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52. 취봉창섭
인생은 잠깐이여, 정진에만 분투해야 시은을 갚지
올곧은 수행자의 규범을 보여주며 평생 흐트러짐 없이 정진한 스님이 있었다. 조계총림 송광사의 취봉창섭(翠峰昌燮, 1898~1983)스님으로, 내전(內典)은 물론 일본 임제대학에서 외전(外典)까지 공부했다. 또한 평생 화두를 참구하며 정진한 선승(禪僧)이며, 국군의 방화로 전소(全燒)된 송광사 복원불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취봉스님의 수행일화를 비문과 상좌 원공(정읍 정토사 주지)스님의 회고 등에 근거해 정리했다.
“인생은 잠깐이여, 정진에만 분투해야 시은을 갚지”
‘진정한 무소유 실천’하며 송광사 복원불사
원적 맞이하는 과정서 수행자 진면목 보여
○…“이 놈아 대중이 드실 것인데, 어찌 니 놈 맘대로 쓰느냐.”
법체가 쇠약해진 은사를 위해 생강차를 끊여온 상좌에게 취봉스님은 야단을 쳤다. 은사의 건강을 염려한 정성을 갸륵하게 여기면 좋으련만……. 스님의 생각은 달랐다. 시주와 공양은 대중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뜻이었다. 끝내 스님은 생강차를 물렸다. 그만큼 스님은 시주물의 쓰임에 엄격했다. 낡고 헤어진 옷과 신발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몇 번씩 기워 입거나 신었다.
○…취봉스님이 이처럼 절약한 이유는, 본래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인 것도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화마(火魔)를 겪은 송광사를 복원하려는 원력에서 비롯됐다. 없는 살림에 한 푼이라도 아껴 복원 불사금을 마련하려는 검박한 생활은 눈물겨웠다.
택시 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오직 시내버스만 이용했다. 기차도 2등 칸 한번 타지 않고, 비좁은 3등 칸을 이용했다. 외출해 공양시간이 되면 따뜻한 백반 한 그릇 조차 사먹지 않고, 절에서 갖고 온 몇조각의 떡으로 대신했다. 공무(公務)로 사중에서 지급한 여비도 아끼고 아껴 남은 돈은 반드시 종무소에 반납했다. 그렇게 절약한 돈으로 마련한 논 열아홉 마지기를 송광사에 보시했고, 설법전을 지을 때는 손수 권선책을 제작해 ‘일금 2만원 취봉’이라 쓰면서 “탁발을 해서라도 불사를 마무리하자”고 대중을 격려했다.
○…내.외전과 선교를 두루 겸비했던 스님은 〈금강경〉을 자주 독송했다. 생전에 “내가 아마 일천독(讀)은 했을 것이시”라고 했다. 어찌나 많이 <금강경>을 독송하는지 도반 동곡스님이 “웬 금강경을 그리 많이 읽어 싸. 수보리 존자 될라고 그러요”라고 하자, 취봉스님은 “부처님 제자가 경을 읽는 것이 뭐시 죄간디”라며 함께 웃었다고 한다.
또한 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좌우익 대립으로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을 무렵에는 관세음보살 독송을 잊지 않았다. 그 공덕 때문인지 죽을 고비를 몇 차례나 무사히 넘겼다고 한다. 스님의 육성이다. “무슨 일이 있건 없건 일심으로 불렀어. 관세음보살님을 많이 부르니 내미럴 하나도 안 무섭대 그리야.”
○…스님의 진면목은 당신이 입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세상 누구나 죽음에 직면하면 목숨을 유지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스님은 ‘세월이 흘러 육신이 무너지는 자연의 순리’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세상과 이별할 시기가 가까워지는 것을 직감한 스님은 주변 정리에 나섰다.
우선 당신 물건을 꺼내 다른 이에게 줄 것은 주고, 버릴 것은 버렸다. 말년에 남은 것은 러닝셔츠 한 장과 겉옷 한 벌이 전부였다. 시자가 빨래를 할 때면 옷이 마를 때까지 알몸인 채로 기다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자들을 불러 들였다. 당신의 정재(淨財)를 법당 건립기금과 장학금으로 내 놓고, 남은 얼마간의 돈은 다비식 경비와 납자들의 여비로 사용하라고 했다.
○…스님의 육체는 점점 쇠잔해졌다. 시자에게 당신 법구를 다비장까지 옮길 관을 짜도록 당부했다. 마을에서 온 목수의 대패질과 톱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선정에 들곤 했다. 또한 상여를 점검하고, 수의를 마련하라고 했다. 원적에 드는 순간까지 당신 사후에 다른 이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썼다. 마치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스님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곳으로의 만행’에 불과했다.
○…한국전쟁 후 한국불교는 정화불사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서울뿐 아니라 지방 사찰도 극단적인 대립이 벌어지는 사례가 많았다.
하지만 송광사는 예외였다. 송광사는 단 한차례의 물리적 충돌도 없이 원만하게 합의를 이뤘고, 승보종찰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이때 기여한 스님이 바로 취봉스님이다. 성공스님 등 몇 안 되는 비구스님들과 효봉스님 제자인 구산(九山)스님을 모셔와 호남불교 중흥의 원력을 실천하도록 했다.
○…한국전쟁 당시 공비들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천년고찰 송광사는 순식간에 화마에 휩싸였다. 불길은 3일이나 계속됐다. 국군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세 명의 스님이 화재 현장에 도착했다. 어디서 빨치산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위급한 순간이었지만, 불길에 갇힌 송광사를 구하려고 스님들은 달려왔다.
거대한 불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부분의 전각을 삼키고 있었고, 16국사 진영을 모신 국사전 귀퉁이에 불이 옮겨 붙었다. 취봉스님은 함께 온 성공.인암스님과 같이 승복을 벗어 개울물에 적신 후 불길을 잡기 시작했다. 다른 도구가 없었다. 벌거벗은 채 물에 적신 승복으로 겨우 불을 잡았고, 사투 끝에 국사전은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 취봉스님 어록 ■
- “중은 어쩌던지 신심이 있어야 되야. …… 중은 돈도 쉐양 없고 명예도 쉐양 없어. 다 망상이여. 내가 이 나이에 다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이러고 버티지 딴 것이 있간디. 자네들도 부지런히 해야 되야. 게으르면 아무 짝에도 못쓰는 것이여.”
- “들은 풍월로 아는 체 하는 선객이 되어 지은 시은과 망어죄를 어찌 할고.”
- “일대사 해결 공부는 진속의 처소가 상관없어 야. 정진상 화두만 순일 일여하면 정처 요처가 없응께, 세진(世塵)에서도 정진 잘 해야 혀.”
- “세월은 빠르게 지나가, 유수와 같다고 했으니 인생 일세는 잠깐이여. 속가의 형제친척도 생각 말고 스님도 걱정 말고 정진 일로(一路)에만 분투해 야. …… 정신을 못 차리면 부지중(不知中) 세월은 흘러, 10년 20년 내지 일생을 수행해도 별 힘 없고 시은만 지중할 뿐이여.”
- “사람 몸 한번 잃어버리면 만겁 회복하기 어려워 …… 이왕 신(身)을 발하였으니 천신만고의 역경을 감행해야 혀. 말이 앞서지 말고 실천이 앞서야 현다고.”
- “중은 어쩌던지 죽은 뒤가 깨끗해야 되거던. 자질구레한 물건도 남기면 안 돼, 죽을 때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이 죽어야 혀.”
■ 행장 ■
내 · 외전 선교 ‘겸비’
조계총림 개원 ‘일조’
1898년 8월29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아랫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임상묵(林相) 선생. 15세에 하동 쌍계사로 출가한 후, 19세 되던 해 순천 송광사에서 남호(南湖)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다음 해에 호은(虎隱)스님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스물여섯살 되던 해 송광사 강원을 수료하고, 이듬해에 송광사가 벌교에 설립한 송명학교(松明學校) 교사를 지냈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정확한 해는 알 수 없지만 42세(1939년)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일본 교토(京都) 임제대학(지금의 하나조노대학)을 졸업했다. 전 조계종 종정 서옹스님도 비슷한 시기에 임제대학에 재학했다. 졸업 후 곧바로 귀국한 취봉스님은 송광사 강원 강사로 후학을 양성했다. 교학을 연찬하면서 참선 수행도 병행했다. 덕숭산 정혜사 만공(滿空)스님 문하와 사천(충무) 용화사 도솔암 효봉(曉峰)스님 회상에서 화두를 참구했다.
“맑고도 투철했던 생활규범으로 / 승보의 도량을 빛내시더니 /
노스님 떠나신지 어느덧 십년 / 빈자리 아직도 메워지지 않았네 /
다시 낯익은 이 도량에 오셔서 / 청정한 승가람을 이뤄주소서.
불기 2537년(1993년) 곡우절 조계후학 법정 삼가 짓다.”
내·외전과 선교를 겸비한 스님은 대중들의 추대로 1949년.1963년.1970년 세 차례 송광사 주지 소임을 보았다. 공비들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국군이 송광사를 방화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던 스님은 평생 송광사 복원불사 원력 성취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69년 조계총림 개설 당시 송광사 염불원 회주와 불일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수행가풍을 진작시키는데 노력했다.
평생 남에게 신세지는 일을 결단코 마다했던 스님은, 육신(肉身)을 바꿔야 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짐작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세속의 부모님 묘소를 정리해 화장한 후 극락왕생을 발원했으며, 후인들에게 짐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당신의 49재도 미리 지냈다.
출가 후 70년을 머문 송광사 전각과 부도전을 참배하며 불보살과 역대조사들에게 이생의 마지막 예를 올렸다. 또한 얼마 있지 않은 당신의 모든 물건을 사중(寺中)에 회향(반납)하고, 옷 한 벌만 남긴 채 곡기(穀氣)를 끊었다. “나는 더 이상 먹지 않을 것이여. 이제 육신을 버릴 것이여” 라고 말한지 8일만인 1983년 6월28일(음력) 오후9시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세수 86세. 법납 71세. 법정스님이 글을 쓴 취봉스님 비는 송광사에 모셨다. 상좌로 광훈(廣薰).원공(圓空).범종(梵琮).달성(達性).법현(法顯).일우(一宇)스님을 두었고, 재가제자로 김정수(金正洙).김종채(金鍾采) 선생이 있다.
정읍=이성수 기자
[출처 : 불교신문 2514호/ 2009년 4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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