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狀행장
1. 의상스님 행장
1) 의상이 가르침을 전하다 [義湘傳敎]
2) 전후로 가져온 사리 [前後所將舍利]
3) 낙산의 두 성인 관음과 정취, 그리고 조신
[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4) 당대 신라국 의상스님의 전기 [唐新羅國義湘傳]
2. 균여스님 행장
「대화엄수좌 원통양중대사 균여전 병서
大華嚴首坐圓通兩重大師均如傳序」
1. 의상스님 행장
1) 의상이 가르침을 전하다[義湘傳敎]1)
1) 저본은『한국불교전서』제6책(동국대학교출판부, 1979)에 수록(pp.348b20-
349b22)된『삼국유사(三國遺事)』권4의「의해(義解)」제5「의상전교(義湘傳敎)」
조이다. 이에 대한 교감본으로 갑본(甲本)은『대정신수대장경』제49권에 수록
된『삼국유사』[1921년에 영인한 정덕본(正德本)]의「의상전교(義湘傳敎)」조이고,
을본(乙本)은 최남선(崔南善)이 편집한『삼국유사』(삼중당, 1943)의 「의상전교
(義湘傳敎)」조이다.『한국불교전서』에서는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
덕임신간본(正德壬申刊本, 1512년)을 저본으로 하였다.
법사 의상은 아버지가 한신(韓信)이고 김씨이다. 나이 스물아홉에 서울
[亰師]2) 황복사(皇福寺)3)에 의지하여 머리를 깎았다.4) 얼마 후 서쪽으로
교화를 보고자 하여 마침내 원효(元曉)와 함께 길을 나섰다가 요동 변방
에서 국경을 순시하며 지키는 병사에게 첩자라고 여겨져 갇힌 지 수십 일
만에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이 일은 최치원[崔侯]5)의 [의상] 본전6)과
원효스님의 행장7) 등에 있다.〉
法師義湘, 考曰韓信金氏. 年二十九, 依亰師皇福寺落髮. 未幾
西啚觀化, 遂與元曉道出, 遼東邊戍邏之爲諜者, 囚閉者累旬,
僅免而還.〈事在崔侯本傳及曉師行狀等.〉
2) 서울[亰師]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가리킨다.「亰」은「京」의 속자이다.
3) 황복사(皇福寺)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었다. 현재는 국보 제37호인 삼
층석탑 등 석재유물 몇 점만 남아 있다. 절 이름으로 보아 왕실과 관계되어 창
건되었을 것이라는 추정만 할 수 있을 뿐 창건자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황
복사는 의상스님이 출가한 사찰일 뿐만 아니라 부석사를 창건하기 이전에 스
님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의상스님이 이 절에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탑돌이를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일연,『삼국유사』「의상전교(義湘傳敎)(韓6,
p.349b15-19)]
4)『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서는 부석사 본비를 인용하여
“의상은 무덕(武德) 8년(625)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韓6, p.327b2-3.
湘武德八年生, 丱歲出家.)고 하고 있다.
5) 최치원(857~?)은 고려 현종(顯宗) 11년(1020)에 우리나라의 문묘(文廟)에 위패
가 모셔졌고[『고려사(高麗史) 권4,「현종(顯宗)」조], 현종 14년(1023)에 문창후(文
昌侯)로 봉해졌으므로[『고려사』 권5,「현종(顯宗)」 조] ‘최후(崔侯)’라고 표현하였
다. 최치원은 상당한 양의 저술을 남긴 것으로 전하지만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계원필경(桂苑筆耕)』,『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사산비명(四山碑銘)』뿐이고,
그 이외에는『동문선』이나 사기(寺記) 등에 단편만이 전한다. 최치원은 40여 세
에 관직을 그만 두고 은거생활을 하는데 이때 불교와의 인연이 많은 것으로 전
한다. 주로 경주 남산(南山), 합천 청량사(淸凉寺), 지리산 쌍계사(雙磎寺) 등에
머물렀으며 해운대(海雲臺)를 비롯해 최치원과 관련되 곳이 여러 곳 있다. 만
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불교 관련 저술도 여러 편이며 특히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석순응전(釋順應傳)』,
『석이정전(釋利貞傳)』등 화엄 관계의 글이 주목된다.
6) 의상 본전(本傳)은 최치원이 지은『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을 가리키나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본전에 대해서는 의천(義天, 1055~1101)의『신편제종교장총
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최치원이 지은「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의 이름을
전하고 있고(韓4, p.682c13), 각훈(覺訓, ?~1215~?)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안함전(安含傳)」에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義相傳)」이 인용되고 있으며(韓6,
p.99c8-9; 大50, p.1021c20), 체원(體元, ?~1328~?)의『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
場發願文略解)』에도 최치원의「본전(本傳)」을 언급하고 있다(韓6, p.570c13-14).
7)『삼국유사』「원효불기(元曉不羈)」조에 원효스님의 ‘행장’을 언급하고 있으나
(韓6, p.347c8; 韓6, p.348a7) 전하지 않는다.
영휘(永徽)8) 초년(650)에 마침 당나라 사신의 배가 서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있어 얻어 타고 중국에 들어갔다.9) 처음에 양주(揚州)10)에 머물렀는
데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관아 안에 머물기를 청하고 성대하게 공
양했다. 종남산 지상사에 찾아가 지엄(智儼)을 뵈었다.
永徽初, 會唐使舡有西還者, 寓載入中國. 初止揚州, 州將劉至
仁, 請留衙內, 供養豊贍. 尋往終南山至相寺謁智儼.
8) 영휘(永徽)는 당나라 고종(高宗)이 650년에서 655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신라
는 진덕여왕(재위 647년~654년)과 태종무열왕(재위 654년~661년) 때에 해당한다.
9)『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서는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의상전』을 살펴보면 ‘영휘 초년(650)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지엄선사를 뵈었다’
고 하였지만 부석사 본비에 의하면 이렇다.”(韓6, p.327b1-2. 按此錄義湘傳云, 永
徽初, 入唐謁智儼. 然據浮石本碑.)고 하면서 “영휘 원년 경술(650)에 원효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고구려에 이르렀으나 어려움이 있어 돌아왔다. 용삭 원년
신유(661)에 당나라에 들어갔다.”(韓6, p.327b3-5. 永徽元年庚戌, 與元曉同伴欲西
入, 至高麗有難而廻. 至龍朔元年辛酉入唐.)고 하고 있다.
10)『송고승전(宋高僧傳)』「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에서는 의상스님이
‘등주(登州)’에 도착하였다고 전하고 있다(大50, p.729a16-17).
지엄은 전날 저녁 꿈꾸기를, 큰 나무 한 그루가 해동에서 생겨나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와서 중국[神州]11)까지 덮었다. 그 위에는 봉황의 집이 있
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가 있어서 그 광명이 멀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꿈을 깨자 놀랍고 이상스러워서 물을 뿌리고 비로 쓸며 기다렸다.
의상이 도착하자 특별한 예로 맞아들이면서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어젯
밤에 꾼 꿈은 그대가 와서 나에게 의지할 징조였다”라고 하고 입실을 허
락하였다. [의상이]『잡화(雜花 :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깊은 데까지 분석
하니, 지엄은 영질(郢質)12)을 만난 것을 기뻐하였다. [의상은] 더욱 새로운
이법을 드러내니 깊은 것을 끌어내고 숨은 것을 찾아내어 쪽과 꼭두서니
가 본색을 잃었다13)고 할 만하다.
儼前夕夢, 一大樹生海東, 枝葉溥布來蔭神州. 上有鳳巢, 登
視之, 有一摩尼寶珠, 光明屬遠. 覺而驚異, 洒掃而待. 湘乃至,
殊禮迎際, 從容謂曰,“ 吾昨者之夢, 子來投我之兆,” 許爲入
室. 雜花妙旨, 剖柝幽微, 儼喜逢郢質. 克發新致, 可謂鈎深索
隱, 藍茜沮本色.
11) 신주(神州)는 중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 전국시대 제자백가의 한 사람인 제
나라 추연(鄒衍, 騶衍)이 중국을 ‘적현신주(赤縣神州)’라고 표현한 것에서 기원
한다[『사기(史記)』].
12) 영질(郢質)은 내 마음을 자기 마음처럼 알아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장자
(莊子』「서무귀(徐無鬼)」에 나오는 고사이다. “[초나라 도읍인] 영 사람이 흰
흙을 코끝에 파리날개처럼 얇게 바르고 장석(匠石)에게 이를 깎아내게 하였다.
장석이 도끼를 바람 소리가 나게 휘둘렀으나 [영 사람은] 그저 듣기만 하고 그
대로 있었다. 흰 흙은 모두 깎여 없었지만 코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고 영 사람도
선 채로 얼굴빛조차 바꾸지 않았다. 송나라 원군(元君)이 이것을 듣고 장석을 불
러 이르기를, ‘시험삼아 과인에게도 한 번 해보라’ 하였다. 장석이 말하기를, ‘전
에는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제 바탕이 죽은 지 오래입니다’ 하였다.”(郢
人堊漫其鼻端若蠅翼, 使匠石斲之. 匠石運斤成風聽而. 斲之盡堊而鼻不傷, 郢人立
不失容. 宋元君聞之, 召匠石曰, 嘗試爲寡人爲之. 匠石曰, 臣則嘗能斲之. 雖然,臣
之質死久矣.)
13) ‘쪽과 꼭두서니가 본색을 잃었다’는 말은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비유한 말
이다. “푸른 색은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고 붉은 색은 꼭두서니에서
생겼으나 꼭두서니보다 더 붉다”(『순자(荀子)』「권학편(勸學篇)」. 靑出於藍
而靑於藍, 絳生於茜而絳於茜)는 말을 이용하여 쪽에서 나온 푸른 색과 꼭두서니
에서 나온 붉은 색에 눌려 쪽과 꼭두서니가 본래 색을 잃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미 본국(신라)의 승상 김흠순(金欽純)14)이, 혹은 김인문(金仁問)15)이라
고 하는데, 양도(良圖)16) 등과 당나라에 가서 갇혀 있었다. [당나라] 고종이
크게 동쪽을 정벌하려 하자 김흠순 등은 몰래 의상에게 권하여 먼저 가게
하였다. 함형(咸亨)17) 원년 경오(670)18)에 나라에 되돌아와 조정에 그 일을
알렸다. [조정은] 신인(神印)의 대덕 명랑(明朗)19)에게 명(命)하여 밀교의
제단을 임시로 세우고 법으로 기도하니 나라가 곧 위기에서 벗어났다. 의
봉(儀鳳)20) 원년(676)에 의상이 태백산으로 돌아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
석사를 창건하고 대승을 널리 펴니 신령스러운 감응이 많이 나타났다.
旣而本國承相金欽純, 一作仁問, 良啚等, 往囚於唐. 高宗將大
擧東征, 欽純等密遣湘誘而先之. 以咸享元年庚午還國, 聞事
於朝. 命神印大德明朗, 假設密壇法禳之, 國乃免. 儀鳳元年,
湘歸大伯山, 奉朝旨創浮石寺, 敷敞大乘, 靈感頗著.
14) 김흠순(金欽純, ?~669~?)은 신라 중대의 장군으로 김서현(金舒玄)의 아들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이다. ‘김흠춘(金欽春)’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화랑이 되
어 크게 존경을 받았다. 김유신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부흥 운동을 꾀하는 백제와 고구려의 잔민을 포섭하여
회유하는 한편으로 대당 항쟁을 꾀하는 과정에서 669년에 김양도(金良圖)와 함
께 사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갔다[『삼국사기(三國史記)』권6「신라본기(新羅本紀)」
‘ 문무왕(文武王)’].
15) 김인문(金仁問, 629~694)은 신라 삼국통일기의 장군이자 외교관이다. 자는 인
수(仁壽)이며,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학문
을 좋아하여 유가서(儒家書)를 많이 읽었고, 장자·노자·불교의 책도 섭렵하
였다. 넓은 식견과 훌륭한 기예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김춘추
(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을 도와 삼국통일에 힘썼고, 여생을 당나라에서 보내
면서 양국간 정치적 분규의 해결과 중재에 많은 공을 세웠다[『삼국사기(三國史
記)』권6「신라본기(新羅本紀)」 ‘문무왕(文武王)’].『삼국유사』권2「문호왕법
민(文虎王法敏)」 조에 김인문이 부탁하여 의상스님이 귀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韓6, p.288a8-9).
16) 양도(良圖, ?~670)는 신라의 장군이자 문장가이다. 성은 김씨이다. 김유신· 김
인문 등을 도와 백제와 고구려 및 그 잔민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669년
5월에 파진찬(波珍飡)이 되어 각간(角干) 흠순과 함께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그러나 670년에 김흠순은 돌아왔지만 김양도는 계속 억류되어 그 곳에서 옥사
하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권6「신라본기(新羅本紀)」 ‘문무왕(文武王)’].
17) 함형(咸亨)은 당나라 고종이 670년에서 674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신라는 문
무왕(재위 661년~681년) 때에 해당한다.
18)『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서는 부석사 본비에 의거하여
의상스님이 함형 2년(671)에 신라로 돌아왔다(韓6, p.327b6)고 하고 있으나 연대
와 간지를 함게 기록한 지금의 「의상전교」 조의 기록이 더 신빙되고 있다.
19) 명랑(明朗, ?~632~?)은 신라 문무왕 때의 승려로서 신라의 신인종(神印宗)의 중
흥조로 일컬어진다. 자는 국육(國育)이며, 재량(才良)의 아들로서 자장율사(慈
藏律師)의 외조카이기도 하다. 632년(선덕왕 1) 당나라로 건너가서 진언밀교(眞
言密敎)의 비법을 배우고 3년 만에 귀국하여 진언종(眞言宗)의 별파인 신인종의
중흥 조사가 되었다. 신인종은 호국(護國), 호법(護法)과 결부되어 교세를 떨쳤
다. 경주의 원원사(遠願寺), 개성 현성사(現聖寺), 천마산 총지암(總持庵), 모악
산 주석원(呪錫院) 등이 신인종의 종찰이었다. 명랑의 뒤를 이은 고승으로는 안
혜(安惠)·낭융(朗融)·광학(廣學)·대연(大綠) 등 4대덕(四大德)이 있다.『삼국
유사』권5「명랑신인(明朗神印)」조.
20) 의봉(儀鳳)은 당나라 고종이 676년부터 679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신라는 문
무왕(재위 661년~681년) 때에 해당한다.
종남산의 문인 현수(賢首)21)가 현묘함을 탐구한『소(䟽)』22)를 지어 그 부
본(副本)을 의상의 처소에 보내고 아울러 글을 올려 간절하게 말하였다.
終南門人賢首, 撰搜玄䟽, 送副本於湘處, 并奉書懃懇曰.
21) 현수(賢首, 643~712)는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法藏)스님이다. 속성은 강
(康)씨이며 조상은 서역의 강거국(康居國) 출신이나, 할아버지 때부터 중국의
장안에서 살았다. 의상스님과 함께 지엄(智儼)스님에게서 화엄을 배웠다. 주요
저서로는『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대승
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등이 있다.
22) 지엄스님의 특정 문헌을 가리킨다거나 법장스님의 특정 문헌을 가리킨다고 보
기는 어렵다. 지엄스님에게『화엄경수현기(華嚴經搜玄記)』라는 저술이 있는데
제목의 ‘수현(搜玄)’이 여기의 수현과 같은 의미이다.
“서경 숭복사(崇福寺)23)의 승려 법장은 해동 신라의 화엄법사의 시자에
게 글을 보냅니다. 한 번 헤어진 지 20여 년이 되었으나 존경하는 정성이
어찌 마음에서 떠나겠습니까? 더욱이 안개와 구름이 만 리이고 바다와 육
지가 천 겹이니, 이 한 몸이 다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함이 한스럽고 마음
으로 그리움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전생(前生)에 인연을
같이 했고 금세(今世)에 학업을 함께 했기 때문에 이 과보를 얻어서 대경
(大經)에 함께 목욕하고 특별히 선사(先師)24)께 이 오묘한 경전의 가르침
주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西亰崇福寺僧法藏, 致書於海東新羅華嚴法師侍者. 一從分
別, 二十餘年, 傾望之誠, 豈離心首? 加以烟雲萬里, 海陸千
重, 恨此一身不復再面, 抱戀戀, 夫何可言? 故由夙世同因,
今生同業, 得於此報, 俱沐大經, 特蒙先師授玆粤典.
23) 숭복사(崇福寺)는 장안(長安) 도성 안에 있던 사찰이다. 670년에 측천무후의 고
택을 태원사(太原寺)로 건립하였다가 689년에 이것을 숭복사로 고쳤다. 이 곳에
신라 스님으로 원측(圓測, 613~696), 승장(勝莊, ?~710~?), 승전(勝詮, ?~?) 등
이 머물렀다.
24) 선사(先師)는 지엄스님을 가리킨다.
우러러 들으니, 상인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화엄경』을 펴셔서
법계를 선양하고 걸림 없는 연기의 겹겹의 인드라망[帝網]으로 부처님 나
라를 새롭게 하여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신다고 하니 뛸 듯한 기쁨이 더
욱 깊습니다. 이로써 여래께서 입멸하신 후 부처님의 해를 빛나게 하고 법
륜을 다시 굴려 법을 오래 머무르게 한 사람은 오직 법사뿐임을 알겠습니
다. 법장은 나아가려는 취지가 있어도 이룬 것이 없고 두루 갖춘 것도 더
욱 모자라니,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면 선사께 부끄러울 뿐입니다. 분수
따라 받아 지닌 것을 버리고 여읠 수 없으니, 이 업(業)에 의지해 내세의
인연을 맺고자 합니다.
仰承上人歸鄕之後, 開演華嚴, 宣揚法界, 無㝵緣起, 重重帝網,
新新佛國, 利益弘廣, 喜躍增深. 是知如來滅後, 光輝佛日, 再
轉法輪, 令法久住者, 其唯法師矣. 藏進趣無成, 周旋寡況, 仰
念玆典, 愧荷先師. 隨分受持, 不能捨離, 希憑此業, 用結來因.
다만 [지엄]화상의 장소(章䟽)는 뜻이 풍부한데 글이 간결하여 후인들
이 이해하여 들어가기가 많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화
상의 미묘한 말과 오묘한 뜻을 기록하여 겨우 주석[義記]을 완성했습니
다. 근래에 승전(勝詮)법사가 베껴 썼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
전할 것입니다. 청컨대 상인께서는 잘잘못을 상세히 검토하셔서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마땅히 내세에는 [이] 몸을
버리고 [다른] 몸을 받아서 서로 함께 더불어 노사나불께 이와 같은 다함
없는 미묘한 법을 듣고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보현[보살]의 원행을 수행하
고자 합니다. 만약 남은 악업에 하루 아침에 떨어지더라도 상인(上人)께
서는 지난날을 잊지 마시고 모든 갈래[趣]25)에서도 바른 길을 보여주시기
를 바랍니다. 인편과 서신이 있으면 때때로 생사를 물어주십시오. 이만 줄
입니다.”〈이 글은 『대문류(大文類)』26)에 실려 있다.〉
但以和尙章䟽, 義豊文簡, 致令後人多難趣入. 是以錄和尙微
言妙旨, 勒成義記. 近因勝詮法師抄寫, 還鄕傳之彼土. 請上人
詳撿臧否, 幸示箴誨. 伏願當當來世, 捨身受身, 相與同於盧舍
那, 聽受如此無盡妙法, 修行如此無量普賢願行. 儻餘惡業, 一
朝顚墜, 伏希上人不遺宿昔, 在諸趣中, 示以正道. 人信之次,
時訪存沒. 不具.”〈文載大文類.〉
25) 갈래[趣]는 중생이 윤회하는 갈래를 가리킨다. 보통 지옥·축생·아귀·수라·인
간·천상의 여섯 갈래를 말한다.
26)『대문류(大文類)』는 의천의『원종문류(圓宗文類)』를 가리킨다.『원종문류』
권22에는 법장이 보낸 편지가「현수국사기해동서(賢首國師寄海東書)」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韓4, pp.635c4-636a13; 卍103, pp.843b12-844a18).
『원종문류』에는 편지 끝에 ‘법장화남(法藏和南)’이라는 말이 붙어 있으며 이
어서『화엄탐현기(華嚴探玄記)』20권(두 권은 미완성),『일승교분기(一乘敎分
記)』3권,『현의장등잡의(玄義章等雜義)』1권,『별번화엄경중범어(別翻華嚴經
中梵語)』1권,『기신소(起信疏)』2권,『십이문론소(十二門論疏)』1권,『신번법
계무차별론소(新翻法界無差別論疏)』1권을 전하고 있다.
의상은 곧 열 곳의 사찰에서 가르침을 전하게 하니 태백산의 부석사(浮
石寺),27) 원주의 비마라사(毗摩羅寺),28)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29) 비슬산
의 옥천사(玉泉寺),30) 금정산의 범어사(梵魚寺),31) 남악의 화엄사(華嚴寺)32)
등이 그곳이다.33)
湘乃令十刹傳敎, 太伯山浮石寺, 原州毗摩羅, 伽耶之海印, 毗
瑟之玉泉, 金井之梵魚, 南嶽華嚴寺等是也.
27) 부석사(浮石寺)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鳳凰山)에 있다. 676
년(문무왕 16) 2월에 의상스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
찰로 삼았다.
28) 비마라사(毗摩羅寺)는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에 있었다고 전한다. 의상스님이
창건한 화엄 10찰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 그 터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29) 해인사(海印寺)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伽倻山)에 있다. 의상
스님의 화엄 10찰의 하나이자,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을 봉안한 법보사찰
(法寶寺刹)이다. 신라 애장왕(재위 800년~809년) 때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하였다.
30) 옥천사(玉泉寺)는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오산리 최정산(崔頂山)에 있다. 현재
이름은 용천사(湧泉寺)이다. 670년(문무왕 10)에 의상스님이 창건하였다. 1261
년(원종 2) 일연스님이 중건하고 원래 이름인 옥천사를 불일사(佛日寺)라고 칭
하였다가 다시 용천사로 고쳤으며, 1631년(인조 9) 조영(祖英)스님이 다시 중창
하였고, 1805년(순조 5)에는 의열(義烈)스님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1) 범어사(梵魚寺)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금정산(金井山)에 있다. 678년(문무
왕 18)에 의상스님이 창건하였으며 제자 표훈(表訓, ?~674~?)스님이 머물렀다.
32) 화엄사(華嚴寺)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에 있다. 화엄사의 창
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1979년에 신라 경덕왕(재위 742년~765
년) 때의『화엄경』사경(寫經)이 발견됨으로써 황룡사(皇龍寺)의 연기(緣起)스
님이 경덕왕 때 창건한 것으로 밝혀졌다.
33) 여기에서는 화엄 10찰 중 여섯 곳만 전하고 있으나 최치원의『법장화상전』에서
는 열 곳을 모두 전하고 있다. 『법장화상전』이 전하고 있는 화엄 10찰 또흔 화엄
10산은 ①중악(中岳) 공산(公山)의 미리사(美理寺), ②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③
북악 부석사, ④강주(康州) 가야산 해인사 및 보광사(普光寺), ⑤웅주(熊州) 가
야협(迦耶峽) 보원사(普願寺), ⑥계룡산 갑사(岬寺), ⑦낭주(良州) 금정산 범어
사, ⑧비슬산 옥천사, ⑨전주 모산(母山) 국신사(國神寺), ⑩한주(漢州) 부아산
(負兒山) 청담사(淸潭寺)이다(大50, p.285a29-b2). 지금의『삼국유사』기록과
『법장화상전』의 기록을 비교하면 다섯 곳이 일치한다.『법장화상전』에만 보
이는 사찰 중에 대구 팔공산 미리사는 그 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보원사는 충
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伽耶山)에 터가 남아 있지만 그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지(寺誌)나 사적기(事蹟記) 등의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갑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계룡산에 있는데 420년에 아도(阿道)스님이 창
건하였다는 설과 556년(진흥왕 17)에 혜명(惠明)스님이 창건하였다는 설, 아도
가 창건하고 혜명이 중창했다는 설 등이 있다. 679년(문무왕 9)에 의상스님이
중수하여 화엄 10찰의 하나가 되었다. 국신사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귀신사(歸信寺)이다. 676년(문무왕 16)에 의상스님이 창
건하여 국신사(國信寺)라 하였으며 국신사(國神寺)라고 하기도 한다. 최치원이
이곳에서『법장화상전』을 편찬하였다. 청담사는 그동안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2008년 서울시 은평구 진관내동 일대 은평 뉴타운 예정지에서 청
담사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화엄 10찰 중 일부 사찰은 창건
된 시기가 의상스님이 생존하였던 시기와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의상스님과 제자들이 대를 이어 건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법계도서인(法界啚書印)』과『약소(略䟽)』를 지어 일승의 요긴함과
중요함을 포괄했으니 천 년의 본보기가 될 만하므로 여러 사람이 다투어
소중히 지녔다. 그밖에는 지은 것이 없으나 솥[의 국] 맛을 아는 데는 고기
한 점이면 충분하다.『법계도』는 총장34) 원년 무진(668)에 완성되었다. 이
해에 지엄 또한 입적했다. 공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꺾음35)
과 같다.
又著法界啚書印并略䟽, 括盡一乘樞要, 千載龜鏡, 竸所珎佩.
餘無撰述, 甞鼎味一臠足矣. 啚成總章元年戊辰. 是年儼亦歸
寂. 如孔氏之絕筆於獲麟矣.
34) 총장(總章)은 당나라 고종이 668년부터 670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신라는 문
무왕(재위 661년~681년) 때에 해당한다.
35) 공자가『춘추(春秋)』를 끝낸 일을 가리킨다. 공자가 편찬한『춘추』는 춘추시대
노나라의 은공(隱公) 원년(기원전 722년)에 시작하여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77년)에 끝나는 노나라 역사책이다. 공자가『춘추』를 짓다가, 애공 14년 봄에
기린(麒麟)이 잡히자, 기린은 본래 성왕(聖王)의 아름다운 상서인데 성왕이 없
는 세상인데도 기린이 나오니 주(周) 나라 도가 일어나지 못하고, 아름다운 상
서가 나타나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해 응험이 없음을 한탄하여 “14년 봄에 서
쪽으로 사냥 가서 기린을 잡다”(十四年, 春西狩獲麟)라는 구절로 『춘추』를 마
감한 것을 말한다. 기린은 중국에서 봉황·용·거북과 함께 신령스러운 동물의 하
나로, 왕이 인덕(仁德) 정치를 펼쳤을 때 나타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공자의
절필을 주목하여 지엄스님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의상스님의『법계도』의
의미를 드높이는 것으로 보인다.
세상에서 전하기는 의상은 금산보개(金山寶蓋)36)의 화신이라 했다. [그
의] 제자로는 오진(悟眞),37) 지통(智通),38) 표훈(表訓),39) 진정(眞定), 진장
(眞藏),40) 도융(道融), 양원(良圓),41) 상원(相源),42) 능인(能仁), 의적(義寂)43)
등 열 명의 대덕이 우두머리가 되니 모두 버금가는 성인이며 각각 전하는
것이 있다.
世傳湘乃金山寶蓋之幻有也. 徒弟悟眞, 智通, 表訓, 眞定, 眞
藏, 道融, 良圓, 相源, 能仁, 義寂等, 十大德爲領首, 皆亞聖
也, 各有傳.
36) 금산(金山)은『법화경』(高9, p.728c13; 大9, p.4c13)이나『화엄경』(高8, p.32c16;
大9, p.423b20) 등에서 부처님의 몸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보개(寶蓋)’는 부
처님이 계신 자리를 덮는 장엄구를 가리키므로 ‘금산보개’는 부처님을 가리키
는 말이다.『금광명경(金光明經)』 등에는 금산보개여래(金山寶蓋如來)의 이름도
보인다(高40, p.640c2-3; 大16, p.345c1-2). 『범어사창건사적(梵魚寺創建事蹟)』
「고적(古蹟)」 조에서는 의상스님을 “금산보개여래의 제7 화신”이라고 하고 있다.
37) 오진(悟眞)의 활동은 드러나 있지 않으나『팔십화엄(八十華嚴)』이 신라에 전래
된 뒤 경의 품수에 대해 당나라의 자원(子源)에게 편지로 질문한 기록이 있다
[균여(均如),『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鈔)』권4(韓4, p.120a19-20)].
38) 지통(智通, 655~?)은 일곱 살 때 영취산(靈鷲山)의 낭지(朗智)스님을 찾아가 출
가하였다. 가는 길에 현신한 보현보살(普賢菩薩)에게 계(戒)를 받고 도리어 낭
지스님에게 예를 받았다. 영취산 동쪽에 있을 때 영취산 서북쪽의 반고사(磻高
寺)에 있던 원효스님과 자주 접촉하였고, 원효스님은 지통스님을 위하여『초장
관문(初章觀文)』과『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그 뒤 의상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삼국유사』권5「낭지승운보현수(朗智乘雲普賢樹)」조].
의상스님이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90일 동안 3,000명의 대중에게 화엄을 강의하
였을 때 그 요지를 뽑아『추동기(錐洞記)』 2권을 지어 세상에 유포하였으나 현
재 전하지는 않는다.
39) 표훈(表訓)은 의상스님과 함께 흥륜사(興輪寺) 금당에 모셔졌던 신라 10성(十
聖)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다[『삼국유사』권3「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
京興輪寺金堂十聖)」조]. 황복사에서 의상스님에게『법계도』를 배우고 의상스님
이 입적한 후에는 황복사에 머물기도 하였다. 불국사(佛國寺)에 머물면서『화엄
경』을 강하였고, 능인(能仁)·신림(神琳) 등과 함께 금강산에 표훈사(表訓寺)를
창건하여 초대 주지가 되었다.
40) 진정(眞定)은 출가하기 전에는 군무에 종사하였는데, 틈이 나면 품을 팔아 홀어
머니를 봉양하였다. 의상스님이 태백산에서 설법한다는 소문을 듣고 의상스님에
게 출가하였다. 진정스님 어머니를 천도하기 위하여 의상스님이 추동에서 90일
동안 화엄을 강하고 이 내용을 표훈스님이 정리한 것이 『추동기』이다[『삼국
유사』권5「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美)」조]. 진정스님은 의상스님에게서
『법계도』를 배운 후「삼문석(三門釋)」을 지었다. 비는 지리산 단속사(斷俗寺)
에 있다.
41) 양원(良圓)은 최치원의『법장화상전』에서는 ‘양원(亮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균
여스님의『석화엄지귀장원통초』에 양원스님의 설이 몇 가지 인용되고 있어 의
상스님의『법계도』에 주석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42) 상원(相源)은『법장화상전』에는 ‘상원(相圓)’으로,『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
髓錄)』에는 ‘상원(相元)·상원(常元)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십구장원통기(十句
章圓通記)』.『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鈔),『법계도기총수록』등에
상원스님과 여러 스님 사이의 문답이 전하고 있다.
43) 의적(義寂, 681~?)은 의상스님의 10대 제자이기는 하나 유식가로 더 유명하
다. 입당(入唐)하여 유식(唯識) 등을 연구하여 규기(窺基, 632~682)·원측(圓測,
613~696) 등과 함께『유식론(唯識論)』주석가 6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 불
교계의 존경을 받았으나 자세한 생애는 전하지 않고 있다. 25종의 저술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문헌은『법화경논술기(法華經論述記)』
상권과『범망경보살계본소(梵網經菩薩戒本疏)』,『무량수경술의기(無量壽經述義
記)』뿐이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의 골암사(鶻嵓寺)44)에서 거처하면서 밤
마다 팔을 뻗쳐 부석사의 석실에 등불을 켰다. 지통은『추동기(錐洞記)』45)
를 지었는데 대개 직접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글이 정묘함에 도달
하였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佛國寺)46)에 머물면서 항상 천궁을 오갔다.
眞嘗處下柯山鶻嵓寺, 每夜伸臂, 點浮石室燈. 通著錐洞記, 蓋
承親訓, 故辭多詣妙. 訓曾住佛國寺, 常往來天宮.
44) 하가산(下柯山) 골암사(鶻嵓寺)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하가산은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학가산(鶴駕山)의 옛 이름이다. 학가산 북쪽 북후면(北後
面) 석탑리(石塔里)에 돌로 쌓아 만든 적석탑(積石塔)이 있고 근처에 석탑사(石
塔寺)가 있는데, 석탑사의 동쪽 산을 조골산(照骨山)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석
탑사의 원래 명칭을 골암사로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45)『추동기』가 지어진 배경에 대해『삼국유사』권5「진정사효선쌍미(眞定師孝善雙
美)」조(韓6, p.367a17-23)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진정스님이 출가하려
고 할 때 어머니에게 효도를 마친 뒤 출가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가 곧바로 출
가하기를 권하였다. 의상스님에게 출가한 3년 후 어머니의 부고를 받자 진정스
님은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어 명복을 빌었다. 그 뒤 이 사실을 의상스님에게
말하자 의상스님은 제자들과 함께 소백산 추동(錐洞)으로 가서 3,000명의 대중
에게 90일 동안『화엄경』을 강하였다. 이 강의가 끝나자 진정스님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생천(生天)했음을 알렸다고 한다.
46) 불국사(佛國寺)는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에 있다.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의 발원으로 창건하였다. 528년(법흥왕 15)에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과 기윤부인(己尹夫人)이 이 절을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
다는 설도 있다. 불국사에 머물던 표훈스님이 천궁(天宮)을 자유롭게 왕래한 일
과 관련하여 경덕왕(재위 742년~765년)의 청을 받고 천제(天帝)에게 태자를 낳
게 하여 달라고 부탁하여 혜공왕(재위 765년~780년)이 태어난 이야기가『삼국
유사』권2「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조에 전한다(韓6,
p.292b1-21).
의상이 황복사에 머물 때 제자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항상 허공을 딛
고 올라가 계단을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다리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제자들이 계단에서 세 자나 떨어져 공중을 밟고 돌았는데 의상이 돌아
보면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괴이하게 여길 것이니
세상에는 교훈될 것이 못 된다.” 나머지는 최치원이 지은 본전과 같다.
湘住皇福寺時, 與徒衆繞塔, 每步虛而上47), 不以階升, 故其塔
不設梯磴. 其徒離階三尺, 履空而旋, 湘乃顧謂曰. “世人見此,
必以爲怪, 不可以訓世.” 餘如崔侯所撰本傳.
47) 저본에는「工」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과 을본에 따라「上」으로 바꾸었다.
찬한다.
험한 덤불 헤치고 안개와 티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니
지상사 문이 열려 상서로운 보배를 맞이한다.
잡화를 캐어 와서 고국에 심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한가지로 봄이로다.
讃曰. 披榛跨海冐烟塵, 至相門開接瑞珎. 采采雜花我故國, 終
南太伯一般春.
2) 전후로 가져온 사리[前後所將舍利]48)
48) 저본은『한국불교전서』제6책(동국대학교출판부, 1979)에 수록된『삼국유사(三
國遺事)』권3의「탑상(塔像)」제4「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이다. 이 중
에서 본 서에 소개한 내용은 의상스님의 행장과 직접 관련된 부분(pp.325c7-
326a3)만 발췌하였다. 이에 대한 교감본으로 갑본(甲本)은『대정신수대장경』제
49권에 수록된『삼국유사』[1921년에 영인한 정덕본(正德本)]의「전후소장사리
(前後所將舍利)」조이고,을본(乙本)은 최남선(崔南善)이 편집한『삼국유사』(삼
중당, 1943)의「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이다.『한국불교전서』에서는 고
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덕임신간본(正德壬申刊本, 1512년)을 저본으로
하였다.
『의상전』49)에서 말하기를,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 지
상사의 지엄존자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이웃에 도선율사(道宣律師)50)가
있어 언제나 하늘로부터 공양을 받고 공양[齋] 때마다 하늘의 주방에서
음식을 보내왔다. 하루는 율사가 의상스님을 청하여 공양[齋]를 하는데
의상이 가서 자리잡고 앉은 지 오래도록 하늘의 공양이 때가 지나도 이르
지 않았다. 의상이 빈 발우로 돌아가자 하늘의 사자가 비로소 이르렀다.
相傳云, 昔義湘法師入唐, 到終南山至相寺智儼尊者處. 隣有
宣律師, 常受天供, 每齋時天厨送食. 一日律師請湘公齋. 湘至
坐定旣久, 天供過時不至. 湘乃空鉢而歸, 天使乃至.
49)『의상전』으로 번역한 상전(相傳)을 ‘전해오는 이야기’ 정도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나 하늘의 공양을 받고 사리를 전하는 내용이 부석사 본비에도 있으므로
‘『의상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50) 도선율사(道宣律師, 596~667)는 중국 수(隋)·당(唐) 초기에 활약하였다. 남산율
종(南山律宗)의 개조로서 남산율사 또는 남산대사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속성
(俗姓)은 전씨(錢氏)이다.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대선정사(大禪定寺)의 지수
(智首)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율학의 대가인 스승을 모시면서 공부하고 후에 종
남산(終南山)에 머물면서 율학의 연구와 전파에 전력하여 ‘남산율종’이라는 명
칭을 얻게 하였다. 667년 정업사(淨業寺)에서 계단(戒壇)을 창립하고 각지에서
찾아온 20여 명의 사람들에게 계를 주었는데, 이것이 후세에 계단 설치의 모범
이 되었다. 당시 장안 불교계의 최고 지도자의 명망이 높았으며,『사분률행사초
(四分律行事鈔)』(3권)를 비롯한 계율 관련 주요 저술과,『속고승전(續高僧傳)』(30
권), 인도 지리에 대한 기록인『석가방지(釋迦方志)』(10권), 도교를 낮추고 불교
를 선양하려는 의도에서 쓰인『집고금불도논형(集古今佛道論衡)』(4권), 불교를
옹호하는 논서의 집대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광홍명집(廣弘明集)』(30권) 등, 35
부 188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겼다.
율사가 묻기를, “오늘은 어찌하여 늦었습니까?”라고 하니, 하늘의 사자
가 “온 골짜기에 신병(神兵)이 가로막고 있어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라
고 하였다. 이에 율사는 의상스님에게 신병의 호위가 있음을 알고는 그 도
(道)의 뛰어남에 탄복하고 그 공양 거리를 그대로 두었다.
律師問,“ 今日何故遲?” 天使曰,“ 滿洞有神兵遮擁, 不能淂51)
入.” 於是律師知湘公有神衛, 乃服其道勝, 仍留其供具.
51)「淂」은「得」의 속자이다.
이튿날 다시 지엄과 의상 두 스님을 공양[齋]에 청하고 자세히 그 연유
를 말했다. 의상스님이 조용히 도선에게 말했다.
“스님은 이미 천제(天帝)의 존경을 받고 계십니다. 일찍이 들으니 제석
궁에는 부처님의 40개 이빨 가운데 어금니 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들
을 위하여 [천제께] 청하여 인간 세상으로 내려 보내 복되게 하는 것이 어
떻겠습니까?”
율사는 그 후에 하늘의 사자와 함께 그 뜻을 상제에게 전하니 상제가
칠일을 기한으로 보내주었으므로 의상스님이 예를 마치고 맞이하여 대궐
안에 모셨다.
翌日又邀儼湘二師齋, 具陳其由. 湘公從容謂宣曰. “師旣被天
帝所敬. 甞聞帝釋宮有佛四十齒之一牙. 爲我等軰, 請下人間,
爲福如何?” 律師後與天使, 傳其意於上帝, 帝限七日送與, 湘
公致敬訖, 邀安大內.
3) 낙산의 두 성인 관음과 정취, 그리고 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52)
52) 저본은『한국불교전서』제6책(동국대학교출판부, 1979)에 수록된『삼국유사(三國
遺事)』권3의「탑상(塔像)」제4「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正趣
調信)」조이다. 이 중에서 본 서에 소개한 내용은 의상스님의 행장과 직접 관련
된 부분(pp.330c6-331a3)만 발췌하였다. 이에 대한 교감본으로 갑본(甲本)은『대
정신수대장경』제49권에 수록된『삼국유사』[1921년에 영인한 정덕본(正德本)]의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조이고, 을본(乙本)은
최남선(崔南善)이 편집한『삼국유사』(삼중당, 1943)의「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
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조이다.『한국불교전서』에서는 고려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덕임신간본(正德壬申刊本, 1512년)을 저본으로 하였다.
옛날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大悲]의 진신이 이
바닷가 굴 안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므로 낙산(洛山)53)이라
이름했으니 서역에서는 보타락가(寶陁洛伽)54)산이 있기 때문이다. 소백화
(小白華)55)라고도 번역하니 백의대사(白衣大士)56)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를 빌려 이름한 것이다.
昔義湘法師, 始自唐來還, 聞大悲眞身住此海邊崛內. 故因名
洛山, 盖西域寶陁洛伽山. 此云小白華, 乃白衣大士眞身住處,
故借此名之.
53) 낙산(洛山)의 원래 이름은 오봉산(五峰山)이다. 의상스님이 낙산사를 창건한 이
후로는 낙산이라고도 부른다.
54) 보타락가(寶陁洛伽, potalaka)는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진 산이다. 보
타락가(補陀落伽)·보달락가(補怛洛迦)·포달락가(布呾洛迦)·포다라(逋多羅)·
포타(逋多)라고도 쓰며, 광명(光明)·해도(海島)·소화수(小花樹) 등으로 번역한
다.『화엄경』「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스물여덟 번째로
만나는 선지식(善知識)이 바로 관음보살인데, 관음보살은 광명산(光明山)에 머
물면서 대자비의 경전을 연설하여 중생을 섭수한다고 하였다(高8, p.351c8-12;
大9, p.718a14-19).『육십화엄(六十華嚴)』의 광명산을『팔십화엄(八十華嚴)』에서
는 보달락가산(補怛洛迦山)이라고 하였다(高8, p.856c2-3; 大10, p.366c3-4). 현장
(玄奘, 602~664)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남인도의 말라구타국(秣羅矩吒
國)을 설명하면서 “말라야 산 동쪽에 포달락가산(布呾洛迦山)이 있다. 산길은
위험하고 암곡은 험준하다. 산정(山頂)에 연못이 있으며 … 연못 옆에는 돌로
된 천궁(天宮)이 있다. 관자재보살이 왕래하며 머무는 곳이다. 보살을 보고자 하
는 사람은 신명(身命)을 돌보지 않고 강물을 건너 산에 오른다.”(高32,
p.459c8-13.; 大51, p.932a14-18. 秣剌耶山東, 有布呾洛迦山. 山徑危險, 巖谷敧傾.
山頂有池, … 池側有石天宮. 觀自在菩薩往來遊舍. 其有願見菩薩者, 不顧身命, 厲水登
山.)고 하였다. 이처럼 보타락가산과 연관된 관음신앙으로 곳곳에 보타락가산이 있
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남방 바다 가운데 있는 주산열도(舟山列島)에 있는 보
타산(普陀山), 티베트 라사의 포탈라궁, 우리나라에는 강원도 낙산(洛山), 인천
시 강화군 석모도의 낙가산 보문사를 예로 들 수 있다.
55) ‘소백화(小白華)’는 ‘보타락가(寶陁洛伽, potalaka)’를 번역한 말이다. 징관(澄觀,
738~839)의『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에서는 관자재보살이 머무
는 보달락가산에는 소백화나무가 많아 소백화수산(小白華樹山)이라고 번역한
다(大35, pp.939c29-940a2)고 하였고 이통현(李通玄, 635~730)의『신화엄경론(新
華嚴經論)』에서도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大36, p.863b8-10). 의상스님의『백
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역시 ‘소백화’에서 끌어쓴 것에서도 의상스님
의 화엄 관음신앙의 모습을 알 수 있다.
56) ‘백의대사(白衣大士)’는 관음보살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중생에게 나타나는 모
습 중에 흰 옷을 입고 흰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백의관음을 말한다.『법화경』「관
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는 관음보살이 서른세 가지 모습으로 나
타나 중생에게 설법한다(高9, p.794a4-b10; 大9, p.57a23-b19)고 하였는데, 중국
의 당·송 이후 민간에서 서른세 가지 모습에 다양한 관음의 이름을 붙여 삼십
삼관음(三十三觀音) 신앙이 이루어졌다. 특히 백의관음은 한국불교에서 화엄의
관음으로 부각된다. 관음보살께 공양을 올리는 관음청(觀音請) 중에 관음찬(觀
音讚)은 “백의관음은 말없이 말씀하시고 남순동자는 들음 없이 듣도다. 병 위의
푸른 버들은 세 때가 여름인데 바위 위의 푸른 대나무는 시방이 봄이로다.”(白衣
觀音無說說, 南巡童子不聞聞. 甁上綠楊三際夏, 巖前翠竹十方春.)라고 하고 있다.
남순동자, 즉 선재동자와 백의관음이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화엄의 관음임
을 알 수 있다. 조계종에서는 2009년 4대 관음사찰로 불려온 강화도 보문사·양
양 낙산사·여수 향일암·남해 보리암을 비롯해 전국의 33곳을 관음성지로 선정
하여 ‘33관음성지 순례사업’을 펼치고 있다.
[의상이] 재계한 지 7일 만에 좌구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중(龍衆)
과 천중(天衆) 등 팔부(八部)57)의 시종들이 굴 안으로 인도했다. 공중에 예
를 올리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주므로 의상스님이 받아가지고 물
러나왔다.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자 의상이 받아가지고
나와 다시 7일 동안 재계하였다. 이에 진신의 모습[眞容]을 보니 [진신이]
말씀하기를, “앉은 자리 위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마땅히 그 땅에 불전을 지어라”라고 하였다.
齋戒七日, 浮座具晨水上, 龍天八部侍從, 引入崛內. 叅禮空
中, 出水精念珠一貫之, 湘領受而退. 東海龍亦獻如意寶珠一
顆, 師捧出, 更齋七日. 乃見眞容, 謂曰, “於座上山頂, 雙竹湧
生, 當其地作殿宣矣.”
57) ‘팔부(八部)’는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중(神衆)을 말한다. 천(天, deva)·용(龍,
nāga)·야차(夜叉, yaksa)·건달바(乾闥婆, gandharva)·아수라(阿修羅,
asura)·가루라(迦樓羅, garuma, 金翅鳥)·긴나라(緊那羅, kidnara)·마후라가
(摩睺羅伽, mahoraga)의 여덟이다. 천룡팔부(天龍八部)라고도 한다.『법화경』
을 비롯한 다양한 대승 경전에 나타나는 신중이지만 여기에서는 화엄신중의 면
모가 두드러진다.
스님이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자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金堂)58)을 짓고 [관음의] 상을 빚어 모시니,59) 원만한 모습과 고
운 자질의 장엄함이 마치 하늘에서 생겨난 것 같았다. 그 대나무가 없어지
고 나서야 바로 진신이 머무른 곳임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 이름을
낙산이라 하였으며 스님은 받은 두 개의 구슬60)을 성전에 모셔놓고 떠나
갔다.
師聞之出崛, 果有竹從地湧出. 乃作金堂塑像而安之, 圓容麗
質, 儼若天生. 其竹還沒, 方知正是眞身住也. 因名其寺曰洛
山, 師以所受二珠, 鎭安于聖殿而去.
58) ‘금당(金堂)’은 구체적으로 현재의 낙산사 홍련암을 가리킨다. 홍련암 주련에는
앞에서 언급한 관음찬이 새겨져 있으며 1930년대에 경봉(鏡峰, 1892~1982)스님
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59) 이어진『삼국유사』「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洛山二大聖 觀音 正趣 調信)」조
의 내용에 따르면, 이때 모셔진 관음상 이외에 858년(헌안왕 2)에 사굴산파의 개
산조 범일(梵日, 810~889)스님이 이 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3
칸의 건물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였으며, 고려 초기에 산불로 낙산사가 소실되
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하였다고 한다(韓6,
p.331a15-b15). 그러나 몽골의 침략으로 이 절이 전소될 때 이 건물도 불타 버렸
다. 현재 홍련암에 모셔진 관음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한 것이다. 낙산사
를 대표하는 해수관음상은 1970년대에 조성된 것이며 2005년 화재로 손상되었
다가 2009년 복원되었다.
60) 이후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는 몽골의 침략이 있었던 시기(1253~1254)에 절의 노
비가 땅에 묻고 도망쳤다가 난이 평정된 뒤 파내어 관아에서 보관하다가 1258
년(고종 45)에 궁으로 옮겨 모셨다[『삼국유사』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조(韓6, p.331b15-c5)]. 그러나 1273년(원종 14) 3월에 원의 사신 마봉(馬絳)이
귀국할 때 수행하던 대장군 송분(宋玢)에게 두 구슬을 헌납하였다고 한다[『고
려사(高麗史)』권27「원종(元宗)」조].
4) 당대 신라국 의상스님의 전기[唐新羅國義湘傳]61)
61) 저본은『대정신수대장경』제50권에 수록(p.729a3-c3)된『송고승전(宋高僧傳)』
권4「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이다.
석의상(釋義湘)은 속성은 박씨62)이며 계림부(雞林府)63) 사람이다. 태어
나서 또한 재주와 지혜가 특별히 뛰어났고 자라서는 세상을 떠나 노닐며
도에 들어갔으며 타고난 성질이 천성 그대로였다. 나이 약관이 되어 당나
라에서 교종이 한창 융성함을 듣고 원효법사와 뜻을 같이 하여 서쪽으로
유학하고자 하였다. 본국의 바닷길의 문이자 당나라 경계64)로 가서 큰 배
를 구해 푸른 파도를 건너갈 계획이었다.
釋義湘, 俗姓朴, 雞林府人也. 生且英奇, 長而出離, 逍遙入道,
性分天然. 年臨弱冠, 聞唐土敎宗鼎盛, 與元曉法師, 同志西
遊. 行至本國海門唐州界, 計求巨艦, 將越滄波.
62)『삼국유사』「의상전교」조(韓6, p.348b21)나 체원의『백화도량발원문약해』
(韓6, p.570c4)에는 의상스님의 속성을 김씨라고 하고 있다. 신라는 태종무열왕
(재위654년~661년) 때에 왕조가 교체되면서 성골(聖骨)에서 진골(眞骨)로 골품
제가 바뀌고 박씨에서 김씨로 왕위가 이어진다. 따라서 김씨는 직계는 아니지만
왕족이 된다.『송고승전』에서 의상스님이 왕족임을 강조하기 위해 박시라고 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63) 계림부(鷄林府)는 경주를 가리키며 넓게는 신라를 가리킨다. 계림은 경주시 교
동에 있는 숲으로 시림(始林)이라고도 한다. 닭이 울었다고 하여 계림이라는 이
름이 붙었으며, 신라시대 경주 김씨의 시조이자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곳이
라고 한다[『삼국사기(三國史記)』권1「신라본기(新羅本紀)」].
64) 당나라 경계[唐州界]는 의상스님이 등주(登州)를 통해서 당나라에 갔다고 전하
는『송고승전』의 기록을 고려하면 당항성(黨項城)이라고 한다. 현재 경기도 화
성시 서신면에 있는 산성으로 원래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한때 고구려 지역이었
다가 6세기 이후 신라의 영역이 된 후에는 당나라와 교통하는 중요 항구의 역할
을 담당했다. 의상스님이 당나라로 가려던 무렵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교통로
는 흔히 당항성에서 등주에 이르는 바닷길이었다고 한다.
갑자기 중도에 궂은비를 만났는데, 마침 길가의 토굴[土龕] 사이에 몸
을 숨기게 되어서 비바람을 피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자세히 보니 오래
된 무덤에 해골이 옆에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가랑비가 내리고 땅도 진흙
이어서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웠다. 그대로 머물며 나서지 못하고 또 무
덤굴 벽에 기대어 있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괴이하
였다.
倏於中塗, 遭其苦雨, 遂依道旁土龕間隱身, 所以避飄濕焉. 迨
乎明旦相視, 乃古墳骸骨旁也. 天猶霢霂, 地且泥塗, 尺寸難
前. 逗留不進, 又寄埏甓之中. 夜之未央, 俄有鬼物爲怪.
원효스님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제 여기에서 머물며 잤을 때에는 토
굴이라며 또한 편안했는데 오늘 밤은 잠깐 머물면서도 귀신의 동네에 의
탁하니 동티가 심한 것이구나. 곧 마음이 생하므로 갖가지 법이 생하고 마
음이 멸하므로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겠도다. 또한 삼계는 오직 마
음이요, 만법은 오직 식뿐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할 필
요가 있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하고는 곧 짐을 챙겨
되돌아갔다.
曉公歎曰,“ 前之寓宿, 謂土龕而且安, 此夜留宵, 託鬼鄉而多
祟65). 則知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又三界唯心, 萬
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我不入唐,” 却携囊返國.
의상은 이에 자신의 그림자뿐이어서 홀로 떠나며 죽어도 물러서지 않
겠다고 서원하였다. 총장 2년(669)66)에 상선을 타고 등주(登州)67) 해안에
도착하였다. 걸식[分衛]68)하며 한 신도의 집에 이르자 의상의 용모와 안색
이 뛰어남을 보고 집에 머무르게 한 지가 이미 오래였다. 소녀가 있어서
고운 옷을 입고 단장하였는데 이름을 선묘(善妙)라 하였다. 아름답고 요
염하게 그를 유혹하였으나 의상의 마음은 돌과 같아 바꿀 수 없었다. 여인
은 말을 해도 대답을 보지 못하자 갑자기 도심을 일으켜 그 앞에서 큰 서
원을 맹세하며 말하기를, “세세생생 화상께 귀명하고 대승을 배우고 익혀
큰 일을 성취하겠습니다. 제자는 반드시 단월(檀越)69)이 되어 도움과 인연
을 공급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湘乃隻影孤征, 誓死無退. 以總章二年, 附商船, 達登州岸. 分
衛到一信士家, 見湘容色挺拔, 留連門下旣久. 有少女麗服靚
粧, 名曰善妙. 巧媚誨之, 湘之心石不可轉也. 女調不見答, 頓
發道心, 於前矢大願言,“ 生生世世, 歸命和尚, 習學大乘, 成
就大事. 弟子必爲檀越, 供給資緣.”
66) 의상스님의 입당 연도에 대해서『삼국유사』「의상전교」조는 ‘영휘 초년(650)’
이라고 하였고,『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조가 전하는 부석사 본비에서는 ‘영
휘 원년(650)’에 1차로 시도하였다가 실패하고 ‘용삭 원년(661)’에 2차로 시도하
였다고 하였다. 지금『송고승전』이 전하고 있는 ‘총장 2년(669)’은 다소 신빙성
이 떨어진다. 의상스님의『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직접 ‘총장 원년
(668) 7월 15일’에 지었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韓2, p.8b9). 의상스님이『화
엄일승법계도』를 지어 지엄스님에게 인가를 받고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0월 29
일에 지엄스님이 입적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67)『삼국유사』「의상전교」조에는 의상스님이 처음에 양주에 머물렀다고 전하고
있다(韓6, p.348c2).
68) 분위(分衛, pindapāta)는 빈다파다(賓茶波多)라고도 음역하고, 탁발(托鉢)·걸
식(乞食)·단타(團墮)라고 번역한다.
69) 단월(檀越, dāna-pati)은 시주(施主)라 번역한다. 다나(dāna)는 베푼다는 의미
로 시(施)라고 번역하고, 빠티(pati)는 주인이라는 의미로 주(主)라고 번역했다.
단(檀)은 보시를 뜻하고, 월(越)은 보시한 공덕으로 빈궁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다.
의상은 이에 곧 장안으로 가서 종남산의 지엄삼장의 처소에서『화엄경』
을 모두 배웠다. 그 때에 강장국(康藏國)의 [법장]국사가 함께 공부하였다.
이른바 기미를 알고 드러남을 알며,70) 질서가 있고 올바름이 있으며,71) 덕
의 병이 만족시켰다72)고 한 것이고, 삼장(三藏)의 바다에 노닌 것이다.
湘乃徑趨長安, 終南山智儼三藏所, 綜習華嚴經. 時康藏國師
爲同學也. 所謂知微知章, 有倫有要, 德瓶云滿, 藏海嬉遊.
70)『주역(周易)』「계사하전(繫辭下傳)」에서 “군자는 숨어있는 기미도 알고 드러난
현상도 알며 부드러운 것도 알고 강한 것도 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본다”(君子知微知彰, 知柔知剛, 萬夫之望)고 하였다. 본문의 ‘지미지장(知微知章)’
은 ‘지미지창(知微知彰)’과 같은 말로 쓰인다.
71)『서경(書經)』「여형(呂刑)」에 “형벌은 시대에 따라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것이나 바르지 못한 자를 바르게 하는 것이니 질서가 있고 올바름이 있어야 한
다”(刑罰, 世輕世重, 惟齊非齊, 有倫有要.)고 하였다.
72)『화엄경』「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보리심은 공덕의 병과 같으니, 일체 중생
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때문이다”(高8, p.925b16-17. ; 大10, p.430a17-18. 菩提心者,
如功德瓶, 滿足一切衆生心故.)라고 하였다.
이에 돌아오는 길을 논의하며 법을 전하고 가르침을 펼치면서 다시 문
등에 있는 옛 단월의 집에 이르러 수년의 공양과 보시에 감사하고 곧 상
선을 기다려 막 닻을 올릴 참이었다. 그 여인 선묘가 미리 의상을 위해 법
복과 여러 가지 집기 등을 힘써 모아 상자에 가득할 정도로 하여 해안에
도달하니 의상의 배가 이미 멀었다. 그 여인은 빌며 말하기를, “내 본래 마
음은 법사를 공양하는 것이다. 원컨대 이 옷 상자가 저 앞의 배에 날아 들
어가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상자를 거센 파도에 던졌다. 마침 거센 바람
이 상자를 불어 새털 같을 뿐이어서 멀리 곧장 배로 날아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 여인은 다시 맹세하기를, “나는 이 몸이 큰 용으로 바뀌
어 배의 앞뒤의 날개가 되어 본국에 도착하여 법을 전할 수 있게 도우리
라”고 하였다. 이에 옷을 벗고 바다에 뛰어 들었다. 바라건대 원력은 굽히
기 어렵고 지성은 신을 감동시킴을 알라. 과연 모양을 말하자면 [몸을] 굽
혔다 쳐들고 혹은 뛰어오르며 그 배 밑을 구불구불하게 하여 저쪽 해안에
무사히 도달하게 하였다.
乃議迴程, 傳法開誘, 復至文登舊檀越家, 謝其數稔供施, 便慕
商船, 逡巡解纜. 其女善妙, 預爲湘辦集法服并諸什器, 可盈篋
笥, 運臨海岸, 湘船已遠. 其女呪之曰,“ 我本實心, 供養法師.
願是衣篋跳入前船.” 言訖投篋于駭浪. 有頃疾風吹之, 若鴻
毛耳, 遙望徑跳入船矣. 其女復誓之,“ 我願是身化爲大龍, 扶
翼舳艫到國傳法.” 於是攘袂投身于海. 將知, 願力難屈至誠感
神. 果然伸形, 夭矯或躍, 蜿蜒其舟底, 寧達于彼岸.
의상은 본국에 되돌아온 후 산천을 두루 다녔다. 고구려의 먼지와 백제
의 바람, 그리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에서, “이 곳은 땅이 신령
스럽고 산이 수려하니 참으로 법륜을 굴릴 곳인데 어찌 권종이부(權宗異
部)의 무리들이 5백 명이나 모여 있을까?”라고 하였다. 의상은 또 조용히
생각하기를, ‘대화엄의 가르침은 복되고 선한 땅이 아니면 일어나지 못한
다’고 하였다.
湘入國之後, 遍歷山川. 於駒塵百濟風, 馬牛不相及地, 曰,
“此中地靈山秀, 眞轉法輪之所, 無何權宗異部聚徒, 可半千衆
矣?” 湘默作是念,‘ 大華嚴敎, 非福善之地, 不可興焉.’
그 때에 선묘룡(善妙龍)73)은 항상 [의상을] 따라다니면서 수호하고 있었
는데 의상의 이러한 생각을 알았다. 곧 허공 중에서 큰 신변(神變)을 나타
내 커다란 바위로 변해서 너비 1리나 되도록 가람 위를 덮고는 떨어질 듯
말 듯 하였다. 많은 승려들이 놀라 갈 곳을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
다. 의상은 드디어 이 절에 들어가 이 경을 널리 폈는데, 겨울에는 양지 바
른 곳에서 여름에는 그늘에서 하였다.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모여드는 사
람이 많았다.
時善妙龍, 恒隨作護, 潛知此念. 乃現大神變於虛空中, 化成巨
石, 縱廣一里, 蓋于伽藍之頂, 作將墮不墮之狀. 群僧驚駭, 罔
知攸趣, 四面奔散. 湘遂入寺, 中敷闡斯經, 冬陽夏陰. 不召自
至者多矣.
73) 선묘룡(善妙龍)과 관련하여 현재 부석사에는 선묘룡의 부석(浮石) 설화와 연관
된 석룡(石龍), 선묘정(善妙井), 부석(浮石) 등이 남아 있고, 창건자 의상스님은
부석존자(浮石尊者)로, 의상스님에게서 비롯된 화엄종은 부석종(浮石宗)으로
불린다.
국왕이 중하게 여겨 전장(田莊)과 노복을 베풀어주었으나, 의상이 왕에
게 말하기를, “우리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모두 고르고 귀하고 천함
이 같은 도리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八不浄
財]74)이 있는데 어찌 장전이 있으며 어찌 노복이 되겠습니까? 빈도는 법
계를 집으로 삼고 발우로 밭갈이를 하여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의 혜명
(慧命)은 이것을 빌려 생겨납니다”라고 하였다.
國王欽重以田莊奴僕施之, 湘言於王曰,“ 我法平等, 高下共
均, 貴賤同揆. 涅槃經八不淨財, 何莊田之有, 何奴僕之爲? 貧
道以法界爲家, 以盂耕待稔. 法身慧命, 藉此而生矣.”
74)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八不淨財]에 대하여『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은「여래
성품(如來性品)」등에서 언급만 할 뿐(高9, pp.53c24-54a2; 大12, p.401a22-23), 구
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다. 장안관정(章安灌頂, 561~632)의『대반열반경소
(大般涅槃經疏)』에서는 금(金)·은(銀)·노비(奴婢)·소[牛]·양(羊)·창고(倉庫)·
판매(販賣)·농사[耕種]의 여덟 가지를 들고 있다(大38, p.98b14-17).
의상의 강설의 나무는 꽃을 피우고 말의 숲은 열매를 맺었다. 높은 수준
에 올라 오묘함을 본 이가 지통, 표훈, 범체(梵體),75) 도신(道身)76) 등 여러
명이었으니 모두 커다란 알을 깨고 날으는 가루라[迦留羅]새였다. 의상은
설한 대로 행함을 귀하게 여기고 강설로 펴는 일 외에 부지런히 수련하며
찰해(刹海)를 장엄하는 데에 따뜻함과 시원함을 꺼리지 않았다. 늘 뜻을
깨끗이 하고 더러움을 씻는 법을 실행함에 수건을 써서 닦지 않고 서서
마르기를 기다리며 멈추었다. 세 법의와 병과 발우 외에 다른 것은 전혀
없었다. 대개 제자들이 도움을 청하면 함부로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가라
앉는 때를 기다린 후에 깨우쳐 주었다. 의상은 이에 의문을 따라 막힌 것
을 풀어서 조금도 찌꺼기가 남지 않게 하였다.
湘講樹開花, 談叢結果, 登堂覩奧者, 則智通表訓梵體道身等
數人, 皆啄巨㲉, 飛出迦留羅鳥焉. 湘貴如說行, 講宣之外, 精
勤修練, 莊嚴刹海, 靡憚暄涼. 又常行義淨洗穢法, 不用巾帨,
立期乾燥而止. 持三法衣瓶鉢之餘, 曾無他物. 凡弟子請益, 不
敢造次, 伺其怡寂而後啟發. 湘乃隨疑解滯, 必無滓核.
75) 범체(梵體)는 의상스님의 직제자는 아니고 의상스님의 5세 법손(法孫)으로서 9
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76) 도신(道身)은『삼국유사』「의상전교 조의 10대 제자에는 들지 않으나 의상스
님의 강의를 기록한『도신장(道身章)』2권을 남겼다. 균여(均如, 923~973)스님의
저술에서는 대개 ‘도신(道申)’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로부터 구름처럼 떠다니며 정하지 않고 마음에 들 만한 곳이면 지팡
이를 꽂고 머물렀고 배우려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혹은 붓을
집어 큰 띠에 쓰기도 하고 분필을 품어 나무 잎에 쓰며, 가려 뽑은 글은 결
집과 같고 베낀 글은 말을 그대로 담은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의미의 문[義
門]은 제자를 따라 제목을 삼기도 하였는데『도신장(道身章)』77)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혹은 [강설한] 곳으로 이름을 삼았는데『추혈문답(錐穴
問答)』78)이라 하는 등과 같다. 여러 장소(章疏)는 모두 화엄성해(華嚴性海)
비로자나(毘盧遮那)의 가없는 경전의 의례(義例)를 밝혔다. 의상은 본국
(신라)에서 생을 마쳤으며 탑(塔)79)도 여기에 있다. 해동화엄(海東華嚴)의
초조(初祖)라고 불린다.
自是已來, 雲遊不定, 稱可我心, 卓錫而居, 學侶蜂屯. 或執筆
書紳, 懷鉛札葉, 抄如結集, 錄似載言. 如是義門, 隨弟子爲目,
如云道身章是也. 或以處爲名, 如云錐穴問答等. 數章疏, 皆明
華嚴性海毘盧遮那無邊契經義例也. 湘終于本國, 塔亦存焉.
號海東華嚴初祖也.
77)『도신장(道身章)』은 의상스님의 제자 도신스님이 의상스님의 강의를 기록한 책
이다. 의천스님의『신편제종교장총록』에는『일승문답(一乘問答)』이라는 제목
으로 실려 있다(韓4, p.682a10). 현재 전체가 전하지는 않고 균여스님의 저술에
40여 회,『법계도기총수록』에 10여 회 인용되었다.
78)『추혈문답(錐穴問答)』은 의상스님이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90일 동안 강의한
것을 제자 지통스님이 기록한『추동기(錐洞記)』를 가리킨다. 현재 전하지는 않
으나『화엄추동기(華嚴錐洞記)』,『추혈기(錐穴記)』,『지통기(智通記)』,『지통
문답(智通問答)』,『요의문답(要義問答)』등으로 불리면서『법계도기총수록』에
3회, 균여스님의 저서에 20여 회 인용되어 있다.『도신장』과 더불어 의상스님의
강의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므로 의상스님의 화엄 교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
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79)『송고승전』에서 탑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의상스님의 탑이 있었고 그에 따라 탑
비도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2. 균여스님 행장1)
대화엄수좌2) 원통양중대사3) 균여전 병서(大華嚴首坐圓通兩重大師均如傳序)
혁련정4 )지음
赫連挺 撰5)
1) 저본은『한국불교전서』제4책에 수록(pp.511a1~517a9)된「대화엄수좌원통양
중대사균여전병서(大華嚴首坐圓通兩重大師均如傳并序)」이다. 교감본으로 갑본은
『고려대장경』제47책에 수록(pp.259c1~262c13)된「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
여전병서(大華嚴首坐圓通兩重大師均如傳并序)」이다.『한국불교전서』에서는 갑본
을 저본으로 하였다. 이 번역에서「보현십원가」관련 부분(韓4, pp.513a7~516a19,
pp.515b3~516a10)은 제외하였다.
2) 수좌(首座)는 고려시대 승려의 법계(法階) 가운데 하나이다. 국.가에서 주재하
는 승과(僧科) 가운데 교종선(敎宗選)에 합격하면 대덕(大德)→대사(大師)→중
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를 거쳐 수좌(首座)와 승통(僧統)에 이르게
된다. 수좌와 승통에게는 국사(國師) 및 왕사(王師)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
다. 대덕부터 삼중대사까지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에 모두 해당되나, 이후
에 교종은 수좌와 승통으로, 선종은 선사와 대선사(大禪師)로 나뉘어진다. 조선
시대에는 이 수좌가 법계의 명칭으로 사용되지 않고 선원(禪院)에서 참선하는
스님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양중대사(兩重大師)는 고려시대 승려의 법계(法階) 가운데 하나로서 승과에 합
격하여 대덕과 대사를 거쳐 이르는 법계이다.
4) 혁련정(赫連挺, ?~1100~?)은 고려 중기의 학자로서 ‘혁련’은 성이고 ‘정’이 이름
이다. 균여의 전기『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병서』를 1074년(문종 28년)
4월부터 1075년 1월에 걸쳐 완성하였다.『고려사』에는 혁련정이 1100년 11월
요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토산물[方物]을 선사하였으며[『고려사(高麗史)』 권11,
세가 제11, 숙종 5년], 1105년 장락전 학사·판제학원사(長樂殿學士·判諸學院事)
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고려사』 권12, 세가 제12, 예종 1년]
5) 이 전기의 저자가 혁련정임을 밝히는「赫連挺撰」이라는 문구는 편찬자가 보충
해서 넣은 것이라고 저본의 각주에서 나타내고 있다. 서문에서는 창운대사의
부탁으로 혁련정 자신이 이 전기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다.(韓4 p.511a12-16)
헌나명〈[명(㗮)은] 명(名)과 경(庚)의 반절이다〉하(巘拏㗮賀)6) 십만 게송이 신
독(身篤)7)〈천축을 또한 신독이라고도 한다.〉에서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오직
용수(龍樹)8)로부터 연유했고, 부상(扶桑)9)에서 처음 시작된 것10)은 오직
의상으로부터 연유하였으며, 성조(聖朝)11)에서 앞장서 두루 화합시킨 것12)
은 오직 수좌(首座)13)로부터 연유하였다.
巘拏㗮〈名庚切〉賀之一十萬揭, 復興於身篤,〈天竺亦云身篤也.〉 職龍
樹之由, 濫觴乎扶桑, 職義相之由, 祖洽乎聖朝, 職首座之由.
6) 헌나명하[巘拏㗮賀]는 산스크리트어 ‘Gandavyūha’의 음역으로 건나표하(健拏
驃訶)라고도 한다. 잡화엄식(雜華嚴飾)의 뜻이며,『화엄경(華嚴經)』을 가리킨다.
법장(法藏, 643~712)은『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高47 p.471a19-24, 大35
p.121a9-15)에서 화엄(華嚴)의 호칭은 산스크리트어로「健拏驃訶」( Gandavyū
ha)이니,「健拏」는 잡화(雜華)를 이름하고「驃訶」는 엄식(嚴飾)을 이름한다고 밝
히고 있다. 또 징관(澄觀, 738~839)은『화엄경(華嚴經)』의 산스크리트어명을「摩
訶毗佛略勃陀健拏驃訶修多羅」( Mahāvaipulyabuddhagandavyūhasūtra)라고 밝히
고 이는『대방광불잡화엄식경(大方廣佛雜華嚴飾經)』에 해당하지만「雜」과「飾」
의 두 글자를 생략하고『대방광불화엄경』으로 사용한다고 설한다.[『화엄경행원
품소(華嚴經行願品疏)』(卍7, pp.511b16-512a1)] 종밀(宗密, 780~840)은 징관의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健拏驃訶」를「巘拏㗮賀」로도 표기하고 있다.[『화엄경행
원품소초(華嚴經行願品疏鈔)』(卍7, p.795a7-b3)] 현재『Gandavyūhasūtra』라는
제목으로 유통되는 산스크리트본은『화엄경(華嚴經)』가운데「입법계품」의 별행경
에 해당한다.
7) 신독(身篤)은 산스크리트어 Sindhu의 음역으로 신독(身毒), 신독(申毒), 천축(天
竺) 등으로도 쓰여진다. 본 뜻은 인도의 인더스(Indus) 강을 가리키지만 이 지역
주변의 나라, 도시 등을 뜻하는 말로 확장되면서 인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
었다. 현장(玄奘, 602?~664)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 천축(天竺)의 예전
호칭으로 신독(身毒), 현두(賢豆) 등을 소개하면서 지금은 바른 음을 따라서 인
도(印度)로 불러야 한다고 설한다.(高32 p.379a6-18, 大51 p.875b16-26) 한편 사마
천(司馬遷, BCE 145?~BCE 86?)의『사기(史記)』 권123「대원열전(大宛列傳)」에
「身毒國」이라는 나라가 소개되어 있는데, 이의 주석서인 사마정(司馬貞)의 『사
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身」의 음이「乾」이라고 하고 있다.
8)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는 인도 대승불교의 논사로서 중관학파의 시
조이며, 동아시아에서는 팔종(八宗)의 조사로 모셔진다. 화엄종에서는 용수보
살이 용궁에서『화엄경(華嚴經)』세 본을 보고 그 중 10만송 48품의 하본을 외워
서 가져와 인도에 전해 널리 유통시켰다고 한다.[법장(法藏),『화엄경전기(華嚴
經傳記)』(大5,1 p.153a27-b4); 징관(澄觀),『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
疏)』(大35, p.523a12-18)]
9) 부상(扶桑)은 해가 뜨는 나무를 의미하며, 신라와 고려가 위치했던 한반도를 가
리킨다. 중국의『산해경(山海經)』「해외동경(海外東經)」과『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등에 ‘해가 뜨는 나무’로서의 용례가 보이며, 9세기 이후에는
중국의 당시(唐詩)와 신라의『고운집(孤雲集)』「贈希朗和尙」, 고려의『삼국유사
(三國遺事)』「嵩福寺碑銘」 등에서 이를 신라나 고려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
고 있다.
10) 처음 시작된 것[濫觴]에서 濫觴은 술잔에 넘친다는 뜻으로서, 어떤 일의 시작이
나 기원을 가리킨다.『순자(荀子)』「자도(子道)」편 가운데 양자강 같은 큰 강도
그 처음은 겨우 잔에 넘칠 정도의 시냇물이지만, 나중에는 배를 띄우고 바람을
피해야만 건널 수 있다는 공자(孔子)의 말 중에 그 용례가 보인다.
11) 성조(聖朝)는 고려의 왕조를 가리킨다.
12) 앞장서 두루 화합시킨 것[祖洽]이란 의미의「祖洽」은『예기(禮記)』「중니연거
(仲尼燕居)」 가운데 예를 잃으면 곧 대중의 앞에 서서 화합시킬 수 없다는 문구
에 그 용례가 보인다.
13) 수좌는 균여스님을 가리킨다.
옛 서서원(瑞書院)의 학사(學士)14)〈당나라 관직〉 이철찬(夷喆飡)15)〈신라 관
직〉 청하공 최치원16)이 의상스님의 전기를 지었으나 유독 수좌의 행장만
이 빠졌으므로 일승행자(一乘行者)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고 나도 또
한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근래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17) 강유현(康惟
顯)18)이 수좌가 드러낸 흔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았는데 글은 곧 유려하
나 사실이 많이 탈락되었으므로 일승행자들이 이를 유감으로 여겼고 나
도 또한 유감으로 여겼다.
故瑞書院學士〈唐職〉, 夷喆湌〈新羅職〉, 淸河公致遠, 作相師傳,
獨首座之行狀闕焉, 一乘行者, 惜之, 予亦惜之. 近有殿中內給
事康惟顯, 集首座初終現迹, 文則遒麗, 事多脫略, 一乘行者,
憾之, 予亦憾之.
14) 서서원(瑞書院)의 학사(學士)는 서서원의 최고 지위이다. 서서원은 왕의 명령을
비롯한 대외문서를 관장하던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문한기구(文翰機構)로서,
주로 유학과 한문문장에 뛰어난 사람들이 등용되었다. 경덕왕(景德王) 대에 설
치된 한림대(翰林臺)가 약 1세기 후인 880년 경에 이름을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최치원이 신라로 귀국한 후에 서서원학사에 제수되었다는 기사는『삼국사기
(三國史記)』권46「최치원전(崔致遠傳)」,「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
大師寂照塔碑)」등에 나타난다.
15) 이철찬(夷喆湌)은 신라의 골품제(骨品制)에 의한 17 관등(官等) 중에서 두 번
째로 높은 ‘이척찬(伊尺飡)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척찬은 이찬(伊湌, 夷
粲)·이간(伊干)·일척간(一尺干) 등으로도 표기되며, 진골(眞骨)만이 될 수 있는
관등이다. 그러나 최치원은 신분이 육두품(六頭品)이었으며, 관등이 17 관등 중
여섯 번째로서 육두품의 최고관등인 아찬(阿飡)까지 올랐다는 기록만이 남아있
다.[『삼국사기』권11,「신라본기(新羅本紀)」진성여왕 8년조] 하지만 17 관등
중 다섯 번째인 대아찬 이상, 즉 진골만이 가능했던 자금어대(紫金魚帶)를 최치원
이 하사받았다는 기록 또한 여러 곳(『삼국사기』권46;「최치원전」;『계원필경
집(桂苑筆耕集)』;「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鷄寺眞鑒禪師大空塔碑)」;「봉암
사지증대사적조탑비」등)에 보인다. 한편 이철찬은 관등(官等)의 명칭으로서
직능을 가진 관직의 이름은 아니다.
16) 최치원(崔致遠, 857~?)은 신라 말기의 문장가, 학자로서 자는 고운(孤雲)이며 해
운(海雲)이라고도 한다. 868년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과거에 급제, 현위
(縣尉)와 도통순관(都統巡官) 등의 관직생활을 하였으며, 이때 벌써「토황소격
(討黃巢檄)」등의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885년에 귀국하여 병부시랑(兵部侍
郎) 및 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 등의 관직을 제수받고 아찬의 관등에까지 올라
혼란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시무10조를 건의하기도 하지만, 골품제의 한계와
당시 신라사회의 모순을 절감하고 은거를 결심한다. 이후 전국을 떠돌다가 만
년에는 모형(母兄)인 승 현준(賢俊) 및 정현사(定玄師)와 도우(道友)를 맺고 가
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머물렀다. 졸년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없으나, 그가 지은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에 의하면 908년
(효공왕 12) 말까지 생존했던 것은 분명하다. 평소 자신을 ‘유문말학(儒門末學)’
이라고 칭하면서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특히 화엄가와 선사들의 전
기와 비문을 많이 남겼다. 그중에 화엄가의 전기로는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
(일실)『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현존)『석순응전(釋順應傳)』(일실)·「석이정
전(釋利貞傳)』(일실) 등이 확인되고, 선사의 비문으로 지증(智證)·낭혜(朗慧)·
진감(眞鑑) 등 선승들의 탑비문(塔碑文)이 남아있으며 여기에「대숭복사비문
(大崇福寺碑文)」을 합하여 소위「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한다. 그외 저술
로는『계원필경(桂苑筆耕)』(현존)·『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일실) 등이 유명
하며,『동문선(東文選)』에 다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 현종(顯宗) 11년
(1020)에 공자묘에 위패가 모셔졌고, 현종 14년(1023)에 문창후(文昌候)로 봉해
졌다. 최치원에 대한 전기로는 『삼국사기』「최치원전」등이 참조된다.
17)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는 고려시대 관직명으로 전중성(殿中省)에 속하는 종6
품 벼슬이다. 전중성은 고려 전기 때 왕의 공상(供上) 및 친족의 보첩(譜牒)에 관
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이다.
18) 강유현(康惟顯)은『균여전』에 실린 이 기사 외에 현존 자료 가운데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에도『균여전』에만 보이는 인물이 있는 경우 별도로 표기하
지 않는다.
함옹(咸雍)19) 10년(1074) 초여름 달에 이르러『신중경(神衆經)』20)을 주석
한 대사 창운(昶雲)21)이 실록 고본 한 권을 보이며 나에게 전기 짓기를 부
탁하였다. 나는 좋다고 하였으나 티끌 그물[같은 세상사]에 끌리고 얽매어
뜻이 전력을 다하지 못하였다. 이에 달빛 아래에서 구상하고 등불 앞에서
글을 엮느라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지나서 그 이듬해 봄에 붓을 놓고
스스로 서(序)를 짓는다.
예전 진사 혁련정은 삼가 서문을 쓴다.
迨咸雍十年首夏之月, 神衆經注主大師昶雲, 示以實錄舊藁一
卷, 因托述於予. 予曰諾而塵網牽惹, 志未全功. 乃於月下搆
思, 燈前綴文, 緜秋涉冬, 明春絶筆, 自爲序云.
前進士赫連挺謹序.
19) 함옹(咸雍)은 요(遼) 도종(道宗)이 1065년부터 1074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20)『신중경(神衆經)』은『화엄경(華嚴經)』을 수지·독송하기 쉽도록『화엄경(華嚴
經)』에 나타나는 신중(神衆)을 중심으로 요약한, 라말여초에 만들어진 위경(僞
經)으로 추정된다.『균여전』「자매제현분(姉妹齊賢分)」에 균여스님이 그의 누이
에게『신중경』을 강설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며, 또한『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
錄)』권1 태조(太祖) 2년조에는 태조 이성계가 숙위군사들로 하여금 왕궁 뜰에
서『신중경』을 독송하게 하였다는 기사 등이 확인된다. 1921년에 작성된 해인사
「사간장경목록(寺刊藏經目錄)」에 대략 고려 고종37년(1250)에서 38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화엄신중경』목판 1권이 전해지고 있으나 『신중경』과의 동
일여부는 불분명하다.『화엄신중경』은『팔십화엄(八十華嚴)』을 기준으로 「세주
묘엄품(世主妙嚴品)」의 39류신중과「입법계품(入法界品)」의 53선지식의 명호를
뽑고 39품의 품명을 추가한 것이다.
21) 창운(昶雲, 1031~1104)스님은 속성이 ‘류(柳)’이고 8세에 화엄종으로 출가하여
승통에까지 이르렀다. 당시에 대덕으로 존숭받았으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
천(義天, 1055~1101)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문종(文宗, 1019~1083)과 선
종(宣宗, 1049~1094)에게 경전을 강설했으며, 예종(睿宗, 1079~1122)이 홍호사
(弘護寺)를 지을 때 주지로 추대되어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에 대한 기록으
로는「홍호사주지등관승통묘지명(弘護寺住持等觀僧統墓誌銘)」이 현존한다.
이제 장차 수좌의 행장을 지음에 열 문으로 나눈다. 첫째는 태어나신
영험의 부문이고, 둘째는 출가하여 이익을 청함의 부문이고, 셋째는 누
이와 동생[姉妹]이 모두 현명함의 부문이고, 넷째는 뜻을 세우고 근본을
정함의 부문이고, 다섯째는 여러 글을 해석함의 부문이고, 여섯째는 감
통과 신이의 부문이고, 일곱째는 노래를 펼쳐 세상을 교화함의 부문이
고, 여덟째는 노래를 번역하여 덕을 드러냄의 부문이고, 아홉째는 감응
으로 마라[魔]22)를 항복시킴의 부문이고, 열째는 변역생사(變易生死)23)의
부문이다.24)
今將述首座行狀, 分爲十門. 初降誕靈驗分, 二出家請益分, 三
姉妹齊賢分, 四立義定宗分, 五解釋諸章分, 六感通神異分, 七
歌行化世分, 八譯歌現德分, 九感應降魔分, 十變易生死分.
22) 마라(魔羅)는 산스크리트어 māra의 음역으로 죽임, 죽음을 뜻하며 살자(殺者),
탈명(奪命) 등으로 의역하고 악마(惡魔)라고도 한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선
행과 수도를 방해하는 존재 또는 행위를 가리킨다. 초기 경전에서는 부처님께
서 성도하시기 직전에 나타나 방해하고자 했던 마왕 파순(波旬)이 마라의 대
표적 존재이며[『잡아함경(雜阿含經)』(高18, pp.1105b4-1106b23; 大2, pp.
286b22-287c6)], 후대에는 사마(四魔)로 발전·정리된다. 사마는 첫째, 죽음의
근거인 오온을 가리키는 온마(蘊魔), 둘째, 번뇌로 인해 내생을 불러 태어나면
죽게 되므로 죽음의 원인이 되는 번뇌마(煩惱魔), 셋째, 죽음 그 자체인 사마
(死魔), 넷째, 선을 닦는 자가 앞의 세 마를 초월할 때 타화자재천의 마라가 그
것을 방해하는 것을 가리키는 천마(天魔)이다.[『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高15, p.711a14-711b7;大30, pp.447c17-448a02)] 『화엄경(華嚴經)』에
서는 이 사마를 바탕으로 열 가지 마를 설하고 있으니,『육십화엄(六十華嚴)』
에서는 그 열 가지를 오음마(五陰魔), 번뇌마(煩惱魔), 업마(業魔), 심마(心魔),
사마(死魔), 천마(天魔), 실선근마(失善根魔), 삼매마(三昧魔), 선지식마(善知
識魔), 부지보리정법마(不知菩提正法魔)로 설하고 있다.[『육십화엄(六十華
嚴)』(高8, p.291c7-13; 大9, p.663a6-b13);『팔십화엄(八十華嚴)』(高8,
p.788c14-20; 大10 p.307c10-17)]
23) 변역생사(變易生死, pārināmikī cyutih , pārināmika)는 삼계에서의 생사윤회를
여읜 이후 무여열반에 이르기 전까지의 생사를 일컫는 말로서, 삼계에서의 생사
윤회를 가리키는 분단생사(分段生死)와 함께 두 가지 생사를 이룬다. ‘변역’은
분단생사의 거칠고 하열한 몸을 변화하여 미세하고 미묘하여 몸의 형태, 수명
등에 한정을 갖지 않는 몸을 받기 때문이다.『승만경』에서는 이 변역생사가 아
라한, 벽지불, 대력보살(大力菩薩)이 받는 생이며, 변역생사하는 몸으로 오랫동
안 보살행을 닦아야 무상보리에 도달한다고 설한다.[『승만경』(高6, pp.1364c
24-1365a21; 大12 pp.219c20-220a8)]
24) 이 가운데 일곱째와 여덟째는「보현십원가」관련 부분으로서 이 부분은 번역에
서 제외하였다.
‘첫째, 태어나신 영험의 부문’이란 [다음과 같다.] 수좌의 속성은 변(邊)
씨이고 휘(諱)는 균여(均如)이다. 아버지는 성품이 밝고 뜻이 고상하였다
고 하나 이름을 알 수 없다.25) 어머니는 점명(占命)이라 한다. 일찍이 천우
(天祐)26) 14년(917) 4월 초 이렛날 밤 꿈에 암수 봉황이 모두 노란 빛깔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와 함께 품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천우] 20년
(923)에 이르니 점명의 나이 이미 60살이었는데도 능히 임신하여, 7개월
[二十一旬]을 채우고 이 해 8월 8일에 스님을 황주 북쪽에 있는 형악(荊岳)
남쪽 기슭의 자기 집〈둔대엽 마을이다〉에서 낳았다. 지금의 황주 판관이며
전 습유(拾遺)27)인 이준(李晙)이 그 옛터를 중수하고 이름하여 경천사(敬
天寺)28)라 불렀으니 바로 그곳이다.
‘初降誕靈驗分’者. 首座俗姓邊氏, 諱均如也. 父曰煥29)性尙
志, 亡名. 母曰占命. 甞於天祐十四年四月初七日夜, 夢見雄雌
雙鳳, 皆黃色, 自天而下, 並入已懷. 至二十載, 占命年已六十,
而能有身懷, 滿二十一旬, 以此年八月八日, 誕師于黃州之北
荊岳南麓之私第〈遁臺葉村〉. 今黃州判官前拾遺李晙, 重修舊址,
號曰敬天之寺, 卽其所也.
25) 혹은 균여스님의 부명(父名)을 ‘환성(煥性)’으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망명(亡
名)’은 본래 ‘입명(立名)’이었으나 활자가 마멸되어서 「立」이 「亡」으로 잘못 읽
힌 것으로 본다. ‘입명’은 이름을 크게 날렸다는 뜻이다.
26) 천우(天祐)는 당(唐) 소종(昭宗)과 경종(景宗)이 904년부터 907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907년에 당은 멸망하고 오대십국의 시대가 열리지만, 혁련정은 이 전
기에서 당의 이 마지막 연호를 실제 사용됐던 연도 이후에도 연장하여 사용하
고 있다.
27) 습유(拾遺)는 고려 전기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6품 관직으로 군주에 대한
간언(諫言)을 주요 기능으로 하는 간관직이다.
28) 경천사(敬天之寺)는 황주에 위치하였으므로 황해도 송도(지금의 개성시)에 위치
했던 십층석탑으로 유명한 경천사(敬天寺)와는 위치상으로 볼 때 다른 절로서,
황주의 경천사에 대해서는 이 전기 이외에 현존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29) 저본에는「」이지만 갑본에는「煥」의 이체자인「」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갑
본을 따랐다.
스님은 처음 태어났을 때, 용모가 너무 추하여 가히 견줄 이가 없었다.
부모는 꺼림칙하여 길 가운데 버렸더니, 두 마리의 까마귀가 날개를 가지
런히 연이어서 아이의 몸을 덮어주었다. 길 가던 사람이 그 신이함을 보고
서, 마침내 집을 찾아가 이 일을 자세히 얘기해주었다. 아버지는 뉘우치고
어머니는 한탄하며 거두어 길렀으나, 그 모습만은 꺼려하여 이내 상자 속
에 놓아두고 젖을 먹인 지[鬪穀]30)〈[투곡은] 젖을 먹인다는 뜻〉 여러 달 뒤에야
동리 사람들에게 보였다. 스님이 강보에 있을 때 원만게(圓滿偈)를 잘 읽
고, 무릇 아버지가 말로 가르쳐 주는 것을 열에 하나도 놓침이 없었다.
師始生, 容貌甚醜, 無可倫比. 父母不悅, 置諸街中, 有二烏比
翼連蓋兒身. 行路人見其異, 遂尋家而縷陳之. 父悔母恨而收
育焉, 而諱厥狀, 乃置笥鬪穀〈給乳之義〉數月而後, 示於鄕黨. 師
在襁褓, 善讀圓滿偈, 凡父口授, 十無一失者也.
30) 투곡(鬪穀)은 젖을 먹인다는 뜻의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말로서, 그 예가『춘
추좌전(春秋左傳)』선공(宣公) 4년조에 보인다.(楚人謂乳穀 謂虎於菟. 故命之曰鬪
穀於菟.)
‘둘째, 출가하여 이익을 청함의 부문’이란 [다음과 같다.] 스님은 어려서
홀로 되었다. 배움에 뜻을 둘 나이[志學之歲]31)에 이르자 사촌형인 스님
선균(善均)을 따라 부흥사(復興寺)32)에 나아가 식현(識賢)화상을 뵙고 그
를 모시며 공부하였다. 그 가르치는 이의 그릇이 가르침을 받는 이의 기틀
보다 모자라니, 비록 [한] 삼태기의 흙이라도 높이 쌓아 이루는데 사양하
지 않지만 [한] 잔의 물이 어찌 큰 갈증을 없앨 수 있겠는가?
‘第二出家請益分’者. 師少而孤. 及志學之歲, 隨堂兄僧善均,
往詣復興寺, 謁識賢和尙, 事之隸業. 其乃能訓之器, 劣於所訓
之機, 雖簣塵不讓於成高, 而盃水豈蠲於大渴.
31) 배움에 뜻을 둘 나이[志學之歲]는 15세를 가리키는 말로『논어(論語)』「위정(爲
政)」편에 그 용례가 보인다. 균여가 15세 되는 해는 937년이다.
32) 부흥사(復興寺)는 고려시대 황해도 우봉현(牛峯縣, 지금의 김천군) 남쪽에 있던
절로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42 황해도 우봉현 편)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 때에 영통사(靈通寺)33) 의순공(義順公)이 도량이 큰 종과 같아서 묻
는 자를 잘 맞이하니, 이 때문에 사방의 배우려는 사람들이 안개처럼 모여
들어 저자를 이루었다. 스님의 구하는 마음이 마치 바람[塊噫]34)이 범[於
菟]35)을 대하는 것〈바람이 범을 따른다는 뜻이다.〉과 같아서, 날마다 황혼이 깃
든 뒤 식현화상이 얼핏 잠에 드는 저녁을 기다려 몰래 영통사에 찾아가
배우기를 청하고 새벽 무렵에 돌아와 스스로 죽을 받들어 공양을 올렸다.
于時靈通寺義順公, 量如洪鍾, 善待問者, 是以四方義學, 聚
成霧市. 師相求之心, 若塊噫之於於菟〈, 風從虎之意.〉 每日黃昏
之後, 俟識賢假寐之夕, 潛詣靈通寺請益, 方曉而返, 親自奉
粥奉供.
33) 영통사(靈通寺)는 고려 현종 18년(1027) 황해도 송도 인근 오관산(五冠山)에 창
건되어 대각국사 의천이 출가하고 고려의 역대 왕들이 자주 행차한 영통사와는
창건연대로 볼 때 다른 절로 추정된다. 의순공이 주석했던 영통사에 대해서는
이 전기 이외에 현존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식현화상은 짐짓 그 뜻을 알았으나 다스려 막을 수 없는지라 얼마 후
의순공에게 가기를 허락하였다. 스님이 그곳을 떠나 이곳으로 오니 일이
원대로 이루어졌다. 그 뒤부터 가르침의 바다에서 깊이 퍼올리고,〈[구(㪺)
의] 음은 구(俱)이니 퍼올리는 것[斟]이다.〉 뜻의 하늘에서 높이 빛났다. 어느 때
양식이 7일 동안이나 떨어져 끼니를 굶은 적이 열 번을 넘었으나, 일찍이
한 순간도 싫어서 물러갈 생각을 내어 배움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識賢密認其意, 乃理不能遮, 尋許投于順公, 師去彼就此, 事與
願契. 自爾之後, 深㪺〈音俱, 斟也.〉敎海, 險掞義天. 于時匱粮七
日, 不食者十度許, 曾無一念而生厭退以怠於學也.
‘셋째, 누이와 동생이 모두 현명함의 부문’이란 [다음과 같다.] 스님이 오
랫동안 절[練若]36)에 있다가 고향집이 생각났다. 드디어 돌아가 가족을 만
나보고 수명(秀明)과 지혜를 겨루었다. 첫째인 수명은 스님보다 3년 먼저
태어났는데, 이 해가 천우 17년(920)이었다. 그녀는 날 때부터 우는 것이
절도가 있더니, 장성해서는 총명함이 견줄 이가 없었다.
‘第三姊妹齊賢分’者. 師久居練若, 係戀庭闈. 遂歸覲親顔, 與
秀明鬪智. 初秀明, 先師三年而生, 是歲天祐十七年也. 女生而
啼呼者有節, 長則聰悟絶倫.
36) 난야(練若)는 아란야(阿蘭若)의 줄임말로서, 산스크리트어 āranya의 음역이다.
본래는 수행하기에 적합한 ‘한적한 숲’을 의미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숲과 함
께 사찰도 의미하게 되었다.
일찍이 탁발하는 스님이 집에 와서『법화경(法花經)』37)을 독송하였는데,
그녀는 안에서 이를 듣고 바로 신심을 냈다. 그래서 자리를 마련하여 스님
을 맞이하고 마저 독송하기를 청하니, 스님이 8권을 다 독송하였다. 이에
하룻밤 머무르며 경의 뜻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니, 무릇 귀로 들은 바를
조금도 놓치는 것이 없었다. 스님은 떠나면서 그녀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
는 곧 보리유지(菩提留支)38) 삼장이고, 너는 덕운비구(德雲比丘)39)의 화신
이다.”라고 하였다.
甞丐僧到舍, 讀法花經, 女自內聽之, 便生信焉. 因設席迎僧,
請爲了讀, 僧讀八卷畢. 仍請一宿敷暢經旨, 凡所耳湌, 片無
遺漏. 僧行謂女曰,“ 我卽菩提留支三藏也, 汝是德雲比丘化
身耳”.
37)『법화경(法花經)』은 여기에서 8권본이므로 현존하는 한역본 가운데 구마라집
(鳩摩羅什, Kumārajiva, 344~413, 또는 350~409)이 406년에 8권으로 한역(漢譯)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Saddharmapund 3 3 arīka-sūtra)』을 가리킨다.
38) 보리유지(菩提留支 또는 菩提流支, Bodhiruci, ?~508~?)는 북위(北魏) 때 중국에
들어와 역경에 종사한 북인도 출신의 스님으로, 도희(道希), 각애(覺愛) 등으로
의역되었다. 북위 선무제(宣武帝) 때인 영평 원년(508)에 낙양에 와서『십지경
론』,『묘법연화경우파제사(妙法蓮華經憂波提舍)』(또는『법화경론(法華經論)』),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등 39부 127권을 한역하였으며, 또한 반만교(半滿敎)
와 일음교(一音敎)의 교판을 세우기도 하였다.
39) 덕운(德雲, Meghaśrī)비구는『팔십화엄(八十華嚴)』「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
가 문수보살의 권유에 의해 역참하는 선지식 중 첫번째 선지식으로, 공덕운비
구(功德雲比丘)(60권), 길상운비구(吉祥雲比丘)(40권)라고도 한다. 선재동자는
문수보살과 헤어져 승낙국 묘봉산에 있는 덕운비구로부터 ‘모든 부처님의 경계
를 생각하여 지혜의 광명으로 두루 보는 법문[憶念一切諸佛境界智慧光明普見
法門]’을 듣고 염불(念佛) 해탈문을 얻고 나서 계속 선지식을 찾아 구법행을 이
어나간다.[『팔십화엄(八十華嚴)』(高8, pp.815c25~817a10; 大10 pp.334a9~
335a3)]
또 스님이 돌아가서 만난 날 수명은 그 익힌 것[業]을 들려달라고 청했
다. 스님은 보현·관음 두 선지식의 법문과『신중경(神衆經)』과『천수경(千
手經)』의 두 경문을 강설하였다. 말[三寸]로 설한 것을 한 글자도 놓치는
것이 없었다. 스님이 또 초저녁에 화엄육지(華嚴六地)의 뜻 약 5백 문답을
외었더니 수명은 엿듣고 바로 깨달았다. 5년 후에 손으로 써보기를 청하
자 자기가 깨달은 것을 한 문장 한 구절도 빠뜨리거나 의심스러워하는 것
이 없었다.
及師歸覲之日, 秀明請聞其業. 師講普賢觀音兩知識法門神衆
千手二經文. 三寸所宣, 一字無失. 師又於初夜, 念諷華嚴六地
義約五百問答, 秀明偸聽頓悟. 至後五年, 請書手記, 己所悟,
一文一句, 無闕疑也
‘넷째, 의미를 세우고 근본을 정함의 부문’이란 [다음과 같다.] 스님은 북
악의 법손이다. 옛날 신라 말엽에 가야산 해인사에 두 분의 화엄의 대가
가 있었다. 첫째는 관혜공(觀惠公)40)이라 하니 백제의 우두머리 견훤(甄
萱)의 복전이었고, 둘째는 희랑공(希朗公)41)이라 하니 우리 태조대왕(太祖
大王)42)의 복전이었다. 두 분은 신심을 받아들여 향을 사르며[香火] 원을
맺기를 청하였으나, 원이 이미 달랐으니 마음이 어찌 하나이겠는가! 내려
가 문도에 이르러서는 점점 물과 불이 되어 법의 맛에 비유하면 각각 시
고 짠 맛을 받았으니, 이 폐단을 제거하기 어려움은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
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관혜공의 법을 이은 문도[法門]를 일컬어 남악이
라 했고, 희랑공의 법을 이은 문도[法門]를 일컬어 북악이라 했다.
‘第四立義定宗分’者. 師北岳法孫也. 昔新羅之季, 伽耶山海
印寺有二華嚴司宗. 一曰觀惠公, 百濟渠魁甄萱之福田, 二日
希朗公, 我太祖大王之福田也. 二公, 受信心請結香火願, 願旣
別矣, 心何一焉! 降及門徒, 浸成水火, 況於法味, 各稟酸醎,
此弊難除, 由來已久. 時世之軰, 號惠公法門爲南岳, 號朗公法
門爲北岳.
40) 관혜공(觀惠公, ?~?)은 신라 말기 화엄종의 승려로서, 후백제 견훤(甄萱)으로부
터 크게 존경을 받았다. 지리산 화엄사에서 『화엄경(華嚴經)』의 깊은 뜻을 널리
선양하여 그의 학파를 남악(南岳)이라고 하였다.
41) 희랑공(希朗公, 889~956)은 신라 말·고려 초의 화엄종의 승려로서, 고려 태조
의 귀의를 받았다. 희랑과 그 문도들이 북악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활동하
여 그의 학파를 북악(北岳)이라고 하였다.『가야산해인사고적기(伽耶山海印寺古
籍記)』에는 신라말기 왕건이 후백제의 왕자 월광(月光)과 싸울 때 도저히 적수
가 되지 못하자 화엄신중삼매를 얻은 희랑에게 부탁하니 희랑이 용적대군야차
왕(勇敵大軍夜叉王)을 보내자 금갑(金甲)을 입은 신병이 공중에 가득하여 월광
이 이를 보고서 항복하였다는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현재 가야산 해인사에는
희랑이 주석했다고 전해지는 희랑대와 10세기 중엽 목조로 조성된 희랑조사상
이 현존한다.
42) 태조대왕은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 877~943)을 가리킨다.
스님은 남북의 종취의 모순을 분간하지 못함을 매번 탄식하고 많은 갈
래를 막아 한 길로 가리켜 돌리고자 했다. 수좌 인유(仁裕)와 더불어 명산
을 두루 다니기를 함께 좋아하며, 불문[玄肆]에 노닐다가 큰 법의 북을 울
리고, 큰 법의 깃발을 세워 불문[空門]의 젊은 스님들을 모두 가르침에 따
르도록 했다.
師每嘆南北宗趣矛楯未分, 庶塞多歧, 指歸一轍. 與首座仁裕
同好遊歷名山, 婆娑玄肆, 振大法鼓, 竪大法幢, 盡使空門幼
艾, 靡然向風.
또 화엄의 가르침 가운데 앞선 분들이 30여 가지 뜻을 뽑은 글이 있었
으니, 그 명목은 세 가지 가르침의 위하는 대상[三敎所爲], 동체의 공·유
[同體空有], 다함과 다하지 아니함[盡不盡], 방편과 진실[權實], 화장세계
의 설[華藏說], 국토 바다를 이룸[成土海], 힐난을 밝힘[明難], 찬탄과 찬탄
하지 않음[歎不歎], 세 가지 생[三生], 체를 섭수함[攝體], 직무를 줌[授職],
육상(六相), 진실[實]에 나아가고 진실을 근본으로 함[就實本實], 장애를
끊음이 적음[斷障微少], 도솔천자(兜率天子), 다섯 가지의 성불[五種成佛],
해불과 행불[解行佛], 분상[分相], 흘러나옴과 지목함[流目], 마음을 돌이
킴[廻心], 육지(六地), 팔회(八會), 백육성(百六城), 정토(淨土), 보리수(菩
提樹), 성기(性起), 다섯 과보[五果], 사구(四句), 널리 공양을 닦음[廣修供
養], 주(主)와 반(伴)에 대한 장(章) 등이었다.
又華嚴敎中, 有先公鈔三十餘義記, 其名曰, 三敎所爲, 同體空
有, 盡不盡, 權實, 華藏說, 成土海, 明難, 歎不歎, 三生, 攝體,
授職, 六相, 就實本實, 斷障微少, 兜率天子, 五種成佛, 解行
佛, 分相, 流目, 廻心, 六地, 八會, 百六城, 淨土, 菩提樹, 性
起, 五果, 四句, 廣修供養, 主伴章等也.
스님은 원류로 삼는 것이 곧 달라서 뒤섞여 어긋난 것이 파다하니, 글이
번쇄한 것은 요긴한 것만 뽑고 깎아냈으며, 뜻이 미묘한 것은 상세히 궁구
하여 그것을 드러내었다. 모두 부처님의 경과 보살의 논을 인용하여 증거
로 삼았으니, 곧 일대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모두 헤아려 보았다.
師以爲源流則別, 踳駁頗多, 丈之煩者, 撮要而刪之, 意之微
者, 詳究而現之. 皆引佛經菩薩論以爲證, 則一代聖敎斟酌
盡矣.
국가에서 왕륜사(王輪寺)43)에 승과[選席]를 크게 열어 불문[空門]의 급
제자를 뽑아 취함에 이르러서는 곧 우리 스님이 뜻한 길로 정통을 삼았고,
나머지는 방계로 했으니, 무릇 재주와 이름 있는 무리들이 어찌 이 길을
말미암지 아니하였으랴. 크게는 지위가 왕사, 국사까지 취하였고, 작게는
위계가 대사, 대덕에 이르렀으며, 홀로 몸을 드날리고 홀로 자취를 드러낸
이에 이르러서는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洎國家大啓選席於王輪寺, 擢取空門及第, 則以吾師義路爲正,
餘旁焉, 凡有才名之軰, 何莫由斯途也. 大者, 位取王師國師,
少者, 階至大師大德, 至於揭獨身拔獨迹, 不可勝數矣.
43) 왕륜사(王輪寺)는 개성 송악산(松岳山) 고려동(高麗洞) 죽선대(竹仙臺) 입구에
있었던 절로서, 고려 태조가 919년(태조 2)에 창건한 십찰(十刹) 중의 하나이다.
이 절은 교종(敎宗) 승려들의 승과장(僧科場)으로서, 여러 국사들이 이곳에서
응시하여 승직에 오르는 등 고려 교종 승려들의 등용문이기도 하였다.
‘다섯째, 여러 글을 해석함의 부문’이란 [다음과 같다.] 스님이 세상에 계
실 때 불법을 널리 펴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임무로 삼
았다. 만약 여러 불가(佛家)의 문서에 자세히 알기 쉽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위하여 주기와 해석을 지었다. 그러므로『수현방궤기(搜玄
方䡄記)』44) 10권,『공목장기(孔目章記)』45) 8권,『오십요문답기(五十要問答
記)』46) 4권,『탐현기석(探玄記釋)』47) 28권,『교분기석(敎分記釋)』48) 7권,『지
귀장기(旨歸章記)』49) 2권,『삼보장기(三寶章記)』50) 2권,『법계도기(法界圖
記)』51) 2권,『십구장기(十句章記)』52) 1권,『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53)
1권이 있어 모두 당대에 유통되었다.
‘第五解釋諸章分’者. 師之在世, 以洪法利人, 爲己任. 若有諸
家文書未易消詳者, 必爲之著記釋. 故有搜玄方䡄記十卷, 孔
目章記八卷, 五十要問答記四卷, 探玄記釋二十八卷, 敎分記
釋七卷, 旨歸章記二卷, 三寶章記二卷, 法界圖記二卷, 十句章
記一卷, 入法界品抄記一卷, 並行於代.
44)『수현방궤기(搜玄方䡄記)』는 지엄(智儼, 602~668)이『육십화엄(六十華嚴)』을 주
석하여 지은『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
軌)』를 균여가 주석한 것이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45)『공목장기(孔目章記)』는 지엄이『화엄경(華嚴經)』의 강요를 뽑아 풀이한『화엄
경내장문등잡공목(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을 균여가 주석한 것이지만, 현존하
지 않는다.
46)『오십요문답기(五十要問答記)』는 지엄이 화엄의 주요교설을 50여 가지 문답으
로 정리한『화엄오십요문답(華嚴五十要問答)』을 균여가 주석한 것이지만, 현존
하지 않는다.
47)『탐현기석(探玄記釋)』은 법장이『육십화엄(六十華嚴)』을 주석하여 지은『화엄
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를 균여가 주석한 것이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48)『교분기석(敎分記釋)』은 법장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교(五敎)로 나누어서 비
교·분석하고 화엄교의 주요내용을 상세하게 풀이한『화엄일승교의분제장(華
嚴一乘敎義分齊章)』을 균여가 주석한 것으로서,『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教
分記圓通鈔)』(10권)라는 제목으로『고려대장경』권47에 실려 있다.
49)『지귀장기(旨歸章記)』는 법장이『화엄경(華嚴經)』의 취지를 열 가지로 풀이한
『화엄경지귀(華嚴經旨歸)』를 균여가 주석한 것으로서,『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
華嚴旨歸章圓通鈔)』(2권)라는 제목으로『고려대장경』권47에 실려 있다.
50)『삼보장기(三寶章記)』는 법장이 화엄종의 주요교설 중 다섯가지 주제에 대해서
『육십화엄(六十華嚴)』의「명법품(明法品)」을 중심으로 풀이한『화엄경명법품내
립삼보장(華嚴經明法品內立三寶章)』을 균여가 주석한 것으로서,『화엄경삼보장원
통기(華嚴經三寶章圓通記)』(2권)라는 제목으로『고려대장경』권47에 실려 있다.
51)『법계도기(法界圖記)』는 의상이『육십화엄(六十華嚴)』의 핵심 교의를 담아 낸
『화엄일승법계도』를 균여가 주석한 것으로서,『일승법계도원통기』(2권)라는 제
목으로 동국대학교 소장의 필사본 등이 현존한다.
52)『십구장기(十句章記)』는 지엄이 『화엄경(華嚴經)』의 요체를 간추린 열 구절을
의상의 법손 법융이 주석하여『십구장』을 지었고 이를 균여가 다시 주석한 것
으로서,『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라는 제목으로『고려대장경』권47에 실
려 있다.
53)『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는 지엄이『화엄경』「입법계품」을 주석하여 지은
『입법계품기』를 균여가 주석한 것이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여섯째, 감통과 신이의 부문’이란 [다음과 같다.] 건우(乾祐)54) 2년(949)
4월 그믐날, 대성대왕(大成大王)55)의 대목황후(大穆皇后)56)의 옥문(玉門)
에 종기가 나서, 이를 의원에게 보일 수가 없으므로, 스님의 스승 의순공
을 불러 법약으로 그녀를 구하도록 청했다. 의순공은 능히 그 고통을 대신
함으로써 황후를 낫게 했으나, 의순공은 그 병을 대신 앓게 되었다. 병이 7
일 동안 위중해져서 스스로 나을 수 없었다. [균여]스님이 향로를 받들고
주문을 외우며 기원하니, 종기는 저절로 홰나무 서쪽 가지에 옮아가 붙었
다. 홰나무는 스님의 처소 동쪽 모퉁이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말라죽었
다. 청녕(淸寧)57) 연간에 이르러서도 그루터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第六感通神異分’者. 乾祐二年四月晦, 大成大王大穆皇后玉
門生瘡, 不可以示之於毉, 召師之師順公, 請以法藥救之. 順公
因能代苦, 使皇后立差, 順公代病其病. 病革七日, 不自免焉.
師奉香爐呪願, 瘡自移著於槐樹之西柯. 槐在師房東隅, 因爾
而枯. 至淸寧中, 株杌尙存.
54) 건우(乾祐)은 오대십국 시대 후한(後漢)의 은제(隱帝)가 948년부터 950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55) 대성대왕(大成大王)은 고려의 제4대 왕 광종(光宗, 925~975)을 가리킨다. 재위기
간은 949년부터 975년까지이며 이름은 소(昭), 자는 일화(日華)이다. 고려 태조
의 아들이며, 모후(母后)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劉氏)이고, 제2
대 왕 정종의 친동생으로 정종의 선위를 받아 왕이 되었다. 비는 대목왕후 황보
씨(大穆王后皇甫氏)와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林氏)이다.
56) 대목황후(大穆皇后, ?~956~?)는 광종의 비(妃)이다. 태조 왕건과 신정왕후의 딸
이며, 제5대 왕 경종의 모후이다. 성과 본관은 외가를 따라 황주 황보(黃州 皇甫
氏)이며 정식시호는 안정선명의정신경공평정예대목왕후(安靜宣明懿正信敬恭平
靜睿大穆王后)이다.
57) 청녕(淸寧)은 요(遼) 도종(道宗)이 1055년부터 1064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광순(廣順)58) 3년(953)에 송나라 사신이 와서 대성대왕을 책봉하려 하였
다.59) 왕이 관리들[有司]에게 명하시어 각기 그 직무를 명백히 하게 하였
다. 3월에 준비를 갖추고 막 책봉을 받으려 하는데, 때마침 장마가 그치지
않으므로 책봉의 예[禮命]를 행함에 지장이 있었다. 사신[西使]이 말하기
를, “이 나라[東國]에 반드시 성인(聖人)인 사람이 있을 터인데 어찌 그로
하여금 날이 개도록 기원하게 하지 않습니까? 하늘이 만약 개이면 나는
성현의 영험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광종이 이 말을 듣고 근
심에 잠겨 잠 못 들고 앉아 있으니, 허공 중에 소리가 있어 외쳐 말하기를,
“대왕은 장차 근심하지 마십시오. 내일이면 반드시 해당(海幢)60)의 설법을
들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즉시 뜰로 나가 위를 바라보았으나
어둑어둑하고 흐릿하여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廣順三年, 宋朝使至, 將封大成大王. 王命有司, 各揚厥職. 三
月蕆事, 方臨受策, 會愁霖不止, 禮命阻行. 西使謂,“ 東國必
有聖人者在, 何不使之祈晴, 天若晴明, 吾以爲聖賢之驗.” 光
宗聞之, 愁坐輟寢, 有空聲唱言,“ 大王且莫愁惱, 明日必聞海
幢說法.” 上卽出庭仰睇, 溟濛無迹.
58) 광순(廣順)은 오대십국 시대 후주(後周)의 태조(太祖)가 951년부터 954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59)『고려사』「세가」광종 4년(953)조에는 후주에서 왕연(王演)과 여계빈(呂繼贇)
등을 보내 광종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953년(광순 3년)은
아직 송(宋)이 건국되기 이전이다. 당시 중국은 중원의 후주(後周)와 북방의 요
(療)로 양분되어 있었다.
60) 해당(海幢, Sāgaradhvaja)은 40권 『화엄경(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
品」)에서 선재동자가 역참(歷參)하는 선지식 중 여섯 번째 선지식이다. 해당비
구는 염부제반(閻浮提畔)의 변무구(遍無垢) 나라에서 평등청정보장엄삼매(平等
淸淨普莊嚴三昧門)의 해탈문을 성취하고 본인이 성취한 이 해탈 경계를 선재동
자에게 설한다.(高36, pp.33b3-39c11; 大10, pp.688b18-693c3) 변무구는『육
십화엄(六十華嚴)』(高8, p.324a7; 大10, p.695a24-25)에서는 장엄염부제정(莊
嚴閻浮提頂)로,『팔십화엄(八十華嚴)』(高8, p.823b18; 大10, p.340a22)에서는
마리가라(摩利伽羅)로 번역되어 있으며, 현존 산스크리트본에는 mālikāra로 되어
있다.
다음날 아침 성스럽고 어진 스님을 찾아 법석에 맞이하려 하였으나 승
려 가운데 뛰어난 대덕들은 모두 사양하며 피하였다. 그때 국사 겸신(謙
信)이 아뢰어 스님을 천거하였다. 스님은 그때 젊었으나 나라의 부름을 받
아 코끼리 같이 [천천히] 걸어서 편안히 사자좌에 올라가서 원만한 음성
으로 한 번 연설하니 우뢰와 번개가 사라지고 잠깐 사이에 구름이 걷히며
바람이 잔잔해지고 하늘이 밝아지며 해가 나타났다.
詰旦欲索聖賢僧以邀法席, 緇班彦碩, 悉辭避焉. 時國師謙信
秦薦師. 師時年少, 受國請, 象步安詳升師子座, 圓音一演, 雷
電潛藏, 須臾之間, 雲卷風怗, 天明日出.
이 때 임금이 극진히 공경하여 아홉 번 절하는 예를 행하고는 스님이
태어난 곳을 물으니, 황주 북쪽의 둔대엽촌이 비구의 고향이[라고 하였
다.] 임금은 용과 이무기가 태어나는 곳이 큰 연못에서만은 아니니, 충신
이 어찌 열 가구의 [마을]에는 없겠는가라고 하였다.61) 얼마 후, 스님을 책
봉하여 대덕으로 삼고 아울러 칙령으로 속가의 권속 10여 인에게 사람마
다 밭 25경(頃)과 남녀 노비 각각 5명씩을 하사하여 황주의 성안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是時, 萬乘珍敬, 禮加九拜, 因問師之誕所, 黃州北鄙遁臺葉
村, 是比丘桑梓也. 上以爲龍虵之生非大澤, 忠信寧無十室. 尋
封師爲大德, 兼勑俗眷十有餘人, 人賜田二十五頃, 藏獲各五
人, 俾徙居于黃州城內.
61) 이 구절은『춘추좌전(春秋左傳)』양공(襄公) 21년조의 “깊은 산과 큰 연못은 실
로 용과 이무기를 낸다(深山大澤,實生龍蛇)”는 구절과『논어』「공야장(公冶
長)」편의 “열 가구의 마을에도 반드시 나(공자)처럼 충성되고 믿음직한 사람이
있을 것이나 나처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十室之邑,必有忠
信如丘者焉,不如丘之好學也.]”라는 구절을 연결하여 말한 것이다.
현덕(現德)62) 5년(958) 불일사(佛日寺)63) 내에 벼락친 곳이 있어서, 그
변괴를 없애고자 하니 반드시 큰 법력에 의지해야 하므로 스님에게 강연
하도록 청하여 밤낮에 걸쳐 약 21일 동안 이어졌다. 그 묻고 대답함에 인
(仁)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않을 것64)을 뜻으로 삼았다. 모임 가운데 오현
(悟賢)65) 철달(徹達)〈철달은 지금의 승통이다.〉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생각을
했다. ‘강주가 비록 명민하나 아직 후배이고 내가 비록 재주가 없으나 그
래도 선배인데, 어찌 문답하는 사이에 겸손과 사양의 예절을 고려하지 않
는가!’
現德五年, 佛日寺內, 有霹靂所, 欲禳怪, 須憑大法, 請師講演,
緜晝貫夜, 約三七日. 於其問對, 以當仁不讓爲意. 會中有悟賢
徹達,〈徹達現今之僧統.〉 作如是念. “講主雖敏, 猶是後生, 餘雖不
才, 尙爲先軰, 何於問話之間, 不顧謙辭之禮!”
62) 현덕(現德)은 오대십국 시대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 954년부터 959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63) 불일사(佛日寺)는 개성 동쪽 보봉산에 있었던 절로서, 951년(광종2년)에 광종이
어머니 유씨(劉氏)의 원당으로 창건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의『신증동국여지승
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이 절이 현존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
이후에 폐허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64)『논어(論語)』「위령공(衛靈公)」편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인(仁)에 철저할 것을
당부하는 “인(仁)에 있어서는 스승께도 양보하지 않는다(當仁不讓於師)”라는 구
절이 있다.
65) 오현(悟賢)은『균여전』에 실린 이 기사 외에 현존 자료 가운데 관련기록이 보이
지 않지만 본문에 본문에 균여가 후배이고 의상이 선조라고 하는 점 등으로 미
루어 볼 때 의상계 화엄의 승려로 보인다.
이미 불만이 생겨서 막 비방하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어떤 거사가 와서
말하기를, “당신은 시기하고 원통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의 강사는
당신의 선조 의상스님의 일곱 번째 화신입니다. 큰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
한 까닭에 다시 인간 세계에 오신 것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오현이 듣고
는 놀라 이에 대중에게 전하고 참회하여 말하기를, “내가 잘못을 알았다.”
라고 하였다.
旣是生慊, 殆欲興謗, 無何, 有居士, 至止謂曰,“ 你不須嫉恨.
今日講師是你先祖義相第七身也. 爲欲弘宣大敎故, 復來人間
耳.” 悟賢聞已, 驚愕, 乃傳言於衆海, 懺之曰,“ 吾知過矣.”
스님이 내도량(內道場)66)에 이르니, 밤중에 뻗쳐오르는 빛이 방안에서
부터 밖으로 쏜살같이 나가 흡사 무지개가 사리지기 직전 같았다. 임금이
그 빛을 보고 시자에게 가서 그것을 알아보라고 명하였다. 보고하여 말하
기를, “스님의 안광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스님의 처소에 행차하여
묻기를, “무슨 법을 닦아서 이와 같이 되었습니까?”라고 하였다. 답하기
를, “빈도에게 특별한 수행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에 불경[을 놓
아두는] 탁상 위에 염주 한 꾸러미가 있었는데 저절로 공중에 날아올라 스
님을 세 바퀴 돌고 멈추었다. 임금께서 이에 더욱 존경하시니 총애가 고금
에 없었다.67)
師赴內道場, 夜半有逸光, 自房內射外, 如流虹之未滅者. 上
望其光, 命侍人往尋之. 報云,“ 師之眼光也.” 上幸師所, 問曰,
“修行底法, 獲致如此?” 答曰, “貧道無勝行.” 于時經几上, 有
數珠一索, 自然騰空, 遶師三匝而止. 上乃敬重寵絶古今.
66) 내도량(內道場)은 고려시대 및 조선 초기까지 대궐 안에 있던 법당을 말한다.
67) 이후 일곱째와 여덟째의「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관련 부분은 번역에서 제외
하였다.(韓4, pp.513a7~516a19, pp.515b3~516a10)
‘아홉째, 감응으로 마라를 항복시킴의 부문’이란 [다음과 같다.] 개보(開
寶)68) 연간에 귀법사(歸法寺)69) 승려 정수(正秀)는 법관에게 나아가 헐뜯
어 말하기를, “균여스님은 딴 마음을 먹고 수행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
다. 법관은 그 사실을 [위에] 아뢰었다. 광종은 이것을 듣고 노하여 스님을
빨리 불러오게 하고, 들어오면 그를 해하려 하였다. 스님이 대왕의 처소에
와서 황송해하며 땅위에 엎드렸다. 임금은 그 모습을 보고서 정직하다고
여겨서 칙령을 바꾸어 의원 두 사람을 시켜 그를 호송하게 하고, 조금 뒤
에 승선(承宣)70) 설광(薛光)을 내려보내 절에 가서 위로하게 하였다.
‘第九感應降魔分’者. 開寶中, 歸法寺僧正秀, 詣法官, 讒搆
曰, “如師有異情修行.” 官奏其事. 光宗聞之, 怒促召師, 入欲
害之. 師及御所, 惶懼仆地. 上見其狀以爲直, 翻勑毉者二人,
護送之, 尋差降承宣薛光, 到寺慰撫.
68) 개보(開寶)는 송(宋)의 태조(太祖)가 968년부터 976년까지 사용한 연호이다.
69) 귀법사(歸法寺)는 963년(광종 14)에 광종이 대원(大願)을 세워 송악산 아래에 지
은 국찰(國刹)이다. 균여가 이 절의 초대 주지를 맡았으며, 또한 이 절에서 입적
하였다. 이 절은 광종 이후 목종·선종·의종 등 여러 왕의 행차가 잦았으며, 중
요한 법회 의식이 거행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국찰이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70) 승선(承宣)은 고려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정3품 관직으로, 중추원에 소속
되어 있었다. 중추원은 상·하 이중으로 조직되어 상층부인 추밀(樞密)은 재상
으로서 군기(軍機) 등을 담당하였고, 승선은 그 하층부를 이루는 관원으로서 왕
명의 출납을 맡았다.
이날 밤 임금이 꿈에 신령스런 사람을 보았다. 키가 한 장 가량인데, 침
전을 누르고 서서 말하기를, “대왕이 천박하게 헐뜯는 일을 믿고 법왕을
능멸하여 욕되게 했으므로 반드시 불상사가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꿈을 깨자 땀이 온몸에 흘러 있었다. 옆의 신하를 불러 꿈 이야기
를 하였다. 이튿날이 되자 송악산 북쪽 두둑의 소나무가 바람도 없는데 저
절로 넘어진 것이 몇 천 그루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此日夜, 上夢見神人. 身長一丈許, 壓寢殿而立, 乃言口,“ 大
王信膚訴之事, 凌辱法王故, 必有不祥大起.” 夢覺已, 流汙遍
身. 召傍臣說夢. 至明日, 松岳北畔松樹無風自倒者, 不知其幾
千有株.
임금은 이 괴변을 듣고 그것을 점쳐보라 명하니 말하기를, “법왕을 욕보
인 까닭에 일어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이에 뉘우치고 두려워하
여 곧 대궐 안에 재앙을 없애는 도량을 설치하고 법관에게 명령하여 정수
를 시장에서 목베게 하고, 또한 정수의 방을 철거하라 하였다. [정수의] 속
가 형도 문서를 함부로 만들어 아우로 하여금 무고하게 했으므로 정수와
같은 날 죽음을 당하였다.
上聞此怪, 命卜之, 云,“ 辱斥71)法王所由生也.” 上乃悔懼, 便
於大內持置消災道場, 命法官, 斬正秀於市, 仍池其正秀房. 俗
兄浪造文書, 令弟誣告, 及正秀, 同日被誅.
71) 저본에는「午」로 되어 있지만 갑본에는「斥」의 이체자인「」로 되어 있다. 여
기서는 갑본을 따랐다.
또 영통사의 백운방(白雲房)이 연대가 오래되어 점차 무너지므로, 스님
이 이를 수리하였다. 이로 인하여 땅의 신에게 책망을 받아 재앙과 변괴가
날로 일어났다. 스님이 간략히 노래 한 수를 지어 이를 물리치고 그 노래
를 벽에 붙였더니, 이 이후로 귀신의 괴변이 바로 없어졌다.
又靈通寺白雲房, 年遠浸壞, 師重修之. 因此地神所責, 災變
日起. 師略著歌一首以禳之, 帖其歌于壁, 自爾之後, 精怪, 卽
滅也.
‘열째, 변역생사의 부문’이란 [다음과 같다.] 개보(開寶) 6년(973)에 김해
부사(金海府使)가 말하기를, “올해 몇 월 며칠에 어떤 이상한 스님이 머리
에 종려나무 삿갓을 쓰고 바닷가에 왔습니다. 그 이름과 거처를 물었더니,
자칭 비바시(毗婆尸)72)라 하면서 말하기를, ‘일찍이 5백 겁 전에 마침 이
나라를 지나가다 인연을 맺었었다. 이제 보니 삼한(후삼국)이 통일되어도
아직 불교가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숙세의 인연을 갚기 위해 잠시 송악산
밑에 머물러 여(如)자로 불법을 널리 펴고 지금 일본으로 가려한다.’라고
하고는, 말을 마치자 곧 숨어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 날짜를 헤아려보도록 명하였더니 스님
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변역의 부문을 마치다.
‘第十變易生死分’者, 開寶六年中, 金海府使, 秦云,“ 今年月
日, 有異僧, 頂戴椶笠子, 到海邊. 問其名居, 自稱毗婆尸曰,
‘曾於五百劫前, 會經此國, 締緣焉. 今見三韓一統, 而佛敎未
興故, 爲酬宿因, 暫至松岳之下, 以如字洪法, 今欲指日本.’
言訖卽隱.” 上奇之, 命推其日, 是師順世之日也. 變易分竟.
72) 비바시(毗婆尸, Vipaśyin)는 과거칠불 가운데 첫번째 부처님으로, 승관불(勝觀
佛)·정관불(淨觀佛)·승견불(勝見佛) 등으로 의역한다. 과거 91겁 전에 출현하
시는 부처님으로서 출현하시는 나라, 부모, 성(姓) 등의 이름은 남전과 북전의
전승에 따라서 상이하다. [『불설장아함경(佛說長阿含經)』「대본경大本經」
(高17,pp.815a3-826a21; 大1 pp.1b11-10c28) 등 참조.]
스님은 세상에 있을 때에 대성대왕과 인연이 두터웠다. 대왕은 큰 서원
을 일으켜 송악산 밑에 귀법사를 새로 창건하였다. 절이 완성되자 왕은 조
칙으로 스님을 청하여 이 [절에] 주지하게 하였다. 스님은 명을 받들어 향
불을 사루고는 대중을 거느리고 불법을 널리 폈다. 일찍이 불법을 강하기
전 날, 대덕 전업(全業)에게 경의 서문을 기술하게 하였는데, 전업이 열 장
가량 기술해서 강당 근처에 가지고 나아가 스님에게 올렸다. 스님은 향로
를 받들고 코끼리같이 걸으면서 한 번 보고 강연하는 것이 마치 오랫동안
익힌 듯 하였으니, 그 총명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師之在世, 厚緣於大成大王. 王發大願於松岳之下, 新剙歸法
寺. 寺成, 詔請師住持之. 師祈命香火, 領衆洪法. 甞於講法之
前日, 使大德全業述經序, 業述十許張, 將詣講軒畔, 秦於師.
師奉香爐, 象步次一覽, 演暢有如宿習, 其聰悟率如此也.
슬프다! 교화에는 인연이 있으니, 인연 있음이 다하면 여기에서 죽어
저기에서 태어나는 것이 보살의 일이다. 개보(開寶) 6년(973) 6월 17일 □
시에 귀법사(歸法寺)에서 입멸을 보이시니 팔덕산에 장사했다. 산은 귀법
사의 동남쪽에 있는데 절에서 백보 가량 떨어져 있으며 울창하고 수려한
곳이 이곳이다. 수명[報年]은 □73)이고 승납은 □74)이다. 그의 뛰어난 제
자[神足]는 담림(曇琳)이라 하고 조□(肇□)라 하는데 모두 한 시대의 고
승[龍象]으로서 지위가 수좌에까지 이르렀으며, 그 아래의 문도들도 참으
로 번창하였다. 저 문도들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벼나 삼풀처럼 점점 번성
하니 혹은 흩어져 외곽에 있기도 하고, 혹은 본방을 지키고 있다.
鳴呼! 化有緣, 有緣盡, 死於此, 生於彼, 菩薩之事也. 以開寶
六年六月十七日□75)時, 示滅于歸法寺, 葬於八德山. 山在歸
法之東南, 去寺百許步, 豊且秀者, 是也. 報年□, 僧臘□. 其
神足曰曇琳曰肇□, 皆一時龍象, 位至首座, 自下之軰寔繁. 有
徒及至于今, 稻麻浸盛, 或散在於外, 或守之本房.
73) 수명[報年]은 앞의 제1장에서 균여가 천우 20년(923)에 출생하였다는 내용과
연결하여 살펴보면 51세로 추정할 수 있다.
74) 승납은 앞의 제2장에서 균여가 15세에 출가하였다는 내용과 연결하여 살펴보
면 37세로 추정할 수 있다.
75) 갑본을 따라서「□」을 추가하였다. 저본인『한국불교전서』는 각주에서 저본에
공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하 공백의 경우 동일하다.
그 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76) 김연준(金廷俟)이 있어 봉황
은 날아가고 둥지만 남은 것을 보고서 주인을 생각함에 공경하여 방을 마
침내 수리하니, 이름을 감로원(甘露院)이라 하였다. 옛 급사중(給事中)77)
고연(高挻)이 이를 위해 글을 썼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철인(哲人)이 돌아가 하늘에서 노니시니 빛나던 집도 허물어져 버렸도
다. 보배 누각과 구슬 기둥은 선재(善財)가 사라지니 풀밭으로 되어버렸
고, 푸른 산과 흰 구름은 지둔(支遁)78)이 떠나니 그 빛이 슬쓸하도다.”……
後有門下侍郞平章事金廷俟, 見鳳飛而穴在, 因思主而敬, 房
遂乃重修, 名甘露院. 故給事中高挻, 爲之述記, 其略曰.“ 哲
萎游天, 輪奐掃地. 寶閣珠柱, 善財散而蕪平, 靑山白雲, 支遁
去而色慘.”〈云云〉
76)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는 국가의 행정을 총괄하는 관청인 중서문하
성(中書門下省)에 속했던 정2품의 관직으로, 문하시랑이라고도 불렀다. 성종 때
3성6부(三省六部)의 관제가 확립되면서 처음 설치되었다.
77) 급사중(給事中)은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의 종4품 관직으로 왕에 대한 간쟁(諫
爭)의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간관(諫官)이었다.
78) 지둔(支遁, 314~366)은 중국 동진(東晋)의 승려로서 자는 도림(道林)이고 속성은
민(閔)이다. 일찍부터 산에 은거하며『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을 공부하다 25
세에 출가하였다. 노장사상에도 통달하여 당대의 명사들과 이에 대해 담론하며
두루 사귀었다. 362년 애제(哀帝)에게 초정되어 『도행반야경』을 강의하였고 오
산(塢山)에서 입적하였다. 평생 반야경전의 연구에 몰두하여 그의 학설을 즉색
의(卽色義)라고도 하였다. 저서로는『즉심유현론(卽心遊玄論)』(일실),『성불변지
론(成佛辨知論)』(일실),『대소품대비요초서(大小品對比要鈔序)』(현존) 등이 있다.
후서
성인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미혹한 이를 인도하고 어리석은 이를 가
르쳐 큰 이익을 주는 까닭이다. 정(挺)이 엎드려 우리 스님의 행장을 살펴
보니 그분은 성인이었구나! 양웅(楊雄)79)이 말하기를, “태산에 오르고 나
서야 뭇 산들이 올망졸망 이어져 있는 것을 알게 된다”80)라고 했는데, 나
는 옛날의 큰 덕 있는 분들의 비명(碑銘)을 보고 놀라 감탄하면서 시간 지
나간 적이 열 번이나 되었지만 우리 스님의 행장을 보고 나서는 여러 비
명들이 올망졸망 이어져 온 것임을 알았다.
後序
聖人之所以異於人者, 以其導惑敎愚, 作大利益故也. 挺伏審
吾師之行狀, 其聖人也歟! 楊雄曰, “登泰山然後, 知衆山之迤
邐,” 予見古碩德碑銘, 驚嘆移晷者十數矣, 見吾師行狀然後,
知衆碑之迤邐矣.
79) 양웅(楊雄 또는 揚雄, BCE 53~CE 18)은 중국 전한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자는 자
운(子雲)이다. 성제(成帝) 때에 궁정 문인이 되어 성제의 사치를 풍자한 문장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후에 왕망(王莽)이 일으킨 쿠데타 정권을 찬미하는 글을 써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작품으로는「감천부(甘泉賦)」,「하동부(河東賦)」등의 부
(賦)가 유명하며, 저서에『태현경(太玄經)』,『법언(法言)』 등이 있다.
80) 이 구절은 양웅의『법언』「오자(吾子)」편에 있는 구절의 뜻을 취한 것이다. 원문
은 다음과 같다. “책을 읽는 것은 비유하면 산과 물을 보는 것과 같다. 동악에 오
르고서야 뭇 산들이 낮게 이어져 있음을 안다. 하물며 작은 언덕이겠는가!(觀書
者 譬諸觀山及水. 升東岳而知衆山之峛崺也. 況介丘乎!)”
아! 앞의 부처님은 이미 말씀하셨고 뒤의 부처님은 아직 출현하시지 않
으셨으므로 세상 사람들의 눈은 점점 어두워져 법륜은 도중에 멈추었는
데, 스님은 능히 걸출하여s 현묘한 교화를 도와 드날리시고 신통과 상서
로운 감응을 인연에 따라 티끌 세상에 두루 보여주셨다. 본 것이 적고 들
은 것이 모자라서 요점만 뽑아 겨우 만(萬)에 하나 남겼으니, 학식이 넓은
이를 만나 이 글을 윤색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함옹 11년(1075) 정월 모일에 후서하다.
대화엄귀법사주원통수좌균여전
於噓! 前佛已說, 後佛未興, 世眼漸昏, 法輪中輟, 師能傑出,
助揚玄化, 神通瑞應, 隨緣遍示於塵沙. 少見寡聞, 撮要僅存於
萬一, 庶逢博識, 潤色斯文而已.
咸雍十一年正月日, 後序.
大華嚴歸法寺主圓通首座均如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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