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54. 혜암현문
누더기 한 벌과 주장자 하나로 끝없이 달렸네
근현대 한국불교의 선지식이며 중흥조인 경허.만공스님의 선풍(禪風)을 계승하고 덕숭총림 수덕사 초대 방장을 역임한 혜암현문(惠菴玄門, 1886∼1985)스님. 천수(天壽)를 누리며 깨달음의 향기를 사바세계에 전한 혜암스님의 수행일화를 덕숭총림 수덕사 수좌 설정스님과 주지 옹산스님의 증언, 묘봉스님이 지은 행장기, 그리고 1984년 10월 10일자 <불교신문> 등을 참고하여 정리했다.
“누더기 한 벌과 주장자 하나로 끝없이 달렸네”
경허 · 만공 법맥 계승 선풍 진작
덕숭총림 수덕사 초대 방장 역임
○…전법스승 만공스님과의 선문답은 유명한 일화이다. 만공스님이 어느 날 법상에 올라 대중에게 질문을 던졌다. 공부의 깊이를 알아보기 위한 방편이었다.
“내게 큰 그물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물고기 한 마리가 걸렸다.
물고기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아는 대중은 답을 하라.”
그 자리에 있던 한 스님이 일어나 나름대로 답을 했지만, 만공스님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그래, 물고기 한 마리 걸렸구나” 라고 했다. 또 다른 스님� 방책을 이야기 했지만, 만공스님은 “그렇지, 또 한 마리 걸려 들었구나” 라고 답했다.
잇따라 수좌 여러 명이 해법을 제시했지만 그때 마다 ‘만공스님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 들뿐이었다. 그 때 한쪽에 앉아있던 혜암스님이 일어나 만공스님의 옷깃을 잡아 끌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큰스님, 이제 그만 그물에서 나오시지요.”
○…만공스님과 혜암스님의 또 다른 법담.
만공스님이 손가락으로 불상을 가리키며
“부처님 젖이 저렇게 크시니 수좌들이 굶지는 않겠구나” 라고 했다.
곁에 있던 혜암스님이 “무슨 복으로 부처님 젖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답했다.
만공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무슨 복을 그렇게 지었는가.”
혜암스님이 답했다. “복을 짓지 않고는 그 젖을 먹을 수 없습니다.”
또 다시 만공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혜암 수좌가 부처님을 건드리기만 하고 젖을 먹지는 못하는군.”
당시 혜암은 만공스님의 질문에 답을 못했다고 한다.
훗날 혜암스님은 “부처님의 젖을 먹는 흉내를 냈어야 했는데…… ” 라고 회고했다.
○…혜암스님이 수덕사에 머물 무렵 90세의 노구를 무릅쓰고 수원에 있는 한 병원에 병문안을 갔다 온적이 있다. 주위에서 자가용을 이용할 것을 청했지만 한사코 마다한 스님은 삽교역에서 기차를 타고 수원까지 다녀왔다. 병문안을 가니 병원에는 대부분 환자들만 있었다. 가만히 서서 병상을 둘러본 스님은 함께 온 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 오니 내가 바보같구만.”
○…덕숭총림 수덕사 범종불사 회향법회 당시 혜암스님의 법문은 불자들의 정진을 독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종소리에 ○○하면, 북소리에 거꾸러진다” 고 한뒤에 “대중은 각기 한마디씩 일러 보아라” 고 했지만 대중은 아무 말을 못했다. 이에 스님은 “만약 나에게 뜻을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면서 주먹을 들어 보인 후 법문을 이어갔다. “이렇게 펴는 것이 옳으면 손을 이렇게 쥐는 것이 그르지 않노라.”
○…“선(禪)의 종자를 미국에도 심어주어야 할 것 아닌가? 종자만 심어주면 가지 뻗고 꽃피고 열매 맺는 거야 저절로 되리라 생각해.” 세수 100세에 미국 포교를 위해 손수 나섰던 혜암스님이 출국 직전에 <불교신문>과 한 인터뷰 내용이다. 이때 스님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미국인과 교민들에게 불법(佛法)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서부 능인선원 봉불식에 참여해 ‘선의 가르침’을 서양세계에 전했던 것이다. 당시 스님은 미국에 가기 전에 매주 수덕사를 찾아오는 한 교수를 통해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보다 쉽게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나이를 뛰어넘은 열정을 직접 보여주었던 것이다.
○…혜암스님을 두고 어느 노작가는 ‘달이요 바람’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불교에서 달(月)은 불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람은 자유자재한 수행자의 삶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혜암스님은 달과 바람처럼 깨달음의 향기를 자유롭게 널리 전하는 수행자라는 표현으로 보인다. 혜암스님은 평소 깨달음에 대해 간단하고 명료하게 지적했다.
“다만 알지 못할 줄을 알면 되는데 …… 그러면 견성(見性)하는 거야,
망령을 여의면 돼, 그 길이 곧 참선(參禪)이지.”
○…혜암스님 노년에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온 기자가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시봉하는 스님들이 옷을 여법하게 갖춰 입고 찍어야 한다고 권유하자, 스님은 손을 내저었다. “뭐, 다 보이면 어때. 있는 그대로이면 되는 거야. 그리고 나 같은 사람 사진 찍어서 뭐에 써.” 가식적이지 않았고 솔직 담백했던 스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일화이다.
○…“큰스님 올해 세수가 어떻게 되십니까?” “9×9=82” 세수 100세 때 스님을 찾아온 이가 연세가 얼마인지 질문 드리자, 스님은 ‘9×9=82’라고 답했다. 물론 9×9=81 이지만, 당신의 세수를 ‘9×9=82’라고 한 것이다. 앞의 9×9는 당신의 세상나이 99를 표현한 것이고, 82는‘빨리’로 ‘인생은 빠르게 지나가니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천수를 모두 누렸지만 스님은 노년에 “큰스님께서는 부처님보다 20여년을 더 세상을 보셨는데, 무엇을 보셨습니까” 라고 질문한 제자에게 “모든 것은 바람 앞의 등불” 이라고 명쾌하게 답했다. 스님의 말씀은 ‘숫자’에 끄달려 방일(放逸)하지 말고 정진에 몰두하라는 뜻 이었다.
○…경허.만공스님의 선맥(禪脈)을 계승한 선장(禪匠)이었지만, 스님은 염불에도 탁월했다. 참선수행을 본격적으로 하기 이전에 익힌 것이었다. 제자들을 제접할 때도 간혹 염불을 들려주었는데, 듣는 이마다 환희심이 났다고 한다. 스님은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범패와 범음 등을 가리키는 어산(魚山)에도 밝았다고 한다. 후학들이 “큰스님은 안채비와 바깥채비 등을 엄격하게 배워서 어산에 빈틈이 없었다” 고 흠모했다고 한다.
■ 혜암스님의 시 ■
혜암스님은 세수 90세 중반에 한 편의 시를 지었다. 평생 수행자로 살아온 세월을 회고하며, 후학들에게 경책이 되는 가르침을 담은 것이다. 묘봉스님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行狀衲衣一枝(행장납의일지공) / 東走西走走無窮(동주서주주무궁) /
傍人若門何處走(방인약문하처주) / 天下橫行無不通(천하횡행무불통)”
“내 행장 겨우 누더기 한 벌에 여윈 지팡이 하나니 /
동서로 치달리기 끝없이 하였네 /
뉘 있어 그리 어디로 다녔느냐 물으면 /
천하를 가로질러 통하지 않은 곳 없었다 하리로다.”
■ 어록 ■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다.”
“슬플 것도 슬프지 않을 것도 없다.
일체를 여읜 자리에는 그 생각마저 없는 것이야.”
“말이 있는 곳에서 말이 없는 곳으로 이르는 것이 여래선(如來禪)이고,
말이 없는 곳에서 말이 있는 곳으로 가르는 것이 조사선(祖師禪)이지.”
“후회는 무슨, 있다가도 곧 없어지곤 해서 기억이 안나.”
“부처님과의 인연은 스스로도 모르게 지어야 하는 것이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도(道)를 받지, 누가 받겠는가.”
“범부란 재주가 모자라거나 재력.권력이 없는 이가 아니다.
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공평하게 있는 불성은 있는데,
깨닫지 못하는 자가 바로 범부이다.”
“너는 너라는 그 ‘너’가 아니요, 나는 나라는 그 ‘나’가 아니라,
나와 너 둘이 없는 그곳에, 즉시 본래의 너와 나로다.”
“태어나 한 티끌 맑은 바람 일구고,
떠나서는 맑은 못 가운데 달그림자 흐르네,
인연 벗어 몸 버리니 어디로 갔는고.
한양성 밖에 물은 동쪽으로 흐르더라.”
“참선에는 구별이 없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발심해서 정진하는 이가 가장 수승하다.”
■ 행장 ■
세수 101세, 법납 89세의 ‘장수도인’
혜암스님은 1886년 1월5일(음력은 1885년 12월 21일) 황해도 배천군 해월면 해암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최사홍(崔四弘) 선생과 모친 전주 이 씨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세속의 이름은 최순천(崔順天). 본관은 강릉.
11세에 부친상을 당한 후 이듬해 수락산 흥국사에서 삭발했다. 은사는 보암(保菴)스님. 계사는 금운(錦雲)스님. 이때 받은 법명이 현문(玄門)이다. 17세에 모친마저 별세한 후 스님은 운수행각에 나섰다.
스님은 1908년 23세의 나이에 양산 통도사 내원선원에서 처음 안거를 한 이후 참선수행에 전념했다. 당시 내원선원 조실 성월(性月)스님이 “선방의 밥은 썩은 밥이 아니다”고 한말에 더욱 분발하여 정진했다. 1911년 해담(海曇)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만공(滿空).혜월(慧月).용성(龍城)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공부에 몰두했다. 이무렵 오대산 상원사 주지와 태백 정암사 주지 소임을 잠깐 보았다.
혜암스님은 1929년 수덕사 조실 만공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았다. 이때 만공스님이 혜암이란 법호를 내렸다. 이로써 스님은 만공스님의 법맥을 이은 법제자가 되어‘경허.만공의 선풍’을 세상에 보였다.
1956년 수덕사 조실로 추대된 혜암스님은 20여 년간 후학을 지도했다. 1984년 덕숭총림 개설시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어 사부대중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 혜암스님은 1985년 5월 19일(음력은 3월30일) 수덕사 염화실에서 열반에 들었다.
원적에 들기 전에 “모든 존재는 변화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허망한 것도 아니고 허망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는 내용의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스님의 세수 101세, 법납 89세였다.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천명을 다한 스님의 별칭은‘장수도인(長壽道人)’이었다.
혜암스님은 1976년 그동안의 법어를 모은 <선관법요(禪關法要)>를 발간했으며,
1980년에는 <선문촬요(禪門撮要)>를 직접 편역(編譯)해 후학들에게 지남(指南)을 보여주었다.
수덕사=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520호/ 2009년 4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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