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의상(義湘) 대사의 <법성게(法性偈)>에 나오는 구절이다[제7구]. 하나 속에 여럿이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다는 말이다.
이는 <화엄경>에서 말하는, 하나가 곧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라는 말[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과 같은 맥락이고,
<신심명(信心銘)>의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과도 같은 맥락의 말이다.
우리의 진성(眞性) 자리에는 모든 것이 전부 포함돼 있다. 하나 속에 많은 것이 다 포함돼 있다. 포함돼 있지 않는 게 없다.
그 속에 전부 다 포함돼 있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전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통일 후 분열된 민심을 하나로 통합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국면을 의상(義湘)
대사는 불교를 통해 통합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여기에도 나타난다. 즉, 여기서 일(一)을 부처(佛) 혹은 나라(國)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일(一)을 국왕(國王)으로 해석함으로써 통일 이후의 왕권강화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한
것이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즉,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라는 사상이 삼한을 통일한 신라에 전제왕권을 확립
하는 데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한 순간의 마음속에 일체가 있고, 하나의 먼지 속에도 일체가 있다고 했다. 한 순간의 마음속에 일체가
있다는 말은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고도 하고, 일념호구(一念互俱)라고도 한다. 그리고 하나의 먼지 속에 일체가 있다는 말은
<법성게>에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했다.
그러니 <법성게>에서는 또 일즉일체(一卽一切)요 다즉일(多卽一)이라고도 했다[제8구].
하나가 곧 전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말이다. 일체(一切)라 하면 글자가 두 자인데, 일체(一切)를 다(多)자 한 자로 표현했다.
그러니까 전체와 내가 둘이 아니다. 삼라만상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평등해서 서로 주고받는 상응작용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제법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서로 의지해 존재하는 중도연기(中道緣起)의 세계란 것이다. 따라서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
多中一)이란 말과 맥을 같이 한다. 전체 속에 부분이 있지만 부분 속에도 전체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 성품 자리도 그러하다. 내 한 성품이 다른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과 일체 세상의 성품하고 통해있다. ‘나’라는 성품 속에
이들이 다 포함돼있다. 그리고 그 전체 속에서 ‘나’ 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 한 사람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사람 속에서 나 한
사람이 있다. 이것은 비단 사람, 혹은 나 한 사람만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도 다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일즉일체(一卽一切)요 다즉일(多卽一)이라 했다.
그러니까 전체와 내가 둘이 아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다. 하나의 구성원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별개가 아니라 서로 떠나려야 떠날 수 없는 그런 관계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그게 하나가 곧 전체고(一卽一切),
전체가 곧 하나라는 말이다(多卽一).
전체라고 하는 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전체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차례로 빼면 곧 전체가 무너진다.
그러므로 전체와 한 사람이 별개가 아니다. 전체하고 한 사람하고 동일하다. 그래서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와 전체는 그런 관계이다.
우리 몸을 비견해보자. 우리 몸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안에 내 온몸, 인체의 비밀이 다 담겨 있다. 내 몸 자체가 소우주이다.
참으로 우리 몸은 신기한 존재이다. 우리들 모두는 불성(佛性)을 가진 존재로서 서로서로의 연기적 인연 관계 속에서 아주 또렷
하게 빛나는 샹들리에 전구처럼 있는 것이다. 그 빛나는 전구 하나하나가 주체적 자각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든 존재를
받아들여 거대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연출해 가는 것이다. 즉, 샹들리에 속의 여러 전구의 빛이 서로를 비추고 반사돼 결국 전체
가 하나의 빛이 되듯 우리 몸의 조직 하나 하나가 모두 고립되지 않고 하나로 조화롭게, 전체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전체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그 속의 각각의 개체가 자기 역할을 아름답게 해냈을 때 화엄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중
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의 과정이며 인드라망(indrjala網) 구조와 같다. 그래서 이것을 화엄(華嚴)이라 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일체 존재를 <화엄경>의 안목으로 보면 모두 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들 사람도 70억 인구가 이 지구촌이라는 한 방에 같이 살면서 더욱 융화하고 즐겁고 환희로워야 하리라. 이것이 <화엄경>
의 안목이자 일진법계(一眞法界)인 것이다. 일진법계란 오직 하나인 참된 세계. 절대 무차별의 우주 실상(實相)을 말한다.
법계의 종류가 아무리 많아도 모두 일진법계(一眞法界)에 함섭(含攝)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많아야 결국 하나에 모두 포함된다
는 말이다.
그리고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은 비단 인간사회의 삶의 모습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으로까지 확장되기
도 한다.
「독일의 생물학자이며 철학자인 드리슈(Hans A. E. Driesch, 1867~1941)는 성게의 발생을 연구하는 중 성게의 수정란이 난할
(卵割, cleavage)을 일으켰을 때 분열된 각각의 세포들로부터 완전한 성체가 형성된다는 것을 알았다. 세포 하나하나가 그대로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의 세포를 만능줄기 세포(totipotent stem cell)라고 한다.
드리슈는 반대로 두 개의 알을 합치면 하나의 성체가 생겨나는 것도 관찰했다.
드리슈의 이러한 연구는 이후 다른 종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남이 확인됐다. 이것은 부분과 전체의 의미에 대해 철학적 고찰
이 필요함을 말한다. 드리슈를 포함해 여러 가지 철학적 고찰이 있었는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수정란이 난할을 일으켰을 때
생겨난 할구 하나하나의 역할과 가치는 생명체 전체와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할구 하나하나가 완전한 잠재적 생명체라
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 수십조 개의 세포가 합쳐 인간이라는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다. 따라서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합쳐
하나가 되니 글자 그대로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인 것이다.」 - 김성구
그런데 기묘하게도 과학의 소립자 세계에서도 이 사실이 그대로 성립되고 있다. 물리학의 발달로 인해 미세한 물질을 깊이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신비스러운 성질이 밝혀지고 있고, 특히 소립자는 끊임없이 변하며 유동적이라는 성질과 한 개의 소립자
에는 다른 모든 소립자의 영향이 투사돼 있으며, 하나하나의 소립자의 존재는 다른 소립자와의 관계에서 성립된다는 성질이
밝혀지고 있다.
근대과학은 생명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세포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 세포 속에 그것을 형성하는 보다 작은 단위가 있고,
그들은 나름대로의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치 한 개의 소립자가 다수의 소립자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즉, 일즉다 다즉일로서 일심(一心)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삼라만상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평등하게 서로 주고받는 상응작용
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니 제법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서로 의지해 존재하는 중도연기(中道緣起)의 세계이며, 화엄의
무애법계(無礙法界)를 나타내고 있다.
20세기 최고 역사학자의 한 사람인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화엄경>을 읽고 탄복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가
올 21세기는 ‘화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화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연기법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고, 연결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암세포 하나를 떼어내서 검사를 하면 그 사람의 DNA 전체를 다 읽어낼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생활습관을 갖고 있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왔는지도 다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그 사람의 조상까지도 해석해 낼 수 있다. 세포 하나를 떼어내서 봤는데 일즉다(一卽多)라, 하나 속에 모든 것을 다
해석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러니 미운 사람 고운 사람이 어디 있으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요,
내 형제자매인 것을, 이게 화엄의 세계이다.
한국 수학계의 거장이자 오랫동안 카오스(chaos) 이론과 불교사상을 연구해온 김용운(金容雲, 1927~ ) 교수는 그의 저서
<카오스와 불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교사상은 모든 현상에는 본질이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하나가 곧 전체이며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그리고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해가므로,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철학이다. 이는 20세기 이후의
과학이 절대성, 완전성, 확정성, 명백성을 부정하면서 상대성, 변화, 무아(無我)의 개념으로 이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가령 카오스 이론의 특징 중 하나인 프랙털(fractal)은 전체 속의 어느 한 부분이 곧 전체임을 나타내는데,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프랙탈(fractal)---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구조부분과 전체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자기 유사성 개념을 기하학적으로 푼 구조를 말한다. 프랙탈은 단순한 구조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복잡하고 묘한 전체 구조를
만드는 것으로, 즉 ‘자기 유사성(self-similarity)’과 ‘순환성(recursiveness)’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자연계의 리아스식 해안선, 동물혈관 분포형태, 나뭇가지 모양, 창문에 성에가 자라는 모습, 산맥의 모습도 모두 프랙탈이며,
우주의 모든 것이 결국은 프랙탈 구조로 돼 있다.
그리고 “카오스와 불교는 한결같이 연기(緣起)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기계론적인 과학이 아니라 성장하고
사멸해가는 모든 생명현상에 나타나는 복잡한 과정을 과학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것이 카오스 이론이다. “북경에 있는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다음날 뉴욕에 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기상학자 로렌츠의 ‘나비효과’는 카오스 이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인연(因緣)’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 인간사 자체가 우주의 한 부분이고 우주는 카오스이며,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일즉다 다즉일]
라는 관점에서 우리네 개개 인간사 자체가 곧 카오스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진즉부터 불교가 말해온 진리이다.“
그러니까 전체와 내가 둘이 아니다. 이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한 구성원 속에 그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그런 관계에 놓여있다는 말이다.그런데 어리석은 중생은 이러한 관계를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이나 전체가 죽든 말든 나 하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속
좁은 이기적인 탐욕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더불어 살아가기도 힘든 것이다. 하지만 중생이 모두 이러한 사실을 깨우쳐
더불어 살아가는 자혜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다면 그곳이 바로 불국토인 것이다.
세상의 어느 것도 저 혼자 존재하는 것은 없다. 사람의 경우, 수많은 조상의 피가 내 몸에 같이 흐르고 있다. 내가 접하는 모든
것, 물이나 공기 등 주변의 모든 자연환경이 ‘나’라는 존재와 관계하고 있다. 전 지구, 전 우주가 모두 하나로 연결돼있다.
우주가 내 몸과 마음에 들어와 있으니 나 자체가 우주이다. 일체(一切)가 나와 관계없는 것이 없으며 다 나 속에 있다.
그것은 시간과 역사를 넘어 있는 모든 것이다. 온 우주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가 한 몸이며 한 생명이다. 다른 존재를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일이다. 조상 천도하는 것, 자연보호하는 것, 이웃을 돕는 것 등, 이 모두가 중중무진연기의 인과와 순환의
원리에 의해 다 나에게로 되돌아오게 돼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 속에서, 나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연기적 진리로 봤을 때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중중무진연기의 법칙으로 그 자체가 화려하게 장엄을 이룰 수밖에 없다. 근본화엄(根本華嚴)이라고 말할 때 ‘근본’이 붙은 이유
도 여기에 있다. 아주 중요한 말이다. 모든 존재는 다 독특한 개성과 향을 지니고 있다.
개개인이 가진 개성과 향이, 모든 존재와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존재는 다 위대할 수밖에 없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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