든 존재의 실상자리를 깨달은 사람들이라고 우리가 봐야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 부처님은 구경각究竟覺이라, 구경각은 무엇인고 하면

조금도 흠절이 없이 모든 것을 다 깨달아서 아는 분이 구경각입니다.

우리 부처님은 구경각을 성취하신 분입니다. 다른 성인들도 위대하나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적어도 구경각까지는 못 가신 성인이라고 생각이 되는 데 그런 것은 저쪽 사람들은 좀 다르겠지요.

 

어떻든 간에 성자는 그와 같이 자기 본래면목을 깨달은 사람들이고 또 성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의

그 사유활동思惟活動을 할 수 있는 정신능력이 있는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 누구나 다 깨닫기

위한 그러한 우리 수행을 마다할 아무런 이유가 없고 이것이 최급선무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와 같이 한 달이고 또는 몇 달이고 참선을 하고 또는 몇 년이고

참선을 하는 그것이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이렇게 생각이 되시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공부를 어거지로 방법을 잘 모르고 잘 못하면 참선하는 것이 하나의 고된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순탄하게 여법[如法]이 부처님께서나 선지식들이 말씀하신대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그 공부하는 환희심歡喜心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참선을 잘해서 그 참선가운데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정당한 그러한 환희로운 경계를 맛본 사람들은 그만 둘레야 둘 수가 없어요.

 

그와 같이 매력魅力이 있고 그와 같이 인간의 의의意義를 느끼는 그런 경계는 다른 데서는 느끼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고 또는 명예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사실은

우리가 참선參禪 할 때나 기도를 모실 때 느끼는 행복幸福感감에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일반 재가불자님이나 우리 출가 불자님들도 가령 어떤 경우에 한 일주일이나 기도祈禱모시고 그렇게 만나러 오신분이 있어요.

만나보면 한 일주일만 기도 모시고 와도 그 얼굴이 그렇게 색이 맑고 눈이 맑고 그래요.

 

인간이라는 것은 그 잡스러운 생각 때문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 같이 가장 독스러운 것이 우리 아견[我見]입니다.

자기라는 결국은 아상[我相]이란 말입니다. 아상我相이 있으면 벌써 눈도 흐리고 얼굴도 흐리단 말입니다.

허나 기도 모실 때 그 부처님한테 의지해서 그렇게 독실하게 지내 놓으면 그 얼굴도 맑아지고 눈도 맑디맑단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근기根機가 약하니까 오랫동안 지속을 못합니다.

 

우리 불자佛子님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서 가장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내 자신을 찾는 일이란 말입니다. 내 자신이 무엇인가?

 

내 참다운 자신이 참다운 자기가 이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 같이 자성[自性]이고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진여불성을 우리가 그대로 증득證得을 해버려야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을 우리가 증득을 못하면 또 번뇌의 노예奴隸가 되어서 업業을 짓고,

업業을 지어 놓으면 삼계三界 내에서 뱅뱅 지옥으로 갔다 어디로 갔다 하지요.

부처님 법을 만나지 못할 때는 그럴 수밖에는 없겠지요. 그러나 만나서

그 탄탄대로坦坦大路로 행복과 영생해탈永生解脫의 길로 인도引導하는

가르침이 있는데도 우리가 그것을 마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은 결단을 내리셔야 됩니다. 결단을 내리시고 그 다음 문제는 공부하는 걸로 해서 그 삼학도[三學道]라,

석 三자 배울 學자 길 道자, 삼학도라. 삼학도三學道의 관념을 항시 마음에 두고 거기에 준해서 공부를 하셔야 되어요.

계율戒律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 이것이 삼학도 아닙니까. 계율이 없이 절대로 선정에 못 들어 갑니다.

근세近世에 있어서 더러는 계율이 없더라도 무애행無碍行도 하고 아무렇게나 먹고 막행막식을 해도 도인이 된다.

부처님 가르침에나 정통조사正統祖師의 가르침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꼭 도덕적으로 하자瑕疵가 없이, 도덕적으로 계율戒律을 지켜야 선정에 들어갑니다.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계율을 인도印度의 말로 시라尸羅라고 말합니다.

시라불청정 계율이 청정하지 못하면 삼매불현전이라 깊은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깊은 삼매에 못 들어가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삼매에 들어가서(오랫동안 지속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 그 지성적인 미혹迷惑이나 무명無明이나 또는 우리의 업에 칭칭 감겨져 있는 업장이 안 녹아지는 것입니다.

 

이른바 심리心理와 생리生理가 온전히 녹아져야 참다운 깨달음이 온단 말입니다.

사생활이 그렁저렁 사는 사람은 절대로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기에 우리 재가불자님들도 좀 고생스러워도 육재일六齋日이 있지 않습니까.

육재일 이라는 것은 하다못해 한 달에 엿새만이라도 출가한 스님네 같이 생활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끼 먹고 또 내외간 같이 살아도 잠자리 같이 않고 고기도 안 먹고 술도 안 먹고,

요새가 얼마나 참 무서운 때입니까.

 

금년만 해도 제가 아는 분이 암癌으로 해서 둘 셋 네 분이나 죽었어요. 그야말로 무서운 시대입니다.

 

그 암癌을 퇴치하려고 그 서양의 문명 의학들이 얼마나 몸부림을 칩니까마는 아직도 결국은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단념을 한 모양 같아요, 그렇게 부자로 해서 미국 내왕하고 어디 내왕하고 그렇게 해도 결국 암은 치료를 못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 원인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대체로는 우리 입으로 들어갑니다.

 

우리 관념상觀念上 우리 생각이 삼독심三毒心을 못 떠납니다. 그 독毒 가운데 제일 무서운 독이 무슨 독입니까?

삼독심이 제일 무서운 독입니다. 탐욕심貪慾心을 내고 진심嗔心을

내고 또는 무명심無明心 어리석은 마음을 내고 이것이 가장 무서운 독毒이란 말입니다.

 

진심嗔心을 내면 진심을 내는 즉시에 우리 세포를 오염시킵니다.

우리 인간 세포가 60조나 있다고 합니다. 그런 세포가 없어졌다 생겼다 그럽니다.

그런 세포에 우리 생각 하나하나가 다 반영이 됩니다.

 

좋은 생각은 우리 세포를 조화를 시키는 것이고 좋지 못한 생각은 우리 세포를 그때는 중독을 시킵니다.

 

따라서 암癌이고 무엇이고 별것이고 모두가 다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잘 못 먹거나 잘 못 생각하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공부하는 방법도 역시 여러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참 염불念佛만 죽자고 하는 그런 공부도 있고,

또는 우리가 천수다라니大陀羅尼를 외워서 하는 공부도 있고 또는 화두話頭공안을 참구參究해서 하는 공부도 있지 않습니까.

 

다 훌륭한 성불成佛의 법法입니다. 성불의 법인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고 하면 우리

마음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 같이 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남한테 우리가 무엇인가 베푼다 하더라도 그냥 저 사람은 나보다 못사니까 불쌍하니까 베푼다.

이런 것은 단순한 선행善行 밖에는 안 됩니다. 따라서 선행을 했으니까 그런저런 과보는 좀 받겠지요.

허나 이른바 도업道業이라, 도道를 성취하는 진리를 성취하는 업業과는 이것은 좀 거리가 있습니다.

 

저 사람과 나와 본래로 둘이 아니다. 모든 존재가 본래로 둘이 아닌 것입니다.

 

도둑하고 나와도 둘이 아니고 아, 살인 죄인하고 나하고도 둘이 아니고,

그 곤충과 나와도 다 둘이 아닙니다. 성품에서 본다고 하면

모두가 다 일매지게 다 하나입니다. 거기다 우리마음을 두어야 됩니다.

 

그것이 사실이니까요. 우리 중생은 사실事實을 외면하고 허상虛像에다 우리 마음을 집착執着시킵니다.

따라서 사실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모두와 나와 둘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베풀어야 참다운 보시布施고 이른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됩니다.

 

공부하는 방법이 아까 말씀드린 바 같이 염불念佛로 해서 부처님을 생각해서 부처님이 되어가는,

사실은 제일 쉽기는 쉽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참 본래 부처되,

본래 부처가 부처를 생각해서 부처가 되니까 그때는 제일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그러고 다른 공부도 역시 모두가 다 그런 투여요.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의심疑心하는 것도 화두공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화두공안

그것이 내내야 우리 자성自性을 우리 불성佛性을 깨닫는 하나의 방편方便이어요. 모두가 다,

 

따라서 어떠한 공부든 간에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 같이 반야般若의 지혜,

천지우주天地宇宙 모두가 다 진여불성眞如佛性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시고서 화두공안을 들고 염불을 하고 그래야 됩니다.

 

 

염불念佛도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이렇게 하는 것도 염불이지 않습니까.

허나 부처님은 저 밖에 계시고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동경憧憬하고

그러면 우리한테 가호加護를 준다. 이것은 참선參禪은 못됩니다.

 

단순한 타력염불他力念佛은 되어도 참선은 못됩니다. 그런 염불은 참다운 염불도 못됩니다.

 

일체존재一切存在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 자리 즉 말하면 반야바라밀자리 반야의 자리,

참다운 반야바라밀은 깨달아야 되겠지만 그 전에도

역시 우리가 반야바라밀을 지향하는 천지우주天地宇宙를 일원적一元的인 진여불성眞如佛性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반야의 관조법觀照法이란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면서 우리가 염불을 해야 그래야 참다운 염불이고 염불참선[念佛參禪]그래요.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참다운 실상實相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하는 염불念佛이 이른바 실상염불[實相念佛]인

동시에 염불참선입니다.

그래서 다른 우리가 어떠한 공부를 하든지 간에 가령 묵조선黙照禪이라, 잠자코 마음을 관조하는

그런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 같이 반야바라밀을

항시 안 떠나야 참다운 묵조선이 됩니다. 화두선話頭禪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그 우주에 충만해 있는 그 한도 끝도 없는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춘

그 진여불성[眞如佛性]자리 자성自性자리 본래자기주인공[本來自己 主人公]자리를 놓치지 않고서

화두를 참구해야 됩니다. 그렇게 허셔서 부지런히 공부해서 명년明年 봄에 제가 또 죽어버리면 그때는 만나 뵙지 못하고

제가 다시 살아서 오는 경우는 우리가 서로 지금 같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하여튼

우리 공부가 훨썩 더 진척되고 우리 마음도 몸도 그야말로 청정한 그런 진정한 불자佛子가

되어서 서로 피차彼此 상봉相逢 하도록 하십시다.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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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실상 -  청화스님우리 불자님들이 여름에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를 하고 또 겨울에 이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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