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53. 철우태주 - 일생은 달리는 말이 틈새로 지나가듯 빠르다

수선님 2023. 5. 14. 12:58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53. 철우태주

일생은 달리는 말이 틈새로 지나가듯 빠르다

 

 

조선시대 전통적인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출가한 철우태주(鐵牛太柱, 1895~1979)스님은 평생 참선수행에 전념하며 법향(法香)을 전했다. 근세한국불교의 중흥조인 경허(鏡虛)스님의 제자인 수월(水月)스님과 혜월(慧月)스님에게 법(法)을 인가받은 철우스님은 불과 27세의 나이에 통영 용화사 조실로 추대될 만큼 수행력이 뛰어났다. 올해 원적 30년을 맞이한 철우스님의 수행 일화를 상좌 정우스님(구미 금강사 주지)의 회고와 <철우선사 법어집>을 참고해 정리했다.

 


“일생은 달리는 말이 틈새로 지나가듯 빠르다” 
  수월·혜월스님 인가 받은 ‘평생 납자’
  20대에 통영 용화사 조실로 추대 받아

 

○…엄격한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한 철우스님은 부친과 모친 별세 후 인생무상을 느끼고 절을 찾아갔다. 이때가 1908년 12월 1일(음력)로 세속나이 불과 13살이었다. 밀양 표충사 마당에 들어서며 만난 한 스님을 붙잡고 물었다.


“자네가 나의 머리를 깎아주어 중을 만들어 줄 수 있는가.” 그 소리를 들은 스님이 “뭐 이런 놈이 다 있어”라며 시비가 붙었고,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나온 한 노스님이 까닭을 물었다.


훗날 철우스님이 된 소년은 이렇게 뽀杉鳴� 한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마음 붙일 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밀양에서 제일 큰 절을 찾아왔소.” 노스님은 소년의 출가를 허락했다.


○…출가후 주로 참선 수행에 몰두한 스님은 화식(火食)을 끊고 10년간 묵언수행으로 일관해 생식수좌.묵언수좌란 별칭이 생길만큼 정진에 몰두했다.


참선 수행 4년만인 18세 되던 해 태백산 각화사 동암에서 지견(知見)이 열렸고, 묘향산 금선대에서 ‘한 소식’을 얻었다. 이후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 수월스님 문하에서 정진했으며, 부산 선암사 혜월스님 회상에서도 공부를 했다. 혜월스님에게 인가 받을 때 철우라는 법호를 받았다.

 

<사진> 수월스님과 혜월스님에게 인가 받은 철우스님. 사진제공=정우스님

○…양산 통도사 미타암에 머물며 정진하던 스님은 당시 주민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에 관여되어 모진 고초를 겪었다. 궐기문 문안 작성에 조언 해준 것이 빌미가 되어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경찰이 갖은 고문을 자행하며 자백을 강요했지만 스님은 철저히 묵언으로 일관했다. 이후 스님은 일체 붓을 들지 않았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이 몸을 왜놈들에게 갖은 모욕을 받으며 해쳤으니, 부모에게 불효하고, 스승에게 죄스러워 붓을 들 수 없다.”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 머물 무렵, 스님은 시내에 있는 보현사를 찾았다. 마침 고송(古松)스님과 한송(寒松)스님이 보현사 원주와 별좌 소임을 보기위해 장바구니를 들고 보현사를 나서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철우스님은 장바구니를 빼앗아 내동댕이치면서 “수좌들이 무슨 살림이냐”고 호통을 쳤다. 그 길로 고송스님과 한송스님은 철우스님을 따라 금당선원으로 돌아왔다.


○…철우스님이 남긴 ‘참선포교문(參禪布敎文)’이란 글은 참선수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스님은 참선에 대해


“참(參)이라는 것은 결택하는 것이요,
선(禪)이라는 것은 눈이 바른 것”
이라면서
“눈이 바르면 꿈이 없고, 꿈이 없으면 허깨비가 멸하니,
허깨비가 멸한 즉 부처”
라고 지적했다.


스님은 이 글에서 모든 이들이 참선정진에 몰두하여 깨달음의 향기를 맛볼 것을 당부하고 있다.


“원컨대 모든 동포는 지말에도 돌아가고 근본에도 돌아가서,
머리를 돌이켜 자기의 신령스러움을 반조하여 이 마음을 요달하여 깨치면,
무명의 긴 밤에 생사의 물결이 일시에 다 말라 버리고,
가이없는 묘용이 환하게 눈앞에 드러나 어느 곳에나 명쾌하게 활용할 수 있으리니,
어찌 다행이 아니런가. 이야말로 이른바 한 푼도 들이지 않고 풍광을 사서 얻는 것이로다.”

<사진> 구미 금강사에서 제자들과 함께 한 철우스님. 사진제공=정우스님

○…스님은 ‘마음 궁구하기를 권하는 글’인 ‘권구심문(勸究心文)’을 통해서도 마음 깊이 참구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스님은


“몸은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과 같고
목숨은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과 같다”면서
“일생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달리는 말이 틈새로 지나가듯 빠르다”고 지적했다.


철우스님은 천지를 호령하던 영웅열사와 명성을 떨치던 문장호걸도 모두 북망산으로 돌아갔다며 인생무상을 바르게 볼 것을 가르치면서, 이를 면하기 위한 방책을 이르고 있다.


“옛날에 익혀둔 천 가지 묘책과
만 가지 특수한 온갖 학술을 다 내다버리고
다만 한 마음만 쫓아 힘써 연구하되
죽음에 이르도록 물러서지 아니하면
반드시 활로에 서 있으리라.”


○…철우스님은 노년에 “경허 가풍에는 사리가 안 나온다. 그러니 사리는 기대하지도 말거라”는 말을 상좌에게 자주 했다. 스님의 원적 소식을 듣고 수좌들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스님의 법구는 꽃으로 장엄된 상여에 모셔졌다. 신도들이 만장을 들고 앞에 섰고, 수좌들이 상여를 메었다. 도보로 구미 시내를 지난 철우스님의 장례행렬은 다비장이 있는 김천 직지사로 향했다. 이때 신이(神異)일이 생겼다. 직지사 일주문을 통과할 무렵 상서로운 광명이 나투었던 것이다. 동참 대중 모두 목격했다. 직지사 대웅전 앞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고, 다비를 모시는데 또 다시 서기광명이 있었다.

<사진> 철우스님의 일용 도구. 검소했던 스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평생 검소하게 살았던 스님의 유품은 지극히 간소했다. 몇 벌의 승복과 계첩, 경전이 전부였다. 참선수행을 주로 했지만 교학에도 밝았던 스님이 자주 읽고 법문을 했던 <유마경>이 남아있다.


스님 유품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으로는 안경, 삭도(削刀), 인두, 가위 등이 있다. 안경은 경전을 읽을 때, 삭도는 삭발을 할 때 이용했으며, 가위와 인두는 스님이 헤진 옷을 손수 꿰매 입을 때 사용했던 것이다. 상좌나 신도들이 대신 한다고 하면 “예끼, 내 할 일은 내가 해야지”라며 당신의 일은 스스로 처리했다고 한다.

 

 

■ 철우스님 어록 ■

 

“수좌들이 진정 공부할려면
대분심(大忿心)·대의심(大疑心)·대발심(大發心) 없이는 견성(見性) 못한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를 찾는다면
영겁(永劫)을 참선해도 도(道)에 들지 못하며 생사해탈(生死解脫)을 얻지 못하리라.”


“출가대장부란 출가수행의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라야 장부라고 할 수 있어.
그렇지 못하면 남자로 태어났으면서도 졸장부(拙丈夫)야.”


“선가(禪家)에서는 본시 의 길이 끊어지고 행적(行蹟)의 자취가 적요(寂寥)한데
무엇을 남기겠느냐.”

<사진> 구미 금강사에 모셔져 있는 철우스님 부도.

■ 행장 ■

 

밀양 표충사로 출가해
교학 이수 · 참선 수행


1895년 3월 8일(음력) 경남 밀양시.읍 가곡리에서 부친 정기철(鄭其鐵) 선생과 모친 천주옥(千珠玉)여사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만갑(萬甲). 본관은 동래. 어려서 마을의 금서서당에서 통감(統監)과 사서(四書)를 익혔다. 하지만 7살에 부친이 별세하고, 13살에 모친마저 세상을 떠난 뒤 무상을 절감하고 출가했다.


1908년 음력 12월 초하루 밀양 표충사로 입산해 불문(佛門)에 들었다. 이듬해 12월 표충사에서 정암(正庵)스님을 은사로, 보경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1915년 4월 합천 해인사에서 제산(霽山)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또한 표충사 호산스님에게 사집과를, 고성 옥천사 서응(瑞應)스님에게 사교과를, 순천 선암사 진응(震應)스님 회상에서 대교과를 마쳤다.


1911년 해인사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한 이후 25하안거를 성취하며 납자의 길을 걸었다. 1913년 태백산 각화사 동암에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오도송을 남겼다. 이후 묘향산 보현사 금선대에서 수월스님, 부산 선암사에서 혜월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철우스님은 1922년 통영 용화사 도솔암 조실로 추대된 후 대구 동화사 금당ㆍ대구 파계사 성전ㆍ금강산 마하연ㆍ순천 선암사 칠전ㆍ구미 도리사 태조선원 등 제방선원 조실을 역임하며 납자들을 깨달음의 길로 안내했다.


1952년 구미 금강사를 창건한 후 납자들을 제접하고 불자들에게 <유마경> 강의를 하며 불법을 폈다. 노구에도 손수 절 마당을 비질할 정도로 건강했던 스님은 1979년 3월12일(양력) 오후 11시20분 원적에 들었다. 세수 84세, 법납 71세. 같은 달 16일 1000여명이 넘는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전국수좌장(全國首座葬)으로 엄수된 후 김천 직지사에서 다비를 모셨다. 은법제자로 정우 우산 지우 용담 원담 청공 대우 우견 우공 연우 현우 재우 스님, 건당제자로 만우 청강 덕암스님이 있다.

 

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518호/ 2009년 4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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